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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술시(8시) 무렵, 골짜기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마군 앞쪽이 술렁거리더니 곧 고덕 호성이 서둘러 다가왔다. 호성은 기마군의 선봉을 맡고 있어서 언제나 맨 앞에 나가있다. “나솔, 전택이 왔습니다.” 낮게 소리친 호성의 뒤로 전택이 따라왔다. 계백은 전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택은 신라무장 차림이었는데 연락과 감시역으로 파견되었던 장반과 유권도 데리고 왔다. “장군, 준비 다 되었습니다.” 어깨를 편 전택이 계백에게 군례를 하면서 말을 잇는다. “가족은 처가가 있는 산골로 보냈으니 이젠 마음놓고 죽을 수가 있게 되었소.” “죽으면 되나?” 자리에서 일어선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살아서 영화를 누려야지. 그래서 싸우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전택이 따라 웃었고 계백이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화청과 해준이 소리쳐 기마군을 정돈했다. 다시 출발하려는 것이다. 이곳은 삼현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골짜기다. 길잡이 역할을 할 전택을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터라 밤길을 달려야 한다. 다행히 삼현성까지 오는데 농군 몇 명만 보았지 신라 순찰대는 만나지 않았다. 이제 앞에 삼현성 보군대장이며 급벌찬 벼슬인 전택을 내세웠으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출발!” 말에 오른 계백이 소리치자 기마군 3백이 움직였다. 이제는 소음을 죽이고 행군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말들도 울지 않는다. 그 시간에 김유신이 전령의 보고를 받는다. 이곳은 신라 덕천성, 김유신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장군, 백제군이 반으로 쪼개졌습니다.” “쪼개져?” 청 안이 조용해졌고 김유신이 치켜뜬 눈으로 전령을 보았다. 전령이 소리쳐 말을 이었다. “예. 기마군 2만여기가 쪼개져서 남하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아침 진시(8시)경이었으니 지금쯤…….” “2백리는 갔지 않겠느냐?” 김유신이 대신 말을 받았다. “기마군 2만이라고 했느냐?” “예, 속보로 남하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전령은 12품 대사 직급으로 전장에 익숙한 30대다. “백제왕의 깃발은 그대로 진영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전령을 응시했으나 눈의 초점이 떤다. 이윽고 김유신이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전군(全軍)을 출동 준비 시켜라.” “예, 대장군.” 부장 서준이 대답부터 하고나서 묻는다. “어디로 갑니까?” “안곡성으로!” “예, 대장군.” “한시진 후에는 출발이다.” 김유신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안곡성에 전령을 보내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해라!” “예, 대장군.” 청 안의 무장들이 일제히 일어났고 제각기 떠났는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안곡성은 신라 국경에 위치한 산성(山城)으로 백제군이 주둔하고 있는 영암성 근처의 황야와는 50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백제측에서 보면 신라군이 공격해 오는 것으로 알 것이다.
국경을 넘었습니다. 옆을 따르던 장덕 해준이 낮게 말했을 때는 유시(오후 6시) 무렵, 기마군은 이제 일렬종대로 산기슭을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곳은 사람 하나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외진 산길, 옆쪽은 자갈투성이의 불모지인데다 물줄기도 없어서 짐승도 드문 땅, 신라군 국경 초소는 5백여보 떨어져 있었는데 이 시간에는 저녁 준비로 밖에 나오지 않는다. 기마군은 초소를 뒤로하고 술시(8시)가 될 때까지 영토 안으로 더 진입하고 나서야 작은 개울가에서 멈췄다. 변복해라. 계백이 지시하자 각 무장들이 제각기 군사들에게 지시했고 한식경도 되지 않았을 때 기마군은 신라군으로 변했다. 각자가 신라군 복장을 말에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백도 허리띠를 떼고 신라 무장의 가죽갑옷으로 바꿔 입었으며 황금색 용 한 마리를 자수로 놓은 검정색 두건을 썼다. 이찬 등급을 나타내는 두건이다. 장덕 화청과 해준은 붉은색 두건을 썼으니 신라의 6급품 일길찬이 되었고 청색 두건을 쓴 효성은 9급품 급벌찬이다. 자, 오늘밤은 영내로 더 깊게 진입한다. 출발이다. 버릴 것은 땅에 묻고 신라군이 된 기마군이 계백의 명령에 따라 다시 떠났다. 내일 저녁에는 삼현성에 달아야 한다.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계백이 소리쳤다. 이제는 신라군이 되었으니 수군대며 지시할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백제왕 의자가 동방방령 의직에게 말하고 있다. 달솔, 그대는 김유신만 막으면 된다. 김유신이 대야주를 지원하려고 내려올 때 허리를 끊어라. 예, 대왕. 의직이 허리를 굽혔다가 펴고 의자를 보았다. 이곳은 동방(東方) 동북쪽의 황야, 백제대왕의 거대한 깃발이 꽂힌 백제군의 본진이다. 대왕 의자가 친히 2만 친위군을 거느리고 북상했고 동방방령 휘하의 동방군 2만5천에다 북방군 5천까지 합해서 5만 대군이 벌판을 뒤덮고 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서 수천개의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터라 마치 땅에도 별무리가 펼쳐진 것 같다. 대왕, 옥체를 보중하소서. 전쟁이 빨리 그쳐야지. 의직의 시선을 받은 의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는 이미 갑옷 차림이다.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진막을 나온 의자가 위사장이 잡고 선 말고삐를 받아 쥐더니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 올랐다. 어둠 속에는 이미 수백기의 위사대가 주위에 벌려서 있다. 별이 밝구나. 하늘을 올려다 본 의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의직은 바로 말을 받았다. 이번 출정에 대운(大運)이 따른다는 징조올시다. 대왕. 앗하하. 마상의 의자가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달솔, 지금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면 뭐라고 말을 받을 거냐? 액운이 떨어졌으니 거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대는 곧 좌평이 되겠다. 입만 가지고 승진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왕. 잘 지켜라. 의자가 정색하고 말하자 의직이 허리를 꺾어 절을 하고나서 낮게 소리쳤다. 대왕. 만세, 천세.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말고삐를 채어 몸을 돌렸다. 위사대에 둘러싸인 의자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의자는 친위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것이다. 의자대왕 깃발을 놔두었다.
아침, 3백기의 기마군이 칠봉산성을 내려가고 있다. 예비마와 식량을 실은 말까지 4백여 필의 말이 속보로 내려가는 터라 산이 울렸다. 앞장선 척후는 10여기. 그러나 깃발도 들지 않았고 백제군(軍)을 나타내는 띠도 매지 않았다. 사냥을 갈 때의 차림이다. 아침 일찍 산에 나왔던 나무꾼 서너명이 내려오는 기마군을 보고는 길가에 비켜섰다가 계백이 다가오자 꿇어앉았다. 근처 마을 농부들이어서 계백의 얼굴을 안다. “성주, 잘 다녀옵시오!” 나이든 사내가 소리치자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추수 잘 하게!” 계백의 목소리는 곧 말굽 소리에 묻혔고 기마군에 둘러싸인 뒷모습도 곧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남방 방령 윤충도 말에 오르고 있다. “선봉이 떠났습니다!” 부장(副將)인 덕솔 목기진이 소리쳐 말하면서 옆으로 다가왔다. 목기진이 탄 군마(軍馬)가 흥분해서 목을 휘두르며 제자리에서 두 번이나 맴돌았다. 싸움에 익숙한 군마들은 전장 분위기를 느끼면 날뛰는 것이다. “서둘러라!” 말고삐를 쥔 윤충이 소리치자 목기진의 손짓을 받은 중군(中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솔 협반이 지휘하는 선봉군 3천이 조금 전에 방성(方城) 아래쪽 산기슭에 주둔하고 있다가 출발한 것이다. 윤충이 이끄는 중군은 기마군 7천5백, 후군은 3천5백, 선봉군까지 1만4천이다. 기마군이 움직이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자, 이제 시작이다.” 윤충이 말에 박차를 넣어 속보로 걸리면서 주위에 모인 무장들에게 말했다. “이번 싸움은 나솔 계백에게 달려있다.” “방령, 대왕께 전령이 떠났소이다!” 중군의 제1대장을 맡은 나솔 정찬이 다가와 보고했다. “대왕과는 이틀 간격이 되겠소.” “일정이 정확해야 산다.” 윤충이 소리쳐 말했다. “낙오자는 남겨두고 행군을 멈추지 말라!” 이미 각 무장들에게 지시를 해놓은 터라 전령을 시켜 전달할 필요는 없다. 후군(後軍) 뒤로 병참과 예비마까지 3천여 필의 말떼가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성 안은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을 했다. 성 안 주민들이 길가에 나와 서서 구경을 한다. 이 중에 신라 첩자가 있을 것이지만 기마군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한다. 출동 전까지 철저하게 위장하고 있었던 터라 첩자들은 영문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성문을 나서자 아침 햇살이 기마군 위로 펼쳐졌다. 창끝이 빛을 받아 반짝였고 말들은 기운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윤충이 번쩍 상체를 세우고 소리쳤다. “보라! 창끝에 비친 햇살이 이렇게 밝은 적은 처음이다! 이번 싸움은 이긴다!” “와앗!” 근처의 무장들이 소리쳤고 전령들이 앞뒤로 말을 달려 나가면서 기마군들에게 전한다. “창끝의 햇살이 이렇게 밝기는 처음이라고 방령께서 전하셨다! 이번 싸움은 이긴다!” “와앗!” 앞쪽과 뒤쪽에서 전령의 말을 들은 기마군들이 함성으로 대답했다. 병사에게 사기를 일으켜주는 것이 장수의 역할이다. 수백 번 전투를 치른 윤충은 비오는 어느 날에 전장으로 달려가면서 빗속의 귀신이 너희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소리친 적이 있다. 그날 윤충은 5백 기마군으로 3천이 넘는 신라군을 패주시켰는데 귀신의 도움이 컸다. 군사들은 귀신들이 옆에서 돕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것이 사기고 전장(戰場)의 단순함이다. 그것을 잘 응용하는 장수가 이긴다. 제갈공명의 계략은 다 헛소리다. 윤충의 머릿속에 계백의 모습이 떠올랐다. 계백. 지금 어디 있느냐?
“부르셨어요?” 마룻방에 앉아있던 계백에게 고화가 다가오며 물었다. 고화는 깔끔한 옷차림에 이제는 피부에도 윤기가 난다. 성주(城主)의 손님이 되어서 머물고 있는 터라 몸은 편해졌지만 아직 얼굴에는 수심이 끼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아.” 오시(12시) 무렵, 잠깐 자고 일어난 계백이 다시 나갈 차비를 하고 앉아있다. 앞쪽에 앉은 고화가 맑은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이제는 눈에 적의는 사라졌다. 대신 두려움과 수줍음이 절반씩 섞여진 것 같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내일 새벽에 출진을 할 테니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불렀어.” 고화는 시선만 주었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방령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더니 마침 방좌께서 말을 꺼내시더군. 그래서 그대를 내 처로 대우 해달라고 청을 드렸어.” 고화가 시선을 내렸고 계백의 말이 마룻방을 울렸다. “그러니 내가 돌아오지 않아도 나솔 계백의 처로 대우를 받게 될 것이야. 그런 줄 알고 있도록.” “나리.” 머리를 든 고화가 계백을 보았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제가 아버지를 사지(死地)에 빠뜨려놓고 이제는 나리까지 몰아 넣는군요.”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어.”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그대가 지금은 내 걱정을 해주는가?” “아버님께 저는 꼭 살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옳지, 그래야지.” 계백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효도하는 길이고 대의(大義)일세. 내가 전해 드리겠네.” 어깨를 편 계백이 머리를 돌리더니 밖에 대고 소리쳤다. “덕조 있느냐!” “예, 나리.” 문 밖에 있었는지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집안 식구들 모두 불러라!” “예, 나리.” 숨을 다섯번 쉬기도 전에 덕조가 종 둘과 우덕까지 데리고 마룻방 끝쪽에 섰다. 계백이 머리를 들고 덕조에게 말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아씨를 모시고 기다려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나리.” 했지만 덕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내막을 모르기 때문이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방좌 덕솔 연신님께서 아씨를 내 처로 인정하시고 대우해주신다고 하셨다. 알겠느냐?” “예, 나리.” 그때서야 덕조가 계백 사후(死後)의 고화에 대한 대우 문제인 것을 알고는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예, 돌아오실 때까지 잘 모시지요.” 머리를 끄덕인 계백의 시선이 고화에게로 옮겨졌다. “이만하면 되었어.” 자리에서 일어선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나는 내일 새벽에 출진이야. 청으로 들어가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나서 그곳에서 출진할 테니까 여기서 작별이다.” “나리, 무사히 돌아오시오.” 계백의 등에 대고 덕조가 건성으로 말했다. 마룻방을 나가던 계백의 옷자락이 뒤에서 당겨졌다. 머리를 돌린 계백이 옷자락을 잡고 선 고화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화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나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죽을 작정으로 떠나는 무장이야.” 그러나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대에게 돌아오려고 죽음을 피하지는 않아.” 계백이 몸을 돌렸다.
진궁이 보낸 남용이 다시 칠봉성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진시(8시) 무렵이다. 남용은 밤을 새워 달려온 것이다. 백제령에 들어온 후에는 성(城)에서 말을 빌려 탈 수가 있다. 이번에는 성의 청으로 들어온 남용이 계백에게 말했다. 나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남용이 말을 이었다. 서문(西門) 수문장 여진이 성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대아찬이 서둘라고 합니다. 청 안에는 화청과 해준 등 결사대 무장들만 모여 있었는데 계백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틀만 이곳에서 기다려라. 내가 방령께 허락을 받고 바로 날짜를 잡을 테니까. 그러지요. 내가 지금 방성(方城)으로 가겠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 계백이 무장들을 둘러보았다. 출전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도록. 청 안의 분위기에 활기가 일어났다. 마치 야수가 피냄새를 맡은 것 같은 분위기다. 그날 저녁 술시(8시) 무렵, 칠봉성에서 방성인 고산성까지 2백여리 길을 달려온 계백이 윤충과 마주앉아 있다. 청 안에는 무장(武將) 대여섯명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모두 이번 전쟁에 출전할 무장들이다. 계백의 말을 들은 윤충이 어깨를 펴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때가 되었구나. 나솔, 준비는 다 되었겠지? 예, 신라군 군복과 장비도 다 준비되었습니다. 신라 땅으로 들어서면 갈아입을 것입니다. 나는 대군(大軍)을 이끌고 가는 터라 변복할 수가 없어. 그대 뒤를 선봉군 3천이 따라가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릴 거야. 알고 있습니다. 대야성 서문을 하루 동안 지켜야 되네. 지키지요. 대왕께도 전령을 보내겠네. 이제는 길게 숨을 뱉은 윤충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나솔, 살아있어야 하네. 청을 나온 계백이 매어놓은 말고삐를 풀 때 방좌 연신이 서둘러 다가왔다. 연신은 이번 전쟁에 출전하지 않는다. 방령 윤충을 대신하여 남방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보게 나솔, 진궁의 딸을 집에 두었나? 다가선 연신이 낮게 묻자 계백이 목소리를 낮췄다. 왜 그러시오? 진궁이 그대에게 딸을 맡겼다니 나솔의 부인으로 대우해야 되겠는가? 연신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내 부인으로 대우해 주시지요. 알겠네. 머리를 끄덕인 연신이 말을 이었다. 진궁한테 내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전해주게. 고맙습니다. 연신이 말에 오른 계백을 올려다 보면서 웃었다. 살아 돌아와서 혼인을 하도록 하게. 말고삐를 챈 계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신은 만약 계백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경우에 대비해서 고화의 처분을 상의한 것이다. 이제 계백의 말을 들었으니 고화는 계백의 부인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었다. 계백은 호위장 무독 곽성과 둘이서 칠봉성과 고산성을 오갔다. 그날 밤 다시 말을 달려 2개의 성에서 말을 바꿔타고 칠봉성에 닿았을 때는 오전 사시(10시) 무렵이다. 길가에서 잠깐 말을 세워놓고 눈을 붙인 강행군이다. 하루 반나절만에 2백여리 길을 왕복한 셈이었다. 잠깐 쉬려고 사택으로 돌아온 계백이 덕조에게 말했다. 오시(12시)에 날 깨워라. 아씨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대야성 서문 수문장 여준은 다가오는 진궁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성주 오시오?” “난 성주에서 떨어진지 한 달 되었어.” 쓴웃음을 지은 진궁이 다가와 섰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진궁은 여준의 숙소로 찾아온 것이다. 미리 장춘을 시켜 연락을 한 터라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준이 진궁을 안내했다. 여준도 가야 호족 출신으로 진궁의 가문과 인척으로 맺어져 있다. 진궁의 어머니가 여준의 친척인 것이다. 뒤채 마룻방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뒤를 따라온 장춘이 마룻방 밖에서 지켜섰고 여준은 방에 불도 켜지 않았다. 진궁은 이미 기피 인물이다. 딸이 백제군에게 납치된 것을 숨기고 있다가 군주로부터 직위가 박탈된 신분인 것이다. 억울하겠지만 진궁과 접촉했다가 군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리는 진궁을 피하는 실정이다. “이것 봐, 나마. 내가 그대와 친척이라는 것을 누가 아는가?” 웃음 띤 얼굴로 진궁이 묻자 여준이 따라 웃었다. “안다면 벌써 그자가 군주께 말했겠지요.” “그렇군.” “한 달이 지났으니 아마 저도 직이 잘렸을 겁니다.” “김유신은 내 구명 편지도 불에 태웠어.” “당연하지요.” “시간이 지나면 그대와 내 관계도 알게 될 거야.” “그럴 것 같습니다.” 여준은 33세, 활을 잘 쏘았고 마술이 뛰어나 여러 번 전장에서 공을 세웠지만 11품 나마에 머물고 있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지 1백년도 되지 않는다. 그 전(前)에는 가야와 백제가 연합해서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때 진궁이 정색하고 여준을 보았다. 방안이 어두워서 진궁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봐, 나마. 나는 이곳에서 죽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놀란 여준이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어깨를 치켜올린 진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마는 살아서 영예를 찾게.” “왜 죽습니까?” “대야성을 함락시키겠네.” “대아찬, 무슨 말씀이오?” “성문을 열어주지 않겠는가?” 낮게 말한 진궁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여준을 보았다. “대야성만 넘어가면 대야주 42개 가야 영토의 성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네.” “…….” “그럼 우리 가야인들이 다시 대가야의 주인이 되겠지. 나마, 그대가 42개 가야성 한 곳의 성주는 되지 않겠는가?” “…….” “신라가 우리 대가야를 병합시키고 나서 가야족으로 출신한 위인은 김유신 하나뿐이지 않은가?” “…….” “내가 5품 대아찬이 된 것도 30여 번의 전공을 세운 덕분이지. 나 같은 경우는 몇 명 안되어.” “그렇지요.” 어깨를 부풀린 여준이 말했다. “대아찬은 김유신보다도 더 전공을 세웠지요.” 그러나 김유신은 이미 왕족 대우를 받고 진골 김춘추의 매부이며 대장군에다 2품 이찬이 되었다. 가야인 토호 대부분은 11품 나마 이상으로 승급되지 않는다. 전택도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그때 여준이 물었다. “대아찬, 백제에 투항하시려는 겁니까?” “나를 따르겠는가?” “명분은 있으니 실리까지 보여주시오.” “옳지.” 진궁이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하네, 거사가 성공하면 그대에게 성주를 보장하지 못하겠는가?” “조건없는 투항은 백제에서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딸 고화의 장래를 보장받았네.” “대아찬, 살아서 그것을 보셔야지요. 함께 삽시다.” “그럼 성문을 열겠는가?” “대가야는 내 땅이요, 내 집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여준의 두 눈이 번들거렸고 먼저 손을 뻗어 진궁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나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장들이 돌아가고 계백 혼자 마룻방에 남았을 때 먼저 나갔던 남용이 문앞에서 말했다. “뭐냐?” 다가온 남용이 품에서 접혀진 편지를 두 통 꺼내더니 내밀었다. “하나는 대아찬이 나리께 보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딸에게 주는 편지지만 나리께 먼저 드리라고 하더구만요.” 20대쯤의 남용은 농사꾼에서 병사로, 병사에서 15품 진무까지 출신을 했다. 군 경력이 8년, 수많은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터라 생존본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편지를 받아든 계백이 남용에게 물었다. “진무, 대아찬의 기색이 어떻더냐?” 남용은 그동안 진궁과 함께 생활해왔던 것이다. 백제 측에서는 연락역 겸 감시역이다. “가야 호족으로 신라 왕족들에게 무시당해온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남용이 바로 대답했다. “백제군을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려 신라에 충성할 위인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딸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고 진심 같습니다. 딸이 잘 살면 된다는 말만 여러번 했습니다.” “진무, 수고했다.” “나리.” 계백을 부른 남용이 시선이 마주치자 쓴웃음을 지었다. “저와 하성은 이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번 공격이 성공하면 너희들 둘은 12품 문독이 된다. 그것이 자손에게도 전해질 게다.” “그만하면 죽을 보람이 있지요.” 어깨를 부풀린 남용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죽더라도 자식에게 직위가 넘겨진다는 말이다. 남용이 몸을 돌렸을 때 계백은 먼저 자신에게로 온 편지부터 보았다. 이제는 눈에 익은 진궁의 필체다. “나솔, 다시 뵙게 되겠지만 그때는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을 터라 먼저 말씀드리오. 내 딸 고화가 여러모로 부족하나 나솔이 상처하셨다고 들었기 때문에 배필로 맞아주시면 마음놓고 세상을 뜰 수 있겠소. 이것도 인연이니 고화를 받아주시기 바라오. 고화에게도 따로 편지를 쓸 것인데 고화는 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승낙해주신다면 백제와 나솔을 위해 대야성 공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진궁.” 한동안 편지를 보던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편지는 자신의 딸을 배필로 맞으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내용은 당당했고 딸과 대야성을 바꾸겠다는 분위기까지 풍겼다. 이윽고 계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내용 속에 박힌 진궁의 아픔과 분노, 그리고 진심까지 몸속으로 배어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당으로 나간 계백이 종을 불러 고화를 불렀다. 고화는 이제 종이 아니라 손님이다. 방에서 나온 고화가 앞에 섰을 때 계백이 편지를 내밀었다. “부친과 함께 있는 무장이 여기 오면서 그대 부친의 편지를 가져왔어.” 편지를 내민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것도 함께 읽는 것이 낫겠군.” 계백이 다시 편지 한 통을 꺼내 고화에게 건네주고는 돌아섰다. 밤이 깊어서 칠봉산 이쪽저쪽의 부엉이가 울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온 계백이 그때서야 옷을 갈아입었을 때 덕조가 술상을 든 종과 함께 들어섰다. “주인, 무슨 편지를 주신 겁니까?” 종이 나갔을 때 술상 옆에 앉은 덕조가 물었다. “얼핏 들었더니 부친이 보낸 편지라면서요?” “고화 부친이 나한테 고화를 처로 맞아 달라는구나.” 순간 숨을 들이켠 덕조가 몸까지 굳히더니 이윽고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말했다. “소인이 보기에는 마님으로 적당하십니다. 얼른 받아들이시지요.”
결사대 3백은 칠봉성으로 파견된 병력중에서 선발했기 때문에 계백은 매일 군사 조련을 했다. 방령 윤충은 부장(副將)으로 장덕 화청을 보내 주었는데 40대의 한인(漢人)이다. 건장한 체격에 수염이 무성한 화청이 계백을 향해 두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 “장덕 화청이올시다. 나솔께서 연남군에 계실 때부터 용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당(唐)에서 귀화했나?” 계백이 묻자 청 안의 시선이 모여졌다. 칠봉성의 청 안이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화창한 날씨여서 산성위로 흰 구름이 지붕처럼 붙여져 있다. “아니오, 전 수(隋)가 멸망한 후에 귀순했으니 수에서 귀화한 셈입니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수(隋)는 3대 37년만에 멸망한 것이다. 한때 중원을 장악했던 수는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대패를 당한 후에 양제가 친위군의 반란으로 살해되면서 사라졌다. “수가 멸망한지 25년이야. 그대는 수에서 관직에 있었나?” “섬서성 동관의 교위로 있다가 동관이 함락되자 곧장 동성군에 투항하였습니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동성군은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백제령 담로의 하나다. 계백이 성장했던 담로 연남군의 윗쪽이다. “잘왔어, 그대의 경륜이 도움이 되겠다.” 계백이 반기고는 같은 부장(副將)이며 장덕인 해준과 고덕 효성 등 무장들을 소개했다. 이로써 결사대 장수와 병사 준비는 마쳤다. 성안의 군사는 물론 출동시킬 3백 기마군도 아직 대야성 공략은 커녕 출동 날짜도 모른다. 계백과 10여명의 무장만 알 뿐이다. 그날 저녁, 대야성에 밀파되었던 2명중 하나인 진무(振武) 남용이 계백의 사택에 도착했다. 남용은 온몸이 땀과 먼지로 뒤덮여 있는데다 나흘 밤낮을 걸었기 때문에 지쳐 있었다. “지쳤으니 잠깐 물을 마시고 죽을 먹어라.” 늘어진 남용에게 말한 계백이 덕조를 보았다. “가서 장덕 화청, 해준, 고덕 효성까지 불러오너라.” 덕조가 몸을 돌렸을 때 계백이 다시 남용에게 말했다. “다 함께 들으려고 그런다.” 잠시후에 선봉군 결사대의 무장들이 다 모였다. 그들은 남용이 어디에서 온 것임을 아는 터라 긴장하고 있다. 마룻방에 다섯이 둘러 앉았을 때 계백이 남용에게 지시했다. “말해라.” “예, 그동안 대야성의 주둔병력이 1만3천5백으로 늘었습니다. 기마군 5천5백에 보군 8천입니다.” 남용이 가슴에서 접혀진 종이를 꺼내 계백 앞에 펼쳐놓았다. “대야성 지도입니다. 각 부대의 위치와 병력, 창고와 마굿간, 무장과 관리들의 숙소까지 다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 지도는 대아찬이 그렸습니다.” 무장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내었다. 계백이 지도를 집어들고 머리를 끄덕였다. 대아찬은 진궁이다. 다시 남용이 말을 이었다. “대야성 주변에 포진한 신라군은 대략 1만여명이고 중앙군단으로는 삼천당군(軍) 1만이 동쪽 마진성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대아찬은 유사시에 만 하루면 3만여명의 신라군이 모일 수가 있고 사흘이면 5만, 열흘이면 신주로 올라간 김유신군(軍)까지 내려와 10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야성 안 분위기는 어떠냐?” “전쟁 분위기는 아닙니다. 김유신군이 북상했고 의자대왕께서 북쪽에 계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숨을 고른 남용이 계백을 보았다. “대야성안 주민이나 가야출신 군사들은 신라 임금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할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도를 접은 계백이 길게 숨을 뱉었다. 이제 시간이 된 것이다. 이쪽 준비는 다 되었다. “수고했다. 넌 오늘 푹 쉬어라.”
신주(新州)는 백제의 북방을 가로지르는 신라 영토지만 백제로부터 빼앗은 것이나 같다.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빼앗겼던 한강 유역 6군을 회복했다.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을 점령했는데 진흥왕은 갑자기 백제를 배신, 백제군이 수복한 6군마저 탈취한 후에 신주를 설치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성왕이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했으니 백제로서는 피눈물이 뿌려진 땅이다. 그리고 관산성 싸움에서 성왕을 패사시킨 신라 무장(武將)이 바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金武力)이다. 당시의 김무력이 신주군주(新州軍主)였던 것이다. 신주(新州) 서북방에 진출한 김유신이 덕천성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 전령이 달려와 보고했다. 대장군, 백제 의자왕이 영암성에 입성했습니다. 영암성은 백제의 북단으로 신주와는 50여리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김유신이 주둔한 덕천성과는 2백리 정도다. 전령의 보고가 이어졌다. 의자왕이 이끈 기마군은 8천여기, 보군은 1만7천 정도이나 동방 방령 의직이 주둔한 대곡성에는 보기 2만 정도의 병력이 있습니다. 김유신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곡성과 영암성간 거리는 60여리밖에 되지 않는다. 의자가 노리는 곳은 두 곳 뿐이야. 김유신이 청안의 무장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이쪽, 신주(新州)와 서쪽 대야주다. 대장군, 의자가 이쪽에서 사냥 시늉을 하는 건 서쪽을 노리고 있는 것을 숨기려는 수작 아닐까요? 김병일이 물었을 때 김유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신은 올해 49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다. 너무 뻔한 성동격서다. 그것은 뻔하게 드러냈으니 그 반대로 행동한다는 뜻입니까? 대아찬, 그 반대가 무엇이냐? 김유신이 아직 20대 후반이나 5품 대아찬에 오른 김병일을 물끄러미 보았다. 김병일도 진골(眞骨)왕족이다. 상대등 비담의 조카가 된다. 비담 일당이 김유신의 옆에 박아 놓은 감찰관 역할이다. 김유신의 시선을 받은 김병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동격서의 반대란 바로 소리를 내는 곳으로 공격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자가 그렇게 뻔한 짓을 할까? 그럼 서쪽 대야주를 친다는 것입니까? 의자는 우리가 그것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때 김병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둘러선 무장들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대부분이 김유신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다닌 무장들이다. 그때 김유신이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내가 북상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군사를 이끌고 당항성으로 가지 않은 이유를 아는가? 김유신의 시선이 부장(副將) 서준에게로 옮겨졌다. 서준은 6품 아찬으로 38세, 10여년간 김유신을 수행한 무장이다. 아찬, 말해보라. 예,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서준이 바로 대답했다. 어깨를 편 서준의 왼쪽 볼에 칼자욱이 길게 뻗쳐졌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면 어느 쪽 적과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김유신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허나 의자의 준동은 전쟁의 시작인 것은 분명하다. 내가 군사를 이끌고 북상한 것도 당연한 일, 서쪽 대야주 방비도 충분하니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백전노장의 빈틈없는 말이다.
고산성에서 돌아온 계백은 전택과 4명의 농민 차림의 사내를 대동했는데 그들이 바로 신라에 파견될 백제 연락역이다. 바로 첩자인 것이다. 15품 진무와 16품 극우에서 선발된 하급 무장이었지만 중책을 맡은 터라 모두 긴장하고 있다. 그들을 청으로 데려가지도 못하고 사택으로 데려온 계백이 마룻방에 모아놓고 말했다. “대야성 함락은 그대들에게 달렸다. 그대들의 목숨이 결코 헛되게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진무 하나가 물었다. “나솔, 소인이 진무를 단지 3년이오. 이번 일이 성사되면 무독까지는 되겠지요?” 무독은 14품이니 2계단 오를 것이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런 욕심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이다. 공(功)에 대한 욕심이 없는 자는 많을 수가 없다. “내가 13품 문독까지는 보장한다.” “어이구, 살아서 문독이 되어야 할텐데요.” 20대 중반쯤의 진무가 따라 웃으며 말했을 때 계백이 대답했다. “그대가 죽으면 처자식이 그 보상을 받으리라.” 듣고만 있던 전택이 입을 열었다. “나솔, 다음달 보름이면 20여일이 남았소. 서둘러야 될 것입니다.” “그대의 책임이 크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대야성의 대아찬에게 연락을 해야 될 것이고 대야성까지의 길 안내를 해야 될테니까.” “나도 목숨을 내놓았소.” 전택의 얼굴에도 쓴웃음이 떠올랐다. “승자(勝者)의 세상이요, 승자로 죽으면 이름이라도 아름답게 남을 테니까 말씀이오.” 전택은 삼현성에서 대야성까지의 길 안내를 맡은 것이다. 제각기 농민 차림을 한 다섯명이 사택을 나갔을 때는 오후 유시(6시)무렵이다. 그들은 밤을 세워서 삼현성으로 간 후에 다시 전택은 진궁에게 붙여줄 둘을 데리고 대야성까지 가야만 한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계백이 마룻방으로 들어섰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몸을 돌린 계백이 문 앞에 서 있는 고화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고화가 입을 열었다. “언제 떠나십니까?” “무슨 말인가?” “신라땅으로 말씀입니다.” “준비가 되면 떠나야지.” 그때 고화가 한발짝 다가섰다. “아버지를 만나시겠지요?” “당연하지. 내가 그대 아버님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까.” “제가 급벌찬한테서 다 들었습니다.” 고화가 똑바로 계백을 보았다. 물기에 젖은 두눈이 반짝이고 있다. “아버지를 만나면 제 편지를 전해드릴 수 있습니까?” “전해주지.”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전해주겠다.” “그럼 떠나시기 전에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그리고 이번 일이 성공하면 네 부친은 가야국 호족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되실 것이다.” 고화가 시선을 내린채 입을 다물었지만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벼슬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이 아니야. 네 부친은 정당한 권리를 찾으시려는 것이니까.” “……” “너를 종으로 산 인연으로 일이 이렇게 엮였지만 아직 마음이 놓이지는 않아.” “……” “네 부친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지도 아직 알 수가 없으니까.” 계백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나도 최소한의 병력으로 네 부친한테 가는 거야. 네 부친한테 내 목숨을 맡기고 가는 셈이다.” 고화가 머리를 들었지만 계백은 몸을 돌린 후다.
계백이 옷만 갈아입고 전택과 함께 남방 방성(方城)인 고산성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은 해시(10시) 무렵이다. 방령 윤충이 청 안에서 계백과 전택을 맞았는데 오늘도 방좌 연신이 동석했다.“나도 오늘 오후에 대왕께서 보내신 전령으로부터 내막을 들었어.”윤충이 계백을 맞으면서 말했다.“그런데 신라인을 직접 데려오다니 일이 빨리 진행되는구나.”윤충의 시선이 전택에게 옮겨졌다. 그때 전택이 두손으로 청 바닥을 짚고 절을 했다.“신라 삼현성 보군대장 급벌찬 전택입니다.”시선을 든 전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말을 이었다.“신라 관직을 대기가 부끄럽습니다.”“알아.”윤충이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그대의 가슴이 복잡하겠지. 반역이냐 또는 내가 사내의 길로 바로 가는 것이냐, 하고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예, 목숨이 아깝지는 않으나 헛되게 버리지는 않겠습니다.”전택이 눈을 부릅뜨고 윤충을 보았다.“전(前) 삼현성주 진궁도 소인과 같습니다.”윤충의 시선이 계백에게로 옮겨졌다.“나솔, 나도 그대에게 맡기겠다. 허나 신중을 기해야 될 것이다.”그때 연신이 나섰다.“그래서 여기 있는 급벌찬과 진궁에게 각각 우리측 연락역을 배치시키는 것이 낫겠네.”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대아찬 진궁은 지금 대야성의 마장 관리인이 되어 대야성에 있습니다.”“어허.”탄성을 뱉은 윤충이 연신과 마주보더니 전택에게 물었다.“그게 정말인가?”“예, 방령. 그래서 제가 달려온 것입니다.”“그렇다면 곧장 대야성을 찌를 수도 있겠구나.”윤충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삼현성은 놔두고 뱀의 머리부터 떼는 것이다.”“제가 대야성으로 가겠습니다.”계백이 말을 이었다.“전택과 함께 삼현성 군사로 위장하고 대야성까지 가는 것입니다.”“전령의 말을 들으니 3백 군사만 데리고 가겠다던데 가능할까?”“바로 뒤만 받쳐 주십시오.”윤충과 연신이 다시 얼굴을 마주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아직도 전택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전택을 믿더라도 만일 신라군에게 잡히면 실토할 수밖에 없다. 그때 전택이 입을 열었다.“저에게 연락관 둘을 붙여 주시지요. 하나는 제 옆에 남고 또 하나는 연락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둘은 제 고향 농장에서 온 하인인 줄 알 것입니다.”“그렇다면 진궁에게도 둘을 보내야겠군.”“제가 이번에 그 둘을 데리고 가지요.”전택이 말을 이었다.“삼현성을 거쳐 대야성까지 들어가 대아찬을 만날 테니까요.”“그럼 내일 떠날 때 넷을 붙여주지.”윤충도 결단이 빠른 성품이다. 머리를 끄덕인 윤충이 수족 같은 방좌 연신에게 지시했다.“덕솔, 진무나 극우 중에서 넷을 추려 내일 나솔에게 딸려 보내도록.”“예, 방령.”“대가야가 백제에 귀속되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야.”윤충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전택을 보았다.“가야 토호 중에서 김유신만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는 재주를 부려 김춘추에게 여동생을 주는 바람에 출신을 했지?”억지 소리지만 설득력은 있다. 전택이 어깨만 부풀렸고 윤충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대백제는 한때 대성(大性)이 권세를 누렸지만 지금은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신하들을 관리한다. 그대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리!뒷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계백이 말고삐를 채어 말의 속도를 늦췄다. 오후 미시(2시)무렵, 칠봉산성 앞쪽의 황무지를 달려가던 중이다. 머리를 돌린 계백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내를 보았다. 40대쯤으로 손에 손도끼를 들었다.성주 나리.다가온 사내가 가쁜숨을 가누면서 말을 이었다.나무를 하다가 지나시는 것을 보고 인사를 드리려고...무슨 일인가?말을 세운 계백이 물었다. 의자대왕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다. 호위군사 2기만 거느리고 이번에도 쉬지않고 달려오는터라 지친 상태다.예, 제 이름은 곽신조라고 하옵고, 제 자식은 배준이라고 합니다.계백의 시선을 받은 사내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제 자식에게 활과 화살을 주셨고 잡은 노루까지 주셨습니다. 그 인사를 여기서라도 드립니다.오.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아이가 궁술 연습을 하는가?예. 잠을 잘때도 손에서 활을 놓지 않습니다. 나리.연습이 제일이야.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나리.성주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아이나 잘 키워라.나리. 무운장구 하소서.고맙네.말고삐를 당긴 계백이 말을 이었다.올해 농사는 풍년이지만 세는 작년 기준으로 걷을테니 겨울은 잘 지내게 될거네.아이구. 고맙습니다. 나리.사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만큼 기쁜 소식도 없는 것이다. 마을로 달려간 사내가 금방 소문을 낼것이다. 성에 들어간 계백이 옷부터 갈아 입으려고 사택앞에서 말을 내렸을때 덕조가 달려 나왔다.나리. 왔습니다.서둘러 말하는 덕조의 뒤로 사내 하나가 따라 나왔다. 바로 삼현성의 보군대장 전택이다.나리, 이제 오십니까?오. 무슨 일인가?다가간 계백이 전택에게 물었다. 고화와 우덕은 보이진 않았고 며칠전에 고용한 여종 둘이 마루끝에서 기다리고 있다. 계백은 전택과 함께 마룻방에 올라 마주보고 앉았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앉은 것이다. 전택이 입을 열었다.나리. 성주가 대야성의 마장 관리인이 되셨소.대야성의?놀란 계백의 눈빚이 강해졌다.대야성으로 옮겨갔단 말인가?예, 삼현성에 두면 불안하니까 옆으로 불러들여 감시할 작정이었던것 같습니다.전택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그것이 오히려 더 잘되었지요.....구(구)마장을 관리한다고 보냈는데 병든 말 몇필에 군사는 10여명이었습니다. 관리인 숙사는 돼지우리 같았다고 합니다.....저는 삼현성 보군대장 직임을 그대로 갖고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앞장을 설수가 있소.가만.손을 들어 전택의 말을 막은 계백이 정색했다.나하고 갈곳이 있네.어디 말씀이오?내일 아침에 남방 방령을 만나러 가세.방령 나리를 말씀이오?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말을 이었다.내가 이번 전쟁의 선봉을 맡게 되었어.숨을 죽인 전택을 향해 계백이 빙그레 웃었다.이제 그대와 나, 그리고 구(구)삼현성주는 일심동체로 움직여야 되네. 같이 살고 같이 죽을거야.
동방군(東方軍)과 함께 북쪽의 신라 신주(新州)를 겨냥하고 무력시위를 하던 의자왕의 진막 안이다. 이곳은 백제 북방(北方)의 우측 끝, 상진성에서 20여리 떨어진 산기슭, 앞쪽 벌판에는 백제군 2만5천이 포진하고 있어서 인파로 자욱하게 덮였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진막 안에는 상석에 의자왕이 앉았고 좌우로 병관좌평 성충, 동방방령 달솔 의직 등 대장군급 무장들이 둘러서 있다. 그리고 의자왕을 바라보는 정면에 나솔 계백이 서있다. 계백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옷이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다.나솔, 왔느냐?의자가 웃음 띤 얼굴로 계백을 맞았다.예, 대왕.계백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40이 넘어 왕위에 오른 의자는 20대 중반인 계백에게 아버지뻘이다. 더구나 무장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는 법. 의자에 대한 계백의 충성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대왕의 전령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계백은 칠봉성으로부터 이곳까지 5백여리 길을 만 하루만에 달려온 것이다. 도중의 성(成)에 들려 말을 바꿔탔지만 잠은 잠깐씩 길가에서 잤을 뿐이다. 그때 의자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내가 나솔하고 나눌 이야기가 있다. 병관좌평과 동방방령만 남고 물러가도록 하라.그러자 순식간에 진막이 비워졌고 안에는 의자와 성충, 의직, 계백만 남았다. 의자가 계백에게 물었다.대야성은 난공불락인데다 김춘추, 김유신의 권력 기반이 되는 성이다. 더구나 대야주 42개 성의 중심이다.의자의 두 눈이 번들거렸고 목소리가 낮아졌다.나솔, 삼현성주의 모반이 확실하느냐?바로 이것 때문에 의자가 계백을 부른 것이다. 남방방령 윤충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의자가 계백에게 직접 확인하고 있다.대왕, 가야인의 반발은 확실하나 삼현성주의 투항은 아직 믿기 어렵습니다.어허.예상 밖의 대답인지 의자가 탄식했다.그렇다면 그 기회를 버릴 것이냐?아닙니다.계백이 머리를 들고 의자를 보았다.소장이 그 기회를 잡겠습니다.무슨 말이냐?그때 병관좌평 성충이 나섰다.나솔이 그 함정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잡겠다는 말인가?예, 좌평.머리를 끄덕인 성충이 의자를 보았다.대왕, 나솔의 방법이 낫습니다.의자가 지그시 계백을 보았다.자세히 말해보아라.소장이 변복한 군사들을 이끌고 삼현성주의 뒤를 따라 대야성에 진입하겠습니다.말하라.진입한 후에 성문을 열면 기다리고 있던 백제군이 성을 장악하는 것입니다.옳지.의자가 시선을 준 채로 말을 이었다.만일 함정이라면 너와 네 부하들만 당하게 되겠구나.예, 대왕.대야성에는 1만이 넘는 군사가 있다고 한다. 너는 군사 몇 명을 이끌고 가겠느냐?3백이면 성문 하나는 장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왕.3백이면 너무 적지 않느냐?성문 하나를 장악하기에는 적당합니다, 대왕.내가 네 아비를 알지.불쑥 의자가 말했기 때문에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의자가 초점이 멀어진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내가 연남군에 갔을 때 네 아비하고 같이 사냥을 했다. 네 아비는 명궁이었다. 충신이었지.황송하오.계백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대왕한테서 아비 칭찬을 받는 것이 바로 가문의 영예다. 특히 대왕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을 경우에는 더욱 감개가 무량해진다. 그래서 대(代)를 이은 충성이 나오게 된다.
“음, 대아찬, 왔는가?”김품석이 진궁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한낮, 대야성의 청에 앉은 김품석의 표정은 밝다. 사방 100자(30m)가 넘는 청에는 수십 명의 관리, 무장들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인근 성에서 온 성주들도 눈에 띄었다. 진궁이 두 손을 청 바닥에 짚고 김품석을 올려다보았다.“군주(軍主), 부르셨습니까?”김품석이 전령을 보내 대야성으로 부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면서 청 안이 조용해졌다. 김품석은 28세. 장인인 김춘추와 같은 아찬이며 진골 왕족이다. 42개 성을 거느리는 대야군주(軍主)였으니 김춘추보다 오히려 실세다.“대아찬, 심현성에는 이미 신임 성주가 가 있으니 그대에게 새 직임을 주겠다.”김품석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대야성 북쪽의 구마장 관리인이 비었다. 그대가 관리인을 맡으라.”“마장 관리인입니까?”“그렇다.”김품석의 눈빛이 강해졌다. 청 안의 문무관(文武官)들이 숨을 죽였고 누군가 쇠붙이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칼이 마룻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 진궁이 김품석의 시선을 받은 채 심호흡을 두 번 하고나서 입을 열었다.“막중한 소임을 맡겨주셔서 감사드리오.”“그런가?”어깨를 늘어뜨린 김품석의 눈빛이 약해졌다.“오늘부터 맡으라. 관리인 숙사는 비었을 것이다. 북쪽의 구마장이다.”“예. 군주.”머리를 숙여 보인 진궁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청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궁이 청을 나왔을 때 마당 건너편 중문 밖에서 기다리던 장춘이 따라붙었다. 장춘은 삼현성에서부터 따라온 진궁의 집사다. 진궁의 집안에서 대를 이어서 내려온 씨종인 것이다.“주인, 어떻게 되셨소?”진궁과 비슷한 연배의 장춘이 옆으로 붙어 걸으면서 물었다. 장춘은 뼈가 굵었고 힘이 장사여서 지금도 말을 어깨에 올리고 걷는다. 진궁이 대답 대신 지나는 군사 하나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대야성 구마장이 어디 있느냐?”“이 길로 주욱 가시오.”군사가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더니 진궁을 훑어보았다.“거긴 뭐 하러 가십니까?”“내가 구마장 관리인이 되었다.”“병든 말 몇 마리뿐인데요.”그때 장춘이 군사에게 바짝 다가섰다.“이보게. 병든 말 몇 마리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성의 새마장은 남쪽 마장으로 옮겼고 구마장은 병들고 죽어가는 말 몇마리만 남겨놓았소.”숨을 들이켠 장춘이 다시 물었다.“그곳 관리인이 있었는가?”“관리인이 무슨 필요가 있소? 군사 대여섯 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오.”그때 진궁이 장춘에게 말했다.“자, 가자.”“고맙네.”군사에게 인사를 한 장춘이 진궁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둘이 다섯 걸음을 걸었을 때 장춘이 앞쪽을 응시한 채 말했다.“주인, 잘 되었소.”진궁은 발만 떼었고 장춘이 말을 이었다.“마장 관리인으로 박아놓고 감시를 하겠지요. 행여나 했던 내가 미친놈이었소.”장춘은 전택이 계백을 만나고 온 것도 아는 것이다. 어깨를 부풀린 장춘이 힐끗 뒤를 보고나서 말을 이었다.“둑은 손가락만한 구멍 하나가 커져서 터지는 법이오, 주인.”
칠봉산성 아래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강이 흐른다. 맑고 푸른 강이다. 강폭은 3백보 쯤 되었지만 아래쪽은 폭이 50여보로 좁아져서 나무다리가 놓여졌다. 이곳이 칠봉산성으로 오르는 앞쪽 입구다. 계백이 칠봉산이 바라보이는 황야로 들어섰을 때는 오후 미시(2시)무렵이다. 방령 윤충과 만나고 귀성하는 길이었다. 계백이 앞장을 섰고 10보쯤 뒤로 3기의 기마군이 따랐는데 속보다. 질주를 하면 말이 지치기 때문에 네 필의 말은 빠른 걸음으로 황무지를 횡단하고 있다. 가을이 되어가는 8월말, 말 무릎까지 닿는 잡초가 시들면서 칠봉산의 단풍이 멀리서도 붉게 물들고 있다. 그때다. 어디선가 아이의 외침 소리가 울리더니 앞쪽 풀숲을 헤치면서 큰 노루 한 마리가 가로질러 달려갔다. 빠르다. 노루 엉덩이의 흰 반점이 보이더니 사라졌다.“앗! 노루다!”뒤를 따르던 호위랑 무독(武督) 곽성이 소리쳤다. 그 순간 계백이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안장에 걸친 활을 빼들었고 고삐를 입에 물면서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눈 깜빡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흥분한 전마(戰馬)는 네 굽을 모아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노루를 쫓는 것이다. 계백이 풀숲 사이로 보였다가 숨기를 반복하는 노루를 응시했다. 전마는 빠르지만 노루와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1백여보, 그 때 뒤쪽에서 호위 기마군이 쫓아왔지만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계백의 30보쯤 뒤다. 그때 계백이 활을 만월처럼 당겼다. 달리는 말위에서 입에 고삐를 물고 겨눈다. 뒤를 따르는 호위군사는 숨을 죽인 채 응시했다. 그 순간 계백이 시위를 놓았다. 앞쪽 1백10보쯤 떨어져있던 노루가 한걸음에 7~8보 간격쯤으로 도약을 했는데 그 도약해서 떠오른 순간을 겨누고 쏘았다.“와앗!”뒤쪽에서 함성이 울렸다. 솟아올랐던 노루의 목에 화살이 박힌 것이다. 노루가 곤두박질로 풀숲에 뒹굴었을 때 계백과 기마군이 달려가 에워쌌다. 곽성이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칼등으로 노루의 머리를 쳐 숨을 끊었다.“나리, 명궁이십니다.”노루 옆에 선 곽성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지난번 삼현성에서 적장을 쏘아죽이셨다는 소문도 군사들을 통해 사방으로 퍼졌습니다.”곽성은 한인(漢人)이다. 백제는 귀화한 한인은 물론이고 왜인, 남만인, 인도인까지 받아들였고 관직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30대 초반의 곽성은 산적질을 하다가 투항하고 백제인이 되었다. 계백이 흥분한 말갈기를 쓸어 달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아이가 노루를 쫓았던 것 같다.”그때 옆쪽에서 풀숲을 헤치며 아이 둘이 달려왔다. 열두어살 짜리와 열살쯤의 사내 아이. 둘 다 남루한 베옷을 짚으로 묶었고 큰 아이는 조잡하게 만든 활을 쥐었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달려 온 둘이 멈춰 서더니 죽은 노루를 보았다. 그리고는 계백을 올려다본다. 큰 아이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가득찼다. 그때 계백이 물었다.“산성 아랫마을에 사느냐?”“예, 나리.”큰 아이가 가쁜 숨을 참으며 대답했다.“아랫마을 곽신조의 아들 배준입니다.”아이의 맑은 눈을 내려다보던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저 노루를 가져가거라.”놀란 아이가 숨을 들이켰을 때 계백이 들고 있던 활을 아이 앞에 던졌다.“이 활로 궁술 연습을 해라. 화살도 주마.”
전택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깊은 밤, 자시(12시)가 지났을 무렵이다. 고향에서 친척 상(喪)을 당했다면서 엿새 동안 비번 허가를 받고 계백을 만난 것이다. 오늘이 엿새째, 신임 성주 죽성에게 신고까지 마치고 진궁에게 다시 숨어 들어왔다.“고화를 만났고 계백까지 만나 이야기를 했습니다.”전택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계백은 바다 건너 백제령 담로인 연남군 출신 무장으로 24세, 상처하고 혼자 삽니다. 의자왕이 즉위 후에 담로의 무장들을 많이 데려왔는데 계백도 그 중 하나입니다.”전택은 계백에 대해서도 알아본 것이다.“계백은 건장한 체격에 중후한 성품을 지닌 것 같았습니다. 고화를 당장 손님으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반역이야.”불쑥 진궁이 말했기 때문에 전택은 숨을 들이켰다. 굳어진 전택의 표정을 본 진궁이 빙그레 웃었다.“반역이 성공하면 임금이 된다네.”“성즉군왕이요, 패즉역적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나는 가야인으로 돌아가 반역을 하겠네. 그대는 어쩔 텐가?”“따르지요, 당에서도 무시를 받는 여왕의 졸개가 되지 않겠습니다.”진궁이 다시 웃었다.“나는 자식의 생사에 연연하는 부모로 죽겠어.”“같이 가십시다.”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결의(決意)다.남방방령 윤충이 계백과 마주 앉았을 때는 신시(오후 4시) 무렵이다. 계백이 방성(方城)인 고산성까지 호위 기마군 3기만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청 안에는 방좌 연신까지 셋 뿐이었는데 계백의 보고를 들은 윤충이 목소리를 낮췄다.“내막을 들으니 함정은 아닌 것 같다. 대야성이 내부에서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하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계백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삼현성보다 진궁을 이용하여 대야성을 공략하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그렇지.”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윤충이 눈을 가늘게 떴다.“이 기회를 삼현성 하나와 맞바꿀 수는 없지.”“삼현성에서 대야성까지는 1백리 정도이고 그 사이에 성이 4곳이 있습니다.”방좌 연신이 청 바닥에 펴놓은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모두 요지(要地)에 박혀 있어서 삼현성을 함락시킨다고 해도 대야성까지 간다면 병력과 시간 손실이 클 겁니다.”머리를 끄덕인 윤충이 계백을 보았다.“나솔의 의견을 듣자.”“삼현성은 놔두고 대야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입니다. 진궁을 앞세워 신라군으로 위장할 수도 있고 진궁에게 성문을 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그렇지.”윤충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대야성부터 떨어뜨리면 머리 잃은 뱀꼴이 되겠지.”“나솔의 방법이 적합합니다. 다만 은밀히 거행되어야지 잘못되면 망합니다.”“그럼 결정했네.”정색한 윤충이 계백을 보았다.“나솔이 추진하되 선봉군 4천을 응용하도록, 내가 1천을 더 증원시켜주겠네.”“예, 방령”“내가 대왕께 보고하도록 하지, 철저히 기밀을 지키도록 하고 나에게 수시로 보고하도록.”이제 대야성 공략의 첫 발이 내디뎌졌다.
백제가 세상의 중심이다.대왕 의자가 말고삐를 쥔 채 옆을 따르는 왕자 부여풍에게 말했다. 왕자 부여풍(豊)은 무왕 32년인 10여년 전에 왜국의 백제방(百濟方)에 보내졌다가 잠깐 귀국한 길이었다. 의자는 풍과 함께 도성 북쪽의 사냥터에 나와 있는 것이다.명심해라. 지난 수백 년간 백제는 왜국과의 교류에 공을 들였다. 이제 일심동체, 천왕가(天王家)에서부터 대신들까지 백제계가 되었다.풍이 잠자코 옆을 따른다. 한낮, 앞쪽 호위군이 몰아온 꿩 한 마리가 옆쪽으로 날아갔지만 의자는 놔두었다. 둘의 뒷쪽으로 고관, 장수들이 20여보 거리를 두고 따른다. 의자가 말을 이었다.대륙은 이제 전운(戰雲)으로 덮여지고 있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 당까지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머리를 든 풍은 의자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의자왕 3년, 3년 전에 죽은 무왕(武王)은 41년간이나 재위를 했다. 따라서 의자왕은 나이 40이 넘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부여풍은 선왕(先王)때 백제방의 장관이 되어 떠났으니 10여년 만의 귀국이다. 의자가 목소리를 낮췄다.곧 신라의 대야주를 정벌하여 신라 영토의 3할을 획득하고 고구려와 연합해서 당항성을 수복한 후에 당을 사면(四面)에서 포위, 멸망시킬 것이다.숨을 들이켠 풍을 향해 의자가 입술 끝만 올리고 웃었다.풍, 잘 들어라.예, 대왕.일본은 수백년 전부터 백제인과 깊은 교류를 맺었고 백제 문화를 받아들였다.그렇습니다, 대왕.1백년전 목협만치(木 滿致)가문이 왜에 들어가 소가만치(蘇賀滿智)로 이름을 바꾸고 왜국의 대신이 되고 왜왕의 외조부가 되더니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으냐?그렇다. 그래서 왜국의 중심 아스카에 백제방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백제방의 장관으로 백제 왕자가 집무하고 있는 것도 왜국 조정과 동체(同 )라는 증거다.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의자가 말을 이었다.대륙의 담로는 인도 근처의 흑치국(黑齒國)까지 뻗어있으며 우측은 대양에 막힌 일본국까지 대백제의 영향력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예, 대왕.네 책임이 막중하다.대왕, 일본국을 대백제의 동체로 만들겠습니다.수백년간 백제 문물의 영향을 받은 신민(臣民)들이다. 천왕도 우리 핏줄이 아니더냐? 소가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대신 대부분이 백제계다.당 정벌에도 군사를 낼 수가 있습니다.서둘 것 없다.그때서야 안장에 걸친 활을 잡으면서 의자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너는 내 뒤를 이어 대백제의 대왕이 될 신분이다. 멀리 보아라.예, 대왕.고구려에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이 나하고 뜻이 통한다. 그래서 대륙에 격변이 일어나는 것이다.의자왕 재위 2년째인 작년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영류왕 건무(建武)를 죽이고 영류왕 동생의 아들인 보장(寶臧)을 왕으로 삼았다. 영류가 당을 겁내어 수비에만 치중하고 저자세를 보인 것이 연개소문의 경멸을 산 것이다. 풍이 숨을 들이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격변의 시기인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을 맺었다.
“에그머니!”우덕이 비명을 질렀다. 놀란 외침이다.청으로 들어선 우덕이 계백 앞에 앉은 사내를 본 순간 자지러진 것이다.“오.”사내도 우덕을 보고는 짧게 신음했다.“나리.”우덕이 손에 쥐고 있던 쟁반을 겨우 떨어뜨리지 않고 마룻바닥에 놓더니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상인 행색을 했지만 삼현성 보군대장인 급벌찬 전택이었던 것이다. 계백은 둘을 바라만 보았고 전택이 입을 열었다.“아씨는 잘 계시냐?”“예? 예.”영문을 모르지만 대답부터 한 우덕이 부엌쪽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아씨! 아씨! 이리 와 보세요!”그러자 부엌에서 고화가 나왔고 마당에 있던 덕조는 이미 마루 끝에 붙어 서있다. 그러고 보니 마당 끝에 군관 서너명이 주춤거리며 모여서 있다. 청으로 다가온 고화가 역시 전택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나 우덕과는 달리 눈을 크게 뜨고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오, 고화, 고생이 많구나.”“급벌찬이 여기 웬일이세요?”고화가 겨우 물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서 있기가 힘이 드는지 한 손으로 기둥을 잡았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들어와 앉아라.”고화가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청에 올라 전택 옆쪽으로 앉았다. 우덕은 벽에 붙어 서있고 덕조는 마루끝에 자리잡았다. 마당의 군관들도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집안이 조용해졌다. 먼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전택이 계백에게 말했다.“이제 고화를 확인했으니 말씀 드리겠소. 삼현성을 넘겨 드리지요.”고화가 머리를 들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계백도 시선만 주었고 전택이 말을 이었다.“성주께서 말씀하셨소, 딸을 핑계 삼아 성을 넘기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왕국에 대한 충성과 의리 따위를 주절대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소행이라고 하셨소.”그때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믿겠다고 전해주시게.”“기다리고 있겠습니다.”두손을 청 바닥에 붙인 전택이 머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물었다.“고화 주종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지금 돌려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당연하지요.”전택의 시선이 옆에 앉은 고화를 스치고 지나갔다.“손님으로 대우해주시오, 성주.”“그러지.”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마루끝에 다가와선 덕조에게 말했다.“들었느냐?”“예?”“고화가 내 손님이다.”“예, 그것이…”“알았느냐?”“예.”“다른 곳에서 종을 둘 데려와서 고화 주종의 시중을 들도록 해라.”덕조가 숨만 쉬었기 때문에 계백이 다그쳤다.“알아들었어?”“예, 주인.”머리를 돌린 계백이 다시 전택을 보았다. 굳어진 얼굴이다. “대야주가 떨어지면 가야인이 주인이 되도록 도와주지.”그러자 전택이 대답했다.“가야를 바쳐 김유신 일족만 출세했지요.”
칠봉성으로 돌아간 계백이 다음날 아침 밥상을 받았을 때 옆에 앉아있던 고화가 말했다.“절 도성의 기방으로 넘기신다고 하셨는데 넘겨 주시지요.”마루끝에 앉아있던 덕조가 움직임을 멈췄다. 시선을 든 계백이 빙그레 웃더니 다시 밥을 떠 입에 넣었다. 고화가 말을 이었다.“부탁드립니다. 그것이 나리께도 이득이 되실 것입니다.”“저런 건방진.”마침내 덕조가 나섰다. 덕조가 고화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나무랐다.“종 주제에 넘기라 마라 하느냐? 그건 나리 마음이시다. 이년아.”그때 부엌에서 우덕이 나오더니 기둥 옆에 붙어섰다. 놀란듯 눈이 둥그레졌다. 이제 고화의 얼굴이 붉어졌고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잠깐 정적이 흐른 후에 계백이 말했다.“도성은 왕래하는 사람이 많고 첩자들도 많다. 네가 도성 기방에 가면 첩자들에게 이곳 칠봉성의 군사기밀을 털어 놓을 기회가 많아진다.”계백이 정색하고 고화를 보았다.“전쟁이 끝나면 도성이 아니라 바다건너 백제령 담로의 기방에라도 보내주마. 담로 기방에는 두배 값을 받고 팔수가 있을 테니까.”고화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말을 이었다. “들었느냐? 전쟁이라고 했다. 곧 북쪽에서 백제와 신라 대군이 전면전을 벌일 것이다. 네 동족인 가야출신 대장군 김유신이 지금 북상하고 있다.”상을 물린 계백이 덕조에게 말했다.“너도 들었으니 종들 단속을 잘해라. 도망쳐서 기밀을 누설하지 않도록 말이다.”그러자 덕조가 한숨을 쉬었다.“그래서 제가 이년들이 밥짓는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혹시나 밥에 독이나 타지 않을까 해서요.”덕조가 마당에다 침을 뱉었다.“저는 이년들이 침 뱉은 밥을 수없이 먹었을 것 같습니다.”계백이 등청을 하고 나서 부엌에 고화와 우덕이 마주보며 앉았다. 덕조는 마당에서 장작을 쪼개는 중이다. 우덕이 그늘진 얼굴로 묻는다.“아씨, 기방으로 가시고 싶다는 것이 진심이시오?”“그래, 난 저 인간만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곳에 가도 돼.”숨만 들이킨 우덕을 향해 고화가 말을 이었다.“저놈은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야. 나를 미끼로 함정을 파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넘어가실 분이냐?”마침내 고화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저놈이 날 데리고 있다는 편지를 읽고 나서 아버지는 나한테 답장을 쓰셨겠지. 그 답장 내용은 뻔하다. 내가 읽어보지 않아도 알겠어.”“.....”“그리고나서….”고화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아버지는 자결하셨을 것이다.”“....”“저놈한테 더이상 약점을 잡히지 않으시려고, 아마 지금쯤은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아이구, 나리.”갑자기 우덕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었다.“나리께서 아씨를 어떻게 키우셨다고…”그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덕조 목소리가 울렸다.“나리, 오십니까? 우덕아, 손님 오셨다. 청 치워 드려라.”
성주, 힘들 것 같소.전택이 말하고는 외면했다. 깊은 밤, 오늘도 전택이 술병을 차고 뒷문으로 숨어들어와 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 긴 숨을 뱉은 전택이 말을 이었다.대장군은 편지도 주지 않았소. 증거가 될까봐 그랬겠지. 나중에 보자는 건 어렵다는 뜻이지요.이 사람아, 왜 사람을 보냈어?진궁이 나무랐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대장군도 제 앞가림을 겨우 할 정도네. 김품석과 김춘추하고 내 일 때문에 갈등을 일으킬 수는 없어.억울하지 않습니까?전택이 눈을 부릅떴으므로 진궁은 외면했다. 오후에 전택은 김유신에게 심부름을 보냈던 부하의 전갈을 받은 것이다. 보기당의 대군을 거느리고 북상하던 대장군 김유신은 전택이 보낸 편지를 읽고 나서 곧 불에 태우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중에 보자면서 돌려보냈다고 했다.아무려나 같은 가야인으로 이럴 수가 있소? 김춘추한테 말 한마디 해주면 될 텐데.이봐, 급벌찬. 그만하게.개뼈다귀 같은 성주 놈은 지금도 술타령이요..김품석이 그놈이 나쁜 놈이지.이제 칼끝이 김품석에게 옮겨졌다.그놈도 개뼈다귀 아닙니까? 우리 가야인은 신라의 종이 되었소.술 취했나?난 이까짓 9품 벼슬은 안할랍니다.술에 취한 전택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진궁을 보았다.처자식도 고향에 있으니 옷 벗고 돌아갈거요..성주께서도 같이 가십시다. 아마 무장(武將)의 절반 이상이 따라 나올겁니다.죽었겠지.불쑥 진궁이 말하는 바람에 전택이 말을 멈추고 딸꾹질을 했다. 진궁이 흐려진 눈으로 전택을 보았다.내 편지를 보였다면 죽었을 거야.성주, 무슨 말씀이오?내가 죽으라고 쓴 편지니까.누구한테 편지를 쓰신 거요?이보게, 급벌찬.눈동자의 초점을 잡은 진궁이 전택을 보았다.내가 그날 밤 백제 장수 계백의 편지를 받았다네.숨을 죽인 전택에게 답장까지 써 준 이야기를 마친 진궁이 빙그레 웃었다.고화가 그 편지를 읽었다면 자결했을 거네.성주, 과연 그렇게 될까요?뭐가 말인가?계백이 제 종이 뻔히 자결할 줄 알면서 성주 편지를 보여주겠습니까?그 생각도 했어.성주가 계백하고 편지 왕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은 목숨이요.그대에게 밝혔지 않은가?저한테 목숨을 맡기셨다는 말씀이군요.어깨를 부풀린 전택이 빙그레 웃었다.성주, 제가 성주하고 몇 년 인연입니까?15년쯤 되었지?16년이요. 그동안 성주의 은덕을 많이 입었소.같은 가야인으로 서로 도왔을 뿐이지.제가 변복을 하고 백제 땅으로 들어가지요.술병을 든 전택이 병째로 남은 술을 두 모금 삼키더니 진궁을 보았다.계백을 만나겠습니다..먼저 계백의 종이 되어 있는 고화 아가씨가 살아있는가부터 확인을 해야겠지요..살아있다면 계백이 의지할만한 무장이니 털어놓겠습니다.뭘 말인가?진궁이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전택이 이만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김유신이 신라에 붙어 출신한 것처럼 우리는 백제에 붙어 이름을 높입시다. 가야인의 이름을 말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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