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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①

계백이 한산성주 겸 수군항 항장으로 임명된 것은 그로부터 열흘 후다. 도성에서 온 의자왕의 사자(使者)인 전내부 도사는 계백이 4품 덕솔(德率)로 승급했다는 어명을 전했다. 그날 저녁, 한산성의 청에는 수군한 지휘관들까지 모두 모였다. 계백의 승급과 항장 취임을 축하하는 주연이 열린 것이다. 모두 한마디씩 축하 인사를 끝냈을 때 수군항의 나솔 윤진이 술잔을 들고 말했다. “전(前) 항장 국창님께서 해적에게 당해 수중고혼이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소. 하지만.” 옆에 앉은 장덕 백용문이 거들었다. “나솔 백안과 한솔 목덕춘님도 함께 가셨으니 외롭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둘은 국창과 그 추종세력들이 계백에게 몰사당한 것을 아는 것이다. 그때 화청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어쨌든 한산성과 수군항 항장을 덕솔께서 겸임하게 되셨으니 이제는 수륙 합동작전으로 해적을 격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오.” “과연.” 윤진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저승에 계신 국창님도 반기실 것이오.” 계백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수군항의 지휘관이 10여명, 절반쯤은 기가 죽은 분위기다. 죽은 국창의 일파였던 자들이다. 그동안 그들이 안절부절한 상태로 수없이 회의를 했고 두 번이나 도성으로 밀사를 보냈지만 화청과 하도리 등 한산성의 장수들이 쳐놓은 그물에 다 걸렸다. 그래서 계백은 국창의 일파가 누군지 샅샅이 알게 되었다. 그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바다 건너 연남군의 기마대장 출신으로 본국에서 온 전함을 보면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모두 숨을 죽였고 계백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국경을 맞댄 당(唐)의 수군(水軍)은 대백제의 전함을 보면 아예 도망질을 한다고 들었는데 막상 본국의 실상을 보니 해적의 침략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니 놀랍다.” 계백의 시선이 국창의 일파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구나 수군항 항장까지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실종되다니 기가 막힌다.” 국창의 일당으로 도성의 왕비에게 밀사를 두 번이나 보낸 지휘관은 다섯명, 밀사를 잡아 밀서 내용을 보았더니 일당들은 국창을 계백이 살해해서 수장시킨 것으로 믿고 있었다. 지금 계백의 눈앞에 그 지휘관 다섯이 앉아있는 것이다. 밀서를 함께 읽은 화청과 윤진 등은 그들을 모두 죽이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 기회인 것이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대백제는 해상강국이다. 수백년 전부터 남방의 담로를 지나 인도, 페르시아까지 상선을 보내왔다. 그런데 해적이 본토를 제 집 드나들 듯 하도록 놔두다니.” 계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구나 도성의 대왕께서는 이 위기를 보고받지도 못하셨다. 이것은 수군항 지휘관의 반역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옳습니다.” 화청의 질그릇 깨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장도 내륙의 전선을 수년 간 돌아다녔지만 해적이 횡행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반역도의 짓입니다.” 이제 다섯 지휘관의 얼굴은 사색(死色)이 되었다. 청 안 분위기가 얼음 구덩이 안처럼 차가워졌고 살기가 덮였다. 그때 계백이 이 사이로 말했다. “수군항 지휘관 중에서 이 사실을 시인하는 자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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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31 19:40

[불멸의 백제] (104) 5장 대백제(大百濟) (20)

상인으로 변복을 한 계백이 도성에서 대좌평 성충과 마주 앉았을 때는 저녁 술시(8시) 무렵이다. 저택의 밀실에는 지난달 전내부(前內部) 좌평이 된 흥수와 동방방령 달솔 의직까지 넷이 둘러앉았다. 전내부는 내관(內官) 12부 중 선임으로 왕명의 출납을 전담하는 부서이며 성충은 외관(外官) 12부 중 선임인 사군부(司軍部) 장령으로 병관좌평이며 5좌평 중 좌장이다. 내외관(內外官) 각각 12부 중 수석부서의 장이 다모인 셈이다. 동방(東方)은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막강한 군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신라의 대야주는 남방군의 기습전으로 공취를 했지만 백제 주력군(主力軍)은 동방군(東方軍)이다. 계백이 국창의 밀사 양하를 죽인 것부터 어제 수군항 항장 국창 이하 추종 세력들을 수장(水葬)시킨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듣기만 하던 셋의 분위기는 무겁다. 성충이 다시 처음부터 진상을 말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계백이 왔다는 기별을 받자 성충이 둘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먼저 성충이 입을 열었다. 태왕비께서 살아 계시는 한 왕비의 행동을 저지시키기는 어렵소. 어찌 생각하시오? 그때 흥수가 계백에게 말했다.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라 있다. 한솔, 나이든 우리가 무기력해서 한솔한테 다 떠넘기는 것 같네. 아니올시다. 이제 대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왕(先王)시대에 해결해야 했어. 길게 숨을 뱉은 흥수가 성충을 보았다. 대좌평, 내가 대왕께 수군항 항장을 한산성주 계백이 겸임하도록 상주하겠소. 그러니 병관좌평께서 동의를 해주시면 대왕께서 선선히 받아들이실 것이오. 그렇지. 성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왕비 사주를 받는 8족 놈들도 입을 다물겠지. 그때 의직이 나섰다. 국창과 그 일당들이 실종된 것에 대해서 왕비 일파가 의심할 것이오. 아직도 수군항에 국창 세력이 남아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지. 머리를 끄덕인 성충이 계백을 보았다. 한솔, 그대의 공(功)으로 치면 나솔에서 한솔 일등급 승진은 부족했네. 나하고 전내부 장령이신 내신좌평이 그대를 덕솔로 승진시키려고 하네. 그러자 흥수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왕께선 두말하지 않으실거네. 역시 덕솔로 수군항 항장까지 겸임하는 것이 맞습니다. 의직도 거들었다. 수군항에서 국창의 실종 신고가 올테니 그때 우리가 상주하기로 하지. 흥수가 결론을 내었고 의직이 계백에게 다시 조언했다. 이보게, 한솔. 그동안 국창 일파를 면밀하게 탐문해놓게. 한산성이 소속된 서방의 방령 해재용도 지금까지 수군항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어. 해재용에 대해서도 잘 알아보게. 예, 방령. 계백이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갈수록 썩은 뿌리가 드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하룻밤 묵지도 않고 밤길을 달려 성으로 돌아오던 계백에게 수행한 하도리가 물었다. 나리, 전장(戰場)에는 언제 나갑니까? 무슨 말이냐? 계백이 말의 속력을 늦추면서 옆을 따르는 하도리를 보았다. 밤길, 두필의 말이 텅 빈 국도를 질주하는 중이다. 그때 하도리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차라리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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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30 20:38

[불멸의 백제] (103) 5장 대백제(大百濟) 19

아니, 저놈. 그때 막 전선(戰船)에 오른 군사를 본 국창이 눈을 크게 떴다. 체격이 커서 시선을 준 참이었다. 군사 복장에 장검을 찬 사내, 바로 한솔 계백 아닌가? 저놈이? 그때는 이미 계백이 국창의 다섯걸음 앞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널판지를 타고 오른 순시선의 군사는 10여명, 그때 계백이 허리에 찬 칼을 쑤욱 빼들면서 소리쳤다. 한산성주 계백이 역적 국창을 죽인다! 쳐라! 그순간 국창은 한걸음 물러서면서 허리의 칼을 빼들었지만 계백은 껑충 뛰어 두걸음 간격으로 다가왔다. 네 이놈! 놀랐지만 국창도 무장이다. 국창이 칼을 치켜든 순간 계백이 덮치듯이 달려오더니 장검을 옆으로 후려쳤다. 에익! 계백의 기합, 계백과 함께 내달려온 순시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휘둘렀다. 으악! 국창의 비명이 처음으로 전선 위에 울렸다. 왼쪽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베어진 국창이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배에는 비명과 고함소리로 뒤덮였다. 다 죽여라! 이것은 화청의 목소리다. 네 이놈! 하도리의 외침도 섞여졌다. 국창과 함께 홍도에서 주연을 즐기려던 무장들도 변변하게 대항도 하지 못하고 살육되었다. 국창이 계백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자 혼이 나갔기 때문이다. 전선에 오른 10여명의 군사는 계백의 직속 무장들이 변장을 한 것이다. 잠시후에 전선에 탄 국창 일행은 물론 병사와 수부까지 모두 살해되었다. 전멸이다. 불을 질러라! 이제는 화청이 지시했다. 수군항 항장 국창과 수하 장수들은 홍도에 놀러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실종된 것이다. 소리쳤던 화청이 맑은 하늘을 잠깐 보더니 덧붙였다. 해적을 만났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한식경쯤이 지났을 때 불에 타오르던 전선이 갑자기 선수가 물속으로 박히더니 곧 소용돌이와 함께 바다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후에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다시 바다가 잔잔해졌을 때 바다위에는 판자 조각이 몇개 흩어져 있을 뿐 전함은 사라졌다. 수부들에게 입막음을 단단히 시켰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믿을만한 놈들입니다. 부상이 낫지 않아서 순시선에 남아있었던 나솔 육기천이 계백에게 말했다. 순시선은 뱃머리를 돌려 육지로 다가가는 중이다. 수군항 항장과 그 측근 무장들이 몰사했으니 왕비측에서 당황할 것입니다. 화청이 주름진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다시 측근들로 수군항 지휘를 맡기기 전에 손을 써야 할 텐데요. 이번에는 내가 대좌평을 만나고 와야겠어. 계백이 화청과 육기천, 하도리 등을 둘러 보았다. 3국의 정세가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대백제가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모반세력 때문에 내분이 일어난다면 큰일이네. 큰일이라고 표현했지만 왕국은 외부의 침공보다 내부의 모반 때문에 멸망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내부의 분란이 외척의 침공을 불러오기도 한다. 화청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한솔께서 다녀 오시는게 낫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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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9 20:33

[불멸의 백제] (102) 5장 대백제(大百濟) 18

“바다가 잔잔해서 마치 거울 위를 지나는 것 같소.” 나솔 백안이 국창에게 말했다. “ 은솔께서 곧 달솔이 되실테니 오늘은 미리 승급주를 마시도록 하지요.” “이 사람아, 내가 머리위에 혹이 하나 붙은 참인데 무슨 승급주인가? 홧술이나 마시자구.” 국창이 투덜거렸을 때 한솔 목덕춘이 나섰다. “그 놈이 윤충, 성충 형제의 위세를 믿고 날뛰는 것이오. 대왕께서 우리 대성(大性)가문을 아예 몰사시킬 작정으로 뜨내기 가문 놈들을 중용하기 때문이오.” 국창, 백안, 목덕춘 모두가 백제의 대성8족(大性八族)인 것이다. 무왕과 의자왕 시절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면서 한성, 웅진성에 기반을 둔 대성8족이 쇠퇴되었고 불만이 쌓여졌다. 그때 국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왕비마마밖에 없어. 왕비마마는 여왕이 되시고도 남아.” “그렇습니다.” 백안이 맞장구를 쳤을 때 목덕춘이 앞쪽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순시선이 오고 있소.”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백제 순시선이다. 순시선은 돛 1개에 노꾼이 좌우로 12명씩 붙어서 속도가 빠르다. 연안 순시선으로 대해(大海)에는 나가지 못하지만 빠른 속력을 이용하여 연안 순찰과 연락선 역할을 맡(?)는다. “홍도에서 오는 길인가?” 백안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홍도 방향에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시선은 높이가 낮고 앞이 뾰족해서 속력을 내면 앞이 들린다. 이제 순시선과의 거리가 5백보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선장인 무독이 소리쳐 보고했다. 이쪽은 전선(戰船)이다. 대선(大船)이어서 순시선보다 높이도 높고 길이도 2배는 된다. 돛은 2개지만 노가 없어서 바람을 타야 속력을 낸다. 전선에는 수부(水夫)15명에 군사 50명이 탈 수 있는데 오늘은 국창과 무장 10여명, 군사 20여명이 탔다. 놀러가는 길이어서 배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실려져 있다. 그때 선장 옆에 선 키잡이 수부가 다시 소리쳤다. “순시선에 10여명이 타고 있습니다!” 이제 거리는 3백보로 좁혀졌다. 양쪽이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국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선장에게 소리쳐 물었다. “깃발 신호를 해라!” “예, 항장.” 대답한 선장이 곧 수부에게 지시해서 깃발 신호로 물었다. “이곳은 사령선이다. 무슨 일이냐?” 깃발이 색깔별로 흔들리면서 묻자 곧 순시선에서 깃발 대답이 왔다. “급히 보고할 것이 있다!” “해적인가?” 이쪽에서 묻자 깃발 대답이 왔다. “그렇다.” “이런.” 깃발 신호를 읽은 국창이 입맛을 다셨을 때 순시선과의 거리가 1백보가 되었다. 국창이 지시했다. “백에서 널판지를 내려라.” “예, 항장.” 널판지를 순시선에 내려서 직접 보고를 듣겠다는 말이다. “해적을 발견했는가 봅니다.” 목덕춘이 말했을 때 곧 순시선이 전선 옆으로 붙더니 널판지를 붙잡고 고정시켰다. 그러더니 순시선에 탄 군사들이 널판지를 타고 전선으로 건너온다. 이쪽 전선의 군사들이 널판지를 잡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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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8 19:39

[불멸의 백제] (101) 5장 대백제(大百濟) 17

밀서를 읽고 난 성충이 앞에 앉은 하도리를 보았다. 사비도성의 남부 전항에 위치한 성충의 저택 안이다. 오후 술시(8시) 무렵, 하도리는 한산성에서 말을 달려 한나절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갑옷은 먼지로 뒤덮였고 얼굴은 땀과 먼지가 뒤범벅이 되어있다. 성충의 손에 쥔 밀서는 바로 문독 양하가 왕비에게 전하려던 국창의 밀서다. “큰일이다.” 성충이 한숨과 함께 말을 잇는다. “한솔은 이 밀서만 전하라고 하더냐?” “예, 대감.” 하도리가 똑바로 성충을 보았다. “대감께서 알아서 판단하실 것이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 이 밀서를 가져가던 놈, 문독 양하는 죽였느냐?” “예, 죽여서 묻고 말을 소인이 끌고 오다가 빈 말로 버렸습니다.” “잘했다.” “그럼 소인은 돌아갑니다.” 하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자 놀란 성충이 말렸다. “이 시간에 돌아가? 3백리 길을 달려왔지 않느냐?” “말이나 바꿔줍시오.” “그러지. 그럼 내가 한솔에게 답장을 쓸 동안 좀 먹고 쉬도록 해라.” 성충도 서둘러 일어섰다. 하도리가 돌아왔을 때는 다음날 오후 신시(4시) 무렵이었으니 만 하루 만에 600여리를 주파한 강행군이다. “나리, 대감의 답신을 가져왔소.” 성안의 밀실에서 만난 하도리가 품에서 밀서를 꺼내 내밀었다. 목소리는 씩씩했지만 몸이 늘어져서 눈꺼풀이 감기는 중이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장하다. 문독.” 하도리를 칭찬한 계백이 성충의 밀서를 펴 읽는다. “한솔 보게. 역적의 밀서를 읽고 통분한 심정을 가누기 힘드네. 그러나 대사(大事)를 경솔히 처리할 수는 없는 법, 국충과 내 휘하의 병관부 달솔 진재덕, 그리고 왕비까지 연루된 사건인 바 신중하게 처리해야 될 것이네. 그래서 먼저 한솔이 국충과 그 일당을 제거해주기 바라네. 방법은 한솔에게 맡기겠네. 내가 다시 연락을 할 것이나 매사 신중하게 처리해주게.” 이것이 성충의 답신이다. 머리를 든 계백이 하도리에게 말했다. “너는 쉬어라. 큰일을 했다.” 계백의 표정은 어둡다. 그날 밤 계백의 처소에는 나솔 화청과 육기천, 수군항에서 불러내온 윤진과 백용문까지 심복 무장들이 다 모였다. 계백이 먼저 자신이 왕비에게 가는 밀사 양화를 죽인 것부터 말하고 성충의 밀서를 꺼내 모두 읽도록 했다. 그동안 방안은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이윽고 모두 읽기를 마쳤을 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국창을 없애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 국창은 왕비한테 밀사로 보낸 양하가 올 때가 되었는데, 하고 기다리는 중일거요.” “그렇습니다.” 나솔 윤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양하가 돌아오지 않으면 의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 오전에 국창이 전함을 타고 홍도에 순찰을 갑니다.” 장덕 백용문이 말했다. “그 전함에는 국창의 심복 무장들이 다 타고 따르지요. 홍도 수군기지에서 조련을 핑계삼아 놀다가 오는 것이지요.” 홍도는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섬으로 수군 초소가 있다. 풍광이 좋고 가까워서 놀기가 좋은 섬이다. 계백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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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7 18:43

[불멸의 백제] (100) 5장 대백제(大百濟) 16

“저기 옵니다.” 하도리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 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마인이 보였다. 가죽 갑옷 위에 붙인 쇠장식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저렇게 달리는 기마군은 대개 전령이다. 거리는 5백보 정도. 말이 질주하는 터라 금방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잡아라.” 계백이 말하자 하도리가 말에 박차를 넣고는 언덕에서 달려 내려갔다. 이곳은 국도변의 언덕. 숲에 가려져 있어서 달려오는 기마인은 보지 못한 것 같다. 하도리가 달려 내려갔을 때에야 기마인은 말고삐를 채어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국도는 수군항에서 도성으로 통하는 외길이다. 계백도 말을 속보로 달려 국도로 내려갔다. “멈춰라!” 하도리의 목소리가 황야를 울렸다. 수군항에서 30리쯤 떨어진 국도에는 오가는 통행인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가 황무지여서 인적도 없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터라 기마인은 말을 세웠다. 고삐를 세게 당겨서 화가 난 말이 앞다리를 들고 뒷다리만으로 섰다가 내려왔다. 기마인은 갑옷에 청색 띠를 둘렀으니 12품 문독에서 16품 극우까지의 하급관리다. 그때 기마인이 소리쳤다. “누구냐!” 앞에 선 하도리도 청색 띠를 맨 무관인 것이다.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나는 문독 양하다! 수군항에서 전령으로 도성에 가는 길을 막느냐!” “개소리.” 하도리가 짧게 말하고는 허리에 찬 장검을 쓰윽 빼들었다. 칼날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말에서 내려!” “무엇이!” 사내가 말을 옆으로 몰면서 허리의 장검을 빼내려는 순간이다. 말에 박차를 넣은 하도리가 덮치듯이 사내에게 다가가 칼을 후려쳤다. “으악!”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면서 어깨를 맞은 사내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빈 말이 껑충거리면서 둘레를 돌았을 때 계백이 다가왔다. 그때 말에서 뛰어내린 하도리가 땅바닥에 엎어진 사내의 등판을 발로 눌렀다. “이놈, 품에 든 밀서를 내놓아라.” 사내는 칼등으로 어깨를 맞았기 때문에 어깨뼈가 부서졌을 뿐이다. “뭐, 뭐라고?” 사내가 되물었지만 얼굴은 고통과 공포감으로 일그러져 있다. 잠시 후에 계백이 사내의 품속에 넣어져 있던 은솔 국창의 밀서를 읽는다. 국창이 왕비 교지에게 보내는 밀서다. “삼가 왕비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신(臣) 국창이 마마께 급한 전갈을 드릴 일이 있어서 문독 양하를 보냅니다. 다름 아니오라 이번에 한산성주로 부임한 한솔 계백이 수군항에 찾아와 폭언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청에 모인 장수들이 다 듣고 보았습니다. 그자는 제가 왕비마마의 수족이며 왕비마마는 신라의 첩자라고 공공연하게 소리쳤습니다. 시급히 조치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마마께 말씀 올립니다. 계백은 이번에 대야성 탈취에 1등공이 있다면서 기고만장하여 안하무인으로 행동합니다. 조처하여 주시옵소서. 서방수군항 항장 은솔 국창 올림.” 밀서를 다 읽은 계백이 하도리를 보았다. 하도리는 문독 양하를 나무 밑에 묶어놓고 있다가 계백의 시선을 받았다. 계백이 턱으로 양하를 가리켰다. “저놈은 죽여서 묻고 말은 멀리 끌고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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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4 18:26

[불멸의 백제] (99) 5장 대백제(大百濟) ⑮

“국창은 왕비파입니다.” 돌아오는 계백에게 다가온 육기천이 말했다. 육기천의 얼굴은 지금도 상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지요. 왕비파는 국창뿐만이 아니라 그 밑의 한솔, 나솔도 있고 내부(內部) 12부, 외부(外部) 12부에 골고루 박혀 있습니다.” “허어.” 계백이 탄식하고 나서 말했다. “난 칠봉성주를 맡기 전에는 대륙의 담로 연남군에 있었소. 본국 사정을 요즘에야 알게 되는구려.” “대좌평 성충님이 대왕께 간언을 드리고 있지만 듣지 않으시오.” 육기천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지금은 국력이 외부로 뻗어나가는 상황이라 왕비파가 가만있지만 기회만 오면 반역을 할 것이오.” 계백의 시선을 받은 육기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솔께서 왕비파에게 처음 칼을 들이대신 것이오. 이제 곧 왕비에게 오늘 소동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날 밤 한산성 안 계백의 침소 옆 마룻방에 두 사내가 계백과 마주보고 앉아있다. 둘 다 상민 차림이었지만 옆에 장검을 내려놓았으니 변복한 무장(武將)이다. 수군항의 무장 둘이 찾아온 것이다. 하나는 나솔 윤건이며 하나는 장덕 백용문이다. 윤건이 입을 열었다. “한솔, 지금까지 항장은 왕비의 위세를 업고 안하무인이었소. 서방 방령이 오셨을 때 마중도 나가지 않았었는데 오늘 같은 수모는 처음 당했을 것이오.” 둘 다 30대 중반의 건장한 체격이었는데 백용문이 말을 받았다. “한솔이 가시고 나서 심복인 문독 하나를 불러 수군거리더니 내일 일찍 도성으로 보내려는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왕비에게 사정을 알리려는 것이지요.” “무슨 사정 말이오?” 불쑥 계백이 묻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윤건이 대답했다. “지금까지 수군항의 수군(水軍)과 전선(戰船)은 전력이 약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소. 그런데 지난 10여년 사이에 태왕비와 왕비가 수군 쪽에 자기 사람들을 심어서 어느덧 왕비의 전력이 되었소.” “왕비의 전력(戰力)이라고 했소?” 쓴웃음을 띄운 계백이 물었지만 둘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본국에 수군항이 서방과 남방에 각각 1곳씩 2곳이 있는데 두 곳 항장이 모두 왕비와 통하고 있소.” 윤건이 말했다. “병관좌평 휘하의 병관부(兵官部) 달솔 진재덕이 수군(水軍)을 통제합니다. 그 진재덕이 왕비의 심복이오.” “그것을 병관좌평이 압니까?” 계백이 묻자 둘이 머리를 끄덕였다. “압니다.” “왕비께서 수군을 장악하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백제는 해상강국이었습니다.” 윤건이 말을 이었다. “왕비는 수군이 약한 신라에 백제 수군의 전력과 전선을 넘기려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대왕께서도 상좌평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수군항의 장수들이 이렇게 갈라져 있을 줄은 몰랐소.” 계백이 굳어진 얼굴로 두 무장을 보았다. “나는 해적을 퇴치하려고 한산성주로 부임한 사람이오. 수군항의 수군 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둘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내가 실제로 국창의 목을 벨지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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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3 19:49

[불멸의 백제] (98) 5장 대백제(大百濟) ⑭

“그대가 한산성주로 온 한솔인가?” 항장(港將) 국창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긴 얼굴, 눈꼬리가 솟은 눈이 번들거렸고 엷은 입술은 야무지게 닫쳐졌다. 국창은 은솔(恩率)이니 한솔인 계백보다 2개 등급이 높다. 국창 좌우로 장수들이 서 있었는데 한솔, 나솔이 네 명이나 된다. 계백이 청 위에 앉은 국창을 올려다보면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항장 은솔님이시오?” “보면 모르는가?” 국창이 꾸짖듯이 말하자 계백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백제국 대왕께서 앉아계신 줄 알았소.” “무엇이?” “내가 도성에서 대왕을 뵙고 왔지만 은솔께서는 대왕보다 더 직위가 높으신 것 같소. 황제폐하 모습이오.” “무엇이?” 국창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왕보다 더 높게 보인다면 구설이 두려워진다. “나를 모함하는가?” 국창이 버럭 소리쳤을 때 계백이 다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목청을 돋워 말했다. “지금 황제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대왕께서도 단 위에 앉기를 거북해 하시는데 은솔이 계단 위의 단에 앉아 한솔급 성주를 호통 쳐 부르다니, 이곳이 역모를 꾸미는 곳으로 보이오.” “무엇이라고? 역모?” “대왕을 능멸하지 않고서야 이런 행태를 부릴 수가 없소. 은솔이 단 위에 앉다니.” 그때 계백이 허리에 찬 장검을 쑤욱 빼들었다. “내가 은솔을 베어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대왕께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는 것이 낫겠소.” “무, 무엇이!” 했지만 국창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졌다. 둘러선 나솔, 한솔급 장수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국창의 역성을 들면 역적의 동조 세력으로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계백의 뒤쪽에서 한꺼번에 칼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섬뜩한 쇳소리다. 계백과 함께 온 화청, 곽성, 한쪽 팔을 못 쓰는 육기천, 그리고 하도리까지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자, 은솔 국창! 네가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라!” 칼로 단 위의 창을 겨눈 계백이 소리쳤다. 기마군 대장으로 단련된 목청이다. 청이 울렸고 마당까지 퍼졌다. “바로 대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 내 이름은 들었을테니 그쯤은 일도 아니다!” “이, 이보게, 한솔…….” “네 이놈! 대왕을 능멸하고 이곳에서 황제가 될 모의를 꾸미고 있었느냐!” “내, 내가 언제…….” “내륙의 성(城)이 침탈을 당하는데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네가 황제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냐!” “한솔, 다, 당치도 않는…….” “네 이놈! 네 목을 베고 내가 도성으로 가겠다!” 그때 구르듯이 단을 내려온 국창이 계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솔! 진정하시게! 오해가 있네, 사람 좀 살리시게!” 계백이 칼등을 국창의 어깨에 대었다. 그 순간 몸서리를 친 국창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치켜뜬 눈의 눈동자는 죽은 생선의 눈 같다. 계백이 머리를 돌려 둘러선 수군창의 무장들을 보았다. “그대들도 은솔의 말에 동감하는가?” 계백이 소리쳐 물었으나 선뜻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국창에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그때 계백이 칼을 내려 칼집에 넣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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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2 20:52

[불멸의 백제] (97) 5장 대백제(大百濟) ⑬

“적은 피하지 말고 가깝게 두는 것이 낫다고 했소.” 말에 오르면서 계백이 말했다. “내 선친께서 남기신 유언이오.” “그렇습니까?” 화청이 말을 몰아 계백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연기신과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태왕비의 명을 받고 현동성에 가서 신라쪽 조상들께 제사를 지낸다고 했소.” “태왕비가 신라공주였다지요?” 화청은 수나라 출신이라 선화공주는 겪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듣던 문독 곽성이 거들었다. “선왕(先王) 때부터 태왕비는 신라를 싸고 돌았지요. 태왕비 주변에 첩자가 깔려있다는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지. 더욱이 왕비가 그렇다면야….” 화청이 말을 이으려다가 계백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계백도 잠자코 말을 몰았다. 허실이 없는 인간은 없다. 왕국도 마찬가지다. 신라는 골품 귀족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고 내전(內戰)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며 고구려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전권(全權)을 쥔 것 같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사후(死後)가 불안한 상황이다. 그리고 백제는? 왕실 내부에서 불씨가 키워지는가? 한산성,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진 석성(石城)이나 허술하다. 전(前)임지였던 칠봉성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규모는 2배 이상이나 커서 성 안의 주민수가 1만이 넘었다. 모두 해적을 피해 성안으로 들어온 피난민이나 같다. 성의 청에 앉은 계백에게 이번에 사비도성으로 전임이 된 성주대리 육기천이 보고했다. “군병은 1천2백5십명, 그중 기마군이 4백3십입니다.” 육기천은 지난번 해적의 살을 맞아 한쪽 팔을 목에 걸고 있다. 무관으로 나솔이나 체격이 왜소했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당이 대륙을 평정한 후에 연안의 해적 세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당군에 쫓긴 각 세력이 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세력이 강한가?” 계백이 묻자 무관 하나가 대답했다. “진헌창이 이끄는 남진(南辰)의 해적이 수만명입니다. 한번 침공해올 때마다 수십척씩 무리를 지어 오는데 보통 2천명 가까운 군사가 상륙합니다.” 그렇다면 해적이 아니라 반란군이나 같다. 계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세히 말하라.” “예, 이쪽 서방(西方)의 해군력은 무역선 보호에 맞도록 전선(戰船)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적선은 육지에서 노략질을 목표로 삼은 대형 상륙선입니다. 배가 크고 수십명씩 노잡이들이 있는데다 견고합니다. 우리 전선이 따라 잡아도 그쪽은 궁수가 백여명씩이 있어서 가깝게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수군항까지는 얼마나 되나?” “30리 거리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화청을 보았다. “내일은 수군항에 가봐야겠소.” “그렇습니다. 육상군과 수군이 서로 연합해야 해적을 막습니다.” 그때 육기천이 말했다. “수군항의 항장(港將) 국창님은 병관부달솔 진재덕님의 지시만 받습니다.” “무슨 말이오?” 화청이 짜증난 기색으로 물었더니 육기천은 외면한 채 대답했다. “국창님은 내륙의 성이나 주민들은 안중에도 없소. 우리하고 한번도 연합전선을 편적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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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1 18:06

[불멸의 백제] (96) 5장 대백제(大百濟) ⑫

주막으로 들어선 계백이 안쪽 평상에 앉아있는 솔품(率品) 관리를 보았다. 자색 관복을 입었기 때문에 금방 표시가 난다. 계백이 다가가자 관리가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한솔 계백공 아니시오?” “누구십니까?” “나는 덕솔 연기신이오.” “아아.” 계백이 다가가 앞쪽 자리에 앉아 머리를 숙였다. “저를 알아보십니까?” “먼발치에서 뵈었소.” “그런데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이곳은 사비도성 남문에서 20리 떨어진 주막이다. 이곳 주막 앞에서 대로(大路)가 동서남북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길손들이 모이는 것이다. “나는 현동성으로 태왕비 마마의 심부름을 가오.” “태왕비 마마의 심부름을 가십니까?” “예, 그곳에 태왕비 마마의 제단이 있소. 그 제단에서 신라에 계신 조상께 제를 지내는 것이요.” “아아, 과연.” “내가 계속해서 태왕비 마마 대신으로 그곳에 다녀오지요.” “수고 많으십니다.” “그런데 한산성주로 가신다니 고생이 많으시겠소.” “아닙니다.” 그때 주막 안으로 화청이 들어섰다. 그 뒤를 문독 곽성이 따른다. “여기 계셨군요.” 떠들석한 목소리로 말한 화청이 다가서자 계백이 물었다. “아니, 나솔 여긴 왠일이오?” “여기 계실 것 같아서 들렸습니다.” 화청이 수염 투성이의 얼굴을 펴고 웃었다. “제가 한산성의 부성주로 임명되었소.” “아니, 도성의 동부(東部)수비대장으로 임명되지 않았소?” “제가 병관 좌평께 부탁을 했더니 바로 조치를 해주셨소.” 그때 뒤에 서있던 곽성이 다가서서 말했다. “소인도 점구부에서 빼주셨소. 한산성주 휘하의 문독이요.” “이런.” 계백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내가 덕(德)이 모자란데도 동행하여 주는구려.” “우리는 기마 정찰대에서부터 생사(生死)를 함께한 사이 아닙니까?” 화청이 웃음띤 얼굴로 말하더니 연기신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리시지요.” 둘이 주막을 나갔을 때 연기신이 계백에게 말했다. “나는 문관(文官)이어서 무관(武官)들의 이런 우정을 보면 부럽습니다.” “우정은 무관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덕솔.” 계백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로 뜻이 맞으면 문무관이 갈릴 필요가 있습니까?” “옳으신 말씀이오.” 연기신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기회가 오면 한솔을 자주 찾아 뵙도록 하지요. 한솔같은 영웅을 알게 된 것이 행운이오.” 연기신과 헤어진 계백이 주막 밖으로 나왔을때 기다리고 있다 화청이 대뜸 말했다. “한솔, 그자가 연기신 아닙니까? 주막 하인의 말을 듣고 한솔을 막 모셔 오려던 참이었소.” 화청이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왜 첩자라는 소문이 난 놈과 상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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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0 20:03

[불멸의 백제] (95) 5장 대백제(大百濟) ⑪

“나리, 이곳에서 한산성까지는 3백리길이라고 들었습니다.” 밤, 계백의 품에 안긴 고화가 더운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말을 달리면 하루 길이지만 걸어서는 이틀이 걸린다고 하네요.” “한산성은 성주 식구가 살 곳이 못되오.” 계백이 고화의 허리를 당겨 안고는 귀에 입술을 붙였다. “내가 가끔 말을 달려 도성으로 올테니까 집이나 잘 가꾸시오.” “나리, 소문을 들었습니다.” 고화가 계백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었다. 불을 끈 방안은 어두웠지만 고화의 흰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슨 소문?” “왕비마마가 신라에 첩자를 자주 보낸다고 합니다.” “저런.” 혀를 찬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신라 첩자가 퍼뜨린 소문 같구만.” “종이 거리에서 듣고 와서 우덕한테 이야기를 해줬답니다.” “왕비마마를 모함하면 대역죄가 될 텐데 큰일 날 소리들을 하는군.” “왕비마마의 측근인 덕솔 연 아무개란 분이 신라에 들락인다는군요.” “허어.” 계백이 고화의 허리를 더 당겨 안으면서 말을 막듯이 입을 맞췄다. “도성에 온지 닷새도 안되었는데 벌써 온갖 소문을 듣고 오는군.” 고화가 가쁜 숨을 뱉으면서 계백의 어깨를 감아 안는다. 다음날 오전, 임지로 떠나기 전에 대왕을 뵈러갔던 계백을 병관좌평 성충이 불렀다. 왕궁의 정청 안이다. “이보게 한솔, 대왕께서는 오늘 조례에 나오시지 않네.” 다가온 성충이 말을 이었다. “나를 보고가면 되네.” “예, 대감.” 성충을 따라 전내부의 대좌평 청으로 들어선 계백이 자리에 앉았다. 청 안에는 성충과 계백 뿐이다. 마주앉은 성충이 청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내가 이 청을 곧 떠날거네, 한솔.” “무슨 말씀입니까?” “잘되면 귀양이고 못되면 참형을 당할지도 모르네.” “대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계백이 눈을 치켜떴다. “대감은 대백제의 기둥이십니다. 대왕께서 그 기둥을 버리시겠습니까?” “내가 왜 기둥인가?” “대감은 충신이십니다. 제가 바다 건너 담로에 있을 때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선대(先代) 무왕께서 계실 때하고는 다르네, 한솔.” 정색한 성충이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왕비의 전횡이 심해졌어. 이것은 태왕비께서 뒤에서 사주하시는데다 지금까지 다져놓은 반역 기반이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야.” 숨을 죽인 계백에게 성충이 말을 이었다. “선왕(先王)께서 나한테 유언을 하셨네. 왕비 교지를 조심하라고. 그런데 내가 그 유연을 어찌 대왕께 전해드린단 말인가?” 성충의 눈이 흐려졌다. “역부족이야. 내가 여러 번 대왕께 말씀드렸지만 대왕은 믿지를 않으시네.” “대감, 진실입니까?” “그래, 왕비 교지는 신라 첩자에, 태왕비 또한 마찬가지, 대백제는 안에서 망하게 될지 모르네.” “대감,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대에게 이 말을 전하는 것이네. 그대가 대백제의 기둥이 될 재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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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7 19:57

[불멸의 백제] (94) 5장 대백제(大百濟) ⑩

왕비 교지(僑智)가 들어서자 덕솔 연기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제각기 외면했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다. 내궁(內宮)의 별각은 지금은 태왕비(太王妃)가 되어있는 의자왕의 모친 선화공주가 제사를 지내는 장소여서 대왕(大王)도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다. 연기신의 앞에 앉은 교지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별각은 텅 비었다. 안쪽에 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신라의 진평왕이다. 태왕비 선화공주의 부친이며 지금 신라 선덕여왕의 부친이기도 하다. 초상 밑쪽의 향이 타면서 은근한 향내가 맡아졌다. 이윽고 왕비 교지가 입을 열었다. “성충이 이제는 심중을 굳힌 것 같다. 갈수록 심하게 대왕을 압박하는구나.” “제가 김춘추 공의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누가 보았단 말입니까?” “신라에 심어놓은 첩자겠지.” “그 첩자가 누군지를 밝히지 못하지 않습니까?” 연기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흰 얼굴에 염소수염을 길렀고 풍채가 좋다. 37세의 대성8족 중 하나인 연씨 일족이다. 부친 연대수는 바다 건너 백제령 담로의 태수를 지냈으며 조부 또한 좌평을 지낸 명문(名門)이다. 그때 교지가 지그시 연기신을 보았다. “덕솔, 네가 한번 더 김공께 다녀와야겠다.” “지금은 위험합니다. 마마.” 연기신이 굳어진 얼굴로 머리까지 저었다. “성충이 보낸 밀정들이 제 주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성충의 기질로 보아서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마마.” “넌 다음달에 3품 은솔이 된다.” “제, 제가 말입니까?” 연기신이 눈을 크게 떴다. 결코 반기는 얼굴이 아니다. “마마, 그러면 더욱 의심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공(功)이 없는 데다 더욱이 신라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터인데.” “누가? 성충이?” 교지가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성충은 대왕을 능멸한 죄로 곧 귀양을 가게 될 것이다.” “귀, 귀양을 말씀입니까?” “어제 궁성의 청에서 일어난 사건을 듣지 못했단 말이냐?” “계백의 친위기마군 대장 직임을 바꿨다고만 들었습니다. 성충이 반대를 해서요.” “대왕을 능멸했다.” 교지가 차갑게 말했다. “넌 조회에 참석하지 않아서 자세히 모른다.” 그렇다면 왕비는 조례에 참석한 또다른 고관으로부터 내막을 들었다는 뜻이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연기신이 교지를 보았다. 왕비 교지는 신라 선화공주이며 선군(先君)인 무왕(武王)의 왕비가 데려온 여자다. 선화공주는 교지를 딸처럼 애지중지 키우다가 태자(太子)인 의자와 결혼시켰는데 무왕도 반대하지 않았다. 자신도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처지인 것이다. 교지는 선화공주의 친척인 신라 왕족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때 교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넌 동방(東方)의 현동성에 태왕비(太王妃)의 심부름을 가는 것이다. “아, 예.” “태왕비의 심부름은 대왕도 막을 수가 없지 않겠느냐?” “당연하지요.” 더구나 성충까지 귀양을 간다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교지가 말을 이었다. “계백이 연개소문한테서 받은 밀서 내용은 다 베껴놓았다. 그리고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도 내가 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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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6 21:13

[불멸의 백제] (93) 5장 대백제(大百濟) ⑨

“백제가 망한다면 안에서부터 망하게 될 것이야.” 성충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옆에서 걷던 동생 윤충이 들었다. 동방 방령 윤충은 형처럼 직선적인 성품이 아니다. “이것 보시오, 형님. 그런 말은 반역죄에 해당되오.” 의직, 흥수와 헤어져 둘은 왕궁의 마당을 걷고 있다. 지나던 관리들이 둘을 향해 절을 했다. 성충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나 혼자만이라도 이렇게 떠들 것이야. 동생, 너는 지금처럼 대놓고 나를 비판해서 대왕의 권위를 세우거라.” “형님, 왕비마마를 오해하고 계신 건 아니오?” “내가 병관좌평이다. 첩자 2백여 명을 휘하에 두고 있단 말이다.” 다시 성충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걸음을 멈춘 성충이 몸을 틀어 윤충을 보았다. 둘은 왕궁의 넓은 마당에서 마주보고 섰다. 성충이 말을 이었다. “신라 도성에 있는 내 첩자가 연기신이 김춘추를 만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어. 김춘추를 말이야.” “그럴 리가….” 놀란 윤충의 얼굴이 굳어졌다. “형님, 그 첩자를 믿을 만 하오?” “대왕도 그러시더군.” 성충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 첩자가 누구냐? 이름을 대라고 하시더란 말야.” “그거야…” “관직에 있는 자야. 처자식이 이곳 도성에 살고, 목숨을 내놓고 적의 도성에서 위장 신분으로 지내는 자야. 그자 이름을 밝히면 왕비가 가만 두겠는가?” “……” “대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대왕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시더군.” “……” “왕비가 요물이야. 대왕은 안의 관리를 못하시네. 백제는…” “형님, 그만 하시오.” 말을 자른 윤충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다고 계백에게 해적소탕 임무를 맡겨 벽지로 보내는 건 너무하신 것 아니오? 왜 계백에게 화를 푸시오?” “내가 곧 계백을 불러 이야기를 해줄 것이네.” “어, 어떤 이야기 말이오?” “모두 다.” “이것 보시오. 계백한테 대왕 험담을 하실 참이오?” “계백도 알아야 해. 대백제의 장래를 이끌어갈 재목이니까 실상을 알아야 되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야.” “형님.” “왕비 교지가 누구냐? 선화공주가 데려온 여자 아니냐?” 몸을 돌린 성충이 발을 떼었고 윤충은 그 뒷모습만 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서방 방령인 달솔 해재용이 계백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보게 한솔, 내 휘하에 2만7천의 병력이 있지만 그 중 절반이 수군일세.” 해재용은 60대로 무장(武將) 출신이다. 해재용이 말을 이었다. “나머지 절반이 32개 성에 분산 배치되어 있지만 해적이 작심하고 한 지역을 공략한다면 당할 수밖에 없어.”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서방(西方)은 대륙과 마주보고 있어서 전부터 수군(水軍)이 발달했다. 계백이 물었다. “전선(戰船)으로 해적을 막을 수는 없습니까? 전에는 해적 피해가 적었지 않습니까?” “근래에 이르러 수군(水軍) 전력이 약해졌네. 그것이 문제일세.” 백제 전력(戰力)의 내막이 드러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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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5 20:42

[불멸의 백제] (92) 5장 대백제(大百濟) ⑧

성충과 흥수는 좌평이며 의직과 윤충은 달솔로 각각 남방과 동방의 방령이다. 백제는 동서남북 중 5개의 방(方)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중 남방과 동방군(軍)이 가장 강했다. 어전회의를 마치고 청을 나갈 때 앞장서 나가던 성충을 흥수가 불렀다. 흥수의 뒤에는 의직과 윤충이 따르고 있다. “이보시오, 병관좌평. 나 좀 봅시다.” 머리를 돌린 성충이 그들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충신들이 다 모였군.” “저쪽에서 이야기합시다.” 흥수가 턱으로 앞쪽 기둥을 가리켰다. 구석진 곳이다. 삼삼오오 나가던 관리들이 그들을 향해 절을 했다. 조정의 실권자들인 것이다. 모두 40대 중후반으로 의자보다 연상인데다 선왕(先王)인 무왕(武王) 시절부터 신임을 받고 있던 원로들이다. 넷이 둘러섰을 때 흥수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성충을 보았다. “당신은 대왕께 직언을 한다는 구실로 왕권을 약화시키고 있어. 그 의도가 수상하오.” “아하하.” 짧게 웃은 성충이 흥수와 의직, 자신의 동생 윤충까지를 보면서 말했다. “백관 모두 들었겠지. 대왕의 인사가 중구난방, 편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무엄하오!” 버럭 소리친 의직이 성충을 노려보았다. “대왕이 당신 노리갯감이요? 직언을 한답시고 당신은 대왕을 능멸하고 있어! 내가 용서하지 못하겠소!” “나를 죽이기 전에 잠시만 여유를 주시게, 방령.” 성충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왕비마마를 죽일테니 그때 나를 베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왕비를 죽인 대역무도한 놈으로 말이네.” 그 순간 셋은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굳혔다. 얼굴이 창백해졌고 흥수는 수염 끝이 벌벌 떨렸다. “이보시오, 형님.” 놀란 윤충이 남 앞에서는 절대로 부르지 않던 ‘형님’소리까지 했다. “무슨 그런 망발을…….” 윤충이 목소리를 떨었을 때 성충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두 알고 계시지 않는가?” 셋은 숨소리도 죽였고 성충의 말이 이어졌다. “왕비 교지가 신라 첩자 연기신 놈을 싸고도는 것이 아니라 교지가 첩자라는 것을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대왕은 자만심에 빠져있는거네.” “…….” “그까짓 첩자 한 놈 갖고 뭘 그러느냐? 또는 여자가 뭘 하겠느냐? 하는 동안에 궁궐이 썩고 조정이 썩고 나라가 썩네.” “…….” “내가 계백 꼬투리를 잡고 대왕을 끌어당겼다는 건 대왕도 알고 계실 것이고 그 이유도 아실 것이네.” “이보오, 대좌평.” 조금 진정한 흥수가 반걸음 다가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도 연기신이 첩자이고 왕비께서 그놈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방법이 틀렸소.” “아니, 대왕한테는 이 방법뿐이야.” 성충이 머리를 저었다. “훗날에 후손들이 성충을 대백제의 역적으로 기억하게 되더라도 나는 눈에 보이는 역적을 토벌하고 순사하겠네.” 기둥 옆에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이것이 대백제의 그늘이다. 왕비 교지는 덕솔 연기신을 먼 친척이라면서 측근에 두었는데 신라를 여러 번 오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연기신이 왕비의 친척이 아니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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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4 18:45

[불멸의 백제] (91) 5장 대백제(大百濟) ⑦

집이 마음에 드느냐? 다음날 왕궁의 청에서 만난 의자가 계백에게 물었다. 백관이 모두 도열해 서 있는 상황에서 의자가 물은 터라 계백이 당황했다. 예, 대왕. 계백의 관등은 한솔이니 좌평, 달솔, 은솔, 덕솔에 이은 제5등급이다. 4등급 덕솔(德率)이면 군(郡)의 군장(郡長)으로 나갈 수 있고 달솔이 맡은 방령 밑의 방좌(方佐)가 될 수 있다. 아직 한솔이 고위 관직은 아니다. 그때 의자가 머리를 들고 백관들을 둘러보았다. 한솔 계백은 대야성 함락의 1등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 공으로부터 동맹의 약조를 받아왔다. 대백제의 공신이다. 그때 병관좌평 성충이 나섰다. 대왕, 계백은 아직 약관으로 칭찬이 과하시면 분수를 모르게 됩니다. 삼가 주시옵소서. 백제에는 최고위 관직인 좌평이 5명 있었는데 성충이 그 중 으뜸인 대좌평이다. 50대 초반의 성충이 의자를 올려다 보면서 말을 이었다. 대왕, 계백을 친위군 기마대장으로 삼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보류시켜 주옵소서.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친위군 기마대장은 4품 덕솔 관등이 맡은 자리다. 대왕이 병관좌평 성충에게 그리 지시를 내렸단 말인가? 모르고 있었던 일이다. 그때 의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좌평, 나이가 적다고 공을 적게 평가하지 마라. 계백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경륜이 적거나 경솔하지 않다. 압니다. 성충도 지지 않는다. 백관들은 숨을 죽였고 성충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계백을 대백제의 동량으로 키우려면 더 단련시켜야 합니다. 대왕 으음. 의자의 신음이 낮게 울렸다. 그때 서방 방령 달솔 해재용이 나섰다. 대왕, 한솔 계백을 서방의 한산성주로 보내주시옵소서. 백관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여졌다. 해재용이 소리치듯 말을 잇는다. 한산성 근처에 해적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모두 내륙으로 도피해서 바닷가 인근이 황무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의자가 물었다. 한산성주가 아직도 공석인가? 예, 대왕 대답은 성충이 했다. 성충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의자를 보았다. 전(前) 성주 국겸은 병이 들어 도성으로 옮겨와 거동을 못 한지가 반년 가깝게 되었고 성주대리를 맡은 나솔 육기천은 지난달에 해적과 싸움에서 화살을 맞고 운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계백을 보내란 말인가? 그때 계백이 한걸음 나섰다. 대왕, 소장을 한산성주로 보내 주시옵소서. 그곳에서 해적을 소탕하겠습니다. 내가 병관좌평의 술수에 넘어갔다. 쓴웃음을 지은 의자가 옥좌에 등을 붙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친위대 기마대장으로 임명하겠다고 말했을 때는 아무 소리를 안 하더니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의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떠올라 있다. 왕의 독선을 막겠다는 의도 아닌가? 성충이 시선을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고 의자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좋다. 계백을 한산성주로 보낸다. 그래서 더 단련시켜 보도록 하자. 이렇게 어전회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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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3 19:24

[불멸의 백제 (90) 5장 대백제(大百濟) ⑥

사비도성 안쪽 부소산 기슭에 있는 왕궁의 뒤쪽에는 사비수가 흐른다. 사비 천도를 단행한 성왕(聖王)은 천도와 동시에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꿨는데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부여는 백제 왕실의 본향으로 왕실의 성(性)인 부여(夫餘)씨도 이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성왕이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패사한 후에 국호는 다시 백제로 환원되었으며 이후 현대의 의자왕대(代)에야 왕권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100년 가까운 세월이 허송되었다. 사비도성 거리는 모두 바둑판처럼 직선으로 뻗어나가 어디서든 끝이 보인다. 도로에는 돌을 깔아 마차가 지나거나 기마군이 달릴 때면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도로의 폭이 100자(30m)가 되었지만 항상 인파로 붐빈다. 거리의 행인은 한인(漢人)과 왜인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남방인과 서역인도 보였는데 대륙의 백제령 담로에서 온 사람들에다 장사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도성안 중부(中部) 전항 지역은 주로 관리들만 거주한다. 도성은 동, 서, 남, 북, 중의 5부(部)와 5항으로 나뉘어 있어서 각 구역별로 거주민이 다르다. 사비도성의 인구는 10만호에 65만이다. 동방(東方)의 대도(大都)인 것이다. 이곳이오. 중부 전항 지역의 대로변에 멈춰선 외관(外官) 점구부(點口部)의 고덕(固德)이 손으로 옆쪽 저택의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이 가리킨 저택은 담장이 높은 대저택이다. 계백이 숨만 삼켰지만 뒤를 따르던 덕조가 대문으로 달려가더니 문을 열어 젖혔다. 아이구. 덕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머리를 돌린 계백이 열린 문으로 저택의 안을 보았다. 넓다. 마당이 칠봉성의 청 앞 마당만 했고 앞쪽 청은 그보다 더 크다. 마당은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서 햇볕에 반사되고 있다. 고덕이 말했다. 이 저택은 본래 달솔 목신의 집이었지만 남방 흑치군의 군장으로 가시는 바람에 작년부터 빈집이 되었소. 과분하네. 계백이 말하자 고덕이 쓴웃음을 지었다. 40대 초반쯤의 고덕은 점구부의 관리로 호구 파악과 무역 업무를 맡는다. 점구부가 주택을 관리하는 것이다. 한솔, 대왕의 명이오. 나한테 그러실 것 없습니다. 들어가십시다. 신이 난 덕조가 계백의 말고삐를 잡아 끌면서 소리쳤다. 대야성 탈취의 일등공을 세우신 상을 받으신 것이오. 덕조에게 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선 계백이 다시 숨을 삼켰다. 이곳은 바깥채 마당과 청이다. 그리고 옆쪽에는 행랑채가 있고 그 뒤쪽에는 다시 중문(中門)이 있는 것 같다. 중문 안에는 사랑채인가? 그 안은 또 안채인가? 그때 계백 옆으로 고화가 다가와 섰다. 고화도 말에 타고 따라온 것이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고화가 눈웃음을 쳤다. 입술은 꾹 닫았지만 눈이 초승달처럼 잔뜩 굽혀졌다. 그래서 꾹 닫힌 입술이 막 터질 것 같다. 행복한 얼굴이다. 그것을 본 계백이 고덕에게 말했다. 고맙네. 고덕, 과분하지만 대왕께서 내리신 저택을 감사히 받겠네. 그러셔야지요. 고덕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도성 안에서도 한솔의 용명(勇名)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이오. 계백은 칠봉성에서 식솔들을 이끌고 이곳 사비도성으로 온 것이다. 칠봉성은 계백의 첫 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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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0 20:59

[불멸의 백제] (89) 5장 대백제(大百濟) ⑤

나리가 오셨다! 덕조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한낮, 계백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종들이 달려 나왔다. 청에서 계백을 모셔온 덕조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한솔 나리가 오셨다! 그때 안방에서 고화가 나왔다. 계백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고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선을 내린 고화가 마루에서 내려오더니 머리를 숙였다. 이제 오세요? 잘 있었소? 두 달여 만이다. 다가간 계백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고화를 보았다. 계백이 성에 온다는 기별을 받았을 테니 고화가 단장할 여유는 충분했다. 깨끗한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고화의 자태를 보자 계백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모습이다. 그날 밤, 성주의 관저는 해시(10시)가 되기도 전에 조용해졌다. 하인들의 방에도 불이 꺼졌고 두런거리던 집사 덕조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마당 안쪽의 주인 침실에서 불이 꺼진 것이 신호가 된 것 같다. 계백과 고화가 같이 침실에 든 것이다. 침상에 누운 계백이 어둠 속에서 사그락거리며 옷이 벗겨지는 소리를 듣는다. 고화가 옷을 벗는 것이다. 이윽고 옷을 벗은 고화가 침상 위로 오르더니 계백의 옆에 누웠다. 몸을 웅크리고 등을 돌린 자세로 누운 것이다. 계백이 잠자코 팔을 뻗어 고화의 어깨를 당기면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고화가 얼굴을 계백의 가슴에 묻으면서 안겼다. 고화는 엷은 속옷 저고리치마 차림이다. 치마만 들치면 알몸이다. 계백은 고화의 치마끈을 차분하게 풀었다. 고화가 막으려는 듯이 계백의 손목을 두 손으로 쥐더니 곧 떼어졌다. 고화의 숨결이 가빠졌다. 이윽고 치마끈이 풀리면서 계백이 치마를 젖히자 고화의 하반신은 알몸이 되었다. 고화가 이제는 몸을 더 붙인다. 그렇게 알몸을 감추려는 것 같다. 그때 계백이 이제는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고화가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시늉하더니 다시 손이 떼어졌다. 저고리가 젖혀지면서 고화의 젖가슴이 통째로 드러났다. 어둠속이지만 희고 풍만한 젖가슴이 선명하게 보인다. 고화의 숨결이 계백의 목에 닿았다. 뜨겁다. 이제 고화는 알몸이 되었다. 두 손으로 계백의 저고리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다. 이제는 계백이 바지를 내려서 벗고 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그 순간 둘은 알몸의 짐승이 되었다. 계백이 먼저 고화의 입을 맞췄다. 놀란 고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숨이 막히자 입이 벌려졌다. 계백은 벌려진 과일 같은 고화의 입을 빨았다. 고화가 이제는 두 팔로 계백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다. 그때 계백이 고화의 몸 위로 올랐다. 고화가 순순히 받아들일 자세를 만들었다. 뜨거운 밤이다. 거친 숨소리에 이어서 신음 같은 탄성이 일어났고 방안에 열풍이 휘몰아쳤다. 열풍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날 아침, 아침상을 들고 방안에 들어선 우덕의 뒤에는 덕조만 따르고 있다. 항상 식사 시중을 들던 고화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계백이 수저를 들었을 때 덕조가 헛기침을 했다. 나리, 나리께서 도성의 대왕 옆으로 가신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 소문이 맞습니까?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도성에서 따라온 군사들이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사실이다. 나는 곧 새 관직을 받을 것이야. 곧 칠봉성을 떠난다. 어젯밤에 고화에게는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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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9 20:15

[불멸의 백제] (88) 5장 대백제(大百濟) ④

계백이 탄 고구려선(船)이 사비도성의 구드래 포구에 도착했을때는 평양성을 출발한 지 7일째가 되는 날 오후다. 연개소문의 선물이 많았기 때문에 평양성 아래쪽 포구에서 배를 탄 것이다. 구드래 포구는 백제의 중심항으로 사비도성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백강(白江) 중류에 위치한 구드래 포구에는 수백척의 무역선과 수군(水軍)의 전선(戰船)까지 들락거리는 터라 언제나 붐빈다. 배에서 내린 계백에게 포구 경비 책임자인 나솔 관등의 관리가 다가왔다. 솔(率) 품계는 자색 관복을 입었기 때문에 표시가 난다. “한솔께서 오셨군요.” 초면인데도 관리가 활짝 웃는 얼굴로 계백을 맞는다. 백강(白江) 입구에 들어서면서 빠른 정탐선을 보내 포구와 도성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대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을 준비했으니 가시지요.” “고맙소.” “짐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나솔이 비껴서자 도시부(都市部) 소속의 관리와 함께 군사들이 재빠르게 배에 올라 짐을 내린다. “고구려선 선장과 선원 대우를 잘 부탁하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객사도 비워놓았고 실컷 먹고 놀도록 하겠습니다.” 선장과 선원들과 작별한 계백이 서둘러 도성으로 들어가 의자왕을 보았을 때는 오후 유시(6시)가 지났을 무렵이다. “한솔, 널 기다리느라 내가 목이 늘어났다.” 의자가 계백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좌우로 도열해 서있던 중신(重臣)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의자왕은 40이 넘어서 왕이 된 터라 왕의 체통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친인 무왕(武王) 시절에 대성8족(大性八族)의 기세를 꺾고 왕권을 강화시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대왕께 드리는 밀서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어디 선물부터 보자.” 의자의 말에 다시 웃음이 일어났다. 계백이 선물 목록을 펴고 읽는 동안 청 안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졌다. 호피가 20장이나 되었고 비단이 1백필, 금으로 만든 노리개가 한 상자, 진주, 보석 등이 2상자, 녹용이 2상자. 그래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이윽고 목록과 선물의 대조가 끝났을 때 의자가 계백에게 말했다. “이제 됐다. 그만 돌아가 쉬어라.” 계백이 눈만 껌벅였을 때 청 안이 다시 웃음으로 뒤덮였다. 의자도 같이 웃는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의자가 말했다. “밀서를 보자.” 계백이 내민 두루말이 밀서를 받은 병관좌평 성충이 의자에게 두손으로 바쳤다. 그러자 의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가 읽으라.” “예, 대왕.” 성충이 전 아래에서 밀서를 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읽는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백제국 의자대왕께 글을 올립니다.” 숨을 고른 성충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고구려는 일찍이 수의 대군을 전멸시켜 수왕조를 멸망에 이르도록 했으며 대륙의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 대륙을 평정할 계획이었으나 전왕(前王) 건무가 소심, 옹졸하여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리하여 이 연개소문이 건무를 베어죽이고 보장을 왕으로 세워 대륙 정벌에 나설 예정입니다. 이에 백제와 대동맹을 맺고 대륙을 분할 통치하고자 맹약을 드리는 것입니다.“ 계백은 성충의 목소리를 들으며 감동했다. 눈 앞에 대륙의 평원이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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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8 21:28

[불멸의 백제] (87) 5장 대백제(大百濟) ③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고구려 남부(南部)를 통과한 김춘추가 신라 신주(新州)로 들어섰을 때는 도망친 지 나흘째가 되는 날 저녁 무렵이다. 그동안 군관 둘이 죽고 부사(副使) 김성준도 화살에 어깨를 맞아 부상을 입었으니 구사일생을 한 셈이다. 국경에서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맞은 것이다. 당항성에 들어섰을 때는 해시(오후 10시) 무렵이었는데 김유신이 기다리고 있다가 맞았다. “대감, 천지신명이 도우셨습니다.” 김춘추의 몰골을 본 김유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대감의 이 우국충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꼭 보답을 받으실 것이오.” 당항성주와 장수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은 김춘추가 옷만 갈아입고 청에 나와 김유신과 마주앉았다. 청에는 김춘추, 김유신, 김인문까지 셋이 모였다. 김춘추가 입을 열었다. “실패했소. 연개소문은 이미 백제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소. 그래서 날 죽일 눈치가 보이길래 여섯만 빠져나왔구려.” 김춘추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연개소문의 집에 20명을 남겨두고 왔으니 모두 죽임을 당했을 거요.” “소장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김유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춘추를 보았다. “떠나신 지 얼마 안 되어서 백제 왕궁에 박아놓았던 세작의 밀서를 받았습니다.” “……” “의자가 연개소문한테 사신을 보냈는데 그 정사(正使)가 계백이라는 것입니다.” 김춘추의 시선을 받은 김유신이 길게 숨을 뱉었다. “의자는 대야성 함락의 공신인 계백을 보내어서 전공(戰功) 자랑도 시켰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에게 가셨을 때 그놈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지금 처음 알았소.” 김춘추가 말했을 때 김인문이 나섰다. “우리한테 숨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겠지.” 머리를 끄덕인 김춘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연개소문을 만날 때 백제 사신들도 고구려 관리들 사이에 끼어 있었을 수도 있겠다.” “계백까지 가 있는 상태에서 대감께 호의적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계백 인상착의가 어떻소?” 불쑥 김춘추가 묻자 김유신이 대답했다. “6척 장신에 호남이라고 합니다. 눈썹이 짙고 코가 두꺼우며 수염이 짙다고 합니다.” “눈은?” “눈꼬리가 조금 솟았고 안광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놈이군.” 쓴웃음을 지은 김춘추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연개소문이 나에게 확인차 보낸 고구려 관리가 그놈 같군.” “아버님, 대부사자 연백이라는 놈 말씀입니까?” “그렇다.” 김춘추가 팔걸이에 몸을 의지하더니 말을 이었다. “연백이란 연개소문의 성(性)에다 계백의 이름 ‘백’을 붙인 것이었구나.” “그놈이 매부와 누이를 죽인 원수였습니다. 그놈이 눈앞에 있었군요.” 김인문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때 김유신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했다. “대감께선 천운을 받으셨으니 반드시 그 한(恨)을 푸실 기회가 올 것입니다. 쉬시지요.” 김유신의 위로를 받은 김춘추가 웃었다. “그렇소. 국운은 천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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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7 20:46

[불멸의 백제] (86) 5장 대백제(大百濟) ②

“도망쳤어?” 버럭 소리친 연개소문이 눈을 부릅떴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저녁을 먹자고 김춘추를 부른 다음에 창고 옆쪽의 별당에 연금시키기로 결정을 했던 연개소문이다. “예, 부사(副使) 둘과 함께 도망쳤습니다.” 데리러 갔던 관리가 쩔쩔매면서 대답했다. “수행원 장인 중 군관 셋까지 여섯이 비었습니다.” “이놈이.” 연개소문이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내려치고 나서 소리쳤다. “잡아라!” “예엣!” 대답한 고관은 병관대신(兵官大臣)인 막리지 요영춘이다. 몸을 돌린 요영춘이 청 밖으로 달려나갔다. 전쟁에 익숙한 장수 출신이어서 세세한 지시 따위는 받지 않는다. 연개소문 또한 장수를 부려온 대장군이다. 김춘추 체포를 맡기더니 시선을 돌려 고관들을 보았다. 연개소문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라있다. “쥐새끼 같은 놈, 눈치를 채었구나.” “전하, 놈이 경솔했다는 증거올시다.” 동생 연정토의 말에 연개소문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방심을 했다. 내 집안이라고 경비를 배치시키지 않았구나.” 연개소문의 시선이 고관들 사이에 선 계백에게 옮겨졌다. “계백, 잡았다가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신라가 그만큼 다급했던 것입니다.”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먹을 만한 고기도 아니었습니다. 미련을 버리시지요.” “그런가?” 쓴웃음을 지은 연개소문에게 계백이 말을 이었다. “전하, 저도 내일 백제로 떠나겠습니다. 너무 오래 폐를 끼쳤습니다.” “떠난다니 서운하구나.” 눈썹을 모은 연개소문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내가 백제왕께 보내는 서신과 선물을 준비하겠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사시(10시) 무렵에 계백은 연개소문의 전송을 받으며 저택을 떠났다. 고구려 기마군의 호위를 받은 백제 사신 일행의 행차는 볼만했기 때문에 길가에는 구경꾼들이 가득 찼다. 일행이 평양성 남문을 나왔을 때 화청이 계백에게 말했다. “한솔, 김춘추가 말장수한테서 말 7필을 샀다고 했으니 꽤 멀리 갔을겁니다.” 말을 판 말장수가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야 신고해서 늦었다. 화청이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가 신라 신주(新州)를 지나야 되니 답답합니다.” 그렇다. 고구려 남부(南部)와 신라 신주(新州)가 맞닿아있는 것이다. 신주를 통과해야 백제땅이다. “신주를 우리가 차치해야 합니다.” 화청이 낮게 말했다. 본래 신주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해서 고구려로부터 탈취했던 땅이다. 그랬다가 신라가 배신해서 백제를 밀어내고 신주를 설치했던 것이다. “한솔, 김춘추는 왕의 그릇이 되었습니까?” 화청이 말을 몰아 바짝 붙으면서 다시 물어서 계백이 빙그레 웃었다. “그만하면 신라왕이 될 만한 인물이야.” “그렇습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적지에 온 용기, 그리고 왕국(王國)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연개소문에게는 다르게 말해서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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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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