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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전북 브랜드가치 ‘문화’가 중심 - 이재규

김완주 신임 도지사의 취임사에 문화가 발견되지 않아 의아했다. 날이 갈수록 하락하는 도세와 지역경제의 열악함을 반영하여 경제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대중적기치의 절박함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부분에선가 균형을 맞추었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교육, 문화, 의료의 격차를 해소한다.는 한 줄 언급을 빼고는 김 지사의 고유 브랜드처럼 알려졌던 문화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전주를 맛과 멋의 고장, 전통문화중심도시로 내세우면서 지역의 브랜드 매니징을 문화에 맞추었던 전주시장 시절의 판단은 전라북도의 수장이 되면서 급전환하게 된 것일까 궁금증이 커졌다. 지난 경제성장 정책에서 소외되었던 지역들이 나서 지역문화브랜드 개발 전략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성장을 도모하는 정책을 펴 온 것이 최근의 지자체 발전 전략의 전반적 추세였다. 문화를 중심 이미지로 활용하는 자치단체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문화와 관광이 결합하고 이것은 다시 문화토건사업으로 이어졌다. 관광단지가 줄을 지어 건설되고 온갖 시설물들이 문화의 이름 아래 시도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여러 이름의 축제와 영화제의 행진이 이어졌다. 물론 나비와 반딧불 등 연성전략을 통해 성공한 몇 지자체 외에는문화산업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지역은 아직 드물다. 그렇다면 다시 대규모 공단과 기업 유치, 첨단신산업의 시도로 중심점을 옮겨야만 할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기회의 시간은 사라져 버리고 경쟁도시들은 저만큼 앞서가 버리고 있다. 이웃한 광주는 2023년까지 20년 동안 2조원이 넘는 돈이 투자되는 등 참여정부의 지원 아래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지역경제의 동력이자 대안모델로 내세우고 있다. 5.18의 경험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아시아 인권, 평화의 중심도시라는 이미지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형 이벤트도 지속적으로 조직하는 눈치다. 전북은 어떤가. 호남에 대한 정치적 고려라는 과실을 광주전남이 독식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들려오긴 한다. 하지만 정작 문화 인프라의 가장 핵심적 요소인 문화자원을 어느 지방보다 경쟁력 있게 갖추고 있는 전북의 잠재력을 효율적으로 발휘하고 배치하는 일에는 서툴기만 한 것 같다. 아시아, 문화만 해도 전북이 훨씬 더 다양하게 많이 채워나갈 수 있다. 전북의 정치역량과 문화일꾼이 집중점을 설정하여 그것을 못해내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한국문학을 이끄는 중견 작가들의 연고가 강한 전북에서 21세기 세계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가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대회>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전북을 아시아문학으로 열린 창, 문학거점으로 확산해가는 시도 같은 것은 어떨까. 한국문학의 산실이라는 기존의 보유가치를 아시아로 연결하면서 고유 브랜드 가치로 선점,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여기에 맛과 멋으로 집약되는 전북의 문화컨텐츠가 가져올 여러 부대효과를 잘 짜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전북인이 이미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일을 중심으로 전북발전전략을 짜고, 이와 연관된 일을 자꾸 엮어내면서 큰 흐름을 만들어 가려는 특별한 노력 속에 21세기 문화 전북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재규 처장은 전민련 정책위원, 시민행동21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전북CBS <생방송 사람과사람> 진행자,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처장(현), 6.15남측위원회 부대변인(현)을 맡고 있다./이재규(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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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12 23:02

[문화마주보기] 도시인의 새내기 시골 생활 - 장성수

작년 겨울, 그 동안 살던 전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골에 황토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탈도시화 바램을 앞장 서 실천한 선구자적 용기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부럽기까지 하다는 반응이었다.그러나 나는 정작 엉겁결에 감행한 시골로의 이주가 어떤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행동이었는지를 잘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난생 처음으로 시작한 시골 살림이 상당히 두려웠다. 60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도시를 떠나 생활해 본 적이 없는 완전한 도시인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는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었다. 두려움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왔다.그 해 여름에는 동네에 큰물이 났다. 장맛비가 줄곧 내리더니 큰 개울이 넘쳐 개울가 집을 덮쳤다. 산사태로 도로가 막히고, 전기와 식수가 끊겼다. 새로 편입한 자에게 가해지는 통과의례라고 하기엔 너무 충격적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폭력성에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시련은 겨울에도 닥쳤다. 폭설로 출퇴근길이 자유롭지 못했고, 본의 아니게 도시의 여관 신세를 지기도 했다. 화장실 하수구로 느닷없이 기어 나오는 지네, 눅눅한 방바닥을 옴찔옴찔 기어 다니는 벌레,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왱왱거리는 말벌 떼에 가슴 졸여야만 하는 일상생활의 어려움은 편안한 도시의 아파트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원망을 저절로 우러나오게 했다.그러나 자연은 시련만을 주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도시생활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번민이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진다. 도시의 소음과 공해로 답답했던 가슴이, 찌들었던 눈과 귀가 확 트인다. 트인 가슴으로는 맑은 바람 한줄기 시원스레 지나가고, 밝아진 눈으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무리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침이면 앞마당 나뭇가지로 내려와 앉아 다투어 지저귀는 새떼들 소리에 귀도 덩달아 즐겁다. 뽑고 돌아서면 또 다시 돋아나는 잡초들 등살에 허리가 뻐근하고, 텃밭에 심어놓은 고추며 토마토, 가지, 오이에 서식하는 진딧물 잡기로 몸은 고단하지만, 심간은 편안하여 속리의 신선이 따로 없다.개망초, 개양귀비, 질경이, 환삼덩굴, 소루쟁이, 쇠뜨기, 비단풀, 쇠비름, 비비추, 감국 등 그저 잡초로만 알고 있던 야생초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들이 피워내는 수줍은 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가외의 소득도 얻게 되었다. 아직은 농촌의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소리라고 비난하지 마시길 바란다.여전히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어정대고 있는 처지이지만, 머지않아 도시의 찌든 때를 완전히 벗게 되는 날,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우리 동네 이장 노릇 한번 해 봤으면 하는 소원이 요즘 새로이 생겼다.△전북대학교 교수회 부회장 역임전북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장 역임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회장 역임현) 전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20세기 민중생활사 연구단』공동연구원『최명희문학관』관장/장성수(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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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05 23:02

[문화마주보기] 반갑다, 꽃뱀 - 김유석

유월은 소리의 천지이다. 새벽마당을 쪼아대는 참새에서부터 늦은 밤의 개구리 울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연의 화음이 귀를 씻는다. 이따금 시꺼멓게 하늘을 몰아세우는 우레와 양철지붕을 박음질 하는 소낙비소리, 하루를 들놓고 돌아오는 주인을 맞는 초저녁의 누렁이 소리조차 그윽하게 들판을 적신다. 게다가 새참을 내놓고 어이! 하며 지나치는 발씨들을 붙잡는 컬컬한 목소리는 또 얼마나 가슴에 감치던가. 투박하고도 무심하게 몸에 익은 소리들을 모름지기 따르다보면 결코 무심할 수만은 없는 세월의 잔해들이 묻어난다. 참새들의 지저귐 속에는 홀어미 혼자 사는 마당귀의 적막이 감나무 그늘 밑 청태처럼 끼어 있다. 공명하듯 서로의 가슴을 맞받아 흥얼거리다가도 일순간 툭 끊기는 개구리 울음 사이엔 일말의 긴장감 같은 것이 서려있고 어이라는 말의 다정함 속에는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외로움이 숨겨져 있다. 그나마도 아직은 그것들에 위로받을 수 있는 순간이 남아있기에 망정이지 그것들마저 사라진다면 산다는 것의 쓸쓸함을 어디에 감추겠는가.실은 이 밤 온 들판을 끓이는 저 개구리울음이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서글프게 들리는 까닭이 있다. 보리쌀 씻는 소리처럼 배고프던 시절 우리들을 대신해서 칭얼대던 토종들의 울음이 점점 끊기게 된 사연은 참으로 씁쓸하다. 농기계소음에 묻혔거나 오염된 환경 탓쯤으로 모두가 무심했던 그것들의 종적은 홀연 들려오던 정체불명의 괴성 속에 있었다. 황소개구리, 커다란 덩치에 겁나고 징하게 고함질을 질러대던 이 외래종들에게 무참히 희생당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심지어는 무자치들까지 잡아먹으며 마구잡이로 생태계를 교란하던 무법자들이 먹이가 줄자 필경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도태될 때까지 어디론가 내몰렸던 토종들. 다행히 멸종만은 면한 그것들이 다시 제 터전에 돌아와 저렇듯 뒤섞는 기쁨과 슬픔을 듣는 마음이 여간 착잡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개구리들만의 애환이 아니라 배스, 블루길 등에 의해 전철을 되밟고 있는 물고기들을 생각하면 반성보다 분노가 앞서기도 하지만. <개구리를 먼저 보면 부지런해지고 배암을 먼저 만나면 게을러진다>는 어릴 적 우스개를 떠올리며 올 봄 뱀 한 마리와 마주친 적이 있다. 꽃뱀이었다. 뱀에 대한 달갑지 않은 선입견과 토끼풀 무덤에 묻혔다 스르르 풀리는 소리가 여전히 기억을 섬뜩하게 하였지만 한편으론 여간 반갑지 않은 우연이었다. 한 마장 학교 길을 줄창 끌고 다니며 징그러운 모습을 공연히 들볶기도 하고 때론 음산한 눈초리를 피해 다니기도 했던 족속들. 그땐 서너 걸음마다 똬리를 틀만큼 흔했던 녀석을 수 삼년 만에 들길에서 만난 것이다. 서로 경계하고 서로 마주보다가 숙연한 생각을 끌고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슬그머니 꽁무니를 감추는 녀석이 얼마나 미덥고 또, 얼마나 고맙던지.다시 돌아오고 있다. 도롱뇽, 자라, 너구리, 참게 등등 이 땅의 들과 물가에 살던 얼굴들이 하나 둘씩 제 터전을 되찾고 있다. 떠나게 된 사연을 묻지도 말고 돌아온 생각을 앞질러 따지지도 말고, 그냥 내버려 두자. <자연>이란 말 그대로 상관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모습으로든 지금보다야 훨씬 무성해지지 않겠는가. 인간의 개입으로 인해 <고질라>와 같은 돌연변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반갑다, 꽃뱀!/김유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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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6.28 23:02

[문화마주보기] 월드컵과 우리 동네 - 김정수

월드컵이 먼 나라 이야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출전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전하지 못했던 때, 월드컵은 하나의 신화였다. 펠레의 공차는 모습을 본적 없는 아이들도 펠레를 알았고, 그들에 의해 펠레는 살아있는 전설이 될 수 있었다. 현대의 월드컵은 국가적 전쟁 영웅이 범법자로 지탄받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왔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영웅이 필요한가 보다.지난 2002년 월드컵의 최대 성과는 무엇보다 우리 국호의 완전한 사용이었다. 그동안 각종 매체가 한국으로 즐겨 써왔던 우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실히 정착시킨 계기가 2002월드컵이었으며, 붉은악마가 숨은 공로자였다. 월드컵 개최 경험은 올해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축구팬들에게 새로운 응원 모델을 제시했다는 거리응원도 2002년의 유산이다. 도시마다 간선도로를 응원을 위한 공간으로 내놓는 것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았으며, 응원을 어디에서 누구와 할 것인가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티 브이가 없던 시절, 밤 시간은 참 길었다. 해 질녘까지 함께 놀았던 동네 아이들은 저녁밥을 챙겨먹고 난 후 다시 모였다. 어둠 속 숨바꼭질이 본격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청년티 나는 아이들부터 세살박이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였다. 어둠 속에 은밀한 스릴은 짜릿했다. 가끔은 동네 어른들 모인 자리에서 재롱잔치도 벌어졌다. 일종의 소규모 학예발표회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배운 노래와 유행가 몇 가지지만 치마나 보자기를 활용한 소품과 의상이 있는 꽁트도 있었다. 그렇게 동네의 밤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지난 주 월드컵 토고전이 벌어진 날, 내가 사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임대하여 단체 응원을 준비했다. 누가 얼마나 나올까 하고 시큰둥하게 생각했고, 반응 또한 영 시원찮아 보였다. 그런데 경기 시작 무렵, 밖에 나가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파트, 이웃 아파트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이들이 줄고 있다는 뉴스 때문이 아니라 실제 내 눈으로 아이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랬다. 아이들은 재난과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에 숨은 은둔자들처럼 내 눈 밖에 벗어나 있다가 해방의 날, 어둠과 함께 하나 둘 나타난 것이다. 학교수업에 학원 수강, 야간타율학습, 성적관리, 건강관리까지 강요당하느라 숨쉴 틈이 없었던 그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꼬마부터 중고등학생들까지 오밀조밀 붉은 옷을 입고 모여앉아 기특하게도 대-한민국을 함께 외치고 있었다. 참 안쓰러운 감동이었다. 이들에게 어쩌면 월드컵이 모처럼 맛보는 공인된 해방구였는지 모른다. 단 하루만이라도 부모의 눈총과 선생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기쁨을 누렸는지 모른다. 아이들의 외침과 탄성을 들으며 참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죄를 많이 짓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국가주의, 상업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월드컵이 그래도 우리 동네에 기여하는 바가 최소한 하나는 있구나 싶었다./김정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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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6.21 23:02

[문화마주보기] 예술의 상상할 자유 - 김정수

전 세계의 관심 속에 개봉된 영화 다빈치 코드가 완성도 논란 속에서도 순항중이다.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의 극단적인 개봉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개봉 4일만에 140만을 넘기며 국내 영화계를 휩쓸고, 세계 가톨릭국가들에서도 박스오피스 1~ 2위를 달리고 있다.한기총은 역사적 소재를 표면에 내세워 교묘한 소설적 허구 전환의 기만적 기법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엄청난 오해와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한다면서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었으며 허구를 역사로 착각하게끔 하여 일반인은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소설보다 더한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하지만 이런 한기총의 태도는 처음부터 웃음거리로 전락할 공산이 컸다. 소설이나 영화는 아무리 사실을 근간으로 창작되었다 해도 허구다. 그런데 영화의 허구성을 규탄하는 일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스스로 현실을 가장한 허구임을 명백히 하는 예술작품을 규탄한다는 것처럼 비논리적인 일은 없다. 과연 일반인들이 혼란을 느낄 것은 무엇이며, 영화 한 편에 기독교인들이 갈등을 느낄만큼 그동안의 기독교 교리가 허술한 것이었나 반문하고 싶다.최근 발견되었다는 유다복음과 같은 외경과 위경의 사실성까지 굳이 들먹일 것까지도 없다. 전제컨대, 나는 헐리우드 영화에 관한 반감과 함께 기독교적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과 신앙의 문제가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중요한 만큼, 종교를 바깥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나 판단도 소중히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의 문제다.보수 교단이 다빈치 코드를 특별히 문제 삼는 이유는 예수의 신성에 도전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신성을 상상하면 발칙한 일인가? 예수의 결혼설이나, 예수의 신격화 과정에 관한 인간적 상상력은 정녕 금기시되고 단죄해야 하는 문제인가? 나는 오히려 이 작품이 현대인들에게 예수와 그 시대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이 작품을 처음 읽을 무렵,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공감을 보인 점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배교를 결행했을까? 내 주변엔 결코 그런 사람이 없다. 그들의 신앙이 그렇게 유아적이고 단세포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염려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수준이 염려스러울 정도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타인과 공유하고픈 욕망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종교인에게는 종교탄압과 똑같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예술은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서로 다양한 생각들을 갖고 산다. 그 때문이라도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일만큼은 자유로워야 한다. 침대에 맞추어 사람의 다리를 자르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김정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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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5.24 23:02

[문화마주보기] 디지털치매 - 김유석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언어 동작이 느리고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함이라는 치매의 사전적 의미에 시대의 화두인 디지털이 합성된 신조어쯤으로, 컴퓨터나 핸드폰 등의 기기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세태를 꼬집을 때 쓰이는 예를 몇 번 들어본 것 같다. 치매가 보통 노인성 뇌질환을 일컫는데 비하여 디지털치매는 디지털문화에 민감하게 노출된 보다 젊은 세대들의 정서질환을 겨냥한 증후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기기 가운데서도 가장 빠르고 다양한 용도로 생활화된 컴퓨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정도로 무소불위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반면 감당해야 할 병폐 또한 만만치 않게 드러내고 있다. 사소한 부주의나 개인적인 책임일 뿐으로 공공연히 묵인해 가고 있는 그런 사건사고를 일컬음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증상도 없는 인터넷의 그늘, 홀릭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모름지기 노출되어 있다 할 수 밖에 없는 인터넷의 함정을 말함이다.여전히 컴맹에 가깝지만 컴퓨터를 켜는 일이 점점 늘어 간다. 그 대부분이 인터넷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대문 앞 우편함을 흘긋거리는 대신 틈틈이 이메일을 들여다본다. 그전 같으면 수첩이나 주소록 같은 데에 꼼꼼히 적던 중요한 일들을 그 안에 저장해 두고 혹 날아갈까 봐 기우에 시달리기도 한다. 만년필이 아닌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기도 하고 부질없이 이곳저곳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우연히 유익한 정보를 얻을 때도 적잖다. 보고 싶은 영화나 노래를 내려 받을 줄 안 뒤로 영화관에 가고 디스크를 사 본 기억이 까마득하고, 게임은 할 줄 모르지만 솔직히 야동을 몇 번 즐긴 적도 있다. 그 정도야 기본 아니겠는가, 적어도 폐인은 아니니까. 그러다보면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책읽기가 그렇다. 클릭 몇 번이면 폭풍의 언덕을 읽지 않고서도 등장인물은 물론 줄거리를 훤히 꿸 수 있으므로 굳이 먹고사는 일이 아닌 것들에 긴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물들의 감정과 복선 등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그만이다. 어디 책뿐이겠는가. 만물상처럼 없는 게 없고 백과사전 못지않게 브리핑되어 나오는 지식들, 흘려들은 얘기로는 컴퓨터 하나로 논문을 쓴 작자들도 있다나? 필요한 것들은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기 속에 다 들어있으므로 자판기의 커피를 뽑듯 꺼내 쓰면 된다는 얘기다.이쯤 되면 편리함을 들먹거리기 전에 홀려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싶다. 신발이든 옷가지를 사든 꼭 쇼핑몰에서 택배로 구입하는 아이에게 물었더니 유행이라고 그런다. 유행이란 말을 문화로 바꿔 들으며 어릴 적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읍내 장날을 떠올려봤다. 시간도 아끼고 값도 발품을 파는 것보다 저렴하다하니 일거양득인 것만은 분명하다 싶은데 뒷맛이 여간 씁쓸하지 않은 까닭은 디지털치매가 역설적으로 디지털문화를 낯설어 하는 쉰(?)세대를 호칭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여느 때처럼 컴퓨터가 켜진 밤이다. 마땅히 사용해야할 일이 없어도 우선 컴퓨터부터 켜놓고 책상을 닦거나 하루의 생각을 정리한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하고도 무서운 질환이다. 클릭, 클릭, 또 클릭./김유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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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5.17 23:02

[문화마주보기] 문화도시의 성공조건 - 전효관

전국적으로 문화도시 열풍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부분적으로 과열일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도시가 문화도시, 창조도시 만들기에 나섰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문화도시 프로젝트는 문화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중소도시의 경우에 문화도시 만들기는 매우 현실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구도심의 쇠락현상, 재래시장의 붕괴는 일반적으로 관찰된다. 문화도시 프로젝트는 이 현실에 대응하는 문화적 전략이자 대안을 구축하는 작업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그런데 이 구상은 성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문화도시 프로젝트에 대해 의구심이 많다. 요즘 나는 광주에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 의구심들에 답하느라 바쁘다. 광주 프로젝트의 요지는 구도청 부지에 교류와 창조를 통해 가동되는 문화 발전소를 만들고 그 성과를 도시 전체로 확산하여 새로운 인본주의 도시(neo-humanic city)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또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가 광주뿐만 아니라 전주, 경주, 부산 등에서도 추진 중이다. 또한 국가 프로젝트 위상에서는 아니지만, 지역의 자구적 차원에서도 문화도시화 계획이 속속 수립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 기획예산처가 주관한 문화 예산 토론회에서 문화도시 프로젝트를 국가 예산으로 감당하기는 힘들다는 목멘 소리가 대세를 이루기도 했다.어쨌든 문제는 문화도시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일 것이다. 먼저, 한 도시가 문화도시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도시 자체의 문화적 자생력이 필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예산 지원이 우선이 아니고 문화도시를 만들어갈 자생력이 있을 때에만 예산 지원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자기 프로젝트가 없이 예산이 배정되면 마치 떳다방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문화도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문화도시 프로젝트는 문화적 행정이 발전한 곳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문화도시는 창의성을 핵심으로 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창의성을 존중하는 프로세스가 필수적이다. 문화행정이 제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찾을 줄 알고, 그들이 수행하는 작업의 저작권을 존중할 줄 알며, 남의 아이디어와 사유의 힘을 제대로 초대할 줄 아는 곳에서 문화도시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하고, 기획에서 기획자의 이름을 지우고,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행정에서 문화도시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문화도시 프로젝트는 문화적 자생력과 문화행정 사이의 생산적 관계가 설계되는 곳에서 성공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도시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누가 선점하는가의 문제가 아닌 누가 문화적 과정을 설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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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5.10 23:02

[문화마주보기] 문화축제의 전제(前提) - 나종우

5월이 시작되면서 모두가 달라지고 있다. 어린아이를 닮은 연두 빛 나뭇잎들은 사춘기 소년의 모습으로 점점 바뀌면서 계절의 여왕답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발랄하고 아름답다. 이 계절에 전국적으로 봇물 터지듯 축제의 향연들이 그 막을 열고 있다. 올해도 족히 천 여 개가 넘는 축제들이 한 해 동안 줄을 이을 것이고 5월 한 달 동안 전북에서만도 5개의 큰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축제들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속의 무관심으로 흘러 가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붙잡아 맬 수 있을까.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모든 축제들이 그 앞에 문화 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주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남제, 한지문화축제, 대사습놀이, 국제영화제도 올해는 아예 하나로 묶어 전주문화축제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어디 전주축제뿐인가 다른 고을도 마찬 가지다. 하기야 우리 민족은 예부터 문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고, 몽고족이나 일본의 침입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에 끝까지 저항 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낮은 민족에게 굴복 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 애국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문화라는 것은 다른 민족과 차별되는 독창적이고 우수한 전통이 내포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각 지역마다 문화를 내세우는 것은 그 지역의 독창적인 전통을 그 내면에 깔고 있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는 그 지역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역축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제의 확실한 성격, 지역적 특성화, 내용의 독창성, 주체의 민중성, 축제의 문화 산업화, 축제지식의 전문성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조건은 그 지역정신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기획되고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라고 하는 것 속에는 정신 얼 혼 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주정신은 전주문화 속에 녹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 속에 정신이 있다면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신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주역사속에서 전주정신을 찾고 전주정신을 바탕으로 전주문화를 찾아야 된다. 비빔밥, 한지, 소리, 영화,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모든 멋과 맛, 흥 모두의 문화의 모태인 전주정신을 찾고 그 근원인 전주의 역사를 시민과 문화일꾼 모두가 먼저 알아야 된다. 그래야만 겉포장만 그럴듯한 문화축제가 아니라 느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축제를 만들 수 있다. 전주역사를 모르면 전주정신을 알 수 없고, 전주정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대로 된 전주문화축제를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앞으로 전주가 문화의 도시가 되고, 문화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무원도, 의회의원들도, 문화일꾼들도 먼저 전주의 역사를 알아야 된다. 알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꾸며야 될 것인지는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는 만큼 사랑 할 수도 있다. 자존심과 자부심도 생겨나게 될 것이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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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5.03 23:02

[문화마주보기] 한 보수 논객의 '용기' - 김정수

독도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일 외무차관 합의 3개항이 발표되면서 일단 시간을 버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미봉책에 불과한 굴욕적 협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독도가 당연히 우리 땅이라는 생각은 우리들만의 생각이었을까요?갈등의 원인이 독도의 영유권에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일본은 수 십년동안 틈만 나면 독도문제를 쟁점화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니까요. 잊혀질만하면 독도문제를 거론하고, 한국민의 저항이 거세지면 사무라이 정신으로 옷을 벗는 일본관료들의 행태만봐도 일본 보수우익의 뿌리 깊은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모두가 흥분한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사고의 진정한 유연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떤 국제적 분쟁도, 국가적 위기도 지난 시기의 이념의 자로 재단할 수 있다는 독특한 생존방식을 일러주었으니까요. 그 누가 아무리 당신을 일컬어 친미의 도를 지나쳐 굴미의 태도를 위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일본까지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더라도, 가미가제 정신이 영원하듯, 우리의 위대한 보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아무도 상종할 논객으로 치부하지 않는 외로움을 딛고, 적화라는 지난 세기의 쓰레기 같은 용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국익이고 나발이고 간에 오로지 수 십 년 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창 삼아 천둥에 개 뛰듯 휘둘러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일본을 적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못살며 잔혹한 집단인 북한과 세계에서 가장 큰 일당 독재국가와 친구가 되겠다는 자살 충동을 억제해줄 세력이 한국에 과연 있는가라는 당신의 비분강개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국민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홀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 보수에겐 왜 자살충동이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간 김에 용기있게 할복 자살하여 꿈에도 그리던 조국 수호와 적화 방지의 일석이조를 거둘 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안 없는 충동질이 주특기라 하여도, 일본의 드라이아이스 전략에 말리지 않고 조용히 독도를 헌납하자는 주장이 아니라면, 한번쯤 시도해볼만한 이벤트였을 것입니다. 그 것은 이 땅의 보수 우익이 평생 꾸어온 꿈 아니었던가요?최근 한일간의 문제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용감무쌍한 극우 보수인사가 핵으로 일본을 쓸어버리자 주장하던가, 하다못해 일본에 건너가 테러나 분신자살을 한다면, 그래서 양국관계를 미묘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다해봤습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우리의 보수는 영원히 살아야하니까요.이번 기회는 우리 보수의 실체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생각합니다. 아, 참! 그런데 외롭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뒤틀린 궤변으로 곡해하여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또 걱정입니다.제발 너나 걱정하세요/김정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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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4.26 23:02

[문화마주보기] 시인들은 망했다 - 김유석

주일에 한 번쯤 책상을 정리하다가 종종 머츰해질 때가 있다. 접혀진 채 쌓여있는 신문더미, 뜯지 않은 몇 권의 책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읽혀진 듯한 우편물들을 치우는 가슴에 묻어나는 먼지를 훔칠 때마다 절로 낯설어지는 나를 보게 된다. 행여 그것들 틈에 낀 채 지나쳐버린 약속이라도 눈에 띌라치면 난감하기가 이만저만 아닌데, 바삐 산다는 시쳇말보다 이미 익숙해진 습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일부러 핑계를 대자면 숫제 인터넷 탓이다. 어젯밤도 줄창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던가. 웬만한 소식이나 정보쯤은 마우스 하나로 간단히 검색해버리므로 신문을 펼치는 경우라곤 화장실 갈 때가 고작일 정도로 하루 분의 짬에서 소외되어 가는 판이다. 책에 대한 예우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책이라야 겨우 구독하는 문예지 두서너 권과 애써 보내온 지인들의 시집 낱권뿐인데도 한참을 그냥 쌓아두었다가 따로 시간을 빌어 허겁지겁 넘기는 예가 늘고 있으니 정독은커녕 모름지기 허물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인터넷은 이미 생활의 일부로써 다양한 정보와 재미를 안겨주고 있다. 전문지식에서부터 뉴스, 스포츠, 오락에 이르기까지 클릭만 하면 그 즉시 원하는 것들을 창에 끌어다주므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대한민국에 안되는 게 어디 있니?라는 우스개 말을 떠올릴 만하다. 날밤을 새워가며 게임삼매경에 빠지는 아이들이나 고스톱을 즐기는 아줌마들, 틈만 나면 카페에 들러 잡담을 주고받는 사람들 모두가 마니아인 우리나라는 가히 인터넷 공화국인 셈이다.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밤이면 밤마다 컴퓨터를 켜고 새로운 호기심을 찾는다. 뿐만 아니라 따로 즐겨찾기에 올려둔 몇 개의 사이트를 들락거리느라 밤잠을 설치는 날도 많다. 나름의 취향이니 만큼 음악과 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물 없이 기웃거리며 마음의 닮은꼴을 찾는 것이다. 그쯤 익숙해지던 어떤 방에서 즐겨 듣던 몇 곡의 노래가 슬그머니 지워진 그 어느 날 이후 일말의 아쉬움과 회의가 드나는 곳마다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노래가 지워진 까닭은 필경 저작권 시비였다. 모든 노래가 한꺼번에 삭제되지 않은 영문이야 잘 모르겠지만 공짜였던 유명 음악사이트들이 유료화 되어 이제부턴 한 곡 한 곡을 내려받을 때마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됐다. 노래 한 곡을 지어 대중의 희로애락을 어우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하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어 기꺼이 따르다가도 불현듯 울화가 치밀 때가 있다.한창 잘 나가는 가수들의 노래가 걸맞은(?) 예우를 받는데 반해 시인들은 여전히 인터넷을 방황하고 있잖은가. 지명도에 상관없이 대다수 시인들의 글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의 대중화를 역설한다든지 여전히 생계를 도외시한 채 고리타분하게 정신적인 측면만을 운운한다면 좀 무안한 자기변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편의 시도 한 곡조 노래 이상의 산고를 겪으며 태어나는 것이다. 시집이 이따금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기억하기론 작년에 가장 많이 팔린 시집이 얼추 5000~6000권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시를 더 많이 읽는다는 통설이 맞다면 한 편의 시가 밥 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요즘은 살만한 세상인가? 아니면. 그래도 새로운 문예지를 만들고 원고료도 없는 한 두 편의 글을 발표하기 위해 한해에도 수없이 탄생하는 이 땅의 오프라인 마니아들을 보자니 은근히 힘(?)이 난다./김유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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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4.19 23:02

[문화마주보기] 문화의 시대와 경제적 선동 - 전효관

문화의 시대라는 말은 헛 수사일 뿐인가. 문화와 예술이 창조력의 발원지이며, 문화적 태도와 사고방식이 한국사회가 하청사회에서 창조사회로 진화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말들은 더 이상 낯설진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문화적 낙후의 증상을 경험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여전하다. 문화와 예술의 가치는 경제 논리 내로 완전히 포획된 듯 보인다. 문화콘텐츠가 새로운 생산력을 만들고 문화가 우리를 먹여살릴 것이라고 부쩍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단, 그 낙관적인 전망도 문화와 예술이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적 과정이 존재하고, 문화의 힘을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일상의 인프라가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문화의 시대, 콘텐츠의 시대로 이행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순탄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화와 경제가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회 각 영역의 수준과 품격이 높지 않는 곳에서 문화와 경제의 대응관계는 난망하다. 특히 천민적인 경제 선동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지고 수용되는 곳에서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는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례는 적지 않다. 얼마전 방폐장 유치경쟁에서 역사문화도시를 추진한다는 경주시가 90%가 넘는 시민 지지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방폐장이 있는 도시와 역사문화도시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눈앞의 이익을 누군가 선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월드컵을 앞두고 대기업 두 곳이 벌리고 있는 문화 마켓팅은 시민들의 자발적 열기를 기업 홍보 차원으로 막무가내로 끌어들이고 있다. 아무리 기업이 시장 경쟁을 위해서는 앞뒤가리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아무런 사회적 배려가 없는 홍보 전략을 보고 있다보면 그들이 이해하는 문화 마켓팅 수준이 참 천박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 문화기관의 운영도 경제부처가 관리하겠다고 한다. 세계일보 3월 23일자 기사는 기획예산처가 국내 314개 공공기관 및 공기업 전반의 경영과 지배구조에 개입할 수 있는 내용의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기본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화정책과 행정도 경제 부처가 관리하게 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기업, 정부가 모두 나서 전방위적으로 경제 선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전통도, 시민들의 문화적 열망도, 문화적 공공 서비스의 필요도 오로지 눈 앞의 경제적 이익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무력화되는 현실인 것이다. 삶의 질과 관계 회복이라는 문화의 가치는 언제나 뒷전이다. 한 후배의 홈페이지에서 봤던 사진 한 장이 생각이 난다. 애완견을 들고 돈다발을 흔들어대면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이었다. 이 어색한 조합이 우리 시대의 상징이다. 만일 이 질서가 숙명이 아니라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또 하나의 고민의 레퍼토리가 추가된다./전효관(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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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4.12 23:02

[문화마주보기] 축제, 그 성공을 위하여 - 나종우

연두 빛 봄빛이 수채화로 번져가고, 선거 열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는데 한 모퉁이에서는 어김없이 축제의 계절이 다가오는 홍보용 현수막과 입간판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올해의 축제는 각종 선거 열기 속에 묻혀서 그 의미가 퇴색될 것인지 아니면 그 덕(?)으로 더 빛을 발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나라의 축제는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 120여개의 축제가 전국적으로 있었는데 1996년에는 325개로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1000여개의 축제가 치러졌다. 우리 전북의 경우는 1996년에는 32개의 축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는 60여개가 넘어섰다. 덩치가 큰 축제만 보더라도 전주영화제, 풍남제, 한지문화축제, 남원춘향제, 고창청보리축제 등 지역마다 고유한 역사 전통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축제들이 제법 많아졌다. 이젠 차분하게 이러한 축제들이 성공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축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생각 해 볼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전통 지역축제를 현대적 의미로 복원하고 전승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철저한 고증 속에서 구성된 축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신명나는 오락적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특성을 끌어내는 관광 자원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지역축제의 관광 상품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된다. 축제 투자비용 효율을 높임과 동시에 관광 상품화 전략으로 다양한 지역 활성화 효과를 얻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현대는 지역축제의 관광 상품화 전략이 지역을 살리는 산업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국적으로 문화관광 축제가 약 32%인데 우리 전북의 경우는 16%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도 보여준다는 의미를 뛰어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곳에서도 하고 있는 축제는 성공하기 어렵다. 보여주는 축제, 축제를 위한 축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축제에서 보여주는 의미가 강한 문화예술제의 성격이 차지하는 축제가 47%인데 우리 지역에서는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러한 성격의 축제는 볼거리의 다양화만을 추구하여 백화점식으로 구성하기 마련이다. 셋째로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축제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관람대상을 차별화하는 알차고 작은 축제, 투자가 비교적 적으면서도 효과를 크게 얻을 수 있는 축제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공한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더불어 꼭 정체성이 분명한 축제로 구성되어야 하며, 축제의 타이틀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나종우(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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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4.05 23:02

[문화마주보기] 아직도 침 뱉고 싶은 얼굴이 있다 - 김정수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막 탄생할 즈음이다. 최고 통치자는 아니지만, 여성총리라는 상징성 하나만으로도 한국 사회에 만만찮은 파장을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수 천 년 억눌려왔던 여성 지위에 분명한 변화의 지표며, 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일부 야당에서는 허물어진 무덤에서 파내온 썩어빠진 자를 또다시 꺼내들고 여성총리 지명자를 재보겠다고 덤비는 모양이다. 어찌 그 모양들인지…,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남성과 여성의 대결구도로만 받아들이는 몰지각함보다 더 치졸한, 그야말로 논쟁의 가치도 없는 작태다.차제에 여성을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도 바로 잡히면 좋겠다. 우리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성적 편견은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고 넓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다. 삼월 한달 정가의 이슈가 되었던 최연희 의원 사건이 그 뿌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짧고 작은(?)사건 안에는 왜곡된 성문화, 남존여비, 계급적 성차별, 후안무치의 성도덕 등 우리 사회 성문제가 종합세트처럼 구성되어 있다.문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도 사뭇 이중적이다. “어머! 웬일이니? 어머머,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 라고 제발 말하지 말자. 내숭 떨지 말자는 말이다. 솔직히 당신도 그런 식으로 놀거나 놀고 싶어 한 적 없었던가? 아니면 그렇게 노는 사람들에 대해서 듣도 보도 못했던가? 정말 난생 처음 접한 이야긴가? 그렇다면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 우리에겐 유사한 추억이 있다. 지난 2003년 10월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회식 자리 경향신문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 사건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배지를 자연스럽게 유지했다. 그 뿐 아니다. 전 제주도지사의 여성단체장 성추행사건, 지난달의 해양수산부 고위 공무원의 길거리 성추행 사건 등 알만한 권세가들의 추문이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용서했다. 단죄의 바람은 잠시 뿐이고 여전히 건재한 그들, 이처럼 좋은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리는 죄인에게 결코 침을 뱉지 못한다.만에 하나 “그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 공인이 말이야, 깨끗한 정치를 해야할 정치인이잖냐, 말이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놔두지 말자. 과감히 침을 뱉자. 이거 죄 없는 사람부터 침 뱉는 것 아니야? 하는 번민일랑 버리자. 하느님께 죄송하지만, 모두 용서하기엔 세상에 용서할 일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놀란 척, 분개한 척이 아니라 단죄에 나서는 것이다. 하는 게 아니라 단죄다. 응징이다. 우리가 단호할수록 우리도 바뀐다. 선거철이 다가온다. 내숭도 용서도 잠시 잊어버리자. 나는 수양이 덜 되어서인지, 아직도 침을 뱉고 싶은 얼굴들이 많다/김정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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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봉호
  • 2006.03.29 23:02

[문화마주보기] 막연한 기다림 - 김유석

햇쑥 냄새 같은 게 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냥 흙내라고 해야겠다. 누렇게 말린 애보리 눈빛에 찔끔거리던 빗물을 매몰차게 닦아내는 바람 속을 걷는 나절가웃, 어디선가 쏘여 오는 새물내가 연신 가슴을 훔치고 있었다. 얼핏 송사리 떼 같으나 도랑 물 웅덩엔 알록거리는 햇살뿐이고 눈이 밝은 실버들도 아직은 기별을 좀 더 미뤄야 될 성 싶은데, 한참을 따라서 제법 슬거운 기운이 끼는 들길이고 보면 그래, 봄이라 하자.봄이 상징하는 수많은 수식어들, 이를테면 희망, 소생, 시작 등등의 어휘들에 <기다림>이란 낱말을 잇대어보며 들판을 나선다. 흔히 쓰고 듣는 <봄을 기다린다>라는 말 속의 <기다림>이 무엇을 가름하는 것인지 곰곰 끌어가는 걸음이 자꾸 비끗거린다. 여태껏 <기다림>의 어감을 상황의 지속보다는 종료에 이름으로 풀었거나 어떤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때 빗대어 쓰곤 하던 이 말을 새삼 중얼중얼 되새김질 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지난겨울부터의 일이었다.들판의 한해살이는 얼추 3월에 시작하여 10월이면 마무리 된다. 축산을 한다든지 시설원예를 하는 농가의 경우는 사철 일손을 당겨 써야 하지만 벼농사를 일반으로 하는 농투성이들은 보리갈이를 끝낸 후부터 긴 휴식에 들어간다. 정확이 말하자면 휴식이라기보다 그냥 <논다>라고 얘기해야 할 시간들이 너댓 달 가량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무위도식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산한 벼를 시장에 내다팔아야 하고 틈틈이 영농교육에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 갈수록 수상해지는 세월도 걱정이지만 당장은 가격하락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 소득을 보태기 위해 먼 공사판 까지 날품을 팔러 다니는 몇몇 바지런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겨울 내내 지루한 시간과의 몸싸움에 시달려야 한다. 어귀에 참새처럼 웅크린 채 한숨을 내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고 많은 날 주유소나 마을 점방 후미진 방구석에 몰려 화투장을 두드리며 죽이는 시간들이 여전한 겨울나기의 모습인 것이다. 아낙네들의 겨우살이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아직 <누구네 엄마>라 불리는 비교적 젊은 소수의 부녀자들은 아이들 치닥거리에 그나마 무료함을 덜 타지만 <댁네> 호칭이 붙는 연배의 아줌마에 이르면 남정네들과 별 다름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자치단체에서는 풍물, 수영, 노래, 스포츠댄스 등의 프로그램을 짜서 농촌의 삶들도 나름의 취미를 붙일 수 있 도록 점차 관심을 기울려 나가는 듯싶기는 하다. 그러나 <노래방계>가 새로 생겨날 정도로 가요프로그램만이 호응을 보일 뿐 여타의 과목은 영 별무신통인 실정이다.<어서 봄이나 왔으면 쓰것다>. 누차에 푸념처럼 걸쳐 들은 말이었다. 담배값이나 잃고서 자리를 털던 누군가의 겉말 같은 거였는데 한구석에 뒹구는 소주병만큼이나 뒤끝이 씁쓸했다. 어떤 바람이 느껴지기는커녕 그저 공허하고 지루하게만 들렸다. 며칠 동안의 노 동 후에 주어지는 하루 이틀의 휴식이 아니라 나날이 빈둥거리며 기약 없는 세월을 기다 리는 것, 노는 것도 일인데 삼동을 소주와 담배연기에 찌들며 품삯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러니까, 초입의 들판에서 풍기는 이 거름내 같은 건 일철을 맞아 가분한 사람의 냄새인 것이다./김유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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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3.22 23:02

[문화마주보기] 왜 문화정책은 실패하는가 - 전효관

문화는 창조성에 기반한다고 한다. 조금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문화의 힘을 창조의 힘이라고 전제하기로 하자. 문제는 이 창조성이 어떤 상태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또 더 근본적으로 창조성은 개발되거나 지원될 수 있을까?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수많은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비록 부족하지만 존재하고 있고 문화콘텐츠 업체에 대한 지원금이 막대한 액수로 뿌려지고 있지만, 이러한 정책적 지원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별반 없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성을 만들어내는 정책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자면 대부분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정책의 기대 예측이 번번히 빗나가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문화를 다루는데 있어 문화 생산과 향수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창조성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 위치로부터 기원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창조성에 대해서 학습하는 사람이 아니다. 창조적 행위는 안정적인 기반에서 벗어나 있는 주변적 위치와 상관적이고, 변화의 욕구에 의해서 가동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문화)정책이 움직이는 방향은 대부분 안정화와 시스템을 만들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는 창조의 힘을 평준화시킨다. 특히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민간의 욕망조차도 대부분 같은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라고 할 때 그 정책의 제도적 속성은 과정 속에서 매우 강화되기 마련이다.나는 그 한 사례를 최근의 복권사업에서 본다. 최근 사회양극화 문제가 의제화되면서 대부분의 예술 정책도 사회복지적 틀 속에서 조율되고 있다. 어느새 예술은 치유의 힘으로 국한되어 버리고 있고, 예술이 치유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강조 속에서 예술은 아주 부드러워지고 있다. 예술이 가진 적나라한 존재를 드러내는 힘, 현실을 넘어서는 불편한 힘이 사회적 필요와 일대일 대응관계로 조율될 때, 예술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조차 생기게 된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관행적인 지원틀을 깨고 창조력을 기반을 강화하는 지원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문화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문화정책에서 창조력을 지원하는 의미를 숙고할 때가 되었다./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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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3.15 23:02

[문화마주보기] 등록문화재로 부활하는 '옛 담장' - 나종우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에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과거에는 슬프게 하는 것들이 오늘은 기쁘게 하는 것들로 바뀔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irony)일까.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얼마 전에 있었던 두 가지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 그 하나는 최근 들어 새로 만들어 지는 제도 가운데「등록문화재」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사업 중의 하나인 「묵은 동네 담장 등록문화재」 등록과 관련하여 현지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다. 이 제도는 그 대상이 생성된 후 50년을 경과한 문화유산 중 우리나라 근대사에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이 되고,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등이 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건조물, 시설물, 문학? 예술작품, 생활문화, 역사? 인물 유적 등이 모두 포함 되는 셈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시골 마을에 퇴락해 가는 상징처럼 여겨지는 묵은 동네의 담장이 그 대상의 하나가 되어 조사를 한 것이다. 우리 전북의 경우 세 곳이 있었는데 어느 곳은 퇴락한 명문가(?? )의 애잔함이 남아있고, 어느 곳은 150여 호의 마을이 이제 80호로 줄어들어 여기 저기 빈집들이 을씨년스런 마을의 담장이기도 하다. 어느 것은 흙으로 된 토담들이고 어느 것은 돌담들이고, 또 어느 것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 들이다. 어느 것이든 한결같이 숱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라져 가는 것들-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문화유산의 이름으로 앞으로는 사랑 받는 존재로 다시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일은 지난해 가을 개성을 다녀온 뒤의 느낀 소감이다. 개성을 세계문화유산 역사도시로 등재하기 위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조사였는데 과거의 남아있는 문화유산, 또는 이제는 텅 빈 폐허의 자취들, 이런 것들을 정비하고 새롭게 조명하려는 작업이었다.우리 전북은 과거 긴 농업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그 삶의 현장이 그 의미를 잃고 뒤로 밀려나는 현실의 풍경이 되었지만 이제 그러한 현실의 풍경은 풍경을 넘어서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요소로 자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쩜 묵은 담장만이 아닌 등록문화재의 요소는 우리전북이 가장 풍부한 지도 모른다. 관계당국에서는 이런 제도를 홍보하여 의미를 갖게 될 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로 다시 태어 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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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3.08 23:02

[문화마주보기] 복고, 혹은 온고지신 - 김정수

최근 원판 ‘혹성탈출’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삼십년 전쯤 티비에서 처음 보았던 나는 상당 기간 이 영화가 흑백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았다. 흑백 티브이 세대의 아픈 상흔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대부분 장면들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영화가 남기려했던 메시지만은 비교적 정확히 남아있었다. 불시착 했던 낯선 혹성이 지구였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바닷가 장면의 처절한 순간과 쓰러져 있던 자유의 여신상만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컴퓨터 그래픽 없이 수제 특수분장을 사용한 이 영화가 몇 년전 다시 만들어졌던 신판 혹성탈출에 비해 훨씬 단단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생각했다. 그건 내 생각 뿐만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전형적인 컴퓨터 세대인 두 아들들도 그 사실에 동의해주었다. 비교적 함께 영화 보는 시간이 많은 편인 우리, 조금 오래된 영화를 볼라치면 나는 “참 괜찮은 영화지. 그지?” 라며 은근히 옛날 거 무시하면 안 된다는 쪽의 멘트를 날린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시대도 제법 괜찮았음을 과시한다. 기성세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수작이긴 하다.이번 겨울방학에는 ‘스타 워스’ 꿰맞추기를 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삼 십년 전부터 4편, 5편, 6편 순서로 제작되었고, 에피소드란 이름으로 1편부터 제작되었기에, 그동안 뒤죽박죽이 되어 있던 스토리를 1편부터 차근히 정돈해 두자는 취지였다. 아들들의 강력한 도움으로 진행된 이 영화보기를 통해 오래된 영화들이 훨씬 인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술한 만큼 로봇 하나에서도 인간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다.요즘 복고댄스가 한창 인기다. 어느 세대에 물어봐도 자신들의 춤이 아니라 하니, 어느 시기로 복고 했는지 아리송하긴 하지만, 나이트댄스와 테크노댄스를 적당히 버무려 놓은 듯한 이 춤이 일단 ‘복고’ 자체를 하나의 유행상품으로 띄워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티비 드라마의 복고도 활발하다. ‘청춘의 덫’에 이어 김수현의 ‘사랑과 야망’이 이십년만에 브라운관에서 재연되고 있다.이 같은 양상에 긍적적 평가도 부정적 평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태리의 문예비평가 폴티는 서른 여섯 가지 극적 경우로 모든 소설과 드라마를 분류한 적이 있다. 실제로 많은 이야기들은 그 범주 안에서 진행된다. 그것이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폭이며 상상력의 크기다. 그러기에 옛것을 통해 새로움을 배우라는 조언은 여전히 큰 설득력을 얻는다.복고가 유치하고 촌스러움의 표상으로 희화화되는 일은 문제다. 지난 시대에 존재했던 문화적 상황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 안의 삶을 존중함으로써 진정한 온고지신이 가능해질 거라 믿는다. 세대 차이? 그리 문제될 일이 아니다. 우린 함께 살고 있고,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없이 공감할 ‘그 무엇’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김정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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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3.01 23:02

[문화마주보기] 꽃과 만년필과 핸드폰과...

받아야 할 만큼 별다른 일도 아닌데 작은 꽃다발 하나를 받았다. 꽃에 대한 기억이라면 여전히 좀 생소하기도 하고 한구석이 설레는 각별함도 있어 안개꽃에 묻힌 장미 서너송이는 오래도록 가슴에 꽂혀 주고받은 그 사소함으로 시들어 갈 것이다.이맘때면 학교마다 졸업식이 한창이고 이어 새내기들 입학식도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주말엔 봄기운에 맞춰 행진하는 젊은 쌍들도 부쩍 띈다. 따로 짬을 낸다든지 제 철이 아니고서 이 만큼의 꽃송이들을 거리에서 눈동냥 하기란 여간치 않아서 남의 공치사라고해도 공연히 은근해지곤 하는 것이다. 그렇듯 꽃이 있는 풍경들은 얼마든지 따사롭고 갸륵해도 좋을 성 싶겠지만 때론 다소 치우치는 면도 있어 한 때는 관에서까지 가로 나서는우화를 빚기도 했었으니. 꽃과 함께 크고 작은 선물들을 받기도 한다. 학창시절의 선물에 관한 유서를 따르자면그 옛날의 공책에서부터 한참 주가를 올리는 노트북에 이르도록 나름의 세태를 반영하는것들이 주종을 이루어 왔다. 주는 이의 정성이 우선인 건 틀림없겠으나 요즘은 받고 싶은사람의 바람을 먼저 고려해야 할 만큼 구체적이고, 어지간한 것으론 생색조차 낼 수 없을정도로 드는 비용도 만만찮은 것들이 많다. 그 가운데 으뜸으로 유행하는 것은 핸드폰이아닐까 싶다.중 고등학생쯤은 물론 웬만한 초등학생들의 주머니 속에서도 쉽게 만져지는 그것. 언제부턴가 생필품화 되어버린 그것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 일지, 단지 소통의 도구로써가아니라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도 경이롭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단순한 수첩 기능에서부터 계산기, 사진기, 인터넷, 그리고 이제는 위성수신 능력에 까지 무소불위로 그 영역을넓히는 그것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가다가도 얼핏 씁쓸한 맛을 다실 때가 있다. 문자메시지라는 걸 받아볼 때 이따금 그렇다. 긴급한 연락이라든지 피치 못할 사정이 담겨진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하장을 대신해서 날아드는 연말연시의 수많은 문자들, 모임 약속이나 애.경사 알림은 이미 오랬고 심지어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문안마저도 글자 몇 개로 갈음하는 매트릭스적 세상이 된 것 같아 유감스러운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핸드폰인지도 모르겠다. 손바닥 한 번 쥐었다 펴는 시간과 비용으로 그만한 효용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을 몇이나 셀 수 있을까? 반면 그것의 편리함 속에는 뜸한 불편함도 들어 있다. 먼 길이라도 떠나와 그것의 배터리가 닳아버렸을 때, 마침 통화해야 할 일이 생겨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그쯤 있어야할 전화부스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렇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조금은 번거로움을 덜게(?)된 직업이 있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마 집배원일 것이다. 따로 소포를배달해주는 택배회사들이 생긴 탓이 아니라 여타의 서신은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대신 해버리므로.누구한테서 인가 받은 지 꽤 오래된 선물이 하나 있다. 만년필이다. 소지품 중 가장 애지중지 하는 것으로써 이 만년필을 꼽는다. 명품이 아닌 그것은 그 때 담았던 마음들을변함없이 또박또박 적어주며 낯 설은 세월을 위로해 왔다. 갈수록 책상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도 백지를 펼 수 있는 여분의 생각만큼은 남겨두고 싶은 것인데마음은 자꾸 편한 것들만 닮으려 해서 탈이다. 한밤중 깨어 다시 잉크를 채워본다. /김유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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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2.22 23:02

[문화마주보기] 문화 만들어가기 - 전효관

얼마 전 내 일상을 돌아볼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는 서비스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아이들과 조립하고 놀아주는 것이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꽤 피곤한 노동이기도 한 나는 그 서비스의 유혹에 유혹 당했다. 또 하나는 비만을 치유할 지방분해 약품 주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요즘 옷이 맞지 않는 내 몸을 보면서 잉여 칼로리 소비로 고민하던 나는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대신 약물로 지방을 분해할 수 있다는 말에 의사를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내 정서적 노동이 투입되었야 할 일, 그리고 내 몸을 관리해야 하는 일을 상품 구매로 쉽사리 처리하고 싶어지는 나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러는 나를 보면서 100% 상품 세계에 둘러싸인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상품 질서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얼마만큼일까 의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순도 높은 상품질서에 둘러싸인 내 욕망의 구성 자체가 결국은 기계와 다를 바가 무엇인지 고민에 빠져 들었다. 자본주의는 이제 단순히 삶의 존재를 유지하는 물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내 감정과 행복을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감있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쾌락을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매일 광고에 넘쳐나는 메시지는 그 약속이 곧 여기에서 실현된다는 믿음을 강요한다. 자동차를 구매함으로써 가족의 행복을 얻고, 아파트를 잘 선택하면 웰빙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는 것이다.그렇지만 그 약속이 확실하다고 믿는 순간, 나는 그 상품 질서 내에서만 존재한다. 아마도 상품 질서 내에 존재하는 나는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이다. 왜냐면 내 욕망과 신체를 조정하는 서비스가 나라는 존재가 구매를 통해 투여한 환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환상과 대면하는 순간, 공허감과 무력감이 나를 지배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결여된 존재의 문제를 상품과 서비스로 대체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막다른 선택에 내몰린 느낌이 있다. 문화는 상품 질서와는 다르게 존재의 결여를 채우고 자율적 연대를 통해 서로 만나는 힘이 되어야 하지만, 문화 역시도 그 힘을 가시화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문화적 실천이 이 힘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자율적이고 자구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생성의 힘이 될지 결정적인 선택에 직면하고 있는 느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화가 삶의 기쁨과 존재 이유를 구성하는 에너지가 되는 작은 실천을 나로부터 도모해보는 것을 꿈꾼다. /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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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2.15 23:02

[문화마주보기] 문화관광의 문화산업화 - 나종우

지방자치 실시 이후 각 지방 마다 관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관광을 내세우기 위해 문화관광 이라는 용어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지방, 어느 도시든지 그 명칭 앞에 ○○ 문화관광도시 라는 말을 수식어처럼 내 걸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관광개발이란 관광자원으로서 차지하는 문화유산(유형? 무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관광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경제성장이 문화발전을 담보로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문화적 수준과 창의성이 경제를 이끌어 간다고 보기 때문에 문화를 상품화하고 경제적 가치로 바꾸는 문화의 산업화가 큰 관심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문화산업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관광산업이다. 관광산업도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져야 한다. 관광이 한가한 여가 생활로서 즐김의 놀이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지식을 확충하고 새로운 문화체험을 위한 필수적인 지식정보 습득과 현장학습 활동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광의 추세가 과거의 보았다 해봤다 식의 관광에서 휴양관광, 문화관광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는 온천지역이 인기여서 이곳에 모여들던 사람들이 이제는 전통문화의 현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문화관광의 현장이 바로 문화유산이 풍부한 전통문화의 고장이다. 우리전북의 경우는 관광을 구체적으로 구상하여 계획되고 시행한 것이 15년이 지났지만 대체적으로 몇 번의 변경된 계획들이 기본 틀에서는 크게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전략 구상에서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관광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관광산업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의 바탕위에서 정책수립이 이루어져야하며, 또한 지역의 전통문화에 대한 충분한 지식기반 확충위에서 새로운 전략의 관광개발을 미래 지향적으로 구성해야 된다. 다음으로는 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라는 것이 일시적인 관광 상품을 가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관광자원으로서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 문화관광의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 또한 관광상품 가운데서 특히 문화상품이 되게 하려면 예사 상품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문화적 기능을 띠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와 이벤트화라는 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문화관광이 문화산업이라는 안목에서 새롭게 추진되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산업의 범주에 들어가는 출판, 음반, 게임, 영화, 방송, 기타(사진, 디자인, 광고, 공예품, 한복, 한지, 음식, 박물관 등) 모두를 전북의 문화관광이라는 틀 속에서 협력하고 이해하는 관광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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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2.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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