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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문화의 선진(先進)을 꿈꾸다

그는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1920년대 농촌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단편소설 <고향>(현진건)의 첫 대목이다. 조선과 일본, 중국의 옷이 섞인 외양 묘사는 주인공 ‘그’의 험난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궁핍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간도와 일본 탄광을 떠돌았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진 것이 없다. 그사이 부모도 잃고, 결혼을 약속했던 고향 처녀는 유곽에 팔려간 뒤였다. ‘그’의 운명은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그’의 옷차림새는 중국과 일본, 조선천지를 부랑하며 살아갔던 삶의 제유(提喩)이다. 이처럼 소설가는 인물의 몸과 옷차림의 인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대상의 성격과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디 소설뿐이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개성 있게 드러내기 위해 패션에 신경을 쓴다. 옷은 우리 몸의 최종 표시물이다. 옷차림은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첫인상이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는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고 한다. 상대를 보고 7초 안에 열 가지 이상의 이미지를 상상한다고 하니 놀랍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일상에서 옷의 선택과 개성 표출에 관심을 많이 갖는다. 옷은 사회문화적 기호이다. 인간 삶의 필수요소인 의식주 중에서 그 첫 번째 항목에 옷(衣)을 내세운 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옷은 우리의 삶을 뚜렷하게 형식화한 문화기호임에 분명하다. 옷은 신체 보호나 자연에 대한 적응, 사회적 위치나 계층, 직업을 드러내는 도구적 속성이 있으면서도 표현 욕구의 기능도 함유하고 있다. 옷은 개성과 멋을 드러내는 장치이면서 취향을 표현하고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옷을 ‘무성(無聲)의 언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옷은 문화 기호이기 때문에 나름의 표현 형식(기표)과 의미(기의)가 있고 사회생활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문법이 있다. 자신의 패션에서 건전한 가치관이나 의식, 타인과 공유하는 공감의 기호 표현이면 다행이다. 반대로 내면의 자기 세계와 상관없이 사치와 겉치레, 가식의 문법만 작동한다면 한심할 노릇이다. 자신의 경제능력과 상관없이 명품 브랜드만 찾거나 과시를 위한 패션에 함몰되면 안 된다. 이는 타인 흉내에 빠져 자신을 속이는 위선일 뿐이다. 반면에 평범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도 자신 있게 자기 생활을 가꾸는 멋진 젊은이도 있다. 이들에게서 예의와 정중의 기호와 함께 자신감과 진정성이 있는 몸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 엊그제 한옥마을에 다녀왔다. 한복 체험을 하며 과거와 공유하고, 현재 삶의 여유를 즐기는 젊은이가 유쾌해 보인다. 여행복도 화려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옛날 옷 체험 이벤트가 더욱 확대되어 중요 유적지에서 삼국시대 옷 입기, 고려 옷 입기, 조선군 군복 입기 체험 등이 확산된다면 꽤 흥미로운 여행의 멋이라고 생각했다. 옷은 겉치레의 끝판왕이 아니다. 배냇저고리로부터 시작하여 수의(壽衣)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옛 것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문자이다. 한복 입기 체험을 하는 젊은이들이 여유 있는 시선으로 우리 옷의 세계화에도 관심을 갖기를 기대했다. 이것이 옷 문화 선진(先進)의 시작이다. 옷은 날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가 담겨있는 상형문자이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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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9 13:21

변호사 우영우와 ESG의 E

얼마 전 평소 긴밀하게 지내는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환경·사회·거버넌스를 뜻하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딴 ESG에서 ‘E’에 해당하는 정확한 단어가 무엇이냐는 내용이었다.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엔 이견이 없는데, 환경을 두고는 ‘Environmental’과 ‘Environment’를 두고 어느 게 맞는 표기인지 갑론을박이 있다는 전언이었다. 인터넷의 백과사전에서는 물론 다른 많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도 비슷한 비율로 영어표기가 형용사와 명사로 엇갈렸다. 맞는 표기는 ‘Environment’이다. 원래 투자용어에서 유래한 ESG는 사회책임 관점에서 투자대상 기업을 고르는 기준이다. 사회책임투자(SRI)에서 투자대상 기업을 선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모두 명사이어야 한다. 그럼 ‘사회’는 ‘Social’보다 ‘Society’가 맞는 것 아닐까. 답은 간단하다. ‘Social’ 또한 명사이다. 투자대상 기업을 고르는 기준이 ‘사회’일 수는 없다. 기업이 사회와 관계를 맺는, 사회적인 양상을 살피며 투자적격 기업을 선별한다. ‘Social’은 기업경영의 사회적 측면을 뜻하는 내용상의 명사이다. 환경ㆍ사회ㆍ거버넌스를 뜻하는 ESG로 쓰면 되니까 영어표기에 정색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반론이 예상된다. 형용사가 본질에서 주어를 설명하는 보어로 사용되거나 명사를 수식하는 용도로 활용되기에 언제든 명사에 치여 희미해질 수 있다는 걱정은 단지 기우일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이다. 제작진이 극중에서 장애를 다루면서 세심하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극의 구조상 이 드라마에서 장애의 소비가 불가피하다. 드라마에서 장애인으로 그려진 우영우는, 우영우를 뺀 현실의 거의 모든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에겐 별똥별이나 기러기처럼 비교를 불허하는 저 높은 곳의 존재이다.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인 것이 흥행의 핵심 요소이다. 너무 압도적인 그 탁월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장애가 사용됐다고 말한다면 세상을 너무 삐딱하게 보는 것인가. 우영우는 현직 대통령 윤석열을 포함한 서울 법대로 통칭되는 엘리트 집단의 주변인이지,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의 대표가 아니다. 물론 우영우가 현실의 인물이라면,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여 대중예술로 재현한 것이 아닌 진짜 편견과 차별, 소외에 투쟁한 진짜 피와 살로 된 그 실제 인물이라면 그는 삶으로 장애를 공유하기에 장애는 장식이 아니다. 즉 장애는 수식어나 형용사가 아니라 주체이자 명사가 된다. 반면 서울 법대 수석 서울 의대 수석 등을 내세워 엘리트 집단의 정점과 그 집단 내 주변부 사이의 대비를 극대화한 상업주의 드라마에서는 장애인이 사라지고 특출한 변호사 ‘불구하고’만 남는다. 자폐스펙트럼이란 형용사가 탁월한 변호사를 수식하고 증발했다는 견해는 ESG에 더 주효하게 적용된다. ESG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E이다. 일각에서 E를 형용사로 만들어 ESG의 뒷전에 두려 한다는 우려가 전해진다. ESG의 모든 현장에서 E가 ESG의 맨 앞에 자리한 확고한 명사임이 기억돼야 한다는 생각이 우영우를 보며 들었다. ESG는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ESG가 아니다. E가 형용사이어서도 안 된다. 영어표기가 생각보다 중요한 사안 같기도 하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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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2 14:00

기대를 실현으로, 닻 올린 희망 교육 공감

전북교육의 희망이 도민의 기대와 함께 시작됐다. 선거에는 유권자의 소망을 정확히 보여주는 최다득표의 진실함이 있다. 그래서 전북교육은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손질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은 타당하다. 이제 공약도 중요하지만, 12년간 눌어붙은 세세한 교육을 조각조각 들여다보고, 이을 것과 바꿀 것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선거에서 3선은 허용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항간의 진솔한 얘기는 12년 굳은살에 대한 절박한 평가를 표현한다. 교육은 아이를 바른 성취에 도달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도민에게 교육이 절박한 이유는 인재양성에 대한 약속을 함께 품고 싶은 소망에 있다. 7세에서 19세, ‘만들어진다’는 말이 가능할 이 시기의 아이들을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초․중등 교육에는, 교육 수장의 이상적 가치 못지않게 현실 여건을 적용한 교육적 실현도 중요하다. 그래서 도민은 그 대응력으로 학력향상과 대입지원을 크게 주문하지 않았나 싶다. 실사구시를 강조한 새 교육감이기에 이것의 실현에 거는 기대도 크다. 타 시·도에 현저하게 뒤진 미래교육, 곧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부추긴 자유학기제, 천천히 가자는 말로 동력을 늦춘 고교학점제 등에 대해서는 독선의 반교육부 정책으로 전북 아이들의 교육 수혜에 구멍이 뚫리게 만들었다. 학점제를 위한 그린스마트학교 추진이 전북에서 유독 어려운 것은 이런 맥락의 현재진행형이다. 자기 이해부터 탐색, 성숙, 결정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적용하지 않고 예산만 현장으로 내려 보내는 진로교육 실태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진로결정, 고교학점제, 학생부 평가를 이어 감으로써 대입 수시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초․중․고 연계적 시스템을 교육청에서조차 각성하지 않았나 싶다. 기초학력조차도 학력의 역량 요소로 해석해 인지영역에 대한 기초를 소홀하게 다뤘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의 교육 정책은 촌각을 다투어 바로잡혀야 한다. 특히 기초학력과 진학은 학생중심의 으뜸 정책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모두가 고무적으로 바라봐야 할 일이다. 학생자치를 학생의회제로 확대 강화하는 방향성에 아이들의 더 큰 성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학교자치의 상향식 의결 방식 속에 절대화되었던 교사 자율성도 그 진솔함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율적 의지에 교육자로서의 책무성은 어느 정도의 바탕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교육보다는 개인의 편의함에 비중이 컸다면, 자율성과 책무성의 균형감 의식도 학교문화에서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영역이다. 교사 의식은 교육 실현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이다. 앞으로 추진할 많은 계획이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교육적 성과로 도달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전제한 교사문화의 기반이 절대적이다. 정책은 교육청에서 시작하지만 실행은 학교문화 속에서 교사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희망의 닻을 올린 전북교육은 할 일도 많고 챙길 것도 많은 조직적 실체다. 방향성도 중요하지만 적용과 실행을 살피는 것은 더 중요하므로,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의 조화로움이 정책에서 중요한 묘수가 될 것 같다. 대외성과 대내성의 균형, 현장 적용과 지원을 살펴가는 정책, 소통과 협치 속에 세세한 교육 현장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이며 궁극이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현장이 체감하고, 교사가 함께 하고, 도민이 응원하는 전북교육의 대전환이 모두의 공감으로 더 큰 힘을 받기 바란다. ‘더불어, 미래를 여는 전북교육’에 동참하고 응원하면서 모두가 한 목표를 향해 진지하고 진솔한 뜻을 수렴해 가야 할 일이다. /송영주 군산동고 교장 △송영주 교장은 전북교육청·전주교육지원청 장학사 등으로 활동했으며, 전주시 창의인성교육지원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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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6 13:48

대통령이 풀어야 할 ‘소통 방정식’

윤석열 대통령은 참모 뒤에 숨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열린 소통을 강조했다. 거의 매일 언론과 마주하고 있다. 이전 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상징적인 변화다. 출근길 문답이다. 하루짜리 중단 소동이 있긴 했다. 프레스센터가 대통령 집무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국민제안’이 개설됐다. 온라인 대국민 소통 창구다. ‘102 전화 안내’도 등장했다. 윤석열의 ‘열’에서 10, ‘귀 이(耳)’에서 2를 따왔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다. 소통의 뼈대는 만들어졌다. 문제는 조금씩 벌어지는 이음매에 있다. 인사가 만사라 하지 않는가. 검찰 편중 인사는 검찰 공화국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부실한 검증은 잇단 장관급 낙마를 불러왔다. 급기야 사적 채용 논란까지 이슈로 떠올랐다. 대통령의 언어는 거칠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 즉흥적 감정 표출, 특유의 직설화법이 그것이다. 어설픈 실언이 설화로 눈덩이가 됐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이런저런 얘기들도 한 몫을 거들고 있다. 윤 대통령의 표현처럼 대통령을 처음 해본 것이기 때문일까. 하루가 멀다시피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훌쩍 취임 두 달이 지났다. 탈권위의 신선한 파격이 생경한 걱정거리가 된 형국이다. 집권 여당 내부의 권력 싸움은 임계점을 넘었다. 볼썽사나움 그 이상이다. 성상납 의혹을 받는 대표는 징계로 떠돌이 신세가 됐다. 윤핵관과 당권 주자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치열하다. 문재인 정부와의 갈등 지수는 급상승 중이다. 탈북 어민 북송 사건과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제대로 얽혔다. 그야말로 정치가 민생 경제를 덮어버렸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3고(高) 위기에 코로나 19는 재유행 국면에 진입했다. 모든 영역이 끓는점으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만이 데드크로스를 지나 ‘자유낙하’ 중이다. 대통령이 불안한 뉴스메이커가 되고 있다. 소통의 힘은 뼈대가 아닌 이음매에서 나온다. 갈라진 틈을 메우고 하드웨어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야 한다. 빗물이 새면 아무리 좋은 벽지라도 얼룩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통의 소프트웨어는 윤 대통령이 내건 공정과 상식이다. 대통령의 ‘통(統)’은 통치를 의미한다. 일방향이다. 통(統)한다고 통(通)할 수 없다. 통(通)해야 통(統)할 수 있다. 통(通)은 쌍방향이다. 국정운영의 방점을 소통에 둬야 하는 이유다. 민주 국가에서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이 있다. 권력-언론-국민이다. 대통령의 언행, 언론의 보도 양태, 여론지지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느 하나라도 흔들리면 곧바로 위기 국면이 조성된다. 고작 두 달이 지났는데 레임덕에 빗댄 ‘취임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여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감의 ‘쩍벌’이 오만한 독선으로, 불안한 ‘도리도리’가 준비 안 된 산만함으로, 힘찬 ‘어퍼컷’ 이 안하무인의 무모함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성찰해야 한다. 수학계 최고상인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수학은 어렵기 때문에 재미가 더 크다”고 말했다. 소통도 수학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문제를 풀면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윤 대통령 앞에 놓인 소통 방정식에는 해법이 있다. 손에 손잡는 덧셈과 서로를 끌어안는 곱셈을 디딤돌로 활용하는 것이다. 상대를 외면하는 뺄셈과 갈라치는 나눗셈은 걸림돌일 뿐이다. /박종률 우석대 교양대학 초빙교수 △박종률 교수는 제 43대·44대 한국기자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언론중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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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9 13:35

K-culture, 이제는 시조(時調)이다

한류 문화 열풍이 뜨겁다. K-drama, K-pop을 위시하여 음식, 옷, 일상 소품까지 우리의 문화 산물이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K-culture의 전성시대이다. 작년 이맘때 전 세계인은 <오징어 게임>에 매료되었다. 이 드라마의 제작비는 220억 원이지만, 경제적 가치는 104조원으로 추산한다고 하니, 실로 문화 콘텐츠는 국가적 위상을 결정하는 가늠자가 되기도 한다. K-culture가 세계화의 중심에 있으면서 인류 문화의 대명사로 자리할 때까지 우리에게는 어떠한 전통의 힘이 있었을까. 한류 문화 콘텐츠가 전 세계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데에는 우리 민족의 예술적 감수성과 공감의 감성적 코드, 창의적 상상력이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이를 즐기며 세상을 다시 볼 줄 아는 여유와 흥이 있었다. 이제는 한국의 전통 문화가 함유하고 있는 정신과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고 이를 현대화하여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문학양식인 시조도 그중 한 예이다. 시조는 육당의 선언대로 ‘조선 문학의 정화(精華)이며 조선시가의 본류(本流)’이다. 3장 6구 형식으로 구성된 시조는 고려 말에 발생하여 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세계 유일의 시 형식이다. 시조의 시상 전개는 ‘대상 → 관계 →의미’의 사고과정을 거친다. 즉, ‘문제적 상황 제시’, ‘매개적 연결’, ‘변증적 종합’의 사고의 틀을 거쳐 완결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미학적 특질 때문에 시조의 교육적 가치는 지대하다. 시조의 감상과 창작을 통해 ‘성찰을 통한 인성 함양’, ‘소통과 관계 형성’, ‘경험 공유와 공감’의 교육 효과가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의 시조 교육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초등학교에서 시조 교육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고, 중고등학교에서도 고시조 감상에만 매달리고 있다. 시조는 발화의 주체와 그 대상이 명료하여 관계 지향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소통과 공감의 제재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문학의 생활화는 멀리 있지 않다. 어른과 아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공유제로 시조가 활용되길 바란다. 일본에서는 전통 시형식인 ‘하이쿠’를 짓고 즐기는 애호가만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왕이 주관하는 신년하례행사 때마다 전국 하이쿠 경연대회를 열어 일본 문학의 세계화에 노력한다고 하니 부럽기도 하다. 우리 지역은 시조문학의 성소(聖所)이다. 시조의 현대화에 온몸을 바친 가람 선생의 정신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시조부흥을 외친 선각들의 정신을 이어 전북이 시조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이는 《시조교육관》의 건립으로부터 시작된다. 전국에 작가를 기리는 시조문학관은 많지만 교육관은 한 곳도 없다. 이 기관을 통하여 시조의 세계화 방안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시조를 즐기며 새 세상을 꿈꾸는 이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들은 분명 K-culture를 선도하는 동량(棟梁)으로 성장할 것이다. “바람도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가람 선생의 시조 「별」을 노래로 불러보다 드는 생각이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김용재 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교수협의회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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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2 13:20

연못에 수련 키우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

연못에 수련을 키우고 있다. 그 수련은 하루에 2배씩 면적을 넓혀 나간다. 만약 수련이 자라는 것을 그대로 놔두면 30일 안에 연못을 완전히 뒤덮어 연못 속의 다른 생물은 모두 질식해 사라져 버린다. 29일째에 수련이 연못의 절반을 덮었다. 연못을 모두 덮기까지 며칠이 남았을까? 이 수수께끼의 답은 “단 하루”이다. 로마클럽이 50년 전에 발간한 <성장의 한계>에 나오는 얘기다. 원제는 “성장의 한계, 인류의 위기에 관한 로마 클럽 프로젝트 보고서”이다. 반세기 전에 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은, 50년이 지난 후에 보니 추세가 거의 맞아들어가고 있다. 기후변화 등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음을 이제는 누구나 동의한다. 주요 쟁점은, ‘29일째’라는 게 너무 비관적 진단이 아니냐는 것과 만일 ‘29일째’라면 인류에게 되돌릴 기회가 있느냐는 것으로 좁혀진다. 비관적인 이들은 우리에게 앞으로 10년가량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경고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배경은 지구온난화 대처에 실패해 역으로 얼음나라로 변한 미래의 어느 시점이다. 영화적 설정이긴 하나 그런 디스토피아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반면 에코모더니스트로 불리는 기술낙관론자들은 과학기술로 언제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이 ‘29일째’라 하여도 한나절에 연못의 절반을 덮은 수련을 걷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판이한 사태인식 가운데서 과연 공통의 해법과 행동노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현재의 사회체제와 글로벌 거버넌스를 감안할 때 그것을 찾아내는 시점엔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돼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 없다면, 소극적이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만일 요즘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ESG(환경·사회·거버넌스)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내어놓으면 많이 부족해 보일까. 그렇긴 하다. 작금의 엄중한 상황에 비해 ESG라는 방법론이 너무 유약해 보이고,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한다. 다만 더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론이 없지는 않겠으나 구호를 외치는 것과 현실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ESG자본주의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모색한다는 이런 발상은, 인류가 만들어놓은 지금 체제에서 그나마 수용될 수 있는 생각일 것이기에 해보자고 주장하게 된다. 비관론과 낙관론 중 누가 맞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까닭은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인데, 유의할 것은 변수 중엔 의지라는 핵심 변수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ESG라는 방법론이 더 나은 미래를 열어줄지가 확실하지 않지만,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전세계적으로, 이심전심으로 합의한 게 ESG인 만큼 그 길을 가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ESG가 지금으로선 인류의 의지인 셈이다. 이때 ESG는 할 수 있는 최대가 아니라 최소라는 점이 꼭 기억돼야 한다. 사람의 웃는 얼굴과 비슷해 ‘웃는 돌고래’로 불리는 희귀종 민물 돌고래 이라와디 돌고래가 지난 2월 멸종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몸길이 2.6m에 몸무게 110kg이 나가는 수컷 돌고래는 25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앞으로 더 비극적인 소식을 더 많이 접하게 되겠지만, 수백년 축적된 오류를 1~2년에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각자가 더 나은 사람, 모든 조직이 더 나은 조직이 되어 가는 원론밖에는 다른 해법이 없다. 언행일치하는지 모르겠으나 구글의 모토는 “올바른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이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안치용 ESG연구소장은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이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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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5 14:36

다시 돌아보는 일상용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란 구절이 담긴 1863년 11월 펜실베니아주 북군 전사자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행한 2분여의 짧은 ‘게티즈버그 연설’은 링컨대통령의 작품이다. 말이나 연설은 시간과 공간적 배경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누가 어디에서 누구를 상대로 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즉 말을 한 사람의 ‘힘’과 그 연설을 들은 청중들의 분위기와 수준이 명언 또는 명연설로 판가름이 되기 때문이다. 키보드를 몇 번만 두드리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자막이나 영상으로 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독서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지식을 쌓아가고 정보를 얻어가며, 생각하는 훈련과 사유하는 시간에서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리라. 그런 일환으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황소, 도루묵, 인절미, 당신, 자기⌟등의 어원을 알아본다. 언어학적 연구나 사실에 기반 하지 않고 어형과 의미의 우연한 유사성에 근거해서 유래를 찾는데 그것을 민간어원이라 한다. ‘황소’는 누런 소가 아니라, 큰 소를 가리키는 말로 15세기의 ‘한쇼’로 한쇼는 ‘크다’를 뜻하는 ‘하’의 관형사형 ‘한’과 ‘소’가 결합된 단어로 ‘한’은 한길, 한밭, 한울님(하느님), 한글의 뜻과 같다. 언제부턴가 ‘한’을 한자 황(黃)을 써서 황우(黃牛)로 해석해서 황소라고 하면 누런 소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도루묵’은 여러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함경도 피난길에 올라 고초를 겪는 상황에서 목(木)이라는 물고기가 수라상에 올라 허기진 배를 채웠다. 고마움에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후, 그 은어가 다시 수라상에 올랐는데, 예전의 맛이 아니어서 은어라는 이름을 삭탈하고 다시 옛 이름 ’목‘이라 부르라고 했다. 이때부터 도로목(도루묵)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기대를 잔뜩 끌어올린 상황이 헛수고가 되었을 때 “말짱 도루묵”이라 한 것과 연결이 된다. 한편 도로묵을 한자어로 쓰면 환목어(還木魚) 다시 목어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인절미’의 유래는 조선 16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는데, 인조가 지금의 공주(公州) 공산성으로 피난을 했을 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찹쌀로 떡을 만들어 진상을 했다. 맛있게 먹은 왕이 떡 이름을 물었는데 이름이 없다고 하자, 임씨가 만든 매우 맛있는 떡이라 해서 임절미(任+ 絶味)라 했다 한다. 뒷날 음의 변화로 임절미에서 ’인절미‘로 불리고 있다.’당신과 자기‘의 용어다. ‘당신’이 이인칭 대명사로 쓰일 때 잘 못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은 부부간에 호칭으로 쓰이거나, 싸울 때 상대를 낮춰 부를 때 ‘당신이 뭔데 나서는 거야?’라고 쓰이면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릴 수도 있다. ’어머님 생전에 당신께서‘로 쓰일 때는 삼인칭대명사다. 최근에 자주 쓰이는 ’자기‘라는 단어는 당신, 그대, 자네 등의 이인칭대명사들이 쓰이는 자리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연인들끼리 주로 쓰기에 때와 장소, 분위기를 잘 맞춰 사용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이외에도 많으리라. 요즘은 원칙 없이 줄여 쓰는 말로 인해 세대 간의 대화가 황당하게 불통되는 기류가 이뤄지고 있는 미묘한 사회풍조다. /김형중 에세이스트·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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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8 13:42

실업팀 창단붐 일어 전북체육 제2의 르네상스 기대

지난 6월 1일 끝난 지방 선거 시기에 덩달아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도내 언론사에서 발표되는 여론조사 추이를 매일 점검하며 후보들을 찾아다녔다. 바로 지자체 실업팀 창단과 운영 관련 사업 때문이었다. 후보들과 대부분 선거사무소에서 미팅이 이뤄졌지만 초를 다투는 후보들이 현장에서 만남을 요구하면 군말 없이 현장 출동을 감행했다. 논두렁에서부터 동네 어귀 마을회관까지 만나기 원하는 장소는 상관없었다. 14개 시군을 하루 300~400km 거리를 돌며 강행군을 지속했다. 시장 군수 캠프만 찾은 것이 아니라 도 예산을 심의하는 일부 도의원 후보들의 방문도 빼놓지 않았다. 지자체 실업팀 창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면 지옥의 불속이라도 뛰어 들어가야 할 처지였다. 예전 전북은 체육 분야가 유독 강했다. 70년대에 전성기였고 90년대 초반까지 전국 16개 시도 중 상위권의 종합순위를 유지했었다. 1974년 서울에서 열린 제55회 전국체전에서는 당시 최강 서울 선수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해 도민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현재 전북 체육은 초라하다. 가장 최근 마지막으로 참가한 제100회 서울 전국체전에서 11위에 그쳤다. 전국체전의 종합순위는 그 해당 광역단체의 자존심이자 지표다. 올림픽에서 각 국가가 상위권 종합순위에 목을 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전북은 현실적으로 아무리 용을 써도 8위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가 없는 구조다. 실업팀이 없어서 출전조차 못하는 형국이다. 하키의 메카인 김제시의 경우 김제여중, 김제중, 김제여고, 김제고에서 하키팀을 육성하고 있지만 경기를 출전할 엔트리가 부족할 정도로 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키를 하려는 꿈나무 선수들과 학부형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도내에서 하키 실업팀을 창단하고 육성할 곳은 사실상 김제시청이 유일하다. 하지만 김제시는 예산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지 오래다. 김제시청에서는 여자 태권도팀이 소수의 선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기간 몇 차례 김제시에 여자 태권도팀을 존속하면서 직간접으로 하키 실업팀 창단을 유도하고 설득했지만 항상 돌아오는 반응은 늘 차가웠다. 하지만 최근 반전 분위기가 벌어지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김제시장으로 당선된 정성주 당선인을 여론조사 1위 후보에 약간 뒤쳐질 때 선거 캠프에 찾았다. 다부진 체격에 똑소리 나는 추진력의 정치인이다. 3선 시의원에 시의장 출신이다. 당시 정 후보에게 실업팀 창단의 필요성에 설명하자 그 자리에서 동의했고 본인의 시의원 시절에 항상 염두에 뒀던 사업이라고 되려 방문자들을 격려했다. 김제시에 이어 전주시 우범기 시장 당선자도 남자 배드민턴 창단을 선거기간 약속했고 순창군 최영일 당선자도 지역 학교 운동부가 있는 역도와 소프트테니스부 실업팀 창단을 공약집에 넣었다. 권익현 부안군수도 현재 운영중인 기존 요트부에 바둑을 추가 창단하겠다고 공언했고, 전춘성 진안군수도 테니스부 창단을 약속했다. 도의원 출신이어서 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학수 정읍시 당선자도 정읍중과 정읍고에서 육성하고 있는 검도와 핸드볼 전통의 강호 정일여중과 정읍여고의 핸드볼부 출신들의 타 시도 유출을 걱정하며 검도부와 여자 핸드볼부 창단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인라인 스케이팅과 복싱의 고장 남원은 최경식 당선인이 당선후 실업팀 창단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장수군수 최훈식 당선인에게는 승마부 창단을 설명해 긍정적 답변을 받았고 완주군수 유희태 군수 당선인은 완주 소양에 있는 전북체고 근대5종 선수들의 타 시도 유출을 공감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취임후 근대5종 창단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기폭점으로 지자체 실업팀 창단붐이 일어 전북체육 제2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한다. /정강선 전북도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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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1 13:44

촉법소년 사건의 심각성과 법적 관용의 한계

형벌 법령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 소년을 말하는 촉법소년은 형사미성년자라고 하여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상 처벌받지 않는다. 이러한 촉법소년은 형벌 대신 「소년법」에 따라 보호처분을 받는다. 보호처분이란 법원 소년부 판사가 소년보호사건을 심리한 결과 소년의 환경개선을 위해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내리는 처분이다. 보호처분 중 가장 강력한 처벌은 2년 이내의 장기 소년원 송치인데 형벌과 달리 전과 등의 기록이 남지 않아 소년의 장래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소년법」 제32조 제6항에서는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라고 정하고 있다. 촉법소년보다 어린 만 10세 미만의 어린이는 형사책임에서 완전히 제외돼 보호처분 대상도 되지 않는다. 처벌보다는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소년법의 취지에 따라 만들어진 조항이지만 최근 형사미성년자임을 무기 삼아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A군은 경기도 광명시의 한 학원 여자 화장실에 몰래 따라 들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B양을 불법 촬영했다가 적발돼 교내봉사 3시간 처분을 받았다. 사건 당일 학원 CCTV에는 모자를 뒤집어쓴 채 여자 화장실 앞을 서성이다 B양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주변을 살피고 뒤따라 들어가는 A군의 모습이 담겼다. 학교폭력 대책위원회에서 A군에게 내린 처분은 교내봉사 3시간으로, 학폭위는 초범이란 점을 고려해 이 같은 처분을 내렸다. 또 승합차를 훔쳐 무면허 운전을 해 특수절도 등 혐의로 조사를 받은 14세 미만의 중학생들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과거에도 40여 차례 비슷한 범행을 저지른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풀려났으며, 만 14세를 넘어선 뒤에야 검거된 사례도 있었다. 이런 법의 관대함을 악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계속 늘어나면서 기준 나이를 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서 「소년법」 개정 청원에 약 4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참여한 것을 고려한다면 개정의 필요성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반영한 의원입법으로 형사미성년자 기준을 낮추자는 소년법 및 형법 개정안이 제안된 상태다. 이처럼 촉법소년 기준을 변경함으로써 실제 '처벌'의 목적보다는 '전과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범죄를 억제하는 예방 효과를 꾀하자는 것이다. 촉법소년의 법적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것은 10대 범죄가 갈수록 잔혹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지 ‘교정 담론’에 따르면 소년원에 신규 입원한 사람 가운데 촉법소년의 비율은 2014년 1.1%에서 2020년 3.1%로 3배 가까이 뛰었다. 소년원 입원이 정도가 가장 심한 처분임을 생각하면 흉악 범죄를 저지르는 10대들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는 의미다. 그와 반대로 소년범에 대한 형사처벌이 과연 장기적으로 봤을 때 범죄감소의 수단으로의 실효성을 갖췄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 오히려 보호처분 등으로 충분히 교화될 수 있는 청소년을 처벌한다면 미리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니냐는 반대 의견도 있다. 물론 반대 의견처럼 처벌만이 유리한 해결책은 아니다. 처벌보다 교화에 중심을 맞추는 현 촉법소년 제도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반대 의견에 기반한 것이며, 원칙적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원칙이다. 하지만 강력범죄, 즉 살인, 강도 범죄 등을 저지른 촉법소년들에게 나이가 면죄부가 된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분명 문제가 있다. 과거에 비해 청소년의 정신적·육체적 성장이 빨라져, 소년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범죄의 양상도 잔혹해지고 있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SNS에 영웅심리를 가지고 자신의 범죄 행위를 올리기도 하고, 그로 인해 모방범죄도 일어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적당한 대안을 찾아 개선해야 할 것이다. /홍요셉 전북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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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14 16:10

술 술 술

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로 날마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생판 모르는 아저씨들한테 술을 얻어먹고 취하는 고아원 아이. 최인호의 단편소설 <술꾼>의 주인공이다. ‘술꾼’은 ‘술’에 ‘꾼’을 붙인 말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주량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진정한 술꾼은 주종(酒種)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모름지기 술꾼은 술시가 되면 술이 고플 줄 알아야 한다. 계절 따라 조금 다르지만 ‘술[酒]시’이기도 한 술시(戌時)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다. 그런데 한자어 ‘술(戌)’은 ‘개(犬)’하고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술 취한 개’도 거기서 나온 말일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찰떡궁합이 따로 없다. 어설픈 흉내의 뜻을 가진 말로 ‘풋’이 있다. ‘풋마늘’이나 ‘풋사랑’의 그 ‘풋’이다. 잔 것 같지 않은 잠도 ‘풋잠’이다. 누군들 양손에 술병을 움켜쥐고 태어났으랴. 다들 처음에는 남들 따라서 어설프게 마시기 시작했으니, 그 또한 ‘풋술’이다. 풋술의 대부분은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 따라주는 대로 들이붓는다. 그걸 ‘뻘술’이라고도 부른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어떤 일로 ‘회가 동해서’ 갑자기 퍼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한바탕 소나기처럼 퍼마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소나기술’이다. 술에는 장사 없다고 했다. 소나기술에 엉망으로 취한 이는 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해 곱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아, ‘홧술’도 있다. ‘홧병’을 다스리려고 마시는 술이다. 이 또한 뒤끝이 좋기 어렵다. 술이 나를 마시기 때문이다. 홧술이나 소나기술을 마시고 나면 ‘술망나니’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 일쑤다. 끊어진 필름은 무슨 수로 이어붙일 수 있을까. 술을 ‘도깨비 뜨물’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으리. 논에 물을 대려면 삽이나 괭이로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술도 물이다. 그래서 술이 들어가는 목을 ‘술꼬’라고 한다. 술을 잘 못하던 사람이 주량이 크게 늘어서 술을 잘 마시게 된 것을 두고 옛날에는 ‘술꼬가 터졌다’고 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술꾼들 아니고 무엇이랴. ‘타오르는 물’이 술이다. 술시부터 자시(子時) 끝까지 퍼마신 술은 다음날 아침에도 코나 입을 통해 알코올 기운을 활활 풍겨낸다. ‘소줏불’이다. 빈속에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을 최고로 치는 술꾼들이 적지 않다. 그걸 ‘강술’이라고 한다. ‘깡소주’를 마신다고 하지만 그건 군대식 용어를 빌려다 악으로 깡으로 마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프로기사가 되면 초단을 받는다. 다른 이름으로는 ‘수졸(守拙)’이다. 졸렬하나마 스스로는 지켜낼 줄 안다는 뜻이다. 바둑의 최고 단수는 9단이다. 그걸 ‘입신(入神)이라고 한다.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술도 바둑의 입신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지가 있다. ‘열반주(涅槃酒)’다. 한평생 술과 더불어 살다가 결국 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술독에 빠져 죽는’ 경지 아니고 무엇일까. 풋술이든 뻘술이든 상관없다. 가끔 퍼마시는 소나기술이 대수랴. 굳이 술꾼 아니라도 살다 보면 때로는 홧술도 필요하리. 출근해서까지 소줏불 좀 풀풀 날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 깡소주 퍼마신다고 누가 잡아갈 턱 있을까. 그래도 딱 하나, 열반주만은 멀리할 일이다. 입원실 병상에 며칠간 누워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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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07 15:53

인간은 욕망의 화신일까

문학인들로부터 계절의 여왕이라 칭송을 받는 짙푸른 오월에 들어 유행성 질병으로 인해 무너져가던 생활패턴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은 수억만 년을 유전(流轉)할 이 땅위에서 우연이나마 한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대단한 인연을 맺고 있다. 현대를 가리켜 어떤 사람은 탈진실의 시대라 한다. 사실여부를 확인하려는 수고도 없이 일부 극성분자들이 주장하는 이야기가 뉴스가 되는 세상, 그럴듯한 가짜뉴스가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진실은 힘의 논리에 묻혀버리는 혼돈의 시대다.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라 할지라도 행동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생명력이 떨어진다. 성선설이나 성악설 같은 인류의 오랜 논쟁으로 인간의 양극을 달리는 이중성 앞에서 종종 길을 잃고 마는 소모적인 갈등으로 인생관을 허비하지는 말고 살아가자. 1970년대 캄보디아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200만여 명을 학살한 폴 포트는 이웃들에게는 매우 친절한 프랑스역사담당 교사였다. 이처럼 인간의 모순적 본성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운 혼탁한 시대다. 원로가수 나훈아가 콘서트에서 ‘테스(소크라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며 자조하는 노래를 하자, 열성팬 일부는 세상이 종말을 맞은 것처럼 우울해 했다고 한다. 인간은 분별력이 있는 현명한 피조물이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의식한다면 태양이 새벽을 몰고 오듯 지금처럼 어두운 삶의 시간을 분명히 밀어낼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은 눈만 뜨면 다퉈야하는 사회적 갈등해소를 위한 방정식은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높고 많고 넓은 것만을 우성(優性)으로 보는 일반인들의 관념은 돈이 권력이고 행복의 전부가 되어버린 사회구조다. 먹잇감만 보면 사투를 벌이는 동물들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비겁(卑怯)한 세상이다. 행복이나 권력은 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얻어진다. 그러나 그 뒤끝은 비극을 불러온다. 그러기에 과욕을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과 억제하고 조절하는 절제력으로 자기를 지켜내야만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극한상황에서도 이성으로 인내하면서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그가 바보여서가 아니라, 법제화된 사회규범과 자신의 인격을 지키려는 절제된 행위일 것이다.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세계인들의 공통감정인 것처럼, 행운이나 행복의 문을 두드리며 무지개빛 인생을 그리는 인간의 심리적 본능은 누구나의 공통분모다. 한 번의 서운함에 오해하고 실망하여 토라지는 못난 감정을 지닌 사람보다는 함께한 좋은 기억을 살려내는 따뜻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로 변모하는 모습이 그립다. 누구의 인생이든 일회성의 삶이다. 행복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애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깊은 구릉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겠지만 조급증, 집착, 과욕, 스트레스, 의심, 갈등 같은 불행을 부르는 수많은 요소를 미련 없이 버리는 내공도 길러내야 한다. 이런 잡다한 것들이 우리들의 정신을 밤낮으로 짓누르고 있기에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 모두가 꿈꾸는 행복은 집착하지 않는 데서 찾아든다고 했다. 이런 상황들을 시나브로 감지하면서 인생은 환상과 때로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달래가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형중 군산대 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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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24 13:38

체육인들과 도민이 차기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

지난 4월 한 달여 동안 전북 14개 시·군 체육회 소속 종목단체장들과 전라북도체육회 산하 72개 종목단체장들, 원로 체육인 등을 대상으로 마련한 정책 간담회는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최근 언론에서 전북도교육감 선거의 관심도가 시들하다며 흥행이 저조하다는 보도와는 정반대였다. 차기 교육감이 과연 누가 될 것인가는 체육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책 간담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마디로 불신과 희망을 동시에 토로하는 흥미로운 대화의 장이었다. 3선을 이어온 김승환 현 교육감에 대한 피로도와 함께 지난 12년간의 학교체육 정책에 대한 불만의 볼멘소리가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반면 전북 교육을 이끌어갈 새로운 교육계 수장 선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도내 체육인들은 도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학교 체육 행정에 차기 교육감이 메스를 대고 과감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학교 체육의 근간인 도내 초·중·고에서 엘리트 선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이로 인한 팀 해체가 도미노처럼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북도교육청은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간담회 참석자들이 주장하는 주요 골자였다. 인기 종목인 축구와 야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종목에서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전처럼 어린 꿈나무 선수들이 전북 체육을 이끌어가고 나아가 대한민국 체육을 선도해야 하는데 꿈나무 발굴과 육성은커녕 씨가 마르고 있는 실정이다. 특단의 행정이 나오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전북 엘리트 체육의 희망과 변화의 바람은 메아리로 돌아올 공산이 크다. 전라북도와 전북체육회 등 체육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지만 학교체육의 중장기적인 설계의 주인공은 그래도 전북교육청이 우선이다. 그래서 체육인들 사이에서는 이번 전라북도 교육감의 선출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전북체육회장 자격으로 우리 도내 체육인들에게 학교체육에 대한 많은 건의 사항과 요구의 목소리를 들었다. 먼저 차기 교육감에게 체육 특기교사를 매년 3∼5명 정도를 임용해 달라는 입장이 단연 으뜸이었다. 전북체육 발전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고 노력한 도내 출신 우수 선수 및 지도자들의 자긍심 고취와 사기진작 차원에서 체육 특기교사를 모집 인원의 20% 정도를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북체육을 선도한 이들 선수와 지도자들의 타 시도 유출이 지속되고 있는 냉담한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차기 교육감의 결단으로 현실이 된다면 체육계는 쌍수를 들고 이를 환영할 것이다. 현재 체육 교사들을 가리켜 문무(文武)를 갖춘 교육자라고 칭한다. 문과 무가 균형 잡힌 체육 교사의 등용이 필요하다. 실기에 능한 엘리트 선수 출신 체육교사들은 이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전한 정신이 나오는 법이다. 예전 같이 적극적인 학교 운동부 부활 추진도 차기 교육감이 풀어야할 숙제다. 우리 전북지역에 초중고가 768개 학교(초 425, 중210, 고133) 운영 중인데 전체 학생 192,791명 대비 겨우 2,945명이 운동선수로 등록되어 있어 전체 대비 1.5%에 불과한 수준이다. 엘리트 꿈나무 선수 감소에 따른 전북체육이 고사 위기 직전임을 보여주는 수치다. 이런 이유로 도내 모든 학교에서 1학교 1종목 육성을 새로운 차기 교육감에게 바라고 있다. 학교장들에게 재량권을 위임한다며 그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고 차기 교육감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이를 반드시 적극 실행해야 한다. 노련한 관록과 젊은 패기로 상징되는 차기 교육감 후보들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강선 전북도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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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7 14:09

‘불통’ 교육감이 아닌 ‘소통’ 교육감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녀가 유·초·중·고에 재학 중일 때는 교육행정에 관심을 두지만, 이후에는 무관심해진다. 그 무관심에 교육감 선거도 포함이 된다. 교육감은 선출직 중 유일하게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전문성, 자주성 보장을 명시한 헌법 제31조 4항에 따라 국가 권력을 비롯한 특정 세력에 영향받지 않고 본연의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정당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교육감 선거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도 사실이어서 상당수 유권자가 자신의 지역에서 누가 교육감 후보로 나섰는지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지방선거에서 교육감을 뽑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 교육감 선거가 ‘깜깜이 선거’ ‘묻지 마 선거‘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교육감 선거에 대한 무관심이 오로지 제도적 문제나 유권자의 탓인 걸까? 분명 그렇지 않다. 흔히 교육을 국가의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기르는 현세대의 책무이기에 눈앞의 이익이 아닌, 백 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감은 바로 국가백년지대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이므로 교육감 후보의 자질에 대한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검증이라는 미명 아래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과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다면, 이는 선거의 격을 떨어뜨림은 물론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의 장점이나 정책을 제시하기보다 상대의 부정적 요소와 의혹을 강조하는 네거티브 선거는 공격하는 측과 공격당하는 측을 떠나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심한 피로감과 실망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후보들의 자질과 도덕성 또한 당연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를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후보보다 자신의 비전과 정책, 소신을 이야기하는 후보를 만나고 싶다. 유권자 앞에 자신의 전문성을 입증할 정책과 공약을 내놓고 떳떳이 겨루는 후보를 보고 싶다. 그러니 상대에 대한 ’아니면 말고‘ 식의 근거 없는 의혹과 비방을 일삼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 학생을 위해,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지 논의하길 바란다. 얼마 전 전교조 전북지부는 “김승환 교육감의 12년 임기는 혁신학교, 작은 학교 살리기 등 긍정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불통’이라는 별명이 상징하듯 소통 측면에서 부족함을 보였다”며 현재의 교육감과 그 관료 체제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라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당선될 새 교육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소통’이어야 한다.”라면서 “다른 시도 교육청에서 하는 ‘분기별 지부장-교육감 간담회’, ‘교육감과 조합원과의 대화’를 전북에서도 시행하도록 교육감 후보들에게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육감은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사람이다. 불통은 좋은 환경과 최선의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교육에 몸담은 교육자들과 그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과 소통하고, 새로 거듭날 각오로 절차탁마하여 전라북도 교육을 앞선 교육으로 이끌 수 있는 교육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권자들은 같은 선출직이라도 미래세대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에게는 한층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육감을 선택하는 선거 역시 더 공정하고 깨끗하게 치러지기를 바란다. 비전과 정책은 보이지 않고 흑색선전과 낯 뜨거운 인신공격이 난무한다면 자라나는 세대가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더욱이 이번 선거는 만 18세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첫 지방선거이다. 모쪼록 교육감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학생들 앞에, 유권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거를 치러 주기를 당부한다. /홍요셉 전북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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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0 13:50

사랑밖에 난 몰라

‘사랑’과 ‘이별’, 어쩌면 우리네 삶의 영원한 화두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 읽은 ‘세계명작소설’의 큰줄기를 이끌어가는 스토리도 대부분 그거였던 걸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랑과 이별. 이 둘을 즐겨 다루기로는 대중가요라고 물론 예외일 리 없었고, 여전히 없다. 그 안에 담긴 뜻을 풀어낸 해석의 가지가지 또한 일곱빛깔 무지개를 수십 배 뛰어넘고도 남는다. 어떤 이는 사랑을 두고 ‘향기로운 꽃보다 진한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했던가. 그걸 ‘차가운 유혹’과 ‘때늦은 후회’라고 정의한 건 혹시 ‘이별’에 대한 경계심 때문? 하긴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면서 속울음을 꺼이꺼이 삼켰을까. 동전의 양면 같기만 한 이 둘을 제법 오래전에 우리들의 ‘태스형’이 단박에 정의를 내린 바 있음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으리라, 눈물의 씨앗이라고. 살아오는 동안 누군들 사랑의 환희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이별의 고통을 한두 번쯤 겪어보지 않았으랴. 우리 지역 출신 가수 송 아무개가 오래전에 부른 노래를 이 자리에까지 굳이 끌어댈 필요는 없으리.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별이 남긴 ‘당신의 슬픔’을 치유하는 데는 남녀나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세월만 한 약이 없다는 데 이의를 달 이들은 별로 없을 테니. 이쯤에서 만해(卍海)의 시 한 편을 새삼스레 다시 꺼내 읽는다. 리별은 美의創造입니다 리별의 美는 아츰의 바탕(質)업는 黃金과 밤의 올(絲)업는 검은비단과 죽엄업는 永遠의生命과 시들지안는 하늘의 푸른꼿에도 업습니다 님이어 리별이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엇다가 우슴에서 다시사러날 수가 업습니다 오오 리별이어 美는 리별의創造입니다 구구절절 과장이 지나쳤으되, 사랑 없는 이별이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이별이 아픈 만큼 사랑도 깊었을 터, 그와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는 우리네 어리석음이라니. 사랑이 이별이고, 이별이 곧 사랑이다. 하여, 세상 어디에도 이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만한 게 없다는 만해의 역설에 이의를 달기가 쉽지 않다. 무릇 사랑이란 ‘as you want’ 혹은 ‘It’s up to you’로 번역되는 ‘너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식에게든 연인에게든 이웃에게든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그걸 기꺼이 실천하는 것.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한다는 건 그러므로 스스로 ‘바보’가 되어야 가능한 일. 문득 눈앞을 서성이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다. ‘바보’로 불리는 걸 기꺼이 즐거워했다던 추기경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던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던 그 ‘바보’의 투박한 얼굴도 있다. 퍽 쑥스러워하는 낯빛으로 통기타를 어설프게 퉁기면서 음정박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부르던 <상록수>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러서일까. 아니면 사랑하다 이별한 연인들처럼 그토록 수많은 봄꽃이 한바탕 잔치를 끝낸 뒤끝이어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우리 동네 문신 시인의 말처럼 인생의 충분한 이유를 알 만한 나이를 지나서 이별의 아픔 따위에는 면역이 생겨서일까.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고 당신 없인 아무것도 이젠 할 수 없다고 했던 심수봉의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으니.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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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03 13:50

문학이란 무엇인가

서구문학의 제반(諸般) 양상은 우리정서에 여과 될 시간의 여유를 주지 않은 체, 갑오경장 이후 일본과 중국을 거쳐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예부터 문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는데 개화기 무렵 일본을 통해서 문학이란 말이 들어온 것이다. 문학이란 용어는 문자로 나타난 모든 기록과 학문의 뜻으로 사용되며, 즉 학문, 저술, 문헌 및 인쇄물 등 문자로 기록된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이천 년대 들어와 글을 쓰는 문학가(시인, 수필가)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 민족의 정서와 개인의 의사표현을 줄기차게 쏟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의 질문에 짧게 정의해보자.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학문과 예술의 구별은 학문 활동을 문학연구라 하고, 예술 활동을 문학이라고 한다. 문학작품의 창작은 작가의 내재적 공간으로 불리는 상상력에서 우러나오는 감정과 외재 요인, 즉 작가가 처해 있는 문화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동향의 영향에서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문학이라는 용어를 논의 할 때 사용하는 작가의 문학정신, 사상과 정서와 감동, 영감, 동기, 성격 등의 용어는 그 작가의 심리적인 상태를 말한다. 작가는 조탁(彫琢)된 언어감각으로 최선의 언어 표현을 추구하는 예리한 관찰력과 이상적인 감정을 풀이해내는 화자(話者)라 할 수 있다. 한편 문학작품 속에서의 언어는 매우 풍부한 세련미와 섬세하면서도 질척거리지 않아야 한다. 학술에 대한 저서나 논문이 아닌 창작문학은 언어를 매개물로 정리하고 결합시켜 인생을 표현하는 언어예술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학이란 예술은 표현의 형식은 언어이며, 감정과 인생체험, 관찰력과 상상력을 예술적인 구조로 나타낸 것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에게는 오감의 쾌감과 만족을 주어야 좋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살아가는데 이러한 자기표현을 직접적으로 표출시킨 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기능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이 나타낸 사상이나 감정을 읽어가면서 그 리듬에 빠져들거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들에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아! 그런 의미였구나. 하고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기능이다. 바꿔 말하면 문학작품은 말로 독자들을 교화시키거나, 즐거움을 주어서 기쁘게 해주는 쾌락적 기능으로 독자의 정서를 잘 읽어내야 한다. 독자들마다 감정의 선이 다르기 때문에 하등감각을 자극하는 관능적인 쾌락과 감각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쾌락과 이성(理性)에서 오는 지적인 쾌락을 지닌 기능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 교훈적 기능만을 추구하면 단순한 종교적ㆍ도덕적 교훈이나 이데올로기에 머물고 말 것이며, 쾌락적 기능만을 쫓는다면 속세에 물든 흥미나 관능적이고 대중적 오락으로 수준 낮은 문학으로 격하될 수도 있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문장이나 이미지의 아름다움만 추구하려하거나, 말(단어)들만 늘어놓는 다면 그는 삼류 작가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오직 독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자세로 글을 써야한다. 즉 무엇을 어떻게 써야하고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아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민족은 대단한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문맹률 1% 미만과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우수한 두뇌를 지닌 민족이기에 거칠어져 가는 민족의 정서에 윤활유가 되는 좋은 작가, 즉 좋은 작품들이 많이 쏟아지길 바란다. /김형중 군산대 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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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26 14:02

전북 체육인이 차기 도지사에게 바란다

2주간에 걸쳐 전북 14개 시·군 체육회를 돌며 각 체육회에 등록된 종목단체 회장들과의 간담회를 진행했다. 민선 체육회장 취임 후 거의 2년 반년만의 일이다. 최소 1년에 한번 정도는 각 지역을 돌며 소통의 시간을 갖고 이를 각종 체육 정책에 반영해야 했지만 기나긴 코로나 19 여파로 여의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4일 전주시체육회를 시작으로 익산시체육회, 군산시체육회를 연이어 방문했고 지역 종목단체 회장들의 심도 있는 의견을 청취했다. 시종일관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고 대부분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뜨거웠다. 지난 14일 완주군을 제외한 고창군체육회를 마지막으로 우리 시·군 체육회를 순회하며 강행군을 종료했다. 특히 이번 간담회의 대부분의 토론 내용은 보다 많은 체육 관련 예산 증액 문제와 학교체육에 관련한 질의가 이어졌다. 지역 구석구석에 폭 넓은 예산을 지원해서 57만 여명의 전북도민 전문 체육과 생활 체육인들의 복지와 행복추구권을 챙겨달라는 내용이 다수였다. 정책 간담회에서는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 분야 모두 턱 없이 부족한 예산을 탓하며 증액을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엘리트 체육인들은 상위권 성적을 고수했던 예전과 다르게 최근 전국체전에서의 성적은 최하위권으로 곤두박질하고 있는데도 전북도는 방관자 입장이라며 강하게 성토했다. 그러면서 도내에 종목별 실업팀이 없어 대회에 출전조차 못하고 있는 처지에 전북도민 입장에서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또한 실업팀 창단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했음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전북도의 체육 정책을 꼬집었다. 대표적인 예로 정읍시가 강세를 띄었던 검도, 핸드볼 종목은 고사 직전이다. 정읍지역 검도 명문인 정읍중학교, 정읍고가 있고 정일여중과 정읍여고는 전통의 핸드볼 명문 학교들이다. 정읍시청에 검도부와 여자핸드볼 실업팀이 건재했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현재 정읍시 체육 수장이자 전북 시·군체육회협의회장을 맡으며 왕성한 활동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강광 회장의 민선 정읍시장 시절이 바로 그때다. 강광 회장이 재선을 이어 가지 못하자 경쟁자였던 차기 시장이 검도부와 여자 핸드볼팀의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정읍지역의 자랑인 검도와 핸드볼의 입지는 급속도로 위축됐고 현재까지 뚜렷한 성적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운동을 하려는 꿈나무들이 없어 엔트리를 못 채워 일반 학생들을 섞어 전국대회 출전을 겨우 겨우 연명하고 있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가장 큰 이유는 해당 지역 지자체에 실업팀의 부재로 인한 파급 영향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당 지자체에서 관내에 육성하고 있는 운동부의 연계 차원에서라도 지역 대표 종목의 실업팀 창단에 적극 나서야 되는데 철저히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이다. 지자체가 실업팀 운영을 망설이는 것은 바로 예산 때문이다. 전북도가 14개 시·군 지자체에서 창단하는 실업팀 운영비의 절반인 50%를 지원한다면 자연스레 전북체육은 큰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생활체육도 마찬가지다. 우리 전북지역의 14개 시·군 체육회에 등록된 순수 생활체육 동호인 클럽의 수가 2021년 기준 4,616개 팀이다. 동호인 수는 무려 156,647명이나 된다. 이들의 부양가족들의 수를 합치면 대략 57만 여명이라는 통계치가 나온다. 178만여명의 도민들의 전체인구를 감안하면 적지 않은 체육인들이다. 각 시·군에 생활체육 관련 예산을 대폭 늘려 지원한다면 체육활동을 통한 도민들의 건강은 날로 증진될 것이 분명하다. /정강선 전북도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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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9 13:48

변호사의 변론권

우리나라 헌법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고인이 구속된 때, 피고인이 미성년자인 때, 피고인이 70세 이상인 때, 피고인이 듣거나 말하는 데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인 때, 피고인이 심신장애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때, 피고인이 사형, 무기 또는 단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기소된 때 국가에서 필요적으로 변호인을 선정하여 준다. 또 법원은 피고인이 빈곤이나 그 밖의 사유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에 피고인이 청구하면 변호인을 선정하여야 하며, 피고인의 나이·지능 및 교육 정도 등을 참작하여 권리보호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피고인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변호인을 선정하여야 한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헌법은 국민 누구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기본권으로서 보장한다. 그 국민이 흉악범으로서 만인의 지탄을 받고 있을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국가가 형벌권을 행사함에 있어 수사기관이 가지는 지위와 대등한 위치를 피의자 등에게 보장함으로써 형사소추를 당한 자에게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으며,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하고 확장하는 데에 가장 핵심 규정으로서 모든 국민에게 예외 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에 해당한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을 보다 보면 ‘이런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변호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런 사람을 변호하는 변호사도 문제 아닌가?’라는 댓글들을 심심찮게 보곤 한다. 만일 변호인이 흉악범을 변론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된다면, 이는 국가권력에 대하여 헌법상 보장된 피고인의 방어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대한 부당한 침해가 관습적으로 자리 잡게 되어 자칫 사법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법치주의가 흔들릴 수 있다. 강력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람이라도 법원에서 판결이 최종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며, 변호사윤리장전은 변호사가 사건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변호를 거절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변호인은 이러한 법의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단 한 명의 피고인이라도 억울함이 없도록 변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변호사들이 사회적 시선과 여론의 압박 때문에 의뢰인을 가리게 되면,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받을 권리 등 국민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할 수 있으며, 이는 ‘당사자 평등의 원칙’과 ‘무기 대등의 원칙’을 보장하는 근대 법치주의 정신과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변호사 제도의 도입 취지에도 어긋난다. 이러한 이유로, 변호사가 사회적 지탄받는 강력범죄자를 변호한 활동 자체를 이유로 윤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폄훼하거나 신상을 유포하고, 인신 공격적 비난을 하는 것은 헌법 정신과 제도적 장치의 취지에 기본적으로 반하는 것으로 지극히 부당하다. 흉악범죄자들 또한 헌법으로 보호받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헌법상 무죄추정을 받는 피고인을 변호인은 피고인이 사회에서 어떠한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헌법의 요구에 따라 피고인에게 필요한 충분한 조력을 다하여야 한다. 물론 국민의 입장에선 이러한 상황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변호사는 형사소추를 당한 피의자 등이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라 하더라도 피의자 등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변론을 해야 하는 것이 직업적 사명이다. /홍요셉 전북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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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2 13:41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

피라미드는 ‘고대(古代) 7대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것들은 ‘현대(現代)의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불가사의든 불가사리든 나는 그런 구조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내가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따로 있다. 바둑하고 음악이다. 바둑판에 돌을 놓는 자리는 기껏해야 361개다. 돌도 희거나 검은 것 두 가지뿐이다. 수가 몇 가지 안 될 것 같은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보(棋譜)가 만들어진다. 하긴 나도 인터넷 바둑을 10년 넘게 두었지만 똑같은 판은 하나도 없었다. 음악도 다르지 않다. 몇 가지 안 되는 음표를 오선지에 연결해서 교향곡이든 소나타든 대중가요든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그런데 들어봤지 않은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곡이 이미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걸. 통계학을 전공한 선배한테 원리를 물었더니 온갖 용어를 들이대면서 설명을 해주는데 숫자 놀음에는 까막눈에 가까운 나로서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선배는 이런 말로 내 입에 빗장을 걸었다. “한글은 글자가 몇 개야? 자음하고 모음 합쳐봐야 스물네 개밖에 더 돼? 그런데 그걸로 쓴 문학작품은 얼마나 다양하고 많으냐고….” 바둑이나 음악보다 훨씬 불가사의한 건 따로 있다. 사람 얼굴이라는 게 기껏해야 강호동의 손바닥 넓이 이쪽저쪽이다. 거기에 달린 거라곤 눈썹하고 눈동자 둘씩에 코 하나, 입 하나가 전부다. 그런데 어쩌면 생긴 게 그토록 제각각일 수 있단 말인가. 생김새뿐일까. 저마다 성격이나 취향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세상에 꼭 같은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쌍둥이조차 예외가 없으니 그만하면 말 다했지 않은가. 조물주의 위대한 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처음 만난 사람한테 혈액형을,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물어서 은근히 편을 가르려고 싶어하는 이들을 가끔 볼 수 있다. A형은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갖고 있단다. B형은 말이 많고 감정기복이 심하며. O형은 리더십이 강한 기분파이고, AB형은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데 성격은 쿨하다는 것이다. 과연 맞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O형 남자지만 스스로를 기분파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 그 흔한 반장 한 번 못 해보고 졸업했으니 그만하면 빵점 리더십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을 재단하려 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나도 혈액형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식의 ‘아재 개그’로 응대한다. “우리 집은 남자 형제가 셋인데요, 그중에 제가 맏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무슨 형이냐면요, ‘큰형’이에요. 동생들이 저를 ‘좋은 형’이라고까지 생각할지는 자신이 별로 없지만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읽다 보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전 혈액형에 대해서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꼭 자기의 혈액형이 나타내 주는, 그, 생물책에 씌어 있지 않아요? 꼭 그 성격대로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성격밖에 없을 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믿음입니까? 희망이지.” “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대로 믿어 버리는 성격이에요.” “그건 무슨 혈액형입니까?”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에요.”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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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5 13:27

그래도 봄은 찾아오더라

김형중 군산대 자문교수 겨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게 역할을 다하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3중순경 강원도에선 때 아닌 폭설이 내려 향로봉의 누적 적설량이 80㎝나 되었다. 3월의 마지막 주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따스한 봄이 오려면 시침(時針)은 상당한 시간을 끙끙대며 앓아야 할 것 같다. 자연의 섭리에 대항하면서 애처롭게 내미는 새싹들을 호되게 때리는 바람을 꽃샘추위 또는 잎샘추위라 한다. 이처럼 인간들도 이웃이나 옆 사람들을 시기 질투하는 얄밉도록 인간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늘 우리들 옆에 존재한다. 겨울의 마지막 달 음력 2월을 ‘시샘 달’이라 하는데, 꽃잎이 돋아나는 것을 시샘하는 일컬어 꽃샘추위는 계절의 오작교를 의미한다. 꽃샘추위의 이름표는 어쩌면 우리민족이 지닌 시샘과 질투의 정서를 의인화해서 나타낸 감정표현이 아닐까한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가듯, 가냘픈 초승달이 상현달을 거쳐 보름달로 가득 찼다가 점차 이지러져 그믐달로 스러져가는 과정이 달(月)의 일생이라면, 인간도 생노병사의 순서를 엮어가는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우리들 곁에서 멀어져 가리라. 자연의 섭리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아닌가한다. 살다보면 조그마한 가시가 몸에 박혔을 때 상당한 고통을 느낄 만 큼 아플 수 있듯이, 뇌가 없는 것 같은 어휘와 생트집 같은 언행,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교활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의 거짓언행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지겹도록 보고 들으면서도 모른 체하며 살아간다. 왜 이런 저급한 이야기들 곁에서 참고 살아야하는 걸까. 말을 잘한다는 것은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과 상대에게 감동을 주면서 운율의 아름다음을 지니고 서정을 지닌 혀의 놀림이 부드러워야한다. 어둡고 우울하고 음침한 주위의 사회 환경이 우리들을 슬프게 하는 현실이다. 러시아의 푸틴은 옛 소련 연방국이었던 우크라이나를 힘으로 침략해서 연약한 민간인들을 무참히 살상하고 있는데 이게 비로 가난과 약자의 설움이다. 유엔통계에 의하면 부자나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의 3분의1이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진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마실 물과 굶주린 배를 채워줄 음식이 없어 수많은 어린애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현상이 21세기 지구촌의 현주소다. 그런가하면 153만 원짜리 개 밥그릇이 없어서 못 팔고, 113만 원짜리 몽클레르 어린이 패딩이 불티나게 팔리는 우리나라의 부자동네 풍경이란다. 20대 대통령선거는 0.73%의 박빙의 표차로 희비가 엇갈려 호남인들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후회와 추억은 세월에 묻혀가면서도 새록새록 다시 되살아나는 게 일상이다. 세상이 아무리 치사하고 혼란스러워도 지구는 변함없이 돌고 있기에 동장군을 밀어낸 따스한 봄기운은 우리들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람의 눈썹을 닮은 것 같은 가냘픈 초승달, 초저녁에 마실 나온 이웃집 아줌마의 하소연을 귀담아들어주는 예쁜 초승달처럼 순박한 감정으로 살아보는 것도 그럴듯하지 않을까 한다. 여성들은 봄이면 기운이 솟고, 마음이 설렌다는데, 여성의 계절이라 부르는 봄을 맞이하면 향기를 품은 꽃들은 멀지 않아 꽃샘추위를 견뎌내면서 우리들 곁에서 예쁜 모습으로 피어나리라.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다. 삶을 꿈틀거리게 하는 봄비가 내리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치사할지라도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야하듯 꽃샘추위가 제아무리 매섭다 해도 봄은 다시 섭리대로 찾아들 것이다. /김형중 군산대 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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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29 13:59

국립 스포츠 종합훈련원, 비하인드 스토리…

평소 집안 애경사까지 상호 챙기는 친한 선배로부터 회사를 사직했다는 연락을 받은 시기는 2월 초쯤이다. 잘 다니던 동아일보를 31년만에 그만뒀다며 “정 회장이 나 좀 잘 도와주소”라며 안부성 소식을 전했다. 2007년 무렵 베이징 특파원 시절 주중국 대한민국대사관에 출입하는 25개 신문 방송 통신사 34명의 특파원중 가장 모범적인 활동을 보이며 특종을 휩쓸던 국가대표급 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하종대 선배였다. 하 선배는 같은 동향에 성격이 줄곧 맞아 타국살이 중국 베이징에서 아침, 저녁으로 자주 만나 흉금을 털어놓는 친한 사이였다. 기자를 천직으로 또 자부심으로 항상 가득 차 있던 선배의 갑작스런 사직 소식은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사직 이유는 간단했다. 대통령 선거 캠프에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직접 도움을 요청해 고심 끝에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는 것이 선배의 설명이었다. 법조 출입 기자 시절 평검사 신분인 윤 후보와 인연이 있었으며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에는 윤 후보가 여주지청장을 역임했다는 기억도 함께 소환하며 각별한 사이임을 부연 설명했다. 결국 하 선배는 지난 2월14일 전북도의회에서 기자실을 찾아 중앙선대위 상임 언론특보 겸 전북 선대위 상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기자회견 후 선거 공식 일정 첫날인 15일 점심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우리 전북체육회 임원인 이사직을 맡고 있는 하 선배와 역시 도 체육회 이사 신분인 전북일보 위병기 편집국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음식을 주문한 후 “윤 후보가 언제쯤 전북에 방문하냐”고 물었더니 당장 내일(16일) 유세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냥 단순히 점심만 먹는 자리로 그치면 안되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뇌리에 스쳤다. 바로 우리 전북도민과 체육인들의 30년 염원 사업인 2,000억원대의 ‘국립 전북 스포츠 종합 훈련원 건립’ 사업을 공약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돕고 싶으나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대답이 대번에 돌아왔다. 국민의힘 정운천 전북도당 위원장도 전북지역에 8개의 공약사업이 이미 확정됐고 당장 내일 후보가 전주를 방문하는데 시기적으로도 너무 늦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 선배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중앙선대본부장을 맡은 권영세 현 대통령직 인수위 부위원장에게 바로 SOS를 취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결국 극적으로 단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추가 급조해 끼워 넣었다. 다음날 전북을 방문한 당시 윤석열 후보는 전주역 유세에서 마이크를 잡고 남원시 운봉읍 지리산 일대에 ‘국립 전북 스포츠 종합훈련원을 건립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한 관련 기사가 속보로 나간 직후 민주당 선대위 조직본부 미래경제단 총괄단장 안호영 의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 배경에 대해 물었다. 그간 과정과 사정 얘기를 상세하게 전달했고 진지한 논의 끝에 결국 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공약사업인 국립 전북 스포츠 종합 훈련원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양당 대통령 후보들에게 외면 받았던 공약사업이 단 며칠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여곡절 끝에 20대 대통령 선거는 윤석열 후보가 박빙으로 당선되며 종료됐다. 야구 명문 충암고 출신인 윤 당선인은 소문난 야구광이다. 선거 기간 동안 줄곧 ‘스포츠가 곧 복지다’를 주장하며 약 500만명에 달하는 전국 체육인들의 표심을 흡수했다는 평가다. 이제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 본인이 공언한 공약대로 남원에 국립 스포츠 훈련원이 조속히 건립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 /정강선 전북도체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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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2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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