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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료 분리 징수라는 “꼼수”

모든 문제에는 맥락이 있다. 작금 대통령실 주도 하에, 그리고 여당과 보수언론들의 거들기로 진행되고 있는 수신료 분리 징수의 문제도 그렇다. 대통령실은 지난 3월 9일 국민제안 홈페이지에 ‘TV수신료 징수방식(TV수신료와 전기요금 통합징수) 개선’에 대한 국민참여 토론을 게시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4월 9일 대다수 국민이 분리 징수에 찬성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며, 수신료 분리 징수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국민제안 홈페이지의 등록 시스템이 동일인의 중복 응답이 가능토록 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보수여당과 보수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참여 독려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이에 언론노조는 “공론장을 열고자 함이 아니라 한편의 여론 조작극”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TV수신료는 공영방송의 핵심 재원이다. 외국의 경우 우리보다 5-10배 높은 수준의 수신료를 조세 또는 특별부담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징수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1981년 2,500원으로 수신료가 책정되어 4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4년부터 효율성을 위해 한국전력에 위탁하여 징수하고 있다. 전기세에 함께 부과되어 청구되고 있는 것이다. 수신료 징수 및 징수 방식은 해묵은 논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문제제기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결로 정리된 바 있다. 1999년 헌법재판소는 위헌소원 판결에서 수신료는 ‘공영방송사업이라는 특정한 공익사업의 경비 조달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되는 특별부담금’으로 규정하며 수신료 징수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또한 2016년 대법원은 현행 수신료 징수방식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사정이 이러한대 대통령실이 직접 나서서 수신료 징수 문제를 또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현 통치 권력은 언론을 순치하고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대놓고 실행해 왔다. MBC에 대한 공격, 방송통신위원회에 대한 압수수색과 검찰수사, 준공영방송인 YTN의 매각 추진(사영화), TBS(서울시 산하 공영방송) 지원 조례 폐지를 통한 재원 옥죄기 등이 잇달아 이어졌다. 결국 재원 문제를 건드려 공영방송인 KBS를 다스려 보겠다는 꼼수가 수신료 문제에서 엿보인다. 보수여당과 보수언론은 공영방송 수신료 폐지나 인하가 세계적 추세라며 추임새를 넣고 있다. 그 예로 프랑스의 수신료 폐지, 영국의 2028년 수신료 폐지 추진 계획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 역시 맥락을 간과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이다. 프랑스는 주민세에 수신료를 통합 징수하다 폐지하는 대신 그에 해당하는 공적재원을 조달하기로 했다. 영국의 2028년 수신료 폐지 언급은 확정된 정책이라기 보다는 보수당 입장을 따르는 정부 인사의 의견일 뿐이다. 그리고 2027년까지 수신료 존속이 보장되어 있기에, 2028년 수신료 폐지를 위해서는 2024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 정권의 승리와 수신료 대안 모델이 제시되어야만 가능하다. 특히 일부 북유럽 국가에서는 수신료를 공공서비스세로 전환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수신료 폐지로 나타나지만, 보다 장기적이고 중립적인 차원에서 공영방송 재원 확립을 위한 조세화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과 맥락은 애써 외면하면서 수신료 문제를 통해 공영방송을 겁박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꼼수는 꼼수일 뿐이다. /김은규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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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1 17:34

지역특화형 비자 제도의 성공 조건

한국의 주민등록인구는 2019년 11월 말 정점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발발 이전에 인구감소가 시작되었고, 그 후 더욱 심화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국가균형발전 특별법’에 근거를 두고, 2021년 10월 전국 89곳을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했다. 전라북도에서는 전주·익산·군산·완주 4곳을 제외한 10개 시∙군이 인구감소지역에 들었다. ‘지방 인구소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지방자치단체 기금관리기본법’에 근거하여 2022년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조성하여 향후 10년 동안 매년 1조 원씩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외국인 우수인재 또는 외국국적동포 가족을 지역사회에 정착시키려는 ‘지역특화형 비자 제도’ 시범사업에 착수했다. 국회는 2022년 6월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제정했고, 올해 1월 1일부터 그 법을 시행하고 있다.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은 인구감소지역의 산업구조, 일자리 현황, 지역대학과의 연계성 등을 고려하여, 해당 지역에 적합한 외국인의 정착을 장려하고, 생활인구 확대, 경제활동 촉진, 인구 유출 억제 등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지역 우수인재 체류 제도’(유형1)와 ‘재외동포와 가족 체류 제도’(유형2)의 두 가지(two track)가 있다. 유형1은 지역의 대학 유학생이나 지역에서 일하는 외국인이 5년 이상 체류한다는 조건에서 선발되면 거주(F-2)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배우자와 미혼자녀 등 가족 초청도 허용한다. 유형2는 중국 조선족, 구소련 고려인 동포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방문취업(H-2) 체류자격 소지 동포 가족이 인구감소지역으로 이주해 2년 이상 거주해 정착하면, 체류 기간 3년 이내의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체류기간 연장을 허용한다. 이 두 유형 모두, 당사자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방문동거(F-1) 체류자격을 가진 배우자 역시 해당 지역사회에서 취업할 수 있다. 지역특화형 비자 제도는 지방자치단체별 고유한 인력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생활인구 확대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 가지 사항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지역특화형 비자’가 외국인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제도라는 점을 빌미로, 단순한 서류 작성 대행을 넘어서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브로커가 창궐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예방대책을 수립하여 철저히 집행하는 한편, 지역사회에 적합한 우수인재를 선발하는 장치를 갖춰야 한다. 둘째, 지역 우수인재 또는 재외동포와 가족에게 적합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 주민도 끌어당길 만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산업단지와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사업 등 다양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셋째, 외국인 고용허가제와 ‘지역특화형 비자 제도’의 연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비전문취업(E-9) → 특정활동(E-7) → 거주(F-2) → 영주(F-5)로 이어지는 기존 경로를 대폭 손질해야 한다. 넷째, 지역특화형 비자 제도의 목표와 기본 원칙을 정립하고, 성과 평가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부정적 효과를 줄이고, 긍정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다. 이 조건을 충족해야만, 외국인이 인구감소지역에 정착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활성화가 이루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 지역사회 활력 증진과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룰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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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4 15:19

'더 글로리'의 권선징악과 진영 간 학폭 대응의 변화

최근 학교폭력 대응 방안으로 학폭 내용을 생기부에 기록하는 조치를 강화하고 대학입시까지 불이익을 주겠다는 교육부와 대학 관계자들의 조치가 이어지고 있다. 학폭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조치’는 2012년 도입되었다. 생기부에 기재하고 보존하는 최대 기간은 초·중학교의 경우 5년, 고등학교 10년이었다. 하지만 2013년 고등학교도 5년으로 단축되고 심의를 거쳐 삭제할 수 있게 됐고 2014년에는 최대 보존 기간이 2년으로 단축됐다. 당시 생활기록부에 학폭 내용을 기재하는 것에 가장 극렬히 반대했던 진영은 진보 교육감으로 알려진 인사들과 관련 교육단체였다. 최근 윤석열 정부에서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고교시절 학교폭력에 대한 대응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지면서 하루 만에 사퇴 의사를 밝혀 논란이 되었다. 정 변호사 아들의 학폭으로 인해 피해자는 정신과 병원 진료를 받았고 '자살 위험 진단'을 받았으며 상태가 심각해진 피해자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이르렀다. 반성은커녕 정 변호사는 아들의 대학입시를 위해서 소송을 이어 갔다. 피해자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고, 가해자는 서울대에 진학해서 대학 생활을 누리는 중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글로리’가 세계적으로 흥행하게 되고, 정 변호사의 아들 학교폭력 사건과 맞물리면서 학폭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교육부의 대응 방안과 함께 이미 정시 전형에 학폭 이력을 반영하고 있는 서울대에 이어 연세대와 고려대, 중앙대와 한양대 등 학폭 이력을 정시에 반영하기로 했다. 이러한 발표가 이어지자 보수언론의 한편에서 형사 범죄도 불이익을 주지 않는 대입전형에 학폭으로 불이익을 준다면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수년 전 진보, 보수언론과 관계자들의 부딪침이 정반대로 나타나거나 이전의 비판적 논쟁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국이다. 학폭 가해 학생이 줄어 든다면 가해 사실을 생기부에 기록해야 한다. 대학입시 또한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현 제도에서 정 변호사와 같이 권력을 가진 이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 소송을 이어간다면 생기부에 기재가 되고 대학입시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어쩌면 학교에서 일진으로 통하는 청소년들만 낙인찍는 도구로 사용되고(이들이 권력과 돈이 있고 서울대 갈 성적은 될까?), 오히려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면 안 될 정도의 학폭 가해자들이 교묘히 법적 처벌을 피해 가는 일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지도 걱정이다. 정책이 잘 보완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매번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만들어지는 제도의 허점에 진보, 보수로 나뉘는 정치권의 계산이 우리 사회의 불행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진영별 유불리에 따라서 주장하는 정책이 다른 자들의 논리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죄지은 자 죗값을 받게 하고, 죄에 대한 아픔을 알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입시 문제로 인한 경쟁과 억압적 교육 환경을 타파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매번 정파적 이익에 따라서 복무하는 이들의 논리에 따라 청소년의 힘겨움만 커진다. 이들에 의해 구조적인 아픈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은 그 누구도 아닌 학생으로 통칭하는 청소년들이라는 말이다. /정건희 청소년자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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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8 18:54

학교여, 카르페 디엠을 허하라!

'카르페 디엠'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영화 속에서 키팅 선생(로빈 윌리암스)은 대학 진학에 짓눌린 학생들에게 줄곧 '카르페 디엠'을 외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고 청춘의 욕구와 감정을 맘껏 발산해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라틴어다. 직역하면 '지금 (병 마개를) 따라', 내일을 위한다며 아끼지 말고 오늘 '현재를 즐기라'는 뜻이다. 카르페 디엠은 로마시대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처음 등장한다. "짧은 인생, '현재를 즐기게'. 미래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으로 줄이고.."('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 '카르페 디엠'을 영어는 ‘Seize the day(오늘을 붙잡아라)’로 번역했다. '오늘, 이 시간을 소홀히 흘려보내지 말고 꽉 붙잡아라'가 되겠다. 우리는 이를 '현재에 충실하라'로 해석한다. '즐겨라'를 '충실하라'로 번역하는것은 산업화시대의 ‘근면’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명백한 오역이다. '즐기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한몫했을 것이다. 즐기는 건 나쁜 것일까? 호라티우스는 에피쿠로스학파, 쾌락주의자다. 쾌락주의는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쾌락이 곧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쾌락주의자인가? 에피쿠로스는 한순간의 감각적 쾌락은 오히려 불쾌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쾌락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그는 감각적 쾌락보다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명상에 집중했다. 즐거움은 좋은 친구와의 대화, 등산, 게임 등 취미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사람마다 쾌락의 포인트가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강렬한 쾌락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깨달음을 얻을 때 일어난다. 독서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그러다 문득 깨우침이 생길 때 비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감각적 쾌락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좋은 그림을 보는 눈, 판소리를 듣는 귀, 맛을 느끼는 미각은 절로 생기지 않는다. 훈련(공부)을 해서 감각을 개발해야 한다. 정작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언제 행복한지를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내 아이들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길을 가라고 충고했는데, 아이가 대학 갈 때 말하길 “아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참 어려워요”한다. 직장에 들어간 지금도 잘 모르겠단다. 미래교육은 아이들에게 ‘맞춤형 교육’을 하는 것이다. 진정 ‘맞춤형 교육’을 하려면 아이들 하나하나가 자신이 무엇을 즐거워하는지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 좋아하고 즐길 때 창의성이 튀어나오고 스스로 독특해질 수 있다.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은 감독이 되기 전에도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그는 오직 좋아하는 일을 했고, 영화가 좋아 영화 말고는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라는 말을 많이 들을 것이다. 이런 말도 기억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니체의 말이다. 전북교육은 ‘배움이 즐거운 교실’을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있다. 배움이 ‘즐거워야’ 꿈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다. 학교여, 카르페 디엠을 허하라! /한긍수 전라북도교육청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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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1 18:34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

위 제목의 표현은 ‘대통령과 언론’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다. 평소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표현을 취하여 쓴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빼앗긴 개념들에 앞서, 한국 현대사 과정에서 잃어버린 개념들에 대해 먼저 언급해 보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무’와 ‘인민’이다. ‘동무’는 벗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어린 시절 같이 놀던 또래, 나이가 비슷하며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무들아 오너라’라고 시작하는 ‘봄 맞이 가자’라는 동요, 그리고 이은상 작곡의 가곡 ‘동무생각’은 아직도 우리가 즐겨듣는 노래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동무라는 용어는 금기어가 되었다. ‘동무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로 바뀌었다. ‘인민’도 마찬가지이다. 인민은 보통 사람들을 의미한다. 정치적, 국적상의 구분 없이 상호 간에 위계가 없는 자연인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때문에 학문적으로 세심해야 할 경우 ‘국민’이나 ‘시민’과 구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1948년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인민’이라는 용어가 제안되기도 했지만, 이념적 문제로 밀려나고 ‘국민’으로 대체된 바 있다. 위 두 용어는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념 대립 속에서 정치적 금기어가 되었다.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서슬 퍼런 국가 기관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새로운 이념 대립의 시대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금기어가 되어 해당 단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용어로 전용되면서 본래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이다. 현 통치 권력과 그 도우미들이 주로 언급하는 자유, 공정, 정의, 법치라는 용어가 그렇다. 자유를 강조하지만 자본의 자유에만 중심이 실린다. 공정을 부르짖지만 차별은 애써 외면한다. 법치는 그들만의 편익과 통제를 위해 적용된다. 같은 편들은 옹호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는 통치 과정에서 자유, 정의, 법치와 같은 개념들이 동원되고 있음이다. 이 속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는 논의하기조차 힘들다. 행사장의 퍼포먼스에서도 개념의 전용이 일어난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민중의 노래’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을 대변하는 내용이다. 그러한 노래가 보수 정당의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입장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가히 빼앗긴 개념의 시대이다. 온라인에 조롱과 풍자가 올라오고, 모욕을 느꼈다는 반응이 많은 것은 어이 상실된 개념 때문이다. 과거 보수정부 시절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를 애써 외면하거나 반대했던 것은 그나마 개념은 있었던 셈이다. 지금의 보수 정권은 무지하거나 아주 뻔뻔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듯하다.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에는 갈라치기 전략이 내재되어 있다. 규범적 수사들을 통해 얼핏 원칙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상은 피아(彼我)를 구분하면서 적대감을 키우고 자기 세력을 결집시키는 정치 과정으로 이어진다. 취임식에서 비판했던 반지성주의의 전형을 현 대통령 자신이 직접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위 철학자의 지적이다. 그 때부터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리라. /김은규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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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4 16:26

경로의존성과 혁신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사물의 운동 법칙’ 중 하나인 ‘관성의 법칙’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특정 사회제도 또는 관행에 익숙해지면 시대가 변해 그것이 비합리적으로 되더라도, 그 제도·관행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보통 고착효과·매너리즘·타성 등으로 비판하지만, 때로는 전통·관습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경로의존성이라 한다. 경로의존성은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특정 기술이 축적 발전을 지속할 때는 합리성 문제가 없지만, 해당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어 신기술과 비교할 때 기존 기술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구성원 모두가 휴대폰을 갖고 있음에도 집에 유선전화를 두고 있는 가족, 이메일 또는 SNS 등 정확하고 신속한 방식으로 문서를 보낼 수 있음에도 팩스를 주로 이용하는 회사 등, 그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나라 간 비교를 해보면 ‘문화의 수수께끼’를 종종 발견한다. 왜 영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에서는 좌측통행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우측통행하는가? 왜 미국·미얀마·라이베리아만 미터법 도량형 체계를 따르지 않는가? 세계 각국의 정격전압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110볼트, 220볼트 등으로 제각각인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 정부와 기업은 왜 날인(捺印) 관행을 고수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경로의존성에 있다. 비합리성이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고, 기존 체계를 바꾸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의 발전 과정을 보면, 경로의존성을 과감히 탈피한 사례가 여럿 있다. 언론과 출판사는 문서에 글자를 써 가는 방식을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꿨고, 정부는 정격전압을 110볼트에서 220볼트로 변경했으며, 보행 방향을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바꿨다.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성과를 달성했다. 이처럼,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사회적 행위를 혁신이라 한다. 특히,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회구조가 크게 바뀐 상황에서 ‘합리성을 상실한’ 제도·관행은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플랫폼 사회에서 정부·지방자치단체의 시장·시민사회 규율 방식은 개발 연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듯, 사회적 여건이 변화하면 기존 제도·관행은 재편해야 한다. 더구나, 이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이고,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며, 노인인구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지역 불균형 발전의 심화로 ‘지방소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의 성공 모델에 집착해 기존 제도·관행을 고수하는 것을 멈추고 혁신의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김관영 전라북도지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0년간 로드맵을 그려 전라북도 인구의 10%인 18만 명 규모로 외국 인재를 수용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정보기술 산업 분야에서 우수 외국 인재를 받아서 산업 경쟁력을 키운다는 방침”이라는 혁신 방향에 공감한다. 그 혁신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우수 외국 인재에게 일자리를 공급함과 동시에 한국 인재에게 적합한 ‘좋은 일자리’를 대량 창출할 수 있어야 하고, 외국 인재가 수도권으로 이탈하지 않고 전라북도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설동훈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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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7 18:45

나는 꼰대일까?

‘쇼츠’나 ‘릴스’ 보는 것을 좋아하는 막내에게 한마디 했다. “네가 하루 10시간 스마트폰 해도 좋은데 조금 의미 있는 것을 하면 어떠니?”, 그러자 “아빠, 뭘 할 때 모두 의미가 있어야 해?”라며 되묻는다. “아니 모두 의미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긴 시간 뭘 하는데 의미 없이 하는 것은 삶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러지. 차라리 영화나 다큐를 보면 어떠니? 웹소설도 좋다.” 이제 중학생 되는 아이가 “알았떠.”라고 대답. 반응이 떨떠름해 보였다. 내가 국민학생 때 두꺼운 종이를 접어 만든 딱지부터, 문구점이나 동네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만화 캐릭터 그려져 있는 딱지를 친구들과 게임 해서 열심히 모으는 게 일이었다. 어느 때인가 딱지를 많이 땄다. 그 순간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오락실 알게 되어서 열심히도 다녔다. 게임기에 50원 넣으면 시간 가는지 모르고 하게 됐다. 친구들이 뒤에 서서 구경할 정도가 됐다. 그럴 만도 했다. 학교 가기 전 아침에 오락실 들렀고 방과 후에도 찾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허무했고,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지치기와 오락실 게임과 같은 일은 방법과 내용만 달라졌을 뿐 나이 먹어서도 계속 반복됐다. 무언가 재미나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허무해지고 의미 없는 일의 반복이 삶으로 이어졌다. 꼰대는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찾아 보니 10대와 20대 꼰대도 넘치는 세상이다. 나 또한 꼰대 짓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닌지? 강의실, 회의실이 주 무대였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교사나 청소년지도사, 상담사 등 청소년과 관계된 사람들 대상으로 강의를 수단으로 내 경험이나 지식이 모두인 것처럼 주장한 일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삶의 현장은 지구 안에 나만이 아는 먼지 같은 아주 작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막내에게 전하는 내 이야기가 먹힐지 알 수 있다. 내 말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릴스 보다가 상상력이 향상되고 창의력이 넘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허무함을 알게 되고 자신도 깨닫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지 누가 알까? 청소년들이 스마트폰 보는 것에 문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또 한 면에 이를 통해 배우는 것도 많다. 중요한 것은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인데, 조절 능력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나? 그렇지 않을 거다. 돌아보니 수십 년 전에 열심을 냈던 딱지와 오락실 등이 마냥 허무했던 것은 아니었다. 꼰대 짓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강연이나 회의장에서 진정성 다해 어떤 본질에 대해 가슴으로 만난 일을 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순간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타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다. 말의 중심에 진실이 있다면 이미 꼰대는 아닌 게 된다. 다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꼰대라고 하면 꼰대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선시 되고 이후 그가 복이 될 수 있도록 제안이나 가치를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배움이 크다는 것. 살다 보니 그 정도는 알겠다. 써 놓고 보니 막내에게 배움이 컸다. 나는 꼰대일까? /정건희 청소년자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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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1 18:44

질문이 있는 교실

신학기 때 대학 강의실에서 가장 답답했던게 학생들 질문이 없는 거였다. 말이 되는가? 교실에 질문이 없다니. 왜 질문을 하지 않을까? 대략 세 가지 원인이 작동하지 싶다. 첫째,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고교시절 토의, 토론을 즐기는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나는 다투어 말을 하는 쪽이고, 친구 A는 주로 듣는 쪽인데 가끔 질문을 했다. "그게 뭐야? 그건 왜?" 우린 그 질문을 무시하면서 살짝 넘어가곤 했는데, 사실 A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바늘에 콕 찔린 기분이었다. 친구의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내가 잘 모른다는걸 알게 되었다. 모르는 걸 난 왜 아는 척 넘어갔을까, 질문하지 않았을까? 친구의 어떤 질문은 내 가슴에 새겨져 오랜 세월 되새기곤 했다. 난 A를 친구이자 스승으로 여겼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나 보다. 친구들이 A를 말할 때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는데 '존경하는 친구'라는 것이었다. 말 잘하는, 많이 아는 친구가 아니라 질문하는 친구가 존경을 받았다. 아, 일찍이 공자 선생이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질문을 가로막는 둘째 원인! 자신의 질문이 시시해서 비웃음을 살까봐... 그렇다. 시시한 질문, 피상적인 질문이 있고, 깊이있는, 지혜로운, 깨달음을 주는 질문이 있다. 좋은 질문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통해 근육을 기르고 기술을 연마하듯 좋은 질문을 하려면 질문하는 근육을 길러야 한다. 깊이 있는 질문은 시시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드러내는 용기를 내야 한다. 시시하게 시작할지라도 질문하는 사람은 빨리 성장한다. 질문이 없으면 성장도 더디다. 내가 아는 한 시, 소설, 음악, 방송 모든 분야에서 고수가 된 사람은 모두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제일 나쁜 장애물은 질문을 싫어하는 분위기다. 질문을 '진도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기거나 심지어 '무례한 도발'로 여기는 풍토가 있다. 질문을 억압하던 군사독재 시대의 유물이 21세기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 공자는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늘 묘당에 들어가 질문을 하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 공자가 말한다. “그렇게 '묻는' 것이 예(禮)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정확한 앎에 도달하도록 도왔다. 질문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가 해야 한다. 질문이 학생을 앎에 이르게 한다. 천재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말한다. “질문이 없는 '답'을 갖기보다 차라리 답이 없는 '질문'을 갖고 싶다.” 교실에서 교사의 정체성은 '질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새학기, 질문이 풍성한 교실이 되면 좋겠다. 질문이 있는 교실, 교사가 이끌어야 한다. /한긍수 전북도교육청 정책공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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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14 17:45

검찰정권과 언론, 그리고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진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권세를 과시하는 과정에서 나온 고사성어이다. 권세를 부리며 진실을 농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얼마나 권세가 무서웠으면 사슴을 사슴이라 못하고 말이라고 해야 했을까. 이번 정권 들어 대통령을 위시한 통치 권력과 언론의 갈등이 자주 불거지고 있다. 그럴 때 마다 대통령과 그 주변 권력의 대응은 날카롭고 위협적이다. 비속어 보도 관련 MBC에 대한 외교부 소송, 법무부 장관 명예훼손 이유로 KBS 기자 불구속 기소,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한 시민언론 민들레 압수수색, 장관 자택방문 취재한 시민언론 더탐사에 대한 압수수색과 기자 구속영장 청구, 역술인의 대통령 관저 개입 의혹 보도 한 뉴스토마토와 한국일보 기자에 대한 형사 고발 등.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진위를 따지며 대응하기 보다는 감사, 고소고발, 압수수색, 구속영장 청구와 같은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검찰정권의 면모를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몇 가지 효과들이 나타난다. 첫째는 의혹이나 잘못에 대한 사실 관계 이슈가 특정 언론사의 문제로 전환된다. 이슈가 바뀌는 것이다. ‘바이든/날리면’과 비속어 사용 문제로 불거진 MBC 압박이 대표적이다. 전용기 탑승 배제, 감사원의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조사, 외교부의 소송이 이어졌다. 여기에 정부여당이 사장퇴진 요구, 광고배제 종용, 편파언론 낙인찍기 등으로 가세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된 애초의 이슈는 이미 저만치 지나가 있다. 둘째는 언론의 위축 효과이다. 다수의 언론사가 동일 이슈를 다루었건만, ‘최초 보도’를 빌미삼아 특정 언론사만을 겨냥한다. MBC에 대한 압박이 그러했고, 뉴스토마토와 한국일보 기자에 대한 형사고발 역시 같은 방식이다. 속칭 ‘한 놈만 팬다’는 식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할 말 못하는 언론은 없겠지만, 자기 검열과 같은 위축 현상이 나타난다. 셋째는 전략적 봉쇄 효과이다. 고소고발, 압수수색, 구속과 같은 법적 행정이 진행되면 심리적 경제적 부담과 비용이 수반된다. 구속이나 기소가 되면 순식간에 일상이 파괴되고, 해당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낙인효과까지 일어난다. 특히나 소규모 언론사의 경우에는 향후 언론사 운영과 취재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언론 활동 자체가 봉쇄되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언론윤리의 문제로 접근하면 될 사안들마저 압수수색, 구속영장 청구로 대응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흐뭇할 수 있겠지만, 언론자유 및 민주주의의 측면에서는 매우 위험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이러한 비판들에 귀 기울여야 하건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하다.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주어야 한다”며 언론 대응을 주문한 대통령의 발언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옥죄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줄 세우기, 길들이기가 현 검찰정권의 언론관이다. 그렇다면 언론 역시 고민해야 한다. 감시견이 될 것인지, 애완견이 될 것인지.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 못하는 ‘지록위마’의 사태까지 가지 않아야 한다. 시민사회가 눈 부릅뜨고 지켜보며, 함께 할 일이기도 하다. /김은규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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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7 15:47

사회적 고립

70여 년 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두 동료와 함께 『고독한 군중: 미국인의 성격 변동 연구』(1950)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대중사회에서 개인은 타인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외로움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현대사회의 개인은, 타인에게 격리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면적 고립감으로 번민한다는 것이다. 고독 또는 외로움은 단지 ‘혼자 있는 상태’가 아니라 ‘개인 내면의 주관적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개인은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이 있어도 정서적 교류가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리스먼은 현대인의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 즉 타인과의 연결이 단절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명쾌하게 밝혔다. 미국의 사회신경과학자 존 카시오포는 외로움을, 사회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을 느꼈던 수렵채취인 시절 인류의 삶의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음의 진화’의 결과로 설명한다. 개인이 홀로 남았을 때 두렵고 초조한 마음이 들어야 사회집단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카시오포는 『외로움: 인간 본성과 사회적 연결의 욕구』(2008)에서 현대사회가 ‘외로운 개인’을 더 깊은 수렁에 빠뜨리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한다. 외로운 개인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기보다는, ‘거절’을 당할 염려가 없는 인터넷이나 TV 또는 반려동물에서 대안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외로운 개인이, 정서적 교류를 동반하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운 세기: 찢긴 세계에서 인간적 연결을 복원하는 방법』(2020)에서 초연결 세계에서 고립된 현대인을 분석하였다. 그는 한국의 ‘먹방’(먹는 방송)을 외로움 때문에 번창하는 채널이라 소개했다. 사람들은 혼자 저녁을 먹을 때 가장 외로워하는데, 그것을 상품화한 것이다. 렌터카뿐 아니라 ‘렌터 친구’ 사업도 유망 업종이 되고 있다고 알려준다. 또한, 그는 인터넷을 통한 연결이 허상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개인은 스마트폰을 통해 타인과 피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정서적 교류는 사실상 차단되어 있다. 개인이 SNS 게시물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등 ‘얕은 대화’를 오래 해도 충족감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의 소통 능력을 퇴화시켜, 외로움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사회적 고립은 개인뿐 아니라 정치·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SNS는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알고리즘 탓에 이용자의 확증편향을 계속 증폭시킨다. 즉, 사회적 고립은 개인 간 소통 단절, 시민성 수준 저하, 정치적 양극화를 추동한다. 또한 그것은 사회의 신뢰 수준에 영향을 미쳐, 경제의 혁신성을 떨어뜨린다. 사회적 고립은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가족·친구·이웃 등으로 통칭하는 ‘공동체’가 해체되었거나 그 성격이 크게 변모하였다. 2021년 기준 한국 전체 가구의 33.4%가 1인 가구였다. 일터나 삶터에서 ‘사회적 연결’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만나서 소통하며 사회적으로 연결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정부 정책 수단으로 강요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개인의 사회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비대면 환경에 익숙해져 대면을 꺼리는 현상도 발견된다. 심지어 전화 통화조차 두려워하는 ‘전화 공포증’까지 확산하고 있다. 사회현상으로서의 외로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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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31 15:10

행복의 방법, 타자를 위하기

누군가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닌 '욕망'이라고 했다. 행복은 개인에 따라 모두가 다르게 인식하는 것 같다. 같은 회사,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떤 이는 만족하고 누군가는 불행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맥락이 있다. 모두가 제각각이다. 오래전이다. 모 지자체에서 최고위층까지 오르고 은퇴하신 분이 계셨다. 고향에서 활동 해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는지 외국에 나가셔서 사업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인들이 공직에 있을 때의 자기 권위를 내려놓지 못하면서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교육계, 정치계, 행정 등 고위공직에서 은퇴한 분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새로운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한편에서 60대 초반부터 80~90 어르신 행세 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분 중 은퇴 후 1, 2년 만에 외모까지도 완전히 나이 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마흔이 되면서 월급 주던 직장을 사직하고 프리랜서를 몇 년 하면서 개인 연구소를 운영 했었다. 나와 보니 알았다. 명함에 이전에 내가 가졌던 기관장이라든지 단체에 어떤 위치 등 내세울 게 없었다. 이름만 만들어 놓은 무허가(?) 연구소가 다였다. 완전히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당시 내가 가진 역량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이 나와 진정성 가지고 함께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은퇴를 아주 빨리한 거다. 그리고 몇 년 있다가 다시 지역에 돌아와 ‘청소년자치공간 달그락달그락’을 기획 운영하고, 이후 ‘길위의청년학교’도 시작하게 된다. 나는 지금도 20대에 하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현장 활동뿐만 아니라 연구와 집필 등 질적으로나 네트워크적으로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은 ‘청소년활동’이다. 지금이 행복한가? 모르겠다. 행복의 정의를 내리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안다. 이 일이 청소년들에게 복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달그락’에 선생님들도 그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군산까지 와서 방 얻어 살면서 청소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청소년과 지역사회, 그 안에 많은 사람과 연대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전문적으로 움직여 가는 활동.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은퇴는 없다. 하는 ‘일’이 바뀌어 갈 뿐이다.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일의 목적에서 자기 ‘욕망’을 내려 놓고 ‘본질’을 보게 되면 평생에 걸쳐 우리가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 보인다. ‘행복’이다. 그것은 바로 나를 통해 타자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삶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를 통해 타자와 이어졌다. 이 글도 누군가 읽히기 위해서 쓴다. 의사도 환자를 돌보고 있고, 기자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한 기사를 쓴다. 택시 기사는 손님을 안전하게 목적지에 태워준다. 정치인은 어떤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일은 누군가를 위해서 함께 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다. 모든 직업이 그렇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살피고 조금이라도 복이 되도록 거드는 일이 우리 행복을 판가름한다. 우리우리 설날이 막 지났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삶을 묻는다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인생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또 다른 새해다. 모두 행복하기를. / 정건희 청소년자치연구소 소장 △정건희 소장은 여성가족부 청소년정책위원∙국가인권위원회 아동인권전문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군산시교육발전진흥재단 이사∙한일장신대학교 겸임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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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24 15:25

이제, 미래교육이다

평소에 코엑스의 번잡함이 싫어서 즐겨 찾지 않았는데 며칠전 '미래교육박람회'를 찾아 코엑스를 다녀왔다.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크기의 디지털 영상이 발길을 붙잡는다. 90도 각으로 휜 양면형, 360도 원통형, 디스플레이의 형태가 기발하고 다양하다. 코엑스에 가면 오늘, 미래를 만날 수 있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일이기에 ‘미래교육’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교육'은 '교육'과 같은 뜻,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전례없이 '미래교육'을 말한다. 전북교육의 슬로건도 '학생중심 미래교육'이다. 왜 ‘미래교육’인가? 지금은 4차산업혁명시대, 기술의 발달은 세상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갈 10년 후의 세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역량을 요구할 것이다. 변화된 세상에 필요한 미래역량을 기르려면 교육과정도 환경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미래교육이다. 코엑스의 미래교육 전시장에 들어서니 미래교육이 얼마나 가까이 와있는지 실감 났다. 수많은 미래교육 도구, 콘텐츠, 플랫폼이 선보이고 있었다. 지금 교실에서 미래교육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미래교육 교실에는 또하나의 교실이 존재한다. 더 크고 경계가 없는 온라인 클래스(가상교실)다. 온라인 교실에는 수많은 수업 도구가 있다. 교사는 필요한 도구를 선택하고 과제를 낸다, 학생들은 인공지능 기반의 콘텐츠로 각자 자기 수준에 맞는 학습을 한다. 학생과 교사는 실제 교실과 온라인 교실을 넘나들며 수업한다. 학생들의 학습과 성장 과정은 온라인 클래스에 저장된다. 학생의 성장 기록은 장차 학생의 진로 진학, 전공선택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미래교육을 위해 학생들에게 스마트기기는 필수도구다. 교실의 무선인터넷 용량은 대폭 증강하고 온라인 교육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디지털 활용 수업 역량이다. 학생보다 교사들의 연수가 시급하다. 그간 정부와 17개 시∙도 교육청은 10여년 전부터 미래교육을 준비해왔다. 다만 시∙도별로 추진 실적이 다르고 전북은 다 알다시피 미래교육에 많이 뒤처졌다. 미래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빈약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답답하게도 모든 지역이 미래교육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도 전북교육계 일각에서는 스마트기기 관리의 문제점을 내세우며 발목을 잡고 있다. 구더기 무서우니 장 담그지 말라는 것과 같다. ‘미래교육’의 기치를 높이 든 서거석 교육감은 새해를 ‘미래교육 도약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미래교육이 성공하려면 교사의 자발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적잖은 교사들이 AI 기반의 디지털 교수법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미래교육에 앞서간 교사들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라, 수업 중에 막히면 디지털에 익숙한 학생들이 더 빨리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에듀테크 교실은 수준 높은 수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좋은 방법이 있다.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는 것이다. 교사끼리 수업을 공개하고 다른 수업을 참관하면 개선점을 찾고 다른 수업의 장점을 배울 수 있다. ‘수업 열고 나눔’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서툰 디지털 역량을 키우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는게 확인되었다. 2023년, 전북 미래교육이 높이 도약하길 소망한다. 작은 걱정으로 큰 걸음을 막기보다 성원과 독려가 필요할 때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전북 미래교육, 속도를 내야 한다. /한긍수 전북도교육청 정책공보관 △한긍수 정책공보관은 2017대한민국독서대전 총감독, 한남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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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7 18:12

그들은 왜 방통위 공무원과 언론학자들을 수사할까

새해 벽두부터 칼바람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이다. 얼핏 보면 원칙도 철학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기준이 있다. ‘내 편이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이다. 그리고 거기엔 ‘법과 원칙’이라는 규범적 언어들이 동원되고, 법기술 관료들이 주도하는 권력기관이 앞장선다. 한편으로는 보수여당과 보수언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박자를 맞춘다. 권력 감시를 본연의 책무로 하는 언론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언론은 국익과 헌법수호라는 걸맞지 않는 명분까지 앞세워 철저히 ‘왕따’ 시켰다(MBC).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프로그램(김어준의 뉴스공장)이 방송된다고 지역공영방송(TBS)의 생존 근거를 박탈했다. 그러면서 불편했던 대통령의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은 MBC 기자의 도발(?)에 대한 재발 방지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폐지했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신년사로 대체하는 한편, 특정 보수일간지를 통해 단독 인터뷰를 내놓았다. 언론탄압, 비상식적 언론대응, 편협한 언론관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지만, 수사로 다져진 맷집일까. 그들만의 원칙 앞에서 쇠귀에 경 읽기이다. 방송통신위원회 흔들기도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방통위원장의 퇴진을 종용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보수언론이 나서서 개인적 치부를 드러내고자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감사원이 나섰고, 방통위는 집중 감사의 대상이 됐다. 2022년 6월부터 통상 감사를 벗어난 고강도 감사를 실시했다. 그리고는 2020년 3월에 실시한 TV조선 재승인 심사과정을 문제삼아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일부 심사위원이 점수를 수정한 것을 빌미 삼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검찰은 심사과정을 진행한 방통위 직원과 심사에 참여한 민간인 전문가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심사에 참여하면서 점수를 수정한 언론학자들 역시 수사의 대상이 됐다. 압수수색, 통화기록 및 이메일 조회, 출국금지 조치, 검찰 출두 조사를 받았다. 언론 학계는 범학회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사위원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무리한 수사와 언론학자 탄압을 규탄했다. 306명의 언론학자들이 서명한 의견서를 감사원과 검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지난 3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국무조정실의 방통위 감찰 역시 같은 과정이다. 공영방송인 KBS, MBC, EBS의 이사 추천과 선임은 방통위가 주도한다. 이에 전 정권 시절 진행된 이사 선임과 임명 과정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감사원 조사, 검찰 수사에 이어 방통위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카드이다. 조그마한 흠이라도 발견된다면 가차 없는 그들만의 법과 원칙 규범이 적용될 것이다. 지난 7일 검찰은 마침내 방통위 간부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심사 결과는 지켜 볼 일이다. 방통위 공무원 노조는 이어지는 감사원 감사, 검찰 수사, 국무조정실 감찰과 관련 “현정권은 방통위를 방송장악을 위한 도구로 변질시켜 정권수호의 앞잡이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나도 종편재승인 심사에 참여했었다. 검찰 조사를 받고 온 동료 학자의 말이 귀를 울린다. “학자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 화가 나서 살 수가 없다”. 나찌 정권 하에서 고초를 겪었던 ‘마르틴 니묄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시도 귀에 맴돈다. 내 삶에 묻은 티끌을, 언제 어느 때 법과 원칙의 규범으로 불러낼지 불안하다. 그래서 새해이건만 덕담을 나누기가 힘겹다. /김은규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김은규 교수는 현재 한국언론정보학회 학회장이며 전주공동체라디오 대표와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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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0 17:55

파편사회 극복의 과제

며칠 전 미국의 시사 주간지 ‘U.S. 뉴스 & 월드 리포트’는 세계 85개국을 대상으로 ‘2022년 가장 강한 국가’ 점수와 순위를 발표했다. 이 지수는 지도자,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영향력, 강력한 국제 동맹, 강력한 군사력, 수출 등 여섯 지표에서 점수를 매겨 총점을 계산하여 산출하는데, 한국은 2021년보다 2계단 오른 6위를 차지했다. 이 잡지는 한국을 ‘세계 최대 경제국 중 하나’로 평가했다. 한국은 정말로 살기 좋은 나라라 할 수 있을까? 경기 침체, 부동산 가격 폭등과 폭락, 지속되는 부정부패, 흔들리는 사회 안전 시스템 등에 실망한 한국인은 상당수가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즉, 한국은 경제·정치·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이지만, 시민의 삶의 질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 원인은 ‘사회적 파편화’에 있다. 그것은 사회관계의 두 측면, 즉 사회체계와 대인관계에서 균열·단절·파괴가 일어나는 상태를 뜻한다. 첫째, 사회체계 차원으로, 한국사회는 유기적 연대를 가진 하나의 통일체로 묶이지 못하고, 소집단 또는 개인 수준으로 조각나 버리는 ‘사회의 원자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사회체계를 구성하는 하위부문 간 접면(接面) 또는 연결고리가 파괴됐고, 사회체계의 불균형이 심화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둘째, 대인관계 차원으로, 사회성 부족과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외로운 개인’이 증가하고 있고, 단절된 대인관계로 인해 ‘정체성 불안’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다. 또한 계층·인종·종족·성·이념·세대·지역·종교 등에 따라 ‘우리’와 ‘그들’로 가르고, 다른 생각, 이해관계 상충을 이유로 ‘우리’가 아닌 ‘그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사회갈등’이 심화하였다. 이처럼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소통·관용·공존·상생이 약화되고, 외로움·증오·공포·혐오가 강화된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 앞에서 이루어진 ‘폭식 시위’, 대구 이슬람사원 공사장 앞에서 행해진 ‘돼지고기 잔치’, 온라인에서 자행된 서울 이태원 압사 사고 피해자에 대한 ‘무분별한 비방’ 등은,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이다. 중세 유럽에서 ‘전염병 확산의 주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던 마녀사냥의 희생자처럼, ‘사회에 위협을 가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에 대해 혐오를 퍼부은 것이다. 파편사회에는 관용이 자리 잡을 틈새가 없다.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의심의 확증편향만 난무한다. 이처럼 갈기갈기 찢긴 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동질성에 기초한 연대나 사회통합은 불가능하고, 시민의 행복지수도 낮을 수밖에 없다. 정치와 언론은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제도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여야 정치인은 상대방을 ‘공존’이 아니라 ‘적폐 청산’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어,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실현’은 기대난망이다. 언론은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여, 사회적 파편화를 오히려 부추긴다. 정치와 언론은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전락했다. 정치와 언론의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그뿐 아니라, ‘사회체계 균형의 회복’ 또는 ‘사회적 연대의 회복’을 목표로, 파편사회 극복을 위한 대안적 제도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한국사회학회 회장 △설동훈 교수는 한국사회학회장·전라북도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조사연구학회장·한국이민학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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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3 14:22

새해 인사, ‘손글씨’로 마음을 담다

한 해가 간다. 부모님이나 은사, 지인들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는 때이다.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몇 마디의 언어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상대방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정중한 뜻을 전하는 글귀에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며 정성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연말연시를 맞아 쏟아지는 인사말 홍수가 카톡이나 밴드, 문자 메시지, 이-메일을 통해 넘쳐난다. 연하장이나 편지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입력되는 ‘폰트 언어’가 아닌 ‘손글씨’를 본다면 어떠할까.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속도의 아이콘인 컴퓨터 글보다 영혼이 깃든 손글씨가 제격이다. 글쓰기의 수단이 펜에서 컴퓨터 자판으로 이양한지 오래이다. 시인 하재봉의 말대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치는’ 시대이다. ‘터치 스크린’시대, ‘디지털 노마드’ 세상에서 손글씨는 번거롭다고 외면 받고 있다. 컴퓨터 글쓰기는 편집과 교정의 편리성으로 인해 일반화되었다. 나의 정신을 손으로 옮겨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가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글쓰기 완성의 속도와 꼭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쓰기의 막힘이나 머뭇거림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나는 컴퓨터로 글을 쓸 때, 모니터에서 깜박이는 커서와 힘겨루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옛 선비들은 글씨에 그 사람의 정신과 혼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의 글쓰기가 연필이나 펜에서 컴퓨터 글쓰기로 옮겨 갔지만, 육필의 힘을 믿는 작가도 많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작가 김훈의 고백이다.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손글씨는 그의 말대로 ‘아날로그적 기쁨’인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새기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만년필로 눌러 써서 작품을 완성해간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의 의지도 되새겨볼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손글씨를 버려서는 안 된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첫 단원의 이름은 ‘바른 자세로 읽고 쓰기’이다. 아무리 아이패드 학습 시스템이 미래교육의 한 방식이라고 강조해도 그 기본은 바르게 앉아 바르게 글을 쓰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글씨만 보여주는 경우보다 직접 써보게 한 경우에 뇌가 해당 단어에 훨씬 활발하게 반응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직접 손으로 필기를 하며 수업에 참여해야 학습효과가 배가된다고 한다. 매년 1월 23일을 ‘손글씨 쓰기의 날’로 정한 사례도 있다. 미국에서 제정한 이 날은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한 존 핸콕의 생일이다. 제정에 앞선 이들은 “현대인들은 빠르고 편리한 것에 익숙해지면서, 정작 인간적인 숨결이 배어나오는 손글씨가 주는 감성적 소통의 중요성을 잊고 산다”고 경고하고 있다. 손글씨의 생활 문화적 가치를 되새길 때이다. 연하장이나 편지글을 쓸 때 컴퓨터로 작성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손글씨로, 또는 보내는 이에 자필 서명이라도 정성껏 써서 보내면 좋겠다. 로맨틱 영화의 고전으로 알려진 <러브 액츄얼리>에서 남자 주인공이 스케치북에 크게 쓴 손글씨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가 그리운 날에/ 편지를 쓴다/ 내 추억을 담아/ 내 기억을 담아/ 너에게 보낸다--(중략)--내 작은 손글씨로/ 니가 그리운 날에 편지를 쓴다/ 쓰고 또 쓰고 쓰고 쓰고/널 그리워하며/ 편지 속에 담는다.”(신세미의 ‘손글씨’) 오늘따라 대중가요가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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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7 13:49

웨슬리와 감리교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개신교의 한 종파를 세운 인물이자 기독교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살아서 그가 꽃길을 걷지는 않았다. 개인사는 논외로 하더라도 신학적으로 적잖은 공격을 받았다. 웨슬리의 동시대 사람으로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의 기틀을 세운 주요한 인물로 꼽히는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를 이단으로 비난하며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악마”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했다”는 보편구원설이 공격의 근거였다. 비기독교인 보기엔 보편구원설이 문제가 없지만, 소위 개신교 정통교리에선 은총을 받은 선택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보편구원론은 감리교의 사회적 성화 교리와 연결되고, 노예제 반대 등 인권 중시의 실천적 사회참여로 연결된다. 웨슬리의 사회적 관심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였다. 제철과 섬유 산업의 발전은 단순노동을 기계노동으로 대체하여 자영업을 몰락시켰고, 곡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2차 인클로저는 농촌 사회를 다시 한번 교란하며 도시빈민과 산업예비군을 형성했다. 부르주와 프롤레타리아가 동시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 시점에 영국에서는 기독교가 역사적 두 계급의 대립을 완충하면서 자체의 활로를 확보해야 하는 전환에 직면했는데, 감리교가 그 역할을 수행할 잠재력을 갖게 된다. 보편구원론은 자본주의의 발흥은 물론 근대국가의 토대 형성에 긴요했다. 웨슬리가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다고 하여도 보편구원론과 노예제 반대, 여성권을 포함한 인권 중시 등의 태도는 근대 서구민주주의의 이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보편구원론과 사회적 성화의 교리는 제도적인 보편선거의 도입과 내용상 봉건체제의 대체와 맥을 같이한다. 감리교가 이러한 전환에 복무하였다기보다 이런 시대의 전환에서 종교가 감당해야 할 변화를 감리교가 떠맡았다고 해야 한다. 웨슬리는 가난을 가난한 사람들의 나태함의 결과이거나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불변적 운명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난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극복해야 할 불행으로 여겼기에 끊임없이 그 원인을 연구하고 책임 있는 이들을 질책하며, 또한 격려하고 부지런히 일하도록 부추겼으며, 사회적인 불의를 제거하기 위하여 부유한 사람들과 영향력 있는 이들의 책임의식을 일깨우려고 시도하였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도 요청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혁명적 사상을 전파했다고 할 수는 없다. 노예제 반대, 여성인권 신장, 빈민구제 등 진보적 사유가 확연했지만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왕정을 옹호하고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도식적으로 분류하면 정치적으로 보수, 사회적으로 개혁, 종교적으론 진보적이었다 하겠다. 그의 감리교는 근대사회의 전환기에 사회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종교가 해야 할 일을, 정치혁명이 아닌 사회적 성화란 이름으로 수행했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의 세계에 부와 권력이 흘러넘치게 함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수십 번의 박해가 가져온 것보다 더 악한 일들을 교회에 불러들였다”며 “콘스탄티누스 이후 종교개혁까지 이런 상태는 실로 한탄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곧 성탄절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도 한탄할 만한 상황이다. 웨슬리가 꼭 정답을 제시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 시대정신을 고민하며 종교의 활로를 모색한 건 사실이다. 기후위기와 4차산업의 중층 위협 속에서 지금 표류 중인 기독교가 새로운 ‘사회적 성화’를 제시할 수 있을까.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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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0 14:14

‘IB 교육’, 성공을 담보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IB 교육을 일반학교에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2015년 즈음 제주도교육청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국제학교에 적용된 IB 교육(International Baccalaureate Programme)은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인증학교 교육 프로그램으로, 현재 세계 161개국 5,434교에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021년 기준). 혁신교육과 미래교육을 거치면서 국제적 미래인재 구현을 목표로 최근 부쩍 IB 교육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 창의인재형 미래글로벌 역량을 목표로 학생 주도의 열린 사고와 균형감을 지향하는 교육과정을 펼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한 적용은 PYP(유,초등), MYP(중), DP(일반고)/CP(특성화고)로 단계화 되어 있고, IB 공식 교수언어(영어 등)는 고교 과정에 적용된다. 평가도 학교와 본부 주도를 병행하지만 과정과 학기 모두 오직 서술을 통해 종합적 사고를 측정한다. 그러나 IB 교육은 우리나라 대입제도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현행 대입제도에서는 수능성적 확보가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 국제 감각, 심층사고, 토론, 탐구, 관계, 공감 등의 교육적 요소로 대표되는 미래글로벌 역량은 이 시대의 교육적 역할로 매우 타당하지만, 이를 핵심으로 적용하는 IB 교육은 수능 중심의 대입을 직접 도울 수 없다. 제주도에서는 대입 여건을 고려하여 특정 지역 표선면에 시범 적용했으나 이에 대한 성과를 크게 이어가지는 못해 보인다. 이어서 그 적용과 시도의 움직임이 야심차게 진행되고 있는 곳은 대구다. 대구의 적용 방식은 특정 학교의 일부 학급에만 적용함으로써, IB 교육을 인정하는 대학(학종전형)이나 외국 대학 진학을 전제로 추진하는 것 같다. 둘 다 대입에의 부정적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면서 IB 교육을 적용하는 조심스러움이 있다. 시대와 논리로 매우 타당한 IB 교육이 대입제도로 인해 많은 제약과 요령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그러함에도 이에 대한 추구는 많은 지역에서 가세되고 있다. 경기, 인천의 가시적인 노력뿐 아니라 전북에서도 적극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IB 교육의 적용과 성공을 위해서는 진실로 중요한 몇 가지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IB 교육에 동참할 교사들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교육 역량이다. 학생들의 사고를 열고 탐구력을 증진하는 IB 교육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수업 역량과 외국어 능력은 집중코스로 최소 2~3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물론 전면 시행이 아닌 샘플링 적용에 필요한 선택적 교원의 역량교육만도 그렇다. 두 번째는 이러한 교육 방식을 함께 호흡해 갈 학생의 역량이다. 탐구적 힘, 논리를 채우는 토론, 주도적 배움, 국제적 감각, 공감과 균형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교육적 저변과 배움 스타일이 학생에게도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IB 교육은 유, 초, 중, 고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원론일 것이다. 세 번째는 대입에서 IB 교육을 인정하는 대학의 수가 최대한 확보되어야 하는 현실적 기반 조성이다. 전북교육은 혁신교육 이후 미래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전북교육이 IB 교육에 의지가 있다면, 지금은 혁신교육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무엇보다도 미래교육을 충실히 시행해야 한다. 동시에 IB 교육을 위한 교사와 학생의 역량 기반을 닦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타 지역 사례 기반의 심도 있는 논의와 다른 지역의 방향성 검토도 알찬 준비를 위해 챙겨야 하는 필수 수순이다. /송영주 전 군산동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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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13 14:08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둥근 축구공’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간 계속된다.” 195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 우승 주역인 서독의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이 남긴 말이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깼다. 강호 헝가리를 누르고 ‘베른의 기적’을 만들었다. 축구의 명언이 된 이 말은 ‘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승부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로 쓰인다. Nobody knows. 강팀이 항상 이긴다는 법은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약팀이 승리의 감격을 누릴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공은 둥글다는 표현은 애매하다. 축구공은 진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는 다르다. 대부분 어디로 튈지 알 수 있다. 돌출변수를 빼면 둥근 축구공은 본대로 찬대로 굴러가 결과를 만든다. 공은 둥글다는 진리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새삼 확인됐다. 우리 태극전사들이 조별리그 마지막 포르투갈 전에서 보여준 ‘추가시간의 감동’이 이를 증명한다.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이를 악물고 뛰었던 우리 선수들은 역전승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루과이와의 승점, 골 득실에 이은 다득점 기준을 통과하며 월드컵 통산 세 번째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물론 안타깝게도 원정 첫 8강행을 앞에 두고 세계 최강 브라질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승리 확률이 높지 않았던 국가들의 선전은 조별리그에서 계속 이어졌다. 일본도 16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 승부차기 패배를 당했지만, 그에 앞서 ‘전차군단’ 독일과 ‘무적함대’ 스페인을 꺾는 파란을 연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아르헨티나에 역전승을 거뒀다. 예선전이었지만 튀니지가 프랑스를, 카메룬이 브라질을 꺾은 것도 기억에 남는 경기였다. 둥근 축구공은 땀과 꿈의 결정체다. 남들은 ‘이변’과 ‘반란’으로 약팀의 승리를 평가한다. 하지만 승리를 일궈낸 선수들에게는 이변이 아닌 당연한 귀결이다. 정당한 보상이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은 공이 둥글기 때문에 승부를 예측할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땀과 꿈이 없는 기적은 없다. 기적은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공이 굴러가는 만큼 선수들은 더 달리고 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만큼 꿈은 더 커진다.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뛴 선수들에게 축구공은 보람과 감격을 선물한다. 둥근 축구공의 진리 앞에 내로라하는 강팀들도 고개를 숙였다. FIFA 랭킹 2위 벨기에를 필두로 독일, 멕시코, 덴마크 등이 우수수 예선 탈락했다. FIFA는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두고 “그들은 꿈꾸고 믿었고 이뤄냈다”고 박수를 보냈다. 단일 종목 스포츠 행사로는 지구촌 최대 규모인 월드컵. 월드컵은 그야말로 국가대항전이다.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이다.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이 걸린 무대다. 경기 시작 전 녹색 그라운드 위에는 대형 국기가 펼쳐진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국가(國歌)를 부르며 최선을 다짐한다. 자국민들은 목이 터질 듯 열정적으로 응원한다. 모든 시선이 축구공에 집중된다. 공 하나에 울고 웃으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러나 진정 둥근 축구공은 승패를 떠나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위해 공은 굴러가야 한다. 방탄소년단 BTS의 정국이 부른 월드컵 송 ‘드리머스(Dreamers)’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꿈꾸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이뤄낼 거야. 우리는 믿으니까. 우리는 볼 수 있으니까”. /박종률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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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06 14:04

인터넷 게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26세기 초반의 미래 우주에는 세 종족이 버티고 있다. 지구촌 연합연맹에게 버림받은 범죄자들의 집단인 테란(Terran), 집단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족을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우주괴물 저그(Zerg)와 초능력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 프로토스(Protoss)이다. 이 세 종족은 각자 특유의 장·단점이 있다.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발전시켜 상대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여기저기 숨어 있는 ‘광물’과 고급 유닛이나 건물의 생산에 사용되는 ‘베스핀 가스’를 얻기 위해 전략을 짜고 경쟁을 한다. 이 싸움의 승자는 누구인가. 판타지와 전쟁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실시간 전략 게임 <스타크래프트>이다. 1998년 이 게임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후 컴퓨터 사용이 늘고 인터넷에 익숙해진 문화 환경 속에서 온라인 게임은 더욱 발전하고 일상적 놀이문화로 정착되었다. 게임이 TV(24.5%)나 영화(23.2%)와 함께 여가활동의 20.4%를 차지한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이다. 밖에서 뛰어놀았던 놀이문화는 PC방이나 개인용 컴퓨터, 모바일 게임으로 앉아서 즐기는 형태로 바뀌었다. 게임 산업은 경제적 가치도 커서 우리 문화 산업 중 가장 짧은 기간에 급속하게 발전한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게임 산업 규모는 세계 5위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그 매출액도 연간 14조원이 넘었다. 게임의 산업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즐기는 일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사실이다. 게임에 빠져 학업이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게임이나 인터넷 중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게임 이용이 많을수록 폭력성이 강하고 불안감과 적대감의 부정적 정서를 키운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에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한 다양한 종류의 게임은 ‘e-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프로게이머도 생기고, 이들은 여느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처럼 인기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게임의 긍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게임은 여가 활용의 수단이면서 학업이나 대인관계 갈등, 업무에 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화작용을 한다. 게임을 통해 소속감이나 단결심, 양보심, 협동 등의 사회 학습도 가능하며 게임 속에서 친구와 만나고 한 편이 되어 싸우는 경험도 함으로써 또래관계를 유지하는 놀이문화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시각과 청각을 효율적으로 자극하여 지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하는 교육용 게임도 있다. 학습부진아 지도에 보드게임이 활용되기도 하며, 경제·역사·언어 분야의 인지적 훈련이 필요한 교육 분야에서도 게임 프로그램이 큰 효과를 드러내기도 했다. 기억력 게임, 같은 그림 찾기 게임, 간단한 수학 놀이 게임이 노인들의 인지능력을 향상시켜 치매 방지효과가 드러났다는 보고도 있다. 미국에서는 군사 훈련의 수단으로 가상 전쟁 게임이나 게임을 활용한 비행기 조작교육, 폭발물 찾기 게임이 이용되기도 했다. 게임은 오락 문화이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인 인간은 노는 행위를 통해 일의 활력을 얻기도 하지만, 게임이나 놀이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 호이징가의 주장대로 놀이는 인간의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게임 문화가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건전한 여가 선용의 문화기호로 정착되길 바란다. 이는 게임의 개발자나 이용자 모두가 인간 중심의 기술(human-tech) 강조, 개인의 행복과 성장, 생활의 여유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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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9 13:28

세계정부 없이 국민국가들이 결정하는 세계의 미래

이집트 샤름 엘 셰이크에서 20일 막을 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는 기후변화에 따른 개발도상국의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 보상을 위한 기금 조성에 합의해 역사적인 진전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6일 개막한 COP27은 원래 18일 폐막 예정이었으나, 주요 쟁점에 당사국들이 견해 차이를 보여 20일 새벽까지 협상을 연장하며 마라톤 회의를 한 끝에 손실과 보상 기금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지구 차원에서 기후정의에 한 걸음 다가간 조치이다. 기후변화의 원인인 온실가스 대부분을 먼저 산업화를 이룬 부국들이 배출했지만, 기후변화의 악영향은 빈국들이 더 많이 받았다. 예컨대 올해 파키스탄은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고 1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조 원의 물적 피해를 보았다. 수재민이 전체 인구의 약 15%인 33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홍수 피해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세계 최빈국 연합을 대변하는 셰리 레흐만 파키스탄 기후 장관은 기금 조성 합의 후 “우리는 지난 30년 분투했고, 그 여정이 첫 긍정적 이정표에 당도했다”며 “합의는 기후 취약국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라고 평가했다. 파키스탄 기후 장관이 말한 대로 그동안 최빈국과 개도국들은 기후변화 보상 기금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홍수, 가뭄 등으로 인명 피해나 이재민 발생, 시설 파괴, 농작물 피해 등이 점차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부국들은 온난화의 유발자로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보상 액수가 천문학적인 수준이기에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번 기금 조성 합의에도 불구하고 부국들은 기금이 ‘보상(compensation)’ 성격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대신 결정문에 “손실과 피해 복구에 초점을 맞춘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fund for responding to loss and damage)을 조성한다”라고 표현했다. ‘보상’을 ‘대응’으로 규정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절충안이다. 보상을 요구하는 빈국에 부국이 응답하되 보상이라는 용어는 피했다. “기후변화의 부정적 영향에 특별히 취약한 개도국을 지원하고자 신규 재원 지원체계를 설치한다”라는 문구 또한 부국의 이해가 반영됐다. ‘특별히 취약한 개도국’에만 기금이 지원되도록 하여 수혜 대상 국가를 제한했다. ‘합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갈 길이 멀다. 누가 돈을 내고 누가 돈을 받을지, 어떤 종류의 피해와 언제부터 발생한 피해를 지원 대상에 포함할지 등 기금 운영의 세부원칙을 정해야 하는데 이게 누가 봐도 합의보다 100배는 어려운 일이다. 유럽연합(EU) 등이 돈을 내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공여국은 대체로 성의표시 차원에서 금액을 결정할 공산이 크다. 최근 분석으론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55개국이 지난 20년의 기후 재앙으로 인한 피해액이 5250억 달러(약 700조 원)로 추정된다. 선진국이 개도국을 위해 연간 1000억 달러를 기후변화 대처 재원으로 제공하겠다는 (사실상 선언에 불과한) 약속의 이행을 COP27에서 빈국들은 촉구했다. 세계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합의’의 후속 조치는 마냥 눈치게임으로 흘러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세계의 기후정의 못지않게 각국 내부의 기후정의가 시급한데다 ‘정의’는 대체로 국민국가의 핵심 관심사가 아닌 까닭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또 내부적으로 어떤 국가가 될 것인가. 그것은 결국 국민이 결정한다. 또한 세계정부가 없는 가운데 세계의 미래는 국민국가들이 결정한다. 어떤 미래일까. /안치용 ESG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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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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