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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률에서 황금률로 머무를 때까지

전주에 있는 병원에 가려고 광주 사무실을 나서서 차를 운전하여 동광주 IC를 빠져나와 광주-대구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주말과 주일에는 누님과 매형, 조카들까지 나서서 병문안과 돌봄을 해드리고, 나는 주중에 병원에 들러 살펴드리지만, 병원을 나설 때에는 간호사와 돌보는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오는 게 가슴이 많이 아팠다. 병원에 입원하실 때만 해도 막연하나마 좀 지나면 퇴원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어서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일정이 힘들지 않았다. 병상에서 누워 계시다가 너무 늦으면 안되니 이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일어설 수가 없어 앉아 있다가 자정 넘어 일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날이 많아지던 중, 봄을 지나 한여름, 늦가을, 겨울로 접어들었다. 나는 인간적 힘겨움을 잠재우려고 동양 고전 서적, 성리학자들의 마음 학문에 관한 고전, 근대 서양철학자들의 이성과 정신론, 도덕신앙론, 신학론을 다시 펼쳐 들고 깊이 파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있게 하신 분에 대한 마음의 원리인 효, 그 이치를 깨닫게 인도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에 대한 사유와 묵상을 할 틈이 없이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까지 다녔던 것 같다. 걱정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눈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하였지만 나 스스로는 사별을 예감한 혼돈의 시간이었다. 여러 병원을 알아보고 병원을 옮기는 데 애써준 누님 내외분과 아내, 병환의 치료를 위해 귀한 약재를 달인 물을 건네주고, 병원까지 차로 태워다 주며, 병원에 와서 휠체어를 밀어주기까지 한 친구들의 손길 가운데, 나는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떠나야 했다. 서울로 올라와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다가 늦은 겨울 아침 출근 길에 1년 후배와 같이 지하철 안에서 아내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 그날 천국으로 보내드렸다. 다음 해 여름 청주로 다시 옮긴 후 사무실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숙소에서 신학 서적을 정독하며 지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동편 하늘에 아침 빛과 구름이 맞물려 열린 구름사이로 빛이 내려오는 현상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 현상을 보면서 광주와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갈 때 새벽녘 고속도로 굽은 구역에서 운전하는 차 앞으로 달려오는 게 고라니가 아니라 암벽이었던 장면을 보여준 날이 떠올라 기도를 드리며 긴 묵상을 하였다. 내가 보았다고 한 장면이나 현상이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 동안 지내왔던 고된 시간들에 대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의 응축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지득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잡고 있던 도덕률이 서적에 적혀있는 문자가 아니라 실천으로 현시되어야 하는 삶의 원리이자 정언명령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보았다. 자신을 가해하는 부친과 아우들을 관용과 포용으로 아우르는 순 황제, 육신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수사제 태자, 갈대밭에 있는 배에 올라예상된 희생을 감수하는 공자 급과 수, 리디아 크로이소스와 결전을 앞둔 아브라다타스에게 맹세하는 판테아의 언행들, 이는 인간들이 이뤄낸 삶의 원리들이었다. 그러한 삶의 원리들을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황금률이 자리잡게 되고, 사랑과 겸손이 뒤따른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수년 전 서울,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고속도로와 길에서 나 보다 먼저 내미는 손길들을 감사하게 받았고, 어머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린 후 더 깊이 깨달으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제 서울과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던 그 길을 나 자신의 순례길이라고 내 마음과 영혼속에 새겨놓고, 그 새김을 하나하나 실천하리라 묵상해 본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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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6 18:35

수도권 집중 뉴스를 읽으며 불꽃놀이를 듣네!

선친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타향은 낯설어도 눈은 낯익어 고향을 떠나온 지 고향을 이별한 지 몇몇 해던가 (<고향설>, 조명암 작사) 어린 시절, 서발 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고단한 삶을 겪으며 할머니와 단 두 분이 고향 담양에서 쫓겨나듯 떠나 순창에 닿았지만, 그곳에서도 땅 한 뙈기 없는 팍팍한 삶에 떠밀려 다시 군산으로 오셨단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고, 결국 배우신 목수 일을 터전 삼아 그 무렵, 머나먼 경기도 수색으로 일거리를 찾아 가셨단다. 그 추운 겨울, 곱은 손으로 나무를 매만질 때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늘 부르셨다는 노래가 <고향설>, 즉 <고향의 눈>이다. 그러니 어찌 그 노래를 평생 잊으실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마저 백년설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고향설’과 ‘고향의 눈’이 주는 음색은 많이 다르다. 우리에게 훨씬 정감을 불러일으킬 듯한 고유어 ‘고향의 눈’보다, 한자어 ‘고향설’이 막연하면서도 깊고 낯설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까닭을 밝히는 것은 언어학자의 몫이리라. 우리는 그저 고향에서 머나먼 땅에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의 촉감을 눈물로 녹이면 그뿐이다. 전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몰려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50년 전 고향을 떠나 수도 서울로 옮겨온 나를 떠올린다. 다행히 열서너 살 소년은 고향이라는 – 결코 고유어로 표현할 수 없는 – 단어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수도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아야 이웃 아파트뿐일 것이다. 층간소음과 주차 문제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바람이 부는 그곳 말이다. 수도권 집중 현상은 그래서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아파트 숲에서 내리는 눈은 치우기 힘든 겨울의 불청객에 불과할지 모른다. 눈이 내린다는 예고에는 어김없이 빙판길 조심, 출근길 조심이라는 경계 신호가 뒤따른다. 도시의 삶에서 눈은 향수와 그리움, 어머니와 고향의 숨결이 아니라 귀찮고 치워야 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그뿐이랴. 가을 바람과 봄 바람, 겨울 바람의 표정 변화는 우리를 가슴 설레게도 하고, 깊은 우수에 잠기게도 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숲에서 부는 바람은 베르누이의 정리를 따르는 자연현상일 뿐이다. 아무 숨결도, 색상도 갖지 않은 기압 현상. 어제 저녁 서울 도심에서는 수백억 원을 단 한 시간 동안 터뜨리는 불꽃축제가 열렸다. 전혀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편의점에서는 한 시간에 천문학적 매상을 올렸다는 기사가 나오고, 가장 긴 기다림의 행렬은 이동식 화장실 앞에서 펼쳐졌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 한 시간의 기쁨을 위해 열 시간의 수고도 마다하치 않는 도시인들의 곤핍한 삶이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속에 낭만 한 점 품지 못한 이웃들이 그 안타까움을 해원(解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상이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연결하지 않겠지만, 나는 고향의 상실과 인위적 불꽃놀이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머릿속에 고향이 떠오른 이 가을에, 전군가도에 퍼지는 저녁놀의 품 안으로 여행 한 번 가야겠다. 빠르디 빠른 KTX 대신 50년 전 준급행(완행보다는 빠르고 급행보다는 느린)보다 세 배는 빠른 군산행 서해금빛열차를 타고서. 김흥식(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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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9 19:07

정읍사 노래 속 서울을 걷는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한 손님이 오신다. 꿈과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오신다. 정읍 신태인고와 왕신여고 학생들이다. 7년 전 학생들과 함께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었다. 첫 번째 책이 나올 무렵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연한 기회였다. 출판기념회 제쳐두고 그들을 보러 갔다. 청년들과 함께 서울 속 정읍을 찾아 흥인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순성하였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리’ 백악산 정상에 오르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목이 마르고 지쳐갈 무렵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에 모두 웃는다. 학생들과 선생님도 백악산 정상 바위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경복궁과 목멱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마치 정읍사 여인처럼 산 위에 올라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듯 한양도성 따라 걷는다. 천 년 동안 계속 불려진 노래가 정읍사다. 애달프지만 장단에 맞추어 박수로 호응한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도성 안 정읍의 흔적은 무엇일까? 낙타산 성벽에 井邑(정읍) 각자성석이 있다. 600여 년 전 한강 건너 한양도성을 만든 정읍 사람들 흔적이다. 그들도 정읍사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을 기다렸으리라. 발길을 옮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광장 이순신 상이 있는 곳이 황토현이었다. 그 옛날 청계천으로 물이 흘러가는 언덕배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이 정읍 초대 현감이셨다. 정읍 성황산 기슭 충렬사에 기념비와 영정이 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신사 터다. 이제 충무공 이순신 상과 함께 정읍시청이 있는 충무공원이 되었다. 서울에는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거리다. 보신각 가는 길 종각역 5번 출구 앞 황금색 상이 웃는다. 녹두장군 전봉준 상이다. 매서운 눈빛, 꼿꼿한 허리, 불끈 쥔 주먹, 다리를 걸치며 누군가 응시하는 눈빛 그리고 오른손을 바닥에 받치고 앉아 기다린다. 종각이 있는 이곳은 전옥서 옛 감옥 터다. 회문산에서 이곳으로 압송되었다. 1895년 전옥서에서 속전속결 첫 재판을 받고, 종로 한복판에서 손화중·최경선·성두환·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127년 전 41세 나이로 별이 되었다. 이곳은 서울 속 전봉준 거리다. 아니 정읍의 거리다. 보신각 건너 탑골공원 지나 수운회관까지 동학의 길이자, 녹두장군을 기리는 기억의 공간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 파랑새 노랫소리와 함께 학생들과 걷는다. 뜨거운 태양 속에 덥지만 길 위에서 묻고 답하며 길을 찾는다. 길 위에서 정읍을 생각하고, 정읍에서 찾아온 청년을 보며 함께 미래도 그린다. 그들이 힘이요, 청춘이 곧 미래다. 올해 효창원을 함께 걸었다. 도성 밖 추모 공간이다. 이른 아침 새들이 반기는 고요한 공간이다. 초록색으로 바뀌는 계절 발걸음도 가볍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었다. 해방 후 목멱산과 한강이 보이는 독립운동가 묘역이 되었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가 나란히 있다. 백정기의사기념관과 동상은 정읍에, 백정기 의사 묘는 효창원에 있다. 의열사와 삼의사 묘가 있는 이곳은 역사의 숨결이자, 기록의 공간이다. 몸과 맘을 바친 독립운동가 정신을 되찾는 곳이다. 정이 메말라가는 요즘, 부부간 사랑과 남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정읍사(井邑詞)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삭막한 서울에 정다운 정읍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심고 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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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5 18:00

어른들의 대화, 상상의 보고(寶庫)

지금은 불쑥 남의 집에 가면 실례이지만,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초대와 무관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친가, 외가, 진외가 등 부모님을 중심으로 이어진 친인척들과 촌수를 따지기도 뭣한 먼 일가들이 명절이나 집안 제사, 하다못해 장날 특별한 용건 없이 드나들었다. 그들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린 나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어 생각나지 않지만, 그 광경은 생생하다. 울 정도로 배꼽 잡고 웃다가 허기지면 자주 돌아오는 생일 떡이나 국수를 끓여 먹기도 했다. 버스 시간에 누군가는 떠나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워도 대화는 탈 없이 이어졌으니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심심했던지, 학교를 파하고 놀다가 집에 왔어도 저녁 식사 때까지 하루가 참 길었다. 일없이 곤충을 잡아 빈 병에 넣어 관찰하기도 했으니 손님으로 집안이 북적이면 싫지 않았다. 구석에 엎드려 숙제하는 것처럼 뭔가를 끄적거렸지만, 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TV가 없던 시절 그들의 만담은 내게 연속극 재방송 같았는데, 왜 어른들은 비슷한 이야기에도 매번 재미있어할까 의아했다. 평교, 주산, 동진, 성내, 소성, 이평 등지에서 온 착하디착한 사람들, 그들의 자손은 지금 전주나 서울, 그리고 그 주변 어딘가 아파트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못 박힌 군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훈련은 고된데 부식이 형편없던 시절, 중대장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한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끝내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중대원들 전부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토끼가 왜 죽었나”라는 구호로 토끼뜀을 시켰다는 이야기다. 기억이 부실한 탓도 있지만 옮겨 쓰고 보니 별 시답지도 않다. 누군가의 뱃속에서 이미 소화가 돼버렸을 토끼로 화난 사람은 중대장 한 사람이었을 뿐, 부대원들 모두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 기상천외한 구호를 외치며 뛰었을 상황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화자도 어쩌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군대 이야기에 으레 들어가는 과장은 당연하고, 앞뒤로 높으신 중대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치가 들어가면 한 편의 완벽한 소극이 된다. 다음번 장날에 새로운 청중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야기는 재현됐을 것이니 볕이 잘든 우리 집 마루는 일종의 소극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논문이나 책을 저술할 때 비유를 즐겨 쓴다. 내용보다는 저술 중에 나온 비유가 좋다는 말을 간혹 듣는다. 그리고 대화나 강연 중에 ‘예를 들어’나 ‘비유컨대’로 새로 시작할 때가 많다. 그 말투는 단언컨대 장날 우리 집 손님들의 대화에서 익힌 것이리라. 그들은 자기 말에 집중케 하려고 월남전, 농사, 하다못해 소, 돼지, 닭까지 소품으로 썼다. 그 과정에서 비유와 우화, 메타포가 등장했고, 어린 나는 이런 문화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회과 부도에서 본 나라와 광주, 부산 등 대도시, 어른이 되어야 가는 군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상상력이란 근육이 있다면 그때 부쩍 자랐을 것이다. 주교황청 한국대사를 지냈던 성염 교수가 번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록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소싯적부터 조그만 잔에 담긴 물을 보고도 나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 감히 이에 견줄 바 못 되지만, 장날과 명절 어른들의 대화는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자 상상의 세계였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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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8 17:07

봄볕과 가을비를 같이 한 친구와 아우들

고향 마을 어귀에서 들리는 여름 새소리를 추억하던 소년이 청년으로 커서 전북대학교 법정대학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봄볕이 따사롭지만 아직은 쌀쌀한 무렵 신입생이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 건물을 오가며 1층 도서관에 둥지를 만들어 놓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할 지를 생각하며 1학년 초반을 지나던 중, 청년은 1층 도서관에 놓아둔 검정색 책가방과 책들을 모두 도둑맞습니다. 청년이 망연자실하여 의자에 힘들게 기대어 있다가 도서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한 친구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합니다. . 하루, 이틀 지나서 몇 권의 다른 책을 들고 오가는 길에 그 친구가 청년에게 힘내라고 말하면서 검정색 가방을 건넵니다. 그 안에는 도둑맞은 책들을 새로 사서 넣어 둔 채로. 청년은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겸연쩍게 그 가방을 받아 들었습니다. 전공 서적 1권 사고 나면 시내버스 회수권(시내버스 승차권)을 사는 게 주저되어 걸어 다닌 일이 생생한 터라 너무 감사했습니다. 덩치 큰 익산 친구, 하얀 고무신 신은 춘포 친구, 중키에 점잖은 부안 친구, 작은 키에 체격좋은 부안 친구와 같이 어머님이 끓여주신 김치찌개를 단칸 셋방에서 나눠 먹으며 감사의 마음도 나누고 순전한 우정도 채웁니다. 청년이 미래 방향을 정하여 2층 도서관과 중앙도서관을 오가며 그 친구들과 같이 대학생활을 하며 꿈을 키웁니다. 덩치 큰 익산 친구와 하얀 고무신 신은 춘포 친구는 새벽 열차를 타고 걸어 다니고, 작은 키에 체격 좋은 부안 친구는 대학 근처에서 자취 하며 같이 어울려 소망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즈음 청년은 완산고등학교 1학년 때 헤어진 임실 친구를 대학에서 다시 만나 그 기쁨을 간직한 채 평생 법률 직역에서 같이 지내게 됩니다.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는 중키에 안경 낀 김제 친구, 안경 낀 까무잡잡한 정읍 친구의 자췻방에서, 청년과 비슷한 키에 논리적 말솜씨가 좋은 남원 친구와 더불어 우정의 공간을 채워 갑니다. 한 친구는 시험 보러 다니는 청년의 단칸 셋방에 들러 어머님 몰래 청년이 서울이나 대전으로 시험을 보러 가는 데 들어가는 차비를 이불 속에 넣어 두고 갑니다. 그 어느 날 6월 항쟁 한 가운데 한 친구가 붙잡혀 갔는데도 법률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청년과 친구들은 분노를 삼키며 굵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머님께서 자주 끓여주시는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던 친구들과 1, 2살 아래 아우들이 어느 늦은 가을날 저녁 비를 흠뻑 맞고 눈물이 범벅되어 청년을 끌어안고 축하의 탄성을 지릅니다. 그들은 전북대학교에서 청년의 단칸 셋방까지 시오리가 넘는 거리를 차가운 비를 마다하지 않은 채 맞고 걸어와 밤새 많은 얘기를 나누다 아침에서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청년이 전주지방검찰청에 근무하면서 많은 친구와 아우들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오래전부터 친구와 아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열어 주신 감사함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께 드립니다. 청년이 장년이 되어서도 늘 선함과 배려, 의로움과 자애로움을 피어나게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년은 작고 빈한했지만 장년이 되어서까지 평생 같이 하는 친구들과 아우들이 많은 우정의 부자가 되어 있음을 마음에 심어두고 감사 기도를 붙잡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아나니아, 키루스 옆에는 고브리아스와 가다타스, 크리산타스가 있었고, 관중에게는 포숙, 백사에게는 한음, 청년을 지나 장년이 된 제게는 각 분야의 리더나 전문가가 되어 있는 친구들과 아우들이 있음을 깊이 사유해 봅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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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1 15:32

기차를 탔다! 그리고 놀랐다!

지방 강연을 다녀오는 길에 기차를 탔다. 과거에 기차를 떠올리면 달걀, 가락국수, 구멍 뚫린 차표 같은 것이 떠오르는 반면, 오늘날 기차를 타면 보이는 건 99% 스마트폰(나야 수중자판기(手中自販機라는 표현을 고집하지만, 다른 분들이 모르실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상품을 개발한 자가 팔기 위해 붙인, 장사용 명칭을 그대로 쓴다)이다. 오늘날 기차를 타면서 느끼는 또 다른 하나는 시간 관념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 유학 중 고향 군산에 가기 위해 탄 장항선은, 기억이 맞다면 적어도 6시간 이상을 달렸다. 오늘날 KTX는 전주까지 2시간이면 족하다. 그런데 왜 오늘날 기차가 훨씬 지루한지 모르겠다. 더 빨리 다가오는 풍경과 더 빨리 사라지는 풍경은 파노라마적인 경험을 주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듯하다. 경험이 카이로스로 승화되지 못한 채 죽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멈추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잘 모르겠다. 여하튼 호두과자 상인도 없고, 이동식 매장을 끌고 다니는 종사원도 없는 요즘 기차는 참 지루하다. 그래서 모두 수중자판기, 아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차! 이런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앞자리에 붙은 주머니에 잡지가 한 권 꽂혀 있다. 서둘러 꺼내 본다. 그러자 몇 가지가 나를 놀라게 한다. 우선 정말 잘 만든 잡지인데 보관 상태가 너무 깨끗하다. 공중이 사용하는 물건이 이토록 깨끗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의 공중도덕 관념이 향상되어서라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런 건 아닐 것이다. 2년 전인가?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나선 한 사람이 기차 앞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턱 걸쳐 놓은 모습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다른 사람이 앉을 게 분명한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 놓을 사람은 내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문제삼는 이는 국민의 절반이 안 되는 듯하다. 그러니 시민 의식 덕에 책이 깨끗이 보관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승객 대부분이 수중자판기에 관심을 집중하고 책은 멀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안타깝다. 이렇게 잘 만든 책이 이렇게 도외시되다니! 한 5분에 걸쳐 펼쳐만 보더라도 삶에 도움이 될 텐데. 특히 승객이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럴 텐데. 왜? 우선 디자인이 워낙 뛰어나다. 그러니 넘겨만 보더라도 디자인적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국내 여행지 순례부터 맛집 탐구, 나아가 전국의 행사 정보까지 신나는 것 투성이다. 그런 정보 구하려면 열심히 검색해야 하지 않나? 반면에, 책 한 권 다 넘기는 데 고작 5분이면 족하니,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이른바 크로노스 시간의 카이로스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더욱 감동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책 향기 따라’-전북 전주에서 특별한 테마로 꾸민 작은도서관에 들렀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기사다. 사진은 또 왜 이리 멋진가! 학산숲속시집도서관, 서학예술마을도서관을 가진 주민들은 선택받은 시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도서관 여행 프로그램을 매주 토요일 운영한단다. 이런 문화적인 일이! 그래! 이번 토요일에는 시간을 내는 거야. 그래서 학산숲속시집도서관에 가서 백석 시 한 편 필사하고 와야지.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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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4 16:41

만복사저포기, 천년 남원을 품다

가을이 오면 그곳에 가고 싶다. 산들바람 따라 상큼한 솔향과 감 익어가는 그곳은 어머니 품과 같다. 무더위 지나니 들판이 제법 누렇다.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진이 날 진이 해동청 보라매...' 노랫가락에 발걸음도 가볍다. 누구는 남한산성 아니냐고 말한다. 남원성 너머 교룡산에 천년을 머금은 천혜의 요새 교룡산성이 남원산성이다. 그 옛날 남원에 용이 승천하기 전 교룡(蛟龍)이 살았다. 백제시대 518m 높이의 교룡산에 성곽을 3.12km 쌓았다. 성 안에 우물이 99개와 계곡마다 수문이 3개나 있던 철옹성이다. 교룡산성 동쪽 홍예문에 옹성이 있어 지금 보아도 튼실하다. 과연 누가 성을 쌓았을까? 홍예문 지나 비석들도 오랜 흔적을 보여준다. 별장과 장군의 이름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즐비하다. 계곡 따라 오르면 선국사 대웅전 아래 보제루가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동학농민혁명군 김개남 장군이 머물던 곳이다. 그는 전봉준 장군과 뜻을 같이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철학이 약간 달랐다. 누구의 영향이었을까. 동학의 시작을 알린 수운 최제우가 머물며 '동경대전'을 쓰고, '칼노래'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남원은 그냥 남원이 아니다. 춘향이가 살던 광한루, 이도령과 만난 오작교, 여뀌꽃 피는 요천(蓼川)이 흐르는 남원은 사랑을 간직한 도시이자 천년 역사를 품은 도시다. 남원은 천년 전에도 남원(南原)으로 불리었다. 통일신라 5소경 중 남원경처럼 옛 이름을 간직한 곳은 남원이 유일하다. 백제의 문화도시, 신라의 역사도시에 남원성과 교룡산성 옆에 선원사와 만복사가 있다. 고려 사찰과 탑들이 지리산과 섬진강변에 많다. 고려 말 왜구 침입에 이성계 장군과 포은 정몽주 그리고 만육 최양 종사관이 황산대첩을 이룬 곳도 남원이다. 남원 운봉과 인월에 가면 역사 속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피바위와 인풍리에서 황산대첩 후 남원성 옆 만복사가 있는 왕정동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남원성 안 용성관에서 미래를 기획한다. 그 후 황희 정승이 남원에 귀양 와 광한루를 짓고, 정인지가 오작교와 삼신산에 정자도 꾸민다. 또한 매월당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남원성 서문 옆 만복사에서 구상한다. 삶과 죽음에 얽힌 사랑 이야기가 음악과 함께 내려온다. 남원은 춘향가와 흥보가 판소리가 있지만, 더 깊은 역사 속 정유재란 만인의총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가을에 꼭 한번 가야할 도시가 남원이다. 지리산 오르기 전 섬진강 따라 뱃놀이 하기 전 남원성 옆 만복사지에 꼭 가보자. 만복사지에 가면 눈에 보이는 보물이 많다. 만복사 규모를 알려주는 만복사지 당간지주, 오층석탑과 석조대좌 그리고 석조여래입상이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만복사 석인상 얼굴에 미소가 머문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양생처럼 살포시 웃는다. 남원역에서 5분 거리에 만복사지가 있다. 광한루까지 걸어서 10분이면 족하다. 남원성 북쪽 만인의총도 걸어가보자. 427년 전 정유재란 때 스러져간 우리의 조상도 만날 수 있다. 그날의 함성을 들었다면 술 한잔 올린 후 교룡산성으로 가자. 성안 보제루에 앉으면 지리산과 요천이 보인다. 가을에 남원은 언제나 엄니 품과 같다. 남원에 가면 따뜻한 온기를 꼭 담아 오자. 가을이 주는 힐링 도시, 남원~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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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8 15:15

조상현 국창과 사철가

1987년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직후 성남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 일주일 입소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공무원 소양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때 평생 함께할 친구를 얻었다. 판소리.. 당시 40대 말 한창 소리에 힘이 붙었을 조상현 명창은 강당에 모인 300 명의 연수생들에게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부르고 그에 덧붙여 강의하는, 요샛말로 ‘렉처 콘서트’를 했다. 그날의 체험은 2년의 연수 기간 중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판결문 쓸 때 ‘...고’와 ‘...며’를 번갈아 쓰라는 이른바 ‘고며 체’라든지, 불기소장 작성 때 상급자 도장보다 작은 것을 쓰되 인영이 칸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도제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사상에 올려진 맨들맨들한 밤처럼 이리 깎이고 저리 깎여 2년이 지나고 나니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됐던 그 시절, 거칠되 거칠 것 없는 우리의 소리를 처음 들었으니 다듬어지기를 거부하는 성정에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판소리 애호가가 됐다. 물론 그때 소리를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대청마루 한쪽에는 늘 북이 놓여 있었다. 간혹 집안 어른들이 북채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연초가 되면 마을 농악대가 집마다 꽹과리, 장구, 징을 치며 놀다가는 장면을 보고 자랐는데, 꽹과리의 날카로운 소리가 그때는 소음으로 들렸다. 그런 문화적 경험이 쟁여졌기 때문일까 조상현 명창의 공연 겸 강연을 들은 후 나는 ‘귀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아예 판소리 CD를 차에 넣고 먼 길 갈 때마다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둘째 녀석 입에서 갑자기 “이산 저산 꽃이 피니..”가 나오는 게 아닌가? 사철가에 나오는 많은 한자어의 뜻을 알 턱이 없는 어린아이가 읊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학예회 때 부르고야 말았다. 가사 한번 본 적 없이 귀로 듣고 입으로 뱉어낸 것이다. 아내 말에 따르면 행사 후 몇몇 학부모로부터 아이가 어디서 국악을 배웠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브리태니커에서 낸 조상현 소리 / 김명환 북의 춘향가 완창 CD(6장)를 사서 듣기도 했다. 공연 경험 중에는 20여 년 전 국립극장 야외극장에서 있었던 안숙선 명창의 심청가 완창을 나의 인생 공연으로 꼽는다. 한때는 오정숙 명창의 수궁가(북 김청만)를 차 안에서 즐겨 듣곤 했는데, 그 CD 앞부분에 식전음식처럼 사철가가 나온다.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해 계절을 한 바퀴 돌고 난 백발노인이 삶을 회고하며 부모효도, 형제우애, 우정을 노래한 불과 5분 남짓 단가를 나는 그 어떤 사계(四季)보다 좋아한다. 비발디와 차이콥스키의 사계도 계절의 아름다움이 잘 들어 있지만, 정작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사철가를 인생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사철가가 판소리처럼 오래된 줄 알았는데, 최근에야 조상현 국창이 20대 만든 것을 알게 됐다. 설익었던 나의 20대를 생각하니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난 18일 전주세계소리축제 폐막을 장식한 조상현과 신영희 국창의 공연에 가지 못해 아쉽다. 조 국창은 제자를 많이 길러낸 국악인으로 유명하다. 나는 비록 그의 수하에서 소리를 배운 적이 없지만, 40여 년 전 그의 짧은 렉처 콘서트로 ‘듣는 제자’가 되었다. 부디 건강하셔서 귀명창을 많이 키워내시기를 부탁드린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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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1 18:35

낮음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제가 법조인의 길에 들어선 이후 현직에서 일한 때로부터 12년이 지나서야 전주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다니는 동안 실무 수습 과정 1년도 전주에서 지내기도 하였지만, 그 이후 12년 지난 즈음에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삼성상이 있는 공간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북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닐 때 도서관에서 법률 서적을 보다가 지칠 때 였는지 아니면 법조인이 되기 위해 연수를 받던 시점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작고하신 사도 법관님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분에 대한 평전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이따끔 발길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법조의 현직에 계실 때 직위를 개의치 않으시고 도시락을 직접 싸서 들고 다니시며 일하셨던 청빈한 법조인이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인 교도소를 찾아 그 분이 유죄판결을 선고한 사람을 면회하여 신앙으로 인도하시는 성자와 같으신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순전한 청년 시절 사도 법관님에 대한 글을 읽고 아주 깊은 감명을 받으며, 감동의 눈물까지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살아가신 인간으로서의 행로, 법조인으로 걸어가신 크고 깊은 걸음은 제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곳에 자리잡았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물이 밤낮으로 흘러 그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은 채 사람이 거처하려 하지 않는 곳에 머무는 것처럼, 사도 법관님은 인간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겸허함을 간직한 수도자처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에 대한 경외심을 늘 품고 낮은 곳을 찾아다니신 분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 가운데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을 잘 낮추었기 때문이라는 현자의 경구가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진리의 말씀에 다다르게 됩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분께서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본체에 관하여 긴 시간 동안 담론을 나누다가 헤어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율곡 이이에게 퇴계 이황께서 고갯마루까지 걸어나와 배웅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 드립니다. “거경궁리(居敬窮理)”, 마음을 전일하고 바르게 삼감으로 근본 이치를 깨달아 실천하라는 마음의 인사였습니다. 이러한 현자들과 성자 같으신 분의 낮음으로 가는 걸음걸이는 그 곳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진리의 빛과 영광의 길이 있다는 견성과 활연관통의 경지를 넘어선 참된 신앙의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유해 봅니다. 이러한 사유의 지향성은 바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을 향한 자유의지가 발현된 것이자 그분의 뜻에 따르려는 경외심에 기반을 두는 것일 것입니다. 제가 법조인으로 사는 동안 이러한 현자들의 깨달은 경구를 이정표로 삼고, 제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가언명령이 아닌 정언명령을 꼭 붙잡고, 늘 마음과 영혼 안에 계시는 영원한 존재자에 대한 경외의 믿음으로 살아가리라 소망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리라 다짐하고 기도해 봅니다. 제가 가끔 전주에 다녀오는 길에는 덕진공원에 가보려고 합니다. 존경하는 사도 법관님에 대한 흠모가 낮은 곳으로 내려온 물처럼 머물러 있고, 청년 시절의 열정과 의지가 호수에 피어 있는 꽃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되며, 믿음의 싹이 튼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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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7 18:01

전북에 출판학교 프로그램 하나쯤 어떨까?

오늘날 세상에는 독자보다 저자가 넘쳐난다. 그래서일까? 서점에는 손님이 없는데, 오늘도 출판사는 새롭게 문을 연다. 그래서 그런지 독립출판, 1인출판 전성시대다. 먼저 출판의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참으로 걱정이 앞서는 까닭이다. 스물 셋에 뜻을 세우고 서른 셋에 설립한 출판사는 쉰 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자립의 기틀을 닦았다. 도서관 한 귀퉁이에 내가 세운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상상하기 힘든 희열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왔다. 그 고난의 파도를 넘은 힘은 오직 출판!에 삶을 걸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독백으로, 방백으로, 연설로 말한다. “저는 정말 세상에, 독자에, 하늘에 감사합니다. 내가 뜻을 세운 일을 하며 굶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삶을 건 후 출판으로 평생을 걷다 보니 또 다른 뜻이 눈에 들어왔다. “출판을 하겠다고 나서는 후배들을 위해 할 일은 없을까? 더군다나 내 고향 전북에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라는 대표적인 정부기관까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터무니도 없는 꿈을 꾸다 보니 몽상도 하게 된다. “고향에 출판학교 하나 운영하면 어떨까? 지역에서 오랜 기간 뿌리를 내리며 인문학, 문학, 문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대학과 정부 기관, 그리고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마음은 늘 그곳에 씨를 뿌리는 출판인들이 삼위일체를 이룬 후, 삶을 사랑하고 문명을 아끼는 젊은이들에게 출판하는 힘, 출판의 현실을 전하는 프로그램 하나쯤 운영하면 어떨까? 명칭은 고향 출신 이병기 선생님을 기려 가람학교로 할까? 아니면 채만식을 기리는 백릉학교나 시인 신석정을 기리는 석정학교도 좋겠다. 아, 혼불학교도 있구나.” 사실 출판은 돈의 양으로 무게를 잴 수 없는 고귀한 작업이다. 한 시대를 기록한 후 세상에 전파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이 놀라운 작업을 어찌 자본의 잣대로 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 모든 상품을 구입하는 이들은 소비자(消費者), 즉 ‘상품을 사서 써 버리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오직 단 한 가지, 책을 구입하는 이들만은 독자(讀者), 즉 ‘읽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하기에 출판에 뜻을 세운 젊은이들이 걷게 될 험난한 길을 떠올린다고 해도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한마디 거들 뿐이다. “첫 삽을 뜨십시오. 다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자기 결정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물론 그 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실력를 탄탄히 쌓으면서. 겸손하게, 지치지 말고, 앞선 선배들의 무릎 아래서 배우면서 함께 나아갑시다.” 기회가 닿으면 그런 일에 일조를 하고 싶다. 졸업 후 서울로 향하는 길 외에는 오리무중인 시대에, 문화의 고장, 문학의 고장, 문명의 고장에서 젊은이들과 부대끼며 새로운 출판의 꿈을 꾸고 싶다. 계절학교도 좋고, 주말학교도 좋고, 정기강좌면 또 어떠랴! 교실을 떠나 출판도시 견학도 해 보고, 저자도 만나 보며, 인쇄 현장, 제본 현장, 유통 현장, 나아가 서점 담당자도 만나보면서 실무적 힘도 배양하다 보면 더 큰 뜻을 세우는 후학들이 왜 성장하지 않겠는가. 이미 고향 곳곳에서 출판운동, 문화운동에 여념이 없는 선학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과 힘을 합한다면 세상이 눈여겨 볼 만한 성과를 거둘지 누가 알겠는가.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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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31 15:21

서울과 전주 역사와 문화를 함께 보자

몇 해 전 이맘때 비긴어게인 경기전 버스킹이 있었다. 역사의 도시이자 전통 문화를 간직한 전주에서 여름날 밤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한옥마을인가 했더니 궁궐같은 전각에 궁담길 옆 오래된 나무가 세월의 깊이를 보여준다. 하마비와 외삼문 그리고 홍살문이 보이는 전형적인 서울의 고궁과 같은 운치있는 풍경이다.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보물 같은 공간’이 경기전(慶基殿)이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 어진과 조선왕조실록 보전기적비가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전주가 지켜온 조선의 자긍심이 바로 경기전이다. 경복궁은 알아도 경기전은 잘 모른다. 더구나 한양도성 관문인 숭례문은 가 보았어도 전주성 정문인 풍남문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1907년 성문과 성벽이 헐린 후 전라감영 전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 풍남문이다. 서울 숭례문 및 흥인지문과 규모 및 옹성이 비슷하다. 풍패지향(豐沛之鄕)은 조선왕조의 발원지 전주 이씨 본향인 전주다. 그리고 호남제일성 전주성 남문이 경기전 옆 풍남문이다. 600여 년 전 이성계가 남원 황산대첩에서 승리 후 전주 오목대에 올라 조선 창업을 구상하며 풍년가로 종친과 하늘에 고했다. 전주와 서울은 다른 듯 같은 계획적 역사·문화 도시다. 오래된 역사가 있어 동네마다 도성과 읍성에 얽힌 이야기가 풍성하다. 한양도성에 한강이 있다면, 전주성에 전주천이 있다. 한양도성 안 왕이 사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있듯, 전주성 안 왕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과 풍패지관 전주 객사가 성안에 있다. 또한 숭례문 옆 남대문시장이 있듯, 풍남문 밖 남부시장이 시민과 관광객의 먹거리를 보장하고 있다. 도성 안 서촌 한옥마을과 북촌 한옥마을처럼, 읍성 밖 한옥마을이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멋스러움과 여유로움까지 선사한다. 서울과 전주는 가톨릭 역사도 비슷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이자 상징은 김범우 토마스 집터인 명례방에 지은 명동성당이다. 1898년 대한제국 시대 우여곡절 끝에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이 도성 안 명동대성당이다. 1791년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등 호남 지역 많은 가톨릭 신자의 순교 터에 전동성당(殿洞聖堂)을 지었다. 풍남문 밖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건물이다. 전동성당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풍남문 성벽이 헐린 후 화강암과 성돌이 주춧돌로 사용되었다. 전주 없이는 서울도 없다. 전주가 본관인 조선왕조 시작이 태조 이성계이듯, 조선왕조실록의 대기록을 지킨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조선의 명맥을 이었다. 서울 한양도성은 600년 역사를 간직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한다. 한양도성에 있었던 사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창의문)에 훼철된 성문을 복원하고, 소실된 성벽을 이으려고 한다. 600년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풍패지향 전주성도 복원되기를 바란다. 전국 팔도 중 가장 크고 웅장했던 전라감영 건물들과 전주성 사대문(풍남문·패서문·완동문·공북문)도 복원되기를 희망한다. 전주와 서울은 사실 비슷하다. 두 도시는 공간적으로 멀지만 시간적으로 공통점이 많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울과 대한민국 전통을 간직한 전주는 해외 관광객과 국내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다. 가서 머물고 보고 배우는 역사·문화·생태도시로 접점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최철호 소장은 한양도성 전문가로 양천문화재단 비상임 이사·(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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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4 15:08

전주 여행

맞벌이로 바쁜 아들 부부가 여름휴가를 전주로 간다고 해서 귀를 의심했다. 내 고향이긴 해도 요즘 비행기 타고 가는 흔하디흔한 일본이나 제주가 아닌 전주라니.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기 위해 간혹 고창에 간 적은 있어도 뜻밖이라 생각했다. 나는 부안에 언제 가보았나 생각하니 아득하다. 간혹 격포에 있는 콘도에 하루 이틀 묵었던 적은 있으나, 정작 내가 태어난 부안읍에 간 지는 꽤 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싶은 우리 집,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신작로. 신작로(新作路)라니⋯.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게는 근사한 ‘새로 만든 길’이다. 한여름 더위에 오래 서 있으면 신발 바닥이 뜨거워지고 도로 군데군데가 물컹해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다. 그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아무도 나를 알아볼 리 없고 내가 아는 가게나 사람도 없어 마치 외국 어느 도시를 걷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느릿느릿⋯. 성묘 때나 변산에 갈 때,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줄포나 선운산 IC로 나가기 전 오른쪽으로 부안이 보인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김제를 거쳐 부안읍을 왼편에 두고 지나간다. 내가 처음 서울에 유학할 때는 전주나 김제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모두 합치면 5시간 넘게 걸렸다. 5시간이 4시간∙3시간으로, 이제는 2시간 반으로 줄었다. 신기록을 세우기라도 하는 양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말 그대로 주파한다. 세 시간에 갈 길을 두 시간 반으로 당겼다고 해서 경제성, 효율성이 얼마나 더 올라갔을까? 이 좁은 땅에서 하루 생활권이면 족하지, 반나절 생활권으로까지 만들 필요가 있을까? 선거철 유세하듯 말이다. 부안에서 김제나 전주로 가는 길은 오랜 세월을 두고 신작로가 많이 생겼다. 어떤 곡선도 직선보다 짧을 수는 없다는 법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신작로는 그렇게 생겨났고 옛 도로는 마을 길로 바뀌었다. 그 길은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다니고, 가을이면 고추를 널어 말리는 건조장으로 쓰인다. 그런데 길이 직선으로 나면 마음도 곡선에 머물지 않는 것 같다. 오래전 모 정치인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라고 말했다가 지역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한 적이 있다. 이제 그 도시는 사천시로 편입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본래 도로의 기능이 시점과 종점을 연결하는 데만 있지 않은데도 서울, 부산, 광주 같은 큰 도시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삼천포에 빠진다는 말이 논란이 된 것이다. 지금은 전주에, 부안에 빠져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전주가 여수 가는 길목에 있거나 부안읍이 격포 가는 우회로의 배경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유럽 큰 도시의 중앙역은 대부분 열차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도심을 관통하지 않는 것은 전통적 도시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 도시에 머물게 하려는 뜻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전북에는 머물러야 할 매력적인 곳과 맛이 즐비하다. 멀리서 휙 지나가며 보거나 휴게소에서 맛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가수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라는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 죽을 만큼 뛰다가는 /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아들 내외가 전주에 흠뻑 빠지기를 기대한다. 추신: 17년 만에 ‘타향에서’에 다시 글을 쓰게 됐다. 독자 여러분께 첫 글로 인사를 드린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남형두 교수는 부안 태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를 거쳐 2005년 이후 연세대 로스쿨에서 저작권법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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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7 14:59

재 넘어가는 길에서

늦은 오후 고향 마을을 나서서 읍내를 향하여 재를 넘어가는 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름 새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맴돌듯이 들렸습니다. 고향 마을 입구에 있는 삼거리에 서서 어머님의 흔드시는 손이 먼 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습니다. 한여름 무더운 들판에서, 오일장 열리는 추운 읍내 장터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렸습니다.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녘, 병원에 다니시느라 어느 때부터인가 이따끔 씩 들리지 않자, 소년은 집문 밖을 서성이고 서성이다 눈물을 훔치고 작은 손에 책을 들어 글을 읽기 시작하고, 알고 싶어하는 길을 찾아갑니다. 무엇을 알고 싶어서인지, 어떤 것을 찾고 싶어서인지 모르지만 근원적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나 마음을 찾는 궁리의 노정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몇 해 지나서 전주에 있는 셋방으로 소년을 데리고 이사온 어머님이 고향 읍내 오일장에 가시면, 소년은 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책을 찾으러 3층 도서관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돈 계산을 놓쳐 매점 아저씨께 손해를 끼치기도 하였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소중한 체험으로 도덕률의 첫 걸음을 하게 됩니다. 청년이 되면서 걷기도 하고, 버스를 타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며 도서관에 몇 년 머무르다 꽃 재배단지가 남아 있는 서초동에 이른 후 십년이 3번을 흘러갑니다. 그 세월 동안 무덥고 추운 날의 새벽이슬, 거친 폭풍우 한 가운데서도 오롯이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의 합심 덕택인 것을 마음에 새겨둡니다. 여름 새소리를 잊지 못하던 소년은 청년을 지나 장년을 넘어설 즈음 수년간 병상에 계시다 떠나시려는 어머님을 부여잡다가 거부할 수 없는 떠남을 모시려고 삼생지양을 하지 못한 통한을 가슴 깊이 움켜쥐고 피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장례 버스로 그 재를 넘어갑니다. 아내와 아이들, 형제와 친척들, 빈천지교이자 평생 친구들의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고향의 산에 이릅니다. 이제는 장년이 된 소년은 그 재에서 들리던 새소리, 책과 더불어 궁구의 길을 좇아갑니다. 그 길은 학교 매점에서 일하던 소년의 응시, 사유, 깨달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길 가운데 황금률을 마음 깊이 심어두었습니다. 그 길에서는 셋이자 하나인 빛나는 진리가 있으므로 그 길을 따르게 되고, 한없는 그리움과 더불어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삼가함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바깥을 바로한다) 라는 현자들의 깊은 글로 선한 마음을 나누며, 평생친구들의 따뜻한 미소가 손짓하므로 정겹게 화답하게 될 것입니다. 고향을 오가는 길가에, 그 재 너머에 있는 산까지 마음을 가로막는 띠풀이 자라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늦은 저녁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서 도심의 휘황한 불빛만큼이나 그리운 고향 길과 평생친구들의 정담과 웃음소리가 역력하게 보입니다. 옛 시인의 시를 입으로 읊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손바닥을 앞뒤로 젖힘에 따라 구름이 일고 비가 오듯이 분분한 경박함을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으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했을 때의 사귐을 이 길을 지금 사람들은 먼지 털 듯 버리더라”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김석우 변호사는 전주완산고와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광주지검 목포지청장·서울중앙지검 외사부장검사·서울남부지검 형사5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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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0 15:43

아버지! 제가 전북일보에 글을 씁니다

그 고요하고 따스한 곳에서 안녕하시지요? 올해 초 가신 어머니도 만나셨는지요? 이곳에서는 많이도 다투셨는데, 그곳에서는 어떠세요? 그래도 떠나신 후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셨어요. 그나저나 제가 전북일보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우시죠? 저보다 더 고향을 사랑하셨던 아버지.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셨으면, 우리 형제들 이름에 ‘흥’자를 넣으셨을까 싶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아버지께서 청장년을 보내신 동네가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동이잖아요. 지난번에 군산을 찾아 흥남동을 찾고자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더라고요. 제 어린 꿈이 서린 팔마산은 물론, 밤낮으로 돼지 울음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했던 도살장도 사라졌더라고요. 아이들과 숨바꼭질하던 토마토 밭의 진짜 향기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그래도 군산 아니면 맛보기 힘든 박대구이도 풍족히 먹었습니다. 다시 형님이 청년 시절을 보낸 전주로 차를 돌렸는데, 전주 역시 옛 시절을 그리워할 만큼 충분히 발전했더군요. 그래도 남도와는 또 다른 북도 사투리는 여전했고, 호남제1문은 더 확장된 모습으로 저를 맞아주더군요. 아버지, 기억나시나요? 제가 그 무렵 S그룹에서도 꼽히는 J기획에 입사원서를 낸다고 하니, 이력서에 출신도를 서울로 쓰라고 하신 것 말이에요(요즘은 이력서에 학교 이름도 쓰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이 일반적인데, 그때는 출신도 쓰는 난까지 있었지요). 그렇게 고향을 사랑하시던 아버지께서도 꺼리실 만큼 그 무렵에는 호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같은 게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인가요. 오히려 눈에 잘 띄게 한자로 全北(전북)이라고 썼는데도 300대 1을 뚫고 최종합격했지요. 그러니 호남에 대한 차별은 지레짐작이었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모난 세월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께서는 충분히 우려할 시대였지요. 그런 시대를 지나 이제는 차별과 우려 없는 맑은 사회가 된 듯합니다. 고향이 변한 만큼 세상도 많이 변한 셈이지요. 그래도 여전히 고향에 대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안이 너무 어려워 국민학교(초등학교)를 3년밖에 못 다니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미수(米壽)를 맞아 순창군 동산초등학교에 연락을 했지요. “저희 부친께서 그 학교를 중퇴하셨는데, 명예졸업장이라도 받을 수 없을까요? 그리고 부친처럼 집안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적으나마 장학기금을 기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학적부가 소실되어 아버지의 재학 기록이 사라졌대요. 결국 명예졸업장 프로젝트는 실행하지 못했지요. 그래도 자식들만은 당당히 교육을 시키셨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평안보다는 사회와 이웃을 위해 싸우셨으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 덕분에 우리 가족에게 경제적 곤란은 숙명이 되었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저는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정신 덕분에 평생 책 만들면서 잘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머리는 하얗고 허리가 굽어가지만, 아직도 아버지 모습만 떠올리면 불효를 일삼던 10대가 된 듯합니다. 이제 불효를 일삼을 아버지, 어머니도 안 계시지만 말이지요. 아버지,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버지 타시던 차를 지금도 몰고 다니는 둘째아들이 노는 모습을, 늘 앉으시던 뒷자리에 지금도 꽂혀 있는 전주 태극선을 천천히 부치시며 바라봐 주십시오. 불초 둘째아들 올림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김흥식 대표는 군산에서 태어났고 서강대학교를 졸업했으며 <행복한 1등 독서의 기적>, <세상의 모든 지식> 등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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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3 16:07

다시 생각해 보는 교육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한국의 고립·은둔 청년 규모를 총인구의 0.5% 수준인 24만명으로 추산한 바 있다. 은둔형 외톨이는 집에 틀어박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일본은 15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연구원은 2050 서울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탈(脫) 관계화된 축소사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1인가구와 비혼가구가 급증하고 개인가치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하는 데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이러한 초(超) 개인주의화는 사회적 고립과 소외로 이어져 탈사회화를 진전시키고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을 약화시킨다. 과거보다 더 풍요롭고 편리한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왜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해 은둔하는 삶을 사는 걸까? 필자는 결과를 중시하고 실패에 관대하지 못한 사회문화 못지 않게 우리의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과 학과가 서열화된 사회에서 대학은 삶, 기회, 지위를 결정한다. 대학입시가 초·중·고 교육을 압도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낙담하고 불안해한다. 심리적 압박이 커 비판에 민감하고 지나치게 자기 비판적이며 실패를 두려워한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진단이다.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밀도, 고경쟁, 고학력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 승자 독식 문화가 싹트고,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해로운 크랩 멘탈리티(crab mentality)가 자리를 잡는다. 개인간 경쟁의 심화는 공동체를 위한 협력의 기회와 사회 전체의 상호이익 감소로 이어진다. 성공한 사람을 질투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자신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외부 환경에서 찾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이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은둔형 외톨이를 양산하는 탈관계화된 축소사회와 초개인주의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더불어 사는 지혜 즉,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있는 민주시민으로 키워내는 교양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교양이 없는 사회보다 위험한 사회가 없다는 말이 있다. 교양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리더와 전문가에게도 중요한 덕목이다. 평범한 시민에게도 교양이 요구된다. 교양의 힘은 자기성찰과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갖게 하는 데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교양이야말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편리함과 효용성을 중시하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어 자칫 교양이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이미 정해진 삶의 늪’에서 미래세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초·중·고는 물론 대학 교육까지도 교양교육이 강조되어야 한다. 교양 기반의 교육을 통해 세계와 사람을 이해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지혜를 가진 시민으로 키워내는 일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시험과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 전부인 작금의 교육 현실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입시학원의 도움으로 좋은 성적을 얻는 학생을 대량 생산하는 것은, 어느 정치학자의 표현처럼, 경쟁 국가의 병정을 훈련시켜 유능한 노동력을 키울 뿐 교양을 갖춘 교양있는 민주시민을 기르는 일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고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서순탁(서울시립대학교 교수, 前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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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6 16:15

Thinker in Residence 전북을 꿈꾸며

지난해 한 달간 춘천에 머문 적이 있다. 6개월간 연구 연수를 맞아 지역살이를 기획했는데, 춘천문화도시센터가 받아들여 나를 춘천으로 초대했다. 프로그램은 Thinker in Residence. 오스트리아에서 시행한 이 사업은 말 그대로 연구자들에게 지역에 머물며 연구하고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술가 레지던스의 연구자 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내가 지방의 모 연구원에 제안했던 것이다. 특정 분야에 집중된 정부연구원과 달리 여러 분야를 연구해야 하는 지방연구원 여건상 연구인력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나처럼 연구 연수를 하거나 잠시 쉬며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자를 불러들여 지역을 연구하도록 하면 어떻겠냐는 게 내 제안이었다. 당시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춘천문화도시센터가 흔쾌히 받아들여 첫 Thinker in Residence를 진행했다. 처음 살아본 춘천은 참 매력적이 도시였다. 아침마다 뿌연 안개를 피워내는 의암호는 춘천을 신비롭게 만들었고, 봉긋이 솟아올라 춘천을 조망하는 봉의산은 어머니처럼 늘 푸근했다. 마주 선 석사천은 시민들의 놀이터로 다양한 활동의 공간이었고, 그 안에 형성된 도시는 다양한 먹거리로 꽉 채워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SNS에 ‘닭갈비만 포기하면 춘천의 맛이 보인다’라고 했을까? 난 매일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로 의암호를 달렸고, 하루 3만 보 이상 걸으며 춘천이 가진 가능성과 가치를 찾으려 했다. 한 달 후 난 결과를 보고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춘천이 남긴 흔적들에 대한 것이다. 내 보고서가 춘천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춘천은 나에게 매우 진한 흔적을 남겼다. 지친 삶을 위로받았고, 도시를 연구하는 처음 시절로 돌아가 기본자세를 새롭게 했으며, 여러 사람과 사귀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를 구했다고 할까? 무엇보다 춘천에 대한 관심을 얻어 얼마 남지 않은 정년 이후 춘천에서 거주할까 생각 중이다.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서울을 떠나 춘천이라는 도시에서 새롭게 지역을 연구하고 강의하며 지역을 기획하는, 자그마한 기여라도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관계인구, 생활인구. 지역소멸에 대응해 여러 제안이 나온다. 나는 그런 지역에 다양한 형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운영을 권하고 싶다. 나처럼 연구자도 좋고, 기획자나 혁신가, 디자이너, 전통적인 예술가도 좋다. 지역을 연구하고 새롭게 하고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정 기간 머무르며 지역을 학습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보자. 그럼 뭔가 나오지 않겠는가? 또 설령 나오지 않더라도 나처럼 지역에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게 관계인구, 생활인구를 늘려 가는 것이라면 그것도 성공 아니겠는가? 미래에 지역은 혁신에 달려 있다. 누가 시대에 맞는 코드에 맞춰 자신을 혁신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렇기에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주 4일제의 시대이고, 워케이션(workation)의 시대이며, 한달살이를 포함해 다양한 지역살이를 꿈꾸는 취향의 시대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난 6개월 ‘타향에서’를 쓰며 떠나온 고향을 생각해 봤다. 생각보다 진하게 흔적을 남긴 것 같다. 그간 감사함을 전하며 앞으로 전북의 파이팅을 기대해 본다. /라도삼(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문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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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9 15:53

'만인의총'의 창극화를 바란다

지난번 '타향에서'의 글 "남원의 역사유적 만인의총"(4월 11일)을 잇기로 한다. 1986년에 국방부 육군본부의 정훈감실 기회에 의해서 나의 극작품(戱曲) <만인의총>이 제작되었다. 그해 하반기와 이듬해 87년까지 걸쳐서, 후방(대구)과 전방(원주)의 연대단위 예하부대 및 해당지역의 주민 위문을 겸한 순회공연을 가짐으로써 크게 성공을 거두고 좋은 평가를 받았음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남원 땅 고향의 역사 유적지가 나의 창작품 소재라니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행운이며, 또한 큰 기쁨이고 자랑이랴! 그러고 나서 6년이 흘러 2012년에 나는 뜻밖의 희한한(?)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된다. 풍천임씨(豐川任氏) 문중의 임영훈(任永勳) 장군(예비역)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는 과거에 사명당기념사업회의 일로 더불어 일행이 되어서, 사명당의 일본 유적지를 찾아 교토(京都)를 탐방하고 심포지엄을 갖는 등 함께 여행한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역사극 <두 영웅>의 주인공 유정(惟政) 큰스님 사명대사의 속성(俗姓)이 풍천임씨여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두 영웅>의 내용은 임진정유재란의 참혹한 7년 국난(國難)이 끝나고 나서 사건이다. 전란 때의 영웅 의승병장(義僧兵將) 사명당께서 일엽편주 현해탄을 건너서 전후처리를 위해 원수의 땅 일본에 입국한다. 그리하여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서 담판을 짓고, 향후 260여 년 동안의 한일간 양국평화와 선린우호의 주춧돌을 쌓는다는 기둥 줄거리. 여기서 기적 같은 사실이 하나 밝혀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읍성은 일본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6만 왜병의 공격을 받아서 성이 함락되고 민관군 1만인이 옥쇄 순국하였으며, 산하가 모조리 불타고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다. 그 당시에 남원부사(南原府使) 임현(任鉉)사또의 어린 손자(5, 6세)가 왜군에 납치되어 일본 쿠슈(九州)의 남단 다네가 섬(種子島)으로 끌려가게 된 것. 그 어린 손자가 일본 땅에 살아남아서 400년이 흘러간 오늘까지 핏줄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의 성씨는 사성(賜姓)으로 ‘이노모토’(井元). 이노모토 집안은 그곳 명문으로, 큰어른 이노모토 마사루(井元正流)옹은 동경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출신이며, 그곳의 3선 민선시장까지 지낸 유명인사라고 한다. 임씨문중에서도 그런 한스럽고 피 맺힌 이야기를 수년 전에사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통교(通交)하게 되고 양쪽 집안이 상호방문하는 등 우의와 친교를 다졌다. 그리고 이노모토 가족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여, 남원의 만인의총과 충렬사(忠烈祠)에 참배하고 순의제향(殉義祭享)을 올렸다는 것. 한 가문의 흘러오는 뜨거운 핏줄, 그 뿌리의 혈흔(血痕)이 아니랴! 그리하여 2012년 봄 임씨문중의 기획으로 나의 책임편집하에, <충간공 애탄임현(愛灘任鉉) 남원부사 순절기>를 상재하고, 작품 <만인의총>도 새롭게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를 재창작하게 되었다. 우리 남원 고장은 <춘향전>과 <흥보가> <변강쇠타령> 등 세 마당을 낳은 판소리의 탯자리이자 본향(本鄕)이다. <만인의총> 역시 판소리 창극으로 멋지게 탄생하는 그날을 희망해 본다. / 노경식 (극작가, 대학로연극인광장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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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2 15:08

사색의 창에서 잘 사는 길을 만나다

찬란한 노년이 되려면 과거를 숙고하고, 무엇인가 찾아내어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며, 열정 있는 삶을 꾸려가라고 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서 노트에 정리해 보니 나에게 주어진 길이 있었고, 주어진 몫과 짐을 지고 걸어왔다. 인생길은 계속 걸어가야 하고, 어떠한 길이 나타나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고 따뜻한 마음과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본다. 부족한 사람이 굽이굽이마다 누군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그런대로 평범하지만 큰 탈 없이 살아온 것이 무척 다행이고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생각하면서 매사 조심조심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 인생길은 참 어렵고, 특히 불의의 사고에 대비할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두렵고 무서운 일이지만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고, 준비와 연습만 잘 하면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고명한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가르침도 인생길을 걸어가는데 참고는 되겠지만 결국은 자신이 받아 들여야 하고 모든 것은 실천하는데 달려 있다. 혼자서 고요하게 단전호흡만 하면서 무념무상의 세계에 빠져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근심 걱정도 내려놓을 수도 있고, 사색을 통하여 지금의 자신도 알게되고, 마음의 여유도 찾게 되면서 사색을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산책을 하거나 산행을 할 때도 혼자가 좋아 진다. 자신과 대화하면서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보다 의미 있고 값지게 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에 대한 해답도 풀리기 시작한다.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사색의 창이 열리게 된다. 앞으로 남은 여정에 꼭 해야 할 일도 정리가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고 참다운 어르신으로 살아갈 것을 매일 다짐하게 된다. 이미 ‘죽는 연습’ 즉 잘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죽는 연습’을 매일 하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기도문도 저절로 만들어진다. 계절따라 피는 꽃 이름, 새 이름, 산과 강 이름, 별자리도 외우게 되면서 내마음도 자연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맑은 공기와 개울물소리, 달님과 은하수 속으로 빠져든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서로 정 나누고 도우면서 살아온 이웃과 어르신들이 그리워진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더 진정성 있게 대하고 배려하면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색의 창에서 만난 ‘잘 살아가는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은 것이다. 좋은 약과 운동법도 서로 공유하고,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주고, 어려운 이웃에게 용기를 주면서 살아가는 길이다. 나를 길러주고 이끌어 준 고향을 위해서 할 일을 계속 찾아가면서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갈 것이다. 몸과 마음을 꽃중년으로 묶어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꽃동산도 만들고, 함께 명상하고, 일하고 도우고 나누면서 지내고 싶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했다. 그냥 죽는 연습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친구들과 이웃에게 계속 전파하면서, 따뜻한 마음과 열정, 함께 어우러진 예쁜 색깔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꿈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류영하 시인∙전 국토해양부고위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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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9 18:10

복잡한 도시에서 단순하게 살아보기

최근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특이한 두 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본 장면인데,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걷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은 이어폰을 끼고 여유 있게 걷고 있는 반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들은 어딘가를 향해 분주하게 가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에서 목격한 두 세대의 모습이다. 젊은 세대들은 핸드폰에 있는 앱을 통해 표를 구입하고 시간에 맞춰 대합실에 도착하는 반면, 나이 든 분들은 과거에 하던 방식대로 일찍 와서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승차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이 두 장면은 평균적인 시선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다분히 역설적이다. 두 세대의 다른 모습에 주목한 것은 젊은 세대들은 바쁘게 살아야 하고 시간적 여유가 많은 시니어들은 상대적으로 더 여유 있게 살 것이라는 필자의 고정관념 탓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면접촉을 중시하고 사회적 관계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관계의 불편함과 다름을 피할 방어적 개인주의에 익숙한 MZ세대들의 일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인 아비투스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기성세대들은 분업과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사회에서 성장한 반면, MZ세대들은 소셜미디어가 보편화된 디지털 사회에서 성장했다. 이것은 두 세대가 다른 사회적 맥락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두 세대의 일상이 다른 소이이다. 어쨌든 우리는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고, 살기 위해 과거보다 더 숨 가쁜 일상을 보내야 한다. 전문가들은 소셜미디어의 보편화로 사회적 고립과 스트레스가 증가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미래 사회는 유사성을 지닌 것과는 과잉으로 접속하고 차이가 나거나 다른 것에는 관계를 차단하는 단속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대 간의 차이와 차별, 공동체 의식의 약화가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비관적인 미래 전망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방안은 없을까? 다양한 해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단순하게 살아보기, 이른바 심플라이프를 권하고 싶다. IT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빠르면서도 느리게 살아야 하는 이중적 삶을 요구한다. 빠름은 생활의 편리와 효율을 주지만, 우리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나은 삶을 위한 보상적 느림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산다>의 저자 샤를 바그네르는 단순함을 인간다운 삶의 특징으로 규정하고, 유전되는 생물학적 능력이 아니라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위해서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동시에 의무와 욕구를 단순화하고 단순함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묻어둔 묵은 감정과 과거의 미련을 떨쳐내는 것도 심플라이프의 핵심이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과 이별하는 방법으로 농촌에서 살아보기와 여행을 권하고 싶다. 시골은 감성을 깨우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체험하는 느림의 공간이자 쉼터이며, 여행은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일상의 피로를 덜고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자 위로다. 조금 있으면 여름 휴가철이다. 우리의 삶을 더욱 분주하게 만들고 사회적 고립과 스트레스가 증가하는 지금, 우리의 멋진 시골로 여행을 떠나보자. /서순탁(서울시립대학교 교수, 前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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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2 16:32

사람이 크는 지역을 만들자

문화정책을 하며 누군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단연코 사람이라고 말한다. 다른 정책과 달리 문화정책은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단적인 예로 골목에 빈 벽이 있다고 하면 거기에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실제 그림을 그리는 건 예술가고, 그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때문에 문화정책에 있어 핵심은 사람이다. 현장에서 일을 기획하고, 사람을 끌어모으며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 이들이야말로 문화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원이라 할 수 있다. 한때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예술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한 결과 지역을 변화시키거나 문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인력은 제한되어 있었고, 문화매개자라는 이름으로 산발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2006년부터 시작된 ‘Art in City’(2006~2007)에서부터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활성화 시범사업’(문전성시, 2008~2012), ‘마을미술프로젝트’(2009~현재) 등 여러 지역 사업이 추진되며 역량을 쌓기 시작했고, 2014년부터 시작된 문화도시 사업을 타고 활동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올해의 우수한 기획자를 시상하는 ‘내일의 기획자’라는 상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2000년대 창조도시 열풍이 불던 시절에는 ‘창조적인 사람’, 즉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예술가나 금융가, 법률인, 건축가 등 이른바 상류층이 살만한 지역 만들기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지역을 혁신하고 재생할 전문가가 필요하다. 로컬 크리에이터라 부르는 창조적 행위자, 지역 혁신가가 필요한 것이다. 창조적인 계급이 아닌, 창조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창조적 역량을 가진 지역기획자, 문화기획자를 키우려면 지역은 실험하고 도전할 기회를 줘야 한다. 교육을 통한 학습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는 것은 직접 해보는 것이다. 지역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사업을 해 봐야만 감(感)이 오는 일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문화사업과 지역혁신 사업은 그들이 성장하는 판이 된다. 앞서 얘기한 사업들도 실제 나타난 성과를 보면 사업성과보다 사람 성장이 더 컸던 사업이다. 당시 일했던 사람들이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을 돌며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고, 각 지역에서 후배를 육성하고 있다. 지역이 문화기획자를 키우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이 해볼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고 도전토록 하는 것이다. 경험보다 중요한 자산은 없다. 다른 한편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조성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인증감을 부여하고 자존감을 불어넣어야 하며, 기획자로 생활하며 활동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사람은 함부로 크지 않는다. 적절한 환경과 지원이 있어야만 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큰 사람이 도시를 먹여 살린다. 2000년대 창조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영국의 게이츠헤드(Gatehead)가 연극전공자인 피터 스타크(Peter Stark)의 작품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더불어 지금도 여러 부상하는 지역에도 다양한 기획자가 활동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전북에도 그런 기획자가 많을 것이다. 이들을 위해 전북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성장하는 판을 깔고 있을까? 소멸의 위기에 빠진 전북의 미래를 위해 여러 생각을 해본다. /라도삼(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문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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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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