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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공짜가 없다, 모든 성취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라는 말은 평범하면서도 진리이고 철칙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공짜가 있다고 하여도 이 공짜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돌발적인 공짜 즉 정상적인 공짜가 아니다. 모든 세상사는 인과응보(因果應報) 법칙에 따라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발생하는 법, 우연적인 공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인간의 인성과 품성이 결정되는 요인은, 어릴적 부모 교육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이 말을 뒷받침하는 것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다, 즉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3번씩이나 이사하였다, 이는 부모로서의 자식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하겠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집은 매일 저녁이면 동네 사랑방이 되어, 앞집, 뒷집, 어르신들이 오셔서,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자식 된 도리가 무엇이며, 바르게 행동하여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기에, 자연적으로 어르신들로부터 가정교육을 받게 되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남자 못지않게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자상한 어머니셨고, 자식교육에는 엄한 어머니셨다. 필자가 공무원이 되었을 때에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공직자는 청렴하여야 하고, 남의 돈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셔서, 필자의 인생관과 가치관 형성에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필자가 1970년 초반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민원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인데, 한 민원인이 찾아왔기에 친절히 안내하고, 절차에 따라 처리하여 주었는데, 민원인이 고맙다고 금일봉 봉투를 책상위에 놓고 가셨다. 한편으로는 이를 사용해도 괜찮치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였으나, 부모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떠올라 바로 일과 중에 급하게 민원인 주소지로 반송한 적이 있었다. 후에 생각해보니 그때 내 결정이 옳았구나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었다. 또 1975년 8월 전라북도공무원교육원 교육을 받을 때, 다른 교육생들은 강의시간 끝난 후 매점에 가거나 취침을 하고 있는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강당에 나가서 혼자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교육생 200여명 중에 영예롭게 1등을 하였고, 또 1978년 8월 1일 총무처 주관으로 전 부처 공무원을 대상으로 사무관 승진시험이 있었는데, 그때도 필자는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에 전념한 결과 평균 80.1점으로 전국 수석을 한 경험이 있다. 위 내용은 필자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실제 성취한 결과와 사실(fact)에 근거한 기록임을 밝혀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목에서 밝힌바와 같이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은 진리요, 철칙이고, 상식화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요즈음 일부이긴 하지만, 본인 노력 없이 아빠, 엄마, 지인 찬스까지 이용하여, 대학에 입학하고 표창 받았던 것이 들통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있었는데, 이제는 부모 등 찬스를 이용하려 하지 말고, 본인의 노력으로 성취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책무를 다한다면, 그 결과는 성취로 돌아오게 되어 있고,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정의롭고 밝은 사회가 이룩된다고 확신한다. /조현건 전 전북지방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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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13 15:08

서울에서 만난 전북 - 3·1 운동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혹시 이런 문구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저에게는 아주 익숙한 문장이지요. 사법시험을 공부하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의 첫 문장이거든요. 헌법 전문은 우리 헌법의 이념과 가치를 축약한 고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바로 3·1운동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주인 안순환은 이 사실을 총독부에 전화로 알렸지요. 물론 민족대표들이 시켜서 한 일이었습니다. 곧 80여명의 일경이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뒤 그들은 기꺼이 일경에 의해 연행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부근에 있는 파고다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운동에 나섰습니다. 이후 독립을 기원하는 만세운동은 5월까지 전국으로 퍼져나갔지요. 100만명 이상이 참여해 900여명의 사망자를 내었으며, 4만 7천여명이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태화관과 거리에서 연행된 분들이 투옥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서대문형무소이지요. 서대문에서 무악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바로 그 뒤에 빨간 벽돌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서대문형무소입니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만들어져 1987년까지 수많은 우국지사가 수감되고 때로는 생명이 다해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었던 곳이지요.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판결문에는 태화관에서 연행된 분들을 포함해 손병희 선생을 필두로 48명의 이름이 공범으로 적혀 있습니다. 판결문을 읽어가다 주소가 전북으로 표기된 분들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임실군 청성면 남산리 출신 박준승, 익산군 오산면 송학리 출신 임규, 김제군 반계면 반계리 출신 정노식 세분입니다. 판결문에는 경기도로 되어 있지만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나 남원군 송동면에서 유아기를 보낸 백상규(법명 백용성) 선생도 계십니다. 박준승 선생은 천도교측 대표 중 한분이셨고, 임규 선생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독립선언서와 통고문을 일본 정부와 의회 등 공식 기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정노식 선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정될 정도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드셨지요. 백상규 선생은 불교계 대표였는데, 최초로 한글판 금강경을 편찬하셨습니다. 검찰에 근무하는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산위원회’에 파견나가 근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친일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국가로 환수해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을 위한 사업에 쓰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위원회였지요. 나라를 빼앗긴지 100여년, 독립으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였습니다. 때문에 많은 재산을 환수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지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려운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 거기에 더해 재산까지 바치다 보니 후손들을 돌볼 겨를이 없던 탓이었겠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합니다. 지난 100여년의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요. 서대문형무소에 가보시면 그 해답의 일부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양중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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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06 16:24

꿋꿋한 노력이 미래를 보장한다

그래도 계속해라! 가능할지 누가 아는가?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이러한 말을 남겼다. 물리학의 대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적인 교육의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어렵게 공부했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꾸준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결국 물리학계의 존경을 받는 학자가 되었다. 지난 50여년 한국 방위산업의 성장 과정을 짚어본다.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하면서 국내 방산육성은 시작되었다. 소총 한 자루 스스로 만들지 못하던 시절,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이 시작되었다. 80년대 초반까지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 ‘방산원가제도’ 등 방산육성에 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국내 방위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ADD가 기술 개발을 전담하고 방산업체가 생산하는 수직적 협력구조로 출발한 방위산업은 90년대와 2천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국내 방산업체의 기술력과 제조능력이 급성장을 거듭하였고, 마침내 2006년 방위사업청 출범과 함께 국과연과 방산업체간 수평적 협력구조를 정립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 방산업체 스스로 선제적으로 주요 핵심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품질관리에도 집중하며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국내 방위산업은 작년 방산 수출액이 170억불을 상회하여 수주액 기준으로 세계 5위내로 진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5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사이에 소총 한 자루 만들지 못하던 나라가 지·해·공 모든 분야의 첨단 무기체계를 생산하고 수출까지 하는 방산 선진국으로 성장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러한 성장과정에서 만났던 질곡은? 린다김 사건, 통영함 비리 등으로 대표되는 방산비리였다. 소수의 부적절한 일탈로 발생한 방산비리는 방산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방산 종사자들 전체에게 부과되는 가장 큰 짐이었다. 일례로, 세월호 참사 이후 통영함 비리 등 방산비리가 국민적 우려사항으로 부각된 이후 방산분야는 비리가 있다는 전제하에 저인망식 수사 감사가 진행되었다. 당초 해외 도입과정에서 발생했던 통영함 비리로부터 시작하여 국내 연구개발 사업의 대부분의 사업에 대한 비리를 캐는 수사 감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도 방산비리로 매도되었고, 방산분야 종사자들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극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우리 방산 종사자들은 연구개발과 생산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K-방산이라는 찬사를 이끌어 낸 것이다. 지난 하반기부터 전북도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많은 도전이 요구되는 영역으로 예기치 않은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과연 전북도에서 신기술 중심 연구와 방산 전문 인재를 양성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난 여러 칼럼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북도는 지자체 고유의 강점을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그리고 꾸준하게 새로운 영역에 씨앗을 심고 있다. 곧 대한민국 방위산업이 그랬던 것처럼 결실을 맺으리라 기대한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인 것처럼 새로운 산업에 도전하고 성공하는 비결은 일관적인 정책, 수미일관하는 자세 외에는 없는 듯하다. 온 힘을 다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 전북도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강은호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자문위원∙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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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9 15:45

공동묘지의 의미를 바로 알자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묘지(共同墓地, Cemetery, Memorial Park)는 쉽게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선산이 없는 사람들이 가족이 돌아가시면 묻는 곳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 전라도 여행하는 동안에 K씨를 만나 공동묘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왜 공동묘지가 생기게 되었으며, 현재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국민이 분열되어가며, 경제가 어렵게 되어가는지 궁금하여 밤 깊은 줄도 모르고 K씨의 말에 관심을 두고 두 귀를 기울였다. 메이지 왕릉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히고 있는 만큼 일본은 풍수지리를 믿고 풍수사를 데리고 왕릉의 명당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풍수 철학을 지켜온 나라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제 강점기 시대의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명당자리에는 일본의 관공서나 학교, 그리고 사찰을 세우고, 야산이나 쓸모없는 땅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사람이 사망하면 아무 곳에나 묘지를 만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공동묘지에 시신을 매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행여 명당에 묘지를 쓰므로 훌륭한 인물이 나와 일본을 무너뜨릴까 봐서 간교한 계략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은 풍수지리가 미신이라 말하며, 우리 민족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일본인들은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 유골을 매장하며 우리나라를 압박하며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은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 지역을 선정한 후 공원묘지를 조성하여 분양하며, 봉분 하나에 조상 대대로 화장한 유골함을 지하 하단에서부터 2단 3단으로 매장하고, 탑 묘를 조성하고 집안의 묘비를 만들어 후손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합본한다고 하였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조상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일까? 공동묘지가 주택가 가까운 곳에 있어 묘지를 자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문화정책을 말살시키고 사람을 학대와 학살을 일삼았지만, 자국민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애틋하였던지 층층이 쌓은 납골묘가 대부분이라 한다.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이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로 유명한 곳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온 피난민들로 부산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집 지을 자리가 부족하여,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공동묘지에 집을 짓고 마을을 꾸렸던 곳으로, 일본이 패전하여 갑작스럽게 우리나라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무덤을 이장할 겨를이 없어 남겨진 비석마을의 골목에는 아직도 상석이나 비석들은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된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풍수지리를 예로부터 봐 왔기 때문에 집을 짓거나 묘지를 정할 때, 풍수사를 모시고 다니며 명당자리를 찾아다녔다. 대소사를 앞둔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이 총선이나 대선을 앞두고 조상 묘지를 이장하는 것도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이 있다고 믿음으로 하는 행위 중의 하나인 것이다. 깨어있는 지식인이나 명문가 유생들은 명당을 찾아 조상의 묘지를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명당이라는 곳이 있어 조상의 묘를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후손의 흥망성쇠가 좌우된다고 하시는 선친들의 말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K씨는 어른들을 잘 섬기고 조상 대대로 묘를 잘 관리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선산 1만8000평을 조상이 도와 되찾았다고 말하며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김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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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2 18:05

선행(善行)을 쌓으면, 하늘이 복을 내린다

옛 성인의 말에 의하면, 착한 일(善)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악한 일(惡)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는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 많은 선행을 베푼 명문가 봉소당(鳳巢堂)을 소개하고자 한다. 봉소당은 전남 여수시 봉강동 언덕에 아주 웅장하고 큰 한옥 저택이 나오는데, 여기가 봉소당이다. 그리고 봉소당은 몇 년 전에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봉소당은 영광 김씨 집안의 건물로, 영광 김씨의 종손인 김한영 씨가 지었고, 현재는 한영대학교 이사장인 김재호 씨의 소유로 되어있다. 김한영은 거대한 부자(1만2000석)로, 가난한 과객대접에 후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소작인들은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소작료를 제 때에 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것을 본 김한영은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그냥 눈감아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왜 그 집만 봐주느냐고 항의할 것을 예상하고 그 방법의 하나로 자식이 많은 어려운 소작농에게 수백 가마의 쌀을 배에 싣고 내리는 하역 작업을 시켜 그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줘 공평하게 여기도록 배려를 하였던 것이다. 지주(地主)인 김한영은 많은 소작인을 배려하면서, 많은 선행을 베풀어 인심 좋은 부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때는 1948년 10월에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좌익세력의 반란군은 부자들을 즉결 심판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반란군은 여천군청 2층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책임자 1명과 호위병 2명으로구성된 심판정이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대지주였던 영광 김씨 11대손인 김성환(1915-1975)이 제1착으로 끌려와 심판을 받게 되었다. 책임자인 심판관은 봉소당 토지를 소작하고 있던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당시 봉소당은 소작농이 가난해서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소작료를 탕감해주는 선행을 베푼 것을 평소에 알고 있었다. 그 심판관은 김성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2명의 호위병들에게 너희들은 나가 있어라 명령을 내리며 김성환을 의자에 앉도록 하고, 심판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신문(新聞)만 보고 있었다. 이런 침묵상태로 10분, 20분, 30분쯤 지날 무렵까지 심판관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 김성환은 아! 나더러 도망가라는 뜻이구나 하고 군청사무실 창문을 살며시 열고 물홈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도망하여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지주인 김성환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말과 같이 선한 일을 많이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일어난다는 말이 입증(立證)되었다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15년 5월경 봉소당을 방문하고 이사장을 면담하려 하였으나 마침 출타 중이어서 면담은 하지 못하고, 봉소당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온적이 있다. 이세상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얽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도 선행을 쌓으면 하늘이 복을 내린다는 말과 같이, 봉소당은 어려운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또 어려운 소작농의 소작료를 탕감해주는 등 선행을 많이 쌓아 불의의 화를 면하는 산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조현건 전 전북지방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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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16:27

서울에서 만난 전북 - 황희 정승

학창 시절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있었습니다. 소풍과 운동회였지요. 아마도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누구나 그랬을 테지요. 학교 밖 행사도 있었습니다. 매년 사월 초파일을 전후해 열리는 ‘춘향제’였지요. 학생들과 주민들이 춘향, 이도령, 향단, 방자, 월매, 변사또 등으로 분장하고 행진하는 가장행렬, 전국에서 모여든 예쁘고 착한 누나들을 뽑는 춘향선발대회, 판소리 명창들의 국악경연대회 등 행사가 무척이나 다채로웠습니다. 그 시절에는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놀이도 빼놓을 수 없지요. 지금이야 전국적으로 많은 지역축제가 있지만, 80년대만 해도 전국 3대 축제로 불리던 춘향제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든 행사들의 주무대가 있었지요. 바로 ‘광한루원’입니다. 광한루를 처음 만든 사람은 조선을 대표하는 정승인 황희입니다. 선생은 남원과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광한루를 지었을까요. 선생의 아버지인 황군서는 고려말 개성에 터를 잡고 벼슬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도 개성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지요. 그런데 황군서의 출생지가 바로 남원이었습니다. 벼슬살이를 위해 개성으로 이주한 것이었지요. 선생의 조부인 황균비의 묘지도 남원시 대강면에 있는 '풍악산(楓嶽山)'에 있다고 합니다. 선생이 벼슬길에 들었던 조선 초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가 한창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왕위를 둘러싼 다툼도 심했습니다. 태종에게는 세 명의 대군이 있었습니다. 바로 양령, 효령, 충령이었지요. 선생은 양령 대신 충령으로 세자를 교체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 바람에 관직에서 파직되어 유배를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지요. 첫 유배지는 개성과 가까운 임진강가에 있는 교하(交河)였습니다. 그런데 한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선택된 곳이 바로 남원입니다. 유배지가 남원으로 변경된 것은 앞서 본 것처럼 선생의 향관이 남원이었다는 이유도 작용했습니다. 비록 유배를 떠나는 몸이지만 어느 정도 배려를 한 것이지요. 덕분에 선생은 유배지인 남원에서 노모, 처자식과 함께 머무르면서 광한루를 지은 것입니다. 광한루는 선생에 의해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광한루는 1626년에 재건된 건물이지요. 서울에서 문산 방면으로 자유로를 따라가다 보면 임진강변 경치 좋은 곳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갈매기와 함께한다는 뜻인데요. 지금은 강변을 따라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어 분단의 아픔이 느껴지기도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썰물 때면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을 여전히 볼 수 있는데요. 황희가 87세에 18년 동안 재임하던 영의정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서울 사람들에게 반구정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선생의 말년 거주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근에 장어집이 몰려 있는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저도 20여년 전 고양검찰청에 근무할 당시에는 그저 유명한 장어집으로만 알았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반구정에는 선생의 일대기와 두문불출의 유래, 세종과의 관계 등을 설명해 둔 기념관, 영정을 모신 사당, 제사를 모시는 재실과 동상이 있습니다. 햇살이 좋은 가을날 임진강가를 걸으며 ‘두문불출’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면 어떨까요. 거기에 코끝에 스미는 장어 굽는 냄새의 유혹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양중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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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8 17:33

새만금 방산허브화, 신뢰를 기반으로

약속의 무게는 무겁다. 로마의 정치가 푸블릴리우스는 심지어 적에게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말했다. 서로간의 신뢰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수많은 약속, 그리고 협상을 했던 나폴레옹은 차라리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결코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며 약속의 무게,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거 경제적 풍요를 갈망하던 시대에는 생산 과정에 투입되던 생산 설비, 기계 등 물적 자본(physical capital)이 한 산업과 사회 번영의 핵심이 되고, 물적 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들이 사회 곳곳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물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 지식사회에서는 물적 자본과 대비되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 네트워크가 핵심이 된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생각이나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핵심 가치를 점유하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점유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관계에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K-방산 수출의 성공 역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강점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나 제조업 대국이라는 물적 자본에서 찾고는 한다. 이러한 특징들도 방위산업이 성장하게 된 계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대한민국 방산 정책이 일관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민간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와 타국 정부와의 네트워크 능력이 융합되었기에 가능했다. 정부는 일관된 정책을 유지했고, 기업도 당장은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투자하고 노력했다. 반대로 만약 정부가 방산정책에 일관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또 큰 비용이 투자되어 생산된 무기를 돌연 구매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방산시장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정책에 변화가 있더라도 역대 모든 정부가 적어도 방위산업 정책에 있어서는 일관된 기조를 유지해왔다. 이전 칼럼에서 필자는 전북도가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중심적 허브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신기술·신소재, 방산 인재양성의 거점을 지향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전북도에게는 지난 10여 년간 우직스럽게 투자해온 탄소산업과 방산인재 양성에 집중할 수 있는 지역거점대학이 있으며, 광대한 새만금이 신기술 개발에 필수적인 실험 및 생산에 활용될 자산일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정책 일관성을 가지고 새만금 지역의 방산 허브화를 추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러 기업들이나 도내·외의 방산 관련 기관들이 전북도의 일관된 산업 육성 의지를 신뢰하고 전북도만이 지닌 강점을 찾아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 육성에 있어 ‘신뢰와 일관성’은 그 어떠한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에 신중해야 한다. 방위산업 허브화를 추진함에 있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우직하고 일관된 발걸음을 기대해본다. 업무협약은 지켜졌어야 했는데...... /강은호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자문위원∙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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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1 17:46

저들은 외친다, 살려달라고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우리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맑고 높게 보이고 온갖 곡식이 익는 가을철이 되어 농부의 손이 분주하고,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 역시 분주한 틈을 이용해서 김해국제비엔날레 행사에 참여하고 추석 연휴를 놓칠 수 없어 산행을 마음먹고, 민박하면서 평소에 가지 못한 산을 찾아다녔다. 누구나 바쁘게 살아온 삶의 한 페이지마다 사연이 있고, 배꼽이 빠지도록 웃으며 행복을 노래했고, 때론 좌절하고 낙망하여 방황도 하고, 하늘을 향하여 목청껏 울부짖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얼룩진 눈물 자국은 세월이 덧없이 흐르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과 상처는 삶의 도전에 후원자가 되었고, 그러므로 세월과 함께 끝없이 달려가고 있으며, 오늘 하루도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 인생 살다 보면, 낙화유수(落花流水)와 같아서 세월이 흐르면 몸도 약해져 보잘것없이 쇠해져 가고,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물러날 때가 있는 것이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부리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요즘 자연이 몸살을 앓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인구는 자꾸 줄어만 가는데, 조금 편리하게 살겠다고 자연을 희생시키고 있다. 10여 일 동안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터널이 왜 그렇게 많은지, 가는 곳마다 터널을 지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산허리를 잘라 뻥뻥 뚫린 도로, 저들의 살을 깎고 핏줄을 끊어가면서 편하게 살겠다고,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떠드는 동안, 살 곳을 잃어가는 저들은 울부짖고 있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고 신나게 달리는 차에 치여 죽음을 맞이하는 가엾은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심히 걱정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내가 좋아서 찾아갔으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서 찾아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많은 경비를 투자해서 광고도 하고 경고도 하지만 ’소귀에 경 읽기‘가 되었다. 내가 사용한 쓰레기는 자연에 버리지 말아야지, 여기저기 왜 던지고 다니는지, 내 집만 깨끗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져서일까요, 아니면 자기관리가 잘 안돼서일까요, 내 것이 중하면 남의 것도 중하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자연을 사랑하고 아꼈으면 좋겠다. 또 동물들의 먹이를 훔쳐 가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아니면 그들의 먹이가 맛있어서 훔쳐 갈까요. 저들의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훔쳐 가면 어떻게 되나요. 문명이 발달 되어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지만, 애완견을 모시고 부모를 버리는 시대에 살면서, 자연을 훼손하고 저들의 안식처를 침범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병들어가고 있는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범죄가 늘어나고,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패륜(悖倫)을 저지르고도 반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회가 되어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동물들이 비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노인과 자연이 울부짖고 있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앞으로 더 이상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기 위하여, 터널과 도로 확장은 그만하고, 모두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배낭에 잘 담아 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금수강산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김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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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5 18:02

겸손(謙遜)은 최선의 처세술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인구는 약 80억명으로, 우리인간은 가족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생을 유지하고 있어, 인간을 사회적동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간의 교류와 접촉을 통하여, 살아가는 과정에서, 서로가 인간의 도리와 예절을 지킴으로써, 원만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도리와 예절이 지켜지지 않을 때, 사회가 무질서하게 될 것이고, 더구나 사회가 복잡하여지고 있는 가운데, 남이야 어찌되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범법자가 속출하여,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혼란사회를 방지하기 위하여, 강제성을 지닌 법과 규약을 만들어 사회를 안정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문 법(法)자를 파자하여 보면, 삼수 변에 갈 거로 구성되어 있어, 사회가 물같이 흘러 가도록 하여,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법의 목표라고 생각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에, 예의바른 사람에게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호평(好評)함과 동시에 존경하고 인정하는 것을 보면,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 우리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된다. 그럼 올바른 예절의 기준은 어디에 둘 것인가? 예절은 생활규범으로 오랜 관습을 통하여, 개선 발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천 발전해나갈 것이다. 필자가 감히 예절에 대하여 쉽게 표현하면, “나 자신을 제외한 주위사람에게 폐해, 피해 부담을 주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며, 폐해, 피해 부담의 기준은 상식(常識)이라는 잣대로 진단하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요즈음 예의범절과 법을 지키지 않고, 잔인무도한 범죄행위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탄식이 저절로 나오고 있다. 요 며칠 전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일어난 '묻지마' 살인사건, 부모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패륜아 사건 등이 발생하고 있는데, 하루속히 사회가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이러한 패륜적인 범죄가 빈발하는 원인은, 부족한 인성교육을 주요원인으로 꼽고 싶다. 옛날에는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통하여 인간성을 길러주고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교육시켜왔으나, 작금은 이러한 교육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 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 인간이 겸손(謙遜)하지 아니한 것도 범죄발생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줌으로써, 사회가 화합되고 정의롭게 될 수 있다. 필자는 겸손 교육의 주요 내용으로, 노자의 수류육덕(水流六德)을 주목하고 싶다. 즉 물방울이 인내와 끈기로 바위를 뚫고, 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 구정물도 받아주는 포용력, 막히면 돌아 갈줄 아는 지혜, 낮은 곳 을 향해 흘러 바다에 이르고 대의(大義), 넘치도록 채우지 않고, 적당할 때 멈추는 겸손이 물의 육덕(六德)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류육덕을 거울삼아, 인성교육을 함에는 효심에 중점을 두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을 기르고, 예의범절을 잘 행하도록하고, 팽배된 이기심을 줄이고 도덕심을 일깨우고, 이타심을 극대화하여, 온 사회가 겸손한 마음으로 충만 될 때, 사회가 화합되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조현건 전 전북지방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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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8 18:06

서울에서 만난 전북-미당 서정주

햇볕이 좋은 계절입니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여기저기서 국화전시회가 열리지요. 그만큼 국화는 한국인의 삶에, 정신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를 선정하면 꼭 빠지지 않는 시가 있습니다. 바로 ‘국화 옆에서’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었는데요. 1956년에 발표된 미당 서정주의 작품입니다. 미당만큼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논란이 많은 시인도 드뭅니다. 그가 가진 문학적인 재능과 성과만큼이나 친일과 친독재의 논란도 두드러지기 때문인데요. 그 때문인지 요즘은 교과서에서도 거리의 시비에서도 미당의 흔적을 찾아보긴 쉽지 않습니다. 미당은 1915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댁에서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마름이었습니다. 그의 시 자화상에는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지요. 하지만 마름과 종은 천지 차이입니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아리랑’을 통해 마름의 역할을 엿볼 수 있는데요. 지주를 대신해 소작료를 징수하거나 소작을 떼거나 붙여주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 빈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 덕분인지 미당은 줄포에 있는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시절 보통의 시골 사람보다는 훨씬 더 높은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지요. 그는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 1주년 기념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하고 말았지요.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사건을 주동해 자퇴를 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그도 학생 시절에는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똑같은 조선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1933년부터 기고 형식으로 시를 발표하던 미당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게 되는데요. 1940년대 들어 친일 행적을 보입니다. 그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요. 1987년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56세 생일을 기념하는 축시를 발표하는 등 친독재 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시류에 편승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는 1968년에 조성된 예술인 마을이 있습니다. 그 동네 한켠에 ‘서정주의 집’이 있는데요. 미당이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70년대 중산층이 살았던 전형적인 2층 양옥집인데요.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는 이름이 함께합니다. ‘쑥과 마늘의 집’이라는 뜻에서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 집에는 미당의 두상과 직접 붓으로 쓴 국화옆에서,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사진, 미당이 쓰던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그의 시비가 여러 군데 있었는데요. 서울 금천구 은행공원, 부천시 상동 보행자 거리, 이천시 설봉공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현재는 모두 철거되어 땅 속에 묻히는 운명에 처해졌지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미당은 죽어서 ‘서정주’라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친일, 친독재라는 평가도 함께였지요.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당의 시비도 그 이름과 함께 다시 설 수 있을까요. /양중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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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1 15:05

빡빡함과 느슨함, 그사이 어딘가에 적당함이 있다

전북은 예로부터 온화한 기후와 넓은 평야, 그리고 농업용수의 공급이 원활하여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북이 명실상부 '맛의 고장'이 된 이유는 음식에 '중용의 미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 음식은 너무 짜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함'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음식 이야기로 화두를 던진 것은 '방위산업 육성'에 있어서도 적당함의 매력, 다시 말해 속도감 있는 추진력과 차근하게 내실을 다지는 신중함이라는 두 축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한 이후 첨단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나라는 방산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 신속하게 무기체계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무리하게 '속도'에만 집중할 경우 한 순간에 탈이 날 수 있다. 몇 달만에 드넓은 러시아를 뚫어내고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오히려 제국을 잃게 된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기업인들도 흔히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반대로, '돌다리도 두드리'는 신중함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는 것 역시 시대의 조류에 뒤쳐질 위험이 있다. 장인정신이라는 신중한 사업문화로 전 세계를 제패했던 일본의 반도체업계를 떠올려보라. 속도와 추진력을 앞세운 한국의 후발기업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패배하였다. 결국,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은 급변하는 기술 발전 등에 대응할 수 있는 신속성 뿐만 아니라 차분히 견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신중함이 결합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방산 전문인재 양성이다. 방산 전문인재는 첨단 방산기술을 개발하는 '연구개발 전문인력'과 용접 도금 등 생산 현장에서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무기를 제조 생산하는 '현장기능 전문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연구개발 전문인력'의 양성을 위해서는 필요한 첨단 지식을 통섭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전문교육은 기본이다. 더불어, 방산기술을 학술적 입증단계를 넘어 실제 전장상황에서 작동하는 무기체계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 개발 초기 단계부터 야전 운용과 유사한 실험여건이 조성되어야 하고, 무기체계를 생산하는 기업 환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현장기능 전문인력은 더더욱 지식의 학습만으로 육성되지 않는다. 학습과 더불어 현장 '노하우'의 체득이 필수적이다. 현장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방산 불모지였던 전북도에서 이제 새만금 지역을 중심으로 신기술 신소재 중심 방산 허브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도지사를 비롯하여 도청, 도의회, 도내 거점대학 등 주요 구성원들의 속도감있는 노력과 활동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단기간내 성과도 기대된다. 다만, 몇몇 주요 방산시설이나 기업의 유치, 방산학과의 신설 등으로 방산 허브화가 달성될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다. 방산 신기술, 방산기업, 그리고 전문가 양성체계 등 3자가 결합할 때 진정한 방산 허브화가 달성된다. 방산 전문가 양성은 많은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 '착륜지의(斲輪之意)', 수레바퀴를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 빡빡하거나 너무 느슨하지 않고 적당함의 지점을 스스로 체득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전문가 양성을 위해,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을 쌓는 축적의 시간을 부여하는 넉넉한 자세가 필요하다. / 강은호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자문위원∙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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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4 18:22

꼰대가 아닌 성숙한 인간이 되자

꼰대란 나이가 어린 상대에게 억지로 가르치고 강요하려는 어른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직장이나 단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강요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본인은 하지도 않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사람, 그 앞에서는 따르는 척 하지만 뒤에서 꼰대라 말하면서 비웃으며 비아냥거리기 때문에 전혀 발전이 없는 부패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요즘 젊은이들은 각자의 취향과 삶의 방식에 따라 움직이려 한다.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길을 열어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앞에서 방향을 잘 제시해 주는 어른이 함께하는 세상이 되어주고, 강요나 명령보다는 스스로 참여하고 깨닫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존경받는 어른이 많은 세상이 되면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다. 어느 날 버스 승강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고등부 학생쯤 되어 보이는 두 명이 승강장 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이들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다짜고짜 “어른이 오시면 벌떡 일어나 앉으세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건방지게 앉아 있어,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시고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셨다. 곁에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할아버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는 것이 ‘옆에서 왜 거들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느냐?’ 하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바라보고 계셨다. 버스가 오자 할아버지는 “버르장머리 없는 ㅇㅇㅇ”라고 욕을 하고 가셨다.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침을 뱉으며 저러니까 대우받지 못하는 꼰대 같은 영감탱이, 어이가 없구먼” 하고 둘이 마주 보며 웃는다. 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옆자리가 비어있는데 구태여 그렇게 아이들에게 화를 내시며 호통을 치셔야 했을까? 그 순간 아이들이 ‘그래도 착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할아버지께 대들고 같이 욕을 하였을 텐데, 가끔 그런 경우를 봐왔기 때문에 은근히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하다 보니 노인들만 꼰대가 아닌 젊은 꼰대들의 세상이 되어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다. 언론을 통하여 보도되는 것을 보면 젊은이들이 더 꼰대 짓을 할 때가 많다. 핵가족 시대를 살다 보니 어려서부터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전혀 없고 외골수로 자기주장이 강하여 꼰대 아닌 꼰대가 되어 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고, 스트레스를 받고,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으로 뛰쳐나가 죄 없는 누군가에게 돌을 던져 상처를 주고 세상을 불안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간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여야 할까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선친들이 말씀하셨는데, 꼰대가 많은 세상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고 허물을 감싸주는 어른들이 많은 세상이 되어야 하며, 아이들과 아랫사람들에게 호통치며 가르치려는 꼰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배우고, 배려하며 사랑을 주는 따뜻한 어른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먼저 남을 배려하는 자세와 용서하는 마음, 훈훈한 정을 나누어 주는 사랑과 서로 어우러져 사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피부로 느끼고 배운다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먼저 꼰대가 아닌 존경받는 어른이 된다면, 젊은 꼰대들이 변화될 것이고, 살기 좋은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며, 불미스러운 일은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지 않을까? /김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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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20 15:29

추석명절에 효와 예를 음미하며-밥상머리 교육등 가정교육이 품성형성의 중요 요인이다

타향에서의 추석을 쇨 때에는, 고향과 부모를 그리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추석을 옛날부터 중추가절, 또는 한가위 등으로 부르고 있고, 춥거나 덥지 않은,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의 명절로 반기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빈말이 아님을 실감케한다. 농민들은 일년내내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으로 만든 송편, 그리고 사과, 배 등으로, 다례 상을 차려 조상님께 감사하고, 가족과 함께 즐기며 조상의 묘소도 살피고[省墓] 넉넉한 인심으로, 이웃과 정을 나누는 미풍양속을 이어 가고 있다, 올해는 9월29일이 추석이어서, 지금쯤은 추석준비가 한창 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큰 명절을 쇨때 자연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공경하고, 정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성품을 기르게 되며,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질을 터득하게 되어,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조성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금에 와서는 가족구성이 핵가족화 되고, 극심한 이기심과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이 퇴보해 가고, 거기에 더해 극히 일부분이지만,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파렴치범도 자주 발생하여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요 근래 불특정다수인을 상대로 흉기를 마구 휘둘러 '묻지마 살생'을 하는 범죄행위가 자행되고 있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불충하고 사회를 불안과 혼란에 빠뜨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필자는 가정교육의 부재, 그리고 학교와 사회교육이 충분치 않음으로써 발생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옛날에는 밥상머리 교육이라 하여, 온 식구가 밥을 먹을 때 부모가 자식을 교육하였고, 이러한 가정교육은인간의 품성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기본교육이었다. 옛말에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과 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시절에 효와 예에 대한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명심보감 효행 편에 보면 “엄부(嚴父)는 출 효자하고, 엄모(嚴母)는 출 효녀”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게 자녀교육은 우선 부모가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효와 예를 숭상하는 미풍양속인 추석명절 등을 더욱더 활성화시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토록 하고, 초∙중∙고 학과목에서 효와 예를 익힐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강화하여, 인격수양교육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국민의식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켜, 높아진 민주시민의식의 토대위에서 정치가 국민의 눈높이에 걸맞게 선진화된다면, 우리 경제∙사회는 저절로 발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하나를 소개하면 , 미국 제35대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1월 20일 취임사에서의 명연설이 떠오른다, 케네디대통령은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어보라”는 명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의 명연설과 같이 민주시민의식을 고취함과 동시 위에서 지적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강화한다면, 지금 현재 세계가 부러워 할 정도의 경제성장과 문화발전을 이룩한 토대 위에서, 더욱더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지리라 확신한다. /조현건 전 전북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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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3 17:36

서울에서 만난 전북-가인 김병로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법률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가고 싶은 대학교는 있었지요. 운동을 좋아했던 저는 TV로 중계되는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을 보면서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습니다. 학력고사 점수를 받아보니 마침 좋아하는 학교에 갈 점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점수에 맞추어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대학 생활을 하던 중 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한다는 점이었지요. 결국 저도 친구들을 따라 시험 준비를 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검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시험에 합격한 후 지금까지 제일 많이 들은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가인 김병로’입니다. 대한민국 법조인의 표상과 같은 분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요. 가인은 1888년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인도 처음부터 법조인의 꿈을 꾸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법조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했고,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있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가인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최익현 선생이 이끄는 의병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법률을 배우게 됩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법률을 가르치다가 1919년 판사로 임용되었지요. 하지만, 일제에 협력하는 판사의 길이 맞지 않았는지 1년만에 변호사의 길로 나섰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변론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결국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1932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로 낙향해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삼켰습니다. 지금은 서울시 도봉구 창동이 된 그곳에 가인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이지요. 창동역사문화공원에는 가인과 함께 위당 정인보, 고하 송진우 선생의 동상도 있습니다. ‘창동 3사자 동상’이라는 설명과 함께. 일제에의 협력을 거부하고 감시와 탄압을 피해 이주했던 독립운동가들이지요. 거기에는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한평생 조국을 되찾고자 헌신하셨던 그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사실 서울에는 가인의 동상이 한 곳에 더 있습니다. 바로 서초동에 있는 대법원 1층 로비이지요.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상’이라는 설명과 함께 흉상이 있습니다. 가인은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인로서도 모범적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법의 기틀을 마련한 점에서 더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우선 일제의 영향권에 있던 법률체계를 벗어나기 위해 대한민국에 맞는 법률을 만드는데 앞장섰습니다. 사법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 발췌 개헌이 위법이라고 판결한 것에 대해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대통령이 비판하자 맞대응한 말입니다. 그만큼 사법의 독립이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대한민국은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된 삼권분립 국가입니다. 국가의 권력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나누어져 있어야 서로 견제를 하고 균형을 이루어 국민들을 위해 제대로 작동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과연 그런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서로의 영역을 탐하거나 시기하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 시도들 앞에서 가인은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요. ‘이의 있으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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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6 16:09

등자와 야전삽, 그리고 첨단 무기

첨단무기라는 단어에 독자 분들께서는 F-35, 토마호크, 극초음속 미사일 등을 떠올리실 것이다. 첨단무기는 첨단기술의 집합체로서 전쟁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 등 강대국은 무기개발 시 자국의 첨단 기술역량을 총체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첨단무기는 지나치게 고가인 경우가 일반적이고, 대부분의 나라들은 첨단기술을 보유하지 못하여 개발 자체를 꿈꾸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첨단무기를 첨단기술의 집합체로만 한정할 필요가 있는가? 기존의 무기에 신기술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첨단무기와 같은 역할을 한 사례를 소개한다. 먼저, 1950년대의 수류탄이 드론을 만나 러시아 탱크의 천적으로 변신한 사례이다. 작년 우크라이나 전장 상황의 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례로, 우크라이나 드론부대는 회전날개 8기를 장착한 옥토콥터에 50년대 개발된 곤봉탄을 결합하여 300m 고공에서 투하, 러시아 군의 전차, 장갑차의 취약한 상단을 정확하게 타격하였다는 것이다. 옥토콥터는 약 1천만원, 곤봉탄은 13만 원에 불과하다. 러시아 전차는 최소 10억 원을 호가하니, 구형 곤봉탄이 드론이라는 신기술과 결합하여 최고의 가성비를 갖춘 첨단무기로 변신한 것이다. ‘등자’와 ‘야전삽’ 역시 그렇다. 등자는 말 안장에 연결해서 기수의 양발을 받쳐주는 도구이다. 등자의 발명 전에도 기병은 활용되었지만 양손을 활용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기병을 양성하는 데에는 수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등자가 도입된 후부터 양 손으로 방어무기와 공격무기를 동시에 활용하거나 몸을 돌려 뒤 쫓아오는 적을 향해서도 활을 쏠 수 있는 안정적인 자세 유지가 용이해졌고 기병의 양성도 단기간에 가능하였다. 이후 보병 중심의 군 체계는 기병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일찍이 등자를 도입한 게르만 민족은 기병을 중심으로 군을 재편하여 보병 중심의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야전삽! 중세의 영주들은 성을 쌓아 자신의 영지를 지키려 했고, 전쟁은 주로 이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의 형태로 벌어졌다. 거대한 성벽이 제공하는 방호력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공격을 방어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성을 쌓아 방어하는 방식은 포병의 출현으로 사라진다. 우뚝 솟은 성은 포병의 쉬운 먹잇감이 된 것이다. 이러한 포병에 개인 병사가 대응하는 장구가 야전삽이다. 야전삽은 병사에게 수 십분만에 거대한 성과 유사한 수준의 방호력을 제공한다. 게다가 땅 속으로 파고들어 포격 대상으로 삼기에도 쉽지 않았다. 야전삽이 병사들의 개인 장구로 지급된 것은 1910년대로, 1차 세계대전은 지리한 참호전으로 전개되었다. 위 사례에서 기존 무기체계가 신기술과 창조적으로 결합되면 첨단무기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북도의 방산 허브화! 경량성, 고강도의 탄소소재 등 신기술을 기존 무기체계에 덧입혀 가성비 높은 첨단무기로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불시일번한철골 쟁득매화박비향(不是一翻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당나라 황벽선사의 오도송이다. 한차례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매화가 콧속을 파고드는 향기를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전북도는 부가가치로 되돌아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소재 산업에 우직스럽게 투자해 왔다. 많은 아품의 시간을 견뎌왔다. 이제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때이다. 창조적인 방식으로!!! /강은호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자문위원∙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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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30 18:19

우리 꿈과 희망을 함께 이루어 가자.

어제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어제 수고의 열매가 오늘이 되고, 오늘의 준비가 내일을 있게 하리라 믿는데, 오늘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일을 꿈꾸는 헛된 망상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헤매고 방황하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정원에 한 포기의 꽃을 심고 가꾸는 수고가 있어야 아름다운 꽃을 오랫동안 볼 수 있다. 물론 혼자만 보기 위하여 심지는 않고 누구나 와서 아름다운 꽃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정원을 열어 놓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행복한 하루를 서로 이야기꽃으로 아름답게 피워가는 멋진 정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꾸어 보자.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상처를 내고 상처를 주며 불행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자신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죄인이 되어 불행을 자초하며 살아가고 있는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자. 매미의 삶을 생각해 보면, 매미의 한살이는 보통 자연에서 성충 매미의 수명은 1주일에서 2~3주일 정도, 길면 한 달 반 정도인데, 7년에서 17년까지도 되는 유충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짧은 생을 살다 간다. 살아있는 동안 수컷은 열심히 노래하고 암컷은 후손을 위한 알을 낳기 위하여 노래도 못하고 산란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수컷과 암컷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잠시 생각해 보자. 백세 시대를 산다고 하는데 흉악한 범죄가 난무하고, 가정이 파괴되며 태어나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는 영혼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민화 작가로서 문자도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라고 하는 문자도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덕목이다. 우리의 심성에 스며있는 유교적 사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국가에 충성하며, 친구와의 믿음과 의리, 윗사람에 대한 예절,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청렴결백,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며, 생활 속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실천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될 것이다. 어느 할머니께서 손녀를 데리고 갤러리에 찾아오셔서 문자도에 대하여 설명을 부탁한다. 아마 두 자매를 무척 사랑하는 분이라 손녀들에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효제충신예의염치'라는 교육을 원하셨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연신 대답하며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 부탁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무도 산에 푸른 나무를 심지 않고 바라만 보면서 그늘을 원한다면, 그 시원한 그늘은 누가 만들어 줄까요? 혼자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사랑의 나무를 심고 열심히 가꾸어 보자. 상처투성이가 되어 세상을 원망하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을 베풀고, 소외된 자들이 편히 쉼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주면서, 행복한 정원을 만들어 간다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우리의 자자손손 안전하고 멋진 꿈을 꾸며 세상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듯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멋진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꿈과 희망을 함께 이루어 가자. /김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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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3 15:12

칠월 칠석, 오작교와 견우직녀

음력 칠월이면 가을에 접어든다는 입추와 더불어 천고마비의 계절로 접어든다. 특히 8월 22일은 우리 세시풍속인 칠월칠석으로 1년에 한번 ‘오작교’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 애틋한 사랑을 속삭이는 날이라고 한다. 사실 요즘 독자들은 ‘오작교’하면 견우직녀의 오작교보다는 필자의 고향이 있는 광한루 오작교 부근에서 열리는 춘향제전행사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지난 5월 25일부터 5월 29일까지 개최된 제93회 ‘춘향제전행사’에 많은 관심과 남다른 애정을 갖고 참여한 바 있으며, 성대하고 화려한 춘향제전 행사를 즐기며 뜻도 새겨보았다. 잠시 춘향제전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우선 춘향제의 꽃인 ‘춘향선발대회’를 빼놓을 수 없다. 초창기에는 출전자격을 남원시 관내출신으로 제한하였으나, 몇 년 전부터는 전국적으로 확대 선발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미인대회가 되었다. 또 민속씨름대회, 춘향국악대전 등의 볼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도 있는데 광한루 안에 있는 월매집 막걸리 맛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기가 절정이라 독자들도 기회가 된다면 꼭 경험해 보시기를 바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광한루의 대표 상징인 오작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오작교는 이름 그대로 까마귀 오(烏)자와 까치 작(鵲)으로 까마귀와 까치가 놓은 다리를 말한다. 은하계에서는 오작교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지상에서는 광한루 오작교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만나서 사랑을 속삭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럼 오작교의 주인공인 ‘견우직녀’에게는 어떤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조금 더 생각해보자. 견우(牽牛)는 한문으로 끌견, 소우로 소를 끌며 농사짓는 목동이고, 직녀(織女)는 배짤직, 여자녀로 배를 짜는 여자라는 뜻으로 견우성, 직녀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별의 이름으로 ‘견우’와 ‘직녀’ 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별의 고귀함을 생각해 볼 때 견우직녀의 격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견우직녀는 지금말로 표현하면 선남선녀로 인정받아 결혼도 하고 함께 같이 살게 되었으나, 결혼 후 사랑의 즐거움에 빠져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게을러져 이를 본 옥황상제가 견우직녀를 은하수 동쪽에는 견우, 은하수 서쪽에는 직녀가 살도록 하였다. 이 안타까운 견우직녀의 소식을 들은 까마귀와 까치가 남을 돕는다는 사랑과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매년 칠월칠석에 위험을 무릅쓰고 하늘로 올라가서 몸을 맞대어 오작교라는 다리를 놓아 줌으로 견우직녀가 사랑을 속삭이도록 하였으나, 그리움을 안고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서러운 심정으로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칠월칠석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고도 한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묻지마 식의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는 요즘, 견우직녀의 숭고한 사랑을 도와주기 위한 까마귀와 까치의 봉사정신은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우리의 인정어린 덕행(德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또 견우와 직녀는 당초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혼 후 그들만의 사랑에 빠져 자기 본연의 책무를 다 하지 않은 점을 보면서, 우리 인간도 비록 좋은 의도를 가진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본연의 책무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부여된 책무를 다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정도(正道)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조현건 전 전북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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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6 17:37

서울에서 만난 전북 -한양도성

코흘리개를 겨우 면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을 시절의 일입니다. 제가 다녔던 남원중학교는 시내에서 꽤 떨어진 야트막한 산밑에 자리잡고 있었지요. 입학식을 마치고 보니 학교 옆으로 뭔가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는 시설을 만드는 공사였습니다. 1만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이라는 뜻이지요.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싸우다 돌아가신 조명연합군과 백성들의 무덤을 이장해 그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시설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자주 있었던 것처럼 저희도 그 공사에 투입되었습니다. 흙을 나르고 돌을 고르고 잡초를 뽑는 일이었지요. 남원성 전투 당시 왜군의 지휘관 중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있었습니다. 왜군의 선봉장으로 부산포에 처음 상륙했던 인물이지요.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경쟁 끝에 흥인지문(동대문)을 통해 한양도성에 처음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무능한 왕 선조는 이미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후였지요.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후 천도를 계획하면서 한양도성을 쌓았습니다. 길이만 해도 약 18.627Km에 이릅니다.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낙산 ~ 목멱산(남산) ~ 인왕산까지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매우 긴 성이지요. 한양도성은 백악산을 기점으로 97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팔도의 백성들을 동원해 만들었습니다. 당시 동원된 인부 약 12만명 중 18,25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지요. 전라도 백성들은 천자문 59번째 글자인 이(李)부터 74번째 글자인 용(龍)까지의 구간을 담당했습니다. 목멱산 서쪽에서 시작해 백범광장과 숭례문(남대문)을 거쳐 이화여고 부근까지의 구간입니다. 농한기를 이용해 상경한 그들은 아침 저녁으로 고향을 향해 절을 하면서 마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변변한 기계와 기구가 없던 시절, 맨손으로 성을 쌓다 보니 많은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태조 대에 신축되고 세종, 숙종, 순조 대에 개축된 한양도성은 이후 일제에 의해 많은 부분이 헐렸습니다. 그로 인해 전라도 백성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구간은 현재 목멱산 서쪽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구간만 남아 있습니다. 전라도 백성들의 노고는 세종 때 개축되면서 그 흔적을 뚜렷하게 남겼습니다. 흥인지문에서 낙산에 이르는 구간인데요. 그곳 성벽에는 지금도 井邑(정읍), 金堤(김제), 沃溝(옥구), 咸悅(함열)과 같은 지역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곳을 담당한 지역 백성들에게 보수를 시키기 위해 일종의 공사실명제를 실시한 까닭이지요. 남원 출신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내사산 중 낙산이 125m로 제일 낮다 보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성곽을 견고하게 쌓아본 경험이 있는 전라도 백성들이 낙산구간에 동원된 것으로 추측한다.” 한양도성은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후 도시를 새로 정비한다는 미명 아래 헐릴 운명에 처합니다. 전차길을 낸다는 명목하에 결국 서대문, 혜화문 등이 헐리게 되지요. 그런데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살아남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또와 고니시가 두 문을 통해 한양으로 입성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한양도성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역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남원성을 파괴했던 고니시로 인해 흥인지문이 살아남았으니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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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9 16:12

전북인의 DNA, 4차 산업혁명시대의 방위산업에 특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천적 ‘기질(氣質)’, 세칭 DNA를 가지고 태어난다. Y세대나 MZ세대, 해변 지역과 내륙 지역 사람들의 성향이 다른 것은 이러한 기질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집단적으로 고유한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DNA가 성공적인 삶의 결정적인 요소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농경시대의 성공적인 DNA는 무엇일까? 근면, 성실, 그리고 협동심일 것이다. 농업은 지역 공동체가 함께 일구어 나가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의 DNA는? 산업화 시대는 특정 분야의 깊이 있는 기술적 지식과 경험이 조합된 전문성을 요구한다. 전문성을 위한 기질은 집중성이다. 정보화 시대에는 아마도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 때에 정확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민첩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기질은? 정보통신 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이 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등 모든 것이 연결되는 융합의 시대이다. 융합능력이 핵심이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방위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DNA는 융합성과 국가 공동체에 대한 사랑 즉 애국심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전북인의 DNA는 무엇일까? 전북을 대표하는 표현들, 즉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농지’, ‘수양버들 같다’는 평판, 그리고 대표음식 ‘비빔밥’, 이 세가지에서 전북인의 DNA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북인은 수천년간 이어져내려온 농경인의 DNA, 근면 성실 협동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기에 수양버들 같은 유연함과 느긋함이 덧붙여져 있다. 마지막으로 비빔밥! 다양한 식재료를 불로 굽거나 끓여서 제3의 맛을 내는 화학적 결합형 음식들과는 달리 비빔밥은 각 재료의 고유 특성은 유지하되 섞고 비벼서 새롭게 증강된 맛을 내는 융합형 음식의 대명사이다. 따라서, 전북인의 DNA는 근면 성실 협동심 유연함과 느긋함 그리고 융합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DNA로 농경시대는 주도하였으나 특정 기술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산업화 시대와 민첩성이 핵심인 정보화 시대에는 조금은 잘 어울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특히 이 시대의 방위산업의 주역은 전북인이 될 것이다. 근면 성실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하기 싫거나 힘들더라도 지금 미리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기질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성공적인 삶을 위한 기본 요소이다. 여기에 전북인은 유연함과 융합능력이 탁월하다. 공동체가 함께 일하는 협동심은 국가를 향해서는 애국심으로 표출된다. 전북인은 이러한 DNA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를 기다려 온 듯하다. 특히, 이 시대의 방위산업을 이끌기 위해 특화된 듯하다. 다만, 근면 성실이 완고한 고집으로, 유연함이 우유부단함으로, 협동심이 소아적 파벌의식 또는 집단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끊임 없이 경계해야 한다. 봉산개도(逢山開道) 우수가교(遇水架橋)! ‘산을 만나면 길을 만들어 나가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 건넌다’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특히 이 시대 방위산업의 주역이 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산과 물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 때마다 전북인의 DNA로 길과 다리를 만들어 나가리라 믿는다. /강은호 국방과학연구소 정책자문위원∙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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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2 14:59

문화예술이 살아야 하는데

우렁찬 노래를 부르며 세상 밖으로 홀로 나왔다.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서 사랑받고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 어느 날 수많은 경쟁을 하면서 넓은 세상으로 나왔다. 상처와 오해와 비난 속에서 우리의 삶이 무척 힘들고 지쳐 때론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포기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될까? 오랜 해외 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타인 인격을 존중하는 것을 배웠다. 남이 잘하면 아낌없는 박수와 함께 칭찬해 준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좋은 습관은 어릴 때부터 칭찬 속에서 자라서일까? 자존심도 강하고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강하다.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는 미술에 대하여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예술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는 한마디씩 던지는 전공 하였느냐는 질문에 상처받을 때가 있었다. 필자는 전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뒤 쳐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노력하여 책을 읽고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찾아 활용한다. 필자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인은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끝없이 노력해 왔다. 또한 많은 작가를 만나며 기자로서 SNS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작품의 색깔과 살아온 삶의 냄새가 느껴진다. 어려운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순간을 잘 극복한 작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작품 세계는 겸손과 행복이 성공한 작가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필자는 학연, 지연, 혈연 때문에 예술 분야가 많이 부패하여 있어 서글프다, 가끔은 재벌 작가도 있지만 가난한 작가들도 많고, 요즘은 특히 전공한 30~40대에 대가가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도 많다. 또한 대부분 삶의 현장에서 물러난 백발이 된 늦깎이 작가들의 노련한 삶이 묻어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며 어렵고 힘들게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고 슬픈 현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꿈을 갖고 열심히 준비하여 공모전에 출품을 하였는데 인맥이 없어 떨어졌다는 출품자의 말을 들을 때마다, 새싹이 자라기도 전에 짓밟혀버리면 저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상처를 받아 꿈을 접어버리는 안타까운 작가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다. 필자는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으로 좋은 대학에서 공부는 하지 못하지만 필요한 자료나 정보는 온라인으로 혼자 터득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우리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학연, 지연, 혈연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훈련을 그렇게 받아서인지 자존심이 강하고 남이 부족하면 서로 인정하고 채워주는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맨하튼 미술박물관을 방문하다 보면 유치원생이 끄적거린 것 같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며 칭찬해 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종종 있었다. 저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가들의 실력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 다시 말하면, 작가의 표현하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예술인들 역시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에 작가의 내면세계를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인정해 주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김종숙 작가 △김종숙 작가는 재경 남원문학협회 이사이며 (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대외협력위원회 위원장․아트코리아방송 뉴욕뉴저지 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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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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