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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나날이 가꾸어야 하는 민주주의

서울 도심 사무실에서 창밖을 가만히 내다 본다. 7월 아침 해가 벌써부터 예열을 하는 듯하고, 출근길 직장인들 발걸음이 분주하다. 커피숍에는 헤드셋을 착용한 학생이 노트북을 살피고 있다. 신문을 통해 야당이 새 정부의 장관 후보 청문회를 벼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정부와 대통령을 향한 날선 말이 오가지만 아무도 제재되지 않는다. 참 평범한 아침 일상이다. 그런데 이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그런 존재였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고, 의식적으로 고마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누구든 자유로이 말할 수 있고, 다투어야 할 때 폭력이나 총 대신 대화와 투표용지로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우리는 그러한 일상을 살면서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해 12월3일, 그 믿음은 흔들렸다. 윤석열 전대통령의 전격적인 비상 계엄령 선포는 헌정질서를 훼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 충격 그 자체였다. 총과 군화가 정치의 도구로 다시 등장할 뻔한 순간,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를 수십년 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야 했다. 그 동안 묻혀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혼돈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울의 응원봉만이 아니었다. 전주·부산·광주·대구·대전·춘천·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선 남녀노소 시민들이 손팻말을 흔들며 광장과 거리를 메웠다.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가결했고,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피고인 윤석열을 파면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이재명 정부는 바로 그 민주주의와 헌정 회복의 열망 위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제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는 이재명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민주주의를 다시 튼실하게 재건하고, 국정에 더 많은 시민이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이 기자들과 격의 없는 타운홀 미팅을 하고, 국회에서 시정 연설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삼겹살을 굽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국회, 헌법재판소, 정부나 대통령의 노력만으로 온전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일상적인 실천과 행동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선거 때 투표를 하는 일, 여론조사에 참여하는 일, 마을 토론회에 가서 한마디 보태는 일. 하나 하나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만들어 가는 작지만 큰 실천이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전 세계 167개국을 대상으로 매년 민주주의 성숙도를 진단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작년에 32위를 차지하여 ‘결함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구분되었다. 22위였던 2023년에 비해 10위나 하락한 결과다. 그렇지만, 조만간에 2024년 이전의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최상위 단계로 재진입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국민이 민주 시민으로서의 권한과 책무를 전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잘 행사하리라는 것을 고스라니 체험했기 때문이다. 계엄과 탄핵과 대통령 선거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오늘은 누구의 하사품도, 저절로 주어진 것도 아닌, 나와 주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로, 말 한마디로, 참여로 인해 나날이 가꾸어진 결과이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우리의 눈길과 손발을 필요로 한다. △김춘석 부문장은 전주 상산고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조사협회 대변인, 한국조사연구학회 이사, 한국갈등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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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3 18:13

[타향에서] 고향을 품은 마음, 서울에서 꽃피우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이 말이,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고향에서 받은 사랑과 가르침이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서 더 깊고 푸르게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1991년 봄, 전북대학교 졸업식장에서 학사모를 던지며 나는 다짐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지만 단단한 꿈. 그 마음 하나로 스물네 살의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행 버스에 올랐을 때, 창밖 풍경은 낯설었고 마음엔 설렘과 막막함이 함께했다. 서울에서의 첫 보금자리는 신림동 고시원이었다. 창문 하나로 들어오는 햇살도 고마웠던 그 좁은 방에서 책과 씨름하며 보낸 시간이 어느덧 6년. 밤늦게 공부하다가 문득 고향 생각이 나면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장 큰 위로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언제까지 공부만 할 거냐", "그만하고 취직해라"는 말을 할만도 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몸은 괜찮니?",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니?" 언제나 안부를 물으시고 "네가 원하는 길이니 괜찮다"며 묵묵히 응원해주셨다. 그 따뜻한 말씀이 힘든 순간마다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만난 수험생들과의 우정도 큰 힘이 되었다. 서로 다른 고향에서 왔지만,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동행이었다. 함께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버텨낸 그 시간들이 지금 생각해도 소중하다. 1997년 초겨울, 서른 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고향에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그 눈물 속에 담긴 자랑스러움과 안도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사법연수원 2년을 거쳐, 2000년 서른셋에 변호사가 되었다. 처음 맡은 사건, 처음 마주한 의뢰인, 처음 선 법정.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고향에서 배운 정성과 진심만은 잊지 않으려 애썼다. 특히 여성 의뢰인을 만나면 더 다정히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들의 아픔과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가려 노력했다. 26년간의 법조 생활 속엔 아픔도, 감사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조금씩 더 따뜻한 법조인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이라는 큰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품었던 꿈보다 훨씬 더 큰 자리를 마주하며 깨닫는다. 고향에서 받은 순한 마음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사실 한 번도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내가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 2010년부터 13년간 법원 파산관재인으로 활동하며 2,400여 명의 채무자를 만난 사연이 모티브가 되었다. 제목은 '두 번째 기회를 위한 변론'이다. 사법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만큼이나 설레고 두렵다.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과 더불어, 고향에서 받은 순한 마음이 서울에서 어떻게 꽃을 피웠는지 담아내려 노력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 두렵더라도, 그곳에서 받은 사랑과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어디서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나는 여전히 전북의 딸이다. 스물네 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아온 지 33년이 되었지만, 마음속 중심은 늘 고향을 향해 있다. 고향의 마음을 품고 서울에서 피워낸 꽃 한 송이. 그 향기가 누군가의 삶에 닿기를 바라며 오늘도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 △왕미양 회장은 제29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대한변호사협회 제49대 사무총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법무법인 시니어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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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6 19:11

[타향에서] 세금 안 걷히는 이유, 경기 탓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세입예산 대비 걷지 못한 세금은 2023년과 2024년 두 해 동안 무려 87조 원에 달했다. 최근 10조 3천억 원의 세입을 감액하는 2차 추경예산이 편성되는 등 금년에도 세수 결손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세금이 걷히지 않는 이유로 흔히 경기침체 등 경기순환 요인을 지목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경기 사이클의 하강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경제구조의 변화가 세입기반 약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는 인구구조의 변화다. 우리나라는 2018년부터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본격적으로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반면, 고령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여 올해부터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동인구 축소는 소득세 기반의 약화로 이어지며, 소비 감소를 초래해 부가가치세 세입에도 악영향을 준다. 둘째는 노동시장 구조의 변화다. 디지털 플랫폼 산업이 확대되며 전통적인 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1인 창작자, 프리랜서, 플랫폼 종사자 등이 늘어나면서, 원천징수를 통한 안정적 조세징수가 어렵다. 이들은 과세인프라 밖에 놓여 있어 과세누락 가능성도 크다. 셋째는 산업구조의 전환이다. 글로벌 경쟁하에서 국내 제조기업이 생산시설과 수익창출 거점을 해외로 이전하여 국내 세입기반이 약화된 반면, 세원 이동성이 낮은 서비스산업의 세수 기여도는 높지 않다. 또한, 기업 가치창출의 원천이 점차 생산설비 등 유형자산에서 데이터, 소프트웨어, 브랜드 등 무형자산으로 이동하고 있어 전통적 과세체계로는 과세에 어려움이 많다. 특히, 구글 등 해외플랫폼 기업들의 경우 국내에서 막대한 매출을 올리면서도 국내사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실질적인 법인세 납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넷째로 부동산 세원의 약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은 그간 주요 세원으로 기능해 왔지만, 최근 거래량 감소와 보유세 완화 정책 등으로 세수 기여도가 크게 줄었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경제사회구조 변화의 반영이다. 경기가 회복되면 조세수입도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디지털 경제시대의 변화된 현실에 맞도록 세입구조 개혁을 통한 중장기적 세입확충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AI 등 전략산업 육성, 아동수당 확대 등 대통령 공약의 충실한 이행 못지않게, 지출구조 조정과 세입구조 개혁을 통한 재정건전성 유지도 긴요하다. 경제사회구조 변화에 따른 사회복지 지출의 증가는 현재 세대에서 부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혜택이 집중된 윤석열 정부의 감세정책을 시급히 원상복구해야 한다. 또한, 금융투자소득세, 가상자산 과세 등 자산소득 과세의 정상화를 통해 소득유형별 과세형평성을 제고해야 한다. 그리고 디지털/AI 기반 포괄적 소득파악시스템 구축 및 국가간 조세협력을 강화하고, 중장기적으로 OECD 등 국제기구의 권고대로 부가가치세 세수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간접세의 역진성은 저소득층 환급 또는 근로장려금 강화 등을 통해 완화할 수 있다. 국가재정은 국민 삶의 기반이며, 조세 기반이 흔들린다는 것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다는 의미다. 이제는 조세정책의 중심축을 ‘순환대응’에서 ‘구조대응’으로 옮겨야 할 때다. △김명준 전 청장은 국세청 조사국장과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서울시립대 겸임교수, 세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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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9 19:38

[타향에서] 탄소중립의 판을 새로 짜자: 기후에너지부 출범을 기대하며

새 정부가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공식화 했다. 2050 탄소중립을 국가 비전으로 선포한 지 채 5년도 되지 않아 조직 개편 카드를 꺼낸 것은, 기후정책이 더 이상 환경부의 ‘부속 과제’가 아니라 국정 운영의 근간이라는 방증이다. 우리는 마침내 ‘기후=경제’라는 등식을 제도에 새기려 한다. 그동안 탄소 감축 권한은 환경부, 배출의 진원지인 산업·에너지 정책은 산업통상자원부, 예산은 기획재정부로 흩어져 있었다. 부처 간 조각난 KPI는 ‘누구도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를 낳았고, 탄소중립 커브는 완만히 눕기만 했다. 각 부처가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의도’로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탄소중립 목표에는 효과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는 ‘분절적 선의’로는 글로벌 탄소 국경 조정(CBAM) 시계를 멈출 수 없다. 사실 기후에너지부 논의는 노무현·이명박·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번번이 좌초됐다. 산업규제와 성장전략을 한 몸에 담는 ‘두 얼굴의 부처’가 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탄소 감축은 선택이 아니라 해외 시장 진입권이며, 에너지 안보는 국가 생존 전략이 되었다. 규제·진흥·안보를 한 테이블에서 조율하지 않으면 ‘넷제로 적자국’이 될 뿐이다. 첫 단추는 “감축 목표를 넘어, 감축 시장을 만든다”는 발상 전환이다. 정부가 배출권 가격과 산업 전환 속도를 예측 가능하게 설계하면 탄소는 비용이 아니라 자본이 된다. 배출권 대비 혁신 효율을 기준으로 세액 공제와 조기 감면을 설계해 ‘탄소 절약이 생산성’이 되는 생태계를 열어야 한다. 탄소감축 실적을 담보로 녹색국채를 발행해 시장이 성과를 선제적으로 보상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을 ‘탄소중립 레버’로 활용하자. 국내 신재생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소·암모니아·SMR 같은 차세대 클린에너지 투자에 전략적 공적자본을 먼저 집행하고, 이를 ODA·수출금융과 연계해 ‘탄소 저감형 P4G’ 모델로 수출 산업화 해야 한다. 새만금 RE100 클러스터처럼 지역 기반 프로젝트를 글로벌 밸류체인과 직결하면 지방도 기후 혁신의 주역이 된다. 셋째, 산업부문 규제·진흥 이원화를 끝내야 한다. 환경부는 규제의 신뢰성을 유지하되, 기후에너지부가 ‘감축 컨트롤타워’를 맡아야 한다. 규제는 유지하되 목표·인센티브·패널티와 예산을 단일 부처가 책임지면 기업은 예측 가능성을, 정부는 실행력을 얻는다. 넷째, ‘탄소 데이터 라거’를 구축하자. AI·블록체인으로 실시간 배출·감축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면 투자자는 녹색 프리미엄을, 시민은 생활 감축 포인트를, 지방정부는 맞춤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국민 1인당 탄소배당(Citizen Climate Dividend)을 연결해 감축 성과를 국민 소득으로 환원하면 ‘기후정책은 세금’이라는 인식을 바꿀 수 있다. 문제 진단은 충분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와 일관성이다. 기후에너지부가 분절된 권한을 묶고 감축 시장·클린에너지 경제·데이터 거버넌스를 축으로 삼아 출범한다면, 탄소중립은 규제가 아닌 기회, 비용이 아닌 성장 엔진이 될 것이다. 전북 경제 또한 이 대전환에서 새 성장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대식 이사장은 재경익산향우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기후환경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2020년 설립된 넷제로 2050 기후재단을 이끌며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에너지·환경·기후 관련 실천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등 탄소중립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장대식 넷제로 2050 기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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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2 18:29

[타향에서] 대통령님께 고합니다

'분노하는 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없이는 지도력의 힘이 없다는 얘기다. 대통령께서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변호사로 출발 성남시장을 지냈으며 경기 도지사를 거쳐 더불어 민주당 대표까지 역임하고 훌륭한 리더십으로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동안(20대)은 정권창출 때마다 희망의 메시지를 쏟아 내고 공약을 해 왔지만 많은 정권에서 초심은 사라지고 권리나 권한을 본래의 목적이 아닌 범위를 벗어나 남용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1대 대통령께서는 인본을 중심에 두고 권력은 국민들에게 이롭게 하는 헌법 최상위법으로 국정을 운영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세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인본을 꿰뚫는 진실만이 가능하다. 이는 역사가 보여주었고 근본을 성찰한 인문학에서도 증명한다. 조직의 지도자나 성직자는 단순한 직함이 아니다. 수없는 고난 속에서도 사랑으로 품고, 용서와 이타심과 인고의 성숙함을 갖는 게 리더의 자격이라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미움을 통해 인간은 가장 추악해 진다'라고 말했다. 지도자의 마음에 미움이 싹트고 있으면 공동체는 서서히 시들고 시름하다 갈등을 안고서 파괴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지도자는 큰 사랑으로 공동체를 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산을 도출하고, 현실을 점검하면서 대안과 변화를 진단 처방하여 미래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인본을 우선시 하는 정책만이 진정한 승리가 되어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사랑은 능동적이고 고통'이라고 했다. 즉 타인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끓어 안아야 되고, 누구도 단죄하지 않으며, 악인을 미워하지 않는 거룩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영혼의 중보자의 역할을 능히 실천하는 자가 진실한 종이라 했다. 대통령께서 진실한 종이 되어 사회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을 통합하는 정책을 우선순위에 넣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통합 정치가 원만해지면 정권은 쾌속 순항하리라 확신한다. 통합의 출발은 야권에서도 인정하는 인물을 삼고초려 하여 인재를 발탁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께서 결단해 주기를 바란다. 신정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키 위해 신재생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적극 환영한다. 필자는 새만금 사업 프로젝트를 정부주관 주도로 새만금개발공사가 적극 사업추진 할 것을 권장 한다. 그동안 정부 예산, 전라북도 예산과 민간자본을 활용 사업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신정부는 새만금을 신재생에너지 전초기지로 검토를 바란다. 신에너지와 재생에너지 생산 기지화 하여 세계일류공영에 기여하는 메카로 거듭나기 위해 새만금개발공사에서 추진하는 ESG (기업의 환경, 사회, 지배 구조) 경영체계를 체계화 하고 실질적인 성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선 방향을 적극 추진해 주기를 바라며. 신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새만금 사업은 우리들의 숙원사업이고, 반드시 백년대계를 위한 사업이므로 속도를 내어주기 바란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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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5 18:50

[타향에서] 한국의 수니온곶 변산반도 적벽강

내 고향 김제에서 가까운 전라북도 변산에는 ‘채석강’과 ‘적벽강’이라는 관광 명소가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적벽강은 몰라도 채석강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두 곳은 ‘강’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을 뿐 사실 흐르는 강은 아니다. ‘채석강彩石江’은 주변 경관이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은 강을 닮아 그 이름을 딴 지명이고, ‘적벽강赤壁江’은 주변 경관이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노닐었다는 강을 닮아 그 이름을 딴 지명이다. 채석강과 적벽강은 ‘죽막마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인접해 있다. 채석강에서 싸드락싸드락 걸어서 출발하면 격포해수욕장 해변을 거쳐 죽막마을을 지나 20여 분 만에 적벽강에 도착할 수 있다. 나는 두 곳 중 적벽강을 더 좋아한다. 그곳이 그리스의 수니온곶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수니온곶이, 그리고 수니온곶에 가면 적벽강이 생각날 정도다. 우선 수니온곶이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반도 끝자락에 놓여있는 것처럼 적벽강도 변산반도 서쪽 끝자락에 놓여있다. 또한 수니온곶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다면 적벽강에도 수성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수니온곶은 앞쪽으로 에게해의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어 바다의 신의 성소가 자리 잡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에 포세이돈의 강한 기운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고 일찍부터 제단을 쌓고 그에게 제물을 바치며 선원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BC 8세기경의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는 트로이 전쟁 후 스파르타로 돌아가다가 수니온곶에 상륙하여 포세이돈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 적벽강도 칠산 앞바다, 위도, 상왕등도, 하왕등도, 고군산 군도 등이 아주 잘 보이는, 낮아도 그곳에서는 가장 높은 용두산 정상이라서 그 지역을 항해하는 배들과 어선들을 돌보는 당집이 들어서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수성당은 상량 기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 순조 때 지어졌다. 하지만 발굴된 유물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앞선 삼국시대부터 고기잡이를 떠나기 전 그곳에서 바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무사 귀환을 빌었다. 수성당에 모신 신은 거인巨人 ‘개양할미(혹은 계양할미)’와 그녀의 여덟 명의 딸이다. 구전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수성당 근처 여울굴에서 나와 여덟 명의 딸을 낳아 일곱 명은 각각 전국의 도로 보내고 남은 한 명과 함께 서해 바다를 다스렸다. 개양할미는 특히 조기가 많이 나던 칠산 앞바다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어부들을 위해 위험한 곳은 알려주고 거센 파도는 잠재워 주었다. 언젠가 개양할미는 곰소 앞바다의 깊은 곳 ‘계란여’를 지나다가 치마가 조금 물에 젖자 화가 나서 얼른 육지로 건너가서는 치마에 흙과 돌을 가득 담아 와 단숨에 그곳을 메우기도 했다. 끝으로 수니온곶과 적벽강은 똑같이 석양으로 유명하다. 수니온곶이 석양에 비친 포세이돈 신전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면, 적벽강은 석양에 비친 진홍색 바위와 바닷물이 서로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적벽강처럼 전라북도에는 전 세계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또 다른 명소가 있다. 바로 9개 코스 총 240km에 달하는 ‘아름다운 순례길’이다. 그중 ‘수류성당’에서 ‘금산사’까지 이어지는 제7코스는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등 우리나라 4대 종교의 화합을 염원하면서 조성한 길이라 뜻깊어 더욱더 ‘아름다운’ 길이다.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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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8 17:29

[타향에서] 서울에서 만난 전북- 헨리 아펜젤러

우암 송시열, 해공 신익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이 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우암은 서인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사후에 종묘에 배향되었습니다. 그는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상경하다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해공은 초대와 2대 국회의장을 지내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유세를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타고 내려가다가 익산에서 급서하셨지요. 아펜젤러는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등을 세웠습니다. 1902년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배끼리 충돌하면서 물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려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지요. 2007년 군산에 아펜젤러노블기념관과 순교기념교회가 건립된 이유입니다. 이쯤 되면 정답을 아시겠지요. 전북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한 것은 아닌데, 전북에서 삶을 마치신 분들입니다. 그중 아펜젤러는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가면 그의 묘비를 발견할 수 있지만, 사실은 유해를 찾지도 못했습니다.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정동교회 종소리 은은하게 들리면’, ‘덕수궁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혜은이의 ‘옛사랑의 돌담길’과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중 일부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동교회와 조그만 교회당이 바로 아펜젤러가 세운 그 교회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1885년부터 지금까지 140여년 동안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펜젤러는 1858년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나 1885년 목사 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서울에서 딸 앨리스를 낳았는데,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라고 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갈림길에 정동교회가 보입니다. 그곳에서 왼쪽 언덕길로 오르다 러시아대사관을 지나면 빨간 벽돌로 된 오래된 건물이 서있습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라는 현판과 함께. 그곳에서 우리나라 근대 교육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지요. 최초에는 두 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는데, 빠르게 늘어 1886년에는 스무 명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했습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배움터’라는 뜻이지요.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지청천, 여운형 선생 같은 분들이 그곳에서 배운 분들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책을 읽고 있는 아펜젤러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이거나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종교시설인 데다가 외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일제의 감시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3·1 운동 당시에는 담임목사 이필주와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또 유관순 열사도 정동제일교회 신자였지요. 그의 사후에도 부인과 아들, 딸은 여전히 조선에 남아 교육과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현재는 양화진 묘역에 함께 묻혀 있지요.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습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요. 호국보훈의 달 6월입니다. 헨리 아펜젤러라는 이름을 한번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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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1 18:40

[타향에서] 보신탕과 견분곡(犬墳曲)

6월부터 여름, 보신탕 시즌이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찬반논쟁이 벌어지는 계절이다. 어찌 사람이 개를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은 감성 호소일뿐 논리가 아니다. 개고기 옹호자는 전통 음식문화를 즐기는데 왜 외국 눈치를 봐야 하는가라며 전의에 불탄다. 아니나 달라, ‘거위 간도 먹으면서’ 운운한다. (개고기는 제사상에 오르지 못하므로 전통음식이 아니다) 해외사례 열거도 별무소용이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이 영국여왕을 만나고 나간 뒤 여왕이 궁전 정원의 개 마릿수를 세는 만화가 현지 신문에 실렸다, 미국지사로 발령난 아버지를 따라간 어린이가 ‘식견종’이라고 학교에서 왕따 당했다는 실화도 먹혀들지 않는다. 보신탕이 참 맛있다는 백인의 실명이 줄줄이 제시된다. 보신탕에는 우격다짐식 ‘국뽕’도 개입돼 있다. 개를 먹는 사람은 민족주의자, 안 먹고 반대하면 매국노라는 투의 비약마저 이뤄진다. 개는 여느 짐승과 다르다, 정을 주고받는 반려다, 가족처럼 지내다가 잡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하소연 또한 통하지 않는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왜 동물을 차별하는가, 소·돼지·닭도 정겹기만 한데, 식물이 불쌍해요…이런 유의 대응이 잇따른다. 식용견과 반려견은 별개다, 고문치사 대신 고통없이 죽이면 괜찮지 않을까라며 합리적인 척하는 남녀도 있다. 황구는 본래 먹으라고 있는 것이라며 고개를 주억대기도 한다. 하지만 누런 진돗개도 보신탕감이다. 치와와, 요크셔테리어 같은 조막 만한 개는 근수가 덜 나오는 덕에 연명할 따름이다. 반려견도 개소주로, 보신탕 국물용으로 도살되고 있다. 필자는 한국동물보호연구회 회장으로서 1990년대 초부터 보신탕과 싸웠다. 국내 최초로 일간지에 애완동물면을 만든 신동립 기자와 의기투합했다. 신문에 실린 대만의 떠돌이개 뉴스를 접하고 대만으로 날아간 게 벌써 30년 전이다. 보신탕용으로 가져간다고 의심하는 현지 동물보호소를 설득, 겨우 데려왔다. 이 사연을 보도한 이도 신 기자다. 그와 나는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그렇게 쉼 없이 보신탕에 돌을 던졌다. 2027년 마침내 보신탕이 사라진다. ‘개식용금지법’이 작년 초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 공포 3년 뒤부터 시행한다. 지난달 임실군의 제40회 오수의견문화제에 맞춘 나의 졸시(拙詩) ‘견분곡(犬墳曲)’을 읽고 개고기를 지웠으면 좋겠다. ‘너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짖지도 망설이지도 않았지/ 그저 내 곁에 있었을 뿐인데/ 너는 결국 나 대신/ 불길에 스러졌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젖어 있었고/ 내 숨은 여전했지만/ 너는 조용히/ 다신 일어나지 않았다// 냇물로 달려가 첨벙/ 불꽃을 향해 네 온몸을/ 던진 그 발굽 자국/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온몸이 타고 꺾이고/ 무너졌어도/ 너는 물을 안고 왔다/ 오직 나를 살리겠다는/ 그 하나뿐인 마음으로// 내가 너를 데려왔을 때/ 그저 길 위의 개 한 마리였거늘/ 오늘 나는/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너를/ 무덤에 묻는다// 돌 위에 새긴다/ ‘여기, 나보다 먼저/ 사랑을 아는 생이/ 잠든다’// 오수의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뜨겁고도/ 차갑다/ 마치 네 마지막/ 숨결처럼// 내 눈물은 말라가지/ 않는다/ 살아남은 죄가 너무 커/ 너를 부를 수도 없다// 너는 개였지만/ 너는 참 사람이었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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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8:34

[타향에서] 평범한 일상을 감사히 생각하자

어제까지 별 탈 없이 친구들과 곡차도 하고 유쾌하게 귀가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무릎과 허리가 아프다.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오후가 지나도 불편함이 이어진다. 할 수없이 약국을 다녀와 근육통 완화제를 복용했다. 외출을 못하고 쉬고 있는데 웬걸, 나아지기는커녕 일어나 활동도 어렵고 하루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씻는 일, 떨어진 물건을 줍는 일, 양말 신는 일, 기침을 하면 견갑골 근육통 때문에 참아야만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 수 없이 병원을 다녀왔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등산을 가끔 했는데 무릎이 시큰할 때도 있었고, 뒷목이 뻐근하기도 하며, 목도 결리고 등짝은 근육통이 가끔 왔었다, 눈도 침침하며 속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몸 구석구석에서 힘들었노라고 불평을 해댔는데 무시한 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습이 어렵다. 중국 속담에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라는 말을 싱겁게 웃어 넘겼는데 반듯하게 짱짱히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는 중이다. `아프기 전과 후`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게 우리 몸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축복으로 알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필자가 아시는 분은 성공도 하셨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신 분인데 어느 날 갑자기 뇌경색으로 입원하시게 되었다. 각별한 인연이 있어 병문안을 다녀온 적이 있다. 2년여 입원 치료중인데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본인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정도에 불과한 모습에 마음 아프게 다녀왔었다. 열정과 예리한 분석력, 인본을 기본에 두고 사업을 전개 승승장구 하셨던 분인데, 무기력한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때의 빛났던 재능과 인품도 다 소용 없구나 하는 생각에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지금 저 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혼자서 일어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얘기하고 식사하는 것, 그리고 두발로 산책하는 등 그런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닐까, 그런 소소한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뒤라는 점이 안타깝다. 대부분 사람들은 하늘을 날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땅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말이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의사께서 몸에 무리가 와서 그러니 약 먹고 며칠 쉬면 회복할거라 진단이지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감사한 일임을 이번에 또 배웠다. 건강하면 다 가진 것이다. 오늘도 일상에 감사하며 살아가자, 말로는 늘 감사를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두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않았으면 한다. 어느 의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몸을 의술로 할 수 있는 것을 금액으로 계산하면 약 50억 원이라 한다.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은 50억 순자산 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 할까요? 그건 욕심 때문입니다.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정상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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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8 18:31

[타향에서] ‘마당 깊은 집, 전주에서 놀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세계신화연구소에는 그리스 신화를 공부하는 ‘신화반’이 있다. 현재 제10기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고 있다. 지난 5월 10일 ‘신화반’ 선후배 포함 총 12명이 ‘마당 깊은 집, 전주에서 놀다’라는 제목으로 1박 2일간 전주를 다녀왔다. 2016년 연구소가 설립된 이래 매년 개최하는 행사다. 몇 년 전에는 연구소 회원 50여 명이 서울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이번엔 특히 『전라도 천년』의 작가 김화성 전 동아일보 기자가 인솔 교수로 동행했다. 일정은 매년 거의 똑같다. 첫째 날은 전주 시내 비빔밥 전문점에 집결하여 점심을 먹고 교외에 있는 귀신사歸信寺, 금산사, 금산교회, 강일순의 동곡약방, 정여립 집터, 동학 원평집강소, 수류성당 등을 둘러보고 전주 시내로 돌아와 전주 막걸리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고 가맥에서 가볍게 2차를 한 뒤 숙소로 향한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숙소 근처인 ‘혼불문학공원’을 거쳐 오송제까지 1시간 정도 산책하고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먹은 뒤 한옥 마을 내 경기전, 전주사고, 전동성당, 오목대, 향교 등을 탐방하고 해산한다. 기행에는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법. 주로 인솔 교수가 탐방지에 숨어있는 일화를 소개하지만, 회원들도 그곳과 관련된 글을 낭독한다. 귀신사에서는 그 절을 배경으로 한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한 대목을 낭독하고, 오목대에서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른 뒤 그곳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한나라 시조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읊어 은근히 역성혁명의 의지를 내비치자, 동석했던 정몽주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근처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가 크게 한탄하며 지은 우국시와 관련된 글을 낭독한다. 귀경 후 단톡방에 이번 전주 기행이 성지 순례였다며 귀신사와 금산사는 불교, 금산교회는 개신교, 전동성당과 수류성당은 천주교, 동곡약방은 증산교, 원평집강소는 천도교 성지라는 촌평이 올라왔다. 맞는 말이다. 근처 금구의 원불교 교당까지 포함하면 여러 종교 성지가 이렇게 한곳에 모여있는 경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전주 기행은 단순한 성지 순례를 넘어 세상 더께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의 참모습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이 코스를 기획하고 애정하는 이유다. 가령 금산교회는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 남녀가 따로 앉도록 지은 ㄱ자 한옥교회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세운 거부 조덕삼의 미덕이다. 그는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에도 백정 출신 머슴 이자익과 함께 교회에 다녔고,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집사가 되었다. 그 후 장로 선거에도 두 사람이 함께 출마해, 예상외로 이자익이 당선되자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깨끗이 승복했고, 자신은 정작 2년 후에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사비를 들여 이자익을 평양 신학교로 보내 목사로 만들었다. 그래서 조덕삼에게서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소아시아 초대교회 신자들의 형제애가 엿보인다. 더 나아가 조덕삼은 신분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동학군 김덕명 장군에게 원평집강소를 헌납한 백정 동록개의 분신分身이고, 모두가 평등한 후천개벽의 세상을 기약하며 구릿골에 동곡약방을 열고 천지공사를 펼친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의 분신이며, 신분엔 귀천이 없어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여립의 분신이다.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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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1 18:33

[타향에서] 서울에서 만난 전북- 정순왕후 송씨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1980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왕방연의 시조입니다. 이 시조에 곡을 붙여 조용필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요. 학교 시험이나 학력고사에 자주 나왔던 시조인데요. 여기에서 ‘님’은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슬픈 사연을 갖고 있는 단종을 말합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사방이 강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 청령포로 유배되었는데요. 왕방연은 단종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돌아오면서 슬픔에 겨워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합니다. 단종은 유배된 지 몇 달 후 1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조선의 왕 중 가장 단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왕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종의 왕비는 정읍시 칠보면에서 태어난 정순왕후 송씨인데, 본향은 여산입니다.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가 위치한 바로 그곳이지요. 개인적으로는 45년 전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입니다. 정순왕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가 15세의 나이로 당시 국왕이던 단종의 비로 간택됩니다. 하지만 1년 후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서 물러나 대비가 되었다가 다시 1년 후 서인으로 강등됩니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요. 종로 쪽에서 신설동 쪽으로 가다 보면 흥인지문(동대문)을 지나 왼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입니다. 그 산 끄트머리 부근을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르는데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정순왕후는 단종과 헤어진 후 이 부근에 살았는데요. 매일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동망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흥인지문 부근에는 유독 정순왕후와 관련된 곳들이 많은데요. 먼저 동망봉에서 북쪽으로 가면 ‘청룡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그곳에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있는데요. 정업원 옛터에 세운 비석이라는 뜻입니다. 정업원은 왕실과 관련이 있는 여성들이 출가해 거주하던 곳이었는데요. 정순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된 후 이곳에서 염색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부근에 있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는 곳에서 염색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녀가 지초(芝草)라는 자주색 나는 풀로 염색을 해 자주색 물이 흘러내린 데서 연유합니다. 동망동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이르면 ‘영도교(永渡橋)’라는 다리를 만나는데요. ‘영영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졌기 때문인데요. 왕후는 이 다리를 건너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여인시장에서 염색한 천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대까지 살다가 82세의 나이로 그토록 그리워하던 단종의 곁으로 갔는데요. 안타깝게도 영월 장릉에 잠들어 있는 단종과는 멀리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에묻혀 있습니다. 단종은 숙종 대에 정순왕후와 더불어 복위되었는데요. 사육신을 선양함으로써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려는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일. 아마도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일 텐데요. 정순왕후는 저승에서나마 낭군을 만나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었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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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4 18:07

[타향에서]길고양이를 자연에 맡기라고?

길고양이가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남녀가 많다. 혹한과 폭염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굶주리는 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어쭙잖은 말장난 뒤에 숨지 않는다. ‘그대로 두라’며 생태계 운운하지도 않는다. 측은지심으로 족하다고 나는 본다. 안쓰러워하는 데서 나아가, 행동하는 양심이 된 경우가 ‘캣맘’이다. 골목골목 길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는 그들에게 자연의 순리를 들먹이며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 도시에는 흙길이 없다. 포장도로에서는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다. 사방이 콘크리트 빌딩숲이다. 들어갈 처마 밑도 없다. 그렇게 좋으면 당신네 집으로 데려가라는 댓글 한 줄 달면서 이성적인 척해도 안 된다. 그들은 이미 여러 마리를 구해다가 보살피고 있다. 자기 돈으로 사료를 사고, 자기 발품을 들여 공존공생을 실천한다. 어느날 갑자기 출현하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묘마마(猫媽媽)’라고 불린 선량한 백성들이 길고양이를 챙겼다. 길고양이를 노리는 흉악한 자들이 공분을 사는 사건이 반복되는 세상이다. 나중에 연쇄살인범이 될 수도 있는 아이에게서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 요소 중에는 동물학대로 대표되는 사디즘이 있다. 보통사람도 유년기에는 경미한 수준의 가학성이 있다. 교육으로 교정 가능한 정도다. 연쇄살인범의 싹에게 만큼은 예외다. 장차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연습과정일 따름이다. 다만, 길고양이 개체수는 조절해야 한다. 용어부터 섬뜩한 살처분을 하자는 게 아니다. 무한번식을 방지하는 중성화(TNR)가 현시점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포획(Trap)-중성화수술(Neuter)-방사(Return)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길고양이의 왼쪽 귀에 ‘V’자형 표시가 있다면 중성화수술을 받은 것이다. 나는 전 서울시장에게 길고양이 무상 중성화수술을 제안한 바 있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더 할 수도 있으나 길고양이 수술에만 전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루에 5마리만 거세(수컷)하거나 난소자궁 제거(암컷) 시술을 하겠다고 했다. 1년이면 1800마리다. 그러나 그 시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본인이 아닌 엉뚱한 수의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선의의 재능기부 실천 의지는 어쨌든 그렇게 꺾이고 말았다. 우리집에는 반려묘가 있다. 이른바 ‘품종묘’는 아니다. 어느 대학생이 빈사 상태의 새끼고양이를 주워 내 병원으로 안고 왔다. 결국 살려냈고, 자연스럽게 집고양이가 됐다. 이름은 ‘갸릉이’, 이제는 늙어 만사 심드렁한 녀석이다. 그래도 저 위하는 건 잘 안다. 경계를 풀고 다가와 몸을 비비고, 박치기를 하고,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시도한다. 주인의 품에서는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믿음에 근거한 방심으로 배를 내놓은 채 곯아떨어지기도 한다. 감동이라는 감정, 거창한 게 아니다. 길고양이의 미래가 장밋빛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상당부분 희망적이기도 하다. ‘도둑고양이’라는 단어가 죽은말이 됐다는 사실에서 성선설을 감지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길고양이’가 등재된 것이 불과 4년 전이다. 반려동물 가운데 30%를 차지한 고양이가 언어생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 셈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인구가 늘수록 길고양이의 안전은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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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7 17:55

[타향에서] 백석 시인과 김영한의 거룩한 사랑

살랑살랑 봄바람은 온 누리에 꽃을 피우고, 뽀송한 생명들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피우는 봄날, 아름다운 순정을 전한다. 일제 강점기 때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많은 여성들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기생 김영한 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않은 절절하고 가슴 뭉클한 사랑을 나누었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어느 날 회식 자리에 갔다가 기생이던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잘생긴 얼굴에 로맨티시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서 손을 잡으며 하는 말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 까지는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요” 라며 진심을 전한다. 이후 백석은 이백(당나라시대 시인)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반해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부모님께서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혼사를 치르게 한다. 그러자 백석은 첫날밤 집을 나와 연인 자야에게로 간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을 했다. 자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이 백석의 장래에 누가 된다는 염려로 단호히 거절을 하였다. 할 수 없이 백석은 혼자 만주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 자야를 기다리며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를 짓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를 사랑하고/눈은 푹푹 내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다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힌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출출이 흐르는 깊은/산골로 가 살자/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면/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이야기 한다/산골로 가는 /아름다운 나타샤는/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힌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응앙응앙 울 것이다. 그러나 간절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백석은 자야를 찾아 함흥으로 왔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3.8선이 그어지고, 이어서 6.25 전쟁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이후로 백석은 평생을 홀로 자야를 그리워하며 살다가 북에서 1996년에 운명(殞命)한다. 서울에서 살던 자야(김영한)는 대한민국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부를 이루며 성장을 거듭하였다. 훗날 자야는 시가 1,000억 원 상당의 대원각을 아무 조건 없이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하였다. 그 대원각이 현재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吉祥寺)다. 자야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폐암으로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에 어느 날 기자가 물었다. “1,000억 원의 재산을 시주한 게 아깝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000억 원의 재산은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 합니다” 라고 했다 한다. 평생 동안 백석을 절절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순정으로 살아 왔던 것이다.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뿌려 달라” 고 하였다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을 죽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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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30 18:36

180만 전북도민 염원에 응답할 시간이다

결국, 제자리다. 윤석열 정부의 일방통행식 의대정원 증원은 채 아물지 않은 깊은 상흔만을 남긴 채, 실패로 귀결됐다. 대책은 손바닥 뒤집듯 번복됐고, 대화와 협의는 실종됐으며, 원칙은 무너졌다. 정부는 목적지는 알았지만, 그곳에 다다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살리겠다던 공공·필수·지역의료는 오히려 송두리째 무너졌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취약한 의료체계의 민낯 앞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불안과 염려는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이제 갈등의 늪에서 나와, 다시 미래로 향해야 할 시간이다. 제대로 ‘진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확한 ‘처방’ 이다. 의료개혁의 첫 단추를 다시 꿰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방이 직면한 처참한 현실과 마주하면, 과연 우리의 의료체계는 선진국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민간 위주의 의료공급으로 공공의료 기반이 취약해, 언제라도 집단 사직 등 갈등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 있다. 자원과 인력 편중이 심각하고, 특히 응급, 심뇌혈관 질환, 고위험 분만 등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의 지역 내 자체 충족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때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서글픔만을 삼킬 수는 없다. 필요한 곳에 의사가 있어야 한다. 의대정원 증원의 최우선 목적은 공공·필수·지역의료의 확충이 되어야 한다. 아프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차별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국민의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위한 보편적 공공보건의료의 요람, 그 최전선이 공공의대의 역할이다. 공공의대를 통해 배출되는 의료인은 지역별 격차를 줄이고, 수익성이 낮은 필수의료 분야의 공백을 해소하는 선봉이 될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무너진 외양간에 이대로 방치한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공공·필수·지역의료가 처한 작금의 위기 앞에 또다시 비겁하게 침묵한다면, 상처는 곪고 곪아 대한민국을 치유 불가능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2018년 서남대 폐교에 따라 당시 당·정 합의사항인 서남의대 정원 49명을 활용한 공공의대 설립은 기울어진 불균형을 바로잡고, 필수과목의 인력 확보, 감염병·재난대응 구축 및 의료의 공공성을 이루는 한걸음이다. 차분히 준비 해왔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이 복지위를 통과했지만, 정부와 여당의 반대로 안타깝게도 목전에서 좌절됐다. 그사이 남원은 부지의 50% 이상을 매입했고, 전북은 공공의대 유치지원 특별위를 꾸렸다. 더불어민주당은 작년 6월, ‘공공의대법’ 당론 추진을 발표했다. 70여명이 넘는 의원들이 힘을 모았다. 여야와 정쟁에 가둘 일이 아니다. 정치적 소모와 갈등을 뒤로 하고, 국민의 생명 앞에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공공의대는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인력을 배치하는 일이다. 그저 학교 하나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계가 나아갈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물꼬를 트는 일이다. 개혁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시대적 책무를 받들고, 남원시민뿐 아니라 전북특별자치도민과 지리산권역 의료취약지역 주민의 염원을 이뤄야 한다. 이제, 국회가 180만 전북도민의 염원에 응답할 시간이다. 박희승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남원장수임실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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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27

「제다움」과 「나는 반딧불」 단상斷想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사에는 인생의 온갖 애환이 녹아 있다. 송대관의 트로트 「유행가」에도 “유행가 노래 가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라는 구절이 있지 않은가. 간혹 어떤 사람이 우연히 어떤 가수의 노래를 듣고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아 그의 광팬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가령 진성의 트로트 「보릿고개」의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라는 가사에는 50~60년대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애간장을 녹이던 부모들의 깊은 슬픔이 오롯이 담겨있다. 내가 요즘 꽂혀 있는 노래가 두 곡 있다. 페이스북 프로필에 번갈아 공유할 정도로 즐겨 듣는다. 하나는 「홀로 아리랑」과 「개똥벌레」를 작사·작곡한 한돌의 「제다움」. ‘제다움’은 표준어는 아니지만 ‘자기다움’의 준말. 노래 내용은 마치 꽃은 꽃으로 살고, 나무는 나무로 사는 것처럼 나는 나였으면 좋겠고 너도 너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돌은 진영논리의 블랙홀에 빠져 서로를 헐뜯기에 바쁜 세태를 점잖게 꼬집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감히 손에 꼽는 음유시인답다. 또 하나는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 내용은 ‘나는’ 개똥벌레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른 채 한때 하늘에서 떨어진 빛나는 별로만 생각했다는 것. 개그우먼 안영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황가람을 초청해 대담을 나누면서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자신의 노래라고 생각해서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는 게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한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오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너무 기고만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에도 「나는 반딧불」의 ‘나’를 빼닮은 벨레로폰이라는 코린토스의 왕자가 있었다. 그는 실수로 동생을 죽인 뒤 조국에서 추방당해 티린스의 왕 프로이토스에게 몸을 의탁했다. 얼마 후 왕비 안테이아가 궁전에서 우연히 벨레로폰을 보고 첫눈에 반해 구애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하자 남편에게 오히려 벨레로폰이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그를 모함했다. 프로이토스는 아내의 말만 믿고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하지만 손님을 죽였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다. 궁리 끝에 그는 벨레로폰을 죽여달라는 내용의 밀봉한 편지와 함께 그를 장인이자 리키아 왕 이오바테스에게 보냈다. 편지를 읽은 이오바테스도 손님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는 게 두려워 위험한 과업을 주어 벨레로폰을 자연스레 해치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보내준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힘든 과업을 3개나 완수하고, 길목에 매복해서 자신을 급습한 왕궁수비대마저도 몰살했다. 이오바테스는 그제야 벨레로폰에게 편지를 보여 주며 용서를 구했다. 진실이 밝혀지자 이오바테스는 벨레로폰에게 작은딸을 주고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때까진 벨레로폰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으스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어느 날 신들의 왕 제우스와 식사하고 오겠다며 페가소스를 타고 올림포스 궁전을 향해 날아갔다. 분노한 제우스가 재빨리 쇠파리를 날려 페가소스의 궁둥이를 물게 했다. 놀란 페가소스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자 벨레로폰은 그 충격으로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잘나갈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인간이 정상에 올랐을 때, 신은 오만이라는 깊은 함정을 파놓고 시험한다. 거칠 것 없는 인간에게 오만은 꿀처럼 달콤한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나게 오만을 만끽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추락한다.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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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26

원동산공원 의견상, 오수개와 다르네

지난 2월12일 이 코너 ‘타향에서’를 통해 오수개 이야기를 했다(‘오수개 있음에 임실이 있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서 잠이 든 사이 불이 나자 개울을 오가며 제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살리고 죽은 개다. 오늘 한 번 더 오수개, 정확히는 오수개 동상을 이야기한다. 남원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우리집은 남원 시내보다 임실군 오수면과 더 가까웠다. 오수개의 사연을 일찌감치 접할 수 밖에 없었다. 오수개 복원의 첫 걸음으로 1996년 오수견연구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성장기에 오수개의 강렬한 스토리가 뇌리에 각인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오수개를 부활시켰다. 과학은 기본이고 미(美)까지 탐구했다. ‘목적에 적합하도록 완성된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충실했다. 처음부터 막연하나마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했다. 국제축견연맹(FCI)의 원산지 기준을 과정과 단계마다 엄격히 적용했다. 중후하고 믿음직한 오수개는 그렇게 부활했다. 역사에서 현실로 실체를 드러낸 오수개, 복원된 오수개는 그러나 시빗거리도 들고 왔다. 바로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22번지 원동산 공원의 의견상이다. 고증과 유전학으로 육종해 낸 오수개와 의견상의 오수개 모습이 딴판이기 때문이다. 오수JC 심재석 전 회장이 특히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이다. 이 의견상은 1997년 세워졌다. 오수개를 되살려 내기 전이다. 동상 오수개가 실물 오수개를 닮지 않은 이유다. 상상으로 만든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귀와 갈기털 등 오수개와 다른 구석이 많다. 게다가 너무 높은 곳에 동상을 설치한 바람에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기는커녕 기념촬영을 하기에도 불편하다. 동상을 실제 오수개 형태로 다시 빚고, 명칭도 ‘의로운 오수개’식으로 새로 붙임직하다. 동상은 ‘그까짓’ 게 아니다. 동상은 일방적, 무조건적 긍정이다. 본받아야 마땅할 대상만 동상으로 제작해 기린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동상이다. 따라서 동상은 사실과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기존의 의견상은 오수개의 상징성을 웅변하기에 부족하다. 동상을 보고 받은 감동과 교훈을 살아있는 오수개에게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수개의 감동적인 충의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미덕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과 사랑에 빠졌다. 극진한 사랑에 감동한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여성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간절하면 하늘도 돕는 법이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효과’를 오수개 동상에 원용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새로운 오수의견상에는 ‘불끄는 개’의 이미지가 추가됐으면 좋겠다. 119구조견, 그 가운데서도 소방견으로 오수개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화재예방협회(NFPA)의 달마시안종 소방견 ‘스파키’처럼 오수개도 글로벌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수의견문화제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심민 임실군 군수의 적극행정 덕분에 해를 거듭할수록 알이 꽉꽉 차는 행사다. 올해는 더욱 성황을 이룰 것이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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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9 18:28

서울에서 만난 전북- 권율 장군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 장군께서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쓰신 글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낸 덕분입니다. 군량미를 지켜냄으로써 왜군이 식량을 조달할 수 없게 만들어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이지요. 당시 호남을 지켜낸 싸움이 이치전투와 웅치전투입니다. 충무공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영화 ‘한산’에 웅치전투가 등장하는 이유이지요. 웅치·이치 전투는 1592년 음력 7월 완주와 금산의 경계인 배고개(梨峙)와 전주와 진안의 경계인 곰치(熊峙)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치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웅치는 임시 전라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이 지켰습니다. 조선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 결국 호남을 지켜냈습니다. 왜군을 몰아낼 토대를 마련한 것이지요. 이후 권율 장군은 수원을 거쳐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군대를 움직입니다. ‘평양성에서 패한 왜군이 전열을 정비해 대규모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수적으로는 열세에 놓여 있었지만 지휘관인 권율 장군을 필두로 똘똘 뭉쳐 사기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참을 싸우던 중 화살이 떨어지자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랐다. 왜군에게 돌팔매질이라도 하는데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왜군을 물리쳤다. 그때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후 행주산성이 어디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판문점 가는 길 쪽에 있다던데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요. 그쪽으로는 산성을 쌓을 만큼 높은 산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원검찰청을 떠나 고양검찰청에 근무하게 되면서 행주산성의 위치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명성에 비해 성의 규모가 너무 작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고양쪽으로 가다 보면 한강변에 외롭게 떠있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습니다. 바로 덕양산이지요. 그 얕고도 조그마한 산에 행주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행주산성을 올라가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높이는 125미터에 불과하지만 천혜의 요새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우선 3면이 강과 늪,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니 군사가 진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북쪽 능선뿐인 데다가 이곳도 좁디좁아 한꺼번에 대규모 병력이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저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격퇴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권율 장군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또 한군데 있습니다. 사직공원과 독립문을 연결하는 사직터널 위쪽 산기슭에 있는 장군의 집터입니다. 지금은 집 대신 500여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덕분에 동네 이름도 은행나무 동네, 즉 행촌동(杏村洞)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은행나무 아래라고 합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학문이나 학교의 상징으로 여겨져 향교나 문묘에 심었다고 합니다. 또 선비가 살던 집이나 별서 혹은 마을의 입구에도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요. 햇살이 좋은 날 행촌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선비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걸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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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8 15:43

십승지(十勝地) 운봉고을

역사적으로 전쟁,재해,질병이 없고 거주환경이 좋은 조선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십승지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해발450-550m)이다.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가장리(법정리명은 덕산리)다. 마을뒤엔 큰 저수지가 있다. 용왕님이 있다는 검푸른 저수지는 두려움이 있던 곳으로 나에게는 신성한 경외심으로 다가와 용왕님께 두손모아 간절히 소망을 빌었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봄이 오면 수리조합 직원들이 와서 거대한 수문을 열었다. 한번은 친구와 나는 저수지 아래 작은 방죽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굉음에 놀라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폭포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주변을 삼켜버릴 듯한 포악스러운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친구와 나는 두려움이 엄습해 낚시를 포기하고, 먼 발치에서 수로를 따라 넘실대며 도도하게 흐르는 물살의 위용에 넔을 잃고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리조합 직원들의 안내를 미리받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께서는 큰 축복을 받으신 듯 물길을 내느라 분주히 다들 소란스러웠다. 논에 물이 잠기자 이곳저곳에서 누렁소를 이끌고 논갈이가 시작되었다. 한해의 농사가 물의 공급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수지 물은 벼농사를 위해 겨우내 움크리고 추위를 견디며 봄날을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둑방은 아득한 높이여서 친구들과 자주 선착순 경쟁을 했다. 도착하면 가슴은 터질 듯이 숨이 차오르고 수평선을 바라보면 물결은 우리들을 포근히 품어주던 엄마같은 존재였으며 용왕님이 깊은 곳에 있다는 신비를 동경헀었다. 부드러운 물결은 투박한 우리들 마음을 어루만저 주고 푸른 꿈을 심어 주었다. 둑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은 넓은 들녘을 철갑산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전란에서도 우리를 보호하는 요새였고, 평야는 오곡백과로 풍성해 살기좋은 낙원이었다. 성심으로 땀흘리시며 사셨던 선조님과 부모님 세대의 지혜와 삶이 있었기에 미래를 향한 우리들은 도전할 수 있었고 나래를 펼수 있었다. 좋은 환경의 양분은 오늘날 곳곳에서 소금되고 빛이되는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 말할 수 있다. 여름이면 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며 여울목 막아 가물치,쏘가리,피라미,메기,붕어,미꾸라지,모래무지,가재등을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지는 무렵에야 각자 집을 향해 달음박질 하며 짧은 하루를 보내며 지냈다. 가을날엔 오고가며 길목에서 단감,오이,토마토,자두,복숭아,무우,당근등을 살며시 취해 인적드문 곳에서 깔깔대며 철없는 만찬을 즐기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림없는 얘기다. 당시엔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눈감아 주셨다. 때론 무서운 주인을 만나면 크게 혼이 나고 부모님까지 난처하게 한 상황도 있었다. 겨울이면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형들이 발자국 내어 주면 그곳을 밟으며 등교를 하였다. 운봉고원은 고지가 높아 추위가 매섭고, 눈보라 치는 날이면 온몸이 꽁꽁얼어 교실 공탄 난로의 따뜻함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두려움의 저수지도 작은 호수에 불과하고 마을, 저수지둑방,학교길,개천,정자나무,뒷동산등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낡고 왜소해진 모습으로 변해있다. 1년에 한두번 방문하면 필자를 알아보시는 고령의 어르신 몇분이 계신다. 힌머리에 굵은 주름과 구부정한 세월의 낙관(落款)을 볼 때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알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낀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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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2 18:05

몽당연필과 책보

나는 샤프펜슬이 아니라 연필 세대다. 연필심을 보관통에 집어넣고 맨 위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자동으로 심이 조금씩 나오는 샤프펜슬과는 달리 연필은 칼로 직접 끝자락을 깎아야 심이 나왔다. 이를테면 샤프펜슬이 디지털이라면 연필은 아날로그였던 셈이다. 내 기억으론 그때 난 친구들과 연필을 가장 빠르고 예쁘게 깎는 시합도 벌였다. 난 아직도 책을 읽으면서 책장에 뭔가를 기록해두거나 노트에 요약할 때 연필로 써야 마음이 편안하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칼 대신 연필깎이를 쓴다는 것. 모든 게 귀했던 국민학교(!) 시절 우린 새 연필이 생기면 닳고 닳아 몽땅하게 될 때까지 써야 했다. 심지어 연필이 엄지와 검지로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짧디짧은 몽당연필이 되어도 머리 부분을 칼로 다듬어 어렵사리 구한 볼펜 몸체에 끼워서 썼다. 가수 마이진의 노래 <몽당연필>에서 “닳고 닳은 인생이라 비웃지 마소”와 “내 목숨이 줄어드는 줄도 모르고”라는 가사가 애틋하게 귀에 착 꽂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몽당연필’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과 애환이 오롯이 담겨있는 단어가 바로 ‘책보’다. 그 시절 우리 소꿉친구들 사전辭典엔 ‘책가방’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우린 등교 전날 저녁이나 당일 아침에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보자기를 펴놓고 그 위에 수업에 쓸 책들과 공책들을 대각선으로 놓은 다음 둘둘 싸서 방 한쪽에 챙겨놓았다. 우린 그 책 다발을 ‘책을 싼 보자기’의 줄임말인 ‘책보’라 불렀는데, 이럴 때 ‘책보’는 당연히 ‘책가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책보’는 그냥 ‘보자기’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보자기조차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어렵사리 보자기가 생기면 으레 책보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당시 책보를 꾸릴 때 가운데쯤에는 필통을 넣었고, 둘둘 만 보자기 끝자락은 풀어지지 않도록 오삔(!)으로 고정했다. 이어 부리나케 아침밥을 먹은 후, 어떤 친구는 책보를 마치 벨트처럼 허리에 두른 채, 어떤 친구는 마치 검객이 칼을 메듯 대각선으로 어깨에 멘 채 대문을 나서자마자 학교를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 책보를 열면 필통 속 연필심은 이미 부러져있기 일쑤였고, 가끔 책보에 도시락을 함께 쌌을라치면 책들과 공책들이 모두 김칫국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린 다음 날 아침도 어김없이 무조건 달려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업 전에 연필을 깎느라 바빴다. 그때 우리가 왜 그렇게 무작정 뛰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늘 그렇듯 힘이 넘쳤거나, 얼른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놀 생각에 마냥 신이 났기 때문이리라. 혹은 그냥 좋아서 그랬으리라. 어린 시절은 그저 바람만 불어도, 비만 와도, 눈만 내려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순진무구한 때가 아니었던가? 선물 보자기를 보면 불현듯 어린 시절 책보를 메고 신작로를 질주하던 내 모습과 더불어 또 다른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때가 되면 엄마가 내게 책보를 가져오게 하여 가운처럼 내 목에 두르고 바리깡(!)과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시던 장면이다. 궁핍한 시대였는지라 설 명절 등 특별한 날 외엔 자식들을 이발소에 보내지 못했기에 집집마다 생긴 진풍경이다. 내가 4남 2녀 중 막내라서 엄마의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못한 덕분일까? 내 생각엔 당시 엄마의 바리깡과 가위질 솜씨는 단연 우리 동네 최고였다. 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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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6 18:47

서울에서 만난 전북- 백정기 의사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서울서부지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청사 뒤쪽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았지요. 바로 효창공원입니다.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리던 곳이었지요. 일제 강점기 왕실 무덤은 고양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했고, 대신 골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효창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추모 시설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김구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도 모셔져 있지요.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묘역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바로 ‘삼의사묘’입니다. 삼의사(三義士)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을 말합니다. 부끄럽게도 당시 저는 윤봉길, 이봉창 두 분은 알았지만 백정기 의사는 잘 몰랐습니다. 설명판에는 백의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전북 부안 출신으로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 운동과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이끌었고,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암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6월 5일 순국하였다.” 당시만 해도 저는 ‘무정부주의자 운동’라던가 ‘일본 공사 습격 사건’ 같은 내용들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이회영, 박열, 백정기 선생 같은 분들이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백정기 의사는 1896년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902년 정읍시 영원면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지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19세 때인 1914년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러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계속 무장 투쟁의 길을 걸었지요. 1924년 일본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 시도, 같은 해 일본 천황 암살 시도, 1932년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 1933년 홍커우 아리요시 일본 공사 습격 시도 등이 그것입니다.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는 윤봉길 의사가 성공했던 바로 그 사건과 같은 사건입니다. 당시 백 의사도 일본군 사령관 암살 등을 노리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에 ‘삼의사묘’가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46년 일본에서 순국하신 세 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46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세 분을 효창원으로 모신 것이지요. ‘삼의사묘’ 옆에는 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묘이지요. 하지만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유해를 찾지 못해 현재는 가묘 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 주기 바라오.’ 백 의사의 유언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이 의사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덕분에 자주 독립된 나라에서 사는 우리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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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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