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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노예

한강의 기적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급성장과 함께 그 속도와 성취감에 중독된 느낌이 든다. 물론 중독자체는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속도중독과 성공집착은 우리국가에 대단한 경쟁력을 가져다주며 어마어마한 원동력을 제공해준다. 허나 이에 의한 사회적 부작용도 무시하지 못한다. 부작용의 증상은 세계 자살률 2위와 낮은 행복지수로 뚜렷하게 진단되어있고 다양한 사회부문에서도 고통의 자국은 선명하다. 딜레마다. 자연자원이 희박한 우리나라로서는 인간자원을 최대로 활용해야하고 선진국의 문턱으로 들어섰다고는 하나 앞으로 해결해나갈 과제들이 무겁게 우리 어깨를 누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지속적이고 발빠른 발전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행복을 지켜나갈수있을까? 사회와 개인의 진화가 동시에 진행돼야 올바른 해법이 나오지않을까 싶다. 만약 지금 나날이 거론되고 있는 사회복지가 사회적 진화의 열쇠라면, 개인적 진화의 핵심은 바로 교육에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마다 느끼는 어려운 점이 있다. 질문을 해야할 때 또는 받았을 때 발언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배움의 장에서 자기 의견이나 질문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은 학생이 갖춰야 할 기본적 태도이며 이런 습관의 연장선에서 토론식 교육이 가능해진다. 동료 앞에서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연습은 초등교육 시절부터 진행돼야 하며 그 연장선상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토론식 수업이 진행돼야 한다. 토론식 교육의 장점은 주어진 정보를 접했을때 동료들과 다양한 각도의 해석 및 견해를 교환하며 그 정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을수있다는 점과 토론의 절차를 통하여 자기와 다른 가치관를 가진 자에 대한 존중 및 공감하는 법을 배울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한 사립초등학교에서는 학교등급이 하위 25퍼세트권에서 못 벗어나자 교사들이 회의를 열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행해보자고 결정한다. 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해리 포터 소설을 바탕으로 교재를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해리 포터 소설의 캐릭터로 변신해 학교에 등교했고 선생들 또한 책안의 캐릭터로 수업을 운영해 나아갔다. 영어는 해리 포터 책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연극을 창작하고, 수학은 책 안의 마술들을 응용해서, 체육은 소설 속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스포츠 퀴디치를 응용하여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매 학기마다 아이들에게 다음학기의 테마 선택권을 주었다. 해리 포터 다음에는 타이타닉, 아프리카, 왕자와 공주 등등의 테마로 커리큘럼을 매학기 갱신했다. 결과는 경이로웠다. 단 3년만에 이 학교는 하위 25퍼센트권에서 상위 5 퍼센트권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입학 희망자들이 넘쳐나는 엘리트 학교로 탈바꿈 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아침일찍 등교해서 학과목들을 공부하고 방과후 사교육 시스템에서 늦게까지 다시 공부를 하고 귀가한다. 그리고 학부형들은 시험통과를 최우선시 하는 사교육 시스템에 엄청난 경제적 자원을 투자한다. 이런 환경속에서 학생들은 시험을 잘 치를수있는 기술을 전수받으며 지식을 공식으로 축소하는법들로 노트를 채운다. 학부형들은 학생들 못지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경제적 부담을 실감하고 삶의 선택들을 후회한다. 과연 창의력을 외치는 이 시대에 걸맞는 인재들을 이런 시스템에서 배출해 낼 수 있을까? 감성이 풍부하고 시대와 공감 할 수 있는 리더들을 탄생시켜 낼 수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학생들을 지식의 노예로 감금하고있다. 이제는 학생들이 지식의 자유인이 될수있도록 풀어주어야 할 시기다. 그래야지만 지식의 마스터가 될수있는 가능성을 제공할수 있다. 한국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한국의 성공과 행복의 열쇠는 바로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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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7 23:02

대제학도 양보했던 선비정신

조선왕조 5백년은 선비정신으로 버텼던 나라였다. 여러 차례 국난을 당했었고, 임진병자의 양란에는 사실상 국가가 망하기 직전에 이른 참혹한 형편의 나라였다. 그러나 망하기 직전의 나라는 다시 살아나 무려 500년의 긴긴 세월을 견뎌냈었다. 그렇게 버텨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여러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하나만 든다면 바로 조선민족의 선비정신이었다. 국난에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건져내야겠다던 선비정신, 자신의 몸보다는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선비정신,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아도 한 가닥 양심과 도덕성만은 버리지 못한다던 선비정신, 모두와 함께 살고 기쁨과 슬픔도 남과 함께 나누자던 선비정신이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었고 나라가 그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때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상류층의 지성인들은, 오늘처럼 돈만을 위해서, 권력만을 위해서 염치코치 없이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만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많았었다. 조선시대의 그때로 가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선조 원년(1568) 8월 초하루의 기사에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는 기록이 있다. "이황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 이때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제가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이황도 힘껏 사양하여 오래지 않아 다시 벼슬이 교체되어 박순이 대제학이 되었다."라는 조선 선비정신의 본체를 나타낸 기록이 있다. 대단한 일이다. 500년 조선사에 아름답고 멋진 역사의 한토막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다.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은 일찍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제학에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역임한 학자이자 시인이던 큰 정치가였다. 박순은 하담 서경덕이 제자였지만 퇴계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도를 물었던 선비였다. 선조 원년은 퇴계 68세, 사암 46세의 시절, 박순의 양보가 없었다면 70세로 세상을 떠나는 퇴계의 이력에는 대제학이라는 그 찬란한 벼슬이 없었지 않겠는가. 정승의 지위보다야 아래이지만, 세상에서 알아주고 높이 여기는 벼슬이 대제학이었다. 그런 벼슬을 선배 학자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선비 정치가 박순의 아름다운 행위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미화할 수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사양하고 양보할 줄 알던 선비 퇴계 때문에 박순은 바로 대제학에 오르지만, 이런 사양과 양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선비정신인가. 수십억을 공천헌금으로 상납하고라도 결단코 국회의원을 해야겠다는 사람, 친구고 선배고 스승이고를 무시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이 고관대작이 되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과는 그때의 선비들은 분명히 달랐었다. 나만이 대통령 자격이 있지 다른 어떤 사람도 대통령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결코 양보 없이 끝까지 완주해야 되겠다는 요즘 사람들과는 그때의 선비들은 많이 달랐었다. 이런 말세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에게 양보한 안철수 교수의 선비정신은 대단했다. 선배에게 기꺼이 양보한 그런 멋진 모습이 지금도 그립다. 온 세상이 후보 경선으로 자기만이 최고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세상, 사양하고 양보해서 진짜 선비가 후보로 선정되어 국민의 심판을 받는 그런 미덕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인지. 사암 박순의 아름다운 양보가 이런 시절에 생각나는 이유는 무슨 이유일까. 대제학을 양보하니, 다시 또 대제학이 되돌아왔던 그때 일이 잊히지 않음은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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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0 23:02

도그 데이즈(Dog Days: 삼복 더위 때)

서양에서'도그 데이즈(dog days , 직역: 개같은 날들)'는 여름 중 가장 덥고 습기가 많은 날을 뜻한다. 더위가 계속되는 요즘 잠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아침 그 자체가 고통과도 같다. 어떤 일도 하기 싫을 정도의 고통스런 열기와 높은 습도 때문에 온 몸의 힘과 에너지가 쏙 빠져나갈 정도다. 이런 날씨와 맞서기 위해선 산으로 여행을 떠나 시원한 개울가 다리 밑에 눕는 게 상책인 듯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개고기를 먹는 일로도 더위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엉터리 주장이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개 같은 날들'이란 의미는 한국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수세기를 걸쳐 오면서 아주 더운 여름 날 동양의학에 따라 몸의 열을 식히고 여름에서 기를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말이다.근래 들어 부쩍 나의 절친한 친구들이 함께 영어로 '도그(dog-개)'를 먹으러 가고 싶은지 물어왔다. 당연히 영어로 들어도 그것이 길에서도 사먹을 수 있는 핫 도그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데에 부정적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얘기하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몇 차례 이미 개고기를 먹은 바 있으며 그걸 먹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늘 집에서 친구와 가족과도 같았던 개들과 살아온 내가 이렇게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내 한국인 친구들과 외국인 친구들이 더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그래서 말인데 나는 정말 개들을 사랑하며 다른 동물들 역시 사랑한다. 내 어린 시절엔 토끼며, 새들이며 다양한 다른 동물들과 한집에 살았었다. 나는 그들을 무척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작은 토끼가 얼마나 예쁜지 알지만 그와 달리 맛있는 토끼 요리가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 있다. 작은 돼지는 또 얼마나 귀여운가. 큰 눈망울의 어린 송아지는 또 어떻고? 그러나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을 먹으면서 단지 개고기를 먹는 것을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내 유년시절을 언급했듯이 개와 인간 사이에서는 깊은 연대감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보는 동물이라고 해서 먹을 수 없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내가 개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 이유는 좀 더 맛있는 고기를 만들려는 의도로 개들에게 고통을 주며 죽이진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개고기는 일반적인 다른 육가공품과 달리 정확한 취급 법규 등에 의해 통제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사육하고 도살해야 하는지 모른다. 어떤 규제도 없이 고기를 얻거나 육질을 좋게하기위해서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것이 걱정이 든다. 2002년 한 월드컵이나 다른 외국 기관이나 단체들이 개고기 소비를 금지토록 하려는 요청이 있어왔음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그들의 그러한 요구에 몹시 화가 났었다. 내가 개고기를 먹고 또 먹어야 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요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고 다른 나라의 음식문화에 대한 무지에 의한 간섭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슬람 국가의 기관들이 그들의 종교 때문에 런던올림픽 기간 동안 국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영국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 요구는 아마 영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항의와 격노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개고기를 금지시키는 일은 항의의 불꽃을 일으키진 못했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고개를 숙이며 식당들을 숨기는데 급급했다. 동물보호와 종 보존을 위해 고래를 포획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되자 포장마차와 특수한(?) 식당의 테이블 위에 그 고기들이 놓여 있게 되었다. 고래, 개 말고 다른 동물은 국제적으로 보호해야할 종이 아닌가? 작은 뒷골목 어딘가에서 숨듯이 비밀리에 먹어선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삼복 더위 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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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3 23:02

모두가 공무원·교사 되어야 하나

필자는 어렸을 때 매달 25일을 그리도 기다렸다. 그날은 평소 잘 먹어보지 못하는 생과자를 먹게 되는 행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매달 25일은 평생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의 월급날이었다. 아버님 월급날만 되면 온 식구들이 밤늦게까지 눈 빠지게 아버님을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식들은 아버님이 사오시는 생과자를, 어머님은 아버님의 월급봉투를 기다리셨다.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면 여간 손해가 아니었기에 어떤 때는 밤 12시 까지 두 눈을 비벼가면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리도 기다리던 아버님이 오셔서 생과자를 풀어놓으면 5명이나 되는 자식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러나 어머님은 누런 월급봉투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세시고 나서 항시 한숨만 내쉬시고, 멋쩍으신 아버님은 우리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절대 공무원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우리 5남매 중 필자를 포함하여 3명이 아직도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피할 수 없는 집안의 팔자라는 생각이 든다. 한 때는 기피직업이었던 공무원이 이제는 선망의 직업이 되었으니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필자가 지난 4월 전라북도 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자녀들이 어떠한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지를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아들과 딸의 선호 직업은 각각 달랐는데 아들의 경우는 공무원이, 딸은 교사가 가장 많았다. 먼저 아들의 경우 공무원이 22.7%로 가장 선호되고 있는 직업이며, 이어서 의사가 10.1%로 두 번째, 사업가가 9.9%로 세 번째로 많이 지적되었다. 이밖에 교수(9.4%), 외교관(7.6%), 법조인(5.3%), 과학기술자(4.6%), 회사원(4.1%), 교사(3.8%), 언론인(3.0%) 순으로 많이 지적되었다. 딸의 경우는 4명중 1명꼴인 26.6%가 교사를 가장 선호하였으며, 공무원이 15.0%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이밖에 약사(8.0%), 간호사(6.0%), 은행원(4.0%), 디자이너(4.0%), 교수(3.8%), 외교관(3.5%) 순으로 많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20년 전인 1992년, 그리고 1998년 조사와 비교해 보면 전북도민들은 20년 동안 일편단심 공무원과 교사만을 고집하였는데, 아들의 경우는 20년 동안 오직 공무원만을 선호하였다. 딸의 경우에도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높아진 점이 두드러졌는데, 20년 전에는 선호도가 6.9%로 5위, 1998년엔 10.2%로 3위였다가 올해 15.0%로 2위로 뛰어 올랐다. 아들의 직업에서 과거에 비해 운동선수가 10위권 밖으로 내려가고, 언론인이 새롭게 순위권으로 등장한 점이 눈에 띈다. 딸의 선호 직업은 아들에 비해 과거와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연예인, 언론인, 회사원 등의 직업이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새롭게 은행원, 디자이너, 외교관 등의 직업이 10위권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면 당사자들인 자녀들의 생각은 어떨까? 며칠 전에 발표된 아르바이트 전문포털 알바천국이 전국 13세~18세 청소년 1027명을 대상으로 '청소년 장래희망 직업'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면 부모의 생각이나 자녀들의 생각이 거의 똑같다. 청소년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장래희망 직업은 교사(15.3%)가 1위를 차지했으며, 연예인(14.8%)이 2위, 공무원(13.8%)이 3위로 꼽혔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남녀노소 모든 국민이 공무원과 교사를 선호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들 직업이 각광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직업이 안정적인데다, 봉급도 많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직업의 안정성과 보수만을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모든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직업에만 매달리고, 좀 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직업을 외면하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청소년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특기와 적성에 맞는 비인기 직업과 창의적인 직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도전의식을 키워주는 다양한 진로 교육이 필요하고, 정부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실패하는 젊은이들을 지원해주는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 하겠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스티브 잡스를 공무원과 교사로 잡아두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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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7 23:02

영웅의 길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은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 1802년에 하나의 악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1803년에 서양음악사의 전환기를 장식할 곡을 창조한다. 이 곡의 원고 첫장에는 겸손하게 필기된 작곡가의 이름 위에 '보나파르트 헌정' 이라고 굵은 글씨로 표기 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곡품이 초연될 3개월 전인 1804년 5월, 프랑스 혁명의 집정이었든 나폴레옹이 자기자신을 황제로 공포하고 나서자, 여기에 배신감을 느낀 베토벤은 원고 위의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종이가 찢어지도록 긁어 지웠다고 한다. 결국 이 곡은 1806년 '영웅 교향곡(Eroica Symphony), 위대한 인간의 기억을 기념하며' 라는 곡명으로 출판됐다. 에로이카(Eroica)는 이태리어로 '영웅적' 이라는 뜻을 지니는 단어다. 영웅의 의미를 사전에서는 '위험과 불우에 처한 또한 약자의 입장에서 전인류의 안녕을 위해 용기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정의로운 일을 하는 자' 라고 되어있다. 이 뜻은 원래 군사적인 용감한 행위와 관련돼 사용 됐으나 근대에는 도덕적 고결함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허나 사실 어느 인물이 사회에서 영웅적 지위로 우상화되기 위해서는 위의 면모 뿐 아니라 뛰어난 능력과 통찰력 있는 시대정신까지 갖춰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영웅이 완벽하길 기대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을 이룩해 영웅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프랑스혁명은 그가 나타나기 전 벌써 진행중이었다. 미라보,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등 각자 다른 사상을 가진 혁명가들에 의한 연쇄적 사건들이 축적되고 있었으며, 1799년 혁명 막판에 나타난 나폴레옹 장군은 쿠데타를 성공시켜 혁명의 절정을 찍는다. 여기서 그는 이런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이제 혁명의 로맨스를 마쳤으며 지금부터 혁명의 역사를 시작해야만 한다."프랑스 전 국민의 공공이익을 존중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질서 있는 정부를 창립한 나폴레옹은 그 후 나폴레오닉 전쟁이 벌어질 동안 프랑스를 방어하며 군주국들의 연합군 공격에서 승리를 거듭하면서 프랑스를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패배한 나라들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전파하는 일에 충실했다. 시대는 나폴레옹의 능력을 필요로 했고 그는 기꺼이 이 도전에 응했을 뿐만아니라 이를 능가하며 시대의 영웅이 된 것이다. 한편 베토벤은 비슷한 시기에 영웅 교향곡으로 음악세계에 혁신의 획을 긋는다. 영웅 교향곡은 그 전에 작곡된 어느 교향곡보다 길고 복잡했다. 1악장이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어느 교향곡 전체보다 길었으니 청중이 경악한 것은 이해가 간다. 초연 후 반응은 명확히 나눠졌다. 너무 복잡하고 난해해서 감상하기 어렵다는 시각과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시각. 두번째의 시각을 지지한 자들은 음악이 청중 중심의 엔트테인먼트 에서 작곡가의 예술적 가능성을 도전하는 매체로 진화했다고 주장했고 또한 청중의 책임도 이에 따라 순수한 즐김에서 공부를 통한 깨달음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은 이 행위를 통해 관습에 거대한 도전장을 내밀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명성을 희생하면서까지 예술적 숙명을 추구했던 것이다.여기에는 우리가 고려해아 할 심리적인 사실이 또 있다. 청각의 악화로 고통을 겪었던 그는 1802년 완치의 꿈을 버려야 된다는 현실에 처하고 절망에 빠진다. 그 때 작성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는 이렇게 써있다. "사람들에게 '귀가 잘 안 들리니 좀 더 크게 말해주세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더 민감 해야 될 감각이 약하다고 선언 할 수 있겠는가."작곡가로서의 필수의 능력을 잃어가면서도 사명감을 잃지않고 인류를 위한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 베토벤 또한 시대의 영웅이 아니겠는가? 1821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음을 맞이한 나폴레옹의 소식을 접한 베토벤은 말했다. "나는 이 슬픈 날을 위한 음악을 17년 전에 작곡해놓았다네."이것이 바로 영웅 교향곡 2악장, 장송행진곡이다.※박종화 피아니스트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최연소 입상, 최우수연주가상, 부조니 루빈스타인 산탄데르 등 국제 유수 콩쿠르에서 입상했으며 33세에 서울대교수로 임용돼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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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0 23:02

뇌물죄는 반드시 들킨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 '부패한 나라는 절대로 망한다'라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은 그냥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말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헌법에 의해 권력은 십년에 이르지 못하고, 5년에 그치 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권불5년이다'라고 본다면 권력의 무상함은 옛날의 일과 다르다. 상왕의 권력이라던 '영일대군', 최고 권력자의 멘토라던 '방통대군', 차관급이면서도 왕의 지위에 가까운 권력을 지녔기에 '왕차관'이라던 권력자들이 연달아 구속되어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세간의 이야기가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참으로 신통하기만 하다. 권불5년인데, 천년 만년 가리라고 위세당당하게 권력을 쥐락펴락하던 그들의 신세가 너무나 허망하게만 보인다. 국가를 대표하여 자원외교를 펼치면서 세계를 누비던 권력, 4대 종편을 허가해주면서 언론매체를 장악했던 권력, 모든 인사는 왕차관을 거쳐야만 이루어진다던 그런 권력, 그들은 모두 '뇌물'이라는 사슬에 걸려 막강한 권력이 힘을 잃고 옥창의 별빛을 바라보고만 있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는 '뇌물'과 무관한 때가 많지 않았다. 청와대 안방에서 뇌물을 챙겼다고 임기가 끝나자 두 전직 대통령(전씨노씨)이 뇌물죄로 처벌받은 것을 비롯하여, 대통령의 아들들이 대통령 재임 중에 구속 수감되어 뇌물죄로 단죄되었는가 하면, 가까운 친인척이나 최측근의 대통령 주변의 실세들이 처벌되었던 것이 한두번이 아닌데, 왜 그런 범죄는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은 천륜(天倫)의 관계다. 대통령의 아들도 뇌물죄만 확인되면 천륜도 어쩌지 못하고 구속시킬 수밖에 없는데, 여타의 친인척이나 실세들이라고 빠져나갈 어떤 길이 있겠는가.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는 말도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공직자들의 청렴만이 나라를 바르고 깨끗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그렇게도 역설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의 『목민심서』에서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어느 누가 비밀스럽게 하지 않으리오마는 한 밤중에 주고받은 행위라도 아침만 되면 벌써 소문이 쫙 퍼지게 되어 있다[貨賂之行 誰不秘密 中夜所行 朝已昌矣]라고 말하여 뇌물의 수수는 반듯이 들킬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거듭거듭 주장하였다. 권력은 유한하고 뇌물은 반드시 들키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범죄행위는 근절되지 않는 것인가. 이쯤 해서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단계가 아닐는지. 우리나라가 경제 강국이라고 떠들지만, OECD 가입 34개 국가 중에서 삶의 질이 낮기로는 32번째라니 할 말을 잊을 지경이다. 뇌물의 공화국이요, 부패의 공화국에 다른 어떤 명예가 있을 수 있겠는가. 뇌물죄를 규정한 형법을 손질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수억원, 수십억원을 받고도 뻔뻔스런 범죄자들은 끝까지 우기는 것이 '대가성'이 없음을 증명하느라 발버둥을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재판에서 대가성이 없다는 입증으로 무죄를 선고 받아 죄가 없음을 공인받는 경우가 잦다.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성 없이 그냥 수억, 수십억을 퍼줄 수 있다는 것인가. 국가의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마구 퍼주는 그런 일이 어떻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어떤 이유로도 권력자나 고위공직자는 돈을 받을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고, 일단 돈을 받으면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가성을 논하고 따지는 일 자체가 세상을 희롱하고 만인을 웃기게 하는 일임에 분명하다.나라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최고책임자는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 권력은 유한하고,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하는데, 입만 다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인가.※박 이사장은 교사출신으로 평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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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3 23:02

카스텔라 만들기

"코끝을 스쳐 숨이 나가고 코끝을 스쳐 숨이 들어옵니다. 호흡을 조절합니다."아침 햇살이 마룻바닥 깊숙이 들어오는 넓은 홀에는 조용한 인도 명상음악이 낮게 흐르고 그 사이로 선생님의 작은 목소리가 돋들린 뿐 정적이 가득하다. 창의 롤스크린 사이로 들어온 햇살은 내 이마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코를 어루만지고 다시 목으로 내려와 잠시 머물다가 복부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이내 내 작은 몸 전체를 휘돌아 나를 감싼다. 몸이 이완되어 있는 나는 햇살의 유혹에 대책 없이 내 모두를 내어주고 만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모두를 맡긴 채 반가부좌로 앉아 있다.초겨울의 아침햇살은 내 유년의 아침처럼 나를 평화롭게 한다. 나는 내게 스며든 햇살 자락을 보고 싶어 가느스름하게 눈을 떠본다. 햇살은 우측 창문 새로 들어와 홀 중앙에 앉아 있는 내게 사선으로 비치고 있다. 나는 그 햇살 줄기를 타고 어디론가 미끄러지고 싶어진다. 미끄러져 닿는 곳엔 아픔도 슬픔도 없을 거야. 햇살 가득한 고요함과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가 가득할거야.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가 보자.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가슴을 열어봅니다."요가 선생님의 멘트가 바뀌고 있다. 시선을 돌려 앞을 보니 낮은 단에 앉아 시범을 보이고 있는 선생님의 감은 눈과, 눈이 감겼으므로 더 야무져 보이는 입매가 눈에 들어온다. 엊그제 이곳을 방문했을 때 "처음이세요?"하며 웃던 선생님은 선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빛과 대조적으로 웃는 표정 뒤로 굳게 닫히는 입술이 문득 나를 쓸쓸하게 했다. 저 맑은 웃음 뒤에 감추고 있는 슬픔이 있단 말인가? 아니, 왜 나는 감추고 있는 슬픔을 읽어낸단 말인가? 어느 틈에 내게 스며들어온 습성이란 말인가? 기쁨이 가득 찬 사람은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의 그늘을 알아채지 못한다. 마음에 슬픔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슬픔이 절로 전이되어 오기도 한다. 타인의 기쁨은 그들의 소유일 뿐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의 정서와 동화될 수 없으므로 멀찍이 그들을 떼어놓고 싶어진다. 사실은 내가 슬금슬금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나를 들키고 싶지 않고 그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고 그들이 나를 이해해주는 것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도 모두가 싫다. 그래서 사실은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딸아이 방의 책상에 있던, 박민규의 소설 〈카스테라〉를 읽고 난 후 냉장고 안에 오롯이 남아있던 부드럽고 달콤한 카스텔라의 환영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작가는 그 맛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들과 사회에 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냉장고 안에 가둔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한 조각의 카스텔라만이 남아있다. 모든 것을 가두어 정화시켰을 때 한 조각의 달콤한 카스텔라가 되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몸을 기웁니다. 왼쪽 늑골을 좌악 펴서 사이사이를 넓힙니다."나를 감싸고 있는 이 아침햇살을 가두고 싶어진다. 순도 놓은 아침의 맑은 햇살을 내 안에 오롯이 가두어 들인다. 따스하고 포근한 햇살은 그대로 내 심장으로 직진해 들어온다. 빛바랜 오만과 잘못된 자만, 후회와 반성, 그리고 결코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는 나의 잘못된 행동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의 잘못과,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타인에게 준 상처들까지 햇살과 함께 가두어 들인다.허리를 젖히며, 두 다리를 꼬아 비틀어 짜며, 옆구리를 늘리며, 무릎을 펴서 하늘 높이 치켜들며 나는 내 자신에게 명령한다. 그들에게 아침햇살을 보게 하자. 그들을 아침햇살과 함께 가두자. 동작은 어느새 사바아사나로 바뀌고 있다. 호흡을 조절하고 마음을 푸욱 내려놓는다. 선생님이 홀의 불을 끄고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가는 소리가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고 나는 한조각의 카스텔라로 남는다.※ 수필가 양경심씨는 '지구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 '진분홍 실내화'를 냈으며, 현재 군산여상 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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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3 23:02

인생에 단 한번 있는 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딱 한 번만 일어날 법한 사건이 있다. 그런 일은 보통 전혀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 경험이 다르고 또 좋았는지 깨닫게 되곤 한다.2002년 한일월드컵은 나에게 있어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대단한 이벤트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매 순간 한국의 곳곳이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분위기로 넘쳐났다. 아무튼 2002년의 여름은 지금으로부터 이미 10년 전 일이 됐고, 그 이후 지금껏 있어왔던 국제 행사들에서 그런 경이로운 순간을 볼 순 없었다. F1 국제자동차경주대회가 한국 전역을 하나로 엮을만한 행사로, 모두에게 정열을 발산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한국이 세계적인 국제 스포츠행사 주최국으로 당당히 등극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엉성한 마케팅뿐만 아니라 F1국제자동차경주대회 주최 진영의 내부 갈등 등으로 기대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호응도는 놀라울 것도 없었다.그러고 보니 이 시점에서 여수세계박람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중앙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오랫동안 꾸준한 홍보를 해오며 전 세계의 집약적인 첨단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된 행사다. 여수 엑스포 뒤에 선 정부와 기업의 지원으로 이 행사가 잘못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사가 시작된 뒤 7주가 지나오면서 매번 접하는 언론 매체들의 주된 반응은 문제만 많은 엑스포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는 행사라는 것이다.행사 조직위원회가 보여준 많은 실수들은 당연히 수치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에는 언제나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엑스포는 그야말로 인생에 단 한번 볼 수 있는 전 세계적인 행사로,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훌륭한 행사다. 만약 지금 한국에 있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꼭 이 행사를 보길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여수에서 가까운 광주에 산다는 이유이거나 엑스포의 독일관에 관여해서가 아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엑스포야말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있기까지 시간과 돈을 들여 볼만한 멋진 행사라고 믿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저 가기만 해서도 안될 것이다. 올바르게 엑스포를 이해하고 관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엑스포 관람객들이 아쿠아리움이나 한국관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만 했다는 불만을 들어보면 과연 그 사람들이 엑스포를 진정 이해하고 관람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엑스포란 만국박람회로, 그야말로 세계를 전시하는 곳이다. 한국인으로서 다른 나라를 배우며 잘 모르는 문화를 경험하고 심지어 서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음식까지 맛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인 셈이다. 엑스포 기간에만 볼 수 있는 그 많은 국가관들을 제쳐두고 엑스포가 끝난 뒤 줄을 서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아쿠아리움 앞에서 어떻게들 그 뜨거운 태양 아래 몇 시간이고 서서 입장을 기다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현대 한국 사회는 너도나도 편리만을 찾으며 순간의 만족을 쫓아가는 욕구가 강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더욱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어떤 것은 스스로 보고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다운로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F1 국제자동차경주장 내에서 포효하는 강력한 엔진 소리라던가 엑스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국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 그리고 거대한 축구장과 같은 곳에서 가슴속부터 울려 나오는 뜨거운 함성과 기쁨의 눈물을 흘려 보는 일들 말이다. 10대 소년이었을 때 나는 맹랑하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의 라이브 콘서트를 보기 위해 혼자서 독일 함부르크에서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했다. 며칠 간의 여행에서 콘서트장 앞 자리에 앉기 위해 더운 태양 아래 긴긴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고, 돈이 없어 길가에 신문지를 깔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고생인가 묻는다면 서슴없이 그렇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그 경험은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절대 놓칠 수 없는 내 인생의 단 한 번의 이벤트였다.※안톤 슐츠는 한국과 유럽소재의 다양한 기관과 기업을 위한 컨설팅 통번역 이벤트 매니지먼트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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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6 23:02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오해와 진실

지난 6월 26일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금년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일부 교사단체와 학부모 단체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실시를 전후하여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대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50명 정도의 학생들이 부모들과 함께 "일제고사"로 매도하고 평가에의 참여 여부가 선택권이라고 주장하면서 평가를 거부하고 일부 단체에서 마련한 체험학습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 수는 전수평가가 시작된 2008년 이후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거부하는 학생 수가 줄어들고 반대하는 단체들의 목소리도 약해지고 있지만,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논란이 시험거부라는 물리적 행동보다는 학업성취도 평가가 갖는 부작용의 해소를 위한 노력과 토론으로 이어진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평가대상 해당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평가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의 목적을 학업성취도 변화추이를 파악한다거나 교육과정 개선자료로 활용한다거나 교수학습방법 및 장학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는 것에 한정한다면 표집평가를 실시해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일견 타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행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는 이전에 실시했던 표집평가와는 달리 그 목적이 확대되었다. 개별 학부모들이 알고자 하는 그들 자녀의 학업성취 수준을 전국적 수준에서 정확하게 파악하여 제공하고, 개별 학교가 교육적 책무를 다하고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단위학교로 하여금 책무이행에 보다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는 것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의 목적에 추가하고 있다. 특히, 국가가 학생들의 기초학력을 책임지고 완성하게 하는 국가의 교육적 책무 이행 정도의 파악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의 목적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표집평가를 전수평가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전수 평가가 학교간 서열화를 촉진한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전수 평가가 학교간학생간에 서열을 매기는 것을 본래적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는 학생들에게 교과별로 우수학력, 보통학력, 기초학력, 기초학력 미달 등 절대적 수준의 4단계로 통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단위학교로 하여금 절대적 성취수준에 도달하도록 경쟁을 촉진하기는 하지만, 상대적 서열을 놓고 경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일부 학교에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대비하여 학생들에게 문제해결력과 같은 기본 역량을 길러주기보다는 시험 준비를 위한 정답교육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기초학력 미달학생에게 실시하는 보정교육의 왜곡 가능성을 경고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학교행정가와 교사들은 보정교육이 시험문제 정답 중심의 단순 암기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교과 성격을 고려하면서 이해와 탐구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평가는 남에게 나를 드러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평가결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부담스러움이 사라질 수 있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는 분명, 학생들이나 학부모에게는 자신에 대하여 알게 하고, 교사와 학교에게는 수업을 개선하도록 하며, 국가에게는 학생들의 학력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더 이상 부담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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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9 23:02

사회통합, 다원주의와 법치주의가 답

독일어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를 번역한 시대정신은 한 시대의 사회에 공유되고 있는 정신으로 이해된다. 요즘 언론매체를 통해 시대정신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현 시국을 전망하거나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할 때 사용하는 듯하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시대정신의 내용은 사회통합이다.정치적 분열의 역사는 오래된다. 의회민주주의의 태동기에도 당쟁은 있었다. 최초의 근대정당으로 불리는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 간의 싸움은 걸리버여행기에서도 풍자될 정도로 심각하였다. 비슷한 시기 대륙의 끝 조선에서도 붕당정치는 있었다. 서인과 동인 간의 대립, 그리고 동인에서 갈린 남인과 북인 간의 대립, 그리고 서인에서 갈린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이 비판되었다. 이는 조선인에게 자율적 조정 능력이 없어 식민지배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일제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기도 했다.오늘날 다른 민주국가들에 비해 정당 간 차이가 적다는 미국에서조차 민주당과 공화당 간 가치 차이는 계속 증대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동서고금을 털어 당파적 정쟁이 전혀 없는 정당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내부의 갈등은 외부와의 경쟁에서 패배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적을 앞에 두고 분열되는 적전분열(敵前分裂)과 반대되는 현상은 오월동주(吳越同舟)이다. 서로 원수관계인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협력하여 풍랑을 극복한다는 오월동주는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적개심이 풍랑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약해야 가능하다.한국의 경우 국내 분열의 정도가 외국과의 갈등보다 더 클 때가 많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북한, 미국, 중국 등 남한 외부의 문제로 남남갈등이 전개되는 것은 내부 경쟁세력에 대한 불신이 외부 세력에 대한 불신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내부 분열이 심각한 이유는 그 분열이 패거리적이기 때문이다. 패거리적 분열에서는 무엇을 지지하고 비판하느냐는 측면보다 누구를 옹호하고 비난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언론매체의 청탁으로 원고를 기고하게 되면 글의 내용보다 기고 매체로 판단될 때가 많았다. 주장의 논리성보다 가담한 패거리가 더 중요한 세상이다. 물론 색깔이 뚜렷한 언론들은 원고를 청탁하고도 작성된 글 내용이 자신의 편집방향과 맞지 않다고 게재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언론과 SNS는 상대와의 소통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성격이 강하다.사회가 분열되었다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FTA와 같은 외국과의 협상에서 국내 협상파의 대척점에 있는 국내 강경파의 존재 때문에 외국이 더 양보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내부 분열이 외부와의 협상에 유리할 때도 있다.민주주의, 특히 정당민주주의는 분열을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의회나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 수준은 낮아진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 불신과 분열은 민주주의의 필요악이다. 따라서 분열 자체를 없애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과도한 불신과 분열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기도 한다. 따라서 합리적 분열이 되어야 한다.세상의 이치를 음과 양으로 설명하는 음양설에서 음과 양은 대립된다는 의미보다 상호보완적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음양설은 순음 또는 순양으로 구성된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분열은 합리적인 합의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극단적 입장보다 중도적 입장이 두터워야 한다.중도 비중의 증대는 정치엘리트 차원에서 모색될 수 있다. 이편저편 왔다갔다하는 행태는 중도가 아니다. 그러한 행태는 한쪽으로 힘을 몰아주어 단기적으로 정치적 통합과 안정에 기여하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론 정책의 일관성을 훼손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여 오히려 사회통합에 부정적이다.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더라도 남의 소신도 인정하면 통합이 될 수 있다. 또 합의된 게임규칙을 지키는 것도 통합에 필수적이다. 통합을 정치 슬로건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와 법치주의를 바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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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2 23:02

생각하지 않는 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여사, 손녀등과 함께 육사 생도들을 사열하면서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지난 9일 SNS 트위터를 통해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지난 6월 8일 육군사관학교 발전기금 200억을 달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서 전 전 대통령은 생도들이 열병 도중 '우로 봐!'라는 구호에 맞춰 경례할 때 거수경례로 답했다. 육사의 설명에 의하면 전 전 대통령은 1000만 원~5000만 원 출연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초청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누군가? 쿠테타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책임을 물어 '내란 수괴죄',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 받았던 사람이다. 대한민국 육군의 미래를 이끌어갈 장교를 교육시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젊은 생도들이 충성을 외치며 바라본 사람이 바로 쿠테타와 민간인 학살의 주역이었다. 말이 되는가.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 나도 나도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저 자리에 서서 후배들의 자랑스런 선배가 되자. 쿠테타면 어떤가. 일단 성공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지 않는가.검찰은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 후 사저로 사용될 서울 서초구 내곡동 터 불법 매입 의혹과 관련해 지난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고발한 이 대통령 등 피고발인 7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한 시사주간지의 폭로로 촉발된 이명박 대통령 사저 부지 매입 의혹이 이 대통령의 사과를 포함 240여일간의 숱한 논란만을 남긴 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마무리됐다. 검찰은 다만 청와대가 땅을 구입한 뒤 부담금을 나누는 과정에서 일부 잘못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법적으로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며 대통령 장남인 이시형씨가 이득을 보도록 행정을 처리한 청와대 직원에게 잘못을 묻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검찰은 이씨와 대통령실의 지분 비율과 매매대금 간 불균형에 대한 내용을 감사원에 통보해 관련 공무원들의 과실이나 비위행위에 대한 감사에 참고토록 조치했다.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이라더니. 2012년 6월 대한민국의 육군의 정신을 대표하는 육군사관학교는 쿠테타의 주역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전 대통령에게 최대한 예의를 표했으며,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했었던 대한민국의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의 심기를 조금도 거스르지 않는 충견이 됐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 충성 경쟁이 과관이다. 유대인 학살의 책임을 묻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예루살렘 재판 과정을 지켜 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지극히 온순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데 놀랐다. "그는 사악하지도 않았고,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다.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에서 관료적 의무를 기계적으로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반성적 사유의 결여' 때문에 '냉철한 톱니바퀴 기술자'가 되어 유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법정의 검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것이 아이히만의 죄"라며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2012년 6월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수장인 국회의장에 강창희의원이 선출될 것이다. 강의원은 박근혜 전위원장의 멘토단으로 알려진 '7인회' 멤버중 한사람으로 하나회출신이다. 5선 의원인 강창희의장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열정의 시대]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을 "정치생활의 멘토"라고 말했다. 연희동에 사는 한 초등학생이 "29만원 할아버지"라는 글을 썼다. "29만원 할아버지! 얼른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세요. 물론 그런다고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지는 않아요제 말이 틀렸나요? 대답해보세요! 29만원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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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5 23:02

책과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

독서의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70 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초등학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자유 교양 경시 대회'라는 게 열렸다. 문교부에서 필독도서를 선정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읽게 한 뒤, 그 책 속의 내용을 가지고 시험을 치러서 우수학생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독서 분위기의 진작이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그 연례행사는 돌이켜 볼 때마다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게끔 한다. 학교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경쟁이 어찌나 심했는지, 담임선생에 의해 선발된 학생들은 운동회 매스게임에도 빠지는 특혜 아닌 특혜를 받으며 밤 10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책장에 밑줄을 그으며 여러 권의 책을 통째로 달달달 외워야 했다. 내 경우에는 〈김유신전〉,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과 〈신유복전〉, 〈박씨부인전〉, 〈흥부전〉, 〈춘향전〉 같은 고대소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어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외에 뜬금없이 단테의 〈신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 유명한 기독교 고전을 일찌감치 접하긴 했지만, 거기에 대응되는 불교 관련 서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책 선정 과정에서 외압에 의해 종교적 편향이 가해진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험 방식에 있었는데, 독후감을 쓰는 게 아니라 수십 개의 단답형 문항들을 가지고 일종의 모의고사를 보아야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흥부의 몇 번째 박에서는 어떤 물건들이 나왔는지, 〈신곡〉의 〈지옥편〉에서 지옥의 몇 번째 계곡에서는 어떤 인물이 어떤 벌을 받고 있는지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학생들은 본의 아니게 늦게까지 책상 앞에 붙들려 앉힌 채 그 방대한 내용을 원시적으로 암기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는데, 정작 본인들로서도 왜 그런 것들을 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의 독서 기억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다. 하기야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국민교육헌장〉을 강제로 암기시키던 시절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유사한 상황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자기들이 고른 책을 읽게 하고서 반드시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책 속의 내용에 대해 질문하여 정말로 읽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입에 담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읽게 하는 폐단이 있거니와, 진부하고 틀에 박힌 독후감을 쓰는 버릇을 조장할 따름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독서를 권장한다. 읽을 책을 스스로 선택하여 발췌독이든 남독이든 정독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눈길을 끄는 책을 뽑아들고 내키는 대로 뒤적이며 책을 '맛'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덮어버리면 된다. 그러다가 책 속의 내용에 이끌리면 집중해서 읽으면 된다. 만약 처음으로 돌아가서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 책과 독자는 궁합이 맞는 것이다. 나는 책과 사람 사이에 분명 궁합이라는 게 있다고 믿고 있다. 책을 반드시 진지하게 정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려야 한다.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가 날마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정보를 얻는 방식 중에 책은 가장 비효율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와 시간을 상대적으로 너무 많이 필요로 한다. 빠르고 복잡한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책을 안 읽어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독서의 비효율성이야말로 귀중한 것이다. 거의 무한정으로 널려 있는 수많은 정보들 중에는 단순히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습득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정보들의 제공을 책이 담당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궁합이 잘 맞는 짝을 찾는 것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신중하게 행해야 좋은 결실을 맺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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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8 23:02

소규모 학교 통폐합 논란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5월 17일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학교의 적정 규모에 관한 기준을 신설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일부 개정하는 입법예고를 하였다. 입법예고에 의하면, 교과부가 정하고 있는 초중고등학교의 적정규모 최소 학급수는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학년별 1학급을 원칙으로 6학급, 중고등학교의 경우에는 교원의 평균수업시수 및 교육과정의 단위별 수업시간을 고려하여 중학교 6학급, 고등학교 9학급이다. 그리고 초중고의 학급당 학생수는 최소 20명이상 되도록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강원전남전북지역 등 농산어촌이 주를 이루는 도의 경우에 해당 지역 학교의 절반 내외가 통폐합 대상이 된다고 한 언론보도는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충남북, 경남북 지역도 적지 않은 수의 학교들이 통폐합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은 농어촌 인구의 감소에 따라 농어촌 지역 학생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1980년대 초반부터 추진되어 왔다. 소규모학교를 통폐합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소규모 학교가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적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학생 개인의 특성에 따른 맞춤형 교육이 효과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규모학교를 유지하자는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의 경제나 규모의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규모학교의 유지는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체육활동, 합창이나 합주와 같은 음악활동, 학예회와 같은 교육활동은 어느 정도 수의 학생들이 있어야 가능하고, 지적인 교과활동의 경우에도 또래 학생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적지 않으며, 도덕성이나 사회성의 발달도 친구들끼리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는 점을 찬성의 논거로 내세운다. 교육여건도 규모의 경제가 유지되기 때문에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통폐합 이전보다 좋아질 뿐만 아니라, 교원들도 일정 수 이상 유지되어 누가 가고 누가 오느냐, 즉 교원인사에 의하여 학교의 교육활동이 급격하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없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소규모학교 통폐합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일정 수의 학생과 학급을 기준으로 그것에 미달하는 학교를 통폐합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이 그것에 대한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바람직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산어촌에서 학교는 단지 아이들을 교육하는 장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학교는 마을 주민들이 아이들의 교육을 매개로 서로 간에 관심사를 교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학교는 지역주민 체육대회, 각종 행사 등이 열리는 지역사회의 활동의 중심지이다. 학교가 폐지되어 예컨대, 읍면단위에 학교가 없게 되면 지역주민들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걸어서 다니다가 먼 곳을 통학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도 생길 수도 있다. 비록 이번 입법예고에서 "거리교통이 통학 상 극히 불편한 지역의 경우 등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따로 정할 수 있다"고 하여 해당 교육청별 상황을 고려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조항은 도서벽지 지역과 같은 아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소규모학교 통폐합의 딜레마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중앙정부보다는 시도교육청이 지금과 같이 지역적 여건을 반영한 자율성을 가지고 그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이렇게 소규모학교 통폐합정책 추진에서 학교급별로 지역의 특성을 크게 고려함으로써 이 정책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순응성을 확보할 수 있다. 어떤 정책이든지 간에 성공하려면 정책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집단으로 하여금 그 정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그 정책의 효과에 관하여 믿음을 가지게 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과학기술부는 소규모학교의 통폐합을 규모의 경제나 규모의 교육의 관점에서 법령으로 획일적 기준을 정하기 보다는 교육청으로 하여금 학교급별지역적 특성을 크게 고려하여 자율적으로 추진하게 하는 게 적절하다. 그게 농산어촌과 그 지역의 교육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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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1 23:02

대북정책은 상호주의가 최선이다

오는 5월 29일 제19대 국회가 출범한다. 임기 개시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300명이 최종 확정되지 않은 분위기이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국회의원들의 거취가 아직도 논란중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당내 경선 절차의 공정성에 대해 많이 보도되고 있는데, 일부 언론들은 일부 비례대표 당선자의 북한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집중 보도하고 있다.북한 이슈는 한국 사회를 나누는 주요한 이념적 기준이다. 북한은 직간접적으로 남한 정치의 큰 축이 되어있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소위 남남갈등은 김대중 정부 시기에 심화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에서 강한 바람은 실패하고 따뜻한 햇볕이 성공했다는 이솝우화를 근거로 김대중 정부는 따뜻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다.따뜻한 대북정책은 다른 이솝우화로 비판되기도 한다. 숲은 도끼자루가 필요한 나무꾼에게 나무 한 그루를 선의로 주었지만, 나무꾼은 그 도끼로 숲의 많은 나무를 베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대북지원은 남침 능력만 강화시켰다는 주장이다.적대적인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지속적인 관용이 있어야 한다. 3년의 전면전과 60년의 냉전을 겪고 있는 남북한이 상대의 마음을 단기간에 얻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마음보다 행동이 협력적이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상호협력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상호주의가 거의 유일하다. 적대적인 상대에게 모조건 강경하거나 무조건 유화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상호협력에 도움 되지 않는다. 대신에 상대의 행동과 유사하게 대응하는 것이 상호협력을 실현시킨다. 만일 상대가 나의 행동대로 행동한다면, 나의 협력은 곧 상호협력이고, 나의 적대는 곧 상호적대이다. 상호적대보다 상호협력이 더 나은 상황에서는 내가 협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대북정책 기조가 승공(勝共)이었던 20여년 전, 필자가 남북한 공영(共榮)을 위한 상호주의 대북정책 제안했을 때 비판이 있었다. 북한에게 호의적 행동을 먼저 행한 후 그 다음부터는 북한의 행동과 동일한 선택을 하는 상호주의는 대북 유화 정책이라고 비판되었다. 그러던 대북 상호주의는 대북정책 기조가 포용(包容)이었던 10여년 전에는 북한의 상황을 외면한 대북 강경 정책이라고 비판되었다.필자는 7년 전 한 외국 학술지에서 상호주의가 반드시 등가(等價)적, 즉 쌍방의 협력 크기가 같을 필요는 없음을 밝힌 바 있다. 상대 행동 그대로 즉시 반응하지 않더라도 상대 행동에 따라 규칙적으로 반응한다면, 상호협력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의적/적대적 행동에 대해 즉각적으로 그대로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일정 시차를 두고 일정 비율만큼 상대 행동에 따라 대응하기만 해도, 상호협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상대 행위에 따른 조건부 협력이 상호협력 실현에 중요한 것이다.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는 말은 정권에 따라 정부 정책이 뒤바뀌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대북정책 기관들도 정권에 따라 정책이 심하게 바뀌는 부처이다. 대북정책 부처가 사법부처럼 독립되어 초(超)정권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대북정책은 국내정치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무릇 정책이란 일관성을 지녀야 정책 효과를 갖게 된다. 대북정책의 일관성은 상호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에 호의적이냐 적대적이냐는 것은 엄밀한 정책적 기준이 아니고 정책 일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단순한 강경/온건의 대북정책 스펙트럼으로는 남북한관계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고 정치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다. 대북 강경이나 대북 유화이냐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북한 협력을 남한 협력의 조건으로 보느냐로 논쟁되어야 한다. 북한의 행동에 따른 대북정책이 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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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5 23:02

'양치기 정부'와 신뢰사회

많은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선거 때나 조금 신경을 쓰지 평상시에는 정치이야기가 나오면 TV나 라디오를 꺼버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정치인을 싸움이나 하고 모두 '썩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는 정치 자체를 외면해 버린 탓이다. 2008년 시사주간지인 시사저널이 '미디어 오늘'에 의뢰해 발표한 직업별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33개 직업군가운데 소방관과 간호사가 1,2위를 차지했고, 정치인은 꼴찌(33위)를 했다. 왜 국민들은 정치인을 믿지 않을까? 무엇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게 한 것일까? 만일 한 국가에서 그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인이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했다면 그 국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신뢰(Trust)'에서 신뢰는 한 사회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관습, 도덕, 협동심과 같은 사회적 자본이 경제에서 매우 중요하며, 신뢰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는 상대방을 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협력이 어렵거나 협력에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용은 결국 사회 또는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트리게 된다는 것이다. 2012년 5월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는 받고 있는가? 우리 국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부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가? 광우병 파동 당시인 2008년 5월 정부는 주요 일간지에 "국민의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정부가 책임지고 확실히 지키겠습니다"라고 광고를 냈다. 농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는 이 광고에서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면, △즉각 수입 중단 △이미 수입된 쇠고기 전수조사 △검역단 파견 현지실사 △학교 및 군대급식 중지를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되자 정부는 미국에 검역단을 파견했을 뿐이다.청와대는 "현재 미국에서 광우병 걸린 쇠고기가 우리에게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라고 발표했으며, 서규용 농식품부 장관은 "미국에서 온 자료를 (분석)했을 때 검역중단을 할 단계가 아니다. 문제가 없다"라고 말했다. 2005백년 전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풍족한 식량(糧), 충분한 병력(兵), 백성의 신뢰(信)가 있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한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셋 가운데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는 말하길 "병력을 버려야 한다" 고 답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식량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지만,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라고 했다.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자공과의 문답에서 공자는 '정치의 3요소'로 '식량, 병력, 신뢰'를 꼽으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의 신뢰'임을 역설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놀랄만한 경제발전 덕에, 우리나라는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최고의 경제적 생활을 누리고 있다. 또 군사력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백성의 신뢰'는 어떤가? 2008년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시위', 그리고 '천안함 사태'는 우리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또 정부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대국민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광우병관련 뉴스가 최근 TV나 언론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국가 운영에 정말 중요한 일이다. '양치기 정부'를 누가 믿겠는가?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 국민의 믿음이다. 국회의원 수가 많든 당원수가 많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국민의 신뢰는 얻는 것이 정치의 요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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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8 23:02

사바나 원칙

대체적으로 남자는 왜 여자의 유방이 더 큰 쪽을 선호하는가. 얼마 전에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변을 들었다. 애초에 인간 여성의 유방이 다른 영장류의 경우보다 더 발달한 것은, 인류의 조상이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수컷을 유혹하던 암컷 엉덩이의 역할을 유방이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남자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자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가슴이 작은 여자도 자기 아이가 먹을 모유는 가슴이 큰 여자들만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1990년 말에 한 과학자가, 풍만한 무거운 가슴이 작은 가슴에 비해 나이가 들면서 훨씬 눈에 띄게 처진다는 사실을 관찰해냈다. 작은 가슴은 나이가 들어도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남자는 여자가 작은 가슴보다는 풍만한 가슴을 가졌을 때 그 여자가 젊은지 늙었는지를 판별하기가 훨씬 쉽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자가 젊을수록 남자의 씨를 퍼트릴 수 있는 번식 능력이 더 월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남자는 자연스레 가슴이 풍만한 여자에게 더 매력을 느끼게 된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최근에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진화심리학의 '사바나 원칙'이라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바나 원칙에 따르면,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 왔는데. 1 만 년 전에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채집을 하며 살아가던 시기부터 진화가 멈추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도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을 진화가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두뇌는 석기시대의 두뇌라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여전히 석기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탓에, 우리는 사실상 과학적 발명품들은 물론이고 경찰이나 법정이라는 것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과 번식에 성공하여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심리적 기제를 여전히 지닌 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게 진화심리학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리하여 진화심리학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몰려드는 이유, 남자들이 여자들의 긴 머리카락, 금발, 가는 허리를 선호하는 이유,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의 얼굴에서 좌우동형의 이목구비를 선호하는 이유, 남자들이 포르노그래피에 열중하는 데 반해 여자들은 포르노그래피를 피하는 이유, 심지어 남성 성기에서 귀두가 지금처럼 특별한 모양을 취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명쾌하게 '진화론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 흥미로운 것들 중에 하나는 중년 남자들이 겪는 중년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데, 중년의 위기는 남자들이 중년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아내가 중년이 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아내가 폐경기에 접어들 때 남편들은 더 젊고 번식 능력이 있는 여자를 찾으려는 새로운 욕구에 빠지게 되면서 안팎으로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남자의 두뇌는 실리콘이 들어찬 가슴이나 염색한 금발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1만 년 전의 환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진화심리학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명분, 즉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인간 갈등의 새로운 측면들을 찾아내려는 시도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진화심리학이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짝짓기에 연결 지어 파악함으로써 인간을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동안 당연하거나 자명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과감히 질문을 던짐으로써 깊이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을 밝혀보는 일은 무엇보다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근래 들어 이 분야의 책들이 거의 며칠 간격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우리는 진화심리학의 성실하고 부단한 '진화'에 대해 믿음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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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1 23:02

세계화시대의 핵심 덕목

우리 사회의 안팎에서 현재 진행되는 다양한 변화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세계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경남 창원에서 지난 4월 열린 교육도시 세계연합 총회는 40여개 국에서 시장 등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참석하였는데 지방의 세계화를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행사였다. 요즈음 우리 젊은이들은 스파게티와 와플을 즐겨먹고, 잉글랜드에서 뛰는 박지성 선수나 이청용 선수에게 열광하며,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소통한다. 외국의 젊은이들도 우리 음식인 비빔밥에 반하고, K-팝 등 한류에 열광한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인 프리드만이 지적하였듯이, 경제적 차원에서 지구는 이미 평평해졌으며, 자본의 흐름 앞에 국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는 곧 앞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활동하게 될 게임의 무대 역시 글로벌 차원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경을 모르는 또 다른 불청객이 있으니 바로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 빈곤, 불평등과 같은 글로벌 차원의 위기 요소들이다. 빈곤이나 불평등은 자국 내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으며, 환경 위기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인적 교류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문화, 환경 등에서 바야흐로 우리 시대의 거대한 흐름인 세계화는 가장 중요한 변화인 동시에 기회와 위기를 함께 만들어내는 야누스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복잡하게 진행되는 세계화를 이해하고, 그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글로벌 소양(global literacy)일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 한편, 세계 여러 나라와 더불어 글로벌 위기를 현명하게 해결해 나가며 인류의 지속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소양을 갖출 필요가 있다.첫째, 우리 젊은이들이 무엇보다도 외국어 의사소통능력을 증대시켜야 한다. 개방과 교류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외국어에 의한 의사소통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모국어만 하고서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유럽어의 위상을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던 EU의 출범이 역설적이게도 세계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영어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유창한 영어소통능력을 가진 사람,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 국가는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 비하여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교육도시 세계연합 총회에 참석한 국가들이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이었는데, 이렇게 아직 영어가 많이 사용되지 않는 지역(예컨대 남미 등)을 무대로 활동을 하고자 한다면, 해당 국가들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습득하는 일도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자국 문화에 대한 주체성 형성과 더불어, 문화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다문화적 소양이 요구된다. 다문화 사회는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도 결혼 이주여성이 비례대표로 집권당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다문화 사회로 급속도로 이행하고 있듯이, 글로벌 지구촌은 이미 하나의 역동적인 다문화 사회이다. 따라서 우리 젊은이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할 줄 아는 다문화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한국인에게는, 열린 마음을 가진 세계시민으로서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을 도외시하지 않는 박애적 소양, 즉 나눔과 배려의 미덕이 요구된다. 열린 마음에 기반한 박애적 소양은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핵, 인권, 환경, 이민, 빈곤 문제와 같은 공동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당연히 요구된다. 세계화 시대는 기회와 위기가 공존하는 야누스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기회, 즉 국가 경쟁력은 글로벌 소양을 갖춘 인적 자원에 의해 가능하다면, 세계화 시대의 위기의 해결은 남보다 앞서가서 선점하겠다는 경쟁적인 마음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함께 가겠다는 마음, 내가 가진 것을 선뜻 나누는 태도에서 가능하리라. 우리 젊은이들을 글로벌 소양을 가진 젊은이로 기르는 교육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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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04 23:02

선거분석 유감

지난 4월 23일부터 제18대 대통령선거 예비후보자 등록이 진행되고 있다. 언론들은 지난 411선거의 결과를 갖고 연말 대선에 대해 여러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첫째, 411선거의 결과를 '황금 분할'로 표현하고 있는데, 오는 대통령선거는 어떤 결과가 되어야 황금 분할인가? 대다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선거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와 같은 유권자의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4천만 명이 넘는 유권자들이 서로 조율해서 의도대로 황금 분할을 만들어내기는 불가능하다. 선거결과는 유권자 모두의 뜻을 합산한 결과일 뿐이다.둘째, 특정 정당이 승리하고 다른 특정 정당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들이 선거 후 많아졌는데, 오는 대통령선거 결과도 그렇게 잘 알 수 있는가? 미리 예측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끼워 맞추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패배할 줄 그렇게 잘 알았더라면 왜 선거 전 미리 분명히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패배한 정당의 지도부는 반문할 것이다.선거 전 명확히 언급되지 않던 요인들이 선거 후에는 승리 요인 아니면 패인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잘못된 원인 분석이 많다. 사후 합리화뿐 아니라 틀린 선거 전망도 있었다. 특정 지역을 야도(野道)로 단정한 주장이나 엄청난 비용으로 실시된 설문조사가 그러한 예이다. 모두 전문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셋째, 선거 후 유권자 표심을 '홍동황서(紅東黃西)'의 컬러지도로 나타내고 있는데, 대통령선거에서도 동쪽은 붉은 색이고 서쪽은 노란 색일까?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는 그러한 지도가 유용하다. 왜냐하면 특정 지역에서 이긴 후보가 그 지역의 선거인단을 다 갖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 대통령선거에서는 두 후보가 각각 60%와 40%의 득표율을 얻는다면 그 비율대로 표도 나눠가진다. 411선거에서 새누리당은 강원과 울산에서 100% 의석을 가져갔지만 정당득표율은 절반에 불과했다. 반면에 서울에서 새누리당은 의석을 ⅓만 차지했지만 정당득표율은 절반에 가까웠다. 따라서 411선거로 대통령선거를 전망할 때의 지도는 강원, 울산, 서울 모두 붉은색이 반 정도만 들어가서 동쪽과 서쪽 간의 색깔 차이가 크지 않다.언론에서 계속 홍동황서의 지도로 보도하면, 자칫 지역유권자들에게 그 색깔대로 투표하게 유도할 수 있다. 그 지도를 보는 유권자들은 더 이상 지역색으로 투표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대신에 남들이 지역색으로 투표하니 자신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쉽다.4월 선거의 결과가 12월의 선거까지 그대로 가지는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 8개월이면 지지도 등락이 수차례 반복될 수 있는 긴 기간이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의 정당들은 '정주(定住)'형이며, 주요 정당 후보가 아닌 무당파 후보가 당선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이에 비해 한국 정당의 흥망성쇠 주기는 매우 짧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자유선진당은 4년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 정당은 들뢰즈가 말한 탈근대적 '유목(遊牧)' 개념에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정주형과 반대되는 유목형이다. '떴다방'이나 '천막 정당' 식으로 창당되고 운영되며 해체된다. 천막 당사가 지지도 증가에 도움 되는 정치문화이다. 안철수 바람으로 보듯이 기성 정당과 관계없는 후보가 당선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성 정당은 바람 부는 초원의 천막에 불과해서 누구나 천막을 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아와 뜨내기사기꾼 모두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들은 좌우 스펙트럼 대신에 선악 스펙트럼을 갖고 나타난다. 기성 정치인은 자기 물을 퍼내거나 자기 불을 피우기 위해, 그 바람을 마중물이나 불쏘시개로 이용하려 하기도 한다. 펌프가 새거나 펌프질이 약하면 마중물이 있다고 해도 큰 물을 퍼낼 수 없고, 태울 연료가 많지 않으면 쏘시개가 있다고 해서 큰 불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오는 대선에서 반칙이 난무하지 않는 높은 수준의 경쟁이 되려면 언론의 수준 높은 관전평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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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27 23:02

불편한 진실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 152석, 민주통합당 127석, 통합진보당 13석, 자유선진당 5석 그리고 무소속이 3석을 차지했다. 18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친박연대가 얻었던 의석이 모두 167석이었으니 15석이나 줄었지만 선거 몇 달 전 120석도 어렵다는 말이 나왔던 점을 감안하면 완승이나 다름없다. 반면 18대 때 81석이었던 민주통합당은 46석을 늘려 127석을 차지했지만 당초 제1당은 물론 과반수 의석까지 노렸던 것을 생각하면 참패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어쨌든 새누리당은 국회 과반의석을 넘기면서 향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새누리당은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선거를 이긴 것이다. 그리고 민주통합당은 결코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 왜 그랬을까? '反한나라 非민주당'은 최근 선거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유권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이다. 이명박 정권 4년의 실정과 부정부패의 대명사인 한나라당에 대해 반대하지만 내부 분열과 정치적 추진력이 고갈돼 대안세력이 되지 못하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안철수교수의 지지를 받은 박원순 시민단체대표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집권여당과 제 1야당이 유권자의 선택지에서 제외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당은 총선을 앞두고 변화를 모색했다. 한나라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하고, 당의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는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과거 새누리당의 전신이었던 한나라당, 신한국당이 선거 때면 어김없이 써먹었던 '색깔론'을 생각하면 이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이 바뀐 것은 별로 없다. 제도나 기구도 그대로이고 당헌 당규도 큰 변화가 없다. 사람들도 개혁적인 새로운 인물들로 바뀌었다기 보다 친이 중심에서 친박 중심으로 이동한 것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새누리당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뿐이다. 사람과 제도가 거의 그대로이다. 따라서 새누리당은 한나라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반면 민주당은 시민사회세력, 한국노총을 받아들여 민주통합당으로 변신했다. 또 선거직전에 진보통합당과 야권연대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한나라당이 아니라는 믿음(?)때문이었을까 민간인 사찰에 대한 청와대의 개입논란이 있었음에도 유권자들은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 주었다.411 총선은 '反한나라 非민주당'의 구도에서 빠져나간 새누리당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의 선택이었다. 선거과정에서 새누리당은 국민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발빠르게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역사인식 논란, 여성 비하 논란, 금품살포 논란, 쌀 직불금 부당수령 논란 등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곧바로 이들의 공천을 철회시켰다. 임종석 후보의 사퇴, 막말논란의 김용민 후보와 관련되어 민주통합당이 우왕좌왕했던 모습과 비교되었다. 전체적으로 새누리당이 좋은 후보를 찾기위해 더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실제 내용과는 별개로 새누리당의 변화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이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누리당의 변신은 KBS, MBC, YTN 등 공영방송을 포함 조중동 등 보수 언론에 의해 신속히 전달되었다. 선거는 이제 끝났다. 선거기간 유궈자들에게 성추문과 돈봉투, 부정부패한 한나라당과는 다른 당이라고 했던 새누리당이 성추문과 논문베끼기로 논란이 된 김형태, 문대성 당선자와 관련해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의 말이 떠오른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 당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새누리당의 '불편한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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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20 23:02

작은 수레와 큰 수레

선거철이 되면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근래 들어 새로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사실은 좋은 평판을 얻어 장차 다른 곳에서 부수적인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식들이 생존할 수 있게 도움으로써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 복제되게 하려는 바람의 결과라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에게 비상호적 이타주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우리가 늘 보다시피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하겠다고 공언한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투표를 하는 것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사이에는 흡사한 점이 있다. 진화심리학은 충실한 남편과 비열한 남자를 분명히 나눠놓고 있다. 여자들은 장기적 짝짓기 전략을 추구하는 남자와 단기적 짝짓기 전략을 추구하는 남자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여자는 미혼모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럴 경우 그녀와 자식들의 생존확률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은 정조를 지키는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뻐꾸기처럼 자기 둥지 속에 다른 사람의 씨가 들어앉아 있는데도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장기적으로 동행할 수 있는 충실한 남편과 절개를 믿을 수 있는 아내를 선택해야만 이용당하거나 기만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기심이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마당에 이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이기적 본성을 경계하고 넘어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서 묵묵히 실천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최우선의 목표로 생각하는 파충류 뇌라는 게 있는데, 부처의 가르침은 사실 그 파충류 뇌의 준동을 제어하려는 노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불가에는 소승과 대승이라는 개념이 있다. 말 그대로 '작은 수레'라는 뜻의 소승은 자기 한 개인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고, '큰 수레'라는 뜻의 대승은 자타가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작은 수레에서 시작하여 큰 수레가 되는 것인데, 내 한 몸 기꺼이 버리겠다고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가들 중에 그렇듯 각고의 수행을 거쳐 이상적인 수레에 이른 자가 얼마나 있을까. 또 불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염소 수레, 사슴 수레와 구별하여 하얀 황소 수레가 곧 중생을 피안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데, 염소 수레, 사슴 수레가 하얀 황소 수레인 양 가장하고 나서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지금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언젠가 어느 솔직한 후보자가 나서서 이런 연설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이다. "저는 제가 누구보다 이기적인 인간임을 인정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자 애쓰지만 너무도 어렵습니다. 사실 제 지나온 삶도 간신히 구색을 갖추었을 뿐,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 선 것도 사실 남들 앞에 나서서 위세를 부리고 싶은 게 제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염소 수레나 사슴 수레가 어울릴 뿐, 감히 하얀 황소의 수레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장차 저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가동시켜서 여러분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낙선하면 결과에 승복하겠지만 마음속으로 분노와 적개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저라는 한 인물 살려주시는 셈치고 저를 뽑아주십시오. 어차피 누가 되든 거기서 거기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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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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