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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장이 떴다] "못해요!"→"재미있네!"⋯화정마을 그림 교실에서 생긴 일

"선상님, 다른 그림 안 보면 못 허요!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께. 허연 종이에 뭐슬 그리라고." "어머니, 저 한 번 따라해 보시게요. 네모 먼저 그려 볼까요? 저는 지붕을 이렇게 그릴 거예요." 지난 19일 화정마을 '청년 이장' 아지트에서 특별한 그림 수업이 열렸습니다. 전주에서 이일순(서학동사진미술관 대표)·김삼열 선생님이 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일찍이 채비를 마치고 모였습니다. 앉을 자리 없어 따닥따닥 붙어 앉았지만 얼굴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네요. 그렇게 앉은 책상 위에는 달랑 하얀 캔버스와 4B 연필뿐. 그림 주제는 '집'입니다. 내가 살았던 집, 살고 있는 집, 살고 싶은 집, 다 좋습니다. 그림을 그려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할머니들 눈에는 물음표가 가득합니다. 최은주(80) 할머니는 "선상님, 이거 본뜨는 거 아닌가? 나 이러믄 못 허는디. 갑자기 '집'이라고 하니께 생각 나는 게 없네, 우짠대"라며 당황해 했습니다. 다른 할머니들도 "이렇게 하믄 어떻게 혀", "금방 나왔는디 우리 집이 우째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 서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일순 선생님도 덩달아 당황했습니다. '청년 이장' 취재진으로부터 할머니들이 지난해 그림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지만 다들 밑그림을 원하셨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이전에는 본뜨듯이 아래에 그림을 대고 스케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힘으로 했던 건 물감 칠하기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단 캔버스를 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네모부터 천천히 그려 보자는 선생님 말에 할머니들도 하나둘 손에 연필을 들고 따라 그려 봅니다. 닭부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고양이도 하나씩 넣어 캔버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전에 '그림' 수업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안 하겠다고 하셨던 강정애(79) 할머니까지 푹 빠졌습니다.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집도 그리고 마당에 있는 양은솥, 닭도 그려 봅니다. 괜히 쑥스러운지 더 크게 소리 내 웃으시면서 꼼꼼히 색칠해 봅니다. 하얀 캔버스가 순식간에 알록달록 색깔 옷을 입었네요. 처음에 어떻게 그릴지 몰라 헤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작업에 열중해 봅니다. 생각보다 수준급의 완성도를 보이는 할머니들에 작가님들도 깜짝 놀랍니다. 모두 캔버스를 들고 여기저기 돌려 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나 같이 작품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앉아 있었던 것도 벌써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모두 지친 내색 없이 작품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작가처럼 완벽한 그림은 아니지만 어르신들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은 장관을 이룹니다. 오늘도 '청년 이장' 아지트에서의 수업은 성공입니다. 두 세 시간 내내 실컷 웃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또 하나의 추억을 쌓았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22 08:57

[청년 이장이 떴다]"유쾌한 어르신들 모습에 위로 받아"⋯작가까지 떴다

'청년 이장' 취재진에게 새로운 의뢰가 접수됐습니다. 이번에는 그림입니다. 곧바로 취재진은 작가 섭외에 나섰습니다. 고민 끝에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서학동사진미술관 이일순(52) 대표님을 섭외하기로 했습니다. 겨우 전화 한 통으로 프로젝트 설명 후 재능 기부를 조심스레 요청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기자님 좋은 일 하시는구나!"라며 응해줬습니다. 이 대표는 남편인 김삼열(56) 작가와 함께 화정마을을 찾아 하얀 캔버스 위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 주셨습니다. 처음에 "부끄러워!", "그림은 안 혀, 못 그려!" 하던 어르신들은 뚝딱 작품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과 서너 시간을 호흡한 이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흔쾌히 재능 기부에 응해 주신 이유가 있나요? "먼저 신문사에서 시도하는 이색 취재 현장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갔습니다. 막연하게 농촌 인구가 줄어든다며 걱정하던 시대를 지나 나라 전체가 인구 소멸 등의 문제를 안고 살고 있잖아요. 어르신들이 모여 마을을 지키고 있는 현실을 신문사가 관심을 갖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젊은 기자들의 활약도 궁금해 흔쾌한 마음에 응했습니다." 직접 시골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보니 어떠셨나요? "미술 작업이 처음인 분들도 계셨을 텐데 유쾌한 어르신들의 호응에 감사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현재 부모님들이 편찮으셔서 요양원, 요양병원에 계셔요. 그래서 오랜만에 어머님들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90세가 되신 어르신들도 함께 그리고 소통하며 서로를 챙기시는 모습 속에서 마을 공동체의 역할과 좋은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청년 이장' 프로젝트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사회에 꼭 필요한 연결고리로서 전북일보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고 성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22 08:56

[청년 이장이 떴다]"게이트볼 한판 허야지!"⋯화정마을 할배들의 '특별한 나들이'

오늘(18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청년 이장' 취재진이 화정마을 할아버지들과 나들이(?)를 가는 날이기 때문이죠. 평소 오후 2시만 되면 삼삼오오 경로당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할머니들과 달리 할아버지들은 경로당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할배들은 365일 게이트볼을 칩니다. 점심 먹고 오후 1시가 되면 이경구(87)·윤병일(83) 할아버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장청송(80) 할아버지 집 앞에 모입니다. 세 분 모두 멋들어진 모자에 장갑을 꼼꼼히 챙기고는 청송 할아버지의 트럭에 올라탑니다. 목적지는 고산체육공원 게이트볼장. 이날 취재진이 찾아간 게이트볼장의 첫인상은 '훈훈함'이었습니다. 실내 게이트볼장 곳곳에 설치된 난방기가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며 어르신들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 줍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다치기 쉬운 어르신들을 위해 겨울이면 후덥지근하게, 여름이면 시원하게 유지되는 곳입니다. "이(여기)는 누구여?" 저기 멀리 몸을 풀고 있는 고산게이트볼협회장 이승규(78·덕암마을)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때 경구 할아버지가 "우리 동네 청년이장이여!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지!"라고 환하게 웃으며 한 마디 던집니다. 처음엔 취재진을 낯설어하던 할아버지들도 '청년 이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뿐 아니라 할아버지들에게도 인정받은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진짜 고산면, 그것도 화정마을 사람이 다 된 듯하네요. "어이! 이제 시작하게! 일로 오쇼!" 순식간에 게이트볼장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도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더니 어느덧 10명이 모였습니다. 게이트볼을 한 팀당 5명, 총 10명의 사람이 모여야만 할 수 있는 협동 운동입니다. 우리 삼총사 할아버지로는 턱없이 부족하죠. 그래서 게이트볼장에는 총 5개 마을이 함께합니다. 화정마을을 비롯해 덕암·교전·심풍·부동마을까지 모이죠. 사는 마을은 다 다르지만 대부분 '고산 토박이'인 터라 서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게이트볼장은 '고산면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뭣이 그렇게 재밌으셔요?"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경구 할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365일 친다고! 겨울엔 따숩고 여름엔 시원하니 을매나 좋아!"라고 대답합니다. 이승규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 나오면 사람 만나고 같이 노니까 좋지. 집에서 뭐 하겄어?"라며 한 마디 덧붙입니다. 젊었을 적에는 일하는 게 전부였던 할아버지들은 취미가 뭔지도 모르게 바삐 살다 이제서야 비로소 취미를 찾았습니다. "옛날엔 취미가 어딨어? 먹고 살기도 바뻤지. 우리가 배곯지 않고 살게 된 지 얼마 안 됐어.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누가 이렇게 따순 밥 먹고 좋은 옷 입었겄어. 일만 허고 살았지." 할아버지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십니다. 트럭을 타고 게이트볼장을 가야 하기 때문이죠. 덕분에(?) 고산 게이트볼장은 연중무휴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2.22 08:5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4) 〈남정일기(南征日記)〉, 〈갑오실기(甲午實記)〉

〈남정일기〉 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남정일기(南征日記)〉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차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 영접사 이중하(李重夏)의 비망기로 ‘남정(南征)’이란 일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쪽 전라도 동학농민군 정벌 관련한 내용 중심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진주한 청국군의 경로와 조선 정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5월 1일 조선 정부는 공조참판 이중하를 대표로 하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통신ㆍ치안 등을 위한 인력과 양식, 우마와 선박ㆍ뱃사공 및 이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적극 협조하였다. 아산에 상륙한 청국군의 인력과 우마ㆍ양식ㆍ선박 제공 등과 관련하여 직명ㆍ용도별 동원 인원 및 금액 지출 내역 등을 매일매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중하는 서울을 출발하여 평택과 둔포를 지나 당일 저물녘에 아산 백석포에 도착하였는데, 아산현감과 온양군수ㆍ직산현감 등이 와서 청국 군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우마와 운송 선박 마련과 제반 응접에 관한 일들을 준비하는 한편, 각 읍에 각별히 경계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다음 날 인천 주재 청국 영사는 영접사에게 태원진 총병 니에시청(聶士成)과 직례제독 예지차오(葉志超)를 비롯한 청국 군대의 도착 일정을 설명하고 아산의 포구는 물이 얕은 까닭에 병선은 앞바다의 내도(內島)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운반할 것이라고 예시하였다. 이후 니에시청의 병선 1척과 소륜선 1척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이중하는 작은 배로 병선으로 가 니에시청과 그 일행에게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하고 잠시 대화하였다. 니에시청 부대의 아산 상륙은 새벽 조수가 밀려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어 작은 배로 군량과 군기를 운반하느라 종일 부산하였다. 니에시청도 군대를 거느리고 백석포에 내려 아산읍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예지차오의 병함 1척이 내도의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니에시청의 경우와는 달리 배와 말의 준비 문제로 상륙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수가 밀려올 때 예지차오의 대군은 배를 타고 백석포로 향했다. 이중하는 초토사가 ‘비류(匪類)’를 크게 이겨 도망가고 흩어졌다는 충청감사의 전보 내용을 예지차오에게 설명하고 ‘적도(賊徒)’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진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예지차오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니에시청은 내일, 자신은 모레 행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며칠 만이라도 쉬면서 피곤함을 풀고 잠시 정탐한 사실을 기다린 후 행군할지 머물지를 결정하자고 완곡히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공주에 도착하여 친히 적들의 형세를 살펴본 연후에 행군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면서 일축하였다. 이중하는 ‘읍촌에서 짐을 질 백성들은 뽑아 군에서 필요한 땔감과 말먹이 등 각종 물건의 짐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값으로 쳐서 지급할 것이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걸었다. 한편 예지차오도 별도로 전주의 농민군들이 흩어져 달아났다는 정탐 내용을 확인하였지만,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지시를 받은 후 수군과 육군의 거취를 정하겠다고 우리 측에 회답하였다. 전주의 동학농민군들이 철수했다는 조선 정부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적당(賊黨)은 그래도 몇몇 군데에 둔을 치고 모여 있다’는 전보를 받은 청국군 진영에서는 관원을 전주에 파견하여 상세히 탐지토록 하였다. 예지차오는 ‘여비(餘匪)가 아직도 많이 몰려 있다’는 전주 파견원의 정탐 보고에 따라 군사를 보내 그들의 근거지로 들어가서 ‘비도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중하는 ‘이미 흩어진 여비들은 저들 스스로 귀화할 것인즉, 이와 같이 사람을 파송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고 전하였다. 이중하의 건의에 따라 청국군은 당분간 아산 일대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지차오는 농민군 진압을 위한 출동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비당(匪黨)이 아직도 장성ㆍ고부 등지에 남아있고 다시 방자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진군시켜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지금 초토사를 철수시켰고, 남은 ‘비도’들도 이미 흩어졌으니, 근심할 것이 못 된다면서 정탐한 내용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다시 정확하게 탐지한 후에 병사들을 진군시키자는 신중론을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이미 북양대신으로부터 속히 ‘남비(南匪)’를 쓸어버릴 일에 대하여 전보로 영을 받은 것이 지엄하므로 감히 잠시도 늦출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그 결과 니에시청으로 하여금 소속 병용 900명과 진마(陣馬) 100필을 거느리고, 각 영과 각 역에는 말 150필의 대기를 지시하고 전주를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기간 일본군의 인천 출병과 서울 도성 밖 진입상태에서 청국군 주력은 전라도 행을 중지하고 다시 아산으로 되돌아오면서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예상되는 일본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니에시청은 6월 13일 아산을 출발하여 성환역을 지나 다음날 진위와 수원 등지를 정찰하고 15일에는 평택을 거쳐 아산으로 되돌아왔다. 23일 새벽 니에시청은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 즉, 성환 전투의 준비를 위해 성환으로 부대를 옮겼다. 당시 황현(黃玹)의 기록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서울로부터 삼남 가는 도로변의 성환 100여 개 마을이 청국군에 유린되었고 노인과 어린이의 사망자가 이어졌다고 한다. 남정일기는 6월 27일 성환전투까지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서이다. 〈갑오실기〉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갑오실기(甲午實記)〉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중요 사실을 정부 입장에서 날짜별로 기록한 것으로 필자는 확인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3월 26일 자 의정부 초기부터 시작한다. 최근에 호서ㆍ호남ㆍ영남 등지에서 협잡의 부류들이 무리를 모아 멋대로 못된 풍습을 자행하고 난동을 부린다고 하니 3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만약 고치지 않고 예전과 같은 폐단이 있다면 그 괴수를 잡아서 효수해 경계하고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그 결과 29일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전라 병사에 제수하고 현지에 파견토록 하였다. 4월의 기사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호남지역 파견, 고부민란과 군수 조병갑의 도주, 안핵사 이용태의 파견과 불법 행위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후는 고부ㆍ금구 농민군의 활동과 전주 점령 내용까지 이어진다. 5월 1일에는 청국 원병의 조선 파견 요청에 관한 조정 내의 논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임 대신 입궐 시 고종은 청국군의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면서, “총리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 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자 고종은 일본이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궁궐에서 물러난 뒤 이 일로 민영준이 영돈령부사 김병시에게 편지와 사람까지 보내어 문의하자 “비도(匪徒)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라면서 잠시 관망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민영준이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고종은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기운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내 이 내용을 전달하니, 위안스카이는 곧장 톈진으로 전보하여 며칠 되지 않아 청병 군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예지차오가 2천여 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6월의 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관련 내용이다. 갑오실기에 따르면, 6월 21일 “새벽에 일본 병사 몇천 명이 와서 경복궁을 지키고 영추문 밖에 이르렀는데, 자물쇠가 열리지 않자 나무 사다리를 타고 궁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또 동소문은 불을 질러 돌진하여 자물쇠를 부수어 문을 열고, 임금이 계시는 집경당(緝敬堂)의 섬돌 아래로 곧장 들어와 빙 둘러 호위하고 각각의 문을 지켜서고 조정 관리와 액속(掖屬)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양 병정 중에 신남영(新南營)에 있던 자는 곧장 건춘문으로 들어와서 일본 병정을 향해 발포하였다. 안경수는 안에서 나와 서둘러 중지시켰다. 평양 병사는 분한 마음으로 군복을 벗고 나와서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면 최초의 교전은 사다리를 타고 궁을 넘은 일본군과 수비병 간에 궁 안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이미 궁 안에 있던 안경수가 일본군과 내응하여 전투 확산을 저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부터 8월까지의 기록은 군국기무처 설치와 이 기구에서 입안 시행한 각종 개혁안과 정부의 직제 개편 내용 등에 관한 것이다. 원훈(元勳)이자 전 총리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조선에 공사로 파견하였는데, 총리대신에게 전임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핍박한 것은 매우 불경한 것이었고 지금까지의 의안 대부분은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행한 것 뿐으로 매우 한심스럽기에 대개 ‘개화에 관한 법’은 하루 이틀에 급하게 논의할 수 없고 점차 실시하고 서서히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10월의 기사는 성주와 하동의 소요로 인한 민가 소실, 수원 및 용인 동학농민군 지도자 효수 및 수색 체포 처단, 법부 협판 김학우 암살 등의 내용이다.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ㆍ경상도에 위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래게 한 내용도 상세하다. 11월에는 정부군과 일본군의 호남 농민군에 대한 연합 토벌 작전과 지역별 농민군 체포 차단 상황, 공주 효포전투에 관한 선봉장 이규태의 보고, 회덕전투에 관한 교도 영관 이진호 보고, 직산과 목천ㆍ공주ㆍ노성ㆍ논산 농민군 체포 처단에 관한 선봉장 보고 등을 기록하였다. 12월에는 패잔 농민군 체포 처형, 금구 원평 농민군의 동향, 홍산ㆍ서천 농민군 토벌과 함께 김개남 처단, 전봉준 체포 압송 소식을 기술하고 있다. 갑오실기에는 청일전쟁과 청국군의 동향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지차오는 부하 병사 다수를 이끌고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했고 흩어졌던 청국군은 평양에서 합류했다. 원래 청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올 때 의주부터 평양에 이르는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도시락밥과 국을 싸들고 와서 맞이하였고 쌀과 소고기 등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히 웨이루쿠이(衛汝貴)의 성자군(盛字軍)은 오합지졸로 통솔이 되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는 곳은 노략질로 넘쳐나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시기 평양 이북부터 의주까지의 지역 사정을 ‘십실구공(十室九空)’의 형세로 비유하고 있다. 당시 평양은 인구 2만여 명의 도시로 1만 5천여 명인 청국군의 군량과 군수 등을 대기는 쉽지 않았고 질고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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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1 12:14

[전북의 기후천사] 김지훈 문화통신사협동조합 대표가 2년 째 '플로깅' 하는 이유는?

‘이 시간에 쓰레기를 줍는다고요?’ 1월 17일 금요일 오전 7시, 김지훈 문화통신사 협동조합 대표가 해도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아침에 서신동 천변을 걸으며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한 손에 봉투를 들고 보물찾기하는 사람처럼 천변 곳곳을 훑으며 쓰레기를 줍고 있는 그에게 슬쩍 물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쓰레기를 줍나요?” 2023년 연말부터 서신 천변에서 플로깅을 실천하고 있는 김지훈 대표는 튼튼한 팔다리와 짱짱한 허리만 있다면 누구든 기후 천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로깅’은 길거리와 공원, 바닷가 등을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는 행위로, 기후 문제에 관심이 높은 MZ세대 사이에서 입소문 난 기후 행동으로 꼽힌다. 전북의 기후 천사를 소개하고자 기자도 이날 직접 참여해 봤다. 슬쩍 둘러봤을 때는 깨끗했지만 천변 곳곳을 샅샅이 훑어보니 담배꽁초부터 플라스틱 뚜껑, 땅에 묻힌 마스크까지 갖가지 쓰레기들이 튀어나왔다. 플로깅을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나자 봉투 안은 쓰레기로 가득 찼다. 평소와 다르게 아침 일찍 쓰레기도 줍고 운동도 하니 기분은 가뿐했다. 하지만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쓰레기를 줍는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의구심을 품고 그에게 물었다. “쓰레기를 주워서 세상이 바뀌었나요?” 스웨덴에서 시작된 ‘플로깅’은 환경보호와 운동효과가 결합한 활동으로 주목받으며 힙한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각종 소셜미디어에는 해시태그(#) 플로깅이 달린 게시물들이 수만 개에 이른다. 최근 들어서는 친환경 이미지를 원하는 기관이나 기업에서 플로깅 행사를 열어 캠페인을 실천하기도 한다. 플로깅이 단순한 거리 미화를 넘어 기후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김 대표는 환경 문제를 알리는 효과가 크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그가 꾸준히 플로깅을 실천하면서 가족과 주위 예술인들도 플로깅에 관심이 생겼다. 플로깅이 다른 기후 행동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 보니 접근도 쉽고 다른 기후 행동 실천으로 확산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평소 기후 위기나 환경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김 대표도 기후 행동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린웨이환경축제 감독이었던 대표에게 지인이 “사업으로만 (환경 활동에) 접근하지 말고, 진심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겠냐”고 조언했고, 곧바로 플로깅을 시작했다. 그는 쓰레기를 줍다 보니 점점 환경 활동에 진심을 쏟게 됐다고 했다. “오타니 (야구) 선수가 운동장 모퉁이와 관중석까지 돌면서 남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줍잖아요. 행운을 줍는다고 하면서 말이죠. 저도 제가 하는 일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천변을 걸으면서 행운을 주워요. 좋은 마음으로 플로깅을 실천하다 보니 좋은 일들도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2년 동안 꾸준히 플로깅을 하다 보니, 어르신들의 칭찬과 용돈은 덤으로 따라온다. 아침부터 사람들에게 “수고한다, 고맙다” 등의 애정 어린 인사를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플로깅이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에너지 전환 등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환경 문제를 보려고 하기보다는, 개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기후 행동을 실천하다 보면 훗날 거대한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고 했다. 꾸준한 변화를 위해 김 대표는 환경 활동에 재미와 가치를 결합한 시도를 계속해서 선보일 방침이다. 캥거루 옷을 입고 등산을 하면서 주운 쓰레기를 앞주머니에 넣고, 배가 많이 나온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환경 활동 ‘캥거루 플로깅’부터 버려진 골판지를 활용해 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고래 먹이주기 자판기’ 등 환경에 재미를 더하고 가치를 덧댄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플로깅을 마친 뒤 김지훈 문화통신사 협동조합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후 행동이라는 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천하면 돼죠.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일도 기후위기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작은 실천들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세상을 바꾸는 단단한 힘이 될 테니까요" 대표는 주운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겠다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플로깅만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쓰레기 줍기라는 작은 행동 덕분에 우리의 삶은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김지훈 대표는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지훈 대표는 사회적 기업인 문화통신사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젊은 청년들과 함께 문화활동을 기획하고, 환경 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그린웨이 환경축제 총감독으로 일했으며 2023년 지구를 지키는 신묘한 자판기 축제 등을 기획해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부안에서 '에코 서바이벌 게임'과 꿈다락 문화학교 '지구를 지키는 신묘한 자판기' 등 기후·환경 활동을 추진해 청소년들이 기후위기, 환경문제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 기획
  • 박은
  • 2025.02.20 14:46

농협중앙회 전북본부 이정환 총괄본부장 "청년들 농업 진출 위한 소득 3000만 원 기틀 마련"

"전북농협은 지난 60년을 넘어 앞으로도 우리 땅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농업인과 농촌의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으로 1년 동안 활동하다가 올해 1월 1일 총괄본부장으로 영전한 이정환 본부장. 부안출신인 그는 전북농업의 발전을 위해 초심을 잃지 않고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올바른 길로 가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 현장에서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믿음직한 동반자, 전북농협’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북특별자치도와 함께 도내 농업·농촌과 농업인의 동반자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특히 농업에서 희망을 찾고 젊은이들이 농업에 더 많이 진출 할 수 있도록 농업소득 3000만원의 기틀 마련도 약속했다. 올해 전북 농축협이 탄탄한 수익을 바탕으로 농촌을 지키는 중심축이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이정환 총괄본부장을 만나 전북농협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전북농협 본부장으로 일하게 된 이정환입니다. 을사년에는 모두에게 희망이 있고, 발전이 있는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전북농협도 어려운 시기에 지혜와 협력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삼는 힘찬 도약을 하는 해로 만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전북농협은 전북특별자치도와 도민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동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전북출신으로 고향 사랑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전북발전을 위한 계획이 있다면 "저는 부안에서 태어나서 초·중·고를 나왔고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농협에 입사했습니다. 그 만큼 전북특별자치도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제가 농협은행 본부에서 여신과 기업 관련 업무를 담당할 때 전북특별자치도의 기업들이 더욱 열심히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최대한 지원을 했습니다. 그게 고향이 제가 큰 일을 할 수 있게 도와 준 고향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는 농생명사업의 수도입니다. 이는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북농협의 수장으로서 도내 농업인 등이 마음 놓고 농업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작은 일부터 차근히 준비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것이 전북특별자치도의 발전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생각입니다. -농업소득 3000만원 달성을 위해 농업 현장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지원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데 구체적인 추진계획이 있다면 "지난 2023년 기준 농업소득은 약 1,110만원 정도였으며, 1994년에 약 1,032만원에서 30년 동안 8%에도 못 미치게 증가했습니다. 물가상승률을 대입하면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사이 같은 기간 농업경영비는 502만원에서 2,677만원으로 430%가 넘게 증가했으니 대한민국 발전의 근간을 책임졌던 농업인의 어려움이 어떠할지 이 수치만 보더라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농협은 농업인의 본업인 농업소득 보다 농업외 소득이 더 많은 상황을 타개하고, 농업에서 희망을 찾고 젊은이들이 농업에 더 많이 진출 할 수 있도록 농업소득 3000만원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려고 합니다. 전북농협은 이를 위해 농가 수취가 제고, 경영비 절감, 생산성 향상이라는 세가지 분야에 중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먼저, 수취가 제고를 위해서 전국 최초 도내 14시·군에 설립된 조공법인 활용을 통해 판매량 극대화와 농산물 제값받기에 매진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도내 54개 운영 중인 로컬푸드 직매장 내실화를 통해 소비자에게 믿음을 주고 탄소배출 감소에도 노력하는 한해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농산물 부가가치 증대를 위해서 지속적인 상품개발을 지원하고 OEM가공사업 추진 농협도 적극 육성해 나가겠습니다. 다음으로 경영비 절감을 위해서는 농작업 대행과 공동방제를 적극 확대하여 작업량과 면적을 확대해 나가겠으며, 드문모심기와 직파재배를 지원하여 쌀 생산농가의 비용 감축에도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스마트팜 확대를 지속해 나감과 동시에 농진청, 농업기술원 등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농업기술 도입에 매진하겠습니다. 더불어 청년농 육성과 신기술 보급을 위해 지자체-농축협-전북본부와의 삼각 지원체계 마련을 위해 협력해 나갈 예정입니다. 농업소득은 농업인의 가장 근본이 되는 소득원이지만 그간 소득증대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2025년을 계기로 농업소득 3천만원을 달성의 기반을 마련토록 전북농협이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 농도 전북의 위상에 걸맞은 2025년 새해 전북농협의 계획과 비전이 있다면. "전북농협은 2025년 슬로건으로‘믿음직한 동반자, 전북농협’을 선정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농업인과 함께 웃고, 성장하는 전북농협'을 만들기 위해 농가 수취가 제고, 경영비 절감, 생산성 향상이라는 세가지의 중점 과제를 설정하고 농업소득 3천만원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또한, 농촌은 살기 힘들고 지루한 곳이라는 인식을 개선하는데 앞장서서 신규 복지사업을 발굴ㆍ확대하고 더 많이 웃는 농촌을 만들어 나갈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농축협의 성장을 지원하는 '농축협과 함께 뛰고, 도약하는 전북농협'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농촌지역에서 농축협의 역할은 단순히 금융과 농자재 지원이라는 개념을 넘어 식품 사막화를 막고, 인적 교류의 중심 센터로 자리매김 하는 등 경제ㆍ문화의 중심 역할의 수행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농축협은 농업인이 힘들 때 가장 먼저 의지 할 곳으로‘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해는 전북의 농축협이 탄탄한 수익을 바탕으로 경제사업을 활성화 시켜, 농업인의 경영안정을 돕고 농촌지역을 지키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 하도록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와 협력하는 '지자체와 함께 보고, 협력하는 전북농협'을 만들겠습니다. 농업정책은 행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농협이 하는 일들은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전북농협은 지자체와 협력을 공고히 해서 행정의 지원 역할을 강화하고, 지역 발전의 방향과 개선책을 찾아 정책에 적용 시키는 상호보완의 관계 발전에 주력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농업인과 농촌 그리고 전북특별자치도의 발전의 한 축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지난 해 전북농협은 아침 밥 먹기 운동 등을 통해 쌀소비촉진을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실시했는데 올해는. 많은 분들이 한번 정도는 들어 보셨을 ‘아침밥 먹기’운동을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매년 떨어지고 있으며 잘못된 다이어트 정보로 인한 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높아지는 현실 속에서 농협은 건강한 식습관 형성으로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쌀 산업 유지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한 해 동안 진행한 캠페인이 약 330여회, MOU는 55회, 판매는 수출을 포함하여 2천톤을 넘겨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임직원들 스스로 실감했습니다. 쌀 산업은 대한민국 농업의 근간을 이루며, 식량안보는 물론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밑바탕으로 2025년에도 농협은 지속적으로 올바른 인식을 전파하고 소비촉진을 추진해 갈 예정입니다" -전북농협이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 해 왔는데 올해 계획은. "전북농협은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통해 도내 농업인 등이 좀 더 나은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청춘버스가 그 중 하나입니다. 청춘버스는 도내 농촌을 찾아 농협과 유관기관들이 함께 자발적 재능기부를 통해 의료검진, 피부미용, 청춘사진 촬영 등 제공하여 많은 농업인들의 호응을 받아 올해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하여 급속도로 인구가 소멸되는 도내 농촌에 식품사막화가 가속되고 있어 찾아가는 이동 장터를 통해 올바른 먹거리를 제공 할 수 있게 계획 중 입니다. 또한 도내 많은 유관기관·지자체와 함께 일손 부족으로 농업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을 찾아 지속적인 일손돕기도 실시할 예정입니다. 이처럼 전북농협은 일회성 전시 행사가 아닌 도내 농업인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할 계획이니 많은 관심과 협조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도민들과 전북일보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가 부임한지 벌써 2달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도내 곳곳을 다니며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분들 60년 넘은 세월동안 농업인들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농협에 대한 칭찬과 개선점 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들을 하나 하나 메모하여 올 한해 전북농협이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꺼내 보곤 합니다. 또한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현장에서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저희 전북농협은 지난 60년을 넘어 앞으로도 우리 땅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농업인과 농촌의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고자 노력 할 것입니다. 늦었지만 전북일보독자 여러분 모두가 새해에 이루고자 하시는 일 성취하시길 바라며 2025년‘믿음직한 동반자, 전북농협’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이정환 총괄본부장은 1969년 생인 이정환 총괄 본부장은 부안고등학교와 전북대 정치외교학를 졸업하고 지난 1995년 농협에 입사했다. 이후 전주산업단지 지점장, 무주군 지부장, CIB심사부 부장 등을 거쳐 지난해 1월 1일 자로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에 임명돼 활동하다가 올해 1월 1일 NH농협 전북 총괄 본부장에 임명됐다. 전북지역에서 오랜세월 동안 활동한 경력이 있어 지역사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데다 전북출신으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박진감 있는 추진력과 함께 친화력을 갖춘 덕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 기획
  • 이종호
  • 2025.02.16 18:17

[청년 이장이 떴다] 씻고, 무치고, 끓이고⋯수십 인분 정월대보름 밥상은?

평소 화정마을 경로당의 인사는 "성님, 어서 오셔요!"로 통합니다. 하지만 한 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을 맞이한 12일 인사는 다릅니다. 오늘의 인사는 "성님, 내 더위 사세요!"로 통일됐네요. 정월대보름에는 '더위팔기'를 합니다. 새벽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내 더쉬 사가라!" 또는 "내 더위 네 더위 맞더위!"라고 소리치는 방식이죠. 보통 해 뜨기 전에 하는 아침 인사지만 오후 2시가 돼야 만나는 화정마을 어르신들은 늦게나마 더위팔기를 해 봅니다. 정월대보름인 지난 12일 화정경로당에서 부녀회장이 나물을 씻는 등 바삐 움직이고 있다. 김지원 기자 아참, 오늘은 정월대보름을 맞이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날입니다. 이장님이 영양 가득한 찰밥을 준비하고 부녀회장님이 9색 나물·고등어찌개·두부조림 등을 준비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탓에 저녁밥을 조금 일찍 먹고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 부녀회장님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마을 주민 수십 명의 반찬을 만들어야 하니 정신없는 게 당연합니다. 차가운 물에 나물을 깨끗이 씻고, 고등어찌개 간 맞추고,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두부조림 뒤집어 주고, 다시 나물 무치고⋯.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여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먹을 밥·반찬이 모두 완성됐습니다. 완성되기가 무섭게 곧바로 수십 명의 밥·반찬 덜기가 시작됐습니다. 상다리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 상 가득 정월대보름 밥상이 차려졌습니다. 여차저차 준비를 마치고 '청년 이장' 취재진들도 자리 잡고 앉아 봅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으니 진짜 가족이 된 듯합니다. 함께 모여 밥 먹고, 먹고 또 한 그릇 더 먹고,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우다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또 공동체를 배웠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함께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게 됐죠.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15 18:29

[청년 이장이 떴다] "필라테스가 뭐라고?"⋯시골마을 겨울잠 깨운 운동 교실

여느 농촌이 그렇듯 농번기가 오기 전까지는 한가로이 흘러갑니다. 화정마을 역시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죠. 아침에는 따듯한 집에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오후 2시가 되면 경로당으로 모입니다. 오늘(11일)은 화정마을에 반가운 손님이 왔습니다. 바로 인기 방송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유명세를 떨친 '청년 농부' 차정환(28) 씨와 필라테스 강사 백진선(39) 씨입니다. 둘은 지난 2023년부터 김제 어르신들께 필라테스를 알려 주는 '재능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김제에서 완주 화정마을까지 왕복 1시간 40분이 걸리지만 '청년 이장' 취재진의 부탁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오늘은 필라? 필라 뭐라고? 그거 한담서, 그래서 빨리 왔지!" 오율례(76) 할머니가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맨 앞자리를 찜한 율례 할머니 뒤로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입니다. 그렇게 모인 인원은 총 11명,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입니다. "어머님들, 필라테스라는 운동을 해 볼 거예요. 필라 아니고 필라테쑤 아니고 필라테스예요." 유쾌한 정환 선생님 말씀에 어르신들의 얼굴에도 금방 웃음꽃이 핍니다. 누워서 다리를 들어 올리고 손끝을 쭉쭉 늘려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움직임이지만 어르신들에게는 큰 도전입니다. 진선 선생님도 어르신들 사이사이를 다니며 자세를 바로잡아 줍니다. 뻣뻣하게 굳은 어르신들의 몸은 작은 동작 하나에도 다칠 수 있어 특별히 더 신경 쓰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니께 엉덩이가 두근두근하는디? 아유, 선상님! 이게 맞는 거여요?" 최은주(80) 할머니가 빨개진 얼굴로 묻습니다. 경로당에 한바탕 웃음이 번집니다. 정환 선생님도 제대로 운동하고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지 여기저기서 곡소리(?)와 비슷한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아고야! 나 죽네, 나 죽어. 어구 시원혀."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정환·진선 선생님이 돌아갈 시간이 됐습니다. 다들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평소 어르신들밖에 없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오면 항상 헤어짐이 아쉽습니다. 어르신들은 두 선생님이 선물해 주고 가신 필라테스 공을 한참 만지작거리며 배운 동작을 다시 해 봅니다. 어쩌면 남은 겨울 동안은 화투패 대신 공을 들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읍내만 나가도 필라테스·헬스 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읍내에 나가는 것도 일인 시골 마을은 간단한 체조 하나 배우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오늘 열린 운동 교실이 화정마을 어르신들에게 작은 활력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2.15 07:44

[청년 이장이 떴다] "더 많은 마을에서 봉사하고 파"⋯'청년 농부'도 힘 보탰다

'청년 이장' 취재진에게 접수된 수많은 의뢰 중 하나는 '운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운동과 관련해 재능 기부를 하는 청년을 떠올리던 중 문득 텔레비전 속에서 본 차정환 씨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전화를 걸어 '청년 이장이 떴다' 기획 프로젝트를 소개한 후 조심스레 재능 기부를 부탁했습니다. 아무 대가 없는 부탁이었지만 고민도 없이 "좋다"고 웃었습니다. 그렇게 화정마을 어르신들과 차 씨의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일과 중 가장 재미있는 시간은 '화투'뿐이었던 어르신들은 차 씨와 어느 때보다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고요한 화정마을에 긍정의 힘을 불어넣은 '긍정 농부' 차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김제에서 마을 어르신들께 필라테스를 알려 드린다고요? "2023년 12월부터 봉사를 시작했으니 벌써 1년이 넘었네요. 원래는 저희 할머니 운동 시키는 게 목적이었어요. 사실 운동이라는 건 혼자 하면 재미가 없죠. 마을 어르신들이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봉사까지, 힘들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습니다. 따뜻한 분위기가 되게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난 어르신들도 오래 본 사람처럼 대해 주시거든요. 이런 게 평소 살아가는 데 좋은 영향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농번기에도 빠지지 않고 봉사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실 생각이신가요? "그럼요. 앞으로는 더 많은 마을에서 봉사하고 싶어요. 운동하고 싶은 어르신들이 되게 많거든요. 대신 그러려면 선생님들이 더 필요하겠죠. 그래서 저와 뜻이 맞는 선생님을 구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선생님들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화정마을 어르신들께 한 마디 해 주신다면요? "연세가 많으신 편이더라고요. 그래도 굉장히 유쾌한 모습을 보여 주시고 힘차게 함께 운동해 주셔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멀리서 온 외지인인데 정말 자식·손주처럼 친절히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 기획
  • 문채연
  • 2025.02.15 07:40

[청년 이장이 떴다] "죽기 전에 꼭"⋯75년 만에 날아온 '편지 한 장'

지난주 조재신(89) 할머니가 화정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 이장' 취재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는 "시방, 누가 우리 집으로 편지를 보냈어. 이장님들이 내 주소를 알려 준 겨?"라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취재진은 "할머니 개인 정보인데 누구한테 알려 드려, 큰일 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편지를 확인하러 함께 할머니 댁으로 이동했습니다. 할머니는 일기장 깊숙이 넣어 놓은 편지 봉투를 꺼내셨습니다. 색이 다 바랜 우표가 붙은 봉투 속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눌러쓴 글씨가 빼곡히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고산면 화정리 조재신 할머님께. 나는 비봉면 죽산마을에 살다가 전주로 이사 간 조재영입니다. 오늘 아침 전북일보 신문을 보고 본 서신을 드립니다." 누가 봐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쓴 편지 같았습니다. 조 할머니는 "처음에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당게. 근데 시방, 나랑 같이 국민학교 다닌 양반이더라니께. 신문 보고 편지 썼디야. 우리 집도 모를 텐디 어떻게 알고 보냈는지 모르겄어"라고 말했습니다. "75년 전 비봉국민학교 제17회 졸업생이시면 반갑게 인사 올립니다. 졸업한 지 75년이 되었지요. 졸업 사진 보고 얼굴도 기억했습니다. 조 여사님 건강하시고 잘 계셔요!" 알고 보니 두 분은 열다섯 살 때 같은 반이었던 겁니다.(옛날에는 국민학교를 18살에 졸업하는 일도 있었죠.) 먹고 사느라 바빠 친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지냈는데 본보 신문(1월 20일·2월 3일 자 각 2면)을 보고 75년 만에 연락한 것입니다. 할머니도 편지를 읽고 너무나 반가워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한참을 통화하다가 약속했죠. 죽기 전에 꼭 만나자고요. 이후 취재진은 사무실로 돌아와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봤습니다. 75년 만에 닿은 연락이라⋯. 편지의 내막이 궁금해 바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동창들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친구를 보니까 반갑더라니까. 아버지·어머니 산소 갈 때 아들들이랑 가기로 했어요"라며 만남을 기약하셨습니다. 꼭 두 분이 만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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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5 07:33

[청년 이장이 떴다] 그땐 그랬지⋯ 왕할머니에게 듣는 옛 정월대보름

올해 화정마을 정월대보름은 저녁 먹고 해산됐습니다. 옛날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경로당이 없을 때부터 매년 대보름을 챙겨오던 화정마을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풍습을 이어가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이웃집을 찾아가 쌀을 받으러 다니는가 하면, 같이 풍물놀이를 하기도 했죠. 이것도 마을 주민들이 젊었을 때나 가능했다는 게 주민들의 전언입니다. 이제는 말이 다릅니다. 모두 나이가 들면서 풍습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졌죠. 대체 화정마을은 그동안 어떤 정월대보름을 보냈을까요? 화정마을 왕할머니인 90대 이장순(91)·이칠월(90)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을 거창하게 지냈다고 들었는데요. "암, 화정마을은 해마다 밥도 같이 먹고 그랬지. 젊어서는 경로당이 없었어. 그래서 마을 아줌마들이 찰밥을 걷으러 다녔어. 가정집에 가서 골고루 얻어다가 같이 밥해서 먹고, 밤새도록 놀고, 술 마시고 그랬다니께. 심지어 돈도 걷었어. 마을 돌아가는 데 쓰기도 혔지." 막걸리까지 직접 만들어서 드셨다고요? "예전에는 막걸리가 통으로 있었어. 지금 보는 병이 아녀. 그것도 다 직접 빚었다니께. 옛날에는 소주·맥주가 귀혔지. 막걸리가 만들기 쉽고 많으니까 막걸리를 많이 먹었지." 화정마을도 당산제 지내고 그랬나요? "옛날에는 불교를 많이 믿어서 다 했어. 정월대보름이 오면 과일을 사고, 술도 사고, 다 준비해서 그냥 제사를 지내는 데가 있어. 저그 마을 입구에 돌 있고 끄트머리에 또 있고. 두 곳에서 다 혔지. 화재맥이라고 혀. 이걸 안 하면 불이 난다나 어쩐다나. 어떻게 안 하겄어. 꼭 가서 제사도 지내고, 절도 하고 그랬는디." 진짜 불이 난다고요? "한 20년 전에 불이 났었어. 해마다 허다가 한 해 건너뛴 적이 있었는디 모르겄어. 진짜 불이 났더라고. 정월대보름에 맞춰서 말이여. 고거 참 신기하더라고. 근디 지금 보면 그것도 아닌가 벼. 안 한 지 오랜디 아무 일도 없잖어. 그냥 단속 잘하는 게 답이었나 싶어. 알아도 혔지. 혹시 모르니께, 옛날부터 했고." 또 정월대보름에 했던 게 있나요? "쥐불놀이도 있쟈. 막 내두르고 그랬지. 우리 애들 클 적에만 해도 했는디. 지금은 쥐불놀이도 안 혀? 동네에 애들이 없는디 어쩌겄어. 뭐 하는 사람이 있겠어? 옛날에는 불도 나고 그랬는디. 그냥 그렇게 놀고 그랬어. 그게 다 재미고, 추억이고, 풍습이었지. 근데 지금은 뭐 하간? 이제 힘들어서 못 혀. 아, 풍물놀이도 했어. 다들 풍물을 할 줄 알았거든. 저기 골목 끝까지 풍물도 치고 쭈욱 서서 같이 춤추고 그랬는디 다 옛날 이야기 돼 부렸지."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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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5 07:3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3) 1894년 이후 중범죄의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정배안〉 〈중범공초〉에 실린 관료층과 민중에 대한 차별

〈정배안〉는 1895년 3월경에 작성한 것으로 1885년부터 유배된 자의 죄목과 유배지 등이 기록된 책이다. 원 제목은 〈도유배안(島流配案)〉(1책)이며, 내지에는 ‘정배안’이라고 했고, 대조선국 법부 형사국의 인신이 찍혀있다. 조선정부는 새로운 재판소 제도가 시행하기 이전에 중범죄 죄인의 경우 유배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첫머리에는 평안도 용천부에 유배된 백은수(白殷洙)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는 1885년 을유년의 백성 침학죄로 유배된 것이기 때문에 농민전쟁과는 관련이 없다. 3번째 기록된 경상도 금산군에 유배된 이용태(李容泰)로부터 관련 사항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 4월 21일 승정원의 전언에 의해 유배형에 처한 것으로 “고부 안핵사로 전내(傳內)의 명을 받아 안핵(按覈)하라는 법의(法意)가 있었지만, 하등 긴급하지 않고 아무런 사계(查啓)도 하지 않고 오히려 소요를 일으켰으며 이미 분함과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상도 거제부에 안치된 김문현(金文鉉)의 경우, 5월 14일부터 승정원의 명에 의해 위리안치(圍籬安置)하여 가극(加棘-귀양간 사람의 집 둘레에 가시나무를 둘러서 왕래를 하지 못하게 함)의 벌을 받았다. 그는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농민봉기를 막지 못하고 도리어 전주성을 버리고 월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중 처분된 이유는 김문현이 직접적으로 전주성 함락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었지만, 그해 5월 20일에 이설(李偰)의 상소에 의하여,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전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감사 김문현, 영광군수 민영수 등 처벌이 가중되었다. 고부민의 원흉이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에 대해서도 5월 17일 엄형 1차로 신장(訊杖) 30도 후에 원악도 안치의 죄를 처분하였다. 이어 조만승, 민영준, 민형식, 김세기, 조필영, 임치재, 이소영, 신학휴 등이 수많은 부패관료들이 그해 말까지 계속해서 처벌되었다. 전총제사 민응식과 전전 개성유수 김세기도 포함되었다. 또한 오석영(吳錫泳)의 사례도 눈에 띈다. 그는 전 성주목사로 성을 비워 비적들에게 넘겨준 죄로 갑오년 11월 10일에 귀양을 보내졌다. 정배안의 기록은 1895년 3월이후에도 추가되어 4월 20일 제주 등지에 유배를 떠난 종신죄인 서주보 등 9명에 대한 처분을 기록하였지만, 나머지 부분은 백지로 남아있다. 당시 유배형을 처벌하게 되는 사유를 설명하면서 고종은 반복적으로“이것은 내가 백성을 위하는 것이고 또한 세신(世臣)을 보전하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국왕의 태도는 관료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차별적인 언사였다. 이들 부패무능 관료들의 유배형은 1895년 6월 27일 전격 중단되었다. 고종은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인들인 민영준을 비롯하여 조병식, 민영주, 민형식, 김세기, 민병석, 이용태, 김문현, 이용직, 조필영, 조병갑, 민응식, 김창렬, 조만승. 임치재, 서정철, 심능필, 조준구, 민영순 등 19명외 260명을 방송(放送)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갑오개혁의 출범 1주년을 맞이하여 취한 대사면의 결과였다(〈고종실록〉 1895년 7월 3일 기사). 당시 사안을 한 걸음 들어가 보면, 내부대신서리 유길준이 ‘대소죄인 방석하는 사’라는 안건을 제의하였다. 1895년 4월 1일 이전(신식 재판소제도 시행)에 국사범 이하 정치상 관계 및 기타 유형(流刑)에 처한 자는 모두 석방하자는 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농민전쟁과 관련되어 재판을 받거나 구속된 농민들도 석방조치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부대신 서광범은 이에 반대하여 적용 예외대상을 절도, 강도, 통간, 편재 등 파렴치한 범죄자 이외에도 모반과 살인자를 포함시켰다. 법부는 주로 유배된 주요 관료들만에 한정하는 사면조치를 취했다(〈구한국관보〉 106호, 1895년 7월 5일, 1072∼1073쪽). 결과적으로 유배형 관료의 석방조치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제기했던 조선국가의 정치 개혁과 부패 관료의 청산과제가 1년 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자료는 〈중범공초(重犯供草)〉다. 이는 1895년(고종 32)부터 1899년(광무 3)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 발생한 민요(民擾) 등에 가담한 중범(重犯) 죄인을 심문한 공초 자료이다. 모두 9책으로 되어 있다. 중범죄 사례는 대부분 민란 관련, 사주(私鑄)‚ 사굴인총(私掘人塚) 등의 죄와 관련된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제5~6책, 그리고 9책에 수록된 부분이다. 먼저 제5책은 황해도 지방의 동학 잔존 세력의 병란 모의와 관련된 기사이다. 장연군 신화방(薪花坊) 산포수를 조직하여 다시 봉기를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주모자는 백락희(白樂喜)와 김재희(金在喜) 등이었다. 백락희는 당시 38세로서 1894년 7월 동도(東徒)에 들어가 교장 명색으로 활동하다가 1895년 봄에 귀화하였다가 그해 11월에 산포수 도반수인 김재희와 공모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1895년 12월 12일에 해주 김창수(金昌守) 가를 방문하여 김형진(金亨鎭)을 만나 모의하게 되었다. 김형진은 청국 심양에 가서 마대인(馬大人)을 만나서 심양자사 연왕 이대인(李大人)에게 ‘진동창의(鎭東倡義)’인신과 직첩을 받아 조만간 병사를 거느리고 출래할 것으로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자신은 평안, 전라, 황해 3도 통도총관이 되고, 백락희는 장연 선봉장이 되어 각군병을 이끌고 취회하여 먼저 군기를 탈취한 후 관장과 관속을 도륙해서 오면, 검단방 유학선, 안악 대덕방 최창조, 문화 차담동 명부지 이가(李哥) 등과 힘을 합쳐 해주부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다음에는 황해도 제군을 소탕하면 청병이 올 것이니 이와 합세하여 도성을 도륙한 후에 정(鄭)씨로서 왕을 삼으면 대사를 다스릴 수 있다고 선동하였다. 봉기예정일은 1896년 1월 초 1일이었으나 사전 탄로가 났다. 그래서 붙잡힌 백락희를 비롯하여 전양근(24세), 백기정(38세), 김계조(41세), 김의순(30세), 백락규(31세) 등 6명 공초가 수록되어 있다. 6책에는 해주부 장연군수 염중모(廉仲模)의 보고서와, 앞서 수록된 공초가 중복되어 첨부되어 있다. 황해도 장연 일대의 봉기 모의는 이전 정감록을 차용하여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1812년 홍경래란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가 황해도 지역에서 실패한 이후 황해도 장연군 일원에서 동학의 잔당 인사들이 대규모로 반정부 봉기를 추가로 계획하고 있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제9책은 〈흥덕난민공초(興德亂民供草)〉라는 제목이 붙여진 자료로 1899년 1월 7일 장성군수 김성규(金星圭)가 흥덕군 민란을 조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한 기록이다. 1898년 12월 28일 새벽에 난민 수백 명이 흥덕 동헌에 난입하여 일으킨 사건을 수서기 박우종(朴佑鍾)이 조사하였다. 보고서에는 민란 두목 이화삼(李化三)과 수종 이이선, 이복환, 정계술, 박기수, 채기엽 등 6명을 전달 30일에 해군의 관속과 각촌민이 합세하여 순교청에 잡아들였고, 이어 31일에 난민이 해산되었다고 간단히 요약되어 있다. 봉기의 주모자는 이화삼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진행되었던 만민공동회를 모방하여 민회(民會)를 개최하였다. 그는 “흥덕 원(군수)을 여기에 두고 재판하는 게 가(可)하냐, 월경을 시키고(군수를 내쫓고) 우리거지(행동거지) 공사(公事)하는게 가하냐”는 극단 질문을 해서 흥덕군민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봉기를 일으켰다. 이 공초 내용은 주로 주모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후 미흡한 사후 조처로 인하여 5월 4일 흥덕민란을 재차 일어나기도 했다. 1899년초 흥덕민란의 주모자들은 ‘갑오동학여당(甲午東學餘黨)’‘갑오누비(甲午漏匪)’라고 지칭되듯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 이후 잔여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서양 종교 영학(英學)을 이용하여 고창과 고부, 흥덕지역을 거점으로 고창, 고부 등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동학농민 재봉기를 잇고자 하였다. 이처럼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구현이 여전히 미완의 농민적 개혁이념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정배안과 더불어 중범공초는 모두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범공초의 경우,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별도로 정서한 필사본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범공초〉 9책 흥덕민란에 대한 정부 보고서. 서울대 규장각 제공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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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2 13:36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7)염견(焰肩) 도상의 세계적 전파, 태양신에서 종교 권위자로

교회, 성당, 불교 사찰,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이슬람 모스크에는 태양신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은 어깨의 화염이다. 무슨 소리일까? 인류 초기부터 태양은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샤마쉬(Shamash)는 그 대표적인 신이었다. 그런데 샤마쉬의 모습에는 매우 특이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성한 존재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염견(焰肩)' 도상이다.(그림 1) 어깨에서 솟아나는 화염은 원래 신의 권위와 왕의 통치권을 상징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 방식은 문화권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기독교, 불교, 무속 신앙,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최고 권위자를 표현하는 보편적 상징으로 발전했다. △ 왕권과 신성: 고대 태양신 숭배의 발전 태양신 숭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간 중요한 문화 현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태양신 샤마쉬는 정의와 공정의 상징이었으며, 어깨에서 뻗어나오는 불꽃으로 그려졌다. 특히 함무라비 법전의 조각에서는 샤마쉬가 왕의 통치 권력을 인정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그림1) 태양신 숭배는 이란 고원에서 미트라교로 변화했다. 미트라교는 태양신의 능력을 화염과 빛으로 나타냈고, 이후 로마 제국에서도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런 전통이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숭배로 이어졌다. 아후라 마즈다는 빛과 선을 상징하는 신으로, 날개 달린 원반과 화염으로 표현되어 왕의 통치력이 신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 성스러운 빛의 표현: 기독교와 이슬람의 염견 기독교 초기의 염견 도상은 그리스-로마의 태양신 아폴론과 헬리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4세기 바티칸 지하 무덤의 그리스도 모습은 태양신의 빛나는 형상과 섞여 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이 표현이 만돌라(Mandorla)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깨의 불꽃이 온몸을 둘러싸는 거룩한 빛이 되었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그림2) 이슬람 미술에서는 예언자 무하마드가 하늘로 올라가는 미라지 장면에 염견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일칸국 시대의 역사책 필사본들은 무하마드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왕권을 상징하는 전통과 이슬람의 예언자 사상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이다.(그림3) △ 빛과 불의 신들: 인도-이란 문화의 연결고리 고대 인도와 이란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는데, 특히 태양신 신앙에서 이런 공통점이 잘 드러난다. 힌두교의 수리야와 페르시아의 미트라는 모두 '빛나다'를 뜻하는 'swar'에서 비롯되었고, 두 신 모두 태양 수레를 타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불을 다루는 신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힌두교의 아그니는 제사를 주관하는 신으로, 브라만 사제들이 관리하는 성스러운 불꽃과 관련이 있다.(그림4) 이란의 아타르 역시 조로아스터교에서 마기 사제들이 모시는 거룩한 불로 여겨졌다. 이러한 신들의 모습은 쿠샨 왕조 시기에 이르러 더욱 복잡하게 섞였고, 간다라 지역에서는 힌두교와 페르시아의 전통이 불교 미술과 만나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림4)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 △ 카니시카 왕의 시대: 문화 교류의 황금기 쿠샨 왕조는 월지라는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로, 박트리아에서 시작해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지역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었다. 특히 127년부터 150년까지 통치한 카니시카(Kanishka) 왕 시기에 문화 교류가 절정에 달했다. 카니시카 왕이 만든 동전에는 왕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그림5)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상징이었다. 카니시카 왕은 또한 불교를 적극 지원했는데, 이로 인해 간다라 지역의 불교 미술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가필시(Kapisi)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페르시아 미술의 전통과 불교가 만나 만들어진 독특한 불꽃 표현을 보여준다.(그림6) △ 불꽃에서 빛으로: 한국 불교 미술의 염견 수용 간다라에서 시작된 염견 도상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거쳐 중국에 도착했고, 마침내 한국과 일본까지 퍼져나갔다. 키질(그림7), 호탄(그림8), 돈황(그림9), 운강, 병령사의 석굴 사원과 하북 석가장의 불상(그림10)에서 발견되는 어깨의 불꽃은 이 도상이 동아시아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불교 미술에서도 이 전통이 이어져, 무주 안국사 칠성탱(그림11)과 미황사 괘불탱(그림12)에서는 팔에서 머리까지 오색 빛으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염견 도상이 동아시아까지 전해지고 변화한 것은 고대 유라시아의 활발했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그림8) 신강 호탄 부처상의 염견 (그림9) 막고굴 263굴 부처상의 염견 (그림10) 석가장 금동불좌상(300년경) (그림11) 무주 안국사 칠성탱 어깨 주위의 방광(放光) (그림12) 전남 미황사 괘불탱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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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1 13:58

[청년 이장이 떴다] "나도 꼬부랑 간판 읽고 싶어"⋯할매들이 영어를 공부하게 된 사연

'청년 이장' 취재진들이 만든 화정마을 아지트가 문 연 지 하루도 안 돼 소란스럽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벌벌 떨면서도 할머니들이 아지트로 모여듭니다. 저기 멀리 학생처럼 가방을 들고 오는 오율례(76) 할머니도 보이네요. 할머니들이 아지트에 왜 모였냐고요? 오늘은 아지트에서 영어 수업이 열리는 날입니다. 지난 6일 오후 1시 30분에 열린 영어 수업은 그동안 할머니들에게 접수된 민원 중 하나였습니다. 몇 주 전 이칠월(90) 할머니는 슬쩍 다가와 "청년 이장, 영어 좀 아는가? 장에 나가믄 간판을 못 읽겄당게"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 일본 여행을 다녀온 율례 할머니도 "화장실이 일본어·영어로 쓰여 있는데 뭐라고 써 있는지 몰라 못 갔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습니다. 화정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도 환갑이 넘었다 보니 대부분 영어보다는 한자에 익숙한 세대뿐입니다. 한자는 막힘없이 턱턱 읽을 수 있지만 꼬부랑 글씨 같은 영어는 언제 봐도 큰 산처럼 어려워만 보입니다. 읍내에 나가도 간판마다 영어가 잔뜩 적혀 있는 터라 못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청년 이장으로서 영어를 알려 드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화정마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불편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의뢰해달라고 말한 청년 이장들이 말을 지킬 때가 왔습니다. 대망의 첫 수업 날, 수능을 앞둔 고3 교실을 방불케 했습니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고 딱딱한 의자에 앉았지만 불편한 내색 없이 영어 수업에 집중했습니다. 눈이 침침해 선도 잘 안 보이지만 영어 노트 위에 알파벳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합니다. 처음 써 보는 영어 노트에 대문자, 소문자 할 것 없이 다 한 줄에 쓰기도 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갑자기 칠월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십니다. "할머니, 왜 그러셔요. 뭐 불편하셔?"라고 묻자 "눈이 침침혀! 안 보여! 나 집만 빨리 갔다 올게"라고 대답하십니다. 돋보기 안경이 없어 집중하기 어렵다는 할머니입니다. 1시간이 넘도록 알파벳을 쓰면서 굳어버린 손이 아파 바르르 떨더라도 내색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복습하겠다며 다 걷어온 영어 노트와 연필·지우개를 찾으십니다.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열일곱 소녀처럼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이고, 진짜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 정말 영어 배우고 싶었는디 너무 고마워." 오늘 영어 수업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진은 쏙 빠졌지만 할머니들을 위해서 우리는 매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1시간 영어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농번기가 오면 이마저도 어려워질 테니 조금씩 속도를 내 보려고 합니다. 화정마을 영어 수업은 다른 수업과 달리 목표가 크지 않습니다. 1등을 만드는 것도, 유창한 영어 회화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ABC 수준이어도 좋습니다. 그냥 읍내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셔서, 자식·손주와 해외에 나가서 영어 간판을 읽지 못해 헤매는 일이 없는 날이 오기를 그려 봅니다. 디지털뉴스부=문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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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8 10:07

[청년 이장이 떴다] 온종일 뚝딱뚝딱⋯옛 마을회관 아름다운 변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신(神)만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청년 이장이 해냈습니다. 가구라고는 싱크대뿐이었던 냉기 가득한 화정마을 옛 마을회관은 아늑한 아지트로 바뀌었습니다. 장판 깔기부터 방 꾸미기까지 해 본 우당탕탕 이야기보따리 한 번 풀어보겠습니다. 참고로 청년 이장들은 창문에 단열 에어캡 '뽁뽁이'도 안 붙여봤습니다.(우당탕탕 덤앤더머 같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완주 고산면사무소의 지원을 받아 지업사에서 가지고 온 장판 매트를 옮기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청년 이장의 자동차는 모닝인데 300x400, 400x500 크기 매트를 구겨 넣으려니 곧 차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겨우 옮기긴 했는데 직접 깔아야 한다니 정말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일단 돌돌 돌려 깔고 보니 제법 그럴싸해 보입니다. 혹여나 냉기가 올라올까 걱정돼 매트 테두리 전체에 테이프도 붙였습니다.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청년 이장 둘이서는 할 수 없다는 판단에 같은 디지털미디어국 영상제작부 기자들의 도움까지 받았습니다. 한 명은 장판을 붙이고, 한 명은 테이프를 자르고, 또 한 명은 테이프를 연결하고. 나름대로 분업 끝에 한 시간에 걸쳐 장판 깔기를 마쳤습니다. 잠시도 엉덩이를 붙일 틈이 없었습니다. 아직 장판만 깔았을 뿐 갈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장판 위 청소하기, 책상·의자 설치, 테이블보 깔기, 행거·수납장 조립하기, 단열 에어캡 붙이기. 그래도 천천히 하나씩 해 나갔습니다. 줄어들지 않을 것 같았던 할 일도 어느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날이 너무 추워 냉기가 들어올까 봐 단열 에어캡 뽁뽁이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청년 이장 두 명과 영상제작부 기자들까지 세 명은 처음 붙여 보는 뽁뽁이에 머리를 맞대고 설명서를 읽었습니다. 일단 분무기가 필요한 듯합니다. 문제는 분무기가 없습니다. 일단 고민도 없이 경로당으로 향했습니다. 오늘도 할머니들은 모여서 왁자지껄 이야기 꽃을 피우고 계시네요. 분무기가 있냐고 물어보자 분무기는 없고 떡과 배만 있다고 합니다. 분명 분무기 빌리러 간 건데 제 손에는 떡과 배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 분무기 있당게! 같이 가자고"라는 할머니의 말에 곧바로 할머니 댁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도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직접 만드신 단호박 식혜입니다. 아지트에 있던 두 명은 바리바리 싸 온 청년 이장에게 "뭐야? 뭘 그렇게 많이 가지고 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정을 가득 안고 돌아왔습니다. 어르신들의 정에 힘입어 다시 속도를 냈습니다. 그렇게 안 끝날 것 같던 아지트 꾸미기도 다 정리됐습니다. 이곳은 마을주민들이 와서 커피도 마시고 공부도 하고 시골에서 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책상·의자를 들이고, 행거를 들이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소품도 놓으니 뭔가 집 같습니다. 제법 모습을 갖춘 아지트는 이미 마을주민들의 마음을 쏙 빼앗은 듯합니다. 아지트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실 때는 '내일 또 여기 와야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가시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08 10:06

[청년 이장이 떴다] "아따, 잘 꾸몄네"⋯10년 만에 마을회관 본 주민들 반응은?

화정마을에 새 경로당이 생긴 지 벌써 10년, 마을주민과 동고동락했던 옛 마을회관이 문 닫은 지도 10년이 됐다는 말입니다. 건물을 허물지 않았지만 귀농·귀촌인 등이 잠시 머무는 거처가 되면서 마을주민도 옛 마을회관에 들어가는 게 조심스러워졌습니다. 평생 못 들어갈 줄 알았던 옛 마을회관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경로당 가던 할머니들도, 게이트볼 치러 나가려던 할아버지들도 마을회관이 아지트가 됐다는 소식에 구다보고('들여다보다'의 전라도 사투리) 가십니다. "나 진짜 10년 만에 들와보네. 그때 생각 나, 성님도 글치?" 놀랍게도 불과 일주일 전 옛 마을회관을 청소하던 '청년 이장' 취재진들에게 "여긴 못 써, 추워!"라고 말하던 마을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지나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할머니·할아버지들도, 경로당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묻던 이장님도 인정(?)하는 아지트가 됐습니다. "아니, 이렇게 아늑혔다고? 아따, 잘 꾸몄다!"부터 "진짜 옛날 생각 난다잉"까지. 반응도 제각각이지만 다 긍정의 표현을 하십니다. 내심 '너무 춥지 않을까? 이거 사람들이 오긴 할까?' 걱정하던 청년 이장들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 '삐그덕' 나무 문이 열리고 문틈 사이로 이경구 노인회장이 고개를 내미십니다. 평소 무뚝뚝하시던 회장님은 "벌써 문 연 겨? 깨끗하게 잘해 놨네잉"라는 말씀만 남기고 바로 게이트볼을 치러 가셨습니다. 그래도 성공입니다. 이제 이곳에서는 좋은 일들만 일어날 것입니다. 평소에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날은 청년 이장과 공부를 하기도 하겠죠. 매일 모여 화투만 치던 할머니들도, 게이트볼 치러 다니던 할아버지들도, 집에만 있던 어르신들도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든 아지트가 조용한 시골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이번 주도 화정마을로 출근해 보겠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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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우
  • 2025.02.08 10:06

[작지만 강한 우리마을]②365일 강정처럼 단단하게…남원 웅치마을, 기적을 만들다

"이제는 마을 주민 누구나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가난했던 곰재마을은 잊어주세요” 최미아 웅치마을영농회 대표는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난 웅치마을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웅치마을은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도 강정 사업을 중심으로 지역 경제를 일으키고, 공동체의 자립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내며 주목받고 있다. 웅치마을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농사지은 옥수수와 들깨를 전량 수매해 어르신들이 시장까지 가지 않고도 마을 내 공장에서 즉시 수매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공장에서 작업에 참여하는 주민들에게는 시간당 1만 원의 인건비가 지급돼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웅치마을 주민들은 고령화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 단순한 농산물 재배에서 벗어나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다양한 강정을 가공·판매하며 경제적 자립 기반을 구축한 셈이다. 나아가 농촌 체험 프로그램과 관광을 연계해 마을을 찾는 방문객이 증가하면서 지방소멸 위기 극복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최 대표는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농사만 지어도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마을 전체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하고 외면받던 곰재마을에서 새롭게 태어난 웅치마을 웅치마을은 원래 ‘곰재마을’로 불렸다. 그러나 1995년 지방행정 개편으로 ‘웅치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곰재마을이라는 이름은 남원 지역에서 가난하고 발전이 더딘 곳으로 여겨져 주민들에게조차 부끄러운 과거의 상징이었다. 최 대표는 “예전에는 곰재마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불편한 시선을 받곤 했다”며 “마을 이름이 바뀌고 강정 사업을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인식도 크게 변했다”고 회상했다. 웅치마을의 변화는 단순한 명칭변경에서 끝나지 않았다. 주민들은 마을을 새롭게 가꾸기 위해 매년 꽃을 심고 가꾸며 ‘꽃이 있는 웅치마을’을 만들어갔다. 특히 2018년 5월 본격적으로 시작한 강정 사업은 웅치마을을 ‘못사는 곰재마을’에서 ‘잘 사는 웅치마을’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 인내와 도전의 3년 웅치마을은 지리산 자락 초입에 위치해 자연의 풍부한 혜택을 받고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쌀과 옥수수, 쥐눈이콩, 땅콩, 들깨 등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활용해 방부제 없이 전통 방식으로 조청을 만들어 강정을 생산한다. 주요 제품으로는 곰재강정, 곰재옥수수강정, 들깨땅콩강정, 찰옥수수 뻥튀기 등이 있다. 이 강정들은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영양 간식으로 입소문을 타며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웅치마을의 강정은 건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주민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최 씨는 “우리 손으로 키우고 만든 강정이 마을의 상징이 됐다”며 “그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정성과 역사를 함께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웅치마을 강정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웅치마을의 강정 사업은 2016년 남원시 환경 취약지구 개선사업에서 12억6000만 원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시작됐다. 웅치마을영농회라는 마을기업을 설립하고 마을회관 옥상에서 소규모로 출발했지만, 초기 3년은 경제적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고령층이었고, 여성들이 농사와 공장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환경 탓에 인건비 부담이 컸다. 최악의 경우 최 대표와 마을 이장은 무급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기업의 수익 분배 구조도 문제였다. 판매 금액의 10%를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방식은 마을 신뢰를 얻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마진이 적어 자립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 대표와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강정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조청을 직접 달여내는 노력을 이어갔다. 동시에 홍보와 유통망 다변화에도 주력했다. 그 결과 웅치마을의 강정은 전국 농협 로컬푸드 매장과 우체국, 온라인 쇼핑몰 등에 입점해 판매되기 시작했고, 연매출 2억 원을 기록하는 건실한 마을기업으로 성장했다. 강정뿐만 아니라 조청 해석 공장과 체험장을 조성해 연간 2000여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며 농촌 관광지로도 자리 잡았다. 강정 만들기 체험은 가족 단위 방문객과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며 마을의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가는 길, 마을 주민이 직접 그리다 웅치마을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마을 경관 개선과 공동체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주민들은 2016년부터 새뜰마을 가꾸기 사업을 통해 환경 정비에 나섰고, 그 일환으로 무궁화 800그루를 심어 마을 곳곳에 꽃동산을 조성했다. 무궁화꽃은 단순한 경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매년 피어나는 무궁화는 주민들의 땀과 노력을 상징하며, 마을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웅치마을은 ‘365일 태극기 휘날리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주민들은 국경일뿐 아니라 매일 태극기를 게양하며 애국심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다. 이러한 활동은 여러 차례 방송과 언론에 소개되면서 마을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마을은 어르신들을 위한 문화·여가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트로트 장구, 농악단 활동을 통해 주민들은 함께 어울리며 세대 간 유대감을 쌓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주민 간 소통을 활성화하고, 마을 내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웅치마을의 성공은 단순히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체를 일구어낸 결과다. 지방소멸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웅치마을은 농촌 재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희망의 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 웅치마을은 강정 이외에도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곡물바, 전통 디저트 등의 신제품 개발을 검토 중이며 도시 소비자들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또 마을 내 젊은 층의 유입을 유도하고 세대 간 협력을 통해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강화할 계획이다. 최 대표는 “마을의 발전은 결국 사람에서 시작된다”며 “우리가 힘들게 만들어온 성과를 다음 세대와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5.02.06 17:2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2) 경상도 상주와 김산소모영의 동학농민군 진압 자료인 〈소모사실〉

〈소모사실(召募事實)〉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붙인 사료가 1895년에 경상도 상주와 김산 두 지역의 소모영에서 나왔다. 상주의 〈소모사실〉은 상주 소모사 정의묵(鄭宜默, 1847~1906)이 상주소모영을 설치해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기간에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건곤(乾坤) 두 권의 자료이고, 김산의 〈소모사실〉은 김산 소모사 조시영(曺始永, 1843~1912)이 김산소모영을 설치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을 지휘한 기간에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단권 자료이다. △소모사 선임 과정 소모사는 왕조정부가 외적이 침입하거나 병란이 일어나서 위기에 처했을 때 민간에서 사람들과 재물을 모아 대처하도록 군권을 부여한 임시 관직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몇 차례 소모사를 임명한 사례가 있었다. 먼저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할 때 민간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소모사를 임명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순조대에 서북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소모사를 임명하였다. 가장 많은 소모사가 임명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였다. 불과 28년이 지난 1894년 9월에 다시 소모사를 임명한 것은 왕조정부가 삼남을 중심으로 거의 전국에 걸쳐 대규모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자체 무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9월 22일 임시 군사지휘부인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해서 경군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 직후 경기도의 전감역 맹영재를 소모관에 임명하였고, 경상 감영의 남영병을 이끌던 대구판관 지석영은 토포사에 임명하였다. 호남의 장성부사 이병훈은 소모사를 겸하도록 했고, 금산유학 정두섭도 소모관에 임명하였다. 9월 29일에는 삼남 요지에 각각 2명씩 현직 지방관을 선정하여 소모사에 임명하였다. 영남소모사에는 창원부사 이종서와 함께 상주의 향리에 있던 전 승지 정의묵을 선임하였다. 상주 목사는 9월 22일에 상주 읍성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될 때 도피해서 공관 상태였다. 영남 북서부 일대는 8월 말부터 격동하고 있었다. 예천에서 동학농민군과 읍내 민보군이 격돌하여 공방전을 벌였고, 9월 18일 동학 교단의 기포령 직후 상주와 선산 읍성을 동학농민군이 점거하였다. 그러자 상주 낙동과 태봉, 선산 해평에 설치된 일본군 병참부의 주둔병이 기습해서 읍성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상주성에서 물러난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집중 추적해서 경내를 안정시켰다. 김산소모사 조시영이 임명된 날은 11월 21일로 일본군과 남영병이 동학농민군을 평정해서 경상도 지역에서 봉기 상황이 종료된 시기였다. 바로 그때 충청도에서 우금치전투를 치른 손병희 통령의 북접농민군이 전라도를 거쳐 김산 인근까지 북상해왔다. 김산과 상주소모영이 최대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두 편의 〈소모사실〉에 실린 마지막 문서들은 그 내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소모사실〉의 공문서와 소모영의 관할 군현 상주의 〈소모사실〉 건은 10월 16일부터 12월 11일까지 주고받은 92건의 공문서를 모은 것이고, 〈소모사실〉 곤은 12월 12일부터 다음해인 1895년 정월 25일까지의 130건을 모은 것이다. 김산의 〈소모사실〉은 11월 21일부터 1895년 정월 22일까지 주고받은 138건의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김산소모영에서 공문서를 주고받은 날은 모두 56일이고, 상주소모영은 모두 69일이다. 상주소모사의 임명 날짜인 9월 29일보다 17일이나 늦게 공문서 편집이 시작된 것은 임명장이 뒤늦게 왔기 때문이다. 경상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권 부여자는 더 임명되었다. 창원부사 이종서, 그리고 거창부사 정관섭도 소모사가 되었고, 대구판관 지석영과 인동부사 조응현은 토포사가 되었다. 따라서 책임 소재를 위해 관할지역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경상감사 조병호를 만나서 이를 제의하였고, 이에 따라 경상감사는 60개 군현을 나누어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북부 15개 읍, 대구토포사 지석영은 대구에 인접한 12개 읍, 인동토포사 조응현은 중부의 9개 읍, 거창소모사 정관섭은 지리산에 인접한 12개 읍, 창원부사 이종서는 남부의 12개 읍을 분장하도록 했다. 상주소모사는 상주 함창 문경 의성 용궁 예천 예안 안동 풍기 봉화 순흥 영천 청송 진보 영양을 관장하였다. 이런 조치 직후 다시 조시영이 김산소모사에 임명되자 인동토포사가 관할하던 9개 읍인 인동 칠곡 선산 개령 김산 군위 의흥 비안 성주 고령과 의흥을 관장하게 하였다. 1894년에 전국에 임명된 소모사 소모관 토포사 조방관 등이 많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공문서집은 오로지 상주와 김산소모영에서 편찬한 것뿐이다. 상설이 아닌 임시로 운영된 기관은 관련 문서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활동 실적을 알리면서 운영 경비를 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주소모영의 기록은 처음부터 철저히 편집해서 상주 〈소모사실〉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양호도순무영 등에 보고한 문서를 남김없이 수록하여 〈갑오군정실기〉나 〈고종실록〉 등에 들어가지 않은 여러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김산소모사 조시영은 먼저 소모영을 운영한 상주의 선례를 직접 알아본 다음에 김산소모영을 설치하였다. 공문서를 보관해서 책자로 만드는 내용도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 △〈소모사실〉의 주요 내용 상주 〈소모사실〉에 전재한 공문서를 왕래한 대상에 따라 모아보면, 다음 표와 같이, 상주목과 각 면리에 보낸 공문이 91회로 가장 많다. 상위 기관인 의정부와 순무영 그리고 군무아문과 주고받은 공문은 14회이고, 경상감영과는 36회를 왕래하였다. 이 자료에 전재된 소모영막하파임기(召募營幕下爬任記)와 소모절목, 그리고 군문규획(軍門規劃) 등은 소모영의 편제와 운영 방침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김산 소모영의 편제와 운영 등을 전하는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런 까닭에 이 내용으로 추정해야 한다. 김산 〈소모사실〉에 전재한 공문서의 왕래 대상은 상주와 다르다. 북접농민군이 김산으로 행군해올 것에 대비해서 추풍령을 방어하던 군관과 병정에게 보낸 공문이 눈에 띈다. 김산소모영 활동 기간에서 가장 황급하게 보낸 시기가 북접농민군 대군이 경상도로 들어올 것을 우려하던 때이다. 공문의 표현을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전라도 무주의 적당 수만 명이 둔취하여 이미 황간읍의 성을 함락시키고 여러 날 청산현 지역에 진을 치고 있다가 장차 괘방령과 추풍령의 두 재 사이로 향하려 하는데, 그들 명성과 위세가 워낙 거세므로 비단 누차에 걸쳐 해당 읍에서 구원을 청할 뿐이 아니고 이 적당이 만일 재를 넘는다면 재 밖의 모든 군현은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릅니다.” 김산소모사 조시영과 상주소모사 정의묵이 공문을 통해 다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북접농민군을 막기 위해 추풍령에 경상도 각 군현의 민보군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김산소모사 조시영은 주장을 했고,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상주성이 가장 위험하니 보은에서 상주로 오는 길목을 집중해서 지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합의를 하지 못하고 각 소모사가 관할하는 군현의 민보군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상주에는 안동 민보군 370명, 예천 민보군 516명, 용궁 민보군 21명, 함창 민보군 20명, 대구 남영병 50명이 집결하였다. 외지에서 온 관군과 민보군이 모두 977명이었다. 여기에 상주 민보군을 합하면 그 수는 적지 않았다. 김산에서 추풍령을 막던 병력은 규모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데, 대구 남영병 150여 명과 선산포군 150명, 개령포군 95명, 인동포군 100명, 성주포군 10명 등 500여 명으로 나온다. 북접농민군이 보은으로 행군하자 추풍령 방어군은 이들을 뒤따라서 보은까지 들어갔다. 김산소모사 조시영이 경영(京營)에 보낸 공문에는 김산의 실상이 잘 드러난다. 김산은 교통의 요지로 보은과 영동, 무주와 진안 등과 쉽게 연결된다. 동학 교단의 영동포 등의 조직이 김산에 이어지고, 무주와 금산 등과 오가면서 김개남 장군과도 연계된 기록이 나온다. 김산 〈소모사실〉에 그러한 내용이 같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보은의 동학과 연결해서 활동하던 김화준과 김순필은 동학교주 최시형의 혈당이라고 하였다.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증언이다. 보은을 거점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에 조직이 있는 충경포가 활동했는데 김산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산 동학농민군의 거두가 4인인데 그중 5 ~ 6만명을 거느린 남홍언과 편사흠은 “전라도 한 도는 거의 다 성을 함락하였고, 충청도와 경상도 두 도는 장차 도륙(屠戮)할 것이니, 통일하는 계획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라고 전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남원에 주재하고 개남왕을 칭하던 김개남 처소에 가서 신하라 일컫고 이런 뜻을 담은 소초(疏草)를 올렸는데 그 글을 그들의 집에서 찾아냈다고 하였다. 전봉준 장군과 관련된 내용도 나온다. 무주에서 활동하던 전천순과 김원창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전봉준의 폐부(肺腑) 역할을 하는 괴수로, 영남에 출몰하면서 기포를 독려’했다고 하였다. 상주 〈소모사실〉은 개인 소장이고, 김산 〈소모사실〉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는 공공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산 〈소모사실〉이 등재되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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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5.02.05 17:12

[청년 이장이 떴다] 시골 마을에 아지트?⋯손님 맞이 준비 '착착'

화정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빈집이 시끌벅적합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마을 가득 퍼집니다. 빈집 주변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인기척에 슬리퍼만 신고 나와 빈집 창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요리조리 살핍니다. "아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나 했더니 우리 청년 이장님들이었어?" 맞습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아지트를 만드는 사람들, 바로 '청년 이장' 저희들입니다. 어떻게 저희가 아지트를 만들게 됐냐고요? 한 달여 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본격적인 <청년 이장이 떴다> 기획 취재에 앞서 화정마을을 답사하던 중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장님의 도움을 받아 문을 열어보니 냉기가 돌았습니다. 보일러도 안 되고 낡은 곳도 많지만 쓰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이곳은 옛 마을회관입니다. 바로 옆 경로당이 생기면서 마을회관 대신 귀농·귀촌인 등이 잠시 머무는 거처 역할을 해 왔습니다. 지난해 말까지도 사람이 살았지만 다시 빈집이 됐습니다. 이장님 말에 '청년 이장' 취재진은 귀가 솔깃했습니다. 고민 끝에 이곳에 아지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저희의 집(?), 마을 아지트가 생겼습니다. 지역 소멸을 겪는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우리의 색깔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아직 아지트는 가구도 없고 휑한 공간입니다. 일단 이곳저곳 있었던 거미줄을 치우고 먼지 가득 쌓인 창틀을 닦으니 금새 사람 사는 집이 됐습니다. 이번주부터는 쓸 수 있도록 인테리어 등에 속도를 내면서 손님 맞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히도 고산면사무소는 책상·의자를, 이웃 마을인 용진읍에 사는 주민은 블라인드를 지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당분간 화정마을에는 "버스가 없어서", "다리가 아파서"라는 말은 없습니다. 읍내에 나가기 어려웠던 마을 주민들은 그동안 매일 경로당에 모여 화투 치고 이야기 나누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수십 년 잡고 있었던 화투 패는 잠시 내려놓고 이제는 붓·펜·아령을 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첫 날 말했듯 청년 이장이 온 이상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농번기가 오면 오전에는 같이 작업복 입은 채소 밭을 매고 오후에는 이곳에 모여 새로운 추억을 쌓게 되겠지요. 쉽지 않겠지만 평소 경로당에 나오지 않던 마을 주민부터 경로당 할머니들·게이트볼 할아버지들과 차 한 잔 마시고 여러 프로그램도 하는 '따뜻한 아지트'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5.02.01 11:34

[청년 이장이 떴다] "잘 부탁드려요"⋯정성 가득 담은 한 그릇 맛있게 ‘후루룩’

오늘은 22일, 완주군 민생안정 지원금을 나눠 주는 날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지원금을 배부한다는 말에 일찌감치 마을 사람들이 경로당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청년 이장이 떴다' 취재진들은 다른 때보다 경로당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점을 고려해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화정마을 정기총회 때 지원금 배부가 점심 때쯤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음식을 뽐낼 솜씨는 아니지만 맛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믿음 하나로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일회용품 없는 전북' 만들기에 동참하기 위해 전북특별자치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에 전화해 다회용기부터 대여했습니다.(나름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쉬웠지만 장보기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애호박, 당근, 양파 등 구입할 것은 모두 정했는데 50인분은 처음이라 재료를 얼마나 사야 할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애호박을 들었다 놨다, 당근을 들었다 놨다, 양파를 들었다 놨다. 몇 번을 반복하고는 한 보따리 장을 보고 재료 손질부터 했습니다. 정말 많았습니다.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재료들.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많더군요. 문제는 장보기도, 재료 손질도 아니었습니다. 끓이기만 하면 되는데 어마어마한 양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났습니다. 일단 경로당에 있는 큰 냄비란 큰 냄비는 다 꺼냈습니다. 육수부터 내고 재료를 넣고 팔팔 끓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소면을 삶아야 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저희를 보고 불안해하셨습니다. 그냥 지켜보시는가 했더니 참지 못하고 한 마디씩 던졌습니다. "우리 청년 이장님들을 보고만 있자니 불안한디?"부터 "50인분은 쉽지 않을 텐데", "경로당은 좁으니께 다 가지고 나와. 우리가 소면을 삶을게"까지. "보기만 하셔요. 저희가 다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지만 그 누구도 저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도움을 받았습니다.(정말 저희끼리는 할 수 없는 일이더군요.) 마음은 급해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속도를 낼 수 없었던 취재진들과 달리 속전속결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말 안 하고도 어르신들은 소면 씻기, 1인분씩 덜기, 그릇에 담기, 경로당으로 옮기기 등 각자 자리를 잡고 속도를 냈습니다. 어르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녁을 대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차저차 국수를 완성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일단 국수의 모습은 갖춰야 할 듯해 처음 만들어 본 달걀 지단까지 올렸습니다. 평소 취재진들을 묵묵히 지켜 보시던 아버지·할아버지들도 고맙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하루 힘듦을 다 잊게 만드는 한 마디입니다. 저희를 흔쾌히 청년 이장으로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수 대접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저희 사무실이자 화정마을 사랑방이 될 구 마을회관을 둘러봤습니다. 아참, 저희에게 드디어 집(?)이 생겼습니다. 아직은 거미줄도 많고 곳곳에 흠집도 있고 고칠 게 산더미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습니다. 진짜 화정마을 주민이 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 많이 놀러 와 주세요!

  • 기획
  • 박현우
  • 2025.01.2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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