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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산공원 의견상, 오수개와 다르네

지난 2월12일 이 코너 ‘타향에서’를 통해 오수개 이야기를 했다(‘오수개 있음에 임실이 있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서 잠이 든 사이 불이 나자 개울을 오가며 제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살리고 죽은 개다. 오늘 한 번 더 오수개, 정확히는 오수개 동상을 이야기한다. 남원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우리집은 남원 시내보다 임실군 오수면과 더 가까웠다. 오수개의 사연을 일찌감치 접할 수 밖에 없었다. 오수개 복원의 첫 걸음으로 1996년 오수견연구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성장기에 오수개의 강렬한 스토리가 뇌리에 각인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오수개를 부활시켰다. 과학은 기본이고 미(美)까지 탐구했다. ‘목적에 적합하도록 완성된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충실했다. 처음부터 막연하나마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했다. 국제축견연맹(FCI)의 원산지 기준을 과정과 단계마다 엄격히 적용했다. 중후하고 믿음직한 오수개는 그렇게 부활했다. 역사에서 현실로 실체를 드러낸 오수개, 복원된 오수개는 그러나 시빗거리도 들고 왔다. 바로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22번지 원동산 공원의 의견상이다. 고증과 유전학으로 육종해 낸 오수개와 의견상의 오수개 모습이 딴판이기 때문이다. 오수JC 심재석 전 회장이 특히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이다. 이 의견상은 1997년 세워졌다. 오수개를 되살려 내기 전이다. 동상 오수개가 실물 오수개를 닮지 않은 이유다. 상상으로 만든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귀와 갈기털 등 오수개와 다른 구석이 많다. 게다가 너무 높은 곳에 동상을 설치한 바람에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기는커녕 기념촬영을 하기에도 불편하다. 동상을 실제 오수개 형태로 다시 빚고, 명칭도 ‘의로운 오수개’식으로 새로 붙임직하다. 동상은 ‘그까짓’ 게 아니다. 동상은 일방적, 무조건적 긍정이다. 본받아야 마땅할 대상만 동상으로 제작해 기린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동상이다. 따라서 동상은 사실과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기존의 의견상은 오수개의 상징성을 웅변하기에 부족하다. 동상을 보고 받은 감동과 교훈을 살아있는 오수개에게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수개의 감동적인 충의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미덕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과 사랑에 빠졌다. 극진한 사랑에 감동한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여성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간절하면 하늘도 돕는 법이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효과’를 오수개 동상에 원용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새로운 오수의견상에는 ‘불끄는 개’의 이미지가 추가됐으면 좋겠다. 119구조견, 그 가운데서도 소방견으로 오수개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화재예방협회(NFPA)의 달마시안종 소방견 ‘스파키’처럼 오수개도 글로벌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수의견문화제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심민 임실군 군수의 적극행정 덕분에 해를 거듭할수록 알이 꽉꽉 차는 행사다. 올해는 더욱 성황을 이룰 것이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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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9 18:28

십승지(十勝地) 운봉고을

역사적으로 전쟁,재해,질병이 없고 거주환경이 좋은 조선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십승지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해발450-550m)이다.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가장리(법정리명은 덕산리)다. 마을뒤엔 큰 저수지가 있다. 용왕님이 있다는 검푸른 저수지는 두려움이 있던 곳으로 나에게는 신성한 경외심으로 다가와 용왕님께 두손모아 간절히 소망을 빌었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봄이 오면 수리조합 직원들이 와서 거대한 수문을 열었다. 한번은 친구와 나는 저수지 아래 작은 방죽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굉음에 놀라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폭포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주변을 삼켜버릴 듯한 포악스러운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친구와 나는 두려움이 엄습해 낚시를 포기하고, 먼 발치에서 수로를 따라 넘실대며 도도하게 흐르는 물살의 위용에 넔을 잃고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리조합 직원들의 안내를 미리받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께서는 큰 축복을 받으신 듯 물길을 내느라 분주히 다들 소란스러웠다. 논에 물이 잠기자 이곳저곳에서 누렁소를 이끌고 논갈이가 시작되었다. 한해의 농사가 물의 공급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수지 물은 벼농사를 위해 겨우내 움크리고 추위를 견디며 봄날을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둑방은 아득한 높이여서 친구들과 자주 선착순 경쟁을 했다. 도착하면 가슴은 터질 듯이 숨이 차오르고 수평선을 바라보면 물결은 우리들을 포근히 품어주던 엄마같은 존재였으며 용왕님이 깊은 곳에 있다는 신비를 동경헀었다. 부드러운 물결은 투박한 우리들 마음을 어루만저 주고 푸른 꿈을 심어 주었다. 둑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은 넓은 들녘을 철갑산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전란에서도 우리를 보호하는 요새였고, 평야는 오곡백과로 풍성해 살기좋은 낙원이었다. 성심으로 땀흘리시며 사셨던 선조님과 부모님 세대의 지혜와 삶이 있었기에 미래를 향한 우리들은 도전할 수 있었고 나래를 펼수 있었다. 좋은 환경의 양분은 오늘날 곳곳에서 소금되고 빛이되는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 말할 수 있다. 여름이면 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며 여울목 막아 가물치,쏘가리,피라미,메기,붕어,미꾸라지,모래무지,가재등을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지는 무렵에야 각자 집을 향해 달음박질 하며 짧은 하루를 보내며 지냈다. 가을날엔 오고가며 길목에서 단감,오이,토마토,자두,복숭아,무우,당근등을 살며시 취해 인적드문 곳에서 깔깔대며 철없는 만찬을 즐기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림없는 얘기다. 당시엔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눈감아 주셨다. 때론 무서운 주인을 만나면 크게 혼이 나고 부모님까지 난처하게 한 상황도 있었다. 겨울이면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형들이 발자국 내어 주면 그곳을 밟으며 등교를 하였다. 운봉고원은 고지가 높아 추위가 매섭고, 눈보라 치는 날이면 온몸이 꽁꽁얼어 교실 공탄 난로의 따뜻함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두려움의 저수지도 작은 호수에 불과하고 마을, 저수지둑방,학교길,개천,정자나무,뒷동산등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낡고 왜소해진 모습으로 변해있다. 1년에 한두번 방문하면 필자를 알아보시는 고령의 어르신 몇분이 계신다. 힌머리에 굵은 주름과 구부정한 세월의 낙관(落款)을 볼 때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알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낀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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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2 18:05

몽당연필과 책보

나는 샤프펜슬이 아니라 연필 세대다. 연필심을 보관통에 집어넣고 맨 위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자동으로 심이 조금씩 나오는 샤프펜슬과는 달리 연필은 칼로 직접 끝자락을 깎아야 심이 나왔다. 이를테면 샤프펜슬이 디지털이라면 연필은 아날로그였던 셈이다. 내 기억으론 그때 난 친구들과 연필을 가장 빠르고 예쁘게 깎는 시합도 벌였다. 난 아직도 책을 읽으면서 책장에 뭔가를 기록해두거나 노트에 요약할 때 연필로 써야 마음이 편안하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칼 대신 연필깎이를 쓴다는 것. 모든 게 귀했던 국민학교(!) 시절 우린 새 연필이 생기면 닳고 닳아 몽땅하게 될 때까지 써야 했다. 심지어 연필이 엄지와 검지로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짧디짧은 몽당연필이 되어도 머리 부분을 칼로 다듬어 어렵사리 구한 볼펜 몸체에 끼워서 썼다. 가수 마이진의 노래 <몽당연필>에서 “닳고 닳은 인생이라 비웃지 마소”와 “내 목숨이 줄어드는 줄도 모르고”라는 가사가 애틋하게 귀에 착 꽂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몽당연필’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과 애환이 오롯이 담겨있는 단어가 바로 ‘책보’다. 그 시절 우리 소꿉친구들 사전辭典엔 ‘책가방’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우린 등교 전날 저녁이나 당일 아침에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보자기를 펴놓고 그 위에 수업에 쓸 책들과 공책들을 대각선으로 놓은 다음 둘둘 싸서 방 한쪽에 챙겨놓았다. 우린 그 책 다발을 ‘책을 싼 보자기’의 줄임말인 ‘책보’라 불렀는데, 이럴 때 ‘책보’는 당연히 ‘책가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책보’는 그냥 ‘보자기’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보자기조차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어렵사리 보자기가 생기면 으레 책보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당시 책보를 꾸릴 때 가운데쯤에는 필통을 넣었고, 둘둘 만 보자기 끝자락은 풀어지지 않도록 오삔(!)으로 고정했다. 이어 부리나케 아침밥을 먹은 후, 어떤 친구는 책보를 마치 벨트처럼 허리에 두른 채, 어떤 친구는 마치 검객이 칼을 메듯 대각선으로 어깨에 멘 채 대문을 나서자마자 학교를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 책보를 열면 필통 속 연필심은 이미 부러져있기 일쑤였고, 가끔 책보에 도시락을 함께 쌌을라치면 책들과 공책들이 모두 김칫국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린 다음 날 아침도 어김없이 무조건 달려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업 전에 연필을 깎느라 바빴다. 그때 우리가 왜 그렇게 무작정 뛰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늘 그렇듯 힘이 넘쳤거나, 얼른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놀 생각에 마냥 신이 났기 때문이리라. 혹은 그냥 좋아서 그랬으리라. 어린 시절은 그저 바람만 불어도, 비만 와도, 눈만 내려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순진무구한 때가 아니었던가? 선물 보자기를 보면 불현듯 어린 시절 책보를 메고 신작로를 질주하던 내 모습과 더불어 또 다른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때가 되면 엄마가 내게 책보를 가져오게 하여 가운처럼 내 목에 두르고 바리깡(!)과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시던 장면이다. 궁핍한 시대였는지라 설 명절 등 특별한 날 외엔 자식들을 이발소에 보내지 못했기에 집집마다 생긴 진풍경이다. 내가 4남 2녀 중 막내라서 엄마의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못한 덕분일까? 내 생각엔 당시 엄마의 바리깡과 가위질 솜씨는 단연 우리 동네 최고였다. 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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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6 18:47

서울에서 만난 전북- 백정기 의사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서울서부지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청사 뒤쪽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았지요. 바로 효창공원입니다.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리던 곳이었지요. 일제 강점기 왕실 무덤은 고양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했고, 대신 골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효창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추모 시설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김구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도 모셔져 있지요.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묘역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바로 ‘삼의사묘’입니다. 삼의사(三義士)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을 말합니다. 부끄럽게도 당시 저는 윤봉길, 이봉창 두 분은 알았지만 백정기 의사는 잘 몰랐습니다. 설명판에는 백의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전북 부안 출신으로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 운동과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이끌었고,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암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6월 5일 순국하였다.” 당시만 해도 저는 ‘무정부주의자 운동’라던가 ‘일본 공사 습격 사건’ 같은 내용들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이회영, 박열, 백정기 선생 같은 분들이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백정기 의사는 1896년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902년 정읍시 영원면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지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19세 때인 1914년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러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계속 무장 투쟁의 길을 걸었지요. 1924년 일본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 시도, 같은 해 일본 천황 암살 시도, 1932년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 1933년 홍커우 아리요시 일본 공사 습격 시도 등이 그것입니다.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는 윤봉길 의사가 성공했던 바로 그 사건과 같은 사건입니다. 당시 백 의사도 일본군 사령관 암살 등을 노리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에 ‘삼의사묘’가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46년 일본에서 순국하신 세 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46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세 분을 효창원으로 모신 것이지요. ‘삼의사묘’ 옆에는 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묘이지요. 하지만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유해를 찾지 못해 현재는 가묘 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 주기 바라오.’ 백 의사의 유언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이 의사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덕분에 자주 독립된 나라에서 사는 우리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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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9 18:19

진료는 수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약국이 개·고양이 약을 판다. 마취제, 호르몬제, 항생항균제, 생물학적제제 등 종류도 가지가지다. 코로나·인플루엔자 사독백신 등 주사제도 수의사 처방 없이 약사가 판매한다. 반려동물이 실험동물이 돼버린 셈이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은 약의 부작용도 호소할 수 없다. 약사는 사람약 전문가다. 동물약은 수의사가 전문이다. 약국의 새로운 수입창출 욕구와 반려동물 주인의 ‘귀차니즘’이 맞아떨어진 시장 왜곡의 현장이 바로 ‘동물약 파는 사람약국’이다. 수의사는 동물을 시진, 청진, 타진, 촉진한다. 주인을 문진하기도 한다. 진찰 후 처방이 정확할 수 밖에 없는 체제다. 반면, 약사는 ‘내 개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주인의 자가진단만 믿고 약을 내놓는다. 위험하고 위태롭다. 이게 다 ‘약사법’의 독소조항(제85조 제7항) 탓이다. 수의사를 건너 뛰고 누구나 약국에서 동물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수의사의 처방을 생략한 채 동물약품을 유통할 수 있도록 약사법에 예외를 부여했다. 동물용 실데나필을 사다가 남성용 ‘비아그라’로 오남용하는 것마저 가능할 지경이다. 이런 약국이 전국에 1만5000곳 이상이다. 수의사들은 동물판 의약분업에 찬성하지 않는다. 동물병원들의 피해가 막심하다. 법을 바로잡아야 동물병원이 정상 가동되고, 동물병원이 제 기능을 해야 아픈 동물들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약사가 수의사를 동물약품 시장에서 몰아내고 있다. 동물병원 말고 약국으로 오라고 호객하는 약사들이 증가일로다. 약대의 동물용의약품 교과목을 확대하고 동물약 전문약사를 양성해 약사가 동물약을 조제토록 하려는 움직임마저 감지된다. 동물병원은 수술과 내과진료만 하라는 우격다짐이나 다름없다. 의약품을 내 준 동물병원은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하다. 개와 고양이와 그 주인이 사람약국을 찾는다면 동물병원의 미래는 없다. 수의사 단체들이 나서야 한다. 약사법 개정 투쟁을 서둘러야 한다. 국회와 농식품부에 약국의 부당함을 알리고 단속 강화를 촉구해야 한다. 수의사에게만 공급하는 동물약품을 약국 매대에 진열해 팔고 있는 행태를 좌시해서는 안 된다. 수의사는 동물용의약품을 제외한 인체용의약품은 사용만 할 뿐 판매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약사가 동물용 의약품을 판매하는 것은 허용하는가. 동물에 관한 한 ‘수의사법’이 ‘약사법’ 위에 있다고 본다. 약사법은 강도 프루크루테스, 수의사법은 그 침대에 묶인 나그네 꼴이다. “동물학대를 유발하는 무분별한 약품 판매가 개선되기를 바라고 동물약품을 판매하는 곳에서도 해당 행위가 사용자의 오남용을 유발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며 동물의 보호자 역시 선의로 행한 행위가 동물에 대한 학대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대한수의사회의 어필은 한가롭고 점잖다. 현 시점 동물병원 수의사들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의사는 이미 20여년 전 어의사(수산질병관리사)에게 물고기 등 수산생물 진료를 내줬다. 이번에는 동물약품까지 약국에 헌납한 ‘실패를 잊은 백성’으로 연명해야 하나.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된다. 남 또한 내 것을 빼앗으면 안 된다. 개와 고양이를 기르는 시민들도 당장의 편리만 좇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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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2 18:41

조선시대 김삼의당 여류시인

지난 2월달 칼럼에서 ‘남원을 문화의 도시로 만들자’에 이어 남원이 낳은 조선시대 여류시인 김삼의당은 누구인가. 김삼의당은 1769년(영조45)년 김해김씨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의 후손 김인혁(金仁赫)의 딸로 남원부 서봉방(유천마을)에서 출생하여 18세 되던 해,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혼인하였는데, 하립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후손인 하경천(河經天) 의 아들로 비록 가세는 기을었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해 다섯 형제가 모두 시문에 능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립과 김삼의당 부부는 입신양명하여 두 집안의 가세를 회복하고, 부모님께 영화를 보여 드리기 위해 과거시험 합격을 목표로 삼아 신혼생활을 꿈꿀 겨를도 없이 이별과 별거를 15년 하며 학업에 정진하였으나 과환(科宦)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한 결과 어렵던 생활은 더 어려워져 갔지만 낙방 소식을 전해들은 김삼의당은 뒷바라지를 위해 머리를 자르고 비녀를 파는등 전력을 하였다. 편지에는 ‘당신의 과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소임입니다. 올 가을에 경시(慶試)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 같은 아녀자에게 마음쓰지 마세요, 꼭 합격하여 큰 꿈을 펼치시고,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훌륭하게 만드세요’ 라며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으나 끝내 부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 하립과 김삼의당은 혼인식을 하였다. 두 사람은 문학적 재능으로 첫날밤 신랑이 먼저 시를 읇었다. “우리 둘이 만났으니 광한루 신선인가/이 밤에 만남은 분명 옛 인연을 이음이오/배필은 원래 하늘이 정한다고 하니/세상의 중매란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오/부부간의 도리는 인륜의 시작으로/온갖 복이 여기서 비롯한다 하오/시험삼아 <시경> 도요편 살펴보니 /집안의 화목이 당신 손에 달렸다오”. 그러자 신부가 아미(蛾眉)를 살짝올리며 시로 화답한다. “열여덟 살 신랑과 열여덟 살 새색시가/동방화촉 밝히니 좋은 인연이네요/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한 동네에서 살았으니/이 밤의 우리 만남 어찌 우연이겠어요/부부의 만남에서 백성이 생겨나며/군자의 도리도 여기에서 시작된다지요/공경하고 순종함이 아내의 도리이니/이 몸 다하도록 당신 뜻 어기지 않겠어요”. 이렇게 시를 나누며 첫날밤을 보낸 신랑은 신부의 방벽에다 그림과 글씨를 가득 붙여놓고,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을 심은 다음 아내의 방문앞에 ‘삼의당(三宜堂)’ 이란 당호(堂號)를 걸어주었다. 뜻은 ‘집안을 화순하게 한다는 의미다’. 김삼의당은 시문집으로 99편 264수의 시와 22편의 산문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류작가는 신사임당(1504-1551),송덕봉(1521-1578),허난설헌(1563-1589)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삼의당(1769-1823)작품도 손색이 업으며 작품 수에서는 압도적이다.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로는 가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기울어졌던게 원이이라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은 율곡이이가, 허난설헌은 교산허균, 송덕봉은 미암유희춘 같은 걸출한 배경과 후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도부터 남원김삼의당 기념 사업회를 추진해 오신 분들께 존경심을 표한다. 2020년에는 사단법인 김삼의당 기념사업회도 발족하였다하니, 문학을 통하여 남원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본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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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5 18:32

아주 보통의 하루

전주에서의 고등학교 시절, 기전여고 뒤 도토리골 등 여러 하숙집 중 특히 중노송동 하숙집을 잊을 수 없는 건 그곳에서 난생처음 생생하게 직관한 죽음 때문이다. 1학년 여름 어느 토요일, 난 한방을 쓰던 3학년 형의 예지력(!)으로, RCY에서 인공호흡 교습을 받고 와 꽤 피곤한 터라 초저녁에 곯아떨어졌다. 새벽녘, 갑자기 안방에서 하숙집 아주머니의 어린 딸이 울면서 다급하게 엄마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왜 그래? 엄마!” 깜짝 놀라 형과 함께 벌떡 일어나 달려가 보니 아주머니가 주무시다가 갑자기 서너 번 “크억!”하시더니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번갈아 가며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하지만 응급차가 올 때까지 아주머니의 호흡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우린 교회에서 목사님으로부터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울러 성도를 살리려 애써준 두 하숙생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들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2021년 11월. 느닷없이 고등학교 같은 기수 동문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기가 날 찾고 있는데 전화번호를 알려줘도 되냐는 것. 이름을 물어보니 나도 그동안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포기했던 친구였다. 우린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는데, 각각 지방과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헤어진 뒤 속절없이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망설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얼른 친구 전화번호를 받아 당장 통화를 할 수밖에. 정말 감격의 해후였다. 우린 내내 달뜬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말쯤 부부끼리 만나기로 하고 아쉬운 통화를 끝냈다. 내가 친구를 찾지 못한 것은 일단 내 착각 때문이었다. 난 친구가 한의학과에 들어간 줄 알고 인터넷에서 전국에 있는 친구 이름의 한의원만 찾았는데, 사실 친구는 의대에 진학해서 졸업 후 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구는 나처럼 고등학교 동문회 활동에 소극적인지라 동문 주소록에 연락처를 남겨놓지 않았다. 이러구러 크리스마스가 지난 2021년 12월 26일 이러다가는 해를 넘기겠다는 조급함에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메리 크리스마스! 11월에 연락했는데 어느새 연말이야. 연말연시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라. 올해 너와 연락된 게 내겐 정말 가장 큰 선물이었어.” 하지만 2주가 되도록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해를 넘겨 2022년 1월 초에 이번에는 문자를 보냈다. “잘 지냈어? 카톡을 안 보네?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역시 아무런 답이 없었다. 며칠 후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막 동문회장에게 연락해보려는 참에 카톡으로 청천벽력 같은 친구의 본인상 부고가 날아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당장 인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통곡했다. 친구 동생을 통해 사정을 들어 보니, 친구는 처음엔 혼자 의원을 운영해오다가 몇 년 전 뜻이 맞는 지인들과 큰 병원을 설립해서 이제 막 편안하게 살만하니 갑자기 쓰러져 홀연히 먼 길을 떠나버렸다. 올 2월은 다섯 번이나 지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나는 부고장을 받을 때마다 불현듯 내 뇌리에 깊이 아로새겨있던 위의 두 죽음이 떠오르며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곤 한다. 그렇다고 허망해하며 절망하는 건 아니다. 원래 허망한 삶을 내가 어쩌겠는가? 알베르 카뮈의 책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처럼,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처럼 ‘아주 보통의 하루’에 감사하며 살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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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6 18:03

서울에서 만난 전북- '인촌 김성수'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건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남원 촌놈이 태어나서 처음 서울에 올라오던 날이었지요. 남원역에서 통일호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물어물어 서울역 건너편으로 가서 버스를 탔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꿈에 그리던 풍경이 나타났지요. 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마치 ‘대학이란 이런 곳이야’라고 알려주는 듯했기 때문이지요. 그 건물들 정면에 머리와 어깨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그가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입학 후에 보니 고려대학교 교내에는 그의 묘소도 있었습니다. 학교 뒤편 고즈넉한 곳에 있었는데 ‘인촌묘소’라고 불렸지요. 당시에는 학생들의 데이트나 동문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1987년경 남양주시로 이장되었고, 그 자리에는 ‘인촌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왜 고려대학교 안에 그의 동상과 묘소가 있었을까요. 선생은 1891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주 집안이었지요. 담양에 있는 창평 영학숙과 부안에 있는 내소사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해 1914년 와세대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1917년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해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지요. 그해 10월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운영했고, 다음 해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해 사장으로 일했습니다. 여러 사회활동을 하던 선생은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고려대학교로 전환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교내에 선생의 동상과 묘소가 있던 이유이지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1936년 동아일보도 일제에 의해 발행이 중지됩니다.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 때문이지요. 때문에 선생도 사장이던 송진우 선생과 더불어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 행적을 보이게 되는데요. 친일 강연을 하고 국방헌금을 낸 것이 대표적입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이름을 올린 이유이지요. 해방 후 선생은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요. 재직 당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했는데, 선생이 물러나자 다시 부활했다고 합니다. 서울에는 고려대학교 이외에 세 곳에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먼저 중앙고등학교입니다. 1915년 경영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사학으로 육성한 선생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로 세워졌습니다. 과천 서울대공원에도 1991년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는데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건립했습니다. 청계천 입구 동아미디어센터에도 선생이 40대 초반의 모습으로 있는데요. 동아일보를 설립해 운영한 업적을 기리는 취지입니다. 최근 105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인격과 인간관계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 인촌 선생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기주의 배격, 선의의 경쟁과 결과에 대한 승복, 사회에 헌신하기 위한 후학 양성의 중요성 강조 등이 인촌 선생이 강조하신 덕목이라고 하셨는데요.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 아닐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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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9 18:15

오수개 있음에 임실이 있네

전북 임실군 오수면은 의견의 성지나 다름없다. 모름지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충견의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때는 신라 말~고려 초, 술에 취해 풀밭에 잠든 남자에게로 들불이 엄습했다. 곁에 있던 개는 수십수백 번 물을 오가며 제 몸을 적셔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 그는 개를 묻고 무덤에 지팡이를 꽂았다. 지팡이는 자라서 나무가 됐다. 개 ‘오(獒)’, 나무 ‘수(樹)’, 오수라는 지명의 유래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수개를 내가, 아니 우리가 부활시켰다. 1996년 오수면 청년회의소(JC) 심재석 회장과 의기투합해 이듬해 ‘오수견 연구위원회’를 결성했다.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국견세계화추진위원장 자격으로 내가 위원장을 맡았다, 한홍률 서울대교수, 최인혁 전북대 교수, 민속학자 천진기 관장, ‘얼굴박사’ 조용진 교원대 교수 등 사계의 권위들을 연구팀과 육종팀으로 모셨다. 여기에 정관일 오수개육종사업소장의 헌신이 더해졌다. 티베탄마스티프에 주목했다. 적당히 긴 털에 물을 묻혀 불을 끌 정도의 몸집과 체력을 갖춘 오수개의 조상으로 가장 유력했다. 이 견종을 순종교배(퓨어브레드 브리딩) 방식으로 육종했다. 흑색 수놈 3두(흑 2·황 1)와 암놈 7두(흑 5·황 2)로 시작했다. 숱한 시행착오와 난관을 극복한 끝에 오수개는 어느덧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오수개는 처음부터 핫이슈였다. ‘순종’으로 확정되기 전인데도 마리당 3000만~5000만원을 낼테니 분양해 달라는 애견인들이 있었다. 물론, 안 팔았다. 혈통이 완전히 고정되지 않기는 했다. 그래도 오수개라는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들 차 버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수개는 그렇게 ‘만들어 낸’ 품종이다. 행여 천연기념물로 지정 받을 생각은 해서는 안 된다. 정체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느 토종개(?)를 타산지석 삼아야 한다. 1000년을 타임슬립해 탄생한 오수개는 오수와 임실, 나아가 전북을 상징하는 보배가 돼야 한다. 충의의 오수개는 기록, 달리말해 출전(出典)이 명확하다. 스토리텔링 만으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알프스’하면 세인트버나드가 떠오르 듯 오수개는 임실의 상징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플란다스의 개, 충견 하치코는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덤이다. 30년 전 오수개를 역사에서 불러내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비상한 관심이 좋은 보기다. 1990년대 아날로그 시절의 모든 매체가 일제히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임실은 들어봤지만, 오수는 생소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오수를 각인하는 효과를 거뒀다. 하물며 지금은 IT시대다. 파급력이 빛의 속도다. 노스탤지어에서 소환해 낸 오수개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향해 걸어야 한다. 오는 5월 초 오수 의견공원 일대에서는 어김없이 의견문화제가 열린다. 벌써부터 기다져진다. 과거 의견문화제에서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었다. 지금은 전주로 옮겨 메뉴도 바꿨다는 개고기 음식점이 오수에서 성업 중이었다. 의견 행사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외쳤던 기억도 생생하다. 다른 곳도 아닌 오수에 보신탕집이 웬말이냐는 요지였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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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2 18:15

남원을 문화의 도시로 만들자

고전문학의 요람(搖籃)지 남원시에 ‘고전,근현대 문학의 융합과 남원시 문화콘텐츠 창출 토탈풀랫폼’으로 공립남원종합문학관(가칭) 설립을 적극 검토하는 사명적 관심의 2025년이 되었으면 한다. ‘문학진흥법’(세부사항은 문학진흥법 시행령)에 의한 전주시 문화의 도시 ‘문화특구’에 이어 문학적 자원이 풍부한 남원시도 지정받아 문화예술, 관광, 전통, 역사등을 글로벌 문화산업 메카로 도약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여 문화특구에 기여하는 빅픽처를 바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전문학의 예술허브도시로 발돋움을 위한 콘텐츠를 알아보겠다. △춘향전: 조선후기 작품으로 우리나라 대표 고전소설이며, 한글소설 판소리계 소설로 신분을 초월한 사랑 스토리다. △흥부전: 조선후기 작품으로 판소리계 한글소설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표하고 있다. △만복사저포기: 조선전기 김시습이 남원왕정동에 있는 만복사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최초의 명혼소설(冥婚小說)로 이승사람과 저승영혼의 만남을 소재로한 소설이다. △최척전: 1621년 조위한 지음, 전쟁으로 인해서 조선과 일본, 명나라등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고전소설이다. △홍도전: 조선중기 유몽인 채록기다. 남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홍도라는 주인공과 그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헤어지고 만나는 소설이다. 이와같이 훌륭한 고전문학이 창달(暢達)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대표적 축제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춘향전〉춘향제(현제전위원장 이광연)는 2024년 94회로 세계인이 참여하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행사 기간(7일)에 1백20만명이 참여하고 있다(발표자료인용) 올해는 200만명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단다. 여기에 다른 고전들과 근현대 훌륭한 작품들을 발굴 문화도시 사업을 통하여 도시 전체를 문화 콘텐츠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의 허브 도시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공립남원종합문학관(가칭) 설립이 꼭 필요한 이유로 고전,근현대 문학관련 자료수집,보존,복원,관리,전시,연구,교육,연수 기타 활동을 통하여 문학 유산의 계승과 문학활동의 진흥 및 발전을 도모하고 향유 증진하는데 목적이 있다. 비전으로는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역사이기에 역동하는 미래이며, 미션으로는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문학관이 되어, 문학유산의 보존과 활용 및 문학생산과 교류등 문학적 삶의 공유와 연대이다. 역활 정립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남원시 문학 인프라 구축, 남원 이미지 활용, 관광증진(지역자원과 연계),기념관 박물관적 기능 포함, 남원 특성을 살리는 문학관 건립이 요구된다. 문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정신과 혼이 깃든 것이다. 소중히 보존하고 가꾸는 일은 사람과 지역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고전과 근현대 문학이 살아 숨쉬는 문학관은 문화 콘텐츠를 산업으로 성장시키고 청년 종사자를 양산하며,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은 지식 사업으로 정주,교육,경제 전반에 스며들어, 남원을 문화향유자 증대,문화공간 확충,고용창출,관광객과 매출증대,정주 만족도 상승등 문화,경제,사회적 효과가 창출되어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 문화의 도시로 변화할 것이다. 남원을 문화의 도시 「문화특구」로 지정받기 위한 민,관,문화단체, 전문인의 적극적 노력을 당부드린다. 문화의 성지로 꽃피울 수 있게 남원예술의전당 공립남원종합문학관(가칭) 설립을 제안한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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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5 18:09

울엄마

내 고향은 김제 시내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봉남이다. 봉남은 그전에는 접주리接舟里라고 했다. 삼국시대 저수지 벽골제 수문을 열면 배가 그곳까지 닿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는 후문이다. 그만큼 마을 주변엔 온통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대학 시절 방학 때 고향 집에 놀러 온 강원도 친구가 이렇게 너른 들판은 난생처음이라며 탄성을 연발했을 정도다. 이제는 고향에서 산 것보다 타향살이가 더 오랜지라 고향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 소환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뇌리에 깊이 각인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인 마흔둘에 혼자가 되셨다. 아버지가 금광을 하던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자 화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남편을 잃었다. 당시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집달리’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심지어 괘종시계에까지 빨간딱지를 붙이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엄마는 틈만 나면 내 손을 잡고 어느새 종적을 감춰버린 이웃 동네 아버지 친구 집을 찾아갔다. 이어 그 집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마당 한가운데로 달려가 쓰러져 그 아저씨 이름을 부르며 제발 빚 좀 갚아달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땅을 치며 우시던 엄마를 말리며 나도 큰소리로 따라 울곤 했다. 나는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아저씨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언젠가 그 집에 들렀다가 여느 때와는 달리 인기척이 없자, 그 동네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그 아저씨가 야밤에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부턴 그 집에 발길을 뚝 끊었다. 집안 곳곳에 즐비하던 빨간딱지가 사라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채권자들에게 반드시 빚을 갚겠다는 엄마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이리라. 그 뒤 엄마는 얼마간 있던 논을 부쳐 엄청난 빚을 갚으면서 우리 6남매를 키우시느라 정말 치열하게 사셨다. 과부라고 놀리며 윗논 물꼬를 터주지 않는 동네 아저씨와 한바탕하고 오셔서 나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시기도 했다. 엄마는 유난히도 무덥던 2004년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 마치시고 너른 들판 사이로 난 신작로를 따라 홀로 집에 가시다가 동백꽃 떨어지듯 길가에 푹 쓰러져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홀몸으로 우리 6남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새도 없이 불현듯. 아마 엄마는 이제 지상에서의 임무가 끝났으니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전에 얼른 조용히 사라질 때가 되었다고 결심하신 듯하다. 일요일이라 곱게 화장도 하시고, 옷도 깨끗하게 차려입으신 채, 평소엔 교회에서 점심 식사 후 동네 어르신들과 교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시던 분이, 아무리 말려도 손사래를 치시며 혼자 걸어가시다가 훌쩍 먼 길을 떠나셨으니 말이다. 엄마는 일찍이 선산 밭 한 귀퉁이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시고, 그 옆에 당신 가묘를 만들어 놓으신 다음, 내게 가끔 장롱에서 미리 마련해두신 삼베 수의를 꺼내 보이시면서 당신이 세상 떠나시면 입혀달라고 당부하셨다. 지금 엄마는 바로 그 수의를 입으시고 그 가묘에 누워계신다. 난 엄마 삼우제 때 무덤 앞에서 굳게 다짐했다. 설 명절과 생신 등 생전에 엄마를 뵈러 오던 날은 꼭 오겠다고. 하지만 그 다짐은 공수표가 된 지 이미 오래. 겨우 기일에나 찾아뵐 뿐, 전주에 특강이 있을 때도 잠시 생각은 해도 엄마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때마다 내 귓가에 그리운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이구 참말로! 썩을 놈!”. △김원익 소장은 신화연구가로 저서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1, 2〉, 〈브랜드로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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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2 18:39

서울에서 만난 전북- 태조 이성계

중학교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고려 말 왜구가 아지발도라는 소년 장수를 앞세워 쳐들어왔다. 아지발도는 얼마나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던지 고려군이 크게 밀렸다. 그는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감싸고 있어 칼이나 활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멀리서 활을 쏘아 투구를 맞춰 벗겨냈다. 그 틈에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쏘아 맞췄다. 아지발도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지금도 바위가 피로 물들어 붉은색을 띈다. 그래서 피바위라고 불린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지요.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황산대첩비와 피바위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활을 쏘아 그렇게 정확히 맞출 수 있나’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걸 보면 왜구를 물리친 무용담이 재미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전주로 유학을 갔던 고등학교 시절, 어느 가을 경기전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왜 그리도 크고, 왜 그리도 노란색을 가졌는지. 지금은 한옥마을과 함께 한 해 1,5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곳에 불과했지요. 서울에는 정동(貞洞)과 정릉동(貞陵洞)이 있습니다. 비슷한 이름이지요. 이름이 비슷한 건 유래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성계의 본부인은 청주 한씨였습니다. 태종 이방원 등 8남매를 낳은 신의왕후이지요. 그런데 이성계가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부인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지요. 신의왕후는 조선이 개국하기 약 1년 전에 사망해 개성에 묻혔습니다. 따라서 개국 당시에는 신덕왕후가 왕비였지요. 태조는 신덕왕후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덕분에 신덕왕후 소생인 여덟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지요. 왕자의 난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조선의 법도에 의하면 도성 안에는 묘지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신덕왕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를 무시했지요. 경복궁에서 보이는 지금의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부근 언덕에 신덕왕후의 능을 조성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조선의 사랑꾼’인 셈이지요. 문제는 태조 사후에 일어났습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통해 태종이 된 후 신덕왕후의 능을 현재의 정릉동 자리로 옮긴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능의 석물들을 파내어 청계천 광통교를 지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실상 왕후의 능을 밟고 다니게 된 것이지요. 태종의 복수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서울에는 두 개의 정릉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장을 하다 보니 ‘릉’이 없어져 먼저의 정릉동에서 ‘릉’자 하나를 뺀 것이지요. 그렇다면 태조는 사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구리에 있는 동구릉에 묻혔는데, 바로 건원릉입니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다른 점이 있지요. 봉분이 잔디로 덮힌 다른 능과는 달리 억새로 덮여 있습니다. 태조는 조상들이 있는 함흥에 묻어달라 유언했지요. 하지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왕릉을 조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책으로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두 명의 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이 있었지요, 열네 명의 자녀도 두었습니다. 그런데 사후에는 곁에 누가 남았을까요. 정릉과 동구릉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양중진 변호사는 대전지검 공주지청장, 춘천지검 강릉지청장, 수원지검 제1차장 등을 거쳐 마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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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5 18:21

고향에서 키운 꿈, 서울 가서 전국에 펴다

남원에서 태어난 내가 처음 동물병원을 개원한 도시는 전주다. 애견문화(요즘은 반려문화)를 새로 정립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한계를 느꼈다. 전북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에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주 병원을 접고 1985년 서울로 간 이유다. 그 무렵 서울 지역 동물병원은 100곳 미만이었다. 지금은 1000군데, 전국적으로는 5000곳에 육박한다. 당시 동물병원의 환경은 열악했다. 동물병원이 아닌 ‘가축병원’ 간판이 흔한 시절이다. 중구 필동에 자리를 잡은 나는 개를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병원을 표방했다. 그때만 해도 고양이는 드물었다. 지연도 학연도 없는 타향살이,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혼신을 다하는 수술과 치료 틈틈이 방송사와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다. 현대인의 정서에 애완견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전도사처럼 설파했다. 심상사성(心想事成)이었다. 간절히 바라니 이루어졌다. 동물 관련 TV프로그램 사회자 옆에 서는 일이 잦아졌다. 역시 동물 관련 신문 기사 중 전문가 코멘트는 어느 순간부터 내 몫이 되다시피 했다. 동물 칼럼 연재는 덤이었다. ‘매스컴을 타니’ 개와 주인들이 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끼니를 걸러가며 하루 34마리를 수술하기도 했다. 그렇게 물이 들어왔지만 나는 노를 젓지 않았다. 타 병원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파격적인 수가로 아픈 동물들을 치료했다. 그 와중에 심각한 텃세에도 시달렸다. 치러야 할 유명세로 치부하기에는 ‘안티’ 세력의 가짜뉴스는 도를 지나쳤다. 동물약을 싸게 팔고, 또 이를 적극 홍보하는 내가 못마땅한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내 신앙까지 걸고 넘어졌다. ‘세계적인 권위의 수의사는 자기 광고를 합리화하기 위해 신성한 종교를 이용하고 예수님을 팔고 있다.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하겠는가. 소문이 언론에 나가면 세계적인 망신거리 톱뉴스가 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사필귀정, 법은 내 손을 들어줬다. 명예를 훼손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확인했다. 나는 철저히 ‘내돈내산’ 원칙을 지켰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애완동물사진촬영대회를 매년 열었다. 김대중 대통령, 개그맨 이경규씨, 영화배우 김혜수씨 등 유명인들의 동물사랑 사연을 널리 알렸다. 내 책 ‘개를 무서워하는 수의사’를 읽은 어린이신문 독자들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나를 지명, 팬레터를 보냈다. 그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내 이름에 꽂혀 수의대로 진학했다. 외화내빈을 경계한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케널코프 따위 질환의 심각성을 외쳤다. 종합예방접종(DHPPL) 한 방이면 그만이던 관행이 어느덧 교정됐다. 심장사상충의 위험을 공론화한 것 또한 나다. 내가 고쳐주는 개는 대개 서양품종이다.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다. 실내에서 키우기에 적당한 사이즈들이다. 토종은 대부분 중개다. 나는 이들 한국견도 챙긴다. 진돗개, 삽살개, 동경이(댕견), 불개, 제주개, 그리고 오수개 등 국산이라면 예외없이 개입해 있다. 심지어 북의 풍산개 연구서까지 냈다. 이 책은 과거 정부를 통해 북측 권력자에게도 전달됐다. 그리고, 지나친 동물 의인화를 나는 반대한다. 사람이 동물을 모신다는 것은 본말전도다. 사람을 위한 동물보호가 우선이다. 그래야 상생할 수 있다. △윤신근 원장은 전북대 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동물보호연구회'를 설립해 동물 질병에 대한 연구와 '동물권' 확립에 앞장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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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8 17:12

새해는 인성(人性)을 성근(誠勤)히 하자

오늘날 사회는 물질만능 주의가 인격위에 군림하여 인성은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그러다 보니 공허한 마음속엔 늘 불안과 혼돈이 존재해 방황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옛날에는 집성촌에 일가친척이 자연스럽게 함께 살면서 어울림으로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여, 옳고 그름을 제시해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하고, 관심과 사랑 안에서 성장, 평생을 함께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로 인성(人性)은 늘 중심에 있었다. 사회 생활도 인성은 근간이 되어 자신과 가문에 누가되지 않기 위해 정도를 알고 힘쓰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회의 고도성장과 외국 문명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새로운 변혁기에 적응하다보니 지역에서 도시로 대부분 이주하게 된다. 함께 공유했던 일가친척과 정겹게 나누던 이웃은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핵가족화로 가정은 정신학적 결핍의 굴레가 되었고, 자녀는 온실속 화초로 자라 이타심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이기심은 강해져 개인주의로 울타리를 치면서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자녀들은 유치원부터 경쟁하며 우열속에서 신음하고 불안의 심리를 안고서 자라고 있다. 돈이 있어도 없어도 불안하고, 직장을 다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직장마저 없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나 싶다. 이때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자존감을 주는 것이 정심(正心)이다. 정심이 마음뜰에 성근(誠勤)하게 자란다면 어떻한 고난과 시련이 오더라도 능히 뚜벅뚜벅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진리이다. 영원없이 공허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우둔한 짓이다. 인생은 되돌아 오는 길이 없고, 빈손으로 왔다 가는 게 인생인데 빛나는 이름은 아닐지언정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남기도록 우리는 성심을 다해 살아야 한다. 소크라 테스는 30년을 아테네 시민 정신혁명을 위해 생을 바치신 분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아테네 사람들의 양심과 생활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방황하는 청년들을 향해 호소하고 계도에 힘쓰며, 인격을 각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셨다. “시민들이여! 청년들이여! 지혜와 진리와 자기의 인격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노력을 합시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진실하게 사는 것이요, 둘째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며 , 세째로 보람있게 사는 것입니다. 항상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입니다” 라고 열변을 토하고 다녔다. 생각은 인생의 소금같은 것이다. 말과 행동을 하기전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좋은 말은 덕(德)으로, 나쁜 말은 화(禍)로 온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선악이 구별받는다. 육조 혜능대사는`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라 하셨다. 상황에 따라 선악은 넘나들고 있으니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움은 사각에서 오고, 이해는 자각에서 오며, 사랑은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천사가 주는 마음이고, 사각은 악마가 주는 마음이며, 자각은 자기 생각을 가지는 마음이다. 고마운 것들은 마음에 담고 기억하며, 섭섭한 것들은 물에 새겨서 흘려보내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잘 다스리면 나라를 다스리고 태평해 진다는 뜻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기에도 정심(正心)에서 시작되고 있다. △오동근 위원장은 (주)금산영상사업단(영화제작)대표를 역임했고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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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5:18

삼각산 인수봉 기슭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대학생 때 수유리 4·19 묘지를 갔다. 하지만 해마다 들어가지 못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부 시절 4·19 묘지를 간다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검문검색이 당연한 때 수유역에서 전경들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 했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마칠 무렵 4·19 묘지에 간신히 들어가 이곳저곳 돌며 정중히 절하였다.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떨렸던 그때 저 멀리 삼각산 인수봉이 보였다.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을뻔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외국 등반가까지 암벽 등정하던 인수봉이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왜 삼각산 인수봉(仁壽峰) 기슭에 묘역을 만들었을까? 1960년 4월 19일 초·중·고·대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경무대로 향했다. 이승만 정부하에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혁명의 도화선은 막 입학한 어린 김주열 학생이었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이었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남원에서 다녔다. 넉넉한 집안에 3남 2녀 중 차남인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속에 경남 마산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하려던 15살 김주열 학생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힌 채 떠올랐다. 끔찍한 사진 한 장 속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다. 차가운 주검이 된 김주열은 장례식도 없이 몰래 묻혀졌다. 원통한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전국 학생들과 부모들을 울렸다.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가 해방 후 15년 만에 일어났다. 이후 김주열 열사 무덤은 남원시 금지면에 조성된다. 남원역에서 10분 거리 17번 국도변에 묘역과 추모각 및 기념관도 있다. 해마다 김주열 열사 묘를 찾는 사람이 많다. 김주열 열사 묘는 이제 성역화되어 추모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다. 하지만 삼각산 인수봉 기슭 국립 4·19 민주묘지 내 김주열 열사 허묘는 찾는 이가 별로 없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었던 김주열 열사 허묘와 비석에 쓰여진 몇 글자는 쓸쓸함마저 감돈다. 김주열 열사의 어린 시절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2024년 12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64년 전 어린 김주열 학생의 희생과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열정이 재평가 받는 시점이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모든 국민이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좋겠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중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서울에서 가장 자연과 하나된 동네, 삼각산 인수봉 기슭에 어린 김주열 학생 등 186명이 영원히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강북구다. 이제 서울시 강북구와 전북자치도 남원시가 자매결연 맺어 그들을 위한 포럼과 추모행사도 함께 하면 좋겠다. 또한 김주열 열사 나신 날과 가신 날 만큼은 함께 기념하면 어떨까? 김주열 열사 묘비에 새겨진 ‘살아서는 호남의 사랑스런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영남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었다’라는 문구를 모든 사람의 가슴에 담아주면 좋겠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김주열 열사 만나러 삼각산 인수봉 기슭으로 간다. 태양은 국립 4·19 민주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또다시 희망찬 내일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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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5 17:52

영화의 힘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간혹 TV에서 계급장이 번쩍거리는 제복 차림의 경찰이 무서운 표정으로 뭔가를 발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한동안 해가 짧은 겨울이 된 듯 동네는 어두워졌고, 이웃 세탁소나 인쇄소 주인도 혹시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런 것이 TV에서는 대공 수사물이 인기리에 방영됐고, 곳곳에 붙어 있는 “수상하면 신고하라”는 간판은 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역산해 보니 그때의 일이 훗날 조작으로 판명 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 때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접했다. 방송이나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으니 서울에서는 온갖 소문만 난무했다. 12.12. 사태로 불렸던 군사 반란 역시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국회 청문회와 수사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게 됐다. 지난 12월 3일 밤, 일찍 잠이 들었는데 둘째 녀석이 흥분한 상태로 귀가해 계엄이 선포됐다고 소리쳐 일어났다. TV에서 현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처음 경험했을 아들과 달리 나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했다. 몇 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고, 이후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의결됐다. 계엄 발표 후 특전사 군인보다 먼저 국회로 달려간 국회의원과 수많은 시민의 용기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그날 군인들의 소극적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 눈에도 첨단 장비를 갖춘 최정예 대원임을 알 수 있는 그들이 맨손의 시민들에게 힘없이 밀리는 것을 보면서 상황이 길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TV를 통해 똑똑히 목격했던 그날의 상황과 1980년 광주는 무엇이 달랐기에 그토록 다른 결과가 되었을까? 나는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영화 <서울의 봄>을 들고 싶다. 천만 관객이 들었던 이 영화를 보면서, 이미 과거지사인데도 영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상황을 막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 반란으로 한때 권력과 부를 차지했지만, 법정과 역사의 심판으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쓴 이들의 부끄러운 역사가 영화를 통해 재현되었다.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던 젊은 세대, 그 시대를 살았어도 전모를 알지 못했던 거의 모든 세대에 영화는 엄청난 학습 효과를 끼쳤다. 국회 진입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 중 상당수는 이 영화를 봤을 것이고 자신들이 훗날, 아니 며칠 후 어떤 자리에 있게 될 것인지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도 채 되지 못해 작전을 이끌었던 장군들이 눈물을 참으며 그날 일을 후회하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중계됐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이렇게 힘이 있다. 무장한 군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휴대폰 카메라가 일촉즉발의 상황을 동시에 촬영하고 실황 중계했다. 1979년과 1980년, 서울과 광주에서 무장 군인들이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시민을 향해 발포했어도 신문과 방송만 장악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이번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세계의 이목이 한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광장에 나왔던 사람뿐만 아니라 TV와 휴대폰을 통해 사건의 발생부터 전 과정을 실시간 중계로 경험한 이들에게 그날 밤의 일은 비가역적인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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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8 18:53

법의 현장에서 보이는 모습들

제가 법률 분야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과 많은 사건들을 접하면서 결정하고, 도와주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수사와 공판 활동을 수십 년 하다가 이제는 몇 년 전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법률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피해를 입었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증거를 모으고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 조사하여 법원에 기소하거나 불기소 결정을 하는 활동을 하였다가, 몇 해 전부터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와주며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해 주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법률분야 활동을 하면서 그 현장에서 목격하고 깨닫게 되는 진실 하나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피해를 준 사람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도 피해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질에 피해를 주는 사례의 경우에는 그러한 현상이 일반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하여 사람의 생명에게까지 해악을 미치는 사안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다툼이 법적 분쟁으로 진행되었을 때 탐욕에 젖어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법률적 지원을 해주는 사람마저도 객관적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에 동조하는 사례도 이따끔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이기는 게 아니면 최소한 유리하게 되는 게 정의라고 고집하는 데 있었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내면에는 참된 정의에 관하여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심연에는 신의 공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근ㆍ현대 시대에 접하고 있는 법률쳬계와 그 기저에 있는 철학적 조류에는 서양에서 비롯된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그리고 제3의 이론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철학적 조류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정의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정의의 여신상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신화에서 유래한 디케, 유스티티아의 상으로 알려져 있고 눈을 가리고 검과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눈은 가려져 있으나 내면에 담겨있는 바른 관념을 바탕으로 공평하고 공정하게 현명한 결단을 하는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장 사람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눈을 가리고 있을까요. 사유해 보건대, 그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보다 내면으로 꿰뚫어 보는 범주가 더 넓고 깊이 있게 통찰하여 지혜로운 결론을 끌어내지 않을까 라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아가, 인간은 그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신의 공의를 추구하고 따르려고 한 것이 아닌지 묵상해 봅니다. 그래서, 동ㆍ서양의 학문적, 문화적 배경과 표현은 다르더라도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수많은 글귀에는 무거운 울림과 깊은 깨달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글귀들이 찾아가는 곳에는 늘 낮음과 겸손, 사랑과 관용이 피어 있고,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정의와 공의라 불리는 드넓은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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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1 18:31

나는 기다린다, 고향을 빛낼 또 다른 지도자를

1987년 12월, 뱃속에 7개월 된 첫째를 품은 여성의 손을 잡은 나는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향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후보로 나선 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1988년 2월 4일, 첫째는 군부 출신 대통령이 취임한 나라에서 태고의 울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참된 민주주의와 진보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1992년 12월 18일, 다섯 살이 된 첫째와 두 살이 된 둘째는 부모 손에 끌려 다시 그이의 유세장에서 민주주의와 진보, 통일의 외침을 자장가 대신 들어야 했다. 1997년 12월 18일 밤, 드디어 두 아이와 그들의 부모는 온갖 거짓과 비난, 오해와 무지의 파도를 이기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선 이의 승리를 함께하였다. 광복된 지 80년이 되어가는 이 나라에 대통령은 여러 명이 존재했지만,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어쩌면 단 한 사람뿐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만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지역감정의 소산이야.”라거나, “너의 편견일 뿐이야.”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니 “빨갱이”니 하는 비난이 지나고 보니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역사는 그가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킬 것이다. 그가 지도자가 된 후, 우리 사회에서는 비로소 민주, 진보, 통일 세력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전에 대한민국에서 민주진보통일 세력은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다수를 차지하는 취약한 처지였다. 그 역시 보수의 심장 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한 걸음 진보시켰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민주와 진보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는 보다 앞선 사회로 개조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으니, 나는 IMF 외환위기를 이른 시일 내에 극복시킨 그의 능력보다 이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그이에게 위대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올곧은 자세 때문이다. 그이는 곡절이 지배해온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단 한 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설사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조차 그이는 옆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유 역시 바로 그러한 인간적 자세 때문일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고, 죽음 앞에 타협하며, 자리를 위해 철학을 굽히는 이들이 난무하는 인류 역사에서 그이와 같은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그러한 인물을 위인(偉人)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이가 태어나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분명한(이는 그이가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 후광(後廣)이라는 호를 만든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향과 같은 뿌리를 가진 땅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있지만, 그 땅의 말투와 그 땅의 음식과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뒤를 이을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배지와 자리와 돈다발과 명성을 한없이 가벼이 여기는 반면, 민주주의와 약한 이웃과 정의로운 역사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쓰러질지언정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후배 지도자를 기다린다. 그 후배가 그이와 한강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세계에 호남의 가치를 펼칠 것을 믿는다.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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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4 18:1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어디서 태어났을까?

서울시 중구에 있는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1958년 개관하여 66년 동안 영화의 메카로 대한극장은 충무로의 상징이었다. 영화관 시작이 단성사라면 영화인들이 모이는 곳은 충무로였다. ‘영화의 날’ 기념행사도 대한극장에서 하였다. 서울역에서 숭례문 지나면 명동과 충무로 일대가 극장가로 필름 현상소와 인쇄소가 즐비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그리고 중앙극장과 국도극장 등이 있는 영화의 거리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런데 목멱산 기슭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있는 대한극장은 왜 ‘충무로(忠武路)’라 불렸을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세종대왕 이도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두 분 모두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계신다. 세종대왕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준수방 장의동에서 태어나셨다. 그렇다면 목멱산을 바라보고 계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디서 태어났을까?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은 너무도 많다. 이순신 장군은 도성 안 무과시험을 치르는 훈련원 봉사직을 시작으로 최초로 정읍 현감과 태인 현감까지 겸하였다. 또한 해미읍성 군관으로 해안가에 머물며, 진도군수를 거쳐 통영에서 초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바다를 지켰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23번 싸워 23번 전승을 이룬 해군의 제왕이셨다. 하지만 무고로 인해 백의종군 후 남원에서 섬진강 따라 남해안까지 걷고 또 걸었다. 결국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고, 84일 후 아산 외가 선산에 묻혔다. 하지만 아산 현충사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시 중구에 있는 서애길 역시 충무로역 대한극장 가는 길 위에 있다. 500여 년 전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선조에게 천거한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3대첩을 이끈 도원수 권율 장군과 통제사 이순신 장군 사이에 도체찰사 서애 류성룡이 있었다. 류성룡이 자란 곳도 대한극장 근처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50m 앞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목멱산 기슭 마른내골 건천동과 개천에서 함께 지낸 형과 동생 사이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징비는 ‘내 지나간 일을 경계하고,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豫其懲而毖後患)”라는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과 상황을 기록한 류성룡의 땀과 혼이 담긴 서적이다. <징비록>에서 위기 속 나라를 생각하는 ‘이순신과 선조, 권율과 원균, 이이와 이항복 이야기’도 나온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소중한 강토가 유린당한 7년의 현실을 그대로 담았다. 역사 속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위기 속 또 다른 기회를 찾는 지혜가 다를 뿐이다. 어머니와 자식을 잃어도, 나라가 자신을 버려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국토와 백성을 지킨 인간 이순신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1598년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쌀쌀하지만 활기찬 겨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본 <노량 : 죽음의 바다> 그 장면이 더욱 애틋해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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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7 18:45

액자 걸기

몇 년 전 어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사물에게 말 걸기’라는 코너가 있었다. 일상에서 늘 보는 물건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액자’에게 말을 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아내와 나는 신혼 때 많은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액자 걸기’였다. 아내는 눈높이에 걸자고 했고 나는 천장에 가깝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말하는 높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낮은 것 같았다. 벽에 붙어있는 액자라는 사물을 처음 인식한 것은 물론 어려서이다. 그때 액자란 고개를 뒤로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경험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내와의 견해차이는 그보다는 내가 살았던 부안의 옛집 천장이 낮아서 높게 걸렸다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당시 아버지가 벽에 붙은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을 때 의자 위에 올라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옛집에는 시계와 함께 돌아가신 조부모 사진도 천장과 벽의 모서리를 이용해 거의 45도 각도로 걸려 있었다. 어른을 우러러보라는 뜻이 있는 것 같고, 조상님들이 방안의 우리를 지켜보니 삼가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대단히 권위적이지만, 시계나 유리 액자를 높이 다는 데는 위험한 물건이나 중요한 물건을 키 작은 어린아이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도 있었으리라. 액자란 무엇일까? 사람이 보기 위해 벽에 거는 사물이다. 그렇다면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 거는 것으로 충분하다. 액자 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포함한 내용물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 위험한 물건은 경우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어른 키높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물의 쓸모가 잊혀져 도리어 주인 행세하는 경우가 있듯이 사회의 제도도 그 본질을 잃고 인간을 옭아매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안존하려는 관성과 타성 탓도 있지만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본질을 애써 외면하려는 점도 있다. 한 지붕 안에 사는 부부도 의견이 다를진대 직장, 지역, 국가, 세계 등 크고 작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나로 모여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각기 다양함을 인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견 차이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가부간 판단이 필요한 때가 있다. 정부, 국회, 법원에서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같은 호모사피엔스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좁혀지지 않는 골을 두고,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I)에 판단을 맡기자는 의견이 나올 만도 한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축구나 야구 경기에서 불완전한 인간 심판 대신 기계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간의 판단을 번복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숫자와 양으로 계량할 수 없는 가치 충돌의 세계에 인공지능을 내세워 그 판단에 순복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면 되지 않은가 하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 단계에 오면 과연 “인공지능이 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본질과 쓸모를 보는 눈에도 주관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습해야 할 목적을 지닌 법과 제도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 그 자체만으로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액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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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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