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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내 세금 쓰면서 나와 멀어지는 양당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한국 정당은 ‘자산 부자’다.작년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은 ‘67억 건물과 125억 토지’를 보유한다.‘예금과 현금으로 450억 8919만원에 부동산 임대료 수입이 2억 5천만 원’이다 국민의힘은 ‘215억 건물과 642억 토지’를 갖고 있다.‘예금과 현금으로 72억 601만원에 11억 4000만원의 임대료 수입’도 있다.모두 여의도 소재 부동산의 공시지가 기준이다. ‘이중 지급’의 결과다.경상과 선거 보조금에 선거비용 보전까지 추가된다.2024년 4분기 경상보조금이 ‘민주당 54억 국민의힘 52억’이다. 경상보조금은 선거가 있든 없든 정당에 지급되지만 선거 때는 보조금이 추가된다.작년 총선 때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각각 189억과 177억’의 선거보조금을 받았다. 양당은 선거비용도 전부를 세금으로 보전 받는다.선거보조금도 받고 선거비용도 돌려받는 것이다.선관위도 바로 잡자는 입장이지만 ‘양당 협치’는 요지부동이다. 최근 선거에서 ‘민주당은 평균 158억 국민의힘은 평균 147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고 한다.“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으로 선거를 치를수록 정당은 부자가 된다. 양당의 자산(대출) 증식(청산) 속도는 기네스북 수준(?)이다.2015년 민주당의 재산 총액은 77억 8500만원이고 건물도 없었지만 10년 만에 657억 3100만원으로 8.4배 늘었다.10년 전 445억 4600만원이었던 국민의힘은 지금 1198억 5400만원으로 2.7배 늘었다. 민주당은 2016년 193억 원에 현재 당사를 매입하는데 이때 123억 원을 은행에서 빌렸다.국민의힘도 2020년 480억 원에 당사를 구입하면서 320억 원을 은행 대출로 마련했다.양당 모두 5년 안쪽으로 은행 빚을 전액 청산했다.‘조물주 바로 밑이라는 건물주’ 양당이다. 재원은 국민 세금과 당비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현금”이다.민주당은 지난해 342억5800만원 국민의힘은 205억2700만원의 당비를 걷었다.여기에 국고보조금으로 양당은 각각 438억1000만원과 411억5200만원을 받았다. 양당의 세금 의존은 구조적이다.양당 재정 수입의 절반이 넘는다.2024년 기준 더불어민주당은 56.1% 국민의힘은 66.8%를 국고보조금에 의존한다. 한국 정당은 ‘당원 부자’다.민주당은 2024년 전당대회 기준 ‘권리당원 약 122만 명 국민의힘은 책임당원 약 82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2017년과 비교하면 민주당 권리당원은‘25.6만→150.4만’,국민의힘 책임당원은 ‘37.8만→91.8만’으로 늘었다는 추정도 있다. 세계적 추세와 반대다.‘대규모 전통적 당원의 쇠퇴’와 ‘느슨한 참여의 확장’이 대부분이다.양당의 당원 수 폭증을 매우 이례적으로 보게 되는 까닭이다. 2023년 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민주당 전체 당원은 512만 3000명이다.2014년 243만 당원에서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국민의힘은 444만 9000명으로 2014년 270만 8000명에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히틀러의 나치당(900만)에 비유될 수의 당원 수로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양당 당원이다.주요 선진국의 10배가 넘는다.영국과 독일이 2% 일본이 1% 내외다.중국(7%)보다도 3배 가량 높다. ‘건물주와 당원부자의 정당’ 특히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정당’은 위험하다.세금 의존이 커질수록 정당은 ‘국가화’되어 당내 경쟁을 제한·안정화하려는 ‘카르텔 정당’화 위험이 커진다는 게 정설이다. “개딸과 태극기 부대”의 강성 지지층을 향한 구애가 과열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근본 배경이다.“강성 당원들에게 찍히면 경선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니 “그들이 좋아할 센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정청래 당선’과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선명성 경쟁’은 구조화된 부자 정당 카르텔의 완성을 상징한다.상식을 벗어난 강성 지지층 중심의 극단화된 정치는 민주주의 후퇴의 지름길이다 국민 혈세로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충당하면서도 양당은 당직 선거에서 유권자 의사를 무시한다.민주당은 ‘권리당원과 대의원 70%+국민여론 30%’ 국민의힘은 ‘책임당원 80%+국민여론 20%’로 지도부를 구성한다.권리당원과 책임당원도 ‘양당 공식 당원’의 1/5과 1/4 수준에 불과하다. 양당은 공적 자금으로 운영하면서 의사결정은 소수가 독점하는 ‘사유화된 공기업’이다.국민 혈세를 쓴다면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한다. ‘주주 자본주의’의 ‘혈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정당 재정의 공공성에 상응하는 시민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싫으면 받지 않으면 된다.’당원과 지지층 우선이라면 당비와 후원금으로 운영하라! ‘보조금 비중만큼의 시민참여’는 ‘당심-민심 괴리의 완충판’이자 ‘공적 기구로서 정당에게 부여된 국민 책임실현의 가교’다.내 세금이 제대로 쓰이길 원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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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1 18:46

[금요칼럼] 흐느끼는 돌과 ‘먼 곳’에 대하여

사람은 참 이상하기도 하지. 죽어본 적도 없는데, 죽음을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을 타고 생성과 변형이 반복하는 격류에 휩쓸린다. 우리는 좋든 싫든 우주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 삶이라는 것에 동참한다. 이 소용돌이는 영원히 지속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고, 나의 죽음으로 격류는 끝난다. 왜냐하면 온 것은 가고 시작한 것은 끝나는 게 생명 세계의 보편 원리이니까. 우리 중 태어나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다. 이 태어남에 내적 필연성은 없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파먹으며 산다. 그 생명 우주에 초대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 명쾌한 진리를 꿰뚫어보고 “인간은 참 이상하다. 죽어본 적이 없는데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참 이상하다. 아무것도 허락하지도, 아무것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죽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해 여름 서해안의 해변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평범한 돌이었다. 그것을 책과 필기구가 있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배고픔도 모르고 자라지도 않는 돌을 오래 두고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중에도 틈틈이 돌에게 눈길을 준다. 이 돌은 어디에서 왔는가? 돌을 쥐면 손에 퍼진 수용체 감감 속에서 그것이 둥글고 표면이 매끄럽다는 걸 알 수 있다. 돌 표면의 매끄러움이 시간의 유구한 흐름 속에서 마모와 변형을 거듭한 결과임을 증언한다. 돌은 저 먼 태고에 큰 바위에서 쪼개진 파편이었을 테다. 돌은 비바람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된 것인데, 이 돌에 윤곽과 형태를 부여한 것은 자연의 시간일 테다. 시간은 돌의 형태를 빚는 조각가다. 돌은 자연과 시간이 낳은 잔여물이다. 수동의 완고함으로 빚어진 돌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이것에서는 비와 바람, 대지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돌이 굴러다닌 편력의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마음은 어떤 복잡성과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돌에게는 백지 같은 순수함 밖에 없다. 이 돌을 마음이라고 하자. 돌은 아무 의지도 없는 무생물이고 죽음의 항구적 형태로 굳어진 물질이다. 비누처럼 쉬이 닳지 않는 돌은 우주의 침묵과 고요하게 조응할 뿐이다. 태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영원히 죽지도 않는 이 침묵의 고형물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시간의 포획 속에서 죽는 존재인 까닭이다.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인 돌이 운다. 심장도 마음도 없는 돌이 흐느끼다니! 그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그날 낮엔 붉은 동백꽃이 피어났는데, 돌이 흐느끼는 밤엔 하얀 꽃잎 같은 눈이 펄펄 날렸다. 한밤중에 쓰던 걸 멈추고 돌의 흐느낌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오, 죽음을 보는 자다. 즉물성과 침묵의 세계에 갇힌 동물은 죽음을 보지 못한다. 오직 생각하는 존재들만 죽음을 엿본다. 돌은 죽음을 모르고 따라서 울지 못한다. 울지 못하는 돌이 흐느끼며 울다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을 책상에 올려두고 바라본다. 모든 생물이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세계의 자명함이다. 마치 샘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우리는 운명처럼 세계를 만난다. 산 자들의 꿈과 갈망의 푸른 힘으로 꽃이 피고 지며 계절은 순환한다.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과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은 동일한 존재다. 죽는 사람은 죽음 그 자체로 돌아간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죽음에 이른 사람이 보는 건 이미 죽음이 아니라 ‘먼 곳’이다.”(두이노의 비가-제8 비가) 나는 책상에 놓인 말하지 않는 돌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돌의 지속되는 침묵이 저토록 숭고할 리는 없을 테다. 짧고 비천하지만 찬란한 생명을 가진 개체 중 하나인 나도 언젠가 죽음의 덫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자로 다시 태어나 살 수 있을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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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4 18:38

[금요칼럼] 공부가 무서울 때가 있다

공부가 무엇일까? 공부는 왜 하는가?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일까? 공부는 꼭 학교에서 책을 가지고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까. 공부해서 어디 다가 어떻게 써먹을까? 공부를 많이 한다는 말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공부가 꼴등이라는 말은? 일등이 있고 꼴등이 있다. 일등은 좋은 사람이고 꼴등은 안 좋은 사람일까. 좋은 대학이란? 일류 대학이란? 그런 데서 공부하면 무엇이 좋을까? 공부는 학교에 다닐 때만 하는 것인가? 공부 잘하면 어떤 사람이 될까? 공부 잘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까?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과 학교 공부 안 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부! 공부! 공부! 우리 아이들은 지금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과 집에서 무슨 공부 하고 있을까? 지금 우리 아이는 공부하면서 어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진짜 공부를 하면 좋은 사람이 될까? 행복한 사람이 될까? 책을 한 페이지도 안보고, 글자도 모르는 우리 마을 사람들도 있다. 그분들은 잘 못 산 것일까? 공부를 안 하면 무식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일까? 공부하면 시험을 보는데, 지금 그 정답이 정말 정답일까. 세상에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것일까? 사람들이 어떤 한가지 삶의 문제에 대한 정답 하나로 살아야 할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일을 하며 살까. 그 공부대로 살까? 공부를 잘하면 부자로 살고, 공부를 못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한다. 공부를 안 하면 어른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고 묻는다. 진짜로, 공부는 뭘까?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지금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지금 우리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해서 국민이 내 세금인 나랏돈으로 나랏일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모두 공부 잘할 사람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공부만 잘하면 뭐 한다냐? 사람이 되어야지. 여기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일류 대학에서 많은 공부를 잘한 사람이 차지한 자리는 모두 좋은 자리라고 한다. 공무원들이다. 공무란 무엇일까. 그러니까 그렇게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잘해서 높은 자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학교 다니지 않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지식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오랫동안 살았다. 저렇게나 공부를 잘해서 저렇게 높은 자리에 간 사람들이 무슨 돈 욕심이 있어 자기 욕심 챙기겠어. 다 알아서 배운 대로 우리들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겠지. 그렇게 국민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의지했다. 설마 그렇게나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저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 나쁜 짓 하겠어. 저런 높은(?) 사람이, 체면이 있지, 그런 못된 짓을 하겠어, 그렇게 생각했다. 대통령, 장관들, 국회의원들,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들 교수 경찰들, 장군들, 기자님들, 도지가 군수 경찰서장 교육감 교육장 교장, 교감 선생님, 면장 공공기관장님들 모두 좋은 대학을 나오고 또 많이 배운 사람이 설마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짓이야, 하겠어. 그러면 사람도 아니지. 그렇게 믿고 살다 보니, 아니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들이 우리의 공금을 얼마나 사적으로 사용하는지 다 알고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도 뻔뻔스럽게 대 놓고 나쁜 짓을 한다. 현 정부에서는 서울 대학을 열 개를 만든다고 한다. 서울 대학 열 개를 만들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열 배로 늘어날 텐데, 공부 잘하는 그 사람들이 나랏일과 나랏돈을 쓰는 것에 대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열 배로 늘어나서 나라 걱정 없는 국민이 열 배로 늘어나게 될까. 아무 생각 말고 공부 잘해서 출세만 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이 참담한 반사회적인 생태 지형을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공교육이란, 공공의 이익을 앞에 둔다는 것을,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그 어디에서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곳이 없이‘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는 공부가 무섭습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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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8 17:52

[금요칼럼]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나눔은 돌아올 때 진짜가 된다.’ 예전에 한 선배가 해준 말이다. 그저 멋진 말이라 여겼지만, 나이가 들어 과거를 돌아볼 때 그 의미가 마음 깊이 와닿는 장면들이 있다. 그중 한 장면이 떠오른다. 독일 유학 중이던 당시, 동료들이 부르던 필자의 별명은 하우스마이스터(House Meister), 커피마이스터(Coffee Meister)였다. 이른 아침 연구실 문을 열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문을 닫고 돌아가는 ‘건물관리인’의 모습, 아침마다 연구실 동료들 간에 ‘누가 커피를 내릴 것인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긴장감 속에서 잠을 이겨내야 하는 필자가 아침에 출근하여 곧바로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주변 동료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논문을 마무리할 즈음엔 거의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했고, 새벽에 동이 트고 나서 몇 시간 지난 후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며 겨우 정신을 차리곤 했다. 한참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필자는 다니던 한인교회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받게 되면서 고생의 강도가 2배로 불어났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교포사회에서 2세 자녀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부모와 불화를 겪는 가정이 많았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우등생으로 부모님의 자랑거리였던 자녀가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백인사회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원인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돌리고 원망하는 자녀들이 꽤 있었다. 이 청소년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멘토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논문 마무리라는 큰 숙제가 있는 필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거나 전공과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쯤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인 교포 2세들에게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여 상담하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1~2시간씩 그들을 만나 어려움을 듣고 가슴으로 상대방을 품는 일은 학위 논문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들과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독일의 어두운 저녁 날씨처럼 우울했다. 귀국을 앞둔 상황에서 청소년 중 누구도 변한 모습이 보이지 않아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마치고 최종 논문 심사를 위해 다시 독일에 방문하였을 때 아이들은 많이 성장하고 변해있었다. 어떻게 보면 등 떠밀리다시피 한 봉사였지만 그 시간만큼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고 그 진심이 통해서였는지 아이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후일에는 그들 중 아프리카 오지에 의료봉사를 떠나거나 후진국 자원봉사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논문과 청소년들을 돌봐주는 두 가지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필자를 곁에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본 연구실 동료들이 필자가 학위 논문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연구실 동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되돌려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내가 보여준 작은 사랑이 또 다른 도움으로 되돌아왔던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 사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아 생물이 살 수 없는 ‘사해’가 있다. 산맥에서 흘러 내려온 물은 갈릴리 호수에 생명체를 자라게 하고,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그 물은 요단강을 타고 사해로 흐르지만, 사해에 이르러서는 더 흐르지 않고 갇혀버려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된다. ‘사랑과 도움’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사랑과 도움을 받고 나에게서 끝이 나면 생명이 살 수 없는 짠물, 썩은 물처럼 되지만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맑은 물로 선순환이 될 때, 나도 살고 상대도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필자가 젊은 시절 겪었던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의 경험, 흐르지 못하고 갇힌 사해에서 생명체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주변 사람들과의 짧은 인사,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가벼운 대화가 따뜻한 정을 나누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게 시작된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이 타인에게 작은 울림이 되고, 언젠간 나에게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오늘도 ‘사랑과 도움의 선순환’이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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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1 19:03

[금요칼럼] 여름의 복판에서 바다를 노래하다

요즘 부쩍 자주 어린 시절이 꿈에 비친다. 내가 나이든 탓일까, 혹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 탓일까. 이런 꿈을 자주 꾸는 까닭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꿈은 아무 의미 맥락도 없이 뒤죽박죽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미 새벽이 와 있다. 내륙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땅따먹기나 하며 권태를 견뎠다. 나는 농업 기반으로 살림을 꾸리는 내륙인의 농담과 수수께끼, 그들만의 습속과 도덕관념을 체화하며 성장한다. 바다 근처에서 살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꿈을 품었지만 나는 내륙에서 나고 자랐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실존의 불가피한 조건이었다. 질풍노도였던 사춘기에는 바다를 동경했다. 바다, 나로부터 멀리 있는 바다는 미지의 그 무엇이고, 결핍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실물로 처음 영접한 건 17세때다. 그 여름 태풍이 몰아치던 동해안의 포구인 죽변항 앞 바다를 보았다. 방파제에서 본 바다는 집채만한 파도로 세상을 뒤집을 듯한 태세로 포효하며 사납게 일렁거렸다. 그것은 무서운 바다였다. 태풍이 지나간 뒤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놀랐다. 나는 일망무제의 고요를 품고 있는 바다의 표변에 몸서리를 쳤다. 저 바다, 저 무서운 바다, 저 변화무쌍한 바다! 배들을 난파시키고, 숱한 항해자들을 집어 삼키고도 어린애처럼 순진한 얼굴로 떠 있는 바다! 바다는 잠잠하거나 사납게 일렁이지만 약탈자가 아니다. 바다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바다는 스스로 그러함으로 인류에게 교역과 소통의 길을 열어주며 많은 기회를 베풀었다. 그 바다를 윽박지르고 도발한 것은 늘 탐욕스런 인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다는 상상력의 보고다. 바다는 모든 좋은 걸 무상으로 주었다. 나는 바다에서 분노와 열정을, 좌초의 쓰라림과 회생의 기쁨을, 우정과 사랑을 배웠다. 내륙인으로 성장했지만 나는 바다에서 인생의 덕목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중요한 계기 때마다 나는 바다에서 숙고하고 결단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리고 바다에 관한 많은 시를 써냈다. 바다는 내게 삶 자체다. 우리는 저마다 실존의 바다에 닻을 내린 채로 삶을 꾸린다. 바다에서의 나날은 예측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다가 변화무쌍한 탓이다. 허만 멜빌의 ‘모비 딕’은 거대한 흰 고래를 쫓는 에이허브라는 사내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바다에 관한 매혹적인 서사시다. ‘물줄기다! 고래가 물을 뿜고 있다! 는 덮인 산처럼 하얀 혹이다!’. 분노에 눈이 먼 에이허브는 일곱 곳의 바다를 누비며 흰 고래를 쫓는데, 흰 고래는 바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저마다의 바다에서 하얀 고래를 쫓는다. 하얀 고래는 우리 꿈과 사랑이고, 우리 그토록 열망한 성공이자 명망이며, 삶의 보람과 고귀함의 집약체일 테다. 어쩌면 그건 우리를 유혹한 신기루였는지도 모른다. 에이허브 선장이 쫓던 흰 고래는 궁극의 추구이자 의미의 표상이다. 살아보니, 흰 고래가 없었다면 에이허브의 삶은 무의미로 전락한다. 살아보니, 사람의 가슴마다 흰 고래가 살아 있다. 그것은 일종의 성배다. 그 성배를 찾으려고 우리는 평생을 실존의 바다에서 헤맨다. 나는 무슨 흰 고래를 좇았던가? 살아보니, 알겠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길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 흰 고래는 인생의 모험 그 자체인 것을! 평생 내륙인이었지만 스무 살 때 ‘바다사냥’이란 장시를 써서 내놓은 자로 감히 바다의 발명자라는 자부심을 품었다. 휘트먼에게 풀잎이 있고 보들레르에게 파리가 있었다면 나에겐 바다가 있었다. 지금 바다는 플라스틱 쓰레기 등으로 오염되고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인류가 일으킨 재앙의 피해자들은 고스란히 바다 생물들의 몫이다. 영원을 품은 저 바다, 뭇 생명의 태초를 품은 저 바다. 늘 새롭게 변화하며 숨 쉬는 저 바다가 살아야만 인간도 살 수 있다. 나는 폴 발레리처럼 노래한다, 저기 바다가 있다, 살아봐야겠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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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7 18:21

[금요칼럼] 8월 아침

일어나자마자 고양이에게 갔다. 고양이가 똥 쌌다. 3일 동안 똥을 싸지 않아서 걱정이었다. 안심했다. 부채 들고 날 파리 쫓으며 마을 길을 걸었다. 날 파리들은 떼로 까맣게 날아들어 눈동자 속을 파고든다. 경기네 집 둘레 벽 등이 훤하다. 불을 켜놓고 출타했나 보다. 집 주위 벽을 살펴보았다. 스위치를 못 찾았다. 논에 벼들이 꽉 차 간다. 볏 잎마다 끝에 이슬이 달려있다. 잘도 자란다. 볏 잎에 거미집들이 하얗다. 벼 논에 거미집들을 보고 안심하였다. 물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명랑한 물소리도 나를 달래주는 소리다. 할미새가 길에서 날아올라 전깃줄에 앉아 꽁지를 까분다. 비둘기, 참새, 개개비, 꾀꼬리. 파랑새, 직박구리, 돼지빠뀌, 어치, 붉은 머리 오목눈이, 까치, 박새, 물까치는 나의 산책 친구들이다. 호반새는 우리 마을과 먼 산속에서 멀리 운다. 강변 자갈밭으로 걸었다. 큰물이 지나간 자갈밭은 자갈돌들이 물살에 뒹굴고 씻겨 희고 깨끗하다. 자갈들은 밟으면 몸이 뒤뚱거린다. 신경을 써서 몸의 균형을 잡는다. 강 건너 복두 농막에 갔다. 복두, 잔가? 하고 불렀다. 복두가 느리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안개 속에 서서 이야기하였다. 자두 이야기했다. 아직 덜 익었다고 한다. 내가 경기 집에 불이 켜져 있다고 하자, 여수 놀러 갔단다. 경기에게 바로 전화한다. 내가 벌써 일어났을까? 그랬는데, 경기가 전화를 받는 모양이다. 집 둘레 전등불 스위치는 현관에 있다고 한다. 오늘 온단다. 자두가 익으면 아무 때나 와서 따먹으란다. 복두는 작은 텃밭에 오이, 가지, 고추, 옥수수, 방울토마토, 취나물도 키운다. 잘 자랐다. 복두는 나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당숙 아들이다. 당숙은 큰 소나기가 와도 절대 뛰거나 빨리 걷지 않으셨다. 평생 마을 길을 걷는 속도를 변동하지 않고 같은 속도를 유지 하셨다. 밤이면 강 건너 복두 농막에 불빛이 환해서 앞산이 정답다. 참새들이 떼로 전깃줄에 앉아 있다가 흩어진다. 참새들이 떼로 모이는 것은, 그해 새끼들을 다 길렀다는 뜻이다. 새끼들을 데리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닌다. 참새는 걷지 않고 뛴다. 참새에게서는 어쩐지 문명에 시달린 몸짓이 느껴진다. 참새들이 길가에서 풀씨를 따 먹는다. 풀대들이 작아서 올라가 앉지 못한다. 훌쩍 뛰어 풀씨를 물고 땅으로 내려오면 풀이 휘어진다. 풀을 발로 잡고 풀씨를 따 먹다가 풀을 놓아주면 휘어져 있던 풀들이 벌떡 일어서서 낭창낭창 흔들린다. 흔들리다가 멈추면 참새들은 또 풀쩍 뛰어올라 풀을 잡아당겨 발로 누르고 풀씨를 따 먹는다. 그 일을 반복한다. 강아지풀이다. 즐거운 놀이 같다. 새들은 꺾어질 풀이나 나뭇가지에 앉지 않는다. 철새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멀리 높이 나는 힘을 기른다. 어떤 새는 날다가 공중에 멈춰 발발발 떨고 있다. 웃긴다. 파랑새만 아직, 빼앗은 까치 집에서 새끼를 기르고 있다. 새들은 자세에서 표정이 나온다. 호박꽃이 핀다. 호박꽃은 해가 뜨기 시작하면 꽃을 닫아 버린다. 옥수수는 넘어지고 참깨꽃은 핀다. 강물이 많이 빠졌다. 시멘트 다리 주위에 고기 떼들이 물살을 튕겨 일으키며 논다. 내가 다가가자. 새까맣게 흩어지며 재빠르게 도망간다. 물고기들을 저렇게 떼로 놀다가 흩어지는 것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다. 불거지들이 얕은 물 속 자갈밭에서 등을 물 위로 내놓고 정신 없이 놀다가 자기도 모르게 땅 위로 훌쩍 뛰어올라 마른 자갈밭에서 훌훌 뛰다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었다. 짝짓기 철이 되면 불거지들의 몸은 화려한 무지개색을 갖추고 뽐낸다. 몸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임실 납자루’는 어디로 갔을까. 강변 자갈들이 달빛에 하얗게 빛나던 옛날 일이다. 주황색 조끼에 진초록 슈트를 잘 받쳐 입은 물총새가 잔 고기떼들이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노리고 돌 위에 앉아 있다. 이웃집에서 재채기 소리가 담을 넘어 크게 들린다. 자연은 이런저런 현상을 통해 해마다 다른 말을 한다. 자연은 꾸준히 자기들의 변화를 강변하고 사람들은 자연의 그 물음에 응하다가 외면하는 일을 반복하며 지구의 일을 크게 키운다. 매미가 울다 그쳤다. 해뜨기 전우는 매미는 맴맴맴 하고 우는 참매미다. 일찍 일어나 밭도 매고 논도 매라고 맴 맴 맴 운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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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31 18:10

[금요칼럼] 개기일식이 주는 삶의 지혜

올해는 유난히 무더위가 일찍 시작된 느낌이다. 한밤중에도 뜨거운 열기가 식지 않아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어젯밤도 더위를 참지 못해 뒤척거리다 침대에서 일어나 찬물을 마시고 집 안을 서성거리다 소파에 앉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다 문득 지난날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은 희미해지고 아름답고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그 시절을 힘들게 했던 어려운 일들, 그 일을 마주치면서 겪은 심적인 갈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미래에 대한 걱정은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힘들었던 유학 시절이 떠올랐다. 논문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 막막함과 불안함 속에 지내던 시기였다. 며칠씩 밤을 지새우며 내용을 고민하고 작성했지만, 지도교수님과의 면담을 거치며 공들여 쓴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지워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과연 내가 이 공부를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주말, 머리를 식힐 겸 가족과 함께 교외 호숫가에 다녀왔다. 유난히 오리를 좋아하는 두 딸과 함께 오리들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너희는 참 평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물속을 바라보니, 물 위에 조용히 떠 있는 듯 보이던 오리들이 사실은 물 아래에서 쉼 없이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애씀이 있다는 것, 성과라는 것이 결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닌 여러 과정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자신감이 바닥까지 내려갔던 당시엔 박사학위를 끝내지 못하고 귀국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지만, 그것은 성취의 과정이었고 그만큼의 애씀과 준비가 필요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교수님의 냉정하지만 날카롭고 세심한 지도, 주변 동료들의 도움, 가족의 응원이 결국 나를 성장시킨 동력이었다. 끝내 그 시간을 견뎌 학위를 끝내고 전공 분야의 학자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의 힘든 고개를 넘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인생의 자산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 ‘개기일식과 삶’의 비유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자연이 주는 교훈을 얻었다. 개기일식은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를 지나며 태양을 잠시 가리는 현상으로서 잠깐 동안 하늘은 캄캄해지고 태양이 사라진 듯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오죽하면 옛날 사람들은 세기의 종말을 보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실제로 태양은 달보다 400배 크고, 방출되는 에너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함에도 우리는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서 태양의 존재가 없어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기일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몇 분이 지나면 다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밝은 대낮이 돌아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의 모습은 희미해지다 못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난관이 태양을 가리는 달의 모습과 같아 보이는 것이 아닐까?’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생각을 정리해보는 ‘개기일식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어려운 시기마다 내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 응원하는 가족, 동료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득 ‘은혜’라는 제목의 노래가 떠오른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돌이켜보면 위의 가사가 가슴에 와닿고 머리가 끄덕여진다. 내 삶에는 개기일식과 같은 순간이 있었고 지금 내 앞을 가리는 일들로 그 뒤에 감춰진 빛을 보지 못하고 힘들어하면서 ‘왜 나만 혼자 고생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해주는 크신 은혜와 좋은 분들과의 사귐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개기일식이 주는 삶의 지혜’는 지금의 어려운 문제 뒤에는 밝고 힘찬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 혹시 그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시간이 지나면 말끔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해준다. 그와 함께 햇볕처럼 따뜻한 정감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분’들이 내 곁에 있음을 기억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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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4 17:42

[금요칼럼] 시대와의 불화 겪는 한국정당

정당은 “민주주의의 생명선”이다. 정당 없는 대의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작년 총선은 1987년 이후 무소속 당선자가 한명도 없는 첫 총선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소속이 300석 중 283석이다. 202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872석 중 양당이 862석을 차지한다. 정당은 권력의 성패를 결정한다. ‘윤석열 권력의 실패’는 여당의 기능부전에서부터 출발했다. “삼권분립은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라는 언급은 ‘이재명 권력의 민주당’을 상징한다. 개인화된 정당과 권력종속의 여당은 ‘정당과 정치 그리고 권력의 연쇄 실패로 이어지는 필요조건’이다.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붕괴는 ‘정당 좌절’의 전조 증상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윤석열의 여당보다 나을지’우려하는 이유다. ‘정당의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당의 제자리 찾기’가 핵심이다. 정당 특히 집권 여당의 제 역할 회복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정당의 연구는 다양한데 첫째, 조직 차원에서 정당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분석한다. 한국의 정당은 “간부정당,카르텔 정당 그리고 선거전문가 정당”이다. 둘째, 기능적 차원으로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분석한다. “포괄정당”이 대표적이다. 셋째, 체계의 차원으로 정당 간 상호작용과 정당 체계의 특성을 분석한다. “경쟁적 정당체계,양당제와 다당제”등으로 분류하는데 한국정당은 포괄정당으로 다당제의 경쟁적 양당제다. 최근 정당연구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거시적+미시적 접근의 융합이 등장한다. 정당의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요인을 분석하는 거시적 입장과 개별 정당의 조직과 행태를 분석하는 미시적 접근의 결합이다. 연구의 적실성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전통적 정당연구의 제도와 구조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있다. 정당의 내부 문화와 조직 행태에 주목하는 ‘정당 문화론적 접근’이다. 한 정당의 문화가 그 정당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다. 예를 들면 정당 엘리트와 당원 수준의 조직 문화와 행태를 설명하고 계파와 이념적 분화 등을 설명한다. 정당 민주주의 또는 당내 민주주의도 다양성과 함께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당직과 공직후보 선출과정의 민주성과 당내 의사결정구조의 성격 그리고 당내외 계파갈등의 양상’ 등이 초점이다. 정당 내부의 파벌구조와 문화적 역학 그리고 정당 지도부의 성향과 배경 등이 정당의 조직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다. 정당 내부의 비공식적 규범과 조직 관행 등이 새롭게 주목받는다. ‘스페인 포데모스와 이탈리아 5성운동’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두 정당의 후보자 선출과정은 정당의 조직 문화와 관계있다.’고 한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 구조와 문화를 가진다. ‘이데올로기 중심의 운동체로서 교리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문화의 공화당’과 ‘이익집단 연합체로서 수평적 연대와 내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문화의 민주당’이다. 한국의 정당 문화연구는 아직까지 간접적이다. ‘당원 충원방식과 조직 효용성 분석’은 공개된 당원 수와 실제 유효당원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당원 충원이 주로 선거 입후보자를 매개로 한 동원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정당의 당내 민주주의 연구에 따르면 정당 엘리트의 의사결정과정의 주도성이 관찰된다. 진보정당에서조차도 ‘권위주의적 운동문화가 정당 내부로 이전되어 당원 주도형 제도가 사문화’되었다고 한다. 성 평등 차원에서 한국정당의 조직문화 분석도 있다. 정당 사무처의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가 여성 당직자의 정치 세력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여성 당직자들이 남성 중심적인 정당 조직문화로 인해 부서배치 차별과 인맥 형성 소외 등을 경험하는 것을 확인한다. 한국정당의 조직 문화와 행태는 첬째, 중앙당 중심의 위계적·집중적 구조로 정당의 주요 의사결정은 당 지도부와 국회의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둘째,당 보다는 ‘후보자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물 중심적 문화와 당원의 수동적 참여다. 당의 신뢰와 충직함 보다는 ‘공천권’이라는 교환 관계를 매개로 한 인물 중심의 충성 문화가 지배적이다. 셋째, 한국정당은 남성 중심적 인사구조와 계파 문화로 여성·청년·소수자 당직자들의 문화적 소속감과 의사결정 참여가 제한적이다. ‘빠른 추격자’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는 대한민국 공동체는 정당이 시대변화와 그 흐름에 적응하기를 요구한다. ‘자율과 책임의 극대화와 다양성 제고’가 시대의 방향이다. 정치적 책임감과 공동체 우선의 공적 마인드는 전제조건이다. 과연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시대와의 불화를 넘어 설 수 있을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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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7 18:37

[금요칼럼] 여름과 후무사 자두와 연애

무슨 자문회의를 하러 서울에 나갔다 마치고 돌아온다. 나는 서울에 나갔다가 폭염에 화들짝 놀란다. 올여름 일사광은 비명이 나올 만큼 뜨겁다. 공중이 하얀 화염에 정령된 듯한 이 폭염은 열탕 지옥이다. 공중에서 새가 폭염에 기절해서 갑자기 추락할 수도 있겠다. 건설 현장에 나갔던 외국인 노동자와 땡볕에서 밭일을 하던 노인이 온열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어쩌다 한반도가 열탕에 갇히게 되었을까? 내 스물 살의 여름도 더웠다. 여름이니 더운 게 당연하고 여겼다. 하지만 그 시절의 더위는 올여름 같이 사납지는 않았다. 가정교사인 나는 여름 오후 4시에 폭염에 갇힌 거리를 지나 가여중생의 집으로 간다. 아이는 수학과 영어 공부는 싫어하지만 피아노를 잘 진다. 아이는 나 들으라고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데 검은 머릿결에서 햇빛이 빛난다. 월말에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월급을 받는다. 그는 염전의 사장이고 나이가 많다. 딸은 늦둥이인 셈이다. 그는 월급을 주며 늦둥이 딸이 공부를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서창에 해가 기운 뒤 버스정류장에서 퇴근하는 애인의 기다린다. 애인은 저녁 7시쯤에 도착한다. 우리는 칼국수를 먹은 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를 걷는다. 나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라는 음반을 사러 음반가게를 간다. 또 다른 날엔 애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알랭 드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다. 푸른 바다에서 요트를 운전하는 알랭 드롱이 너무 잘 생겨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애인은 비가 오면 반바지를 입고 빨간 장화를 신었다. 애인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우리는 영화를 본 뒤 칼국수를 먹고 돌아와 집으로 돌아간다. 스무 살에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스물한 살에 끝났다. 왜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더위에 늘어진 플라타너스의 잎들과 먼지가 떠다니는 버스정류장 일대의 여름 저녁 풍경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름 저녁 7시에 더는 버스정류장에서 나가지 않게 되면서 내 여름은 시시해졌다. 나는 여름비와 붉은 배롱나무 꽃을, 제주 협재 바다를, 후무사 자두와 복숭아를 사랑한다. 여름비는 온수 같이 따뜻하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애인은 내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으로 내 마음과 세상의 명도는 얼마쯤은 더 높아졌을 테다. 길바닥에 도랑을 이룬 빗물을 보며, 그 웃음을 만져볼 수 없구나, 생각하니 쓸쓸해진다. 장마가 끝나면 여름의 파란하늘에는 흰구름이 뭉개뭉개 피어오른다. 나는 샐러드를 씹어 먹는 어린 사자처럼 기분이 좋아져 시립도서관을 간다. 참고열람실에 구석 자리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는다. 비 그친 여름밤에 맹꽁이들이 운다. 축축한 공기가 떠다니는 여름밤에 후무사 자두를 먹는다. 후무사 자두는 달고 시다. 그 달고 신 것을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쓴다. 스무 살에 후무사 자두 세 개를 먹고 쓴 시에서는 후무사 자두향이 난다. 손에 묻은 후무사 자두향 냄새를 맡을 때 내 기분의 고도는 낮아진다. 언젠가 후무사 자두를 먹을 수 없겠지. 두꺼운 절망이 얇게 펴지면 우울로 변한다. 맹꽁이들이 맹렬하게 울어대는 여름밤에 나는 조금 우울하다. 여름은 아스팔트의 아스콘을 끈적이도록 만드는 태양의 계절, 비온 뒤 맹꽁이가 맹렬하게 울어대는 계절, 달고 신 후무사 자두를 먹고 달고 신 맛이 나는 시를 쓰던 계절, 흰구름 아래서 사자가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계절, 스무 살의 청년들이 도서관 복도에서 서성이는 계절이다. 수많은 여름들이 지나갔다. 숱한 이들이 내게로 왔다가 떠나갔다. 나는 그 여름들의 과거이자 미래다. 나는 폭염을 견디면서도 여전히 여름을 사랑하지만 이제 여름이 마냥 즐겁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여름의 기대, 여름의 소슬한 꿈은 물거품처럼 꺼졌다. 그렇건만 새로운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첫 연애의 기억과 함께 죽었던 연애세포가 오롯하게 살아난다. 여름에 만나서 여름에 헤어진 애인은 어디선가 이 폭염을 견디며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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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0 18:52

[금요칼럼] 잘 지나 간 시인의 하루

아침 일찍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30분 걷고 집에 와서 아침을 먹을 까 하다가 어제 읽었던 단편 소설을 다시 한번 읽기로 했다. 어제 읽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 줄거리가 드문드문해서 다시 읽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창밖에서 새가 울었다. 처음 울음을 시작할 때는 낮은음으로 시작해서 점점 높은 음으로 울어가다가 아주 높은 음에서는 일정한 음으로 울다 그치고 울다 쉬며 반복해서 울었다. 높은음으로 길게 울 때는 슬프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책 내용 속으로 새소리가 찾아들면 내용을 놓치곤 했다. 줄거리가 잘 이어지지 않을 때는 줄거리가 끊긴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 줄거리를 이었다. 도대체 어떤 새가 저리 예쁜 소리를 낼까, 궁금해서 책을 들고 창가로 가서 여기저기 뒷산 밤나무 숲속을 찾았지만, 새우는 소리는 또렷한데, 새는 찾지 못했다. 책을 다 읽고 아침밥을 대신해서 먹는 누룽지를 끓이고, 쌀을 씻어 밥하고, 집 뒤 안 살구를 두 개를 따 씻어 먹었는데, 익지 않아 떨떠름한 맛이 입안 가득 찼다. 냄비에 누룽지가 자글자글 물 닳아지는 소리를 냈다. 얼른 달려가 식혀서 먹었다. 그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새는 그치지 않고 울었다. 부엌문을 살며시 열고 서서 뒷산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새를 찾아보았다. 그때 새 울음소리가 문득 그쳤다. 문 여는 소리 때문인가, 가만히 서 있었다. 새가 울지 않았다. 저 새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설거지하는데, 이번에는 까마귀 움을 소리 물까치 울음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다른 쪽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까마귀기가 전깃줄에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 주위를 맴돌며 물까치와 꾀꼬리들이 까마귀를 공격하고 있었다. 물까지와 꾀꼬리의 집중 공격과 까마귀의 필사적인 방어를 겸한 공격은 격렬했다. 까마귀 한 마리에 꾀꼬리가 세 마리, 물까치 대여섯 마리였다. 싸움은 길고, 공방전은 치열했다. 새들이 공격하는 동안에도 까마귀는 전깃줄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새들의 공격이 더 치열해지자 견디지 못한 까마귀가 진지인 전깃줄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새들은 함성을 지르며 까마귀를 쫓았다. 푸른 하늘에 새들의 공중전은 볼만했다. 까마귀는 회문산 멀리 사라지고 꾀꼬리와 물까치는 마을로 귀환해서 흩어졌다. 싸움이 끝났다. 한숨 돌린 나는 댐의 방류로 불어난 큰 강물을 뒷짐 지고 서서 구경하였다. 큰물일수록 소리를 감추고 묵묵하게 흐른다. 오후에는 새로 나온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 소설집을 읽었다. 두어 편은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이지만 다시 읽었다. 본 영화를 다시 볼 때처럼 기억나지 않은 새로운 장면들 때문에 글은 새로 읽혔다. 김애란의 소설집을 다 읽고 ‘문지’의 ‘소설보다 봄’ 속의 성해나의 단편 ‘스무드’를 읽었다. 선이 굵직굵직하고 이야기가 힘차게 뻗어 나갔다. 글발이 흐르는 강물처럼 출렁이고 꿈틀거린다. 밥 먹기 전에 읽은 단편은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 피다’ 였다. 무더위가 일찍 시작되었다. 벌써 뙤약볕이다. 올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이렇게 더울 때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 책을 읽을수록 읽을 책이 자꾸 새로 나타난다. 그것이 좋다. 아직도 책을 읽을 힘과 글을 쓸 힘이 내게 비축된 긴장을 느낀다. 대통령은 부지런히 여기저기 다니며 나랏일을 하고, 자주 웃고,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 편하게 밥 잘 드시고, 국회에서 선배님을 만나 악수하며 어깨도 툭 친다. 별로 웃기지는 않지만, 뼈 없는 농담도 해서 대통령 본인도 속 편하게 웃고 착한 우리 국민 맘 편하게 해서 좋은 거 같다. 남 탓 별로 안 하고, 나라 일하면서 큰소리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지 않고도 공무를 보는 이들을 은근히 긴장시킨다. 취임한 지 한 달 되었는데, 오래된 대통령처럼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익숙해지고 있는 것도 같다. 크게 속상한 일들도 큰 소리 나지 않게 순리대로 잘 풀리길 바란다.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흐르면 일이 저절로 해결되게 하는 정치의 기술도 있다. 나는 오늘 우리나라 시인으로 우리 마을과 함께 하루해가 잘 넘어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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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3 19:25

[금요칼럼] 종소리가 외치는 삶의 우선순위

지난달, 모교에서 고위정책 과정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KTX와 광역버스, 시내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여유 있게 움직이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강의 장소에 도착했다. 여유 시간에 옛 추억이 어려있는 모교의 복도를 천천히 걷다 보니 장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학생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복도 한쪽에는 옛 스승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 있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70년대 초,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토계획과 환경정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학자들이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남성, 여성의 평균수명은 각각 80.6세, 86.4세이다. 인생 2라운드를 사는 필자도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진짜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곰곰이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천문시계 ‘사도들의 행진’을 본 적이 있다. 매시 정각이면 성 비투스 대성당 앞에 있는 시계탑에서 인형들이 나오는데 관광객들은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그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4개의 조각상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조각상이 종을 울리는 줄을 당기면, 그 옆에 있는 ‘탐욕’, ‘허영’, ‘쾌락’을 상징하는 세 조각상이 나와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장면이다. 죽음을 경고하는 종소리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모습이 필자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도 시계탑에 있는 네 개의 조각상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건강,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행동 등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뒤로 미루고 당장 눈앞에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종소리는 ‘너의 삶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라.’라는 충고의 말처럼 필자의 가슴을 두드렸다. 일단, 내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적절히 관리하며 의미 있게 사용하는 지혜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을 건강한 생각으로 시작하고 작은 일이라도 시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집중하고 난 후 휴식하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이지만 ‘오늘 하루를 잘 보냈어!’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다. 또, 내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지금까지는 나 중심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아내, 가족, 친구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배려해야 할 시간이 왔다. ‘내가 좋으면 그들도 좋은 것’이라는 일방적 행동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마지막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정리하는 일이다. 읽지 않는 책, 입지 않는 옷, 무의미한 교제 등 욕망으로 끌어안고 있던 짐들을 하나하나 덜어내야겠다. 정작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 쓰겠지 하고 쟁여놓았던 물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했던 관계, 나의 경직된 프레임으로 만들어 놓은 고민들. 훌훌 버려야 진정 자유롭고 가벼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하루는 의미 없게 낭비하는 1년보다 훨씬 귀하다.’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가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삶의 끝이 언제일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매일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다.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서의 기억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한자리에서 마주한 듯한 시간이었고, 그 속에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프라하 천문시계 조각상처럼 내게 들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일상을 돌이켜보며 정돈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매일의 일상을 보내면서 유한한 인생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정돈하는 그 시간. 즉, ‘삶의 우선순위’를 정돈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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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26 18:33

[금요칼럼]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내년 6월 3일 지방선거 결과는 어떨까? 오늘 시점에서 보면 ‘민주당 승리 예측’이다. ‘대통령 후광효과’로 선거가 취임일에 가까울수록 여당에 유리하다. 2018년 지방선거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년 즈음으로 당시 그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선거 전날 ‘북미정상회담’은 민주당 압승의 확인이다. 2022년 지방선거는 대통령 취임 22일 만으로 ‘허니문 효과’다. 윤석열 대통령 재임 중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이 때다. 2018년과 2022년 지선 모두 ‘대선의 연장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지방선거 결과는 ‘양대 정당독점과 반복되는 특정정당의 쏠림’이다. 2022년 지방선거의 광역의원 872석 대부분을 국민의힘(540석/62%)과 민주당(322석/37%)이 독점한다. 양당의 독점은 자신의 텃밭 지배로부터 출발한다. 국민의힘은 영남권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광역의회 의석의 90%이상을 차지한다. 대구는 32석 중 31석 광주는 23석 중 22석이다. 양당은 교대로 ‘특정 정당 쏠림의 정치적 행운’을 누린다. 2018년 광역단체장 기준 ‘민주당(14) vs. 자유한국당(2)’은 2022년 ‘국민의힘(12) vs. 민주당(5)’로 바뀐다. 기초단체장도 2018년 ‘151 vs. 53’은 2022년 ‘63 vs. 145’로 역전된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서울시 의회 110석 중 102석을 얻는다.지역구 선거는 ‘97 vs. 3’으로 비례 포함 6석의 당시 자유한국당은 교섭단체도 구성못했다.경기도 의회도 민주당은 142석 중 135석으로 압도한다.자유한국당 4석 정의당 2석 바른미래당 1석이었다. 2022년 지방선거는 정확하게 반대다. 국민의힘은 서울시 의회 112석 중 76석을 차지하며 12년 만에 과반의석을 확보한다.경기도 의회도 민주당 압도에서 양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서 각각 1석씩 더 얻으며 여야 동수 의회가 된다. 강원도 의회도 특정 정당 쏠림 현상이 엇갈린다.2014년 당시 새누리당(37/44석) 2018년은 사상 처음으로 민주당(35/46석) 그리고 2022년에는 다시 국민의힘(43/49석)이 압도적 의석을 갖는다. ‘소선거구+단순다수 선거제도의 승자독식 구조’의 당연한 결과로 결국 ‘양대 정당으로의 수렴’이다. 정당별 득표율과 의석수의 괴리도 심각하다. 2018년 지방선거 서울시 의회선거에서 당시 민주당은 51%의 득표율로 93% 의석을 독점한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25%를 득표하지만 의석은 5%에 불과하다. 당시 바른미래당(12%)과 정의당(10%)은 각각 1석씩 얻는데 그친다. 민주당 지지표와 바른미래당 지지표 1표의 가치가 23배 이상 차이다. ‘소선거구+단순다수제’의 대량 사표발생을 완화하자는 비례대표도 역할을 못한다. 전체의 10%에 불과하다.OECD 34개국 중 1등만 당선되는 제도를 채택하는 나라는 7개국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시행한다. 결과는 정치적 양극화와 거대 양당 중심의 지방정치의 대립구조 고착화다. 소수 의견은 배제되며 정치적 대표성도 악화된다. 지방의회의 견제와 균형 기능 상실도 당연하다. 텃밭의 양당 독점과 엇갈리는 특정 정당으로의 쏠림현상은 지방선거의 무투표 당선 급증으로 이어진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는 508명으로 2002년 이후 최다다. 군소정당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지방자치와 지방정치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질 저하가 우려되는 이유다. 대안은 첫째,지역정당이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지역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특히 ‘중앙당을 수도에 두도록 규정’한 것은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지방 없는 지방자치’다. 지방자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지역정당이 활발하다. 우리도 “직접행동영등포당은 문래동의 공공공지 문제,은평민들레당은 불광천 생태하천 복원,과천시민정치당은 지식정보타운 중학교 신설 문제” 같은 구체적인 지역 현안에 집중하게 하자! 지역정당은 ‘공천이 당선이고 공천권을 가진 중앙 정치인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지역’과 ‘중앙정치의 대리전’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의제 정당의 활성화는 정치적 소수자의 대표성 강화와 정책혁신을 통한 주민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한다. 둘째, 광역의회 중대선거구제다. 지역정당과 지방의회의 정치적 다원성은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시킨다.협치의 필요성을 높이고 정책경쟁을 유인한다. 셋째, 광역단체장 결선투표제다. 원내 8개 정당 의원 11명이 공동발의에 참여한 천하람 법안이 대표적이다. 중대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는 지방정치의 다양화와 다당제 정치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지방 있는 지방자치’가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 결선투표 도입을 통한 민주적 정당성 강화와 사회적 갈등 최소화’를 약속한다. 민주당과 이 대통령의 정치적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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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9 19:16

[금요칼럼] 6월의 장미꽃은 흐드러지고

우리 시름을 덜어주던 모란과 작약꽃이 지고 나니, 이웃집 담에 걸린 6월의 장미꽃이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붉은 장미꽃은 눈에 시리도록 탐스럽고 아름답다. 이 계절에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죽고 사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불가피하게 겪는 숙명이니 이걸로 누군가와 드잡이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5월에 손아래 누이가 세상을 떴다. 한 배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태어난 오남매 중 손아래 누이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조카의 연락을 받고 요양병원에 있던 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누이는 편안해보였는데, 놀란 것은 누이가 외할머니와 판박이처럼 닮아서다. 병상에 누운 외할머니가 일어나 잘 왔다고 내 등이라도 두드릴 것만 같았다. 누이는 이태 전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힘들게 투병을 하다가 내게 유서라고 할 만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오빠, 나 먼저 가. 오빠는 천천히 있다가 와. 누이는 그렇게 적었다. 죽음을 앞두고 볼펜을 쥘 힘조차 없었을 텐데 온몸을 쥐어짜 몇 자를 적었을 테다. 그 쪽지를 조카에게 건네받아 읽을 때는 눈물을 꾹 참았는데, 육개장 국물을 플라스틱 수저로 뜨다가 눈물 몇 방울이 후두두 벌건 국물로 떨어졌다. 나는 살아 있음으로 육개장 국물이 짠지 싱거운 지도 모른 채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누이의 장례 뒤 새벽에 오줌을 누러 일어났다가 고요한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아내와 고양이 두 마리가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각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음으로 거실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새벽이 오기 전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누이가 떠나고 그 부재의 현전을 실감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각이었다. 산 자는 어떻게든 살지만 죽은 자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누이의 장례식장에서 먹은 육개장 국물의 맛을 떠올리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럽고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마는 육친을 떠나보내는 것은 더 큰 상실감을 갖게 한다. 부모님 중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성에 와 있던 어머니가 그 뒤를 이어 떠났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메말라 슬픔 한 조각도 없었던가? 퉁곡하 듯 울음을 토해낸 것은 장례 끝나고 보름쯤 지났을 때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다했구나, 하는 자각이 스친 찰나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나는 한밤중 시골집 부엌에서 혼자 앉아서 통곡을 쏟아냈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겪지는 않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란 생리적인 운동과 활동을 멈추고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이다. 살아서는 겪을 수 없는 일, 누구나 단 한 번만 겪을 수 있는 실존적 사건, 살아 있음에 반대되는 것, 그 확실성이 죽음이다. 삶은 몸을 갖고 온갖 슬픔과 근심을 끌어안고 느끼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게 삶이다.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면 나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도덕경경 13장) 오후 산책을 마친 뒤 붉은 줄장미 피어 있는 집을 지나쳐 돌아온다. 목덜미에 닿은 햇볕이 따갑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잠겨 있던 롤랑 바르트는 나날의 소회를 일기에 적었다. 그 일기를 묶은 책이 ‘애도일기’다. 스쳐 읽은 것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왔던 것은 가고 간 것은 돌아온다. 누이가 떠나고 내 안에도 순수한 슬픔이 고인 고랑이 생겼다. 누이여, 그대 있는 곳에도 6월의 붉은 장미가 활짝 피고, 장미꽃 향기를 품은 바람도 부는가? 그대 돌아간 간 곳에서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고 평안을 누리시게. 필경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는 마시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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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2 18:36

[금요칼럼] 대통령

이따금, 문득, 때로 내가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이게 사는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 이게 꿈속은 아닌지, 내가 나의 삶을 의심하며 내게 묻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게 묻기도 한다. 내 하루하루가 초라하고 괴롭고 슬퍼지지는 않는지, 그럭저럭 그래도, 잘못 디딘 곳이 많고 볼품없고 허술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런 거지 그저 이런 거지 이러면 되지 스스로 위안도 하며, 일어나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물도 마시고 어질러 놓은 책도 챙기고, 거실도 정리하고, 밖에 나가 앞 산도 한번 보고, 뒷산도 돌아다 보고, 물도 보고, 숨도 몰아쉬며, 아침이구나, 또 하루를 시작하였다. 참새가 벌써 새끼를 기르나, 마당 가 감나무 잎 사이에 푸른 벌레를 물고 나를 경계한다. 까치가 앉아 있는 느티나무도 본다. 어? 오늘 아침에는 꾀꼬리가 날아와 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으로 가만 가만 노랗게 그네를 타는구나, 집 밖으로 걸어 나가 마늘 밭 가를 어슬렁거리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본다. 찔레 꽃은 벌써 지고 없구나. 나는 지금, 쓸쓸한가? 한가한가? 나의 시에 대한 나의 고민과 외로움과 괴로움은 정당한가. 세상에 대한 나의 말과 글은, 그 행색이 초라하지는 않은지, 내 걸음걸이는 가난하지 않고 내 얼굴 표현은 정당하고, 내 말은 저문 나무같이 아름다운가? 내가 이렇게 살자고 제법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고, 힘든 데다 더 힘든 말을 보태지는 않은지, 불안과 적개심은 조성하지는 않는지, 마을을 돌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 샘과 뒷산 감나무를 보고 새소리들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시가 바람처럼, 기억나지 않은 어느 날 날씨처럼 새소리처럼 햇살처럼 없었던 것처럼 자국 없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 생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가만히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 같이 서서히 사라지면 그만이겠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고 앞산의 진초록은 해마다 지치지 않고 저리 진저리를 치며 푸르러질 것이다. 숨 막히던 진초록이 지나갔다, 여기까지 산은 얼마나 요동쳤는가. 그러면서 초록은 동색이 되어 성하(盛夏)의 입구에 의연하게 섰다. 올해 새로 길어 난 마당 가 감나무 가지를 뼘으로 재어보니, 30센티미터는 더 자랐다. 감꽃이 피었구나. 꽃진 다음으로 감이 커갈 것이다. 놀랍다. ‘자연은 건너뛰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어머님과 아버님이 사시던 집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시고 내가 태어나 자라 사는 집이 아니었으면 이런저런 일 속에서 사는 내 마음이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할 때도 더러 있다. 살아 온 많은 것들을 잊고 잃어버리고 사니까. 나의 삶은 고향을 멀리 두고 이따금 그리워하며 사는 일상이 아니다. 회한이 더 짙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내 삶을 내 주머니에 우겨서 넣고, 만지작거리며 날이면 날마다 강가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부는구나. 몇천 만개의 나뭇잎을 흔들고 몇천 만개도 넘는 바람이 앞산에 불어오는구나. 오늘은 강 건너 숲에서 새들이 많이도 우짖는다. 새들아 오늘 만은 우리를 위해 울어다오. 강가에 서 있다가 삶이 이래도 된다고, 어쩌겠냐고, 가보자고, 오늘도 강을 건너가 보자며, 그러자며 강을 건너간다. 그냥, 사는 게 이렇게 호젓하게, 삶은, 삶이 이렇게 구석구석 살아지는구나. 그래,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강을 건너면 산이다. 산을 올려다본다. 그 위에 구름이다. 구름은 흐른다. 때로 나를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후회하고 나를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며 세상에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때로는 못난 나를 스스로 위로하다, 다시 걷는다. 걷는 것이 나는 좋다. 지금을 버리고 다음을 딛고 그다음 새 땅을 디디면 또 새 땅이 온다. 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대통령이 있는 듯 없는 듯 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사람’ 말이다. 나는 이 나라 백성이다. 때로는 나도 나라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을 생각하며 ‘그런’ 적은 없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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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6:12

[금요칼럼] AI+X 시대의 새로운 도전

얼마 전 영국의 세계적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스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 THE)가 주최한 아시아대학 총장 컨퍼런스에서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우송대의 국제화 전략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그 자리를 통해 아시아 유수의 대학 총장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고등교육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었다. 총장들은 공통적으로 대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국제적인 대학평가의 중요성과 AI를 고등교육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발표된 아시아 10대 대학의 순위는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주요 대학이 당연히 순위에 포함될 것이라 기대하며 자리를 지켰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발표된 10개 대학 중 무려 7개 대학이 중국 대학이었고, 특히 중국의 저장대학교(Zhejiang University)의 성장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저장대학교의 성공 배경에는 AI를 기반으로 한 융합교육 ‘AI+X’에 있었다. 교양대학에서 인문학적인 소양 교육을 받듯이 학생들의 AI 기초 소양 교육을 의무화하였고, 이를 각 전공 분야와 융합하여 고등교육 전반에 녹여냈다. 이러한 AI 기반 교육 혁신을 바탕으로 학업이 연구, 창업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저장대학이 중국의 혁신대학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특별한 교육과정을 통해 세계적인 AI 기업 딥시크(Deepseek)의 창업자인 량원펑을 배출하게 되었고, 딥시크 AI는 저비용 고효율 모델 개발을 통해 기술 접근성이 향상되고 중국-서구 간의 AI 기술 격차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오늘날 세계는 ‘AI+X’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혁신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AI+제조업’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교육과 연구 현장에서는 ‘AI와 전공을 결합한 융합형 인재 양성’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AI를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 AI와 데이터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기술인 데이터 사이언스(Data Science)를 결합하여 ‘AI·DS’를 핵심역량으로 교육체계를 바꾸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들도 ‘특성화 분야의 전공과 AI 역량을 갖춘 융합인재 양성’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이러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취업시장에서도 과거 ‘인성’을 강조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AI 역량을 기본소양으로 갖추고 전공 및 협업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AI+X’형 학습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인생 2라운드를 준비하는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퇴직 평균 연령이 49.4세인 현실에서 AI는 새로운 도전의 문을 여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없앴고 대학에서 4년간 배운 전공으로 평생을 버틸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나이와 관계없이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기술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고 경험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려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음을 실감한다. AI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여 대학도 청년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위한 평생학습의 장, 특히 AI와 연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나 언제든 다시 배우고 도전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AI와 함께하는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AI가 이끌어가는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기회를 앗아갈 수도 있고 다른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과 경험을 AI와 연결시켜 ‘AI+X’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향성 있는 ‘새로운 도전’만이 그 기회의 문을 열 열쇠가 될 것이다. 대학은 이미 문턱을 낮추고 넓혀 놓았으니 보다 많은 이들이 기회의 열쇠를 쥐게 되기를 희망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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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9 18:14

[금요칼럼] ‘이재명의 민주당’은 ‘윤석열의 여당’보다 나을까!

‘윤석열의 권력은 실패’다. 통합의 구심점은커녕 권력은 양극화된 진영대결의 한 축으로 전락한다. 대한민국 공동체 미래의 준비와 선도도 물론 불가능했다. 권력의 실패는 ‘정치의 실패’다. 견제와 균형의 붕괴는 입법부의 기능상실과 권력 집중으로 이어진다. 문제해결 능력과 타협 부재의 정치는 정치 리스크를 높이고 결국 국민 신뢰를 잃는다. ‘민폐가 된 정치 리더십’으로의 퇴행이다. ‘권력과 정치의 실패’는 제도적 결함의 결과로 ‘정당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정당 실패는 정당역할의 상실로 ‘제왕적 대통령과 야당대표 권력’으로의 종속과 당내 민주주의 훼손 나아가 입법부 역할의 포기로 이어진다. 대의 민주주의의 기능 부전이자 위기 심화다. ‘윤석열 권력 종속의 국민의힘’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나타난다. 2022년 4월 ‘검수완박’법안은 대통령 당선인의 반대로 여야 합의 4일 만에 무효화된다. “국민의 뜻”이라는 게 합의 파기에 대한 여당 측의 공식 설명이다. 의원총회에서 추인까지 받았던 여야 협의안의 번복은 입법부의 자율성보다 대통령의 권력이 우선임을 상징한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대통령의 “특정 세력의 유도 가능성”과 “민주당의 여론조작” 그리고 “북한 지령에 따른 행동”등의 발언들은 여당 의원들에 의해 반복 된다. 대통령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권력 복종’의 전형적인 여당 사람들이다. ‘이준석 대표 축출’과 ‘김기현 대표 당선과 강제(?) 사퇴’ 그리고 ‘한동훈 비대위원장 선임’도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된다. 집권 여당대표의 진퇴를 사실상 대통령 한 사람이 결정한 셈이다. 여당 국민의힘의 정당으로서의 자율성과 당내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다. 김상욱 의원이 “국민의힘은 정당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라며 “야당이 된다 해도 야당으로서 견제기능조차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이유다. 집권 여당 민주당의 가능성이 높은 지금 ‘이재명 권력의 민주당’은 “삼권분립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를 구현하려 한다.2022년 대선 슬로선 ‘이재명은 합니다.’의 구체적인 실천이 진행 중이다. ‘이재명 재판 중지법’은 ‘피고인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때에는 법원은 당선된 날부터 임기 종료 시까지 공판절차를 정지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묻지마 이재명 당선법”은 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죄 구성 요건 가운데 '행위'를 삭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들의 뜻대로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재명 후보의 해당 혐의는 자동 면소된다. 헌법 제84조의 ‘불소추 특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허위사실공표죄의 ‘행위’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2021년 합헌결정을 내린 상황이라 위헌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법권 침해” 우려와 정치적 압박 비판은 무시 된다.민주당은 “사법 쿠데타”나 “사법살인”으로 본다. ‘재판 4심제’로 불리는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확대안과 대법원장 청문회와 탄핵론으로 이어진다. 지난 3년에 걸쳐 완성된 ‘이재명의 민주당’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압도적 당 대표 재선과 “비명횡사”의 2024년 총선공천으로 마무리되었다. 윤석열의 여당과 이재명의 민주당 모두 (대통령이든 야당대표든 제왕적인) 개인권력 중심의 정당이다. 한국 정치에서 정당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보다는 권력의 맹종을 우선 한다. 집권당은 언제나 “청와대(용산) 출장소”였다. 귀결은 입법부로서의 독립적 역할과 견제 기능의 상실이다. 당내 민주주의의 붕괴도 마찬가지다.‘정당-정치-권력의 연쇄 실패’는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다. ‘이재명 개헌안’은 ‘대통령 권력의 분산과 국회 권한과 기능의 강화’로 요약되는데 입법부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전제 될 때 성공 한다. 대통령과 입법 권력의 민주적 견제와 협력의 동적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제도적 협치 시스템은 권력의 건강한 긴장관계에서 시작한다. 정당의 실패는 다양성과 역동성의 당내 민주주의의 파괴로 결말은 정당의 사회적 대표성 약화와 결여다. 유권자 10명 중 6명 이상은 “정당이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지 못한다.”며 “현재의 정당체제로 민주주의 유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당의 제자리 찾기(성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당내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한 권력 견제의 제도화가 요구된다. “권력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고 민주당 안에서 견제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권력폭주가 있을 때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직언한다.”는 김상욱 의원의 다짐이 민주당에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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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2 18:33

[금요칼럼] 다들 잘 알지만 쉬쉬 하는 작가들의 사정

나는 집필노동자다. 보통은 시인이나 작가라고 불리지만 서른 두 해 동안 나를 버팅기도록 도와준 건 집필노동이다. 집필노동자의 수입원은 두 가지다. 매체에 기고하면 나오는 원고료와 출판사와 저작권계약을 맺고 낸 책에서 발생하는 인세 수입이다. 우리나라에 문학(시인, 소설가, 수필가) 종사자를 알려주는 국가통계 따위는 없다. 어림짐작으로 30만명쯤 되리라 생각한다. 이들 중에 저작 활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넉넉하게 잡아도 300명을 넘지 않을 테다. 오직 0.001 퍼센트에 드는 사람만이 글을 써서 먹고 산다. 오직 집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천운 덕분이다. 작가들은 생계를 꾸리려고 교사, 대학교수, 언론출판계, 의사, 건축가 같은 일을 하고 그 나머지는 비정규 노동자 처지와 다를 게 없는 학원강사, 판매직, 자영업, 공사장 잡부, 대리기사, 시간강사, 자서전 대필 같은 허드렛일을 한다. 글쓰기 외의 직종에서 일하는 작가들은 직장에서 퇴근하고, 혹은 주말에 몰아서 글을 쓴다. 드물게는 이종격투기나 장례지도사나 연예인 같은 직종의 일을 하면서 쓰는 이들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될 테다. 얼마 전 한 후배가 대리기사를 한 경험을 장편소설로 써서 책을 냈다. 신문사 두 곳 신춘문예 공모에서 시와 소설이 잇달아 당선되며 유망한 신인작가로 주목을 받은 작가다. 그가 유력 출판사들에서 출판 제의를 받은 게 16년 전 일이다. 그 뒤로 시집과 소설책 몇 권을 냈으나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가 받은 인세는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을 테다. 그는 무명작가로 살지만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저러다가 굶어죽지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업계의 사정을 흘리자면 원고료는 40년 전과 똑같고, 작가들이 몇 해에 걸쳐 쓴 작품이 출판사와 저작권 계약을 맺더라도(그건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책이 중쇄를 찍는 경우는 훨씬 더 드물다. 나는 종종 성인 열 명 중 여섯이 일 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 척박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나온 건 기적 그 이상의 일이다. 그보다 작가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더 기적일지도 모른다. 여섯 해 전 한 시인이 굶어 죽은 일이 일어났다. 죽은 뒤 보름이 지나서야 비참한 상태로 발견되어 지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게 외부로 알려진 건 그가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 같은 시집으로 주목을 받고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덕분이다. 이런 업계의 참담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나 계간지의 신인작가 공모에는 수 백, 수 천의 작품들이 몰린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하는 건 단 한 사람이다. 그들이 머잖아 처하는 사정은 앞서 밝힌 것과 어금버금하다. 이 업계가 처한 현실을 잘 알지만 다들 쉬쉬 하며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나라 경제 규모는 40년 전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작가들은 최저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기금을 주고,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문학 우수도서를 뽑아 간접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그건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출판 편집자 15년 경력을 뒤로 하고 불가피하게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서른 두 해나 우직한 회사원처럼 글 쓰는 데 매달렸다. 나는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흥청망청 한 기억도 없다. 한때는 방송 패널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했지만 들인 시간과 노고에 견줘 수입은 보잘 것이 없었다. 집필노동으로 생계를 꾸린 일에 한 줌의 자부심이 없지 않은데, 물론 이건 재능이나 성실함 때문이 아니라 행운 덕분이라는 걸 잘 안다. 어쨌든 빈사상태에 빠진 이 업계를 살리려면 정부가 지금처럼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시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작가의 생계나 복지 실태를 살펴보고, 40년 째 그대로인 원고료를 올리며, 작가에게 노후 연금을 지급하는 지원책 등을 내놓아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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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5 18:08

[금요칼럼] 나무와 어린이와 대통령

나는 우리나라가 나무를 ‘제일로’ 사랑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들은 더 오래 살도록 보호해 주고 어린 나무들은 나라의 곳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기름지게 할지니, 잘 자라도록 돌보고, 길을 내거나 집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오래 토론하고 그 나무를 보고 사는 사람들의 의견들을 모아 나무의 운명을 결정하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들이 공사판에서 함부로 뽑히고 찢기고 잘린 체 하얀 속살을 보이며 나자빠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고 부아가 치밀 때가 많다. 내가 다니는 강변길에서 자란 기세가 좋거나 장래가 엿보이는 나무들을 나는 가꾼다. 칡넝쿨같이 강한 넝쿨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걷어주고, 웃자란 가지들을 다듬어 준다. 인간에 대한 모독이 인간만을 상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얽힌 사연들을 함부로 내팽개치는 인간들의 무심하고 무지한 행위가 어떤 범죄 행위보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런저런 공사로 마을 강변에 오래 버티고 있던 나무와 바위들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나무도, 오래된 돌들도 호적을 만들면 어떨까. 마을의 나무나 강변의 큰 바위들을 관리하는 나라의 ‘관리 부서’가 있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 때문에 하나의 커다란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그 나무를 돌아가고 멀리 구부러진 길을 갖고 있는 나라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나라다. 길이 조금 구부러지고 공사에 돈이 조금 더 든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길이 구부러져 있는 것을 본 어떤 어린이가 “아빠, 저 나무 때문에 이 길을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거야?”하고 물을 때 아빠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질문과 대답이 그려진다. 우리나라가 어린이들을 ‘제일’로 생각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나는 어렸을 때 마을 어른들에게 네 가지 말을 들으며 살았다.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냅둬라, 애들은 싸워야 큰다”. 싸우면서 아이들은 자잘못을 스스로 알고 뉘우치고 깨달아 자기를 고치고 바꾸어 마을 사람들과 생각을 맞추며 살아가도록 했다. ‘남의 일 같지 않다.’고 가르쳤다. 마을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이 다 내 일 이었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을에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다 그 어린이의 선생이었다. 도둑질하면 안 되고, 거짓말하면 안 되고 막말하면 안 된다고 나는 마을에서 배웠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라를 어떻게 가꾸겠다는 말은 안 하고, 입을 열었다, 하면, 험한 막말로 남이나 헐뜯고, 초등학교 앞에서 엄청 난 숫자의 어른들이 모여 고함을 지르며 막말하며 다툰다. 어린이들이 듣고 보고 배운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 다니고, 나라의 일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되면, ‘좋은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은 ‘나랏일’과 ‘나랏돈’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나무도 돌도 어린이도 힘이 없다. 어른들의 생각대로 배워 세상으로 나간다. 나무와 어린이들이 저 5월의 푸르른 산처럼 바람을 타고, 강물처럼 출렁이며 흐르도록 해야 한다. 연두색에서 초록의 건너가는 앞산에 꾀꼬리가 날아와 운다. 저 산 아래에서 우리 사람이 해야 할 말을, 할 짓을 생각해 보자. 멋진 어른은 없는가. 아름다운 말을 하는 어른들은 없는가. 대통령이 되면, 의원이 되면, 도지사 군수 시장이 되면 뭐 하나?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좋은 대통령, 좋은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가.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곳(?)을 차지한 사람들의 파렴치함 이 나라의 기강과 인간의 근본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다. 대통령은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나라의 선생님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은 다 대통령 탓이다. 저 산의 나무들과 저 하늘의 별들과 강가의 돌과 저 학교의 어린이들과 우리 국민에게 인간 교육을 담당할 ‘선생님’이 될 자신 없으면 지금 당장 그만두라.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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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8 14:43

[금요칼럼] 따뜻한 5월에 기억되는 일들

'가정의 달'인 5월이 될 때면 머릿속에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 부모님의 은혜와 희생을 생각하며 어버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 제자의 성공을 보면서 기뻐하는 스승의 마음을 회고해보면 봄날씨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제주 태생의 반항아 애순이와 팔불출 무쇠같은 관식이의 삶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 삶의 모습과 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등의 모습이 비춰지며 매회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눈시울 붉어지며 콧등이 시큰거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부모님의 모습과 함께했던 일화가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잊고 등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내 이름을 외치며 도시락을 들고 뛰어오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아들이 굶을까 싶어 체면 가리지 않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는 것은 당시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부끄러운 마음에 짜증만 냈기 때문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종종 그때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면 못난 나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자 반성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와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당시의 다른 아버지들처럼 희로애락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분이셨고 고생스러운 삶을 그저 담담하게 살던 분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이 떠오른다. 고사장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12월 한겨울 날씨에 교문 앞에서 기도하며 종일 서 계셨다. 시험이 끝나고 나가니 아버지는 '고생했다. 밥 먹으러 가자.'라며 중국집으로 필자를 데리고 가셨고 별말 없이 짜장면을 나누어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그 당시가 뇌리에 남아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사는 여동생과 통화를 하며 처음 듣게 된 이야기인데 필자가 박사학위 시험에 통과했다는 국제전화를 받으시곤 너무 기쁘신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고 한다. 감정표현을 잘 안 하시던 아버지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 또, 그렇게 기뻐하셨다니! 돌아가신 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필자를 포함한 네 자녀를 공부시키고 독립할 수 있도록 고생과 희생을 했지만 조용하고 덤덤하고 꾸준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불평 없이 불만 없이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것을 내어주셨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지도해주셨던 헨켈교수님도 부모님과 같은 분이다. 재직 중이던 대학을 휴직하고 유학을 떠났기에 정해진 기간 내에 학위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던 사정을 고려하여 필자보다도 훨씬 더 신경을 쓰셨다.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필자의 노력을 존중하면서도 '박사논문은 그 분야에 학문을 시작하는 단계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좀 더 하고 싶은 내용은 박사 후에 심층적으로 연구를 펼쳐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책임지듯이 헨켈교수님은 한-독 국제 공동연구를 제안해서 연구과제 제안서를 손수 준비하고 본인의 뛰어난 연구실적을 바탕으로 본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몇 번이고 정부에 설명하였다. 막 박사학위를 취득한 초년병인 필자는 교수님 도움으로 수준 높은 국제연구의 공동기여자가 될 수 있었다. 2년간 열심히 했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던 기억이 난다. 무심하게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온통 감사할 일로 가득하고 특별히 내 인생에 불을 밝혀 앞길을 편히 갈 수 있도록 말 없는 다정으로 나를 응원해주신 분들이 있다.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주신 부모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대가 되어주신 스승님. 5월의 푸르고 따뜻한 계절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부모님, 스승님을 떠올릴때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울창해진 나무가 숲을 보호하며 자연을 살리다가 나중에 장작이 되어 태워지는 것처럼 자녀, 제자를 위한 희생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셨음을 새삼 느낀다. 올해 가정의 달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과 스승에 대해 회고하면서 감사를 기억하고 그분들에게 말로 다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모아서 자녀와 제자들에게 내리사랑의 마음으로 전해주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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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18:22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택은 무엇일까?

6·3 대선을 향한 양당 경선이 한창이다.민주당은 “어대명을 넘어 구대명”으로 당내경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90% 득표 중으로 사실상 요식절차만 남았다. 그는 본선을 겨냥하며 ‘전략적 침묵 중’이다. 논쟁이나 논란 대신 ‘포용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초점이다.예전의 ‘사이다 맛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오더라도 ‘규제 완화 대신 규제 합리화’나 ‘의대 증원 대신 의대정원 합리화’ 라고 말한다. 갤럽기준으로 최근 이재명 후보 지지율은 연이어 최고치를 경신하며 30% 박스권을 탈출하는 모습이다. 전국지표조사(NBS)의 가상 3자 대결에서 그는 국민의힘 3강 후보 중 누구와 붙어도 45%를 득표한다. 이준석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지지율을 산술적으로 모두 합해도 25%에서 31%에 불과하다. 가상 3자 대결에서 이재명 지지율이 50%선에 근접한다는 예측조사도 나왔다. 12월 계엄이후부터 최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67개를 종합한 지지율 예측조사로 이에 따른 그의 지지율은 49.8%다. 이재명 대권의 걸림돌은 대부분 사라지는 모습이다. 내부적으로는 호남 경선의 투표율과 득표율이 관심일 정도다. 본선 차원에서 보면 “이례적”이라는 대법원장의 직접 전원합의체 회부와 당일 바로 합의기일을 정한 것인데 대선 전에 대법원 결론이냐가 핵심이다. 지금 현재로는 ‘정확한 시점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이제 남은 변수는 ‘제3지대 반명(反明) 빅 텐트’다. 미래 지향형 단일 후보로 ‘1:1 양자대결’이어야 그나마 해볼 만한 선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출발점일 수 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성공조건은 까다롭다. ‘이재명은 안 된다.’가 출발점이지만 유권자 58%가 “반대만 하는 연대는 지지하지 않겠다.”는 것이 부담이다. “빅 텐트”의 성공을 위한 ‘비명+반명 세력의 정치개혁의 연결고리’가 필요하고 단일 후보의 리더십과 다양한 참여세력 간의 정치적 신뢰도 전제되어야 한다. '빅 텐트'는 일단 한덕수 참여여부부터가 결정적이라고 한다. “90% 확률로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과 “한덕수가 나오는 순간 검증이 시작될 거고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엇갈린다. 그의 참여는 디딤돌이자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범보수 대선후보 적합도 1위”이자 “54명 의원으로부터 출마요청”을 받지만 동시에 “탄핵받은 정권의 총리가 대통령에 나오겠냐!”라는 우려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몸값”이 될 이준석의 참여는 “빅 텐트”의 완성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1라운드를 마치고 4강전을 향한다.4강은 ‘찬탄과 반탄 반반’으로 평가된다. ‘나경원 탈락 이변’으로 “경선 외면했던 유권자들이 돌아보게 됐다.”는 말도 나온다. 1라운드는 ‘일반국민 여론조사 100%’로 지지자와 무당층만을 포함하는 역선택 방지조항에 따라 사실상 당심이 결정적일 것으로 봤다. 그래서 ‘나경원 탈락’은 의외다. “이념이 곧 밥”이고 “체제 전쟁의 선거”라며 반탄 집회의 주요연사였던 그녀의 ‘드럼통 무리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안철수 4강’은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이제는 ‘탄핵 찬반 여부는 안 따진다.’며 중도 확장성과 ‘그를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누구냐는 본선 경쟁력의 기준으로 투표한다는 말이다. 안철수 후보는 “탄핵된 전직 대통령의 탈당은 책임정치의 최소한”이라며 “윤석열 탈당”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4강 진출은 국민의힘 경선이 ‘찬탄 vs. 반탄 구도’를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윤석열 전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예상과 기대보다 빠른 ‘윤석열 아웃’의 모양새다. ‘윤 어게인 신당창당론’은 그에게 비판적인 중도층 여론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는 “이기고 돌아왔다.”며 “이번 선거에서 우리 당이 승리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확증적 망상”으로 “병원 가야”한다는 반발과 “당에 부담만 될 뿐”이라며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관심은 2강 압축이다. “1~3위 후보들은 사실상 의미 없는 수준의 차이”로 “반탄 vs. 찬탄 득표율은 6:4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원투표 50%로 더 보수적일 가능성”이라는 전망과 ‘탄핵의 강을 건너는 전략적 판단’일 것이라는 예상이 엇갈린다. 대선은 근본적으로 ‘국민의힘 책임선거’다. 그들의 ‘야당 할 준비’가 원칙적이다. 이번 경선은 단기적으로는 대선 이후 진영과 당의 성찰과 책임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미래를 향한 준비의 개혁 리더십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택을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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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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