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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린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여느 해와 달리 인파가 몰렸다. 전시장에 입장하려는 인파가 통로를 메운 채 이동하는 광경은 진풍경이었다. 전시장 입장에만 한 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출판사 부스마다 저자 강연을 마련하고, 전문가가 나서서 책 추천도 하고, 저자 서명 같은 행사 등으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 출판사 부스를 순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다. 이토록 많은 독자들을 마주하며 고무된 한 출판인은 출판사는 좋은 책 내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이 낮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해마다 수천군데의 출판사에서 8만여 종의 신간을 쏟아내는데, 1년 동안 책을 1권도 안 읽는 우리나라 성인은 10명 중 6명이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가용 어휘의 양이 줄고, 복잡한 사유를 할 능력이 사라지며, 뇌의 인지 능력도 감소된다. 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가? 시간이 없다, 책값이 비싸다, 좋은 책이 드물다, 같은 다양한 이유를 댄다. 책을 멀리 하는 사정도 제각각이다. 우리에게 ‘읽는 뇌’의 경이로운 여정을 알린 이는 인지신경과학자인 매리언 울프라는 사람이다. 울프는 독서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반복적인 독서 경험을 통해 읽는 능력, 즉 공감하고 이해하는 문해력, 추론, 사색과 성찰을 위한 지력을 키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독서란 학습과 훈련을 통해 체득해야만 하는 생존 기술 중 하나다. 독서는 인지적 프로세스 전체를 포괄하는 활동이고, 뇌에 생물학적, 지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다. 인류는 독서 능력을 체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류는 책 읽는 능력을 갖춘 뒤 놀라울 지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한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독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 발명품을 통해 인간은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꿔놓았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내 뇌가 읽기 능력을 갖춘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지 30만년이 흘렀다. 30만년의 끄트머리에서 문자가 나오고 책이 나올 때까지 인류는 문자나 책 없는 살았다. 인류가 점토판, 거북의 등껍질, 바위, 양피지, 파피루스, 죽간 등에 문자롤 기록한 건 겨우 6천년 전이고, 책은 그보다 한참 뒤에 출현한다. 원시인의 뇌에는 독서를 할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세기에 걸쳐 책과 친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읽는 학습을 반복하면서 인류의 뇌에는 책을 읽는 회로와 배선이 만들어졌다. 문자를 발명해내 읽기에의 걸음마를 시작한 수메르인 이후 쿠덴베르크 활자가 발명된 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읽는 뇌’를 만드는데 장구한 세월을 보낸다. 인류는 진화 과정을 거치며 뇌에는 큰 혁신과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책 읽는 뇌의 시대에서 이미 디지털 뇌로 전환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매일 디지털 화면이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폭발적인 정보에서 또 다른 정보로 이동한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책을 읽고 사색하는 대신 디지털 기기에서 검색하며 정보를 손에 넣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깊은 독서와 사색 능력을 강제로 삭제당하는 중이다. 책이란 문자로 엮인 생각의 뭉치, 사유의 덩어리, 혹은 서사의 집적체이다. 인류는 책과 친해지고 ‘읽는 뇌’를 도약대 삼아 놀라운 진화상의 성과를 거둔다. 인류가 책과 담을 쌓고 멀어진 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그 미래가 낙관적일 것 같지는 않다. 진짜 위기는 위기가 위기임을 모르는 데서 시작한다. 출판업은 지식을 생산하고 그 역량의 키우는 산업이다. 지금 출판업은 위기다! 만년 적자에 빠진 출판업의 위기는 서점과 인쇄소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은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건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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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4 15:13

국민의힘 전당대회 ‘보수 재구성의 출발점’ 될까?

국민의힘이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의 후보자 등록을 마감했다.대표경선에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 후보가 나섰고 4명을 뽑는 최고위원에는 모두 10명이 후보신청을 했는데 현역의원이 4명 원외에서 6명이 지원했다.최고위원 4명 중 한 명은 여성 몫인데 후보자 중 유일한 여성후보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셈이라고 한다. 청년 청년최고위원 한 자리에도 11명의 후보자가 몰렸다.10명이 신청한 최고위원 경선과 함께 전당대회 선관위가 예비경선의 컷오프 적용 여부와 경선 참여인원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어서 본선 경쟁 참여자 수는 다소 줄어들 수 있어 보인다. 본선 진출자들은 7월 23일 치러지는 전당대회까지 전국 권역별 합동연설회를 갖는데 다음달 7일 광주·전북·전남·전주 지역 당원들을 대상으로 첫 대회전을 치른다.이어서 10일 부산·울산·경남,12일 대구·경북,15일 대전·세종·충북·충남,17일 서울·인천·경기·강원 순으로 합동연설회가 차례로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번째 관심은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이 계속되느냐다.후보등록 전까지의 여론흐름은 ‘1강 2중 1약’이었다.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 한동훈 지지여론이 압도적이다.대부분의 조사에서 찬성과 지지가 최소한 절반이상이고 높게는 70% 전후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이 당내외로 엇갈린다는 점이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연임’에 대한 찬반여론이 지지층과 당 밖으로 나뉘는 것은 이중적 해석의 대상이다.이재명 지지층의 계속된 결속력 강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한동훈 지지’에 대해 지지층과 당 밖 여론이 엇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그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의 미래 기대와 아쉬움의 표현이다.그들은 한동훈이 보수의 미래라고 기대한다.물론 한동훈이 지난 총선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지만 총선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해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등록 후 첫 여론조사가 분기점이다.특히 ‘1강 2중 1약의 구도가 지속 되느냐,여전히 압도적 1위냐,누가 2위냐,2위의 앞뒤 격차는 얼마냐’가 핵심이다. 초점은 한동훈의 ‘수평적 당정관계 구축과 대법원장 추천의 채 상병 특검추진’ vs.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당정 소통강화와 선 수사 후 특검’이 갖는 여론의 영향력이다.한마디로 ‘한동훈이냐 vs. 아니냐’의 첫 시험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두 번째 관심은 결선투표 여부다.1차 투표에서 대표경선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5일 후 7월 28일 결선투표가 진행 된다.후보 등록 후 여론흐름을 봐야겠지만 결선투표로 간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강” 입장에서 결선투표는 부담스럽다.결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여권 내 리더십의 타격은 불가피하다.채 상병 특검 등 현안과 관련한 입장 차이는 당정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무(無)당적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실험,’ 나아가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 결선투표의 쟁점은 ‘윤석열이냐 vs. 아니냐’다.‘한동훈이냐 아니냐’의 1차 투표가 ‘한동훈의 기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결선투표는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 ‘윤석열의 평가’를 묻는다. 대통령 지지율은 ‘윤석열 평가’의 한 표현이다.전국지표조사(NBS)애 따르면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평가는 27% 부정평가는 64%로 4월 총선이후 뚜렷한 변화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다른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박스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 극복의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 상황에서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보수의 대안과 미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결국 영남의 선택이다.영남 보수와 수도권 보수분화의 시작일까? 한 달 앞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보수 재구성의 시작이 될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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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35

국민의힘 전당대회 ‘보수 재구성의 출발점’ 될까?

국민의힘이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의 후보자 등록을 마감했다.대표경선에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 후보가 나섰고 4명을 뽑는 최고위원에는 모두 10명이 후보신청을 했는데 현역의원이 4명 원외에서 6명이 지원했다.최고위원 4명 중 한 명은 여성 몫인데 후보자 중 유일한 여성후보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셈이라고 한다. 청년 청년최고위원 한 자리에도 11명의 후보자가 몰렸다.10명이 신청한 최고위원 경선과 함께 전당대회 선관위가 예비경선의 컷오프 적용 여부와 경선 참여인원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어서 본선 경쟁 참여자 수는 다소 줄어들 수 있어 보인다. 본선 진출자들은 7월 23일 치러지는 전당대회까지 전국 권역별 합동연설회를 갖는데 다음달 7일 광주·전북·전남·전주 지역 당원들을 대상으로 첫 대회전을 치른다.이어서 10일 부산·울산·경남,12일 대구·경북,15일 대전·세종·충북·충남,17일 서울·인천·경기·강원 순으로 합동연설회가 차례로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첫 번째 관심은 ‘어대한(어차피 대표는 한동훈)’이 계속되느냐다.후보등록 전까지의 여론흐름은 ‘1강 2중 1약’이었다.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 한동훈 지지여론이 압도적이다.대부분의 조사에서 찬성과 지지가 최소한 절반이상이고 높게는 70% 전후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이 당내외로 엇갈린다는 점이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 연임’에 대한 찬반여론이 지지층과 당 밖으로 나뉘는 것은 이중적 해석의 대상이다.이재명 지지층의 계속된 결속력 강화와 동시에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식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한동훈 지지’에 대해 지지층과 당 밖 여론이 엇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그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의 미래 기대와 아쉬움의 표현이다.그들은 한동훈이 보수의 미래라고 기대한다.물론 한동훈이 지난 총선패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지만 총선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가 할 수 있는(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해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후보등록 후 첫 여론조사가 분기점이다.특히 ‘1강 2중 1약의 구도가 지속 되느냐,여전히 압도적 1위냐,누가 2위냐,2위의 앞뒤 격차는 얼마냐’가 핵심이다. 초점은 한동훈의 ‘수평적 당정관계 구축과 대법원장 추천의 채 상병 특검추진’ vs.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당정 소통강화와 선 수사 후 특검’이 갖는 여론의 영향력이다.한마디로 ‘한동훈이냐 vs. 아니냐’의 첫 시험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두 번째 관심은 결선투표 여부다.1차 투표에서 대표경선의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5일 후 7월 28일 결선투표가 진행 된다.후보 등록 후 여론흐름을 봐야겠지만 결선투표로 간다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다. “1강” 입장에서 결선투표는 부담스럽다.결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여권 내 리더십의 타격은 불가피하다.채 상병 특검 등 현안과 관련한 입장 차이는 당정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무(無)당적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실험,’ 나아가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다. 결선투표의 쟁점은 ‘윤석열이냐 vs. 아니냐’다.‘한동훈이냐 아니냐’의 1차 투표가 ‘한동훈의 기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면,결선투표는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 ‘윤석열의 평가’를 묻는다. 대통령 지지율은 ‘윤석열 평가’의 한 표현이다.전국지표조사(NBS)애 따르면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평가는 27% 부정평가는 64%로 4월 총선이후 뚜렷한 변화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다른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박스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 극복의 차별화’로 승부수를 던진 상황에서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색깔과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하며 스스로 보수의 대안과 미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결국 영남의 선택이다.영남 보수와 수도권 보수분화의 시작일까? 한 달 앞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보수 재구성의 시작이 될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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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26

그렇게 된 나의 인생

해진다. 나는 걸어서 마을 밖으로 나간다. 마을에서 떨어진 길가 모정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인사를 하며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데 선생님 제자라고 해서 놀랐다. 그냐? 하며, 반갑게 악수하였다. 자기 이름을 말하며 수줍어한다. 제자 아버지는 허리가 몹시 굽었었다. 짧은 머리에 유순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어떤 때는, 영화 속의 동학농민군들이나 흑백사진 속 독립군 단체 사진 얼굴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공동의 신념이 얼굴에 스쳐 갈 때도 있었다. 달구지로 나무도 해 나르고 보리도 벼도 실어 날랐다. 나는 그 어른이 어쩐지 좋았다. 제자는 시내버스 운전한단다. 정년이 6년 남았단다. 내가 아버님을 속으로 좋아했다고 말했다. 제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봤다. 사회적인 공분을 살만한 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선량한 시민의 얼굴이다. 우리 집에 한 번 들려라. 아버지 사진이 나온 책이 있다고, 했다. 조금 걸어갔더니, 다른 제자가 비닐하우스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저 제자 아들도 가르쳤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아이를 닮은 아이가 있어서 사진 찍어 준다고 했더니, 길로 쪼르르 뛰어 올라왔다.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을 말하고는, 아버지가 힘들게 지었단다. 내가 웃었다. 아이는 2학년이다. 자기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잘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다. 네 아버지와 네 큰 형을 가르쳤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했다. 저기, 간다고 했다. 비가 온다고 했냐고 내게 물었다. 모르지만 비는 올 것 같지는 않다고 하늘을 보며 말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또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내용은 별로 없다. 오랜만에 2학년 학동과 몸짓 손짓 발 짓을 해가며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했다. 둘이 크게 웃기도 했다. 막힌 데 없이 이어지는 유쾌하고 활발한 담소(?)다. 나는 2학년을 20여 년 가르쳤다. 그럼, 나는 이제 그냥 가보겠다고 했다. 또 어디까지 가냐고 했다. 그러다가 아, 아까 말했지, 하며 할아버지는 어디 사냐고 했다. 저기 산다고 우리 마을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언제 놀러 오라고 했다. 그런다고 하는 아이에게 나, 이제 가도 되냐고 확실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냐고 또 물었다. 귀여워서 또 사진을 찍었다. 두 손가락을 펴서 브이 자를 만들어 눈에 대고 이이이, 하고 억지로 웃다가 진짜로 히히 웃었다. 앞니가 모두 빠졌다. 그때 아이 아버지가 선생님, 그 녀석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으니 그만 가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바쁘신 분이다. 그만 보내 드려라. 그럼 간다고 하고 빨리 걸어갔다. 돌아오면서 보니, 아이가 아버지 트랙터에 타고 있다가 큰 소리로 지금 아버지가 창고 만든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이 형이 생각났다. 이 아이 형은 미니포크레인도 운전할 줄 알았었다. 아버지의 잔심부름은 다 하였다. 나는 하교할 때 아이에게 주려고 이따금 아이스케키를 사 들고 가기도 했다. 빈손으로 만난 어느 날 돈도 2천 원 준 기억이 난다. 그럼 나가볼게, 안녕! 근데 할아버지 집이 어디예요. 아까 말했어도 또 저기 저쪽 산 아래 있어. 언제 놀러 와, 그랬더니, 큰 소리로 우리 형 알아요, 한다. 내가 형을 가르쳤다고 나도 크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볼게. 오늘 정말 반가웠어. 잘 있어. 날이 어두워졌다. 강둑길 풀밭에 밤바람이 불었다. 이것은 나의 인생! 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아이가 크게 손을 흔든다. 이 길은 나의 길이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나는 이 강물을 거스르고 때로 따르며 순응과 거역을 배우고 자유를 얻는다. 지금도 나는 이 길을 걷는다. 나는 이렇게 이 길에서 하얗게 늙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자다 깼다 새벽이다. 창가에 달이 떠 있어서 놀랐다. 달이 나를 보고 있다. 좋아하였다. 아까 본 아이 생각이 났다. 나는 조각달 오목한 곳을 가만히 베고 잔다. 새는 소쩍새, 밤에 새가 운다. 나는 저 새 소리로 내게 주어진 삶을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고쳐 눕고, 다시 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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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0 17:27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의 즐거움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학 캠퍼스로 출근하는 것은 교수 생활을 해 온 나의 고유한 즐거움이다. 아침 등굣길, 젊은 학생들 사이로 배낭을 메고 활기차게 걸어가는 나이 지긋한 분들의 모습이 눈에 띄면, ‘정년을 앞둔 교수님들이 아침 일찍부터 수업 준비를 하시려고 일찍 출근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흐뭇해진다. 그런데 며칠 후 교내 행사에 참여하니 학생 대표석에 (교수라고 착각했던)그 분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 사석에서 그 분에게 만학의 이유를 물으니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의 딸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보살펴주기 위해 대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껴 입학하게 되었고, 지금은 공부가 재밌고 행복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과 교수들이 수업시간, 시험 등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어린 학생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새삼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표를 위해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은퇴 후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 또 다른 모델이 필자 주변에 있다. 연구소에서 평생 연구직으로 종사하며 나름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온 분이 은퇴즈음, 평소 소망이었던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원문소설을 읽고 소화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60대에 영문학과에 편입하여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대학 생활 동안 젊은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졸업 후 대학원까지 진학하였다.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면서 직접 아일랜드에 가보고, 소설의 배경이었던 더블린을 방문하여 작가의 하숙집, 애용하던 카페, 서점에 가서 작가와 시간을 초월한 공감대를 느끼는 경험을 통해 생애 최고의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재취업, 고령자 창업, 재교육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퇴직자 스스로 은퇴 이후를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추세다. 우리나라 역시 기대수명은 점점 증가하는 반면, 퇴직연령은 평균 50세 머물러있어 은퇴 후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상에 치여 못했던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사회변화를 고려하면 (지역)대학이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위해 해야 하는 역할은 분명하다. 은퇴 후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구체화시키고 지원하는 역할을 지역 교육기관(대학)이 수행해 나가야한다. 우선은, 본인이 꿈꾸고 진짜로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려는 도전이 필요하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를 시작해 보려는 도전과 ‘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미 젊은 학생들이 있는 밝고 활기찬 캠퍼스에 발을 디뎌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하고 본보기가 되고 있는 분들처럼 본인의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는 분들이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역대학, 고등교육기관, 지자체 등에서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평생교육 체계 내에서 조금 더 나아가 마이크로디그리(Micro Degree) 형태의 성인학습자 교육을 통한 소단위 이수 등 수요자의 요구에 맞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퇴직자들의 전문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학생, 지역주민들에게 환원하고 봉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서로가 함께 공부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필자도 젊지 않은 나이에 변화를 위해 용기를 내고 실천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 인생 절반 이상을 살아온 시점에서 조용히 내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떠밀려 주변의 잣대와 의무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마무리하고 진짜 하고 싶었던 나만의 공부를 찾아서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면 생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꿈을 찾아 캠퍼스를 누비는 만학도를 만나면 가장 따뜻하고 반가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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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3 15:10

태평성대를 위한 교태(交泰) 혁명

요즘 석천학당 학생들과 주역 공부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낸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주역 철학은 상처 나지 않고 온전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인생은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가온 상황을 정확히 인정하고(時, 시), 바라보고(觀, 관), 결정(彖, 단)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질문과 대답은 모두 나의 몫이다. 주역은 나에게 묻고 내가 답하는 학문이다. 세상에 나만큼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엄중하고 현명한 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역의 11번째 괘, ‘지천태(地天泰)’ 괘를 뽑았다. 태(泰)는 평안하고 태평하다는 뜻으로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한자어이기도 하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는(國泰民安, 국태민안), 태안(泰安)은 인류 역사의 꿈이었다.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은 주역의 태괘(泰卦)에서 유래한다. 하늘(天)과 땅(地)이 서로 자리를 바꿔 교차(交, 교)하여 태평한 세상을 만든다는 뜻으로, 최초 만들어졌던 세종 때에는 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의논하고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하늘은 자신을 낮추고 내려가고(來, 래), 땅은 하늘 위에 올라가(往, 왕) 존중받는 지천(地天)의 세상이 태평성대다. 강자가 약자를 섬기고, 권력이 개인을 보호하고, 갑이 을에게 양보하는 세상이 교태(交泰)의 세상이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지 않고 소통하니 같은 꿈을 꿀 수 있다. 기업이 교태하면 경쟁력이 강화되고, 가정이 교태하면 만사가 형통하다. 교태는 역할을 바꾸는(交) 혁명이다. 대한민국의 다음 혁명은 교태혁명이다. 정치인은 나라에 헌신하고, 의사는 환자를 섬기고, 경영자는 노동자를 존중하고,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국가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실질적 혁명이 교태혁명이다. 교태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공약이 필요하다. 첫째,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주장을 하는 거친(荒, 황) 집단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과감하게 포용(包, 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맞다’라고 해도, 과감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그 사회는 건강하다. 비록 말은 거칠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사회의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하게 하는 교태백신이다. 둘째 과감한 개혁이다. 강물(河, 하)을 맨몸으로(馮, 빙) 건널 수 있는 용기로 혁신과 개혁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태평성대에는 개혁의 주장이 힘을 잃는다. 평화와 안정이 영원할 것이란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태평의 시대는 언제든 불통의 시대로 바뀐다. 다만 시간이 문제다. 익숙하고 편한 것과 결별하는 용기가 있어야 그 시간을 늦출 수 있다.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셋째 소외계층의 보호이다. 세상은 강자들만의 세상이 아니다. 약자들도 보호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소외된(遐, 하) 사람들을 버리지(遺, 유) 않고 챙겨주는 대동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홀아비, 과부, 고아, 노총각 노처녀(鰥寡孤獨, 환과고독)는 맹자가 강조하는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다. 요양병원에서, 고독한 병실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좁은 방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을 사회가 잊지 않고 배려해주는 세상이 교태의 세상이다. 넷째 사적 이익집단의 해체(亡, 망)다. 집단 이익을 위해 패거리(朋, 붕)를 조장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다. 학연과 지연, 업연(業緣)으로 얽힌 사적 이익 집단은 세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과감한 이익집단의 해체, 교태혁명을 완수하는 방점이다. 땅은 계속해서 평평하게 이어지지 않고(無平不陂, 무평불피), 세상사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無往不復, 무왕불복). 태평성대도 때가 되면 불통의 시대를 만나고, 화려한 궁궐도 결국 폐허의 성(隍城, 황성)이 된다. 황성옛터에서 지나간 영광을 추억하며 넋두리하기 전에 교태혁명을 과감하게 수행해야 할 이유다. /박재희(인문학 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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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5:34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내 품을 떠나는 여름의 날들

모란과 작약의 계절이 지나면 곧 수국꽃 피는 계절이다. 수국꽃은 여름을 여는 신호와 같다. 벌써 이마가 데일 듯 한낮 땡볕은 뜨겁고, 머잖아 향기로운 여름 과일들이 쏟아져나올 테다. 기억 속 여름의 한 풍경. 때죽나무 위에서 매미가 맹렬하게 울어댄다. 화단에는 키 작은 맨드라미가 있고, 껑충 자란 해바라기도 우두커니 서 있다. 어른들이 집을 비워 나 혼자 종일 심심했다. 뽕나무로 올라가 오디를 따먹었다. 까맣게 잘 익어 달콤새콤했다. 오디를 욕심껏 움켜쥐었던 손은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고, 셔츠 자락도 보랏빛 범벅이 되었다. 옷을 더럽혔다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실 게 분명했다. 밤늦게 지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내 옷을 보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린 시절의 동네에는 철공소가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용접봉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파란 불꽃이 뱀의 갈라진 혀처럼 허공을 핥았다. 모루 위에는 제물처럼 달궈진 쇠가 올려져 있는데, 망치가 모루 위의 쇠를 두드리면 나는 쇳소리가 천둥소리 같이 퍼졌다. 세상의 강철들을 연마하는 모루와 망치들. 한여름의 철공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거기엔 모루와 망치의 합창, 후끈한 열기와 땀방울들이 있었다. 나는 심부름을 나왔다가 용접봉에서 나오는 파란 불꽃에 매혹되어 철공소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여름의 철공소와 함께 나는 미처 가보지 못한 먼 고장을 꿈꾸곤 했다. 거기 번잡한 도시들, 낯선 기름과 향신료 냄새들이 후각을 찌르는 시장, 귀에 선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과 맛보지 못한 열대과일도 풍성할 테다. 여름은 나무들의 전성기다. 수목들은 무성하고, 식물 특유의 방향이 공중에 가득 떠돈다. 녹색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거린다. 바람이 불면 챙캉챙캉 쇳소리를 내는 녹색 잎들, 활엽의 나무들이 일제히 내뿜는 산소,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들. 여름의 모든 것이 다 좋다. 여름의 나무 그늘에서 여름을 노래하는 시를 읽는 것도 좋다. '올여름의 할 일은/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김경인 '여름의 할 일') 같은 싱그러운 싯구를 찾아 읽는 기쁨을 누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넓은 해변들//하얀 더위/푸른 강물//다시, 말라붙은 노란 야자나무들//여름에 잠자는 집에서/8월 내내 꾸벅 졸며//내가 붙잡았던 날들,/내가 잃어버린 날들//딸애들처럼 웃자라서/내 팔을 빠져나가는 날들'(데릭 월컷 '한여름, 토바고'). 오, 딸애들처럼 웃자라서 팔을 빠져나가는 여름의 날이라니! 여름이 없었다면 이토록 많은 여름의 시들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다.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어느 해 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고 작가의 무덤이 있다. 올리브와 무화과가 무르익는 계절에 그 섬을 찾아갔다. 끼니때가 되면 해변가 식당을 찾아가 오징어 튀김과 해산물, 갓 구운 신선한 빵, 짭짤한 올리브 열매,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양파와 양상추, 체다치즈를 곁들인 요리를 먹었다. 바다에서 쾌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숙소로 돌아오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여름은 파란 바다와 흰 모래가 빛나는 계절, 긴 셔츠와 반바지의 계절이다. 여름은 여름이라서 모든 게 좋았다. 여름 저녁엔 식구들과 찐 옥수수·복숭아를 먹는 일, 비 오는 날엔 쇼팽의 피아노곡에 귀를 기울이는 것, 서른 몇 해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古城)에서 가곡을 부르며 향수로 눈시울이 적시던 찰나,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겪은 열일곱 살 여자애와의 첫 키스가 찾아온다. 다시 여름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마구 뛴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나는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죽는 이유를, 여름이 항상 좋았던 까닭을.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인 채로 살아간다. 아는 것은 여름의 빛들이 내 인생을 스쳐간 영화(榮華)의 기억을 불러온다는 사실뿐이다. 여름의 빛은 짧게 머물다가 사라진다. 지나간 것은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다. 변성기 무렵 내 목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음치는 내 인생의 불운. 부모들이 돌아가신 뒤 나는 더 이상 가곡을 부르지 않는다. 오, 인생의 모든 여름들이여, 그 짧은 여름의 빛이여!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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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30 16:38

당심 vs. 민심

총선 후 양당 모두 양당 모두 리더십 교체가 논란의 대상이다.국민의힘은 새 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황우여 비대위를 출범했다.윤석열 대통령 취임 만 2년에 4번째 집권여당의 비상대책위원회다. 국민의힘 차기 당권경쟁은 경쟁적으로 보인다.‘나경원 유승민 윤상현의 출마’를 예상하지만 한동훈의 거취가 결정적이다.스스로의 결정이든 끌려나오는 것이든 그의 당권도전은 기정사실로 보는 분위기다. 민주당 리더십은 이재명 대표의 연임여부가 쟁점이다.이 대표가 재출마한다면 사실상 추대가 될 전망이 대부분이다. 양당 리더십 재편의 핵심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은 혼란스럽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월 하순 한 조사에 따르면 한동훈의 당권도전에 대해 유권자 10명 중 5명 이상(52%)는 반대한다.찬성은 43%.반면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는 58%가 그의 출마에 찬성한다. 한동훈의 당권도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여론과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 유권자들의 생각이 엇갈리는 장면은 5월 초 조사에서도 확인된다.한동훈의 전당대회 출마에 대해 전체 유권자의 52%는 반대하고 찬성은 35%다.한 달 전 조사와 비교하면 반대는 비슷하고 찬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국민의힘 지지층은 정반대의 의견분포를 보인다.그들 중 56%는 한동훈의 전당대회 출마를 지지한다.그의 당권도전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36%다.한달 전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지지층은 대체로 그의 전당대회 출마에 찬성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당원 100% 경선으로 치러진다면 한동훈의 쉬운 승리가 점쳐지는 이유다.5월 조사에서 한동훈을 포함한 여러 출마 유력 후보들의 국민의힘 대표 적합도를 물은 결과도 앞선 여론동향과 유사하다. 국민의힘 대표로 한동훈을 적합하다고 보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48%에 이른다.‘원희룡(13%) 나경원(12%) 유승민(9%)’을 압도한다.한동훈(26%)은 전체 유권자 대상 조사에서도 유승민(28%)에 오차범위 내에서 뒤진다. 한편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연임여부에 대한 여론도 한동훈 당권도전의 여론 흐름과 비슷하다.4월 초 조사들에 따르면 일반 국민들은 이 대표의 연임에 대해 상대적으로 반대의견이 높다.‘찬성 46% vs. 반대 49%’ 또는 ‘찬성 43% vs. 반대 48%’다. 민주당 지지층 또는 진보적 유권자들의 생각은 정반대다.그들은 이 대표의 연임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찬성 61% vs. 반대 32%’ 또는 ‘찬성 68% vs. 반대 26%’다. 보수적 유권자들은 이재명 연임에 부정적이다.‘찬성 30% vs. 반대 68%’ 또는 ‘찬성 23% vs. 반대 74%’다.중도층은 일반 국민의 여론동향과 유사한데,‘찬성 40% vs 반대 45%’다. 5월 초 조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한데 다른 게 있다면 일반 국민의 이 대표 연임에 대한 찬반의견이 접전양상으로 바뀐다.‘찬성 44% vs. 반대 45%.’한 달 전에는 오차범위 내외에서 반대의견이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5월 초에는 찬반 비중이 붙었다. 민주당 지지자냐 아니냐의 간극은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더 벌어진다.민주당 지지층은 이 대표 연임에 대해 ‘찬성 83% 반대 12%,’무당층은 ‘찬성 25% 반대 47%’다. 국민의힘은 대표 선출절차를 논의해야 할 전당대회 준비위와 선관위를 꾸려야 하지만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당원 아닌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어떻게 지도부 선출과정에 반영할지가 쟁점이다. 민주당은 “국회의장 후보,원내대표 당 지도부 경선 때 권리당원 의견 10% 이상 반영을 원칙으로 하는 10% 룰”을 넘어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 뽑을 때도 국회의원 50%+당원 50%를 적용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양당 모두에게 당원과 지지층은 중요하다.민주당은 “당원이 100만 명 넘고 당비가 연간 180억”이라고 한다.규모는 다르겠지만 국민의힘도 엇비슷할 것이다. 작년 우리나라 정당들에 지급된 국고보조금은 모두 475억.민주당에 223억 국민의힘에 202억으로 국민 세금이다.2022년 양대 선거나 올해 총선처럼 선거가 있을 때 국고보조금은 통상시의 두 배에 이른다. 양당의 리더십에서 민심과 당심은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어야 할까? 양자가 충돌한다면 무엇이 우선이어야 할까? 그들은 선택하고 유권자는 평가한다. 선택의 시간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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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3 15:00

살구가 익을 무렵

순창으로 이발하러 갔다. 목욕탕 안에 이발소가 있다. 이른 아침이라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만들어가는 육체는 움직이는 동작이 불편하고 직립의 거동이 위태위태하다. 육체는 체념하는 중인데 왕년의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몸들은 외롭고 슬프고 짜증나고 성질난다. 이발하고 강천사로 물 받으러 갔다. 몸에 좋다는 이 물을 받아다가 먹은 지 2년쯤 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거나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물이 맛나서 이 물로 아내는 고추장 담고, 나는 봄 여름에 찬물로 마신다. 물 받으러 가는 길은 순창읍 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낮은 두 고개를 넘어 몇몇 마을들을 지난다. 낮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아늑한 들끝 저 멀리 산아래에 마을들이 편안하게 앉아 있다. 낮은 고개 하나를 넘어 들길을 가는데, 저쪽 마을 앞 도로에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멀리서 왼손을 번쩍 들고 길을 건넌다. 내 차 때문에 저런 강한 경고 자세를 취하고 길을 건널 텐데, 그러나 내 차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서 나는 혼자 크게 웃을 뻔했다. 이 길은 차들의 왕래가 아주 뜸한 곳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학교와 집에서 단단히 교육 받은 대로 교통 도덕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한다. 나도 속도를 아주 줄였다. 길은 건넌 아이들이 상당히 높은 논두렁에 올라서 있다. 그 모습도 웃겼다. 아이들은 분홍색 잠바에다 짧은 치마를 입고 흰 스타킹 차림이다. 둘 다 가방 색까지 같다. 등교 차림이 주위 풍경에 약간 어색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앞뒤를 살핀 후 차를 멈추고 차창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반갑고 명랑한 표정으로 “얘들아,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다.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서 있는 논두렁 풀잎에 이슬이 맺혀있다. 아이들이 딛고 지나간 이슬 털린 발자국이 두어 군데 보인다. 아이들 신발에 이슬이 묻어있을 것이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더니, 팔을 반 쯤 들어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동생은 언니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 언니를 올려다본다. “학교 잘 갔다 와“ 나는 다정하고 다감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아이들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가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내 차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영화 장면처럼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크게 흔들어 주었다. 지난 봄 날 이 길 오른쪽 마을 2층 집 붉은 기와 지붕 위로 살구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아이들이 그 집에 사나? 언젠가 평양에 갔을 때 보았는데, 개선문 부근에 가로수가 살구나무였던 것 같다. 길가에 이발소가 있어서 유리창 너머로 이발 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의자에 앉은 사람과 이발사, 이발사가 가위질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발사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가본 북쪽 어느 고원에 흰 감자꽃이 서늘할 때였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마 살구가 익을 무렵이었는지도 모른다. 갔던 길을 따라 집으로 왔다. 아이들 둘이 논두렁에 서 있던 단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길에서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을 처음 만나서 뭔가 그렇게 낯설고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것은 분명해 보였었다. 몇 가지 이런저런 사연의 경우가 생각나기도 했다. 생각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단정하게 잘 빗어 묶은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엄마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종일, 살구나무가 있는 가로수 길 평양의 이발소와 북쪽 어느 고원 너른 감자밭가에 서서 희고 고운 감자꽃을 바라보던 서늘한 생각과 논두렁에 낯선 듯 서 있던 아이들의 빈틈없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파리하다는, 생각이 났다. 논두렁에 서 있던 아이들과 평양의 거리와 감자꽃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풍경인데도 말이다. 이상하여, 오히려 아주 이상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그 무엇인가 어떤 중요한 어떤 것들을 버려둔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에, 나는 허전한 어떤 구석이 사라지지 않아 자꾸 허기가 찾아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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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6 15:57

천천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봄이 와서 들판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구다. 매년 꽃들이 만개할 즈음이면 학교도 새 학기를 맞아 수업과 행사 등으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곤 한다. 하지만 올 봄에는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자세하게 그리고 오래 볼 수 있었다. 10년 이상 필자를 괴롭히던 무릎 통증을 치료하고자 약 2개월 전에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회복하는 동안 지팡이에 의지해 걷다보니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봄의 화사함, 마른 가지에 싹이 돋고 꽃이 피는 자연의 신비함, 캠퍼스에서 명랑하게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잠시 멈추고 나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지금까지 앞만 보면서 달려오다 보니 무심히 지나쳤던 일,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 밀렸던 일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고, 주변의 따뜻한 봄날과 활기 있는 삶의 모습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담장에 피어있는 라일락의 그윽한 향기를 맡다보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교수가 생각이 났다. 그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방학이 되면 제자들과 함께 필리핀 무의촌으로 의료봉사를 나가곤 했다. 대학병원 특성상 여름휴가는 일주일 남짓했는데 그 황금 같은 휴가를 의료 봉사하는데 다 쓰고 돌아와서는 소진된 기력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여름휴가 기간 가족과 여행을 다녀온 필자를 매번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퇴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정기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치료를 위해 휴직 신청을 하였다. 그 해에는 해외 봉사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 친구들은 그에게 ‘몸이 아프면 좀 쉬어야지, 왜 무리를 해서 해외 봉사를 다녀왔냐?’, ‘나이가 들면 자기 자신에게도 신경을 써야한다.’라는 걱정 어린 충고를 했지만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였다. ‘지금까지 여름방학이면 매년 가던 의료봉사여서 올해도 가야될 것 같아 조심하면서 다녀왔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이기적이고 소심한 마음으로 바뀌어서 하던 일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의 병은 치유되었고 정년퇴직 후, 신변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의료 활동을 위해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한 추억은 무릎통증 하나 때문에 소심하게 작아지는 나를 바라보면서 다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니, 무릎 수술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움직임 등에 다소 불편함이 있지만 오히려 바쁘게 살아왔던 과거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겼고,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들과 이웃,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며 빙그레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준 전환점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이기적으로 변하고 소심해지는 경향이 생기지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벗들의 귀한 모습을 생각해보고 다시 한 번 힘을 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계절의 여왕인 5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고 라일락, 아카시아 꽃향기가 퍼지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자. 바쁘게 지내왔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것’들을 느끼고 자신을 회복하는 따뜻한 봄날 을 맞이할 수 있는 5월이 되기를 바란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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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9 15:14

의료사태가 명현(瞑眩) 현상이라고?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된 의료계 파행이 국민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공의들의 사표를 시작으로 의대교수들의 주 1회 휴진 등 의료계 집단행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의 의료 수혜 확대와 소외된 지방 의료의 복구를 위해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고, 의사들은 자신들을 이기주의 집단으로 몰고 가며 의논도 없이 밀어붙이는 일방적인 의료행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정부와 의사들의 팽팽한 대립 국면 속에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국민들만 죽을 노릇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따져서 풀지 않으면 의료 공백의 장기화로 대한민국의 의료는 파국을 맞이하며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임에 분명하다. 이번 의료 사태를 주역(周易)의 관점에서 보면 불통과 반목이다. 불통의 괘는 비(否)괘이고, 갈등의 괘는 송(訟)괘이다. 불통의 비(否)는 하늘과 땅이 서로 반목하여 꽉 막혀 있는 형상이고 갈등의 송(訟)은 하늘과 물이 서로 등을 돌리며 소송하고 있는 형상이다. 불통은 인간사에서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이다(匪人, 비인). 하늘과 땅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사는 중간(中, 중)에 그만두면 좋지만(吉, 길), 끝까지 계속하면(終, 종)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한 나쁜(凶, 흉) 일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결국 파국은 끝나지 않는다. 꽉 막혀 있는(窒, 질) 형상이니 중간에 중재자를 두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혹자는 말한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통도 필요하니 병을 낫기 위한 명현(瞑眩) 현상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현(瞑眩)은 한의학에서 약을 투약한 후 병이 완전히 낫기 전에 있는 부작용을 말한다. 병이 치료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약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지럼증이나 구토 같은 부작용 없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번 의료사태도 더욱 발전된 대한민국 의료 체계를 위해서는 갈등이나 반목이라는 명현 현상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명현 현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힘없고 위중한 국민들이란 것이다. 건강하고 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길을 찾는다. 대통령과 장관이 아프면 의료계 파업이라도 치료를 못 받을 확률은 없다. 그러니 의료 파국의 심각성이 정책자들의 피부에 절실하게 와 닿을 리가 없다. 명현 현상 운운하며 한번은 겪어야할 부작용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일반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명현 현상은 검증된 의료 치료도 아니다. 유교 경전인 서경에 나오는 구절을 근거로 이야기되는 잘못된 믿음이다. ‘만약에 약을 먹고 명현의 부작용이 없다면(藥不瞑眩, 약불명현), 그 병은 낫지 못할 것이다(厥疾不瘳, 궐질불추)’. 이 말은 원래 <서경>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인용해서 사용한 말이다. 좋은 약은 반드시 부작용이 있으니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어떤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아도 명현 현상이란 약리작용은 없다. 초유의 의료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아프지 않는 것뿐이라는 현실이 너무 서글프다. 아프지 않는 것이 어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명현 현상이니 참으라는 정부의 무대책은 더욱 어이가 없다. 애초부터 전략과 협상도 없이 의대 증원을 확정하여 발표했던 당사자들은 빠지고 의료 당사자인 국민들과 의사들과의 갈등만 깊어가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송사(訟)는 끝까지 가면 흉(凶)한 일이다. 불통(否, 비)과 송사(訟, 송)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안타까운(吝, 린) 일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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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2 16:44

어느 주말에 겪은 강연 소동

지난 주말 오후에 K시의 한 대형 쇼핑몰로 인문학 강연을 하러 갔다. 봄비 내리는 주말 오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연 시각보다 이르게 도착할 수 있게 출발했다. 그런데, 대형 쇼핑몰 주차장은 인근은 차들로 넘쳐났다. 만원이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는 통에 주차에만 40여분을 소비했다. 지하 주차장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쇼핑몰 안 강연장을 찾는데 또 시간을 지체했다. 쇼핑몰 매장의 규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인파로 바글거리는 주말 오후 그 광활한 소비 천국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강연장에 도착해서, 오, 맙소사! 내 앞에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넓은 강연장엔 청중 세 분이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쇼핑 매장은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인파가 북적거렸는데, 강연장은 무인도처럼 적막했다. 여러 강연을 다녔지만 이런 굴욕을 당한 건 처음이다. 비명은 지르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은 붉어졌다. 애초 이 강연이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내 책을 참석자에게 구매해 무료로 나눔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강연 수락을 한 것이다. 출판사 영업부장님도 일부러 가족과 강연장을 찾았다가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나는 태연하게 성심성의껏 강연을 했다. 강연장 앞자리에 차지하고 앉은 세 분은 강연을 조용히 경청하셨다. 세 분에게는 눈물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강연을 마치고 세 분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조지 오웰의 한 말이 떠올랐다. “광장에 모인 인파를 흩어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시를 읽어주는 것이다.” 시가 대중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재치 있게 표현한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시나 인문학에 심드렁하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그까짓 시는 뭐 하러 쓰나? 밥이 나오더냐 떡이 나오더냐? 그러다가 굶어 죽기 딱 좋으니라.”라고 꾸짖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아주 짝에도 쓸모가 없는 시’ 따위를 쓰면서 사람 구실을 못할 걸 염려했던 것이다. 주말의 쇼핑몰은 붐볐지만 같은 장소의 강연장을 찾은 사람은 달랑 세 분이었다. 왜 사람들은 인문학 강연을 외면할까? 시나 인문학 강연이 쇼핑보다 덜 재미있을 뿐더러 무용하다, 라고 판단했을 테다. 사람들은 시나 인문학이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확증 편향을 갖고 있다. 각자의 생업에 매진하던 사람들이 주말 쇼핑몰 나들이에 나와서 가족들과 함께 쇼핑하고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애초 볼거리와 놀거리로 가득 찬 쇼핑몰에서 뜬금없이 인문학 강연을 위해 모객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인문학의 홀대를 두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테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더 유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이 꼭 쓸모 있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않는다.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을 생각해 보라. 쓸모없음의 큰 쓸모를 찾아낸 동양의 현자가 퍼뜨린 천년된 거목의 우화는 2000년이 넘어서도 회자되고 있다. 장자의 거목은 얼마나 큰까? 꼭대기는 하늘에 닿고 나무 그늘에는 소 네 마리가 끄는 마차 천 대가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 크기는 상상으로만 가늠해 볼 수 있을 테다. 작은 쓸모라도 있으면 싹뚝 잘라 가버리니, 나무는 천년 동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도리가 없었으리라. 저 거목은 쓸모가 없었던 탓에 천년 동안 베임을 당하지 않은 채 자라날 수 있었다. 주말의 강연장에서 쓸모없는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생각하자. 사람들은 인문학을 무시하고 지나쳤다지만 먼 훗날 내가 강연에서 뿌린 것들이 싹을 튀우고 거목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강연은 끝났지만 복잡해진 심경을 안은 채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배도 고팠다. 강연장을 나와 근처 냉면집을 찾았다. 탈북민이 창업했다는 냉면집은 냉면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나는 놋그릇 담겨 나온 슴슴한 냉면 국물을 들이켰다. 냉면 육수는 시원하고 면은 담백했다.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주말 강연으로 생긴 소동이 남긴 복잡한 심경 따위는 씻은 듯 사라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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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5 18:26

보수의 ‘재(再)구성’이 필요하다

‘정권 심판론’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국민의힘 참패’라고 쓰고 ‘윤석열 심판’이라고 읽는다. “비정상적 국정기조,” “오만과 일방적 불통의 국정운영 그리고 독선적 ‘검사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평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이번 총선대패의 책임이 ‘윤 대통령에게 있다.’는 의견이 유권자 10명 중 7명에 이른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70%도 대통령 책임론에 동의한다. “대통령 부부가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이라는 말이다. 여론조사 꽃에 따르면 총선참패의 책임은 ‘윤 대통령 54% 김여사 10%’로 둘을 합하면 유권자 10명 중 최소 6명이 대통령 부부에게 책임을 묻는다. 대통령과 용산의 총선인식은 다르다.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대통령의 변화 의지가 없다.”로 본다. 비공개 자리에서 대통령이 “죄송하다.”고 해서 놀랐지만 취임 만 2년을 앞둔 대통령에게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전부라는 것도 ‘민주국가 지도자 중 거의 없는 일’이다. 용산은 총선결과를 “당의 선거운동이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국정방향은 옳다. 다만 국정을 운영하는 스타일과 소통방식 등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근거는 2년 전 대선승리. 용산은 “국정방향은 지난 대선에서 응축된 국민의 총체적 의견이다. 그 뜻을 받아서 윤석열 정부가 집권 했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거 때문에 국정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국정기조를 ‘유지’하면서 소통방식을 다양화하는 ‘정도의 변화’가 해답이 된다.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에도 소극적이다. ‘달라진 윤석열’을 요구하는 선거결과에 부응하기 위해 총선 민심을 과연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우려되는 이유다. 야권은 “도대체 답이 없다.”며 “역대급 심판에도 변하지 않고,” “국민이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한다. 여권에서도 “국민은 불통이라 느끼고 민심을 외면한다고 생각할 듯하다.”는 의견이 있다.“ 국민적 사과와 태도 대전환 각오를 피력 했어야”한다는 아쉬움은 “범야권이 때론 강제적 힘으로 윤 대통령을 바른 길로 유도해야”한다는 주장에 주목하게 한다. 관건은 국민의힘이다.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변화를 유도하거나 최악의 경우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리스크’가 총선결과지만 여당도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정의화 전 의장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는 “참패의 원인은 대통령의 불통 그리고 우리 당의 무능함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라고 말한다. 정 전 의장은 ‘당은 더 유능해져야 한다.“며 이제 대통령만 쳐다보는 정당이 돼선 안 된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땐 직언하는 당이 돼주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국민의힘은 이번 총선에서 두 가지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사상 ‘첫 여당 총선대패’와 보수정당 ‘첫 총선 3연패’ 기록이다. 2012년 총선의 152석에서 2016년 122석 2020년 103석 그리고 2024년 108석으로 쪼그라들었다.다음은 두 자리 수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총선 때마다 국민의힘 지지층의 축소를 말한다. 수도권 집중화와 함께 정치지형의 근본적 변화와 구조화의 가능성이다. 향후 ‘수도권과 고령화 유권자가 선거결과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총선 참패의 책임자를 자처하며 참회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지금 국민의힘이다. “영남 자민련”이나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 소리를 들어도 위기감은 물론 절박감도 없다. 그저 ‘월급 나오니(당선되었으니) 다행’인 샐러리맨들만 모아 놓아 “단일대오”만 부르짖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보수정당의 한 줄기가 끝났다.’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수정치로 새 출발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게 지금 당장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이다. 첫째,리더십 진공상태는 당분간 그대로 둬도 된다.의원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면서 중론을 모아간다. 이때 리더십도 만들어진다. 둘째, 전당대회 룰 개선이다.정당은 민심의 바다에 떠 있는 존재다. 정당은 ‘왜 무슨 일을 하는 집단’인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셋째, 총선대패의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출발점이다. 넷째, ‘지금 체제가 지속 가능한지’에 대답하는 미래비전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보수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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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8 15:08

눈물이 사는 살구나무 언덕

새벽입니다. 늦게 자도 일찍 자도 나는 늘 이 시간 부근에서 눈이 떠집니다. 언젠가부터 나의 잠은 이런 자연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나는 손으로 어둠을 만져 봅니다. 어둠이 부드럽고 편안합니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맑아집니다. 내가, 내게 몸을 움직이자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때 문득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몰래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적개심’, 이 말이 왜 이때 불쑥 솟아났는지, 느닷없는 이 말이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역사 속의 기억과 상처들이,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과 인간의 존엄, 내 짧은 삶의 흔적들이 함께 섞이며 소용돌이가 되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나도 이 말이 시키는 대로 일을 저지르며 살았던 것입니다. 적개심으로 일어났던,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일들이 생각나, 그 일들이 나의 현실이 되어 금방 내가 가난해졌습니다. 혐오, 증오, 적개심, 이런 삶의 끝에 다다른 막말들이 내 일상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때로 나는 ‘이 나라’가 싫어질 때가 다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라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도 떠나지 못하고 사는 내가 우리나라를 두고 ‘이 나라’란 말이 내 입에서 나오다니, 내가 싫어지고, 싫어지고, 정말 싫어집니다. 선하고 따듯하고 다정다감한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적개심과 적대적이라는 말이 우리의 일상을 살벌하게 지배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공격과 방어와 모면으로 교육된 우리들이 자세와 표정에서는 정의도, 평화도, 포근한 공정과 아름다운 자유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사는 우리나라를 ‘이 나라’라고 하는 절망적인 말을 하기 싫습니다. 이렇게 서로 부대끼며 사는 게 인생 아니냐고 하는 삶의 근본적인 질문이 지금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따금 정의로운 바람을 맞이하러 사람이 살지 않은 우리 동네 서쪽 밤나무 숲으로 갑니다. 영혼이 사라져 버린 말들이 삭풍이 되어 밤나무 숲을 흔들며 지나갑니다. 나는 괴롭지요. 슬퍼요. 서로를 바라보며 주고받아야 할 말을 버린 저 앙상한 나무들의 숲이 싫어집니다. 직업으로 삶의 비교우위를 가려가며 이렇게나 차디찬 돌멩이들처럼 돌아서서 무심한 얼굴로 살아가다니, 내가 싫습니다. 말 같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모두 ‘행복한 불행’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돈이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의 얼굴을 섬뜩하게 조종합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누추하고 낡은 정치가 그에 기대어 판을 만들고 부추기며 우리의 정신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부러움은 존경도 사랑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잘 못산 것은 아닙니다. 평생을 한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인간적인 가난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분들의 흠은 마을과 흙이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잘못들입니다. 누가 크게 잘한 영웅적인 일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분들은 늘 끝에 가서 두 손 마주 잡고 웃습니다. 나라가 왜 있습니까. 사람들이 호랑이가 무서워서 모여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가난은 달콤한 인문적인 위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나라의 일이듯이. 나라의 일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게 아닌가요. 시골 마을에 사는 시인은 이 새벽, 미안하게도 찬란한 봄날이 괴롭습니다. 아이들이 싸우면 동네 어른들은 “냅둬라, 아이들은 싸워야 큰다”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잘잘못이 드러나 싸우게 되지요. 싸워야 하지요. 싸우면서 내 잘못이 확실해지면 고치고 바꾸고 서로 맞추어 새로워지는 게 사람 사는 일 아닌가요. ‘혁신 이란 끝이 없는 착오들을 결론짓는’ 일입니다. 그게 정치지요. 사람의 얼굴, 우리의 얼굴은 지금 어떻게 생겼나요?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며 어떻게 살자는 것인지요. 나는 순진하게도, 바람이 불고 흰 구름 둥둥 떠가는 평화의 언덕 작은 마을 그 어디쯤, 눈물이 사는 어린 살구나무 곁에 누워 있습니다. 내가 심은 이 살구나무는 새로운 봄을 만나 저리나 곱게 화사한 꽃을 피우며 한 치도 어김없는 새 아침을 가져왔네요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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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1 16:53

행복한 ‘인생 2라운드’를 위한 준비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시대라 불릴 만큼 우리 사회는 100세까지 사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의학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는 ‘알파에이지’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면서 기대수명은 140세까지 바라보게 되었다. 실리콘밸리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생명연장을 위한 연구가 붐을 이루고 구글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노화연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60세 무렵 정년퇴직을 하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비단 나와 내 주변의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 2라운드를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막연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떠오른다. 슈바이처 박사는 30세에 이미 유럽 지역에서 존경받는 신학과 교수였으며 어려서부터 오르간(organ) 연주자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확고한 인생 계획 즉, ‘30세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학문과 음악을 하고 그 이후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자.’ 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의학공부를 시작하고 8년 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장래가 보장되는 프랑스가 아닌 의료기술이 취약한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의 랑바레네(Lambarene)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성공과 명성을 뒤로한 채 52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이타적인 삶’이라는 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슈바이처가 한 중요한 말이 있다. ‘내 안에 빛(꿈,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남들이 정해 놓은 가치, 나만 돋보이고 싶은 가치는 내 안의 빛이 아니다. 안으로부터 저절로 빛나는 나만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조용히 내면을 성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직업에서의 성공, 교수에서 의사로의 변신 등 슈바이처 박사의 특별함은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삶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슈바이처 박사의 특별함은 물리적 능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아보고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용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 박사는 인생을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명확한 비전이 있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기 위한 가장 필요한 분야가 의술인 것을 알고 의학 공부를 한 것이다. 우리도 성취와 물질만을 위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던 여정을 잠시 멈추고 더 높은 차원에서 인생과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은 무엇인가는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서 혹은 타인만을 위해서 살았던 삶이 아닌 제3의 길이 분명 보일 것이리라 믿는다. 또, 슈바이처 박사는 인생 2막을 열어줄 공부를 시작했다. 8년간의 의학공부와 의사로서의 준비과정이 있었다. 밑그림을 채색하기 위해 물감과 붓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인생 2라운드를 잘 살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가 통합되어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며 절망대신 희망이 우울대신 환희가 내면을 채우며 성취감과 행복감이 찾아올 것이다. ‘성공은 행복의 열쇠가 아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이다.’ 라는 슈바이처 박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어려서부터 꿈꿔왔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다보면 내가 행복해지고 자연스럽게 내면의 빛이 더 환하게 빛나게 될 것이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게 긴 노후를 맞는 것이 화두가 된 시대이다. 오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의료기술이지만 활력이 있는 ‘행복한 인생 2라운드’의 열쇠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명은 재천이지만 삶을 어떤 가치로 꾸려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자.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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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4 16:48

한 남자의 응징

중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보복은 오자서(伍子胥)의 응징이다. 춘추시대 초나라 귀족이었던 오자서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역모(逆謀) 죄로 기소되어 멸문의 화를 당한다.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던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큰아들 오상과 함께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오자서는 죽고 싶었다. 혼자서 비겁하게 살아가며 마음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가치 없는 죽음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응징할 것을 다짐하며 오(吳)나라로 망명한다. 오자서는 왕위 계승순위에서 밀려 있던 공자(公子) 광(光)을 왕으로 만들며 킹메이커로 부상하여 권력의 중심에 선다. 오자서는 권력을 남용한 초나라 평왕을 응징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오나라 왕 합려의 동의를 받아내어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와 함께 자신의 조국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영(郢)을 함락시킨다. 자신의 가족을 풍비박산 낸 평왕이 이미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에서 평왕의 시신을 파내어 채찍으로 300대를 내리쳐 부모의 원수를 갚아준다. ‘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내고 시신을 꺼내서 채찍으로 때린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조선의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 윤 씨를 참소하여 죽게 한 신하들에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으니, 묘를 파내고 죽은 시신을 훼손하여 응징하는 전통은 동양의 역사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지독한 응징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의 옛 친구였던 신포서의 충고를 <사기>에 적고 있다. “그대는 이미 죽은 사람을 묘에서 파내 욕보이니 한때 신하였던 자로 너무 극악무도하지 않은가?” 이런 충고를 들은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해는 저물고 응징할 시간은 없다(日暮途遠, 일모도원).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무도한 대가를 치러야겠다(倒行逆施, 도행역시).’ 자신의 부형을 죽이고,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에 대한 응징, 아마도 오자서는 그 일념 하나로 모진 세월을 견뎌왔기에 응징이 잔인하다는 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의 응징은 비장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두려울 것도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 맺힌 남자의 멋진 응징을 응원한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 속에 응징의 대상을 하나씩 갖고 살기 때문일까. 오자서의 응징 이야기를 열전(列傳)에 기록한 사마천도 49살 나이에 아무 죄 없이 궁형을 당하였다. 억울하고, 답답하여 잠을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깨어 일어나서 입은 옷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멍하니 생각에 젖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장이 꼬이는 고통을 받았으니 그 억울함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적에 의한 모함으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 선생도 억울함이 있었을 것이고, 8년간 유배지에서 고통 받은 김정희도 통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가족을 무참히 파괴하고 인생을 나락으로 몬 상대를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복수와 응징을 <열전>에 기록하며 응원한다. ‘오자서가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면 한낱 개미의 목숨과 무슨 구별이 있었겠는가? 끝까지 살아서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을 후세 남겼으니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생명의 끈을 놓아 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나, 끝까지 살아서 재기하는 것은 대장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마천의 평가가 귀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온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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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8 15:40

벚꽃 필 때 죽음을 생각하라

통영은 3월 중순에 벚꽃이 피고, 날마다 조금씩 북상한다. 열흘쯤 뒤엔 서울 여의도 윤중로 일대에서 벚꽃은 팝콘처럼 만개한다. 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다가 탄식한다. 어쩌자고, 하얀 벚꽃은 벚나무 검은 가지 속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만개하는가! 봄비가 지나가며 꽃잎을 떨구면 봄은 파장이다. 꽃 진 벚나무 가지에는 연초록의 잎들이 돋아난다. 제국이 멸망하듯이 벚꽃은 무너지는데, 하얀 벚꽃 시체가 낭자하게 흩어진 길을 걷노라면 가슴은 슬픔으로 벅차오른다. 젊은 시절, 연락이 끊긴 후배가 머리를 삭발하고 잿빛 승복을 입고 나타나 놀란 적이 있다. 스님으로 변신한 후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끌어안고 번민했노라고 말한다. 인생의 알 수 없음, 그 수수께끼를 품고 출가를 감행한 후배는 곧 수행을 하러 미얀마로 떠난다고 한다. 후배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떠올렸다. 살아 있는 동안 멈추지 말고 죽음을 생각하라!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다.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비행해 이 별에 도착하는 데는 약 2만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보이저 2호의 속도는 총알보다 10배 더 빠르게 날아간다. 지구 행성에서는 날마다 몇 만명이 태어나고, 먼저 이 별에 왔던 몇 만명이 생로병사를 겪으며 죽는다. 2만번의 봄이 왔다가 가는 동안 전쟁 고아들은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고, 유기묘 수 만 마리가 먹이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데, 나는 당신을 연모하고, 당신은 내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짚을 것이다. 우리는 길흉화복을 겪으며 평생을 살 테고, 그 동안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고, 폭풍과 뇌우는 우리 어린 자식들을 무서움으로 떨게 할 테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해마다 어김없이 봄이 돌아오고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에 모란과 작약이 핀다는 것이다. 당신이 봄날의 백일몽에 잠겨 있는 동안 내 후배는 미얀마의 오지를 걸으며 탁발 수행에 정진할 테고, 보이저 2호는 무서운 속도로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갈 테다. 아이들이 청년으로 자라고 어머니들은 늙어 허리가 굽고 백발로 변한다. 세상엔 얼음 위에 엎드려 잠든 사람도 있고, 파업을 위해 나선 노동자도 있고,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연인들도 있을 테다. 내게는 괴로운 밤들도 두어 번은 지나갈 테고, 누군가는 제 잇속을 챙기려고 친구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불시에 찾아든 질병으로 비탄에 빠질 것이며, 벚나무들은 봄마다 벚꽃을 피우느라 바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게 무시로 변하며 순환할 테지만 피었던 것은 지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법칙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다. 우리는 대지가 죽음을 어떻게 양육하는지를 지켜보았다. 분명한 사실은 지구에서 동식물들은 죽음을 주기 삼아 순환한다는 점이다.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 죽음을 자각한다. 무심히 버스 창밖의 간판들을 스쳐지나가던 그 선험의 찰나, 나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갇힌 채 오도가도 못 하는 느낌이었다. 만물을 이루는 원자는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별, 우주 먼지, 암흑물질, 바닷가 모래, 바위 들은 다 무생명이다.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감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죽음으로 충만한 이 삭막한 우주에서 우리가 살아서 존재한다는 게 기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기적일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죽음에는 출구도 빠져나갈 샛길도 없다. 죽음이 지구 생물의 역사에서 상수이자 보편의 진리라는 점은 단 한 점의 의혹도 없는 진실이다. 당신과 나는 어쩌다가 봄마다 모란과 작약이 꽃피는 걸 보는가? 어쩌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벚꽃이 덧없이 지는 걸 봐야 하는가? 벚꽃 필 때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이여, 나를 만나려거든 부디 벚꽃 핀 봄날에 찾아오라! 나는 활짝 웃으며 너를 맞으마! /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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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1 16:22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야구가 돌아왔다.’시범경기가 치러졌고 3월 23일 개막이다.10개 구단은 자신의 전력과 환경 그리고 최근 흐름 등을 바탕으로 올 시즌 목표를 설정한다.우승을 겨냥하는 팀도 있고 포스트시즌 진출의 5강을 목표로 하는 팀도 있다. 겨우내 국내외에서 진행된 스프링 캠프는 팀 목표를 위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강점을 극대화하려는 구단들의 노력이다.‘대한민국에 10명밖에 없는 프로야구 감독’의 운명은 성적에 달렸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팀이 우승을 놓고 경쟁할 수는 없다.그래서 팀의 목표는 크게 ‘우승이냐 (Win Now)이냐 정비와 준비(Rebuilding)’냐로 나뉜다. 작년 통합 우승팀 LG는 차명석 단장의 ‘우승 5개년 계획’에 따라 5년차에 우승을 달성했다.그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은 물론 순위도 계속 상승했고 팀의 예상승수와 우승 경쟁자가 어느 팀일지도 짐작했다고 한다. 스프링 캠프에서 10개 구단 감독들은 어떤 목표를 말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이를 바탕으로 올 시즌 우승을 놓고 다툴 팀은 어디인지 그리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팀은 어디인지를 예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팀 리더십의 목표설정과 그 결과를 비교해보자는 말이다.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다퉜던 두 팀의 리더십은 역시 우승을 목표로 한다.우승팀은 ‘왕조건설의 시작’을 다짐한다.“첫 번째 우승은 전력이지만 두 번째 우승은 철학”이라며 팀의 방향성과 칼라를 좀 더 분명하게 가져가자는 다짐이다. “우승 경쟁권의 팀”으로 평가받았지만 포스트 시즌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팀은 리더십을 전격 교체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감독교체와 프랜차이즈 스타의 갑작스러운 이적으로 뒤숭숭했던 팀의 새 리더십은 “리모델링”을 다짐한다. 팀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을 가장 잘 돌파할 수 있는 리더십을 선택한 팀이 하나 더 있다.그들은 갑작스럽게 감독 선임 프로세스를 진행했지만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새 리더십은 ‘내부 지도자의 감독승격’이 가장 현실적 선택이라는 판단을 한다.‘세대교체의 감독’은 빠르게 팀을 안정시키며 우승전력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킨 팀의 리더십은 올 시즌이 “한국시리즈 우승” 타이밍이라고 선언한다.작년 우승을 놓고 한국시리즈에서 경쟁했던 팀의 감독조차 “만만치 않은 감독”이라고 인정하는 팀이라 보여 지는 전력 이외의 강점이 팀 성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초보감독”이었지만 작년에 포스트 시즌 진출의 성과를 낸 팀 리더십은 ‘작년에 이어 포스트 시즌 이어가기’를 목표로 한다.당장 우승경쟁은 아니지만 팀이 계속 나아지는 중이라는 뜻이다.곧 우승전력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승 청부사”로 “카리스마 감독”을 영입한 팀은 “새로운 팀의 가을야구”를 목표로 한다.이를 위해 그들은 “공격적이며 새로워진 팀 야구를 지향”한다.우승 경험이 많은 감독은 ‘선수들이 파닥파닥 뛰는 이기는 야구’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선수들의 기를 올리는 데 둔다. 지난해 가을야구에 탈락한 팀의 리더십은 ‘홈구장에서 가을야구’를 목표로 한다.당장 우승도전은 어려우니 차근차근 전력향상을 노리겠다는 말이다.투타의 기둥이 모두 빠져 어려운 시즌이 예상되는 팀의 리더십이 ‘도전정신과 완주’를 목표로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다. 만년 하위 팀의 리더십은 “가을야구 냄새라도 맡자”는 목표를 세웠지만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메이저리거의 복귀는 팀의 “5강 도전의 포부”로 이어진다.선수 한 명이 가져오는 급변인데 인사가 팀과 리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경쟁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무능하고 무책임한 무도한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하자 “운동권 특권 부패 종북 세력의 합체”라고 맞받는다.‘사면 음란 친일 극우공천’이라고 하자 ‘충성심과 방탄력 기준의 공천'이라고 한다.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 보다 ’상대의 악마화와 반사이익의 정치‘다. 여야는 우리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미래를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실행계획을 제시할까? 프로야구 감독도 계약기간은 있지만 성적에 따라 언제든 교체된다.우리가 4월 10일 뽑는 사람들은 임기 4년이다.우리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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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4 16:40

시인이 사는 마을

나는 강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 태어나고 자라 산다. 나의 조상들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두 살 때 전쟁이 일어났다. 집은 불태워지고, 그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잃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재만 남은 집터에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세 번째 집으로 1962년에 지으셨다. 아버지는 나무와 풀과 햇살과 흙과 바람으로 집을 지으셨다. 나도 그렇게 바람과 햇살과 흙과 나무로 시를 쓰며 그 시속에서 살고 싶었다. 마을을 만들어 살면서 사람들은 마을의 질서를 위해 법을 만들어 갔다. 불문율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막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도둑질을 하다 들키면 추방당하거나 스스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거짓말을 하면 평생 신용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사는 게 공부였다. 배우면 써먹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자연이 시키는 일을 잘 알아서 농사와 삶의 근본을 삶았다. 삶이 예술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싸워야 큰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했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삶 속에서 만들어진 마을 법을 지키며 사람들은 같이 먹고 같이 일하면서 같이 놀았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을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라 했다. 공동체라는 정치경제 문화 사회적이고 인문적인 이 아름다운 말은, 실은 이 작은 마을 문화에서 만들어졌다. 마을에는 별로 소식이 없었고, 쓰레기가 강물로 나가지 않았다. 가난을 무시하지 않았다. 가난은 남모르게 서로 돌보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마을에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어렵고도 아름다운 말이다. 마을은 인간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학교였다. 스물한 살 때 초등학교 선생이 된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31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 인생이 늘 더 잘 되어 있어서 나는 놀란다.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일이 늘 새로워했고, 신비로웠고, 감동적이었다. 초가을 햇살을 날개에 실은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는 운동장에서 나는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아이들은 나의 아름다운 스승이었다. 교육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는 자기 교육이었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동안 드나들던 모교 교문을 나올 때 나는 부끄럽고 괴로웠다. 아이들에게 잘못 한 일들이 되살아나 나는 부끄러웠고, 아이들에게 가르친 대로 살지 못해서 괴로웠다. 교육은 미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그대로 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논밭으로 오가던 길, 학교와 직장을 걸어 다니던 그 강길을 지금도 나는 걷고 있다. 강물을 거스르고 따르는 일은 내게 수긍과 거역을 가르쳤다. 박힌 돌에 물은 거세게 부딪치고 부서지며 흘렀다. 시정이 넘치는 이 작고 소박한 강은 내게 그리움을 실어다 주고 외로움과 태어난 땅에 사는 아픔을 가져갔다. 어느 날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시를 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달이 다닌 길에서”라고 했다. 나는 달이 다니는 길을 따라다니며 강길에 앉아 시를 썼다. 마을은 나의 학교였고, 해 아래 나무들은 나의 새 책이었으며, 새로 쓰는 시였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로 참나무가 참나무로 평생을 우람하게 사는 나무들의 하루는 나에게 마르지 않은 상상력과 시적인 영감을 주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 말로 씨를 뿌려 곡식을 가꾸어 거두는 농부들의 일상은 나의 시가 되었다. 나는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 나는 새와 바람과 달과 별들이, 나무들이 아침 강물과 저문 강물이 하는 말들을 달빛으로 공책에 받아 적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나 강을 건너오라고 부르지 않는다. 달이 뜬 밤 나락을 짊어지고 징검다리를 건너와 달빛이 깔린 마당에 짐을 부리고 허리를 펴던 고단한 아버지들의 하루 곁에 서 있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어찌 내가 잊고 살까. 나는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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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7 15:23

AI를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설 명절 휴가기간 동안 SNS에서 따뜻한 에피소드를 접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 한복판에 폐지가 가득한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노인 옆에서 우산을 씌워드리고 함께 가는 어느 여성의 모습이었다. 목적지까지 비를 맞으며 모시고 간 후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아 저녁을 드실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상실감에 젖어있는 추운 계절에 마음의 온도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나날이 눈부시게 기술이 발전하고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과 반비례로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가는 요즘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올해 최고의 화두는 ‘생각하는 AI’인 ‘생성형 AI’의 출현이다. AI 기술의 발전은 우리 생활에 상당히 밀착하여 다가오는 느낌이다. 삼성전자에서 가장 최근에 출시된 스마트폰에 탑재된 AI는 13개국의 언어를 실시간으로 통·번역할 수 있게 개발되었고, 실제 사용해보니 일상대화는 물론 어려운 말도 대략 뜻이 통하는 수준으로 번역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외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근 AI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이다. 2021년, 미국의 전 외무장관 키신저(Kissinger), 구글의 전 CEO 슈밋(Schmidt), MIT 학장 허튼로커(Huttenlocher)가 공저를 한 ‘AI 이후의 세계’라는 책에서 AI가 인간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 대단한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였다. 2년이 지난 2023년 키신저 등 3명의 공저자들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Chat GPT가 지적혁명(Intellectual Revolution)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뉴욕타임스는 직업세계에서 AI가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대학졸업자의 75% 정도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그만큼의 직업군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였다. 기술은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일과 삶의 현장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AI의 활용으로 많은 것이 편리해졌지만 인간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더 강해지고, AI의 활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창의적인 사고를 생략한 채 습관적으로 AI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사회라면 ‘AI에 지배되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주도적으로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역량과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첫 번째는 교육현장에서 AI를 이해하고 잘 다룰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있다. 초등에서 고등교육까지 학문과 직업세계에서 AI를 활용할 수 있는 기술역량을 습득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탁월한 인재로 키워내는 것과 더불어 생활에서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50대 후반의 은퇴한 세대도 3~40년 AI를 활용해서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두 번째는 기술 발전을 다룰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인성과 창의력이다. 사람이 AI보다 탁월할 수 있는 것은 따뜻한 품성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발전을 소화할 수 있는 인간적인 소양이다. 도덕적, 윤리적 의식을 함양해주는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적인 이해능력, 동료와 함께 협업공동체를 결성하고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창의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소양을 개발하여 AI의 발전을 충분히 포용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노인에게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도 기꺼이 우산과 따뜻한 마음을 내어준 여성을 보면서 AI시대를 맞는 우려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품성을 바탕으로 이웃과 연대하고 AI에 지배되지 않고 충분히 활용하여 긍정적이고 효율적인 현재를 살아간다면 ‘기술 지배의 차가운 개인주의 사회’가 아닌 ‘사람냄새 가득한 AI를 품을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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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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