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어진이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말한다. 전주에 있는 경기전은 유서깊은 곳으로써 조선왕조 실록과 태조 어진이 모셔져 있었던 곳이다.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행사가 10월에 치루어진다.
오늘의 태조 어진이 지금까지 보존될수 있었던 데에는 깊은 사연이 숨어있다.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한반도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런 국난에 전주 경기전에 있었던 조선왕조 실록과 태조 어진의 안전에 위험이 닥쳤다.
조선왕조 실록은 전주 경기전을 비롯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충청도 청주, 경상도 성주 실록각에 각각 분치(分置)되었는데 전주만 제외하고 나머지 3곳의 실록이 모두 전란(戰亂)중에 불타버렸다. 왜군이 웅치재를 넘어 전주에 당도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기전 참봉 오히길은 실록과 태조 어진을 봉안(奉安)할 뜻있는 인물을 찾던중 태인의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선비가 자진해서 나섰다.
참봉 오희길과 두 선비는 여려 사람들을 대동해서 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기고 9일후에는 태조 어진을 내장산 은적암(隱寂庵)옮겼다고 한다. 실록과 어진은 조선의 국보(國寶)였기에 전란 중에도 조정(朝廷)은 이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않고 그 행방에 관심을 가졌다. 조정은 좌랑(佐郞) 신흠(申欽)을 내장산 현지에 파견하여 실록과 어진의 안전을 확인케 했다.
이렇게 옮겨진 실록과 어진은 다른곳으로 이전되기까지 약 1년간을 머물게 되는데 이때도 안의 손홍록 두 선비는 이의 안전을 위해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둘이서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후 왕명(王命)에 따라 어진은 충청도 아산 객사으로 옮기게 되었고 실록은 해주목(海州牧 )으로 옮겼다고 한다.얼마후 정유재란이 터지자 안의, 손홍록은 다시 분발하여 아산에 있는 어진을 강화부를 거쳐 청천강을 지나 안주(安州) 객사에 옮겼다고 한다.
이때 해주목에 있던 실록도 옮겨져 와 어진과 5년만에 재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후로 다시 심산유곡인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으로 옮겼다. 태조 어진만 광해군 때 경기전의 중건(重建)과 함께 봉안되었다. 태조 어진은 그냥 지켜진것이 아니었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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