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지신(尾生之信)'은 융통성 없이 약속만을 굳게 지킨다는 걸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국 춘추 시대에 미생(尾生)이라는 청년이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한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홍수에도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익사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사기'의 소진열전(蘇秦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는 2010년 1월 당시 한나라당 의원 신분이던 박근혜 대통령과 당 대표인 정몽준 의원 간의 논쟁 때 인용돼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약인 세종시를 놓고 원안대로 해야 한다는 박 대통령과 수정안을 지지하던 정 대표 간 논쟁이다.
정 대표는 '미생지신'을 인용하면서 국민과의 약속과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는 박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미생은 진정성이 있고, 애인은 진정성이 없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약속 이행은 곧 신뢰와 직결된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8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신뢰와 약속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정치인으로 각인돼 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선거공약 이행 태도를 놓고 자치단체들의 불만이 많다. 심지어는 집권당인 새누리당도 흰 눈을 들이댄다. 구체성이 없어 지역공약이 흐지부지될 우려 때문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걱정도 태산이다.
정부는 최근 지역공약 이행계획(106개 공약에 167개 사업)을 발표했다. 소요 재원은 124조 원에 이른다. 이중 71개 계속사업은 중단 없이 추진하지만 96개 신규 사업은 예비 타당성과 경제성 조사를 거쳐 걸러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전북이 치명적이다. 전북은 7개 공약에 9개 사업이 대선 공약이다. 이중 부창대교, 미생물융복합 과학기술단지, 지덕권 힐링 거점, 동부내륙권(새만금∼정읍∼남원) 국도 등 신규사업 4건은 경제성이 없거나 떨어진다. 경제성 잣대로는 기대난망이다.
또 재원 부족 때문에 사회간접자본(SOC)은 가급적 추진하지 않고, 필요할 경우 민간자본을 끌어들인다는 것인데 이 역시 전북은 설 자리가 없다. 민간부분은 수익성이 있어야 투자 가능한데 수익성 있는 사업이 거의 없다. 7개 공약 중 '새만금 지속적 추진'과 '익산국가식품클러스터' 두 사업을 빼고 나머지는 말짱 도루묵이 될 개연성이 크다. 경제성과 타당성이 부족한 탓이다.
문제는 대선 공약을 다루는 방식이다. 타당성 없는 공약을 과연 추진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제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거공약은 대 국민 약속이다. 선거라는 이벤트를 통해 지역의 현안이나 숙원 사업, 주민여론 등을 정책화시켜 반영해 나가는 것이 선거 공약이다.
이런 성격을 이해하지 않고 공약사업마다 경제성과 타당성 잣대로 재단한다면 일반 사업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거창하게 선거공약을 제시해 놓고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파기한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애당초 하지를 말아야 하고, 한번 내뱉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 '미생지신'의 고사가 던지는 교훈이기도 하다. 신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무신불립(無信不立)'도 같은 맥락이다.
신뢰와 약속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면 공약 이행에 최선을 다해야 옳다. 불가피하게 이행치 못할 상황이라면 정중히 사과하고 국민 이해를 구하는 것이 도리이다.
공약이행은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경제성과 타당성 조사도 결국엔 정치적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건이 험악한 만큼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협력하고 전북도가 지원하는 모양새를 갖춰 전북의 현안들이 차질 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역량을 발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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