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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8. 시간을 품은 깊은 맛, 순창 - 순창 사람이라도 서울서 고추장 담그면 제 맛 안나더라

조화 강조된 고추장 맛·영양 우수한 식품…조선시대 장류 발전 꽃피웠다 해도 무방 / 좋은 재료가 지닌 땅 힘 사람 정성·시간 기다림…맛있게 취하는 즐거움 마음과 연결될 수 있다

▲ 순창 고추장 임금님 진상행렬 재현 행사.

“전후에 보낸 쇠고기장볶음을 잘 받아서 아침저녁의 반찬으로 삼고 있느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느냐? 무람없다. 무람없어. 난 그게 포첩(육포)이나 장조림 따위의 반찬보다 나은 것 같더라.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야.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부모의 마음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연암 박지원(1737~1805년)으로, 아들에게 장을 담가 보내며 쓴 편지가 『연암선생 서간첩』에 남겨져 있다. 고추장을 손수 만들어 보냈는데 잘 먹었는지 답이 없어 갑갑해 하고 살짝 마음 상해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 고추장 사랑에는 정약용 선생도 남달랐다. 『다산 시문집』에는 배를 타고 가며 고추장을 가져가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작은 상자에는 고추장이 있고 / 小盒茄椒醬

 

여행길 주방엔 장작불 연기로세 / 行廚榾柮煙

 

사람과 고기 사이를 이어주는 맛이 / 人間梁肉味

 

모두 이 강 뜬 배에 있구려 / 都只在江船

 

요즘 들어 인기 쉐프로 남성 요리사들이 등장하면서 음식 만드는 남자를 TV에서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요리하는 일상이란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지금도 그러한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었다니 놀랄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궁중음식을 담당했던 이들도 남성이 중심이었고, 초기의 고추장은 입맛을 돋우며 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담그며 나누어 먹은 기록을 남긴 것에는 조화로운 맛과 발효음식에 담긴 지혜를 귀하게 여긴 듯싶다. 또한, 선비 못지않은 조선 왕들의 고추장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수많은 기록과 지역의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흔적들이 순창의 자산이 되어 깊은 맛으로 자리 잡았다.

▲ 순창 만일사 전경

장(醬)의 명가인 순창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고추장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기 북쪽 여진족을 쳐부수고 남쪽 왜구를 격퇴한 전공을 세웠는데 경상도를 거쳐 올라오는 왜구를 순창 인근 남원 운봉지역에서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즈음 이성계가 만일사(萬日寺)의 무학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창에 들렀는데 그때 인근 민가에서 순창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초시(椒豉)’에 비벼 낸 밥을 먹어보고 이 맛을 잊지 못해 임금에 오른 후 순창 현감에게 진상토록 했다는 설화이다.

 

이때 이성계가 맛본 초시가 고추장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기인 1335년 태어나서 1392년 태조로 즉위했고 1408년 사망했다.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가 순창에서 고추장을 맛본 건 늦어도 고려가 아직 망하지 않았던 1392년 이전이다. 고추장의 주요 재료인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건 이성계가 사망한 뒤 적어도 100년이 지난 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성계의 입맛을 사로잡은 초시는 산초(山椒)나 호초(胡椒·후추나무 열매껍질) 등을 넣은 장류로 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길 만하니 매운맛을 내는 발효식품인 것은 맞다.

 

또한, 본관이 전주인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년)은 승려들이 만들기 시작하여 평민들이 즐겨 먹기 시작했다는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남겨 놓으며 번초(蕃椒)를 백성들이 고추라 부르며 하루라도 끊을 수 없는 최고의 양념이라 소개했다. 그 기록을 보아도 승려인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고추장에 관한 사연은 순창의 귀한 이야기 자산으로 의미를 둘 수 있다.

▲ 만일사 경내 순창고추장 시원지 전시장

고추장은 조화미(調和美)가 강조된 맛과 영양이 우수한 발효식품으로 조선시대 장류의 발전은 고추장으로 꽃피웠다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고추장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고추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호초(胡椒)나 천초(川椒)와 같은 매운맛을 내는 장(醬)문화가 존재하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고추의 도입 시기와 관련해서는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설과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와 있었고 이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소수의견이지만 두 학설의 절충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부터 고추를 받아들였고, 임진왜란 때 이 고추가 일본으로 역수출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고추 재배가 일반화된 후에는, 고추가 종래에 매운맛을 내는 데 사용했던 호초와 천초를 대체하며 점차 장(醬)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중기 영조 때의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고초장(苦椒醬, 古椒醬)이 기록된 점이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년)에 고추장의 제조법이 기록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추장 중 가장 유명한 순창 고추장에 대한 명성은 과거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조 때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소문사설(謏聞事說)》중 「식치방(食治方)」이 대표적이다. ‘순창고추장조법(淳昌苦艸醬造法)’에는 순창의 유명한 고추장 담금법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재료의 내용과 비율 등이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해동죽지(海東竹枝, 최영연, 1925)에는 “순창고추장의 색깔은 연한 홍색이고 맛은 달고 향기로우며, 기운은 맑고 차서 반찬 중 뛰어난 식품이다. 순창 사람이 서울에 와서 손수 이 고추장을 만들었는데, 맛과 색깔이 모두 본지방에서 생산하는 고추장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순창 고추장은 똑같은 사람이 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담가도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같은 맛이 나지 않아, 순창의 물맛과 기후가 조화를 이루고 재료들을 섞는 비율이 좋아 그만의 맛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순창 고추장은 귀하게 여겨지며 임금에게 진상(進上)되는 것이기도 했다.

 

신분 고저를 떠나 사랑을 받았던 고추장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다양한 이야기도 함께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고추장을 가장 좋아한 왕은 정조로 입맛이 없을 때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정조실록(正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고추장을 사랑했던 정조는 대궐 밖을 나설 때마다 고추장을 챙겼다고 하며, 이후 연희궁 앞에 아예 고추밭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고추장에 관한 왕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스토리는 심한 현기증과 입안의 염증으로 고생하는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비약으로 고추장을 구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고추장의 매력에 흠뻑 빠진 영조는 “고추장이 늙은이의 입맛을 지켜준다.”면서 고추장을 장맛이 좋은 사가로부터 진상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전해진다. 그 이후 기력을 차린 영조가 훗날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고추장은 슬프기도 하다. 매운 것을 먹으면 눈물이 나는데, 매운 고추장으로 눈이 시큰할 때마다 생각날 사람은 그 사연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마음도 더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조상의 지혜로 일반적인 밥상에서 ‘약치(藥治)’이며 ‘식치(食治)’였던 고추장을 위시한 발효식품인 장들은 건강을 지키면서도 마음을 전하고 어루만지는 ‘심치(心治)’를 겸한 듯하다. 좋은 재료가 지닌 땅의 힘, 사람의 정성과 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맛있게 취하며 느끼는 즐거움은 마음과도 연결될 수 있다. 장(醬)맛은 그 집안의 음식 맛을 판가름한다는 속설이 있으며 어머니의 손길이 가장 오래 담겨있는, 정을 느끼는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음식으로 치유의 과학을 전해준 조상의 지혜에 감사하며, 가을과 더불어 장(醬)이 익어가는 소리에 마음을 더해보면 어떨까. 그 시간에 담긴 의미를 헤아려보며 고추장의 명가 순창의 풍요로운 가을을 느껴 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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