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③ 백제의 또 다른 왕도, 익산
익산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중요한 지방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왕궁리 일대는 위덕왕대(554~598) 말기부터 이미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명실상부하게 왕도로서 익산이 자리매김한 것은 무왕대(600~641)이다.여러 설화에서는 무왕이 익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마를 캐던 서동(무왕)이 다섯 개의 금을 얻은 곳이 오금사(五金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설화와 역사의 기록은 모후의 출생지가 익산이었거나 즉위 이전 무왕의 근거지가 익산이었음을 의미한다.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였다. 즉 익산은 백제의 새로운 왕도, 또는 별도였다는 것이다.익산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위덕왕대 백제는 사비도성 바로 앞에 있는 알야산성이 신라군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었다. 신라와 본격적인 대결을 준비하던 무왕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한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군비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에 부합된 곳이 바로 익산이었다. 익산지역은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만경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신라로 진격하기에도 용이하였다. 아울러 익산은 너른 평야가 있어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였다는 증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그 첫 번째 증거는 궁성(宮城)의 존재다. 남북 490m, 동서 240m의 규모를 자랑하는 왕궁리유적은 궁성에 부합하는 유적이다. 아울러 왕궁리유적 북쪽에는 오금산성과 저토성이 있는데, 이 두 산성은 궁성의 방어와 유사시 대피 용도로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궁리 궁성은 궁장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대지에는 부여 왕경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기와를 쌓아 기단을 조성한 건물과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 등을 지었다. 이와 더불어 공방, 대형화장실, 정원과 후원 등의 부대시설이 만들어졌다.두 번째 증거는 왕실 사찰의 존재다. 여기에 부합하는 사찰은 백제의 새로운 궁성에서 불과 1.4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제석사이다. 제석사는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를 보인다. 또한 동서 회랑의 길이가 100m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거리가 140m로, 백제 사찰가운데에서는 미륵사지 다음으로 크다. 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제석정사를 지었으며, 639년 벼락으로 7층 목탑, 불당, 회랑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어, 무왕 재위 당시 제석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세 번째 증거는 새로운 통치이념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법왕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에서는계율종과 함께 현세에서 계율을 잘 지켜 미륵보살이 상주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미륵상생신앙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교신앙은 개인적, 귀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왕이 연못 속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보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무왕은 미륵하생신앙을 익산시대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미륵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서원, 중원, 동원 등 세 개의 사원을 병립시킨 사찰인데, 이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000만년 후에 나타나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의 서원을 사찰의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 한편, 〈미륵하생경〉에는 성불한 미륵불을 영접한 전륜성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통일제국이라고 한다.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던 무왕은 그의 원대한 포부인 삼한일통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겠다는 염원을 담아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9층탑의 조성을 미루어 볼 때, 미륵사 창건을 통해 불교의 패러다임을 개인불교와 귀족불교에서 호국불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왕릉이다. 익산시 팔봉동에 있는 두 기의 대형 고분은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있으며, 흔히 쌍릉이라 부른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무덤의 구조와 출토품이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이 고분이 무왕릉과 왕비릉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능산리의 왕릉과 비교해봐도 대형인 점과 부여지역의 왕릉에서 확인된 바 없는 옥장신구가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왕릉급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백제 왕실 인사 가운데 익산과 가장 연관성이 있는 무왕과 그의 왕비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처럼 익산지역은 무왕대에 왕도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궁성의 건설, 왕실 사찰의 조영, 그리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기념물 즉 미륵사의 창건을 볼 때, 무왕의 익산 개발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즉 금마와 왕궁 일대는 백제의 계획도시이자 또 다른 왕도였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