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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지평선명품사업단(주) 이대훈 대표 "뒤집은 농장 다시 뒤집는 혁신 작업…'로컬랜드' 명성 살려"

전라북도가 2012년 6차산업 사업을 처음 공모했을 때 완주의 로컬푸드, 정읍의 선농(주)와 함께 사업자로 선정된 사업단이 김제의 농업회사법인 지평선명품사업단(주)이다. 예로부터 포도 집산지로 유명한 김제 백구지역의 포도농가들이 대거 참여한 지평선명품사업단은 포도 농원을 가꿔 체험농장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온 이대훈 대표가, 그의 표현을 빌리면 농장을 또 한번 뒤집어 엎어버리면서 탄생했다. 그가 뒤집어 엎어버린다는 말은 기존 사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혁신 작업이다. 지난 4일 김제시 백구면 수룡귀지길 276-4(옛 주소 백구면 부용리 911-36) 지평선명품사업단 대표실에서 이대훈 대표(53)를 인터뷰, 그들의 브랜드 로컬랜드의 경쟁력에 대해 들어보았다. 2층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각종 브랜드 와인 병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와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예. 조금 있으면 현재 숙성 중인 와인을 병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규모로는 와인사업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와인 제조 등 가공사업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지원대책도 필요한 데 그렇지 않거든요.-어떤 것들이 부족합니까.이번 6차산업 사업화 이전에도 무주, 임실 등에서 와인을 생산했지만 생산농가나 가공사업자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요. 예를 들어 무주 머루와인공장에 납품하기 위해 백구지역 포도농가에서도 머루를 생산했어요. 그런데 유통업자들의 농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좋은 가격으로 사갔지만, 일정 시일이 지나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이대면서 매입 단가를 낮췄거든요. 그래서 농업, 농민이 어려운 것이죠. 그 때문에 6차산업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당국에서 시설 지원만 할 것이 아니라 안정적 생산과 판로 문제까지 고민하고 지원하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당국의 고민도 필요하지만 결국 사업계획을 세운 사업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고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맞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가 않아요. 당국도 30억짜리 건물 준공시켜 주고 출범시키면 끝은 아니죠. 안타까운 것이, 6차산업 하려면 대기업 등과 경쟁해야 하는데, 6차산업 사업자 손발 묶어놓은 상태에서는 일어서기조차 힘들어요. 예를 들어 이 건물의 경우 행정 보조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지평선명품사업단이 신규 투자를 위해 금융권에 담보물로 제공할 수 없게 돼 있어요. 보조금을 달라는 것이 아니예요. 다만 사업자가 필요로 할 때 대출을 받아 뭔가 해 볼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부족하면 싸울 수 없잖아요.한 두 사람이 도둑질해 먹고 도망간다고 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까지 못하게 제동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어려운 것이 그런 거예요. 저희가 농가에서 30톤 이상 포도를 수매해 와인을 담가 놓거든요. 와인 제조에는 수매 비용, 인건비 등 각종 경비가 엄청나게 투입되는데, 투자비용을 곧바로 회수할 수 없는 선투자 구조예요. 와인은 1년 이상 숙성시켜야 하기 때문에 투자금 회수가 그 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이에 대한 당국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당국의 세심한 관심이 요구되는 대목이군요. 지평선명품사업단은 어떤 곳입니까.백구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생산과 가공, 판매, 체험, 숙박을 연계해 농가 소득을 좀더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는 구조로 계획해 만들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사업을 백구지역 포도농가들이 참여하는 사업단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로컬랜드는 지평선명품사업단의 브랜드 명칭입니다.- 사업단은 어떤 계기로 출범시켰습니까.2012년 초 전라북도가 농식품 6차산업 사업자를 공모한다는 얘기를 듣고 추진했습니다. 사업 기반은 돼 있었기 때문에 멋지게 보완을 했죠. 작년에 세월호 사고 때문에 모두가 힘들었을 때도 3만여명이 다녀갔습니다. 매출 4억을 올렸지만, 적자가 났어요. 직원 급여 등 관리비가 적지 않고, 와인용 포도 수매에 투입된 비용이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로컬랜드의 사업 아이템은 포도입니다. 이 지역은 언제부터 포도 집산지로 유명해졌습니까.1930년대 백구면 부용리 일대에서 포도농장이 시작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 3대 포도작목지로 꼽힐 정도가 됐는데, 이 곳에는 목과동, 과목장 등 과수원을 일컫는 지명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백구포도가 아니라 부용포도로 유명했다고 해요. 6.25전쟁 후 이 일대에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포도 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농 위주로 과수원이 운영됐지만 1980년대 들어서부터는 마을마다 포도농사 짓는 농가가 늘어났고, 마을 단위로 포도작목반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포도농장이 커졌고, 현재 350농가에서 100㏊(300만평)의 포도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1개 면단위 포도 생산 기준으로 볼 때 백구는 대한민국 최고 포도 집산지라고 자부합니다.-이 곳 포도는 어떻게 관리 생산됩니까.350농가 중 200농가 이상이 시설재배를 하고 있습니다. 고품질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 비가림 시설을 하는 것이죠. 포도 품종은 캠벨이 대부분입니다. 약10% 정도가 거봉 계통이고, 청포도, 와인용 포도 등 근래들어 품종이 다양화되고 있습니다.-이 대표 집안은 옛부터 포도농사를 지었습니까.아닙니다. 일반 농사를 지었는데, 제가 농업고등학교 졸업하고 포도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군대 갔다와서 짓기 시작했으니까, 1983년 가을에 아버님과 상의해서 포도묘목을 사다 심었습니다.-포도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당시만 해도 이 곳 우리동네에는 포도농사 짓는 사람이 없었어요. 부모님은 벼농사가 많았고, 장남인 저는 농고 졸업했잖아요. 부모님 모시고 농사지으며 살려고 농고 다니면서 관심을 갖고 있던 포도농사를 시작했죠. 농고 다닐때부터 와인 담그는 기술을 익힐 만큼 포도농사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처음 1,200평으로 시작해 6,000평까지 늘렸는데 지금은 생산농장 규모를 크게 줄였습니다.-농장을 규모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대표는 왜 농장을 줄었습니까.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영향으로 포도 가격이 폭락한 적이 있어요. 그 때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할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 직거래 형태의 포도농장이 안정적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1996년 농장을 한 번 뒤집어 엎어 체험농장으로 만들었어요. 일부 포도나무를 캐내어 사람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잔디밭을 만들었고, 가로등과 주차장도 시설했습니다. 물론 포도 직판장도 만들었죠. 유치원 아이들 체험학습장, 어른들 주말농장으로 변화시킨 거죠. 직판장에서 포도를 판매하고,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포도나무도 분양했어요. 이런 체험학습농원은 아마 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했을 거예요.-10년 넘게 가꾼 포도나무를 캐내고 잔디밭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체험학습장 반응이 어땠습니까.첫 해에 500명 정도가 다녀갔고, 이듬해에 1,000명 등 해마다 늘어가더라구요. 성공적이라고 판단, 농장을 단순한 포도생산 농장에서 관광농원 형태로 계속 바꿔나갔어요. 23년 해서 손님 늘어나면 개보수 해서 넓히는 식이었죠. 또 농산물 판매만으로는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고, 오래 머물게 붙잡아 둘 수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2002년에는 식당과 족구장, 무대, 방가로도 만들었습니다.-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아니예요. 2008년에 또 한번 뒤집었어요. 3억 원 정도 들여가지고 평상을 새로 들여놓았고, 가로등을 확충했습니다.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화장실, 소규모 동물농장도 만들었어요. 농산물 판매장, 체험장, 식당, 잔디광장까지 어우러진 멋진 체험농장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죠. 땅 속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포도주를 생산했어요. 잘 숙성되면 병입해서 지인들을 통해 판매하고요. 그렇게 해서 1년에 2만 명 이상 찾아오는 체험농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당국이 말하는 6차산업 아니겠냐 싶습니다.-평소 6차산업 마인드를 갖고 꾸준히 노력해 왔군요.그렇습니다. 2012년에 백구농협 이재희 조합장이 저에게 6차산업 사업공모가 있다고 귀띔해 줘서 응모했죠. 공모 내용을 보니 제가 평소해 하고 있는 것이더라구요. 사업을 규모화 해서 좀 더 의욕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이제 포도 농사는 1,200평 정도만 짓고, 로컬랜드 관리 업무를 주로 합니다. 포도밭이 줄었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훨씬 많아졌어요. 포도를 수매해 와인을 담그고, 숙성 정도를 관리합니다. 찜질방에 쓸 화목도 직접 잘라야 하죠. - 지평선명품사업단 로컬랜드 사업에 참여하는 농가는 얼마나 됩니까.출자금 100만원 이상을 낸 농가는 120명 정도이고, 법인이나 작목반에 속한 분들까지 합하면 557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적지 않은 농가에서 참여하고 있군요. 사업계획을 세워 추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농가들이 선뜻 믿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영농조합법인 등이 잘 운영돼 왔으면 성공 사례를 지켜본 농민들이 믿고 따르겠죠. 그런데 부도 나서 폐기처분되는 경우를 보아 온 터라 곧바로 믿지 않은 것 같습니다.-와인은 언제부터 했나요.재래식 생산은 포도농사 짓는 동안에 계속 했어요. 땅에 항아리 묻고 포도주를 담갔죠. 3년 정도 숙성되면 병에 담아 지인들에게 선물하거나 저렴하게 팔았어요. 현재 와인생산 시설은 6차산업 사업 중 한 부분입니다. 와인 제조기술은 농업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고, 그동안 기술이 늘었습니다. 이번 사업을 하기 위해 전문가 컨설팅도 받았구요. 와인시설 건물에 제빵체험장과 저온저장고도 함께 갖췄습니다.-와인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한 해에 와인을 담기 위해 포도 30톤을 수매합니다. 최고 품질의 와인은 가장 좋은 포도를 사용해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농가에서 수매할 때 가장 좋은 포도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와인공장에는 와인 3만 병 분량이 숙성 중에 있습니다. 연간 1만 병 정도를 병입해서 판매하는 시스템입니다.-제빵 시설은 어떻게 운영됩니까.처음에는 제빵사를 두었는데, 인건비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직원이 제빵 기술을 배워서 제빵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제우리밀영농조합법인과 업무 제휴, 우리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밀가루, 우리밀국수, 우리밀라면 등은 김제우리밀영농조합에서 가져다 판매도 합니다.-포도와 와인, 제빵체험을 비롯 체험행사가 많은데, 소개해 주시죠.포도와 딸기, 토마토, 배 등 과일을 직접 따는 체험을 비롯해서 와인 만들기, 곶감 만들기, 우리밀 쿠키 만들기, 우리밀 머핀 만들기, 피자 만들기, 잼 만들기 등 각종 체험행사가 다양합니다. 포도물염색 체험도 즐길 수 있고요. 4월말까지 포도나무 분양을 받은 사람은 여름 수확철에 4상자 이상의 포도를 직접 따갈 수 있습니다.특히 저희 농장에는 대한민국에서 하나 뿐인 명품 포도시험장이 있습니다. 세계 30개국 120개 품종을 한곳에 모았죠. 여름에 각양각색의 포도가 열리면 그야말로 예술이예요. 러시아 원산인 리자마트는 한송이에 3㎏이나 나갑니다. 호텔 식당에서 주로 사용하는 귀한 몸이예요. 이런 지구촌 포도들이 다 집합해 있어요. 청포도, 적포도, 검은포도, 알이 큰 포도, 알이 작은 포도, 고추같이 생긴 포도, 와인용 포도, 배추같이 생긴 포도 등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환상적이죠. 이곳에 마련된 평상에서 하룻밤 숙박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가 연간 고정고객 23만명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이 특별한 포도시험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도가 열리는 여름철에는 한 달에 8000명 정도의 손님만 받습니다.-포도밭에서도 하룻밤 잘 수 있는 거군요.황토방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 아래 마련해 놓은 평상에서도 모기장 치고 하룻밤 자고 가는 프로그램이 아주 인기입니다.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과원에서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누워 별을 헤면서 하룻밤 추억을 담아갈 수 있도록 마련했습니다. 이 곳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화장실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다고 자부합니다.-와인스파는 어떻게 운영합니까.황토방과 함께 와인스파가 있습니다. 와인스파는 탕에 와인을 넣은 것입니다. 와인에 항산화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서 와인스파를 하면 피부 노화방지 등 피부미용에 효과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피로회복에도 효과적이고요. 와인공장이 있으니까 운영할 수 있는 특별한 시설입니다.-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당국에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6차산업 사업화만 할 것이 아니라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 농민들의 인식 변화를 유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농민들이 자연스럽게 6차산업의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대훈 대표는 유기농 인증 '신지식인 1호''농사법 선진화' 주경야독김제시 백구면 부용리가 고향인 이대훈 대표는 이리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포도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를 졸업했다.그는 신지식인 1호다. 친환경포도 생산에 주력하는 그는 1999년 유기농 인증을 받았는데, 같은해 정부가 처음 시작한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 대표는 꾸준히 친환경 유기농산물 생산에 주력하고, 1996년부터 시작한 주말 체험농장 운영이 당국의 눈길을 끌어 신지식인 선정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이대훈 대표는 한 곳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혁신가다. 그는 혁신만이 어려운 농촌 현실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 끊임없이 농사법을 선진화했다. 1차 생산에 그치지 않고 가공 및 주말 체험농장을 운영하며 일찌감치 6차산업을 실천해 왔다. 농장 한켠에 잔디밭을 조성하고, 세계 120여 포도품종을 갖춘 하우스를 만들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포도밭에 평상을 설치해 고객들이 한여름밤 포도밭 추억을 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와인 제조기술을 배워 와인을 직접 담그고 관리한다. 와인용이라고 해서 흠결있는 포도는 수매하지 않는다. 최고 품질의 와인은 최고 품질의 포도가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끝〉

  • 기획
  • 김재호
  • 2015.03.20 23:02

영농법인 선농(주) 김삼곤 총괄이사 "사계절 관광객 모을 수 있는 '농업체험 시스템' 구축할 것"

정읍시 신태인면 천단오주길에 가면 사시사철 은빛 물결이 일렁인다. 배추와 무, 고추 등이 주로 생산되던 이곳에 20년 전부터 조금씩 늘어난 비닐하우스가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천단마을 일대에서 시작된 하우스는 인근 연정리와 오주리 쪽으로 퍼져 나가는 양상이다.이 거대한 비닐하우스 물결은 유기농 포도를 생산하는 비가림시설이다. 비닐하우스 사이에 해썹 인증 포도 가공시설도 있다. 관광객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펜션도 몇 동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커다랗게 세워진 천단유기농포도생산단지 간판 옆에는 지난해 정읍유기농체험센터가 준공됐다. 몇 년 전부터 농촌에 불어닥친 6차산업 바람이 이곳을 또 한 번 변신시키고 있다.영농법인 선농(주)가 전라북도와 정읍시의 지원을 받아 2012년부터 시작한 정읍 푸른웰팜 조성사업 이 한창이다. 이 사업을 통해 천단마을은 관광객들이 유기농포도는 물론 레드향, 체리 농장에서 영농가공 체험을 하고 하룻밤 묵으며 힐링할 수 있는 시설로 탈바꿈하고 있다. 농민과 도시민이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포도 위주의 작목도 레드향 등 현대인들의 미각에 맞는 과수작목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올 연말부터 레드향과 한라봉 등이 본격 생산되면 제주도로 가는 관광객의 발길을 이곳으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나들목이 10분 이내에 있고, KTX 정읍역도 근거리에 위치해 있는 등 사통팔달 교통 여건도 좋다. 천단마을의 6차산업을 총괄하고 있는 선농(주) 김삼곤 총괄이사(63)를 인터뷰했다.-천단 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토박이신가요.아니예요. 경기도 평택에서 시설원예 농사를 짓다가 1984년에 이곳으로 이사해 정착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평생 농사를 지었는데, 이곳에 온지도 벌써 31년이 됐네요.-개인적으로는 어떤 농사를 짓고 있습니까.이곳으로 이사와서는 양채류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낭패를 봤어요. 1990년대 중반에 우루과이라운드를 대비한다며 정부와 자치단체가 유리온실사업을 거창하게 벌였는데, 장수군 농가들이 유리온실 사업을 반납했어요. 그걸 정읍시가 가져와서는 저에게 권했어요. 다른 지역은 장관 빽으로도 못따는 사업인데, 당신은 그냥 준다는 데도 못하겠느냐고 해서 결국 자의반 타의반 하게 됐죠. 9억3000만원어치 네덜란드 구근을 들여다 유리온실에 심었어요. 전북무역을 통해 미국과 일본에 백합을 두 번 수출했는 데 그만 IMF가 터졌어요. 완전 거지가 됐어요. 참담했죠.-당시 정부가 유리온실 사업을 밀어붙였지만,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타격이 컸는데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습니까.우연찮게 폐유리 가공공장을 운영하게 됐는데, 밤잠 안자고 일인 다역을 하다보니 적자를 흑자로 돌릴 수 있었어요. 이를 기반으로 다시 농사도 짓게 됐죠. 지금은 포도, 레드향, 체리, 패션푸르츠 4가지 과일을 모두 생산하고 있습니다. 농사 규모가 2만평인데 레드향 4,500평, 포도 3,000평, 고사리 1,000평, 패션푸르츠 1,000평, 체리 5,000평, 연 2,000평, 고추 1,500평 등 다품종을 합니다. 주식으로 따지면 분산투자 개념이지요.-천단마을은 어떤 곳입니까.제가 1984년에 정착했을 때만해도 채소농사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유기농 농사도 불모지였고요. 하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유기농포도 1번지를 자부합니다. 실제로 국내 최초 과수 분야 유기농 인증 1호 마을이거든요. 현재는 대부분이 포도를 생산해요. 천단마을 33 농가가 9만평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 작목 전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 농가에서 체리를 6,000평 심었고, 레드향은 다섯 농가에서 9,000평, 패션푸르츠도 다섯 농가가 뛰어들었는데 3,300평 규모입니다. 물론 모든 농가의 과일은 유기농 방식으로 생산됩니다.-명성에 걸맞게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천단마을은 몇 년 전 전라북도의 농식품 6차산업화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유기농포도 생산으로 유명하다보니 당국의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천단마을에 신태인유기농포도영농조합법인과 농업회사법인 (주)아리울이 소재해 있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아리울은 무항생제 돈육 생산자입니다. 또 천단마을에는 과거에 신태인 소도읍가꾸기사업 일환으로 조성된 유기농포도체험센터와 숙박시설 등이 있었거든요.이를 바탕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농(주) 이라는 법인을 만들어 2013년도 농식품 6차산업화 사업에 응모했고, 사업자로 선정됐습니다. 도비와 시비, 자부담 등 총 35억원이 투입돼 정읍유기농체험센터와 숙박시설 등이 세워졌습니다. 이제 걸음마 단계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습니까.이 사업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보조금사업이기 때문에 일단 지난해 8월 건물은 준공됐어요. 하지만 사업의 성공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더라구요. 함께 일할 농민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고, 농민들도 관심이 부족한 상태였어요. 사실 농민들은 유기농포도 열심히 생산해서 완판할 만큼 잘하고 있거든요.하지만 6차산업에 초점을 맞추면 포도 하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많은 농가들이 사업에 참여해 소비자 요구에 걸맞는 다양한 작목을 생산하는 것이 기본적인 경쟁력이죠. 그래서 제가 이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후 시작한 것이, 농가들을 설득해서 사업에 참여시키고, 또 작목을 다양화하는 것이었습니다.-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천단마을은 유기농포도로 유명한 곳이에요. 선농(주)는 유기농포도와 무항생제 돈육을 합쳐서 6차산업화 사업을 계획했습니다. 할 수는 있죠. 그러나 이런 사업구조로는 미래가 불투명한 것은 물론 당장 사업을 꾸려나가기 조차 어렵습니다. 포도는 여름에 약 2개월간만 생산될 뿐입니다. 게다가 천단의 유기농포도는 백화점과 생협을 통해 완판되고 있어요. 돈육을 덧붙였지만, 영농 및 가공 체험 관광객을 사계절 유치할 수 있는 사업 구조는 아닌 것이죠. 저는 사계절 모두 도심 관광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영농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이 사업의 선결 과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농민의 참여와 경쟁력 있는 작목 도입이 관건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달랑 포도 하나 가지고 이 거대한 사업을 끌고 가서는 안되잖아요. 포도가 생산되는 여름 2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월을 뭔가로 채워야죠. 손님들이 계속 방문할 수 있는 만족할 영농 체험거리를 만들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선농에 발을 들여놓은 후 사계절 농업 체험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6개월간은 레드향, 레드향골드 등 오렌지 계통을 생산하고, 체리는 6-7월에 생산합니다. 포도는 여름에 주로 생산하고, 패션푸르츠는 연중 생산합니다. 이곳에서는 맛있는 과일이 연중 생산되는 것이죠. 포도 위주의 천단마을에 이 생산 시스템이 완전 구축되면 도시민 등 외부 관광객들이 연중 천단마을을 찾아 맛 좋은 유기농 과일을 접할 수 있고, 애초 6차산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포도농사를 안정적으로 짓고 있는 일반 농가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도전인데, 포도나무 뽑아버리고 레드향이나 체리를 심을 용기가 나겠습니까.과거에 포도는 여름철에 맛볼 수 있는 계절과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계절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됐습니다. 게다가 포도는 비가 많이 오면 썩고, 수확해 놓았는데 팔리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자칫하면 까치나 참새가 다 쪼아버리기도 합니다. 위험을 줄여줄 안정적 작목이 필요합니다. 이제 포도만 짓는 농사에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그래서 제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제 포도농장 7000평 가운데 4000평에 심어진 포도나무를 모두 캐내고 레드향을 심었습니다. 주식으로 보면 농사에도 분산투자가 필요합니다.-레드향, 레드향 골드는 감귤류로서 제주도나 일본 등 따뜻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인데 이곳에서 생산이 가능합니까. 또 추운 겨울철에 비닐하우스에서 생산하려면 유류비용 등 생산비도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요.감귤류는 이제 더 이상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과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몇 년에 걸쳐 조사하고 실험재배를 했습니다. 제주도가 아닌 이곳 천단에서 레드향, 한라봉 모두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재배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농업기술센터 관계자들이 제 농장을 수차례 방문했는데 모두 놀라서 돌아갔습니다. 하우스안에서 자라는 이곳 한라봉은 4월20일 무렵 개화하지만, 제주도 한라봉은 5월 중순에 개화합니다. 결국 천단마을 한라봉 수확이 제주도보다 30-40일 가량 빠르게 됩니다. 또한 이곳 과일 당도가 13브릭스에 달해 제주도 한라봉보다 월등합니다. 화산토에서 생산되는 제주도 과일보다 황토에서 유기농으로 생산되는 이곳 과일의 경쟁력이 훨씬 좋은 것이죠. 비닐하우스라서 겨울철 연료비 걱정을 하는데, 기술이 좋아졌어요. 3겹 하우스이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하우스 안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큰 추위가 없었던 지난 겨울의 경우 연료비가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농가들이 움직이던가요.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상당수 농가가 작목 전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패션푸르츠의 경우 지난해 한 농가가 심었는데, 올해는 다섯 농가가 참여합니다. 체리, 레드향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포도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죠.-레드향, 레드향 골드, 패션푸르츠, 체리는 과일로서 어떤 특징,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지난해부터 사람들을 만나면 눈을 감게 한 뒤 오렌지와 레드향 맛을 보도록 해 보았는데, 레드향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들 작목의 평당 소득은 포도에 비해 5-7배에 달합니다. 그동안 귤, 한라봉, 천혜향은 제주도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년 겨울부터 천단마을에서 레드향과 레드향 골드가 생산되면 서울 관광객들이 제주도가 아닌 이곳 천단마을로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호남고속철 정읍역은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 거리에 불과합니다.최근 체리는 사상 최대 수입물량을 기록했습니다. 소비자 기호가 변하고 있어요. 당도가 18-24브릭스가 나오거든요. 패션푸르츠는 겉이 보라색이고 조그만 계란형 과일이데, 속에는 올챙이 알같은 씨앗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숟가락으로 떠 먹거나 갈아서 주스로 먹죠. 지난해부터 수입됐는데 백화점과 마트에서 물건이 없어 팔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포도와 더불어 천단마을의 경쟁력을 높여줄 과일로서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가공과 영농 체험 시설, 숙박시설 등이 계획대로 갖춰졌고, 김 이사께서 지적한 문제점들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농산물 판매는 어떤 식으로 할 계획인가요.체험객 유치, 인터넷 판매, 기존 포도 판매처(생협, 풀무원, 현대백화점) 등 다양한 마케팅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필요하다면 아이스크림 등으로 가공 할 계획도 있습니다. 천단마을에는 과일 선별장과 해썹 인증 가공장이 시설돼 있거든요. 가공용 귤은 다루코라는 종자가 있는데, 안토시아닌이 다량 함유돼 있어요. 요즘 눈에 좋은 안토시아닌이 함유된 블루베리가 인기인 것 처럼 다루코 주스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체험객은 어느 정도 내방하고 있습니까.지난 1월에 300명 정도 왔는데 지난해에 비해 최근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지난해 준공된 체험시설에서 아이스크림과 소시지 만들기 체험을 하고, 영농체험 하우스 안에서는 레드향과 한라봉 따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연말에 레드향이 본격 생산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으로 봅니다. 모두 8개 객실(25평)이 준비돼 있는데 주말에 70%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천단마을은 유명 관광 여건을 갖춘 곳이 아니만 농민들이 차별화된 영농을 하면서 경쟁력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솔직히 6차산업으로서 천단마을 사업은 현재로선 걸음마 단계예요. 너무 서두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읍시와 선농, 그리고 천단마을 주민들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성공을 확신합니다.이 동네가 소비자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유기농 마을이기 때문에 힐링캠프라고 생각해요.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휴양시설로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제가 농장 옆에 있는 연 방죽을 메워서 분수공원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 때문이예요. 아이들이 여름에는 분수공원에서 물장구 치고, 겨울에는 썰매나 스케이트를 탈 수 있도록 만들면 사계절 사람들의 웃음 꽃이 만발한 천단마을이 될 것입니다. ● 김삼곤 총괄이사는 6차 산업 열정 대단한 '유기농 전도사'부안군 백산면 거룡리 용출 마을이 고향인 김 이사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를 따라 평택에 가서 살았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고등학교를 늦게 다닌 그는 방송통신대를 졸업할 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은 농부다.1984년 처음 천단마을에 정착, 양상추와 브로콜리 등 양채류 농사를 지었다. 평택에서 배운 유기농사를 지역 농민들에게 보급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1986년 어느날 갑자기 지역신문 기자가 불쑥 찾아왔다. 유기농법을 취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무허가 비료를 만들어 판매한다는 제보가 들어와 취재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가 유기농에 사용하는 효소 봉지를 농민들에게 보급하는 것을 본 어느 농약사 주인이 무허가라며 신문사에 제보한 것이다. 덕분에 그의 유기농 활동은 기사화됐고, 방송사에서도 다뤘다. 그는 1987년 전국 유기농협회 정읍지회를 전국에서 4번째로 만들었다. 천단마을을 비롯해 정읍지역의 많은 유기농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김삼곤 이사는 요즘 천단마을 6차산업의 효과를 어떻게 하면 극대화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다고 한다.서울 사람들이 천단마을 체험관광을 오겠다고 하면, 전용차량을 이용해 KTX정읍역으로 모시러 가는 체계를 갖출 생각이다. 서울 사람들이 레드향 체험하겠다고 하면 정읍역 가서 모셔와 체험시키고, 과일 바구니가 무거우면 택배 서비스를 제공한다. 소비자는 30% 정도 싸게 살 수 있으니 좋고, 천단마을은 과일 선별비와 상하차비 등 중간비용을 들이지 않아 이익이다. 게다가 한라봉과 레드향 등 감귤류를 제주도보다 1개월 일찍 생산할 수 있다.그동안 제주도 감귤 여행을 하던 도시민들이 발길을 돌려 천단마을을 찾게 되면, 전북지역의 관광 경쟁력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 기획
  • 김재호
  • 2015.03.06 23:02

완주로컬푸드 안대성 대표 "철저한 준비, 행정과 주민의 신뢰가 사업 성공 이끌어"

최근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완주로컬푸드는 6차산업의 모델을 제시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2012년 출범한 지 2년여만에 사업장이 3개(완주 용진농협 로컬푸드 제외)로 늘었고, 매출액은 200억 원에 육박한다. 지역 농민과 도심 소비자를 절묘하게 연결시킨 시스템과 노력의 결과다.지난 달 29일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입구에 자리잡은 완주로컬푸드 모악점에서 안대성 대표를 인터뷰, 6차산업의 성공 조건을 들어보았다.-안 대표는 완주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저는 경기도 수원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광고대행사를 다녔습니다. 열심히 했고, 승진도 해서 국장으로 일했어요. 2005년 무렵이었어요. 광고대행사 일하며 사는 것에 회의감이 들 무렵이었는데, 장수군에 귀농해 살던 대학 선배가 찾아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어요. 광고대행사에서 갈고 닦은 기획, 마케팅 등 저의 재능이 농촌에서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2005년 말에 내려왔는데, 최근 소양 문화마을 집을 사서 이사했습니다.-로컬푸드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요.제가 완주에 내려와서 처음부터 로컬푸드 일을 한 것이 아니예요. 저를 이곳으로 부른 선배는 2003년에 장수군으로 귀농했어요. 그 선배는 농업농촌 활성화를 위해 일하던 또 다른 선배를 장수에서 만났고, 그들이 장재영 장수군수 초선 시절부터 함께했죠. 제가 제안받았을 당시는 장수 거점산지유통센터(APC)가 문을 열 무렵이었어요. 유통 마케팅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췄으면서 나름대로 농업농촌에 대한 가치관이 남다른 사람을 찾던 중 기업 마케팅 홍보 전략 등을 기획해서 실행할 수 있는 저를 부른 것이죠. 그리고 2006년 12월에 선배들이 농촌문제 전문 컨설팅 회사인 지역파트너를 설립했는데, 이곳에 들어가 진안군 귀농지원사업 등 농업농촌 관련 용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완주와 인연을 맺은 것이죠.-그러면 완주군과 일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저희 지역파트너와 완주군이 연결된 게 2007년 여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완주군수가 농촌을 어떻게 하면 활기 넘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 것 같고, 담당 공무원은 당시 농업농촌활력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장수군을 방문해 농정기획단, 지역순환농업 등 성공 사례 벤치마킹에 나섰던 모양입니다. 그 때 장수군 담당자가 그런 일이라면 지역파트너를 찾아가 보라고 저희를 소개했던 것이죠.-실제로 완주군 담당 공무원이 지역파트너를 찾았군요.장수군에서 지역파트너의 전문성을 인정해 줬기 때문이죠. 지역파트너는 곧바로 완주군수에게 지역농업농촌 활력화 방안과 관련한 브리핑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지역파트너는 몇가지를 제안했는데요, 농정기획단을 만들자, 마을만들기사업을 하자, 농촌 노인 맞춤형 복지를 하자 등입니다. 예를 들어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농촌 복지의 경우 보일러 등 기술자와 영양급식전문가, 침 놓을 줄 아는 사람 등을 확보해 가가호호 방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농촌 노인 맞춤형 복지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봤어요. 저희는 장수와 진안 일을 해 본 경험을 토대로 완주군에 제안한 것이고, 판단은 완주군 몫이었습니다.-완주군에서 조건없이 받아들였습니까.저희가 브리핑한 다음날 완주군은 지역파트너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완주군 농업농촌활력사업 용역을 지역파트너가 맡게 된 것이죠. 완주군은 그 해 가을에 민원봉사과에 민원기동반을 만들었어요. 또 저희가 제안한 농정기획단도 만들기로 했습니다. 또 완주군에서 실무를 맡아 진행할 전문가 추천을 요청, 지역파트너 전문가 한 사람이 2008년 3월에 완주군에 계약직으로 채용됐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정책이 완주군 농업농촌 발전 약속프로젝트예요. 골자는 지역농업순환시스템 구축, 소농 고령농 유통 대책으로 로컬푸드 구축, 농가부채문제 해결, 마을회사 만들기, 생산적복지 차원에서 두레농장 만들기 등 5가지 입니다.-진통은 없었는가요.논란이 있었지만 2008년 하반기에 예산을 확보하였고, 비교적 차질없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2009년 말에 희망제작소와 MOU를 체결했고, 2010년에 약속프로젝트를 민간차원에서 진행할 수 있는, 행정과 민간의 중간조직인 지역경제순환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지역경제순환센터에 마을회사 육성센터, 로컬푸드 지원센터, 커뮤니티 지원센터, 도농순환센터, 공감문화센터 등 5개 기간조직이 만들어졌고, 거기에 민간인 전문 계약직이 채용됐습니다. 저는 마을회사 육성센터 팀장으로 합류했습니다. 이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완주군에도 정규 행정조직인 농촌활력과가 신설됐고, 마을회사육성계와 로컬푸드계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2010년 일입니다.-마을회사육성센터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로컬푸드 사업 대표이사를 맡게 됐습니까.마을회사육성센터에서 10개월 정도 일하다가 나와서 2011년에는 링크라는 컨설팅회사를 세워 전라북도 향토산업마을, 완주군 거점농업가공사업 등을 컨설팅했어요. 그러던 중 완주군이 농업회사를 만들어 로컬푸드를 총괄할 책임자로 저를 불러주었습니다. 당시 전라북도 6차산업에 완주군의 해피스테이션이 선정됐고, 저는 2012년 1월부터 농업회사 법인 준비단을 맡아 일했습니다. 6월에는 대표이사로 취임했습니다.-안 대표는 이 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2007년 완주와 인연을 맺고 일하면서 지역 사정에 정통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완주군 로컬푸드 사업 성공 요인은 뭐라고 보십니까.철저한 준비, 행정과 주민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준비단을 만들어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주로 무슨 일을 했습니까.로컬푸드가 타지역에서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 정책 대상이 되는 주민들을 재조직하지 않고 로컬푸드 사업을 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 행정단위에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그 분들은 조직화 돼 있지 않거든요. 저희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다니며 홍보하고 교육도 했습니다. 제가 대표이사 취임하기 6개월 전인 2012년 1월부터 준비단을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저를 중심으로 한 4명이 완주군 마을회관 전체를 다 찾아 다녔어요. 로컬푸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농가를 재조직하는 것이 준비단의 핵심 임무였거든요. 완주군 마을회사 100개가 소재한 마을을 제외한 347개 마을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연로하신 여러분이 직접 매장까지 나올 필요도 없고, 농사만 잘 지어 깨끗하게 다듬고 포장해서 마을회관 앞에까지만 가져다 놓으면 저희가 찾아가서 제품을 실어가고, 매장에서 판매한 뒤 대금을 1주일에 한번씩 각자 통장으로 넣어준다고 설명 했죠.-노인분들이 쉽게 수긍하던가요.열심히 설명하고 다니는데 어느날 면장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사기꾼이 돌아다니며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할머니들이 저희들 얘기를 들어보고선 저 사람들 말대로만 하면 참 좋겠지만, 과연 이게 될 일이냐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과거에는 없던 일이잖아요. 다행히 제 명함을 드리고 다녔기 때문에 곧 오해가 풀렸지만, 모든 주민이 저희 설명을 믿지는 않았죠.-그래도 지금은 많은 분들이 로컬푸드 매장에 물건을 보내고 있잖아요.처음 저희 설명을 들은 할머니들 상당수는 나 낼 모래면 하늘나라 갈텐데 돈 필요없어라거나 나 농사 안지어하시며 시큰둥했어요. 실제로 시골 곳간에는 참깨며 호박 등 수십가지 농산물이 쌓여 있지만, 소량이기 때문에 판매할 생각을 하지 않잖아요. 또 자식들이 찾아오면 싸 주고, 친척들 보내주고 해야 잖아요. 그런데 로컬푸드매장이 가동되면서 할머니들 반응이 달라졌어요. 로컬푸드 매장에 참깨, 메주가루 등을 팔아 돈을 번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놀다가 통장을 꺼내 보이며 자랑한 거예요. 나 저번에 로컬에 거시기 냈더니 통장으로 20만원 들어왔어 하는 식이죠. 시골 할머니들에게 20만원이면 큰 돈이잖아요. 다른 할머니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고 참여하시더라구요.-로컬푸드 직매장에 굉장히 다양한 제품이 진열돼 있는데, 몇가지나 됩니까.연중 500여 품목이 돼야 일상적인 시장보기가 가능합니다. 현재 농산물 300, 가공품 150, 축산물 50 품목이 진열되고 있습니다. 조합원이 1120명 정도 되는데, 농산물을 진열하는 분들은 기존의 농사방법을 바꾸고 있어요. 단일 품목을 대량 생산하는 농가가 로컬푸드 매장에 물건을 진열하면 해당 농가는 일부 품목만 팔고, 로컬푸드 매장은 다양한 품목을 진열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희는 기획생산 체제를 갖추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가들이 팔릴 만큼 계산해서 농사를 짓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죠. 소비자 밥상의 먹거리를 기획해서 생산해야 예측 가능한 농업이 됩니다.-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전 준비, 기획생산 체제 구축 등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2차 산업인 가공 쪽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습니까.로컬푸드 직매장에서 신선 농산물을 판매하지만, 매장에 농산물 가공품이 없으면 운영이 어렵습니다. 완주는 처음부터 마을만들기라는 단위 프로젝트만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마을만들기, 로컬푸드, 두레농장을 통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마을만들기 사업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지역 농산물 판매와 맞닿아 있고, 농산물을 제대로 많이 판매하려면 가공해서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이걸 동시다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로컬푸드와 마을기업 가공품을 연계해 진행하고 있습니다.-떡메마을, 학동마을 등 농산물을 가공하는 마을기업에서 생산한 제품을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판매하는 시스템이군요.저희는 농산물 가공을 기업이 아니라 농민이 스스로 하는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농산물 가공으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도 농민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농민이 가공의 주체가 돼야죠. 농민이 가공업체에게 원료만 제공하다보면 정작 농민 호주머니는 덜 두둑해지잖아요. 완주군 마을회사 정책이 농민가공을 촉진할 수 있는 여건과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각자 마을의 농업 여건을 활용한 가공 공장을 소규모로 짓게 한 것이죠. 이 마을은 콩농사 많이 짓고, 두부 잘 만드는 할머니가 있으니까 두부, 청국장을 만듭시다 하는 식이죠. 여기 로컬푸드 직매장에 나와 있는 가공품들이 그렇게 마을에서 생산된 제품들입니다. 2011년도에 고산에 들어선 거점농민가공센터 1호와 지금 구이면에 짓고 있는 거점농민가공센터 2호도 그런 시설입니다. 완주군 농민이라면 누구나 소정의 교육을 받은 뒤 자신이 생산한 원료를 가지고 거점가공센터에 가서 농산물을 가공 생산할 수 있습니다. 제조허가를 획득할 수 있게 군 차원에서 시스템을 만든 겁니다. 농민이 밭에서 생산한 깻잎 40장을 한묶음으로 포장해 판매하면 1,000원을 받는데, 깻잎 장아찌를 만들어 내놓으면 한봉지에 3,000-4,000원 받을 수 있습니다. 엄청난 차이죠. 현재 완주로컬푸드 매장 진열 상품 중 장아찌, 청국장 등 140가지 가공품이 그렇게 생산된 것들입니다. 저희 매장에 대기업 제품은 없습니다.-완주로컬푸드는 모악점 2층에 농가레스토랑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 음식점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가요.완주산 식재료만 가지고 조리한 음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레스토랑에는 해산물을 이용한 음식이 없습니다. 커피도 없습니다. 대신 생강차, 돼지감자차 등을 마련했습니다. 완주산 식재료만 사용한다는 신뢰성 때문에 고객이 찾아 주시는 것 같습니다.-음식은 누가 만듭니까.농가레스토랑이기 때문에 기본 컨셉이 농촌 전통밥상입니다. 그래서 완주에서 30년, 40년 살아온 주부, 할머니들이 주방에서 일합니다. 화학조미료 쓰지 않고 천연조미료만 사용하죠. 예를 들어 물엿 대신 조청을 쓰는 겁니다. 저희는 가장 건강한 식단을 추구하고, 그래서인지 여기만 오시면 마음껏 드신다는 손님들도 계십니다. 혈압, 당뇨환자분들 중에서 매일 오시는 분도 있고요.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완주로컬푸드가 성공하면서 전국에서 벤치마킹하는 등 관심이 높습니다. 타시군 관계자들에게 조언 한 말씀하신다면.완주는 로컬푸드직매장 단일프로젝트로 성공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중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다양한 지역 농정을 어떻게 재편, 지역농업을 활성화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 중의 하나가 로컬푸드이고, 또 그 중 하나가 직매장일 뿐입니다. 6차산업도 하나의 단일프로젝트로 접근하면 실패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지역농정을 통합적으로 재조정,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단기중기장기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농정 차원에서 수립했을 때 6차산업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농정을 통합적으로 재점검, 사업 방향이 정해졌다면 로컬푸드를 먼저 시작할 수도 있고, 마을만들기를 먼저 시작할 수도 있고, 협동조합을 먼저 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지자체가 로컬푸드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어려운 농업농촌문제 실타래를 푸는 첫 번째가 로컬푸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주 로컬푸드는 조합원 1120명 출자, 협동조합 전환 운영완주군에서 처음 문을 연 로컬푸드 직매장은 2012년 4월27일 문을 연 용진점이다. 완주군은 용진점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전주시 효자동 옛 동사무소 건물을 임대, 그해 10월 30일 효자점을 개점했다. 여세를 몰아 2013년 10월27일에 모악산 입구에 모악점을 열었다.모두가 성공적이었다. 이들 3개 로컬푸드 직매장 시절의 완주 로컬푸드는 완주군과 용진농협 등 9개 지역농협과 지역축협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제3섹터형 농업회사법인이었다. 그러던 중 협동조합형으로 전환 필요성이 제기됐다. 주주총회를 통해 협동조합 전환이 결정됐고, 출자금도 모두 돌려주었다. 새롭게 농가 등 1,040명이 출자, 7억 원의 자본금이 모아졌다. 2014년 1월20일 협동조합기본법에 의한 완주로컬푸드가 창립됐다. 완주로컬푸드와 용진로컬푸드도 이제는 협력관계일 뿐이지 별도의 법인체다. 완주로컬푸드는 효자점과 모악점, 그리고 2013년 1월29일 전주시 하가지구에 자리잡은 하가점 등 3개 직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도 1,120명으로 늘었다. 생산농가들은 다양한 품목을 출하한다. 1개 농가의 연평균 출하품목수는 40-50개다. 많게는 150 품목을 내는 농가도 있다.출하 농민의 70% 이상이 60대 이상 조합원이다. 이창영씨(67세)의 경우 지난달에 30여 품목을 팔아 84만 원을 벌었다. 그가 낸 품목은 감자 3개, 냉이 3개, 도라지 3개, 강낭콩 1개, 돼지감자 33개 얼갈이배추 9 봉다리 등 다양하다. 노지 생산이 많은 지난해 10월 이씨는 160만 원어치를 팔았다.로컬푸드제품은 농가가 직접 진열한다. 당일 팔리지 않고 남으면 수거도 직접 한다. 판매액의 10%는 수수료로 뗀다. 원거리 농가의 제품은 3대의 순회수거차량이 수거한다. 이 수수료는 3%다. 1일 고객이 모악점 700명, 효자 1500명, 하가점 650명 정도다.

  • 기획
  • 김재호
  • 2015.02.05 23:02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 엉겅퀴 국내 첫 재배 성공·건강식품화로 100억 매출 꿈

건강기능식품이 주목받으면서 약초류 재배 농가도 늘고 있다. 최근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수유, 홍화씨, 오가피, 헛개나무, 다시마, 청국장, 석류, 천마, 흑마늘, 민들레, 꾸지뽕, 울금, 돼지감자 등이다. 최근에는 산야에 자생하는 가시엉겅퀴가 간과 혈행 개선에 좋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30년 넘게 약초재배와 가공 사업을 하면서 최근 가시엉겅퀴 건강식품화에 성공한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이사를 지난 9일 만나 약초재배의 6차 산업화 가능성을 들어보았다. 심 대표는 지난 2005년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농업인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각종 특허와 표창장, 위촉장이 수두룩하게 걸려 있었다.-공장과 사무실을 둘러보니 심 대표께서 걸어온 길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약초 농사는 어떤 계기로 짓게 됐는가요.전주농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집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기계공장에서 실습생으로 3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는데, 제 인생을 걸만한 직장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약초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고 수박이며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을 지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실패했어요. 그러던 중 약초 농사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어요. -기업체 취직을 않고 농사를 선택했다면, 부모님 농사 규모가 꽤 됐던 모양이군요.아니예요. 아주 가난한 편에 속했습니다. 전답은 논 600평, 뽕밭 300평이 전부였어요. 다행히 학교 졸업 후 1년 정도 됐을 때 어머니가 탄 쌀계 자금으로 마련한 황무지 6000평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농사는 잘 됐는가요.누구나 성공을 하려고 시작하죠. 당시 저의 경우는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요. 농업의 성공요인이 토지, 자본, 기술인데 당시 저에게는 황무지밖에 없었어요. 수박 참외 생강 담배 등 다양한 농작물을 심었는데 다 망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심재석이가 하는 일은 다 망한다는 말이 들렸어요.-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그 때 떠오른 생각이 농산물은 생물 그대로 판매하면 부가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은 것을 찾았어요. 그 때 약초가 제게 왔어요. -주변에 약초 농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가요.당시 저는 4-H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날 장수에 사는 4-H 선배가 율무 농사를 권했어요. 율무는 토질이 좋은 땅에서는 웃자라는 문제가 있는데, 우리 땅이 황무지잖아요. 이제 막 개간한 땅에 율무농사가 제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당장에 시작했어요. 그 때가 1981년이예요. 율무 종자를 가져다가 개간한 밭 6000평 중에서 절반인 3000평에 심었는데 농사가 잘됐어요. 그렇게 약초농사에 입문했습니다.-작물마다 알맞은 토질이 있군요. 약초농사를 계속 확대했습니까.그래요. 율무를 생산하니까 약초상들이 생지황을 권했어요. 생지황을 생산하면 구매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듬해에는 율무와 생지황을 함께 재배했죠. 생지황은 율무와 달리 굉장히 까다로운 작목이었어요. 거름도 많이 줘야 하거든요. 이 때부터 약초 관련 서적도 뒤져가며 공부하며 지식을 습득했어요. 그러다보니 약초 전문가 대접을 받았어요. 당시 오수에는 약초농사 유경험자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약초, 약초 재배법에 대해 문의하는 상황이었고, 내친김에 오수면 소재지에 5평짜리 오수생약사업소라는 사무실를 냈습니다. 1982년 일이었습니다. 약초농사 초보 시절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있었구요.-율무와 생지황은 어떻게 해서 팔았습니까.생지황 농사를 지어 생것으로 팔면 이익이 별로 안나는데, 껍질을 벗긴 뒤 말려서 팔면 이익이 훨씬 많았어요. 그래서 오수생약사업소 한켠에 2평 짜리 건조실을 만들고 건지황을 생산했습니다. 저로서는 가공 판매의 시초였습니다. 가공사업이 좋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었죠.-그러면 율무와 생지황 생산 판매에 전념했는가요.아닙니다. 당시 임실 북부지역에서 독활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저도 독활 재배에 나섰습니다. 제 농사를 지으면서 주변 농가에서 재배한 약초를 수매, 전주에 있는 건재한약방 등에 납품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농가에서 약초를 수매 하고, 약재상에 공급하고, 수금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창피했어요.-아니, 뭐가 창피했습니까.전주지역 건재한약방에 100만 원어치 약재를 납품하면 수금하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어요. 건재한약방에 돈 받으러 가면 주인이 손님들 진료 본다며 1시간 넘게 기다리게 해놓고 찔끔 5만원, 10만원 주는 거예요. 동냥 주듯이. 너무 창피했죠. 야, 이거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광주로 뛰었어요. 광주는 200만 원 수금하는데 3개월 걸렸어요. 조금 지나니까 경쟁이 치열해지고 제값을 못받는 상황도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대구로 진출했어요. 블루오션을 찾아 도망가는 전략이예요. 당시 독활, 생지황, 건지황, 방풍, 우술 등 다양한 약재들을 취급했습니다. 마침 1988년 88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저는 5일에 한 번씩 대구를 갔습니다. 제가 대구에 공급한 약재는 부산, 서울, 영천 등지로 공급됐어요. 88고속도로 최고 수혜자는 저였습니다. 대구는 500만원을 2개월에 수금할 만큼 수금 여건도 좋았습니다.-약초 경기가 아주 좋던 때였군요.그렇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모든 경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한약재 가격이 최고였거든요. 모든 한약재는 생산해서 내놓으면 잘 팔렸어요. 국민들이 한의원을 많이 찾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합니다.심 대표가 독활을 생산해 대구까지 진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을 두고 우연의 일치였다라고 말하는 데는 뼈아픈 뒷얘기가 있었다.그는 1984년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느날 오수 농약사에 들렀더니, 주인이 수박농사를 권했다. 약초농사를 잘 짓고 있던 때였고, 몇 년 전에 수박농사를 실패한 경험이 떠올라 싫다고 했다. 그런데 농약사 주인이 제시하는 조건이 귀를 홀렸다. 농약사측에서 외상으로 자재를 지원하고, 수박 기술자를 지원하는 대신 심 대표는 수박농사 지을 땅과 인건비를 대면 됐다. 수익금은 나눠 가지면 된다. 심 대표는 자기 밭 6000평과 빌린 밭 3000평을 합해 모두 9000평에 수박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가뭄이 드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1억에 달하는 엄청난 손해를 봤다. 재산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손해였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엄청난 손해를 봤는데 어떻게 재기했습니까.세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심재석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아무도 빚을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수박농사로 망한 이듬해 제가 농어민후계자 자금 500만 원을 타게 된 것이죠.올곧게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융자금이었다. 농협은 빚이 많은 심대표에게 보증인 세 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절망했지만 친구 아버지 세 분이 보증을 서 주었다. 심 대표는 그 중 한 분의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 너를 보고 도장 찍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늬 눈을 보고 찍어 주겠다.-그 때 독활을 심었습니까.그래요. 1986년에 독활을 심었습니다. 독활은 심은지 23년만에 수확하는데, 절묘하게도 제가 독활을 수확하던 무렵부터 가격이 크게 올랐어요. 이 때 빚을 상당히 갚고 숨통을 틀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합니다.-심 대표가 당시에 공급한 독활은 어느 정도 규모였는가요.당시 전국 독활 생산량의 70%를 임실에서 생산했는데, 임실 생산량의 35%-40%를 제가 건조 가공 생산했습니다. 전국 생산량의 25% 정도를 제가 생산한 것이죠. 그러면서 제가 독활 전문가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수확한 독활을 잘 다듬은 다음에 껍질을 벗겨 건조해서 절단, 건재한약방에 출하했는데요, 서울과 경상도에서 1등급 대우를 받았습니다. 전국에서 제 얼굴은 몰라도 심재석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였습니다.-그렇게 약초 사업을 잘 해 나갔는데 왜 건강기능식품쪽으로 전환했는가요.1990년 무렵까지 약초는 돈 버는 농사였어요. 그러다보니 약초 공급 과잉이 초래됐어요. 독활 한가지만 가지고는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작약을 선택했습니다. 1992년 임실군에 작약전문재배단지를 유치했고, 임실 농민들이 작약을 많이 심었죠. 저도 임대 농장에 3만평을 심었어요. 그 때 제 약초농사는 독활 등 6만평에 달했어요. 하지만 실패했어요. 1996년에 작약을 생산할 무렵인데 수입 개방을 틈타 중국 한약재가 많이 들어왔고, 가격이 요동쳤거든요. 약초 농사에 위기가 닥친 것이죠. 그래서 바꿨습니다. 2000년에 한약생산시설을 모두 없애버리고 건강식품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건강식품으로 전환한 뒤 농장과 공장은 어떻게 변했습니까.소비자들에게 건강식품으로 친숙한 쑥에 주목했습니다. 농장에 쑥을 심고, 인진쑥 엑기스를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또 다슬기 엑기스를 생산했어요. 사람들이 간 건강에 좋다며 다슬기 먹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죠. 저는 평소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죠. 옆과 뒤, 그리고 속에 뭐가 있지? 그것을 알려면 연구를 해야 해요. 그래서 원광대에 다슬기 성분 의뢰를 했어요. 술 마신 사람들이 간과 위에 좋다며 다슬기를 즐겨 먹는데 왜 그런지 규명해 달라고 했지요. 다슬기에 아스파라긴산이라는 핵산이 많은데, 간이 섬유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결과를 받았죠. 특허 출원하고 논문발표하고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우리회사 장수 제품이 2가지 있는데, 인진쑥엑기스와 다슬기엑기스입니다.-쑥과 다슬기, 산수유, 돼지감자 등 수많은 건강식품을 생산해 왔는데, 요즘은 가시엉겅퀴를 개발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가시엉겅퀴 상품은 어떤 계기로 개발하게됐습니까.저는 그동안 약초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농촌진흥청 특작부 명예연구관으로 활동하고, 아젠다 연구과제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하고 했어요. 농업인 중에서는 꼭대기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약초, 건강기능식품 전문가인 제가 정작 심재석이라는 이름을 걸고 개발한 히트상품이 없더라구요. 남들이 무주 천마 개발해 히트치니까 따라서 천마제품 만들었고, 의성에서 흑마늘 만든 것을 보고 흑마늘 만들어 팔았어요. 그렇게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이 창피했어요. 내가 죽기 전에 이름을 걸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꾸준히 준비해 왔습니다.-엉겅퀴 효능은 어떻게 알았습니까.엉겅퀴가 몸에 좋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주목하지 못했죠.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매년 가을이면 엉겅퀴를 캐서 감주 등을 만들었어요. 겨우내 아버지가 드실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그러면 지게질 많이 하시는 아버지가 이듬해에는 허리나 어깨 아프다는 말씀을 덜 하셨어요. 그 때 어머니 말씀이 엉겅퀴 한 가마니면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운다고 하셨는데, 옛날부터 엉겅퀴는 관절염이나 허리 아픈데 효험이 있다고 전해왔다고 해요. 그 생각이 떠올라 엉겅퀴 사업화를 계획한 것이죠. -엉겅퀴는 인공재배가 매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저는 2007년부터 엉겅퀴를 연구했습니다. 산야에서 채종, 발아실험도 많이 했어요. 농사 경험이 많은데도 잘 안됐어요.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엉겅퀴 재배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재배방법이 없었거든요. 시행착오가 무지하게 많았지만, 지금은 멸종위기 엉겅퀴를 국내 최초로 재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연구 과정, 효능은.엉겅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재배기술과 엉겅퀴 효능을 규명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해 왔는데, 저의 엉겅퀴 연구가 농촌진흥청과 지식경제부의 국가연구과제에 선정됐기 때문에 그 지원금으로 모든 것을 원활히 할 수 있었지요. 야생 종자 발아율이 5%도 안되기 때문에 직파, 멀칭, 포트육묘이식 등 다양한 재배를 하며 연구했습니다. 그동안 전북대 식품영양학과, 의학전문대학원, 수의과대학, 전주대 대체의학과 등과 함께 효능 연구, 제품 개발 등을 진행했습니다. 엉겅퀴가 혈전을 없애고, 간 기능을 개선하며 관절염과 요통에 탁월하다는 등 7개 논문이 학회지에 발표됐습니다. 엉겅퀴 엑시스와 차, 파스, 크림 등 제품이 5개 정도 됩니다.-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엉겅퀴로 1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싶습니다. 또 꽃이 예쁜 엉겅퀴 농장을 대단위 체험 관광농원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엉겅퀴 농장은 꽃이 피는 56월에 너무 아름답습니다. 체험 관광농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임실은 산림이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실에 300만 평 정도의 엉겅퀴 농장을 조성하면, 임실 목장과 치즈 등 유가공산업 등과 연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갖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심재석 대표는 약초농사 야심찬 도전, 가공판매 사업수완 뛰어나심재석 대표는 전주농고를 졸업한 뒤 농촌 고향마을에서 4-H활동을 하며 약초 농사로 성공을 거뒀다. 일찌감치 농작물 생산에 그치지 않고 가공판매에 눈을 떴다.1980년대 독활을 재배해 큰 성공을 거뒀고, 1990년대 중국산 수입 약초가 범람하자 건강기능식품으로 사업을 전환하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요즘 심 대표는 엉겅퀴에 빠져 있다. 고교 졸업 후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6000평의 농장 등 1만 5000평에 엉겅퀴를 재배하고, 이웃 주민 계약 재배 면적도 1만 5000평에 달한다. 간과 혈관 건강에 좋다고 규명된 엉겅퀴가 현대인들의 100세 시대를 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심 대표는 농촌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지난 30년을 달려왔다.그는 사업은 퍼즐 맞추기라고 했다. 퍼즐이 제대로 맞춰지면 성공이지만, 조금만 어긋나도 실패하듯 사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가 율무와 생지황, 독활을 재배할 때는 퍼즐이 잘 맞았지만, 작약을 재배했을 때는 퍼즐이 어긋났다.이번 엉겅퀴 재배 및 제품화는 심 대표의 야심찬 퍼즐 맞추기 도전이다. 재배방법을 체계화하고, 성분과 효능을 규명해 제품까지 내놓았으니, 이번 퍼즐 맞추기도 일단 성공적이다.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꽃이 아름다운 엉겅퀴 농원에서 임실 최고의 엉겅퀴 축제를 열어 해마다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작년에 오수면과 지사면 일대 산 10만여평에 엉겅퀴를 뿌려봤는데 실패했다. 그만큼 예민한 것이 엉겅퀴 재배다. 햇빛 잘 들고, 땅심도 좋은 적지를 선정해 다시 도전할 것이다.

  • 기획
  • 김재호
  • 2015.01.20 23:02

완주 운주면 삼삼농원 강성룡 대표, 블루베리 생산·가공에 로컬푸드·체험관광 연계까지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원고당에서 블루베리 농장을 운영하는 강성룡씨(48)는 생산과 가공을 바탕으로 체험농장, 체험관광을 연계하는 6차 산업화에 진력하고 있다.그가 체험 농장과 관광을 접목한 6차 산업 아이디어를 낸 것은 농장의 유리한 입지 조건 때문이다. 완주군 운주면은 대둔산 턱 밑에 자리잡은 산골이다. 강 대표의 블루베리 농장은 더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농장과 가공장이 있는 고당리는 꼬불꼬불 금고당계곡길을 따라 10㎞ 이상 더 들어가야 한다. 운주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우뚝 솟은 대둔산 가는 길을 외면하고, 우측으로 뻗은 길이 금고당계곡길이다. 일명 피목골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불과 얼마 전까지 비포장길이었다. 겨울철인데도 계곡물은 적정 수량을 유지하며 흐르는데, 운장산을 모산으로 하는 주변의 선야봉(해발732m) 등에서 흘러든 물이 모여 그야말로 명경지수다. 계곡 주변은 여름철 대표 휴양지를 보여주는 시설, 펜션 등이 빼곡하다. 여름철 인기 관광지다.-이곳은 여름 피서지로는 인기 있겠지만 농부가 농사 짓고 살기도 힘든 여건인데, 원래 어떤 농사를 지었는가요.표고농사를 지었지요. 아버님때부터 짓던 농사인데, 제가 이어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원고당 마을)은 하우스 농사 지을 만큼 농경지가 충분하지 않아요. 겨울에는 춥고. 그래서 2000년에 운주면 소재지인 장선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장선리와 고당리를 오가면서 농사를 짓습니다.-아버님이 이 곳에서 표고농사를 지었군요. 그러면 강 대표는 언제부터 직접 표고농사를 했습니까.고등학교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표고농사를 지었으니까, 저도 농사 경력이 30년이나 됐네요. 표고를 키우는 참나무 토막을 기준으로 최고 3만주까지 했어요. 참나무에 구멍을 뚫고 균주를 심는 데, 저는 1주당 4050개를 심었습니다. 요즘은 균주 구멍을 최대한 많이 뚫더라구요. 그래야 품질 좋은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합니다.-생산량은 어느 정도인가요.3만주에서 한 해에 약 56톤 정도 땄습니다. 그런데 그만 뒀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그 정도면 소득이 괜찮았을텐데, 작목을 바꿀만큼 농사일이 힘들었습니까.표고버섯 4㎏에 2만원 정도 받았으니까 소득이야 나쁘지 않았죠. 그런데 표고농사도 참나무 원목가격, 균주가격, 하우스 설치 등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듭니다. 참나무 1주당 4000원 정도, 균주는 인건비까지 합하면 1주당 70008000원 정도 들어가거든요. 게다가 초기 투자 후 1년 6개월 기다려야 첫 수확을 하기 때문에 자금 회전이 느려요. 농사 지으면서 이것 저것 조금씩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고요. 그런 것들이 어려웠죠.-그러면 무슨 작목으로 전환했습니까.2000년에 깻잎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깻잎농사는 노동력이 많이 들고, 일도 힘 들었어요. 그러던 중 배지 표고버섯 재배가 힘이 덜 들고 수확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는데, 솔깃 했죠. 일이 쉽고, 자금회전도 좋은 장점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냥패를 봤어요. 1억 정도를 까먹었으니까요.-큰 손해를 봤군요.배지 표고버섯 농사는 배지를 구입해 톱밥 같은 곳에 심으면 짧은 기간에 수확할 수 있고, 처음 시작할 무렵만 해도 가격이 괜찮았어요. 4㎏ 한 박스에 7만 원까지 갔었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시세가 떨어져버렸어요. 2004년 무렵부터요. 불과 2000원3000원 했어요. 제값을 받아보려고 노력해지만,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전국이 똑같더라고요. 배지 표고버섯은 맛이 좋은 반면 물로 크기 때문에 저장성이 없고, 이 때문에 시장에서 알아주지 않은 거예요. 수요가 급감하고, 가격이 폭락한 것이죠.-배지 표고버섯 가격 폭락이 작목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군요. 지금은 블루베리를 하고 있는데, 블루베리 농사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습니까.표고와 깻잎 농사를 병행하다가 2008년에 블루베리로 완전 전환했는데, 2005년 무렵에 농촌진흥청에서 하는 영농교육에 갔다가 우연히 무주 블루베리 생산농가를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 분이 요즘 블루베리가 뜨는 작목이고, 재배해보니 괜찮다고 권했어요. 항암성이 뛰어나고, 눈 건강에도 탁월하다는 말이 귀에 쏙 박히더라구요. 당시 그 분도 블루베리를 심은 지 3년 정도밖에 안됐고, 수확한 생과를 조금씩 판매하던 때였지만, 저도 따라 해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배지 표고버섯 농사에 뛰어들었다가 워낙 혼쭐이 났던 때여서 블루베리가 더 끌렸는가봐요.-묘목은 어디서 구입했는가요.무주 농가에서 묘목도 가져오고, 재배기술도 배웠습니다. 운주에서 무주가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열심히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는가요.블루베리 묘목은 2006년 봄에 심었어요. 그해 4월에 1000주를 가져다가 고당리 밭 600평에 심었어요. 조금 밀식한 것이죠. 묘목 가격이 1주에 2만5000원에 달할 만큼 비쌌기 때문에 실패 위험을 분산해야 했고, 또 한꺼번에 블루베리로 전환하면 다른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잘 커 주었고, 첫 수확은 2009년 6월부터 했습니다.-그동안에는 깻잎 농사를 지었겠군요.깻잎 등 여러 작물을 병행했습니다.-전체적으로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총 2500평인데, 블루베리를 하면서 깻잎은 600평 정도만 심었고, 나머지는 콩 등 여러 작목을 심었습니다. 지금은 블루베리 농사만 짓고요. 제가 생산 판매하는 농산물은 블루베리와 곶감인데, 곶감은 자체적으로 감나무 농장이 없기 때문에 감나무를 임대해서 곶감만 생산하고 있습니다. -블루베리 판매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처음에는 생과 위주로 판매했는데, 일반 대중화가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생과 판매도 어렵더라구요. 블루베리가 뭔지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어요. 하지만 첫 해에 완판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그동안 성과를 들려주시죠.2006년에 심어 2009년부터 수확하고 있는데, 처음 600평에 심은 1000주에서 500㎏의 블루베리 생과를 땄습니다. 이 때만해도 가격이 1㎏에 45만원했기 때문에 저는 그야말로 대박터뜨린 겁니다. 엄청나게 기분이 좋았죠. 그동안 수많은 일을 저질렀는데, 이제야 제대로 성공했구나 싶었습니다.-평당 4만 원 정도의 수확인데, 대단합니다. 언제부터 블루베리 재배를 늘렸습니까.생산성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늘렸죠. 2010년도에 2000평에 2000주를 더 심었습니다. 평당 1주가 적당하다고 하더라구요. 이 때 심은 것은 지난해부터 본격 수확하고 있습니다. 블루베리 수확은 6월 20일경부터 한달 정도가 철인데, 2013년에 6톤 정도 수확했고 올해도 비슷합니다.-이제 생과로만 판매하기는 너무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군요.처음 블루베리를 생산했을 때는 완창정보화마을 홈페이지에 올려 팔았어요. 생소한 탓에 판매는 시원찮았어요. 결국 지인들 위주로 판매를 했고, 모두 판매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농협사이트, 정보화사이트 등에도 올렸는데 여전히 판매 부진이었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유통업자를 소개받아 거래했는데,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정작 판매대금을 받는데 어려움이 컸습니다. 지금은 거의 받았지만, 이제 유통업자라면 다시 쳐다볼 만큼 질렸습니다. 이제 선입금하지 않으면 물건을 주지 않고 있어요. 유통하시는 분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라고 생각해요.- 삼삼농원, 내눈애 블루베리라는 브랜드를 붙여 판매를 하고 있던데요. 언제부터 사용하고 있습니까.삼삼농원이란 이름은 표고버섯할 때도 없었어요. 2005년에 운주면 장선리에서 장아찌 사업을 하려고 공장을 짓고, 절을 찾아가 스님에게 작명을 요청해 받은 것이 삼삼농원입니다. 스님이 장아찌니까 삼삼하다는 의미, 느낌을 넣어 지어준 것이죠. 하지만 결국 장아찌 사업은 못했어요.-장아찌 사업도 했군요. 그런데 왜 잘못됐나요.당시 저는 칡순, 질경이, 당귀 등 약이 되는 식물로 만든 장아찌를 개발해 사업화에 나섰는데, 군민 행사 등에 시식용으로 가지고 다니며 홍보도 많이 했고, 소비자 반응도 좋았어요. 그래서 2005년에 공장하려고 건물 짓고, 생산시설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허가를 받으려고 행정기관을 찾았더니 해당 부지가 하천정비구역으로 묶여 있는 거예요. 허가 낼 수가 없었어요. 제 땅이 하천 옆에 있기는 했지만, 이런 문제가 있는 줄은 부지 매입 당시부터 전혀 몰랐거든요. 제가 이곳에 살아오면서 이 일대를 하천정비구역으로 묶는다는 주민 공청회도 들어본적이 없었구요. 사실 여기 고당리 블루베리 가공 공장도 장선리 장아찌공장 자리에 하려고 했는데, 허가를 얻을 수 없으니까 어쩔 수없이 산골짜기인 고당리에 지었어요. 이래 저래 손해가 막심한 상황입니다.-블루베리 생산에서 가공으로 사업이 진일보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2012년도에 전북도 농업기술원 공모사업(고소득 지역특색 벤처농업 육성사업)에 저의 슈퍼푸드 블루베리 상품화 사업이 선정됐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소형 중탕기를 이용해 블루베리 즙을 내 지인들에게 판매했는데, 아주 소량이었어요. 2011년, 2012년에는 생산량이 훨씬 늘어났기 때문에 생과로만 판매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 무렵에는 가공을 해야 했어요. 블루베리를 수확할 때 발생하는 비상품 생과도 30%에 달해 골칫거리였거든요. 이 때 마침 전북도 농업기술원의 공모 사업이 있었고, 제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2013년에 시설을 했던데, 고소득 지역특색 벤처농업 육성사업은 어떤 사업입니까.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늘어나면서 농업 농촌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농업 농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당국이 농업인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블루베리의 경우 처음에는 생산량이 많지 않았지만, 요즘은 크게 늘었고, 그래서 가격이 하락 추세입니다. 제가 구입할 당시 묘목값이 2만5000원이었는데 요즘은 5000원, 1만원 정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제 생과 물량을 적정 유지하면서 가공 제품을 늘려야 재배 농가가 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강성룡 대표가 블루베리를 심었던 2007년 무렵 국내 블루베리 재배면적은 112㏊에 불과했다. 하지만 꾸준히 늘어 2010년 534㏊, 2011년 1082㏊로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할 때 도내 블루베리 농사 규모는 253.5㏊이고, 완주군에서만 57농가가 18㏊에서 18톤의 블루베리를 생산했다. 생과 가격도 1㎏에 1만5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1만 원 수준만 유지해도 경쟁력이 있다고 하지만 생산농가로서는 뭔가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어떤 지원을 받았습니까.총 사업비가 1억2500만원이예요. 국비 5000만원, 군비 5000만원이고 나머지는 자부담입니다. 지난 한햇동안 고당리에 블루베리 가공작업장 50㎡, 블루베리 보관 냉동창고 33.6㎡를 짓고, 이 곳에 추출기, 포장기 등 9종 10대의 가공 장비를 구축했습니다. 이 곳에서 블루베리 잼과 파우치 음료, 드레싱 등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내눈애(愛) 블루베리라는 브랜드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습니다.-가공, 체험농장 등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농업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인데, 강 대표께서는 이런 정보는 어떻게 취득했는가요.농사를 지으면서 농업경영인연합회 사무국장, 부회장 활동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농업인, 농기센터 직원 등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죠.-가공사업을 하려면 까다로운 위생 조건도 맞춰야 할텐데, 해썹(HACCP) 인증 등은 받았는지요.그 부분이 조금 아쉽습니다. 블루베리 가공제품이 해썹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당국의 고시가 지난해 7월에야 있었어요. 2019년까지 유예기간을 거친 후 2020년부터 적용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죠. 다만 조금 일찍 고시가 됐으면 제가 지난 2013년에 시설할 때 해썹 인증을 전제로 시설을 했을텐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케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해야 합니다.-강 대표는 현재 완주군 로컬푸드 가공식품 생산자협동조합 대표를 맡고 있는데, 어떤 조직인가요.말 그대로 지역 농민들이 각자 생산한 친환경 농산물을 보다 손쉽게 가공, 판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현재 완주군 봉동에 시설하기 위해 부지 선정 중에 있고, 해썹 인증 등 가장 위생적인 가공시설로 만들 것입니다.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일단 연간 10톤 이상 생산작목에 한정할 계획이고, 이 곳에서 생산한 가공품은 마트 등에 대량 공급할 것입니다. 완주군 로컬푸드, 농협로컬푸드 매장과 농협 인터넷사이트 등 온라인을 통해서도 판매할 계획입니다.-강 대표는 생산에서 가공단계로 올라서며 매출 구조가 훨씬 좋아졌습니다. 향후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제 사업을 용진 로컬푸드와 연계해 체험 숙박 사업까지 할 계획입니다. 관광 피서지인 금고당 일대에서 1박2일 체험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죠.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블루베리 수확, 가공품 만들기, 금고당 피목골 일대 물놀이와 등산 등 활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계획입니다. 삼삼농원 주변에 아름다운 폭포(용 둠벙)와 험하지 않은 등산코스가 있기 때문에 여건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숙박 시설은 금고당 일대에 민박 펜션 시설이 많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봅니다. -삼삼농원 인터넷 홈페이지는 구축이 됐습니까.사실 제가 바쁜데다 관리하기도 힘들어서 아직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농업기술센터 강소농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와 인터넷 마케팅을 배울 생각입니다. 1월부터 배워서 블로그를 만들고, SNS마케팅을 강화활 계획입니다.● 강성룡 대표는 산골 토박이 농사꾼부친 표고농사 고교 졸업 후 물려 받아운주면 고당리가 고향인 강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표고농사를 지었다. 고향 마을이 산골짜기여서 농경지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표고농사가 제격이었다. 하지만 표고농사를 벗어나 생산성이 좀더 좋은 작목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먹는 깻잎농사도 하고, 배지표고버섯농사도 지어보았다. 산골의 특성을 살려 기능성 건강 장아찌를 개발, 사업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고농사를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몇가지 일들은 큰 성과가 없었다. 배지표고는 오히려 뼈아픈 손실을 안겼다.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접한 블루베리 농사가 그에게 힘을 주고 있다.수확철에 노동력이 많이 드는 것이 단점이지만, 가지치기와 잡초 제거만 잘 하면 크게 힘들지도 않다. 생산량과 단위면적당 소득이 기대 이상인데다 최근에 생산하고 있는 블루베리 가공 제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이 좋다. 이제 강대표는 블루베리 수확 및 가공 체험과 숙박 관광 프로그램을 접목하려고 한다.강 대표는 농촌이 활력을 되찾으려면 6차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농업인들의 관심이 부족한 현실이 아쉽습니다라며 정부가 농업 농촌을 살리려면 농업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좀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재호
  • 2015.01.06 23:02

고창 '손맛 영농조합법인' 정연미 대표, 직접 지은 농산물로 반찬 만들어 믿음 가득한 먹거리 판매

세상은 누구에게나 독자적인 사업 기반을 마련할 기회를 제공하고, 그 기회를 실현할 창업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하지만 아무나 창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창업하는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창업을 성공 신화로 이끄는 사람에게는 위대한 정신이 있다. 숱한 어려움을 돌파하고, 자신의 파이를 넓혀가는 재주가 탁월하다. 누가 뭐라해도 현대 정주영, 삼성 이병철, 애플 스티브 잡스 회장 등은 특별하고 위대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창업은 도시에서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근래 자유무역협정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농촌에서도 창조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창업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도시민을 대상으로 한 농산물 직거래 판매, 계약 재배 판매, 농산물 가공 판매, 농촌 체험, 농촌 관광 등을 바탕으로 사업화하는 농업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하지만 창업은 신나는 도전이면서 여전히 넘기 힘겹고 두려운 산인 것이 사실이다.정읍시와 고창군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메이플-스톤 공동체 지원사업에서 우수 창업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이제 첫 발을 떼고 있는 마을기업 손맛 영농조합법인(이하 손맛) 정연미 대표(45)를 지난 17일 고창군 아산면에 위치한 고창여성농업인센터 사무실에서 만나 창업 과정과 성공을 향한 의지를 들어보았다.이날 고창을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는 폭설이 내렸지만, 고창여성농업인센터의 꾸러미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산과 무장 일대에서 농산물을 가져온 여성 농업인45명이 모여 꾸러미 상자에 농산물을 정성스레 담고 있었다. 단단히 포장된 이 꾸러미들은 택배를 통해 다음날이면 회원 식탁에 오를 것이다.-손맛은 소규모 반찬류 가공공장인데, 여성농업인들에게 적합한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창업을 하게 됐습니까.지난 2010년 고창여성농업인센터가 하는 꾸러미 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농촌에서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꾸러미 사업은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은 물론 식혜, 된장, 고추장, 파김치 등 집에서 여성 농업인들이 직접 만든 농산품을 정해진 규격 단위로 포장, 판매하는 사업이예요. 꾸러미 사업에 참여하면서 농식품 가공 사업장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여성농업인들이 가정에서 직접 만든 농산품을 소포장 꾸러미로 판매하는 것인데 시설비 투자가 부담스러운 가공 시설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어느날 꾸러미 작업을 함께하는 분이 다른 곳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했어요. 꾸러미 반찬류를 대상으로 식파라치가 신고를 했고, 꼼짝없이 벌금을 물었다는 거예요. 저희는 순수하게 가정에서 만든 것을 판매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식파라치들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 것이죠. 소규모 반찬류지만 위생 가공해야 모든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누가 창업 아이디어를 냈습니까.꾸러미 작업 동료들 사이에 가공 시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이 돼 있었는데, 제가 지난해 말 정읍시와 고창군이 공동으로 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를 세워 공동체 사업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안했어요. 모두가 의기투합, 한번 해보자며 나섰지요.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는 지난해 10월 정읍시와 고창군이 공동으로 만든 행정과 주민의 중간 지원조직이다. 주민이 주체가 되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 사업을 발굴 육성하고, 지속 발전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농림축산식품부와 지역발전위원회가 주관한 2013년 기초생활권 연계협력사업에 2013년 5월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사업에는 2015년까지 3년간 국비 14억9000만원, 정읍시 1억3000만원, 고창군 3700만원 등 총16억57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메이플은 정읍단풍, 스톤은 고창고인돌유적지를 지칭한다.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는 마을단위와 3인 이상이 공동으로 창업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업 신청자들은 한달간 창안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광역창안대회에서 범위에 들면 1단계 사업비 300만원을 받고, 2단계 사업비는 3000만원 이내에서 지원받는다.-그래서 사업공모에 응했습니까.사실 저도 40대 중반이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한 상황이기 때문에 뭔가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거든요. 남편이 원예 관련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봐 왔고, 이런 저런 고민도 해봤고요. 그래서 농사도 시작했고, 꾸러미 사업에도 동참했거든요. 마을이든 창업이든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가능하고, 마침 꾸러미 동료들 대부분이 찬성했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신청했습니다.-잘 됐습니까.꾸러미 동료 34명과 함께 창안학교를 열심히 다녔어요. 교육받는 과정에서 사업계획서를 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아 300만 원을 지원받았어요. 300만 원을 가지고 사업계획서대로 4월부터 8월까지 추진했어요. 선진지 견학, 사업화할 반찬 종류 정하기, 표준 조리법 개발하기 등 저희가 만들어 제출한 사업계획서대로 진행한 것이죠. 도시 소비자들에게 설문지도 돌렸어요. 열심히 뛰었죠. 이 평가에 26개 팀이 참가했는데, 평가 결과 우리 손맛이 1등을 했어요. 그래서 3000만 원을 더 지원받게 됐어요. 너무 기뻤지요.-첫 도전에서 1등을 했으니 그 기쁨을 말로 형언하기 힘들었겠습니다. 지원금 3000만 원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300만 원을 지원받아 수행한 과제가 뿌리단계였다면, 3000만 원을 지원받아 하고 있는 지금 단계는 줄기단계예요. 저희가 처음 목표했던 가공시설을 보유, 가동하고 생산하는 단계로 가는 것이죠.-3000만 원으로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시설까지 하려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사실 자부담이 있지만, 3000만원을 지원받아서 식품 가공시설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는 자금력이 부족한 현재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뭔가를 고민했고, 이런 방법을 세웠어요. 제가 사는 동네 옆에 있는 반암정보화마을에 반암권역사업으로 세워진 식품공장이 하나 있어요. 신선식품이라는 한과 제조공장이죠. 그런데 신선식품은 한과만 만들기 때문에 1년에 2개월 정도밖에 공장을 가동하지 않아요. 정부 보조금을 들여 세운 소중한 공장인데, 1년 중 10개월 가량 놀리는 것이 아깝잖아요. 그래서 저희와 신선식품이 협약을 맺고, 반찬류 생산에 필요한 몇가지 시설을 추가한 뒤 다양한 가공식품을 생산하게 된다면 국가적 낭비도 없고, 여러면에서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군청에서는 처음 이중보조 문제 소지가 있다며 꺼려했는데, 저희가 사업장을 따로 만드는 등 조정을 거쳐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신선식품 공장에서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는 중입니다.-신선식품 쪽 반응은 어땠습니까.신선식품은 노령 인력 위주로 한과를 만들거든요. 지역의 젊은 인력이 참여해 다양한 반찬류를 가공 생산하면 신선식품에도 여러 가지 도움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다행이군요. 그 과정에서 따로 사업장을 냈다고 했는데, 무슨 시설인가요.이곳은 고창 읍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아산면이잖아요. 어차피 읍내 쪽 홍보도 필요하기 때문에 고창읍 현대아파트 상가에 홍보관 겸 판매장을 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저희가 3단계로 계획을 세운 농가식당으로 진출, 부가 수익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희 농산물을 이용해서 고창스러운 맛을 내는 농가식당을 하는 것이죠.-처음 반찬류를 보다 엄격하게 위생 여건이 갖춰진 공장에서 가공 생산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했고, 그 꿈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기분인가요.작년 12월에 사업 신청한 뒤 올들어 교육받으며 사업계획서 짜고, 뿌리단계를 진행할 때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평가에서 1등하고 3000만원을 지원받아 줄기단계를 진행하는 지금은 더욱 신나죠. 그러나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동안 줄기단계 사업을 끝내고 정산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웠습니다. 다행히 신선식품과 협의가 잘 되고, 행정당국에서도 협조해 줘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습니다. 메이플-스톤이 열심히 지원해 주고 있지만 창안대회 후 사업자들에게 좀더 세밀한 컨설팅 기회를 제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희는 갑작스럽게 사업자가 되었잖아요. 몰라서 센터측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고 생각해요. 세무, 회계 등 배워야 할 게 너무 많고요. 내년에는 컨설팅을 받아볼 계획입니다. -사실 손맛은 이제 보육단계의 스타트업 기업인데 마케팅, 수익 계획 등은 어떻게 세워뒀습니까.기본적으로 고창여성농업인센터의 고창텃밭꾸러미, 성내면의 언니네텃밭 등 꾸러미 사업체에 납품하고, 로컬푸드와 마트 등을 통해 판매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아산에 운영 중인 온몸농촌유학센터에 도시에서 오는 체험 가족이 많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손맛의 제품들을 소개하고 판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판매는 인력 문제가 있어 아직 보류 상태입니다.-그동안 농산물을 생산해 소규모 꾸러미 판매를 했습니다. 실제로 가공 유통 쪽으로 사업을 진행해 보니 어떻습니까.사업을 쉽게 생각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창안학교에서 알려준다고 하니까 배워가면서 하면 되겠다 싶어서 뛰어든 것인데, 실제로 해보니 간단하지 않습니다. 1년 정도 됐는데 여전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일단 시작한 이상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잘 내딛으며 나아가고 싶습니다. 마트에 가 보면 중국산이 넘치는데, 소비자들이 정직하게 만드는 우리 농산물을 더 소비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예요.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아요. 센터에서 이런 저런 도움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만, 초보 대표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 너무 많아요. 처음 뿌리에서 줄기단계로 오르면서 신났습니만, 어느 순간 회사가 돼 있었고, 수익을 내야 하는 부담이 커지는 것이죠. 적어도 운영비는 나와야 하는데, 인건비는 벌어야 하는데 등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동안에는 제가 농사 지은 것 꾸러미로 내고 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현재 계획으로 보면 손맛에서는 반찬류를 취급합니다. 취급 품목은 정해졌습니까.그동안 파김치 등 15종의 반찬 조리법을 개발했고, 소비자 호응도 조사도 마쳤습니다. 그동안 가정에서 개인적 경험에 의해 만들던 반찬을 표준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표준 조리법을 만들면서 반찬과 생산자를 묶어 전문화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리수쨈-정경자 회원 식이죠. 이처럼 전문반찬생산 체제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야 맛 좋은 고품질 반찬류를 생산 제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처음부터 품목이 너무 많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품목도 최대한 좁혀 출발할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손맛이 그동안 표준 조리법을 개발한 반찬류는 15종이다. 양파김치는 고춧가루, 매실엑기스, 잡젓, 찹쌀풀죽, 깨, 육수(멸치, 다시마), 부추, 대파, 당근, 밤꿀이 주요 재료이다. 4등분한 양파를 절임물에 1시간 정도 절여 간을 맞춘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1시간 정도 끓여 육수를 만들고, 찹쌀죽도 걸죽하게 쑨 다음 양념류를 넣고 잘 버무린다. 부추와 대파를 넣어 색감을 풍부하게 한 양파김치는 식감을 자극한다. 이렇게 개발한 반찬류는 파김치, 열무김치, 보리수쨈, 밀북새미, 땅콩조림, 오이소박이, 고추된장소박이, 버섯장아찌, 깻잎김치, 치커리장아찌, 삼채쫑장아찌, 곤드레장아찌 등이다.-보리수쨈, 밀북새미 등은 생소한데요.양파장아찌, 열무김치, 파김치, 장아찌처럼 반찬류는 아니지요. 보리수는 기관지에 좋은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서 쨈으로 개발했어요. 천식, 기침, 가래에 효능이 있고, 혈액 순환에도 좋다고 합니다. 비타민 C도 풍부해서 감기예방에도 좋고요. 식빵에 찍어 먹을 수 있는 제품입니다. 밀북새미는 지금 거의 사라진 전통음식이예요. 밀과 팥을 넣어서 만드는데, 오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납니다. 건강에 좋고, 고창의 맛을 대표할 수 있는 가공식품을 연구 개발해 나갈 겁니다.-손맛에는 어떤 여성농업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까.처음 7명이 출발했는데, 5명이 출자해서 손맛 영농조합법인이 출범했습니다. 수박, 배, 무, 배추, 복분자, 블루베리, 고구마, 옥수수 등 각각 다양한 농사를 짓는 여성 농업인들이 참여하고 있구요. 손맛이 좋은 분들이어서 맛좋은 반찬류를 소비자들에게 드릴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고창은 전역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가장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짓고, 그렇게 생산된 농산물로 소비자 입맛에 맞는 반찬류를 가장 위생적으로 생산해 제공할 계획입니다. 처음 저희가 이 일을 시작한 목적입니다. 항상 가족의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 마음으로 식재료를 엄선, 가장 위생적인 시설에서 맛좋은 고품질 반찬을 만들어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 다음으로 체험농장, 농가식당 등도 차근 차근 추진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정연미 대표는 1996년 고창 귀촌, 다품목 소량 농사서울에서 막 신혼 살림을 하던 정연미 대표는 남편 직장 때문에 1996년 고창군 흥덕면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고창군이 남편 회사와 추진한 3만평 규모의 첨단 유리온실 사업이 물거품되었고, 정 대표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때 정 대표 남편이 본사 복귀를 포기하고 고창에서 살기를 원했다. 정 대표가 고창 주민이 된 사연이다.정 대표 부부는 1998년 고창군 해리면 동호 해수욕장 인근에 1000평 규모의 오이 하우스 농장을 지었고, 오이농사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폭설 등 자연재해, 기름값 상승이 젊은 귀농 부부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큰 폭설 피해를 입고 7년여만에 오이 농사를 접어야 했다.2005년 고창읍으로 이사한 뒤 남편은 현재 시설하우스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2010년 아산면 반암리 영모정마을로 이사한 정 대표는 남편 사업이 안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농사일을 시작했다. 처음 300평의 밭에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초보 농사꾼에게 해프닝이 벌어졌다. 시장에서 구입해 심은 고추가 공교롭게도 꽈리고추였던 것이다. 농약을 하지 않아 벌레 피해도 있었지만, 다행히 고창여성농업인센터 꾸러미사업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이듬해 블루베리를 심었고, 올 봄에는 복분자를 심었다. 고구마와 옥수수 등도 조금씩 심어 수확했다. 지금은 농사가 600평으로 늘었다. 혼자 하기는 조금 버거운 농사다.꽈리고추 처분하느라 인연을 맺었던 고창여성농업인센터에서 느낀 바가 있어 2012년부터는 꾸러미 판매를 위해 다품목 농사를 짓게 됐다.사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농사를 지으면 단품종 농사보다 훨씬 바쁘다. 그래도 꾸러미 농사가 좋다. 대부분 농산물은 지인들에게 직거래 방식으로 판매하고, 그래도 남는 농산물은 센터 꾸러미에서 판매한다.블루베리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고수익이다. 거름주기, 가지치기, 잡초관리만 하면 잘 자라준다. 하지만 수확할 때 잔손이 많이 가는게 흠이다. 농사를 더 늘린다면 블루베리를 늘리고 싶다. 그러나 요즘 블루베리 재배가 포화상태라는 말이 있어 조심스럽다.

  • 기획
  • 김재호
  • 2014.12.23 23:02

임실 영농조합법인 '대한목장 유가공' 이지혜 대표 "FTA 대비 유가공 모색…현실 안주해선 아무것도 못 지켜"

임실은 치즈의 고장이다. 1964년 임실성당에 부임한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 신부(84디디에 세스테벤스)가 농민들의 가난을 해결하고자 산양을 키우며 치즈를 만들어 키운 덕분이다.지정환 신부가 농민들과 함께 만든 것이 정환치즈다. 지정환 신부는 1971년 정환치즈를 조선호텔에 납품(70㎏), 임실치즈를 세상에 알렸다.이후 지정환임실피자 등 브랜드가 나오고, 임실피자농협도 생겼다. 임실군은 임실치즈테마파크를 만들어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이제 임실군은 낙농과 치즈의 고장으로 우뚝 섰다.하지만 임실을 비롯해 우리나라 낙농업계가 잘 나가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잘 나가던 낙농가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8000호에 달하던 국내 낙농가는 올해 5000호 아래로 내려섰다고 한다. 낙농인들의 나이도 5060대 이상으로 고령화 추세이고, 젊은 층 수혈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낙농업도 원유 생산 뿐 아니라 2차, 3차 산업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전략이 시급해진 것이다. 젊은 후계농 육성은 물론 다양한 소비층을 겨냥한 맞춤형 마케팅 전략도 요구된다.이런 가운데 원유생산에 안주하지 않고 가공과 체험목장 등 2차, 3차 산업화에 도전해 큰 결실을 거둔 곳이 있다. 지난 4일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영농조합법인 대한목장 유가공을 방문, 이지혜 대표(45)로부터 낙농업의 6차 산업 성공 전략을 들어봤다. 목장을 맡고 있는 이 대표의 남편 조봉수씨(49)는 출타중이었다.큰 길에서 목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길로 들어서자 젖소, 목장을 연상시키는 마을벽화가 눈에 띄었다. 작은 산을 등지고 세워진 유가공체험장 앞에는 모형 젖소가 방문객을 맞았다. 목장과 유가공체험장은 동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었다.-조용하고 햇볕 잘드는 곳이군요. 목장으로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언제부터 목장을 시작했는가요.남편이 서울에서 토목기사로 일했어요. 저는 서울에서 성장해 남편을 만났고요. 큰아이가 갓난아이일 때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었는데, 공기 좋은 곳에서 아이를 돌보라는 의사 선생님 권유로 1994년 남편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사실 정착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가 낙농의 매력에 빠져 눌러앉게 됐어요.-서울에서 성장했다면 농사 경험이 전혀 없었을 텐데 낙농을 하겠다고 나선 계기가 있었습니까.이 곳에서 지내다가 알게 된 친구가 낙농가였어요. 젖소 키워 원유를 생산하고 사는 모습이 좋았어요. 게다가 수입면에서도 서울 생활보다 낫겠다 싶어 남편에게 목장을 하며 살자고 했죠.-남편도 같은 생각을 가졌는가요.그렇지 않았어요. 남편은 서울 생활을 원했는데 제가 고집을 좀 피웠죠.-남편이 반대하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뜻을 관철시켰습니까.축사만 지어주면 내가 알아서 키우겠다고 설득했지요. 목장 부지가 문제였는데, 마침 집안에 이전이 안된 땅이 2500평 가량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형제(남편은 7형제 중 다섯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저희가 어머님 모시고 이곳에서 목장을 하겠으니 땅을 주세요하고 요청했어요. 다행히 모두가 저희 뜻을 받아주셨어요. 그 땅이 바로 이 부지예요.-처음 젖소 몇 마리로 시작했습니까.1997년 송아지 5마리로 시작해서 지금은 80두 정도의 젖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큰 소가 아닌 송아지를 키우면서 사육 경험을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지금은 남편이 목장을 운영하고, 저는 유가공공장과 체험을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목장 운영만으로도 꿈을 이룬 셈인데, 유가공공장을 하면서 체험목장까지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2006년 무렵에 임실군이 치즈클러스터, 치즈테마파크 등 사업을 진행했어요. 그 때 원유 납유 뿐 아니라 낙농가들이 직접 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동기 부여 프로그램도 내놨는데, 그것이 치즈생산전문가과정이예요. 아무나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낙농을 하고 있는 농가가 1순위였어요. 전남 순천대에서 과정을 수료했는데, 당시 15명이 수료했지요. 그 중 저를 포함해서 절반 정도가 유가공공장을 창업, 운영하고 있습니다.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원유 생산량이 최고점에 달하면서 원유가 남아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정부는 우유 감산정책을 통해 젖소를 강제 도태시키는 한편 유제품 개발에 나섰다. 이지혜 대표는 이 때 유가공 생산 기술을 배워 2010년 영농조합법인 대한목장유가공을 창립한 것이다.-유가공 쪽에 눈을 돌린 이유가 있는가요.낙농육우협회 여성분과 사무장을 맡는 등 안팎으로 열심히 일하고 배우고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FTA 때문에 1차산업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미리 2차3차산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현실에 안주해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이룰 수도 없다는 생각이 저를 유가공공장 창업으로 이끈 겁니다.-남편은 어떤 입장이었는가요.많이 걱정했지요. 유가공사업에 뛰어든 후 힘든 일이 너무 많았지만, 제가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남편이 있었기에 극복하고 좀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워요.-유가공공장에서는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지요.요구르트, 자연치즈, 아이스크림 등을 생산하고, 생햄 가공도 하기 위해 생햄 숙성실도 만들었습니다. 이들 제품들은 HACCP인증된 청결한 위생시설에서 체세포, 일반세균을 자체 기준(체세포 20만 이하, 일반세균 1만 이하)에 맞춰 생산됩니다.-언제 가장 힘들었습니까.2012년 초에는 자금 사정까지 겹치며 너무 힘들었어요. 주변의 멘토, 친구들이 도와줘서 용기를 낼 수 있었죠. 그 분들은 저에게 금융 지원도 아끼지 않았지만, 제가 정신적으로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어요. 내가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이때 마침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역외보육업체로 선정돼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재단에서 제품개발과 판로, 세무, 회계, 예산, 홈페이지 제작, 포장 디자인 등에 대한 교육 지원을 해주거든요. 창업 초기 기반에 대한 교육 지원을 받으니까 마음이 든든해지더라구요.-대한목장유가공은 목장과 유가공공장 모두 HACCP 인증을 받았고, 친환경 무항생제 제품 인증, 낙농진흥회 체험목장 인증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육하고 관리합니까.저희 부부는 동물이 행복해야 사람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고 목장과 유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유제품의 품질은 원유를 생산하는 젖소의 건강한 사육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저한 사양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목장을 맡고 있는 남편(조봉수 대표)은 사양관리 기준에 따라 적정량의 사료를 먹이고, 태어날 때 개체마다 타고난 능력에 맞게 키우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무리해서 인위적으로 착유량을 늘리려고 하는 것은 동물학대라고 생각해요. 사육장에는 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에 깔짚을 깔아주는데, 저희는 일반 낙농가 대비 1.5배 정도 더 많은 깔짚을 사용한다고 자부합니다. 최대한 안락한 환경, 자연스러운 사육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씁니다.-체험목장 운영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2011년부터 시작했습니다. 1:1젖소분양프로그램, 치즈만들기, 요구르트만들기 등 다양해요. 앞으로는 소시지 체험 프로그램도 할 계획이예요. 치즈 제조 과정에서 나오는 유청(치즈 물)은 영양분이 풍부해요. 이것을 먹여 키운 돼지고기로 소지지를 만드는 것이지요. 낙농진흥회 체험목장은 도내에 2개가 있는데, 목장을 하면서 유가공체험을 하는 곳은 저희 대한목장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임실에 일반 체험목장이 4개 정도 운영되고 있습니다.-체험목장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요.유치원과 어린이집 원생들이 주를 이루는데, 연간 평균 6000명 정도가 다녀갔습니다. 임실과 완주, 전주, 군산 등 도내는 물론 타지역에서도 오고 있습니다.-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합니까.낙농체험학습 기본 프로그램은 다양합니다. 도시나 농촌이나 모두 목장을 접하기 힘든 여건이니까 아이들이 젖소들에게 건초를 주고, 송아지에게 우유를 주는 체험을 진행합니다. 우유를 직접 짜보는 착유는 동물학대 시비도 있지만 내년부터 진행할 생각으로 준비중에 있습니다. 치즈를 직접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먹기만 했던 치즈를 아이들이 직접 만들면서 느끼고, 먹고 하는 활동이죠. 유가공공장을 둘러보는 시간도 갖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보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연에서 배우는 프로그램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 가장 인기 있습니까.모두 좋아하지만 치즈만들기와 요구르트만들기는 특히 인기있습니다. 직접 치즈쿼터를 자르고, 뜨거운 물에 치즈를 늘려 스프링치즈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신선한 원유로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만들고요. 작은 손으로 조물락거리며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이 직접 느끼는 교육 효과는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유치원 등과 결연, 1:1 젖소분양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시스템인가요.유가공공장을 가동해서 생산한 저희 요구르트를 공급하려면 소비자들에게 어떤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제가 만든 좋은 요구르트이니 드세요 라며 소비자에게 접근하기 보다는 저희 요구르트를 마실 수밖에 없는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유치원 친환경급식을 생각했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젖소 한 마리를 키워 요구르트를 마시도록 하는 시스템을 착안했습니다. 실제로 마케팅에 나선 결과, 50여 개 유치원 등 시설이 제 생각에 동의해 젖소를 1마리씩 분양받아 우유요구르트를 일반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공급받고 있습니다. 분양 받으면 어린이 이름이나 가족 이름으로 젖소 이름을 만들어줍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친환경요구르트는 현재 전주, 군산 등 도내 100곳 이상의 유치원, 어린이집 등에 공급되고 있습니다.-이 대표께서는 단순한 원유 생산납품에 그치던 목장에서 유가공제품 생산 및 유통, 체험목장까지 123차산업을 아우르는 6차산업 모델을 구축했다고 생각합니다. 6차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서울에서 살던 제가 낙농을 하겠다고 할 때 주변의 반대, 자금난, 판로 걱정 등 어려움이 너무 많았지만 현재로서는 제가 생각했던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했지만, 저는 운이 좋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임실지역 10여개 유가공공장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낙농인이 목장을 하면서 2차, 3차 산업 분야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해 나가기란 너무 힘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목장은 규모화하고, 유가공 쪽은 전문지식을 갖춘 전업인이 맡아 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봅니다. 6차산업이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임실이 낙농과 유가공 치즈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소비자들이 치즈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조만간 대한목장치즈아카데미센터를 출범시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 가공치즈가 아닌 고급 숙성치즈를 만드는 아카데미 과정을 만들어 고급 치즈 소비층과 좀더 가깝게 소통하는 겁니다. 소비자들이 치즈의 진가를 알고, 직접 자기 치즈를 만들어 먹는 환경이죠. 치즈도 문화 교육적 접근을 해야 판매가 촉진된다고 믿습니다. 퇴직자들이 귀농해서 각자 독특한 숙성치즈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구조도 만들어야 합니다. 숙성치즈를 만드는 가공장이 많아지면 임실 인구도 늘고,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실군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숙성치즈 만드는 가공장이 많아지면 숙성실과 판매점, 음식점, 문화공연장을 세우고, 치즈를 주제로 한 축제도 엽니다. 이런 것이 이뤄질 때 비로소 성공적인 6차산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한 말씀 더 덧붙인다면, 저는 충북 영동에서 운영되는 와인숍에 제가 생산한 치즈를 공급한 적이 있습니다. 역발상으로, 제가 운영하는 치즈숍에 영동이나 무주 사람들이 와인을 팔러 오도록 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습니다.-향후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낙농, 유가공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진로체험교육장 운영 계획을 갖고 있는데, 이는 교육계 등 당국의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축산, 낙농 현장도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경우는 아들 모두 낙농과 유가공 일을 잇기 위해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 낙농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낙농과 축산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어야 낙농의 지속발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지혜 대표는 아들 치료 위해 남편 고향으로 귀촌, 낙농 매력에 '푹'고향이 충청도인 이지혜 대표는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성장, 사실상 서울 토박이다. 임실 지사면이 고향인 조봉수 대한목장 대표를 만나 결혼해 쌍둥이 아들 대한씨(24)와 민국씨를 두었는데, 신생아 예방접종하러 병원에 갔다가 날벼락같은 말을 들었다. 큰 아이 대한이가 발육이 느린 것 같아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했더니 뇌성마비가 의심된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대한씨를 데리고 서울대병원 등 대학병원 다섯 곳을 전전했다. 1994년 공기좋은 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재활에 전념해 보라는 의사 조언에 따라 남편 고향으로 내려왔다. 대한이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했다. 대한씨는 15개월만에 걸을 수 있었다. 말도 잘했다. 1세 이전에 조기 발견, 뇌를 자극하는 재활치료를 계속한 결과였다. 첫째 대한씨는 현재 군대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민국씨는 한국농수산대학 낙농학과를 올해 2월 졸업했다. 부모를 도와 목장과 유가공공장 일을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아들 둘이 낙농 가업을 이어가게 됐다며 좋아 한다.애초 이 대표 부부는 대한씨 병세가 호전되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대표가 농촌 생활에 푹 빠졌다. 낙농업을 결심한 것이다.이 대표는 매사가 적극적이다. 서울에서 성장, 농사를 몰랐지만 특유의 적극성을 발휘해 목장일을 했다. 임실군이 치즈생산전문가과정을 진행하려할 때는 가공산업에 희망이 있다고 확신, 전남 순천까지 장거리 통학을 하며 2년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유가공공장을 창업하고, 판매의 어려움을 친환경요구르트, 체험목장, 젖소 1:1분양 등 참신한 아이디어로 극복해 냈다.이 대표는 축산의 꽃은 낙농이고, 낙농은 과학이라고 말한다. 젖소의 생리를 정확히 알아야 고품질 우유를 차질없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대한목장 유가공은 가족 경영체제다. 남편 조봉수씨가 목장, 유가공 및 체험목장 운영은 이 대표가 맡고 있다. 아들과 조카들이 근무한다. 이 대표는 대한목장유가공에 새로운 가족이 생기게 됐다며 즐거운 표정이다. 얼마전 퇴직한 큰 형님 내외가 귀농, 조만간 목장 일에 본격 합류하기 때문이다.

  • 기획
  • 김재호
  • 2014.12.09 23:02

익산 에덴농장 홍인숙 대표 "사과 참 맛있다 입소문, 체험농장 성공으로 이어졌죠"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1987년 중장비 사업에 실패한 후 사과농장에서 제2인생을 출발한 에덴농장 정학재-홍인숙씨 부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오로지 과일 맛으로 소비자 신뢰를 얻고, 체험 관광농장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며 6차산업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에덴농장 홍인숙 대표(56)를 지난 11일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로 80번지 에덴농장에서 인터뷰했다. 이날 과수원에서는 50여 명의 유치원 아이들이 과일 따기 체험활동을 하고 있었다.-과수원에 와서 그런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군요.오늘은 조금 왔는데, 100명 200명 몰려드는 날엔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둘러보니까 사과나무, 배나무가 상당히 굵은데 농장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아들 7살 때인 1987년에 여기 들어와 농사지으며 살았어요. 그 때 사과나무를 처음 심었는데, 3000평으로 시작했어요. 지금 농장 규모는 사과 6000평, 배 2000평, 감 500평 정도예요.-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는데, 갑작스런 농촌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당시 상황에서는 농사라도 지어야 했어요. 농사짓는 방법을 모르니까 남들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했죠. 힘들었죠.하지만 홍 대표는 농사를 지어 잘 살기는 힘들다는 회의감이 컸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노력한 만큼 소득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을 향해 계속 농사 지을 거면 같이 안살겠다고 하소연도 많이 했다. 그런 어느날, 홍 대표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쳤다.운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모든 게 미리 다 준비돼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들어요. 18년 전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결국 걷지 못하고 있어요. 그 때 아,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내 아이들도 나처럼 학교 수업료도 제대로 못내 선생님 눈치를 보며 어렵게 살 것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끔찍한 일이죠. 그 때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거든요.홍 대표 남편 정학재씨는 당시 마을 이장이었다. 가을 막바지 수확을 마친 후 이장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은 작업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농장일을 하고 있다.-설상가상인데,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요.남편이 다친 뒤 용기를 내서 농사에 전념했지요. 그동안에는 남편 뒤에서 거들어 주는 일만 했는데, 제가 모든 것을 챙기다보니 억울하고 화나는 것이 많았어요. 사과를 수확해서 공판장에 가면 한 상자에 1만원 밖에 손에 못 쥐었어요. 그런데 시장 가격은 3만원 하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느날 남편이 입원한 원광대병원 병실에서 남편 고향 누나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때 순간적으로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어요. 아, 이 분한테 우리 사과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난 거예요. 우리 사과가 참 맛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 분에게 사과를 드리면서 식당 아줌마들하고 나눠 먹어보시라고 했죠. 물론 주문하면 곧바로 배달해 주겠다는 말도 덧붙여서. 식당 아줌마가 50명 정도 됐는데, 주문이 상당히 들어왔어요. 그 배달을 다니다보니 지금은 택시기사보다 익산시내 골목길을 더 잘 알아요.-인터넷도 그 때 생각했는가요.인터넷은 한참 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컴퓨터에 익숙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고교 졸업 후 금성사 컴퓨터실에서 근무했거든요. 또 대학에 다니지 못한 한이 있어서 2002년에 방송통신대에 들어갔는데, 컴퓨터학과를 선택했지요. 그런 것들이 농사 짓는 제게 결정적 도움이 될 줄 그 때는 몰랐죠.-컴퓨터 지식을 농장 운영에 어떻게 활용하게 됐는가요.사람이 살면서 기회가 몇 번 온다고 하잖아요. 어느날 한 친구가 제게 조언을 했어요. 얘, 농업기술센터에 가면 컴퓨터 교육이 있잖아. 너는 컴퓨터 할 줄 아니까 그런 것 한 번 해봐하는 거예요. 그래서 농업기술센터 컴퓨터 교육장에 가봤죠. 그날 마침 블로그 만들기를 하는 날이었어요. 그게 7년 전 일이예요.-컴퓨터를 남들보다 잘 했을 것은데요.그 때 선생님한테 가장 잘한다고 칭찬받았어요. 잘하면 재미있고, 칭찬 받으면 더 재미있잖아요. 게다가 더 즐거운게 있었어요. 제가 인터넷에서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하기 전까지 저는 그저 농촌 아줌마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평범하게 농사짓는 아줌마가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 생각을 담아 올리는 글에 댓글을 달아 동의하고, 응원하는 등 반응해 주는 것이 참 좋았어요. 그 안에 내 모든 걸 펼쳐놓고 참 열심히 했지요.-또 한번의 기회가 왔는가요.두 번째 기회는 4년 전에 왔어요. 올해 추석이 9월 7일, 좀 빨리 왔잖아요. 그 때도 추석이 빨랐어요. 추석이 빠르면 조생종 사과는 수확이 문제예요. 조생종은 추석 지나서 익는데, 그 때는 사과 소비가 급감하거든요. 그래서 추석 전에 수확을 하는데, 그 때는 사과 따는 일이 너무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러던 어느 순간,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바로 체험형 관광농장이예요.에덴농장은 익산시 금마면 소재지에서 왕궁면 소재지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있다. 소비자 접근성이 좋은 것이다. 직접 사과 사러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는데, 그 중에 사장님, 사과 한 번 따보면 안될까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홍 대표는 별 생각없이 한 번 따보시라고 했다.제가 그 생각을 착 잡은 거예요. 사과를 직접 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렇다면 그들이 농장에 와서 사과를 딸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인터넷 블로그며 카페 활동을 한 3년간 열심히 할 때거든요. 익산에 카페활동하는 젊은 엄마들이 5000명 정도 회원으로 있는 익산사랑나눔뜰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거기에 제 글을 올렸어요. 제목을 자연을 나누어 드립니다라고 붙여서 사과 체험농장을 운영하니 오시라고 했죠. 그 때 10월 123일이 연휴였는데요, 첫날에 세 가족이 왔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 활동을 사진찍어 카페 같은데 잘 올리잖아요. 내가 직접 홍보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홍보하는 거예요. 그런 효과예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한달 반 사이에 2500명이 저희 농장에 다녀갔어요. 그래서 아, 이게 되겠구나 확신했죠. 지금 체험농장이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사과하고 배만 있으니까 단조로운 생각이 들어서 감도 심었고, 고구마와 땅콩도 심어서 체험농장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자꾸 변화를 모색하며 가는 중입니다.홍 대표는 인터넷 카페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 그동안의 공력을 모아 2010년 3월17일 만든 eden9004님의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블로그 제목을 친환경 사과와 배, 감이 익어가는 마을 익산 에덴농장 등으로 바꿔가며 친환경 농장을 소비자들에게 부각시켰다. 2013년 11월에는 에덴체험농장으로 제목을 바꿔 체험할 수 있는 농장임을 알렸다.-순간적인 아이디어가 성공으로 이어졌군요.우리가 일상 생활 하면서 아, 이거 하면 괜찮겠다하고 머리를 스치는 것들이 있거든요. 나는 그것을 잘 잡는 것 같아요. 일단 괜찮다는 확신이 서면 과감하게 결정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죠.-인터넷과 체험농장 운영 등으로 직접 판매를 하고 있는데, 성과는 어떻습니까.10년 전부터 생산량을 모두 판매하고 있지만, 체험농장으로 전환하면서 훨씬 일이 훨씬 즐겁습니다.-생산량을 모두 판매하는 비결이 뭔가요. 인터넷 홍보 등 적극적인 판촉인가요.제가 잘하는 것은 과일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예요. 결과적으로 제가 한 일은 그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고객들이 저희 블로그를 보고, 또 저희 과일을 드셔보시고 저희를 신뢰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 분들 사이에 이 사람은 농사를 나쁘게 짓지 않는다. 맛있게 짓는다이런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사과, 배, 감이 참 맛있던데요, 맛좋은 과일 생산 비결은 뭡니까.10년 전 익산 과수농가들에 대한 교육이 있었는데, 그 때 강사로 초빙된 충주농협 정길영 선생이 새로운 전지법을 알려주었어요. 과수원에서는 일반적으로 겨울과 여름 두 번에 걸쳐 전지작업을 하는데, 이 분은 여름 전지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농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데, 저는 이 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무더운 여름에 전지작업하는 것이 힘들고, 인건비도 만만찮잖아요. 그런데 또 농장에 거름을 주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도 받아들였어요. 비료 비용과 인건비가 절감 되잖아요. 나무가 튼튼해지고, 게다가 비용이 절감된다는 말이 가슴에 닿았던 것이죠. 그렇게 한 3년 하니까 나무가 죽는 것 같더라구요. 비상이 걸렸죠. 그런데 4년째 되니까 나무 껍질이 모두 벗겨지면서 속에서 새 살이 나오더라구요.-어떻게 된 일일까요.땅에 비료를 주면 땅 속 뿌리들이 땅 위쪽에서 제공되는 양분만 흡수하며 자라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비료를 주지 않으면 나무 뿌리가 당장은 힘들게 되죠. 결국 나무가 살기 위해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자연속 영양분을 찾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나무가 더 튼튼해지고, 과일맛도 좋은 것 같아요.-아주 간단하군요.저는 실제로 거름이라는 것은 전혀 안줍니다. 제가 자연 그대로 키운다는 말이 그거예요. 그래도 충분해요. 해마다 농장 토양검사 하는데, 영양분이 넘쳐요. 나뭇잎이며 낙과 등 모두가 좋은 거름이거든요. 익산은 농민들 교육이 많은데, 배 교육 선생님도 거름 주지말라고 강조해요. 제가 시골 살면서 많은 것을 느끼는데요, 좋은 정보를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예요. 농부들은 전통적 농사 방법을 거부하기 힘들어하지만,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여야죠. -비료를 주지 않으면 수확량이 떨어지지 않습니까.욕심만 버리면 돼요. 다른 농장 사과가 5㎏ 한 상자에 10개 들어가면, 우리 것은 13개가 들어가요. 사과가 작으니까요. 사실 거름을 많이 주면 과일이 엄청 커져요. 그런데 고객이 원하는 것은 큰 사과가 아니라 맛있는 과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공판장에 낼 과일이면 공판장 기준에 따라 크기를 키우고 예쁘게 농사짓겠지만, 저는 집에서 직접 파는 것이니까 맛만 있으면 돼요.-체험형 관광농장이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체험 관광객은 어느정도 됩니까.처음 시작한 2011년에 2500명 정도 다녀갔는데, 그 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2012년 3000명, 2013년에 4000명 가량 다녀갔어요. 올해는 일주일 전에 4500명이었으니까, 사과 수확이 끝날 때가 되면 5000명은 될 것 같습니다.-체험농장을 운영하면서 어린이, 학생들 대하는 노하우도 늘었겠군요.사실 체험 학생이 100명, 200명씩 몰려들어오면 잔뜩 긴장이 되는데, 게다가 선생님들이 지켜보니까 더욱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어떤 기회에 농업기술원 직원분이 텃밭체험 진행하는 것을 보고서 저도 힌트를 얻었어요. 어렵게 할 것이 아니라, 농장의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유치원생들이 체험 대상이라면 풀잎이나 나뭇잎에 맺힌 이슬을 가리키면서얘들아, 이게 이슬이야. 이슬은 어떻게 맺힐까하는 식이죠. 또 아이들이 어른 존중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나름대로 신경을 씁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간 중간에 과일을 쪼개서 나눠줄 때 얘들아, 이거 선생님부터 드려야지? 하고 선생님 먼저 드린 뒤 아이들에게 나눠줍니다. 과일을 껍질 째 먹도록 하는 것도 친환경 농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이구요. 그런 철학을 갖고 체험농장을 운영합니다.-체험농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은 없습니까.사실 저희 농장에 체험 고객이 많이 오면 좋겠지만, 한계는 있잖아요. 저희 농장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다양한 체험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제 농장 주변에서 고구마 체험 농장, 땅콩 체험농장, 만들기 체험장 등 다양한 공간이 있으면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체험오는 고객이 많으면 우리 농산물이 입소문을 타고, 주문도 들어오니까요. 아직 농민들 관심이 부족하지만, 한 번 우리 지역에 온 도시민들을 연계해 줄 수 있는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농산물 가공 사업도 하십니까.가공 사업은 허가를 받지 않았고, 저희 농장 과일을 허가 받은 건강원에서 즙을 추출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과일을 건조해서 판매하는 부분도 고민중입니다. 지난해 건조기를 들여놓았는데,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하려면 조금 더 갖춰야 합니다.-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끊임없이 변화해 나갈 겁니다. 언제나 내 입장이 아닌 고객의 눈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래야 저에게, 그리고 농촌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인숙 대표는 남편 사업 실패교통사고갖은 시련 이겨낸 '억척이'전주가 외가인 홍인숙 대표는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부산여상을 졸업하고 금성사 컴퓨터실에서 근무하던 20대 초반에 중장비 사업을 하는 남편 정학재(51)씨와 결혼했다. 잘 나가던 남편 사업은 결혼 6년여만에 기울었다. 일을 해 주고 받은 어음이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가족 앞에 제시된 선택지는 농사였다. 그나마 남편이 물려받을 수 있는 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사를 모르고 살아온 홍 대표는 어쩔 수 없이 농사꾼이 됐다. 1987년, 아들이 7살되던 해였다.시댁에서 논의 끝에 사과농사가 결정됐다. 사과 묘목을 심었지만, 과일을 수확해 판매하려면 34년을 기다려야 한다. 남편은 중장비 회사에 취직하고, 홍 대표가 농사를 지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주산, 부기나 할 줄 알았지 농사 짓고 살 줄 몰랐던 홍 대표에게 농촌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해졌다. 어려운 시련이 닥쳤지만, 그 때마다 억척스럽게 이겨냈다. 이제 생산한 과일을 완판한다. 그렇게 27년의 세월이 흘렀다.홍 대표는 이제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농장 체험하러 오는 방문객들과 함께 자연이 주는 선물의 고마움을 실감한다. 학창시절, 매월 수업료를 제대로 못내 속상했던 홍 대표는 이제 어려운 살림 속에서 고등학교 졸업시켜 준 엄마가 너무 고맙다. 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사과농장을 운영하면서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었고, 체험농장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농사는 품질로 승부를 내야 한다. 농산물의 품질이란 자연 그대로의 맛이다. 그 자연의 맛이 에덴체험농장을 만들었다. 홍 대표는 그 기본에 충실했다.

  • 기획
  • 김재호
  • 2014.11.25 23:02

부안 구름호수마을 김성구 위원장, 울금·돼지감자 친환경 웰빙작물 주력···가공·판매까지

부안군 진서면 운호(雲湖)마을은 한자명을 따서 구름호수마을로 불린다. 곰소내소사~모항해수욕장 사이 해안도로변에 자리잡은 운호마을 앞으로는 서해바다가 망망하고, 뒤로는 변산 신선봉과 군신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42가구가 62㏊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겉에서 보면 그저 한적한 산골마을일 뿐이다.하지만 구름호수마을은 20년 전부터 뭔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왔다. 이제는 조그만 산골 작은 마을에 도시민들이 농사 체험하러 찾고, 농산물 사러 찾는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오디, 울금, 돼지감자, 여주, 감, 마늘, 양파, 가시오가피 등 농산물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터넷 공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농식품부가 주관한 2015년 일반농산어촌개발공모사업에서 운호 구름호수권역 창조적마을만들기사업이 선정됐고, 이 마을 김성구 위원장은 농촌융합산업사업자 예비인증을 받았다. 벼농사, 고추농사를 짓던 마을이 몇 년 전부터 지역 특산품을 만들고, 이를 가공 판매하는데 성공하면서 그야말로 6차산업의 모델이 됐다.지난 달 30일 운호 정보화마을에서 김성구 위원장(61)을 인터뷰했다.-운호 구름호수권역 창조적 마을만들기 사업이 지난 달 정부가 공모한 농산어촌개발 사업에 선정 됐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업들이 진행됩니까.운호 구름호수권역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은 31억 원 규모이고, 운호 주변 7개 마을이 사업 대상입니다. 이 사업 유치에 나선지 7년만에 거둔 결실이어서 감개무량합니다. 권역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복지 공간을 확충한다고 보면 됩니다. 체육, 공원, 도서관(소회의실 겸용), 작은 영화관, 공연, 사물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농사만 짓는 1차산업 공간인 운호권역을 농산물 가공 판매 서비스 등 2차, 3차 산업 공간으로 확대하고 나아가 주민들이 복합문화공간에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6차 산업을 지향하며, 그 성공모델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있습니다.-내년부터 사업이 진행되면 운호 구름호수권역 주민들의 삶의 질이 매우 높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운호마을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운호마을은 현대인들이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요구하는 특용작물을 친환경적으로 재배, 판매하면서 도시 소비자들과 소통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농산물을 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공, 판매하는 시스템을 잘 갖췄고, 친환경 건강식품에 주력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주로 어떤 농산품을 판매하고 있습니까.운호마을은 주로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지었습니다. 요즘은 울금과 돼지감자, 여주, 오디 등 현대인들이 주목하는 건강 기능식품 생산이 많아졌습니다. 가시오가피, 감, 양파, 마늘 등도 생산합니다.-위원장님은 특용작물 재배로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이끌어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를 짓게 됐는데, 처음부터 특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추 농사에 터널재배방식을 도입, 저는 물론 마을사람들이 높은 소득을 올렸죠. 그 덕에 1993년 서울종묘가 주는 농민대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9박10일짜리 일본 선진지 견학도 다녀왔습니다. 그 때 오끼나와 농업연구소에 다니는 소메야라는 분의 집에 갔는데, 20평 정도 텃밭에 제가 모르는 작물이 심어져 있더라구요. 향기가 좋고, 생강처럼 생긴 뿌리는 노란색을 띄었는데, 호기심에 무슨 작물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울금이라며 앞으로 세계적 식품이 된다는 거예요. 한번 해보라고 권하는데 마음이 끌렸어요. 그들의 실험 연구 자료와 울금 18㎏을 가지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방송사 6시 내고향에 울금 재배가 소개됐는데 소비자 반응은 시원찮았습니다.울금은 카레에 들어가는 강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커큐민이 주성분이다. 기를 소통시키고, 어혈을 푸는데 도움이 된다. 간장염, 담석증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암 치료에 보조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식품이다.-고추를 재배하다 울금에 빠졌는데, 잘 됐습니까.사람 건강에 좋은 세계적 식품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울금에 미쳤는데, 사실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울금은 국내에서 생소했습니다. 게다가 처음에 너무 많은 면적에 재배했어요. 많은 울금을 생산했지만 거의 팔지 못해 썩히기 일쑤였습니다. 78년간 그랬는데, 사람들이 울금의 가치를 알고 찾아주기 바라며 고집스럽게 농사지었죠. 힘들어도 너무 좋은 작물이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김성구 위원장은 울금 농사를 첫해에 8000평, 이태에 1만2000평 지었다. 3.3㎡당 78㎏ 생산할 수 있는데, 농사가 잘 되면 10㎏도 생산했다. 8㎏ 기준으로 60톤 이상을 생산했으니, 엄청난 양이다.수확해서 창고에 쟁여 놓았는데, 결국 못팔고 상당량을 버렸어요.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래도 이걸 버리지 못한 것은, 앞으로 세계적 식품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지요.-아무리 좋은 농산물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계속 농사지을 수 없잖아요.사실 울금만 바라볼 수 없었죠. 집안 살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2002년에 돼지감자를 시작하게 됐습니다.돼지감자는 뚱딴지라고 불리는 다년생 식물로서 주변에 자생한다. 당뇨, 해열, 변비, 비만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다. 천연 인슐린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돼지감자는 어떻게 재배하게 됐는가요.돼지감자는 밭두렁이나 야산에 자생하는 식물인데요, 어느날 시골 방앗간에 갔다가 돼지감자 볶는 것을 보고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당뇨에 좋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러던 중 원광대 김윤철 교수(약학과)를 찾아가 오디와 돼지감자 둘 중 어느 것을 재배하는 것이 낫겠냐고 문의했더니, 김교수가 돼지감자를 재배하라고 권했어요. 열을 가해도 주요 성분이 파괴되지 않는 장점이 있고, 앞으로 세계적 식품이 될 거라고 조언했어요. 게다가 안팔리면 자기가 다 팔아주겠다는 거예요. 김교수를 믿고 돼지감자를 재배하게 됐죠.-돼지감자도 울금처럼 대규모로 시작했나요.3000평으로 시작했습니다.-그 많은 종자를 어떻게 구했습니까.마침 장수 계북면에 돼지감자를 재배했다가 골치를 앓게 된 농가가 있었어요. 돼지감자로 연료를 만들어 수출한다면서 업자들이 농가와 계약재배를 했는데, 물건을 가져가지 않은 것이죠. 계북면에 사는 지인을 통해 2톤 정도를 캐올 수 있었죠. 그 농가들은 돼지감자가 처치 곤란이었고, 저는 절실했습니다.-농사는 잘 됐습니까.돼지감자 3000평을 심었더니, 당장 어머니부터 미친 놈이지. 좋은 밭에다 천지에 널려 있는 것을 왜 심어하며 이해를 못했어요. 마을 사람들도 미친놈이라고 했어요. 농사는 잘 됐어요. 그런데 2년간 박살이 났어요. 돼지감자는 3.3㎡당 생산량이 20㎏ 정도 되는데, 3000평이니 60톤이 생산된 셈이죠. 부직포 덮고, 비닐 덮고 해서 창고에 정성스럽게 보관했는데 모두 썩고 말았어요. 돼지감자가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열 때문에 폭삭 썩었어요. 그래서 아마 알콜을 만들려고 했던가 봐요. 남들 눈에 보이기 부끄러워서 세 아들과 함께 한 밤중에 몰래 처리했지요. 몇 년 실패하고 나서야 건조 가공을 생각해 냈어요.-그래서 가공 일은 잘 됐습니까.돼지감자를 처음 식품으로 취급하려다보니 재배와 보관 방법, 가공방법 등을 잘 몰라서 힘들었습니다. 시행착오, 실패를 많이 경험했죠. 생산량이 많은데다 열이 많이 나 창고 보관이 어려웠어요. 저온저장고도 대용량이어서 부담이었고요. 그래서 건조 가공을 생각했죠. 건조해 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엑기스용은 냉동해서 사용하고요. 지금은 수확한 돼지감자를 곧바로 세척해서 건조합니다. 모든 시설을 갖췄죠.-제품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돼지감자 환, 분말, 엑기스 등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제품 가격도 제가 정했는데, 처음 360g 한 봉지에 5000원으로 정했다가 따져보니 수지가 맞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1만원을 받고 있습니다.-울금은 별 재미를 못 본 셈인데, 돼지감자는 반응이 괜찮았나요.제가 돼지감자를 재배하는 사실이 운좋게 6시 내고향에 방송됐어요. 돼지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한지 2년 후 일이죠. 울금은 방송 나간 뒤 반응이 별로였는데, 돼지감자는 소비자 반응이 좋았어요. 특히 2010년 10월5일 방송이 나간 뒤 대박이 났어요. 소비자들로부터 엄청난 전화가 왔고, 그 때 고객이 많이 확보됐어요. 돼지감자가 전국에 택배로 팔리고 있어요. 돼지감자가 없었다면 저는 부도났을 겁니다.돼지감자가 잘 팔리자 울금을 찾는 소비자가 예전보다 많아졌다.김성구 위원장은 지금 돼지감자 2만평, 울금 6000평을 짓는다.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여주도 600평(하우스 3동) 짓는다. 이제 팔 수 있는 만큼만 생산하고,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앞장서 대규모로 재배하지 않는 지혜도 얻었다.-그동안 씨를 뿌렸고, 2010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군요.지금은 그 해 생산한 것은 모두 팔립니다. 옛날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꾸준히 팔리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20년 전, 울금을 선택했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후회하지 않았습니까.울금농사 짓기 전에 고추를 대규모로 지었는데, 1994년 울금 8000평, 고추 1000평 정도 했습니다. 완전히 울금으로 작목을 전환한 것이죠. 울금의 가치를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너무 힘든 일이 많았지만, 울금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울금으로 돈은 못벌었지만,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울금은 건강에 좋은 식품입니다. 현재는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았을 뿐입니다.-어떤 효능이 있습니까.지금은 정보화시대 잖아요.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또 카레를 알잖아요. 그래서 카레 원료인 울금도 아는데, 울금은 간에 좋습니다. 애주가들이 울금 환을 먹고 술을 먹으면 간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해독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취기가 없고, 두통이 없는데, 전주 이강주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울금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울금보다 강황이라는 용어에 친숙한 것 같은데요.울금은 가을울금이라고 하는데, 꽃이 하얗습니다. 강황은 봄울금이라고 하는데 꽃이 보라색입니다. 또 울금 뿌리는 노랗지만, 강황은 희끄므레 해요. 완전히 달라요. 가을울금이 진짜 울금입니다.-여주는.여주는 한 3년 전부터 짓고 있습니다. 돼지감자 하다보니까 여주 찾는 소비자들이 있어서 농사를 짓는데, 따로 판매하기보다는 울금이나 돼지감자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덤으로 끼워줄 생각이예요. 여주도 돼지감자처럼 혈당을 강화시켜주니까 필요한 제품입니다.-품목별 생산량은 어느정도인가요.생물 기준으로 울금 30톤, 돼지감자 200톤, 여주 3톤 정도 합니다. 건조하면 크게 줄어들죠.-소비자들이 체험하러 많이 오는가요.매년 6월이면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이 때는 주로 오디따기 체험이고, 11월말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는 돼지감자 수확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돼지감자 캐기 체험은 눈이 와도 합니다.-연간 몇 명 정도 오는가요.주로 도시 소비자들이 오는데요, 운호정보화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은 인천시 간석4동 주민들은 매년 옵니다. 체험 소비자는 연간 3000명 정도 됩니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이 입소문 내서 주변 사람들이 오는 식이더라구요. 우리마을에서 생산되는 울금, 돼지감자, 여주, 감, 마늘, 양파, 고추, 참깨, 들깨 등이 잘 팔리는 것은 도시 소비자들과 소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그렇게 소득이 나오는대로 조금씩 적립했다가 매년 마을 기금으로 100만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위원장님은 6차산업 인증을 받았더군요.농촌융복합산업사업자예비인증서를 지난 10월 1일자로 받았는데요, 부안군에서 유일합니다. 농촌의 희망은 6차산업화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농가들이 사업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운호정보화마을과 원암산들바다영농조합법인, 우동향토산업, 줄포 후촌정보화마을 등 4개가 1개 권역이 돼 사업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김성구 위원장은 녹색농촌체험정보화마을팜스테이각종 사업 지정 받아내김성구 위원장은 운호마을 토박이다. 9대 째 살고 있다. 8녀4남 중 장남인 그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는데, 막둥이 아들 현범(22)씨가 한국농수산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다.현범씨가 집안 농사를 10대째 이어가게 됐다. 장교로 전역한 그는 예비군 중대장을 했다. 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를 짓게 됐다.김 위원장은 그 때 농촌은 너무 힘들었다. 농가소득이 100만원, 200만 원도 안됐다. 1년에 영농자금 30만원, 50만원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농가가 많았다고 회고했다.1980년대 말, 김 위원장은 소득 향상을 위해 터널고추 재배법을 도입했다. 그의 개혁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농촌이 더 많은 소득을 올려 도시 못지 않은 문화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는 2005년에 녹색농촌체험마을, 2006년에는 정보화마을 신청을 해 지정받았다. 2013년에 향토산업, 2014년에 창조적마을만들기 사업 지정을 받았다. 팜스테이 지정도 받았다. 이런 사업들을 기획하고, 서류 만들어 기관에 신청하면서 운호 구름마을을 세상과 한층 가깝게 만들었다.1년이면 몇 백만원씩 경비가 들어가지만, 사비로 충당한다. 김 위원장은 운호 구름호수 정보화마을 사무실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매년 6개월 과정 컴퓨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 주민은 물론 곰소, 격포에서까지 온다. 주민들이 컴퓨터를 배워 블로그, SNS 등 사이버 공간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며 젓갈도 판매한다. 다들 좋아한다. 컴퓨터 교육받은 할머니가 손주들과 카톡으로 대화하고, 사진도 찍어서 주고 받는다.김 위원장은 최근 곰소에 시골장터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주민들이 생산한 감도 팔고, 조, 마늘, 호박 등 농산물을 판매한다.김 위원장은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까,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부안군 506개 마을 리더들이 농촌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그 꿈을 이루고 싶다.

  • 기획
  • 김재호
  • 2014.11.11 23:02

남원 남농영농조합법인 김영숙 대표 "친환경 농업시장 주목…2차 가공으로 부가가치 높여"

남농영농조합법인(대표 김영숙, 이하 남농)은 198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어려운 농촌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고향 농촌으로 달려가 설립한 영농조합법인이다.남원시 덕과면 사율리에 자리잡은 남농은 지난 20여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친환경농업이라는 시대적 화두에 집중, 연매출 100억 원에 육박하는 남원 대표 영농조합으로 성장했다.남농은 이제 생산과 가공, 유통, 서비스를 아우르는 6차 산업의 큰 틀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남농이 추구해 온 생산자 농민들의 1차 울타리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지난 23일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남농 사무실에서 김영숙 대표이사를 인터뷰, 농업의 6차산업화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았다.-남농은 창립 22년된 농민 기업인데, 주로 어떤 사업을 합니까.초창기에는 서울, 성남 등 수도권에 사는 형, 동생 등을 대상으로 고향 쌀 판매 사업을 했고, 아이쿱 생협 등과 손잡고 우리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등 사업을 주로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친환경농업에 초점을 맞춰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곡종합처리장(RPC)은 대강면에 있고, 원예 청과는 이곳 덕과 사업장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0억 여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단기적으로는 매출 100억 원을 넘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합원은 약 300명 정도 됩니다. 남원 지역 생산 조합원들이 20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군산, 익산 등 타지역 조합원들입니다.-남농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19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가 상당히 나온 상황에서 농민회 조직을 통해 어려운 농촌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농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농촌 현장에 들어갔는데요, 농산물 판매사업 과정에서 남농영농조합법인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남원농민회가 1989년 1월에 창립됐고, 남농은 1992년에 출범했습니다.-남원농민회의 경제사업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남원농민회의 목표는 살맛나는 농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부터 우리가 어떻게 경제사업을 할까 하는 현실적 고민을 많이 했죠. 그 결과, 현재 우리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도시에 팔기로 했습니다. 꿀을 팔았고, 쌀도 팔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통일벼 수매가 중단, 농민들 어려움이 컸습니다. 이 때 남원농민회 회원 16명이 화물차를 구입해 쌀을 서울에 직접 판매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마침 1994년 영농조합법인 특별법이 만들어지자 남농영농조합법인을 출범시킨 겁니다. 꿀을 팔면서 경제 마인드를 키웠고, 서울에 쌀을 직판하면서 쌀 출하작목반을 만드는 등 사업을 확대했습니다.-남농으로 법인 전환한 후 사업이 잘 됐습니까.남농은 전국에서 34번째 출범한 영농조합법인이데요, 성남과 서울에 쌀 판매점을 잇따라 냈고, 1994년에는 유통센터, 1995년에는 도정공장을 지었습니다. 대도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쌀 판매를 적극적으로 벌인 결과, 19951996년에는 쌀 사업이 엄청 번창을 했고, 성남 직판장이 3개로 늘었습니다. 78㎏ 소포장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등 쌀 판매를 선도적으로 치고 나갔죠. 나름대로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당시에 쌀 사업만 했습니까.내부적으로는 쌀만 잘 판매한다고 농촌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고민이 있었고, 복합영농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1994년도에 덕과사매보절지역 농민들과 함께 채소 시설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작 들녘에 시설하우스 사업을 끌어들인 것이죠. 채소가 생산되면 곧바로 팔아야 하기 때문에 채소 유통센터와 저온저장창고도 지었습니다. 질 좋은 채소를 생산하기 위해 퇴비장도 지었죠. 남농이 사업체로 진화하는 초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부터 준비를 잘한 것 같습니다.초반에는 그랬지요. 그러나 느닷없이 쌀 판매 현장에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1995년 무렵, 소비자 요구가 양에서 질로 변했는데, 남원지역 쌀을 수도권에 팔고 있던 남농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소비자층에서 밥맛이 없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죠. 이런 쌀을 어떻게 먹어? 하는 반응이 나오면서 남농의 서울 쌀 사업이 망했어요. 다행히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는 채소 사업 쪽에서 진행한 무농약 친환경 딸기 브랜드 새벽딸기가 큰 성과를 냈습니다.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 무농약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컸고, 새벽딸기는 현대백화점까지 진출했습니다. 당연히 새벽딸기 작목반이 만들어졌고요.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 무렵에 흑자 내던 사업들이 적자를 내면서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사업을 전체적으로 정리해야 했습니다.-쌀 사업에 큰 변화를 꾀해야 했겠군요.서울에서 쌀 사업을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남원과 임실, 순창, 무주, 장수, 진안, 곡성, 구례까지 지역의 농협과 일반 매장에 남농의 쌀을 팔았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죠.-미곡종합처리장(RPC) 사업도 이때 구상됐나요.남농의 당시 경영진은 많은 것을 깨달았죠. 쌀은 쌀대로, 원예 청과는 원예 청과대로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고민의 결과물이 RPC 사업과 친환경쌀 전략입니다. 당시 쌀 시장은 큰 변화가 있었어요. 도정공장, 도매점들이 미곡종합처리장과 대형마트에 밀려 사라져갔고, 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들이 쌀 시장 대부분을 가져갔습니다. 그 틈에서 우리의 위치가 위험했고, 남농은 RPC에서 친환경쌀만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덕과에서 하던 사업을 분리, RPC를 대강면에 짓고 전문 경영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2006년부터 남원지역에 친환경쌀 작목반을 만들고, 전북지역 유통망을 확대했습니다. 아이쿱 생협에도 2010년 결별할 때까지 공급했죠.-남원지역 미질에 대한 시비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당시 우리는 그냥 우리쌀이면 다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원, 특히 덕과면 일대의 미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먼저 작목반을 구성하고, 품종을 다수확이 아닌 고품질 쌀로 단일화했습니다. 친환경 농법, 즉 소식 재배와 땅심 높이기 등 땅으로 되돌려주는 농업을 하도록 유도하고, 논에 볏짚을 깔았죠. 결국 미질이 크게 좋아졌는데, 그 관리 비용이 여전히 만만찮아요.-새벽딸기로 시작된 청과는 어땠습니까.청과도 어려웠습니다. 청과 사업을 위해 서울에 유기농 전문 매장 금수강산을 만들었고, 나중에는 남농 지분을 51%로 한 남농CS라는 유통회사로 발전시켰어요. 그런데 당시 시장은 친환경 청과만 취급해 회사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남농CS에 납품한 조합원들 외상이 쌓여갔고, 원성이 높아갔죠. 가만 둘 수 없었어요. 제가 2004년 대표로 취임한 후 담판을 짓고 결별했어요. 수년에 걸쳐 외상값은 모두 받아냈습니다. 결국 청과부문의 서울 사업도 중단한 것입니다. 남농은 1998년부터 아이쿱 생협과도 사업을 같이 했는데, 딸기 작목반 등 우리지역 개별 작목반들은 생협 쪽에 물건을 판매하면서 살아 남았습니다. 남농은 당시 걸음마 단계인 아이쿱이 맨 땅에 헤딩할 때 외상으로 물건주고 키워주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이쿱이 산지를 가져갔어요. 우리를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한 것이지요. 그런 속에서 청과사업은 꾸준히 해 왔습니다. 전국적으로 일반시장에서는 보금자리, 생협시장에서는 청암농장의 딸기쨈이 유명했는데, 이들에게 딸기를 판매했어요. 초기부터 그런 사업을 계속 했고, 그래서 저희는 청과 정품부터 비품까지 판매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었어요.-결국 초기부터 10년 넘게 진행한 사업들이 좌초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농민이 1차 농산물을 잘 생산하게 해서 유통시키는 것을 남농의 역할이라고 규정짓고 지난 20년을 달려왔습니다. 돌이켜보면 1차 농산물은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부가가치도 낮습니다. 동지라고 믿고 함께 해 온 아이쿱 생협 속셈도 결국 산지를 모두 계열화하고 싶은 것이었어요. 우리는 농부가 살 수 있는 조직을 추구하는데, 그들은 우리와 농부들을 떼어놓으려고 한 것이죠. 결국 2010년에 아이쿱과 결별하고, 거래를 단절했습니다.-당시 아이쿱과의 거래가 적지 않았을텐데, 대안이 있었습니까.다행히 우리가 계속 추구해 온 친환경농업 시장이 커지고 있었고, 친환경농산물을 학교 급식시장에 직접 공급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2006년부터 전북지역 일부 학교에서 친환경쌀을 썼는데, 너무 소량이어서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학교 쪽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아이쿱 생협과 거래를 중단한 후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노력한 결과, 아이쿱 매출을 웃도는 학교급식을 확보했습니다. 남농은 현재 서울 11개 구청 65개학교, 부산 연제구 21개교 등에 납품하고, 전북지역에서는 남원과 임실지역 학교에 공급하고 있습니다.-농산물 가공사업 진출은?농산물 사업은 직접 생산자들을 만날 수 있는 면을 넓히고, 상호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춰 부가가치가 높은 진화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첫째는 1차 생산품을 가공해 생산하는 사업, 둘째는 복합영농입니다. 쌀 농가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청과 등과 결합할 수 있는 복합영농, 친환경영농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자, 양파 등 이모작을 시도하고, 청과 산지 구축을 계속 주문하고, 가공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마침 2012년말부터 전북 학교급식에 친환경 원예농산물이 공급되도록 결정됐습니다. 큰 힘이 됐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청과 산지를 만들고, 가공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청과는 반드시 가공사업과 함께 해야 합니다.-두레아띠 등을 통합한 것도 그런 맥락인가요.그렇습니다. 2012년 두레아띠, 2013년 꿈엔들 잊힐리야를 통합했는데요, 모두 농산물 가공사업장들입니다. 남농이 1차 생산물을 2차 가공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사업, 즉 초창기부터 그렸던 그림이 이제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는 셈입니다. 남농은 인터넷 상에서 친환경먹거리 전문 쇼핑몰 유기엔(www.62n.c o.kr)을 운영하며 유기농 미곡과 친환경 청과, 가공식품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소비자 초청행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1990년대부터 소비자 초청행사를 계속 이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서울과 부산 급식학교 학부모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봄과 가을로 나눠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행사는 봄에 5회, 가을에 8회 합니다. 또 학생 학부모가 지역을 찾아오는 행사는 봄과 가을에 각각 3회씩 진행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6차산업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지요.소비자들이 덕과에 내려오면 지역의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농사체험이 1번이예요. 조합원들이 생산하는 논에 가서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베기를 주로 하는데, 이외에 봄에는 감자 캐기, 가을에는 고구마 캐기, 미꾸라지 잡기도 하지요. 마침 덕과면 옆에 사매면 혼불 마을과 서도역이 있는데, 딱 좋은 관광문화코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도역 레일바이크를 타고, 혼불 문학관도 들러 봅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쌀로 떡메치기를 하며 떡도 만들죠. 가을에는 탈곡 등 벼수확 체험을 하고, 짚을 꼬아서 재밌는 놀이도 해 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놓은 제품들을 맛보게 하면, 그들이 사가고, 모두 함께 식사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모두가 황홀해 합니다.-남원시에서도 많은 지원 협조를 할 텐데, 만족하십니까.남농의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선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친환경농업을 남원 전역에서 하다보면 관리가 너무 힘들어요. 행정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행정이 지원하면 농가 소득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친환경농업과 관련, 김 대표께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이 지역 사매 덕과 보절 3개 면을 친환경 유기농업 특화지역으로 전면화 하는 것을 우리가 해보려고 합니다. 봄부터 경작자 모임을 계속 추진하고 있어요. 어차피 우리가 여기에 자리를 굳힌 만큼 대단위 유기농단지로 만들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지리산 온 사람들이 여기에 들러 하루쯤 머물러 가고, 먹고 체험하고, 그러면서 지역에 활기가 도는 것이죠. 좀 더 넓게 보면 남원과 임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임실 치즈마을에 오시는 분들이 우리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6차 산업 아닐까 생각해요. 그동안 남농의 선배들이 추구해 온 살맛나는 농촌 만들기라는 가치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생산과 소비, 도시와 농촌이 동행하는 방향으로 우리 남농의 브랜드 가치를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김영숙 대표는 '농민과 동행' 원칙, 10년간 영농조합 이끌어10년 째 남농영농조합법인을 이끌고 있는 김영숙 대표(51)의 어릴 적 꿈은 농촌에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완주 이서가 고향인 김 대표는 농촌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알았다. 어른이 되면, 농촌은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서에서 전주여고까지 통학을 했는데, 아침마다 딸 버스비 빌리러 다니는 것이 엄마 아빠의 일이었다. 그런 가난한 농촌살이를 벗어나고 싶었다. 꿈이 컸던 그녀는 부모님이 권하는 상업고와 교육대학을 가지 않고 4년제 사범대를 갔다. 그것이 얼마나 부모님에게 버거운 결정이라는 것을, 철딱서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그 당시는 몰랐다.스물다섯에 남편 황의동씨와 결혼,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시댁에서 농촌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소녀시절 찬란하게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그 농촌으로 돌아간 것이다.힘든 농촌 시집살이였지만, 이겨냈다. 그 당시에는 운동적인 삶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게 농촌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농촌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농민운동의 가치와 맞다고 생각했다.남편이 농사 짓다가 남농영농조합법인 실무자로 들어갔다. 혼자 농사지을 수 없어 함께 입사, 조합 일을 익혔다. 1994년 일이다. 조합은 당시 몇 년간 수도권 쌀 판매 덕분에 잘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앓고 있었다. 운영자금이 없어 빚으로 연명하다보니 농가에 제 때 돈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남자들이 판을 벌리고,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다 떠났다.2004년,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남농 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게 됐다. 적자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빚을 갚아 나갔다. 흑자 구조로 바꿔야 살맛나는 농촌을 만들겠다며 세운 남농 문을 닫지 않는 길이다. 그러다보니 억척스러워졌고, 주위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김 대표가 지난 10년 남농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힘은 원칙이었다. 농민 조합원의 울타리가 되겠다는 원칙, 그들과 언제까지나 동행하겠다는 원칙이다.

  • 기획
  • 김재호
  • 2014.10.28 23:02

김제 참조은밀협동조합 신정애 대표이사 "밀 농사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출발했죠"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신정애 씨(56). 벼농사와 우리밀을 이모작하는 신정애 씨는 지난해 진봉과 만경 일대 농민 26명을 조합원으로 규합, 참조은밀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신씨가 대표이사를 맡았다. 1년 농사를 지었는데 성공적이다. 250필지에서 400톤을 생산, 전량 수매 처리했다. 올 가을 밀 파종을 앞두고 종자 보급을 위해 참여 농가를 조사한 결과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다. 희망농가가 계속 늘고 있어 종자 대금을 선착순으로 받아야 할 정도다. 내년 7월 수매량이 700800톤 정도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밀 협동조합을 설립한 신 대표를 비롯, 참조은밀 조합원들의 목표는 밀 생산은 물론 밀을 가공하고 유통 서비스하는 분야까지 아우르는 6차산업의 완결이다. 익산의 작은 양계장에서 출발, 수조원 대 식품 대기업으로 성장한 하림이 수직계열화 사업구조를 성공적으로 이뤘듯, 우리밀 살리기 정신으로 뭉친 참조은밀 조합원들의 열정도 대단하다.신정애 대표이사(56)를 지난 10일 진봉면 고사리 신 대표이사의 자택에서 인터뷰 했다. 인터뷰 자리에는 참조은밀협동조합 이한섭, 김현중 이사도 함께 했다.전주에서 김제 만경읍을 지나 진봉면 지역으로 진입했을 때 서해안 새만금 방면으로 확 트인 너른 들녘은 온통 황금색이다. 밀은 지난 6월 쯤에 수확, 7월까지 수매가 끝났다. 지금은 밀농사 준비 기간이다. 가을 땡볕에 한창 여물어가고 있는 벼를 수확하고 나면 곧바로 밀 농사가 시작될 것이다.신정애 대표이사의 자택 마당에 들어서는데 출타하려고 막 포터트럭 운전석에 오르던 아저씨가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더니 아내(신 대표이사)를 부른다. 신 대표의 남편 유기문씨(60)다. 현관문이 열리고 신 대표가 얼굴을 내밀었는데 웬지 거동이 불편하다. 거실에 들어서니, 창가에 침대가 있다. 병원 침대다.-몸이 많이 불편하시군요?제가 지난 7월 2일 밀 수매 작업을 하다가 톤백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어요.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살려준 것 같아요. 감사하고 있습니다.참조은밀협동조합 설립 후 첫 수매가 시작된 지난 7월2일, 이날은 신 대표에게 매우 뜻깊은 날이었다. 조합원들이 생산한 밀을 수매하고, 그들에게 땀의 결실을 돌려 주는 일이다. 신 대표는 수매 현장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밀이 담긴 톤백을 싣고 창고 쪽으로 들어서던 트랙터가 도로 과속방지턱을 넘으면서 갑자기 기우뚱 했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밀 톤백(1000kg)이 신 대표를 덮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대형 사고였다. 모두가 영락없는 사망사고로 생각했지만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갈비뼈와 골반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꼼짝 할 수 없었다. 사고 4개월 째인 요즘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지만, 걷기가 불편하다.-1990년대 초반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우리밀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협동조합을 만든 동기가 있습니까.아시다시피 조합은 작년 9월에 만들었는데요, 제가 밀에 관심 가진 지는 오래됐어요. 밀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은 것은 10년 전이구요. 밀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에 김제시우리밀영농조합법인을 알게 됐고, 이사로 2년간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진봉면에서는 저를 비롯해 많은 농가들이 밀 농사를 100필지 이상 짓고 있었죠. 그런데 우리밀 생산량이 4만 톤을 넘어선 2011년 밀 파동을 겪은 후 진봉면 농가들이 아무도 밀을 갈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소득이 있어야 하는데, 수매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자 밀농사를 기피한 거예요. 밀은 제가 관심을 가진 후 열정을 쏟은 작목입니다. 진봉면에 밀이 없어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행히 이한섭 이사 등이 도와주셔서 참조은밀협동조합을 만들게 됐습니다.-뻔한 질문 같지만, 어떤 취지를 갖고 출발했습니까.저희들은 생산자니까, 처음에는 생산을 해서 판매만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회의를 거듭하면서 가공과 유통, 서비스 등 밀과 관련된 여러 사업을 두루 해나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정부에서도 협동조합을 권장하고, 또 농업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6차산업 개념을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죠. 우리가 농사만 지을 것이 아니라, 2차산업도 하고 서비스 쪽도 모색해 보자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저희 조합은 운영을 책임지는 이사가 5명인데, 생산 부문에 신정애이한섭김현중 이사, 가공 부문 임철진 이사, 소비자 부문 김남이 이사 등입니다. 임철진 이사는 우리밀 동우라는 상호로 우리밀 짜장면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지난해 400톤을 생산했다고 들었습니다. 생산이사님들은 밀농사를 얼마나 짓습니까.제가 26필지(벼 70필지, 1필지=1200평, 1평=3.3㎡) 짓고요, 이한섭 이사 15필지(벼 25필지), 김현중 이사 7필지(벼 23필지)입니다. 첫 해에 26농가(250필지)가 참여해 비교적 수월하게 출발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사실 출발 단계에서 큰 어려움이 있었어요. 막상 밀농사 짓기로 의기투합하고 조사해보니까 일선 농가에 종자용 밀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거예요.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겨우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진땀이 났었죠.-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사실 저희가 지난해 협동조합 설립을 생각한 것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어요. 밀 농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서두른 것이죠. 그렇게 하다보니, 집안 식구들한테 미쳤다 소리도 들었어요. 잠을 줄여 가며 업무를 챙겼고, 국회와 농림부 등 밀 농사와 관련된 기관이라면 문턱이 닳도록 다녔죠. 그 전에 밀농사를 지었으니까 당연히 종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별 신경을 안썼는데, 막상 농사를 시작하려는데 종자가 없는 거예요. 당시 농민들이 밀농사를 작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자까지 팔아치운 것이지요. 작년에 밀농사를 지은 것은 정말 기적이예요. 기적.-신 대표께서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했습니까.어렸을 때 어머니는 밭에 밀을 갈았어요. 직접 빻아서 얻은 밀가루를 가지고 여름에 칼국수 해주고, 빵 쪄주고, 수제비 해주셔서 먹고 자랐어요. 저 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30대 때 굉장히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밀가루 음식을 모두 끊었죠. 시집 식구들이 밀가루 음식을 좋아해서 힘들었는데, 결국 시집살이 5년만에 집에서 라면을 추방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이 높아졌죠. 이 허벌차도 제가 만든 차인데요, 모든 음식을 가능하면 제가 만들어서 먹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먹어요. 제가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우리밀이 좋다는 것도 알았죠. 자연스럽게 수입밀에 대한 좋지 않은 정보도 알게 됐고, 그런 과정 속에서 김제시우리밀영농조합에서 우리밀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한 거예요. 10년 전에는 가톨릭단체, 농민단체, 개인 등이 조금씩 밀농사 불씨를 살리는 과정이어서 종자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정부에서 밀 농업을 포기했었잖아요.-밀 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습니까.직접 지은 것이 10년 넘었어요. 남편은 보리를 갈았죠. 보리는 필지당 5060가마 정도를 얻을 수 있고, 정부에서 수매를 했지만, 밀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밀은 수확 시기가 보리보다 늦어 벼 농사에 애로가 있는 것이 사실이예요. 남편은 농부예요.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소득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남편하고 싸우기 일쑤였어요. 남편을 설득하고, 고집을 부렸어요. 결국 밀농사를 지었는데, 한 3년은 밀 농사 경험 부족으로 힘들었어요. 정부의 밀 재배 교육도 없었고, 품종도 좋지 않았어요. 필지당 30 가마 정도 수확하는데 그쳤어요.-지금은 밀농사 성적이 어떤가요.농부는 소득이 떨어지는 작목은 짓지 않아요. 돈이 안들어오는 농사를 지으면 망하잖아요. 남편에게 항상 미안했지요. 오로지 안전한 먹거리 생산만을 내세워 언제까지 남편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도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소득이 나아졌어요. 올해 같은 경우 농가 평균 생산량보다 웃도는 결과를 얻었어요. 밀의 생육 특성을 이해하게 됐고, 밀농사 노하우도 생겼거든요. 물론 정부의 관심과 연구 덕분에 밀 품종도 좋아졌어요.-서울 방배동에 직영하고 있는 짜장면집 운영은 어떤가요.농사꾼에게 소득이 중요하지만 안전한 먹거리 생산은 엄중한 의무죠. 정성들여 생산한 안전한 농산물을 누군가에게 먹여 그들이 건강해지면 그 이상 보람이 있겠습니까. 참조은밀협동조합이 추구하는 이념입니다. 서울에 짜장면집 너른들 동우를 개점한 것도 그런 취지입니다. 전주에서 짜장면 사업으로 성공한 임철진 이사의 사업 노하우, 능력을 믿었기에 좀 더 쉽게 결정한 것이구요. 너른들 동우에서 사용하는 밀은 모두 조합에서 생산한 것입니다. 향후 체인사업으로 확대할 생각입니다. 소규모 음식점이더라도 부부가 기술을 익혀 직접 만들어서 운영하는 체인사업을 구상 중입니다.-그 외에 어떤 구상을 갖고 있습니까.진봉면 청보리축제 때 우리밀 짜장면 부스를 운영해 굉장히 많은 인기를 모았는데요, 제가 우리밀로 빚은 우리밀막걸리도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밀 막걸리는 진봉면 특화사업으로 생산되는 연 막걸리보다 훨씬 맛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호평을 얻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년동안 꾸준히 전통주 기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조합이 아직 자금력이 부족해 주정 시설을 할 수 없고, 해썹 인증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돈과 기술력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 조합이 생산한 밀을 인근 제분소에서 OEM방식으로 제분, 인터넷 판매 등도 하려고 합니다. 쿠키와 떡 케익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단 농한기에는 쿠키와 케익을 생산할 있도록 함께 조합일을 하고 있는 딸과 조카딸이 떡 케익과 제과제빵 기술을 익히고 있구요. 지난번 지평선 축제 때 아이들이 쿠키를 만들어 선보였는데, 마가린 대신에 버터를 넣는 식으로 했더니 맛이 괜찮았나 봐요. 마침 바이어 한 분이 찾아와 유치원에 넣겠다며 계약을 했어요. 이렇게 어린이집 하나가 둘 되고, 둘이 셋 되면서 조합이 활성화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체험농장과 체험교육장도 운영할 계획입니다.-체험농장은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지요.우리밀 교육을 겸한 체험농장을 하려고 합니다. 소비자들에게 수입밀이 왜 좋지 않은지, 왜 로컬푸드 국산밀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리고, 안전한 먹거리 교육을 해야 건강한 밥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수입밀 소비량이 98%에 달합니다. 거의 모든 밀가루 음식에 수입밀이 사용되는 것인데, 수입밀이 왜 좋지 않다고 보십니까.밀이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리가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이 개입됩니다. 미국 등 해외에서 화물선에 실려 장거리 운송되는데, 이 과정에서 밀이 벌레 등에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상상 이상의 훈증처리가 가해집니다. 매우 독한 소독약에 곡물이 완전히 노출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수입밀입니다. 저희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 조합은 밀을 수매하면서 농가들에게 함수율 12%를 유지하라고 주문합니다. 13%만 맞춰도 되지만 12%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훈증처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함수율 12% 상태에서는 바구미 생기지 않지만, 13%에서는 바구미가 생기거든요.-밀을 직접 제분해 밀가루 제품을 소량 판매하겠다고 했는데요, 가능한 일인가요.밀가루공장은 첨단 기계 설비 때문에 저희 조합 정도의 자금력으로는 힘듭니다. 하지만 구례 등에서 일부 우리밀 제품을 하고 있어요. 저희는 다행이 인근 익산에 제분공장이 생겼어요. 게다가 제분공장 사장님이 찾아오셔서 조합 참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밀 6차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정애 대표이사는 건강한 밥상 만드는 우리 밀 생산보급 '전도사'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내다. 농촌에서 살림을 맡아 하는 주부이자, 세상에 하나 뿐인 딸 아이의 엄마다. 그러나 그녀에게 또 하나 함께하는 것이 있다. 우리 밀이다.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밀은 쌀 다음 가는 주요 식재료다. 쌀 소비가 70%라면 밀 소비는 30%다. 밀가루 음식은 천지에 널려 있다. 빵을 비롯해 칼국수, 수제비, 라면, 국수, 만두 등 다양하다. 밀가루 음식이 우리에게 익숙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일반이지만, 근래 쌀 소비가 줄면서 밀가루 소비세는 더욱 견조해졌다.신 대표는 밀가루 음식을 무척 싫어했다. 건강 때문이었다. 몸이 허약했던 그녀가 결혼했을 때 시집 식구들은 밀가루 음식을 밥보다 더 좋아했다. 그녀가 시집에서 라면 상자를 없애는데 5년이 걸렸다. 그런데 요즘 그녀 집에는 라면이 있다. 우리밀 라면이다. 우리땅에서 농사지은 밀로 만든 라면은 아무리 먹어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신 대표가 우리밀을 남편과 딸처럼 사랑하게 된 데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국민 모두의 건강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밀 생산과 보급이 절실했다.신 대표가 김제시우리밀영농법인에서 활동하다가 지난해 김제시 진봉면 지역의 밀 농가를 중심으로 참조은밀협동조합을 설립, 대표이사를 맡게 된 사연이다.신 대표의 꿈은 크다. 단순히 밀 농사를 짓는 것으로 적당히 끝내고 싶지 않다. 참조은밀협동조합을 생산 뿐만 아니라 밀 가공과 유통, 서비스까지 아우르는 6차산업의 모델로 성장시키는 것이다.이런 신 대표의 꿈과 농업 농촌 사랑은 외동딸 유지혜씨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유지혜씨는 영농후계자이자, 전업농이다. 밀 생산을 기반으로 한 6차산업이 진봉 들녁에 무르익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4.10.21 23:02

부안 효원식품 최권엽 대표 "약초농사 접목, 천연 발효 효소의 메카 만들고 싶어"

효소는 동식물의 생체 세포에서 생산되는 고분자 유기 화합물을 일컫는다. 살아 있는 생물체의 화학 반응에 관여하니,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생명물질이다.효소는 발효식품에 가득하고, 술, 간장, 치즈 등 식품제조는 물론 소화제 등 의약품에도 사용된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효소는 건강보조식품으로 주목 받아왔다.국내에서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효소가 인기다. 인터넷 포털에서 효소를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효소를 만들어 먹는다. 효소가 건강한 사람은 더욱 건강하게 하고, 병약한 사람은 원기를 회복해 준다는 입소문이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퍼진 탓이다.지난 8월20일 부안군 주산면 만석로(옛주소 돈계리)에서 20년 넘게 효소 제조업을 하고 있는 최권엽 대표를 만나 약초 농사와 발효 식품을 접목시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옛날 이 동네에 만석꾼이 살았는데, 50년 전 최 대표의 부친이 만석꾼 집을 매입해 이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집은 만석꾼의 고대광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커다란 한옥이 아니었다. 현대식 가옥으로 개량한 탓이다. 대신 거대한 옹기 항아리 숲이 고대광실의 고색창연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름드리가 훨씬 넘는 전통 옹기 항아리들이 앞마당과 옆마당 3곳에 가득 늘어서 있는데, 무려 450여개라고 한다. 항아리는 모두 50년 이상된 전통 옹기 항아리라고 한다. 요즘 생산되는 옹기항아리들이 유약 때문에 반들 반들한 것과는 달리 거무튀튀하기까지 하다. 커다란 항아리 입은 비닐로 씌워져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대부분 10년 전후 된 산야초 발효 효소액이 들어 있는데, 그 양이 무려 50톤에 이른다.-옹기 항아리들을 보니 규모가 대단합니다. 언제부터 효소 담그는 일을 했습니까.1990년부터 효소를 담그기 시작했으니까 24년 쯤 됐습니다.-20대 때인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요.아버님께서 한약방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산 몇 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줄포면 선산에 아버지를 따라 벌초하고, 성묘하러 다녔는데 아버지가 풀 이름, 약초 이름을 알려주시고, 우리 몸 어디에 좋다는 설명도 해주셨지요. 그렇게 자라면서 웬만한 식물 이름을 알았죠. 옛날에 감기 걸리면 어머니가 생강을 잘게 썰어 설탕을 잰 뒤 다려 주셨는데, 신기하게도 감기가 싹 나았어요. 또 배가 아프면 어머니가 매실액을 주셨는데, 복통이 씻은 듯 사라졌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향해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솔잎 효소를 담갔어요. 그런데 그만 술이 돼버렸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제가 제대로 된 솔잎 효소를 담그겠다고 나섰다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솔잎 효소 담그기가 어려운 모양이죠.3년간 실패를 거듭했어요. 항아리로 치면 약 30개 정도는 버렸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아까워요. 효소가 제대로 안됐다고 버린 것들이지만, 그야말로 천연 식초거든요. 하여튼 뭐가 잘못됐는지 술이 되거나 식초가 돼 버렸어요. 맛이 이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죠.-어떻게 성공했습니까.설탕의 양, 일정 시기 후 항아리에서 윈재료를 건져내는 시기가 매우 중요했어요. 저는 효소에 빠져든 1990년 이후 최적의 효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했습니다. 수 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저만의 제조 노하우를 가질 수 있었어요. 아마 효소 제조를 저보다 많이 해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지금은 효소 재료로 사용할 약초의 양을 보기만 해도 설탕의 양을 정확히 가늠합니다. 또 항아리 속 재료를 만져보기만 해도 재료를 건져낼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요. 사실 효소 담그기는 계량화된 데이터가 없어요. 시중의 효소 관련 책에는 원재료와 설탕을 1대1로 넣어 100일 있다가 건더기를 거른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잘못된 거예요. 효소는 햇빛과 바람에 의해서 발효되는 것인데 여름 뜨거울 때는 한 달 안에 건더기를 걸러야 돼요. 재료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삼투압 작용에 의해서 수분이 빠져 쭈그러지는데, 한달이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원재료가 수분을 흡수하게 돼요. 재료가 팅팅 불어요. 원재료는 수분을 먹으면서 독성을 내뿜기 때문에 적기에 걸러내지 않으면 효소액이 몸에 더 안좋을 수 있어요. 모든 산야초는 자기를 보호하는 독성을 갖고 있거든요. 봄철에는 재료 건지는 시기가 조금 길어지지만 어린 순이니까 20일만에 걸러야 돼요. 쭈그러지면 그 때부터 재료가 가라앉기 시작하거든요. 그 때 건더기를 걸러 낸 효소액이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고 독성도 없고 몸에 좋아요. 원재료에 따라, 계절에 따라, 햇빛과 바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최초 2030일 정도는 매일 뒤집어 주면서 재료 상태를 살펴야 해요.-정성이 깃들어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겠군요. 최 대표는 설탕을 어떻게 넣는가요.어떤 일이나 그렇지만, 효소 담그기는 정성입니다. 그래야 맛과 효능 좋은 효소를 만들 수 있어요. 처음에 설탕을 적게 넣고 자주 뒤집어주면서 상태를 점검합니다. 이 과정에서 설탕이 부족한 것 같으면 조금씩 더 넣죠. 이게 현명한 방법이예요. 처음부터 원재료와 설탕을 1대1로 섞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예요. 매일 뒤집고 살피면서 설탕을 조금씩 추가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입니다. 자칫해서 균이 죽어버리면, 그것은 효소액이 아니라 그저 설탕물일 뿐입니다.-원재료 채취는 어떻게 합니까.처음 몇 년간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취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논밭은 물론 산에도 농약을 많이 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됐어요. 이제는 밭에 재배해서 사용합니다. 이게 제일 안전해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약초밭 3000평에서 약초 농사를 짓습니다. 사실 약초재배는 쉽지 않아요. 일꾼을 모아 풀 뽑기를 하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숲처럼 우거지거든요. 풀 때문에 농사짓기가 너무 힘들어요. 씨앗 구해다 조금씩 재배하는 것들이 삼백초, 어성초, 민들레, 선학초, 독활, 옻, 두릅, 엄나무, 번행초, 엉겅퀴, 냉이 등 꽤 많습니다.-산야초 효소 만드는데 들어가는 약초는 몇 종류나 됩니까.한 철에 3040종류씩 들어갑니다. 초봄에 나오는 냉이와 미나리부터 담그기 시작하지요. 무조건 넣는 것이 아닙니다. 약초마다 갖고 있는 고유 성질을 고려해서 조절해야 해요. 산야초 담그려고 동의보감도 많이 읽었습니다.-기능성 효소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만.항암효소, 당뇨효소, 혈압효소 등 기능성 효소를 많이 담가봤어요. 체질이 맞는 사람들은 혈압당뇨가 떨어지죠. 기능성 효소로 효과를 못보는 사람들에게는 백야초 효소를 권해요. 백가지 산야초를 넣어 만든 백야초 효소를 먹고 효과 보는 사람이 많아요. 백야초가 기능성 효소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산야초 효소액은 암당뇨혈압위에 좋다고 확신합니다. 번행초가 위염, 위궤양에 좋다고 하는데, 백야초가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산야초 채취 시기는 어느 때가 적기인가요.모든 식물은 잎과 열매, 뿌리에 약성이 있어요. 하지만 효소 재료를 채취할 때는 시기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있어요. 잎은 여름, 열매는 가을, 뿌리는 식물의 기운이 다 내려간 겨울에 채취해야 좋죠. 식물의 약성은 꽃이 필 때가 가장 좋아요. 임신했을 때 좋은 영양분이 필요하듯이 식물도 꽃 피었을 때 약성이 좋은 것이죠. 그런데 독성이 있기 때문에 산야초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양을 조절해서 써야 합니다.-항아리를 보니 거무튀튀한 것도 많은데, 어떤 항아리를 씁니까.효소액은 용기 안에서 발효시켜 만듭니다. 용기 안에서 균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균이 죽으면 설탕물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발효통인 항아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숨쉬는 전통 옹기 항아리만을 사용합니다. 100년 전후된 것이죠. 저희집 항아리는 모두 196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예요.-항아리 입에 비닐을 씌웠던데, 광목이나 모기장 등을 씌워야 숨 쉴 수 있지 않습니까.물론 숨을 잘 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광목이나 모기장을 사용하면 초파리가 몰려들고, 결국 항아리 안에 고자리가 끼어서 먹을 수가 없게 돼요. 저는 그런 제품은 만들지 않습니다. 전통항아리 입에 비닐을 씌우면 발효 때문에 내부에 가스가 차는데요, 1960년 이후 만들어진 항아리는 가스 압력 때문에 비닐이 벗겨지고 맙니다. 하지만 옛날 항아리는 숨을 쉬기 때문에 비닐 덮개가 낮에 약간 부풀 뿐이예요. 요즘엔 그런 항아리가 없어요.-1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효소가 설탕 덩어리라며 문제 제기를 했었죠?사실 그 방송이 나간 뒤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소비자가 중요하죠. 하지만 정직하게 효소를 만드는 사람들도 생각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해당 방송사 PD에게 편지를 썼어요. 20년 이상 효소를 연구하고 생산해 온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 편지를 받아본 후 제 효소 제품들을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와서 곧바로 보내줬고, 그 뒤로 방문하겠다는 연락도 왔는데,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발효 효소를 20년 넘게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효소는 발효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도 되고, 설탕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식초나 술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정직한 장인은 아주 질 좋은 효소를 만듭니다. 효소를 죽여서 판매하면 설탕물이지만, 충분하게 숙성시키고 전통항아리에서 완숙시킨 살아 있는 효소는 틀림없이 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효소는 정직한 사람들이 만들어 판매하도록 해야 합니다.-화제를 바꿔서 최 대표가 개발한 발효 소금에 대해 얘기해 보죠. 발효소금은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었습니까.산야초는 그야말로 천연 약재입니다. 몸에 좋은 수많은 성분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발효통에서 건져낸 건더기를 버리지 않고 밭 거름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인근에서 고추농사를 짓는 귀농 친구의 경우 효소 발효 건더기를 거름으로 쓰고 액비로 사용한 뒤 매년 탄저 없는 고추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소금을 항아리에 담아두고 쓰는 것을 알고, 산야초 건더기를 이용한 발효소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약10년 전 일이지요.-어떻게 만듭니까.7년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 발효소금입니다. 천일염을 맑은 물에 씻은 다음 포대에 담아 2년간 쌓아두면 간수가 대부분 빠집니다. 잘 소독한 항아리 밑바닥에 구멍을 3군데 정도 뚫은 다음 효소 건더기를 광목 보자기에 담아 소금 항아리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소금을 붓는 방법으로 45층을 쌓습니다. 최초 소금 양이 70㎏ 정도 되는데, 2년이 지나면 45㎏ 정도로 줄어듭니다. 소금에 있는 간수, 비소 등 독소가 모두 빠지고, 광목에 넣은 효소 건더기는 바짝 마른 상태가 됩니다. 소금의 색과 맛이 변하고 성분 함량이 크게 변합니다. 최고의 소금이 탄생하는 거죠.-최고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성분 함량 검사 등 증빙 자료가 있습니까.우리나라 천일염은 나트륨 성분이 81.78에 달하는데, 제가 만든 발효소금은 그 절반도 안되는 39.90에 불과합니다. 전라북도 생물산업진흥원에 의뢰해 받은 성분검사 결과입니다. 마그네슘(15.4), 칼륨(44.7), 칼슘(42.2) 등 각종 미네랄 성분은 월등하게 높습니다. 성분이 품질을 말해줍니다.-효소를 이용한 발효식품이 또 있습니까.효소에 미쳐 살아오면서 발효소금을 개발하고, 이어 효소와 발효소금을 이용한 전통 고추장과 된장, 간장도 개발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찹쌀가루를 넣지 않고 엿기름으로 만든 식혜를 24시간 고아 만든 물엿, 메주가루, 고춧가루만을 넣어 만드는데, 전통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오직 건강에 좋은 효소, 발효식품을 만드는 일에 전념해 왔습니다. 부안지역 많은 농가들이 효소를 생산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건강을 지켜주는 효소의 메카 부안을 만들고 싶습니다. 효소 자체가 사람 건강에 좋고, 다양한 발효 기능성 식품을 생산하면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또 효소 슬러지를 거름으로 이용한 친환경 농사는 부안 먹거리 산업의 경쟁력도 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권엽 대표는 산야초 효소 만들며 유명세국회서 시음회도최권엽 대표(52)는 젊은 농사꾼이었다. 이리공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가 친구와 자취하며 직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도시 생활에 흥미를 잃고 고향집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일찌감치 귀농한 셈이다.평범한 젊은 농사꾼인 그가 약초 농사를 짓고, 발효 효소액 만드는 일에 전념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가정 환경 영향이다. 한약방 가정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약초와 친숙해졌다. 아버지가 정부 권유로 지은 약초 농사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약초 농사를 지었던 밭은 최 대표의 소중한 생활 터전이 됐다.어머니가 매실, 솔잎 등을 이용해 발효액을 만든 것은 그가 발효식품의 매력에 눈뜨게 하는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다.산야초를 채취하러 다니다 멧돼지를 만나고 벌에 쏘여 고생하기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각종 산야초 효소를 만들며 유명세도 탔다. 일반인들이 거의 매일 찾아와 효소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야단쳤다. 일을 못할 지경이었다. 지인인 고위 공무원 소개로 효소에 관심 있다는 차관과 장관이 찾아오기도 했다. 국회에 가서 효소 시음회를 하며 부안을 알리고, 전주와 광주를 오가며 효소 교육도 다녔다.하지만 요즘 그는 조금 의기소침하다. 1년 전 케이블방송에 방영된 설탕 효소 탓이다. 효소가 한꺼번에 설탕물로 매장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방송만 나무랄 수 없다. 일부 양심불량 효소 사업가들 때문이다. 그들은 스텐리스 탱크에 재료를 씻지도 않고 넣은 뒤 설탕과 올리고당을 잔뜩 섞어 발효시킨다. 이런 환경에서는 균이 모두 죽는다. 설탕물이 될 뿐이다.최 대표는 정직하게 일하면 희망이 있다고 강조한다. 사필귀정이다. 그는 효소를 생산하면서 발효소금, 고추장, 된장 등 관련 기능성 제품을 꾸준히 개발해 내놓고 있다. 효소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건더기가 친환경 농사에 효자노릇을 하는 것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4.09.02 23:02

남원 '다산육종' 운영 박화춘 박사 "버크셔 순종 100%, 지리산 흑돈 브랜드로 차별화 성공"

우루과이라운드가 발효된 1995년 이후 글로벌시장의 문은 더욱 활짝 열렸다. 요즘은 자유무역협정(FTA) 체제 하에서 세계 시장이 하나로 통합돼 가는 상황이다. 얼마 전에는 정부가 쌀시장 완전 개방을 선언했다. 제조업 수출 비중이 높고, 농수축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이 취약하다. 대한민국에게 FTA체제는 기회다. 하지만 농수축산업 종사자들에게 절망과 위기를 안겼다.하지만 희망과 기회는 여전히 현장에 있다. 수입 농산물 홍수 속에서도 국산 농산물의 품질 경쟁력을 높여 위기를 기회로 돌려놓는 농부들이 많다. 전북일보는 새로운 기획 6차산업이 미래다에서 농업의 가치를 새롭게 세워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농업의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지리산 둘레길 2코스 출발지가 있는 남원시 운봉읍은 해발 500m에 달하는 고지대, 지리산 아래 청정 고원이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대군을 섬멸한 황산대첩의 현장이고, 조선 말 판소리 명창 송흥록 선생의 생가지가 있는 판소리 고장이다.고도가 높은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정부가 1971년 호주에서 들여온 양을 지리산 바래봉 일대에 방목하기도 했고, 국립 가축유전자원시험장(축산기술연구소), 축산고등학교 등 측산 관련 기반이 있는 곳이다.이곳에서 흑돈 농장인 다산육종을 운영하는 박화춘 박사(52)는 귀농인이다.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나와 농촌진흥청과 축협중앙회에서 근무하며 잘 나갔던 육종 전문가다. 그가 10년 전 돌연 귀농, 똥냄새 속에서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왜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돼지 똥 냄새가 진동하는 농장으로 갔을까. 지난 9일 박화춘 박사를 만나 그의 농장과 생햄가공장, 식당, 6차산업의 꿈을 부풀리고 있는 사업예정지 등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그 속마음을 들어봤다.-박 박사께서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농촌진흥청과 축협중앙회에서 축산과 육종 업무를 담당한 인재였습니다. 귀농을 결심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농촌진흥청에 근무할 때는 1400억 원 규모의 전문종돈업육성사업을 담당해 진행하는 등 열심히 일했습니다. 또 1996년 축협중앙회로 직장을 옮긴 뒤 종돈개량사업을 총괄하는 등 육종 관련 업무를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교과서는 양식이 아니라 상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주변의 기라성같은 선배들과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현장의 일을 배우기 위해 고창군 대산에 있는 축협 종돈사업소 근무를 자청할만큼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때 전공으로 먹고 살지 말자, 전공을 부전공화하자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전공 업무 외에 돼지 키우는 일, 사료와 관련된 일, 축사와 관련된 일 등도 현장에서 배우고 연구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망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됐죠. 제가 그곳에서 종돈 개량업무만 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축협과 농협이 통폐합 됐습니다. 실망감이 컸고, 고향에서 돼지농장을 하기로 결심했죠. 2000년 말에 지금의 부지에 농장을 지었고, 2003년 초 완전 귀농했습니다.-돼지 농장인데 다산육종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유가 있는지요.다산은 多産이 아니구요, 정약용 선생의 호 다산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을 표방하고자 했습니다.-처음부터 농장에서 흑돼지를 키웠습니까.처음에는 백돼지(요크셔, 우리나라 대부분 돼지 농장에서 사육)였고, 흑돼지는 2003년 남원시가 흑돈클러스터사업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키웠죠. 제가 흑돼지를 않고 백돼지 농장만 계속 했으면 지금 규모의 농장 3개는 했을 겁니다. 흑돼지 일을 하면서 매년 10억씩 까먹었죠.(웃음)-그런데 왜 흑돼지 사업에 뛰어든 겁니까.말씀드린대로 남원 흑돈클러스터사업이 진행되면서 참여했습니다. 꺼먹돼지라고 불리는 흑돼지는 어려서 저희 집에서도 키웠고, 도내에서는 남원과 진안 등에서 지역 특산가축으로 인식이 돼 있었죠.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신토불이 토종 흑돼지, 꺼먹돼지, 똥돼지는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버크셔, 요크셔종을 들여다 개량하는 과정에서 없어졌고, 일제가 개량했던 잡종 흑돼지도 육종관리가 안돼 처음의 특성을 크게 잃었습니다. 하지만 국내 양돈시장의 대세인 요크셔 백돼지보다 훨씬 품질이 좋은 흑돼지의 경쟁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흑돈클러스터사업에 매진한 것이지요.- 박 박사님은 박화춘박사의 지리산흑돈이란 브랜드의 흑돈을 생산 보급하고 있습니다. 또 남원흑돈클러스터의 고원흑돈과 국내 생산기반을 고려한 브랜드 버크셔K 등 남원에는 3가지 흑돈 브랜드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모두 제가 육종 관리하고 있는 버크셔 순종 100%의 흑돈 브랜드입니다. 다만 박화춘박사의 지리산흑돈은 제 농장에서 생산되는 흑돈 브랜드이고, 고원흑돈은 클러스터 참여농가들의 흑돈에 사용되는 브랜드입니다. 버크셔K는 저희가 공급하는 순종 버크셔를 생산하는 국내 농장의 흑돈에 쓰도록 만든 브랜드입니다. -사실 국내에서 흑돈, 흑돼지는 그 맛이 차별화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장에서 남원, 진안, 장수산 흑돼지는 일반 돼지고기보다 비싸고, 제주도흑돼지도 가격이 비쌉니다. 지리산흑돈과 일반흑돈의 차이를 말씀해 주십시오.털이 까맣다고 모두 흑돈이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 검은털을 가진 돼지 중에서 버크셔 품종의 털색은 열성유전이지만, 다른 흑돈 품종의 털색은 우성유전입니다. 그래서 재래흑돈은 순종, 잡종 모두 검은색 털이고, 잡종흑돈은 검은색 계통의 털색을 지닙니다. 하지만 순종 버크셔흑돈은 네 다리와 꼬리, 머리 등 여섯 곳이 백색(육백보물)인 것이 특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혈통 관리입니다. 버크셔흑돈은 철저한 혈통관리로 고품질의 육질이 고르게 생산되지만, 여러 품종간 교배가 계속돼 온 잡종흑돈은 상품의 품질 편차가 큽니다. 국내에서는 다산육종에서 생산하는 버크셔 흑돈만이 유일한 순종 100% 버크셔이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박 박사님의 버크셔 고기 특징은 무엇입니까.고급 브랜드의 조건은 안정적인 맛, 안정적인 공급, 안정적인 가격에 있다고 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료를 먹여 사육하는 것이지요. 이들 조건을 모두 갖춘 다산육종의 버크셔 순종은 그 맛이 소고기 이상으로 탁월합니다. 맛있는 육질의 조건은 육질이 부드럽고, 촉촉하고, 고소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육질 내 적색근섬유수 비율이 높고, 가열감량이 낮고, 도축 후 24시간 PH가 높아야 합니다. 다산 버크셔흑돈은 적색근섬유수 비율이 1012%, 가열감량 18% 이하, PH5.8 이상의 고른 품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버크셔 지방은 불포화지방산과 올레인산, 리놀렌산 함량이 높아 고소하고 건강에 좋습니다. 고기를 구울 때 지방 융점이 섭씨 50도에 불과해 잘 타지 않습니다. 지방을 그냥 마셔도 될 정도입니다."-과거에 국내에서 버크셔 흑돈 생산을 시도하지 않았나요.제가 흑돼지 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2003년까지 우리나라에 버크셔를 들여와 사업하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흑돼지 사업은 사업성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뭐냐 하면, 2003년도까지 모든 버크셔가 1명의 바이어에 의해 미국의 단일 농장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튜티힐인데, 모돈이 120두 정도인 작은 농장이예요. 이렇게 작은 농장에서만 버크셔를 수입했으니, 그 수가 적었고, 따라서 금방 근친이 돼 도입 후 얼마 안가서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겁니다. 많은 자료를 검토 분석하고, 일본 가고시마 흑돼지 농장 등을 둘러보면서 제가 하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죠."-결과적으로 다산육종과 박사님이 이끌어 온 남원흑돈클러스터의 흑돈 사업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되는데요.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돼지 사육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흑돼지 사육은 안되는 사업입니다. 그걸 육종 개량 등으로 적극 활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성이 없는 사업이란 얘기죠. 그래서 대기업들이 하지 않는 거죠. 저는 육종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지역(남원시)에서 흑돼지 아이템을 갖고 흑돈클러스터를 하자고 했고, (육종을)배운 게 죄고, 지역에 기여하고자 해서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에 참여하게 됐는데, 비전문가는 뛰어들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흑돼지 사업은 끊임없이 연구 노력하고, 새로운 모토를 가지고 끌어갈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의 흑돼지 사업은 이제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섰고, 권할 수 있다고 봅니다.-흑돼지 사업의 성공은 결국 차별화된 맛인 것 같습니다.그렇습니다. 버크셔사업은 고기를 팔려고 하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별화된 맛, 음식문화를 팔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는 그런 음식사업을 잘 하는 사람,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밸류라인을 구축하고자 노력합니다."-박사님은 요즘 농업의 6차산업화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그렇습니다. 저는 버크셔의 가치를 공유하는 밸류라인을 구축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6차산업 구조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고품질의 순종 버크셔 육종 및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 부위별 가격 불균형 해소를 위한 다양한 상품개발, 밸류라인 구축을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 SNS마케팅 등을 통한 유통 확대, 문화가 있는 마케팅 등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부인이 맡아 하고 있는 지리산생햄 가공장을 연계한 6차산업 구조도 구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생햄은 돼지 뒷다리를 천일염에 절인 후 1년 이상 발효시켜 만드는 고급 가공식품입니다. 운봉은 해발 500미터의 청정한 자연조건을 갖췄습니다. 또 다산육종이 고품질의 버크셔 뒷다리를 공급합니다. 명품 생햄 생산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죠. 스페인 이베리코생햄(하몽)이 생산되는 가공공장과 농장, 유통망 등을 벤치마킹했고, 저희 지리산생햄은 요즘 국내에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생햄은 부가가치가 매우 큰 사업 아이템입니다. 신세계백화점서 팔리는 하몽은 뒷다리 하나가 430만원에 달합니다. 돼지 뒷다리가 두 개이니 소 한마리 가격인 셈이죠. 지리산흑돈 생햄 가공장을 운봉 뒷산 중턱에 마련한 5600평 부지에 세울 계획입니다. 카페와 펜션까지 만들어 지리산둘레길 여행자, 관광객들이 운봉에 머물면서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선보일 것입니다. 6차산업은 꿈의 산업입니다. 농수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치를 향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사업계획을 세워 추진하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김제 민간육종단지, 농진청 혁신도시 입주 등 계기로 전북이 육종의 중심지로 부각할 정도로 전북은 기회를 잡고 있다. 종자, 육종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종자산업은 앞으로 가치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요리할 때 양념이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중요했지만, 녹차를 직접 먹인 돼지고기와 단지 녹차가루를 뿌린 돼지고기가 다르듯이, 종자는 가치의 척도가 되고 산업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종자가 좋지 않으면 산업이 안되는 거죠. 종자, 육종 분야에서 전문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현장에서 손에 흙과 똥을 묻히며 연구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귀농하려는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그동안 귀농교육을 다니면서 강조한 것이 젊은가. 기술이 있는가, 3억 원이 있는가다. 만약 이 세가지가 충족되지 않은 채 귀농하고자 한다면 도시에 사는 동안 자기가 아는 사람 50명만 확실히 챙기라고 권합니다. 귀농해서 생산한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충성도 높은 도시 소비자를 확보하는 마케팅 전략을 사전에 펼치라는 것이죠. 꾸러미사업이 이런 식이죠. 귀농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가치를 만들 궁리를 하고, 실력을 쌓은 뒤 귀농해야 성공합니다."● 박화춘 박사는 가축육종학 전문가남원흑돈클러스터 사업 성공 견인박화춘 박사는 학생시절 하룻밤 자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면 쌀 10가마를 벌수 있다며 공부했다. 외길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 있으면 열심히 할 뿐이라는 신념도 그의 뼛속까지 배어 있다. 홀어머니의 고생을 보면서 자란 탓이다.그는 운봉에서 초중고를 나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해발 500m 고지대인 운봉에서 자란 그는 집에서 키우는 흑돼지에 친숙해 있었고, 축산고를 거쳐 대학도 축산학과를 선택했다.가축육종학으로 석박사를 취득한 그는 1994년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축산과학원 축산연구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현장을 중시, 1996년 축협중앙회 종돈개량부장으로 일터를 옮겼다.그는 돈이 안되는 농업, 부가가치가 없는 농업은 머슴살이 농업이라고 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를 좌우명으로 삼은 까닭이다. 이같은 생각이 그를 공무원에서 현장이 더 중시되는 축협으로, 그리고 농장으로 이끌었다.그는 육종 전문가답게 귀농 10년만에 2만평이 넘는 농장을 일궜고, 이곳에서 버크셔 종돈과 새끼 등 1만 2000두의 돼지를 기르고 있다. 남원흑돈클러스터 사업을 주도해 궤도에 올려놓았고, 그의 생햄은 2012년 전주국제발효식품엑스포를 찾은 영부인 김윤옥 여사의 큰 관심을 받을 만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그는 농업이 인간의 가치, 존엄성을 파는 사업이 돼야 2세들도 긍지를 갖고 자랑스럽게 영위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농민들이 일할 환경을 만들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돼지농장이 성공하려면 고기 소비처인 식당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건강과 힐링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고품격 음식문화가 자리잡아야 농장도 함께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급과 보통의 차이를 인정해 주는 풍토를 만들어 주어야 농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음식업을 고급 서비스업으로 만들어 정부가 지원해야 일자리가 늘고 결국 농업이 산다고 말한다. 그의 지향점은 6차 산업화의 성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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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4.08.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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