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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막판 변수 : 단일화·逆단일화·小단일화

이번대선은 과거와 많이 다르다고들 한다. 특히 당선 예측에서 더욱 그러하다. 과거 같으면 30일 전 앞선 후보가 대부분 당선이 되었지만, 대선 2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예측 불가다. 한마디로 이번대선은 백중이면서도 혼란스럽다. 그럼 백중이면서 혼란스러운 이번 대선의 막판 변수는 무엇일까? 대체로 선거는 정치세력간 구도로 고정표를 모으고, 후보가 부동표를 더해 득표를 완성한다. 그리고 전체 득표 100을 기준으로 본다면, 구도로 득표하는 것이 약 70%, 후보 득표가 약 30%정도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구도를 만드는 국민들의 정치성향 즉 보수 중도 진보가 약 1/3 비율로 황금율이라 할수 있는 균형이 유지되어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다. 또한 정당 지지율에서 있어서도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오차범위내에 있다. 이러다 보니 득표의 약 70%를 차지하는 구도 경쟁에서 백중이다. 그럼 후보 경쟁력은 어떠한가? 보통 후보에 대한 국민들의 검증은 후보의 정책이나 공약, 도덕성, 국정운영 등이지만, 선거에서 정책이나 공약은 막판으로 갈수록 상호 수렴이 되어 변별력이 없어지고, 국정운영에서도 모두가 통합과 민주정치를 이야기하기에 역시 변별력이 없다. 결국 남는 것이 도덕성 검증이지만 현재 선두 두 후보를 보면 후보자와 배우자 관련 문제들이 데칼코마니와 같이 비슷하다. 그 것도 긍정적인 측면 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그러하다. 그러다 보니 후보검증이 막판까지 정책이나 국정비전 보다는 도덕성 중심으로 네가티브공방이 이어지고, 그것조차 승부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막판까지 혼란스럽다. 이와 같이 결판이 나지 않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선거판을 기울게 만드는 마지막 변수가 단일화다. 단일화는 백중을 이루고 있는 이념성향과 정당 지지율의 그 밑에서 끓고 있는 유권자의 운동 에너지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여론조사에서 정권 재창출과 정권교체 여부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국민에게 물어보면 선거초반보다 격차가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권 재창출 보다는 정권교체 에너지가 더 크다. 그리고 정권교체 에너지가 막판까지 이렇게 큰 것은 문재인정부의 일방주의적 국정운영에 대한 피로감과 반감이기도 하다. 이는 달리 말하면 다음 정부에서는 협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고 단일화는 협치와 공동 정부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결국 단일화는 이러한 기대와 에너지를 모으는 마지막 퍼즐인 것이다. 이번 대선 막판인 지난 13일에 안철수 후보가 쏘아올린 안철수와 윤석열간 단일화는 일주일만에 안철수의 단일화 철회로 일단락되는 것 같지만, 꼭 그렇게만 볼수도 없다. 오히려 안철수의 단일화 철회로 판세가 백중이 되면, 두 후보간 단일화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문제는 안철수와 윤석열 간 단일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은 反문 정권교체 에너지에 의한 야권 단일화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수 있다. 즉 윤석열과 안철수간의 단일화다. 그러나 일단 두 후보간 단일화가 결렬 모습을 보이자 안철수와 이재명간 단일화도 나온다. 逆단일화다. 역단일화가 가능한 것은 이재명이 소위 친문 후보가 아닌 비문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가능성이 없다고 할수도 없다. 뿐만 아니다. 군소 후보이기는 하지만 이재명과 김동연간의 小단일화도 거론되고 있다. 김동연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비주류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단일화는 정권교체 에너지를 일부 잠식하는 비문연대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단일화는 정권교체론의 에너지에 기반하지만 윤석열과 안철수간 단일화는 반문에너지인 반면, 안철수와 이재명, 이재명과 김동연 단일화는 비문 정서를 에너지로 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단일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전망이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단일화가 선거 막판 최대 변수라는 점뿐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막판까지 혼란스러운 백중이다. 그러나 단일화를 선거이기에 이겨야 하는 후보들의 절실한 필요성에 의한 선거공학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협치와 공동정부에 대한 일부 국민의 정서가 더 큰 에너지이며, 그러기에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국민이나 지지자의 요구를 후보들이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선거에서 유권자를 이기는 후보는 없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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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4 15:25

봄날엔 할 일이 많다

묵은 매화나무 가지에 꽃눈이 맺혔다. 혹한을 견딘 매화나무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설레곤 한다. 매화 맑은 향기가 공중에 퍼질 땐 사는 일이 팍팍해도 우리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하지만 봄이 올 때마다 나는 딸꾹질 하듯이 찾아오는 우울증에 짜증을 내고, 대인기피증으로 고립된 채 지내며, 해결해야 할 문제를 미루고 회피한다. 해질녘 핏빛에 잠긴 붉은 석양 아래 지친 새와 같이 깊은 피로에 사로잡힐 땐 스스로를 구제불능의 실패자로 여기고, 자주 통제력과 의욕을 상실한다. 우울증은 일조량이 준 겨울을 나면서 겪는 환절기 증후군이다. 뇌가 우울증에 잠식되면 사고의 균형을 잃고 모든 정보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인지 왜곡(cognitve distortion)’에 빠져드는 까닭이다. 비현실적 사고에 과몰입 하며 비관에 기울어 종종 자해나 자살 같은 나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울증 따위에 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그러니 나는 우울증으로 낙담하거나 허송세월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금싸라기처럼 반짝이는 햇빛 아래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금생의 시간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 어린 날의 봄은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반짇고리에서 찾은 골무를 끼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동안 나는 어린 동생과 뒷동산에 올라 새 둥지를 찾아 돌아다녔지. 저녁 때 어머니가 작년에 거둔 청둥호박으로 끓인 호박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한 이불 아래 잠 들었지. 호박죽 먹고 한 이불 아래 잠든 어린 형제는 재속 프란치스코 수도회 형제만큼 신실한 믿음을 갖진 못했지만 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가늠하는 어른으로 자라났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랑잎처럼 이승을 떠났지만 세상은 그때보다 더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천지간에 봄이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너무나 많은 이별을 겪고 맞는 이 봄날이 난생 처음 맞는 봄이 아니라고 슬퍼할 까닭은 없다. 씀바귀와 뿔남천에게 인사하자. 겨우내 추위에 시달린 길고양이에게도 인사하자. 청매화 몇 송이 피었다 진 뒤 양지바른 데 선 산수유 생강나무 가지에서 피어나는 노란 꽃을 환대하자. 봄은 벌써 저 남쪽에서 북상을 서두른다는 소식이다. 지금은 다랭이 논에 물이 차오르고, 물찬 논에서 우렁들이 새끼를 치는 봄날을 기다릴 때다. 입춘 지나며 한랭전선은 북쪽으로 밀려났다. 어제도 오늘도 볕이 좋았다. 볕 좋은 날은 양팔을 휘저으며 발목이 시큰해질 때까지 걷다 돌아온다. 내가 사는 파주의 대기를 휘젓는 바람 끝은 아직 차갑다. 하지만 어깨에 다정하게 손 얹듯 내리는 도타와진 볕 아래 걷노라면 팔다리에 새삼 피가 잘 돌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건 신경화학전달물질인 도파민, 세레토닌, 엔도르핀 같은 호르몬이 돌기 때문일 테다. 오후엔 기름 두른 솥뚜껑에 배추전을 부쳐 막걸리 한 잔을 마신 뒤 ‘한 번도 길 놓치지 않고 오는 운명 같은 저녁’(이기철)을 호젓하게 기다릴 일이다. 밤엔 평생 가난했지만 안빈낙도를 꿈꾸던 김관식 시집을 꺼내 읽고, 오래 소식이 끊긴 지인들에게 안부 편지를 쓰자. 언 강물이 풀리고 땅 속 구근들은 지표로 새싹을 밀어 올리는 중이다. 봄날엔 동내의를 벗어 빨아 널고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자. 사랑이 끝났다면 사랑 이후의 사랑을 꿈꾸자. 새들은 더 힘차게 공중을 활강할 때, 숯을 굽는 이들은 산에서 숯을 굽는 일에 열심이고,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는 바다에서 숭어를 잡는 이들은 그물에 걸려 퍼덕이는 숭어 몇 마리를 데리고 온다. 꽃들의 잔치에 불려 나온 꿀벌들이 잉잉대며 노래할 때 우리는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나 어린 인류를 보살펴야 한다. 만물이 움트고, 뻗고, 피고, 생동하는 봄날엔 먹고 노래하고 사랑하라. 우리에겐 할 일이 많다. 봄이 귓가에 소곤거리는 말을 경청하자.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을 배우고 익히자. 길고양이가 먹는 밥에 독약이나 푸는 이들처럼 쩨쩨하게 살지는 말자. 짐승이든 사람이든 어린 생명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자. 키가 한 뼘쯤 커버린 어린 것을 무릎에 앉힌 채 가갸거겨 한글을 깨우쳐 주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도록 도와주자. 주말엔 이른 아침밥을 해먹고 지어미 지아비가 손 맞잡고 고창 선운사 뒤편 대웅보전에나 찾아가서 동백꽃이 피었나 아직 안 피었나 보고 돌아오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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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17 14:19

미래를 바라보기

태어나 처음으로 달력에서 입춘이 언제인지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벌써 지나 있었다. 아직 영하의 날씨인데 입춘이 지났다니 당황스러웠다. 무언가 앞서가는 기분으로 달력 앞에 섰는데 여전히 한참 뒤처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다가오는 절기는 우수(雨水), 눈이 녹아 빗물이 된다는 시절이다. 어쨌거나 나는 달력에서 절기를 찾아본 이날을 기념비적인 날로 여기기로 했다. 나는 드디어 미래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해본 성격검사에서 제일 먼저 ‘과거지향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듣기 좋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더 높이 쳐주는 쪽은 ‘미래지향적 인간’이다. 한반도에 사람이 정착한 이래 언제나 올빼미형 인간은 아침형 인간에게 구박을 받았고, 대한민국이 공화국이 된 이후로는 언제나 과거만 생각하지 말고 미래지향적 시야를 가지라고 잔소리를 들었다. 과거지향적 올빼미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언제나 무언가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것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과거지향적 인간이다. 나에게는 이미 일어난 일만이 실체다. 미래에 대해서는 ‘어찌 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예상하고 계획한다는 것을 무용하게 여긴다. 한 친구가 아이들의 교육비, 식비, 연료비, 통신비 등등을 생각하며 올해의 가정 예산을 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내 눈에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램프를 문지르는 것처럼 신기하게 보였다. 내가 얼만큼 먹고 무엇을 할지 미래의 일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미리 계획을 세우면 그대로 하기 딱 싫어지는데. 갑자기 스스로 미래지향성과의 첫만남이라고 뿌듯해하며 절기를 찾아보게 된 것은 내가 식물을 기르는 취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한지는 어느새 2년이 넘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도 남들처럼 집안에서 즐길만한 취미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식물 가꾸기가 어느새 2년을 넘어 3년차에 접어들었다. 초보자의 손에 맡겨진 식물들의 운명은 녹녹치 않았다. 화원에 있을 때는 싱싱한 모습이었는데 우리집에 데려오면 비실비실 앓거나 벌레가 생기고 곧 죽었다. (식물을 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식물이 죽는 것을 초록다리를 건넜다고 부드럽게 표현한다.) 죽느냐 사느냐가 다급해서 식물의 모양이나 건강상태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3년차가 되자 나의 식물들은 우리 집 환경에 적당히 적응한 상태가 되었다. 이제 식물이 죽을까 날마다 들여다보며 노심초사하는 초보 단계를 벗어나, 나는 드디어 미래를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사람 아이와 고양이들을 키워왔지만 그들은 미래를 생각할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고양이는 하루하루 늙어가니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 아플 뿐이고, 사람 아이는 그저 예전에 예뻤던 모습을 떠올리는게 최고라고 이미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식물 기르기야말로 미래를 생각하기 좋은 취미생활이다. 시간이 흐르면 식물은 점점 커다래지는데, 무작정 물과 비료만 먹여 덩치를 키울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식물이 어떤 형태를 가지게 해야할지 미리 계획하고 때를 놓치지 않게 가지치기를 해서 아름다운 수형이 되도록 유도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식물이 지금 비실비실하고 상태가 좋지 않아도 그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식물의 상태는 당연히 계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조차 모른 채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으므로 나에게는 큰 깨달음이었다. 그것이 내가 달력에서 입춘을 찾아본 이유다. 예전에는 비실비실한 식물이 안타까워서 무작정 영양제와 물 세례를 퍼부었다면, 이제는 봄이 올때까지 초췌한 시기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이 지난 2년동안 식물을 키우면서 배운 것들이다. 드디어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한가지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되기도 한다. 미래는 지금보다 나을 수 있고, 그때까지 나는 남루한 시간을 조용히 견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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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10 19:34

윤석열에게 이런 선택은!

윤학 변호사 내게는 새해에 꾸는 꿈이 있다. 아니 우리 국민 모두의 꿈일 것이다. 진정 국민을 위하는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 그러나 찍을 놈이 없다는 얘기가 도처에서 들린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은 기존의 정치 문법을 버리고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동안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온 나라를 헤집어 놓은 폐해를 목격해 온 국민들은 지금 정권교체의 마법에 걸려 있다. 이 집단적 마법을 이용해 정치인들은 정권교체를 마법의 주문처럼 외치며 권력을 서로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수없이 정권교체를 해오지 않았던가. 이번에 정권이 교체된다 한들 대통령에게 또다시 권력이 집중된다면 무슨 소용인가. 윤석열 후보는 정권교체를 위해 선거에 나섰다고 끊임없이 공언한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은 박빙이다.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마저 어쩌면 선거 날의 운에 좌우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야권단일화만이 정권교체의 확실한 길임을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명백히 알려주고 있는데도 단일화에 선을 긋고 있다. 정권교체가 그의 진정한 소망일까? 국민들은 국가를 잘 이끌어 갈 비전을 바라며 정권교체를 말하고 있다. 정권교체는 포장일뿐 사실은 그 내용물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포장만 크게 외치는 윤 후보에게서 그 내용물을 보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다. 과거 열렬한 지지를 받고 당선된 대통령들도 불행하게 물러났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노무현도... 대통령 권한의 비대화가 그 원인이었다. 오늘 문재인 정권의 문제도 권력 집중 때문 아닌가.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권력으로 시장에 개입해 부동산이 폭등했고, 공수처라는 괴물기관을 만들었으며, 탈원전 고집으로 자연환경만 파괴했다. 현 정권의 힘이 분산되어 있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상은 아예 못 했을 것이다. 그냥 놔두기만 하면 잘 해낼 국민들이 아닌가! 지금 국민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정권교체라기보다 권력의 분산이다. 역대 가장 성공적인 정부를 이끌었다는 김대중은 선거를 앞두고 도박을 하지 않았다. 김종필과의 연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권력을 나누었다. 경제와 과학, 환경은 김종필 총리에게, 법무, 국방, 행정은 대통령이 관장하는 연합정부를 꾸렸지만 국가적 역량을 키워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윤 후보는 정권교체라는 외침이 그의 진심이라면 지금 도박을 할 때가 아니다. 보수를 괴멸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데도 지지율이 오르자 모여든 보수 정객들, 그들이 단일화나 연합정부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권력이 비대해야 손쉽게 한 자리 차지할 그들이 권력의 분산을 바라겠는가. 역사는 인간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남용하기 마련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권력이 집중되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권력을 좇아 몰려든 부패한 자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문재인 정권의 비리를 척결하려다 시련을 겪으며 대통령 후보까지 나서게 된 윤 후보야말로 그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힘이 있을 때 손을 내미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힘 있는 사람이다. 잠재지지율이 높은 안 후보의 손을 잡고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여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끊어내겠다고, 과학 경제 교육 보건 분야의 안 후보 장점과 국방 법무 외교 행정 분야의 윤 후보 장점을 살려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한다면 투표장으로 향하는 국민들의 발걸음은 가벼워질 것이다. 그렇게 새 대통령이 탄생된다면 갈라진 보수와 중도는 물론 진보층으로부터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다. 윤 후보라면 한번 시도해 볼 일이 아닐까. 윤 후보가 바라는 정권교체가 단지 문재인에서 윤석열로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권력의 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없애고 권력을 분산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권으로의 교체라고 믿고 싶다. 윤석열의 비전과 안철수의 비전이 빛을 발한다면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에 기반한 국가의 꿈도, 안철수의 과학기술 중심 국가의 꿈도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 국민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온 국민이 그런 희망을 품고 투표장에 나간다면 얼마나 축복받는 나라가 될 것인가.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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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03 19:26

대선 지지율 40%와 후보단일화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이재명 지지율이 35%40% 박스권이다. 윤석열도 지지율 회복에도 불구하고 40%를 확실히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아직까지 어느 후보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대선 승리를 위해 넘어야 하는 선은 40%, 45%다. 사실상 양자대결일 경우는 45%, 다자대결일 경우는 40%가 기준선이 된다. 실제 역대 대선의 당선자의 득표율을 보면 13대 노태우 36.6%, 14대 김영삼 42.0%, 15대 김대중 40.3%, 16대 노무현 48.9%, 17대 이명박 48.7%, 18대 박근혜 51.6%, 19대 문재인 41.1%로 사실상 양자 대결이었던 16,17,18대 당선자 평균 득표율은 49.7%이며, 나머지 4차례의 다자 대결 평균은 40.0%였다. 따라서 여론조사의 부동층을 감안하면, 다자대결에서는 40%, 양자대결에서는 45%를 넘으면 이기는 선거로 본다. 그리고 이번 대선은 다자 대결이기는 하나 현재까지는 양자에게 표쏠림 현상이 나타나 40%가 아니라 45%가 넘어서야 할 기준이다. 그럼 왜 40%가 그렇게 넘기 힘든가? 첫 번째 이유는 대선후보의 선거지지율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상대평가에서 당락이나 찬반을 결정짓는 기준은 50%이다. 50%가 만점인 것이다. 반면 대통령 지지율은 국민모두 아울러야 하는 절대평가 지표이기에 100%(점)가 만점이다. 그래서 이재명 지지율 35%40%를 대통령 지지율 40%보다 낮다고 비교 할수 없다. 오히려 이재명의 3540%대 지지율이 대통령 지지율 40%대보다 더 얻기 어려운 수치이다. 즉 대선후보의 지지율 40%는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 40%가 아니라 80%에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만큼 대선후보들의 지지율이 힘들다. 두 번째는 국민이 만들어 준 균형과 견제의 운동장이다. 87항쟁이후 탄핵이나 국정파탄과 같은 특정시점을 제외하고 국민의 이념 분표를 보면 보수․중도․진보가 각각 1/3로 정도였다. 그야 말로 균형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절묘한 황금율이다. 한길리서치 아주경제 1월 4주(2224일, 1064명 조사로 이하내용은 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한길리서치 홈페이지 참고) 조사에서도 보수 31.0%, 중도 39.9%, 진보 29.3%였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 후보가 각 진영의 지지를 모두 모아도 절대 40%를 넘어설수가 없다. 즉 중도의 마음을 얻어야만 40%를 넘길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대선에서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다. 세 번째는 대선후보의 비호감도다. 선두 후보의 호감도 조사에서 비호감도가 60%전후인 반면 호감도는 40%내외다. 후보들 스스로가 40%에 갇혀버린 것이다. 네 번째는 40%전후의 문제인 대통령의 지지율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의 특징은 평가가 양극단형이다. 즉 바가지를 엎어 놓은 정규분포가 아닌, 오히려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매우 잘함과 매우 잘못함으로 치우친 양극단형 평가다. 특히 매우 잘못한다는 평가가 높다보니 높은 정권교체비율로 나타난다. 한길리서치 같은 조사에서 정권교체가 50.2%, 정권재창출이 38.9%다. 이재명 입장에서는 문재인 지지율 40%와 40%가 안 되는 정권재창출은 뛰어넘어야 하는 벽과 한계가 된다. 특히나 문재인 대통령이 40% 지지율을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레임덕 없는 기준으로 여기고 부자나 제대말년 병장 몸조심하듯 임기말 관리를 하면 이재명은 더욱 힘들어진다. 또한 문대통령의 40% 높은 지지율은 윤석열에게도 극복해야 할 벽이다. 단지 그 벽의 높이가 이재명보다는 덜 높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2중 3중의 벽들이 합집합보다는 교집합으로 작용하여, 지지율의 확장성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균형과 견제의 민심과 고정층은 강고하고, 이를 극복해야 할 후보들은 오히려 비호감도가 높으니 40%가 마의 벽이 된 것이다. 만약 두 후보가 마의 40%대 지지를 확실히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후보단일화라는 선거공학이 또 다시 등장한다. 막판에 안철수와 단일화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그렇다고 단일화도 낙관할수 없다. 만약 단일화 조차 안될 경우, 결국은 어느 후보가 이기든 40%를 넘기기는 하겠지만 피말리는 선거가 될 것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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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27 17:20

야권이 바라는 정권교체의 길

- 윤학 변호사 권력이 커갈수록 남용하려 드는 약한 인간들, 그들이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그렇게 스스로 약자로 전락했다. 이 정권 들어서도 권력 남용의 그림자가 온 나라에 그늘을 드리웠다. 조국사태는 그 절정이었다. 그때 한 사나이가 거대 권력에 맞섰다. 칼 한 자루의 검찰총장이 수천 자루 칼을 가진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다니! 현 정권은 모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권력 남용이 만들어 낸 것이 대선 후보 윤석열이다. 권력 남용에 진저리치던 국민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 환영에 답하기만 하면 대선 승리는 떼 놓은 당상이었다. 그 답은 대통령이 되어도 권력에 취하지 않으리라는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리멸렬한 야당 대신 그에게 희망을 걸었던 나는 그를 만날 때면 “윤 총장! 당신이 무식한 줄만 알면 대통령이 될 것이오” 직언을 했다. 검찰의 우물에서는 출중했다 해도 세상의 바다에서는 턱없이 부족할 터라 겸손하기를 바라서 일부러 강하게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첫 거보는 국민의 힘 입당이었다. 수십 명의 의원들이 그를 에워쌌다. 목소리에서도 걸음걸이에서도 권력자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대통령이 되면 또 어떤 권력 남용의 유혹에 빠져들지 국민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세를 넓혀갈수록 그의 빛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가슴 속에 품은 비전이 있다면 가득 차올라 그 비전을 내놓기에도 여념이 없을 터인데 정권교체만 부르짖었다. 그것은 권력의 향방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으로 비쳐져 오히려 정권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 같았다. 입법, 사법을 장악한 여당이 집권하면 불의를 정의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권력 남용이 또다시 행해질 것 아닌가. 나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절망하며 밤을 지새울 국민들도 스쳐 갔다. 나도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 나도 힘에 의지하는 사람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내 가슴에도 비전이 있다면 힘이 있건 없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야권에도 서로 견제할 후보가 있으면 오히려 건강한 후보가 탄생할 것이다. 그래, 안철수를 만나보자!’ 서울시장 도전에 실패해 다소 위축되어 있는 그를 지난 9월 만났다. 나는 그에게 또 한 번의 대선 도전을 해야 할 이유를 쏟아냈다. “앞으로 윤석열의 지지율이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때를 대비해 대체할 후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중도의 지지를 받는 경쟁력 있는 야권후보가 나오면 윤 후보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 오히려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 손으로 사업을 해 돈도 벌어 보고 실패도 성공도 하고 정당도 운영했으니 이보다 더 국민의 실생활을 잘 아는 대통령이 있겠느냐. 더구나 과학자로 의사로 살아온 안철수야말로 첨단과학 시대에 어울리는 지도자다.” 초면인데도 그는 나의 말에 귀 기울이며 메모도 했다. 그에게서 인품이 느껴졌다. 한 달 후 그는 대선 출마 결심을 알려왔다. 그의 장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그의 ‘말’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 그를 만나 솔직하게 쓴소리를 했다. 그는 자존심 챙기지 않고 내 조언대로 ‘말’ 연습에 집중했다. 그에게서 구태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당당함이 느껴졌다. 얼마 후 나는 그 ‘말’ 코칭 이야기를 글로 썼다. 대통령 후보로서의 이미지에 흠이 된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면 글을 내지 않으려고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나에게 누가 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나를 안철수 지지자로 볼 거라는 염려였다.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에만 관심 두는 지식인, 정치인만 보다가 남의 입장까지 배려하는 그의 인간성이 깊이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은 구태에 물든 정치인이나 언론인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겠구나!’ “나는 윤석열!” “나는 이재명!” 하던 사람들도 요즘 ‘찍을 놈이 없다’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안철수를 지지하자니 표만 분산될까 봐 야권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딜레마를 푸는 방법은 없을까? 이제부터 구태의연한 단일화의 틀을 벗어던지고 윤과 안이 세 불리기나 상호비방 없이 비전과 정책만으로, 인품과 능력만으로 경쟁을 하여 창의적인 선거판을 만든다면! 우리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다행히 윤 후보가 매머드 선대위를 해체하고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안철수 후보도 중도층의 지지를 받아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 두 후보도 더 성숙해지고 국민들도 더 성숙한 선택을 한다면 이보다 더 경쟁력 있는 후보는 없을 것이다. 그 길만이 야권이 바라는 정권교체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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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9 13:57

김제시민의 안전할 권리 빼앗는 행정은 그만

김제시의회 오상민 의원 평화롭고 조용한 황산면에 유해물질을 배출하는 아스콘공장를 증축한다고 하여 황산면과 금구면 주민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김제시청이 입안 반려처분을 하였으나 이에 황산면 토우세라믹이 전라북도에 행정심판을 청구하였고 김제시청이 패소하였다. 패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처분의 구체적인 이유와 근거를 청구인이 알 수 있도록 제시하지 않았고, 환경피해에 대해서도 아무런 객관적인 사실 및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며, 유해물질(발암물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전혀 없었다. 행정심판에서 김제시청이 패소한 후에, 후속 절차를 진행할 것이 아니라 처분의 구체적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여 재처분을 하여야 함에도 재결의 취지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후속 절차를 진행하였다. 필자는 2021년 9월 제252회 정례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하여 재처분을 요구하였으나 김제시는 결국 도시관리계획 결정 입안을 했다. 김제시는 재처분을 위한 중대한 사정변경이 있는지 등을 알아보려는 노력 등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고문변호사와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다며 후속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는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할 때, ①지역공동체의 활성화, ②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생활권 조성 등을 고려하여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스콘공장의 설립을 위해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과연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생활권을 조성을 고려한 것인지 김제시청에 묻고 싶다. 김제시청은 재처분하며 이런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길 바란다. 환경 피해에 대한 우려는 사업자가 증명책임을 하여야 한다. 울주군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김제시청의 재량적 판단이 현저히 합리성을 결여하였는지, 형평이나 비례의 원칙에 뚜렷하게 배치되는 등의 사정이 있는지에 관하여는 사업자가 증명책임을 하여야 한다. 아스콘 제조 공정의 성격에 비추어, 공해방지시설을 갖춘다하더라도 이 사건 공장의 운영과정에서 각종 환경오염이 발생할 수 있고, 특히 정제 또는 가공된 원료를 사용한다거나 어떤 특별한 최신 공법을 적용한다는 예외적 사정이 없는 한, 아스콘 공장은 「대기환경 보전법」에서 정한 특정 대기 유해물질 배출시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환경부 대기관리과의 대기오염물질 배출시설 인허가 업무 가이드라인에서도 아스콘 공장에서 「대기환경 보전법」상 대기오염물질이 배출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환경이 오염되면 원상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 사후 규제만으로 환경오염으로 인해 피해를 회복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미리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이다. 김제시청이 주장하는 울주군 대법원 판례로 모든 사례를 적용하여 처리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황산면 토우세라믹 입안 반려처분이 어렵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김제시청은 배출에 따른 환경적 측면에서 새로운 자료가 없는 한 후속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앞에 재처분의 근거와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심지어 황산면에 있는 토우세라믹 아스콘공장과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남양초등학교가 있어 아스콘공장에서 배출하는 발암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떤 질환을 앓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제시청은 환경적 측면에서 새로운 자료를 찾기는커녕 새로운 자료를 찾아 주어도 외면하고 있다. 울주군은 아스콘공장의 영종 산업과 산단 분양계약을 체결하고도 주민 반대가 심각해 이전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고 대법원에서 승소하는 판결을 끌어냈다. 더 늦기 전에 김제시청은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행정을 적극 펼쳐주길 바란다. /김제시의회 오상민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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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6 18:24

당신에게 웃을 용기

심윤경 소설가 늘상 뜻대로 되지 않을지언정 새해의 희망과 다짐을 꼽아볼만한 즈음이다. 작년 이무렵에 쓴 일기를 보니까 다소간 축 처진 어조로, 어쨌거나 희망을 담아서, 다가오는 2021년에는 보고싶은 사람들을 마음껏 다시 만나고 싶다고 적었다. 외향성인 나에게 사회적 거리두기의 1년은 힘들었던 것이다. 몽골 여행을 가고싶다고 적은 부분은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그 순진한 바람이 너무 안쓰러울 지경이다. 다시 1년이 흘러 코로나와 함께한 시간이 3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요즘, 해외여행 같이 거창한 것을 섣부르게 바라서는 안된다치고, 작년에 바랐던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올해는 이룰 수 있을까? 야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고 반갑게 안부를 묻는 친구들의 모임들 같은 것 말이다. 작년까지만해도 올해의 소망으로 꼽았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기 힘들만큼 내 마음은 위축되었다. 그런걸 바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해도 어디선가 철없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을 것처럼,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한 내 모습이 어느날 낯설어보였다. 그렇다, 마스크를 깜박 잊고 나선 것이다. 동승자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마스크를 챙겨 나왔다. 몇분 안되는 사이에 누가 타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 불안해하는 짧은 와중에도 나는 거울에 비친 낯선 내 얼굴을 흥미롭게 보았다. 집 밖에서 이렇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던 적이 없어서 중요한 속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거북할 지경이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개방된 실외에서도 마스크 착용이 필수라고 느끼는데, 그것은 감염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비난받을지 모를 가능성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게 질병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회적 비난이다. 작년 이무렵 일기장 속의 나는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의 공격에서 다같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언론의 분석기사를 기록하고, 백신의 빠른 개발에 기쁨과 기대를 표시했다. 가족 중에 고령자와 지병을 가진 고위험군이 많았지만 용감하게 제일 먼저 팔뚝을 걷었다. 그렇게 백신접종률이 충분히 높아졌지만 불행히도 집단면역이라는 이상향은 도래하지 않았다. 반갑게 맞이한 일상회복이 단 몇주를 견디지도 못하고 철회되고 오히려 추가접종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라는 소식에는 속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되었다. 이미 여러번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지만, 필연적으로 언젠가 우리는 코로나와 공존의 시도를 재개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마음엔 불안과 우려가 그득할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단시간 내 세계 최고 수준의 성인 접종률을 기록했으며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실하게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길에서 만나는 개개인들은 합당한 존중을 받을만큼 이미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의심과 질책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일상의 회복이 해외여행과 떠들썩한 친구들의 만남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정말로 그리워하는 것은 거리나 복도에서 만나는 낯선 얼굴들에게 별다른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날 날씨에 대해 낯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 별 뜻없이 미소를 던질 수도 있었던 날들의 따뜻했던 기억들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웃어준 날은 하루 종일 기분좋게 지내곤했다. 모르는 사이에 주고받은 호의가 주는 행복감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 평범하고 소박한 순간들이 진심으로 그립다. 긴 거리두기를 지속하는 새 우리는 바이러스에게 폐를 지키는 대신 마음을 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서로의 선택을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존중할 때가 되었다. 바이러스와 긴 싸움을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해나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믿고 따뜻하게 격려하는 웃음짓는 얼굴들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의 새해 첫 결심은, 어느날 마스크를 벗은 얼굴로 마주친 낯선 당신에게 다시 웃을 준비를 해야하겠다는 것이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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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3 19:59

야권이 바라는 정권교체의 길

윤학 변호사 권력이 커갈수록 남용하려 드는 약한 인간들, 그들이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그렇게 스스로 약자로 전락했다. 이 정권 들어서도 권력 남용의 그림자가 온 나라에 그늘을 드리웠다. 조국사태는 그 절정이었다. 그때 한 사나이가 거대 권력에 맞섰다. 칼 한 자루의 검찰총장이 수천 자루 칼을 가진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다니! 현 정권은 모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권력 남용이 만들어 낸 것이 대선 후보 윤석열이다. 권력 남용에 진저리치던 국민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 환영에 답하기만 하면 대선 승리는 떼 놓은 당상이었다. 그 답은 대통령이 되어도 권력에 취하지 않으리라는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리멸렬한 야당 대신 그에게 희망을 걸었던 나는 그를 만날 때면 윤 총장! 당신이 무식한 줄만 알면 대통령이 될 것이오 직언을 했다. 검찰의 우물에서는 출중했다 해도 세상의 바다에서는 턱없이 부족할 터라 겸손하기를 바라서 일부러 강하게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첫 거보는 국민의 힘 입당이었다. 수십 명의 의원들이 그를 에워쌌다. 목소리에서도 걸음걸이에서도 권력자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대통령이 되면 또 어떤 권력 남용의 유혹에 빠져들지 국민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세를 넓혀갈수록 그의 빛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가슴 속에 품은 비전이 있다면 가득 차올라 그 비전을 내놓기에도 여념이 없을 터인데 정권교체만 부르짖었다. 그것은 권력의 향방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으로 비쳐져 오히려 정권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 같았다. 입법, 사법을 장악한 여당이 집권하면 불의를 정의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권력 남용이 또다시 행해질 것 아닌가. 나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절망하며 밤을 지새울 국민들도 스쳐 갔다. 나도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 나도 힘에 의지하는 사람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내 가슴에도 비전이 있다면 힘이 있건 없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야권에도 서로 견제할 후보가 있으면 오히려 건강한 후보가 탄생할 것이다. 그래, 안철수를 만나보자! 서울시장 도전에 실패해 다소 위축되어 있는 그를 지난 9월 만났다. 나는 그에게 또 한 번의 대선 도전을 해야 할 이유를 쏟아냈다. 앞으로 윤석열의 지지율이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때를 대비해 대체할 후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중도의 지지를 받는 경쟁력 있는 야권후보가 나오면 윤 후보도 긴장을 늦추지 않아 오히려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 손으로 사업을 해 돈도 벌어 보고 실패도 성공도 하고 정당도 운영했으니 이보다 더 국민의 실생활을 잘 아는 대통령이 있겠느냐. 더구나 과학자로 의사로 살아온 안철수야말로 첨단과학 시대에 어울리는 지도자다. 초면인데도 그는 나의 말에 귀 기울이며 메모도 했다. 그에게서 인품이 느껴졌다. 한 달 후 그는 대선 출마 결심을 알려왔다. 그의 장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그의 말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 그를 만나 솔직하게 쓴소리를 했다. 그는 자존심 챙기지 않고 내 조언대로 말 연습에 집중했다. 그에게서 구태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당당함이 느껴졌다. 얼마 후 나는 그 말 코칭 이야기를 글로 썼다. 대통령 후보로서의 이미지에 흠이 된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면 글을 내지 않으려고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나에게 누가 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나를 안철수 지지자로 볼 거라는 염려였다.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에만 관심 두는 지식인, 정치인만 보다가 남의 입장까지 배려하는 그의 인간성이 깊이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은 구태에 물든 정치인이나 언론인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겠구나! 나는 윤석열! 나는 이재명! 하던 사람들도 요즘 찍을 놈이 없다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안철수를 지지하자니 표만 분산될까 봐 야권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딜레마를 푸는 방법은 없을까? 이제부터 구태의연한 단일화의 틀을 벗어던지고 윤과 안이 세 불리기나 상호비방 없이 비전과 정책만으로, 인품과 능력만으로 경쟁을 하여 창의적인 선거판을 만든다면! 우리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다행히 윤 후보가 매머드 선대위를 해체하고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안철수 후보도 중도층의 지지를 받아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 두 후보도 더 성숙해지고 국민들도 더 성숙한 선택을 한다면 이보다 더 경쟁력 있는 후보는 없을 것이다. 그 길만이 야권이 바라는 정권교체의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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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6 19:15

친박․친이, 대통령과 사면 그리고 윤석열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보수정당에는 친박∙친이라는 두 계보가 있다. 친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들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주의 성향 노선이다. 반면 친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자유주의 성향 정치를 했다. 이번 특별사면에서 두 전 대통령의 운명이 엇갈렸는데 52년생으로 형 만기가 2039년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특별사면이 된 반면, 11년이나 더 고령으로 2037년이 만기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외되었다. 사면 이유로 박 전대통령의 수형기간이 좀더 길고, 건강이 나빴다고는 하지만 친이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면직후 여론은 박근혜 전대통령편이었다. 27일 쿠기뉴스 데이터리서치조사에 의하면 박 전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65.2%가 잘했다(잘못했다 31.8%)라고 한 반면, 이명박 전대통령을 사면하지 않은 것에 대해 55.4%가 잘했다(잘못했다 39.3%)라고 했다. 왜일까? 혹자는 박 전대통령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딸이고, 여성이기에 연민의 정이 더 컸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그런의미에서 봐야 할 것은 두 대통령 즉 친박과 친이의 정치노선의 차이일 것이다. 두 진영의 정치 노선의 차이는 두 전대통령의 과거 선거 캠페인을 보면 확연히 들어난다. 이명박은 약체 정동영를 상대로 시장경쟁 해법을 제시하면서 국민에게 부자되세요라고 하고 새벽 국밥집에서 욕을 들으면서 경제나 살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반면 박근혜 캠페인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문재인을 상대로 냉혹한 시장경쟁에 대해 법치사회․원칙이 선 자본주의․패자부활전이 가능한사회 ․ 국민행복으로 맞섰다. 그 결과 이기기 쉽지 않은 선거를 이겼다. 두 사람의 선거캠페인을 비교 해보면 이명박은 국가나 민족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앞세우는 냉혹한 무한 경쟁체제 즉 신자유주였다면, 박근혜는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면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국민 행복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에 가깝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명박은 선사후공先私後公, 박근혜는 선공후사先公後私였다. 실제 두 대통령은 임기내 정책에서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경쟁원리를 놓고 본다면, 이명박 전대통령은 경제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까지 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심지어 교육에 까지 도입하여 평준화를 축소하면서 특목고, 자사고를 확대한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경제이외 교육과 같은 영역에서 경쟁체제 도입에 신중한 편으로 평준화 정책을 유지했다. 복지정책에 대한 입장도 달랐다. 국민에게 두 주장이 어떻게 받아졌을까? 아마도 냉혹한 경쟁을 이야기하면서 선사후공을 주장하는 정치인보다 경쟁을 하더라도 법과 원칙을 지키라면서 선공후사를 이야기하는 정치인이 훨씬더 책임감과 의무감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좀더 도덕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자유주의는 인기가 없었다. 거기다가 보수 자유주의자들은 이승만 전대통령을 앞세웠다. 그래서 국민 정서는 이명박 전대통령보다는 박근혜 전대통령에 훨씬 더 우호적이다. 이번 특별사면에 대한 여론도 그렇게 반영되었다. 이번 대선에서도 친박∙친이 노선이 후보들의 운명을 갈랐다. 최재형이 등장했을 때, 지지층에서는 기대가 켰다. 그러나 최재형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들고, 국가와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유주의 입장에 서는 순간 지지율이 꺾였다. 학습효과일까? 윤석열은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라고 정답을 맞췄다. 그러나 평소 정치적 소신이나 정책을 보면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리고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을 보면, 대다수가 친이다. 그래서 윤석열과 자유주의 정책을 폈던 인물그림 그림도는 국민들에게 호감도가 낮다. 그렇다고 박근혜 마케팅만 했던 친박 정치인들이 비교우위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친박과 친이로부터 자유로웠던 윤석열이 보수정당 후보가 되었다면, 친이와 친박의 과거 정책 노선에 대한 입장은 있어야 하고, 그런 차원에서 당내 정치인의 역할이 그려져야 했다. 아쉽게도 지금 윤석열 후보에게는 그런 컨셉이나 그림이 안보인다. 그래서 윤석열이 최근 고전을 하고 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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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30 19:15

배춧국과 동지 팥죽

장석주 시인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속절없이 지는 태양을 전송하자. 겨울은 태양조차 차갑다. 펄펄 끓던 여름의 야만적인 태양이 식은 지 오래다. 지나간 날은 끔찍했다. 레몽 끄노는 "악마들이 달군 게 태양"이라고 그랬지. 광기와 대의명분으로 태양이 극렬하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말똥 냄새가 나는 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눈(눈)과 얼음, 소금과 후추, 양초 여섯 개를 위해 마련한 겨울 스웨터를 장롱에서 꺼내 입었다. 스웨터를 입으면 저녁의 스산함은 운명의 순간으로 빛난다. 겨울 황혼은 잘 구운 빵 같다. 그걸 보는 게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어쨌든 동생이 빵을 달라고 떼를 쓰지 않는 건 사실이다. 동생은 환절기마다 오는 우울증을 제 방식으로 잘 견디는 중이다. 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에게 낙담이 찾아들었는데, 그건 뉴질랜드 산 마누카 꿀이 떨어진 탓이다. 그 대신 눈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산수유 빨간 열매들이 있음을 깨닫고 위안을 얻었다. 시들고 바스러지는 것들의 소리가 시끄러울 때 사소한 것에 상심한 기분은 함부로 방치된다. 한 해가 끝나는 것은 셰익스피어 4백 주기, 쓸모를 잃은 열쇠, 녹색 채소들, 일요일 저녁들, 빛나던 소녀의 미소가 주던 기쁨과 위안 없이 견딜 날들이 더 길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겨울마다 눈 내리는 오슬로에 가고 싶었지. 오두막집에서 눈 내리는 숲을 오래 바라보고 싶었지. 가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문비나무 어린 가지들이 뚝, 뚝 꺾이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 나는 평생 오슬로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 오늘은 서리 맞은 저 들판의 한해살이풀들이 닳아빠진 무릎을 꺾고 주저앉은 풍경이나 바라볼 뿐이다. 겨울에는 구절초, 꿩의비름, 도라지, 다알리아의 전성시대도 끝난다. 당신도 더 이상 젊지 않다. 새해엔 당신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골밀도도 성겨질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피의 고도(高度)가 낮아지고, 고아원의 복도에는 한기가 들어찰 것이다. 해마다 외양간에 매인 소는 몸집이 자라지만 어머니들은 조금씩 쇠약해진다. 어머니는 늙으신 뒤 부쩍 잠꼬대가 심하다. 사람이 늙으면 왜 어린 시절 꿈을 더 자주 꾸는 걸까?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장자리에 가랑잎이 쌓여 있다. 저 녹색의 시체들! 바람이 저들을 한데 모았을 테다. 파주 북쪽 하늘에는 쇠기러기들이 V자로 대오를 이룬 채 난다. 두어 마리가 그 대오에서 이탈한 채 뒤를 따른다. 아마도 날개 근육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새끼 쇠기러기일 것이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막내 동생을 생각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다. 낮엔 크루아상 하나를 아껴가며 먹고 해바라기의 회색 씨앗을 까먹으며, 그 많던 삼촌과 이모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한다. 오후 5시 무렵 이마가 차가워진다. 문득 겨울 낮은 짧고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일조량이 준만큼 행복도 준다. 점심에는 어머니가 끓인 배춧국을 먹는다. 배춧국은 슬픔을 달래주는 내 소울 푸드다. 어머니는 어쩌자고 그 맛있는 배춧국을 끓이셨을까? 나는 뜨거운 배춧국에 입을 데일까 후후 불면서 먹었지. 응달진 곳마다 추위가 가난한 집 자식들처럼 한데 모여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차갑고 청명한 겨울 저녁들이 더 자주 왔다가 간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다. 동지 팥죽은 귀신을 내쫓고 집안에 닥칠 흉사를 막는다. 그러니 아코디언을 팔아서라도 동지 팥죽은 꼭 먹어야 한다. 어머니가 다시 젊어진다면, 내가 어머니의 어린 아들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머니에게 떼를 써서라도 털모자를 하나 얻어 쓰겠다. 그러면 폭설이 쏟아져도 머리가 젖지 않을 텐데. 사는 동안 너를 미워한 것을 후회한다. 나는 더 착한 아들이 될 수도 있었지. 아, 어머니가 끓인 배춧국과 동지 팥죽을 먹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훌륭해지겠지.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겠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늙어버렸으니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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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3 19:23

함께 해요! 2060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숫자는 숫자에 불과한데 돌아보니 나는 매 순간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왔다. 공자가 열다섯에 학문에 큰 뜻을 두었고 삼십세에 홀로 설수 있었고 사십에 불혹하였고 오십에 지천명하였으며 육십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거슬리는 일이 없다 하였고 칠십에는 마음 가는대로 해도 법과 도덕에 저촉됨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고 살아오는 과정에 큰 의미를 부여했었다. 심지어 나는 열 다섯에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고 삼십에 홀로 서서 나를 책임질 수 있게 되었으니 공자의 삶의 형태를 닮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었다. 나는 고뇌로 가득찼었던 20대를 중국집 주방에서 보냈다. 더운 여름에는 그 흔한 선풍기 한 대도 없이 안팎에서 더해지는 열기를 견디어내야 했고 겨울에는 난로도 하나 없이 볶아지는 요리의 온기로 추위를 녹여야 했다. 폭풍한설에도 새벽에 나가 장을 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삼십여 년이 지나 육십 나이를 눈 앞에 두고 있고 치열하게 살았던 내 청춘의 시절로 다시 한번 돌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나는 20대 청춘들과 함께 하는 중국집을 열기로 마음 먹었다. 주위에서는 모두 하던 것도 그만두어야 할 나이 육십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만류한다. 하지만 나는 굳은 의지하나로 절차를 밟아나갔다. 이 시대는 청년들의 취업과 창업을 권장한다. 청년들의 창업을 돕고 지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창업해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창업을 하고 2030 청춘들을 찾아 나섰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20청춘 함께해요를 외친 결과 20세, 24세, 25세, 27세, 29세의 청춘들로 팀이 짜여졌다. 주방에서 일하다가 거기 양재기 좀 하나 주세요 했더니 양재기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그는 20세이다. 마늘을 찧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묻기도 한다. 살면서 김치를 담글 일이 없었을 터이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사물 하나를 놓고도 60대와 20대가 그것을 부르는 명칭이 달라서 발생되는 일인데 오히려 함께 웃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서점에 갔더니 MZ세대를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 몇 권 나와있다. 책도 두어 권 샀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책을 읽으면서 학습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개업으로 잡은 날이 올 겨울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일기예보가 나온다. 2년 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코로나19에 설상가상으로 오미크론 변이까지 겹쳤다. 연일 확진자가 증가하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는 다시 단계를 격상할 태세이다. 4인까지만 모일 수 있고 영업시간이 9시까지로 확정되면 외식업은 또 직격탄을 맞을 텐데. 나는 지금 외식업 개업을 앞두고 있으니 작은 쪽배에 청춘들의 꿈만 가듣 싣고 악천후의 망망대해를 향해 출항해야 하는 선장의 마음이다. 막상 출발하려니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있다. 라떼는 말이야로 들릴 수도 있겠다. 나 때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 배우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라떼는 전문가도 배출해냈고 장인도 만들어냈다. 지금은 일주일에 52시간만 일을 하라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52시간은 일하기도 바쁜 시간이다. 젊었을 때 더 많이 배워두라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업무외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하니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고심이 된다. 노동을 하는 사람이 노동에 따른 만큼의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한만큼 미래를 위해서 스스로 몰두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예외조항도 필요하다고 본다. 법은 양쪽 모두가 좋다고 느껴야 좋은 법이다. 새해에는 새로운 소망으로 모두 모두 함께 행복해 지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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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16 14:55

우리에게 이런 대통령 불가능한 것인가

윤학 변호사 곧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가 아니라 싸움판이다. 이재명 후보는 尹은 무능무식무당 3무라고 비난하고 윤석열 후보 측은 李는 무법무정무치라고 맞받아친다. 서로 물고 물리는 비난전이 선거판을 지배할 것이다. 국민들은 싸움꾼만 나왔다며 점잖은 체하면서도 공격을 잘 할수록 더욱 열광하며 지지를 보낸다. 상대를 제압할 만한 싸움꾼이 아니면 카리스마가 없어 깜이 아니라며 얼마나 무시했던가. 그러나 네 편 내 편 싸움에 맛들인 국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던가. 친구도 가족도 편이 갈려 얼굴 붉히기 일쑤다. 그런 국민들이라면 그토록 지지했던 대통령도 결국 비난하며 감옥에 보내고 말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나라인가. 국민들이 네 편이 못 돼야 내 편이 잘 된다는 경쟁적 사고에 빠져 있는 한 우리 앞에는 네 편 목 조르는 대통령만 기다리고 있다. 견제할 힘마저 빼앗아버릴 만큼 야당을 짓밟는데 능한 대통령만으로 국민들의 삶이 편하던가. 국민들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길, 네 편도 배려하며 함께 가려는 대통령은 불가능한 것일까. 10여 년 전 내가 만드는 <월간독자 Reader>와 경쟁 잡지가 함께 홍보를 하게 되었다. 참석자 500여 명 중 10퍼센트로 예상되는 독자를 서로 뺏고 뺏기는 게임이 될 것 같았다. 난감했다. 마이크가 주어지자 나는 그 잡지도 구독해달라고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잡지사에 예상보다 3배도 넘는 사람들이 구독 신청해주는 게 아닌가. 그때 한 신부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부님에게 한의사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한약 손님은 줄어드는데 길 건너에 또 한의원이 생겨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신부님은 먼저 남의 한의원이 잘되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은혜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 거리에 한약방만 더 늘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곳이 한약 거리로 소문나 손님들이 몰려들더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남을 위한 기도가 나를 위한 기도다! 어느 날 특강을 하고 나오는데? 한 아가씨가 다가와 제가 뭐라도 돕고 싶어요 했다. 나는 강의에서 사람들에게 정말 유익한 책을 만들고 싶은데 젊은이들이 대기업이나 공직만 선호해 늘 일손이 부족하다고 했었다. 내 강의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가 즉흥적으로 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몇 년 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연락이 왔다. 고액연봉의 외국계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 회사에 오겠다는 것이다. <월간독자 Reader>를 매달 읽으면서 더 가치 있는 삶이 살고 싶어졌다고 했다. 책 편집에 초짜인 그녀에게 그런 연봉을 줄 수는 없다고 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우리 회사로 출근을 했다. 그녀의 첫 출근날 나는 마음먹었다. 결국엔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해줘야지! 6년 전, 인구 감소로 집값이 떨어질 거라며 모두가 집 사지 말고 전세를 살라고 떠들어댔다. 이럴 때 오히려 집을 꼭 사야 해! 7천만 원 전세 살고 있던 그녀는 3억 원도 넘는 아파트를 사라는 내 말에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면 집값이 폭등할 것이 뻔했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파트값이 내려가면 내려간 만큼 내가 메꿔줄게. 꼭 집을 사! 내 말에 그녀는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샀다.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그녀의 집값은 네 배나 올랐다. 사람들은 말한다. 돈이 있어야 집을 산다고, 월급 한 푼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저축해도 몇십 년 넘게 걸리는 몹쓸 세상이라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봉이 높을수록 좋다고. 그러나 그녀가 집을 산 것은 돈이 있어서도, 몇십 년간 저축해서도, 연봉 경쟁에 앞서서도 아니었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선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남을 배려하다가는 손해만 볼 것 같은 이 험난한 경쟁 세상에서도 그것이 오히려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를 우리는 늘 경험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우리 회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상대를 쓰러뜨려야만 내가 이기는 게임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네 편은 몰락시키고 내 편만 떠받드는 나라의 국민들이 잘 살 수는 없다. 이제 우리도 네 편을 더 잘 공략하는 싸움꾼 정치인이 아니라 네 편도 배려하는 더 품격있는 후보를 우리 대통령으로 선택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진정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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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9 15:50

20·30, 더 이상 무시하거나 이용하지 말라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각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된 이후 각 후보들의 2030을 잡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 되고 있다. 과거 같으면 40대였을 텐데 분명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2030세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측면에서는 달라졌지만, 2030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가서는 모습을 보면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 과거 선거를 보면 민주당은 어차피 2030은 40대를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단지 2030이 투표장에만 많이 나오는 방도만 찾았다. 반면 보수정당은 2030에 대해 방도를 찾지 못하고 사실상 포기하거나, 중장년 전통적 지지층의 결집에 집중하면서 대책이 없다보니 2030의 투표율이 낮아지길 내심 바랬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보수의 바램과 달리2030이 투표장에 나오기 시작했고, 투표장에 나와서는 40대와 더 이상 동행을 하지 않으면서 민주당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2030을 잡기 위한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 소통이다. 청년과의 만남 이벤트를 만든다. 또 한편에서는 청년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영입한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벤트와 레토릭이 등장한다 With 석열이형. 그렇지만 무대만 바꾸고 비슷한 얼굴에 분칠만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다. 과연 제대로 된 혁신과 변화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그 얼굴이 이쁘게 보이고 다르게 보일까?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프레임과 2분법 구도로 단순화시켜 30대 워킹맘 공동선대위원장과 같은 상징조작으로 2030에게 마법을 건다. 그러면 과연 30대 공동선대위원장에 대해 2030이 우리를 대표하고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자신도 모르는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등장해 제1여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당대표와 같은 급에 올라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잔다르크라도 된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박탈감만 더 키울 것이다. 아직까지는 각 후보들의 2030 접근하는 방식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는 2030이 어느 후보에게도 마음을 잘 열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030이 더 혐오하는 과거의 방식으로 다가오니 더 거리를 두려 하기도 한다. 후보들이 다가가려는 2030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비합리성이다. 다시 말해 공정과 공존공생의 가치를 지향하며 합리적 논증과 민주적 소통 없이 후보들의 생각만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기에 보수나 진보 포함 정치권이나 후보들은 2030이 어떻게 교육을 받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어떤 이해관계에 절망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기존의 정치적 틀이나 화법으로 2030의 표심을 얻지 못한다. 2030은 먼저 교육에서 윗 세대와 많이 다르다. 2030은 학교에서 자기 주도학습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도출한다. 또한 다른 의견들과도 소통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을 배워왔다. 그러기에 2030은 합리적 논증이나 토론도 없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경쟁을 다르게 본다. 윗세대와 달리 경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력과 스팩을 쌓으면서 공정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승자독식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공존공생을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평등을 주장하는 40대와 다르다. 이렇게 준비해서 사회에 진출하려고 하지만 노동시장은 이미 먼저 진입해 조직화된 힘으로 노동 기득권을 지키는 40대세대에 막히고,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은 60대 이상 산업화 세대 등에 막히고 있다. 이제 막 취업을 하여 가정을 이룰 희망에찬 꿈으로 사회에 진출하려는 미래세대에게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절망적 벽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뛰어 넘으라고, 뛰어 넘지 못하면 너희들 능력의 문제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미래세대는 5060대을 꼰데라 하지만, 40대도 꼰데라 한다. 그럼 대선후보들은 2030표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2030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면, 그리고 그들이 쌓은 실력과 스펙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실질적 사회진출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국가 비전과 정책 및 공약을 만들어 주고 실현해야 한다. 더 이상 무의미한 이벤트나 공허한 레토릭, 그들이 선출하지도 않은 인물을 내세워 여론몰이하려는 상징조작과 같은 술수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젠 2030 자신들이 더 잘 알아가고 있다. 자신들이 어떻게 무시당했고 이용당했는지를.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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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2 14:58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장석주 시인 현실은 변화를 겪으며 요동친다. 이 변화는 감각적이고, 수량적이며, 실체적이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예전 세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변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가 사라지고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거쳐 탈산업사회로 들어선 지도 오래다. 그 사이 농업 인구는 소멸하거나 소수화되고, 디지털 뇌를 장착한 새로운 문명인이 몰려왔다.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한 후기 탈산업사회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자기 착취를 일삼고 피로라는 만성적 질병에 찌들어간다. 이 변화를 긴 시간 단위로 조망하면, 도로는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졌다. 살림 규모는 커졌고, 명목상 가계 수입은 늘었다. 해외여행이 늘고, 집값은 다락같이 올랐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음식점이나 음식 맛은 짜거나 달게 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 변화의 품목이다. 짜고 단맛에 대한 선호가 일반화된 탓이라고 추측하지만 음식 맛이 왜 이토록 달고 짜게 되었는지 그 균일화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딱히 알 수가 없다. 과거와 견줘서 책을 읽는 독자나 신문 구독자가 준 대신 스마트 폰,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색감이 화려하고, 촬영기법은 세련되었으며, 내용은 더 잔혹해졌다. 잔혹 범죄가 늘어난 현실을 머금은 탓일 테다. 하지만 피가 튀기는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고문받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경험이다. 어느 사회에나 청년들은 사회의 최전선에서 오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고 실감한다. 이들이 사회 변화의 촉매이자 발화점이 된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419혁명 세대, 일본 전공투 세대, 프랑스 68혁명 세대, 반문화반전운동을 이끈 미국 히피 세대의 중심은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청년세대는 취업절벽이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곤경 속에서 스펙 경쟁을 하느라 제 존재 역량을 다 쏟는다. 이들은 부의 양극화와 사회적 기회의 불공정에 분노로 들끓지만 불안과 강박을 안고 생존 게임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릴 뿐이다. 올해도 수능이 끝나고 50만명이 넘는 청년이 현실의 최전선으로 몰려나오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루저라고 불리는 소득 하위집단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할 것이다. 이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청년세대는 다른 취향과 감성, 시대정신, 마음가짐을 가진 개별자의 집단이다. 그럼에도 청년을 한 묶음으로 호명하는 움직임은 늘 있어온 일이다. 라이프스타일의 특이점을 끄집어내 청년세대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는 미디어의 작명술은 감탄할 만하다. 그 작명술에 따르면 88만원 세대가 몰려왔다 빠져나가더니, 90년대생이 오고, 지금은 MZ세대가 몰려온다. MZ세대가 물러난 자리를 또 새로운 청년세대가 채울 것이다. 과연 부쩍 척박해진 노동시장에서 구직 활동을 펼치는 오늘의 청년은 누구인가? 당신이 오늘 편의점이나 카페에서 만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 건설노동이나 배달노동을 하는 이 청년은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기성세대라면 그들은 당신의 딸과 아들이고, 혹은 동생이거나 조카일 것이다. 서바이벌이 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현실은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근 TV에서 서바이벌 포맷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끄는 현상도 살아남음이라는 막다른 길에 내몰린 청년세대의 암담한 현실을 반영한다. 지옥에서의 살아남음은 더 이상 가망 없을까? 우리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나는 청년세대에게 가느다란 희망이 될 T.S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자 한다. 시인은 백번이나 망설이고,/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고 노래한다. 우리 앞에 무슨 시간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수정과 결단의 시간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현실을 혁신하려는 실존적 각성과 함께 행동에 나설 동기만 있다면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언제나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결단을 내리기엔 가장 빠른 시간이다. 청년 세대여, 포기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붙잡으라. 지금은 감히 한번 해볼까? 천지를 뒤흔들어볼까?라고 스스로의 결단을 촉구할 순간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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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5 16:46

젊은이와 친구가 되는 방법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2년만에 대면강의가 시작되었다. 2년 다니고 졸업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나온 날이 열 번 남짓하다. 꽃피는 춘 삼월에 입학식을 하고 학과별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축제를 하는 등 사람들이 통과의례를 치르듯 대학에서 행하는 모든 과정이 통으로 생략된 채 졸업을 하게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2년 동안 학생들을 기다려 온 나는 설레이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학생들도 마스크를 쓰고 중무장을 하여 얼굴을 모두 가렸으나 학교에 왔다는 기쁜 표정은 가려지지 않았다. 친구사귈 틈도 없었으니 출석을 부르면서 우리 반에 이런 친구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더니 서로 서로 박수로 환영한다. 서먹서먹 했던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지는 순간이다. 강의를 먼저 해야 할까 반갑다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할까. 늘 하는 일이었는데도 갑자기 두서가 없어진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젊은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 첫째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자고 하였다. 이 일을 하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기쁘고, 무엇을 할 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는지 찾아야 한다. 그것이 취미가 되고 특기가 되고 직업이 되면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평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은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두할 수 있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이던지 열심히 매진하고 몰두해보자고 하였다. <맹자고자 상>에서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귀한 구절을 발견하였다. 혁추라는 사람은 바둑의 고수다. 혁추가 두 학생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한 학생은 바둑을 잘 배우기 위해 전심으로 바둑에만 전념하였고 또 다른 한 학생은 바둑을 배우면서도 날아가는 새를 무엇으로 잡으면 잘 잡힐까를 궁리하였다. 그 두 사람이 이룬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나의 모든 에너지를 한곳에 쏟아 뜻한 바에 이르게 하는 전심치지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내 마음안에 중심을 잡아보자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한 사람이 조나라에 가면 걸음걸이가 너무 멋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조나라로 향하였다. 조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조나라 사람 걸음걸이도 배우지 못 한채 자기 본연의 걸음걸이마저도 잊어버려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내 마음의 중심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여러분이 잘 하는 것을 하자고 하였다. 중국 음식중의 만한전석은 청나라 황실요리를 칭하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요리와 한족 요리가 동시에 차려지는 복합식단을 말하기도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연회에 만주족요리는 한족이 한족 요리는 만주족이 만들게 되었는데 청대의 문인이자 관원이었던 원매 선생은 이 것이 잘못된 일임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만주족 요리는 만주족 사람이 잘 만들고 한족요리는 한족 사람들이 잘 만드니 요리를 서로 바꾸어 만들면서 친목을 도모하기 보다는 서로 잘하는 요리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2년간 대면수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 밖으로 튀어 나오듯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금세 출중한 인물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학교에 와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서로 서로 얼굴을 보고 공감하고 정서를 나누는 일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일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청춘의 시대에 집에서 칩거하듯 보낸 젊은이들이 앞길을 잘 헤쳐 갈 수 있도록 좀 더 살갑게 살펴야 할 일이다. 지금 여당, 야당 대선 후보들은 젊은 층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고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퍼주고 베푸는 정책보다는 친구가 되어주고 공감해주고 살펴야 할 것으로 본다.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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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8 16:32

우리 정치의 역설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야권 단일화에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국민의 힘은 안철수의 지지율이 오르면 단일화에 힘을 쏟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율이 정체되면 단일화를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대통령 선거는 불과 몇 퍼센트 차이로 승부가 갈리지 않던가. 진보3:중도4:보수3으로 갈라진 정치지형에서 진보든 보수든 중도의 표를 가져오지 못하면 정권획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합리적 유권자라는 중도4의 공간에 안철수의 지지층이 있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올라가야만 정권교체가 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선거 때마다 재집권, 정권교체가 최대의 이슈가 되지만 그것은 무엇을 새로 만들겠다는 플러스정치는 아니다. 수없이 재집권, 정권교체를 해왔지만 힘 빠진 네 편을 심판하는 스릴만 즐기지 않던가. 대통령 후보들도 네 편을 밀어내고 내 편이 정권을 갖겠다는 제로섬 정치를 위해 이 주머니에서 뺀 돈을 저 주머니로 옮기는 선심 쓰기로 선거를 치르려 한다. 놀라운 것은 국민들도 제로섬 정치에 열광하며 무능력한 후보에게 환호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무능한 대통령을 뽑아놓고 대통령이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역설적 현실인가. 능력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부끄러운 제로섬게임으로 표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 편 네 편을 넘어선 정치, 첨단과학으로 국부를 늘리는 플러스정치에 힘을 쏟지 않겠는가. 요즘 코로나 확진자가 3천 명 가까이 증가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코로나와 같은 비상사태는 늘 찾아온다. 코로나 초기부터 백신 확보를 주장한 정치인이 있었는가? 문재인 정부의 백신 무능력을 뒷북치듯 비난한 정치인들만 수두룩했다. 국민들이 컴퓨터 바이러스란 말조차 알지 못했을 때 백신을 만들어 보급했던 안철수가 궁금했다. 놀랍게도 그는 코로나 초기부터 백신 구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교과서 읽는 듯한 말투가 우스꽝스러워 무시해왔던 그를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다. 컴퓨터 백신 무료 보급, 세 번의 정치적 양보,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고 거대 양당 틈바구니에서 중소정당을 오랫동안 홀로 이끌어 온 사람이 안철수였다. 그 하나하나가 한국 정치사에서 그 어떤 정치인도 해내지 못한 일들이 아닌가. 생업에 한 번도 종사해본 적이 없으면서 소상공인의 삶을 책임지겠다며 큰소리치고, 과학에 대한 기초소양도 없으면서 과학선진국을 만들겠다며 허풍을 떨고, 내 편 네 편으로 분열시키고도 당당해하는 건달 정치에 우리는 환호해왔다. 세상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놓고도 환호는커녕 제대로 평가도 못 받는 안철수에게 빚을 진 느낌이었다. 나는 안철수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다. 그를 우습게 평가했던 빚, 컴퓨터 백신 무료 사용의 빚, 힘든 양보 한 번 못하고 살아온 빚을 국민들이 그의 진면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그의 말이 원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싸움꾼 정치문화 속에서 기성 정치인처럼 보이려고 할수록 그가 더 어색해 보이지 않던가. 안철수 본연의 목소리를 찾게 하자! 나는 클래식 뮤지컬을 연출하면서 성악가들에게 내 목소리를 찾도록 해왔다. 그러면 노래든 연기든 느낌이 살고 메시지도 잘 전달돼 그들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카이스트 교수로, 의사로, 과학자로, 벤처기업인으로 성공했던 그의 경륜이 정치에서도 빛을 발한다면? 우리나라에 새로운 정치문화가 싹틀 것이 아닌가. 첨단과학기술로 세계가 패권을 다투고 있는 이 시대에 맞는 정치도! 안철수와 처음 마주 앉던 날, 그의 말에 그만의 삶을 담아내자고 제안했다. 안철수다운 말로 안철수다운 정치를 하면 국민들도 분명 알아볼 거라고. 그는 내 쓴소리에도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열었다. 그는 시간을 쪼개어 이른 아침에도 점심시간에도 나를 찾아주었다. 내 사무실이라 직원들 시선도 있어 꺼려할 줄 알았는데 그는 체면 차리지 않고 내가 하라는 대로 연습에만 집중했다. 그의 겸손함에 머리가 숙여졌다. 그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이런 정치인도 있다니! 그동안 안철수를 알아보고 지지해온 사람들도 대단해 보였다. 그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던 날, 자기 욕심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나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철수가 안철수의 목소리를 찾았듯 우리도 정치인의 목소리를 낼 것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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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1 17:06

20·30세대와 40세대, Decoupling or Re-coupling?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최근 여론에서 가장 큰 특징은 2030세대(정확히 보면 30세대 초중반)와 40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 캐스팅보터였던 40대보다 스윙보터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는 2030세대가 더 주목을 받고있다. 이러한 2030의 표심에 대해 민주당이 가장 당혹해한다. 과거 대부분 선거에서 2030은 40대와 함께움직이는 동조현상(Coupling) 즉 40대가 2030을 이끌면서 세대간 대결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했다. 그런 2030이 지난 서울부산보궐선거에서 40대와 비동조화현상(Decoupling)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대립적 표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서울시장선거의 경우 방송3사 오세훈박영선 후보의 득표율 예측조사에서 1820대는 55.3% vs 34.1%, 30대 56.5% vs 38.7%, 40대 48.3% vs 49.3%로 2030에서는 오세훈이 앞섰다. 최근 정당지지도 조사를 보면 20대로 내려올수록 국민의힘이, 40대로 올라갈수록 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경향을 보인다. 분명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지난 총선까지는 2030은 40대와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그러기에 민주당은 이번 대선도 2030세대가 40대와 같은 표심이길 기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두세대간 Decoupling 가능성이 크다. 그럼 왜 2030과 40대의 Decoupling이 나타나는가? 2030과 40대 중 누가 변했다는 건가? 그건 그렇지 않다. 2030세대는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절박함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40대는 2030세대의 이러한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젊은 세대가 보수당을 지지하느냐며 핀잔을 준다. 그런 40대를 2030은 꼰대라 한다. IMF 이후 2030 즉 MZ세대는 저성장의 구조화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대학 입학과 동시에 스펙을 쌓았지만, 탄핵했던 박근혜 정부와는 달리 40대와 함께 지지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취업의 벽도 넘기 전에 주택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반면 문재인정부에서 노동시장에도 제대로 진입하지 못한 2030과는 달리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한 40대는 노동의 조직화된 힘으로 노동 기득권을 강화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 정규직화, 노동시간 단축 등 노동정책의 편익을 누렸고, 늘어난 수입으로 주택을 마련하고 주식 투자로 재미도 봤다. 반면 40대의 노동 기득권이 강화될수록 2030은 일자리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르바이트 자리도 줄어들었고, 노무현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의 재정확대정책은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부채만 늘렸다. 2030과 40대는 박근혜 탄핵 때는 공정과 평등이라는 생각이 달랐어도 탄핵이라는 말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평등공정정의 사회의 약속에 묶여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노동시장에 진입한 조직화된 노동 즉 40대 중심으로 정책적 수혜가 돌아갔다. 문제는 노동시장과 사회적 재화는 한 세대가 과점하면 다른 세대에 돌아갈 것이 줄어든다. 결국 2030은 이러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자각하면서 공정을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동맹이 분리되는 Decoupling이 나타났다. 그럼 이번 대선에서도 2030과 40대가 분리되는 Decoupling이 재현될까? 아니면 다시 재결합되는 Re-coupling이 될 것인가? 전망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거에서 두 세대의 역학이다. 내년 대선에서 캐스팅보터는 과거와 달리 40대가 아니라 2030세대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이번 대선은 40대가 아니라 2030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고 2030세대를 잡는 후보가 이긴다. 즉 이번 대선에서 두세대가 Decoupling이 재현되면 지난 서울부산보궐선거에서 보듯이 국민의힘이 이길 능성이 크고, 반대로 Re-coupling이 되면 민주당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 각당에서는 해법이 쉽지 않다. 이는 마치 취직한 첫째에게 부모가 빗을 내 집까지 싸주면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취업스펙을 쌓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있는 둘째에게 집싸는 것에는 아직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과 비유된다. 과연 그런 부모 결정에 가만히 있을 동생이 있을까? 그래서 형제가 다투면 부모는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많은 지혜가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결국 해법은 2030의 마음일 것이고, 그 과정을 국민들이 켜보면서 표심을 결정할 것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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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4 16:50

전주시의원 임기 중 직계가족 취업실태 전수조사 필요

김영기 객원논설위원 참여자치연대 지방자치연구소장 최근 들어 전주시의원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게 처벌 기준이 강화된 음주운전 단속에 걸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고 전국적인 이슈이며 대선에서도 주요한 사안인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는 의원도 여럿 있다. 일명 경로당 방진망 사건에 연루된 의원은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처럼 수사도 흐지부지 되고 대충 넘어가는 모양새이다. 최근 필자가 소속되어 활동하는 단체에도 여러 제보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로 현역 전주시의원들의 가족들이 임기중에 전주시와 전라북도 출연기관 등에 취업하는 사례들이 많다는 것이다. 제보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며 기관과 이름들이 거명되고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속담처럼 의원들 스스로 의원 윤리 강령이나 이해충돌 방지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알아서 행동을 제어해야 마땅한데 최근의 경향들은 이러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물론 너무도 당당하게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법적 위반 여부를 떠나 의원 직책을 수행하는 임기 중에 자신의 가족들이 전주시나 도 출연기관 등에 취업하는 것은 피해야 할 낯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적법 절차를 거쳤다 해도 세간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업 과정이 보통의 공무원 시험과 같은 방식이 아닌 약식으로 이루어져 대부분 면접만으로 뽑거나 인적성 검사와 면접 등으로 뽑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할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전주시와 각 지자체. 전라북도가 앞장서서 현역의원 직계 가족들의 임기 중 행정기관과 출연기관의 취업 실태를 파악하여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 불필요한 오해와 의혹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6월에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있다. 전북은 각종 여론조사 발표 등을 종합해볼 때 여전히 특정 정당의 독주가 예상되고 있다. 경쟁 정당이 거의 없어 말뚝만 박아도 당선되고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인을 공천해도 당선된다는 30여 년의 전통(?)이 내년에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재연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도당의 공천 과정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면 과거처럼 국회의원과 지구당 위원장과의 관계나 충성도에 의해 자질이 의심되는 의원이나 도덕적으로 이미 문제 있는 것으로 각종 언론이나 시민에게 회자되고 검증된 사람들이 또다시 무임승차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의원실에서 집중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기존 당원과 동원된 권리당원. 이를 통한 여론조사 응대 등으로 공천이 좌지우지된다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현역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여 지난 시기 무리를 일으켰던 의원들의 재입성 확률이 여전히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천 과정에서 자질이나 능력. 도덕성을 검증하는 절차가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사적 이득을 취하고 불공정성과 갑질 논란을 일으킨 의원들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 전북 도당은 지방의원 입지자들의 공천 과정의 룰을 정하고 지방의원 공천을 관리하고 있다. 도당은 내년도 지방 선거 입지자들의 도덕성 검증이 가능한 권한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현역 의원들의 경우 최근 임기 동안 직계 가족들의 취업 실태를 검증 자료에 넣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수사 당국의 개입 이전에 의원 갑질이나 불법. 편법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고 의원 신분을 이용하여 사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이러한 행위자에 대해선 공천 배제라는 칼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북도당의 전향적인 자세를 기대하며 이를 통해 공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현역의원들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 도민의 지지와 부름에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김영기 객원논설위원 참여자치연대 지방자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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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8 16:57

그 많던 한량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장석주 시인 어린 시절, 농사를 짓는 광산 김씨 외가에 홀로 의탁되어 자랐다. 광산 김씨 문중 큰 제사마다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참석하던 할아버지뻘 친척 중 삼례 양반이 기억에 남는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웃고, 막걸리를 좋아하던 이였다. 그 어른 참 한량이었지. 그이를 한량이라고 지목하는 말에 비난의 뜻은 없었다. 정약용은 공무에서 물러 나와 건(巾)을 젖혀 쓰고 울타리를 따라 걷고, 달 아래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산림과 과수원, 채소밭의 고요한 정취에 취해 수레바퀴의 소음을 잊었다고 했다. 뜻 맞는 벗들과 죽란사(竹欄社)라는 시모임을 만들어 날마다 모여 시를 돌려 읽고 취하도록 마신 정약용 같은 선비가 한량의 원조였을 테다.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는 향촌의 유력계층의 젊은이들은 가계 경제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았다. 벗을 환대하고 풍류에 더 열심이었던 탓이다. 농작물의 파종이나 수확 같은 노동의 강제를 면제받는 대신 마을 공동체의 의례를 주재하거나 분란 해결에 앞장을 섰다. 마을마다 한두 명 쯤은 있던 그 한량들은 농경시대가 저물고 산업화시대로 넘어가는 변화 속에서 마을 공동체들과 함께 도태되며 자취를 감춘다. 서양에도 한가롭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부류가 있었다. 댄디라고 불린 이들은 직업이 없어도 부모의 재산 덕택에 먹고 살 걱정이 없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일체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교양과 높은 예술적 안목을 쌓고, 세련된 복장으로 군중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거북을 끌고 파리 산책에 나서던 일단의 사람들. 보들레르는 19세기 서양에 반짝 하고 출현한 이들을 영웅주의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했다. 이 위대한 문명의 잔재는 모든 것에 침투하고 평준화하는 민주주의 물결에 밀려났다. 댄디는 꺼져가는 별처럼, 지는 해처럼 한 점의 애수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이 바뀌고 나날을 축제처럼 즐기던 한량도 댄디도 사라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 강제의 시대다. 모두에게 노동 의무를 지우는 사회에서 노동으로 자기 부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히거나 고립무원의 처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노동의 실행을 거부하고 외톨이로 사는 이들은 한량의 돌연변이 종이다. 오늘날 외로운 늑대, 히키코모리, 사이코패스로 명명되는 이들은 간혹 반사회적 공격성으로 섬뜩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신자유체제는 공동체를 조직으로 전환한다. 오래된 마을 공동체들은 와해되고, 온라인의 그 많은 커뮤니티나 동호회들은 과거의 공동체를 대체한 잔존물이다. 또한 신자유체제는 세계를 극장에서 공장으로 바꾼다. 놀이와 축제는 추방되고, 노동의 실행만이 가치를 부여받는다.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축제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들뜨게 해서 대량 소비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상업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량이나 댄디는 사회적 생산의 유용성 대신에 유희를 선택한다. 그들은 관조적인 휴식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량들이 거간꾼이나 정치 모리배로 타락한 뒤 소멸되면서 우리는 한량과 함께 공동체의 중재자를 잃었다. 호걸스럽게 노닐던 한량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곁에서 사라진 한량들이 그립다. 새들의 지저귐과 계곡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매화 향기에 취해 시를 짓던 이들이 살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한량들이 누린 여유와 한가로움의 가치를 되돌아보고 생산 강제에 속박당하는 삶의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량들이 맡던 공동체의 중재자들이 사라지자 사회 갈등은 더 날카로워지고 삶은 속됨 속에서 척박해졌다. 우리는 놀이가 아니라 컴퓨터 게임에 더 몰입하고, 연애가 아니라 포르노에 더 빠지며, 삶의 충족 대신에 쾌락과 말초적 흥분을 추구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오늘날의 위기는 한가함과 여유를 압살하고, 자발적으로 노동의 강제에 휘말린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닐까?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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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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