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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과 ‘이재명의 민주당’

개헌론이 시민사회는 물론 여야를 넘나든다.“지방분권형 개헌과 국가운영 시스템 대개조,”“대통령 권한 축소와 결선투표제의 4년 중임,” 그리고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제”등이다. 개헌 시기는 “2026년 지방선거와 동시 개헌 국민투표” 제안과 함께 조기대선 전 개헌 주장도 나온다.개헌 의지와 정치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권력구조 중심의 개헌논의가 지난 40년 가까이 공전한 이유다. 제헌헌법은 45일,제2공화국 헌법은 공포까지 50일 걸렸다.1987년 헌법도 여야 8인 정치회담부터 헌법공포까지 2개월 26일이었다.주호영 국회부의장이 “개헌은 의지문제로 야당이 협조하면 한 달 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조기대선 전이든 내년이든 이재명 대표의 동의나 묵인 없는 개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개헌을 포함한 정치개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김부겸 전 총리에게 이 대표는 “지금은 탄핵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이 대표에게 개헌을 촉구하려고 전화를 하면 요즘은 피한다.”는 정대철 헌정회장의 언급도 같은 맥락이다. 조기대선에서 개헌론은 당 밖의 반명과 당내 비명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국민적 공감과 정치적 파괴력에 따라서 이재명의 선택도 변한다.그가 ‘치유와 회복 그리고 공화국의 전진을 향한 전환기적 리더십의 시대정신’을 이해하느냐 나아가 대의에 충실 하느냐가 갈림길이다. 개헌론의 방향은 분명하다.“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이면서 권력의 균형과 협치를 강화하는 것이다. 대통령 권력의 제한과 분산은 ‘국회의 권한과 기능의 확대’다.예산법률주의를 통한 국회의 예산심의와 통제권 강화 그리고 대통령 인사권 축소와 함께 헌법재판소장과 감사위원의 국회 선출 등 이다.감사원의 국회이관도 그 중 하나로 그 끝은 ‘의회중심의 국정운영’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권력의 분산과 국회의 권한과 기능 확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대립과 교착의 정치와 국가 리더십의 기능 부전을 해결할까? 계엄과 탄핵 후의 정치는 민폐가 되었다.거대 야당의 입법 강행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재표결의 악순환 그리고 윤 대통령이 계엄 사유로 지목한 ‘줄탄핵과 예산삭감’ 등은 정치와 리더십 실패의 결과다. “제왕적 대통령”과 여소야대 “제왕적 야당대표”의 극단적 충돌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대통령과 입법 권력의 투쟁과 대치의 위기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개헌이든 정치개혁이든 우리의 최종 목표는 분명하다.‘유능한 민주적 정치 리더십’이 선도하는 ‘문제해결의 정치’다.국민 삶과 생활에 도움 되는 정치다. 우리나라 제헌헌법은 대통령과 국회의 협력과 협치 나아가 공치(共治)를 지향했다.대통령 지명과 국회 인준의 국무총리제와 의원의 장관 겸직 등의 제도적 장치다.“내각제적 대통령제”라고 불리고 기존 제도와 관행의 계승과 심화로 책임총리제를 고민한다. 따라서 국회와 대통령의 협조와 협력의 협치가 제도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들어야 한다.“제왕적 야당대표의 국회”가 등장하지 않도록 제도적 강제 장치의 마련이다. 5년 임기의 대통령과 4년 주기의 총선은 여소야대의 가능성을 높인다.차기 대선을 향한 “1극 체제”의 “여의도 대툥령”행보는 결국 “제왕적 야당 대표와 제왕적 국회”의 출현이다.국회가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다. “제왕적 국회”는 소선거구 단순다수제의 승자독식 구조에 따른 거대 정당의 의석 과점에서 출발한다.현행 제도는 “지역주의와 양당체제 고착화의 주범”이다.대량 사표 발생과 비례성과 대표성의 악화가 불가피 하다.작년 총선에서 지역구 투표의 41.5% 1213만 6757표가 사표였다. 개헌으로 국회의 권한과 기능이 더 강화된다면 그 전제는 국민 대표의 국회 구성이어야 하는데 선거제도 개혁이 핵심이다.양극화 정치의 악화를 막아 민주공화국의 위기를 피할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 없이는 개헌의 실효성이 없다.”면서 “대표성 강화 없이 대통령 권한만 이양하면 뒤틀린 권력구조가 발생한다.”는 게 노회찬의 지적이다.그는 “국회의 정당 득표율-의석수 일치를 달성해야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가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선거제도 개혁은 개헌보다 어렵다.더 많은 정치인의 이해관계를 변동 시킨다.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을 잡는 것보다 선거제도 개혁이 더 큰 정치발전을 가져온다.”며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선거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다. “제왕적 국회”의 등장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다.임기조정을 통한 동시선거로 여대야소이거나 도농복합선거구제를 통한 다당제 국회다. 특히 후자는 양당의 주류세력인 민주당 수도권과 국민의힘 영남 의원들에게 불리하다.거대야당 이재명 대표와 수도권 민주당 의원들의 선택이 출발점이다.절대 다수당이기 때문이다.그들의 선의와 공적 마인드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일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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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7 18:03

[금요칼럼] 그건 교양이 아니에요

예전 어른들이 종종 “그 사람은 교양머리가 없어!”라는 말을 하던 게 떠오른다. 염치가 없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힐난하는 말이었다. 그건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인 막돼먹은 사람, 인품이 조악하고 몹쓸 사람이라는 낙인이다. 그런 이들과는 인연을 끊는 게 마땅하다는 선언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격 미달의 인간이라는 암묵적 합의일 테다. 그러니까 ‘교양머리가 없다’는 말은 사람의 품성과 인격에 대한 무섭고 신랄한 평가였던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됨됨이를 자는 척도로서의 교양이란 말을 더는 쓰지 않게 되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건 교양이 현실에서 더는 유용하지 못한 상태로 죽어버린 탓이다. 교양은 원시 채집시대 인류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인간들이 창안해낸 산물이다. 교양은 말과 태도의 우아함이고, 태도의 실행 속에서 드러나는 기품이자 기억과 지식의 축적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혁신의 결과물이다. 그건 질서와 내면 도덕의 발현이며 고차원의 사회생활의 기술이자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이다. 교양이란 고등 생명체로 진화에 성공한 인간 무리가 합의한 우아한 행동양식이다. 항상 현재 안에서 작동하는 우아함이란 점에서 교양은 정태(靜態)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교양의 반대는 무교양이다. 따라서 교양머리가 없다는 것은 인격의 막돼먹음이고 파렴치한 행실을 일삼는 것을 뜻한다. 무교양 사회는 미개하고 탈법과 무법이 판을 치는 후진 사회이다.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더 나아질 가망이 없는 사회, 도덕과 상식이 퇴행하는 사회가 무교양 사회다. 교양은 지식의 유무나 학력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고, 예의와 교양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교양이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이고 배우고 몸에 익힌 태도이다. 또한 도덕적 일탈을 막는 내면 기율이고, 제 행동을 통제하는 권력이다. 교양은 처세의 기술도 아니요, 도덕적 의무도 아니지만 그것은 언어능력이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수단이다. 교양이 양심에 잇댄 의식, 도덕과 품성, 타인을 포용하는 능력, 기분 좋은 매너를 아우를 때 비록 그것이 현실에서 써먹을 데가 마땅치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교양사회에서는 국가의 통제 권력이 마비된 무정부 상태도, 군중이 폭도로 변해 난동을 일으키는 사태도 없을 테다. 교양은 무례하지 않고, 사회 규범을 존중하며, 성실한 이들의 가치관을 존중한다. 교양은 한쪽 이념으로 치우치거나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으며 폭력을 수단으로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교양은 사회의 혼돈과 무질서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는 불법 사태를 용납하거나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큰소리치며 활개를 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무법과 혼돈이 뒤섞인 사회, 탈법적 폭력으로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회가 교양사회일 수는 없다. 막말, 난동, 폭력, 탈법, 갑질, 거짓, 허언… 그런 것들은 교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막장 현실의 징후들이고 막돼먹은 사회가 최후에 드러내는 아노미 현상이다. 그 반대가 예의바른 태도, 겸손, 타자에 대한 관용,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의 의젓함을 갖춘 이들이 협업하며 만드는 교양사회다. 교양이 문화, 웰빙, 덕성을 집약한 것이라면 그것은 삶을 경이로 바꾸는 기품이고 기쁨일 테다. 그것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가장 좋은 것으로서의 삶 그 자체다. 교양을 가진 어른들과 함께 살던 시절이 그립다. 어른들은 점잖고 웃음과 유머가 있었으며 태도에는 기품이 있었다. 존경을 받을 만한 어른들 앞에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품격 있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교양사회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갈망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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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0 18:42

[금요칼럼] 어쩌다 마주친 새들의 눈

작년 전 겨울이었던가, 서울 중랑천에 원앙 200여 마리가 떼로 나타났다고 많은 매체들이 화려한 원앙 떼 사진을 앞다투어 연일 보도한 적이 있었다. 원앙이 떼로, 그것도 200마리가 넘게 떼를 지어 나타난 일은 세계 최초의 일이라고 전문가들의 입을 빌렸다. 모두 ‘세계 최초’를 앞세웠다. 그런데 그 세계 최초에 세인들은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은 듯했다. 강연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그 ‘최초’를 보았느냐고 물어보아도 그 보도를 보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래전 강길 십리 길을 걸어 출퇴근할 때였다. 강물을 지척에 둔 길이었다, 길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게 나 있었지만, 풀과 나무가 너무 오래 자라 있고, 또 그 길을 이용해야 할 경제성이 없어서 그런지 2년 동안 차도 걷는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다. 이슬 때문에 나는 반바지를 입고 출근해서 긴바지로 바꿔 입어야 했다. 어느 날 강물이 쉬어 가는 소(沼)에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물결을 일으키는 그 물체(?)는 등과 머리를 드러내놓고 헤엄을 치고 있었다. 오싹 겁이 나고, 혼자 놀래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이 못된 구렁이가 우리 마을 근처 큰 호수(그 용소가 지금은 없다.)에 살았다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수달 두 마리였다. 수달을 너무 오랫만에 본 것이다. 출근해서 신문을 뒤적이는데, 우리나라에 수달이 멸종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신문사로 전화했다. 기자님은 수달이 멸종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못 박았다. 나는 아침에 분명히 수달을 보았다고 한 번 더 말했다. 원앙 떼가 서울 중랑천에 세계 최초로 200여 마리가 나타났다는 그 기사의 화제 성에 내가 놀랐던 것은, 지난 3. 4년 동안, 수달이 나타났던 그 강에 원앙이 208마리 정도까지 날아와 한겨울을 지내다가 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208마리 정도라고 그 숫자를 거의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느냐고요? 사진을 찍어 세어 보았으니까요. 어떤 해는 청둥오리 떼와 원앙 떼가 마을 앞 강을 가득 메우고 ‘찬란’하게 먹이를 찾아 먹기도 했다. 3년 전부터는 홍 머리 오리들이 외진 강물에 와서 살다 간다. 작년과 올해부터는 댕기흰죽지 오리리가 여러 마리가 강물에서 놀고 있다. 청둥오리, 비오리, 호사비오리는 철새다. 호사비오리는 멸종 위기 새다. (이 오리에게 총 쏘면 크게 벌 받는다.) 논병아리와 쇠오리, 쥐오리는, 토종 오리다. 토종 원앙도 몇 마리 산다. 어떤 해에는 물닭, 깃털이 우아한 호방 오리도 왔다 갔다. 참, 내, 원, 몇 년 전부터 가마우지도 온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가마우지가 우리 마을 산천하고 어울리지 않게 너무 검고 커서 정서적인 불쾌감과 거부감이 있다. 우리 마을 앞 강에 와서 한겨울을 나던 원앙 떼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새 연구가 한 분이 남원에 사신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원앙들은 기온이 자기들에게 맞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가 길가 숲에서 붉은 머리 오목눈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새가 그 작고 까맣게 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작고 선량한 눈을 보고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렇게 겁 없고 작고 선량한, 아름다운 눈을 처음 마주친 것이다. 며칠 전 흰 댕기 죽지 오리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또 놀랐다. 또, 정말, 진짜로, 참말로 그렇게 아름다운 테두리 속에 눈을 두고 있다니, 검은 바탕에 그 작고 똥그랗고 또렷한 눈가 테두리는 놀랍게도 노란색이다.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그 눈이 서늘하여서 하마터면 사랑한다고, 말을 해 버릴 뻔했다. 나는 나만 외롭게 알고 있어야만 하는, 새들의 경이로운 생태와 태도들을 간직하고 있다. 누구에게 말해 보았자 사람들은 새들의 선량한 눈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어쩌다 새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디서 읽었던 임마누엘 칸트에 대한 이 글이 생각나곤 한다. ‘칸트는 참으로 선량한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오늘날에도 세상에서 의미를 잃지 않은 이유다.’ 선량은 눈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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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3 18:25

‘보통 사람’의 아름다운 작별, 카터의 뒷모습

지난해 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하고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에는 미국 역대 대통령 부부가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밝은 얼굴로 고인을 보내는 이 자리는 슬픔이 가득한 조문의 자리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유쾌한 자리였다. 그의 최대 정적이라 일컬어지던 포드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미리 작성하였던 추도사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추도사에는 ‘평화와 연민이라는 카터의 유산은 시대를 초월해 독보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라며 카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었다. 땅콩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여러 실패를 경험한 대통령이었지만 ‘가장 뛰어난 미국의 전임 대통령 카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을 시종일관 이끌었던 성실한 자세였다. 카터 대통령의 일생을 회고해 보면 ‘보통 사람’으로 살기 위해 평생토록 애썼던 ‘특별한 사람’의 노력이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다. 우선 그는 ‘인생의 성공은 대통령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노력을 통해 마무리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얼핏 ‘미국 대통령보다 명예스러운 자리가 있을까?’ 싶지만 성대한 취임식 후, 재임기간동안 냉정한 평가가 있었고 실제로 임기를 마치면서 ‘성공적인 대통령’이란 칭찬을 듣는 미국 대통령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카터는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사회 정의, 평등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시대의 정황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경제문제, 대사관 인질 문제 등으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하며 단임으로 임기를 마치고 고향집으로 돌아갔을 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명칭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정책 실패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커졌고 재임에도 실패하며 ‘도덕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실질적인 정책 집행에는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통령 퇴임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위해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 각국의 위험한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와 타협을 이끌어 갔던 세계 평화대사로서의 역할은 그의 명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생 2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카터 대통령이 겪고 이겨낸 실패와 새로운 노력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두 번째, 카터의 일생을 뒷받침하고 있는 가치 기준으로 ‘겸손, 겸허, 검소’와 같은 단어가 있다.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침실 2개가 있는 평범한 주택과 상당한 채무였다. 신탁에 맡겨놓았던 땅콩농장은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전임 대통령들처럼 임기 이후 강연, 기업의 자문 등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는 수많은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제의들을 철저히 거절했다. 자신의 연금을 절약하고 33권의 책을 쓰는 등 오로지 본인의 노력으로 빚을 갚아 나갔다. 또한 본인을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겼고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을 거절했다.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연금, 경호, 예우 등을 위한 관리 비용을 다른 전임 대통령들보다 절반 가까운 금액을 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교회 주일학교의 성실한 교사로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일등석이 아닌 이코노미석의 비행기를 타고다니며 전 세계 가난한 마을의 궁핍한 이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지난 1월 9일, 조지아주 고향마을의 교회에서 치러진 장례식 후 연못이 있는 버드나무 옆, 인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로잘린 여사 곁에 묻혔다. 부부가 일생동안 함께 살았던 집은 본인이 죽은 이후 국립공원 관리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사전에 기부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겸허한 모습이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카터 대통령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행복’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행복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렇게 살았던 카터 대통령은 행복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100세 시대에 카터 대통령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필자도 그가 걸어갔던 행복한 삶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이를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필자도 ‘보통 사람’으로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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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6 15:45

‘부정선거론’이 가른다!

계엄과 탄핵 후 여론은 요동친다. ‘정당 지지율과 대선후보 선호도 또는 가상대결 그리고 정권 교체론 vs. 연장론’의 3대 지표 모두 그렇다. ‘초반 압도-격차 축소-접전 양상 또는 역전’의 패턴이다. 첫째, 12월 초중순에는 민주당 지지율이 53%까지 오르며 24%의 국민의힘을 압도한다. 12월말부터 1월 초 민주당 지지율은 하락세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상승세로 1월 중순이후 양당 격차는 더욱 축소된다. 오차범위 내 접전양상이 대부분으로 여당이 야당을 앞서는 조사도 나온다. 둘째, 대선후보 여론은 ‘초기 이재명 독주’다. 다자구도는 물론 양자대결에서도 여권 후보를 상대로 10%~20% 포인트 앞선다. 이후 여권 후보들 지지율이 상승한다. 그래도 이재명 우위지만 양자 간 격차는 좁혀진다. 설 연휴 직전 ‘김문수 약진’이 핵심으로 그는 보수결집의 계기다. ‘46% vs. 42%’로 이재명을 누르기도 한다. 다른 여권후보들도 이재명을 오차범위 내에서 거세게 추격한다. 셋째, 정권 교체론 역시 초반에는 압도적이다. ‘정권 교체가 60% vs. 연장 32%’로 두 배 가까운 차이다. 1월 초 이후 정권 교체론은 줄어들고 연장론이 늘어 ‘교체론 53% vs. 연장론 42%’를 보인다. 중순 이후 설 연휴 즈음에 정권 교체와 연장론이 오차범위 내에서 뒤집히는 조사가 처음 등장하지만 정권 교체론의 우위 속에서 팽팽한 접전양상이다. 당장 이재명 민주당 ‘닥공’의 우려와 불안감이 중도층으로까지 확산된 결과다. 이 대표는 “독재와 반민주 세력의 반동은 계속 될 것”이라며 “마지막 고비 넘어가자”고 한다. “6개월 안에 끝낸다”와 “2심 전 대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모습이다. 최근 조사를 보면 중도 무당층에서 ‘민주당 신뢰와 불신’은 거의 동률이다. 중도층 유권자의 1/4은 ‘현재 지지정당이 없다. ’고 한다. ‘문재인 학습효과’는 구조적 배경이다. ‘1987년 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공화국의 기초 만들기’라는 시대정신과 역사적 임무를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극단적 대립과 교착의 정치’는 ‘문재인 권력의 실패’를 상징한다. 3대 여론 지표에 반영된 보수의 위기감과 결집효과는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된다. 보수층의 적극적 응답은 ‘윤석열을 향한 동정심’과 그의 “끝까지 싸우겠다. ”는 메시지 정치에 따른 동원효과이기도 하다. ‘30대에서 탄핵반대가 앞서는 조사까지 등장하는데서 보듯 2030세대가 결정적이다. 이들은 수도권의 탄핵반대 여론이 전국평균보다 높게 나오는데도 일조한다. 여론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3대 지표 여론의 변화를 추동한 ‘계엄과 탄핵에 대한 의견의 변화’다. 이는 당장 헌재의 탄핵심판과 내란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길게는 향후 우리 정치의 향방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정당 지지율과 대통령 후보 선호도 그리고 양자대결에서 접전 또는 여당 우위의 여론변화의 출발점은 탄핵 찬반의 변화다. 12월 초에는 탄핵찬성 여론이 압도적이다. ‘유권자 10명 중 7명 이상이 찬성했고 반대는 20% 초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엄을 “위헌적 중대범죄 또는 내란”으로 간주했다. 12월말부터 1월 중순사이에 변화가 나타난다. 탄핵 찬성여론은 줄고 반대가 늘어난다. 예를 들면 ‘찬성은 75%에서 64%로 줄고 반대는 32%로 증가’한다. 그후 탄핵 찬반격차는 더 축소되는데 ‘탄핵찬성이 57%~64% 반대가 36%~43%의 분포’를 보인다. 탄핵 찬반의 의견변화는 계엄평가와 연동된다. 초기에는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되는 경향이다. 특히 보수층과 고령층을 중심으로 계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소폭이지만 상승한다. ‘여당 지지율과 대선 후보 선호도 그리고 양자대결의 접전양상 흐름’은 계엄과 탄핵찬반의 의견변화로부터 시작한 셈이다. 나아가 계엄과 탄핵찬반의 근저에는 ‘부정 선거론과 거야 입법독재의 행패론’이 있다. 모두 이념적 갈등과 진영 간 대립의 계기라는 게 걱정이다. 특히 부정 선거론은 ‘30% 중반의 찬성 vs. 60% 전후의 반대’를 보이지만,‘보수 유권자 10명 중 6명 이상이 동의한다. 는 게 주목된다. 젊은층과 고령층에서 부정선거 공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기도 하다. ‘부정선거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48% vs. 불필요 47%’라는 조사도 있다. 결국 부정 선거론은 첫째, 진영 대립을 더 격화시키고 악화시킨다. 중도의 선택과 판단이 결정적인데 길게 끌수록 보수의 부담은 늘어난다. 둘째, 보수의 분화 또는 분열 개연성이다. 극우적 성향의 그룹이 보수의 주류가 되면 대선은 다자구도로 바뀔 수 있는데 이때는 이준석의 향배가 중요하다. 보수의 재편이다. 셋째, 여당 대선후보의 선출방식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출발점이다. 이는 여당 사람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부정 선거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결정할 것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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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30 16:44

혹시 ‘경알이’ 말을 아세요?

말은 시간의 응집이고, 사람의 경험과 기억, 생각을 전달하는 매체다. 말은 시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생성과 소멸을 겪는다. 어떤 말은 살아남고, 어떤 말은 도태되어 사라진다. 지금 내 말은 거의 완전한 서울말인데, 나는 본디 서울말 사용자가 아니었다. 나는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 남단의 경계에 있는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다. 시골에서 들을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뛰어 놀던 촌뜨기가 서울의 부모와 합가하면서 서울내기가 되었다. 충청도 입말에 익숙하던 내 고막에 서울말은 낯섦 그 자체였다. 어린 고막을 울리던 서울말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금세 서울말에 반한다. 고향의 입말과 서울말이 사뭇 다른데 놀라고, 나는 그 차이를 문화적 충격으로 흡수한 것이다. 한 세기 전 경성(서울의 옛 이름)에 사는 중류층 말을 ‘경알이’말이라 했다. 경알이 말은 표준어의 지위를 얻으며 위상이 더욱 공고해진다.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토박이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나 염상섭의 소설들은 지금은 듣기 힘든 경알이 말의 보고다.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꼽는 주요섭 소설이 원작인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감독, 1961)에서도 서울말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극 중 어머니와 어린 옥희가 주고받는 말이 서울말이다. 반세기 전 서울말과 지금의 서울말은 또 다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울의 주인들이 바뀌고 그런 가운데 서울말도 달라진 것이다. 서울말은 서울 토박이의 오랜 습속과 정서가 밴 입말이다. 서울말은 경기 말과 다르고 인천, 강화 말과도 차이가 난다. 그렇건만 서울말과 충청도말, 전라도말, 경상도말 사이에는 우열 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서울말이 소중하면 지방의 말도 언어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서 귀한 말이다. 서울말이 문화적 가치가 있다면 지역말도 보존해야 할 중요한 문화 자산이다. 일부에서는 서울말을 서울깍쟁이말이라고, 혹은 서울말이 간사하다고 흉을 보았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동안 나는 억세고 투박한 지방말에 견줘 서울말이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다. 서울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 해방 뒤엔 미군 상주와 함께 영어의 영향을 받는다. 서울말은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라는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말이다. 산업화 시대로 넘어오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상경 인구가 빠르게 늘었다. 그 결과 서울말은 지방말과 섞이고 동화되면서 그 특색이 옅어졌다. 어른들은 계단을 ‘가이당(階段)’이라 하고, 도시락을 ‘벤또’라고, 손톱깎이를 ‘스메끼리’라고, 등에 매는 가방을 ‘니꾸사꾸(rucksack)’라고, 바지를 ‘쓰봉’이라고, 겉에 걸치는 옷을 ‘우와기’라고 했다. 우리말에 뒤섞여 쓰던 일본말의 잔재는 그 존재감이 뚜렷했다. 본디 서울말에는 된소리 발음이 거의 없었다. 자음 ㄱ, ㄷ, ㅂ, ㅅ, ㅈ 같은 예사소리를 ㄲ, ㄸ, ㅃ, ㅆ, ㅉ 같이 된소리로 쓰지 않았다. 어느 시기부터 서울말에 예사소리를 밀어내고 된소리 발음들이 부쩍 늘어난다. 예전에는 ‘소주’라고 발음하던 것을 지금은 다들 ‘쏘주’, ‘쐬주’라고 발음하는데, 이것은 서울말이 거칠어진 세태로 말미암아 거칠어진 거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오라범땍(올캐), 그러께(재작년), 긍검스럽다(근검스럽다), 후뜨루마뜨루(휘뚜루마뚜루)’ 같은 말은 새 말의 위세에 눌려 자취를 감춘 서울말이다. 나는 서울 서촌 일대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서울의 수돗물을 마시고 서울에서 생업을 일구며 자식을 낳고 마흔 해 넘게 살았다. 살면서 서울 사람의 어휘와 말본새를 듣고 배우며 서울 사람처럼 서울말을 썼다. 서울 시민 노릇을 하며 사는 마흔 해 동안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던 전차가 사라지고 새로 지하철이 개통한다. 도심에 고층 빌딩과 고층아파트 대단지들이 들어서고, 한강 이남의 대규모 개발로 강남이 노른 자리 땅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내 귀와 혀에 인이 박힌 서울말도 그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서울말의 부침을 더듬자니, 세월의 무상함 한 줄기가 따라온다. 가끔 어린 시절 ‘~했걸랑’ 같은 어미를 쓰던 서울 동무들과 그들의 서울말이 그리워진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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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3 18:11

새들의 시

아침밥 먹고 빨래 개서 옷장에 정리하고 빨아 놓은 빨래를 거실에 잘 털어 널었다. 빨래를 널거나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는 내 모습을 내가 생각하면, 내가 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보르헤스’의 시를 읽다가 시집을 배 위에 올려놓고 이불속에 누웠다. 방바닥의 따사로운 온기가 몸으로 전이 되어 왔다. 내 몸과 이불 속의 온도가 일치되는구나, 하면서 정신이 가물가물 스르르 잠이 들었다. 포근한 온기로 푹 잤다. 낮잠을 길게 자고 일어나니, 겨울이 겨울 같다. 몸이 환하게 개여 가뿐하였다. 밖에 나갔다. 하늘이 청명하였다. 정말 맑았다. 고개를 들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둘러보았다. 산 능선들이 선명하다. 눈부신 겨울 하늘이다. 오랜만에 본 하늘 같다. 강을 건넜다. 낙엽이 쌓여 있는 오솔길을 걸었다. 참나무 잎이 수북하다. 참나무 잎은 두껍고 미끌미끌하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바스락 소리가 듣기 좋다. 자꾸 뒤가 돌아보아진다. 강길인데, 어쩐지 깊은 숲속 길 같다. 물속에 잠긴 돌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번도 말을 해 본 것 같지 않은 물속 돌들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자갈들이 밟히는 길이 끝나고 흙길이 나타났다. 따뜻한 양지다. 흙 위에 낙엽들이 쌓여 폭신폭신하였다. 멧돼지들이 땅을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땅이 마치 서툰 사람의 괭이질 솜씨 같다. 든든하게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막강한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도 저렇게 삶에 구차함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들은 비겁하지도 않고 다른 나무를 속이지 않을 것 같다. 따로 무엇을 강하게 주장 하지도 남을 욕할 것 같지도 않을 것 같다. 누구를 지저분하게 이기거나 누구에게 비굴하게 지지 않을 것 같다. 불의를 모를 것 같은 반듯하고 당당한 나무들 곁에 서 있으면 내가 졸아든다. 오래된 나무들은 아무 데나 서 있어도 넘볼 수 없는 고결한 인격을 갖춘 상상 속의 어떤 인물 같다. 내가 사는 마을 앞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50년도 더 되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사셨던 서춘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한다. 서춘 할아버지는 평생 홀로 사셔서 자손이 없다. 이 느티나무가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느티나무의 천년을 넘게 산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살아 숨 쉬는 나의 책이다. 나는 이 나무를 78년째 바라보는 중이고, 77년 동안이 나무 아래를 지나다녔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이 나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봄이 오면 까치가 집을 수리하고, 새잎이 피고 꾀꼬리가 날아와 운다. 여름밤이면 둥근달이 나무 위를 지나간다. 가을이면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이 강물에 떨어지고 겨울이면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이 쌓여 놀라운 마을 풍경을 그려준다. 이 느티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정부를 세워주는 나의 나라다. 날이면 날마다 지치지 않고 새로운 시를 써주는 놀라운 ‘시 나무’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게 인문이다. 보고 배우고 익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 사람을 귀하게 가꾸며 자기가 하는 일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게 책이라면 내게 이만한 책이 없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씻고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써서 보여 주는 이 책은 공부도 하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책도 안 읽는다. 지금도 강 건너 큰 소나무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이 나무가 불러주는 시 한 편을 받아 적었다, ‘나무는 정면이 없다/바라보는 쪽이 정면이다/나무는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다르다/ 나무는 경계가 없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들을/받아들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 달이 뜨면 달이 뜨는 나무가 되고/새가 날아 와 앉으면/ 새가 앉은 나무가 된다/ 나무는/바람의, 눈송이들의, /새들의/詩다’ -졸시‘새들의 시’ 전문.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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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6 15:37

'희망의 리더십'이 그리운 요즘

2025년 새해가 밝았다. 뛰어난 식견과 냉철한 판단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지도자가 그리운 요즘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요한 시기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들이 나타나 어려움을 해결하곤 했다. 뛰어난 지도자는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경륜을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위기에서 그 역량을 최대한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신뢰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가 전쟁에 휩쓸리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독일에 맞서며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중심에는 처칠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정치가들은 전쟁으로 지쳐있던 국민들에게 평화와 안정된 삶을 약속하였다. 특히, 독일의 팽창에 대해 체임벌린 총리(영국 제60대 총리)는 협상을 기반으로 한 외교적 유화정책으로 영국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었다. 반면 처칠은 히틀러의 위협을 경계하면서 강하게 대응해 나갔다. 1939년, 인근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한 독일은 이듬해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유럽대륙은 전쟁에 접어들었다. 처칠이 총리로 임명된 시점은 영국이 전쟁에서 상당히 열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회 연설에서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결연의 메시지를 통해 동료의원들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독일과 맞섰다. 처칠의 뛰어난 웅변과 리더십은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었다. 몰살 위기에 처한 연합군을 구하기 위한 프랑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민-군 협력의 모범적인 사례로 일컬어진다. 독일군이 덩케르크 인근에서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을 포위함에 따라 심각한 패배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군함과 민간 선박, 어선, 요트까지 동원하여 9일 동안 약 34만 명의 아군 병력을 구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철수 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처칠은 ‘전쟁에서의 승리는 아니지만, 위대한 구출이었다.’라며 국민들에게 투쟁의 의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57일간 지속되었던 독일 전투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국민들이 지하벙커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투쟁하자는 처칠의 라디오 연설을 들으며 지도자와 정부를 믿고 버텨나갈 수 있던 배경에는 처칠의 「희망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탁월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도자였다. 화가, 문필가로서도 그의 뛰어난 능력은 위기에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승리를 쟁취하는 탁월한 지도력의 바탕이 되었다. 2002년, BBC에서 영국민 100만 명을 대상으로 ‘역사를 빛낸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뽑았던 설문조사에서 셰익스피어, 뉴턴을 제치고 처칠이 1위로 선정되었고, 2015년에 새로 발권된 5파운드 지폐 뒷면에는 처칠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학교생활 부적응자, 낙제생, 사관학교 3수 등 뛰어난 지도자로서 젊은 시절의 모습은 아쉽지만, 그 모든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통합해 결정적인 순간에 빛나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역사 속에 남을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처칠은 교육과 가치관의 형성, 축척된 경험을 통해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충실히 하였고 실제 역할이 주어졌을 때 지도자로서 준비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시대를 읽는 식견, 뛰어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국민들을 설득하여 자신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확신을 주었으며 무엇보다 어두운 밤, 등불과도 같은 희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도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윈스턴 처칠 못지않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고 지금도 잘 길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처칠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이끌 수 있는 식견과 역량이 있고 「희망의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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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9 18:35

2025년 정치 개혁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방향은 분명하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분산과 승자독식에 따른 독선과 무능의 리더십에서 유능한 민주적 리더십’으로의 전환이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민폐가 아니라 ‘국민 통합의 구심점이자 미래 선도의 정치 리더십’을 지향한다. 1987년 체제의 핵심은 ‘1인 장기집권의 방지’였다. 당시 집권 가능성이 높았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권력의 자리에 올라야 해서 5년 단임의 암묵적 합의였다는 말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과 승자독식의 제도’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과 승자 독식의 선거제도는 정권 말기마다 교체 요구와 정치 보복으로 이어졌다. 진영 간 극단적 대립은 정치적 통합과 협력을 막는다. ‘여야가 5년 동안 죽어라 싸우게 하는 게 대통령제’가 되어 “‘상대가 악’이라는 선악 구도만 매몰”된 정치다. 최근에는 법조인 출신의 정치가 대세로 미래가 아닌 과거의 잘못만 따지는 과거 지향의 정치다. ‘갑툭튀의 끝판왕’ 윤석열 캐릭터의 등장과 계엄 그리고 탄핵은 겸손한 승리와 책임 있는 패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체제가 보여주는 최악의 모습이다. 대통령제가 “민주주의의 죽음의 키스”라는 말을 듣는 이유다.OECD 37개 국가 중에서 대통령제는 6개국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권력 사유화와 교착 정치의 상시화’로 이어진다. 노무현의 “코드인사” 이명박의 “고소영 강부자 인사” 박근혜의 “수첩 밀봉 인사” 그리고 문재인의 “캠코도 인사”가 대표적이다. 교착 정치는 ‘정치 실종’이다. 직선 대통령의 권력은 국회 다수당과 대립한다. 일상화된 여소야대의 분점 정부다. 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사라지고 극단적 대치와 교착 상태다. 우리가 본 거야의 입법과 대통령 거부의 악순환이다. 결과는 ‘정치의 사법화’다. 정치적 갈등을 정치적으로 풀지 못한다. 협상과 타협 대신 법적 해결에 의존한다. 정치 쟁점이 법정으로 넘어가면서 대화와 통합 그리고 미래의 정치 리더십은 사라진다. 법적 공방과 정치적 책임 회피는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의 대상이 된다. 극단화된 ‘팬덤 정치’는 악화된다. 양당과 양 진영 모두 각자의 지지층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지향한다. 팬덤의 양당과 진영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줄인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주와 분열 그리고 내전의 정치다. 승자독식 구조의 핵심은 선거제도다.정치적 양극화의 출발점이다.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한 표라도 더 얻은 사람이 당선되는 제도로 2위 이하의 표는 국정에 반영되지 못한다.단순다수제와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와 결합하면서 양당 중심의 대결 구도를 심화시킨다. 지역주의 기반의 양당 체제는 기득권화되고 폐쇄적인 엘리트 구조로 변질된다. 양당의 극단적 대립과 양극화는 당연한 결과다. 어느 쪽이 집권하든 여당은 대통령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며 정책 보다는 정쟁과 대립을 주도한다.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다. ‘포용적 정치 시스템과 포용적 선거제도’다. 민주주의를 “집단 지성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개인의 성장을 촉지하는 체제”라고 한다면 상호 존중과 인정을 전제로 공동체의 함께 기여를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협조와 협치와 공존과 공영의 정치가 불가피 하도록 제도적으로 강제해야 한다.대통령 권한의 분산과 결선투표 그리고 도농복합선거구제의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원칙인데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출발점이다. 국민여론도 우호적이다.유권자 10명 중 6명 이상이 “현 대통령제를 개헌해야”한다고 본다.“권한 축소한 대통령제의 선호가 가장 높아” 70%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개헌 시기를 ‘다음 대선 전’으로 하자는 의견도 국민 다수다. 보수보다 진보에서 더 개헌을 원하는 양상이다. 민주당 지지층이 국민의힘 지지층 보다 더 개헌을 바란다. 헌정회 여야 원로들은 “선 개헌 후 대선”을 제안하며 “탄핵 정국이 개헌의 적기”라고 한다. 문제는 오해의 소지다. 이재명 대표는 “한가한 소리” “탄핵 관철에 집중할 때”라고 말한다.개헌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내란 동조 세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물타기를 의심한다. 탄핵 지연이나 권력 연장의 정략적 의도로 본다. 헌정 질서의 회복이 우선이라는 말이지만 정대철 헌정회장은 “권력이 눈앞에 보이니 성급해진다.”고 진단한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결심이 중요하다. 특히 100명이 넘는 수도권 의원들의 선택이 핵심이다. 영남 출신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그 다음이다. 선거제도 개혁의 갈림길로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공익우선이냐 사익 우선’이냐다. 2025년 새로운 정치 리더십의 등장을 기대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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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2 17:00

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주일 전에 만나 서로의 건재함을 확인한 지인이 죽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평소 지병이 없던 분이기에 그 부음은 큰 슬픔과 당혹감은 안겨주었다. 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이었다. 죽은 당사자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겠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나는 황망한 마음에 한동안 일손을 놓고 망연히 앉아 있었다. 다시는 웃으며 말하는 그이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죽고 사는 일의 덧없음이 밀려든다. 무생물계 저편으로 사라졌으나 그이의 부재는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언젠가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이는 시인이 된 계기를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그이는 과도와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보자기에 싸서 한국시의 전설인 원로를 찾아가 당돌하게 가르침을 청한다. 그걸 계기로 사제 간의 연을 맺고 배움을 잇다가 시인의 꿈을 이뤘다. 그이는 동료들의 신간 시집을 받아 읽은 뒤 반드시 재생 용지에 쓴 편지를 보내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나도 반듯한 글씨로 쓴 그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동료들의 창작을 격려하는 선의가 작동했을 테다. 그이는 착한 사람이지만 막상 그이에 대해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인간은 한 생명체로 태어나서 죽음이라는 한계 안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말하는 생물학적 실존을 잇는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란 놀라운 실존 사건을 단 한 번씩 겪는다. 죽음이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마주한 영구불변의 조건이다. 지구의 생명체 중에 자기 죽음을 투명하게 인식하는 건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는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있는 존재라는 걸 기억하라는 뜻이다. 질병은 생물학적 존재로 엄연한 인간의 생태적 균형을 흔드는 일이다. 질병을 겪으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저항을 조금씩 누그러뜨린다. 인간은 대뇌변연계를 갖게 되면서 장기 기억 처리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과거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긴 시간’을 뇌의 해마와 편도체에 저장하고 산다는 뜻이다. 긴 시간 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니 인간은 이전보다 훨씬 더 똑똑해진다. 긴 시간은 기억의 양태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데, 그 안쪽에는 사랑과 이별, 명예와 비루함, 고통과 쾌락들이 마치 올실과 날실로 짠 카펫처럼 펼쳐진다. 우리 삶은 긴 시간이라는 카펫 위에 세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 카펫은 죽음과 함께 거둬져서 사라진다. 죽음이 사라짐이라면 그것은 우주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순환의 일부가 아닐까? 그것은 몸이라는 유기체의 구조를 버리고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일이 아닐까? 불면으로 깨어 있는 동안 나는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우리 안에 작은 씨앗 같은 있다가 싹을 틔우고 자라난다. 죽음은 계속 자란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때에 우리를 포획한다. 죽음은 나의 화두,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으로 인한 혼돈과 불안에서 멀리 달아나려고 했다. 죽음에서 도피하려는 욕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내 무의식의 본성이 낳은 것일 테다. 누구도 살아 있는 동안 제 죽음을 겪을 수 없다. 내 대뇌피질에 오롯하게 있는 죽음에 대한 관념은 대체로 타인의 경험에서 유추된 결과물이다. 나는 아직 인간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했다. 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젊었을 때 읽은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 명쾌한 전언에 따르면 무릇 죽음은 태어남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무에서 나와 유로 존재하다가 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잠시 돌아가신 지 오래인 어머니도 떠오른다. 나는 형제들과 요양병원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는데,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뒤 이불 아래로 드러난 어머니의 하얀 발을 잊을 수가 없다. 여동생들이 오열을 할 때 나는 어머니가 발이 시릴까 가만히 쓰다듬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 갑자기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나는 한밤중 주방에서 혼자 오래 울었다. 내 어머니는 흙으로 돌아가서 편안히 안식하고 있으리라.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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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6 18:33

우리 공동체의 리더십 희망을 찾습니다!

엄청난 후폭풍이다.경제부터 흔들린다. 원화 약세와 환율 상승은 물론 주식시장도 고전 중이다. 코스피와 코스닥에서 사라진 시가총액이 144조라고 한다. 내년 우리나라 예산 677조의 20%가 넘는 금액이다. 다행스럽게도(?) 기관이 8000억 원에 가까운 돈으로 더 이상의 증시급락을 막았다. 이 중 6000억 원은 국민연금이 포함된 연기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국민들의 노후 자금을 쏟아 부어 증시폭락을 막은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불안정이 한국경제의 성장률을 더 떨어트릴 수 있다는 점이다. 계엄 사태 이전에도 우리의 성장률 전망은 1%대로 낮았다. 계엄 이후 경우에 따라서는 0%대 또는 역성장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모습니다. 물론 한국경제의 규모와 역량에 비추어보면 이번 사태가 외환위기 수준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부분의 전망이다. 그럼에도 일시적이겠지만 한국의 국제 신용등급 하락 우려와 우리 경제의 대외 신인도 타격은 불가피하다. 외교적 파장도 만만치 않다. 당장 정상 외교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사례가 이어졌다. 주요 국가와의 외교 네트워크가 약화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 및 미중 경제전쟁 등 중요 의제의 논의 과정에서 한국의 입지가 약화될 위험성이 증대된다. 외교 공백을 최소하화기 위해 정부의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계엄과 대통령 탄핵 정국은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에 치명적이다. 세계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주시하며 우리나라를 지정학적 리스크로 간주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례적이라는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공동 외신 기자 간담회는 정부의 회복 노력을 상징한다. ‘한국의 경제와 외교 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국제사회의 불안을 진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초현실적 상황은 지금도 계속 된다. 현직 대통령은 출국 금지되고 내란 혐의 피의자로 구속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하이에나로 변신한 검찰”은 ‘대통령이 국방장관과 공모해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수사기관들은 경쟁적으로 대통령 신병을 노리며 소환장을 계속 발부한다. ‘상상 그 이상의 대통령’은 뭘 더 보여줄지 걱정이다. 12월 3일 밤 우리는 한 사람이 가진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몇몇 사람의 고집과 무모한 행동이 공동체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결국 대한민국 공동체의 정치 리더십이 문제의 근원이다. 댓가는 혹독하다.정치가 민생 경제와 대한민국을 흔드는 상황으로 외신은 “5100만 한국인들이 비상계엄의 경제적 대가를 앞으로 할부로 치러야 한다.”고 우려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 리더십의 대안은 크게 둘로 나뉜다. 집단으로 보면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중심이고 개인으로 보면 “한세표 유안준”으로 ‘한동훈 오세훈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 이준석’ vs. 이재명과 “신3김 3총”으로 ‘이재명 김경수 김동연 김두관 김부겸 정세균 이낙연’이다. 대부분 거론되었거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충분히 예상되었던 사람들이다. 이번에 새로운 인물의 등장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윤 대통령의 ‘의도하지 않은 기여’다. “갑툭튀의 끝판왕”은 지금 대통령으로 충분하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그리고 ‘한세표 유안준’ vs. ‘이재명과 신3김 3총’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의 리더십일까? 양당과 그들은 새로운 헌정체제의 7공화국 요구를 고민할까! 걱정이 앞선다. 해체위기의 여당은 “조기 대선하면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극우 파시즘이냐 정통보수냐 갈림길”에 섰으면서도 “한 명씩 일어나 탄핵 찬반 밝히라”며 배신자를 색출하겠다는 말이 나온다.갈 데까지 갔다. 현재 시점 가장 유리한 위치의 강력한 차기 대권후보 이재명의 민주당은 ‘닥치고 공격’이다. ‘6개월 내에 끝낸다.’며 ‘이재명 2심 전(前) 대선’을 목표로 한다. 자신과 당에 대한 조사와 관련된 24회의 보복성 탄핵시도는 “조폭 정치와 국회 사유화”의 비판을 넘어선다. 그들은 “지금은 점령군인 양”하며 “물 만난 듯 대통령 놀이”하며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얘기를 듣는다. “다뜯어민주당 재명세”의 논란은 정치적 목적을 최우선으로 한 기민함과 민첩한 변신의 이재명 리더십을 상징한다. 새 리더십을 찾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고민은 공동체의 방향성과 리더십의 조건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리빌딩과 재도약을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누가 리빌딩과 재도약의 리더십일까?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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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9 18:06

겨울 감나무

감나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마을 어디서 나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격 있는 나무가 감나무다. 감나무 모습 중에서 가장 문기가 넘치는 모습은 뭐니 뭐니 해도 붉은 감이 몇 개 달린 눈 쌓인 감나무 가지에 까치가 앉아 우는 새 아침의 모습일 것이다. 다른 나무에 비해 실 가지가 굵은 감나무는 눈을 많이 받는다. 검고 굵고 짧고 뭉툭한 가지에 가만가만 내려 눈은 소복하게 얹힌다. 가지에 얹힌 눈이 녹을수록 감나무는 눈 녹은 물로 젖어 더 검어지고 눈은 희게 빛난다. 내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초등학교 주위에 감나무들이 많았다. 그 감나무들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거기 있었다. 나는 계절을 따라 아이들과 감나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감잎이 진 가을이면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학교 뒤에 있는 감나무를 향해 돌멩이를 던져 감을 따 먹다가, 감나무 주인인 강 건너 우리 고모가 운동장에 들어서며 누가 우리 감 따 먹었느냐고 고함을 치기도 해서 달려가 내가 그랬다고 늦가을 소동을 무마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유리창을 열어 놓고 감나무를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하나둘 감 같은 얼굴로 내 곁에 모였었다. 겨울이 와서 감나무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거나, 가지마다 가만가만 쌓인 눈이 여기저기서 천천히 허물어져 떨어지는 모습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아득해지는 고적함을 가져다주었다. 감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몸이 검어진다. 다른 나무에 비해 몸이 검고, 투박하고 까만 가지들은 세월이 갈수록 단아해져 가고 품위를 갖추어 간다. 감나무는 찢어지지 않고 부러진다. 찢어지지 않고 뚝! 부러진 내면은 얼마나 고운, 흰색인가. 뻗어나가며 적당한 길이로 구부러진 멋스러운 마디의 검은 가지에 얹힌 흰 눈의 대비는 수묵의 경지다. 감나무도 나이가 들고 고목이 되어 이 가지 저 가지가 죽어가는 그 꾸밈새 없는 모습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자라 평생을 살면서 마을을 이해하여 그에 알맞은 마음을 곱게 쓰며 살아 온 선량한 동네 어른처럼 믿음이 간다. 나이가 들어가며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다듬어 살아 온 세월의 자세로 다문다문 열린 감 같은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새잎 피는 봄날, 내 책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 사인을 이렇게 해 준다. ‘감나무에 새잎 피어 좋은 날, 임 만나러 가고 싶은 날’. 잎이 피면 잎이 피고, 감꽃이 피면 감꽃 핀대로, 땡감이 열려 있으면 그런대로, 감잎이 다 지고 붉은 감만 달고 서 있으면 또 그런대로, 빈 나무로 서 있으면 그런대로 검고 단단한 골격을 갖춘 자세를 견지한다.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재래종 붉은 감들이 가시덤불 속에서 눈을 하얗게 쓰고 꽁꽁 얼어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농부들의 일평생 같아 눈 맞는 감처럼 마음은 춥다. 감나무는 농촌 사람들에게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소득원이었고, 농촌의 풍경을 사시사철 소박하고도 조촐하게 그려주던 나무였다. 옛날에는 집집이 마당 가나 뒤 안에 감나무들이 있었다. 큰 집 뒤 안 장독대에 감나무가 있었다. 뒷짐 지고 서서 서리맞은 붉은 감을 바라보던 큰아버지의 등은 얼마나 다정하고 말라가는 곶감이 걸린 처마 밑들은 얼마나 정다웠던가. 감나무는 순박한 삶을 가꾸어 온 우리네 저 유구한 농부들과 그 운명을 같이 해 온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김장까지 끝내고 회관 아랫목에 여기저기 누워 ‘비상 계엄’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기도 한다. 가누기도 힘든 몸으로 자다 일어나 묻고, 뒤척이다 잠결에 눈을 비비며 나라의 안부를 묻는다“어치게 되어가? 날씨도 추운디, 많이 모였네” 오늘 밤도 마을 회관에 모여 텔레비전 보다가 어둑어둑 집으로 돌아 들 간다. 희끗희끗 눈 발이 날린다. 어둠 속이다. 강물 소리가 휘몰아친다.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감나무가 어둡게 서 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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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3 13:15

한 해의 끝, 나에게 하고 싶은 질문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일랜드 출신 영국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면 이 문구가 자주 떠오르곤 한다. 2024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올해 어떻게 살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새해에 세운 목표를 되새기고 열심히 살아왔는지’,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따뜻한 일 년을 보냈는지’, ‘후회되는 일은 없는지’ 등등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올해 초에 받은 무릎 수술은 필자의 일 년 계획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외 출장 일정을 소화하던 중 다소 무리하여 무릎의 상태가 나빠졌고, 걷기 힘든 상황이 되어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급하게 귀국하였다. 그 발단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네스코 지원사업 수행차 스리랑카에 방문했는데 교통사고로 무릎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완치하지 못한 무릎은 20년 간의 지속적인 충격으로 결국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수술을 받고 2주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느낀 점은 ’건강도 때가 있다.’라는 것이다. 아플 때 정신 차리고 문제가 된 무릎을 잘 보살피면서 서두르지 말고 살았어야 했는데, 내 몸은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살아왔다. 나를 돌보기보다 급한 일에 쫓겨서 서두르다가 몸도 나빠지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은 병원 옆 제과점에서 아내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병상에만 누워 있다가 목발을 짚고 옆 건물에 있는 제과점으로 가서 아내와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했다. 하지만 무릎이 많이 회복되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면서 돌아가 급한 일에 쫓기며 소중한 일은 미루고 있는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시간의 흐름은 사건의 축적으로 인식한다.’라는 어느 뇌과학자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따뜻한 시간만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텐데 그런 시간은 늘 급한 일에 밀려 소홀히 여기고 있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면서 한정된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일, 급한 일, 꾸준히 해야 할 일’ 등 적어도 세 부류로 구분하여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이 미뤄지지 않도록 삶의 우선순위를 두기로 했다. 매일 바쁘게 흘러가는 삶에서 잠시 멈춰서서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알아차리는 나만의 시간은 중요하다. 매일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삶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되새기게 된다. 바로 옆에 있는 가족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 같은 소중한 사람들과 연락하며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갖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인생의 목표를 ‘짧고 굵게 사는 것’이라며 매번 강조하던 필자의 친구가 있었다. 일 중심으로 살던 그 친구가 갑자기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 이후, 핼쑥해진 모습으로 나에게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면서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 지혜로운 것을 깨달았다고 말해주었다. 당시에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무릎 때문에 크게 고생을 해보고 나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말이었다. 무릎 통증이 가끔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바쁜 일에 몰두하면서 건강관리를 경시했던 모습이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술 후 걷기 위해 애쓰던 시간을 기억하면서 내 몸의 소중함을 알고 친구의 말처럼 건강한 몸으로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나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왔지만, 이제는 고개를 들어 주변도 살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기부, 사회봉사, 자원봉사 등 내가 속한 조직,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실천함으로써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자신이 되어야겠다. 연말연시에 우리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 자신을 내어주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한다. 한 해가 끝나가고 새해를 기다리는 이 시점에서 잠시 멈추어서 지난 11개월의 삶을 되돌아보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고백하는 글을 묘비에 새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삶의 우선순위와 태도를 바꾸고 의미 있게 한 해를 마무리해야겠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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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5 17:04

점술사의 시대

인간의 불확실한 미래는 늘 두렵다. 특히 운명이 걸린 상황이라면 불안이 더욱 고조된다. 내가 투자한 주식, 인사에서 승진, 선거에서 당선, 건강의 위험과 인간관계, 미래는 모든지 불안하고 알고 싶다. 불확실하기에 점술사를 찾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는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어떻게 위기를 피할 수 있을지, 귀를 쫑긋 세워 점술사의 말에 집중한다. 점술사는 위로도 하지만 협박도 한다. 예측도 하지만 대가도 원한다. 점술사의 예언은 한도가 없다. 죽은 뒤에 세계를 천국과 지옥을 나누기도 하고, 살아서 천벌과 축복을 예견하기도 한다. 위기를 피하는 대가로 돈이나 복종을 제시한다. 점술사는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일단 외모부터 도사의 풍모를 갖춘다. 하얀 수염을 멋있게 기르거나 원색의 복장을 입어 찾아 사람의 눈을 홀린다. 주변에는 수행원을 배치하여 권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연기를 피워 후각과 시각을 혼란하게 하고, 묘한 음악과 소리로 귀를 어지럽힌다. 유명인을 잘 안다고 떠벌리기도 하고 화려한 동상이나 상징물을 등 뒤에 배치하여 머리를 숙이게 만든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도 이쯤 되면 주술사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손을 모아 애절한 표정을 짓게 된다. 부디 나를 축복하고, 액운을 물리치고, 건강과 행복을 주소서. 공자는 미래가 현재를 삼키고, 미신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이념이 사람을 옭아매는 세상을 탄식했다. ‘괴력난신(怪力亂神)’, 공자가 평생 금기시 했던 항목이다. 상식을 벗어난 괴상한 이야기(怪),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엄청난 능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力),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고 공정과 정의를 무너트리는 사람과 집단의 이야기(亂), 보이지 않는 귀신과 미신을 찬양하는 이야기(神)는 공자가 평생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제자인 자로(子路)가 귀신과 미래의 일을 물었을 때 공자는 호되게 야단치며 훈계했다, ‘귀신이 아닌 사람을 섬겨라! 내세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라!’ 죽은 조상 제사 잘 지내는 것보다 살아생전 밥 한 끼 잘 차려드리는 것이 효도다.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느니 현재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행복이다. 점술사에게 묻지 말고 주변 사람에게 묻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라, 공자가 평생토록 추구해 온 철학이다. 미래는 중요하다.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가올 위기에 대안을 만들고, 위기가 닥쳤을 때 대항력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예측의 방법이다. 점술사의 예언도 아니고, 주관적 짐작도 아니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 과거의 있었던 패턴, 과학적 수치를 기반으로 미래에 대한 예측이 필요하다. <손자병법>에서는 합리적 미래 예측의 리더를 선지자(先知者)라고 말한다. 미리(先) 알고(知) 전쟁에 임하는 장군이라는 의미다. 거북이 등껍질이나 물소 뼈를 불로 지져 갈라지는 무늬를 보고 전쟁에 임했던 시대에 손자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미래의 정보를 획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귀신에게 묻지 마라!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주관적 경험으로 판단하지 마라!’ 손자는 귀신에게 점을 쳐서 물어보고, 주관적 경험에 의존하여 얻던 관습을 비판하며 철저하게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불확실이 높아지던 시대에는 점술사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었다. 그들은 혹세(惑世)하여 권력을 얻었고, 무민(誣民)하여 이익을 챙겼다. 지도자들은 점술사의 허무(虛無)한 이야기에 해야 할 일을 미뤘고, 맹랑(孟浪)한 경고에 하지 말아야할 일을 했다. 충언과 간언은 길바닥에 내팽겨 쳐졌다. 그런 시대는 혼란이 극에 달했고, 지도자는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 이런 일이 다시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소원한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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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8 18:53

추억은 힘이 세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 때 추억의 힘을 빌어서 거기서 벗어난다. 추억이란 우리 안에서 지속하는 현존이다. 추억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바래지만 그것이 아주 사라지는 법은 없다. 분명한 것은 추억의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이다. 추억과 비밀은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내면의 재화이다. 한 사람이 가진 인격과 취향은 과거라는 골짜기에서 양조(釀造)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은 과거가 머금은 빛들로 빛날 수 있다. 먼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내게 스무 살은 암울하고 칙칙했다. 글을 쓴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백수로 떠돌던 시절이다. 그 시절의 여성들은 더 환하게 웃었는데 그 웃는 얼굴이 얼마나 눈부셨던지! 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여성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에도 봄마다 모란과 작약이 피고, 가을 내장산의 단풍은 볼만했다. 물은 낮은 지대로 흘러가고, 불꽃은 수직으로 타올랐다. 강변의 버드나무들은 푸르고, 가을엔 북국의 기러기 떼가 한반도로 날아왔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더 너그럽고, 배움이 깊지 않은 아버지들은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성심을 다해 일했다. 나는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고은 시집,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단편과 시를 모은 ‘이별 없는 세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 수록된 신구문화사판 ‘전후세계문학선집’ 따위를 경전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한량처럼 빈둥거리던 나는 사실은 서울의 시립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시와 철학에 정진하던 청년이었다. 가끔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거나 명동 입구 카페 데아뜨르에서 연극 관람을 했다. 그리고 굶주린 하이네가 먹잇감을 찾듯이 ‘르네상스’나 ‘필하모니’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영혼이 고양되는 찰나에 취했다. 그 무렵 문학과 예술에 목말라 하던 내게 군 입대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본적지인 충남의 신체검사장을 찾아갔다. 군인들은 신체검사를 받는 장정들에게 반말이니 욕설을 내뱉으며 모욕을 주었다. 나는 신체검사에서 대한민국 청년의 평균 체중에 미달한 탓에 무종 판정을 받았는데, 그건 이듬해 신체검사를 다시 와서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로 돌아와 ‘르네상스’에 가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속으로 들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 작가 하일리히 뵐의 소설이던가? 한 어린 병사가 징집되어 열차에 타기 직전 한 건물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어디선가 울려 나오는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 전곡을 들을 수 있다면 제 인생의 반을 떼어 주겠다고 말하던 어린 병사는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한다. 그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신체검사에서 낙방을 하고 돌아오던 나는 얼마나 의기소침하고 비장했던가! 그건 내가 전쟁터로 향하는 어린 병사의 가엾은 영혼에 빙의된 상태였던 탓이리라. 추억은 늘 실제 경험에 기반 하지 않는다. 철학자 샤를 페팽은 “우리는 과거를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추억은 재가공되고, 뇌를 이루는 850억 개의 뉴런과 그보다 더 많은 시냅스들의 작용하는 가운데 그 정체가 바뀐다. 그것은 추억이 경험과 몽상이 상호 삼투하며 나타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기억의] 재구성’(샤를 페팽, ‘삶은 어제가 있어 빛난다’ 163쪽)이다. 추억은 좋은 시절을 더 화사하게 윤색하고, 끼니를 거르던 가난의 누주함도 그리워하게 만든다. 추억에는 우리를 너그러운 사람이 만드는 힘이 있다. 고백컨대, 15세부터 시를 썼던 볼프강 보르헤르트를 동경하고(나도 15세부터 시를 썼다), 스무 살의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영혼이 찢긴 채 삐적 마른 몸으로 떠도는 한심한 영혼이었다. 나를 성장으로 이끈 창조적 약동, 생의 리듬들은 그 시절의 정처 없음과 방황, 나른한 독서, 음악에의 열광 등에서 나왔다. 오늘 내 삶에 조금이라도 빛나는 게 있다면, 그건 모두 저 암울한 어제에서 온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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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1 18:46

임기 후반의 변수와 첫 분수령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후반부가 시작되었다. 남은 시간이 지금까지 보낸 날보다 짧다. “잃어버린 2년 반”이 반복될지 아니면 반전의 시간일지 궁금하다. 대치정국은 이어진다. 민주당은 ‘기승전 윤석열 탄핵’과 ‘임기단축의 개헌’을 동시에 추진한다. 대통령은 24회의 재의요구권 행사와 ‘시행령 정치’로 맞선다.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 전통은 연이어 위협 받는다. 거대야당은 합의우선의 원칙을 무시하고 ‘독식과 독주’를 새로운 관행으로 만든다. 대통령은 처음으로 국회 개원식에 불참했고 11년 만에 시정연설을 총리에게 미룬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걱정은 점점 높아진다. 시계 제로의 상황이다. “정쟁에 매몰된 정치권이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외면”하지만 “이 상태로는 끝까지 못 간다.” 인식도 넓게 퍼지는 모양새다. 대치정국의 돌파구는 가능할까? 여야의 극단적 대립을 해소할 타협안은 없을까? 대통령 임기 후반 정국의 주요 변수와 포인트에 달렸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그리고 한동훈 대표의 삼각함수다. 여권부터 보자. 당장 관심은 윤석열 지지율이다. 최근 대통령 지지율은 조사마다 ‘최저치 경신’중이었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고까지 한다. 더 내려가면 국정동력을 상실할 위기 앞에 선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당분간 횡보 가능성이 높다. 반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추가 하락을 방어하려 한다. 핵심은 TK 지지율인데 “60%는 나오는 곳이 영남”이라는 주장과 “전국적 여론 흐름과 괴리는 힘들다.”는 반론이 엇갈린다. 최근 한 영남지역 대상 조사는 대통령 지지율이 45%였다. 지금은 대통령의 시간이다. 대통령실과 내각개편의 인사와 쇄신 조치 등으로 국정장악력을 높인다. ‘깜짝’ 외교성과까지 더해질 수 있다. 바탕은 민생 우선의 정책기조다. “장바구니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소상공인 자영업자 관련 대책”도 내놓는다고 한다. “후반기엔 국민 체감할 진정성 있는 정책 추진”하며 “양극화 해소정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소득과 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 타개위한 노력”을 전개하려 한다. 한동훈 대표도 변신 중이다. 그는 “당정이 힘을 합쳐야 한다.”며 ‘승리의 길로 함께 가자’는 화합의 메시지를 말한다. 대표의 측근은 “대통령이 한동훈이 제시한 쇄신열차에 탔다.”며 “대통령이 5대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했고,긍정적으로 변화하려 한다.”고 말한다. “걸핏하면 내부분란 일으키는 여당(대표)”에서 이재명 때리기 집중하는 ‘스트라이커 한동훈’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트리플 지지율 하락세 특히 TK와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한동훈 선호도가 낮아지는 게 부담이다. “전략도 용기도 없는 한동훈 차별화 정치”의 한계다 현재 여권은 윤석열 대통령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강화다. 국민의힘도 구심력이 높아진다.앞으로도 계속 이럴까? 변수는 첫째,대통령의 인식 변화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정확하게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게 출발점이다. 그래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지금 못하면 앞으로도 못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부부의 위기는 더 깊어진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에게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강요될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책임감이 중요하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앞으로 잘할 것이라는 의견은 28%’라고 한다. 대통령의 “담화와 기자회견 공감 한다는 27%”에 불과하다. 대통령 지지율의 최대치다. 둘째,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의 탈동조화냐 동조화냐다. 더블 하락이 계속되면 ‘한동훈의 결속과 쇄신’은 고민에 빠진다. ‘배신자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경계선이라고 판단하느냐가 갈림길이다. 관건은 스모킹 건이다. 사람들이 ‘김건희 특검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 되느냐다. 다음은 대통령을 향할 수밖에 없다. 김건희 특검은 대통령 부부의 정치적 운명에 결정적일 수 있다. 야권은 단순하다. ‘이재명이냐 아니냐다.’ 이 대표는 ‘대선주자 선호도 1위이자 거대야당의 연임수장으로 “여의도 대통령”’이라고 불린다. 조기 대선과 차기 집권을 위한 조직화를 진행 중이다. 변수는 ‘이재명 사법 리스크’다. 그는 ‘7개 사건 11개 혐의 4개 재판’을 받고 있다. ‘트리플 사법 리스크’의 이 대표는 ‘운명의 한 주’를 맞는다. 부인 김혜경씨의 법카 의혹사건과 본인의 공선법 사건 그리고 위증 교사 사건의 1심 선고다.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며 “당이 더 결속할 것”이라고 한다. 민주당은 “집권 가능성 높은 후보 제거의 정치수사와 기소”라며 “정치검찰의 탄압”으로 본다. 대통령 임기 후반의 첫 분수령 이번 주 이재명 부부의 재판 1심을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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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4 17:28

마을은 염려 없다

아침 달이 서산에 걸렸다. 예쁘다. 아직 노란빛이 남았다. 아침 바람 부는 날이다. 양식이가 산책 못 간다고 문자가 왔다. 홀로 걷는 들판이 텅 비었다. 들이 멀리 한가롭다. 아내가 나들이 가면서 빨래 다 되면 널라고 한다. 바람이 거칠어져서 거실에 빨래를 널었다. 책을 보다가 잠이 쏟아져서, 낮잠을 길게 잤다. 어제 주워다 삶은 알밤을 다람쥐처럼 앉아 까먹었다. 배불렀다. 자전거 타고 알밤 주우러 갔다. 회관 마당에 점순 어머니가 콩 타작하고 있다. 점순 어머니가 삶은 감자를 비닐 주머니 속에서 꺼내 준다. 따뜻하다. 감자가 든 비닐 주머니 속에 김이 서려 있다. 하나 남은 것도 가져가라고 했다. 두고 갔다. 가을바람과 가을 햇살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그대로 한다. 널어놓고 깨 위를 돌아다니며 두발로 고랑과 이랑을 만든다. 추상화 같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삶이 예술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밤나무 가지가 흔들려 알밤이 많이 빠진다. 생각대로 알밤이 빠져 있다. 밤나무의 생산은 아름답고 나의 수확은 신난다. 저만큼 밤송이가 알밤을 물고 떨어져 있다. 두 발로 밤송이를 열고 알밤을 꺼낸다. 서너 개 주우면 행복한 한주먹이 된다. 밤을 다 줍고 밤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오지 않아도 되겠다. 점순 어머니가 아직도 콩 타작하고 있다. 나무막대기를 양손에 들고 콩대를 투 닥 투 닥 때린다. 콩들이 콩콩 뛰어나와 톡톡 뛰다가 또르르 또르르 글러 간다. 콩을 쫓아다녔다. 금방 한주먹이 된다. 일하는 중간에 올 수 없어 콩 타작 다 할 때까지 콩을 따라다니며 주웠다. 콩 한 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고 했다. 앞산에는 팽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다. 뒷산 그늘이 마을을 덮어 올 때 아내가 왔다. 뒤 안에서 호박잎과 새순을 땄다. 호박잎은 단 한 번의 서리로 잎들이 시들어 버린다. 서리 오기 전에 호박잎과 호박 줄기 끝 새순을 따서 쌈을 싸 먹어야 한다. 무성한 넝쿨 속에 숨은 호박도 찾아 딴다.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네! 이 무슨 일인가! 늦복 터졌네! 호박 두 포기를 심었는데, 많이도 열린다. 부침개 부쳐 먹기 좋은 애호박을 골라 회관에 가져다드렸다. “아니, 김 선생네는 왜 그렇게 호박이 잘 열린 데야” “내년에 우리 집 호박도 좀 심어주지.” 좋아한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이 잔디 마당에서 뛰어논다. 아이들에게 크게 허리 숙여 인사 하고 나이를 물었다 여섯 살, 네 살이다. 어머니 되시는 분이 나더러 후손이세요, 한다. 김용택 후손이냐는 말이다. 내가 본인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일군이세요? 하기도 한다. 경기도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어제 새로 나온 그림책을 한 권 줬다.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인터넷에 들어가 시집 리뷰를 찾아 읽었다. 월트 휘트먼의 이런 시 구절을 보았다. “당신의 영혼을 모독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멀리하라” 날이 어두워진다. 창밖을 보았다. 밥 짓는 아내의 딸그락 소리가 나의 하루를 고른다. 사람 사는 일에 이일 저일 없을 리 없다.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견디며 이겨내고 무슨 수를 찾아 하루하루 살아간다. 사람들의 하루가 다 장하다. 나는 마을의 일상을 잘 따른다. 열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이라고 나라의 일과 무관할 리 없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나라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평일을 평상시처럼 산다. 여든아홉 점순 어머니는 이웃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와서 70여 년을 사신다. 나는 ‘그 일’이 그렇게 좋다. 오늘은 2024년 10월 26일이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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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7 18:51

‘지금, 여기’ 행복하다는 느낌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 살았던 도시를 방문하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영국의 3대 도시인 셰필드는 놀랍게도 예전 그대로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구불구불한 신작로, 허술한 2층 석조 주택, 도시 중심 커뮤니티 센터와 우뚝 솟은 교회당 종탑이 있는 영국 북부 산업도시의 여전한 모습으로 필자를 반겨주었다. 셰필드까지 1시간이 걸리는 열차가 20분 연착되었지만 승객들은 불평없이 묵묵히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예고없이 플랫폼이 바뀌는 바람에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뻔하기도 했다.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 부부와 엇갈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잘 만났다. 반가운 포옹을 하며 눈에 이슬이 맺힌 친구의 모습을 보자 필자도 울컥했다. 친구 부부에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머나먼 한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밖에서 대접할 수 없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여전히 영국 음식은 심심한 편이었지만 친구의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필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오랜만에 둘러본 친구의 집은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무척 커 보였던 집이었지만 지금은 좁고 옹색한 느낌이 들었고 5명이 앉으면 꽉 차버리는 좁은 거실 한켠에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다. 친구는 50년 이상을 이 집에 살면서 세 자녀를 키워 출가시켰는데, 잘 가꾸어진 과일나무가 있는 작은 뒤뜰에서 멀리서 온 가족까지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때면 새삼스럽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인 필자의 경우는 가족모임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고 집 밖에서 모이고 있지만 예전에 온 식구들이 좁은 집에 모여 음식을 차리고 떠들썩하게 모였다가 헤어졌던 정겨운 모습이 떠올랐다. 올해 초에 필자가 무릎 수술을 받은 뒤 한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친구 역시 나이가 들어 엉덩이뼈 수술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낙후된 영국의 의료시스템 때문에 수술 하루 전날 입원하고 수술받은 다음날 퇴원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약 3주간의 입원, 그리고 퇴원 후 꾸준히 통원 치료를 받았던 필자의 경험과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좋은 의료체계에서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받았음에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필자는 ‘그러한 혜택에 충분히 감사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히 답을 할 자신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행복하다는 느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평범한 일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누리며 얻는 행복에 대해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며 무감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았다. 미국의 모델 겸 배우였던 린 피터스(Lyn Peters)는 “행복이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즐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 살면서 집에 대한 별다른 느낌없이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진 않은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료시스템과 복지서비스를 제공받았지만 병원 예약 문제, 사소한 서비스 문제로 불평하지 않았는지, 더욱더 편안함을 바라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한 그릇의 밥이 차려질 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왔는지 잠시 잊고 살았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수백만 명의 부모님 세대, 선배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을 새삼 돌이켜본다. 우리 세대는 이것을 잘 받고 관리하여 다음 세대들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있고 이것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어갈 것이다. 한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필자, 영국 셰필드에서 노년을 보내는 친구와의 30년 만의 만남은 ‘행복하다는 느낌’은 저기, 멀리가 아닌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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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1 18:58

작은 것의 마법

나쁜 일이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듯이 좋은 일도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이 있기 훨씬 오래 전부터 작은 것들이 모이고 쌓여 지금의 좋은 소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올림픽에 나간 국가대표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은 하루아침에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고, 기술력과 인재 경영으로 인정받는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일이 우연히 되는 일이 아니다. 작은 흙 알갱이가 쌓여 큰 산을 이루고, 조그만 물줄기가 합쳐져 거대한 강을 만든다. 하늘의 작은 별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하고, 돌멩이 하나가 뭉쳐져 두텁고 광활한 땅을 만든다. 세상의 어떤 좋은 일이든 시간과 성실과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역시 어느 날 운이 좋아서 받은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문학 유전자, 작가가 어려서부터 읽은 수많은 책과 주옥같은 문장들, 같은 주제로 치열하게 문학 작품을 써내려갔던 선배 문인들,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던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 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 작가를 키워 냈던 대한민국의 역사적 토양, 심지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현 시대의 다양한 폭력들, 따지고 들면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작은 이유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수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상인 것이다. 여전히 겪어내야 할 역사의 아픔이 있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불합리가 상존하는 대한민국이, 그 아픔과 불합리를 이겨내야 하고 풀어내야 한다는 의미의 노벨문학상인 것이다. 요즘 들어 갑자기 살이 찌고 몸무게가 늘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적은 양이지만 간식을 자주 먹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잦은 간식이 몸에 축적되어 살이 되는 것이다. 실적이 안 좋아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도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잘나갈 때 영원할 것이란 착각에 작은 위기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우물은 없다. 물이 잘 나올 때 다른 우물을 파야 한다.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잃고 헤매는 권력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돌을 맞아도 견뎌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고민이 없다면 결국 쓸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우주가 작은 것의 오랜 시간 축적이고, 존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이 살아온 모든 역사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쌓이면 마법이 된다. 단단한 얼음(堅氷, 견빙)은 작은 서리(霜, 상)가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고, 위대한 업적은 쉬지 않고(無息, 무식) 성실하게 살아온(至誠, 지성) 결과다. 쉬지 않으면 오래가고(久, 구), 오래가면 드러나고(徵, 징), 드러나면 원대해 지고(悠遠, 유원), 원대해지면 넓어지고(博厚, 박후), 넓어지면 높아진다(高明, 고명). 넓어지면 모든 것을 실어주고(載物, 재물), 높아지면 모든 것을 덮어준다(覆物, 복물). 그것이 우주가 운행하는 원칙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오늘 하루가 승부처다. 작은 것이 경쟁력이다. 작다고 무시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몸에 벤 절약이 큰 부자를 만들고, 작은 기술이 쌓여 초격차를 만든다. 작은 신뢰가 쌓여 정권의 존망을 결정한다.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은 겨울을 만드는 작은 첫걸음이다. 이 서리가 쌓여 단단한 겨울을 만들어 낼 것이다. 큰 목표를 세우고, 거대한 담론으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오늘 이 순간 작은 것의 마법을 믿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런 분들이 미래를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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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4 18:22

하루의 보람과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장석주 시인 우리가 삶에서 구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평온이나 고요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침 일찍 동네 빵집에 들러 갓 구운 빵을 사고, 단골 카페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오후엔 상수리나무 숲속을 거닐며 보낸다. 우리 인생은 아무 일없이 지나가는 밋밋한 하루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분명한 건 하루의 보람과 평화는 공짜로 얻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내적 열망과 엄청난 에너지를 품지 않고는 가질 수 없다. 우리의 심심한 일상은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무너지는가! 그걸 잊고 살다가 소중한 것들이 잃어버린 다음에야 우리는 화들짝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낸 보통의 하루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적인가를! 2022년 8월12일 열한시 십오분 전, 사방이 화창한 금요일 오전이다. 그 시각 뉴욕시의 한 원형극장 무대에 올랐던 유명한 작가가 피습을 당한다. ‘악마의 시’로 알려진 일흔다섯 살의 작가 살만 루슈디가 그 피해자다. 그를 표적 삼은 가해자는 무슬림 극단주의자들 중 하나로 스물넷 된 청년이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노작가의 목과 눈을 칼로 찔렀지만 이 흉측한 ‘영웅’의 역겨운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루슈디는 열다섯 군데나 자상을 입고 눈 한쪽을 잃었다. 과연 가해자는 알았을까? 그가 휘두른 칼이 루슈디의 목을 관통했을 때 단박에 한 사람의 자유를 앗아갔으며, 일상과 평화를 산산조각 냈다는 것을. 루슈디는 죽음과 대면한 상태로 외상병원으로 호송 되어 칼에 깊이 베이고 찢긴 데를 금속봉합기로 고정한 채 수술을 받는다. 최고의 의사들이 맡은 외과수술은 잘 끝나고, 그는 고통 속에서 재활 훈련을 받으며 혼자 샤워를 하고 걷는 법을 배운다. 이제 그는 경찰과 보안회사 인력의 철저한 경호 아래 예전의 일상을 되찾고 보통의 삶을 회복하는 중이다. 괴한이 루슈디를 공격한 도구는 칼이다. 칼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주방에서 그것은 조리 도구지만 누군가를 찌를 때는 무기가 된다. 하지만 칼은 도덕적으로 나쁘거나 좋은 게 아니다. 칼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중립인데, 그걸 손에 쥔 자의 의도에 따라 그 도덕적 평판이 나빠지거나 좋아지는 것이다. 작가에겐 언어가 칼이다. 루슈디는 제 피습 과정의 전말을 담은 ‘나이프’라는 책을 펴내는데, 거기에서 ‘언어도 칼이었다. 언어는 세상을 베어 세상의 의미를, 그 내적 작동 방식과 비밀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언어는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베어 들어갈 수 있었다’라고 쓴다. 따지고보면 인류는 태초 이래 폭력에 날 것으로 드러낸 채로 생존을 이어왔다. 인류 역사는 폭력에 얽힌 고약한 서사로 얼룩져 있다는 측면에서 폭력은 역사의 상수이다. 그것은 개인 간 다툼에서 빚어진 소규모 폭행들, 즉 교제 살인, 조리돌림, ‘학폭’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의 유대인 학살, 일본 군대가 저지른 중국 난징 시민 도륙, 크메르루주가 벌인 자국민 150만 학살, 1980년 5월 항쟁 시민 학살까지 그 범주는 아주 넓다. 이 세상 어디에나 이 끔찍한 것이 편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이것과의 투쟁에서 쟁취되는 것임을 뜻한다. 루슈디의 피습 사건이 일러주는 것은 폭력이 우리 일상의 어둡고 추악한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증오와 악의에 의해 추동된 폭력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꿈과 행복을 일그러뜨린다. 폭력은 피해자의 몸에 위해를 입히고 인간 존엄을 부수며, 평생 잊을 수 없는 훼손의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폭력과 미구에 일어날 폭력 사이에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폭력은 우리 삶에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엿본다. 우리가 멀쩡한 신체로 먹고 웃으며 기도하고 산다는 건 지구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광기어린 폭력의 사육제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어떤 폭력도 용인되지 않아야 하며, 그것에 도덕적 정당성을 허락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인류 공동체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대상이다. 우리 생명과 존엄, 가족의 안위, 사회의 질서와 도덕적 가치를 지켜내려면 우리는 폭력, 광기와 증오, 일체의 차별에 맞서야 한다. 우리 곁을 떠도는 이 유령이 방심한 틈을 노려 우리와 가족을 공격하고, 일상의 안녕과 평화를 깨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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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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