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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단골가게들

도서관에서 북토크 행사를 했던 어느날이었다. 행사를 온라인 라이브 송출한다는 것까지도 괜찮았는데, 내가 실시간으로 방송을 확인할 수 있도록 내 앞에 태블릿 하나를 놓아준 것이었다. 태블릿을 치워달라고 말할 찬스를 놓친 채 얼떨결에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북토크를 하는 것과, 내가 북토크 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내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의 화면을 보면서 내내 생각하게 된다. 말할 때 왜 입이 비뚤어지지? 머리는 왜 저렇지? 멍청하게 웃는 저 촌스러운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다행히 그 날 나는 그런 괴로운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면서 몇 번 구부러진 허리를 바르게 펴기는 했지만 그건 주최측이 내 앞에 태블릿을 놓아준 의도와 아주 부합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헐뜯고 경멸하지 않으며 오로지 대화에 집중했다. 나는 평화롭게 행사를 마쳤다. 이 일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큰 기쁨을 주어,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일을 흐뭇하게 되새겼다. 작가 경력 20년만에 드디어 나에게도 경륜이나 자신감이라고 할만한 것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제 모니터 속의 내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베테랑이 되었다. 어쩌면 흔히 ‘나 자신과의 화해’라고 말하는 일을 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고 담담하고 편안한 눈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단골 옷가게에서 봄 세일을 한다는 안내 문자가 왔을 때 나는 갑자기 이날의 북토크를 번개같이 다시 떠올렸다. 그날의 일들이 빠른 속도로 머리 속에서 재생되면서, 이날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했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때 나는 북토크를 하는 중간중간 이런 생각들을 했다. 린넨 재킷을 사길 잘했어. 역시 독자들을 만날 때는 재킷이 좋아. 예의를 차린 듯하면서도 린넨 소재가 주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거든.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잘 입을 수 있겠다. 앞머리가 많이 길었네. 펌 한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음주 쯤에는 미용실에 가야지... 이리하여 나는 지난 10년간 나에게 일어난 숨은 변화와 그 결과를 갑자기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인터뷰에서라도 나에게 지난 10년간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꼽아보라고 물었을 때 내가 미용실이나 옷가게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내가 겪었던 가족간의 일들, 작가로서의 이력, 읽었던 책들이나 사회적인 현상들과 관련된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변화를 이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내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나 옷가게 사장님 같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찾아 내 옷장의 거의 90% 이상을 채웠다. 처음에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사도 이 브랜드 옷들의 분위기와 재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이 브랜드 제품들을 고루 사보면서 어떤 디자인과 분위기가 나와 잘 어울리는지 상당한 데이터가 축적되었으므로 어떤 옷을 사든지 만족도가 높고 오래 입는 편이다. 그리고 감사한 미용사님. 이분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미용실에 가는 일을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의견 따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분께 머리를 맡기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알아서 필요한 일들을 슥슥 다 해주신다. 오랫동안 나에게 미용실과 백화점은 치과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고, 상당한 돈을 쓰고도 그 결과는 항상 미심쩍었다. 쇼핑과 스타일링에 대한 자괴감은 자존감마저 깎아먹어 공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에 불필요한 위축감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의 이 아름다운 단골가게들은 내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구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바꾸어 생각하면 일상 속에서 대단치 않은 일들로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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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01 17:29

위선과 무능 vs. 쇄신과 미래의 유능

최근 대통령과 정당 지지율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작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부터 최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455개로 이 중 면접조사 139개 ARS 조사 316개다.주간 단위로 적게는 2개 많게는 19개의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다. 평균적으로 한 주에 8개 내외의 여론조사가 있었다. 가장 많은 여론조사는 대통령 취임 1주년 때였다. 대통령 지지율은 4월 중순부터 상승추세를 보인다. 지난 5주 동안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54개였는데,이 기간 동안 대통령 지지율은 평균 32.1% 34.2% 34.7% 37.4% 37.9%를 기록한다. 반면 대통령 부정평가는 63.7% 62.8% 61.2% 59.1% 59%로 변화한다. 주별 평균으로 본 대통령 긍정평가가 한 달 이상 계속해서 상승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윤석열 정부출범 후 처음이다. 다른 조사도 비슷한 양상인데 갤럽조사는 3주,리얼미터 조사로는 4주 연속 상승을 기록한다. 이제 40%를 목전에 둔 대통령 지지율의 다음 목표는 40% 중반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선승리의 중도보수연합 재건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행보가 출발점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된다. 정당 지지율은 같은 기간 동안 민주당 하락세의 약보합, 국민의힘 상승세의 약보합 양상이다. 주별 평균으로 보면 지난 한 달 민주당이 국민의힘에 계속 앞섰지만 그 격차는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크게는 양당 지지율이 10% 포인트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양당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로 좁아진다. 양당 지지율의 격차가 줄어든다는 것은 양당의 지지율의 흐름이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최고 지지율은 한 달 전이고 국민의힘 최고 지지율은 가장 최근이다. 민주당 주별 평균 지지율은 이 때 최저 37.7% 최고 42.7%를 기록한다. 국민의힘 주별 평균 지지율은 최저 33.7% 최고 36%를 기록한다. 5.18에서 5.23까지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시간이다. ‘광주에서 봉하마을로’ 이어지며 지지율 상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당이 최소한 여론과 관심의 초점이 되는 기간이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지율은 지난 한 달 동안 하락세였고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윤 정부출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지지율이 하락한다. 추락하는 민주당 지지율은 연속된 구조적 위기의 당연한 결과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의 리더십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에 ‘송영길의 전통과 구태의 관행’ 돈 봉투 파문에 이어 ‘김남국의 신기술 코인’파동이 이어진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여당에 비해 잘하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지만 않아도 지지를 잃지는 않는데 스스로 자초한 위기다. 특히 김남국 파문은 ‘윤미향-양정숙-김홍걸-오거돈-박원순-노영민-김상조’로 이어진 위선 시리즈의 끝판왕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모습이다. 김남국 사태는 지금 시작으로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 위선 시리즈’의 가장 앞에는 조국이 있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상승세의 약보합인 것은 그들이 무엇을 잘한 결과는 아니다. 굳이 해석한다면 최근 대통령의 외교성과에 기댄 부산물의 지지율 상승세다. ‘김재원과 태영호 징계’이후 국민의힘은 여론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야당은 실수하지 않으면 되지만 여당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잘해야 한다. 그래야 골든 크로스가 가능하다. 지금 여당은 무능의 다른 말이다. 국민의힘은 지금 내년 총선을 향한 조용한 준비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벌써부터 영남 일부지역에서는 몇몇 다선의 물갈이와 이들을 대체하게 될 “검사출신 공천”설이 횡행 한단다. 어느 정도의 과장과 오해도 있겠지만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이름으로 윤석열의 중간심판 선거’를 지향한다. 지금부터 내년 총선까지 양당은 ‘새로움의 도전 앞’에 선다. 누가 먼저‘New 민주당’ 또는 ‘새로운 국민의힘’으로 국민에게 다가가느냐의 시험대다. 양당 모두 누가 더 과거로 되돌아가느냐의 경쟁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다. 이제 더 이상 서로가 서로의 등불과 희망이 되는 ‘반사이익의 정치’는 국민들이 용남하지 않는다. 누가 위선과 무능의 정치에서 벗어나 쇄신과 미래의 유능한 정치를 보여주느냐가 문제다! 국민의 힘? 민주당? 아니면 제3당?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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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5 16:55

가짜뉴스 대처법,  필찰(必察)

진실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다. 인터넷에는 근거 없는 거짓정보가 진실인양 포장되어 자리 잡고 있고, SNS에는 그럴듯한 거짓이 설득력 있게 넘쳐흐르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신 차리고 보지 않으면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모호(模糊)의 시대다. 올해 7월에는 3일 빼놓고 비가 내린다는 근거 없는 외국 기상예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누가 무슨 외제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며 거짓 비방하여 법원의 처벌을 받기도 하고, 미국 발 금융위기가 곧 한국으로 불어 닥쳐 상상할 수 없는 금융위기가 올 것이란 어설픈 예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뉴스를 타고 다닌다. 자극적이어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선정적이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다. 바야흐로 가짜뉴스가 진실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입과 혀는(口舌者, 구설자),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의 문이오(禍患之門, 화환지문), 내 몸을 찍어내는 도끼다(滅身之斧, 멸신지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말을 하면, 그 말이 도끼가 되어 나를 찍기도 하고, 내 인생에 큰 근심이 될 수도 있으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명심보감>의 오래된 당부다. 말 한마디라도 신중하게 할 것이며,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은 더더욱 조심하여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거짓은 아무런 여과 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만든 거짓이 아니라도 퍼 나르는 것만 해도 벌을 받아야 한다. 거짓을 진실인양 둔갑시키고, 떠들고, 나르고, 믿는 사람 모두 그 죄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길에서 어깨 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길에서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논어>에서 말한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을 그저 길거리에서 듣고 길거리에서 함부로 말해버리는 것(道聽塗說, 도청도설)이야말로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는 일(德之棄, 덕지기)이다.’ 길거리 통신사를 함부로 세워 마음대로 사건을 부풀리기도 하고, 왜곡시켜 진실이 실종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공자의 경고다. 공자는 ‘도청도설(道聽塗說)’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짜뉴스에 속지 말고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살펴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이야기해도(衆人好之, 중인호지), 반드시 직접 살펴서 판단하고(必察焉, 필찰언),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해도(衆人惡之, 중인오지), 반드시 직접 살펴서 확인한 후 결정해야 한다(必察焉, 필찰언).’ 모든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이 아니다. 진실은 부풀어지기도 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가짜뉴스가 있어 멀쩡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악인을 착한 사람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던 것 같다. 오로지 믿을 것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왜곡된 대중의 의견에 휩쓸려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요즘 시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한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의도된 거짓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정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든 혼란한 시대다. 거짓을 퍼뜨려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근거 없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표를 얻으려는 사람들,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근거 없는 사실을 떠벌리는 사람들, 할 일 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생사람 잡는 사람들,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안기는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반드시 직접 살펴 판단하라(必察)! 이것만이 가짜 뉴스와 결별하고 진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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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8 16:41

썩는 것은 축복이다!

태양은 공중에 떠 있고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낭창낭창 흔든다. 벌써 짙어진 녹색 나뭇잎들은 기름 바른 듯 반짝이는데, 나도 모르게 불쑥, '볕 좋고 바람 좋고, 참 좋은 계절이다' 하며 감탄을 한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죽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생의 길흉화복을 두루 겪고 인생을 알 만큼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나는 이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궁리해도 이 물음은 불가해하기 짝이 없다. 인류는 오랫동안 불사에의 소망을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회춘이나 죽지 않는 소망은 가망없는 짓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땅속에 매장된 시신은 부패하고 원소로 해체되어 사라졌을 테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살아서 무병장수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그들은 결국 흙에서 묻힌 채로 썩어 분해되었을 테다. 생명 활동을 마치고 사라진 존재들, 시신이 썩어서 존재 이전으로 돌아간 존재들은 덧없고 애잔하다.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한 가지 의문은 '신은 왜 결국 무로 돌아갈 존재를 창조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생생한 본성과 감각, 지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적정 온도에서 방치해 둔 음식물은 부패한다. 음식물은 흐물흐물 문드러지고 악취를 뿜어내며 썩는다. 실온 보관한 떡이 쉬어 곰팡이가 슬었을 때 어린 나는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던지. 주방의 부패한 음식들은 식중독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서둘러 이것을 쓰레기로 분리하고 처리한다. 음식물만이 부패하는 건 아니다. 쓸모를 다 한 것들, 즉 고양이나 쥐 같은 동물 사체, 낙엽, 배설물, 옷, 가죽 제품, 종이 등이 다 썩는다. 쇠조차도 녹이 슬고 썩어 부스러진다. 썩는 것은 동식물과 쓸모를 다한 것들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운명이다. 부패는 죽은 것들이 분해되는 전 과정을 아우른다. 이것은 형질 변용이고 소멸이며 다른 한편으로 생성이기도 하다. 부패와 생성은 하나로 포개지는데, 이는 지구 생명이 순환하고 번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생태학에서 구더기, 미생물, 세균류들은 죽은 것들의 자연의 분해자다. 이것들은 썩은 것은 먹어치우며 유기물이나 무기물로 쪼개서 식물들의 영양분으로 만든다. 미생물이나 곤충 같은 땅의 분해자들은 죽은 것들을 재사용할 수 있게 얼마나 부지런히 가공해내는지. 잘 썩는 것들이야말로 지구 생명을 이롭게 한다. 플라스틱 같이 썩지 않는 것은 미세한 조각으로 쪼개질 뿐 썩지 않는다. 썩지 않는 쓰레기의 처리는 인류 최대의 고민거리다. 이를테면 미세 플라스틱은 땅과 해양을 오염시킨다. 이것들은 먹거리와 함께 우리 몸에 들어와 위해를 가하는 원인 물질이다. 썩는 것들로 지구 생명은 번성한다. 이를테면 퇴비 재료는 썩은 식물들로 땅으로 돌아가서 토양을 살리는 영양분으로 탈바꿈한다. 반대로 썩지 않는 것들은 지구의 영구적 골칫거리이고 재앙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의 세계가 분해 세계와 분해에 저항하는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부패와 분해는 궁극의 운명이다. 죽은 것들을 부패와 분해로 되돌리는 능력을 기반으로 자연계는 순환을 이어간다. 부패라는 과정이 없다면 뭇 생명은 대를 이어 살아갈 수가 없다. 일부러 찾아서 읽은 생명 과학자인 후지하라 다쓰시는 '분해의 철학'에서 "부패 기능이 약화되면 먹이 사슬의 기반이 약화되고 이 기반이 약화됨으로써 사슬의 연결이 이완된다. 그리하여 흙이나 바다로부터 주방을 경유하여 인간의 입에 다다르는 음식이 저급화되거나 그 양이 감소되어 기아를 낳는다"라는 구절에 무릎을 친다. 부패가 자연의 섭리라면, 부패에 저항하는 것은 생명 본연의 몫이다. 부패의 기능 속에서 생명 순환의 원리가 작동한다. 모든 생명체는 부패와 분해에 저항하는 세계 속에서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다가 제 생명 정보를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부패한 뒤 무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자연의 섭리다. 그러니 죽고 사는 것은 이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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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1 15:22

양심불량한 비서

챗gpt라는 것이 처음으로 나타나 세계를 강타했을 때 나는 마침 새 소설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챗gpt가 훌륭한 시나 소설, 에세이를 쉽게 써낸다는 경험담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심 심란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인공지능에 의해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역이 예술이라니, 이럴줄이야! 지금이라도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것인가? AI의 학습기능이란 것이 워낙 놀랍다보니 1년 뒤도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초기 기술이니까 아직은 내가 낫겠지 생각하고 일단 하던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 AI를 경쟁자가 아닌 비서로 여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은 내 몫으로 하고, 소설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자료 조사 작업을 AI에게 맡기면 괜찮은 협업이 될 것 같았다. AI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럭셔리 요트에 대해 알려줘. 고급 요트 브랜드는 뭐가 있지? 그 내부 인테리어는 어떻게 생겼어? 듣기좋게 묘사해 봐. 묻자마자 AI 비서는 거침없는 답변을 술술 쏟아냈지만 럭셔리 요트 브랜드에 대한 긴 보고서의 약 80%는 동어반복이었다. 'Azimut Yachts - 이탈리아에서 만든 럭셔리 요트 브랜드로, 1969년에 창립되었습니다. 다양한 크기와 스타일의 요트를 제공하며, 최신 기술과 디자인을 적용합니다'라는 대답에서 브랜드와 연도만 바뀐 것이 열 개쯤 생성되었다.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구매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수준높은 공예와 기술력, 이태리 대리석과 고급 목재 등 고급 자재를 사용했고 침실, 주방, 영화관, 수영장, 휴식공간 등을 갖추었으며 안전에도 신경썼다는 식이었는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그런 대답을 듣고있자니 성실한 조사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이것저것 갖다붙여 아는척만 하는 양아치 비서의 '썰풀기'를 듣는 것 같은 격렬한 열받음을 느꼈다. 내 친구는 AI에게 의학 전문 지식을 물었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랍도록 화려한 새로운 학설과 논문 리스트를 얻어 들고 횡재한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제공한 논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는 의문과 혼란에 빠졌다. AI가 소개한 논문을 실제 저널에서 찾을 수 없었고 저자 이름도 모두 낯설었다. "나는 이런 논문을 찾을 수 없는데? A라는 사람이 이런 학설을 주장한 게 확실해?" AI는 자기 대답이 확실하다, 보충하는 자료도 있다고 몇 번이나 장담하다가 갑자기 논문에 의거한 전문지식을 논하는 것은 자신에게 허락된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라서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다고 태세를 전환하더니 서둘러 대화를 종결해버렸다. 친구는 AI가 불러주었던 화려한 논문 리스트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AI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저널에 가상의 학자가 기고한 가상의 논문 제목을 줄줄 불러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AI의 속성을 눈치채고 있다. 챗gpt에서 g는 generative,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생각해서' 답변을 '만들어낸다'. 이미 정해진 답을 반복하는 이전 AI보다 진보된 모델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대답에 대한 양심이나 성찰이 없는 존재다. 그의 이런 양심불량한 측면을 지적하고 조롱하는 수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그에게 "세종대왕이 안중근 의사를 암살한 이유는?"이라고 묻는다면, 그는 거침없는 대답을 생성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안중근의 총명함과 용맹함을 믿고 그를 중용하였으나 차츰 그가 대북문제에 (대북문제라면 여진족? 북한?) 강경노선을 주장하여 왕명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결국 자객을 보내어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이 대답을 받아들고 나는 이 자가 광대무변한 지식을 갖추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그 지식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합당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 인간이 인공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무거운 질문에 뜻밖에 쉬운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양심과 성찰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는 말을 돌아보고,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현재 인류가 가진 최첨단 AI보다 나은 존재라고, 산뜻하게 말할 수 있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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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3 16:26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공조건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가는 중 이다.무당파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4월에 실시된 12개 여론조사를 보면 무당파의 비중은 면접조사(4개) 기준으로 최대 31% 최소 29%다.지난주 5개 조사의 무당층은 최저 20% 최대 31%로 양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작년 12월부터 지난주까지 내년총선의 성격을 묻는 조사는 모두 21개였는데 여당 심판론이 19승 1무 1패로 압도적이다.4월로 범위를 좁혀보면 정권 심판론이 50%를 넘긴 게 7번 중 5번이다.하지만 중도무당층은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으면서도 민주당 지지로 바로 이동하진 않는다.‘돈봉투’파동 때문이다. 최근에는 국민의힘 지지층의 대통령 지지철회가 늘어나는 양상도 보인다.지난 주 갤럽조사에서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68%인데 그 전주는 74%였다.반면 국힘 지지층의 대통령 반대는 19%에서 25%로 늘었다. 한마디로 중도무당층의 실망이다.그들은 한쪽의 ‘친윤’득세와 다른 한쪽이 ‘개딸’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는 모습을 외면한다.이상민 의원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양대정당이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는 때”라 하고 김종인 위원장은 “국민들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 이유는 분명하다.“보수 10년 진보10년을 얘기하는데 그 20년 동안 문제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젊은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한다.”며 “이런 정당에서 과연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방안이 나올 수 있겠나? 현재 상태로 봐서 불가능하다.”는 게 김종인의 판단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들 스스로 20년 동안 속아왔다고 생각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한다.이른바 ‘제3지대론 또는 제3정당론’으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틀을 만들 수 있는 세력”이라며 금태섭 전 의원이 가장 먼저 물꼬를 텄다. 그렇다면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의 새로운 구상’을 받아낼 수 있는 제3당의 성공조건은 무엇일까? 첫째,인물중심의 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멀게는 1995년 JP의 자유민주연합,가깝게는 2016년 안철수의 국민의당 사례에서 보듯 대선주자급 인물의 존재는 우리나라 제3당 출발의 필요조건이지만 동시에 실패의 시작이기도 했다.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중심의 업그레이드된 제3당이어야 한다.그래야 지속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다. 둘째,문제제기의 정치를 넘어 ‘의제별 문제해결능력의 정치 세력화’여야 한다.기존정당에 대한 반발심리와 정치적 불만은 제3당의 출발동력에 불과하다.이때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는 데 도움 되는 현실적 정책대안의 제시능력이 필요하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1000원의 아침밥’이 화제였다.학생이 1000원을 내고 농림부가 1000원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학이 부담하는 사업이다.여야는 경쟁적으로 ‘1000원의 아침밥’을 확대하자는 입장이다.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정부의 지원 단가를 높여 학교부담을 줄여서 참여 학교가 더 확대되었으면 좋겠다.”면서 “점심 저녁도 제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 술 더 뜬다.그는지원금과 지원대상을 늘려야 한다면서 “전국학교에 주자.”고 한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하다.사람들은 “내년 총선 앞두고 결국 혈세로 생색내는 것.”이라고 한다.청년들은 “아침밥 한 끼 먹고 힘낼 수야 있겠지만 영원히 나오는 밥은 아니다.같이 밥 먹고 치킨 먹는다고 젊은이들이 표를 던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청년들 마음 얻기가 더 힘들어 질 것 같다.”고 한다. 결국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먹거리를 마련해내는 능력’이 요필요하다.일자리 창출의 문제해결능력이다.민생경제만이 아니다.‘연금개혁 노동개혁 그리고 교육개혁의 3대 개혁’은 물론 공동체의 미래를 향한 정치개혁도 마찬가지다.선거제도 개편은 견제와 균형 그리고 분권의 시대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개혁의 출발점이다. 누가 누구와 함께 ‘국민들의 새로운 구상’의 실현을 위한 고통스럽지만 담대한 첫발을 시작할까?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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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7 17:26

괴력난신(怪力亂神) vs 상덕치인(常德治人)

“튀어야 시청률이 올라갑니다.” 방송국 PD가 인문고전 강의를 하던 필자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처음 들어본,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괴상하고 기이한 강의라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는 마케팅 논리다. 삭발을 하든, 기발한 복장을 하든, 기괴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든, 신비적이고 충동적인 논리로 말하든, 이 어느 한 가지라도 있어야 시청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나름 대중을 분석하고 있다는 그 분야 전문가의 조언이다. 한마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언변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없으니 이상하고 특별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온통 괴상하고 이상하고 특별한 것으로 가득하다. 먹는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건강식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상품, 신비하고 오묘한 효능은 그런대로 들어줄만 하다. ‘마귀와 사탄이 들려서 그렇다(怪).’ ‘내 능력은 사람의 생사와 국가의 운명을 주관한다(力).’ ‘혼란의 세상이 다가왔다(亂).’ ‘하늘에서 벌을 내릴 것이다(神).’ 이 정도 되면 괴력난신(怪力亂神) 마케팅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권력을 만들고, 왕국을 만드는 선동가이며 사기꾼이다. 예수님,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신을 모욕하고 능멸한 자로서 벌 받아야 할 대상이며 신성(神性)을 가장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목회자이다. 공자는 괴력난신을 경계하고 멀리하였다. 공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도 튀어야 팔리던 시대였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정상적이고 평범한 논리는 수요자인 귀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 왕들과 귀족들은 신들의 이야기와 비약의 논리를 선호하였다. 당대의 백가(百家)들은 온갖 특별하고 신비한 이야기로 유세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 하였다. 공자 역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지만, 괴력난신으로 접근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세상을 속여서(欺世, 기세) 이름을 도둑질하지 않겠다(盜名, 도명).” 비록 14년 동안 유랑의 길을 걸으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遯世, 둔세)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았던 공자의 선택이 오늘날까지 공자를 있게 한 이유다. 괴력난신으로 이름을 날리고, 왕국을 세우고, 권력을 얻었던 승려, 마술사, 목회자, 차력사, 신비주의자들은 봄날에 녹는 잔설(殘雪)처럼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괴력난신에 대항하는 말이 상덕치인(常德治人)이다. 상식(常)은 재미없고, 인격(德)은 평범하고, 질서(治)는 따분하고, 인간(人)은 흔하다. 그래서 괴상(怪)하고, 능력(力)있고, 혼란(亂)하고, 신비(神)한 것에 항상 밀린다. 그러나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역전된다. 가장 상식적인 것이 가장 정의로운 것이다. 물은 맛이 없는 무미(無味)의 맛이나 영원히 질리지 않는다. 달콤하고 새콤한 것은 아무리 혀를 유혹하고 마음을 사로잡아도 그때뿐이다. 어머니는 평범했지만 가장 뼛속 깊이 새겨진 인생의 추억이었고, 공기는 흔했지만 생명의 근원이 되어 나를 숨 쉬게 한다. 우리가 당연하고 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위대함이고 특별함이다.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연못에는 물고기가 뛰고, 들에는 말이 달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 상식이 자연이고, 자연은 영원하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영원한 것이다. 신을 빌려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혼란을 이용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목회자들이 사회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마음이 허전하고 갈길 몰라 하는 사람들은 황당하고 신비적인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의 빈 마음을 채우고 있다. 비약은 마약처럼 정도(正道)를 마취시켜 사회를 비정상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상덕치인(常德治人)을 위협하고 있는 시대가 안타깝다.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미래가 아닌 지금에 집중하며,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긴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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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0 16:50

봄날이 가도 삶은 계속되어야 해

지뢰가 폭발하듯이 꽃은 만발하고, 대포가 터진 자리에는 꽃 사태였다. 봄은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의 전쟁이다. 평지와 둔덕마다 흐드러진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목련 벚꽃들이 시샘하듯 불어 닥친 비바람에 덧없이 졌다. 길가 벚나무 아래에는 하얀 꽃잎들로 낭자하다. 봄은 서둘러 왔다가 철수할 기색이다. 사월의 태양 아래 꽃들은 지고 나뒹구는 꽃잎들은 철수하는 봄이 남긴 사체들이다. 봄꽃 진 뒤 느티나무 묵은 가지마다 연두색 새잎들이 돋고, 가랑잎 두텁게 쌓인 표토를 밀어 올리며 원추리 싹이 떼 지어 올라온다. 도처에서 피어나고, 돋고, 꿈틀거리고, 뻗치는 것은 봄에 대한 살아 있는 것들의 벅찬 생명 반응들이다. 봄꽃 둘레에 노오란 햇빛이 꿀벌처럼 잉잉거릴 때 우리는 벅찬 희망을 품고 낙관적인 기분에 빠졌었다. 심장은 보람으로 펄떡이고, 혈관의 피들은 온몸을 돌며 환호성을 지른다. 고양이 요람 같은 봄날에 우리의 쾌감지수는 상승하고, 우리는 가장 희망적인 호모 사피엔스로 재발명되는 것이다. 봄날 대기에는 꽃들이 어지럽게 내뿜는 방향만이 아니라 약간의 허무, 약간의 슬픔, 약간의 외로움도 함께 녹아 있다. 봄날의 바람과 태양이 우리 젊음을 약탈해가듯이 세월이 돈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열망하던 우리의 푸르고 아름다운 젊은 날을 앗아간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의 첫 키스는 뇌리에 강렬함으로 각인되지만 어느 입술이 열일곱 번째로 내 입술에 가 닿았던 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토록 얕은 기억의 용량이라니! 우리 오감을 문지르던 꽃이 다 지면, 보람과 기쁨을 앗아간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름다운 것들의 유효기간은 비정상적으로 짧구나! 종달새 우짖는 이 허전한 봄날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견딜 수 있나? 오래 전에 헤어진 당신은 잘 지내는가? 이제는 유난히 찰랑이던 당신의 검은 머릿결만 기억날 뿐 나머지 이목구비는 희미해졌다. 당신에게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꿈속의 우체통에 집어넣는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는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하다. 나는 아침을 먹고 나가 공연히 근린공원을 한 바퀴 돌고, 볼 일도 없는데 동사무소에도 들렀다가 돌아온다. 오늘은 동네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빌어 반나절 넘게 읽고, 저녁 무렵엔 강가를 따라 바람을 맞으며 걷었다. 봄날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지나간다. 희망과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하던 우리의 전성기도 지나간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로 속수무책으로 지나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바다의 악령인 하얀 고래를 좇던 에이허브 선장처럼 용맹했던 우리의 모습을 이제 누가 기억할까! 아무도 우리가 삶에서 거둔 공훈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봄날 저녁의 어스름에 찾아드는 허무와 고통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보람이던 봄꽃의 수명은 짧고 우리가 견뎌야 할 고통은 길다. 빈센트 밀레이는 노래한다. "내 밥그릇은 고통으로 가득 차 넘친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라고. 봄날의 달콤한 고통과 허무를 견디며 우리는 속절없이 하루하루 늙어간다. 한 살이라도 더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한 가지는 인생 마일리지가 쌓인다는 점이다. 인생 마일리지는 삶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는 경험의 두터움이고, 그것에서 양조된 인격의 원숙함이다, 우리는 치열하게 고투하며 보낸 젊은 시절을 지불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다. 인생 마일리지란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한 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원숙함이란 이름의 훈장이다. 당신의 인생 마일리지는 얼마나 되는가? 봄의 무대에서 꽃들은 퇴장했다. 그렇다고 낙담하고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한 계절이 끝나면 새로운 계절이 달려온다. 우리에겐 살아갈 날들이 무궁무진하다. 봄을 여윈 슬픔을 딛고 우리의 갈망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자. 먼 데서 당신이 새로운 아침을 맞을 때, 우리에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늠름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지금 당장 할 일은 봄이 떠나면서 흐트러뜨리고 어지럽힌 자리를 말끔하게 치우는 것이다. 봄날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는 저마다 제 인생의 이야기를 마저 써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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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3 17:37

촉촉했던 산들의 기억

내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인왕산 아래 옥인동 47번지다. 결혼 이후 옥인동을 떠나 10여년간 살다가 2008년 연어처럼 회귀에 성공했고 그 뒤로 계속 경복궁 서쪽 마을에 살고 있다. 2010년 인왕산 계곡 자락에 얹힌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계곡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소리가 울린다는 뜻을 가진 그 계곡의 이름에 의구심을 가졌다.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라면 내가 살던 그 언덕이 아닌가? 옥인아파트 쪽이라면 위치가 다른데? 가까운 곳이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인왕산의 동남쪽 사면이었고 수성동계곡은 정남향 사면이라서 줄기가 좀 달랐다. 그런 작은 차이에도 예민해지는게 내 마음이었다. 우리 동네의 이름을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억울했지만 겸제 정선 선생님이 장동팔경첩에서 그 계곡의 모습을 아름다운 필치로 남기고 그 이름을 ‘수성동(水聲洞)’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해놓으셨으니 따질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의 수성동은 우리 동네였다. 우리 마을은 정말이지 사철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환각이나 환청이 아닌게, 정말로 인왕산 계곡 위에 한겹 얇은 시멘트를 덮고 게딱지만한 작은 집들을 세운 구조였다. 어릴 때 살았던 우리 집 화장실은 그 아슬아슬한 주거 형태의 가장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반듯하게 하얀 도자기로 된 신식 변기가 달려 있었지만 오로지 그 말단 부분만 문명의 흉내를 냈을 뿐 그 아래로는 거침없는 인왕산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힘차게 치솟은 바위와 천둥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 위에 살포시 변기를 얹은 천연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면 무서워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아무런 감흥 없이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날마다 용변을 해결했다. 세월이 흐르며 물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렁차게 힘차던 콸콸 소리가 졸졸 소리로 줄어들어 있었다. 수성동계곡 쪽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 속 아름다운 바위들은 여전한데 그 아래 흐르던 물길은 명맥을 유지하기 위태로울만큼 줄어들었다. 느낌의 변덕이 아닌 것이, 예전에 옥인아파트가 있을 때 그 맨 꼭대기에는 계곡물을 받은 수영장이 있었다. 여름에도 뼈가 시린 그 물 속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첨벙거리며 놀았다. 이제는 아이들도 물도 없어, 그곳에 수영장이 있었다는걸 믿을 수 없다. 여름 장마철이 되어도 수영장을 만들만한 계곡물을 모으기는 터무니없다. 수성동계곡에서 시작된 물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면 청계천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인왕산에서 발원한 그 물길이 청계천으로 이어지고 답십리로 흘러 한강으로 가는 거였다. 이제 인왕산에서 오는 물은 터무니없이 수량이 적기 때문에 청계천의 물은 모두 인공급수에 의존한다. 그 많던 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상청의 통계자료를 참조하면, 1970년대에서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강수량은 큰 변화가 없다. 서울 외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한정해볼 때 하늘은 인간들에게 늘 비슷한 양의 물을 공급했다. 차이는 사용량에 있었다. 인구가 늘었고, 1인당 물 사용량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어릴 때 나는 주 1회 대중목욕탕에 갔지만 지금은 따뜻한 우리집 욕실에서 매일이다시피 씻는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지하수를 퍼낸 토지는 말라서 파삭해졌다. 기후 변화라 하니 하늘을 원망해야 할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이 문제다. 벚꽃이 한창이던 주말, 갑자기 인왕산 산불 소식이 전해졌다. 바삭하도록 오래도록 가물었던 산자락은 거침없이 타들어갔다. 마을 친구들은 메신저로 화재 이곳저곳의 장면들을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는 놀랍도록 정밀하게 화재 하한선에 소화액을 뿌리는 소방 헬기의 진화 장면도 있었다. 전국에서 산불과 싸우신 소방관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반년 넘게 이어진 남녘의 가뭄에 다같이 근심하는 봄이었다. 전국에서 꼬리를 물던 산불 소식을 잠재우는 고운 봄비를 반갑게 맞이하며, 목마른 산들이 다시 촉촉해질 그날을 기다려본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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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6 16:07

2024년 총선, 1년이다

내년 이맘 때 쯤은 총선의 공식 선거운동기간이다.2024년 3월 28일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되는데 4월 5일은 사전투표 날이고 10일은 본 투표 날이다.2024년 4월 10일 22대 총선은 어느 정당이 승리할까? 총선을 1년 여 앞둔 현재시점에서 정당 지지율과 ‘정권 지원론 vs. 정권 심판론’의 여론흐름을 보자. 우선 정당 지지율.윤석열 대통령 취임이후 지난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373개.주별평균 8.3개로 매일 1개 이상의 여론조사가 있었던 셈이다.이중 ARS 조사가 256개 면접조사가 107개였다. 지난 45주 동안 정당 지지율 흐름을 보면 첫째,국민의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작년 지방선거 전후였다.당시 국힘 지지율은 주별평균 50%까지 육박했다.둘째,지방선거 이후 국힘 지지율은 하락하여 주별평균 40%이하로 떨어지고,민주당 지지율은 주별평균 40%를 돌파하며 양당 지지율은 역전된다.이 때가 7월 중하순인데 주별평균 40% 전후의 민주당과 30% 중후반대의 국힘 지지율 패턴은 12월 초중순까지 이어진다. 셋째,12월부터 2월초까지 민주당 약간 우위의 양당 지지율은 주별평균 30% 후반대에 머물면서 엎치락뒤치락 한다.넷째,전당대회를 전후해서 국힘 지지율은 민주당에 잠시 앞서는 모습을 보이지만 최근 한일정상회담과 69시간 논란의 여파로 민주당에 다시 역전 당한다. 다섯째,최근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하락은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과 함께라서 주목된다.보수층과 영남 그리고 고연령층의 이탈이다.작년부터 시작되어서 전당대회를 통해 마무리된 젊은층의 이탈과 함께 복합위기의 국민의힘 지지율이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은 다시 하한선에 다가설 가능성을 보여준다.첫번째 하한선은 35% 전후인데 35%는 “바이든 vs. 날리면 논란” 때 ‘날리면으로 들은 사람들’이다.마지막 저지선은 25% 전후인데 이는 2017 대선 때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얻은 득표율이다. 다음으로 여야 심판론의 여론흐름.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여야 심판론의 여론조사는 모두 5개인데 모두 정권 심판론이 우세했다.그 중 3번은 여당 심판론이 50%에 육박했고 가장 낮은 게 47%였다.야당 심판론은 44%가 가장 높았고 36%가 가장 낮았다. 총선 1년 전에 좀 더 다가서는 올해 3월의 여야 심판론 여론조사도 5개인데 4:1로 민주당 우세다.국민의힘이 42% vs. 39%로 근소하게 앞섰던 것은 전당대회 직후 한 번뿐이다.정권 심판론은 낮게는 39% 높게는 55%였고 국힘 전당대회 전후를 제외하면 44%에서 시작하여 55%까지 계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다.최근의 민주당-국민의힘 지지율 역전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실제 총선결과는 총선 전 여야 심판론의 흐름에 먼저 나타난다.예를 들면 2016년 총선을 7개월 여 앞둔 2015년 9월 조사를 보면 정부 견제론(42%)이 정부 지원론(36%)에 앞선다.총선을 2개월 여 앞둔 2016년 1월 말 조사에서는 정권 심판론이 50%를 넘기며 민주당의 +1 신승(123석)을 예고한다. 2020년 총선 1년 전인 2019년 4월 조사에서도 정부 지원론(47%)이 정부 견제론에 10% 포인트 앞선다.2020년 신년조사에서는 국민 절반 이상이 ‘국정발목을 잡는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고 하고 여당 심판론은 30% 중반에 머문다.2020년 총선의 민주당 역대급 압승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2024년 총선승부의 핵심은 수도권이다.2020년 총선기준 253개 지역구는 122개의 수도권과 131개의 비수도권으로 나뉘는데 131개의 비수도권 중 64곳이 영남이다.따라서 253개 국회의원선거 지역구는 수도권(122)과 영남(64) 그리고 비영남(67)이다.양당 모두 수도권과 중도층 그리고 2040세대가 총선승부의 분수령이라는 말이다.내년 총선,이제 1년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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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30 17:46

청안(靑眼)과 백안(白眼)

눈은 인간의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눈을 통해 신체 건강을 알 수도 있고, 마음의 상태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은 눈을 통해 상대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동공을 둘러싸고 있는 홍채인식을 보안에 적용하는 기술이 있는가하면, 홍채를 통해 전생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을 통해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나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기도 한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에는 꿀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하다고도 한다. 애써 눈을 피하는 사람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고, 이야기를 하면서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면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탐내는 물건을 보면 눈에서 독(毒)이 나와 눈독을 들이기도 하고, 상대방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며 눈에 붙은 살이 움직여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더하면 눈에서 총이 발사되어 눈총을 주기도 한다. 눈은 독이 되기도 하고 총이 되기도 하여 내 감정이 상대방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는 인간의 기관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눈빛으로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완적은 속세를 피해 산림으로 들어가 권력과 단절된 삶을 선택한 지식인이었기에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일단 속물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흰 눈동자로 상대방을 보았다. 일명 백안시(白眼視)의 시선법이다. 마주보고 이야기는 하고 있으나 동공은 다른 곳에 있고, 흰(白) 눈자위(眼)로 상대방을 보는 시선법이다. 백안시는 앞에 있는 사람을 유령취급하고 완전 무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모멸감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무시(無視)당하는 것이다. 시선(視)을 주지 않기(無)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사람들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명품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비싼 차를 타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상대방의 시선이 나를 보아주기를 바라고,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인정 욕구이다. 반면 상대방을 존경하거나 인정할 때는 파란 눈으로 상대방을 보았다고 한다. 일명 청안시(靑眼視)의 시선법이다. 파랗게(靑) 빛나는 눈동자(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호의를 표시하는 눈빛으로 가장 친근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백안시라는 말은 참으로 다양하게 사용한다. 곧은 사람이 의롭지 못한 이익과 자리를 보면 백안시하여 눈길 주지 않을 때는 좋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여 상대방이 누구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깔보고 무시하여 백안시하는 것은 나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눈빛을 곱게 하고 상대방을 바라봐 주는 것만 해도 참으로 큰 보시다. 흰 눈동자를 뒤집으며 무시와 경멸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그 어떤 이유와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다.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만난 이웃에게 청안의 눈인사를 건네고,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백안시당하는 분들을 따뜻한 청안의 눈빛으로 맞이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큰 나눔이 눈빛과 얼굴빛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노선이 다르다고 서로 얼굴을 찡그리며 흰 눈동자로 백안시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민망하기까지 하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하얀 눈동자를 푸른 눈동자로 전환하여 서로 아름다운 눈빛으로 대하는 그런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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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3 17:50

불효자는 웁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상실과 몰락은 생명을 품은 모든 존재의 불가결한 실존의 조건 중 하나다. 상실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삶은 많은 것을 잃는 경험 가운데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애착하는 것들은 망각과 소멸, 세월의 파괴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지는데, 이 상실은 달콤하고도 씁쓸하다. 생에서 가장 큰 상실은 혈연의 사라짐일 테다. 혈연 중 누군가 죽으면 유품들은 소각되거나 증여되고, 소수의 물품만 보존되는 행운을 맞는다.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는 와중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모든 어머니는 바쁜 천사를 대신해서 이 땅에 온다고 했다. 그 천사가 지상에서의 소명을 다 하고 떠난 지 몇 해가 지나간다. 올해도 돌아온 어머니 기일을 혼자 조용히 보냈다. 모란과 작약이 피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는 일에 치어 차츰 얇아지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머니와 시골집 거실에 둘이 있던 어느 쓸쓸한 저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심상한 어조로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는데, 어머니 죽음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탓에 나는 놀라고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팠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슬픔이나 쓸쓸한 자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하도 담담해서 내 마음은 패는 듯 아팠을 것이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때 나는 사춘기를 맞았다. 자식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니 다루기 까다로웠으리라. 모성의 부재 속에서 보낸 유년기 내 무의식에 가라앉은 앙금이 원인이었을 테다. 어머니는 내 어린 입술에 젖을 물리고 배부르게 먹였겠지만 내겐 도무지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열두어 살 쯤 되었을 때 서울에서 온 한 소년을 만났다. 어머니의 고향 친구의 아들로 우리는 곧 친해졌는데, 그는 제 엄마의 젖이 모자라 내 어머니의 젖을 자주 얻어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누구 잘못도 아니었지만 젖 떼자마자 유기로 인한 슬픔, 즉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한 분노와 고통이 내 무의식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농부의 딸로 자란 어머니는 배움이 많지는 않았으나 아득한 눈빛을 가졌으니 딱히 불우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머니는 결혼을 한 뒤 도시 변두리를 떠돌며 올라와 최저 생계수준의 삶을 이어가는 동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가족 부양의 책임을 혼자 짊어졌다. 어머니가 모란과 작약 꽃을 사랑하고,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물과 골짜기를 사랑하셨다, 라고 나는 쓸 수 없다.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최저 낙원에서 영혼이 깎이고 고통과 슬픔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삶을 견뎌냈다, 라고 나는 쓸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에서 홀로 보내시는 어머니를 시골에 마련한 거처로 모셨다. 늙어가는 아들과 늙은 어머니 사이에는 어느덧 세월의 더께가 두터워져 그럭저럭 안온했다. 어머니가 텃밭에 작물을 심어 가꾸는 걸 낙으로 삼을 때 나는 서재에서 책이나 꾸역꾸역 읽었다. 아들이 묵언수행 하는 라마승이었다면 노모는 착한 보살 같았다. 어머니는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리다가 경기도 남부의 한 요양병원에서 시난고난하는 생애를 마감했다. 한 상조회사의 도움을 받으며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는데, 나는 시종 담담했다. 살아가는 내내 가족 생계의 무거움에 짓눌린 채로 가난의 무두질이 거듭되며 착한 본성은 활짝 피지 못한 채로 어머니 영혼은 삭막해지고, 내면의 부드러움과 덕성은 말라붙었을 테다. 시나 음악 같은 예술의 효용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생전의 어머니에게 나는 반항했다. 철부지 아들의 성냄과 엇나감에 어머니는 난감했으리라. 더러는 엇나가는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뜬 눈으로 지새운 밤들도 있었으리라. 아,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나의 어머니'라는 시에서 죽은 어머니의 체중이 얼마나 가벼운지 땅을 누르지 않는다, 라고 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노화가 진행되며 몸피가 눈에 띄게 줄고, 죽은 뒤에는 나비보다 꽃잎보다 더 가벼워진다. 내 어머니가 묻힌 땅도 전혀 그 무게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세월 갈수록 어머니를 겨냥했던 내 거친 분노와 메마름이 불효의 증표였다는 회한에 자꾸만 가슴이 아린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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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6 17:08

그 드라마의 주인공

도합 12년이나 되는 초중학교 시절은 대체로 지겹고 칙칙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즐거운 시간이나 중요한 배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경우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학교생활은 고2때 찾아왔다.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고2는 보통 코앞에 닥친 입시의 압박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부 이야기는 오늘의 본론이 아니지만 이때 나는 성적도 일생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자면 일생 가장 우울하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야 옳았을 시기에 나는 가장 행복했다. 나만 행복했던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반은 전교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반으로 소문이 났다. 입시를 앞두고 까칠해진 사춘기 소녀들 60명을 모아놓았는데 믿을 수 없이 다정하고 화목했다. 그때 우리가 행복했던 것이 대체 어떤 모습이었냐고 말하면 딱 꼬집어 말할만한 일이 없다. 그냥 우리는 학교에서 마음이 편안했고 각자의 문제들을 잊은 채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냈다. 가장 기억나는 남다른 풍경은 우리의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수업시간동안 헤어져 있던 절친들이 다시 뭉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도시락을 들고 다른 반으로 뛰어가는 일도 흔했다. 인싸들은 커다란 그룹을 이루고 시끌벅적하게, 아싸들은 혼자 혹은 둘이서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우리 교실에서는 그런 소란스러운 재배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냥 앉은 자리 그대로 네다섯명씩 짝지어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몇 주에 한번씩 자리를 바꾸었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새로 만난 이웃들끼리 새로 그룹을 이루어 종알거리며 밥을 먹었다. 곧 절친을 찾아 다른 반에서 달려오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그들은 자기 절친이 낯선 아이들과 만족스럽게 밥을 먹는 모습에 놀랐고 절친들의 배타성이 없는 그 그룹에 굳이 끼어들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던 것은 우리가 만든 희귀한 행복에 대한 존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 60명은 1년동안 절친도 왕따도 없이 오붓했다. 그것은 분명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 반이 특별하다는 걸 알았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아름다운 시간에 보이지 않는 연출자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어른이 되고 난 뒤, 관찰자의 시선으로 교실을 다시 보게 된 이후였다. 그 탁월한 연출자는 우리 담임선생님이었다. 20대 후반의 미혼여성이었던 그분은 아주 침착한 성격이었고 말수가 적었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강조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셨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어제 학급청소시간에 무엇을 했냐고 물으셨다.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끼며 학생회 회의에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어쩌면 야단을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알았다. 다음부터는 청소시간에 회의하지 마.” 겨우 그것 뿐이었다. 나는 이후로 청소를 땡땡이치고 학생회 회의에 가는 얄미운 행동을 다시 하지 않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손, 또는 어른의 일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분이 그런 식으로 많은 일들을 보이지 않게 바로잡으셨으므로 우리는 누구나 사이 좋게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한번도 그 일을 당신의 공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참 착해서요.” 그때 우리반이었던 아이들 중에 유명인이 되거나 대 부호가 된 사람은 드물겠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시간을 살았다.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야만과 폭력의 일들로 한참동안 세상이 들썩였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더 추하고 파렴치한 일들을 뉴스로 접해야했다. 아이들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연출자가 있었다. 어른의 삶이 아이들의 삶을 연출하게 된다는 것은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다. 나의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이 싸우지 않는 행복한 1년을 연출했고 뉴스 속의 부모들은 법과 권력을 총동원한 학폭 드라마를 연출했다. 내가 연출한 폭력 드라마의 주인공이 내 자식이 되어 불행과 불명예까지 모두 그 아이의 목에 걸게 될 줄을, 그들은 알았을까. /심윤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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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9 18:21

김기현 레거시?!

한 주 앞으로 다가온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관심사항은 두 가지,김기현 후보가 결선 없이 당선되느냐 그리고 친윤계가 최고위원 5명 중 4명을 확보하느냐다. 최고위원 5명 중 4명이 사퇴하면 비대위 전환이 가능한 게 주류에게는 ‘최후의 안전장치’가 된다. 1월 중순부터 2월말까지 국힘 지지층을 상대로 한 32개 조사결과를 보면 첫째,안철수 후보는 1월 25일 ‘나경원 불출마’ 직후 김기현 후보에 앞서며 지지율 최고점을 찍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한다.2월 초가 분기점인데 “윤안연대 표현은 무례,국정운영의 방해꾼이자 적,공산주의자 신영복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안철수 당 대표되면 윤 대통령 탈당”여파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둘째,여론조사는 1 라운드 김기현 승리 가능성을 시사한다.2월 초 이후 김기현 지지율은 30% 중반대에서 45%까지 접근하는데 국힘 지지층의 40% 초반 지지율은 50%를 훨씬 넘는 당원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론과 최근 당원구성의 변화로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김기현의 국힘 전당대회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우선 정당의 공천이나 당직선거가 점점 개방화되는 추세의 반전이다.‘당원투표 70% + 여론조사 30%’ 방식은 2006년 강재섭 대표선출 때 도입된 이후 2021년 이준석 대표선출 때까지 사용된다.‘당원 100%’ 방식은 2003년 중앙당과 지구당이 인구비례에 따라 각각 50%씩 추천한 당원 23만의 선거인단 투표이후 처음이다.2003년 이전 대의원 투표에서 선거인단 투표로 바뀐 것 또한 정당 구성원의 참여확대였다. 당원 아닌 시민들이 여론조사든 직접참여든 처음으로 정당의 당직선거에 참여한 곳은 보수정당이다.2004년 박근혜 대표선출 때인데 민주당은 2012년 한명숙 대표선출 때에야 비로소 시민을 참여시킨다.박 대표는 여론조사였고 한 대표는 선거인단 방식이었다.2004년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탄핵 후폭풍의 역대급 총선패배를 앞둔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게 시민참여로 알려져 있다. ‘당정 일체론’에 대통령의 ‘명예 당대표론’ 논란도 있다.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입법부 vs. 행정부의 관계’가 아니라 ‘정부여당 vs. 야당’ 대립구도의 악순환이다.따라서 “(집권)당과 (대통령이) 혼연일체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2021년 당시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청와대에 여당 의원들이 휘둘리는 것을 바꾸겠다.”고까지 했다. 민주화 이후 집권당과 대통령 관계는 크게 ‘대권-당권 통합형’과 ‘대권-당권 분리형’으로 나눌 수 있다.이승만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가 통합형으로 이 때 집권당은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한다.통합형은 ‘정부 주도 또는 지배형’이고 분리형은 ‘정당 주도 또는 지배형’이다. “대통령이 당을 장악해 의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신잔재”라며 집권당과 대통령의 분리를 선언한 대통령은 노무현이 처음이다.이후 ‘대권-당권 분리형’의 ‘정당 주도 또는 지배형’이 한국정치의 규범이지만 통합형의 속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게 현실이다.공천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어느 날은 신의 섭리에 따른 구세주로 찬양받다가 다음날은 단지 쓰러진 신상처럼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특히 “제왕적 대통령”은 내각제와 달리 선거이후 정부운영에 있어서 정당(그리고 의회)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갖고 있다.대통령이 “현대판 군주”가 되는 상황에서 집권당은 취약해진다. 따라서 집권당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집권당이 ‘사인적(私人的) 대통령’의 민주적 책임성 부재를 극복하는 데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집권당의 역할확대는 결국 집단적 책임성의 강화다.정치적 책임의 주체를 개인에서 조직으로,사인적 책임에서 집단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대통령의 정당인식이 핵심인데 특히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이 결정적이다. 개방화와 견제와 균형 그리고 분권이라는 시대적 요구의 반전이 김기현 레거시일까? 김기현의 행보를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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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2 18:01

개학(開學)과 재학(再學)

학생들이 있는 집집마다 개학 준비로 분주하다. 중국에서 방학을 방가(放暇)라고 해서, 휴가(休假)의 뜻이 강하다면, 한국에서의 방학(放學)은 학교 밖에서 풀어놓고(放) 스스로 배우는(學) 배움의 연장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우선순위다. 전쟁 통에도 피난지에서 천막을 쳐놓고 배웠고, 공장 끝나고 야학을 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배워야 하고, 병이 들어도 배워야 하고, 나이 들어도 배워야 한다. 코로나 전염병도 배움을 멈출 수 없으며, 어떤 이유든 배움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며, 배움을 지속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죽고 나서도 후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제사를 지낼 때 배우다(學) 살다간(生) 사람이라 써 달라고 하였을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평생 배우며 사셨던 우리 집의 어르신 나타나세요!’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성공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아닌 평생 배우며 살았던 우리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교 경전의 대표자인 <논어> 첫 구절은 배움의 기쁨(悅)에 대한 선언이다. 명품을 줄서서 사고, 새 차를 사는 기쁨도 있지만, 중독성이 강하고, 더 큰 물질적 욕망을 동반하기 때문에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다. 배움을 통해 꽉 막혔던 내 생각의 둑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생각과 만나 신세계를 만나는 기쁨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喜悅)이다. 거기에 배움을 함께하는 친구(朋)가 있다면 열락(悅樂)의 인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 호학(好學)이나 모르는 것을 묻기 좋아하는 호문(好問)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나보다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下)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恥)하지 않고 묻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미덕이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상승의 날개를 달고(下學上達) 저 먼 세상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배움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다. 한국인에게 배움은 책 속의 지식만은 아니었다.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 사람 공경하고, 신의를 지키며 일처리 잘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학교 문턱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미 배움을 이룬 사람이라고 여겼다. 학력은 높지만 도리를 모르고 인성이 안 된 사람은 헛배웠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배움은 지식으로서의 축적이 아니라 내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 학습은 배움(學)이 습(習)이 되어 내 삶에 구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배우고 그저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배움을 흘려보낸다면 나에게 배움은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나라도 배웠다면 어떻게 실천하고 내 삶에 반영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배움은 다섯 가지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넓게 배우고(博學, 박학), 깊이 묻고(審問, 심문),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신사). 명확하게 판단하고(明辯, 명변), 독실하게 실천(篤行, 독행)하는 과정은 배움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과정이다. 김장독을 제대로 묻으려면 넓게 파야하고, 깊게 묻어야 하고, 생각하고 파묻어야 하고, 제대로 독을 놓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학생들은 개학(開學)하고 어른들은 재학(再學)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밀쳐놓았던 책을 다시 꺼내고, 나의 삶을 치열하게 질문하여 부족한 것은 묻고(問), 넘치는 것은 깊이 묻어(埋) 버려야 한다. 이제 배움은 출세나 과시의 도구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에 온전히 사용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되어야 한다. 배움을 갖고 태어난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라면, 열심히 배워서 깨우치는 학이지지(學而知之)는 되어야 한다. 그것도 안 된다면 열심히 반복해서 깨우치는 곤이지지(困而知之)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배움이 중지된 삶은 정신적인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꽃이 피고(開花), 배움이 열리는(開學) 때에 마음의 문을 열어(開心) 나의 수준을 높여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개선(開善)하기 딱 좋은 때이다. 다시(再) 공부(學)하자!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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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3 17:46

봄날엔 그 노래를 듣는다

벌써 도타워진 햇볕과 청명한 날은 추위로 웅크렸던 날에 대한 보상이다. 그래서 봄이 온다는 소식은 기껍다. 곧 한파를 견딘 산수유와 생강나무에 노란 꽃이 피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초록 새순이 돋을 게다. 아침에는 껍질 째 사등분으로 쪼갠 사과에 곁들여 호밀빵과 견과류를 챙겨 먹었다. 포만의 행복은 없지만 한 끼로 부족하지 않다. 봄기운을 더 느끼려면 둔덕이나 빈 밭에서 나온 냉이나 달래를 넣은 된장찌개와 머위나 두릅 같은 나물을 된장이나 액젓과 버무려 들깨가루를 넣어 곁들여 먹어야 한다. 입안에 퍼지는 흙냄새는 기력이 쇠해진 사람이 묵은 병마저 떨치고 일으켜 세울 만한 봄의 보약이다. 아직 조춘(早春)의 바람 끝은 차다. 이맘때 유독 알러지가 심해진다. 연신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흐른다. 항히스타민 류의 약을 한두 알 먹지만 효과는 일시적이다. 약의 내성을 피하려면 몸의 면역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 우리보다 한 세기를 먼저 살다 간 젊은 시인은 '바람이 부는데/내 괴로움엔 이유가 없다'(윤동주, '바람이 불어')라고 노래한다. 바람이 일깨운 괴로움엔 이유가 없다고 했다. 눈 녹은 물이 종일 흐르는 하천에는 일찍 겨울잠에서 깬 산개구리들이 모여 우는데, 어짜자고 어쩌자고 바람은 우리 안의 괴로움을 일깨우는 것일까. 낮엔 겨우내 덜컹이던 낡은 부엌문 문짝의 헐거워진 경첩의 나사못을 죄고 못이 빠진 판자에는 새로 못을 박는다. 봄볕 아래 낮잠을 자던 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허기로 출출해져 서둘러 잔치국수를 끓여 한 그릇을 비우고 약수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양지에 의자를 내놓고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책을 읽었다.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 봄날의 낮은 까치 꽁지만큼이나 짧다. 누가 서편 하늘에 낡은 피를 한 양동이나 쏟았나? 어느새 뉘엿뉘엿 지는 해는 핏물인 듯 붉은 석양에 잠겨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춥다고 실내에 웅크려 있던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와 소리를 지르며 캐치볼을 하다가 돌아간 뒤 저녁답의 땅거미가 내려온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과 상실의 세월을 산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어머니 애창곡은 옛노래 '봄날은 간다'였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그 노래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노래에 울컥했는데, 노래에 어머니의 온갖 슬픔과 시름이 다 녹아 있었던 탓이다. 앙가슴에 쌓인 회한의 내역도 아득해져 이젠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 아득함에 맞물려 홍콩 영화 전성시대의 배우 장국영이 출연한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다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어머니의 봄날은 짧았다. 발 없는 새 같이 산 어머니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은 이른 봄이다. 침상에 누운 어머니의 핏기 없이 하얀 발이 이불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그 발을 무심코 쓰다듬었는데 얼음처럼 차가워서 섬뜩했다. 어머니가 임종을 맞는 순간 여동생 셋이 일제히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2월 하순께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모신 뒤 돌아왔다. 며칠 동안 어머니의 빈자리는 텅 빈 채로 허전했다.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고 혼자 있는데, 새벽마다 부엌에서 성경을 읽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시름없는 천국을 꿈꾸며 고된 생의 날들을 견디셨던 것일까. 아버지는 거듭된 사업 실패로 노동의 의욕을 잃은 채 오랜 세월 바깥 활동을 접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어머니가 무기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식솔을 챙기셨다. 초등학교 졸업 학벌에 기술도 익힌 게 없으니, 어머니가 감당할 노동은 남들이 다 기피하는 하찮고 궂은일뿐이었다. 이제는 어머니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빈다. 젊은 날엔 봄도, 봄꽃에도 태무심하다가 나이 들어 봄꽃의 화사함을 알아보고 감탄하게 되었다. 부쩍 부고 소식이 잦은 봄날, 병과 죽음은 이렇듯 흔한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봄꽃은 마구 피어나는가? 담주엔 열일 제쳐놓고 봄 바다를 보러 떠나자. 눈이 시리고 가슴 탁 트일 때까지 통영의 쪽빛 바다를 보자. 중앙시장통 허름한 식당에서 도다리쑥국을 사먹고, 박경리 문학관도 둘러보자. 이튿날을 쌍계사로 건너가 대웅전 부처도 만나고 뒤뜰을 살뜰하게 돌아본 뒤 하동에서 재첩국수 한 그릇을 먹은 뒤 상행 열차로 돌아오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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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16 15:04

비효율의 효율

인간의 생애가 기적적으로 길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꼬바기 반평생을 흘려보낸 지금에야 깨달았으니, 나에게 ‘효율’이란 얄궂게도 효율을 가장 깎아먹는 구호였다. 동선과 시간을 생각해서 효율적으로 일하기는 나에게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목표였다. 예를 들어 나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잡동사니들을 담아둔 주방 서랍 세 개를 정리하자. 먼저 커피 한잔 마시고.’ 물을 끓이려고 보면 주전자는 싱크대의 가장 더러운 설거지거리들 아래에 파묻혀있다. 그 다음 단계는 이렇게 된다. ‘설거지 먼저 해야겠군.’ 하지만 커다란 곰솥을 보자 벌써 맥이 풀린다. ‘곰솥이 싱크대를 온통 차지하고 있으니 먼저 저것부터 씻어서 높은 수납장에 올려놔야겠다. 그런데 곰솥을 넣기 전에 냉동실의 우거지로 국을 끓일 생각이었는데. 국끓일 재료를 다듬으려면 시간이 또 많이 걸리겠네. 이러다가는 서랍 정리를 또 미루고 말겠는걸. 그러려면 아무래도 서랍 정리를 먼저 시작해야겠어. 그런데 내 커피는? 아, 주전자, 아, 우거지국. 해야할 일이 너무 많구나.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려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할텐데.’ 이러다보면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 된 채 아침밥을 기다리는 고양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넋을 놓고 마는 것이다. 나처럼 일머리가 없는 사람은 효율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걸 깨닫는 데에 반평생이 걸렸다. 무작정 세 개의 서랍을 비우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서랍 세 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 주방은 온통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차버렸다. 싱크대의 곰솥에는 눈을 질끈 감고 주전자만 건져내서 일단 물을 끓인다. 혁명이라도 일어난듯한 부엌바닥을 요령있게 비집으며 나는 커피를 한잔 타는 것까지 성공했다. 원두커피 생각이 간절하지만 이런 날은 더운물만 부으면 되는 달달한 믹스커피 한모금을 마시며 머리 속을 정리하는게 좋다. ‘다 됐어. 이제 이것들을 서랍에 도로 넣고, 사용하지 않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은 버리면 돼. 해야할 일은 겨우 그것 뿐.’ 놀랍게도 겨우 그것 뿐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빈 수납장과 종량제봉투를 채우는 것, 내가 할 일의 양이 시각적으로 구체화되자 왠지 마음이 정돈되었다. 원두커피를 포기하고 믹스커피로 대신하는 것은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우거지국은 포기하고 일단 곰솥을 씻어서 넣는다. 높은 수납장에 올려놓을 물건을 한번에 모아서 한번에 올렸으면 효율적이었겠지만, 나는 오늘 사다리에 다섯 번쯤 올라갔다. 실은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몇 번의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포함해 끈기 있게 물건들을 정리했다. “이번에도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했군. 순서를 좀 더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 따위는 좀 전에 지나간 호랑이에게 물려 보내기로 한다. 실은 효율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져 오히려 손이 느려질 뿐이다. 과정의 비루함을 곱씹을 필요 없다. 똑같은 일을 두 번 할수도 있고 세 번 할 수도 있다. 하루를 꼬박 씨름한 끝에 두 개의 종량제 봉투를 채우고 세 개의 서랍을 정리했다. 그거면 됐다. 토끼해를 훌륭하게 시작했다. 내 친구에게 들은 어린시절의 일화가 있다. 고된 노동으로 자녀를 키우던 어머니는 퇴근해서 아이들을 보면 딱히 무엇이다 할 것 없는 칭찬을 하곤 했다. “내새끼들, 뭐라도 한다잉.” 제각각 그림을 그리고, 만화책을 보고, 라디오 음악을 듣고 있던 아이들은 별 생각이 없다가도 그 말에 왠지 힘이 났다. 필요한 일을 하는가, 효율적으로 하는가 하는 것은 어머니의 기준에 없었다. 그저 ‘뭐라도 하는 것’으로 어머니는 만족했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일머리가 생겨났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제 일을 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주문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도달하는 선불형 야단이다. 어머니의 지혜를 따라, 뭐라도 하는게 낫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빠르게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효율부터 외치지 말고, 두서없이 일할 시간을 주자. 먼저 나 자신에게부터.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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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9 16:28

‘윤석열의 정치와 권력’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정치개혁은 사라졌다.’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언급으로 선거제도 개편이 잠깐 주목받긴 했지만 지금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나경원과 유승민은 출마하느냐? 김기현은 결선 없이 당선 되느냐?’ 그리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구속되느냐? 그 이후 민주당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엊그제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이 출범했다.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의원모임은 ‘화해와 전진 포럼’ 이후 21년만이고 100명이 넘는 여야의원이 참여한다.국회의장은 “2월 말까지 정개특위가 복수안을 만들고 3월에는 전원위원회를 주 2회 이상 열겠다.”는 계획이다.총선 1년 전인 4월 10일이 시한이다. 작년 7월 여야합의로 구성된 정치개혁특별위원회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선”을 목표로 한다.현재 20여 개에 가까운 관련 법안이 제출되어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폐지에 강조점을 둔 반면 야당 의원들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추가하며 적게는 3인에서 10인까지의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한다.유권자가 정당추천 후보를 직접 선정하는 개방형 비례대표제와 지역구와 비례제의 비중을 1:1로 한 법안도 있다. 대안은 다양하고 상상력의 영역이다.소선거구제를 하면서 권역별 비례제를 할 수도 있고 중대선거구제를 하면서 전국단일 비례제를 할 수도 있다.권역별 비례제를 연동형으로 하면서 소선거구제나 중대선거구제와도 결합시킬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하나는 왜 선거제도를 개선 하느냐인데,인구와 지역대표성을 가능한 높이자는 것이 핵심이다.둘째는 ‘제도적 친화력’인데 선거제도가 다른 정치제도(정부형태나 대통령 선출방식 등)는 물론 정치문화나 관행 등과 서로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아 시너지를 내야한다 후자가 중요하다.중대선거구제는 ‘승자독식의 양당 혐오정치’에서 ‘공유와 타협의 다당제 정치’를 향한 대안의 하나로 볼 수는 있다.어떤 식으로든 비례성과 대표성이 강화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결선투표까지 더해진 대통령 선거는 국회와 정치권에 ‘문제해결의 다원주의 연합정치’를 제도적으로 강제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강화된 국회권한과 기능에 따라 일단은 ‘총리 추천제’에서 출발하여 최종적으로는 ‘총리 선출제’까지 이른다면 증오와 배제와 독점의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 ‘합의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결국 비례성과 대표성의 선거제도 개혁에서 출발하여 대통령 결선투표가 더해지고 국회의 총리추천에서 시작하여 국가원수의 직선 대통령과 원내 다수파 총리의 행정부 구성으로 완성되는 게 정치개혁의 완결이다.개헌은 정치개혁의 공식적 완료다. 정치개혁의 종합적 이해와 이에 따른 제도설계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리당략과 기득권의 포기’다.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포기는 불가능하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현재 우리 정치권에 대통령 한 사람밖에 없다.윤 대통령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통령 선거 한 번으로 자신의 정치인생을 장식한다.과거의 빚도 없고 미래의 정치적 부채도 없다.공동체의 기여밖에 없다.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제안은 계획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개헌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것을 보면 대통령의 언급이 개헌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정치개혁의 차원에서 검토된 것도 아닌 듯하다.지난 대선 때도 국민의힘은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이슈를 제기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승자독식과 지역대결 구도에 따른 양당 중심의 대립과 교착의 정치를 마감해야 한다는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이에 따라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을 시작으로 개헌으로 완결되는 정치개혁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한다면 ‘윤석열의 권력과 정치’가 한국정치에 남길 족적은 뚜렷하다.‘정치개혁의 대통령’이다. ‘나경원 사태’는 ‘어젠다 없는 정치인의 한계’를 보여준다.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 없는 권력과 정치는 실패한다.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대한민국 공동체의 불행이다.‘시대정신과 역사적 책무의 인식이 출발점이다.윤석열 권력과 정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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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2 16:15

인생의 맛

코로나에 걸려 미각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무지 살맛이 안 났다고 한다.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모르니 사는 맛이 안 났었다는 것이다. 음식의 맛을 못 느끼는 병을 미각장애 또는 미맹(味盲)이라고 한다. 맛에 깜깜(盲)하다는 것이다. 맛을 못 느끼는 병을 미맹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맛을 못 느끼는 병을 생맹(生盲)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삶(生)의 맛에 깜깜하다는 의미다. 어느 날 갑자기 살맛이 안 나고, 재미있는 일도 없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생맹 증상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삶의 맛을 느끼는 센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신적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이름도 생소한 병리 현상은 사는 맛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난 것이다. 건강한 자아에 균형이 깨지고, 재미와 의미의 맛을 느끼는 센서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인생 사는 재미와 의미를 모르겠다고 자주 말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면 심각하게 치료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중용(中庸)>은 균형 잡힌 인생을 사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 고전이다. 균형 잡힌 인생의 극치는 인생의 맛(味)을 알고(知) 사는 것이다. 사는 재미(在味)와 의미(意味)를 음미(吟味)하며 사는 인생이 맛있는 인생이다. <중용(中庸)>에서는 맛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리 상태를 ‘지미(知味)’의 센서에 이상이 생겼다고 정의한다.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먹지만(人莫不飮食也, 인막불음식야), 제대로 맛을 알고(知味) 먹는 사람이 드물다(鮮能知味也, 선능지미야).’ 사람들이 자기중심을 잃고 불균형과 편향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세태에 대하여 공자는 맛을 모르는 병에 걸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모르고 먹는 것이나, 인생을 살면서 삶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나, 같은 병이라는 것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항상 넘쳐서 맛을 모르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모자라서 맛을 모른다. 성공한 사람은 교만해서 맛을 모르고, 실패한 사람은 우울해서 모른다. 인생의 맛을 알고 산다는 것은 학력과 성공 여부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감정의 불균형(中和), 자기 불신(愼獨), 현실적 판단의 부재(時中), 현실의 부정(自得), 지속성의 결여(能久), 선택의 부적절(擇善) 등 다양한 문제들이 맛을 못 느끼며 사는 인생의 원인이라고 <중용>에서는 열거하고 있다. 인생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는 생맹은 돈과 지위와 상관없이 나타난다. 자식을 좋은 대학 보내는 일에 인생을 걸었던 부모가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탈하여 걸리기도 한다. 그토록 원하던 성공은 이루었는데 막상 돌이켜 보면 재미와 의미 없이 살아 온 인생이 후회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목표만 이루면 인생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곳에 이르렀다고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다. 우울함의 근원은 결국 맛을 모르고 살았던 나의 삶에서 시작된 것이고, 소진된 인생의 에너지는 의미 없이 목표를 향해 뛰어온 결과다. 그때 비록 작지만 소중했던 시간에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결과가 지미(知味)의 기능을 고장 나게 한 것이다. 하늘은 인간을 이 세상에 살게 함에 재미와 의미를 모두 느끼며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었지만 모든 인간이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아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고 의미도 있다면 무조건 해도 좋다. 그러나 도무지 재미도 의미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재미는 현재(在) 좋아서 하는 것이고, 의미는 힘들어도 선(善)해서 하는 것이다. 편한 일을 한다고 재미있는 것은 아니고, 돈을 많이 번다고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삶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때 재미와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의 맛을 느끼며 배를 채운다면 한 수 위다. 성공하기 위하여 인생을 사는 것보다, 인생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며 목표를 달성한다면 높은 수준의 성공이다. 재미없는 일상과 의미 없는 인생으로 하나뿐인 삶을 낭비하지 말자. 고장 난 지미(知味) 센서를 복구하여 맛있는 인생을 사는 나를 만나자. 하늘(天)은 나에게 맛있게 살라는 명(命)을 내려 이 땅에 보냈으니까. 그 천명을 잊지 말고 한 해를 살아보자.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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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26 14:07

내 인생사용법

가끔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이런 생각은 주로 잠 안 오는 밤에 찾아온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소규모 인생 계획들, 커피 삼천사백스물 세 잔, 후추와 소금 약간, 대통령 여럿, 쓰라렸던 백수 시절, 21그램도 채 안 되는 키스와 연애, 그리고 무수한 실패. 그게 특별할 것 없던 내 인생사용법이었다. 아들이 생기면 아이에게 야구 글로브를 사주고 둘이 캐치볼을 해야지, 했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사느라 바빴던 탓이라는 변명은 비겁하다.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변명이나 늘어놓는 인생은 비루하다. 나이 드니, 그토록 혼란에 감싸였던 인생의 전모가 또렷하게 보인다. 시간이 완전함을 가늠하는 인생의 시험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인생 처음의 시련은 벌에 쏘인 것이다. 설마 여섯 살에 통렬한 아픔 속에서 인생이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아니다. 벌 쏘인 턱이 금세 부풀고, 마치 불에 덴 듯 따끔거렸다. 외손자를 들쳐 업은 외할머니는 찐 옥수수를 물려주며 달랬다. 벌에 쏘인 그 선연한 통증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요즘 들어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엄마라고 알았던 외할머니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 평생 시 쓰기에 매달렸다. 열다섯 살 때 김소월 시집을 읽고 그 운율을 흉내내어 시를 적었다. 학생잡지 '학원'에 뽑혀서 활자화된 시를 길거리에서 여러 번 읽었다. 그 어린 시절 내가 쉰 해 동안이나 시를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으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시를 환대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라 여기고, 급류 같은 사나운 세월을 시라는 난간을 붙잡은 채 건너왔다. 시가 아니라 다른 일을 그토록 열심히 팠더라면 삶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스물일곱 살에 출판사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했다. 1인 출판사였다. 혼자 책상에 엎드려 코를 박고 기획과 원고 교정, 표지 디자인을 다 처리하고 인쇄소며 제본소를 쫓아다니며 제작 감리를 봤다. 운 좋게도 창업 직후에 낸 책이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며 직원을 두어 명 뽑고 사무실을 넓혀 이사를 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들을 맘껏 펴내는 동안 출판사는 번창해서 직원이 서른 명으로 늘고, 창업 십년 만에 강남에 사옥을 지었다. 그게 내가 일군 사업의 정점이자 전성기였다.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고, 두 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출판사 폐업을 결심했다. 열다섯 해 동안 출판편집자로 책 만들며 보낸 세월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 후반부엔 제주도에서 작은 서점이나 꾸리며 살고 싶었다. 은둔 거사로 살며 멀 데서 온 젊은 벗들과 담소하고 오후엔 바닷가나 걷고 싶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차선으로 시골에서 영농후계자로 살려는 야무진 꿈을 꾸며 경기도 남단에 집을 지었다. 봄, 가을마다 물안개가 집과 마당을 삼키는 시골에서 나는 처절하게 외로웠다. 낮엔 나무시장에서 사온 유실수와 관상수를 부지런히 심고, 밤엔 안성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물안개와 고독을 견뎠다. 가끔 벗들이 들고 온 붉은 포도주나 동네 슈퍼에서 사온 좁쌀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다. 어둠 속에서 고라니나 너구리가 집 마당을 서성거리다 기척없이 사라졌다. 그 동물들은 야생이었다. 십오 년 뒤 영농후계자라는 난망한 꿈을 접고 시골을 떴다. 돌아보니 인생이란 미친 엄마가 품고 다니는 태아 같다. 우연이라는 날개를 달고 붕붕거리는 애처로운 인생아! 잘 사는 일이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진실의 환한 빛 속에서 사랑하고 슬퍼하며 사는 것, 바람에 펄럭이며 마르는 빨래를 지켜보는 시간을 갖는 것, '일하는 육체와 창조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평생 읽는 자이자 쓰는 자로 살았다. 내 인생사용법에 실수와 오류가 없었다고 우길 수는 없다. 그러나 엉터리로 살지 않았다는 자부심조차 없는 건 아니다. 내 귀는 바흐를 듣고, 내 눈은 권진규의 '붉은 가사를 걸친 자소상'을 보았다. 청년 시절 추앙하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지중해 크레타 섬을 찾아가 그의 돌무덤 위에 붉은 꽃 몇 송이를 바쳤다. 내 인생 추는 갈망과 현실 사이 한 가운데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그게 내 인생사용법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근거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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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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