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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심 vs. 민심

총선 후 양당 모두 양당 모두 리더십 교체가 논란의 대상이다.국민의힘은 새 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황우여 비대위를 출범했다.윤석열 대통령 취임 만 2년에 4번째 집권여당의 비상대책위원회다. 국민의힘 차기 당권경쟁은 경쟁적으로 보인다.‘나경원 유승민 윤상현의 출마’를 예상하지만 한동훈의 거취가 결정적이다.스스로의 결정이든 끌려나오는 것이든 그의 당권도전은 기정사실로 보는 분위기다. 민주당 리더십은 이재명 대표의 연임여부가 쟁점이다.이 대표가 재출마한다면 사실상 추대가 될 전망이 대부분이다. 양당 리더십 재편의 핵심 ‘한동훈의 출마와 이재명의 연임’에 대한 여론은 혼란스럽다.두 사람 모두 당원과 핵심 지지층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당 밖으로 나가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월 하순 한 조사에 따르면 한동훈의 당권도전에 대해 유권자 10명 중 5명 이상(52%)는 반대한다.찬성은 43%.반면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층에서는 58%가 그의 출마에 찬성한다. 한동훈의 당권도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여론과 국민의힘 지지층 또는 보수 유권자들의 생각이 엇갈리는 장면은 5월 초 조사에서도 확인된다.한동훈의 전당대회 출마에 대해 전체 유권자의 52%는 반대하고 찬성은 35%다.한 달 전 조사와 비교하면 반대는 비슷하고 찬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국민의힘 지지층은 정반대의 의견분포를 보인다.그들 중 56%는 한동훈의 전당대회 출마를 지지한다.그의 당권도전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36%다.한달 전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지지층은 대체로 그의 전당대회 출마에 찬성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당원 100% 경선으로 치러진다면 한동훈의 쉬운 승리가 점쳐지는 이유다.5월 조사에서 한동훈을 포함한 여러 출마 유력 후보들의 국민의힘 대표 적합도를 물은 결과도 앞선 여론동향과 유사하다. 국민의힘 대표로 한동훈을 적합하다고 보는 국민의힘 지지층은 48%에 이른다.‘원희룡(13%) 나경원(12%) 유승민(9%)’을 압도한다.한동훈(26%)은 전체 유권자 대상 조사에서도 유승민(28%)에 오차범위 내에서 뒤진다. 한편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연임여부에 대한 여론도 한동훈 당권도전의 여론 흐름과 비슷하다.4월 초 조사들에 따르면 일반 국민들은 이 대표의 연임에 대해 상대적으로 반대의견이 높다.‘찬성 46% vs. 반대 49%’ 또는 ‘찬성 43% vs. 반대 48%’다. 민주당 지지층 또는 진보적 유권자들의 생각은 정반대다.그들은 이 대표의 연임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찬성 61% vs. 반대 32%’ 또는 ‘찬성 68% vs. 반대 26%’다. 보수적 유권자들은 이재명 연임에 부정적이다.‘찬성 30% vs. 반대 68%’ 또는 ‘찬성 23% vs. 반대 74%’다.중도층은 일반 국민의 여론동향과 유사한데,‘찬성 40% vs 반대 45%’다. 5월 초 조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한데 다른 게 있다면 일반 국민의 이 대표 연임에 대한 찬반의견이 접전양상으로 바뀐다.‘찬성 44% vs. 반대 45%.’한 달 전에는 오차범위 내외에서 반대의견이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5월 초에는 찬반 비중이 붙었다. 민주당 지지자냐 아니냐의 간극은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더 벌어진다.민주당 지지층은 이 대표 연임에 대해 ‘찬성 83% 반대 12%,’무당층은 ‘찬성 25% 반대 47%’다. 국민의힘은 대표 선출절차를 논의해야 할 전당대회 준비위와 선관위를 꾸려야 하지만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당원 아닌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어떻게 지도부 선출과정에 반영할지가 쟁점이다. 민주당은 “국회의장 후보,원내대표 당 지도부 경선 때 권리당원 의견 10% 이상 반영을 원칙으로 하는 10% 룰”을 넘어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 뽑을 때도 국회의원 50%+당원 50%를 적용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양당 모두에게 당원과 지지층은 중요하다.민주당은 “당원이 100만 명 넘고 당비가 연간 180억”이라고 한다.규모는 다르겠지만 국민의힘도 엇비슷할 것이다. 작년 우리나라 정당들에 지급된 국고보조금은 모두 475억.민주당에 223억 국민의힘에 202억으로 국민 세금이다.2022년 양대 선거나 올해 총선처럼 선거가 있을 때 국고보조금은 통상시의 두 배에 이른다. 양당의 리더십에서 민심과 당심은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어야 할까? 양자가 충돌한다면 무엇이 우선이어야 할까? 그들은 선택하고 유권자는 평가한다. 선택의 시간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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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3 15:00

살구가 익을 무렵

순창으로 이발하러 갔다. 목욕탕 안에 이발소가 있다. 이른 아침이라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만들어가는 육체는 움직이는 동작이 불편하고 직립의 거동이 위태위태하다. 육체는 체념하는 중인데 왕년의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몸들은 외롭고 슬프고 짜증나고 성질난다. 이발하고 강천사로 물 받으러 갔다. 몸에 좋다는 이 물을 받아다가 먹은 지 2년쯤 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거나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물이 맛나서 이 물로 아내는 고추장 담고, 나는 봄 여름에 찬물로 마신다. 물 받으러 가는 길은 순창읍 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낮은 두 고개를 넘어 몇몇 마을들을 지난다. 낮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아늑한 들끝 저 멀리 산아래에 마을들이 편안하게 앉아 있다. 낮은 고개 하나를 넘어 들길을 가는데, 저쪽 마을 앞 도로에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멀리서 왼손을 번쩍 들고 길을 건넌다. 내 차 때문에 저런 강한 경고 자세를 취하고 길을 건널 텐데, 그러나 내 차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서 나는 혼자 크게 웃을 뻔했다. 이 길은 차들의 왕래가 아주 뜸한 곳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학교와 집에서 단단히 교육 받은 대로 교통 도덕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한다. 나도 속도를 아주 줄였다. 길은 건넌 아이들이 상당히 높은 논두렁에 올라서 있다. 그 모습도 웃겼다. 아이들은 분홍색 잠바에다 짧은 치마를 입고 흰 스타킹 차림이다. 둘 다 가방 색까지 같다. 등교 차림이 주위 풍경에 약간 어색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앞뒤를 살핀 후 차를 멈추고 차창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반갑고 명랑한 표정으로 “얘들아,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다.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서 있는 논두렁 풀잎에 이슬이 맺혀있다. 아이들이 딛고 지나간 이슬 털린 발자국이 두어 군데 보인다. 아이들 신발에 이슬이 묻어있을 것이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더니, 팔을 반 쯤 들어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동생은 언니 누구야, 하는 표정으로 언니를 올려다본다. “학교 잘 갔다 와“ 나는 다정하고 다감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아이들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가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내 차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영화 장면처럼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크게 흔들어 주었다. 지난 봄 날 이 길 오른쪽 마을 2층 집 붉은 기와 지붕 위로 살구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아이들이 그 집에 사나? 언젠가 평양에 갔을 때 보았는데, 개선문 부근에 가로수가 살구나무였던 것 같다. 길가에 이발소가 있어서 유리창 너머로 이발 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의자에 앉은 사람과 이발사, 이발사가 가위질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발사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가본 북쪽 어느 고원에 흰 감자꽃이 서늘할 때였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마 살구가 익을 무렵이었는지도 모른다. 갔던 길을 따라 집으로 왔다. 아이들 둘이 논두렁에 서 있던 단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길에서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을 처음 만나서 뭔가 그렇게 낯설고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것은 분명해 보였었다. 몇 가지 이런저런 사연의 경우가 생각나기도 했다. 생각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단정하게 잘 빗어 묶은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엄마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종일, 살구나무가 있는 가로수 길 평양의 이발소와 북쪽 어느 고원 너른 감자밭가에 서서 희고 고운 감자꽃을 바라보던 서늘한 생각과 논두렁에 낯선 듯 서 있던 아이들의 빈틈없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파리하다는, 생각이 났다. 논두렁에 서 있던 아이들과 평양의 거리와 감자꽃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풍경인데도 말이다. 이상하여, 오히려 아주 이상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그 무엇인가 어떤 중요한 어떤 것들을 버려둔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에, 나는 허전한 어떤 구석이 사라지지 않아 자꾸 허기가 찾아왔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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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6 15:57

천천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봄이 와서 들판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구다. 매년 꽃들이 만개할 즈음이면 학교도 새 학기를 맞아 수업과 행사 등으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곤 한다. 하지만 올 봄에는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자세하게 그리고 오래 볼 수 있었다. 10년 이상 필자를 괴롭히던 무릎 통증을 치료하고자 약 2개월 전에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회복하는 동안 지팡이에 의지해 걷다보니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봄의 화사함, 마른 가지에 싹이 돋고 꽃이 피는 자연의 신비함, 캠퍼스에서 명랑하게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잠시 멈추고 나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지금까지 앞만 보면서 달려오다 보니 무심히 지나쳤던 일,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 밀렸던 일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고, 주변의 따뜻한 봄날과 활기 있는 삶의 모습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담장에 피어있는 라일락의 그윽한 향기를 맡다보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교수가 생각이 났다. 그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방학이 되면 제자들과 함께 필리핀 무의촌으로 의료봉사를 나가곤 했다. 대학병원 특성상 여름휴가는 일주일 남짓했는데 그 황금 같은 휴가를 의료 봉사하는데 다 쓰고 돌아와서는 소진된 기력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여름휴가 기간 가족과 여행을 다녀온 필자를 매번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퇴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정기 건강검진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치료를 위해 휴직 신청을 하였다. 그 해에는 해외 봉사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 친구들은 그에게 ‘몸이 아프면 좀 쉬어야지, 왜 무리를 해서 해외 봉사를 다녀왔냐?’, ‘나이가 들면 자기 자신에게도 신경을 써야한다.’라는 걱정 어린 충고를 했지만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였다. ‘지금까지 여름방학이면 매년 가던 의료봉사여서 올해도 가야될 것 같아 조심하면서 다녀왔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이기적이고 소심한 마음으로 바뀌어서 하던 일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의 병은 치유되었고 정년퇴직 후, 신변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의료 활동을 위해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한 추억은 무릎통증 하나 때문에 소심하게 작아지는 나를 바라보면서 다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니, 무릎 수술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움직임 등에 다소 불편함이 있지만 오히려 바쁘게 살아왔던 과거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겼고,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들과 이웃,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며 빙그레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준 전환점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이기적으로 변하고 소심해지는 경향이 생기지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벗들의 귀한 모습을 생각해보고 다시 한 번 힘을 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계절의 여왕인 5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고 라일락, 아카시아 꽃향기가 퍼지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자. 바쁘게 지내왔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것’들을 느끼고 자신을 회복하는 따뜻한 봄날 을 맞이할 수 있는 5월이 되기를 바란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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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9 15:14

의료사태가 명현(瞑眩) 현상이라고?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된 의료계 파행이 국민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공의들의 사표를 시작으로 의대교수들의 주 1회 휴진 등 의료계 집단행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의 의료 수혜 확대와 소외된 지방 의료의 복구를 위해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고, 의사들은 자신들을 이기주의 집단으로 몰고 가며 의논도 없이 밀어붙이는 일방적인 의료행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정부와 의사들의 팽팽한 대립 국면 속에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국민들만 죽을 노릇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따져서 풀지 않으면 의료 공백의 장기화로 대한민국의 의료는 파국을 맞이하며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임에 분명하다. 이번 의료 사태를 주역(周易)의 관점에서 보면 불통과 반목이다. 불통의 괘는 비(否)괘이고, 갈등의 괘는 송(訟)괘이다. 불통의 비(否)는 하늘과 땅이 서로 반목하여 꽉 막혀 있는 형상이고 갈등의 송(訟)은 하늘과 물이 서로 등을 돌리며 소송하고 있는 형상이다. 불통은 인간사에서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이다(匪人, 비인). 하늘과 땅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사는 중간(中, 중)에 그만두면 좋지만(吉, 길), 끝까지 계속하면(終, 종)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한 나쁜(凶, 흉) 일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면 결국 파국은 끝나지 않는다. 꽉 막혀 있는(窒, 질) 형상이니 중간에 중재자를 두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혹자는 말한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통도 필요하니 병을 낫기 위한 명현(瞑眩) 현상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현(瞑眩)은 한의학에서 약을 투약한 후 병이 완전히 낫기 전에 있는 부작용을 말한다. 병이 치료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약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지럼증이나 구토 같은 부작용 없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번 의료사태도 더욱 발전된 대한민국 의료 체계를 위해서는 갈등이나 반목이라는 명현 현상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명현 현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힘없고 위중한 국민들이란 것이다. 건강하고 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길을 찾는다. 대통령과 장관이 아프면 의료계 파업이라도 치료를 못 받을 확률은 없다. 그러니 의료 파국의 심각성이 정책자들의 피부에 절실하게 와 닿을 리가 없다. 명현 현상 운운하며 한번은 겪어야할 부작용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일반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명현 현상은 검증된 의료 치료도 아니다. 유교 경전인 서경에 나오는 구절을 근거로 이야기되는 잘못된 믿음이다. ‘만약에 약을 먹고 명현의 부작용이 없다면(藥不瞑眩, 약불명현), 그 병은 낫지 못할 것이다(厥疾不瘳, 궐질불추)’. 이 말은 원래 <서경>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인용해서 사용한 말이다. 좋은 약은 반드시 부작용이 있으니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어떤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아도 명현 현상이란 약리작용은 없다. 초유의 의료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아프지 않는 것뿐이라는 현실이 너무 서글프다. 아프지 않는 것이 어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명현 현상이니 참으라는 정부의 무대책은 더욱 어이가 없다. 애초부터 전략과 협상도 없이 의대 증원을 확정하여 발표했던 당사자들은 빠지고 의료 당사자인 국민들과 의사들과의 갈등만 깊어가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송사(訟)는 끝까지 가면 흉(凶)한 일이다. 불통(否, 비)과 송사(訟, 송)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안타까운(吝, 린) 일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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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2 16:44

어느 주말에 겪은 강연 소동

지난 주말 오후에 K시의 한 대형 쇼핑몰로 인문학 강연을 하러 갔다. 봄비 내리는 주말 오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연 시각보다 이르게 도착할 수 있게 출발했다. 그런데, 대형 쇼핑몰 주차장은 인근은 차들로 넘쳐났다. 만원이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는 통에 주차에만 40여분을 소비했다. 지하 주차장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쇼핑몰 안 강연장을 찾는데 또 시간을 지체했다. 쇼핑몰 매장의 규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인파로 바글거리는 주말 오후 그 광활한 소비 천국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강연장에 도착해서, 오, 맙소사! 내 앞에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넓은 강연장엔 청중 세 분이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쇼핑 매장은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인파가 북적거렸는데, 강연장은 무인도처럼 적막했다. 여러 강연을 다녔지만 이런 굴욕을 당한 건 처음이다. 비명은 지르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은 붉어졌다. 애초 이 강연이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내 책을 참석자에게 구매해 무료로 나눔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강연 수락을 한 것이다. 출판사 영업부장님도 일부러 가족과 강연장을 찾았다가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나는 태연하게 성심성의껏 강연을 했다. 강연장 앞자리에 차지하고 앉은 세 분은 강연을 조용히 경청하셨다. 세 분에게는 눈물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강연을 마치고 세 분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조지 오웰의 한 말이 떠올랐다. “광장에 모인 인파를 흩어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시를 읽어주는 것이다.” 시가 대중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재치 있게 표현한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시나 인문학에 심드렁하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그까짓 시는 뭐 하러 쓰나? 밥이 나오더냐 떡이 나오더냐? 그러다가 굶어 죽기 딱 좋으니라.”라고 꾸짖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아주 짝에도 쓸모가 없는 시’ 따위를 쓰면서 사람 구실을 못할 걸 염려했던 것이다. 주말의 쇼핑몰은 붐볐지만 같은 장소의 강연장을 찾은 사람은 달랑 세 분이었다. 왜 사람들은 인문학 강연을 외면할까? 시나 인문학 강연이 쇼핑보다 덜 재미있을 뿐더러 무용하다, 라고 판단했을 테다. 사람들은 시나 인문학이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확증 편향을 갖고 있다. 각자의 생업에 매진하던 사람들이 주말 쇼핑몰 나들이에 나와서 가족들과 함께 쇼핑하고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애초 볼거리와 놀거리로 가득 찬 쇼핑몰에서 뜬금없이 인문학 강연을 위해 모객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인문학의 홀대를 두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테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더 유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이 꼭 쓸모 있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않는다.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을 생각해 보라. 쓸모없음의 큰 쓸모를 찾아낸 동양의 현자가 퍼뜨린 천년된 거목의 우화는 2000년이 넘어서도 회자되고 있다. 장자의 거목은 얼마나 큰까? 꼭대기는 하늘에 닿고 나무 그늘에는 소 네 마리가 끄는 마차 천 대가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 크기는 상상으로만 가늠해 볼 수 있을 테다. 작은 쓸모라도 있으면 싹뚝 잘라 가버리니, 나무는 천년 동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도리가 없었으리라. 저 거목은 쓸모가 없었던 탓에 천년 동안 베임을 당하지 않은 채 자라날 수 있었다. 주말의 강연장에서 쓸모없는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생각하자. 사람들은 인문학을 무시하고 지나쳤다지만 먼 훗날 내가 강연에서 뿌린 것들이 싹을 튀우고 거목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강연은 끝났지만 복잡해진 심경을 안은 채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배도 고팠다. 강연장을 나와 근처 냉면집을 찾았다. 탈북민이 창업했다는 냉면집은 냉면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나는 놋그릇 담겨 나온 슴슴한 냉면 국물을 들이켰다. 냉면 육수는 시원하고 면은 담백했다.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주말 강연으로 생긴 소동이 남긴 복잡한 심경 따위는 씻은 듯 사라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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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5 18:26

보수의 ‘재(再)구성’이 필요하다

‘정권 심판론’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국민의힘 참패’라고 쓰고 ‘윤석열 심판’이라고 읽는다. “비정상적 국정기조,” “오만과 일방적 불통의 국정운영 그리고 독선적 ‘검사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평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이번 총선대패의 책임이 ‘윤 대통령에게 있다.’는 의견이 유권자 10명 중 7명에 이른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70%도 대통령 책임론에 동의한다. “대통령 부부가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이라는 말이다. 여론조사 꽃에 따르면 총선참패의 책임은 ‘윤 대통령 54% 김여사 10%’로 둘을 합하면 유권자 10명 중 최소 6명이 대통령 부부에게 책임을 묻는다. 대통령과 용산의 총선인식은 다르다.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대통령의 변화 의지가 없다.”로 본다. 비공개 자리에서 대통령이 “죄송하다.”고 해서 놀랐지만 취임 만 2년을 앞둔 대통령에게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전부라는 것도 ‘민주국가 지도자 중 거의 없는 일’이다. 용산은 총선결과를 “당의 선거운동이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국정방향은 옳다. 다만 국정을 운영하는 스타일과 소통방식 등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근거는 2년 전 대선승리. 용산은 “국정방향은 지난 대선에서 응축된 국민의 총체적 의견이다. 그 뜻을 받아서 윤석열 정부가 집권 했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거 때문에 국정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국정기조를 ‘유지’하면서 소통방식을 다양화하는 ‘정도의 변화’가 해답이 된다.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에도 소극적이다. ‘달라진 윤석열’을 요구하는 선거결과에 부응하기 위해 총선 민심을 과연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우려되는 이유다. 야권은 “도대체 답이 없다.”며 “역대급 심판에도 변하지 않고,” “국민이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한다. 여권에서도 “국민은 불통이라 느끼고 민심을 외면한다고 생각할 듯하다.”는 의견이 있다.“ 국민적 사과와 태도 대전환 각오를 피력 했어야”한다는 아쉬움은 “범야권이 때론 강제적 힘으로 윤 대통령을 바른 길로 유도해야”한다는 주장에 주목하게 한다. 관건은 국민의힘이다.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변화를 유도하거나 최악의 경우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리스크’가 총선결과지만 여당도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정의화 전 의장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는 “참패의 원인은 대통령의 불통 그리고 우리 당의 무능함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라고 말한다. 정 전 의장은 ‘당은 더 유능해져야 한다.“며 이제 대통령만 쳐다보는 정당이 돼선 안 된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땐 직언하는 당이 돼주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국민의힘은 이번 총선에서 두 가지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사상 ‘첫 여당 총선대패’와 보수정당 ‘첫 총선 3연패’ 기록이다. 2012년 총선의 152석에서 2016년 122석 2020년 103석 그리고 2024년 108석으로 쪼그라들었다.다음은 두 자리 수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총선 때마다 국민의힘 지지층의 축소를 말한다. 수도권 집중화와 함께 정치지형의 근본적 변화와 구조화의 가능성이다. 향후 ‘수도권과 고령화 유권자가 선거결과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총선 참패의 책임자를 자처하며 참회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지금 국민의힘이다. “영남 자민련”이나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 소리를 들어도 위기감은 물론 절박감도 없다. 그저 ‘월급 나오니(당선되었으니) 다행’인 샐러리맨들만 모아 놓아 “단일대오”만 부르짖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보수정당의 한 줄기가 끝났다.’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수정치로 새 출발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게 지금 당장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이다. 첫째,리더십 진공상태는 당분간 그대로 둬도 된다.의원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면서 중론을 모아간다. 이때 리더십도 만들어진다. 둘째, 전당대회 룰 개선이다.정당은 민심의 바다에 떠 있는 존재다. 정당은 ‘왜 무슨 일을 하는 집단’인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셋째, 총선대패의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출발점이다. 넷째, ‘지금 체제가 지속 가능한지’에 대답하는 미래비전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 보수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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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8 15:08

눈물이 사는 살구나무 언덕

새벽입니다. 늦게 자도 일찍 자도 나는 늘 이 시간 부근에서 눈이 떠집니다. 언젠가부터 나의 잠은 이런 자연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나는 손으로 어둠을 만져 봅니다. 어둠이 부드럽고 편안합니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맑아집니다. 내가, 내게 몸을 움직이자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때 문득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몰래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적개심’, 이 말이 왜 이때 불쑥 솟아났는지, 느닷없는 이 말이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역사 속의 기억과 상처들이,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과 인간의 존엄, 내 짧은 삶의 흔적들이 함께 섞이며 소용돌이가 되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나도 이 말이 시키는 대로 일을 저지르며 살았던 것입니다. 적개심으로 일어났던,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일들이 생각나, 그 일들이 나의 현실이 되어 금방 내가 가난해졌습니다. 혐오, 증오, 적개심, 이런 삶의 끝에 다다른 막말들이 내 일상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때로 나는 ‘이 나라’가 싫어질 때가 다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라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도 떠나지 못하고 사는 내가 우리나라를 두고 ‘이 나라’란 말이 내 입에서 나오다니, 내가 싫어지고, 싫어지고, 정말 싫어집니다. 선하고 따듯하고 다정다감한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적개심과 적대적이라는 말이 우리의 일상을 살벌하게 지배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공격과 방어와 모면으로 교육된 우리들이 자세와 표정에서는 정의도, 평화도, 포근한 공정과 아름다운 자유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사는 우리나라를 ‘이 나라’라고 하는 절망적인 말을 하기 싫습니다. 이렇게 서로 부대끼며 사는 게 인생 아니냐고 하는 삶의 근본적인 질문이 지금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따금 정의로운 바람을 맞이하러 사람이 살지 않은 우리 동네 서쪽 밤나무 숲으로 갑니다. 영혼이 사라져 버린 말들이 삭풍이 되어 밤나무 숲을 흔들며 지나갑니다. 나는 괴롭지요. 슬퍼요. 서로를 바라보며 주고받아야 할 말을 버린 저 앙상한 나무들의 숲이 싫어집니다. 직업으로 삶의 비교우위를 가려가며 이렇게나 차디찬 돌멩이들처럼 돌아서서 무심한 얼굴로 살아가다니, 내가 싫습니다. 말 같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모두 ‘행복한 불행’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돈이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의 얼굴을 섬뜩하게 조종합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누추하고 낡은 정치가 그에 기대어 판을 만들고 부추기며 우리의 정신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부러움은 존경도 사랑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잘 못산 것은 아닙니다. 평생을 한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인간적인 가난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분들의 흠은 마을과 흙이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잘못들입니다. 누가 크게 잘한 영웅적인 일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분들은 늘 끝에 가서 두 손 마주 잡고 웃습니다. 나라가 왜 있습니까. 사람들이 호랑이가 무서워서 모여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가난은 달콤한 인문적인 위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나라의 일이듯이. 나라의 일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게 아닌가요. 시골 마을에 사는 시인은 이 새벽, 미안하게도 찬란한 봄날이 괴롭습니다. 아이들이 싸우면 동네 어른들은 “냅둬라, 아이들은 싸워야 큰다”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잘잘못이 드러나 싸우게 되지요. 싸워야 하지요. 싸우면서 내 잘못이 확실해지면 고치고 바꾸고 서로 맞추어 새로워지는 게 사람 사는 일 아닌가요. ‘혁신 이란 끝이 없는 착오들을 결론짓는’ 일입니다. 그게 정치지요. 사람의 얼굴, 우리의 얼굴은 지금 어떻게 생겼나요?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하며 어떻게 살자는 것인지요. 나는 순진하게도, 바람이 불고 흰 구름 둥둥 떠가는 평화의 언덕 작은 마을 그 어디쯤, 눈물이 사는 어린 살구나무 곁에 누워 있습니다. 내가 심은 이 살구나무는 새로운 봄을 만나 저리나 곱게 화사한 꽃을 피우며 한 치도 어김없는 새 아침을 가져왔네요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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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1 16:53

행복한 ‘인생 2라운드’를 위한 준비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시대라 불릴 만큼 우리 사회는 100세까지 사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의학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는 ‘알파에이지’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면서 기대수명은 140세까지 바라보게 되었다. 실리콘밸리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생명연장을 위한 연구가 붐을 이루고 구글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노화연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60세 무렵 정년퇴직을 하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비단 나와 내 주변의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 2라운드를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막연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떠오른다. 슈바이처 박사는 30세에 이미 유럽 지역에서 존경받는 신학과 교수였으며 어려서부터 오르간(organ) 연주자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확고한 인생 계획 즉, ‘30세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학문과 음악을 하고 그 이후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자.’ 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의학공부를 시작하고 8년 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장래가 보장되는 프랑스가 아닌 의료기술이 취약한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의 랑바레네(Lambarene)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성공과 명성을 뒤로한 채 52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이타적인 삶’이라는 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슈바이처가 한 중요한 말이 있다. ‘내 안에 빛(꿈,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남들이 정해 놓은 가치, 나만 돋보이고 싶은 가치는 내 안의 빛이 아니다. 안으로부터 저절로 빛나는 나만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조용히 내면을 성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직업에서의 성공, 교수에서 의사로의 변신 등 슈바이처 박사의 특별함은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삶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슈바이처 박사의 특별함은 물리적 능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아보고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용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 박사는 인생을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명확한 비전이 있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기 위한 가장 필요한 분야가 의술인 것을 알고 의학 공부를 한 것이다. 우리도 성취와 물질만을 위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던 여정을 잠시 멈추고 더 높은 차원에서 인생과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은 무엇인가는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서 혹은 타인만을 위해서 살았던 삶이 아닌 제3의 길이 분명 보일 것이리라 믿는다. 또, 슈바이처 박사는 인생 2막을 열어줄 공부를 시작했다. 8년간의 의학공부와 의사로서의 준비과정이 있었다. 밑그림을 채색하기 위해 물감과 붓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인생 2라운드를 잘 살기 위해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가 통합되어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며 절망대신 희망이 우울대신 환희가 내면을 채우며 성취감과 행복감이 찾아올 것이다. ‘성공은 행복의 열쇠가 아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이다.’ 라는 슈바이처 박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어려서부터 꿈꿔왔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다보면 내가 행복해지고 자연스럽게 내면의 빛이 더 환하게 빛나게 될 것이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게 긴 노후를 맞는 것이 화두가 된 시대이다. 오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의료기술이지만 활력이 있는 ‘행복한 인생 2라운드’의 열쇠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명은 재천이지만 삶을 어떤 가치로 꾸려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자.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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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4 16:48

한 남자의 응징

중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보복은 오자서(伍子胥)의 응징이다. 춘추시대 초나라 귀족이었던 오자서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역모(逆謀) 죄로 기소되어 멸문의 화를 당한다.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던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큰아들 오상과 함께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오자서는 죽고 싶었다. 혼자서 비겁하게 살아가며 마음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가치 없는 죽음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응징할 것을 다짐하며 오(吳)나라로 망명한다. 오자서는 왕위 계승순위에서 밀려 있던 공자(公子) 광(光)을 왕으로 만들며 킹메이커로 부상하여 권력의 중심에 선다. 오자서는 권력을 남용한 초나라 평왕을 응징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오나라 왕 합려의 동의를 받아내어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와 함께 자신의 조국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영(郢)을 함락시킨다. 자신의 가족을 풍비박산 낸 평왕이 이미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에서 평왕의 시신을 파내어 채찍으로 300대를 내리쳐 부모의 원수를 갚아준다. ‘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내고 시신을 꺼내서 채찍으로 때린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조선의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 윤 씨를 참소하여 죽게 한 신하들에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으니, 묘를 파내고 죽은 시신을 훼손하여 응징하는 전통은 동양의 역사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지독한 응징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의 옛 친구였던 신포서의 충고를 <사기>에 적고 있다. “그대는 이미 죽은 사람을 묘에서 파내 욕보이니 한때 신하였던 자로 너무 극악무도하지 않은가?” 이런 충고를 들은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해는 저물고 응징할 시간은 없다(日暮途遠, 일모도원).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무도한 대가를 치러야겠다(倒行逆施, 도행역시).’ 자신의 부형을 죽이고,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에 대한 응징, 아마도 오자서는 그 일념 하나로 모진 세월을 견뎌왔기에 응징이 잔인하다는 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의 응징은 비장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두려울 것도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 맺힌 남자의 멋진 응징을 응원한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 속에 응징의 대상을 하나씩 갖고 살기 때문일까. 오자서의 응징 이야기를 열전(列傳)에 기록한 사마천도 49살 나이에 아무 죄 없이 궁형을 당하였다. 억울하고, 답답하여 잠을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깨어 일어나서 입은 옷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멍하니 생각에 젖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장이 꼬이는 고통을 받았으니 그 억울함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적에 의한 모함으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 선생도 억울함이 있었을 것이고, 8년간 유배지에서 고통 받은 김정희도 통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가족을 무참히 파괴하고 인생을 나락으로 몬 상대를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복수와 응징을 <열전>에 기록하며 응원한다. ‘오자서가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면 한낱 개미의 목숨과 무슨 구별이 있었겠는가? 끝까지 살아서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을 후세 남겼으니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생명의 끈을 놓아 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나, 끝까지 살아서 재기하는 것은 대장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마천의 평가가 귀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온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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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8 15:40

벚꽃 필 때 죽음을 생각하라

통영은 3월 중순에 벚꽃이 피고, 날마다 조금씩 북상한다. 열흘쯤 뒤엔 서울 여의도 윤중로 일대에서 벚꽃은 팝콘처럼 만개한다. 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다가 탄식한다. 어쩌자고, 하얀 벚꽃은 벚나무 검은 가지 속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만개하는가! 봄비가 지나가며 꽃잎을 떨구면 봄은 파장이다. 꽃 진 벚나무 가지에는 연초록의 잎들이 돋아난다. 제국이 멸망하듯이 벚꽃은 무너지는데, 하얀 벚꽃 시체가 낭자하게 흩어진 길을 걷노라면 가슴은 슬픔으로 벅차오른다. 젊은 시절, 연락이 끊긴 후배가 머리를 삭발하고 잿빛 승복을 입고 나타나 놀란 적이 있다. 스님으로 변신한 후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끌어안고 번민했노라고 말한다. 인생의 알 수 없음, 그 수수께끼를 품고 출가를 감행한 후배는 곧 수행을 하러 미얀마로 떠난다고 한다. 후배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떠올렸다. 살아 있는 동안 멈추지 말고 죽음을 생각하라!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다.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비행해 이 별에 도착하는 데는 약 2만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보이저 2호의 속도는 총알보다 10배 더 빠르게 날아간다. 지구 행성에서는 날마다 몇 만명이 태어나고, 먼저 이 별에 왔던 몇 만명이 생로병사를 겪으며 죽는다. 2만번의 봄이 왔다가 가는 동안 전쟁 고아들은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고, 유기묘 수 만 마리가 먹이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데, 나는 당신을 연모하고, 당신은 내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짚을 것이다. 우리는 길흉화복을 겪으며 평생을 살 테고, 그 동안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고, 폭풍과 뇌우는 우리 어린 자식들을 무서움으로 떨게 할 테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해마다 어김없이 봄이 돌아오고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에 모란과 작약이 핀다는 것이다. 당신이 봄날의 백일몽에 잠겨 있는 동안 내 후배는 미얀마의 오지를 걸으며 탁발 수행에 정진할 테고, 보이저 2호는 무서운 속도로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갈 테다. 아이들이 청년으로 자라고 어머니들은 늙어 허리가 굽고 백발로 변한다. 세상엔 얼음 위에 엎드려 잠든 사람도 있고, 파업을 위해 나선 노동자도 있고,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연인들도 있을 테다. 내게는 괴로운 밤들도 두어 번은 지나갈 테고, 누군가는 제 잇속을 챙기려고 친구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불시에 찾아든 질병으로 비탄에 빠질 것이며, 벚나무들은 봄마다 벚꽃을 피우느라 바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게 무시로 변하며 순환할 테지만 피었던 것은 지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법칙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다. 우리는 대지가 죽음을 어떻게 양육하는지를 지켜보았다. 분명한 사실은 지구에서 동식물들은 죽음을 주기 삼아 순환한다는 점이다.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 죽음을 자각한다. 무심히 버스 창밖의 간판들을 스쳐지나가던 그 선험의 찰나, 나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갇힌 채 오도가도 못 하는 느낌이었다. 만물을 이루는 원자는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별, 우주 먼지, 암흑물질, 바닷가 모래, 바위 들은 다 무생명이다.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감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죽음으로 충만한 이 삭막한 우주에서 우리가 살아서 존재한다는 게 기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기적일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죽음에는 출구도 빠져나갈 샛길도 없다. 죽음이 지구 생물의 역사에서 상수이자 보편의 진리라는 점은 단 한 점의 의혹도 없는 진실이다. 당신과 나는 어쩌다가 봄마다 모란과 작약이 꽃피는 걸 보는가? 어쩌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벚꽃이 덧없이 지는 걸 봐야 하는가? 벚꽃 필 때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이여, 나를 만나려거든 부디 벚꽃 핀 봄날에 찾아오라! 나는 활짝 웃으며 너를 맞으마! /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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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1 16:22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야구가 돌아왔다.’시범경기가 치러졌고 3월 23일 개막이다.10개 구단은 자신의 전력과 환경 그리고 최근 흐름 등을 바탕으로 올 시즌 목표를 설정한다.우승을 겨냥하는 팀도 있고 포스트시즌 진출의 5강을 목표로 하는 팀도 있다. 겨우내 국내외에서 진행된 스프링 캠프는 팀 목표를 위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강점을 극대화하려는 구단들의 노력이다.‘대한민국에 10명밖에 없는 프로야구 감독’의 운명은 성적에 달렸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팀이 우승을 놓고 경쟁할 수는 없다.그래서 팀의 목표는 크게 ‘우승이냐 (Win Now)이냐 정비와 준비(Rebuilding)’냐로 나뉜다. 작년 통합 우승팀 LG는 차명석 단장의 ‘우승 5개년 계획’에 따라 5년차에 우승을 달성했다.그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은 물론 순위도 계속 상승했고 팀의 예상승수와 우승 경쟁자가 어느 팀일지도 짐작했다고 한다. 스프링 캠프에서 10개 구단 감독들은 어떤 목표를 말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이를 바탕으로 올 시즌 우승을 놓고 다툴 팀은 어디인지 그리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팀은 어디인지를 예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팀 리더십의 목표설정과 그 결과를 비교해보자는 말이다.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다퉜던 두 팀의 리더십은 역시 우승을 목표로 한다.우승팀은 ‘왕조건설의 시작’을 다짐한다.“첫 번째 우승은 전력이지만 두 번째 우승은 철학”이라며 팀의 방향성과 칼라를 좀 더 분명하게 가져가자는 다짐이다. “우승 경쟁권의 팀”으로 평가받았지만 포스트 시즌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팀은 리더십을 전격 교체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감독교체와 프랜차이즈 스타의 갑작스러운 이적으로 뒤숭숭했던 팀의 새 리더십은 “리모델링”을 다짐한다. 팀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을 가장 잘 돌파할 수 있는 리더십을 선택한 팀이 하나 더 있다.그들은 갑작스럽게 감독 선임 프로세스를 진행했지만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새 리더십은 ‘내부 지도자의 감독승격’이 가장 현실적 선택이라는 판단을 한다.‘세대교체의 감독’은 빠르게 팀을 안정시키며 우승전력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킨 팀의 리더십은 올 시즌이 “한국시리즈 우승” 타이밍이라고 선언한다.작년 우승을 놓고 한국시리즈에서 경쟁했던 팀의 감독조차 “만만치 않은 감독”이라고 인정하는 팀이라 보여 지는 전력 이외의 강점이 팀 성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초보감독”이었지만 작년에 포스트 시즌 진출의 성과를 낸 팀 리더십은 ‘작년에 이어 포스트 시즌 이어가기’를 목표로 한다.당장 우승경쟁은 아니지만 팀이 계속 나아지는 중이라는 뜻이다.곧 우승전력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승 청부사”로 “카리스마 감독”을 영입한 팀은 “새로운 팀의 가을야구”를 목표로 한다.이를 위해 그들은 “공격적이며 새로워진 팀 야구를 지향”한다.우승 경험이 많은 감독은 ‘선수들이 파닥파닥 뛰는 이기는 야구’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선수들의 기를 올리는 데 둔다. 지난해 가을야구에 탈락한 팀의 리더십은 ‘홈구장에서 가을야구’를 목표로 한다.당장 우승도전은 어려우니 차근차근 전력향상을 노리겠다는 말이다.투타의 기둥이 모두 빠져 어려운 시즌이 예상되는 팀의 리더십이 ‘도전정신과 완주’를 목표로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다. 만년 하위 팀의 리더십은 “가을야구 냄새라도 맡자”는 목표를 세웠지만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메이저리거의 복귀는 팀의 “5강 도전의 포부”로 이어진다.선수 한 명이 가져오는 급변인데 인사가 팀과 리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의 경쟁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무능하고 무책임한 무도한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하자 “운동권 특권 부패 종북 세력의 합체”라고 맞받는다.‘사면 음란 친일 극우공천’이라고 하자 ‘충성심과 방탄력 기준의 공천'이라고 한다.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 보다 ’상대의 악마화와 반사이익의 정치‘다. 여야는 우리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미래를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실행계획을 제시할까? 프로야구 감독도 계약기간은 있지만 성적에 따라 언제든 교체된다.우리가 4월 10일 뽑는 사람들은 임기 4년이다.우리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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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4 16:40

시인이 사는 마을

나는 강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 태어나고 자라 산다. 나의 조상들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두 살 때 전쟁이 일어났다. 집은 불태워지고, 그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잃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재만 남은 집터에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세 번째 집으로 1962년에 지으셨다. 아버지는 나무와 풀과 햇살과 흙과 바람으로 집을 지으셨다. 나도 그렇게 바람과 햇살과 흙과 나무로 시를 쓰며 그 시속에서 살고 싶었다. 마을을 만들어 살면서 사람들은 마을의 질서를 위해 법을 만들어 갔다. 불문율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막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도둑질을 하다 들키면 추방당하거나 스스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거짓말을 하면 평생 신용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사는 게 공부였다. 배우면 써먹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자연이 시키는 일을 잘 알아서 농사와 삶의 근본을 삶았다. 삶이 예술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싸워야 큰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했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삶 속에서 만들어진 마을 법을 지키며 사람들은 같이 먹고 같이 일하면서 같이 놀았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마을 사람들의 삶을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라 했다. 공동체라는 정치경제 문화 사회적이고 인문적인 이 아름다운 말은, 실은 이 작은 마을 문화에서 만들어졌다. 마을에는 별로 소식이 없었고, 쓰레기가 강물로 나가지 않았다. 가난을 무시하지 않았다. 가난은 남모르게 서로 돌보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마을에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어렵고도 아름다운 말이다. 마을은 인간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학교였다. 스물한 살 때 초등학교 선생이 된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31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 인생이 늘 더 잘 되어 있어서 나는 놀란다.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일이 늘 새로워했고, 신비로웠고, 감동적이었다. 초가을 햇살을 날개에 실은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는 운동장에서 나는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아이들은 나의 아름다운 스승이었다. 교육은,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는 자기 교육이었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동안 드나들던 모교 교문을 나올 때 나는 부끄럽고 괴로웠다. 아이들에게 잘못 한 일들이 되살아나 나는 부끄러웠고, 아이들에게 가르친 대로 살지 못해서 괴로웠다. 교육은 미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그대로 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논밭으로 오가던 길, 학교와 직장을 걸어 다니던 그 강길을 지금도 나는 걷고 있다. 강물을 거스르고 따르는 일은 내게 수긍과 거역을 가르쳤다. 박힌 돌에 물은 거세게 부딪치고 부서지며 흘렀다. 시정이 넘치는 이 작고 소박한 강은 내게 그리움을 실어다 주고 외로움과 태어난 땅에 사는 아픔을 가져갔다. 어느 날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시를 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달이 다닌 길에서”라고 했다. 나는 달이 다니는 길을 따라다니며 강길에 앉아 시를 썼다. 마을은 나의 학교였고, 해 아래 나무들은 나의 새 책이었으며, 새로 쓰는 시였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로 참나무가 참나무로 평생을 우람하게 사는 나무들의 하루는 나에게 마르지 않은 상상력과 시적인 영감을 주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 말로 씨를 뿌려 곡식을 가꾸어 거두는 농부들의 일상은 나의 시가 되었다. 나는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 나는 새와 바람과 달과 별들이, 나무들이 아침 강물과 저문 강물이 하는 말들을 달빛으로 공책에 받아 적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나 강을 건너오라고 부르지 않는다. 달이 뜬 밤 나락을 짊어지고 징검다리를 건너와 달빛이 깔린 마당에 짐을 부리고 허리를 펴던 고단한 아버지들의 하루 곁에 서 있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어찌 내가 잊고 살까. 나는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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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7 15:23

AI를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설 명절 휴가기간 동안 SNS에서 따뜻한 에피소드를 접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 한복판에 폐지가 가득한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노인 옆에서 우산을 씌워드리고 함께 가는 어느 여성의 모습이었다. 목적지까지 비를 맞으며 모시고 간 후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아 저녁을 드실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상실감에 젖어있는 추운 계절에 마음의 온도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나날이 눈부시게 기술이 발전하고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과 반비례로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가는 요즘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올해 최고의 화두는 ‘생각하는 AI’인 ‘생성형 AI’의 출현이다. AI 기술의 발전은 우리 생활에 상당히 밀착하여 다가오는 느낌이다. 삼성전자에서 가장 최근에 출시된 스마트폰에 탑재된 AI는 13개국의 언어를 실시간으로 통·번역할 수 있게 개발되었고, 실제 사용해보니 일상대화는 물론 어려운 말도 대략 뜻이 통하는 수준으로 번역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외국어를 배우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근 AI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이다. 2021년, 미국의 전 외무장관 키신저(Kissinger), 구글의 전 CEO 슈밋(Schmidt), MIT 학장 허튼로커(Huttenlocher)가 공저를 한 ‘AI 이후의 세계’라는 책에서 AI가 인간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 대단한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였다. 2년이 지난 2023년 키신저 등 3명의 공저자들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Chat GPT가 지적혁명(Intellectual Revolution)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뉴욕타임스는 직업세계에서 AI가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대학졸업자의 75% 정도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그만큼의 직업군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였다. 기술은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고 있고 일과 삶의 현장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AI의 활용으로 많은 것이 편리해졌지만 인간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더 강해지고, AI의 활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창의적인 사고를 생략한 채 습관적으로 AI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사회라면 ‘AI에 지배되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주도적으로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역량과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첫 번째는 교육현장에서 AI를 이해하고 잘 다룰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있다. 초등에서 고등교육까지 학문과 직업세계에서 AI를 활용할 수 있는 기술역량을 습득하여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탁월한 인재로 키워내는 것과 더불어 생활에서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50대 후반의 은퇴한 세대도 3~40년 AI를 활용해서 일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두 번째는 기술 발전을 다룰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인성과 창의력이다. 사람이 AI보다 탁월할 수 있는 것은 따뜻한 품성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발전을 소화할 수 있는 인간적인 소양이다. 도덕적, 윤리적 의식을 함양해주는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적인 이해능력, 동료와 함께 협업공동체를 결성하고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창의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소양을 개발하여 AI의 발전을 충분히 포용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노인에게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도 기꺼이 우산과 따뜻한 마음을 내어준 여성을 보면서 AI시대를 맞는 우려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품성을 바탕으로 이웃과 연대하고 AI에 지배되지 않고 충분히 활용하여 긍정적이고 효율적인 현재를 살아간다면 ‘기술 지배의 차가운 개인주의 사회’가 아닌 ‘사람냄새 가득한 AI를 품을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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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2 16:20

헤어질 결심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마부의 아내는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헤어질 결심을 통보했다. 마부는 갑작스런 부인의 이혼통보에 당황했다. 제(齊)나라 재상인 안영(晏嬰)의 마차를 모는 직업은 비록 신분이 낮은 일이기는 하나 제나라 강력한 실세 안영을 모시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알아서 자신에게 잘 보이려 했다. 마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을 통보받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혼 사유를 찾을 수 없었던 마부는 아내에게 왜 헤어지려 하는지 물었다. “당신은 재상을 모시는 마부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장에서 본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제나라 실세인 안영은 겸손하게 마차를 타고 있는데, 당신은 권력의 실세인양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마차를 몰고 있으니 당신의 부인으로서 창피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머리를 조아린 게 아니라 마차에 타고 있는 권력자에게 한 것인데, 주제도 모르고 권력의 주변에서 함께 누리려 하니 그것이 제가 당신과 헤어질 결심을 한 이유입니다.” 사마천 <사기> 안영과 마부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권력의 주변에는 늘 주변실세가 있다. 권력자는 이미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조심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권력의 주변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사람이 많다. 권력자의 배우자, 친척, 비서실 직원, 수행 기사,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은 모(母)권력의 주변에서 자(子)권력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권을 가진 사람들은 늘 자(子)권력 주변에 모여든다. 명품과 뇌물로 유혹하기도 하고, 아부와 아첨으로 달래기도 한다. 잠깐 잘못하면 무심코 받은 뇌물과 청탁 수락에 모(母)권력이 흔들리고 무너지기도 한다.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 기생권력에서 시작된다는 예는 역사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환관과 외척들, 십상시와 측근들,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주변 실세들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족속들이었다. 내부 단속을 하지 못하고 방치한 것이 결국 화를 키웠던 것이다. 돈이 많은 부자거나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은 의외로 교만함이 적다. 실세가 교만하면 그만큼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귀한 사람보다 더욱 교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측근이나 주변사람들이다. 오늘 나는 어떤 부귀한 자와 만났고, 누구와 점심을 같이 먹었고 떠드는 사람 치고 정말 실속 있는 사람이 드물다. 대부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다른 사람의 명성에 기대어 자신을 돋보이려는 사람들이다. 아내의 헤어지자는 말에 마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날부터 마부는 자신의 몸을 낮추고 겸손하였다.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한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개과천선하였던 것이다. 평소와 달라진 마부의 모습을 본 안영은 그 이유를 물었고 마부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안영은 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의 교만함을 접은 마부를 기특하게 여겨 대부(大夫)의 벼슬에 천거하였다. 일개 마부에 불과했던 마부가 아내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대부의 벼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역사 기록을 읽다보면 멋있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마부가 멋있다.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고친 마부는 멋진 사람이다. 안영은 더 멋있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부하의 변화를 인정해 줄줄 아는 상사였다. 그러나 가장 멋진 사람은 마부의 아내다. 현명한 아내가 위대한 남편을 만들었다. 남편에게 옳은 길이 무엇인지 몸소 가르쳐주었던 마부 아내의 용기는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배우자의 부정을 알면서 눈감거나 조장하는 사람은 그의 행동이 결국 부부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잘못한 것을 어떻게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으로 충고한 마부의 아내가 되어야 사람들의 용서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이 시대에 그런 마부와 부인을 보고 싶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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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15 17:30

자기 혁명을 한다는 것

사는 게 답답하고 제 운명이 마치 갑옷을 두른 것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짊어진 가장이라는 짐을 싣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 어디론가 숨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나모 도르게 한숨을 내쉬곤 했다. 낯선 고장을 여행하고 돌아오면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울렁이던 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음의 공허는 메꿔지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뒤늦게 더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이 필요했었음을 깨닫는다. 전직 ‘뉴요커’ 기자이던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심장을 두드리는 책이다. 제 결혼식을 열리기로 한 날, 형의 장례식이 치러지는데, 그날이 그의 운명의 변곡점이었다. 형을 잃고 내면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뒤 그 지점에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촉망받는 기자는 엉뚱하게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란 직장을 구해 이직한다. 미술관 한 모퉁이에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이란 가장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직업이다. 미술관 경비원이란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게 새로운 일터는 심리 치유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그곳은 속세와 단절된 고요한 피안이었던 곳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계기에 삶의 방식을 바꾸곤 한다. 새 직업을 찾는 시도는 가치의 위계와 자기 시간을 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시도다. 기업가나 정치가도 변화와 혁신을 외친다. 한 기업 총수가 한 “자식과 마누라를 빼고는 다 바꿔라!”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해 기업의 혁신이 얼마나 절실했던가를 환기시키는 발언이었다. 무언가를 바꾸는 일은 미래를 담보하는 위험한 투기일 테다. 자기에게 충실한 삶을 산다는 것, 그건 자기다움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다움이 아닌 것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뭔가에서 벗어나는 것의 최종심급은 혁명이다.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에서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노래한다. 혁명은 고독하고 피(자기희생)가 요구되는 일임을 꿰뚫어 보았다. 혁명은 생이라는 자기의 유일한 자산을 통째로 들이미는 일임으로 두려움과 불안과 현기증을 부른다. 많은 이들이 혁명의 열망을 품지만 실행까지 끌고 가지 못한다. 시인은 혁명을 포기한 자에게 남는 것은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아는 마음의 공허뿐이라고 노래한다. 혁명에 실패하면 마음의 황폐함을 겪는다. 그 황폐한 마음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 그 중간에 엉거주춤한 채로 머무른다. 그 머무름은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나 죽어 있기’(한병철, ‘오늘날 혁명은 왜 어려운가) 때문에 생긴다.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이직은 자기 혁명의 한 방식이다. 뉴욕 한복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건너다보이는 사무실에서 커리어를 쌓던 한 젊은이가 뜻밖의 비극을 맞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는 시간에 쫓기며 자기를 갈아 넣는 기자직을 버리고 경비원으로 전직하며 내면을 관조하는 고요함과 평화를 얻는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10년을 근무한 뒤 여행 가이드로 생계를 꾸리며 이 책을 써냈다. 상실과 치유의 서사를 담은 이 자전적 에세이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40주 연속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주체를 해체한 뒤 그걸 프로젝트로 대체한다. 그 과정에서 운명이란 것도 증발해버린다. 자기 스스로 고용주이자 피고용자로 만드는 시대에는 자기에게 성과를 내라고 채찍질을 해댄다. 그들은 직장에 예속된 채로 업무를 반복하면서 자기 착취를 하는 것이다. 일에 매여 진저리를 치거나 한숨이나 내뱉고 산다면 이보다 더 딱한 처지는 없다.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삶이 따분하고 업무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생을 헛되이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관습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게 자기 혁명이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신에게 맞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온몸으로 변화를 갈망하라. 자기 혁명을 위해 성큼 나아가라!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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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01 17:00

‘윤석열 정치’의 한계와 V2

“약속대련”일까? 아니면 “실전”일까? 주말부터 이번 주를 뜨겁게 장식하고 있는 ‘윤석열 vs. 한동훈’ 맞짱을 바라보는 양론이다.약속대련이든 실전이든 둘의 근거는 유사하다.한쪽은 이관섭 비서실장이 ‘등장’해서고 다른 한쪽은 그가 ‘지목’되어서다.등장이든 지목이든 이 실장은 “(대통령의 비대위원장) 사퇴요구”를 전달한 사람이다. 약속대련의 이유는 간단하다.“한동훈 밀어주기 이벤트”를 통한 총선 승리다.총선 패배는 윤 대통령에게는 식물정부이고,한 위원장에게는 강제퇴출이다.둘의 공동목표는 ‘대선승리의 선거연합’ 복원을 통해 가능하고,특히 수도권 선전(최소 37석+)은 필수적이다.수도권 승부는 원내 과반의석 확보는 물론 민주당과의 원내 1당 경쟁이 가능한 출발점이다. 다수설은 ‘실전론’이다.용산의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라는 해석이다.그들의 공식적 설명은 원칙적이다.“전략공천이 필요하다면 특혜처럼 보이지 않도록 원칙과 기준을 세우고 지역 등을 선정해야 한다.”며 “법무부 장관도 지냈으니 시스템 공천을 할 거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김 여사는 불법적인 몰카 공작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는다.“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 공천에 대한 대통령의 강력한 철학”이라는 언급이 “김건희 리스크”를 제기한 김경률 비대위원이 주요타격방향이라는 것을 가리지 못한다.문제의 핵심은 “디올백 사과와 책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의 “한 위원장 거취문제는 간여할 일이 아니다.”라는 언급도 공허하다.‘대통령의 비대위원장 사퇴요구’는 ‘대통령이 여당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것은 정치적 중립위배 문제에 따라 정치(당무)개입 또는 직권남용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통령은 ‘자신이 누구의 부하도 아니지만 모두가 자신의 부하’인 ‘윤석열 당(黨)’을 원하지만 ‘김건희 리스크의 윤석열 당’으로 총선승리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김건희 리스크’를 안고 수도권 승부는 어렵고 수도권 선전 없는 총선승리는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윤석열 당’을 향한 지난 2년의 행보는 두 가지 중 하나로 해석 된다.그의 목표가 총선승리가 아니거나 아니면 ‘지금 이대로도 총선승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신년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총선예상의석이 “민주당 160석+ 국민의힘 120+”라고 하면 ‘지금 이대로도 총선승리’는 아니다.오늘 현재 ‘8:2’ 정도로 민주당 우세론이 대부분이다. 만약 ‘윤 vs. 한’ 1차 충돌이 ‘김건희 디올백’에서 출발하여 ‘윤석열 당’의 부하 중 하나인 비대위원장의 사퇴요구로 표현된 것이고 또 대통령의 목표가 총선승리가 아니라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V2 보호’다.주말 전후 상황전개에서 ‘감정적 대응’으로 보여 지고 ‘대통령실의 보좌실패’로 읽혀지는 부분도 V2 가능성을 높인다. ‘윤석열 당’의 완성은 공천이다.화재 현장에서 공개적인 정치적 화해의 모습으로 일단 봉합된 여권 내 권력 갈등의 2 라운드로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유다.김경률 거취와 출마도 그 중 하나다.‘결사옹위 세력구축 vs. 총선승리를 향한 미래기획’의 불가피한 충돌이다.총선승리 없는 한동훈의 정치적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사퇴요구를 거절했다.”는 한동훈 위원장의 언급은 권력의 추를 이동시키는 출발점이다.대통령에게는 명분도 없고 세력도 이젠 없다.“48-18-3 응집력 급격히 약화된 친윤 홍위병”소리를 들을 정도로 초라해졌다. 스스로 자초한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다.‘윤석열 권력’의 인식과 능력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권력의 말은 신뢰를 잃었고 권력의 능력까지 의심 받기에 이르렀다.권력의 신뢰와 능력 위기다. 특히 대통령이 과연 공공성을 이해하고 직무수행 과정에서 우선적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사람들은 ‘공적 가치와 V2가 충돌할 때’ 대통령이 무엇을 우선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가사에 얽매여 국사를 그르칠 수는 없다.”며 대한민국의 권력서열을 묻는 것이다.잘못은 고칠 수 있고 참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렵다.‘윤석열 정치’의 한계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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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25 15:44

아름다운 산책

눈이 와 있다. 강물 위로 나온 검은 돌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하얀 눈이 마을을 고요하게 덮고 있다. 조심조심 강을 건넜다. 마을을 걸어 나온 내 발자국을 뒤돌아 바라보고 서 있다가 강물을 따라 걸었다. 눈은 가만가만 온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따뜻해지는 나의 마음을, 이 온기를 이해하여 마음에 담고 새 나가지 않게 오래 오래 보관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따뜻한 내 손이 세상으로 나오게 하자. 사랑이 변하지 않는 그 지점을 나는 걸으면서 배워 왔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세상에 마음을 다 쓰자. 이 글이 산책을 나서는 나의 첫 마음이고 조심하여 올해 내 첫 글이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다. 기쁨이 슬픔을 설득할 수 있는 말들이 있어야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글이 중요하지 않다. 삶은 지나 가나니, 덧없다. 무정하다. 소용이, 내가, 어디에, 무슨 소용인가. 때로, 써 놓은 내 글 속으로 내가 들어가 편안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 죽고 세월은 흐르고 그때도 저 산에 바람은 저렇게 불고 눈은 내리고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저녁 노을로 시를 쓸 텐데,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너를 사랑하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까. 길 위 관 목 숲에서 나무 쪼는 소리가 났다. 오색 딱따구리다. 검은 꼬리 밑 부분에 진 분홍색을 뽐내는 다섯 가지 색의 몸을 가진 새다. 땅 위를 뛰듯 서 있는 나무 몸을 타고 뱅뱅 돌아 뛰어오르며 쫀다. 숲에 눈송이들이 내리고 숲은 조용한 아름다움을 가져왔다. 큰 눈송이다. 눈송이가 막 타 놓은 솜처럼 성글고 희어서 세상의 어디에 닿아도 소리가 없다. 산을 그려주며 산을 지나온 눈송이들이 강으로 내린다. 눈을 감고 고요하게 서서 풀숲에 눈 오는 소리를 듣다가 가만히 눈을 뜨고 눈송이들을 따라 강가로 걸어갔다. 눈송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오며 자신을 응시하고 자기의 태도를 생각하며 내릴 지점을 골라 희게 앉는다.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는가. 흔적도 없이 허공을 지나온 눈송이들은 강물에 내리는 소리도 파문도 만들 줄 모른다. 가치를 가져오는 곳이 허망과 허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눈이 그쳤다. 한 시간 쯤 강물을 따라 걷다가 다른 길로 강물을 거슬러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응달이어서, 눈이 녹지 않았다. 새와 짐승들과 사람의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다. 발자국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딛고 어디를 갔다. 쥐 오리가 물질을 한다. 물속으로 쏙 잠수하였다가 어디만큼 가서 물 위로 푱 나와 동그랗게 퍼지는 파문의 중심에 동동 떠 있다. 쥐 오리가 물속으로 쏙 들어가고 푱 나온다는 이 ‘푱’이라는 말에서는 명랑하고 기분 좋은 물소리가 하늘에서 들린다. 쥐 오리가 잠수하면 가만히 서서 저 아이가 어디로 나올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리지만 내 예상은 항상 빗나간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인다. 몸이 희고 검고 작은 할미새가 꽁지를 까불며 바람에 밀리는 살얼음 가장자리에서 얼어붙은 풀잎을 쪼고 있다. 새의 무게로 살얼음이 밀리며 살얼음이 챙챙챙 소리를 낸다. 너무 멀리 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다. 천천히 타박타박 걷다가 터덜터덜 걸었다. 집에 도착하였다. 마른 빨래를 개고 나서 새로운 빨래들을 탈탈 털어 종류와 크기와 모양을 따져 귀와 모서리들을 찾아 맞추어 가며 체계적으로 널었다. 누가 보기에도 좋게, 예술적(?)으로 빨래를 널려고 노력한다. 노력은 모든 일들을 익숙하게 하여 노련하고 세련되게 가다듬으며 삶의 범위를 넓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정돈의 기쁨은 일상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 빨래를 잘 널고 나서 손을 툭툭 털면 내가 내게 쳐 준 박수 같아 좋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조용한 마을, 아침 산책이 나는 좋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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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8 17:08

새해의 결심, ‘큰 바위 얼굴’ 닮아가기

미국 중서부 사우스다코타주 래피드시 남쪽에 위치한 러시모어산에는 미국을 빛낸 4명의 대통령(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미국인이 존경하는 4명의 대통령 조각상은 미국 시민들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의 관광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부터 노예해방을 이끌어낸 링컨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친숙한 얼굴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위인들의 얼굴이다. 이러한 러시모어산의 석상을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읽었던 나다니엘 호손(Nathanier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이 떠오른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 거대한 얼굴 모양의 바위산이 있었고, 언젠가 큰 바위 얼굴과 똑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마을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다림을 주었다. 소년 어니스트는 평생토록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을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위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부자, 장군, 정치가, 시인들이 마을을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서 사라지고 잊혀지는 얼굴이 되었다. 어느덧 노년기에 들어선 어니스트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지역의 앞날을 이야기를 하던 중, 마을 사람들은 햇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과 닮은 모습을 보고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뜬다. 어린 시절부터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희망을 품고 살았던 어니스트는 자신이 위인이 되기보다는 그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실천하는 행동들이 결국,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매년 이맘쯤이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내기 위해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올해는 ‘나’중심의 시각에서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중심, 즉 ‘우리’라는 시각으로 바꾸어 보려고 한다. ‘큰 바위 얼굴’처럼 큰 꿈은 아니지만 이타적인 삶을 통해 나와 주변이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 한 해를 살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기를 바라며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삶의 태도 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려해 봐야 한다. 어니스트가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이타적인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한다. 정년퇴직자들의 재능기부, 가족이 함께 사회봉사에 참여하거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등 ‘우리’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한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필자의 경우 자녀들이 어렸을 때 가족이 함께 장애인복지시설에 방문하여 그곳 어린이들과 함께 놀게 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경험이 자녀들의 가치관 형성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둘째, 계획과 동시에 바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매년 새롭고, 달성하기 어려운 계획을 한두 개쯤 세울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관심을 가져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계획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계획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셋째, 함께 갈 수 있는 친구와 동료를 구해야 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혼자의 힘으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일을 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뿐 아니라 꾸준히 진행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나와 뜻이 맞는 친구, 동료, 또는 단체의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는 삶은 장기간의 여정이기 때문이다.새해를 맞이하여 삶의 태도를 바꾸어 우리 마음속에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려는 소망을 품고 한걸음 한걸음씩 함께 나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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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1 15:22

유세(遊說)의 시대

새해가 바뀌자마자 국회의원 예비 출마자들이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달라는 문자와 전화가 빗발친다. 그러고 보니 올해 가장 큰 이슈는 3개월 남짓 남은 22대 국회의원 선거다. 총선을 준비 중인 정당 대표들과 당직자들은 벌써 전국을 오가며 민심의 주도권을 잡으려 분주하고, 총선에 나갈 예비 후보들은 출판기념회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며 자기 이름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리려 한다. 대한민국 사회는 4월 10일 이전까지는 온통 선거 이야기로 뒤덮일 기세다. 바야흐로 선거 정국이라는 큰 장이 대한민국에 서고 있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유권자의 표다. 유권자를 설득하여 마음을 얻는 과정을 유세(遊說)라고 한다. 유(遊)는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라는 뜻이고, 세(說)는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말하여 ‘설득한다’라는 뜻이다. 유세의 기원은 강태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폭군 주(紂)의 신하였던 강태공은 자기 뜻이 받아들여 지지 않자, 다른 제후들에게 돌아다니며 자기의 정치적 이상을 유세하였다. 결국 문왕(文王)에게 유세하여 문왕의 신하가 되었고,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건국의 주역이 되어 제(齊)나라 제후로 봉해졌다. 유세의 성공으로 부와 지위를 얻은 것이다. 최초의 유세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지금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상이다. 공자나 맹자를 비롯하여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은 모두 귀족을 상대로 한 유세객이었다. 그들은 귀족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유세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청사진을 제시하여야만 유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유세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자는 유세 도중 봉변을 당해 제자들과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유세의 결과는 둘 중 하나다. 성공과 당선, 또는 실패와 낙선이라는 결과다. 성공과 당선은 높은 지위와 부를 보장해주고, 실패와 낙선은 가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필자의 지인 중에도 당선된 사람과 낙선한 사람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똑같은 유세객이었지만 결과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인다. 당선하자마자 초심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성공에 취해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사람도 있고, 낙선과 동시에 폐인이 되어 하늘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맹자>는 유세에서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당시 유세객이었던 송구천(宋句踐)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성공해도 효효(囂囂)하고, 실패해도 효효(囂囂) 하시게.’ ‘효효’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상황을 인정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득(自得)의 모습이다. 당선되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효효하게 갈 것이며, 낙선되면 마음의 흔들림 없이 나를 수양하며 효효하게 살라는 당부였다. ‘선비는 실패해도 원칙을 버리지 않기에 당당한 자신을 얻고(窮不失義士得己焉, 궁불실의사득기언), 성공해도 자기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백성들이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達不離道民不失望, 달불리도민불실망).’ 실망(失望)이란 당선되기 전에 그토록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던 사람이 당선되면 돌변하여 사람들의 희망(望)을 잃게(失) 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론 찬밥과 나물을 뜯어 먹으며 살수도 있고, 비단옷을 입고 음악을 들으며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찬밥에 나물국을 먹든, 비단옷에 화려한 음악을 듣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 후에 당선과 낙선을 만날 후보자들에게 한마디 미리 전하고 싶다. 낙선되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하며 효효하게 살 것이고, 당선되면 부디 초심을 잃지 않아 국민을 실망(失望)시키는 일은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실망하는 국민을 보는 일은 공직자로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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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04 18:32

더는 인생의 시중을 들지 않겠다

한파가 맹수처럼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대지 위의 웅덩이와 강은 죄다 얼고, 삭풍은 빈 나뭇가지를 붙들고 울어댄다. 나는 옷을 껴입고 올해의 마지막 일몰을 보러 임진강변으로 나섰다. 저 아래 평지는 월동을 위해 몽골에서 날아온 독수리 도래지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강 이쪽은 평야, 강 너머는 북녘 마을이다. 북녘에서 흘러온 물은 평야와 북쪽 마을 사이를 돌아 서해 쪽으로 무심히 흘러간다. 밤이여, 오라! 시간이여, 흘러라!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 동지도 지나고 한 해의 끝에 닿는다. 지금은 떠들썩한 소란보다는 고요 속에 머물며 한 해를 돌아볼 때다. 우리는 다른 처지에서 하루를 맞고 떠나보내는데, 어느 하루도 똑같지 않다. 그 다른 하루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 살아보니 인생의 목적을 돈이나 명예, 출세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뜬구름 같이 흘러간다. 인생의 여정은 의미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행할까? 병을 앓는 사람도, 직장을 잃은 사람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도 아니다. 삶의 경이를 찾지 못한 채 무미하게 하루를 사는 이들이 불행하다. 줄 없는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같이, 과녁을 겨냥해 화살 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같이 사는 이들은 공허하고 불행하다. 올해 나는 아침마다 사과 한 알씩 먹고, 새로 나온 책을 부지런히 구해 읽으며, 새 책도 냈다. 여름에는 야구장에서 안타를 치고 준족을 뽐내며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내달리는 야구선수를 응원하고, 늦가을에는 대관령에 가서 독일가문비나무 숲속을 걸었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더 많았다. 집고양이 둘과도 사이좋게 지냈으니, 좋은 한 해를 보낸 셈이다. 당신의 올해는 어땠는가? 나는 성실한 세탁부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최선을 다했다. 다만 기대만큼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만한 과오없이 한 해를 보낸 점이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절 인연으로 맺어진다. 지금 누군가 어디선가 울고 있다면 그는 까닭 없이 우는 게 아니다. 그는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누군가 어디선가 웃고 있다면 그는 까닭 없이 웃는 게 아니다. 그는 나 때문에 웃고 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웃는다. 더러는 서로의 지옥까지 내려가 서로를 물어뜯기도 할 것이다. 올해도 아이들은 옥수수처럼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 누군가는 애기를 낳아 식구를 늘리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겨 진질머리를 쳤을 테다. 묵은해를 돌아보고 새해 소망도 몇 가지 적어본다. 새해에는 욕심을 줄이겠다. 책을 덜 읽고, 집안 구석구석에 쌓아둔 책들은 나누겠다. 돈벌이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겠다. 멀리 떠나는 여행 대신에 벗들과 자주 만나서 많이 웃겠다. 산책 거리를 조금 더 늘리고, 식사는 하루 두 끼만 챙기겠다. 멀리 사는 벗에게는 편지를 쓰겠다. 새해에 어른은 더 어른답고, 아이들은 아이답기를 바란다. 미아로 떠돈 이들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실직한 가장들은 새 직장을 구하기를. 학대받는 반려동물들은 더 착한 주인을 만나기를. 당신과 나는 세상의 사막과 황량한 풍경을 더 그리워하고, 우리보다 연약한 동물을 더 사랑하자.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과 걷지 않은 낯선 길들을 더 갈망하고, 꿈이 깨지거나 계획한 일들이 틀어지는 것 따위를 무서워하지 말자. 새해에는 외부의 충고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자. 굶주린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고, 집 없는 이들에겐 따뜻한 잠자리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전쟁으로 시름하는 이들에게 벼락같이 평화가 주어진다면 나는 면도를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리라. 하늘에 더 감사하고, 이웃에게 더 자주 미소를 보이리라. “더는 인생의 시중을 들지 않으련다. 그냥 생긴 대로 살련다.” 나는 결심한다. 늘 옆에 끼고 읽는 시인 아틸라 요제프가 노래한대로 살겠다고. 망각된 약속들, 망가진 꿈과 기대들, 지루한 기다림들, 이것들은 묵은해와 함께 흘려보낸 뒤 새해에 처음 솟는 해를 벅찬 가슴으로 품으리라.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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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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