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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나오셨습니다

우리말은 경어법이 발달한 언어이다. 공손하게 존대어를 쓰다보면 행동거지가 조신해지고 마음도 따라 점잖게 예의를 차리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깍듯해서 좋은 존댓말일지라도 지나친 공대어는 듣기 거북하다. 더구나 존댓말이 사람에게 쓰이지 않고 사물에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약국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귀에 거슬리는 말들이 꼬리를 잇는다.“그냥 털어 드시면 되는 약이시구요. 약값은 2500원 되세요.”라든가 “약은 만 오백 원 나오셨습니다.” 또는 “이 파스는 얇아서 잘 붙으세요. 1900원, 2600원 하셔서요. 4500원 되세요. 아대(보호대)가 좀 비싸세요.” 등 과잉된 공대어를 듣고 있으려니 심기가 거북하다. 손님을 높이는 건지, 약을 높이는 건지, 약값을 높이는 건지. 들은 대로 적어둔 것인데 지금 보아도 너무하다. 어쩌다 백화점에 가면 존댓말에 놀랄 일이 많다. “고객님, 오늘 나온 신상(新商)이신데요. 색상도 고급이시구요. 디자인도 멋지세요.” 공손함이 넘치니, 참!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뿐이 아니다. “이 구두는요. 다른 매장에는 안 계세요. 가격이 좀 쌔시긴 하지만 무지외반증이 계신 고객님들께 인기가 많으세요.” 등 구두점 젊은 남성의 공대어도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곳곳에 존댓말 서비스가 넘쳐나지만, 당연히 사람이 받아야 할 존대가 잘못 쓰이고 있다. 은행에 가면 통장이나 도장까지 우대를 받으며, 커피집에선 “고객님, 000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하니 커피가 한껏 존대를 받는 것이다.나는 아버지께 존댓말을 쓰게 된 사연이 애처롭다. 초등학교에서 버젓이 존댓말과 낮춤말을 배우는데도 4학년이 될 때까지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지 못했다. 아버지께선 우리 형제자매들을 앉혀놓고 부모의 체면도 있고,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들을까 싶다며 앞으로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 존댓말을 쓰라고 이르셨다. 그러나 시험문제로는 척척 맞추는 존댓말이 말만 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아 너무나 힘들었다. 언어도 길들이기 나름이다. 요새는 어른이 아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기도 한다. 아이를 존중하는 의미도 있겠으나 어른이 본을 보여 어릴 적부터 존댓말을 익히고 습관들이기 위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서너 살 아이에게 “아들! 엄마가 큰소리로 말해서 화났어요? 그랬어요? 미안해요.”라며 아이를 달래는 걸 보고 있으면 껄끄럽고도 민망하다. 부부끼리는 너냐 나냐 반말을 하면서 자식에겐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가정도 보았다.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까다로운 것이 높임말이라고 한다. 외국인 며느리가 시부모님게 ‘밥 먹으셨어요?’라든가 ‘내가 잘 하실게요.’ 등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조카가 한창 말을 배울 때 “고모, 연우가 그림 그렸다요.” 또는 “아까 인사 했다요.”하며 말끝에 ‘요’를 붙일 때마다 제 엄마가 바로 잡아주려고 애를 썼다. 난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게 귀여워 고쳐주고 싶은 생각은커녕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 그러나 TV에 나와서 우리나라를 ‘저희나라’라고 하거나, 자기 남편을 ‘저희 남편’이라고 하는 걸 보면 속이 탄다. 우리말, 우리글, 우리민족 등 낮출 대상이 아닌데도 낮추는 것 또한 존댓말이 지나친 탓이다.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경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상대에 대한 예우를 함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갖추게 된다.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도구이기에 아무렇게나 사용한다면 자신은 물론 상대의 품격까지 떨어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존대어를 적절히 쓰는 것이야말로 언어로 인격을 다듬는 일이며 세상을 반듯하게 꾸려가는 길이 될 것이다.△수필가 김춘자씨는 1998년 〈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꿈꾸는 달항아리〉 〈썰마의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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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7 23:02

안항(雁行)

손가락이 자꾸 아둔해 지고 어께가 시리다. 나는 앉은뱅이책상을 밀치고 보일러 눈금을 한 칸 높였다. 눈송이가 창 너머 맞은편 쓰레기 분리대에 소담하고, 박새 두 마리가 향나무가지 속으로 날아든다. 나는 한참동안 눈을 바라보다가 눈주름의 뜻 없는 물기를 까닭 없이 닦았다. 겨울방학이었다. 얼굴도 모른 독지가가 보내준 앉은뱅이책상을 챙겨 들었다. 눈은 내리고 버스는 빈 들을 달렸다. 다시 갈아 탄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들판을 무질러 후미진 마을을 거쳐 마을길을 돌고 멎다가 달리기를 반복했다. 군계(郡界)를 벗어난 막 버스가 눈보라 들판 어디쯤에서 벙거지 한 분을 태웠다. 맏형 또래였다. 버스는 해안 초입에 이르러 엔진이 멎고 하차하는 서넛 속에 나도 끼어 내렸다. 눈앞에 남짓 집으로 가는 길이 이십 여리 남짓 놓였다. 어쩐다. 벙거지가 선뜻 눈발 속으로 들어섰다. 주춤하다 나도 나섰다. 나는 고2였다. 산굽이를 돌아들자 눈은 멎고 구름 틈으로 쏟아지는 달빛 폭포를 가르며 기러기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등성을 넘었다. 형설 표 책상 아닌가.어찌 아세요.그게, 저벙거지가 책상을 들어주었다. 잿백이로 이사든 들녘 집 학생이든가.예에.할 마님은 아무개 댁이고.입이 얼어 대답이 쉽지 않는데 눈길은 몹시 팍팍하고, 춥고, 배가 고팠다. 손가락이 먹먹했으나 쓰러지면 안 된다.나도 소년 때 들녘의 꼴머슴이었다네. 육 ? 이오 전란 통에뜬금없이 6?25라니. 얼어붙은 머릿속이 새삼스레 오그라들었다. 넷째 고모가 들추어준 내 3살 때의 6?25는 몽둥이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궁했다던가. 안방 문짝이 박살나고 후려갈긴 간장독에서 검은 홍수가 쏟아지던 앞마당의 기억이 희미하다. 벙거지가 언 손을 후후 불었다.산토깽이가 마당으로 들었어. 그 해 겨울에.잡기는커녕 노마님이 시래기를 던져주었다 한다. 몽둥이패를 따라 나서는 집안 청년 몇을 만류하며 버선발로 고샅을 좇던 노마님이 선하다며 벙거지는 나를 보았다. 까막눈의 청년들은 그저 몰려다니며 패고 두들기는 모진 시국이었다고 한다. 행랑채 문구멍으로 숨어 듣던, 달빛 벙벙한 눈밭에 번진, 노마님의 맨 울음이 귀에 쟁쟁하다고도 했다. 벙거지는 산굽이 하나를 더 돌아야한다며 책상을 건네줬다. 지서 들리면 나를 찾더라고.매운 산바람 한 줄기가 더 이상은 말을 아끼라는 듯 검은 털벙거지를 벗길 뻔 했다. 언 달은 푸른 밤하늘 틈을 비집어 숨바꼭질을 하고 책상을 출썩이는 손가락은 감각이 없다. 윙윙 울던 전신주가 마지막으로 물러선 언덕배기 저만큼 낮은 흙담집 추녀 끝의 자부룩한 불빛 속에 시래기가 어른거린듯하다. 할머니의 기척인 모양이다.노마님의 먹물 깊은 큰 아드님이 내 까막눈을 틔워 줬네. 꼴머슴인 나를 아들처럼 대접했어, 사람은 평등하다며.벙거지가 헤어지며 남긴 끝말을 곱씹다가 자칫 미끄러질 뻔했다. 문득 서너 살인 나를 지게에 걸머지고 천자문을 외우던 멀고 희미한 스틸 한 컷이 휘적휘적 잔등으로 접어드는 벙거지의 뒷모습에 겹쳤다. 꼴을 배려 나서는 지게를 향해 업고 가라고 때를 쓰던 내가 보인다. 나는 잔등을 돌아드는 굽은 그 등을 향해 하마터면 성〔兄〕- 하고 부를 뻔했다. 반세기가 가까워지는 눈 오는 밤길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만 오면 아둔해지는 손가락을 주무르며 창밖을 넘겨본다. 눈보라가 아득하더니 어느새 어스름이 유리창을 넘어와 낡은 빠진 책상을 덮는다. 흐린 형설표를 덮어준다.△ 수필가 박영학씨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가람시조문학회장과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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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4 23:02

새 학기면 생각나는 책가방

텔레비전에 젊은 엄마가 나와 책가방이 십만원 넘는다니 너무한다고 말했다. 나는 젊은 엄마가 여태 까지 책가방이 십만원 넘는다는 걸 몰랐다니 오히려 그것이 놀랍다. 벌써 손자놈이 4학년과 3학년에 올라간다. 새해가 되었으니 당연히 올라갈 것이다. 헌데 손자가 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가방을 사줄까 하고 백화점에서 비싼 걸 사줄 형편도 못되는지라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손자가 원하는 캐릭터는 그래도 중간 정도라고 한다. 나는 가방을 사주는 대신 돈을 이체해주면서 며느리더러 가방 사는데 보태라고 했다.농촌에서 책가방 하나가 십만원이 넘는다고 하면 믿겠는가? 하지만 할미노릇은 해야겠고 재정은 부족하고 별수 없이 보태주는데 그쳤다. 나는 이미 삼년전에 가방이 십만원 넘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이들옷이나 장난감이나 무조건 사주는 대신 제 엄마한테 취향을 물어서 사주어야 한다. 물론 옷 같은 것은 절대 사주지 않고, 제철 과일을 정보화마을에서 배달시켜주는 것을 즐겨한다. 가방이나 필통은 아이들이 취향과 요즘 유행하는 선호도에 따라 달라진다.더구나 텔레비전에서는 십만원짜리가 아닌 최고가 64만원짜리 가방을 화면으로 비춘다. 거긴 40만원이 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64만원이면 근로자들의 한 달 월급이다. 어떤 아이들이 그런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씁쓸하다.예전의 우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없었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우리학교에서 가방 든 아이를 보지 못하였다. 중학교나 가야 가방을 사주었다. 우린 거의 보자기에 책을 말아서 허리에 두르고 다니거나 들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뛰어가다가 풀러져 내리던 책보에서 책과 필통 지우개가 주르륵 쏟아지기가 일쑤였다.어떤 아이들은 필통도 없었다. 언니 오빠들이 도시로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동생들의 선물은 비싼 지우개나, 필통을 사오는 것도 아주 큰 선물이었다. 진작부터 농촌의 아이들도 메이커의 문구를 사서 쓰고 있다. 내가 사는 면소지에는 유명 문구가 들어온 것이 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이다. 그것도 큰놈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다. 그러니까 26년 전이다.산골에서 전주까지 완행버스가 다녔기 때문에 전주 풍남문 근처에 문구 도매점에 가서 노트나 지우개 연필 등을 여러 권, 여러 타스로 사다 두고 주었다. 메이커의 문구는 비싸기만 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는 가방도 내가 직접 사다주는 것은 끝이 났다. 제각기 알아서 사야했기 때문에 돈만 주면 되는 것이엇다. 그렇게 문구점과 멀어졌다가 손자 녀석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기에 가방을 사려다가 비싼 가방 값에 놀라 나자빠졌다. 새 학기가 다가오면 방송에서도 너무 비싸다고 하면서 특집으로 꾸민다. 비싼 가방을 화면으로 비추면서 말이다.우리들의 옛날은 책보를 허리에 매달고 산으로 들로 논두렁으로 뛰어다니던 날도 있었다. 봄이면 나물을 캐서 책보에 같이 싸가지고 가기도 했고 돌아보니 50년 전 일이다. 내가 아이들을 초등학교 보낼 때만 해도 손으로 돌리는 연필깎기가 아주 비싼 값이었다. 그거면 최고였다.책가방들이 이젠 고급화 되다가 사치품이 되어간다. 어른들이 명품가방을 선호하듯이 아이들이 명품 책가방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누구 탓인가? 그 부모들 탓이다. 서로 내 아이만은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시기심 때문이다.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녔던 아이들은 지금은 거의 5,60대 어른이 되어서 늙어간다.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늙어가면서는 무얼 추억하며 살까? 문득 앞으로 50년 후가 궁금해진다.△수필가 김여화씨는 수필집 〈아낙에 핀 물망초〉 〈행복의 언덕에서〉 등을 냈다. 임실문협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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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7 23:02

버팀목 같은 친구

친구란 멀리 떨어져 살아도 마음에 항상 담겨 있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친구는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수놓는 것이나 같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있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더 행복하다. 내 곁에 친구는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에 가깝고 편안한 존재 인지 또는 노력하고 있는지 더듬어 보아진다. 고의를 넘기면서 친구란 의미를 생각하니 나를 지켜준 그 동안의 친구들이 고맙고 삶의 버팀목으로 여겨진다. 농촌 마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앞 내가에서 발가벗은 몸으로 물고기를 손안에 잡으면 팔딱거리는 모습을 보며 좋아해 주던 그때의 친구가 아련히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내 인생의 잔뿌리로 자양분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학창시절 여름 햇볕 아래 비포장 길을 걸었다. 얼굴과 등에 흐르는 땀방울을 없애려고 길가 나무 밑이나 처마 밑 그늘에 앉아 계절의 풍광 이야기로 피곤함을 풀어주던 길동무가 잊혀 지지 않고 있다. 학년이 바뀌어 새 친구가 옆 자리에 다가오면 반갑고 친해지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여 도움이 되었다. 그 친구와 경쟁하듯 외웠던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가 매스컴에서 시사 정보나 기상예보가 있으면 더듬거리지 않고 이해할 수 있어 고마울 때가 있다. 그 친구들이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만나면 학창시절의 옛 추억이 떠오르고 그 동안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여 민주 역사 발전에 기여해준 것이 자랑으로 내 인생의 튼튼한 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인간은 육체를 가진 이상 애정이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우정이다.직장에 근무할 때도 아침 밝은 인상으로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아 하루 일과를 윤기 나도록 도와준 동료가 있어 퇴직 후에도 빛 고운 열매로 반짝이고 있다. 근무지를 옮겨 다니면 혹시나 서로가 무관심 속에 세월을 보낼까 걱정했지만 그 시절 같은 것을 함께 즐기며 업무를 도와준 동료가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 봉사의 정신이 남아있어 지금도 젊음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다. 노후생활은 어린학창시절부터 직장생활 가정생활이 종합된 제2의 인생으로 글로벌 시대에 적응하며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이 인생이 끝나면 버팀목 같은 친구는 잎이 모두 떨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참다운 우정은 삶의 마지막 날까지 싱싱하고 젊음으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하면 아름다움에 빠져 옛 친구의 모습과 추억이 되살아나 자연의 설레 임 속에 빠진다. 친구는 언제나 은은한 향기로 몸과 마음을 적시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 갈 때 행복해 진다. 내가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나의 존재와 생활은 무의미한 가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친구가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고 샘물이 말라버린 샘터와 같다. 친구는 자주 만나지 않아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생에 빛과 향기를 주고 가치와 희망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친구다. 나의 행복 조건 중에 버팀목 같은 친구가 있어 애정의 향기를 발산할 때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 믿어진다.△ 수필가 황춘택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현재 '행촌수필'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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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0 23:02

겨울 속의 새봄

겨울 속에서 봄을 캔다. 지난번의 혹독한 추위와 폭설의 자취가 산그늘에 희끗희끗 남아 있다. 화분 갈이를 하려고 흙을 담으러 내려왔다가 밭두둑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냉이를 발견했다. 두껍게 쌓였던 눈 속에서도 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흙을 털자 뿌리는 하얀 맨살을 드러냈다. 추위를 이겨낸 냉이가 향긋한 봄 냄새를 풍긴다.눈이 쌓이고 땅이 얼게 되면 모두 출퇴근 차량 운행에 긴장해야 한다. 도시인들은 단 하루도 백설 속에서 마음을 비울 시간조차 없다. 길이 막혀서 소동이 일고 교통사고가 여기저기에서 터지기 일쑤다. 그래도, 그리움의 정령들이 춤추는 듯 눈 내리는 하늘을 볼 때 아! 하는 그 첫 느낌은 놓치지 말일이다.물탱크에서 내려오던 호스가 얼었었다. 폭설이 연이어 내렸던 그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은 옛사람의 고향이었다. 날이 풀어져야 호스는 녹았다. 마당 가운데 있던 수도에서 물을 받아다 집안의 물독에 담아두고 사용해야 했다. 춥고 불편했던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그 순백의 향연을 어찌 생활의 불편 때문에 투덜대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보는 눈꽃들의 세상 나들이가 아닌가. 기쁘게 축제를 벌이자고 눈발은 나를 꼬드겼다. 생활의 번거로움과 분주함도 이 고요한 순백의 평화에 스르르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백설은 순백의 나라를 연출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던 백설의 하강이었던가. 그래서 내려올 때 그토록 살풀이하듯 윤무(輪舞)를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쌓인 눈은 사랑의 덩어리였다. 사랑으로 하나 되고 사랑의 힘을 확인한 적설(積雪)은 새 삶을 꿈꾼다. 가을이면 돌아가야 할 사연을 안고 왔던 푸른 잎처럼 적설도 본래로 돌아가야 하리라. 햇볕을 받아 녹으면 땅을 적시고 땅속으로 스며들어 생명수로 흘러야 한다. 만나는 풍광을 감격의 눈물로 맞이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며 숲의 정령들과의 은밀한 랑데부도 즐기리라. 시냇물이 되어 멋진 바위와도 만나고, 청아하게 흐르는 소리를 내며 달빛을 적시리라. 드디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어 사공의 뱃노래에 한 숨 돌리기도 하겠지. 때로는 벼랑에서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가 되어 아름다운 곡예(曲藝)도 펼친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물은 귀향가(歸鄕 歌)를 읊조리리라. 거실 가득 들어온 햇살이 포근하다. 잠시의 향연은 언제나 찬란했다. 묵묵히 기다렸던 태양의 따사로움은 또 얼마나 고마운가. 눈의 잔치는 뒤풀이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그렇다. 축제는 늘 그렇게 왔다 가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육신으로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갈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은 엄연한 생명의 순환법칙까지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한다. 얼마 전, 신문이나 TV 뉴스에서는 인간복제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질서를 잃어 가면서 눈앞의 시급한 문제들만 해결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다. 인간성의 회복이 시급한 현대에 더욱 타락의 길을 재촉하는 과학기술이 된다면 인류의 발전을 꾀하는 과학이 앞으로 큰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연일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아! 이 적설이 녹지 않으면 어쩌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태어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상해 보라. 순리대로 순환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순리에 역행하려는 인간만이 괴로울 뿐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을 회복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리라. 생명나무를 찾을 수 있는 밝은 혜안이 필요할 것 같다. 육신으로는 단 한 번뿐인 생이다. 천수를 다할 때까지 서로에게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무덤으로 돌아갈 때 생의 찬미를 부르며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백설의 귀향(歸鄕)처럼.잔설 속에서 캐낸 냉잇국이 새봄의 서곡이 되어 내 안에서 감돌아 흐른다.*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바람의 커튼〉 〈나도 샤갈처럼 미친(及) 글을 쓰고 싶다〉 〈명창정궤를 위하여〉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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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3 23:02

흰지팡이 여행

흰 지팡이가 눈에 들어온다. 시각장애가 있는 내 아들 이삭이의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 갈 때 흰 지팡이를 가방에 꼭 넣어 가지고 다닌다. 나는 가방에 든 흰 지팡이를 볼 때마다 늘 마음이 쓰인다. 언젠가는 저 흰 지팡이를 아이의 손에 들게 하여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삭이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사고 전, 여섯 해에 대한 기억이 가끔 가물거린다. 그때도 첫아이였던 아이를 혼자 떼어놓는 일은 초보엄마인 내게 참으로 힘든 과제였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유치원에서 여름 캠프 신청서를 보내왔다. 난생 처음 1박2일 동안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불안하여 신청서에 서명을 하지 못하고 며칠을 망설였다. 캠프 당일 날, 버스에 올라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동그란 두 눈동자와 마주쳤다. 불안해하는 내 마음을 혹여 눈치라도 챈 것일까?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생긋 웃더니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다음날 캠프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하러 나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개선장군처럼 내리는 아이들 틈에 이삭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이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어 정말 고마워. 이제 너를 믿을게.그날 이후로 늘 잡고 다니던 아이의 손을 조금씩 놓기로 작정했다. 그랬다. 비로소 나는 아이가 세상과 더 가까워지고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엄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 교통사고로 시각을 잃은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반학교에 갈 수가 없어 익산에 있는 전북 맹아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이의 가방 속에서 흰 지팡이를 처음 발견하던 날, 나는 가슴이 탁 막히고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전래동화 효녀심청에서 지팡이를 들고 구부정하게 걷는 심청이 아버지의 측은한 모습마저 떠올라 우울하기만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학교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교감 선생님을 만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행훈련을 하는 이삭이의 모습을 찍은 핸드폰 동영상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익숙한 학교공간에서만 지팡이로 보행을 하고 다닐 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 달리 아이는 위험한 차가 쌩쌩 다니는 길옆을 걷고 있었다. 그것도 오로지 지팡이 하나만을 의지한 채. 하지만 아이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려는 듯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아이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조용히 익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엄마인 내 마음이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흰 지팡이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지체장애인이나 노인의 보행에 쓰이고 있는 지팡이와 다르게 시각장애인만이 흰색으로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이 지팡이를 들고 걸으면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알고 비장애인들도 그들을 돕거나 배려할 수 있는 것이다. 흰 지팡이를 든 내 아이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아야겠다. 내 아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에게 흰 지팡이의 의미를 알려야겠다. 내가 언제까지나 지팡이를 든 아이의 뒤를 계속 따라 다닐 순 없기에. 과연 엄마의 손을 놓고 길을 떠나는 내 아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다보며 흰 지팡이 여행을 시작한 아이를 위해 정성과 사랑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수필가 노서운씨는 군산 이삭 어린이집 원장, 군산대 평생교육원 전담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상처와 함께 자라는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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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7 23:02

재탕(再湯)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전날 밤새도록 달이고 짜낸 닭발목과 쇠물팍을 큰 용기에 넣고 물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본 일이 없어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버리기가 아까워 재탕을 해본단다. 그러면서 우족을 재탕할 때처럼 불 위에 올려놓고 달이고 있었다. 예부터 전라도 지역에서는 쇠무릎지기를 쇠물팍이라 부르고, 쇠물팍감주는 여인들이 무릎이 아플 때 특효가 있다고 전해져 왔다. 그래서 아내도 내가 가을에 캐다가 말린 쇠물팍으로 가끔 감주를 해 복용했다. 그러나 뇌졸중증세로 한번 의식을 잃은 후로는 항상 입맛이 없다면서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아, 감주를 끌일 때 닭발목을 넣으면 부족한 영양보충이 될 거라는 생각에 닭발목을 사용했다. 벼멸구 모양과 비슷한 쇠물팍의 익은 이삭은 사람 옷에 더덕더덕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아, 서서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야 한다. 쇠물팍이 사람 왕래가 잦은 곳에서만 집단으로 발견되는 이유다. 나는 늦가을 김장이 끝나면 길가나 텅 빈 밭둑에서 쇠물팍을 캔다. 채소가 심겨져 있는 밭둑에서 캐려면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김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실기했다. 갑자기 몰려오는 폭설과 한파 때문에 땅이 얼고 추워서 캘 수 없었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잔득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3년 전 봄부터 나는 풀을 만지면 온몸에 이상이 생겼다. 두릅과 고사리를 꺾으러 다녀온 뒤부터 생긴 일이었는데 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났다. 노쇠 현상으로 피부가 약해진데다 풀독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고, 주사를 맞으며 처방해준 약을 발라야 했다. 5월만 되면 풀독 알레르기 때문에 연중행사처럼 피부과에 다녔다. 그때부터 아내는 내가 쇠물팍을 캐러 다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물리치료를 위해 외출한 틈을 타, 나는 배낭 속에 호미와 전정가위만을 집어넣고 길을 나섰다. 가을에 쇠물팍의 대는 갈색으로 변하고, 마디는 상처로 피가 난 소의 무릎처럼 굵고 붉었다. 그런데 이상기후로 늦게까지 파란 잎을 달고 버티던 쇠물팍이 갑자기 쏟아진 첫눈에 그냥 고꾸라져버렸다. 주위에 넘어져 있는 쪽이나 도깨비바늘의 대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평소 산책을 하면서 쇠물팍을 눈여겨 두었기에 망정이지, 이상 기후 때문에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을 번했다. 쇠물팍은 다년생이기 때문에 줄기가 큰 것을 캐면 뿌리도 굵어 캐기가 힘들었지만, 큰 뿌리를 캐낼 때의 재미도 쏠쏠했다. 큰 뿌리일수록 뿌리 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하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손질을 해서 물이 빠지도록 소쿠리에 담아놓았다. 늦게 돌아온 아내는 상상도 못한 쇠물팍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속으로는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밤이 되자 내 몸에는 이상증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가 가려웠다. 손가락으로 긁어서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해졌다. 나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비치한 피부약을 아내 몰래 복용하고 참으며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약의 효과 때문인지 어려움 없이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제 밤에 복용한 것이 피부약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확인한 결과 내가 복용한 것은 기침 때문에 사다 놓은 감기약이었다. 피부약과 감기약을 같은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눈에 뜨이는 대로 복용해서 생긴 어이없는 해프닝이었지만, 여하튼 감기약을 복용하고 피부질환이 깨끗해졌으니 분명히 위약효과(placebo effect)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배꼽을 쥐었다.다음날 나는 재래시장으로 가서 닭발목 5kg을 사왔다. 아내는 대추와 생강 등 몇 가지 첨가제를 넣고 밤새껏 고운 뒤 짜내더니 다시 물을 붓고 재탕을 했다. 그 재탕한 추출물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싱글벙글했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원탕과 다름이 없었다. 원탕은 냉장고에 보관하고 재탕부터 복용하겠다고 말하는 아내의 태도가 넉넉해 보였다. 날씨관계도 있었지만 풀독 알레르기를 무릅쓰고 캐온 쇠물팍을 소중히 여기려는 아내의 정성어린 마음이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고 아쉬워하며 살 수도 없는 일이지만, 자기의 과거를 망각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내는 나의 지난날의 소중한 추억을 뒤적거리고 불을 지피며 재탕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필가 이희근씨는 2009년 계간 '문학사랑'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아름다운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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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0 23:02

김치 소통

요즘은 누가 외식을 하자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갓 버무린 김장 김치에 뜨끈뜨끈한 밥만 있으면 만족스런 식탁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선 해마다 겨울 입구에 들면 김장도 작은 축제 같다. 젊은이는 드물고 노인들이 많은 마을이지만, 이때만큼은 유독 활기가 넘친다. 뒷짐 지고 한담이나 나누던 노인들도 적극적으로 합세한다. 트럭에서 배추를 내릴 때부터 골목이 시끄럽다. 올해는 배추 값이 아주 싸다는 둥, 운봉까지 가서 배추를 가져왔더니 배추 값보다 기름 값이 더 나간다는 둥. 잠시만 바깥에 나가도 오늘은 어떤 집에서 김장을 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어제는 앞집, 오늘은 옆집.이 즈음이면 택배 차량도 골목에 자주 보인다. 어머니들의 손맛이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웃집에 맛보라며 두어 포기씩 배달하는 일은 주로 남자들 몫이다. 쌀집 통장님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김치를 들고 오신다.맛 있을랑가 모르겄어, 잉? 쪼깨 짭짤헌 것도 같은디.앞집 개인택시 양반도 이날엔 직접 팔을 걷고 나선다. 일의 절차며 방법을 터득한 듯 확신에 찬 목소리가 담을 넘어온다. 앞집에서 가져온 김치를 보면서 고마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느낀다. 주인양반 목소리만큼 우렁찬 포기김치가 커다란 통에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담겨 있다. 작년에도 올해에도 그랬다. 무어 특별히 잘 해 드린 것도 없고, 되레 사람들 왕래와 연주 연습이 있을 때마다 한바탕씩 소란을 피워 미안한 마음뿐인데. 더욱이 잘 담근 김치를 그저 듬뿍 주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찬 그분의 표정! 작년엔 우리 집 감나무에서 딴 대봉시를 그 통에 가득 담아드렸다. 그런데 올해엔 감나무를 옮겼더니 말라 죽어 버렸다. 유난히 크고 달다고 이웃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감이었건만. 이 맛있는 김치 대신 드릴 귀한 게 뭐가 있나하다가 생각해 낸 게 그래 내가 직접 김장을 해 보자. 그래서 내가 담근 김치로 보답하자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나이 들어 난생 처음 김장을 해 보았다. 직장 생활로 버겁다느니, 몸이 아프다느니, 식구가 단출하다느니 해서 굳이 고생해가면서 김장을 해야 하느냐며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어머니 생전엔 당신께서, 그 후부터는 큰언니가 아주 맛있는 김치를 늘 보급해 주어 따로 김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 번도 안 해본 김장을 내가 어찌 순순히 할 수 있겠는가? 믿는 바가 있었다. 언니가 김장할 때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다. 이웃들의 김장 일이 한참이면, 잠시 대문 밖을 나갔던 남편이 얼굴이 상기되어 들어올 때가 있다. 길 건너 집에서 김장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동네 남자들끼리 막걸리 한 잔 하고 왔다고 말한다. 갈무리 할 일도 많고 어수선할 텐데, 그 와중에서도 조촐하나마 가장 맛난 것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지극함이라니.우연하게도 우리 동네에 예술인들이 많이 살아서 간간이 모이곤 한다. 지난주에는 가장 연배가 있는 강 선생님이 당신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김장했으니까. 걍 거그다 밥이나 먹자고.점심을 맛있게 먹고 돌아올 때 우리들 손에 또 선물이 쥐어졌다. 김치 두어 포기와 선생님네 논에서 지어왔다는 쌀 한 봉지씩. 뭔가 굉장한 선물을 받은 듯 가슴이 뿌듯했다.수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한 끼도 거르지 않고 먹어 온 김치! 얼핏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제각기 맛이 다르다.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맛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밥상을 오래 지켜 왔다. 비결은, 정성과 사랑이었다. 그것을 만드는 손길에 어린 마음이 김치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으리라.김장 철. 여러 집에서 가져온 김치로 행복한 식탁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치나 사회 문화 판에서 뭐 좀 한다는 주도층들, 그들에게 김치를 담그는 주부들만큼의 진심과 정성만 있어도, 우리들 눈에 혐오스러운 존재로 비쳐지진 않을 것이라고.* 수필가 겸 소설가인 김저운 씨는 중등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요즘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에세이집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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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3 23:02

명퇴복 유감

저녁 먹을 즈음, 대리운전 문자 3통에 애경사를 알리는 문자도 있다. 주말 산행의 확인문자까지. 피할 길 없다. 산행에 동참한다. 나오니 좋긴 좋다. 고추에 된장, 멸치에 고추장 안주로 마시는 막걸리는 정상 확인의 묘한 성취감이 있다. 잔 들고 바라보니, 어라 부부동반 선후배들의 아웃도어에는 안주 색깔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아들이 입다 만 내 북면(노스페이스)차림에 비해 언제부터인지 거의 패션쇼다. 친구가 걸친 고상한 컬러에 세련된 디자인의 저 정도 바람막이는 거의 동남아 3박 4일 여행 깜인데. 바람막이로 대표되는 아웃도어 상의는 목까지 올라오는 딱단추를 닫으면 눈비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소위 한계에 도전하는 옷들이다. 히말라야에서 입는다는 이건 구김도 안 간다. 오래 입어도 세탁할 일이 없다. 하여, 머시마부터 할배까지 안 입은 사람이 없다. 하긴 아웃도어가 경제를 살린다니, 내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옷은 연령층을 넘어 그 사람의 품성과 능력을 나타낸다. 게으른 학생은 입고 잔 추리닝 그대로 학교에 가고, 날씬한 여성은 아디다스 차림으로 백화점에 가도 된다. 그럼 아저씨들은? 등산복 바지차림으로 직장에 간다. 뻔뻔스럽다. 모두 편함을 추구하면서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는 옷차림이다. 이제 산타할아버지 의상도 아웃도어로 바뀐 광고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발가락 양말과 함께 개량한복을 피한다. 나이 들어 보이니까. 아니, 목이 쑥 빠지거나 맑고 깨끗한 심성이 받쳐줘야 되는 옷이니까. 양복은 거추장스럽고, 뭘 입나 고민이다. 청바지를 간신히 소화해 운동화를 신자니 키가 안 된다. 그렇다고 키높이 깔창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컨버스 차림으로는 옷태가 안 난다. 한옥마을이나 영화의 거리를 채우는 젊은 친구들의 야상재킷은 자신이 없고 그러다보니 나 역시 아웃도어차림이 제일 만만하다. 잘생긴 후배가 턱선이 무너지면 고소하다. 쪼잔한 남자의 질투다. 더한 것은 김광석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친구가 주야장천 바람막이를 입고 다닌다는 것. 그래라. 다행이다. 락을 버리고 팝을 버리고 노래방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노래 뒤 트로트를 부르면서 우리는 아웃도어차림으로 만나고 있다.이런이런, 나이 먹으면 중후한 신사가 될 줄 알았다. 근데, 이게 뭔가. 다행히 양복 권하는 사회는 아니어서 넥타이는 안 매도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데. 그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선배 명퇴자들은 하나같이 아웃도어를 입는다. 울긋불긋한 차림에 비닐봉다리도 스스럼없이 막 들고 다닌다. 이 남자들 모두 도련님이고 엄친아인 시절이 있었을 텐데. 친구들아! 이번 동창들 송년회에 아웃도어는 제발 입고 나오지 말라. 당할 때 당할망정 명퇴복은 벗어버리자. 담배 사러 갈 때와 모악산 정상 막걸리 마시러 갈 때 외에는 입지 말도록 하자. 야상재킷으로 밀리터리룩을 소화하는 조영남 아저씨 차림은 못해도, 조금 불편한 옷차림으로 모이자. 어떻게? 후트티는 좀 그렇고 코트에 머플러다. 가방을 들으면 더 좋다. 거기 꼭 넣을 게 없다면 새해 달력이라도 몇 점 들고 와서 나누어 주시라. 아 참, 총무는 아웃도어 금지라고 문자에 첨언하라.* 신귀백씨는 영화평론가. 평론집 〈영화사용법〉이 있다. 고 박배엽 시인의 삶을 조명한 장편 다큐 '미안해 전해줘'감독으로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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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6 23:02

괭이밥

초대장도 없이 방문한 손님이다. 반기는 이 없어도 태연하다.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틈만 보이면 옆자리에 걸터앉아 팔을 늘어뜨린다. 환영받지 못한 셋방살이다. 다른 화초들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모셔놓고 제때 물을 주며 보살펴 주다가도 잠깐의 실수로 생을 마감하는데, 유독 괭이밥은 신경을 써주지 않아도 자기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바람을 좋아하는 난의 경우는 창문 곁에 반그늘을 지어주어야 하고, 기왓장에 심어진 바위손은 음침한 그늘에 두고 항상 물이 마르지 않게 관리해야한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도 한해 겨울을 지나면 이별을 고하는 화초가 있다. 작년 겨울에도 20년 넘게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나누어주던 문주란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꽃대를 올려 하얀 꽃을 피워놓고 자랑스러워 할 때면 거실과 안방까지 향기가 그윽했다. 그 꽃향기가 그립다. 말라비틀어진 잎과 뿌리를 바라보며 서러운 작별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어느새 그 자리에 괭이밥이 터를 잡았다. 심지도 않은 풀이 제멋대로 화분을 점령하니 자꾸만 문주란을 죽인 원흉으로 생각되어 진다. 억울하다고 항변하겠지만 애지중지 아끼던 문주란을 생각하면 그 빈자리를 점령한 괭이밥이 곱지만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괭이밥이 풀이 아닌 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 화분 받침대가 1m는 족히 되는데 줄기 몇 가닥을 바닥에 축축 늘어뜨렸다. 그 모양이 아름다워 그냥 두었다. 일부러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른 것도 아닌데 분재작품 같아 흡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줄기에 노랑꽃이 피었다. 그 줄기에서 꽃까지 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한낱 잡초로만 생각했었는데 횡재를 한 기분이다. 언제나 화초 곁에 자리를 잡고, 꽃나무와 뒤엉켜서 꽃잎을 해칠 것 같아 뽑아버려도 또 생기는 잡초였다. 그런 풀에서 예쁜 꽃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창문을 여니 갈바람이 햇볕을 몰고 왔다. 물뿌리개로 목을 축여주니 꽃 한 송이가 나를 쳐다보다가 숨어버린다. 향기는 미미하나 빛깔이 곱다. 이른 봄날 초가집마당에서 어미닭을 쫒아가는 노란병아리를 닮은 색이다. 만져보고 싶어도 하도 작고 가냘퍼서 얼른 손을 내밀어 잡아 볼 수 없다. 길섶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풀이라서 귀히 여기지 않았고, 그 꽃의 아름다움도 눈에 띄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꽃잎이 아기자기하게 보인다. 다섯 꽃잎 속에 꽃술도 있다. 어느 방향으로도 치우치 않고 제 위치에 당당하게 자리했다. 이렇게 작은 꽃도 조형미를 갖추고 한 세상을 살고 있다. 작아서 더욱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또 뽑힐까봐 미리 겁을 먹고 살짝 숨는 모습은 마치 촌색시를 닮았다. 이렇게 한낮에만 예쁘게 피는 꽃인 줄을 예전에는 몰랐었다. 갑자기 괭이밥이 고향처럼 친숙하게 다가온다. 지난날 어머니는 내 손톱에 봉숭아꽃을 피우셨다. 봉숭아 꽃잎과 담장 밑의 괭이밥을 뜯어다가 백반을 넣고 막자로 꽁꽁 찧어 햇볕에 거들거들 말려놓았다. 그것을 어슴막에 아주까리 잎에 싸서 손가락에 칭칭 감아주셨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나면 그다음 날 아침에 손톱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꽃잎처럼 예뻤다. 매니큐어가 생기기 전 소녀들의 손톱 미용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할 때 사용되었고, 남에게 도움을 주고도 자신의 공덕을 들어내지 않고 봉숭아꽃에 묻혀 있을 줄 아는 겸손함이 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인내하며 살다보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이가 있어 인정받는 날이 온다는 믿음을 주는 꽃이 괭이밥이다. v:* {behavior:url(#default#vml);}o:* {behavior:url(#default#vml);}w:* {behavior:url(#default#vml);}.shape {behavior:url(#default#vml);}●2004년 수필과비평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 삶의 빛 사랑의 숨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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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2 23:02

가을 색에 취한 주정(酒酊)

바람은 갈잎을 좋아하나보다.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며 갈잎을 희롱한다. 갈잎도 속내는 싫지 않은 듯 다소곳한 흔들림으로 마음을 대신한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 흘김과 은근한 추파에 몸이 달아오른 바람은 몸짓을 키우고 힘을 더 한다. 사내다운 몸짓이다. 가을바람의 적극적인 구애에 갈잎이 넘어 갔나보다. 열정적으로 휘감긴 두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내 땅을 향해 서로 껴안은 몸을 비틀며 떨어진다. 사랑의 환희에 정신마저 혼미해진 탓인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날린다. 낙엽이 되어 비처럼 내리고 있다. 오늘 낮에는 같이 수필을 공부하는 문우들과 순창의 강천산으로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맨발로 걷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은 흙길을 걸어서 구장군폭포까지 갔었다. 가는 길 곳곳마다 갈잎과 가을바람의 사랑이 낙엽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초록의 이파리가 갈색 옷으로 갈아입더니 사랑에 눈이 멀어 버렸나보다. 연두색이던 새봄부터 숱하게 이어진 유혹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정절은 어디에 깊이 묻어두고 한순간에 마음을 열어 몸까지 주어 버린 것이다. 단한번의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던져버리는 갈잎의 열정이 내게는 있었던가? 할 수만 있다면 해보고 싶다. 죽어도 원이 없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바람과 갈잎의 사랑이 노란색, 빨간색, 연갈색의 낙엽비가 되어 내리는 그 숲길은 마술사 같았다. 오가는 모든 사람을 글쟁이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눈을 돌려 보이는 것마다 좋은 글귀가 되어 머릿속을 달음질하니 어찌 글쟁이가 되지 않을 수 있으랴. 앞서 걷는 중년의 아줌마는 시인이 되었을 테고 잽싼 걸음으로 우리를 재촉하는 P문우는 이미 수필 한편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생각은 어김없이 엉뚱한 곳으로 치닫는다. 갈잎의 사랑을 얻어낸 저 바람이 혹시 봄에 꽃잎을 유혹했던 그 바람은 아니겠지. 빨간 단풍이 산언저리 나무들 사이에 크고 작은 모양으로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색이 아주 고왔다. 수분이 넉넉하여 주름하나 없는 단풍잎이 생기 넘치는 처녀의 피부처럼 탱탱하였다. 물이 말라 잎이 타버린 단풍이 간혹 보여 비교되니 그 자태와 색깔이 더욱 곱고 두드러졌다. 그런데 단풍나무가 싫어졌다. 산의 중턱이나 높은 자리, 있어야 할 곳에는 별로 없고 눈에 잘 띄는 길가에 자리 잡고서 저 혼자만 잘났다며 뽐내는 거들먹거림이 맥없이 미워진 까닭이다. 눈을 들어 올려 보니 산에는 노란색, 연갈색이 단풍 색보다 더 짙었다. 어렵고 힘든 자리는 갈잎나무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등산로 가장자리나 주변에도 단풍나무보다 그들이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단풍나무를 호위하고 우러르며 단풍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장미꽃다발은 안개꽃에 싸여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장미 한 송이만으로는 외롭고 볼품없지만 안개꽃 몇 줄만 보태놓으면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게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장미꽃다발로 바뀐다. 갈잎나무들은 장미꽃다발의 안개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하고 뽐내기는 쉽다. 보이지 않게 남을 위해 희생하며 주변을 돋보이게 하는 삶은 쉽지도 않고 빛도 나지 않는다. 사랑도 주기보다는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고 돋보이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내 모습이 그랬다. 스스로 자랑스럽기까지도 했었다. 특히 수필을 배우며 돌아본 내 인생은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잘살아온 인생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면이 나의 깊은 속마음이나 진정성까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어두운 그림자만 남기는 경우가 많았음을 깨닫고 뉘우칠 때가 많았다. 깨우치고, 후회할 때마다 한걸음 한걸음씩 본래의 내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리라. 수필은 진정한 나를 찾아줄 것이다. 수필과 여정을 같이하며 나를 찾아 떠난 끝없는 길 위에서 나는 갈잎나무를 닮고 싶다. 갈잎이고 싶다.*수필가 윤철씨는 〈대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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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5 23:02

오래된 자전거

인간의 삶은 참 이상한 것이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냉장고 속에 보관하였다가 꺼내어도 금방 싱싱한 생선이기를 바라지 케케묵어 냄새나는 청국장 같은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선은 적당히 말려가지고 구워서 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어야 제 맛이듯, 삶 또한 그렇게 제대로 손을 보아가며 살기를 기대한다.오래된 자전거 한 대를 가지고 있다. 가까운 거리는 승용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좋아서다. 자전거는 주로 퇴근 후 운동할 때 사용한다. 홀쭉하고 날렵한 안장과 기름칠한 페달이 언제이고 달릴 준비를 하고서. 자전거는 내가 바쁘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내 다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발이 되어 준다. 시장에 가서 무와 배추를 사올 때도 그랬다. 어떤 땐 짐칸에서 생선냄새가 역겹게 나는데도 코를 옆으로 돌리거나 싫어하지 않고 말없이 나의 분신이 되어 내 삶처럼 군소리를 하지 않고 늘 함께한다.어느 날 점심 약속이 있어 자전거를 음식점 마당 귀퉁이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밖을 나와 주위를 살펴보니 허전했다. 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친구와 함께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찾기 시작했다. 음식점 주변을 돌아다니고, 주변 아파트를 기웃거렸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 누워 잠자던 집사람이 왜 잠을 자지 않고 뒤척이느냐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아무튼 오늘은 참 가슴 벌떡거리는 하루였다.물건과의 인연이란 쉽게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수년 동안 내 분신처럼 다리가 되어주고 발이 되어 주었던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며, 인간이란 정이 들면 오래가는 거. 물건 또한 내 손때가 묻고 지문이 묻어있는 인연을 생각하니 더욱 정이 느껴졌다. 그와의 인연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수년 동안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갯길을 달린 적도 있었고, 어떤 땐 돌멩이와 부딪쳐 개울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기어 나오던 생각도 났다.그러던 어느 날, 천변에서 중고 자전거 한 대가 물속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전거는 안장과 핸들이 뽑혀 휑하게 비어 머리가 없는 흉악한 몰골이었다. 타이어 한쪽은 찢어져 볼품없고 바람이 빠져있어도 내 것임이 틀림없었다. 인간도 타이어처럼 바람이 빠져 있으면 천시를 받는다. 물건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때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버리고 갈까. 몇 번 생각했다. 아니다. 그래도 나와 정이 들었던 세월을 생각하여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냇가에 앉아 병든 몸을 씻듯 깨끗이 닦아 어깨에 메고 가서 수리를 맡겼다. 수리하는 곳에서는 이젠 그만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새로운 부속을 넣고 기름칠하여 안장을 끼워 넣으니 반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안장을 툭툭 때리며 인사를 했다. 정말 겁나게 멋지고 좋아보였다. 오래간만에 천변을 신나게 달렸다. 그날 밤 깊은 잠이 들었다.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오래 된 인연을 쉽게 버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렇지만 사람과 물건과의 인연, 그 인연은 인간의 삶처럼 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번 인연을 맺게 되면 소중하고 오래간다는 것을.※수필가 정곤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현재 '덕진문학회'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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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8 23:02

아내는 베트남 여자

"베트남에서 왔나요? 열심히 살아요." 얼마 전 남원 고향에 가는 길에 오수 시장에서 노점상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금번에도 오수 장에 들렀더니 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내와 나를 힐금힐금 쳐다봤다. 만만한 것이 홍어×이라고 이제는 개나 걸이나 베트남 여자를 꿰차고 산다고 그들은 상상했나 보다.우리 집이 전북대학교와 가까워 우리 부부는 근 10여 년 넘게 외국인들에게 방을 임대해 주고 그들과 함께 생활해 왔다. 그들은 석·박사 학위 취득이나 교환교수로 온 사람들 이었다. 주로 인도, 이집트, 네팔, 인도네시아에서 왔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고생을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자기 나라에 가면 학계에서 활동하거나 정부의 요직을 맡을 그 나라의 엘리트들이다. 인도에서 왔던 나오만 교수는 한국에 오기 전에 친형이 인도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고 했다. 아내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어려울 때 우리가 잘 해주어야 6?25처럼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임대료를 한 번도 올려 받지 않았다. 바다를 보지 못한 외국인의 고향 부모가 방문하면 바닷가에 모시고 가서 수산물 요리도 대접했다. 산모를 위한 병원안내와 뒷바라지를 하고, 때맞게 예방접종을 위해 아내는 산모와 아이를 태우고 보건소에 다녔다. 이처럼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오래 생활하다 보니 아내의 외모가 베트남 여자를 닮아 가는가 보다.요즈음 우리 주변에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우리는 단순히 이들을 소외계층으로 보고 정부 지원이나 기대하는 부류로 단정지어 버리지는 아닌지, 우리의 무역 교역량이 세계 10위권에 가까웠다고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우려된다. 우리 고장 출신 김왕자 씨 사건으로 금강산 방문이 중지되기 전, 금강산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다. 남한에서 온 여성 몇몇이 북한 안내여성들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하는 말, 입맛 없어 아침 못 먹겠단다. 그때 북한은 식량사정이 몹시 어려울 때였다. 가난할 수록 자존심은 더 강해진다고 한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으면 적대감만 쌓일 뿐이다. 우리가 물건 하나를 구입할 때도 그 회사의 신용도를 고려하여 구입 결정을 하듯이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좋은 국민감정이 형성되고 국가간에 믿음이 있어야 상호 교류가 활발해진다. 한 국가의 좋은 제도와 사회적 신뢰가 그 나라의 훌륭한 사회간접자본이고 국제사회에서 신뢰는 무한 경쟁의 글로벌 세계에서 강한 경쟁력이다. 우리는 어렵고 외로울 때 도움을 준 사람을 평생 잊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이 고달프면 고향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가난 때문에 이국만리 타향에 와서 문화차이와 언어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동남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히죽히죽 웃는 것이 자기 고장에서는 미안하고 송구함의 표시다. 화난 데 부채질 한다고 두들겨 패는 남편에 절망하며 울부짖는 이주여성이 우리 주변에는 없는 지 관심을 가져 보자.이제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 전문인력 5만을 포함하여 145만 명이 되는 다문화 세상이다. 우리 모두 이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으로 당당한 우리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 수필가 최동명씨는 201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수필과 비평 작가회의''덕진 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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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1 23:02

아픔을 아는 나무

자신을 들여다보기 참 좋은 가을입니다. 가을은 자기 고독의 색깔을 드러내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철학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가을은 익어가는 계절이요. 숙성의 절기입니다. 들길 지나 산길로 나서면 나뭇잎들은 푸른 빛 떠나보내고 잎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단풍나무 잎은 능금 빛으로 물들고 감은 어느덧 홍시로 숙성해 변화의 계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을 앞에 옷깃 여미며 한 해의 삶을 생각하는 가슴 속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나이의 무게를 의식하게 되면 세월의 속도감이 심장을 건드리는 것 같습니다. 늦가을 대기처럼 마음은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입니다. 그래 더 겸손히 조신하게 살지 못했구나 싶어지기도 합니다. 인생의 철듦은 꼭 나이와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나 너그럽지 못한 생각들 앞에 마음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순간 마음의 옷을 벗고 내가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을 만나 따끈한 국물에 소주라도 한잔 권하면서 마음의 온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내 안의 나에게 묻게 됩니다. 하루하루의 시간을 생각 없이 소비하지는 않았는가? 하고.밤새 / 뒤척이다 / 숲길에 나서니 / 초입 길 / 가로등이 / 벌건 눈으로 / 내려다본다. / 갑자기 / 부끄러워지는 마음 / 나만 힘들게 / 사는 게 / 아니라는 것. 나의 시집 〈〈시목詩木〉〉에부끄러움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시입니다. 그리고 어느 독자가 읽고서 책상 위에 세워놓을 수 있는 그림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른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공원길 걸으면 밤새 한숨도 못 잔 가로등이 충혈 된 눈으로 내 모습을 봅니다. 세상 만물 모두가 편하게만 지내는 것 아니오 사람만 힘들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대지마을 뒷산을 걷다보면 몇 년 전 태풍으로 인해 뿌리 뽑힌 나무가 쓰러져 다른 나무에 얹혀 지내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쓰러진 나무가 다른 나무에 얹혀 있는 모양이 한자의 효孝를 상징하는 꼴 같습니다. 효는 늙은이老를 아들子이 업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효는 늙을 노老 아래 나무 목木을 했다고 해도 그냥 효孝로 인정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아! 나무도 생명의 아픔을 아는구나! 하는 가족애가 느껴졌습니다. 지난 주, 문단의 몇 선배와 만났습니다. 그때 한 시인이 존속 살해 사건이 세계 각국 평균보다 우리나라가 두 배나 높게 발표되었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와 형을 함께 숨지게 한 범인은 돈 때문에 그랬다고 했습니다. 많은 문제의 원인을 거슬러 오르면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을 심각하지 않게 생각 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시인의 말을 듣고 나는 어린 나무가 죽어가는 늙은 나무를 업고 있는 숲속 효목孝木의 꿈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자연 속에서의 나이 질서와 사람 사는 길을 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참 많이 아픕니다. 그런데 정치인만 있고 정치는 안 보입니다. 원로 분도 그립습니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영혼의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시인이나 펜을 쥔 작가로서 영혼의 감각이 무뎌진 것 아닐까요. 가을나무들은 한 해가 간다고 체질개선을 하면서 하나의 나이테를 긋기 위해 뿌리 아픔을 앓고 있는데.* 수필가 김경희씨는 〈월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내 생명의 무늬〉, 시집 〈시목 詩木〉, 저서〈문학의 이해와 수필의 길〉 등이 있으며, 현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전북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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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5 23:02

휴먼웨어 시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쪽풀잎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풀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이다.예로부터 자식이 부모보다 출중하기를 바라는 것이나 스승보다 제자가 출세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인간의 성정임에는 틀림이 없다.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답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 교직자를 사람들은 선생님 또는 스승으로 대접한다.또한 교육의 힘이란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다. 예컨대 왜정 36년간의 황국신민을 만든 것도 일제 식민지 교육의 결과요, 영국의 신사도를 만든 것도 기사도 교육의 힘일 것이다.어제의 배고픔을 가난의 서러움을 딛고 일어선 오늘의 한국 경제발전도 우리들 교육의 힘이 아니던가? 이러한 중차대한 과업에 우리 교육자는 서슴지 않고 뛰어든 것이다.초등학교에서는 유치원생과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이 더불어 생활하고 있다. 교육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4세가 되면 두뇌의 발달과 형성이 된다고 하니 어린이들은 담임선생의 걸음걸이, 글씨체, 말씨 등을 닮아 간다고 할 때 그만큼 선생님은 일거수일투족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고 희생적인 교직생활을 요구받게 된다.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들은 진한 사제의 연분을 맺어야 하는데 자칫 티 없는 천진한 어린이라고해서, 무시하는 상태에서 역할기대체제(役割期待體制)가 이룩되지 못한다면 평생을 두고 제자들로부터 사모는커녕 원망의 소리만 듣게 될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눈뜨고 지내는 시간은 가정보다 직장이 훨씬 많을 것이다. 직장이란 의식주를 해결키 위하여 돈을 벌려고 다니는 일자리라고 해도 모순은 아니다.그러나 직장에 돈을 벌기위해 나간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나는 봉사하러 나간다`고 마음 먹고 하루 일과에 열중한다면 그 직장은 천직이 되는 것이요, 하루 생활의 보람을 찾는 요람이 될 것으로 믿는다.나는 10여년 전에 정년을 하였다. 내가 근무했던 S학교의 정문을 들ㄹ어서면 통일로 우측에 하얀 글씨로 `오늘도 보람되게`라고 쓴 표지판이 있다. 자신을 위한 자아실현도 해야지만 눈 덮인 겨울 무덥고 지루한 여름, 책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선생님을 찾아오는 제자에게 스승으로서 무엇을 도와줄 것인지 오늘의 교육현장에서 다시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큰 소리 아니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뿐이다. 지구의 종말론을 펴내 마음 약한 사람들의 일손을 더듬거리게 하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있지만, 먼 훗날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 더욱 많은 것 같다.머지않아 물질위주의 가치 판단이 주역에서 밀려나고 지가(知價) 쾌적성(快適性)이 가치의 중심이 될 것이다.그 사회에서는 얼마나 돈이 많고 힘이 세고 큰소리치느냐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삶의 질을 높이며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게 될 것이다.이러한 시대를 `휴먼웨어의 시대`라고 부른다.이런 미래를 맞이해야 할 우리는 오늘을 사는 지혜를 창출해야 한다.가을이 지나가는 스산한 길목에 서서 마음의 설렘 속에 심란해 하지 말고 덤뻑 대는 일없이 오늘에 퇴물이 된 우리들과 현직에 있는 모두가 그 책무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는 재생되거나 되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삶을 보람되게 관리해야 할 것이다.*수필가 문희병씨는 1989년 월간종합예술지 〈거목문학회〉로 등단. 수필집 〈박꽃, 달빛을 머금고〉 〈강물따라 흐르는 세월〉 〈사랑의 밀알이 되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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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8 23:02

행복은 나의 것

행복하면 떠오르는 얼굴. 활짝 웃고 있는 그 얼굴.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수단의 자랑인 톤즈 부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그 남자. 그 사진에 겹쳐 떠오르던 다른 모습의 그의 얼굴.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도, 새로 지은 병원의 지붕 위에 올라앉아서도, 흙탕물 같은 개울에서 그 곳 소년들과 한 타령이 되어 뒹굴면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면 눈물을 흘렸다.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 눈물을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을 울리고야 만 그 남자. 그 곳 삭막한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고故 이태석 신부.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를 보면서 나 또한 주체할 수 없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 명예와 부, 안락과 평안을 버리고 톤즈로 달려가 그 곳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사람, 그들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던 사람. 마지막 그를 배웅한 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흩어지지 않고 한 자리에 모여 부라스 밴드가 연주했던 그 노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후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목적은 무슨 목적? 그냥 사는 거지 뭐."라는 무책임하고 회의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겠다. 아님 "이왕 태어났으니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것." 이라는 약간은 불투명하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밝히기도 하겠지. 나아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싶다."라는 분명한 삶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이도 있겠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사는 동안 오늘이 어제보다 그리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추구하는 삶의 목적을 이루었을 때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또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행복.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흔히들 세상에서의 행복조건을 건강과 재물, 그리고 권력과 명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 이뤘다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질주요, 목마름이니 헉헉대며 달려야 하는 그 과정이 어찌 평탄하기만을 바랄 수 있으며 그 갈증에 어찌 마음이 평안할 수 있을까. 이루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평안과 행복은 자꾸 뒷걸음치기 일쑤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더 가지려고, 더 이루려고 힘쓰기보다는 그 욕심들을 덜어내는 데 있지 않을까. 남보다 가진 것은 적어도 늘 만족하고 기뻐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진정한 행복은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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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1 23:02

우리 집 명절

고유의 추석명절이 지났다. 설날과 추석, 단오 3대 명절 중 추석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초청하거나 마중을 나가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게 세월이요 또한 추석이다.추석명절은 그야말로 전통문화로서 민족의 대이동을 불러 온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조상흠모와 인간 경애사상 그리고 효사상이 깊다. 이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그럼에도 명절이 모두에게 그저 흔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명절이 더 외롭고, 부담스러운 가정도 적지 않다. 가족을 만날 수 없거나 고향을 찾을 수 없는 경우는 명절이 오히려 고통이다. 명절이 고통스러운 것은 이들 뿐아니다. 일반 가정의 경우에도 주부들 사이에 명절 증후군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명절 준비가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다. 오죽하면 명절을 전후해 성형외과와 산부인과 예약 손님이 줄을 선다고 할까.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보일 수 있다. 명절은 말 그대로 오랜 관습에 따라 즐기는, 좋은 날이다. 명절이 문제가 아니라 명절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문제다. 우리 집에서는 형제가 격년제로 준비하여 명절을 쇤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이 시제, 제사, 부모님생일과 회갑, 칠순잔치 등 웬만한 행사는 으레 장손들이 담당한다. 그것이 전통풍습이다.나는 2남 2녀 중 장남이다. 맏이로서 가정의 큰 행사는 당연히 내가 도맡아 치렀다. 장남인 나는 조부모님과 부모님으로부터 귀여움도 더 받았고, 재산도 더 많이 상속받았다.그런데 동생부부가 20여 년 전부터 우리 형제가 격년제로 명절을 쇠자고 제의했다. 장남이나 차남이나 부모의 자식 사랑은 똑 같았을 것이므로 명절 행사를 형제간에 1년씩 번갈아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장남의 몫으로 여겨 몇 년을 그대로 버텼다. 그 뒤 명절 때만 되면 동생 내외는 거듭 번갈아가며 명절 주최를 요구했다. 장고 끝에 어머님을 모시고 가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족회의를 열어 동생 내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새천년 설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다.홀수 해에는 형 집에서 짝수 해에는 동생 집에서 설과 추석 명절을 치른다. 어느새 올해로 13년째가 된다. 가부장적으로 실행해오던 우리 집 가규(家規)였던 장남 중심의 수백 년 명절 전통의 벽을 깬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 어색했지만 10년이 지나니 이제 정착이 되었다.두 집 가족이 모두 30명인데 이번에는 25명이 모였다. 옛날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으로 바뀌었지만 명절 때만은 대가족이 모여 행사를 치른다. 두 집이 돌아가면서 명절을 쇠니 두 집에서 따로 따로 준비하던 경비도 절감되고, 명절증후군도 줄어서 좋다. 특히 형제의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단란하고 화합된 분위기여서 참 좋다. 핵가족생활을 잠시 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젖어 즐거운 표정들이다. 이것은 동생부부의 제안으로 이루어졌기에 더 없이 고맙고 자랑스럽다.우리의 명절행사가 앞으로도 대대로 이어지고 후손 모두가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수필가 고재흠씨는 2000년 월간문학 공간으로 등단. 한국신문학 전북지회장·행촌수필문학회장을 지냈으며, 수필집 '초록빛추억'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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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04 23:02

구두 한 켤레

선물 받은 상품권으로 백화점에 들러 구두 한 켤레를 샀다. 콧등이 준수하고 몸통이 거울처럼 깨끗한 유명상표가 붙은 구두다. 그는 기나긴 외출이나 중요한 행사장에 갈 때면 나와 한 몸이 되어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눈이 오나 비가와도 내 발과 생사를 함께 하던 너는 더러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도, 냄새나는 시골 뒷간에 들어갈 때도, 어떤 날은 개자리의 그루터기를 밟고도 불만스런 몸짓 한 번 하지 않고 나의 분신으로 살았지. 미끄러운 도로에서 끝 날을 세워 나를 보호하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기꺼이 동행해주던 너와의 인연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으면서 발이 좀 불편함이 느껴져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의 발등 쪽 옆구리 접히는 부분이 약간 벌어져 있어 볼썽사나워 보인다. 아마 오래전부터 조금씩 달아 헤어졌나보다. 그래도 그와 정 들고 버리기 아까워서 더 신고 다녔다. 여유가 있어 두 켤레를 사서 번갈아 신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 켤레만으로 신다보니 빨리 달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높은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갑자기 구두의 오른쪽 살점이 툭 떨어져 나가버렸다. 그때 내 발도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난 상처 난 몸통을 가만히 비닐봉지에 넣어 병원으로 갔다. 우측 골반 뼈를 수술하여 건강을 회복하니 다시 새 구두가 되어 내 발목을 꼬옥 껴안았다. 그러다 며칠 후 이번에는 좌측 골반 뼈가 빠져나가 또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 의사는 웃으면서 대장과 소장의 연결 부위가 닳아서 몇 달 못가서 하직한다니 그는 회생 불능한 불치병에 걸린 걸까?사람간의 인연의 시작과 끝도 구두가 그 수명을 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만나고 헤어진 무수한 사람들, 낡아 헤어진 구두를 보면서 인연의 깊이를 생각해 보았다. 내 발을 거쳐 간 구두가 몇 켤레인지, 나와 인연을 시작하고 끝맺었던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겠다. 문득 신발장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구두를 꺼내 볼 때가 있듯 과거속의 인연도 그렇게 꺼내보고 싶다. 이제 두 번의 수술을 통해 신었던 구두의 수명이 거의 다 되었나 싶다. 수년을 나의 발과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해온 어느 날 고약스런 빗물이 옆구리를 살며시 파고들었다 수명을 다한 구두를 쓰레기봉투 속에 넣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비스듬히 누워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수년을 나의 발과 함께 해온 그의 생애가 오늘 새벽이면 환경미화원의 손에 이끌려 나락(奈落)에서 열락(悅樂)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당신은 누구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갈 길을 안내해준, 희로애락을 함께 한 내 분신이었다고 말하리라. 구두 속에서 내 발은 여름 해같이 불타오르고, 구두 속에서 삶은 언제나 실감나고 즐거웠었다. 구두는 전조등 불빛처럼 욕망을 비추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외출시켰다. 너는 나의 분신이었다. 내 발과 오래토록 인연을 함께 한 넌 나의 오랜 친구였다. 지상을 더없이 사랑하게 만드는 구두. 지상을 떠날 때 해를 향해 날아갈 구두.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내 희망 한 켤레야!* 수필가 신영규씨는 1995년 '문예사조', 1997년 월간'수필과비평'로 등단. 수필집'숲에서 만난 비',칼럼집'돈아 돈 줄게 나와라''펜 끝에 매달린 세상'등이 있다. 전북신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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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27 23:02

소리, 그 소리

백운봉 산 비알에서 건너온 싸리꽃향기가 살그머니 와 나의 발밑에서 간질입니다. 하늘은 청아한 파란빛이 향기로 감기고, 갈산은 현란하게 물들어 젊어지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사람이라는 말은 소리를 통과시키다(personare)라는 뜻이 됩니다. 진정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 안에 소리를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닫혀 있으면 안 됩니다.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통과시켜야 할 소리는 세상의 소리보다 먼저 절대자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깨달을 수 없는 크고 작은 풍성한 진리, 아름다움, 사랑의 소리가 됩니다. 이런 목소리를 자신 안에 통과시킬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됩니다. 목소리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맑고 청랑한 목소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너와 나는 마음의 미를 갖게 하는 소리가 됩니다. 나아가 보이지 않는 묵상의 소리는 내적 영혼을 살지게 하는 순종의 소명이란 음성으로 승화하게 만듭니다. 어린 날, 가물 한 동요가 맴도는 푸른 아침에 새록새록 피워봅니다. 썰매타기, 자치기, 구슬치기, 댕기머리 놀려대기는 개구쟁이의 홍소(哄笑)된 목소리가 불현듯 머리에 가득 앉습니다. 너무나 긴긴 그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마음에는 어제만 같이 보입니다. 서낙하고 히덕거리며 지순한 웃음소리, 수련한 순이, 복선이의 홈홈한 이뿐 볼, 달구달구한 아이들이 오늘따라 그때의 모습에서 그들의 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 나의 간절한 가슴의 소리를 보내고 또 듣고 싶습니다. 세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소리도 더불어 갑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음성, 천진하고 난만한 소리에서 어릴 적 친구들의 살가운 이야기와 모습의 그리움이 흥건히 배어 있는 숙숙(肅肅)하고 찰지고 지순한 정겨움을 맛보고 싶어 그러합니다. 자연은 신이 살아 있는 옷이다 카알라인의 말입니다. 문명은 자연과 적절히 어우러질 때 최적의 환경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는천작(天作)으로 문명과 비례할 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편견, 이기심, 탐욕이 가득 찬 세상의 소리는 순수의 자연의 소리를 거슬러 몰 인간이 만들어 지는 순간, 이는 너무도 큰 슬픔이 됩니다. 우리는 장애인 하면 흔히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수화의 교감은 소리 아닌 무언의 의미전달을 나눕니다. 그의 초연한 표정 뒤에 감추어 보이지만, 마음에의 미움, 질투, 탐욕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사람 또한 영적인 장애자입니다. 마음이 무디어 다른 사람의 아픈 처지를 외면하는 것도 성령 장애의 요소가 됩니다.우리는 열린 귀로 무엇을 듣고 있으며, 풀린 혀로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요? 자문해 봅니다. 음악의 본바탕은 소리에서 기인되어 사람과 더불어 먼저 사람을 매혹하고 나아가 인생길의 멋을 치부하는 사랑으로 안내합니다. 음악의 정신은 행복을 추구하는 최후의 목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미로운 리듬에 자기를 되돌아보며 너무도 하얀 마음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곧 소리이며 예술입니다. 이런때, 그에서 세상살이의 정화가 요구되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이처럼 자연의 큰 틀 안에는 소리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소리를 떠나서는 잠시를 존재하지 못합니다. 각혼이 없는 생혼만을 지닌 날짐승과 기는 동물은 올금 볼금 울며, 허공과 숲을 전전하며 먹이만을 구하는 소리에서 단순함을 발견합니다. 바람은 소리를 만드는 장치인가 합니다. 들을 건너 산으로 오르면 잎의 군상이 소리의 합창으로 산을 넘습니다. 그의 소리는 습습하여 종합예술의 극치가 되고도 남습니다. 골짜기의 물소리는 산과 벗한 조화이며, 물이 없는 골은 사막과도 같습니다. 바람소리가 모든 소리들을 다 이끌고 간 고요는 정숙과 한가로움이 숲을 덮습니다. 조화는 우리를 만들고 사회를 이끄는 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지혜롭게 꾸미어 살아가게 합니다. 소리의 조화는 순간의 의미를 남기고 순간 소멸됩니다. 그러나 그의 자국은 시공을 뛰어 넘습니다. 영각(永劫)속에서 영계(정신), 육계에 이어져 그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에 남긴 소리의 흔적이 더욱 가까워져 다시 찾고 싶은 것은 사람의 애틋한 정서인가 합니다. 이제 소리를 따라 산자락을 내립니다. 자연의 품안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담 쑥 안겨 청순하고 슴슴이 우러나는 묵념속의 그 소리를 마음과 가슴으로 새겨 사랑에 푹 젖어봅니다. 수필가 이창옥씨는 1982년 한국문협월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사랑한 너 오늘에 핀다등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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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13 23:02

꽃가지를 아우르며

내가 절에서 꽃꽂이를 하게 된 것은 내 건강을 걱정하던 친구의 배려 때문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말하지 않고 가끔 나를 절에 데려가곤 했다. 갈 때마다 고적한 풍경에 마음이 끌려 툭하면 파닥이던 가슴이 진정되곤 했다.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다가 경내의 경건함이 조금 부담스러워질 무렵에 절 뒷마당을 돌아 산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절 지붕 끝자락과 맞닿은 하늘이 참으로 맑고 고왔다. 그 산자락엔 꽃꽂이할 소재들이 많았다. 꽃이나 나뭇가지를 꺾어다 내 방에 꽂고 산사의 분위기를 이어 보고자 했다. 작은 풀꽃에서 절 내음을 맡고 파릇한 잎사귀의 움직임에서 풍경소리를 들으며 자꾸 까무러쳐 가는 심신을 곧추세우곤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그런 내 행동이 왠지 죄스러웠다. 버리고 와야 할 곳에서 오히려 채워 오려고 한다는 생각이 나를 욕되게 하는 것 같았다. 후론 거꾸로 꽃을 사서 들고 갔다. 정성 들여 꽂고 나면 내 마음도 그 꽃을 보는 사람도 함께 즐거웠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이 공양의 의미를 돋보이게 했다. 공양 중에 꽃 공양이 제일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나에게 꽃 꽂기를 부추겼다. 법당에서 시작한 꽃꽂이는 나한전, 관음전, 극락전, 지장전으로 범위를 넓혀 갔고 꽃꽂이를 위한 성금이 점점 많아져 갔다. 큰 행사 때에는 몇 날을 꽃과 씨름하며 파김치가 되도록 몰두했다. 그리고는 며칠씩 앓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보람으로 충만했다. 나뭇가지를 들여다보면 살려야 할 선과 잘라야 할 선이 보인다. 어느 방향으로 어느 만큼을 살리고 자르느냐에 따라 작품의 윤곽이 다르다. 꽃꽂이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구상하는 대로 자르다 보면 어느 것은 너무 아까운 것이 있다. 물론 꽃꽂이를 하기 위한 절화용이어서 마음껏 자르는 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물을 빨아 올려가며 생을 이어가는 생명 아니던가. 그러기에 잘려나가야 하는 것이 있을 땐 가위질이 망설여진다. 그러나 잘라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잘라야만 작품이 나온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잘라내야 할 것들로 진통을 앓듯, 내 삶이 이어지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놓고 마음을 앓을 때가 참 많았다. 꺾어지고 시들고 찢어져서 버려야 할 것들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어떤 선을 살려야 하는 이유로 정말 멀쩡한 가지를 쳐 내야 했을 때처럼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버리고 살아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누구를 위한 삶인지 회의를 느끼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 일들이 내 삶의 곳곳에 딱딱한 옹이를 만들어 갔고 그 옹이들은 내 마음 깊숙이 어둠을 깔고 숨어 있다가 가끔 튀어나와 벌겋게 성을 내곤 했다. 작품으로 탈바꿈한 꽃과 탐,진,치(貪,瞋,癡)를 버리라는 목탁소리 속에서 지내다 오는 날엔 벌겋던 상처 색깔이 달라져 갔다. 잘려나갔기에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사실과 잘린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는 이치가 손끝에서 이루어져 가면서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보듬고 있던 응어리들이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어 갔다. 산사의 풍경소리와 목탁소리와 꽃꽂이. 화사한 봄날 마당에 내려앉는 햇살과 한여름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나뭇잎 뒹구는 소슬한 가을 저녁나절의 고즈넉함과 뒷산 소나무가 꺾어지는 겨울 풍경들을 보고 들으며 꽃을 꽂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 앉아 갖가지 꽃물에 흥건히 젖는다.- 수필가 김재희씨는 수필과비평,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수필집 그 장승을 갖고 싶다꽃가지를 아우르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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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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