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6-04-01 18:39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수필

결혼기념일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 나는 4월이 가장 좋은 달이다. 4월은 결혼기념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진안 홍삼축제가 열린다고 하니까 벚꽃이 절정일 거라는 기대를 걸고 서둘러 마이산으로 향했다. 마이산 남부주차장에 들어서니 벚꽃이 활짝 피어 나무 전체가 하얗게 보였다. 마음이 열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이산 벚꽃은 자주 봐도 나무에 하얀 작은 나비 같은 꽃들이 매달려서 구경꾼들과 눈을 맞추고 활짝 웃어주니 귀엽고 아름다웠다. 아내와 마이산의 벚꽃 길을 걷는 것은 처음이라 더 눈이 부시며 운치가 있었다. 바람이 벚꽃 터널을 스치면 꽃잎은 나비가 되어 길 위로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벚꽃은 달 밝은 밤에 만개된 꽃을 보아야 한다. 전주에서 근무하며 원광대 교육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올 때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벚꽃이 대낮 같은 보름달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은 명품 중 명품이었다. 마이산 벚꽃 길은 그 때만 못하지만 명품이라고 말 할 수 있었다. 탑사와 은수사를 거처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인 천황문까지 가서 쉬었다. 북부주차장 쪽 매표소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연인만이 걷는 길도 걸으며 야생화도 보았다. 등에 땀이 촉촉이 났다. 탑사로 내려와 벚꽃 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오른 쪽 마이산 둘레길 표지판이 마음을 끌었다. 너무 걸어서 무리라는 아내의 말을 다독여주면서 둘레길로 올랐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온 산악회원들이 내려오고 있어 힘이 솟구쳤다. 암마이봉의 바로 뒤쪽을 보면서 산을 올라갔다. 봉두봉에서 내려다보는 벚꽃 길은 산골짜기의 나무가 하얀 눈을 수북이 이고 있어 눈길 같았다. 다른 곳보다 늦게 핀 진달래꽃들은 우리를 격려해주었다. 마이봉을 보고 자라서 꽃모양이 또렷하고 색깔도 분홍색인데 여러 가지였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이름이 비룡대이고 나봉암 바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령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함께 올라왔던 직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보았다. 처음 진안에 근무할 때 눈 내리는 길을 운전하다 사고가 난 지점을 아내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멀리 국도변의 원연장 마을 산자락에 넓게 수놓은 꽃 잔디가 빨간색과 분홍색으로 물들여져 봄의 풍경을 자랑하였다. 남부주차장에 내려오니 오후 4시가 가까웠다. 관광객들은 계속 줄을 이어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었다. 길가의 음식점에서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팔고 있는 수삼 튀김을 한 뿌리씩 사먹었다. 많이 걸었다는 아내의 볼멘소리가 사르르 풀린 것 같았다. 곧바로 진안읍 수삼직판장으로 갔다. 7년 전 아내의 큰 수술 회복에 인삼이 한 몫을 했었다. 값 비싼 '홍삼액제조기'를 구입해서 수삼으로 홍삼액을 만들어 작년 여름까지 복용했었다. 6년 근 수삼 다섯 채를 샀다. 마이산 벚꽃이 활짝 피어 꽃터널을 만들고 전국에서 모인 관광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39돌 결혼기념일 행진을 멋지게 했다. 날씨도 그렇다. 아침 한때 흐리고 싸늘한 날씨가 우리의 과거를 가리킨다면, 화창하고 따뜻한 오후의 봄날은 우리의 미래를 예시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내가 홍삼액을 꾸준히 먹는다면 전망대에서 보았던 마을 언덕의 꽃 잔디처럼 건강을 되찾아 화사한 웃음꽃을 피울 것이다. 마이산 둘레길을 헐떡거리며 오르내렸듯, 앞으로 가야할 길에 힘들 때도 있겠지만, 아내와 동행하는 길이니 웃는 날이 많을 것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전망대에 올라간다면 살아온 날이 후회 없는 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필가 정석곤씨는 '대한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수필집'풋밤송이의 기지개'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24 23:02

봄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파릇파릇한 새순을 내놓은 풀들이 어느새 봄이라는 듯 방긋이 웃고, 양지바른 쪽에선 제법 쑥이랑 냉이도 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저만치 풀밭에 쪼그리고 앉은 어머니가 나를 부르신다. "얘, 이게 쑥이냐, 풀이냐? 구분이 잘 안 되는 구나." "쑥 맞아요.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무 말 없이 일어선 어머니는 몇 걸음 만에 다시 쪼그리고 앉으신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얼굴이 닿도록 가까이 대고 한참을 살피다가 "냉이는 없네…." 하고 중얼거리신다. 그러나 그곳에는 냉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어머니는 나물 캐기 선수셨다. 몇 해 전만 해도 어머니를 모시고 야외에 나가면 바람처럼 들판 이곳저곳을 다니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쑥이며 냉이를 캐셨다. 나는 딴에는 부지런을 떨었는데도 어머니의 반만큼도 캐지 못했다. 우리 형제는 도심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봄을 챙기는 어머니 덕분에 흙과 풀냄새에 매우 친숙하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산과 들로 소풍 나가 봄나물 캐는 일을 즐겼다. 나는 나물 캐는 일보다는 봄 아지랑이에 정신을 팔거나 진달래꽃을 좇아 놀기에 바빴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과 산을 헤매다 점심때 나물을 바구니를 내밀면, 나물 대신 쓸데없는 풀만 캐왔다며 면박주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얘는 매번 그러잖니…."하시며 나를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였다. 그 어머니가 이제는 나물과 풀도 구별하지 못하셨다.한 달 전쯤 어머니는 팔을 심하게 다치셨다. 설 준비를 하려고 시장에 가다가 빙판길에서 넘어져 병원 신세를 지셨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가녀린 팔에 깁스를 하고 병상에 누워 계신 모습에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자식이 많은데도 늙으신 어머니 한 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같아 어찌나 가슴이 먹먹하던지. 그런데도 어머니는 한없이 촉촉한 음성으로 "놀랬지?"하며 침대 한편을 내어주셨다. 사춘기시절 나는 어머니에게 바보짓을 많이 했다. 아버지의 사업으로 덩달아 바빠지신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딸보다 공장 사람들을 더 챙기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미워했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서 우리와 소풍 나가던 어머니의 다정한 모습을 개대할 수 없게 되어 더 원망스러웠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기리며 사업하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의 그때 마음을 헤아리게는 되었지만…. "성급한 봄 땜에 어린 게 얼어 죽을 것 같구나."구겨진 종이컵에 공원에서 캐 온 작고 볼품없는 야생화를 옮겨 담으시는 어머니의 바튼 손마디가 노란 꽃잎 사이로 흔들린다. 어릴 때 잡고 다니던 보드라운 손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데 무심한 세월이 어머니의 손마디를 저리 할퀴어 놓았다니. 한평생 궂은일 마다지 않으셨던 어머니, 이제는 편히 지내며 자식들에게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당당히 요구하셔도 될 텐데, 무얼 드시겠냐고 물으면 따로 먹고 싶은 게 뭐 있겠느냐고 하신다.모처럼 갈치를 구워 도톰한 살을 발라 수저 위에 놓아 드린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나에게 해주었던 그대로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선살을 기어이 내 밥그릇에 옮겨 놓고 다른 반찬만 집으신다. 아마 이건 우리 어머니 평생 못 고칠 병인 성싶다. 공원에서 캐온 쑥과 냉이를 주방에 앉아 다듬는다. 앞에 앉은 어머니의 느린 손놀림도 분주하다."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집에 한 번 놀러 오너라." " 또 나물 캐러 가게요?" "그러자구나." "엄마, 냉잇국 맛있게 끓여 주실 거죠?" 어머니의 얼굴이 봄꽃처럼 환희 피어난다. 어머니를 다시 찾는 그날에 저 야생화도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겠지.* 수필가 박경숙씨는 2010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순수필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17 23:02

머위나물

도로 옆 길가에 푸성귀가 즐비하다. 할머니들의 좌판 앞을 서성거리는데 오늘따라 머위 나물에 시선이 간다. 우리 식구들은 쓰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물이다. 검지만큼 자란 녀석이 오늘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스무 해가 훌쩍 넘도록 김장을 하고 살았지만 머위 나물은 내가 구입하는 채소의 울타리 밖이었다. 밭둑에서 막 베어온 듯 젖은 흙이 드문드문 묻어 있는 것이 솜털까지 보송하다. 소쿠리에 담겨져 있는 것을 주저 없이 샀다. 머위는 습기가 있는 곳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소반에 수없이 오르내렸을 머위를 끓는 물에 넣었다. 논두렁이나 밭둑 등 흔한 곳에 자생하는 머위의 알싸함에서 고향 냄새가 전해진다. 머위를 보면 부지런한 농부들의 삶이 느껴진다. 겨우내 질박한 흙의 기운 속에서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이른 봄이 되면 약속한 듯 여린 순을 내민다. 질곡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우리 민족의 끈기 같다.끓어오르는 압력에 냄비 뚜껑이 열리자 머위를 찬물에 거듭 헹구어냈다. 오동통한 보랏빛 줄기와 녹색 잎의 신선함이 은근히 식욕을 돋운다.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파, 마늘다짐, 참기름 등을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아삭아삭하면서 쌉싸래한 향이 된장과 참기름에 어우러져 감칠맛을 물씬 냈다. 기대 이상이었다. 어찌하여 진작 이 맛을 모르고 외면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쓴 맛이 나는데 입은 달아서 침이 고였다. 입맛을 돋우는 데는 쓴 것이 제일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나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나름의 독특한 쓴맛이 어느 성찬 못지않다. 단 맛이 구미를 더 당길 것 같지만 기실 쓴 맛이 이끄는 오묘함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미나리, 쑥갓, 취나물 등 제각각의 특유한 향을 지닌 봄나물들이 수두룩한데도 나는 오늘 머위 나물에서 느끼는 참맛에 담뿍 매료되었다. 겨울 지나면 봄 오듯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생활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왠지 모를 갈증을 느껴왔다. 달콤하고 자극적인 욕망의 주머니는 잠을 자다가도 문득문득 나를 유혹했다. 우아하고 화려한 삶을 추구하는 꿈은 언제나 이상일 뿐인데도 욕망은 시시때때로 나를 두드렸다. 바람 든 풍선은 매양 저 홀로 떠돌다 이내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언제나 그림자만 좇을 뿐 나와는 어울리는 삶이 아니었다. 불현듯 나에게 어울리는 삶은 머위나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꾸밀 것 없이 수수한 그릇에 담아도 개성 있는 맛을 지닌 채 소박한 밥상에 더 어울리는 찬. 다른 반찬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으며 그만그만하게 어우러지는 나물. 그 모습이 곧 내 삶임을 깨닫는다. 다양한 봄나물 속에서도 고유의 맛을 지녀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머위나물이야말로 봄채소 중의 으뜸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윤기 사라진 세월이 마음 비워내는 법을 가르친 모양이다. 더불어 입맛도 함께 변했나 보다.밥공기는 바닥을 보였는데도 수저를 놓고 싶지 않다. 아이들에게 권해보지만 얼굴이 일그러지며 도리질 친다. 쓴맛이 달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세월이 훌쩍 흘러 아이들의 등에서도 풀기가 가시면 그때는 이 깊은 맛을 터득할지도 모르겠다. 쓴 맛을 달게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둘지 않아도 되리. 열어 놓은 거실 문 사이로 바람 한 자락이 밀려든다. 잠자던 풍경의 청아한 소리가 보리밭 위를 날던 종다리의 울음 같다. 창 너머 소공원이 사월의 초록바람에 한결 짙어 간다.*수필가 이양선 씨는 '계간수필'로 추천 완료. '익산수필''계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10 23:02

칼구름

며칠 동안 잔뜩 찌푸려 비를 쏟던 하늘이 모처럼 맑다. 눅눅한 기운에 젖어 있던 몸과 마음을 말리기 위해 집 옆 공원에 오른다. 어제 내린 철 잊은 장대비로 길바닥에 작은 웅덩이들이 상처처럼 나 있다. 햇볕은 다사로운데도 사월 쌀쌀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허위허위 정상에 올라 팔각정에 오른다. 콘크리트 기둥, 시멘트 바닥이 눈에 설었지만 시원하게 트인 하늘에 마음을 말리기 위해 남쪽 난간 앞에 선다. 난간을 잡고 올려다보는 하늘이 하 맑다. 노랗게 익은 해는 푸르스름한 하늘빛에 싸여 있다. 만지면 찐득찐득 손가락에 달라붙을 듯하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첫 자리에서 천리(天理)를 주관하던 권좌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위용이 꺾인 해를 올려다보며 망령된 생각에 빠져들 즈음 서쪽 하늘에서 하얀 구름이 흘러든다. 뭉게구름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조각구름이라고도, 새털구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구름이다. 혹은 세로로 내리긋고, 혹은 가로로 잘라놓은 것이 어찌 보면 푸른 화폭에 하얀 물감을 죽죽 그어 놓은 추상화인 듯도 하고, 또 달리 보면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칼자국인 듯도 한다. 하늘에 떠 있어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는 해와 달과 별과 구름이다. 이들은 사람이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는 신비성을 지녔다. 해는 하늘의 주인이어서 우러러만 볼 뿐 언감생심 그 주변에도 접근할 수 없는 존재다. 달은 치성을 드리면 바라는 바를 이루어줄 듯도 싶고, 별은 간절한 마음이면 따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 성싶다. 요즘 사람들은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 달나라, 별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지만 달과 별은 아직도 꿈의 나라이다. 구름은 사람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때로는 미소를 짓게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그래서 해는 신앙의 대상이며 달과 별은 치성의 대상이지만 구름은 사람들의 삶에 관여한다.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공허하다. 산봉우리에 걸린 뭉게구름, 서녘 하늘에 곱게 펼쳐진 새털구름, 남쪽 하늘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조각구름-사람들은 이런 구름들을 보면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기도 하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기도 하며, 이룰 수 없는 꿈을 펼쳐보기도 한다. 오랜 가뭄에 살아 있는 것들이 목말라할 때 앞산에 삐죽이 고개를 내민 비구름은 생명수를 뿌리는 구원의 천사였다. 아직 빗방울이 듣기도 전에 시들었던 나뭇잎은 윤기를 되찾고, 기진했던 짐승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장마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어 음울한 기운이 세상에 가득할 때에도 사람들은 겁을 먹지 않는다. 구름 뒤에 하늘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검은 구름이 겁을 주기 시작했다. 앞산에 삐죽 고개를 내민 비구름은 맞으며 달음박질치면 땀범벅인 등줄기를 식혀주던 그 친근한 소나기가 아니었다. 깔리면 살아날 길 없는 바위 덩이가 되어 계곡을 덮쳤다. 장마 구름도 미꾸라지가 마당가에서 꿈틀거리게 하던 그런 비를 쏟는 게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동이로 퍼붓듯 온 동네를 집어삼켰다. 이제 구름은 사람을 친근한 이웃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원한 깊은 대상으로 대하는 듯하다. 서쪽 하늘로 눈길을 돌린다. 관운장의 장검으로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길고 날카로운 칼 구름들이 해를 겨냥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는 높은 굴뚝이 떠오른다. 그 위에 뉴질랜드 하늘에 나타났다는 '악마구름'이 겹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5.03 23:02

곡선이고 싶다

날마다 여행을 떠난다. 하루 중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음에도 대문을 나설 때 마다 매번 설레는 걸 보면 타고난 역마살은 어쩔 수 없나 보다.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반듯한 직선보다는 휘어진 곡선의 길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해서 나는 고속도로보다는 국도나 지방도를 선호하는 편이다. 산 넘고 강을 건너 안개 낀 호수와 맞닥뜨리는 꼬불꼬불한 길 위에서 한가로운 마음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그럴 적마다 가재미눈으로 힐끗힐끗 엿보는 창밖의 풍경에 전율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달려가고 있는 이 길이 곧 우리의 인생길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머물 때 머릿속은 마치, 가느다란 전기 회로 수만 가닥이 꼬여있는 것처럼 헝클어진다. 그것들로 인해 갈 지 자(之) 운전을 하게 되어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굳은살처럼 박혀있는 소소하고 부질없는 생각들을 흔적도 없이 파낼 수 있을까 끙끙댄다. 21세기 사람들은 기다리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세상 돌아가는 일쯤이야 금방 해결할 수 있음에도 조급증을 털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소유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 정신적인 장애를 껴안게 되어 초조하거나 불안해한다. 우리의 생활은 더 없이 편리하고 풍요로워지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너그러운 수평보다는 수직으로 뾰족해져 가는 것만 같다. 그것에 닿기만 하면 터져버릴 것 같은 위험들이 처처에 도사리고 있어 나날의 안위가 결코 평탄치 않다. 혹자는 인생의 속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와 나이에 빗대 말하기도 한다. 시간과 더불어 가는 속도 경쟁에서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때로는 염려스럽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으나 느리고 더디 갈 수 있는 길에서 나는 삶을 노래하고 싶다. 서둘러 오라거나 빨리 가라고 그들은 재촉하지 않는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라며 손 내밀어준다. 펄펄 끓는 라면냄비처럼 보글보글 뜨거운 내 속을 감싸줌은 물론 철학까지 깨닫게 해준다. 아직도 성숙되지 못한 정서성이 밉고 원망스러워 안절부절 못하는 내게 따스한 손길을 건네는 그와의 깊은 애정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젊은 날의 한 때는 거침없는 직선의 삶을 동경했었다. 속전속결로 잘 나가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부러워한 적도 없지 않았다. 세상에는 가난하거나 운 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닐까 치부한 적도 있었다. 세상에 고통은 있게 마련이고 나라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직선이기보다는 곡선이고 싶다. 그래서일까? 웬만한 급한 일이 아니면 곡선의 길과 소통한다. 그 길에서 지나온 날을 더듬어보고 앞으로의 날들을 그려보기도 한다. 한 구비 돌아 한숨 한 번 몰아쉬고 산모롱이 두 번 휘돌아 껄껄껄 웃음 짓는 여유로움 또한 갖고 싶기 때문이다. 그동안 속도경쟁으로 황폐해진 영혼에 그렇게나마 자양분을 얻어 보려는 속셈이다. 내 삶의 터전에는 언제나 직선과 곡선이 공유한다. 그들은 아직도 내게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 햇볕 속으로 나서는 순간 끈질긴 생명력이 다시 부풀어 오른다. 창밖 풍경에 젖을수록 내 몸은 굼뜨게 마련이지만 느린 걸음으로 만나는 세상 속에서 무조건 나는 곡선이 된다. 평화로움이 넘실대는 특별할 것 없는 길모퉁이에서 어떤 선율이 울려나올지 기대가 크다. 가슴 밑바닥에서 은밀한 기쁨이 요동친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26 23:02

맘껏 울어 보내드리시게

며칠 전 문단의 모임에 다녀오는 길에 김 시인에게, "라대곤 선생님 건강이 어떠시냐"고 물어보았다. "문단에서 미리 조시(弔詩)를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고, 펑펑 울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 분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벌써 두어 해도 더 지났지 싶다. 그래도 가끔씩 문우들께서 하시는 안부의 말씀을 곁 들으며, '잘 견디고 계시는구나.' 안심이 되곤 하였다. 그러다가 작년엔가 두 번이나 큰 상을 받으시는 자리에 나가 뵙고 인사를 드렸었다.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예의 활달하고 형형하신 기상은 여전해 보이셨다. 나는 가끔 문단에 모임이 있어 어른을 뵙게 될 때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모두였지만 들음들음 김 시인의 이야기를 듣자하면, 그녀가 문단의 후배로서 어른을 받들고 모시는 모습이 곁에서 보고 듣기에 참으로 대견하고 아름답게 생각되었던 터이다. 또한 어른께서도 김 시인을 문단과 동향의 후배로서 그녀의 재주를 아끼고 격려하는 마음이 남다른 듯해서 듣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러하니, 이제 어른의 건강이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보내드릴 준비를 서두르라 하는 때에야 그 안타깝고 눈물겨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세상에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처럼 어렵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말로는 다 할 수 없으니, 울음을 울어 대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맘껏 울어 보내드리시게" 그 밖에 더 무슨 할 말이 없었다. 떠나는 사람을 위하여 슬픔을 대신할 다른 방도가 없으니, 맘껏 울어 보내야 한다. 사실인즉, 떠나는 사람은 눈만 감으면 그만,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연민도 한 순간에 다 버리고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홀홀히 떠나가리라. 하지만 사람을 보내고 뒤에 살아남은 자들은 말이 아니다. 떠날 때를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는 사람이 지금 어디만큼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이냥저냥 지내다가 덜컥 숨을 거둘 때. 후회와 탄식으로 그를 붙들고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살아서 같이한 시간들, 그것이 기쁨이건 아픔이건 모두 살아남은 자들이 감당해야할 몫이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무겁고도 무겁고 슬프고도 슬픈 짐이다. 때 없이 잠 못 이루며, 꽃피는 봄날이거나, 눈 내리는 겨울이거나, 음식을 먹을 때나, 떠들썩하게 즐거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문득 창문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시간이 지나 지금쯤 잊을 만한 때가 되었다고 마음을 달래며 돌아서보아도. 눈물은 철없이, 불현듯 알 수 없는 무엇에 닿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쏟아진다. 하지만, 느꺼운 마음에 모두 눈물이 감응하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 눈물을 따라서만 비밀스런 얼굴을 내보이니, 어쩌면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마음의 모습이자 소통의 길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참 신통하기도 하고 어리석고 별스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당신도 나도, 또 다른 누구누구도 떠나는 사람은 맘껏 울어 보내야 한다. 눈물을 참는다면 이후로 가슴에 쌓이는 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방도가 없다. 옛날 우리 어른들께서 곡비哭婢를 사서 대신 울게 한 것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상주가 혼자서 사나흘을, 많게는 몇날 며칠을 울음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에 겨웠으리라. 내용이 모자라는 때에는 형식을 갖추어 채울 수도 있지 않은가.다시 김 시인에게 문자를 보내었다."맘껏 울어 보내드리시게."그녀로부터 "네"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이미 많이 울었을 것이다. 한동안은 그녀도 눈물을 감당할 다른 빌미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이글을 마칠 무렵, 라대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발인은 사흘 뒤라는 문단의 통문이 왔다. 나도 한 동안 눈물이 쏟아졌다. 어른이 보내준 수필집을 읽으며 가슴 뜨거웠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시인 겸 수필가인 최정선씨는 '월간 에세이'와'월간 한국시'로 등단. 수필집'지나온 시간은 모두 선하다'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19 23:02

'양떼를 향해 총을 쏴라'

봄이면 해마다 한반도를 찾아오는 불청객, 황사의 근원지 중국의 사막 중 그 크기가 6위인 내몽고 '쿠부치' 사막에 한국인 봉사단이 1,000ha에 해당하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숲 조성을 하고 있다.중국의 어머니 강 양자강, 황하강에 접근해 있는 쿠부치 사막은 1억 톤의 모래를 쏟아 부어 강 상류가 막혀 중국 당국도 큰 골치를 앓고 있다.이대로 사막을 방치 하다가는 중국내륙은 물론 한국과 일본 동북아에 큰 재앙을 몰고 와 멀리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본토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연평균 강우량 200~300mm에 불과하며 증발량은 2800mm로 연간 60일간 모래 강풍이 불어 낙타 없이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죽음의 사막이다.한반도의 44배나 되는 중국대륙은 경제개발이라는 숨 막히는 망치소리에 하루가 다르게 도시화로 인한 무분별한 환경파괴는 지난 우리나라 60~70년대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하겠다. 모래폭풍이 한번 지나가면 동산 같은 언덕이 생겨나고 사는 집도 모래에 묻혀버린다.먹을 물도 없고 나무도 없는 황막한 사막지대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고있다. 한국도 이미 물 부족 국가로 UN이 선정, 지구촌의 당면 문제는 사람이 생존 할 마실 물과 식량 확보가 최우선이 되고 있다.UN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의 표면 1/3이 사막으로 변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빠른 사막화로 2025년 이면 아프리카의 경작지 2/3가 불모지로 바뀌고, 아시아 땅 1/3이, 지구의 허파 남미의 숲 1/5이 사라질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이에 따른 인구 1억4000만 명이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문화혁명이후 등소평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다 보니 국토 파괴는 물론 환경을 생각할 여지없이 개발에 집중하였다. 중국의 국토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부터 빠른 속도로 사막화 되어 포르투칼 면적과 맞먹는, 새만금의 230배에 해당하는 9만2100㎢가 황폐화 되었다.그 당시 등소평은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금했고 자신의 무덤도 만들지 말라 했으며, 북경 100리 전방까지 양떼들이 접근하여 나무의 껍질은 물론 풀뿌리까지 캐먹어 국토가 사막화됨에 따라 유목민들의 재산인 양떼를 향해 총을 쏘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한다. 21세기 지구촌 최대의 화두는 과연 무엇일까. 테러와 전쟁일까? 아니면 경제 전쟁? 그것도 아니면 기아와 전염병? 물론 이 모두는 21세기에 들어서 우리인류를 위협하고 괴롭히는 일련의 절체절명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지구촌을 광범위하게 엄습한 것은 다름 아닌 수 년 전에 중국의 쯔촨성 대지진과 미국을 강타한 '카트리나'와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휩쓸고 간 '쓰나미'와 일본 후꾸시마 대지진에 의한 핵 오염과 대기오염으로 온도가 상승하여 미국 본토만한 얼음산이 녹아내리는 대재앙으로 환경파괴가 큰 문제로 야기되고 있다.태평양의 한가운데 섬들이 점점 물에 잠기고 있으며 일본도 해수면이 점점 차오르고 있어 그 대책으로 브라질에 땅을 사두었다는 소문이다. 환경 학자들은 지구의 종말은 신(神)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을 파괴하는데서 인류스스로 자멸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최근 중국에서도 나무를 심고 자연을 보호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으며 산소주머니를 코에 대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활보하는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가 있다.그 흔한 물이 석유보다 비싸며, 이후로는 산소가 부족하여 질식사 할지도 모른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인데 자연환경을 거슬린 다면 결국 자연에게 엄청난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살려야 한다.* 수필가 송기옥씨는 1995년 월간 '문화공간'으로 등단. 현재 부안문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4.05 23:02

씨앗을 품다

어느새 봄이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계절이다. 내 손에 쥐어진 봉투를 뜯자 상추씨앗이 나왔다. 낱개로 본다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맣다. 저 작은 눈에 푸른 이파리를 품고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후~욱 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씨앗들, 땅에 묻히면 죽을 힘을 다해 흙을 밀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한 잎, 두 잎, 햇빛과 바람, 가끔은 비를 불러 숨죽이고 있던 저 만의 삶을 펼쳐 보이리라. 살아 있다는 것은 저 씨앗들처럼 잎을 피우고 꽃도 피우는 일, 한 편의 시가 탄생되는 것도 그럴 것 같다. 시는 말의 씨앗이 고뇌의 시간에 묻혀 싹이 나고 꽃이 핀 것인지도 모른다. 일생을 펼쳐놓고 본다면 태어났을 때가 발아의 시점일 것이고, 하루하루가 싹이고 꽃일 것이다. 자만하거나 본연의 걸음을 늦춘다면 꽃이 피기도 전에 고사할지도 모르는 일, 상추밭에는 상추만 있는 것이 아니 듯 잡풀들이 위협적으로 뻗어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어두운 밤을 혼자 견디며 햇볕 따스한 하늘만을 꿈꾸었을 때, 파릇한 이파리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살이도 흡사하지 않을까싶다. 묵묵히 잎을 내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잡풀처럼 방해하고 유혹하는 것이 어찌 없으랴. 애벌레가 죽을힘을 다해 가지 끝까지 기어올라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번데기가 되고 깜깜해진 그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서야 날아오르지 않던가. 날고 싶다는 꿈이 있어 애벌레는 가지 끝까지 배밀이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쉬운 길 만을 찾아 씨앗이 될 만한 것들을 묵과한 적은 없었는지. 정말 내가 배워야할 것은 거대하고 큰 것이 아니라 씨앗처럼 작은 것에 있는 것 같다. 기대승선생의 「고봉집」에 '적우침주(積羽沈舟)' 라는 말이 있다. 가벼운 깃털이라도 많이 실으면 배가 침몰할 수 있다는 말, 작은 일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일 게다. 늘 접하면서도 지나쳐버린 씨앗들. 진정으로 새로운 발견과 도전을 하고 싶다면, 누군가 흘리고 간 단어 하나라도 귀히 여겨볼 일이다. 영화 '시'에서 구민관으로 시를 배우겠다고 모인 할머니들이 나온다. 시를 지도하는 선생님은 사과를 들고 나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때 하나같이 사과라고 대답하는데 사과를 본적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누군가 천만번도 더 보았다고 대답했을 때, 선생님은 여러 분은 한 번도 사과를 본적이 없다고 일침 한다. 시는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으로 그와 함께 뒹굴어 보는 것이라고 했다. 사과는 작은 씨앗에 불과할 뿐이니 싹이 트기를 기다리며 물도 주고, 사랑도 주고, 창을 열어 햇빛을 비춰주었을 때 비로소 한 편의 시로 탄생되는 것이라고 했다. 새들도 움을 틔우는지 짹짹짹, 계곡물도 막 발아를 시작했는지 졸졸 거리는 봄이다. 오늘이라는 씨앗에 물도 주고 따스한 햇살로 품어준다면 내일이라는 잎이 곱게 피지 않을까?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29 23:02

운전 - 류미숙

난 가끔 사이버 카페를 방문한다. 그 곳에 가면 특별히 차(茶)를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눈치 주는 이가 없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다. 나처럼 끼적거림을 좋아하는 이가 개설한 곳인데, 여러 장르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어 볼거리도 다양하다. 그 중에 나는 테마 릴레이방을 즐겨 찾는 편이다. 테마 방의 주제가 다수결로 정해지고 나면, 자유로운 형식의 글들이 경쟁하듯 올라온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 주제는 '운전'이다. 벌써 여러 편의 체험담들이 클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호기심을 갖고 한 편 한 편 읽어본다. 남편한테 도로주행을 연수받다 이혼할 뻔 했다는 내용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법한 얘기다. 나는 전문운전학원에서 면허를 땄다. 전문 강사의 지도를 받고 코스시험이며, 주행시험까지 합격한 후 1종 면허를 취득했지만, 주차와 오르막길 운전에는 영 자신이 없다. 특히 오르막길 운전은 죽죽 식은땀이 날 정도로 겁이 난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한테 도움을 청했다. 고맙게도 군소리 없이 받아줬다. 늦은 저녁시간 운전연습을 나섰다. 익산공단 부근 오르막길이 우리가 자주 찾던 곳이다. 연습 첫 날, 남편의 음성은 봄꽃처럼 달콤했다. 꼼꼼하게 가르쳐 주려고 애썼지만, 미안스럽게도 나의 운전 실력은 제 자리 걸음이었다. 남편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천둥처럼 커졌다. 나는 주눅이 들어 급기야 시동까지 꺼트려 버렸다.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어깨도 뻐근하고, 발뒤꿈치까지 아팠다. 몸 전체 근육이 잔뜩 긴장한 때문이리라. 운동신경 운운하며 연신 쏟아내는 남편의 구박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수모를 잘 견디면 자신 있게 운전할 수 있겠다는 욕심에서였다. 방향감각도 없고, 운동신경도 무딘 사람은 답답해서 더 이상 가르쳐주기 싫다는 남편을 꼬드겨 몇 번 더 운전연습을 나섰다. 그런 덕분에 오르막길 울렁증은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었다. 아마도 운전면허증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던 왕초보 시절 있었던 일이다. 나는 하릴없이 한가한 날이면 시립도서관엘 자주 가곤 했다. 어느 날 유치원에 다니던 막내딸까지 태우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초보운전자가 지나기엔 부담스러운 급커브의 내리막길도 무사히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보고 싶은 책을 골라 다시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에 올랐다. 얼마쯤 달렸을까. 팔십오도 각도로 가파른 오르막길 중간쯤에서 그만 시동이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수동변속기를 제때 변속하지 못한 때문이다. 순간 당황했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잽싸게 핸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뒤쪽을 봤다. 다행히 따라오는 차가 없다.무작정 지나가던 봉고 차를 세웠다.사람 좋아 보이는 그 남자에 의해 자동차는 무사히 언덕길을 빠져 나왔다. 연신 고마움을 전하는 나를 뒤로하고, 그 남자는 알 수 없는 미소만 남긴 채 떠났다. 나는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배에 힘을 주고 숨을 골랐다.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그때서야 얼굴 표정이 환해진 딸이 내게 말했다."아빠한테 다 일러 버릴 거야."나는 화들짝 놀랐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불호령을 내릴게 뻔하다. 자동차 열쇠까지 압수할지 모른다. 나는 딸아이 입을 막을 요량으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녀석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엄마의 실수를 간과하지 않고 아빠한테 고자질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유치원생 꼬맹이 딸은 열아홉 살 숙녀가 됐다. 그 동안 나의 운전 실력도 늘었고, 그깟 오르막길쯤은 웃으면서 지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럼에도 운전은 예나 지금이나 조심스럽고 절대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여기저기서 꽃소식이 전해오고 있다. 오는 주말에는 남편을 졸라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라도 다녀와야겠다.* 시인 겸 수필가인 류미숙씨는 2003년 월간 '한국시'(수필)와 2007년 '한맥문학'(시)으로 등단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22 23:02

정거장

긴 의자와 유리벽, 지붕과 바람막이가 된 텅 빈 정거장에 잠시 앉았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조용히 한쪽에 서 있는 여인,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달려와 발을 동당거리며 버스가 올 방향을 자꾸만 바라보며 사람들이 두서없이 서 있다. 먼 길 떠나려는 듯 큰 가방에 차림새가 심상치 않은 40대 여인의 진한 화장품 냄새 사이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 승강장 끝자락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 남자는 불어오는 바람에 브라운 바바리코트 앞자락이 펄럭여도 의식하지 않고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마가 살짝 보이는 단정한 머리와 적당한 체구의 중년 남자는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렸다. 저 남자는 어디에 가려는 걸까.문득 먼 길 떠나신 H작가님이 떠올랐다.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유난히 배가 불룩한 작가님에게 농담처럼 언제 해산하실 거냐고 하면 아주 여유 있게 "달이 차고 때가 되면 나오겠지."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셨던 분이다. 바바리를 입을 때면 그렇게 커다란 배도 숨겨버리고 나타나신 선생님, 언제나 다정하게 웃어주시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아려왔다. 7년 전쯤 저물어가는 가을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전주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를 지목하며 잠시 와줄 수 있느냐고 했다. 주머니에 버스비가 없는 걸까 생각하면서 곧바로 출발했다. 선생님은 청곤색 바바리에 베이지색 체크무늬 머플러까지 멋스럽게 차려입고 그곳에 계셨다. 은빛 머리카락이 오후 햇빛에 반짝이며 바바리 앞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도 괘념치 않고 내가 나타날 곳을 향해 서 있었다. 자동차 시동을 끄고 잠시 쉬어가자며 저만치에 서 있는 정거장 표지판을 가리켰다. 콘크리트 벽에 지붕이 뾰족한 정거장에 있는 나무로 된 긴 의자 위에 손수건을 펼치시며 앉아보라 하셨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와 편안함에 깊은 숨을 내쉬며 눈앞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가을걷이를 마친 들녘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텅 빈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김제평야 황금들판이 떠올랐다. 기억 저편에 놓고 살아왔던 시간들의 아쉬움과 또 다른 연민으로 한쪽 가슴이 아파서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 일어날까요?" "그래도 되겠어?"아무런 말없이 들판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왜 오라고 했는지 알았지?" "네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정거장은 삶의 연속이지만 삶의 쉼터이기도 하다는 것을 항상 바쁘다는 내 삶을 잠시 쉬어가며 뒤돌아보라는 작가님의 깊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시간은 멈출 수 없다. 다만 의식하지 않고 순간순간 잊고 지나갈 뿐이다. 어느새 집으로 가는 버스가 13분 후에 도착한다는 안내 문구가 정거장 전자시스템 창에 떠올랐다. 정거장!H작가님이 계신 그곳에도 정거장이 있을까?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15 23:02

메뚜기와 송사리

저물녘에야 건넛마을 큰댁을 다녀온다. 김장김치 몇 포기를 갖다드리고 오는 길이다. 거뭇하게 산 그림자가 내리고 있는 들녘에 거의 식어버린 듯한 겨울 해가 넘어가고 있다. 떠오를 때는 어지간히 천천히 올라오던 해도 넘어갈 때는 왜 그리 바삐 서둘러 가는지 모른다. 황혼녘 인생 같다. 마을 앞엔 수확이 끝난 빈 논바닥만 썰렁하게 누어있다. 김장 채소마저 다 뽑아가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들이 적막하다. 저녁참이라 동네 길에는 아무도 없다. 으쓱한 냉기가 들어 두 팔을 겨드랑에 끼고 걷는다. 김치 짐을 부려버리고 맨손으로 들길을 종종거리며 걷는 맛이 호젓해서 좋다. 둔덕 위에는 선들 바람에 마른 억새풀이 흔들리고 있다. 어둑한 들녘을 배경으로 희부옇게 서있는 모양이 휘진 노인네가 허청거리는 모습 같다. 홀연, 빈 들녘 어디선가 울리는 목소리가 있는 듯하여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강릉 시동생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들리는 그 환청은 이따금 탄식하던 그 소리였나?"형수님 거긴 메뚜기도 있고 송사리도 있어요? 여긴 그런 걸 볼 수가 없네요. 초충도를 병풍수로 놓으셨던 사임당의 고향에 메뚜기도 없고 송사리도 볼 수 없다니까요. 그래서 되겠어요? 이게 무슨 현실이지요?"장익순 선생, 박경리 소설가와의 교분에서 생명사상을 영향 받은 것인지 시동생은 기회만 있으면 울컥, 농촌의 황폐화를 한탄하였다. 생명체가 모두 사라진 듯, 고요한 빈 들녘을 보니 갑자기 시동생 생각이 떠올랐나 보다. 사실 이곳 시골도 언제부턴가 송사리 메뚜기 구경을 할 수가 없다. 가을철이면 메뚜기를 잡아 풀줄기에 기다랗게 꿰어서 빙빙 내두르며 논둑을 호기 좋게 내달리던 아이들 모습도 구경할 수 없다. 논둑 옆 봇도랑 밑바닥에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박혀있어야 고기들이 숨어들고 새끼도 낳겠건만 마을마다 개울바닥을 통째로 말끔한 시멘트로 깔아놓았다. 흘러오는 물줄기도 머물지 못하고 내려 온대로 그냥 조르르 흘러가버린다. 송사리커녕 개구리도 가제도 살 곳이 없는 것이다. 풀언덕마다 농약을 뿌려대니 메뚜기도 방아깨비도 여치도 먹고 살 풀숲이 없다. 곤충들조차 차츰 멸종되어 가는가 보다. 장지문에 햇살 퍼지는 아침녘, 마당에서 재잘대던 텃새들 소리에 잠깨던 기억, 계절 따라 서식지를 찾아오던 철새들이 겨울 바다, 찬 하늘에서 군무를 추던 그 장관도 잃어버린 꿈이 되려는가 보다. 산짐승들도 해마다 그 수가 줄어간다. 농촌이 비어간다. 젊은이들도 이미 떠났지만 자연도 그 곳을 지킬 수가 없다. 마을길, 농로마저 말쑥하게 시멘트, 아스팔트 포장해서 자동차 소음에 민감한 새들을 쫓아버렸다. 사료용으로 볏짚을 둥글게 비닐 포장해 추수 직후 곧바로 수거해가니까 논에도 새들 먹이인 낙곡이 없다. 새만금같이 대규모 방조제가 생긴 바닷가에는 바닷물 수질 악화로 수초도 자라지 않고 조개랑 수많은 생명체를 품어 키우던 갯벌도 많이 사라져버렸다. 머지않아 이 강산, 이 좋은 농토들이 황폐한 황무지가 되어 버린다면 어쩌나? 메뚜기와 송사리도 이러다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문뜩, 모래시계가 생각난다. 우리의 시간이 혹시, 모래시계의 남은 모래알처럼 차츰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순간의 편리만 쫓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어디까지 달려갈지 모른다. 문명의 종착역은 무지개 같은 행복의 별천지가 될 것인지, 멸망의 낭떠러지로 내달리는 어리석은 괴물열차가 될 것인지, 아무튼 모를 일이다. 빈 들녘에 모래시계의 환영이 보이는 것 같다. 남은 모래가 얼마나 될까?* 수필가 송종숙씨는 2010년'한국수필'로 등단. 수필집'안아당의 오후'가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08 23:02

대지에서 살아온 사람들

겨울은 추워야 한다지만 전에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 하여 구색을 맞추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것도 없다. 이변이려니 싶다. 겨울이면 따뜻한 방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나는 고향 산골마을이 그리워 며칠씩 집을 떠난다. 겨울의 산골은 한가하여 매일이 그렇고 그런 날들이다. 날도 밝기 전에 눈을 뜨니 습관적인 아침산책을 아니 가면 오히려 답답하여 여명이 가시기 전에 집을 나선다. 제법 매서운 추위가 산골에 찾아들어 볼을 에고 장갑 낀 손도 곱아들지만 청량한 공기만큼은 변함없어 산책을 나선 보람이 있다. 앞산이 희부옇게 밝아오면서 집집마다에도 아침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 그림자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산골은 유달리 춥다. 그러나 이러한 한유(閑裕)를 즐기는 것도 겨울철에나 가능하다. 베트남 틱낫한 스님은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 안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마음 안에서 마음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겨울 한 철 조용한 칩거를 통해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 빛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요즈음 자주 산을 찾는다. 노루인지 모를 짐승들의 발자국이 꽃잎처럼 찍힌 눈 위를 걷기도 하고, 마른 가지들이 얼기설기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다 보면, 청량한 기운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은 이렇듯 가까이 있고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린다. 잡목이 빼곡한 가풀막진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 나의 산책로의 종점이다. 큰 소나무에 기대어 마을을 내려다 본다. 산 밑에 다소곳이 엎드린 가옥들이 두세 두세 모여 있다. 가난에 쪼들려도 어느 권세 한 오리에도 손잡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자식들을 낳아 기른 집들이다. 가족이란 삶의 힘이요, 영혼의 중심이다. 영혼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삶이 맘 먹은 대로 되지 않아도, 시절이 아무리 어려워도, 세월 한 번 거를 줄 모르고 씨 뿌려 거두며 한 생을 대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기나긴 동면을 하다보면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려 선조들은 입춘 첩을 써붙였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문지방에 붙여 놓고 경사스런 일들이 한 해 동안 많이 있기를 희구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산하다 보니 깍아지른 듯한 산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따라 내리는 물이 얼음장 밑으로 돌돌돌 소리 내어 흐른다. 작은 골짜기에서 졸졸 흐르던 물은 얼어붙는 대로 고드름이 되고 푸른 솔가지에는 흰 눈이 쌓여 설경인지 선경인지 보기에도 황홀하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쌓여 발길을 조심해야 하는데 밟지 않은 눈에는 멧새들의 발자국이 앙증맞다. 오른 길을 뒤돌아보니 굽이굽이 많이도 넘었다. 인생길도 이렇듯 굽이굽이 험하기도 하여 오르막과 내리막도 많았지……. 그 속에서 맺었던 인연 또한 만나고 헤어지고 이제는 추억 속에 잠겨있다. 예전의 일들이 생각난다. 이맘때가 되면 입춘첩(立春帖)을 묵서하였다. 주로 사용되는 글귀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 새로운 봄이 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아라.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 년을 장수하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을 누려라. '수여산 부여해 (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여라. 이런 글귀를 대문입구나 기둥에 써붙였다. 머지않아 희망의 봄이 올 것이다. 아직도 설과 보름, 우수 경칩이 지나야겠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먹물을 듬뿍 찍어 입춘 첩을 썼다. 마음속에서는 벌써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희망의 봄을 노래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3.01 23:02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 불러도 가슴이 설렌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스물여섯 살 이전의 나이로 돌아간다. 그 뒤부터는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어머니 택호는 사포(巳浦)댁이다.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사포부락에서 시집을 오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딸 아들 다섯 명씩 10명을 낳으셨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유별나게 딸 아들을 사랑하셨다. 막둥이인 나와 관계되는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그만두고, 57세까지 짧게 살다 간 셋째 형님 이야기다. 셋째 형님은 인물이 잘났다. 둘째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생을 광주사범학교에 보내려고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인물이 제일 잘나고 공부도 잘하니 꼭 합격할 것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낙방을 했다. 둘째 형님은 면사무소에서 병사업무를 담당했다. 동생더러 입학시험에 떨어졌으니 군대나 가라고, 열일곱 살 나이를 열아홉 살로 고쳐서 해군에 지원 입대시켰다. 딴사람을 군에 보내기 전에 자기 동생을 먼저 보내야 떳떳하다고 그랬다. 셋째 형님이 입대할 때 우리 마을 뒷산에 있는 신사당에서 환송행사를 마치고 동네에서 구례읍내로 갈 때였다. 초등학생인 우리는 도로 양쪽에서 일장기를 흔들면서 환송을 했다. 어머니는 길 한복판 자갈밭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셨다. 그 일은 면민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입대한 형님이 진해에서 훈련을 받을 때 소고기육포를 만들어 면회를 다녀오셨다. 형님은 교육 성적이 우수하여 일본에 있는 해군공작학교로 갔다. 1944년 초가을, 비가 많이 내린 어느 날이었다. 일본으로 간 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글을 몰라 그 편지를 큰형님이 읽어 드렸다. 큰형님은 마루에 걸터앉아 편지를 읽고 어머니는 뜰 방 덕석에 앉아서 듣고 계셨다. '전에 어머니가 면회 오실 때 가지고 온 육포는 변소에 숨어서 먹었습니다. 진해에서 교육 성적이 우수한 3명이 일본 해군공작학교로 가게 되어 진해를 떠날 때 행여나 어머니가 또 오셨을까 하고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라는 대목을 읽을 때 어머니는 앞으로 엎어져서 마당에 벌렁 누워버렸다. 큰형님은 비에 젖은 어머니를 얼른 안고 안방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계속 우시고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무명옷을 입으신 어머니 가슴에다 얼굴을 대고 울었다. 어머니는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라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지 못 돌아올지 몰라 우셨지만 나는 그냥 어머니를 따라서 울었다. 지금은 두 분이 전쟁도 해군 입대도 없는 천국에 함께 계신다. 어머니는 형님에게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더 오래 행복하게 살지 않고 왜 빨리 왔느냐고 야단을 치셨을까? 아니다 형님은 더 사랑을 받으면서 그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편안히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내 나이 지금 일흔일곱 살이다. 어머니를 만날 날도 머지않았지 싶다. 학창시절에는 일주일만 못 봐도 무척 보고 싶었고, 군대생활을 할 때 그렇게도 만나고 싶었던 어머니지만, 지금은 빨리 만나고 싶지 않다. 23년 뒤에나 만나서 옛날 받았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받으면서 영원히 함께 살고 싶다. 만나면 많이 부르겠지만 우선 크게 한 번 불러봐야지. "어머~니~!"

  • 오피니언
  • 기고
  • 2013.02.22 23:02

봄밤엔 홀로 술을 마시자

작가, 이문열이 어느 인터뷰에서 우울증 예방엔 술이 묘약이라고 말했다. 이문열은 술로도 유명하다. 그것도 혼자 술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뷰어가 혼자 술 마시는 비율을 묻자 100번에 97번은 혼자 마신다고 했다. 바쁜 술친구 불러내기가 미안해서 술이 먹고 싶으면 혼자 술집에 가거나 집에서 마시다가 습관이 됐다고 한다. 이 대목에선 왠지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내 젊은 날의 우상이기도 했다. 한때 위인이자 우상이었던 그가 혼자서 술 마시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도무지 쓸쓸하고 싱거워서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어떤 이유로든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은 유쾌하고 근사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독작은 뭔가에 상처받아 괴롭거나, 대작할 사람이 없는, 고단하고 우울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로썬 이 또한 할 만한 생각 아니겠는가? 요즘 젊은이들은 혼자 술을 따라 마시는 사람을 보면 3년 동안 애인이 안 생긴다고 질색을 하며 술병을 빼앗는다. 자작과 독작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째든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건 꼭 내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을 원망하며 쓰디쓴 모습으로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에 너무 익숙한 탓일까. 그러고 보니 기쁜 일 앞에서 혼자 기뻐하며 술 마시는 모습은 별로 본적이 없는듯하다. 꽃 사이에 앉아 혼자 마시자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됐다.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못 마셔도 그들 더불어 이 봄밤을 즐기리. 내가 노래하면 달도 하늘을 서성거리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춘다. 이리 함께 놀다가 취하면 서로 헤어진다. 담담한 우리의 우정. 이것은 이백의 '독작'이란 시다. 이 시를 읽은 어느 날 독작에 대한 촌스럽고 독한 나의 편견은 마땅히 버려져야 했다. 사람은 물론 온 우주 만물을 감화시키는 그윽한 도를 풍류라고 한다. 꽃과 달을 벗 삼아 혼자 술을 마시는 이백의 풍류가 가히 신선의 경지다. 혼자 술 마시는 일은 막막하고 외로워 보여 궁상맞은 모습으로까지 격하시켰던 내 생각의 어리석음이라니. 하기야 소주 석 잔을 채 못 마시고 울렁증에 시달리는 내 못난 주량을 생각하면 독작이나 자작의 격을 운운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설프지만 내게도 독작의 기억은 있다. 살다 보면 술이 꼭 필요한 날이 있긴 있었다. 노엽고 쓰라려 우울함이 극에 달 할 때 어디든 기대어 위안 받고 싶은 날 말이다. 그런 날의 내 독작(?)은 침대위에서 아메리칸 식으로 마시는 맥주가 고작이지만 주체할 수 없는 취기에도 별 고통 없이 곧 바로 잠들 수 있어 이것도 좋았었다. 꽃이 지천인 이 봄밤, 꽃 밑에 앉아 흥타령이라도 부르면서 혼자 술을 마시고 싶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술잔에 꽃잎이 떨어져도 좋고 눈물이 떨어져도 기꺼울 것 같다. 술을 모든 나쁜 일의 화근처럼 여기는 사람과 술을 몰라 술에 휘둘리는 멋없는 사람이 어찌 그윽한 술의 정취를 알겠는가. 진동하는 꽃 내로 진저리를 치며 전전반측 잠 못 이루는 봄밤, 어떡하든 혼자 술을 마셔 볼 일이다. 그것은 독작이 주는 몽환의 자유가 얼마나 매혹인가 알아버리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도/ 봄볕이 줄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이 슬픔 어이 견디리. 가는 봄 탄식하는 두보의 시구 가 아니라도 봄밤은 아쉽고 허망하다. 환장 할 것 같은 마음에 엉망으로 흐트러져도 좋으니 그대들이여, 봄밤엔 홀로 술을 마시자.

  • 오피니언
  • 기고
  • 2013.02.15 23:02

귀촌일기

산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산골마을 한 구석에 오두막 하나 짓고 닻을 내린 지 세 해째 난다. 닻을 내리던 당시의 생각은, 이제부터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체 관심 갖지 않기였다. 현대판 무슨 도사 따위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살아온 날보다도 장차 살날이 짧은 삶의 등잔불을 조용하고 아늑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였다. 산골마을에 터를 잡고 나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있다. 농사를 짓는 일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밭이나 논이 있어야 했다. 마침 대처로 나가게 된 원주민이 있어 그것을 사들였다. 너마지기 남짓 되는 밭이었다. 밭을 샀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걱정을 앞세웠다. 농사가 장난인줄 아느냐고, 여태껏 애들 가르치는 일만 해온 사람이 중노동이나 다름없는 농사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렇게 큰 밭을 덥석 사들였느냐는 거였다. 심심풀이 삼아 텃밭이나 가꾼다면 모를까. 마을 사람들의 말에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 일에 웬 참견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뿌리고 심는 일이 무에 그리 힘든 일이라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첫해 농사, 남원 장수 장날이면 중뿔나게 나다니며 길가에 그득그득 내놓고 파는 이름도 낯선 작물 모종들을 사다가 밭에 꽂았다. 덕분에 너마지기의 밭은 한 곳도 빈틈이 없이 채워졌다. 비오는 날을 제하고 날마다 밭에 나가 작물들을 둘러보며 무럭무럭 쑥쑥 자라주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그 밭을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먼 산 바라기 하듯 둘러보며 내던지 듯 한 마디씩 했다. 뭘, 요러크럼 골고루 심었당가잉? 콩이면 콩, 고추면 고추, 요런 것들을 심어야제 수확이 많이 나는 것인디. 그래야 몸도 덜 고단한 벱인디…….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밭의 작물들을 돌아보며 수확할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결과는 도저히 농사를 지었다고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뭔가 하나쯤은 툭 불거진 수확거리가 있어줘야 했건만 그렇지를 못했다. 수확물의 대부분이 벌레가 먹지 않으면 쭈글탱이가 태반이었다. 귀촌 첫해 농사 이야기다.엊그제 입춘이 다녀갔다. 지난겨울 모질다 싶을 정도로 참 길고 추웠다. 요러크럼 추운 삼동 날씨는 세상 구경을 하러나온 이래 첨이라고 동네 어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눈도 엄청나게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눈 치우는 가래와 댑싸리비를 손에 들고 살다시피 했다. 찾아올 사람은 없어도 찾아 나설 곳은 있기에 무릎이 묻히게 쌓인 눈을 필히 치워야 했다. 오두막에서 마을회관까지 이어진 길을 거침없이 오가기 위해서였다. 산골 마을회관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곳이다. 보고 듣는 것이 별로 없으니 어제 했던 이바구 오늘 또 하고 내일 해도 무방할 이바구 오늘 앞당겨 쏟아놔야 성깔이 풀리는 곳이 바로 마을회관이다. 이바구 중에는 다가올 농사 거리가 자연 한 몫을 하게 마련이다.이태째인 작년 농사는 첫해와는 달리 평년작은 되었다. 영 글러먹은 첫해 농사일을 교훈 삼아 마을회관에서 귀동냥을 한 농사 이바구가 아주 유효했다.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금년 농사는 더 알차고 멋들어지게 지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손끝이 간질거려 못 견디겠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2.08 23:02

문학상 유감

지난 주말 제 24회 전북 문학상(시 부문)을 받게 되었다. 문단에 등단한 지 32년만의 일이다. 1965년 대학 1학년 때 박범신, 강상기 등과 '지하수'란 문학 동인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합치면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셈이다. 근래에는 1년에 3명씩 이 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근자에 와서는 후배문인들이 대부분 이 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학상이란 게 꼭 등단 순서나 선후배를 따져 주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좁은 지역에서 고만 고만한 얼굴로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처지에, 후배들이 그것도 내 또래를 지나 저 멀리 훌쩍 지나가버리자, 이젠 설령 누가 챙겨 준다고 하더라도 후배들 뒤에 서서 나도 이 상을 받겠노라고 얼굴을 내밀기가 쉽지 않은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기치도 않는 그 예의 '전북 문학상'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당황스럽고 착잡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몇 주 전 전북시인상을 수상하시게 된 J선배 문인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 몇 십 년 전, 작고하신 전북대 K 교수님께서 전북 문화상을 제자들과 한 자리에 서서 받으시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못 이긴 체 받아들이고 말았다. 상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는, 상을 탔다고 해서, 그것도 남보다 먼저,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그 상을 받게 되었느냐가 먼저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받기는 받아도 별로 고맙지 않게 생각되는 상도 있고, 또 생각지도 않았는데 주변에서 챙겨주어, 받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좀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한편 고맙기도 한 그런 상이 있기 마련이다. 한 20년 전의 일이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생겨 내가 그 과의 학과장이 되고 또 초대 교무처장이 되어 얼마 안 되던 날이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문예지 발행인이 찾아와 우리 과 학생의 외삼촌인가가 된다고 했다. 연구실에 꽂혀 있는 내 시들을 읽어보더니 시집을 한 권 내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이면 제1회 문학상, 그것도 그 유명한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 이름의 '제 1회 문학상'을 주겠노라고 했다. 시골 학교에 있는, 그것도 문예창작과 교수인 나로서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날부터 열심히 시를 썼고, 쓰면서 종종 그 약속을 확인해 가면서 일 년 후에 이전의 시와 합쳐 한 권 분량의 시가 모아지자 부푼 기대감으로 원고를 올려 보냈다. 표지에 올릴 프로필 사진도 수십 여장을 찍어 그 중에 한 장을 골라 보냈고, 시집의 제목도 '산행일기'로 정하여, 발문까지 서울 모 대학 국문과 K교수께 어렵게 부탁하여 받았다. 초고를 찍어 교정본을 마무리하여 올려 보내놓고도 다시 읽어보면 볼 때마다 고칠 데가 또 생기고 또 생겨났다. 이렇게 수정에 또 수정을 거듭하다 보니 출판사에서 난색을 표명하여 그만 인쇄에 부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집이 집으로 배달되었는데 다시 보아도 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시가 우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누가 내 시를 즐겨 읽겠는가? 도저히 그대로 시집을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문학상에 그만 눈이 멀어 서둘러 책을 낸 게 잘 못이었다. 책 1000권을 고스란히 폐기처분하고 말았다. 하도 아쉬워 그 중 한 권은 지금도 내 서재에 꽂혀 있다. 그래서인지 이후 문학상에 대한 나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준다고 해서 덥퍽 덥퍽 상을 받을 일이 아니다. 탈만한 사람이 상을 타면 상을 타는 사람도 상을 주는 사람도 또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즐겁고 기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상을 받는 사람도 애써 상을 마련해 주는 사람도 뒤에 가서 욕을 먹게 된다. 주저리 주저리 훈장을 가슴에 달고 뽐내는 후진국 지도자들의 모습처럼,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다니는 문학상 사냥꾼들도 있다. 요즘에 와선 신문사 신춘문예에까지 이런 풍조가 번지고 있어 연말만 되면 신문사마다 쫓아다니는 신종 신춘문예 사냥꾼 문인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번 나의 문학상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 것인지 모를 일이다. 평생을 문학의 길에 들어 이 길을 걸어왔건만 나이가 들어 그것도 상을 하도 오랜만에 타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마냥 기뻐 할 수만 없어 무거운 마음으로 한 번 해 본 말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2.01 23:02

못과 망치의 변주곡 - 이연희

며칠 전 운동 삼아 삼천천 근처를 걸었다. 걷다가 '꿈꾸는 목공방' 이라는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렸다. 원목으로 만든 침대며 책상, 장신구의 선반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왕 내친 김에 문을 밀고 들어갔다. 집 주소가 바뀐 지 두 해째이나 거실 벽 한 면의 허전한 구석이 그대로이다. 그 자리에 무언가를 장식하고 싶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왔던 터라 찬찬히 둘러볼 요량이었다. 주인 없는 가게에 인기척이 있자 삼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작업실에서 나왔다. 동글납작한 얼굴에 잔뜩 먼지가 묻어있는 감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뽀얀 나무먼지로 덮인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서 흰머리처럼 보였다. 그는 아마 톱으로 나무를 자르거나 대패로 깎아내는 일을 하다 나온 모양이었다.맘에 드는 물건을 주문해 놓고 밖으로 나와 조금 더 걷기로 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목공방 아저씨의 톱밥먼지에 절은 수더분한 얼굴하며 유순한 눈매가 뒷전에 머물더니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에게 나무며 톱, 망치, 못 등은 평생 친구이자 밥줄이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한솥밥을 먹던 직공이 그 밥줄을 통째로 집어들고 줄행랑을 쳤다. 그 때 우리 집 형편이 곤궁해서 아버지의 상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새 연장을 마련할 때마다 아버지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더 늘었다. 이삼십 평 남짓한 공간은 잘라 맞추고 두드리는 일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나무먼지와 나무냄새로 인해 아버지의 모습은 안개 속에 서 있는 느티나무 같았다. 반세기동안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허리 펼 날이 없었다. 못과 망치, 날카로운 톱과 대패날은 아버지의 손에 늘 피멍과 함께 깊고 얕은 상처를 남겼다. 톱날의 우렁찬 소리가 공장 안에 그들먹해질 무렵이면 거북이 등껍질 같은 아버지의 손에서는 씩씩하고 경쾌한 못과 망치의 변주곡이 흘러 나왔다. 못과 망치의 절묘한 어울림은 어깨며 팔뚝 근육을 불끈불끈 솟구치게 했다. 굵고 가는 나무들은 자르고 맞추기, 문지르며 두드리고 깎아내기 등의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자개농이나 찬장, 고풍스러운 무늬가 있는 문으로 완성되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허기를 면했으며 가족들의 배가 부를수록 아버지의 허리는 휘고 또 휘었다. 일상에서 아주 가끔 못을 사용해야 할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연상하면서 자신 있게 망치를 휘둘러대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못이 휘어지거나 비스듬히 박히고 더러는 톡 튀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잘못하여 못이 뽑힌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아 눈엣가시가 되었다. 누군들 상처 없는 생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도 가끔은 신세 한탄을 하셨다. 그러나 오랜 세월 아버지는 기꺼이 못이 되었고, 그 못은 가족에게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것이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흔들리는 기둥에 중심이 되었다면 아버지는 나에게도 영원한 못이었다. 내 몸이 헐렁해지거나 느슨해져 비틀거릴 때마다 텅텅 못질에 녹슬지 않도록 윤활유까지 칠해주셨으니 말이다. 젊은 날 소음에 시달린 탓으로 귀가 어둡고 다리가 불편해 조금만 걸어도 비척거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젊은 날의 아버지를 그려본다. 다시 들을 수 없는 못과 망치의 힘찬 변주곡이 무한정 그리운 날, 저 산 너머 언덕 아래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를 소리쳐 불러본다. 아버지의 화답일까? 햇빛 한 줄기가 시린 어깨에 내려앉는다. 참 따숩다.* 수필가 이연희씨는 1993년 전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수필집'풀꽃들과 만나다'등이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1.25 23:02

버스를 기다리며 - 송 순 녀

정초부터 쏟아지는 폭설은 십년 된 제 중고차의 발목을 묶어 놓고야말았습니다. 시외지역이라 더 많은 눈이 내리곤 하는 지형 탓에 버스로 출퇴근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퇴근길에 아무도 없는 빈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저의 인내력을 시험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겨우 저녁 일곱 시가 지났을 뿐인데 산골의 겨울은 이미 깊은 어둠에 쌓여 있습니다. 버스가 들어오는 방향만을 향해 목을 빼고 기다리다보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것은 따뜻한 차 안에서 여유롭게 운전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승용차 불빛이 다가오면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차마 손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아 애꿎은 손가락만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그러면서도 다가온 승용차가 멈출 듯 그냥 미끄러져 가면 차 꽁무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참,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들이군. 아니, 가는 길에 태우고 가면 기름이 더 들기라도 하나? 내가 먼저 손들기 전에 그치면 안 되는 거야?' 하고 투덜댑니다. 그러다가 이번엔 '왜, 버스는 안 오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이 파업을 해도 시민들이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시간을 지키지 않은 운전자가 도대체 누군지, 내 그 얼굴을 똑똑히 봐두고 말테다.' 씩씩거리며 거친 발길로 옆에 쌓인 눈을 툭툭 차보지만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한 시간의 좌선은 거뜬한데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단 십 분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십분. 삼십분. 오십분…. 온몸이 덜덜 떨려오고 손발이 쑤셔옵니다. 자꾸 콧물이 새어나오고 코와 입 주변이 칼로 베이는 듯 아파옵니다. 나중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저기 멀리서 아주 큰 불빛이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게 보입니다. 튕기듯 일어나 차도에 다가섭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빨간 불빛을 향해 손을 마구마구 흔들어대지만 웬걸, 큰 차는 나를 비켜 지나치고 맙니다. 직행버스였습니다. 그렇게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거나 시내버스인 줄 알고 손을 들었다가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사이 몸은 점차 굳어져가고 얼굴은 새파래져 갑니다. 이 적막한 겨울 산속에서 이대로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나를 데리려 와달라고 부탁해 볼만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빕니다. 그러다가 입장을 바꾸어, 누군가가 지금의 이 상황에 맞닥뜨려 있는 걸 알았다면 그를 위해 이 폭설을 뚫고 갈 용기가 있는가?'하고 자문해봅니다. 절로 고개가 흔들립니다. 각박하고 흉흉한 일들이 무시로 일어나는 세상에, 그것도 눈이 쏟아지는 인적 드문 한밤중에 낯선 사람을 선뜻 태우기란 제가 운전자라 하여도 내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제 앞을 지나친 운전자들에 대한 미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인생에 오지 않는 게 어디 버스 하나뿐이던가요. 청춘이, 꿈이, 성공이, 건강이 다 그렇지요.이제 온 몸이 아리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쯤 다시 저기 멀리서 지금까지 봐왔던 불빛과 다른 녹색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슴이 뜁니다. 아! 시내버스입니다. 진짜로 기적처럼 저 눈발을 헤치며 용감하게 버스가 오고 있습니다. 손을 들지 않았는데도 버스는 제 앞에서 멈춥니다. 정확히 한 시간 사십오 분 만에 '촤르르 끼이익~ 덜컹' 문이 열립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버스는 폭설 속에서도 천리마처럼 달려 나갑니다. 한 사람뿐인 승객을 태우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게 되려 제가 미안해집니다. 버스기사를 욕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이 가슴에 찹니다. 안전하게 집 앞에 내려준 기사님께 정중히 절을 올리며 첨으로 입을 엽니다. "기사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조심히 살펴가세요." 오늘도 눈이 내립니다. 저는 완전무장을 하고 저녁 정류장에 서 있습니다.* 수필가 송순녀씨는 2004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완주 송광사 입구에서 차(茶)를 연구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1.18 23:02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아내가 핸드폰을 들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화면을 집었다 놓았다 하면서 옆으로 죽죽 밀어 본다. 뭐하느냐고 물었더니 요즈음 여자들이 하는 대로 자기도 한 번 해보고 있다고 대답한다. 구식 핸드폰 가지고는 안 되고 컴퓨터 기능까지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 구입하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핸드폰이 정이 들었고 휴대하기 좋으며, 지금 휴대폰도 자기가 쓰는데 불편이 없다고 한다. 길에서나 버스정류장 등 어디를 보아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열심히 손을 놀리거나,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는 학생들뿐이다.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데도 각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낯설어 보인다. 학창시절 우리를 설레게 했던 알폰스 도데의 '어느 목동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름다운 아가씨, 스테파노와 같은 이미지는 문학작품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보다 오늘날의 인간 정신세계는 더 나아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데 기계문명의 발전은 어지러울 정도이다. 제발 그만 좀 발달하면 안 될까 싶을 때가 있을 정도이다. 나방은 저의 둥지를 힘들게 빠져 나와야 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했다. 인간의 수명도 어느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좋은 게 좋다고 우리는 생명의 한계를 계속 늘려만 가도 되는 것일까?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은 아닐 텐데…. 지나치게 편리함을 추구하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의 이면에 상대적 빈곤감과 소외감으로 인한 갈등의 벽을 쌓고 있다.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스스로 결정하는 생각의 힘도 잃어 가고 있다.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외롭기 때문에 둘례길 열풍과 집단 쏠림이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풍기는 느낌과 분위기는 다르게 마련이다. 상대에 대한 이러한 아우라(Aura)를 느끼지 못하니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아 결혼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나만의 우려는 아닐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도 SNS등으로 유포된 일부 사연들은 사고의 깊은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진 결과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염려하게 했다.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끈 채 가공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즐기고 싶다. 지난 해 11월 충북 옥천에서 한반도와 닮은 지형을 볼 수 있다는 둔주봉 전망대에 올랐다. 금강의 느릿한 물결이 여유롭다. 그런데 두 여인이 일행과 한참 뒤처져서 손을 잡고 오르고 있었다. 한 여인은 다리를 절며 다른 여인의 손을 지팡이 삼아 끝까지 올랐다. 좋은 심성과 배려로 아주머니의 자녀들은 잘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우리 사회의 갈등의 벽을 허물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계사년 뱀띠해다. 편리하고 새로운 것만 찾기보다는 옛 방식의 좋은 점도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매사에 너무 각을 세우지 말고 우리들 가슴의 응어리가 있다면 봄눈 녹듯 녹아내렸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최동명 씨는 '덕진문학' 회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전 전라북도의회 근무

  • 오피니언
  • 기고
  • 2013.01.11 23:02

내가 뽑은 괘(卦)

중년의 증권브로커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연히 잠적해 버린다. 그는 아내에게 집을 나가겠다는 짧은 편지를 남겼을 뿐 구체적인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아내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파리의 뒷골목에서 그를 찾고 보니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중년의 사내 찰스 스트릭랜드는 가슴에 일렁이는 예술혼에 이끌려 여태까지 누렸던 부귀영화를 버리고 예술 활동에 전념한다는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의 이야기다.사람들은 누구나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꿈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그만 이를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맞아, 내가 그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어!"라며 희미하게나마 젊은 날의 무지개를 되돌아본다. 이 이야기는 화가 고갱의 자서전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소설적 장치가 어떠하든 우리에게 가슴에 묻어 둔 꿈을 한번쯤 돌아보게 한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서너 명과 함께 강천산에 올랐다. 정상 부근 옛 절터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을 우러러 보면서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즉 우뚝 선 나무의 줄기에다 각자의 이름을 새겨놓고 소망을 빌기로 한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몰상식한 일이지만, 신라 화랑들이 돌에 서원(誓願)을 새긴 것처럼 우리들은 나무에다 새겼으니, 철부지들의 생각치고는 엉뚱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우리 친구들에게는 각기 별도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염우구박(廉牛求博)'이라는 우스꽝스럽고 낯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의미만큼은 나름 심오했다. '廉牛'는 '청렴한 소'로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삶'을, '求博'은 '널리 구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제때에 상급학교에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기에 '廉牛'는 당시의 적나라한 나의 모습이었고, '求博'은 무엇이든 많이 알고자 했던 나의 지적 욕망을 압축한 것으로 배움에 대한 나의 서원(誓願)을 담고 있다. 당시 함께 했던 세 친구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지만, '廉牛求博'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하였다. '廉牛求博'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누구의 입을 통해서 들은 바도 없고, 사전(辭典)이나 선현의 고사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내 가슴을 달궈주었던 나만의 이름이기에 늘 정겹다. 어릴 적 서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뼘 지혜를 넓히는 데에 소홀히 했고, 언제나 바쁜 일상에 휘청거렸던 것 같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나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책을 읽고, 틈틈이 내 생각을 나만의 글 바구니에 담기 시작하면서 '求博'의 삶에 다가가고자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스스로 마음 밭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많지만, 글밭을 가꾸면서 스스로 성장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삶의 수준이나 양상을 크게 바꿔주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일이었고 작은 기쁨으로 이어졌다. 내 컴퓨터 '글마당'에 한 편 한 편 늘어가는 글들은 언젠가는 나만의 향기가 담긴 책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廉牛求博! 세상 물정 몰랐던 어린 시절에 내가 뽑은 '廉牛求博'이라는 괘(卦)를 내 평생의 괘(卦)로 삼을 줄이야. 이는 내가 작명한 이름이기보다는 이제는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줄곧 외길 교직의 길을 작은 사명감으로 설레면서 살아왔고, 남은 기간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일상의 편린들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여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스트릭랜드가 파리의 뒷골목에서 그림에 빠졌듯이 나 또한 자그마한 서가에 갇히고 싶다.* 수필가 송일섭씨는 2010년 '수필시대'로 등단했다. 현재 장수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13.01.04 23:0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