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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와 복숭아

▲ 김 금 례 큰아들 내외가 힘겨운 듯 끙끙거리며 들어왔다. 자식들이 집에 가져오는 과일을 보면 어느 계절인지 알 수가 있다. 오늘은 복숭아다. 상자속의 복숭아는 볼연지 붉게 칠한 수줍은 새색시처럼 예쁘게도 생겼다. 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는 과식해도 탈이 없다. 복숭아를 보는 순간 외할머니를 만난 듯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할머니는 평생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면서 사셨다. 그래서 난 여름이면 복숭아를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복숭아 농사는 여름 한 철이라 온 집안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오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날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서 포장하고 예쁜 상자에 넣어 동네 모정 앞에 세워둔 자동차에 실어 보내야 하루의 일손이 끝난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어깨에 걸쳤던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나는 자라면서 과수원일이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바구니에 복숭아를 담아 이 집 저 집 나누어 주면서 웃음꽃을 피우셨다. 아이들이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할머니는 전화를 하셨다. "애야! 복숭아 많이 따는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와서 복숭아도 가져가거라." 애틋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출가한 외손녀의 손자까지 챙기시는 할머니셨다. 복숭아는 비타민A와 C, 펙틴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주며 니코틴을 해독하여 가래와 기침에 좋다. 사과산과 구연산 등 피로를 풀어주는 천연 유기산이 들어있어 간 기능 개선과 혈액순환 개선 및 피부 미용, 위장기능 개선에도 좋아 여름철 과일 중 황제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외가 덕에 복숭아, 복숭아 잼, 주스를 많이 먹고 자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625도 외가에서 보냈다. 가끔 막내 이모와 다투면 외할아버지는 "차라리 핏덩이랑 싸워라." 하시면서 내편이 되어주셨다. 여름방학을 하면 책을 짊어지고 외가로 달려갔다. 모든 식구들이 과수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과수원에서 놀았다. 따갑게 타올랐던 태양이 서산에 기울면 식구들은 반딧불을 벗 삼아 시냇가에서 목욕을 했다. 시원했던 그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저녁 할머니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과수원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모기장 속에서 심청전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 그리고 장화홍련전과 춘향전을 들려주시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시면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노래를 부르셨다. 그 때의 그 선한 눈빛이 생각난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드린다. 노래를 부르시다가 바스락 소리가 나자, 멈추셨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 한참 뒤에 손전등을 켜고 기침소리를 내니 보자기를 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었다. "할머니! 복숭아 도독이지요?" "아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놀다가 배가 고프니 서리하러 온 것 같구나." 도둑이 아니어서 조였던 마음이 풀렸다. 할머니 모습이 어제인 듯 떠오른다. 할머니는 소탈하시고 겸손하시며 정이 많으셨다. 세월은 훌쩍 지나갔어도 할머니에게서 받은 정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서리를 도둑이라고 한다. 언젠가 산에서 감나무와 밤나무에서 과일을 조금 따다가 도둑으로 몰려 몇 배의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한다. 세상이 그만큼 야박해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과수원을 가꾸셨던 식구들이 세상을 떠나고 과수원의 과일나무들도 고목이 되어 남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때는 어제인 듯싶은데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외숙모는 평생 복숭아와 함께 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상에 복숭아캔을 올린다고 하셨다. 여름에 복숭아를 보면 인자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나도 여생을 복숭아 향기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수필가 김금례씨는'수필시대'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를 냈다.

  • 오피니언
  • 김원용
  • 2012.08.03 23:02

등잔불

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집은 등잔불을 밝히고 살았다. 안방과 부뚜막 조왕, 그리고 마루기둥에 등잔대를 만들어 성냥과 나란히 놓았었다. 대두병에는 물같이 맑은 기름이 항상 절반 이상 담겨 있었으며 기름이 달아난다고 마개를 야무지게 틀어막아 그늘진 곳에 걸어 두었었다. 행여 대두병에 성냥을 그어대면 불이 난다며 어찌나 단속을 했던지 동생과 나는 아예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기름이 바로 휘발성이 강한 석유였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마른장마 끝에 애타게 기다렸던 비라서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빠른 손놀림으로 집안일을 대충 마치고 삽을 들고 논으로 가셨다. 초가지붕의 호박넝쿨을 타고 쏟아지는 집시랑 물이 금세 빈 항아리에 가득 차올랐다. 낙숫물의 색깔이 간장 같았다. 강아지와 닭들이 덩달아 갈팡질팡 하였다. 나는 저녁밥을 지으려고 아궁이에 짚불을 지폈고 강아지는 아궁이 옆에 젖은 몸으로 다리를 접고 앉았다. 처마 밑에서 함초롬히 비를 맞은 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태에 들어가 홰를 쳤다.방천 둑에 매어 놓았던 송아지랑 염소는 진즉 집으로 끌고 왔건만, 논 물꼬를 보러 가신 아버지는 땅거미가 내리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 무렵 병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어린 동생과 나는 걱정이 되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생각다 못해 호롱 심지를 돋우고 불을 밝혀 논으로 갈 채비를 하였다. 나는 어른들의 등잔 다루는 법을 평소 지켜본 터였다. 마당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실 때는 호롱 심지를 크게 올렸다. 그러면 끄름은 생길망정 불꽃이 커져 사방을 밝게 비췄다. 방에서는 다시 심지를 평상으로 줄이면 끄름도 나지 않고 적당히 밝아져서 공부하기에 좋았다. 기름이 떨어질 때쯤이면 심지가 타들어가 금방이라도 불이 꺼질 것 같다가도 호롱에 석유를 넣으면 거짓말같이 불이 밝아졌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서쪽하늘에 금방 떠있던 초승달은 벌써 지고 없었다. 아마 칠월 초사나흘쯤이었나 싶다. 등불을 켜들고 동생과 나, 강아지까지 셋이서 강둑을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강아지풀을 꺾어 코에 붙여 콧수염을 달기도 하고 클로버 꽃을 엮어 손목시계와 반지를 만들어 차기도 하며 뛰놀던 방천길,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는 길이건만 그날 밤의 그 길은 왜 그리도 터덕거리고 무서웠던지.한바탕 내린 비로 하늘은 처량하리만치 맑아 초롱초롱한 별과 은하수가 작은 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가끔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번개가 칠 때면 둑길에 서있는 전봇대가 마치 커다란 뼈다귀처럼 휙 다가왔다. 깡충거리던 강아지도 놀랐던지 낑낑댔다. 그래도 동생과 나는 조금만 참으면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대로 무서움을 삼키며 더듬더듬 걷고 있었다.논이 가까워질수록 만약에 아버지가 그곳에 계시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들고 있던 등불마저 휘청거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뒤범벅되어 동생과 나는 맹꽁이와 함께 3중창으로 울고 있었다. 그때였다. 논배미 물꼬 쪽에서 아버지의 기척이 들려왔다. 반가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적막한 밤공기는 성능 좋은 마이크가 되어 허허벌판을 울음소리로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쪽으로 오셨다. 내 일생에 그때처럼 아버지가 반갑고 고마웠으며 커보였을까. 어린 마음에 최고로 여기던 신부님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더 높아 보인 순간이었다. 가톨릭신자였던 아버지는 기도를 하시면서 어제 비료를 뿌렸기에 논물이 넘치지 않도록 물꼬를 조절하고 계셨던 것이다.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동생을 지게에 태우고 나는 아버지의 삼베바지를 움켜쥔 채 강아지랑 졸랑졸랑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내 작은 손으로 아버지의 삼베바지를 움켜쥐었던 그 촉감! 땀과 빗물과 논물로 얼룩진 아버지! 아버지는 방을 밝히고 마당을 밝히고 나를 밝혀주는 등잔불이었다.※ 수필가 최정순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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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7 23:02

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또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의 아들이다. 우리 부모는 딸 둘에 아들 둘을 낳으시고, 딸아들 순으로 질서 있게 전부 열 명을 낳으셨다. 그중에서도 나는 막둥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 위의 누나는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살 때 저 세상으로 갔으니까 나는 그 누나를 잘 모른다. 단 한 사람 살아계시는 내 형님은 나와 다섯 살 차이다. 그 형님은 바로 밑의 동생인 그 누나를 잘 안다. 그래서 형님은 우리가 10남매라 하고 나는 9남매라고 한다.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는 9년간 함께 살았지만 내가 3살 때부터 일을 기억하고 있으니 정확하게는 6년간 같이 산 셈이다. 어머니는 26년간 함께 살았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해서는 생생한 기억들이 참 많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가 더 그리워진다. 아버지가 내가 대학교에 들어갈 열아홉 살 때까지만 사셨더라도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한 맺힌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말라리아라는 병으로 시달렸다. 오후가 되어 몸에 열이 나고 덜덜 떨리기 시작하면 어머니가 더 걱정을 하셨다. 말라리아는 그 시절 많이 유행했던 병이다. 어머니는 그 병을 낫게 하려고 나에게 깅계랍(키니네)이라는 약을 먹이려고 하시고 나는 그 약이 너무 써서 안 먹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면 배추김치 잎에다 싸서 주시기도 하고 약 먹은 다음에 설탕가루를 얼른 입에다 수저로 떠 넣으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에 따라오라고 하셨다. 학질을 낫게 해주시려고 그런 줄로 짐작을 했다. 이삿짐 뒤 강아지 따라가듯 졸래졸래 따라 갔더니 앞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 청년등이라는 야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산에는 큰 무덤과 비석이 있었다. 대낮에도 혼자 그 앞을 지나려면 간이 콩알만 해지고 오싹오싹해져서 달음질 쳐서 지나다니던 곳이다. 아버지는 나더러 그 무덤 옆 잔디에다 머리를 대고 재주를 한 바퀴 넘으면 학질이 떨어진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내가 머리를 대고 막 한 바퀴를 구르자마자, 아버지는 "귀신 나온다!"라고 외치면서 도망치듯 달음박질로 뛰어가셨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는 거친 손마디로 내 눈물을 닦아주시고 나를 등에 업고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갔다. 학질이라는 병이 놀라게 하면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다음해 겨울 위장병이 생겼다. 약도 쓰고 체를 내린다는 사람이 배를 주무르기도 했지만 낫지 않았다. 어머니와 안방을 쓰지 못하고 사랑채에서 혼자 밥도 제대로 못 드시고 무릎을 세우고 앉거나 누워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 집에 좀도둑이 들었다. 사랑채에 아픈 아버지만 계신다는 것을 안 좀도둑이 사랑채 앞에서 훔칠 물건을 찾는 것을 본 아버지는 기침을 해서 돌려보내셨다. 다음날 아침 그 얘기를 들은 우리 가족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알 것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가 누구란 걸 아시면서도 끝내 알려주지 않고 다음해 이승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말씀이 적고 퍽 조용한 분이셨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말이 많지 않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경찰관 생활 37년간 하면서 나이 이순을 넘기자 여자들 앞에서 수줍음도 타지 않고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른다. 이런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닮고 싶어했던 것은 아버지가 더 사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를 낳고 비록 일찍 가셨지만, 내가 그 분을 많이 닮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전북경찰청 경정으로 정년 퇴직한 수필가 이수홍 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해 수필집'노래하는 산수유 '(2008),'춤추는 산수유'(2010)에 이어 '북창구 치는 산수유나무'(2012)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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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0 23:02

죽록원을 다녀와서

죽취일(竹醉日)에 마술을 걸었다. 음력 5월 13일. 이날은 대나무가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하는 날이란다. 이날에 옮겨 심으면 뿌리를 잘 내린다는데, 이날이 아니어도 옮겨 심고서 종이에 '음력 5월 13일 죽취일' 이라고 써 붙이면 효과가 있다. 대나무를 옮겨 심기에 두 번이나 실패했다. 두번 째까지 실패하겠다 싶어 처방을 써 붙였다. 처음과 두 번째는 일반 대나무였고, 세 번째가 오죽이었다.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신선한 곳에서만 뿌리를 내린다는 말처럼 몸살이 심했다. 병이 들어 약물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새순이 벌어졌다. 성급한 마음처럼 순죽(筍竹)이 나와 마디기 쑥쑥 커졌지만, 내 키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연둣빛 잎이나 줄기가 같은 색이어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까마귀처럼 검은색을 띈다 해서 오죽이라는데 처음부터 검은색을 띄는 게 아니라 몇 개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사군자 그림이 안방에 있었다. 오랫동안 자게 장롱의 그림을 보면서 또는 사군자의 매화, 국화, 난은 쳐봤는데 대나무를 칠 때부터 붓을 놓았던 옛 생각 때문인지 대나무에 애착이 갔다. 베란다에 매화, 난, 대나무가 있음에 괜히 들떴고, 가을이 되어 국화꽃 화분이라도 들여 놓으면 사군자의 구색을 갖춘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애써 구색을 갖추었는지도 모른다.사시사철 대나무, 읊조리던 것처럼 청정한 댓잎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서 흡사 대나무가 죽은 것처럼 마른 잎이 되어갔다. 베란다에서 자라는 환경 탓에 짙푸른 댓잎 숲을 이루지도 못한다. 온상속의 화초처럼 대나무의 기질을 맛볼 수가 없다. 촉촉이 비를 맞은 우죽(雨竹)일 때의 모습도 볼 수 없다. 대나무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아 풍죽(風竹)도 없고 대나무의 속성을 잃어버리진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마음 속에서 우는 바람 소리의 여운은 아직도 가슴 한 곳에 여전하고, 눈에는 바람에 흔들리고 가슴엔 스산한 바람 한자락 자리하고 있는데 묵은 댓잎 뿐이다. 달빛이 스미는 밤이면 희부연 '亞' 모양의 창문에 비친 댓잎 그림자는 그럴싸하니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한 줄기씩 훑기도 하고 한 잎씩 뜯어내자니 한움큼이 되었다.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았던 나무를 기른다는 것은 하찮은 졸부로서는 흉내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정성을 기울일 따름이다.죽록원을 몇 차례 다녀왔다. 대나무숲은 바라만 보아도 기운이 서린다. 대숲으로 난 길을 걷노라면 하늘빛이 새어 들 수 없어서인지 한 여름에도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 눈이 내린 대숲은 한기로 등줄기가 오싹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사람들만 발자국을 내야 할 것 같은 세계에 온 듯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하얀색과 녹색의 어울림은 신비의 세계를 열어준다.5월의 대숲은 죽순의 속삭임으로 수런거린다. 여기저기에서 고깔모자 쓰고 고개를 내밀고 대숲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제 막 겹겹이 두른 테가 벗겨지고 이슬 걷힌 맑은 순록의 표면에 생채기를 내고 낙서를 한 사람들 참 못할 짓이다. 갓난아기 속살에 문신을 하라지. 허공을 찌르듯이 솟은 키에 비해 깊이 뿌리내리지 않아도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것은 비움 때문이란다. 사람들 마음을 비우는 법을 알려주려고 마디마다 비움으로 채웠는데, 대통밥을 앞에 두고서는 빈 마음을 배울 수가 없었다. 대나무가 지닌 속성과 사람이 지닌 속성이 다르니, 대나무의 속성을 담기 원하는 마음으로 온갖 생활도구를 만들어 쓰고, 대통 속에 밥을 지어먹나 보다. 밥 한 끼로는 인간의 속성이 아랑곳하지 않을 터. 속됨만 키울 뿐이다. 오히려 속살이 쪄서 비움의 의미가 무색해지지는 않을까. '어떤 시인은 백초는 다 심어도 대는 심지않겠단다. 구슬픈 가락을 내는 피리를 만들기에, 화살을 만들어 쏘면 돌아오지 않기에, 여읜 임을 그리느라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붓대를 만들기에.''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많은 손길을 담아 분죽(盆竹)을 키운 지 몇 해. 다음 해엔 더 푸른 댓잎을 보기 위해 두루두루 거름을 묻는다.※ 수필가 장효근씨는 1998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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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6 23:02

그냥 좋은 비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또렷한 기억은 없으나 노곤했던 봄날에 단잠을 잔 것처럼 잠이 잠을 취하게 했던 지난밤이었다. 잠속의 꿈, 꿈속의 잠이었으니 쌓인 피로를 한 방에 날려버린 기분이었다. 거뜬한 몸으로 일어나 창밖 풍경과 마주했다. 밤새 비님이 살짝 다녀가신 모양이다. 비에 젖은 나뭇잎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간밤의 이상야릇한 기운이 바로 비 때문 이었구나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도 열 살을 갓 넘겼던 그 때부터 비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파란 비닐우산이나 누런 지(종이)우산을 받고 등하교를 하던 날은 괜스레 설레고 기분 좋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비 내리기 전, 시큰둥한 하늘의 낯꽃 또한 싫지 않았다. 검회색 구름이 점점 더 드리워지면 하늘보다 더 낮은 자세로 창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이런저런 상념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시커먼 구름이 성난 짐승이나 험상궂은 형상으로 다가올 때면 겁에 질려 후다닥 커튼을 내려야 했다. 천둥 번개가 하늘을 두 동강이라도 낼 것처럼 으르렁거릴 적에는 지난 시간의 허물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덤빌 때는 그를 잠깐 원망도 했다. 그럼에도 비가 내리면 낭만을 찾고 여유를 즐기려는 분위기의 여왕이 되곤 했다. 종종, 비를 몰고 오는 습한 바람이 좋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나뭇가지가 춤을 추고 풀들이 돌아누웠다가 우르르 일어서는 들녘에서 나는, 나무가 되고 풀을 닮아 같이 눕고 함께 일어서서 등뼈를 곧추세웠다. 세찬 바람에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잔가지의 아픔이나 풀들의 멀미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의 유연함에 우우우~ 탄성을 질렀다. 강함의 본때를 보여주는 그들의 인생철학에 박수를 보냈다.후드득 - 빗줄기가 강가를 건너 올 때면 재빨리 둥구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나무 아래 넓적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거나 늙은 나무 몸통에 몸을 기대고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맥없이 그랬다. 내 발치에 빗물이 흐를 즈음이면 내 몸에도 한기가 스미어 오돌돌 떨면서 집으로 향했다. 풋내 나는 이십대, 깜냥에는 그런 게 낭만을 즐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 맞춰 울고 싶은 날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터이니 펑펑 울 수 있어 좋았던 비. 울음소리마저 아니 그 설움의 덩어리조차도 기꺼이 감싸 안아 주었던 고마운 비. 뿐인가, 울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난 다음의 가벼움이라니.지금도 나는, 저만큼에서부터 퀴퀴한 흙내음과 함께 산을 넘고 실개천을 가로질러 오는 비가 그냥 좋다. 그래서인지 비 내리는 밤에는 긴 시간 포근한 잠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따금 비와 더불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경 그들은, 비를 보면서 내 생각을 했음이니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요즘, 온 국토가 가뭄에 메말라가고 있다. 마치 일상에 절어 사는 나의 일상처럼 건조하고 팍팍하다.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은 시원한 빗줄기 보기를 소원한다.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빗소리와 함께 따스한 안부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솟구치는 그리움이 언덕을 넘는다.※ 수필가 이연희 씨는 199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인도 가는 길','풀꽃들과 만나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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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9 23:02

꿀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꿀비였다. 몸이 새털구름처럼 가벼웠다. 시원한 꿀 차를 한 대접 마신 것 같다. 창문을 열자 구수한 흙냄새를 따라 고구마 밭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냉수 한 잔 마신 후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고 재래시장으로 갔다.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은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고구마 순 있느냐는 말에 비가 오는 날에는 찾는 손님이 많다며 너무 늦었다고만 했다. 그래도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다. 운 좋게도 시장 깊숙한 곳에서 고구마 순과 몇 가지 종묘를 살 수 있었다.심기 전에 물에 적셔놓을 생각으로 화장실에 가 수도를 틀고 막 순을 집어 드는데 물끄러미 보고 있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고구마 순이네요""예, 오후에 심을 건데 물 주려고요.""아닌디, 거 고구마는 선인장처럼 꽂아 놓으면 뿌리가 나요. 심기 전에 하루 정도 그늘에 놓았다가 심으면 땅에서 물을 쭉 빨아들이지요.""그래요?" 멋쩍게 웃으며 봉지에 다시 담아 사무실로 왔다.?자꾸만 검은 봉지에 눈이 갔다. 오는 사람마다 궁금해 했다. "예, 이 주 전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엊그제 가보니 몇 개만 살고 다 타 죽었어요. 어찌나 허탈한지. 농부의 마음을 알 것 같더라고요. 다시 심으려고요." "밭이 어디요?""여산요.""왜 굳이 그 먼 여산에?""실은 여산에 납골묘지가 있거든요. 한쪽에 빙 둘러 매실, 감나무 등을 심었는데, 가운데 빈 곳이 있어 땅을 일궜어요. 그래야 산소를 한 번이라도 더 가보지요."몸은 책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고구마 밭에 가 있었다. 일과는 이미 뒤엉켜버렸다. 신문을 펼쳤지만, 눈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문에 흐르는 작은 빗줄기가 밭고랑의 작은 물줄기 같았다. 빗소리가 밭에서 들리는 환호성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노랫소리로 들렸다. 빗소리가 이리 아름답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단비보다 더한 꿀비였다.정오가 가까워지자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해갈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였다. 초조함에 속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 비온 뒤의 맑고 윤기 있는 세상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밭으로 달려갔다. 순을 다시 심었다. 비는 그쳤지만, 적당히 구름이 드리우고 있어 다행이었다. 고구마 순을 다 심고 나자, 물만 주면 산다는 말이 떠올라 아랫마을민가까지 가서 물을 길어다 흥건히 주었다.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일 마치기가 무섭게 고구마 밭으로 달려갔다. 내 정성을 아는지 달님은 폭삭 주저앉아 목숨만 겨우 유지하는 고구마 순을 또렷이 비춰주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달려가지만 도착하면 이미 저녁도 지난 밤중이었다. 매번 민가에 들어가 살쾡이처럼 살금살금 수도에 다가가 꼭지를 틀었다. 쏴아! 물 받는 소리가 잠든 마당을 깨우지만 주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농작물은 발걸음 소리를 먹고 산다우." 며칠 전 주인 양반의 속말이 울릴 뿐이었다.※ 수필가 전성권씨는 2011년 〈문예연구〉로 수필 당선. 〈순수필〉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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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2 23:02

수업을 접다

초등학교 5학년생 아이들 넷을 향해 말했다. "父母有疾(부모유질)이어든 憂而謨趨(우이모추)하라, 이 말은 부모가 편찮으시면 걱정하면서 빨리 낫도록 도와드려야 한다는 뜻이야. 자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한 녀석이 턱주가리를 치켜 올리면서 되물었다. "왜 걱정을 해야 돼요?"다른 녀석들도 금세 고개를 주억거린다. 웃고 까불고 장난치고 바람개비처럼 팔랑거리는 녀석들답다. 이 녀석들은 당최 심각해지질 않는다."아니, 부모가 아픈 데 걱정이 안 돼?"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서로 쳐다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다 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다시 묻는다."그거 걱정할 문제 아닌가?"아이들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다. 잠시 후 한 녀석이 이제 질문의 요지를 알겠다는 듯 시원스레 쏟아낸다."병원에 가면 되잖아요!""맞아요, 맞아요. 병원에 가면 돼요."아하!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하는 표정으로 이젠 이구동성으로 합창이다."야, 인석들아. 병원에 가는 것은 가는 것이고, 가족이 아프면 걱정이 안 되느냐고?"아이들은 다시 난감한 듯 대답이 없는데, 한 녀석이 돌연 뾰루통해져서 사뭇 도전적 어조로 외친다. "엄마는 걱정 안 해요. 혼만 내요.""맞아요, 맞아요. 아무리 아파도 과외는 가야 해요.""맞아요, 맞아요. 정말 나빠요."녀석들은 마치 규탄대회라도 열 듯한 기세다. 맥이 탁 빠진다. 이 녀석들에게 내가 뭘 가르치려고 했던 거지? 내가 한자 몇 자 익혔다고 폼잡고 싶었나. 컵에 물을 천천히 가득 따라 아주 꼭꼭 씹어서 마신다. 다 마실 때까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먹을 게 턱없이 부족했던 내 어린 시절, 과외는 사치였다. 그저 아프지 않고 맘껏 뛰어 놀고 먹을 것 있을 때 배터지게 먹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부모들의 최대의 희망사항은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커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공부까지 잘 하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내 열두 살은 그렇게 갔고 나는 아직도 '열두 살의 아이'란 당연히 그럴 거라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와 같은 생각과 욕망과 놀이 속에 존재하는 아이들로만 이 아이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의 열두 살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픈 것도 먹는 것도 공부에 지장이 없어야 하는 거다. 벌써 이들을 만난 지 반년인데 나는 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의 이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던 거다. 저 팔랑개비 같은 녀석들을 옥죄는 것은 그 넘의 공부, 공부다. 내가 가르치려 했던 것 또한 저들에겐 또 하나의 구속이었겠다. 감옥이고 형벌이었겠다.공짜로 한자 교실을 열면서 나는 제법 자유인 흉내를 냈다."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돼."선심을 있는 대로 베풀었지, 내 멋에 겨워서. 사실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끌려왔고 거부할 수 없었을 뿐인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을 접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속으로만 간절히 부탁했다. "얘들아!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수필가 강병기(공도한의원 원장)씨는 '에세이스트'로 수필(2007)평론(2009)부문에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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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5 23:02

울리지 않는 전화벨

퇴직과 함께 미루던 디스크 수술을 받고 좋아하는 산행을 자제하였다. 겨울입네, 하여 웅크리고 살다보니 몸도 마음도 무겁고 답답하였다. 봄맞이 대청소나 할까 하는데 눈길이 한 곳에 멈칫 섰다. 낯선 손님 둘이 눈에 띈다. 그 중 하나가 검정 우산이다. 아무리 친해보려 애써도 마음이 가지 않고 서먹하다. 볼 때마다 아쉽고 찝찝하다. 그것은 기억하고 싶은 분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그에 대한 애정과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주신 분의 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오래도록 나만이 만져주고 싶은 우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분명히 있어야할 자리가 비어있었다. 어딘가 있겠지 하면서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밤인지라 한잔 하다 보니 아마 청색이 검정으로 보여 '이거겠지' 하고 집어 갔는가싶다. 체념하고 주인에게 말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종종 있다면서 주인 없는 저거라도 들고 가란다. 나는 들고 오며 혹시나 하고 전화번호를 남겨놓았다. 그러나 지금껏 무소식이다.또 한 친구는 등산화다. 등산을 좋아하다보니 자주 신을 것 같아 이번엔 좀 좋은 것으로 준비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색깔이며 디자인이 아무리 보아도 내 맘에 꼭 들었다. 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 때는 많은 돈이 무겁게도 느껴졌지만 신어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아깝지 않았다. 나는 아이마냥 좋아라 '쿵쿵' 굴러보고 뛰어도 보았다. 가끔씩 신어볼라치면 그렇게 가볍고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모처럼 산행을 마치고 휘파람을 불면서 돌아와 시내에서 꽤 잘한다는 음식점에 들러 주린 배를 실컷 채우고 나오니 있어야할 신발이 없다. 아, 이럴 수가! 실망이다. 둘러보니 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게 하나 있어 들여다보니 누군가 한 짝씩 바꿔 신고 간 것이다. 비슷하여 신어보니 발이 편하니까 무심결에 '이것이 내 것이로구나' 하고 기분 좋게 신고 간 것일 게다. 그러나 나로선 가끔씩 만져보던 모습이 멋 적게 떠올라 더욱 씁쓸하였다. 사랑땜을 못한 터라 잘 먹고도 뒷맛은 참으로 개운치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밥값을 치른 후 전화번호를 남겼지만 오늘까지 역시 무소식이다. 상표나 디자인이 확연히 다른데 뱃심 좋게 모른척하고 짝 신발을 신고 다닐 수도 없고 버리자니 그동안 든 정이 아깝다. 누군지도 모를 야속한 사람을 원망하다 체념하다 세상 탓을 해본다. 우산이나 운동화 욕심이 나서 가져간 것은 물론 아닐 게다. 순간의 착오요,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나중에라도 바뀐 것을 알았으면 합당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소식이다. '뭘 그 게나 그 게지, 내 것도 새것인 걸, 다 그럴 수 있지' 하면서 그만둔 것일까? 대충대충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고잔잔한 푸념일 수 있다. 다 자기 마음대로다.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더 이상 언급하면 우스운 사람이 되는 세상이다. 이는 자신의 교양과 인격을 버리는 행위인 동시에 시민의식의 부재로 이것이 바로 후진성이다. 누구나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실수를 통하여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지 않나싶어 아쉽다. 잘 먹고 산다해서 선진국은 아니지 않는가? 어느 외국인이 우리를 나밖에 모르는 한국인이라고 폄하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대정신은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한 말이 의미 있게 들린다. 멈칫 옷깃을 사리는 낯선 우산과 서로 등 돌린 짝 신발을 바라본다. '그럴 수 있지요, 참 고맙습니다' 나는 이런 대답을 준비하고 기다려보지만 무심한 전화벨은 울리지를 않는다. 반가운 벨소리가 우리 모두에게 들리는 날이 바로 선진국으로 가는 날일 것인데 . 청소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가뿐하다. 하늘이 더욱 푸르게 보인다. 내일 모래는 완도 상황봉 산행이다, 지금쯤 새봄맞이에 바쁠 남녘의 일손과 기지개 켜는 봄뜰의 수줍은 몸짓이 눈에 선하여 가슴이 설렌다.※ 시인 겸 수필가 류준식씨는 초등학교 교장을 정년 퇴임. 매월당 문학상, 릴케문학대상 등을 수상. 시집'고향은 부른다', 시조집 '어디 너뿐이랴', 수필집 '아리의 눈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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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8 23:02

월출동령에 돋는 달과 상현 낮달

'일락서산(日落西山)에 해 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돋는다'는 만고의 진리이다. 해는 서쪽에서 지고 달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뉘라서 아니라 하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오직 이것뿐인 듯이 이 상투어는 흥부가. 새타령. 제비가, 양산도, 쾌지나칭칭나네, 옹헤야, 자진농부가 등 온갖 민요나 잡가나 판소리에 등장한다. 불확실한 우리네 인생에서 이 이상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그렇다고 우리가 서산에 해지고 동령에 달뜨는 현상을 항상 보는 것은 아니다. 일락서산이야 그렇다 치고 월출동령을 얼마나 보았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해가 하지에는 5시 15분, 동지에는 7시 40분경에 뜬다. 그 6개월에 2시간 25분 정도이니, 그 차이가 하루 채 1분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는 거의 제 시간을 정해 놓고 제자리에서 뜨지만, 정월 초하룻날만 해도 해맞이를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비가 오거나 구름이 잔뜩 끼면 늦게야 중천에서 뜨는 해를 본다. 달은 어떤가. 달은 날마다 50분씩 늦게 뜬다. 초승달은 음력 3일경 해가 진 후 서쪽 하늘에서 볼 수 있다. 음력 7일이 되면, 초승달에서 점점 차올라 오른쪽 반이 보이는 상현달이 나타난다. 상현달은 한낮에 떠서 해가 지고 난 후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다. 음력 15일 뜨는 보름달은 태양이 지고 난 뒤 동쪽에서 떠올라 자정쯤에 정남쪽에 위치한다. 음력 23일쯤의 하현달은 자정쯤에 떠서 한낮에 지기 때문에, 해가 뜬 이후로는 관측하기 어렵다. 음력 27일경의 그믐달은 새벽에 떠서 해가 뜨기 전까지 동쪽 하늘에서 관측이 가능하다.그러므로 우리는 월출동령을 거의 체험하지 못한다. '그냥 동령에서 떴겠지'하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밖에는 '아니, 언제 달이 떠 있네' 하는 정도이다. 상현 무렵의 '낮에 나온 반달'도 있다. 월출동령은 거의 보름달이나 그 즈음의 현상이다. 보름달은 기다림에 반하지 않고 빛깔도 환하게 동창에 떠오른다. 이것이 '월출동령'이고 달이 떠오르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누군들 월출동령 하는 보름달에 환호하지 않으랴. 달이나 달맞이노래는 거의가 보름달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달은 '밝은 달'이다. 김영랑은 '아흐레 어린 달이 부름도 없이 홀로 났네'('빛깔 환히')라고 상현달을 안쓰러워했다. 누가 애타게 부르지도 않고 누가 반갑게 맞이하지도 않는데 그냥 홀로 나온다. 윤극영의 반달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서쪽 나라로 간다. 돛대가 있어야 바람을 받으며 삿대가 있어야 방향을 찾아 배를 젓는데 그조차도 없이 반달은 항해를 계속한다. 그렇게 주위에 별도 뜨지 않아 의지가지없이 미아처럼 홀로 희미한 모양으로 낮 하늘을 항해하고 있다. 시인 말고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는가.보름달만 달이 아니다. 호박꽃도 꽃이다. 다만 천체운행의 법칙이랑 DNA가 이들을 생산했을 따름이다. 이들의 탓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민중을 위하는 정당이 왜 종북이라고 뭇매를 맞는지 모르겠다.※ 오하근 원광대 명예교수는 1981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김소월 시의 성상징 연구''한국 현대시 해석의 오류''전북현대문학'등의 저서가 있다. 목정문화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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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1 23:02

통 성냥

때늦은 태풍이 온 시가지를 뒤흔들었다. 추석을 비켜가는 사이에 밀렸던 잔무를 대강 마치고 나는 역전 근처 은행을 찾았다. 예상대로 추석연휴 끝의 은행은 사뭇 붐비었다. 다소 지루한 기다림 속에 나는 문득 '다 먹어도 나이는 먹지 말라'던 친정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떠올렸다.일을 보는 동안에도 가을을 재촉하는지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은행 문을 바삐 빠져 나오려는 순간, 웬 할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역'을 물었다. 금방 나온 집을 모르겠단다. 나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집 근처 슈퍼를 들렀는데 '얼마 전에 이사 든 골목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화도 없고 동(洞) 이름도 몰랐다. 나는 암담했다.나는 무작정 할머니의 길을 더듬어 볼 작정이었다. 두 사람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작은 우산 속에서 노인과 나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였다. 아무리 헤매어도 노인의 기억은 내 손을 덥석 잡던 은행 앞만 맴돌았다. 여전히 비는 지분거리고 어둠까지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할머니의 맨발이 나의 한기를 재촉했다. 길가 슈퍼에 들러 새 양말을 신겼다. 거스름 대신 두 켤레는 가슴에 안겨주었다. 노인은 '고맙다'며 두 손을 모았다. 치마폭에서 성냥갑이 부스스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요즘 세상에 웬 성냥일까?'나는 할머니를 분식집에 앉혔다. 칼국수를 기다리는 동안 자초지종 끝에 큰아들이 개인택시 기사라는 것을 알았다. "왜 혼자 사세요.""-----"나는 더 묻지 않았다. 노인은 '다 먹어도 나이를 먹지 말라'고 혼자 중얼 거렸다. 친정어머니도 똑같은 말을 자주 했었다. 오랜 당뇨병이 지겹지도 않는지 '네 아버지 건강이 전 같지 않다'며 눈물짓던 어머니다.휴대전화와 씨름한 끝에 택시회사와 연결이 되었다. 국수물이 끓을 무렵 젊은 아들 내외가 분식집으로 들어섰다. 할머니의 집은 슈퍼 바로 뒤쪽 두 번째 작은 골목이었다.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할머니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앞장서서 내 손을 이끈다. 돌아서는 나를 애원하듯 놓아주지 않았다. 들어선 집은 부엌도 없는 남의 집 문간 단칸방이었다. 눅눅한 습기가 온 방에 가득하고 구석에 쌓아둔 누더기 홑이불자락 곁에 낡고 덕지덕지 때가 낀 휴대용 가스렌지가 놓여있었다. 찻물을 끓이려는지 렌지에 성냥을 그어댔다. 눅눅한 성냥은 이미 성냥이 아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그만 화가 치밀었다. 할머니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아들과 함께 살지 웬 궁상이세요."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장승처럼 서 있던 며느리가 끼어들었다."방이 모자라서 따로 살 수 밖에 없어요."나는 며느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자식 방은 있겠지' 나는 속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문득 현대판 고려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스라이터도 켤 줄 모르는 여든 하고도 두 살의 할머니에게 며느리가 넷이고 사위가 둘인들 무슨 소용일까. 할머니는 '오늘의 이 고마움을 나머지 자식들에게 말해 두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다시 찾아오겠다.'는 못 지킬 약속을 나도 모르게 남긴 채 어두워진 골목을 빠져 나왔다. 상가의 불빛에 비친 빗줄기가 제법 번들거린다. 비속을 천천히 걸었다. 딸 뿐인 친정부모와 맏며느리의 무게가 내 어깨에 겹친다. 다 먹어도 먹지 말아야할 나이가 내게도 찾아오기는 올 것이다. 나는 빗발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맑게 갠 아침 해를 빨리 맞고 싶었다.※ 수필가 신경자씨는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 문광부의 문학작가파견사업 마동시립도서관 강사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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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5 23:02

연둣빛 계절

공원에서 잡힌 방아깨비가 몸살 나겠다. 동네 꼬마 둘이 마주앉아 한시도 그냥 두지 않는다. 앞뒤 다리를 일직선으로 잡아 당겼다가 벌리기도 하고, 뒷다리를 붙들고 마주보며 방아를 찧게도 한다. 악동들의 손에 잡힌 초록의 방아깨비 날개 위로 유년의 뜰이 도미노가 되어 번져간다. 어머니 걸음 좇아 방죽골 밭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의 약수터는 나의 쉼터였다. 한 모금의 옥수가 땀을 식혀 주던 곳이다. 그 옆으로 누워있는 다랑이 논들의 물꼬마다 벌여 놓은 백중음식에 개구리들은 잔칫날을 맞았다.뾰족뾰족 고개를 내미는 나락 모가지에 농심이 여무는 날, 어머니를 따라 방죽골 밭에 갔다. 아담한 방죽 가장 자리를 빙 둘러 보랏빛 붓꽃들이 청초했다. 방죽물이 무서워 한 송이도 꺾지 못한 나는 애매한 옥수수만 줄기차게 꺾었다. 그러다 무심코 돌아본 우리 동네가 엄지손톱만 했다. 산꼭대기에 걸려있는 낮달이 한낮의 더위에 졸고 있는 사이, 바지런한 어머니는 삽시간에 옥수수를 광주리에 채웠다. 머리 위의 옥수수가 광주리 밖으로 미끄러질 듯 간들간들 거리는데도 어머니는 두 손을 놓은 채 태연히 걸었다. 나는 어머니의 쪽머리를 놓칠세라 종종거리지만 얼마가지 못해 숨이 찼다.노을이 멀어지는 등 뒤로 따라온 하루살이를 쫓다보니 어느새 동네에서는 저녁연기가 한창이다. 귀로의 고달픈 등을 어루만지는 바람과 함께 고삐 풀린 황소도 어슬렁어슬렁 집을 찾아 들었다. 풀벌레가 수런대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마른 쑥으로 모깃불을 지폈다. 마당을 맴도는 매캐한 연기에 나는 그예 눈물을 흘렸다. 긴 꼬리를 물고 오르는 연기를 무심코 따라가다 문득 멈춘 초가지붕에 박꽃이 앞을 다투어 피고 있었다. 밤의 정적 때문이었을까. 달밤에 피어서 더욱 빛이 하얀 박꽃이 신비스런 감성으로 젖어왔다. 멍석에 누운 우리들이 은하수의 전설로 빠져들 때쯤 어머니는 김이 오르는 옥수수 소쿠리를 들고 나왔다. '노랑, 하양, 보라, 어쩜 이리도 결이 가지런할까?'어머니의 잇속처럼 총총히 여문 옥수수를 뜯는 사이, 길을 잘못 든 반딧불이가 사립문을 밀고 들어왔다. 깜빡이는 반딧불 너머로 때마침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야무진 소원을 빌었다. 우리들의 머리엔 어느새 밤이슬이 촉촉했다.여우비가 지나간 들머리에 무지개가 선연하던 말거리재, 그 너머 파랑새를 쫓던 꿈이 마냥 머무르던 곳.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푸나무 짐 위에 꽂혀있던 앵두만큼 새콤달콤했던 시절이었다. 가재를 잡던 동무들도 어느 도시의 중년이 되어 박꽃 피던 시절을 그리워하겠지. 산들바람 사이로 언뜻언뜻 떠오르는 상고머리는 이제 희어지기가 바쁘겠다.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내 가슴에는 아직도 그 시절 어머니의 곱던 모습이 생생하다. 인생사 잠깐이니 두루두루 빈 마음으로 살라고 하시던 말씀 또한 또렷하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질겨지는 욕망의 끈에 매달려 아등바등 살아가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그 시절 어머니의 나이쯤 되면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 나이를 지나친 지금도 노상 복닥거리고 산다. 바래지고, 세어지고, 무디어져 마음이 허허로울 때면 연둣빛 싱그럽던 시절, 밤하늘의 별만큼 꿈이 많던 그 시절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눈앞에 선다.공원에서 방아깨비를 못살게 굴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수필가 이양선씨는 2010년 〈수필과 비평〉에서 신인상을 받고 2011년 〈계간수필〉로도 추천을 완료했다. 2008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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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8 23:02

사나이 우는 마음

제 아버지께서는 어쩌다 막걸리 한잔? 을 마셨다 하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시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는 차마 대문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마당가를 서성거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싶으면 "아이고, 동네 챙피해서 못살것다. 술을 쳐먹을라면 곱게 쳐드실 일이지 동네 우세는 다시키고. 야야, 막내야. 니가 얼릉 좀 나가 보거라."'칫, 엄니가 창피스러우면 나도 창피스러운 것인디. 어리다고 왜 나만 시켜쌓는대. 나도 알 것은 다 아는 나인디.'뒤따라오는 누렁이에게 맥없이 화풀이를 해대며 어둑한 고샅길을 걸어 나오면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틀비틀 팔자걸음에 분명 앞으로 걸어오는 듯 한데 뒷걸음을 치시고, 다시 앞으로 걷다가 또 옆으로, 다시 또 뒷걸음. 분명 걸어오는 것은 맞는데 도통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돌고만 계셨습니다. 그러다가는 금방이라도 넘어질듯 비틀거리다가 용케 몸을 가누시며"싸~랑에 약~한것~이 싸나이 마~음, 울~~지를~~말어~라~~~~~."목청껏 울부짖으시다가, "아~~~아~~~아~~~아~~"에 이르러서는 목이 갈라져 쿨룩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 손으로는 광덕이네 담벼락을 짚으면서 요샛말로 오바이트를 하셨습니다. 동네 개들은 왈왈 짖어대고 고샅에서 광덕이도 나오고 길자도 나오고 오늘따라 하필이면 보름달은 밝고. 정말로 쪽팔려 죽을 맛이었습니다.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했던가요. 담벼락을 짚고 구토를 하시던 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누구인지, 정확한 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아버지께서 이 노래를 그렇게 울부짖듯 부르셔야 했는지를. 그리고 그때는 진정 몰랐습니다. '사나이 우는 마음' 이 어떠한 것인지를.이제 저도 무람하게도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만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반쪽짜리 부모 노릇으로나마 한 아이를 키우며 가장의 눈물, 사나이의 눈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서 흘러나오는가도 알게 되었습니다.평생 농부이셨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다면 지금은 백번이라도 술 마중을 나갈 터인데. 그 옛날처럼 '착하게 살아라. 베풀며 살아라.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이르며 연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착하고 어질며 베풀 줄 아는 참사람으로 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이만 먹은 거짓 어른이 되어 제 스스로 마음을 곧추세우며 어루만지며 다독이며 살려하니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릴 때 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세상살이가 서러울수록 어른노릇 부모노릇이 너무 힘들어 부모님 무덤가에라도 찾아가 온갖 설움을 맘 놓고 쏟아내며 통곡하고 싶을 때 도 많이 있습니다.저녁 예불을 하러 가는 길에 꽃샘바람이 매섭습니다. 아직도 날이 선 차가운 바람에 금방이라도 코피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법당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봅니다. 저 멀리 푸른 보리가 넘실거리는 들녘이 한 눈에 들여 다 보입니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이 새삼 부럽게만 느껴집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그렇다면 이미 저는 진 사람입니다. 아마 저도 늙는 가 봅니다. 어쩌자고 저 들녘이 아닌 절간에서 보리(菩提)를 찾으려 하는 것인지 아마도 오늘은 쉬이 기도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필가 송순녀씨는 2004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완주 송광사에서 차(茶)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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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1 23:02

금 강

틈나면 자주 가 보던 금강변이 망가졌다. 흙먼지 뒤집어 쓴 트럭들이 웅포 긴 다리 밑을 부지런히 오간다. 덕지덕지 피곤에 쌓인 덤프트럭 기사들의 얼굴이 역역하다. 밤낮 없이 파고 나르는 강행군이 남루했었다. 그게 그의 끼니였으나 파고들면 강은 절규하고 흙탕물을 게워내며 쿨럭이는 것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금강이 가까이에서 망가진 모습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감은 눈에 떠오른 비단강둑을 오래오래 지켜본다. 생각에 지친 나를 위무하던 강이다. 번잡한 생각을 도닥이며 키워주고도 그런 내색은 모르는 강이었다. 조약돌을 집어 던지면 수면에 코를 박던 물수제비를 띄워주며 '심심하냐.'고 묻고 깡충깡충 튕겨주다 잦아들던 강이다. 갈잎 배를 띄우면 묵묵히 흘러 빨래하는 아낙 곁을 주춤거리다 방망이 끝에 튀는 땟물을 싣고 가던 강이다. 혼자 가다 심심하면 구비 도는 여울 곁에서 휘어지게 진양조로 한 곡을 뽑고 흘러가다 섭섭하면 여울져 맴 돌아 들던 강이다. 흐름뿐이랴. 넘치면서 쌓이고 쌓이면서 갈리어 무게를 덜고 그 무게의 틈에 모래무지를 길러 함께 사는 지혜를 가르치던 강이다. 강마을 사람들은 잊은 지 오랜 흰 돛배의 새우젓을 이야기한다. 포구 마을 너머로 지는 석양을 등에 진 발길에서 흘러내린 그물자락의 노을이 지등(紙燈)처럼 옛 나루를 밝혀든다. 군산포를 거슬러 강바람을 가르며 갱갱이포(강경)에 이르는 길고 먼 옛 굽이의 소금 배에는 생선과 함께 쌀이 실려 나가고 실려 오던 밥의 이야기가 주절댄다. 흐른다고 다 눈물이랴. 백제 유민 6만이 노예로 실려 갈 때에도 금강은 울면서 울지 않으면서 삼킨 눈물은 넘쳐 황산들의 너른 벼를 알게 모르게 키웠다. 그 강이, 그렇게 천년을 흘러 만년을 이을 그 강이, 울면서 울지 않던 그 금강이 누더기로 뜯기고 할퀴었다. 흐른다고 다 강이랴. 곧장 흘러 바다로 가는 그런 강은 강이 아니다. 구비 돌아 아우르며 끼고도는 푸른 들에는 풀을 뜯고 이삭을 쪼고 뽀뿌라 그늘 아래 웃음이 깃들어야 한다. 멱 감으며 등을 밀다 주춤주춤 손 흔드는 한낮이 길게 누어 흘러야 한다. 강에 기댄 목숨들이 거덜 나는 데 하느님은 말이 없다. 요단강도 파헤치자고 덤벼들 저 굴삭기 앞에 내 기도는 응답이 없다. 십자가는 말이 없다. 파지마라, 자르지 마라, 매달리며 응석 부리고 떼를 쓰며 기댄 기도가 민망하였다.공양미 3백석을 마련하여 눈먼 세상을 수술하고 싶었다. 엇 그제는 누런 모래 둔이 사라졌다. 어제는 두루미가 옛 나루 구비에서 전세방을 뺐다. 강둑에 쌓이던 초록의 장한 노래의 음표가 오늘은 물결의 오선지를 떠난다. 내일은 다함없던 흙탕물의 함성이 도란도란 강톱에 쌓아올린 이야기도 쓸어버릴 것이다. 죽음이 강을 거덜 내 버렸다. 마저 죽기를 기다려 수륙재를 준비해야하나. '원 왕생'(願 往生)을 외우며 극락을 비는 내 무딘 독경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어른이 된 소년의 꿈이 어머니의 강을 윤간해 버렸다. 저 큰 삽의 뚱한 표정이, 덤덤한 무감각이, 참으로 보기 흉하다. 조금 남은 맑은 물을 손으로 찍어본다. 차다. 내가 조금 젖어있을 때 강은 더 깊이 젖어 밑으로만 나를 대신하여 흐르며 위로하고 '하늘의 새끼 구름을 바라보라'고 다독여주었다. 울면서 낮게 외우던 강의 긴 '옴' 소리를 나는 듣는다. 저 때의 냉이 꽃은, 강둑의 어린 칡소는 다 안다. 끌러가던 백제유민의 아픈 눈물을 기억한다. 한 번 더 비단물결을 헤적여 찍어 강의 남은 체온을 재어본다. 아직 살아 있다. 곡신(谷神)이 성나기 전에 차떼기 하듯 삼백 석을 마련하고 싶다. 눈먼 소년의 눈을 수술하여 주기 위해 삼백 석을 마련해야겠다. 물위에 '삼백 석!'을 쓰고 어음으로 달아 놓는다. 물결이 어음을 들고 세차게 달려간다. 풀기 없는 내 문장이 메아리를 못 지어 구만리 하늘을 에둘러 맴 돌더라도 강가에 나아가 강물에 어음 쓰는 필법을 터득하고 말겠다. 굽이치는 필법은 살아있음이 아니냐. 살아있음은 아름다움이 아니냐. 나는 벌떡 일어나 강가로 내닫는다. 맹렬한 삶의 의욕에 넘친다. 오늘도 강가에 나아가 젖지 말자, 젖지 말자, 하면서 흠뻑 젖어 돌아온다. 망가진 대지의 자궁을 안쓰럽게 바라보면 나약하나 나의 기도는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비단강(錦江)의 비단 물결은 눈을 뜨고 보여야 한다.*수필가 박영학씨는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가람시조문학회장과 원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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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04 23:02

봄 마중

잔설이 흩뿌려지고 삭풍이 불어도 정녕 봄은 오는가 보다. 입춘 전후가 되면 그는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고 보아달라고 눈짓을 한다. 신의를 꼭 지키고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군자 같은 풍모다. 나는 그와 만날 때 한없는 설렘과 기쁨과 감격으로 생명의 환희를 만끽한다. 20여 년이 넘었건만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때맞춰 가까운 우리 집 거실에서 봄 마중을 하게 만든다.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그는 화사한 봄차림으로 나에게 생기를 돋게 하고 우중충했던 겨울옷을 벗게 해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늘 푸른 모습으로 사시사철 내 곁에 있다. 그것은 그이가 남겨준 보물이다.남겨준 이의 애틋한 정과 그리움이 더해져 아침에 눈을 뜨면 맨 먼저 인사를 건넨다. 새해가 오고 1월이 가고 2월이 되면 나는 더 눈[目]을 맞추려고 일어나자마자 베란다 문을 열고 쳐다본다. 입춘이 가까이 오면 배가 불러오다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쑥 내민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목을 빼고 기다린다. 사람이나 기계도 실수를 하고 고장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물은 20년을 훨씬 넘도록 한 번도 고장이 나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다. 날짜도 어기지 않는다. 이름은 그저 붙여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꼭 이름값을 한다.꽃 중의 꽃 군자란! 멀리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일찍 봄 마중을 시켜주는 이 군자란을 나는 자식 다음으로 아낀다. 후일 쓸쓸해 할 나를 위해 정성들여 만들어 준 남편의 사랑이 묻은 이 화분은 잔설이 녹기도 전 화사한 봄빛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작년에는 며느리가 만들어준 감자 순이 올라온 유리접시와 함께 봄맞이를 했었다. 이제 며칠 지나면 설 명절이다. 올해는 며늘애가 또 어떤 봄을 가지고 올지 기다려진다. 며느리 희정이는 센스가 있다. 내가 꽃 화분을 좋아하는 걸 알고 전주에 올 때는 꼭 작은 꽃 화분 하나씩을 들고 온다. 멀리 가지 않아도 봄 마중을 하게 만들어 준 남편과 며느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맹자는 고자상에서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나 다 사랑한다. 어느 것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면 기르는 것도 똑같이 한다. 잘 기르고 잘못 기름을 상고(살펴봄)하는 것이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는 애정과 도리를 가르쳤다. 요즘 생명경시 풍조는 끔찍한 일들을 연출한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고 자식은 부모를 모욕하며 내치고, 인륜의 끝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무서운 세상이다.뒤쪽 창문을 열어보니 작년 가을에 파종한 텃밭의 마늘 싹도 겨우내 움츠리고 있더니 봄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기지개를 켜며 파릇한 몸짓으로 곧 주인에게 성찬을 차려 주겠다고 미소를 짓는다.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따뜻한 연민의 정과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봄을 마중하려고 한다.*수필가 공순혜씨는 2008년 〈대한문학〉 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아침 햇살 가득 번지던 그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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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27 23:02

진정한 삶과 행복 - 오정민

오늘따라 봄비가 다녀 간 자리엔 백목련이 더욱 곱다. 한평생 공도를 위해 공변된 삶을 누리다 입적한 그 어른의 자취 그 모습처럼.사람은 누구나 부모의 인연 따라서 몸을 받고 천지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한평생을 살다 세상과 인연이 다하면 빌려 쓰던 몸은 네 가지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고 마음은 생전의 지은 바에 따라 다시 태어나 고통의 굴레에서 살게 된다. 그러니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괴로움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인간이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이다.옛날 어느 고을 욕심이 많은 만석궁의 집에 머슴이 들어 와 살게 된다. 주인이 심부름을 시키면 한 번도 제대로 해오는 일이 없다. 그래서 주인은 이웃집이나 장날 심부름을 시킬 때에는 걱정이 앞선다. 하루는 주인의 궁리 끝에 머슴을 불러 "네 이름을 멍텅구리라고 지었으니 심부름을 갈 때면 이 멍텅구리 방망이를 반드시 차고 가야하느니라. 알겠느냐?" 비록 바보라고는 하지만 좋은 이름 두고 하필 멍텅구리라고 지어주다니 이럴 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불평이나 불만을 터뜨리면 항명이니 어찌할 도리 없이 상전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주인은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멍텅구리방망이'라 쓴 방망이 끝에 어디에 살며 심부름 내역까지 상세히 적어 허리춤에 매달아주곤 했다. 어느 날 주인은 머슴을 불러 앉히고 유언을 당부한다."내가 너에게 오늘날까지 잘 해준 것도 없지만 이제 가야할 때가 되었나보다. 그러니 너는 종전처럼 안방마님 모시고 집안일을 알뜰히 잘 보살펴 드리거라" "으디로 가시는디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구나", "가시면 은지 오시는디유?", "그것도 모르겠구나", "을매나 지시는 디유?", "이 놈아,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머물 날을 어찌 알겠느냐?", "참, 쥔 만님두 답답하시구먼유, 이 놈의 방맹이는 내가 찰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쥔 만님 당신이나 차시구료"했다고 한다.한자에는 욕(慾)자와 욕(欲)자가 있다. 이 두 글자는 똑같은 발음이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마음 심(心)자 부수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욕(慾)자는 '욕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후자의 욕(欲)자는 '하고자 함'을 뜻한다. 하루아침에 변심하여 사람을 헤치고 살해하는 경우는 지나친 명예욕이나 물욕 때문이다. 그러니 욕(慾)은 지나친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할 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를 멍들게 한다. 그러나 욕(欲)은 '하고자함'이다. 자신을 닦아서 우리 모두를 빛내주는 요인이 된다. 은반의 여왕 '김연아' 선수나 미식축구왕 '하인스 워드'선수나 월드스타 가수 '비'와 같은 경우다. 그뿐이겠는가 지체가 부자유한 몸인데도 세계적인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 같은 경우는 전 세계 장애우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동시에 민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생각과 망령된 욕심이 범벅이 되어 우리사회를 괴로움의 바다로 만들어가고 자신과 세상을 활활 타게 하느냐 아니면 나보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문명한 세상을 만들고 인류의 빛이 되게하느냐 하는 욕구의 방향은 모두 이 마음을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달려 있다.현대인들은 많은 돈, 높은 권력과 지위, 명예 같은 것들에 목매어 살아가고 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높여 주며 그것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될 행복, 자아성취, 건강, 웃음, 사랑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하루하루는 참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 갈 것인가. 하루에 한 번 쯤이라도 칠흑 같은 어두운 방에서 1분만이라도 명상에 잠겨보아라. 마음의 눈으로 가슴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라고. 진정한 삶과 행복이란 감정과 일이 기쁨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의 열쇠는 각자의 마음속에 달려있음을 알자.*수필가 오정민씨는 월간수필문학(수필)과 한국문예사조(시)로 등단. 수필집 <다북찬 임의 향기>와 시집<붙박이별이 되어>가 있다. 현 원광효도마을 자원봉사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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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13 23:02

항아리 속에 핀 꽃

햇살 가득한 장독대를 마련했으니,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장을 담기로 했다. 결혼한 지 서른 두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간장을 담가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장 담그기를 미뤘던 것은 일조시간이 짧은 아파트 탓도 있지만, 장 담그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젠 아파트 핑계도 댈 수 없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님을 모시고 있으니, 변명의 여지없이 장을 담글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 집은 동남향이어서 종일 토실토실한 햇살이 강아지처럼 뒹굴고 있다. 간장은 여인의 정성과 물과 바람과 햇살이 빗어내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래서 옛 여인들은 장 담그기 전 날 목욕을 하고, 장 담그는 날은 시루떡에 초를 밝혀 깊은 장맛을 기원했단다. 부정을 타지 않도록 심지어 장독대 주변에 금줄까지 쳤다고 한다. 바람과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마련하고, 비오는 날은 빗물이 들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한다. 외출을 할 때에도 내심 장독대 걱정을 했다. 정성을 다해 장을 삭히고 장맛을 지키던 지극함이 있었으니 '장맛을 보면 그 집안을 알 수 있다'는 말은 깊이 새겨 둘 얘기다. 간장을 담기 전 귀담아 들었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손 없는 날 담가야 장맛이 깊다고 했다. 2월 15일이 바로 손 없는 날이었다. 하루 전 손질해둔 항아리에 소금물을 채우고, 햇볕에 말린 메주를 넣고 숯과 고추를 띄웠다. 요즘은 염도계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굳이 염도계를 사용하지 않아도 물위로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계란이 뜨면 소금물의 농도가 알맞다고 했다. 밤사이 장독대가 내란을 일으킬 일도 없는데 눈만 뜨면 장항아리를 들여다보았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혹 항아리에 금이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햇볕에 몸을 태워 변해가는 간장빛깔을 지켜보는 일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간장항아리는 소금물에 몸을 불려가며 다갈색 수묵화를 그렸다. 날씨가 흐린 날은 구름도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고, 바람 부는 날에는 빨랫줄의 빨래도 고개를 기웃거렸다. 햇살이 꼬리를 내리면, 항아리도 달빛에 몸을 풀었다. 장독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이 들고 맑은 바람이 머물다 갔다. 간장은 깨끗한 환경에서 오래 익어야 깊고 은근한 맛이 깃든다고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뜰 매화가 입술을 벌리기도 전 간장 항아리에 하얀 장꽃이 피었다. 하얀 곰팡이가 매화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장맛을 잘 아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혹 염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밤새 걱정을 했는데, 간장에 꽃이 피면 오히려 장맛이 좋다며, 하얀 곰팡이가 바로 장꽃이라 했다. 하얀 곰팡이는 미생물이 활동할 때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불안한 마음을 편하게 해줬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장의 만개를 기다리리라. 지난 여름 정읍은 삽시간에 전국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폭우의 피해로 저지대 주민들은 막대한 재산 손실을 입었고, 둑이 무너져 하루아침에 땅의 운명이 바뀌었다. 요사이 우리 지역은 절개지에서 밀려온 토사를 치우고, 유실된 농토를 원상복구 하느라 한창 바쁘다. 여름 날씨처럼 언제 어디서 비운의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그러기에 화살을 제거하려면 상호 협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높은 철탑을 쌓고, 맹견을 내세워 소통을 단절하고 사는 이웃도 있지만, "땅은 백 냥을 주고 사지만 이웃은 천 냥을 주고 산다."는 말이나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걸 보면, 얼마나 이웃이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시골의 울타리는 서로의 경계를 드러내지만, 언제라도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열린 통로다. 장맛을 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까운 주변에 천 냥을 주지 않고도 아침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이웃들을 만났으니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다. 마을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이웃이 있어 감사하다. 이제 숲은 묵은 계절을 털어내고 바람에 목 축여 새 옷을 입었다. 새들도 부드러운 속살 드러내며 비상을 꿈꾼다. 겨우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혹한 설움 견디어 온 매화도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문 닫은 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조각하는 일 녹록치 않지만, 또 하나의 열림을 위해 두 팔 벌리면 잠들어 누운 땅한 구석쯤 밝아지는 날 있으리라. 조용한 산골 아담한 집 아니어도, 자연을 벗 삼아 노동의 신성함과 장맛의 하모니를 이루며 살고 싶다.*수필가 이명화씨는 광주에서 태어나 2003년 <문예연구> 로 등단했고, 수필집 「사랑에도 항체가 있다」 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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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4.06 23:02

자유로운 구속 - 이정숙

나를 가둔다. 최대한 생활을 좁혀 감옥을 만든다. 마음 안에 수인번호도 붙여주었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방편이다. 이는 무조건 내달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잠시 내가 가야 할 뚜렷한 목적지를 설정하는 작업이다. 마음 같아서는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갇힌 생활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하기는 어려울듯하여 단 며칠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즐기던 사우나도 단절하고 아침 산책을 외출의 전부로 한다. 파도에 휩쓸리듯 지내온 일상에서 조금 떨어져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물 흐르는 대로 편하게 살자 생각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무조건 즐기며 오케이를 했고, 나 스스로도 건수를 만들어 거기에 보탰다. 그로 인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나한테도 적용이 되는 듯 늘 피곤했다. 세상사 더불어 사는 것. 어찌 보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일이 주어진다는 것은 행복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뭔가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쥐어짰다. 더러는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그것을 탓하는 것은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라고 나무랬다. 부산을 떨면서 바쁘게 사는 것에 위안을 얻으며 그런 시간들을 즐겼는데, 웬 일인지 군중속의 고독이랄까 오히려 스스로가 더 쓸쓸하게 느껴지고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워졌다. 사람은 변화를 추구하는 동물이라던가, 그래서 반복되는 삶이 지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산책을 할 때도 가던 길로 다시 되돌아오기가 싫다. 조금 멀거나 가파르더라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낯섦을 즐긴다. 요즈음은 그 밥에 그 반찬보다는 때로는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사다. 안일한 일상에 저항하여 맺고 끊는 결단이 필요해 홀로 쓸쓸하기로 마음먹는다.바쁜 생활은 나를 가두어놓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게 방해한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를 만날 시간이 없어 내 생활은 붕 떠있다. 바쁘니까 마음의 여유가 없을뿐더러 성격이 거칠어지고, 뭐든 즉흥적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린 듯. 마냥 급하게 쫓기며 살게 되었다.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진솔한 사유의 필요성이 느껴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은 나와 함께 있는 것, 나는 나 자신을 회피할 수 없고 내 자신의 질문에 응답해야만 한다.'고 사유의 중요성을 말했다. 근원적 물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간절히 묻고 또 묻고, 오랜 시간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지?'의 해답을 구해본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불러들인다. 부드러운 남실바람이다. 움직이지 않고, 떠들지 않고, 사람 만나지 않고 지내는 지금 나는 한층 더 자유롭다. 슬픔에의 침잠이 아니라 스스로 가둔 감옥 속에서 생의 안온함과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구속이다. 자발적인 고독이 때론 풍요롭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겠다.밖에 나가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전환된다는 것을 알긴 한데 이젠 그냥 귀찮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단기적인 회피는 보약이 되기도 하는가 보다.아, 오늘도 나 혼자 춤추고 노는 날이다. 탱탱한 무언가가 차오른다.※ 수필가 이정숙씨는 2001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지금은 노랑신호등' 수필집을 냈다. 온글문학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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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3.30 23:02

만덕산방(萬德山房) - 전일환

만덕산 허리를 신작로가 갈라놓았다. 곰티잿길이다. 아예 한자로 웅치(熊峙)잿길이라고도 부른다. 이 길은 여름철엔 원시림 같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수풀터널을 이루고, 골골이 쏟아지는 산골물소리가 온몸을 시원스레 감돈다. 옛날은 진안과 장수, 장계, 무주를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은 근처에 사는 사람 아니면 등산이나 소풍, 혹은 웅치전적지를 찾는 사람 외에 별로 찾는 사람이 없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이다. 만덕산은 만덕(萬德)이 뜻한 것처럼 많은 덕을 안고 있는 산이어서 임진란이나 6.25동란에도 이 지역 주민들은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 한다. 곰티로는 건강을 위해 산보를 하거나 가볍게 조깅을 하는 사람, 사이클을 타는 사람들이 이따금 보이기도 하지만, 다람쥐나 고라니들이 하나 둘, 길을 건너는 것 말고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적막한 산길이다. 천길 험한 산등성이에 아흔 아홉 굽이 산모롱이길이어서 엄청난 버스전복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던 마(魔)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터널을 뚫은 모랫재길을 새로 내고, 또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왕복 4차선의 소태정길을 내더니만 요즘은 다시 곰티재터널로 통하는 익산 장수간 고속도로가 훤히 열렸다. 곰티로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한 후에 우리가 생산한 각종 산물들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신작로였다. 나는 1962년 8월 전주유학을 위해 이 길로 처음 웅치재를 넘어 전주 대처로 나왔다. 트럭을 개조한 낡은 버스인지라, 고향인 장계에서 전주까지 오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비포장 길인데다가 읍면 단위 정유소마다 쉬어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속도전을 벌이고 살아가는 요즘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내가 어릴 적엔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이 곰티잿길로 전주를 왕래하셨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는 전주에서 전주복숭아 한 박스를 자전거 뒷자리에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누나와 난 그 복숭아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지금도 난 아버지가 사다주신 여름날의 그 복숭아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 먹었던 그 복숭아를 수밀도라 했다. 수밀도(水蜜桃)! 글자대로 꿀물복숭아였다. 이후 전주에 살면서도 꿀물 흐르는 그 수밀도의 복숭아를 맛보질 못했다. 90년대 말 베이징문화대학 한국어과 초빙교수로 북경에 갔을 때 그 곳에서 먹어보았던 복숭아 맛과 흡사했다고나 할까. 무더웠던 베이징의 여름날, 아내와 시장에 나갔다가 먹음직한 복숭아 3㎏을 샀다. 중국은 채소나 과일 등 모든 산물은 중량으로 달아 판다. 개수로 파는 우리네완 정말 딴판이었다. 사온 복숭아의 껍질을 벗기니 꿀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온 손을 다 적셨다. 이내 복숭아를 입에 넣으니 사르르 녹아내린다. 영락없이 어릴 적 아버지가 사다주었던 복숭아 맛 그대로였다. 지금도 이 곰티로를 걸을 때면 어린 우리 남매에게 주려고 무거운 그 복숭아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 가파른 길을 오르셨을 아버지를 생각한다.난 틈만 나면 아련한 옛 추억이 오롯이 남겨진 이 곰티로를 안고 있는 만덕산을 즐겨 오르내렸다. 그러다가 급기야 십 수 년 전엔 은퇴 후를 대비해 채전(菜田)도 가꾸고 독서공간도 마련할 겸, 이 산 아래 달윗마을 월상(月上)리에 자그만 터를 장만해 두었다. 그리고 농막(農幕)과 때론 문방으로 스스로 자연에 귀의코자 달팽이만한 한 칸의 와옥(蝸屋) 산방을 마련하였다. 이름하여 만덕산방(萬德山房)이라 할까보다.※ 수필가 전일환씨는1993년 <한국수필> 로 등단했다. 수필집 '그 말 한마디','예전엔 정말 왜 몰랐을까', '옛 수필산책'등이 있다. 전주대 부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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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3.23 23:02

새 봄의 마술 - 조윤수

옛 사람들은 동지부터 99 소한도를 그리면서 겨울을 보냈다던가. 추웠던 시절 매화도를 그려놓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물감으로 색칠하며 홍매를 피워냈다지. 마지막 99송이 홍매화가 피어나면 창밖의 매화나무에 진정 매화가 맺힌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풍류를 누릴 수나 있었겠나. 특권을 누렸던 조선의 문인 화가들에게나 해당된 복이 아니었을까. 매화 그리기에 벽(癖)이 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쯤이면 당연했으리라. '매화도 대련'이나 '매화서옥도'는 겨울에 보면 어찌나 화사한지 추운 겨울이 무색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의 매화는 전 시대의 문인들처럼 매화를 짓누르고 있던 힘겨운 상징성과 지조성을 전부 털어버렸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고고한 청덕의 매화가 아닌 꽃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다.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잠잔 뒤 매화차를 마시고 매화 시를 읊조린 그였으니 말이다. 매화도를 그리듯이 선인장 꽃잎을 담고 아침저녁으로 차를 벗하여 겨울을 보냈다. 떨어진 꽃잎을 모아서 세다 보니 어느새 베란다의 천리향이 퍼지고 있다. 마침 이웃집에서 매화분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다. 매화분의 백매가 피는 창가에서 점심을 먹고, 매화에 취한 듯 포도주도 한 잔 걸치고 알싸한 기분으로 만덕정 솔숲을 거닐었다. 겨울의 창 안에서 익은 새봄을 보았으나 야생 매화나무의 꽃순은 꽃샘추위 속에 아직 숨죽이고 있다. 그래도 춘삼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유년의 아이들이 어린이 집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이와의 전쟁'을 호소하는 젊은 부모가 늘고 있단다. 현대인의 약 95%가 실내에서 생활한다. 요즈음 아이들의 부모 역시 대부분 온실의 화초처럼 살면서 온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왔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도시생활 자체가 모든 일들이 자연과는 분리된 생활이어서 적극적으로 단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내 손녀도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언젠가 며느리가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아빠 엄마가 어디어디 다닌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위험한 사회 환경에 대비해야 하는 부모 입장이 민망스러웠다. 요즈음 대두되고 있는 학교 내의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생각하면 즐겁게 출발해야 할 새학기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공교육의 위기라든가 교육 환경 개선차원을 놓고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이미 교육계의 구조적 개선의 제시는 진부한 대안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는 소식이다. 삶의 다양성과 다양한 가치 추구를 본연으로 하는 문화예술의 역할과 기능이 모든 그늘진 곳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리라.사람을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게 하여서는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기 어려울 것이다. 덕(德)체(體)지혜(智慧)를 갖춘 사람의 향기는 만리(萬里)를 간다고 한다. 위대한 선각자들의 향기는 세대를 초월한다. 온실의 매화나 천리향처럼 자란 사람들이 어찌 사람의 진정한 향기를 지닐 수 있을까.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과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마비시키는 습관을 헤어날 수 있다."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한 단계 한 단계 씩씩하게 훈련해 가면 좋겠다. 명랑하게 한 공간 한 공간을 통해 잘 나아갈 수 있도록.* 수필가 조윤수씨는 2003년 '수필가비평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수필가비평작가회전북문인협회행촌수필문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행촌수필문학상'(2010)을 수상했다. '바람의 커튼','나도 샤갈처럼 미친(及) 글을 쓰고 싶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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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3.16 23:02

정점(頂點) - 김용옥

그는 변화하고 싶다. 어느 정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정점에선 오래 머물 수 없다. 내려가는 길만이 살길이다. 욕망의 덫에 두뇌가 결박당한 채 갇혀 날마다 더 높이, 더 직선으로, 더 빽빽이, 칼로도 베어지지 않는, 쇠망치로도 부서지지 않는, 한 조각 한 조각 욕망으로 빚은 고층건물의 거리에 갇혀 그가 지나간다. 미로를 돌고 도는, 기어도 기어도 거기서 거기를 맴도는 벌레 같다, 지금, 그는.일찍이 사람은 갇히기를 욕망했다. 자연을 버리고 집에 갇히기 시작한 후 현대인은 현대문명을 엄청나게 열애하여, 결국 공간분할의 시멘트벽에 갇히고 철골콘크리트에 갇혔다. 걷기를 버린 후 자동차에 갇히고 철마에 갇히고 비행기와 철선에 갇혔다. 더 빨리 더 깊이 더 높이 갇히며 스스로 갇히는 줄을 몰랐다.그리하여, 날마다 갇혀 사는 그는, 날마다 자유를 찾듯이, 직선의 고층아파트의 문을 열고 외출한다. 자유를 그리워하듯이, 자동차와 지하전동차나 고속열차에 갇혀 혹은 비행기나 철선에 갇혀 공간과 시간을 횡단한다. 해와 달과 상관없이 기계로 시간을 인식하고, 물과 바람과 상관없이 돈으로 정화되는 숨을 쉰다. 도무지 갇히지 않아 비참한 건 그의 육체. 육체는 자연물이기 때문이다.그는 여전히 육체의 두 손과 두 발로 걸어야 하고 일해야 하는 동물 혹은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대지의 소산인 식물과 동물을 입으로 먹어야 사는 동물 혹은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먹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못한다. 화학 알약 한 알 먹고 기계로 대신 배변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기계 한 접시 삼키고 기계똥 누면 얼마나 편리할까만.그는 변화하고 싶다. 문명의 덫에 갇혀 발버둥치던 그가 점점 욕망의 돈벌레가 되었다. 문명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처음엔 욕망의 두 손과 두 발이더니 점점점점 욕망의 손발이 갈퀴처럼 늘어나 지네발이 되어 지네로 변신했다. 더 박박 기는, 더 은밀한 구멍에 숨는, 건드리면 재빨리 독을 뿜는 독충이 되었다. 독충이 먹는 건 무엇이나 독(毒) 원료. 먹는 대로 제 목숨에 독을 품는다. 독충은 더 호화 찬란하게 치장된 색을 입는다. 독충의 공간은 아무나의 눈에 띄지 않게, 단단하게 갇힌 공간이다. 독충은 더 이상 사람들의 공간에서 살지 못한다. 위대하기를 바라지만 독충은 결국 독충일 뿐이다.그는 변화하고 싶다. 이 새로운 바벨탑의 도시를 이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가 속한 곳에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떠나고, 노무현 16대 대통령이 떠나고, 법정스님이 이 도시를, 이 지구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우리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머리와 손 사이엔 가슴이 있어야 한다."는 명제 혹은 인간의 진리를, 오래도록 생각한다. 그는 변화하고 싶다.* 수필가 김용옥씨는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와 수필을 넘나들며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누구의 밥숟가락이냐' 외 3권, 수필집'생각 한 잔 드시지요' 외 4권, 화시집'빛마하생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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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3.0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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