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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대만 문화재 교환전시 이뤄질까

중국과 대만의 박물관들이 국보급 문화재를 교환해 전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성사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일 대만과 홍콩언론들에 따르면 처우쿵신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 원장은 양안 고궁박물원의 보물들을 상호전시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오는 14일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한다. 처우 원장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정신먀오 원장을 만나 오는 10월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융정(雍正)황제전'에 베이징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융정황제 관련 보물을 빌려오는 문제를 협의할 예정이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측은 융정황제 관련 보물 20점 가량을 베이징고궁박물원으로터 대여받아 전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옹정황제의 초상화, 비빈 초상화, 옹정행락도(雍正行樂圖), 옹정독서도(雍正讀書圖) 등을 임대해 전시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중국측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들이 대만에서 전시될 경우 양안간 보물 교류에 있어서도 본격적인 '대삼통(大三通)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쫓겨나면서 2개로 분리된 고궁박물원의 보물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전시되는 것은 60년만에 처음이다. 중국 정부도 양안간 화해 무드에 힘입어 베이징고궁박물관의 보물들이 대만에서 전시되는 데 반대하지 않고 있어 10월 '융전황제전'에서 양안의 보물들이 한자리에 전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문제는 대만의 국보급 보물들도 중국에 임대돼 전시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만측이 대만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들을 중국측에 대여할 경우 중국이 이를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의식한 듯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처우 원장은 9일 중국 방문에 앞서 "타이베이고궁박물원이 중국측에 보물들을 대여하기 위해서는 중국당국이 대여 전시가 끝난 뒤 대만측에 안전하게 반환할 것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류자오쉬안(劉兆玄) 행정원장도 지난 8일 대만의 국보급 보물들이 중국에서 전시되기 위해서는 안전한 반환 문제에 대한 법적인 보장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대만은 1992년 문화 및 예술 교류에 대한 법률을 제정, 중국의 문화재의 법적 소유권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70만점 이상의 중국 문화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11 23:02

정조 '막후정치' 입증 비밀편지 299통 발굴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재위 말년에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를 치밀하게 펼쳤음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그의 비밀 편지 299통이 무더기로 공개됐다.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9일 오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조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어찰첩(御札帖)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개인이 소장해오다 공개된 이 어찰첩은 탈초(脫草.정자체로 풀어쓰기)와 번역을거쳐 내용을 분석한 결과,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되었으며, 그 전부가 정조의 친필로 심환지에게만 보낸 보물급 문화재로 드러났다.이번 자료발굴과 분석에 관여한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이 편지들은조선시대의 어찰로는 분량이 최대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정조가 지속적으로 없애라고 명령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라며 "국왕과 대신 사이에 국정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이 편지들은 수신자인 심환지 쪽에서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 장소를 기록해 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이번 어찰첩이 발굴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조시대 정국 동향은 물론이고, 정조 자신의 성격이나 정국 구상과 그 추진 방식 등이 상당 부분 베일을 벗게됐다.무엇보다 심환지가 정조와는 날카롭게 대립했으며 심지어 그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낭설'로 판명났으며, 정조가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에 능수능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이 편지들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를 보내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런 맥락에서 정조는 심환지의 큰아들을 과거시험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고 했으나 (아들이 그러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아울러 이 편지들에서 정조는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토로한 것으로 밝혀졌다.정조가 1800년 6월28일 타계하기 13일 전인 6월15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뱃속의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중략)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고 호소하기도 했다.어찰첩 분석에 참여한 조선사 전공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자료가 공개되면서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국가 편찬 연대기 자료에만토대를 둔 역사 연구는 방향 전환이 불가피해졌다"고 밝히고 "나아가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로 대표되는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10 23:02

영암군 '고려 목탑' 국내 첫 복원 나섰다

전남 영암군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고려시대 목탑 복원에 나섰다. 영암군은 전남도 지방기념물 제197호로 지정된 '사자사지(師子寺址) 목탑 복원을 위해 타당성 조사 용역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9일 밝혔다. 영암읍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월출산 사자봉 아래 위치한 사자사지는 1995년 순천대박물관에 의해 탑지와 건물지가 확인됐으며 '사자사'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면서 천황사 대신 사자사로 부르고 있다. 타당성 용역을 맡고 있는 전남대 천득염(건축학) 교수는 "사자사지 목탑은 실체가 대부분 소실되거가 자료부족으로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고려 목탑지로 초석 및 기타 유구의 흔적이 잘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며 "사자사 목탑 복원은 학술 연구를 기반으로 디지털, 모형, 구조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 목탑지로는 영암의 사자사지와 남원 만복사지, 개풍, 흥룡사지 등 12곳이 있지만, 복원된 사례는 아직 없다"며 "사자사 목탑이 국내 최초로 복원되면 지역문화 향상, 관광 수요 증가 등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암군 관계자는 "사자사 목탑 복원을 위해 이미 타당성 용역을 발주했으며 규모와 형태 등 학술적 고증 작업이 끝나면 복원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영암군은 10일 영암군 정보문화센터에서 천득염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자사 목탑 복원 타당성 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복원 당위성 등을 분석하는 심포지엄을 연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10 23:02

아! 숭례문…100여년전 원형 사진 공개

1910년 전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숭례문. 염창교 쪽에서 찍은 것이며 숭례문 편액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며 오른편에 감시용 망루가 설치돼 있고 입구에는 정체가 불분명한 석등이 세워져 있다.일제가 도성의 기운을 막으려고 문 입구에 무속제를 올리기 위한 석등을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된 사진이다.일제에 의해 숭례문이 훼손되기 전인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서울성곽과 연결돼있는 숭례문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진 3점이 숭례문 화재 1년을 앞둔 8일 공개됐다.이 사진들은 1883년 제물포에서 조선 최초의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을 설립한 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후손들이 유품으로 간직해온 것들로, 정성길(68)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발굴했다.정 관장은 "숭례문의 원형을 제대로 복원해 보존할 수 있도록 하고자 사진을 공개하는 것"이라며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 위치와 형태조차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우리 후손들이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3점 모두 서울성곽이 연결된 남산쪽에서 숭례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졌다.이 중 188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1번)은 안개가 낀 날 촬영한 듯 흐릿한 화면 속에 한 폭의 그림 같이 숭례문의 자태가 드러나 있다.또 1890년대 초 찍은 것으로 보이는 숭례문 사진(2번)은 숭례문과 연결된 부분의 서울성곽 형태가 적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문 주변부의 성곽을 좁게 만든 옹성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문화재청은 현재 진행 중인 숭례문 복구 때 1907-1909년 일제가 허물어 현재는 경사면 형태(삼각형 모양)로만 남은 좌우측 성곽의 일부도 복원할 예정이어서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이 성곽 복원 작업에도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이 사진의 경우 성곽 안쪽으로 성곽을 따라 들어선 초가집과 지게를 진 사람, 성밖을 내다보는 한복 차림의 어린이 등 당시 사회상도 엿볼 수 있다.역시 1890년대 초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각도의 숭례문 사진(3번)은 무악재 방향과 서대문 성곽을 함께 담고 있다.한편 정 관장은 성밖 염창교 쪽에서 촬영된, 일제 강점기 숭례문의 아픈 과거를보여주는 또 한장의 사진(4번)을 함께 공개했다.이 사진은 숭례문 주변 성곽이 이미 허물어진 뒤인 1910년 전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숭례문 편액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 가운데 오른편에 감시용 망루가설치돼있고 숭례문 입구에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석등이 세워져 있다.이와 관련, 정 관장은 "일제가 1937년 백두산에 쇠말뚝을 박고 무속제를 올렸듯이 숭례문에서도 도성의 기운을 막으려고 문 입구에 무속제를 올리기 위한 석등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일본이 원구단을 철거한 뒤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고 광화문의 위치를 옮겨자신들이 신궁을 세운 남산을 향하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왜곡하고전통 문화를 말살하려 한 또 하나의 사례라는 주장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9 23:02

서울시, 문화재 24시간 감시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2월 발생한 숭례문 방화 사건을 계기로 문화재 전담 경비인력 86명을 흥인지문 등 주요 문화재 22곳에 배치하는 등 '문화재 종합 안전관리 대책'을 시행 중이라고 8일 밝혔다. 시는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직후인 작년 3월 문화재 전담 경비인력으로 86명을 채용해 흥인지문, 문묘 등 22개 문화재에 한 곳당 3~9명을 배치해 3교대로 24시간 근무하도록 했다. 숭례문 화재 이전에도 55명의 문화재 관리 인력이 있었지만 24시간 상주체제는 아니었다. 시는 올해 14명을 추가로 뽑아 총 100명의 경비인력을 최규하가옥 등 2곳을 추가한 24개 문화재에 배치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시는 보신각, 남산골 한옥마을 등 문화재 97개소에 CC(폐쇄회로) TV와 적외선 감지기, 자동경보 소화기, 연기감지기 등 방범ㆍ방재시설을 설치했으며 올해는 56곳에 추가로 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다. 또 유사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흥인지문 등 문화재 11개소에 대한 재난대비용 설계도면을 제작해 관리단체와 자치구, 소방서에 비치했다. 시는 올해는 50곳의 설계도면을 추가로 제작할 계획이다. 시는 아울러 화재에 취약한 목조문화재에 방염제를 입히는 사업을 흥인지문, 사직단 정문, 대원각사비 등 58곳에서 시행할 예정이다. 시는 지난해 문화재 안전관리예산을 1억800만원으로 편성했다가 41억5천200만원으로 재편성했으며 올해 관련 예산을 61억5천600만원으로 증액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9 23:02

미륵사, 판도라의 상자 열리나

'무왕의 익산 천도설' '서동설화' 등 오래된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로 평가받고 있는 익산 미륵사 서탑 사리장엄구 발굴과 관련, 미륵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학계를 중심으로 미륵사 서탑 사리장엄구의 발굴성과를 점검하는 학술대회가 연이어 개최된다. 전라북도 역시 미륵사와 관련해 3월 국내 학술대회와 10월 국제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가장 먼저 열리는 학술대회는 한국사상사학회(회장 최기영)의 정기 학술대회로, 불교적 측면에 주목한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사리봉안기의 판독과 해석을 맡았던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발표자로 나서 사리봉안기 판독과 해설을 보강할 예정. 길기태 국가기록원 박사와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봉안기를 통해 석탑이 조성된 시기로 밝혀진 639년 당시 백제 불교사상에 대해 말한다. 다음달 14일 오후 2시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다.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는 다음달 21일 미륵사를 주제로 제82회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한정호 동국대박물관 연구원이 미륵사 사리구와 왕궁리 석탑 사리구를 비교하며, 김수태 충남대 교수가 7세기 백제와 무왕시대에 비춰 미륵사 축조가 갖는 의미를 분석한다.이 학술대회에서는 사리봉안기의 서체와 사리공양품 중 장신구 유물 등 그동안 언론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뤘던 부분에 대해서도 집중조명할 예정이다. 장소 미정.전라북도는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소장 최완규), 백제학회(회장 양기석)와 공동으로 3월 말 대규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가칭 '미륵사 사리장엄 발견 계기로 본 미륵사의 재발견'.10월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등과 함께 국내외 연구진들이 참석하는 국제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전북도 관계자는 "미륵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을 추진하려면 이에 대한 학술대회는 필수라고 생각한다"며 "분기별 학술대회 개최를 검토하고 있으며, 역사적 규명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산업적 측면에서도 다각도로 접근해 보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09 23:02

맹목적인 이스라엘 찬양을 분석하다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된 이후 유대인은 더이상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수없이 학살당한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며, 그들도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5일 진보적 종교 연구소들의 연대체인 '종교인네트워크'가 서울 충정로 한백교회 안병무홀에서 개최한 '열린포럼, 홀로코스트 종교를 넘어서'라는 토론회에서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김 실장은 '홀로코스트 신학과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이라는 발제를 통해 "아우슈비츠 이후 유대인을 비난하는 게 금기시됐는데 이를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서구 신학자들은 비난했다"며 "현대 서구 신학 역시 이런 홀로코스트 산업에 포섭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자신의 고통을 특화시키는 순간 더 이상 희생자의 담론이 아니며, 또 다른 희생자를 부르는 제국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이 가자를 침공한 순간 유대인들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이 '정당방위'라고 언급하는데 그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적 성공에 예속된 식민화된 자의식이 깔려 있다"며 "(그 자의식을) 성찰할 지적 준비도, 신앙적 의지도 없다면 (개신교 지도자들이) 전 지구의 고난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정당하게 판단할 신학적, 신앙적 사유의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박준영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신학의 시대적 한계와 종교 간 협력을 통한 극복'이라는 발표에서 "한국은 자본주의적 성공 추구로 이스라엘을 정신적 모델로 삼았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고, 이는 개신교의 개별 교회 성장 추구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맹목적 찬양과 지지로 연결됐다"고 분석했다. 박 연구위원은 "배타적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나 내부에 있는 위험한 본능과 같다"며 "기독교는 내부의 근본주의를 극복한 경험이 가장 많은 종교라는 점에서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이스라엘의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라는 발제에서 2차 대전에서 일본인의 피해를 그린 '요코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도식적 이분법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성찰이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6 23:02

"조선은 명분보다 실리 추구한 왕조"

조선의 기본적인 외교노선은 사대(事大)였다. 말 그대로 대국인 중국을 섬겨야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사대'라는 말이 명문화 될 정도였다. 명(明)이 멸망하자 이미 중국 대륙을 정복한 청(淸)을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조선 정가의 최대 화두로 떠오를만큼 사대에 대한 조선의 입장은 확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사대'라는 대의와 명분에 매달린 이념 왕조였을까?청주대 역사문화학과의 민덕기 교수는 이 같은 의문에 제동을 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조선왕조가 이념 왕조가 아닌 무역 실리를 추구한 왕조라는 견해까지 피력한다. 민 교수는 6일 동국대 일본학연구소가 주최하는 '동아시아의 소통과 교류'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 앞서 4일 배포한 논문 '팔포무역으로 보는 사대.교린 사행외교의 특징'을 통해 이런 주장을 폈다. 민 교수는 조선왕조가 건국 초부터 무역적 요소를 배제한 채 신의(信義)에 입각한 사행외교를 전개하려 했으나 대명(對明)외교에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부경사행(赴京使行)을 통한 밀무역을 철저히 통제할 정부의 의지와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국대전'에는 부경사행으로 금지된 물품을 지참하는 자는 사형이라고 규정돼 있으나 조선 정부는 한 번도 이 법조항을 적용해 치죄(治罪)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청나라가 들어서자 '팔포(八包)무역'제도를 도입하면서 부경사행 때 사무역을 독려하기까지 한다. 팔포무역이란 사행원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공인된 사무역을 말하며 통상 사무역에 참가한 이들은 은과 인삼을 거래했다. 심지어 정조는 "은이 귀하면 삼을 가져가고, 삼이 귀하면 다시 은을 가져가게 해 무역의 권한이 우리나라에 있게 하는 것은 실로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획책하는 좋은 계책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민 교수는 이러한 예를 통해 "조선 정부는 이념 왕조라기 보다는 무역실리를 추구한 왕조"로도 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민 교수는 이어 문화적 사대국이었던 명에서 정치적 사대국인 청으로 넘어가면서 사행외교 시 무역을 통해 실리를 취하려는 입장이 더 강화됐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이밖에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츠노 도모아키 일본 고치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가 '임진왜란의 원인.목적에 관한 일본의 제학설'을 통해 임진왜란의 원인과 목적을 조명하고, 이훈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외교문서로 본 근세 한일관계'에서 교린(交隣: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귄다) 이념에 어긋난 조선과 일본사이의 문서 사례를 살펴보는 등 5편의 논문발표가 이어진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5 23:02

전주한지로 조선왕조실록 찍기 '밑그림'

조선왕조실록을 전주의 전통 한지로 재현하기 위한 발전방향이 논의됐다.  3일 최명희문학관에서 열린 '조선왕조실록 복본화사업 실무회의'에서 복본화사업 자문위원회와 실무위원회, 그리고 이번 사업을 주관한 한국고전문화연구원 담당자들은 복본화사업을 위해 전주 전통 한지의 기술 표준을 점검하고, 산업화 방향을 모색했다. 충북대 최태호 교수는 세종실록 생지본을 분석해보니 두께 0.102mm, 무게 61.3g/㎥ , 밀도 0.605g 를 유지하고, 전통 한지 제작 기법인 '외발뜨기(흘려뜨기)' 로 만들어졌다며 본복화용 한지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에대해 홍성덕 실무위원(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은 "최교수의 한지 기술 표준을 받아들여 만들기엔 특히 밀도를 맞추기가 어려워 기준을 완화하기로 했다”며 "전통 한지 제작 방식인 '외발뜨기'를 하는 장인들이 많지 않은 것도 넘어야 할 산”이라고 말했다.'외발뜨기'로 제작하면 '쌍발뜨기(가둬뜨기)'에 비해 닥섬유의 조직력이 강화돼 종이가 질겨진다는 게 장점이지만, 이 방식을 고수해온 장인이 많지 않은 데다 표준화시키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고민이다. 복본화사업을 위한 홍보와 마케팅 강화, 그리고 산업화에도 신경써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이내옥 자문위원(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장)은 "복본화사업의 기록물인 백서를 만드는 일도 의미있지만, 한지 제작 전 과정을 영상물에 담아 지역 방송과 협약을 맺어 홍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며 "중앙 언론사와도 협약을 맺어 지속적으로 홍보해 시민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본 화지가 살아난 것은 종이의 질을 높여 고가 정책을 유지한 덕분"이라며 "한지 가격이 비싸지더라도 고급화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권희 자문위원회 부위원장(경북대 교수)은 "조선왕조실록 전주 사고본 이미지 상태를 조사한 결과 빠지거나 훼손된 부분은 있지만, 이를 보완해 복본화하면 세계적인 기록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며 "당시 고급 종이로 여겨졌던 조선왕조실록의 전통 한지를 표준화해 산업화하면 커다란 수익이 창출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홍성덕 실무위원은 "전주 전통 한지가 시장에 널리 유통되려면, 전주시가 품질인증관리시스템을 구축해 생산 전반을 총괄하는 게 필요하다”며 "전통 한지의 표준화된 규격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은 복본화용 한지 생산자와 제작 업체의 선정을 2월 중에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02.05 23:02

[미륵사 사리장엄, 1400년의 꿈] 3.서동설화, 아름다운 꿈 깨지말자

이번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구의 발견을 계기로 더욱 더 세간의 이목을 받게 된 서동설화는 「삼국유사」 기이편 무왕조에 미륵사 창건 내용과 더불어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의 구성을 요약하면 서동의 탄생과 성장과정,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 서동의 왕위등극과정, 미륵사 창건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설화를 현재적으로 해석하면 첫째, 한 개인의 어려운 환경의 극복과정과 모친에 대한 효성, 둘째, 신라공주와의 결혼은 통합을 의미하며, 셋째,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꿈을 이뤄내는 것이며, 넷째, 개인의 사랑을 뛰어넘어 백성과 국가를 더 크게 사랑하는 것으로서, 그 귀결은 미륵사 창건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서동설화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당시 백제의 어려운 국내외 상황을 극복하고 백제 중흥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무왕의 원대한 포부를 담아낸 역사적인 대서사시라고 할 것이다.또한 서동설화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가 편찬된 시대적 상황은 고려가 몽고의 간섭 하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에게 그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신화나 삼국의 건국신화의 기록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려 했던 의도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서동설화는 백제 무왕과 신라 공주와 결혼에서 보이는 민족적 통합, 그리고 미륵사 창건과 익산천도를 통해 백제 중흥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무왕대의 역사적 교훈을 본받아 고려후기 민족적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대적인 절실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서동설화는 단지 가공된 설화인 것일까? 미륵사지 발굴조사 결과는 미륵사의 창건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해 준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륵사는 세계 유일무이의 3원식 가람으로 미륵삼존을 모신 불전과 탑, 회랑이 세 곳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 회랑 밖에서 연못지가 노출됨으로써 "연못을 메워서 절을 지었다"는 설화의 내용을 증거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내용 가운데 선화공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서동설화가 허구 내지는 가공이라는 견해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 자료에 보이는 백제왕후의 대왕의 안녕과 중생제도의 발원 기록은 서동설화의 미륵사 창건 내용을 이어받아 보강해 주는 자료라고 보는 것이라 더 타당하지 않을까.앞서 언급했듯이 미륵사지의 발굴결과에서 나타난 가람배치의 구조 및 특징에서 보면 동·서원보다는 중원이 미륵사의 중심이기 때문에 사찰의 창건 내력 역시 중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출토유물 가운데 간지가 새겨진 인장기와의 연대를 보면 역시 서탑의 봉안기 연대인 639년보다 앞서기 때문에 미륵사 창건은 이보다 이른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화의 내용과 발굴결과를 대비해서 보면 서동설화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히 기초해서 쓰여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가운데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은 미륵사의 창건이나 전체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륵사의 일부인 서원에 국한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하면 사리봉안기에 선화공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고 해서 서동설화가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백제말기 익산천도와 관련된 사실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열쇠가 바로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이라는 것이다.이번 대발견과 관련하여 전라북도와 더불어 익산시에서도 전례없이 전폭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홍보와 관심을 유도하는 한편, 익산역사문화지구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익산지역에 산재된 백제말기의 도성유적은 그 보존상태도 양호할 뿐만 아니라 자연경관도 공주나 부여보다도 훨씬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문화의식과 지방자치단체의 유적보존과 활용정책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기 때문에 조급증을 가지기 보다는 이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자체를 통해 도민의 통합과 성숙된 문화시민의식을 배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미륵사 서탑 1층 중심기둥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금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성과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 내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몫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최완규(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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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05 23:02

역사 현장에 육화된 함석헌의 저항

함석헌(1901~1989) 20주기(4일)를 맞아 비폭력 저항주의자, 교육가로서의 그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보는 학술대회가 3일 오후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렸다. '함석헌 선생 20주기 겸 마하트마 간디 61주기 추모'라는 이름을 내걸고 열린 이 학술대회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독재와 싸운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통해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함석헌 선생이 영국 시인 셸리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만일 저항(resist)이란 말이 없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다"라는 함석헌의 말을 일례로 들면서 3.1운동 때 반일투쟁, 해방후 반독재투쟁 등에 앞장선 저항주의자로서의 함석헌을 조명했다. 이치석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은 '함석헌의 교육철학'에서 "교육의 본질을 인간의 조건에서 찾고, 학교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주장한 함석헌의 사상은 현재에도 유효한 공교육의 방향"이라고 평했다. 이밖에 '간디와 함석헌의 유산'(김영호 인하대) '함석헌의 말법-거짓말과 참말의 기준'(석경징.서울대), '변호사 마하트마 간디'(박종강 변호사)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 한편 학술대회에 앞서 간디에 대한 다큐멘터리 상영과 싸띠쉬 샤르마 주한 인도대사관 이등서기관의 축사, 함석헌 선생의 육성을 들어보는 자리 등 함석헌 선생 20주기와 간디 61주기(1월30일)를 회고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함석헌평화포럼이 주최하고 주한 인도대사관이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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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04 23:02

[미륵사 사리장엄, 1400년의 꿈] 2."익산이 백제 왕도였다는 사실 증명"

백제시대의 사비 천도 후 창건된 거의 모든 사찰은 일탑식가람배치 곧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는 중앙에 중원을 두고 동과 서쪽에 각각 동원과 서원을 배치한 고대 불교국가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매우 독특한 3원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중원의 목탑과 금당은 동·서원의 석탑이나 금당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동일한 레벨에 위치한 동·서원보다 높은 기단 위에 조영되었고, 동서의 석탑과 달리 아주 정교하게 판축된 기단 위에 목탑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강당이나 외부로 통하게 되어있는 동·서원의 회랑에 비해 중원의 회랑은 4면이 폐쇄된 형태로 돌려져 있고, 그 공간너비도 더 넓기 때문에 동원이나 서원에 비해 더욱 신성하고 존엄한 공간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원에는 백제의 전통적인 목탑을 배치하고 동·서원에서는 당시로서는 유래가 없는 석탑을 창안 배치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에서 각원 조성의 선후관계가 파악된다. 따라서 미륵사 가람에서는 중원이 중심이며 동원과 서원은 종적인 가람으로 기획되었고, 창건과정에서 가장 먼저 건축이 이루어지는 곳은 이 사찰의 중심인 중원이라고 판단된다.한편 강당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서는 을축(605년) 갑신(624년) 정해(627년) 기축(629년)년명 등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어서 미륵사 창건이나 중수연대를 살필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결국 미륵사 창건은 무왕 재위 이른 시기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서탑의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기해'(639년)가 곧 미륵사의 창건연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미륵사 창건과 관련은 중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금번 발견된 사리장치의 내용은 서원 석탑에 관련된 것으로 국한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그렇다면 무왕은 왜 당시 왕도였던 부여가 아닌 익산에 대규모의 사찰을 조성한 것일까? 백제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사씨와 연씨 등이 주축이 된 대성팔족의 막강한 권력은 왕권과 대립하여 정치적인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는데, 무왕 이전의 혜왕과 법왕의 재위년간이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는 데서 당시의 정정불안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혼란상태 속에서 즉위한 무왕은 우선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왕권 강화가 필수적이었을 것이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인 후원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무왕은 사비에서 멀지않은 지역인 익산을 중심으로 마한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정치세력의 도움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현안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익산지역에는 미륵사와 더불어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인 왕궁유적과 미륵산성을 비롯한 많은 수의 성곽유적,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전해오는 쌍릉 등 고대 수도를 경영하는데 있어 4대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무왕대 천도지로 주목되고 있다. 백제 말기 익산천도와 관련해서는 일본 교토 청련원에 소장된 「관세음응험기」에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라 되어 있는데 지모밀은 왕궁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익산천도의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제석사의 화재사실과 목탑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일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제석사지 인근에서 화재 후 이 사찰의 폐기물을 한 곳에 모아 버린 장소가 발견되어 「관세음응험기」의 신뢰성을 더해 주고 있다.이와 같이 무왕은 익산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전통의 정치세력의 후원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이루어 전대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백제 중흥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익산천도로 귀결지을 수 있는데, 당시 정치적 통합 못지않게 갈등과 반목으로 갈라져 있던 전 백제인의 정신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도량이 필요했을 것인데 미륵사 창건이 바로 그것이다.한편, 금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의 공양품 가운데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외에도 은화관식과 금제소형판이 주목된다. 은화관식은 6품이상의 관리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지금까지 사비시대의 횡혈식석실분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중앙관리의 지방파견을 상징하는 표지적 유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금제소형판에는 '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중부의 덕솔이 금덩이 1매를 바친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미륵사 건립에는 왕실에서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그야말로 국가적 사업으로 이룩된 사찰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왕도가 아닌 곳에 이러한 국가적인 대규모 가람 건축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바로 이번에 발견된 서탑의 사리장엄이야말로 익산이 백제 왕도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최완규(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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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9.02.04 23:02

"판소리 발생지 전라도 아니다"

때아닌 판소리 발생지 논란이다.그동안 전라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판소리가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기원해 200여년에 걸쳐 남도지방으로 퍼졌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판소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동국대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단'의 한국 유성기음반 아카이브 구축사업 연구 책임자로 있는 배연형씨는 최근 출간한 「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동국대출판부)을 통해 "광대들이 학습용으로 삼았던 소리책과 유성기 음반 등을 연구한 결과, 판소리는 18세기 말부터 서울 경기지역에서 출발해 지방으로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며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맞지만 이는 개화기 이후의 모습만 보면 그렇다"고 주장했다.「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은 2005년 판소리학회가 주는 '판소리 학술상'을 수상한 논문을 보완한 것. 배씨는 "판소리에는 전라도의 무속음악적 요소도 있지만 경기나 충청 등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도 들어있다"며 "판소리가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서울소리나 가곡식 창법에 점차 전라도 음악의 계면조 등 여러 장단이 뭉쳐졌고 이것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다양성을 지니게 됐다"고 밝혔다.그러나 판소리학계의 한 중진 연구자는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통설이자 정설"이라며 "일부에서 판소리가 정악에서 나왔다, 경기도에서 만들어졌다 등의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여기에 동조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고 잘라말했다.이 연구자는 1754년 충청도 목천의 유진한이라는 선비가 남쪽을 여행하고 기록한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에 판소리 '춘향가'를 직접 듣고 칠언장시로 써놨는데 남녀간의 연애를 썼다는 이유로 그 지역 선비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며, 만약 충청지역에서 판소리가 먼저 퍼지고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는 현재 전하는 '춘향전' 중 가장 초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전기 8명창을 비롯해 초기 기록에 나오는 사람들이 경기도를 비롯 북쪽 사람들이다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만, 기록이란 것이 단편적 사실인 데다 남쪽에는 송흥록 이전에 이름난 명창이 없어서 그런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판소리가 서울소리나 가곡식 창법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판소리에 서울소리인 경조와 가곡식 창법인 우조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 비중이 많지 않으며 무엇보다 전라도 음악의 계면조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반박했다.판소리 발생지 논란에 대해 대부분의 판소리 연구가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이보형 한국고음반연구회장은 "전라도에서 판소리 공연이 활발하지만, 사실 둘 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설로밖에 볼 수 없다"며 "초창기 명창들을 보면 경기·충청지역이 많았으며 조선 후기부터는 전라도가 주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병헌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음악을 바탕으로 판소리 형식으로 불려진 것들이 있었을 것"이라며 "조선 말기 남원 송흥록이란 인물이 역대 판소리 명창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남원으로 와 소리를 배우게 되면서 판소리가 통합되고 자연스레 전라도 지역으로 굳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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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09.02.04 23:02

'正二品松' 또 수술대 오른다

수세약화로 고사위기에 처한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정이품송(正二品松.천연기념물 103호)이 기력회복을 위해 또다시 대수술을 받는다. 2일 보은군과 문화재청에 따르면 올해 2억5천만원을 들여 정이품송의 썩은 동북쪽 큰 가지(지름 25㎝) 줄기를 제거하고 뿌리성장에 지장을 주는 밑동 주변 복토층도 제거할 방침이다. 제거될 줄기는 1993년 강풍에 부러진 뒤 꺾인 부위를 잘라내고 방부처리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작년 정밀진단 결과 목질부가 썩어 몸통까지 번질 우려가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이번 수술에서는 그동안 폭설과 강풍에 부러졌거나 말라죽은 7~8개의 가지를 정밀 조사해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빗물 등이 스며들지 않도록 방부처리한 뒤 인공수피를 씌우는 수술도 병행된다. 또 뿌리 생장을 막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도로쪽 복토층 제거도 함께 이뤄진다. 이 복토층은 1974년 속리산 진입도로 확.포장 때 인근 도로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채워진 것으로 뿌리와 근경부(根莖部.뿌리와 줄기가 이어지는 부분) 부패의 원인으로 지적돼 7년 전 두께 50㎝ 가량이 제거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당시 전체 복토층이 제거되지 않아 아직도 10~30㎝ 두께의 불필요한 흙이 덮여 있으며 이 흙이 뿌리 생장과 호흡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보은군 정유훈(36) 학예연구사는 "잔뿌리가 지표면까지 올라오도록 뿌리 부분을 덮고 있는 복토층을 모조리 제거하고 소나무 방풍림을 조성할 계획"이라며 "날씨가 풀리면 곧바로 공사에 나서는 한편 솔잎혹파리 등 병충해 방제작업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1455년∼1468년) 행차시 어가(御駕)행렬이 무사히 통과토록 가지를 스스로 들어 올려 정이품 벼슬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 4.7m)는 1980년대 솔잎혹파리에 감염돼 투병했으며 1993년 이후 4차례 강풍과 폭설 피해를 봐 4개의 큰 가지 중 3개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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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02.03 23:02

[미륵사 사리장엄, 1400년의 꿈] 1."미륵사 창건 배경 섣불리 풀어선 안돼"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지난달 14일 사리장엄이 발견됐다.500여점에 달하는 이 사리장엄은 미륵사 창건 배경 및 발원자, 석탑 건립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그러나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의 해석을 놓고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무왕의 왕비가 백제 관료의 딸'이라는 글귀로 인해 서동설화가 허구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이에 대해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최완규 교수가 "미륵사 사리장엄의 의미와 가치는 크지만, 사리봉안기가 미륵사 사찰 창건의 모든 것을 말해준 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충분한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보내왔다. 최교수는 "서동설화가 허구라도 해도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갖는다"며 "아름다운 꿈은 깨지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교수의 글을 세차례에 나눠 소개한다.미륵사지 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를 두고 '국보 중의 국보' '백제 고고학의 최대성과' '미륵사의 판도라상자가 열리다' 등 언론에서 보인 경이에 가까운 찬사는 연구자는 물론, 온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석탑 금제사리봉안기의 첫 구절 '竊以(가만히 생각하건데)…'처럼 흥분을 가라앉힌 후 냉정하게 자료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이를 다시 들춰낸 21세기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잘 알다시피, 미륵사는 가람배치의 형태나 규모, 그리고 남아 있었던 석탑 등이 가히 세계적일 뿐 아니라, 미륵사 연기설화에 보이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에게 아름다운 꿈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던 대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석탑의 중심기둥 안에서 금빛 찬란한 사리호와 사리봉안기, 구슬, 은제관식 등 500여점의 유물이 1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금세기 고고학의 최대 성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미륵사 석탑의 사리장엄은 1층 중심 기둥(心柱石)의 중앙에 설치된 네모난 사리공(한변 24.8cm, 깊이 27cm)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닥 전면에는 두께 1cm의 판유리 1매를 깔고, 그 위에 각종 공양품 505점이 정성스레 안치되어 있었다. 공양품이 안치된 순서를 보면, 먼저 사리공의 네 모서리에 원형 합 6개를 안치한 후,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녹색 유리구슬로 채운 뒤 남편에는 은제 관식과 금제 소형판, 그리고 북편에는 직물로 싼 손칼(刀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중앙에 금제 사리호를 세워 안치하고 남측 벽면에 비스듬하게 사리봉안기를 두고 있었다. 이 외에도 북측과 서측 벽면 쪽에는 부식이 심한 3∼5종의 직물들이 있었고 주위에서는 금실(金絲) 등과 함께 작은 금덩이가 발견되었다.금제 사리호를 비롯한 화려한 사리장엄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이들 공양품을 봉안하게 된 내력을 적은 금제사리봉안기일 것이다. 이는 미륵사 석탑을 세우면서 작성한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후대에 작성된 그 어떠한 사료보다도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으로 앞뒷면에 한줄에 9자씩 총 194자를 새겼으며 특히 앞면에는 붉게 주칠하여 문자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백제왕후는 당시의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이었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서 매우 불심이 깊었는데, 이러한 왕비의 선심을 바탕으로 대왕의 안녕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기해(639년) 정월 29일에 가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발원문이다. 바로 이 사리봉안기의 내용이 미륵사 창건연대와 서동설화의 진위 논란에 대한 중심에 있는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일부 언론의 기사 제목이나 일부 학자의 인터뷰를 보면, 사리봉안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미륵사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의 발원으로 기해년(639년)에 대왕을 위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미륵사의 창건은 선화공주와는 무관하다', 나아가 '서동설화는 허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미륵사의 창건문제가 이처럼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즉, 미륵사지 발굴조사 결과 나타난 가람배치의 특성이나 출토 유물의 성격, 그리고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타난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등을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해 본다면,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내용이 미륵사의 창건에 대한 모든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최완규(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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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03 23:02

익산 미륵사전시관 '국립박물관' 승격 요청

전북 익산시가 최근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사찰의 창건 연대와 배경을 밝혀주는 유물이 대거 출토된 것과 관련해 현 미륵사전시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시키고 학술대회를 여는 등의 주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시는 지난주 전북도가 미륵사지를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고 밝힌 만큼 이번 기회에 도(道)에서 관리하는 미륵사유물전시관을 경주, 부여 등과 같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승격시켜 주도록 문화관광체육부에 정식 요청키로 했다고 2일 밝혔다. 아울러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사리 봉안장치) 등 500여점의 국보급 유물은 1-2년이 소요되는 보존 처리과정이 끝나는 대로 전북 도내 박물관에 안치될 수 있도록 문화재청의 협조를 얻기로 했다. 이와 함께, 도내 대학 및 백제문화연구소 등과 함께 사리장엄구의 고고학적ㆍ미술사적 가치를 조명하기 위한 학술행사를 1년에 두 차례 열고 미륵사 복원 및 주변 정비사업도 신속히 추진하기로 했다. 이한수 익산시장은 이날 익산시를 초도 방문한 김완주 도지사에게 이 같은 방안에 대해 보고하고, 도 차원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시 관계자는 "미륵사지가 있는 왕궁면과 금마면 등 역사유물 지역은 현재까지 시비를 들여 토지 매수와 지장물 보상을 하고 있으나 자금이 열악해 어려움이 많다"면서 "미륵사지 주변의 난개발을 막고 신속한 정비사업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예산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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