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스승의 날이다. 그런데 이 날을 교육자의 날로 정해서 쉬는 학교가 많았다. 표면적으로야 교육자의 날이라지만 스승의 날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쉬는 일면도 있다. 예전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지만 지금은 사랑의 회초리 조차도 거부하는 학생과 그 학부모들이 적지 않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지구상에 사는 동물 중-식물이 교육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의 교육기간이 가장 길다. 유아원과 유치원 등을 빼더라도 총·중등 교육을 자그마치 12년을 받는다. 그리고 대학 4년이 이제는 보편적인 교육이 되었다. 그러면 16년이란 세월을 배우면서 지낸다는 이야기가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오랜 기간의 교육 과정은 중세유럽의 말하기, 읽기, 쓰기와 셈하기 교육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세운 학교들 특히 동부의 사립 명문학교에서도 이런 유럽식 교육의 핵심은 그대로 이어져서 유럽의 문화에 대한 높은 교양을 지닌 신사를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었다. 미국의 교육기관이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인식은 20세기 이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면서부터 생겨났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존의 교양인 양성을 포기하고 전문인 양성으로 교육의 목표를 바꾼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대학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교육의 패턴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전문인 양성을 강조하고 교양인 양성을 외면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대학을 전문인 양성기관으로만 여기도 소위 ‘뭘 가르쳤느냐’고 대학에 그 책임을 묻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이 그 긴 기간의 교육을 거쳐서 교양을 겸비하지 않은 전문인으로 양성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의 전공교육보다는 교양교육으로 풍요롭게 된다. 서구의 학제에서 전공이 셋 정도의 비중이라면 둘 정도의 부전공을 두 개 이수하도록 하는 것도 교양이 갖는 성격 때문이다.
교양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현대사회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으로 소양을 중심으로 교육이 그 방향을 잡아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잘 견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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