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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섬 아닌 섬 '죽도'…정여립의 익지 않은 꿈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물머리집 할머니의 불꺼진 방이 있다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강으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박성우 詩 「물의 베개」 中)여름 강이 배를 드러내놓은 채 누워 있다. 며칠 동안 내린 폭우를 잔뜩 머금고 훌러덩 제 살을, 제 속을 고스란히 펼쳐놓고 있다. 물이 차오른 강은 모든 것을 안고 흐른다. 거대한 기암괴석도 모래밭도 짙푸른 녹음도 제 품에 안은 채 흐른다. 여름 강은 엄마의 가슴이다. 탱탱하게 오른 풍만함이 산천에 젖을 물린 채 제 몸을 풀고 있다.진안 죽도(竹島)는 육지 속의 섬이다. 강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흘러 하늘에서 보면 예쁘게 빚어 놓은 '송편'이다. 동북쪽은 덕유산에서 흘러온 구량천이 휘돌고, 서남쪽은 금강 상류 물길이 감싸 안는다. 죽도엔 한자 그대로 산죽이 지천이다. 겨울이면 흰 눈 사이로 댓잎이 청량하고 여름이면 곧게 뻗은 줄기로 햇살이 퉁긴다. 구량천이 죽도를 지나면서 금강 상류에 몸을 섞는다. 말 그대로 '두 물머리'이다.죽도 앞은 진안읍과 동향면, 장수군과 천천면의 경계를 이루며 솟은 천반산(天盤山646.7m)이다. 천반산은 죽도를 향해 다리를 뻗고 편하게 쉬는 소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용이 머리를 내밀며 엎드린 것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복숭아를 받는 소반'같다고 해서 '천반낙도(天盤落桃)의 땅'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천반산의 이름에는 3가지 유래가 있다. 먼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천반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 두 번째는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정여립의 모반"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천반산에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정여립(1546~1589)이 있다.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왕권체제하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던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반체제적인 인물 정여립.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약처럼 위험한 사상으로 장전돼 '대동세상'을 꿈꾸던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론 개혁과 실용을 앞세운 조선왕조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다. 그의 말은 선비사회인 조선에게는 벼락 치는 소리였고 천둥소리였다.그는 서인(西人)의 수장이었던 율곡 이이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거칠 게 없었으며 선조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율곡도 그를 '당대 천재'라고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율곡이 죽자 그는 동인(東人)으로 정치노선을 바꾼다. 돌연한 변신에 서인들의 격분을 샀음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서인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었다.그는 '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고 '백성이 잘 사는 나라,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원했다. 양반, 상놈, 농민, 노비 할 것 없이 누구든 뜻을 같이하면 계원이 될 수 있었다. 대동계원들은 천반산에 모여 무술단련과 함께 세상이야기도 나눴다. 전라도뿐만 아니라 저 멀리 황해도에서도 참가자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대동계를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대부가의 낙향한 벼슬아치 출신이 천민들과 어울린 것도,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적인 모임을 만든 것도, 왕위 세습을 거부하거나 충군의 이념을 부인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서슴지 않은 것도 반대세력에겐 좋은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역모를 고발하는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가 조정에 당도됐고, 곧 토벌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시작됐다.첩보는 구체적이었다. 하지만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과 선조는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당도한다. 변고는 거듭됐고, 얼마 후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문초함)을 시작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시작됐다. 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이듬해 7월까지 무려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조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반에 대한 치죄는 매우 엄했다. 삼족을 멸하고,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후 조선팔도로 흩어지고 그와 서신 한 번, 대화 한 번 한 이력이 있는 사람도 죽었다. 정여립의 근거지 전주는 동래 정씨가 아예 살 수 없게 됐고, 그의 고향 금구는 현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돼 이후 인재등용에서 배제됐다.▲ 음모 그리고 익지 않은 꿈'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동사만록' 中)정여립은 대역죄로 죽었다. 또한 그가 쫓기다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뚜렷한 물증도 없고 단 한 번도 저항한 흔적도 없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고작 몇 년 앞에 두었고 동인들이 주도적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때였다.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에게는 율곡이 죽자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이라며 한탄을 했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을 쓴 신정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정여립의 꽃은 지고 말았다. 천변산 자락으로 떨어진 꽃은 구량천을 돌아 금강 상류로 흐른다. 물을 잔뜩 머금은 강변이 푸르다. 산죽의 잎새에 퉁긴 여름 햇볕이 도포자락처럼 휘날린다. 말을 타고 천반산을 누비는 정여립의 모습이 강물 위에 비쳤다 사라지는 환영을 본다./ 김성철 문화전문시민기자(우석대 한국어센터 강사)

  • 기획
  • 전북일보
  • 2011.08.08 23:02

"푸근한 정서가 담긴 땅이름 지켜내야죠"

도로명 새주소 사업 개선 운동을 벌이는 익산시 용안면 자명사의 행심 스님을 찾았다. 불교신문 누리집에 새주소(도로명 주소) 사업의 부당함을 지적한 글을 올린 주인공이다. 출가 수행자로서 조심스러웠는데 불교신문(7월 20232730일 보도)에서도 연거푸 새주소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스님이 거처하는 주소는 '법성리 279번지'다.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누리집(www.juso.go.kr)에 들어가 보니 '용안교동 1길 83'과 '을동길 76-12' 등 두 가지가 나온다. 지난해 인구조사 때에는 '을동길 76-12'라고 붙여 놓았다. 스님은 "대체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그는 새주소사업에 반대하는데 대해 "수행자는 수행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신도들이 가만히 있어서 나서게 됐다"며 "새주소 사업을 잘못하면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민족의 뿌리를 흔들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지명에는 전설과 애틋한 사연이 내포되어 있어 대부분 고을 이름만 들어도 그 고장에 대한 역사와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는 그는 "설령 조금은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이름일지라도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질박하고 아름다운 한국적 정서와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푸근함이 담겨 있으니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필요하다면 도시에서 시범적으로 하면서 좀 더 검토를 하고, 문제가 더 확산되기 전에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그는 지난 번 교통신호등도 시험했다가 원상태로 되돌린 것을 예로 들기도 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1.08.01 23:02

9. 도로명 새주소 사업

지번 주소체계를 사용해온 지 100여 년. 정부는 지번 주소체계가 일제의 잔재라거나 국제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10여 년부터 '새주소(도로명 주소) 안내 사업'에 매달렸다. 새주소 사업은 주소의 기준을 지번에서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변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통을 원만히 하려던 새주소 안내 사업이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해 뒤로 미뤄졌다.▲ 새주소 안내 사업 추진 배경행정안전부가 새주소 안내 사업으로 내세운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도로명은 도로의 일정 구간별로 부여하되 그 지역의 특성과 역사성을 반영할 것. 둘째, 도로명을 부여하고자 할 때 해당 도로관리청과 지역 주민 등의 의견을 수렴할 것. 셋째, 건물번호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로상에 일련번호(기초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할 것. 정부는 이미 2006년 도로명을 적용한 새주소를 발표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반대가 심해 지난해 다시 새주소를 발표했다. 올해 7월부터 전면 실시하려다 반대 여론에 부딪쳐 2년 뒤로 미뤄졌다. 행정안전부는 지번 주소체계가 △ 행정동과 법정동의 이원화 △ 도시화로 인한 지번의 연속성 결여 △ 경로 안내와 위치 안내의 기능 저하 등을 들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제시한 새주소 안내 사업은 편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평생을 살아온 땅이름(동리)을 모두 없애버림으로써 도리어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지적을 하고있다.▲ 지명을 정하는 원칙지명을 정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대개 풍수적인 요인을 고려하거나 풍토와 특산품, 자연환경이나 기후에 맞추거나 미래를 예견하며 짓는다. 역사적 사건이나 그곳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을 기려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특히 1700년 동안 겨레와 애환을 함께 해오며 민족문화와 정서의 바탕이 되어온 불교 관련 지명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불교계는 "민족문화의 뿌리를 말살하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지는 국민에게 물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국민투표라도 해야 할 사안"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최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새주소 안내 사업이 시행되면 각 시군구의 '동면리' 등 현재 쓰고 있는 땅이름 2만여 개가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이름이 사라지면 문화적 상상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게 한자어이든 본래 땅이름이든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 농촌할 것 없이 마을 이름에서 차츰 고유의 이름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인데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어떻게 지켜갈지 걱정이다. 이는 곧 역사의 단절이나 마찬가지다.▲ 지명에 축적된 우리 문화우리의 땅이름에는 첫째, 산, 내, 초목, 바위, 고개, 포구 등 자연환경이 담겨 있다. 둘째, 샘, 못, 다리, 성(城), 학교, 시장, 창고, 주막, 상점, 정자, 관청이나 치소(治所) 등 인간이 생활하면서 만든 것이 담겨 있다. 셋째, 신당, 장승, 선돌, 탑, 절 등 신앙과 관련된 것이 있다. 그 밖에 서원, 비석, 시가, 유적, 인물 등과 관련한 땅이름이 있다.예를 들자면, 군산의 '소뫼(牛山)'는 소를 맸던 곳이고, 임실의 '벗내(柳川)'는 버드나무가 있는 천이고, 익산의 '새실(草谷)'은 갈대가 우거진 마을이고, 고창의 '대매(竹山)'는 대나무가 많은 산을 뜻한다. 고창익산남원의 '성남(城南)'은 성의 남쪽이고, 남원익산의 '성내(城內)'는 성 안에 있는 마을이다. 고창완주전주김제부안의 장승백이는 장승이 서 있던 곳이다. 이처럼 땅이름에는 자연환경과 삶이 배어 있다.▲ 새주소 안내 사업, 신중하게 추진돼야이런 면에서 본다면 다음의 도로명은 좋은 이름이다. 전주는 견훤이 도읍했던 곳이기에 견성(甄城)으로 불리던 곳이다. 견훤로, 견훤왕궁길, 경훤왕궁로가 있다. 익산에는 무왕로, 선화로, 가람로가 있다. 가람은 시조시인 이병기의 호다. 군산에는 세미(稅米)를 운반하던 진포가 있어서 진포로, 진포길이 있다.정읍에는 샘골로, 무성길, 동학로가 있다. 이는 옛이름, 무성서원, 동학농민혁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남원에는 춘향로, 월매길, 월매안길 등 춘향전과 관련한 이름이 있다. 김제에는 벽골제로, 지평선로가 있는데, 벼골(벼가 나는 고을)로 했으면 어땠을까? 부안에는 신석정의 이름에서 따온 석정로, 고창에는 고인돌공원길, 고인돌대로, 모양성로, 진안에는 마이산로, 장수에는 논개로, 논개사당길, 논개생가길 등이 있다.전주는 옛 이름이 비사벌, 익산은 솜리이다. 이런 길이름은 없는데 살렸으면 좋겠다. 익산에는 원불교 총부가 있으니 소태산 박중빈의 이름을 딴 소태산로(길), 정읍에는 전봉준로(길), 순창에는 고추장로(길), 남원에는 이몽룡로(길), 김제에는 진묵스님을 기리기 위해 진묵로(길)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현재 쓰는 이름을 그대로 쓰되, 잘못된 이름은 제자리를 찾아주고, 토박이 땅이름으로 바꾸고, 역사적인 인물이나 유적지, 역사적 사건도 찾아 써서 내 고장에 대한 애향심을 기를 수 있으면 좋겠다.행정안전부는 1996년부터 준비한 도로명주소법을 올해 7월 시행하려다 2년간 기존 지명과 병행해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만일 새주소 안내 사업이 필요하다면 몇 개 도시를 선정하여 실시해 보고 확대하는 것도 한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적 합의 없이 2014년부터 전면적으로 확대해 실시하겠다고 하는 건 1000년 이상 축적되어온 문화콘텐츠를 일거에 없애버리는 위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이택회 문화전문시민기자(시조시인)

  • 기획
  • 전북일보
  • 2011.08.01 23:02

지리산 문화디자이너 김용근 씨

원촌 김용근 씨(50)는 풍요로운 미래를 지리산에서 찾자는 '지리산 문화디자이너'다. 남원에서 태어나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원 운봉 읍사무소에 재직중이다. 30여 년 동안 지리산의 생활문화를 조사해온 결과 100여 개나 되는 마을과 지리산에서 자생한 토속음식, 소리, 토기, 숯가마 등에 대해 해박하다. 지리산 운명공동체가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전자란 신념을 갖고 산다.-지리산을 오랜 동안 연구하셨는데요, 지리산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요"지리산은 생명과 문화의 마중물입니다. 우리들 삶의 뿌리지요. 그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대모(大母)입니다."-그렇게 생각하신 특별한 이유라도"정유재란 때 군사지도로 만들어진 남원부지도(南原府地圖)에 주촌, 대곡, 상원천 등 낯익은 남원 지명이 표기된 것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대모상'이라는 단어가 뚜렷이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백무동 무당 마을의 무당 할매가 바로 대모 할매란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즉 백무동의 성모 신당에서 시조 대모가 살았던 거지요. 그런 증거들을 입증해 줄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셔서 안타깝습니다."-지리산이 한반도 문화의 출발점이고 세계 문화의 근원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것을 믿을 만한 근거라도 있습니까"사람들은 모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리산에서 출발해서 뻗어나간 판소리, 한지, 도자기, 비빔밥 등이 이제 그 정신과 유래는 도외시한 채 기술과 결과만 가지고 있는 장소, 지역에 열광하죠."-지리산에 대한 접근방향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겠네요"국민소득 2~3 만달러 시대를 준비해야죠. 앞으로는 문화콘텐츠가 경제 산업의 총아가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생활문화를 분석해야 합니다. 둘레길을 만들고 지리산 등허리를 밟는 것도 좋지만, 지리산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그 이야기 속에 농축되어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수천 년 미래 문화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기술은 당장이라도 카피가 가능하지만 중요한 것은 창조정신입니다. 바로 지리산에서 나고 자라 한반도 문화의 전령사가 된 그 옛날 광대들이 바로 소프트파워였죠. 지리산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미친 사람' 취급 참 많이 당했습니다. 앞으로라도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한 '백두대간'이란 땅의 개념에서 '문화대간'이란 이름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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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1.07.25 23:02

8. 한국인의 문화유전자 '지리산'

아름답고도 신묘(神妙)한 지리산을 묘사할 수 있는 단 한 줄의 문장은 없다. 수많은 문장가들이 지리산 앞에서는 자신의 필력을 부끄러워했다. 생각할수록 지리산은 사람들을 사무치게 하는 곳이며 역사 앞에서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문화역사적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시대에 세월의 덮개를 벗겨내고 지리산의 혈류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인의 '문화지도'가 나타난다. 그 안에 수천 년 동안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가 있다.▲ 지리산, 비빔밥판소리 등 문화 DNA 보고중국의 시성 두자미(杜子美)의 작품 중에 지리산을 소재로 한 시구가 있다. "방장은 삼한 그 먼 바깥에 있고, 곤륜은 세상의 서쪽 끝에 있구나. 방장이 있어 천지가 넓은 것을 알겠고, 곤륜의 빼어남에 세월도 무색하네."여기서 말하는 방장산(方丈山)은 봉래(蓬萊)영주(瀛州)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꿈에 그리는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다. 금강산이 바로 그 봉래산이며, 한라산이 영주산이고, 지리산이 방장산일 거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내력을 지닌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으로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 저 멀리에 있네"라 하였는데 두류산이 곧 삼신산 중에 하나일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2200 년 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권력보다도 더 소중한 귀물,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서복에게 명했다. 서복은 익히 방장산에 만물을 다스리는 성모신(聖母神)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백두산이 등허리를 펴고 지리산까지 내달려 생겨난 백두대간. 한라산(영주산)에서 불로장생약을 구하지 못해 낙담이 컸던 그가 발을 디딘 곳은 지리산. 서복은 지리산 일대에 큰 부족이 무리를 지어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다스리는 이는 대모(大母)였다. 대모는 지금의 무당과 같은 존재였으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성모(聖母여신)의 대리자 역할을 했다. 대모는 족장의 아내이자 제사장. 그들은 성모께 치성을 드릴 때 필요한 그릇을 만들었다. 신의 기운으로 빚어진 그릇에 철마다 달리 생산되는 산나물과 약초는 그들을 생명력 넘치게 했다. 커다란 항아리에다 산나물과 약초를 넣고 부패한 시점이 같은 것끼리 분류한 다음 그것들로 찬을 만들고 밥을 비벼먹었다. 비빔밥의 원류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아무 야채나 넣고 마구 비벼먹는 요즘 비빔밥과는 사뭇 다르다. 생명의 정점과 저점이 같은 생명체는 발산되는 기(氣) 또한 같아 폭발적인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주었으니 그 에너지가 수천 년 동안 지리산을 지켜온 것이리라. 서복 일행은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사지낼 때 부르는 그들의 소리는 날아가는 새를 멈추게 했고 나비의 날개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나무들은 부르르 전율했으며 호랑이와 늑대는 포효했다. 소리꾼(광대)들은 봇짐을 메고 성모에 대한 노래를 조선 팔도를 넘어 유라시아까지 퍼뜨렸다. 그것이 1700년도에 만들어진 판소리의 뿌리이고 보면, 한민족 문화공동체가 지리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추측이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지리산에서 몇 해를 보낸 서복은 신적인 존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희로애락의 주체가 인간이 아닐진대 불로장생을 꿈꾸는 따위가 가당치도 않다는 걸 알았을까, 서복은 지리산에서 이상향을 목격하고 새로운 제왕이 될 꿈을 안고 한반도를 조용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지리산은 '문화대간'으로 불려야지리산은 단순히 지리적 개념의 '백두대간' 보다는 문화인류학의 개념인 '문화대간'으로 불려야 함이 옳다. 왜냐하면 북방계 문화와 남방계 문화가 지리산 잠재문화와 결합되어 한반도의 문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대는 소리를 실어 나르고 옹기쟁이는 도자기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퍼뜨린 주인공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바로 한류의 원년 멤버다. 기록문화에 취약한 우리에게 그 증거를 보여 달라면 증거인멸의 책임은 있지만 사실을 훼손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따라서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의 문화가 중국에서 유입되었고, 그 끝자락에 지리산이 있다는 식민사관은 명칭의 진위여부와는 별도로 새로운 해석으로 거듭나야한다. 목기(木器)와 관련해서 내려오는 전설도 의미심장하다. 고려 우왕 36년, 왜구 퇴치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자생한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성모신께 제를 올렸다. 그 정성이 얼마나 갸륵했던지 성모신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초가집 서까래 세 개를 주면서 "5개월 쯤 후 서까래로 인해서 당신의 운명이 바꿔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으로 왜구를 섬멸하고 6개월 후 조선을 개국했으니 서까래 3개는 바로 王을 상징하고 그때 사용됐던 목기는 왕을 만들어 준 제기(祭器)였다는 것. 그 목기는 조선팔도 양반들의 애장품이 되었고 관혼상제를 중요하게 여겼던 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생활필수품이 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오래된 미래'란 말이 있던가, 지리산에는 과거와 현재가 병존하고 있다. 미래로 향한 풍향계도 지리산으로 향해 있다. 지리산자락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는 귀농인 심정현(52)씨는 "지리산에 오기 전, 사업에 성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명성도 얻었습니다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리산에서 생활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지리산에 '내가', '사람'이 보입니다."심정현 씨는 이웃해 있는 사람들도 지리산에 들어와 비로소 자기정체성을 찾았다고들 한다고 전했다.신라 말 즈음에 지리산은 도피나 반항, 불복의 산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사에 지리산을 반역의 산으로 선명하게 각인시킨 이들은 '지리산 빨치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많이 기술된 바와 같이 여순사건의 도주 병력이나 한국전쟁 와중에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까지 지리산에는 그 층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저항세력들이 운집했던 곳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전설적인 남부군 총수 이현상에 관한 이야기까지 보태면 지리산은 21세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프고 예민한 촉수를 품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제 지리산은 새로운 이름을 달 때가 왔다. 현재를 있게 한 과거 속,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었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외면하지는 말되,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지리산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 투쟁과 죽음의 역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생명의 농축액, 문화의 발원지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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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25 23:02

7. 전주 출생의 개혁 유학자 홍계희

"옛날에 홍술해라는 사람의 아내가 살았는데, 시아버지의 밥상을 차려놓고 축지법을 써서 한양에 금방 날아서 다녀왔으며, 다녀 올 때마다 임금님 궁궐의 기왓장을 한 장씩 뒤집어 놓고 왔다."(구미리 박찬경, 박헌우씨 증언)완주군 봉동읍 구미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범상치 않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역사속에 실존하는 인물로 드라마 '이산'으로 잘 알려진 정조 임금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1777일명 정유옥사)과 관련된 홍술해의 아내 벽진이씨 효임(孝任)에 대한 전설이다. 효임이 아들 홍상범과 함께 모의하여 자객을 궁궐로 잠입하는가 하면,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여 반역을 꾀하였던 중심 무대가 바로 이 곳 완주군 구미리였다는 것이다.효임의 남편인 홍술해는 전라도 감사경주 부윤을 거쳐 1776년 황해감사에 오른 인물로, 당시 세손인 정조 즉위에 반대세력이었다. 홍술해의 아버지는 영조대 균역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국가 정책과 경세활동을 한 핵심 관료였던 홍계희(洪啓禧1703~1771)이며, 홍계희가 죽은 후 그 자손들은 홍인한정후겸의 외척당 계열에 서서 정조의 왕위 등극을 반대했다가 결국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을 입게 된 것이다.▲ 잊혀진 인물, 전주 사람 홍계희정유옥사를 이해하는 중심 키워드는 홍계희라는 인물에 있다. 그의 가문은 숙종, 경종, 영조대를 거치면서 경기도 양주에서 전북 전주로 낙향한 노론 중심 가문으로 대대로 서인, 노론 계열로 홍계희가 활약한 영조대에 대표적인 벌열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임피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홍수제 때에는 김제 만경에, 진안현감을 지낸 아버지 홍우전은 완주 고산에 그 근거지를 두고 살게 되는데, 어버지 홍우전이 경종 때 신임옥사로 인해 1722년 삭직하고 전주 구만동(龜灣洞현 구미리)으로 돌아와 스스로 구만(龜灣)이라 호를 짓고 살게 되면서, 홍우전-홍계희-홍술해-홍상범에 이르는 4대에 걸친 54년(1722~1777)의 구미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홍계희의 아버지 홍우전은 영조가 등극한 이후 당쟁의 한복판에서도 대쪽 직언으로 소론을 공격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는데, 스승이자 장인이며 송시열송준길의 제자인 전의현 살았던 이상(李翔)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홍계희는 이러한 친가와 외가의 탄탄한 기반 아래 청풍김씨 처가까지 벌열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였다.그의 출생과 관련한 '담와유고초'에 보면 홍수제-홍우전의 옛 터인 만경현 몽산(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에서 태어났는데 '몽산이 맑고 깨끗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데 홍계희가 태어난 해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사롭지 않는 출생 이야기를 가진 홍계희는 23세가 되던 해인 1725년(영조1)에 전주향교에서 치른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후 영조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 관료이며 최고의 경세가로 활동하게 된다.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영조가 탕평과 함께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던 균역법 제정청계천 준설 등 실제적인 경세정책을 주관하였고, 왕명을 받아'균역사실','삼운성휘','경세지장'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특히 그는 앞서 부안에서 살았던 반계 유형원의'반계수록'에 심취하여, '반계수록'를 직접 편찬하고 이를 토대로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실행하려 했다. 이는 명문가 자손으로 노론의 색목을 지닌 벌열가에 기반을 두었지만, 호남 출신의 개방적개혁적 사상을 기반으로 반계 유형원의 사상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열정을 갖았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는 특히 상수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져 수학과 산학을 기초로 한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국가에 필수적인 경세서 간행, 음악세금건축예학역사음운상수의학 등 여러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갖고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소화는 박학실용적 인물로 평가된다. 따라서 홍계희는 영조대의 대표적인 경세적 정치관료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1747년 일본으로 통신사 정사, 1760년 중국으로 연행사 정사로 사행(使行)를 통한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서적을 통한 학문 접근 등을 시도했다. 일본에 후쿠젠지에는 그와 아들 홍경해가 남긴 글이 현판에 남겨져 있으며, 중국 심양관 기록화는 현종 탄생지를 찾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일본과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대량구입하는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표출하였고, 이는 향후 젊은 신진기예 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지리금석학에 두각을 나타내는데, 1742년 북도별견어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들어, 상수역학을 바탕으로 함경도 북부 지역의 지도, 백두산 지역의 거리 측량 등을 하였고, 금석서예에도 조예가 있어 고산 소농골의 아버지 홍우전신도비, 대둔산의 안심사사적비, 남원 사매에 양사형묘비, 용인에 유형원묘표 등의 글씨를 남겼다.▲ 홍계희의 재평가홍계희는 전주 출신으로 영조 때에 가장 대표적인 현실 관료 정치가로 평가된다. 그는 다양한 학문을 정책에 반영하여 실용적인 국가운영을 전개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홍계희는 정치가로서 임오화변(1762)에 깊이 개입되었고, 그의 후손들에 의한 정유옥사(1777)로 인해 그가 추진한 여러 경세정책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그의 국가 운영의 새로운 경세적 개혁을 위한 열정은 충분히 인정하고 재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또한 무엇보다 홍계희와 전주, 호남이라는 지역사의 재인식이 중요하다. 특히 그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모델로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경세사상을 바탕으로 이후 많은 학자, 특히 호남 출신의 박학다식한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이 크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흥덕의 이재 황윤석, 순창의 여암 신경준 등과의 교유도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홍계희의 직접적인 제자로 알려진 인물로는 목산 이기경이 있는데, 그는 성리학자였지만, 제자백가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기경은 동생 이기정과 함께 홍계희 가문과의 친분으로 정유옥사때 북방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처럼 정유옥사로 인한 호남의 타격도 충분히 컸으리라 생각된다.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 1777년 홍술해의 정유옥사는 성격은 다르지만,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지역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잊혀진 인물 홍계희, 정유옥사는 이처럼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 김승대 문화전문시민기자(전북도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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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18 23:02

"역사적 상흔이 준 교훈 잊지 맙시다"

순창지역 대표적 사찰인 강천사, 그곳의 재덕 스님은 지난 1992년부터 주지를 맡아왔기에 그만큼 강천사의 역사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그는 특히 625 당시 순창 지역 사찰의 피해를 누구보다도 아쉬워한다.그는 전쟁 당시 강천사 인근에 있던 빨치산들이 대부분 가마골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여순 반란사건 이후부터 빨치산의 근거지가 된 가마골은 전남도당 사령부가 있었고, 특히 인민군 대학교가 있었기에 훈련병을 조련하는 곳이었다. 또한 수류탄 제조가 이뤄졌던 곳이 바로 가마골 이었다. 재덕 스님은 "단순히 가마골 인근에 있다는 이유로 강천사의 보광전, 칠성각, 첨성각 등이 소실된 것은 정말 두고두고 아쉽다"고 말했다. "사찰이 더이상 다른 이유로 훼손돼서는 안된다"는 그는 "역사적 상흔이 준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한편, 강천사는 신라 진성여왕 1년(887년) 도선국사가 세운 고찰이다. 고려 충숙왕 때는 3개 불전과 각각 12개 승방과 암자를 갖춘 대규모 사찰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시련을 겪었다. 임진왜란과 625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내부가 소실되면서, 고려시대 덕현대사가 세운 5층 석탑만이 옛 모습 그대로다. 현재의 건물은 1961년에 복원됐다. 대웅전과 요사채만 남아 '이게 절인가 싶어' 지나치기 쉬울 법도 하지만,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천년 고찰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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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11 23:02

6. 빨치산토벌과 순창지역 사찰의 피해

한국 연극 100년 역사상 베스트 작품중 하나로 꼽히는 '산불'이 지난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삶과 죽음을 한 덩어리로 응축시킨'산불'은 빨치산들과 과부들의 비극적인 애욕의 싸움을 통해 625 전쟁이 총칼 든 군인들만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준 대작으로 호평받았다. 625 전쟁이 남긴 또다른 상흔 중 알려지지 않은 것은 소중한 사찰이 소각되었다는 사실이다. 빨치산들은 625 전쟁 당시 은거하기 좋은 덕유산, 대둔산, 운장산, 지리산 등 소백산맥 줄기로 이어진 곳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로 인해 사찰을 훼손시키거나, 없애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국군과 경찰이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이들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사찰을 소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소백산맥을 끼고 있는 남원 천황사칠상암, 임실 강진면 성좌암, 완주 운문사, 진안 심원사, 고창 내원암, 정읍 불출암은 다 타버려 절터만 남아있는 상태. 특히 순창은 인근 회문산으로 인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사찰의 피해가 심각했는데 강천사, 구암사, 만일사가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사찰이다.▲ 강천사(剛泉寺)"강천사가 소실된 것은 1950년 12월 20일쯤이죠, 당시 11사단 20연대 1중대가 순창군 금과면과 순창군 팔덕면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이들이 강천사에 불을 질렀죠. 의용경찰이 있었는데도, 강천사에 불을 지른 것은 군인들이었어요. 당시 이 지역 역시 낮에는 한국군이 있었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있었습니다."강천사의 아랫마을인 순창군 팔덕면 신기마을에 사는 김병관씨(80)의 증언이다. 순창과 담양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강천산은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회문산과 가깝다. 또 산악지대로 연결되어 있어 당시 강천사 인근의 빨치산은 주로 가마골을 근거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강천사의 경우 보광전, 칠성각, 첨성각 등이 소실됐으며, 5층석탑도 원형을 잃었다. 5층석탑은 신라 일반형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을 반영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암사(龜巖寺)구암사는 내장산과 백양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역시 회문산과도 그다지 멀지 않아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빨치산들은 세력이 약화되고 국군과 경찰의 토벌이 강화되자 구암사를 근거로 저항했다. 하지만 국군과 경찰은 강하게 몰아붙여 많은 빨치산을 토벌했고, 이 과정에서 구암사와 그 아랫마을은 모두 경찰에 의해 타 버렸다. 구암사가 소각된 뒤 많은 빨치산들이 죽어 한동안 구암사 근처에 시신들이 남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구암사 아랫마을에 사는 공필순 할머니(95)는 "(중략) 경찰들이 토벌하러 와서 구암사에 불을 질러버렸어. 그리고 올라가서 많은 빨치산들을 죽였어. 내가 한 참 뒤에 올라가 보니 빨치산들 해골이 여기 저기 보였어! 얼매나 무섭던지!" 라고 증언한 바 있다.▲ 만일사(萬日寺)"1952년 봄 대대적으로 빨치산 토벌을 했는데, 이 때 마을이 비행기로 폭격 돼 마을이 다 탔어요. 인근에 있는 안심마을도 그랬고. 비행기로 폭격한 시간이 대략 점심 때 였는데, 휘발유통을 떨어뜨린 후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휘발유통에 불이 붙어 확산됐습니다. 만일사가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알려진 뒤에 들어온 경찰들이 불을 지른 것이죠." (박만선씨)빨치산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바로 회문산은 현재 휴양림으로 개발되어 있는데, 휴양림 안에는 당시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자리에 빨치산들의 활동공간을 모두 복원해 놓았다. 회문산 아래 쪽에 위치한 만일사는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모두 탔기 때문이다.소각될 당시 만일사에는 법당, 칠성각, 요사채, 화장실 등이 있었다. 법당은 매우 오래된 건물이어서 남아 있었다면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 역시 엄청나게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불상은 철불이었는데 겉모양은 갸름했다. 이밖에 쇠부처님 세 분이 있었고, 40여 개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 만일사가 소각될 때 절에는 5~6명의 스님을 포함해 안노장 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화재로 인해 입적, 마을사람들이 스님을 화장시켰다고 전해진다. / 이병규 문화전문시민기자(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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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11 23:02

5. 우리 안의 바깥 전주화교

전주의 근대사를 함께 써온 전주화교들한 때 전주가 화교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꼽혀 중국 화교 문화와의 교차점을 이루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전주화교는 전주 근대문화사에 있어 확고한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의 격동기였던 근대 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나 인식이 부족한 데다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우리문화는 전주화교문화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들고 말았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의 역사를 수놓는 당당한 씨줄이자 날줄인 전주화교들의 이야기. 중국 화교문화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전동성당, 관성묘, 삼합원을 통해 잊혀지고 있는 전주화교의 문화를 돌아본다.▲ 화교 1세대에 의해 지어진 전동성당화교라 함은 '본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국의 문화적, 사회적, 법률적 측면 등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뜻한다. 이들 화교들이 전주에 터를 잡은 것은 한 세기 전으로 추정된다. 그 실마리가 되는 첫 번째 것은 전주의 건축, 토목 현장에 투입된 중국인 목수나 기와공 등 기능공에 대한 이야기다.전주 한옥마을 경기전을 마주보고 자리 잡은 천주교 성당인 전동성당.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복합된 이 성당은 호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건축물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다. 1908년에 착공해 1914년에 완공된 전동성당에는 3년 이상 전주에 거주하며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의 손길이 닿아있다. 이 본당 건물의 기초공사 당시 중국 공장들이 흰색과 붉은 벽돌을 찍어 쌓았다. 5명의 목수와 100명의 석공들이 가마를 설치하고 65만장 이르는 벽돌을 찍었다고 한다.('전동성당 100년사' 중 보르메 신부가 대구교구에 보낸 편지) 당시 이런 벽돌을 찍을 수 있는 기술은 중국인 석공들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초대 주임신부가 중국인 목수에게 공사를 맡겨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전주의 자랑 중 하나인 전동성당이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대아리 저수지 축조에도 이들의 땀이 보태졌음도 확인된다. 1921년께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일대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에 대아리 저수지가 건설된다. 이때 당시 댐 외벽에 석축을 축조하는 공사에도 중국인 공장들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이들이 1910년 전후 전주 근대사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이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화상(華商)들과 연계되면서 전주화교의 시초가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화교들의 정신적 신앙, 관성묘또 하나,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기슭에 있는 관성묘에서도 전주화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관성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운장, 즉 관우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 희랍신화에서 유래하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행운의 여신이 있다면 동양 즉 중국과 한국에는 구체적 재복신(財福神)으로서 관우운장이 숭상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운장은 의리와 신의의 상징이어서 신용을 생명으로 받드는 중국 화교상인들의 정신적 지주이고 중국부기 산법의 발명자라고까지 알려진 관운장에 대한 화교들의 신앙은 각별한 데가 있다."평소에 명절 때도 거의 다 오고. 뭐가 잘 안 풀릴 때 기도를 올리지요. 마음이 좀 편하고. 전주 화교가 한 천명 정도 있었어요. 장구치고 북치고 시내에서 모여가지고 여기까지 옵니다. 재를 올리는 거죠." (전주 진미반점 운영하는 유영백씨의 인터뷰)우리나라의 관성묘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에 의해 유입되어 성하였다. 당시 전주 외곽에도 비교적 큰 규모의 관성묘가 지어졌다고 하며,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5년 전라도 관찰사인 김성근과 전주 외곽의 남고산성 무관인 이신문이 각 지역 유지들의 헌납성금을 받아 다시 복원한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 관성묘는 조선조 말기의 화가 소정산의 '삼국연의도'의 10폭이 관우묘에 보존되어 있는,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곳으로 초기부터 화교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이곳에도 여느 관성묘처럼 중앙에 위령현혁(威靈顯赫), 좌측에는 문무성신(文武聖神) 우측에는 간체자 위령현혁 현판이 걸려있다. 중앙의 위령현혁은 중화민국 10년 '산동동향회'가 기증한 것이다. 왼쪽의 문무성신 현판은 1930년대 전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화상 중 하나였던 화교 거상 '의화길'이 기증했다. 오른쪽의 마지막 현판은 1966년 당시 전주화교소학교 교장이며 진미반점을 운영하던 임국량씨가 기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관우에 대한 숭배는 여러 민간신앙 중 특히 철저했고, 중국 상인들이 더욱 그러하였으며, 전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현재 이곳에는 관운장과 제갈공명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지금도 1년에 여러 차례 정기적인 의식을 치르는 데 멀리 인천에서도 연로한 화교들이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낯선 나라, 낯선 고장에서 관성묘는 화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렇다고 관성묘가 화교들만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관성묘는 우리의 도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 담긴 사연들은 우리 땅, 우리 이야기인 것이다.▲ 지역의 유일한 근대문화유산 지정된 삼합원(三合園)다가동 차이나타운 신흥상회 옆에 위치한 전주 삼합원. 이곳 역시 전동성당을 건축한 중국인 벽돌공들의 손길이 닿은 곳으로 중국 근대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삼합원은 중국의 전통적인 주거공간인 사합원이 변형된 행태로, 본래의 사합원은 사각형 모양의 지붕의 각 변이 맞닿아 있는 미음('ㅁ')자 모양으로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본채와 사랑채 등 4개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이 중 사랑채 역할을 하는 문방이 없거나 동쪽과 서쪽의 건물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삼합원이라고 불리는데, 전주 차이나타운에 있는 것이 바로 이 형태를 띠고 있다. 전주 삼합원은 대대로 포목점을 운영했던 왕국민씨(72현 신흥상회 운영)의 소유로 1920년대 중국 상하이의 전통 비단 상점의 모습을 본 뜬 것이다. 특히 삼합원은 우리 지역의 중국식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역사적 가치도 높지만 화교들의 생활사와 일상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화교들의 고향, 전주 차이나타운전주는 화교들이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 625 전쟁기간에도 커다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농업중심지로 경제상황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기후와 이에 따른 온후한 민심 역시 화교들의 전주 유입을 촉진시켰다. 유입된 화교 수에 비해 아이들이 적었던 것은 당시 화교들이 단신으로 고향땅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관동군이 중국을 떠나는 화교들의 가족 동행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화교 정착 초기에는 아이들의 수가 적었지만 화교 사회가 발전하며 아이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화교학교의 설립도 이뤄졌다. 기록에 따르면 전주화교학교는 1945년 양진옥 선생을 중심으로 전주 다가동에 마련된 화교서당이 그 시초였다. 화교서당은 1946년부터는 전주화교 소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규모도 점차 커지면서 1960년대에는 교사 4명, 재학생이 120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중국인들이 해외에 정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식당을 만드는 일이라는 말도 있듯 전주 화교 사회의 발전에도 중국 식당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목집, 청요리집을 운영하던 초기 화교들의 전통을 이어 1970년 전후 윤전승씨의 아들 가흥씨와 가빈씨의 흥빈관, 홍콩반점 그리고 임국량씨의 진미반점, 아관원 등의 중국 음식점이 전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이들 음식점이 있던 다가동 일대에는 화교거리가 조성되었다. 화교 음식점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다가동 화교거리에는 수십여 개의 화교 상점이 성업을 했다.그러나 화폐 개혁, 토지소유 제한, 사업자의 각종 제한 등 여러 차례 이어진 화교 경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규제와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 속에서 화교 사회는 그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 한편으로 요식업 종사 화교가 많은 것도 다른 업종에 대한 진출을 어렵게 만든 여러 규제 탓이기도 하다. 많은 화교들이 차례로 대만과 미국으로 떠나감에 따라 다가동 차이나타운도 쇠퇴일로로 접어들었다. 현재 다가동에는 20개 남짓의 화교 상점들이 남아 차이나타운의 명맥을 잇고 있다.▲ 전주, 떠나있는 화교들의 고향 될 수 있어야전주 차이나타운의 흥망성쇠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 본 이로는 왕국민씨가 꼽힌다. 중국 본토 산동 '황현'이 고향인 왕씨는 해방 이전 6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포목점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주로 이주하여 근 70여 년을 전주 화교거리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노년에 이른 그는 지금까지도 중화요리 재료를 공급하는 '신흥상회'를 운영하며 전주화교거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부부 중 누군가 아프게 되면 전주를 떠나 자식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만으로 갈 생각이라고 한다. 왜 그는 자신의 노구로 하여금 모든 삶을 바친 이곳 전주에서 마지막 안식을 취하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70년의 세월로도 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벽이 그 자리마저 빼앗은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이곳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전주화교들 그리고 유년 시절 전주화교학교를 졸업하고서 대만 등지로 떠나있는 2세대, 3세대 화교들의 고향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이들의 삶이 이 땅을 살아온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삶임을 온전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 양승수 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기자(전주세계소리축제 전 프로그램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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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1.07.04 23:02

4. 남원이 낳은 조선의 여성시인, 김삼의당

1769(영조 45)년 10월 13일 남원 서봉방에서 여류시인이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 여성이 억압받던 시절, 그녀는 규방문학의 대가 허난설헌에 필적할 만한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중국의 여류시인 이청조와 비견되어 조선의 이청조라 불리기도 했다.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는 당대가 요구한 현모양처였으며 여성평등을 주장한 페미니스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로서 추앙받았으나 개별자로서 불행했을지도 모를 천재시인 김삼의당. 현재 그녀는 우리지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문학적, 여성학적, 평등의식의 첨병에 섰던 그녀에게 오늘날 부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물어본다.첫닭이 울기도 전인 어스름한 새벽녘, 삼의당은 정갈한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다. 남편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의 한양으로의 유학자금을 보태기 위함이다. 형편없게 된 머리를 수건으로 싸맨 뒤 꼭 다문 입술이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여느 여염집 아낙과 다를 게 없지만 이것이 몇 번째인가, 그녀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돈다. 10여 년 동안 규방에 홀로 남겨진 세월, 그 설움을 진정이라도 하듯 시 한 수를 적는다. 고음(苦吟)이다. 세도정치의 먹구름이 조선을 덮을 때 입신양명에 뜻을 둔 시골 선비의 반려로 산다는 것 그 통점(痛點)의 기록. 사랑하는 남편의 거듭되는 좌절과 방황은 그녀에게 같은 무게의 고통을 짐 지운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삼종지도'는 삶의 근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처녀 적부터 담락당과 해로할 때까지 약 200여 편의 작품을 생산했다.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런데 과연 삼의당 김씨는 유교문화가 요구했던 '표본'으로만 사는데 행복했을까? 영특한 여성으로서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의 불합리함을 고발하고 싶지 않았을까?삼의당 김 씨는 탁영(濯瓔) 김일손(金馹孫1462~1498)의 11대 후손인 김인혁(金因赫)의 딸이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자손으로서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시,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담락당과 혼인을 한다. 담락당은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천재소리를 듣고 자랐다. 담락당 하립의 6대 후손인 하재경 선생(74)은 담락당이 태어난 배경과 그에 얽힌 전설이 실려있는 '신옹유부(神翁遺符)'에 대해 이같이 말한다. 다섯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데 그 중에 셋째용이 하립이라는 것.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부부시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삼의당'이라는 아호는 시서화가 능하다 하여 부군인 하립이 지어준 것. 그들은 경서며 사기류를 섭렵하였고 평생을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주위에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담락당의 거듭되는 낙방소식은 그들 부부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삼의당은 규율과 부도(婦道)를 한평생 지키며 살았다. 그녀는 세간의 평가대로 남편과 부모께 헌신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나날들의 기록이 그녀의 시집인'삼의당김부인유고'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문집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100년이 지난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삼의당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같이 삼의당에 대한 연구가 부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역사와 기록마저도 서슴지 않고 왜곡하는 유교사회 사대부들의 뜻깊은 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그들의 집안은 전라도 변방에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간 벼슬도 없는 집의 아낙이었음에 기인한다. 차제에 조선 후기의 규방시인 삼의당이 지향한 것이 무엇인지, 문학사적 의의를 밝혀야 할 것이다.남원시 서북쪽에 삼국시대의 석축물 교룡산성이 있다. 교룡산의 정상과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두른 해발 518미터의 포곡식 산성이다. 유인궤가 축조했으며 왜구의 피난처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오년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교룡산성 아래로 잘 조성된 공원이 있다. 이곳에 김삼의당의 시비(詩碑)가 세워져있다. 문집으로는 '삼의당고' 두 권이 1930년에 간행되었는데 시 99편과 산문 19편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필사본은 하재경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 이화여대 등 학계에서 삼의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최초의 '부부시인'인 이들에 대한 연구는 남원과 진안을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다.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비록 절터만 남았지만 김시습의 소설'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 만복사가 있는 점이다. 노총각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놀이(일종의 노름)에 이겨 예쁜 처자와 인연을 맺었지만 처자는 사람이 아닌 혼령이었다는 것. 혼령이 떠난 후 양생은 식음을 전폐하고 종생토록 수절(?)을 했다는 이야기다. 허구이긴 하나 축첩제도를 당연시했던 시절에 대한 김시습의 반격이 유쾌하고 통렬하기까지 하다.삼의당 내외는 거듭되는 실패 속에 선영이 있는 진안 마이산 자락으로 이주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마이산엔 '부부지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설화가 있다. 조물주께서 금강산 1만 2천봉을 조성할 요량으로 전국의 산봉우리를 소집했단다. 금강산엘 가기 위해 길을 떠났던 부부 산이 진안에 홀딱 반해 진안에 머물렀는데 이곳을 별유천지로 여겼던 암마이봉이 그만 진안에 눌러앉았다. 세속적 욕망이 강한 숫마이봉은 전국의 명산들과 힘을 겨룰 기회를 놓칠까봐 잔뜩 화가 났다. 남편의 성화에 모두 잠든 새벽녘 느릿느릿 발을 옮기는데 그만 어떤 아낙에게 들켜버려 지금의 모습으로 화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전설이란, 당대 민중의 욕망과 세계관이 스며들어 여러 가지 화소(話素)가 삼투되는 것. 따라서 진안 마이산에 내려오는 전설은 마이산의 선경(仙境)에 대한 진안사람들의 자랑스러움이 반영된 것이다. 또 유교문화의 정점에 있었던 그들의 부부유별(夫婦有別)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풍자가 아니었나 싶다. 산이 움직인다는 애니미즘적인 상상력이 즐겁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담락당과 삼의당의 유별난 부부애와 그들이 겪었을 삶의 고초가 애잔하기만 하다.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엔 그들이 살았던 생가는 헛간만 남아있고 그마저 다름 사람의 소유로 넘어갔다. 하재경 선생은 후손으로서 생가복원을 위한 지원이 전라북도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단다. 마이산 탑영지(塔影池)에도 담락당과 삼의당의 시비와 명려각(明麗閣)이 세워져 있다. 부부지간의 정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맑고 곱다하여 명려각으로 이름지었다고 한다.마이산(馬耳山) 자락의 탑영지(塔影池)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삼의당 부부는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의 좌절된 욕망을 담보로 얻어낸 평화가 어찌 즐겁기만 했겠는가! 더구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두 딸을 병으로 잃었다 하니 그 참혹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을 추스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삼의당은 마이산 봉우리가 거울처럼 비춘다는 호수 탑영제를 배회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옥같은 시가 한 편 두 편 나왔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날이 맑다. 탑영제 맑은 물속에 마이봉 부부가 잠겨있다. 농사일이 손에 익지 않아 담락당의 손바닥엔 마디마디 옹이가 박혀 있다. 그것을 보는 삼의당 속이 시커멓게 탄다. 간밤에 썼던 한 편의 시를 남편을 위로할 요량으로 담락당에게 건넨다.붉으레한 내 얼굴에 꽃 또한 붉고 붉어두 붉은 게 서로 마주 열심히만 보나니붉고 붉고 더 붉고 붉어지다간내 얼굴이 꽃보다 한결 붉어지겠네키를 낮춰 꽃을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꽃이 핀다고, 당신의 욕망이 속절없이 저버린 꽃이라면 내 얼굴에 새롭게 핀 이 붉은 꽃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뜨거운 심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남편에 의해 죽고 사는 조선여성의 일단이 삼의당에게도 분명히 존재한다.현모양처의 대명사였으나 개별자로서 갈등했던 '고뇌의 나날'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그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교 속의 여자'로 살면서도 '유교 밖의 여자를' 꿈꿨던 그녀는 평생 사랑하며 살았던 부군과 함께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잠들어 있다. / 기명숙 문화전문시민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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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1.06.27 23:02

3. 익산 함라마을의 보배, 함열관아터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함라마을은 익산의 떠오르는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단초는 마을 돌담길과 세 부잣집(김안균, 이배원, 조해영 가옥)으로 인한 입소문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공자의 영정을 모셨던 함열향교와 일제시기 빼어난 별장으로 평가받았던 서벽정터, 1687년(숙종 13)에 마을 원로들이 만들어 지역사회의 기강과 규제 역할을 수행했던 함라노소 등이 남아 있는 전통마을임에도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간과하는 대목은 함라마을이 당시 수령들의 노른자 땅이자 허균의 유배지로 우리나라 최초 음식 품평서 등을 남긴 곳이며, 효정왕후의 출생지라는 사실이다.▲ 수령들의 노른자 땅, 함열'함열관아터'는 마을 입구인 함라파출소에서 복개된 천북천길을 따라 고즈넉한 돌담길과 삼부잣집을 뒤로하고 다다른 곳에 위치한다. 현재의 관아터에는 대부분 채마밭으로 변하였고, 드문드문 집들이 들어서 있기는 하지만 함라마을과 더불어 옛 정취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듯 하다.'함열' 역시 대부분 사람들이 현재 함열역이 있는 함열읍으로 여길 뿐 옛 현관아지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전라도 대부분의 군현이 없어지면서 일제는 그곳에 학교나 새로운 관청을 설치했고, 이 곳을 중심으로 일본인상가를 중심으로 한 시가지를 형성하였으나, 함열현처럼 마을 전체가 거의 살아 있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일제시기 함열역이 만들어지면서 함열읍 와리인 새읍내에 이름마저 빼앗기긴 했지만 함열(함라마을)처럼 오롯히 옛 정취가 살아있는 옛 고을 치소로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1910년 일제강점이 되기 전까지 현재의 익산시는 4개의 군현으로 구성되었다. 구 익산군(금마왕궁지역), 함열현(함라함열성당웅포황등지역), 용안현(용안용동삼기지역), 여산현(여산낭산지역)이 바로 그렇다. 그 중 함열현은 호남 금강의 서쪽에 위치해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거점으로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한 경제 중심지로 각광받았다. 특히 성당창 관할을 통한 호남 내륙의 조세 확보와 조운을 통한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보유한 지역으로 수령자리는 그야말로 노른자였다. 이곳을 거쳐한 수령은 생원진사의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출신(5명)보다는 문음(門蔭) 양반벌 열가 출신들이 즐비하게 거쳐갔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조선중기 학자이자'쇄미록'의 저자인 오희문(吳希文)의 기록에서 보면 그가 임진왜란 중 피난과정에서 함열 인근 임천(林川) 친지 조존성(趙存性)에 3년간 우거하면서 아들 윤겸(允謙)의 친구이자 함열현감인 신응구(申應矩)에게 장녀를 후취로 혼인시켰고, 이후 사위의 도움으로 다소 곤궁을 덜게 되었으며, 일가의 생활비를 함열관아에서 담당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함열현의 재정이 매우 풍족함을 짐작할 수 있다.'함열관아터'는 현재 터만 남았고 건물의 주초석도 현존하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현재 마을에 오랜 세월 거주한 송길례 할머니(86)는 "1935년 7살 때 동헌 건물을 헐었는데 일부 부재를 가져왔던 기억까지 생생하다"며 "나이 13세 때(1939년)에는 또 한 건물 헐었다"고 말해 일제시기말까지 관아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1872년'함열현지도'가 1871년(고종 8) 열읍지도(列邑地圖) 등사령(謄上令)에 따라 1872년(고종 9)에 함열현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허균이 유배지로 우리나라 최초 음식 품평서 쓴 곳'연어 알 젖 한 그릇을 받아 먹어보니, 맛이 사슴의 태(胎)보다도 뛰어났다.(중략)''사람들이 이곳은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유배지를 원했는데, 금년 봄에는 전혀 없으니 운수가 기박합니다.'('성소부부고' 중에서)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홍길동전'을 펴낸 허균(15691618)의 또다른 걸작'성소부부고'의 일부다. 허균은 1611년 함열에서 '홍길동전'에 버금가는 훌륭한 문학작품 '성소부부고'를 썼다. 성소는 자신의 호로 자신의 옛 글을 정리한 책이 '성소부부고'이다. 여기에 실린 우리나라 최초 음식 품평서'도문대작(屠門大嚼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와 '성수시화(시와 관련된 일화)'는 함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특히 '도문대작'는 전국 8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하여 적은 책. 그가 1611년 4월에 쓴 기록을 보면, '도문대작'은 고기를 먹고 싶으나 먹을 수가 없으므로 도문(도살장의 문)이나 바라보고 대작(질겅질겅 씹는다)하며 자위한다는 것으로, 가당치 아니한 것을 부러워한다'는 뜻이다.허균은 한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서 유명하지만 허균은 유교 중심인 사회와 동떨어진 파격적인 행보로 희대의 반역자이기도 하다. 그가 서얼을 우대했고, 기생과 교유하며 문학을 즐겼고, 1614년, 1615년(17세기)에 북경을 다녀오면서 천주교의 찬송가를 도입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조선을 앞서간 천재라는 평가도 공존한다.1611년(광해군 3), 그가 43세 때 허균이 과거부정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는데 그는 유독 전라도 땅을 고집했고, 그 중에서도 함열을 자원했다. 그가 함열로 유배를 자원한 까닭은 그가 33세 때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호남에서 조운(漕運)을 감독하여 해상 왕래에 익숙하였고, 그의 또 다른 생활 근거지가 되었던 부안 변산과 가까웠으며, '함열현객사대청중건기' 등을 볼 때 당시 함열현감 한회일(韓會一)과 밀접한 관계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그가 쓴 '성소부부고'를 보면 함열에서 음식 연구에 열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해 11월 12일 유배에서 풀려 서울에 잠시 다녀온 후 24일에 부안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가 부안과 함열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일대에 깊은 애착과 생활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특히 함열은 '성소부부고'등 그의 문학을 집대성할 수 중요한 산실로서 자리매김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효정왕후의 태어난 성지암행어사 출두 통고하기도바로 이 청류정에서 함열현감 홍기섭(洪耆燮)의 손녀가 출생하였다고 전하는데, 훗날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가 되었다.효정왕후는 할아버지인 홍기섭이 함열현감으로 재직(182931)할 때, 요즘말로 사또 관사에서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17941863)이며, 어머니는 죽산안씨다. 고종실록 그녀의 행장에 보면, '태후는 순조 신묘년(1831) 정월 22일 사시(巳時)에 조부 홍기섭의 임소 함열(咸悅)에서 탄생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홍기섭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현원로군(玄元老君)이라는 신인(神人)이 집에 내려와서 말하기를, '이 집에 마땅히 상서(祥瑞)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 태후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지역에 전하는 말로는 왕후는 어려서부터 천문학(天文學)에 특별한 재주가 있어 왕실에 추대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시 함열현은 이 곳을 성지(聖地)라 하여 함열지방에 암행어사가 출두할 때는 반드시 미리 관아에 통고(通告)하라는 특전(特典)이 있었다고 전한다.한때 함열현의 후원으로 절경을 이룬 청류정, 육모폭포는 일제시기 함라금광 등으로 인해 옛 자취는 간데 없고 현재 복원된 정자만이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이처럼 함라마을을 중심으로한 옛 함열현 지역은 금마왕궁의 마한백제문화권과 더불어 익산의 또다른 중요한 역사문화콘텐츠다. 함열관아터는 물론 성당창, 함라산성, 함라팔경, 함열 3기인, 함열 농기 뺏기 등 발굴되고 보존되어야 할 함열현의 문화자산을 끊임없이 찾고 복원되길 소망해 본다. / 김승대 문화전문시민기자(전북도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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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6.20 23:02

2. 전주 덕진공원의 기념물

'전주 덕진공원은 친일파들이 만든 공간일까'전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덕진공원은 친숙하지만, 이같은 의문을 품는 이는 많지 않다. 덕진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의외로 비석과 동상 등 기념물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엔 우리가 몰랐던 한국의 근현대사의 숨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관심이 없다면 그저 그곳에 있는 돌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 관심을 가져보면 비석에 새겨진 글씨, 동상의 얼굴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취향정기 비석사람들이 비석을 세우는 것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비석에는 문자로 된 기록이 있다. 비석을 세운 목적, 비석을 세운 시기, 비석을 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결국 비석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현재의 나를 연결시켜준다.덕진공원에 들어가면 연못가에 취향정이 있다. 취향정은 덕진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취향정 앞에 비석이 있다. 덕진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이 비석의 내용을 확인하면 덕진공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이 비석은 취향정기(醉香亭記)로 시작되는데, 취향정을 건립하게 된 과정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1917년 박기순(朴基順)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여 지금의 덕진공원에 취향정을 건립하고 취향정과 이를 포함하고 있는 이동면 검암리 1280번지 6414㎡에 전주면사무소에 기부하였다. 이 사정을 비석을 세워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그런데 이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글자 두자가 마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 두 글자가 마모되었을까? 비석에는 '○○육년신미춘소석박기순기(六年申未春小石朴基順記)'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추정해 보면 마모된 글자가 '대정(大正)'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정은 바로 일제강점기 일제가 썼던 연호다. 일제강점기에는 연대를 표시할 때 반드시 일본의 연호를 쓰도록 하였다. 여기서 대정육년(大正六年)은 1917년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대정은 바로 일제의 잔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후세에 누군가 대정이라는 글자를 지워버렸던 것이다.당시 박기순은 전주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유지로 대접받고 있었다. 또한 아들인 박영철(朴榮喆)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으로 있다가 뒤에 익산군수, 강원도지사, 함경북도 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였던 것이다.그런데 바로 이러한 친일파들이 만든 덕진공원이 전주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편한 안식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역사적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덕진공원이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2005년 8월 9일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전북시민연대가 취향정이 친일파 박기순에 의해 세워졌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최영희장군공덕비덕진공원의 정문인 연지문을 거쳐 들어가면 그네가 나온다. 이 그네를 지나 오른쪽으로 연못을 따라 가다보면 '최영희장군공덕비(崔塋喜將軍功德碑)'라는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이 비석은 덕진공원에서 취향정기 비석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이 비석은 1958년 전주시민들이 추진건립위원회를 결성해 세운 것이다. 최영희장군은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뒤 해방이 되자 국군창설에 참여하여 헌병사령관 등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그는 625 한국전쟁에서 낙동강 작전의 전세역전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국군 제1사단장과 제8사단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그는 제8사단장으로서 전주에 주둔하여 삼남지구사령관을 겸하면서 빨치산을 토벌하는 일에 주력하였다.그렇다면 왜 이 비석이 덕진공원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에 덕진공원에 제8사단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는 빨치산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었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휴전협상으로 소강상태가 되는 상황에서 빨치산토벌에 치중하게 된다. 그리고 8사단에게 전북지역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도록 한다. 그리고 이 8사단이 바로 이곳 덕진공원에 주둔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최영희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시기에는 덕진공원 경내에서 군인들의 천막이 즐비하고 오고가는 군인들의 군화발 소리가 요란하였을 것을 짐작해보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과거의 일들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비석이라는 형태로 남아 우리에게 역사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덕진공원을 근현대사 역사교육의 공간으로덕진연못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도성방위를 위해 늪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그 역사를 따지면 1000년에 가깝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주부의 지세가 건(乾)이 공허하여 기맥이 흘러나간다. 이런 까닭에 도성 서쪽에 있는 가련산에서부터 동쪽에 있는 건지산을 이어 큰 뚝을 쌓아 완성했다.이를 덕진(德津)이라 불렀다'라고 하여 조선시대 둑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7년 박기순이 덕진공원을 조성하였고, 1974년에는 전주시가 현대적인 공원으로 재정비하였으며 이후 전주시가 주축이 되어 여러 차례 정비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덕진공원은 역사, 문화, 생태, 환경 등 실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주시민의 의식 속에 편안함과 안식을 주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덕진공원 명소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하려면 덕진공원 명소화 사업에 앞서 덕진공원에 세워져 있는 각종 기념물을 알리는 사업도 포함되어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덕진공원 내에는 현재 비석 동상 등 16개의 기념물이 있으며 덕진공원 주변에도 많은 기념물들이 위치해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주로 전주 또는 전북,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겨있다. 따라서 이 기념물을 활용해 전주시민들에게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근현대사를 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근현대사를 현장감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러한 기념물만을 대상으로 해설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과 덕진공원을 소개하는 안내서에 이 기념물을 설명하는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근현대사에 대한 인프라가 취약한 전주임을 고려할 때,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제 우리가 덕진공원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물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고 그것들이 갖는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우리의 역사문화자산으로, 역사문화콘텐츠로 활용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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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6.13 23:02

1. 연재를 시작하며

고려시대 일연이 쓴 '삼국유사'를 보면 역사는 '거대한 이야기 보따리'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인 백남준은 '삼국유사'를 창작의 영감을 주는 상상력의 교과서로 여겼다. 따지고 보면 문화콘텐츠는 이야기산업이고, 모든 이야기의 젖줄은 결국 역사로 귀결된다.역사의 두께와 스토리텔링 산업은 비례한다. 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떠돌아다니다 조상이 살던 땅을 되찾아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구약'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책인 '구약'은 정체성의 원천이었다.새로 꾸려진 본보 문화전문객원기자단(시민기자단)은 '전북의 이야기를 찾아서'를 통해 사람과 역사에 대한 재조명을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있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혹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문화장소의 재발견을 해보자는 취지에서다. 기명숙(시인) 김승대(전북도청 문화재전문위원) 양승수(전 소리축제 프로그램팀장)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조사연구부장)이 나서 전북의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 매주 월요일 독자를 찾아간다.지난달 30일 본사 편집국장실에서 첫 만남을 가진 이들은 새로운 연재물'전북의 이야기를 찾아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편집자 주〉▲ 사회자(위병기 본사 문화부장) = 발달된 디지털 기술이 서사의 내용과 방법마저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긴 서사는 틀에 맞지 않다.▲ 양승수 =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열었던 스토리텔링 공모전이 실패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야기란 개개인 '추억의 거품'과 같은 것이다. 발굴된 혹은 창작된 스토리텔링이 누군가에게 쉽게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4~5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상황이다. 이야기는 짧아야 한다.▲ 기명숙 = 영국 작가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은 처음에 '영문학의 재앙'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디지털 시대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됐다. 하나의 큰 줄거리 속에 독립적인 이야기가 연결돼 있는 '반지의 제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병규 =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처럼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성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야기에 즉각적인 댓글과 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김승대 = 이야기에서는 감동도 중요하다. '맛을 찾아가는 협객'들의 요리 대결을 그린 허영만의 만화 '식객'은 한국 음식의 정신과 문화를 그렸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했을 것이다.▲ 사회자 =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획력을 높이려면 각 지역의 이야기꾼 확보에 나서야 한다. 그 지역의 토박이들의 구술을 통해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를 확보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중요한 것은 전주 중심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기명숙 =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로 인해 1400년 이어온 무왕선화공주 로맨스가 허구일 수 있다는 논란이다. 하지만 일연이 없었다면, 이들의 기막힌 러브 스토리와 미륵사의 거대한 석탑 이야기는 그냥 묻혀 버렸을 것이다. 이야기에서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허구적 요소가 가미돼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김승대 = 전주를 전북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전북은 편의상 서남권, 동부권, 북부권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시대 이래 전주를 비롯해 익산, 김제 등은 수도권 문화의 성격이 강했고, 고창이나 정읍은 남도 문화의 영향이 많이 받았다.▲ 사회자 = 단순히 이야기를 발굴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려면 후속 보도에도 신경써서 이와 관련한 연구와 정책 제안을 제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병규 = 도내 동학농민혁명 전적지가 세 곳이 있다. 정읍 황토현 동학농민기념관만 논의돼서는 안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발굴돼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목록에 올리려면, 장기적으로 세계의 농민운동과 연계하는 이야기가 발굴돼야 한다. 이것이 연구자와 정책 입안자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양승수 = 맞는 말이다. 기획을 연재하는 데에만 그칠 게 아니라, 후속 보도가 있어야 한다. 지난해 연재된 '전북의 문화콘텐츠 50'와 관련해 콘텐츠들을 재가공하기 위한 노력을 담아내는 과정이 생략됐다. 이번 연재에서는 그 부분을 충분히 살렸으면 한다.▲ 기명숙 = '이야기하기(telling)'는 진행형이므로 변할 수밖에 없다. 결국 변하지 않는 본질은 이야기이다. 이야기와 관련한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도 환기시킬 수 있도록 힘쓰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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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1.06.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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