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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협동조합 운동 성공하려면 - 지도자 헌신·지속적 교육·조합원간 신뢰 필수

'임실치즈'지정환 신부 같은 정신적 지주 필요 / 자조·자립·공동체 정신 등 이해하고 실천해야 / 믿음 깨지지 않도록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

   
▲ 도내 자생 생협인 전주 한울생협은 지난 1991년 도농직거래 단체인 한울회에서 시작했다. 사진은 생산자 체험을 하고 있는 전주한울생협 조합원들. 사진 제공=전주한울생협
 

협동조합을 하는 이들은 협동조합을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이전부터 지역에서는 민간 중심으로 기존 특별법에 근거한 신협(신용협동조합), 생협(생활협동조합) 등이 있었다. 신협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 자생적인 협동조합 운동으로 시작했다. 외환위기 전까지 협동조합 운동의 대표격이었지만 외환위기를 겪은 뒤에는 경영상 문제 등으로 인해 협동조합의 정신이 다소 희석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0년대에는 농산물 소비자와 생산자가 주축이 된 생협이 협동조합의 중심에 섰다. 특히 먹을거리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생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그동안 도내에서 전개됐던 협동조합 운동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의 필요충분 조건을 살펴봤다.

 

△신뢰할 만한 정신적 지도자는 필수

 

협동조합이 설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가 필수다.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돈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아리에타 신부가, 캐나다 안티고니쉬 지역에는 프랜시스 세이비어 대학의 코디 교수와 톰긴스 교수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협운동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신협 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장대익 신부가 대표적이다.

 

도내 협동조합 운동의 시초로는 임실치즈를 만든 지정환 신부(81)가 꼽힌다. 도내 농민을 위해 반세기 넘게 헌신의 삶을 살면서 신뢰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의 모습을 구현했다. 지난 1959년 12월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한국에 온 뒤 부안에서 농민과 함께 간척사업(99만㎡)을 벌이기도 했다. 1964년 임실성당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가난하던 농가의 모습을 보고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산양을 길렀고 벨기에에 가서 치즈 제조법을 배워왔다. 3년 동안 실패만 거듭하다 천신만고 끝에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즈공장을 세웠고 이것이 임실치즈의 모태다. 그는 2000년대'무지개가족'과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고 있다.

 

△지속적 교육도 협동조합 유지 조건

 

외환위기 전까지 민간 주도의 대표적인 협동조합 운동은 신협이었다. 신협은 초기 같은 성당을 다니는 신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도내에는 최초 신협으로 지난 1966년 1월 당시 이리 창인동 성당에서 성심신협이 출발했다. 이 때에는 신협을 설립하려는 성당에서 저녁마다 교육이 이뤄졌다. 협동조합 정신에 대한 지도자·조합원 교육과 강습, 토론회가 매주 이어졌다. 1960년대 신협의 강습회에는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개신교, 불교 신자도 참여했다. 자조, 자립, 공동체 정신 등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신협의 조직이 확대됐다.

 

더불어 지역사회 개발사업으로 공동 구매·판매사업 등도 이뤄져 조합원의 이익도 도모했다. 군산대건신협의 경우 일반 점포보다 적은 이윤으로 내의류 가게를, 이리신협은 마트를 운영하기도 했다. 장수 무궁화신협은 현재도 사료사업을 지속, 조합원을 대상으로 사료를 보다 저렴하게 공급한다.

 

하지만 신협은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뒤 초기 협동조합 정신이 퇴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동체 의식과 신뢰로 지속 가능

 

도내 자생 생협인 전주 한울생협은 지난 1991년 도농직거래 단체인 한울회에서 시작했다.1999년 전주 서신동에 매장을 열었고 2001년 생협 법인체로 자리잡았다. 현재 조합원은 약 1800명이다.

 

초창기 한울회는 부안 변산의 유기농 생산자 8가구의 판로확대와 도시 소비자 50여명이 만나는 직거래 운동체였다. 소비자는 나눔을 실현한다는 목표 아래 각 지역마다 운영위원을 정해 구매·회계 등을 분담했다. 농산물을 배달할 때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차를 타고 각 구역을 순회하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공동 나눔(배달)을 통해 조합원간 가족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하지만 양 측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해체 위기도 겪었다. 시작 첫 해 매주 생산지에서 일을 돕던 한 소비자 가족이 농약을 뿌리는 분무기를 보고 의심, 직거래를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당시 두 달 동안 진통을 겪다 일부 운영위원이 탈퇴하기도 했다.

 

또한 거래가 지속되다보니 조합원이 고정적으로 배달 당번을 하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한울회가 시작할 무렵 비슷한 단체가 4개 있었지만 모두 해체됐고, 한울회의 경우 인건비를 따로 쓰지 않고 조합원의 자원봉사로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커질수록 공동 나눔보다는 개별 택배와 매장 방문이 늘어나면서 조합원간 봉사와 나눔에 대한 이견도 생겼다. 한울생협은 유기농과 공동나눔에 대한 원칙을 조합원에게 재확인하는 방향으로 봉합했다.

 

한울생협 최선희 사무국장은 "협동조합은 지역의 문제를 지역에서 어떻게 풀 것인가하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지속가능하다"며 "한울생협도 초기에 문제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봉사와 희생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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