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교육 등 19개 단체, 소속 조합원 3만5000여명 / 구호활동으로 시작…사회적 경제 조직 활성화 고민
국내 협동조합 운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강원도 원주. 인구는 32만 명이지만 '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이하 원주네트워크)'에 소속된 조합원은 3만5000여명(중복 조합원 복수집계)이다. 농업가공유통, 소비자, 공동 육아, 교육, 신용, 의료 등이 협동조합으로 이뤄진다. 사회구호활동으로 협동조합의 초석을 다진 이들은 무위당 장일순(1928~1994)과 그를 따르는 운동가, 그리고 지학순 주교(1921~1993)다.
원주는 우리나라 그 어느 곳보다 협동조합이 익숙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해 '한국의 몬드라곤'으로도 불린다. 스페인 몬드라곤은 협동조합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내전으로 피폐화된 작은 마을에서 시작, 현재는 총 자산이 54조 원이 넘는다. 지난 9일 찾은 원주네트워크에서는 한국의 몬드라곤이 과분한 평가라고 하지만 삶에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을 만들려는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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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시 중앙동 무위당 기념관에 장일순 선생을 소개하는 전시물. 이세명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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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동에 있는 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 6층 건물. 밝음 신협과 한의원, 무위당 기념관 등이 있다 | ||
△목적은 확실, 보조금은 금물
원주시 평원동 '만남의 집'은 특별한 식당이다. 곰탕, 된장찌개, 삼겹살 등으로 메뉴는 평범하지만 국내 1호 노인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원주노인생활협동조합은 고령사회에 대비해 고령자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06년 만들어졌다. 사업의 다양화를 꾀하던 중 2010년 직영식당을 열었다. 경상비를 제외한 수익은 모두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데 쓴다.
노인생협은 설립 당시 적용할 법이 마땅치 않아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출발했고, 2008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조합원은 약 1400명, 출자금은 4400만 원 규모다. 이중 1만 원 가량을 출자한 조합원은 1200여명이다. 깨끗한 학교(초등학교 청소), 크린콜(무단 쓰레기 처리), 대형폐기물, 소독방역(보건소, 학교 등), 보험사업부(생명, 자동차, 상조) 등 11개 사업을 펼친다. 4대 보험과 함께 근로계약을 맺은 조합원은 106명이다.
노인생협 박태진 이사장(70)은 "조합은 목적이 중요하다. 노인 스스로 일을 찾으며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목적이 확실해야 한다. 더불어 젊은층의 일자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면서 "우리는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행정이 필요한 일을 찾아 사업을 제안하고 수의계약도 활용한다. 크린콜 사업단은 뒷골목에 쌓인 쓰레기를 치워 깨끗한 원주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박 이사장은 이어 "조합원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사업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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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의료생협 조합원들이 시민을 대상으로 보건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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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에 속한 친환경급식센터 맞두레(주)에서 결식아동에게 공급할 도시락을 담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 | ||
△협동조합 실험 왕성한 원주
원주네트워크에는 현재 19개 단체에 46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972년 원주밝음신협을 시작으로 지난 2010년 친환경생태건축과 저소득층 집수리, 환경생태 교육을 하는 노나메기(주)에 이르기까지 신협(1곳), 소비자생협(6개), 교육(2개), 공동체 운동기관(3개), 농민 생산자 단체(2개)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 같은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에 지학순 초대 교구장이 부임하면서 장일순 선생과 만난다. 1968년에는 가톨릭센터에 협동조합 강좌를 개설하고 이듬해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협동조합 운동이 실시됐다.
협동조합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2년 남한강 대홍수다. 이들은 당시 서독으로부터 들어온 구호자금 3억6000만 원을 운용하기 위해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결성하고, 마을단위로 식량지원과 농토 복구, 농민 소득원을 개발했다. 같은 해 원주네트워크의 맏형격인 밝음신협을 설립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원주는 시련을 맞는다. 정부의 저곡가와 농약으로 인한 증산정책, 탄광촌 폐쇄 등으로 친환경 농업의 축소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심화돼 인적기반이 붕괴됐다. 1982년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모자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5년에 들어서 현재의 한살림생협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과 소비 기반이 다져졌다. 도시와 농촌의 협력 연대를 통한 새로운 협동조합 운동 방식이 도입됐다.
또 외환위기 이후 2002년 의료생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젊은 실무자를 중심으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활발히 이뤄졌다. 공무모임에서 대안사회의 실현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원주네트워크의 전신인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가 창립됐다.
원주에서도 협동조합의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다. 사업 창출과 이용률 제고 등이 고민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목적과 절실함이 부족한 협동조합은 문제 해결 방식과 조직 구성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활동이 뜸한 편이다.
원주네트워크에 소속된 기관과 단체들은 지난해 3월 생명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 조직 협약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상호 부조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각 부문별 공동사업을 강화하고 협동기금을 설립할 계획이다. 교육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하고, 조합원·회원의 참여를 높이는 방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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