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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갈동을 비롯한 전북혁신도시 개발 구역 내에서는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의 움무덤들이 100기가 넘게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많은 수이다. 갈동 유적에서는 출토 위치가 확실한 한국식 동검과 청동 꺾창 거푸집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신풍 유적에서는 간두령 한 쌍이 최초로 동시에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외에 또 주목되는 것이 다양한 잔무늬청동거울이다. 청동제 잔무늬거울은 한국식 동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크기는 보통 직경 20cm 내외이며, 둥근 거울 뒷면의 중앙에 2~3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나머지 공간에 여러 선으로 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정교한 무늬를 새기기 위해 고운 점토로 만든 거푸집을 만들어 세밀한 원과 선으로 공간을 나누고 내부에 녹인 청동을 부었다. 잔무늬거울의 뒷면은 삼각형 또는 사각형, 원형, 사선무늬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무늬를 새겼다. 대부분의 잔무늬거울은 서로 다른 크기의 동심원을 사용하여 크게 2~3등분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13,000여개가 넘는 선이 새겨져 있다. 무늬가 있는 면에 달려 있는 2~3개의 고리에는 구멍에 끈을 넣어 사용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기하학적인 무늬는 마치 20C 초 네덜란드 추상화의 대가인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햇무리의 모습을 무늬로 새긴 잔무늬거울은 신을 부르는 도구인 청동 방울, 정치적 권위를 보여주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주로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중에서는 일부러 깨뜨려 넣은 것도 있어 당시 사람들의 매장 의례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전북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잔무늬거울 20여점이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가 확인된 곳이다. 또한 완주 갈동 유적 5호와 7호 움무덤에서 출토된 잔무늬거울은 곧 보물 지정이 예고되어 있다. 잔무늬거울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전북지역 초기철기시대 사람들의 금속학적 기술과 디자인적 감각은 현대와 비교해보아도 뒤처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더욱 뛰어난 면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왕국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가야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수 삼고리 고분군에서 15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백제계 토기가 출토됐다. 전북도와 장수군,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산 76번지 삼고리 고분군 2차 발굴조사를 통해 56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50여 점을 찾았다고 지난 24일 발표했다. 삼고리 고분군은 1995년 군산대박물관이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계 무덤으로 규명된 곳이다. 앞서 장수군은 마한 시대 이래로 백제 문화권에 속했던 곳으로 인식돼 왔다. 장수 삼고리 고분군에서 가야인의 무덤이 발굴되면서 금강 상류는 백제에 병합되기 전까지 가야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처음 알려졌다. 이번 조사에서는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구덩식 돌덧널무덤) 3기와 토광묘(土壙墓) 1기가 발굴됐다. 유물은 가야계 물결무늬 장경호(長頸壺목 긴 항아리)와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그릇받침)7개 묶음과 장군 등 다양한 철기류가 나왔다. 장군은 물술간장 등 액체를 담는 데 쓰는 길쭉하고 입구가 작은 그릇이다. 아울러 9호분에서는 은제 고리 2점과 쇠도끼, 쇠화살촉, 토기와 재갈 같은 마구(馬具)가 발견됐고, 10호분에서는 작은 항아리 1점과 철모 1점이 나왔다. 이날 출토된 유물에 비춰볼 때 이 무덤을 축조한 가야세력은 5~6세기 주변국들과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이루면서 성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시대의 도자공예라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청자를 떠올린다.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청자가 생산되었고, 고려청자는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고려시대 공예를 대표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생산되었다. 한반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기에 축조된 벽돌가마에서 백자를 생산하였다는 사실이 고고학 조사에서 밝혀졌다. 도자 제작기술이 중국에서 고려로 들어오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중부 서해안에 초기 가마들이 10세기 후반경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일대의 가마와 형태가 유사한 가마로 고려 초기에 축조되었다. 청자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백자가 생산되었고, 특히 경기도 용인 서리 가마터는 청자에서 백자로 전향했다는 사실이 층위로 밝혀졌다. 퇴적층 가장 아래에는 초기에 제작된 청자들이, 그 위층에서는 백자가 주로 발견되어 처음에 청자를 제작하다가 차츰 백자를 제작하는 가마터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대표적 고려청자 생산지인 부안이나 강진 등의 가마터에서도 백자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청자의 전성기 중심 속에서 백자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다만 고려 사람들의 주된 수요 대상이 청자였기 때문에 백자는 적은 양만이 생산되었고 따라서 완형으로 전하는 예도 드물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자화(磁化)가 이루어지는 조선시대 백자와는 달리 고려시대 백자의 태토는 2차 점토이다. 따라서 고려백자는 다소 연질(軟質)로 아백색(牙白色)을 띠며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 매병은 전형적인 고려청자의 매병처럼 어깨가 풍만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홀쭉해지는 형태이다. 다만 하얗게 빛나고 있어 백자임을 알 수 있다. 몸체에 모란당초무늬를 비스듬히 깎아서 무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란에는 화맥(花脈)과 엽맥(葉脈)을 새겨 세밀함을 더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양각 연판문(蓮瓣文) 띠와 음각 번개무늬(雷文) 띠가 2단을 이루고 있다. 유약이 박락된 부분이 있지만 완벽한 형태의 백자 매병에 세밀한 무늬까지 새겨진 예는 거의 없어 주목된다. 청자의 형태와 문양을 본떠 만든 소중한 고려시대 백자 매병인 것이다. 이러한 백자들은 고려시대 도자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해주고 있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 후기 서화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비문이 임실에서 발견됐다. 전라금석문연구회(회장 김진돈)와 임실문화원(원장 최성미)이 지난 14일 전주최씨 만육파의 후손 최성간(1777~1850)의 묘비를 분석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임실군 김철배 학예사로부터 제보를 받아 진행했으며 추사의 필획을 조사하기 위해 서홍식 한국서도협회 전북지회장과 함께 탁본을 실시했다. 이 비석을 살펴보면 최성간은 1777년에 태어나 1850년 까지 74세를 살았다. 묘비 글은 1851년 10월에 조카인 최한중이 지었다. 김정희는 1851년 7월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바로 글씨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는 다음 해인 1852년 풀려나 10월부터 과천에 거주하게 되는데, 그 이후에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사의 글씨체를 보면 전서의 필획도 나타나면서 정부인광산김씨묘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좌우대칭을 균형있게 조절하는 필획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중(中)자와 사(事)자 등은 해서의 필획이 나타나고 있는 것 큰 특징이다. 또 이 비석에는 비석을 세운 장소를 임실(任實) 하신덕면(下新德面) 율치(栗峙)로 기록하고 있어 지명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소견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은 최성간의 묘비에는 추사의 말년 필획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씩 뜯어보면 탈격의 미가 잘 나타나고 있어 추사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최성미 임실문화원장은 이 비석을 찾기 위해 5년 전부터 고 전손주항의원 제보로 온 산을 뒤졌는데, 이제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면서 앞으로 이 비석에 대한 연구를 해 지역 향토문화재나 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지역출신이며 추사체 연구의 권위자인 박철상 박사도 김정희 선생이 남긴 금석문 중에서도 묘비에 쓴 글씨들은 그의 서법 연구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서 이번에 또 다시 새로운 비문 글씨가 발견되어 김정희 서법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정읍 무성서원을 비롯한 조선시대 서원 9곳으로 구성된 연속 유산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유력하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한국의 서원을 등재 권고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 신청한 유산을 조사한 뒤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네 가지 권고안 중 하나를 선택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당사국에 전달하며, 등재 권고를 받은 유산은 이변이 없는 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다. 정읍 무성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면 전북은 고창 고인돌(2000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에 이어 3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심사평가서에는 한국이 등재 신청한 9곳 서원 모두를 등재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의 서원은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인 정읍 무성서원을 비롯해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경주 옥산서원, 경북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으로 구성됐다. 한국의 서원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6월 30일 개막하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확정된다. 한편, 정읍시는 무성서원 일대에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시설 선비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던 물건이었을까? 제일 큰 것은 약 7.7cm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아주 작아, 자세히 들여다봐야 부처와 보살들의 표정이 보인다. 그러나 작은 네 개의 판불에는 아주 큰 세계가 담겨 있다. 이 네 개의 판불은 1980년 김제 대목리(大木里)의 한 밭에서 출토되었다. 여래좌상(如來坐像)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각각 본존으로 한 삼존상(三尊像), 4명의 보살, 승려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래삼존상은 협시보살까지 모두 좌상(坐像)으로 표현된 매우 드문 예이다. 반가사유상은 좌우에 승려상이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다. 부처와 보살의 얼굴 묘사 등 표현 양식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크게 유행했지만 이러한 도상배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하는 독특한 도상으로,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판불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도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요한 국가적 통치 이념으로 도입되었으며, 특히 삼국 중에서도 백제는 동아시아 불교문화 교류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동진(東晉)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문화는 백제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배경에는 당시 백제가 선진문물을 수입했던 중국에서 불교문화가 대대적으로 융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상들은 기존에는 압출불(押出佛, 동판을 대고 두드려 만든 부처상)을 제작하기 위한 청동 원형 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과학적 분석을 한 결과 청동 원형 틀이 아니라 금동 부처상임이 밝혀졌다. 이 판불들은 원래의 봉안 상태를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예로 일본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나무 천개를 장식했던 것처럼 소형 감실 내부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혜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원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민주화운동기념일, 보훈기념일과 같이 거국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9일 전북대구경북충북연구원 공동 주최로 전북연구원에서 개최된 전북학연구센터 개소식 및 동학농민운동 국가기념일 제정 기념 공동세미나에서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을 좌장으로 한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곽종무 대구경북학연구소장은 동학의 인본주의적 평화사상에 주목해 향후 대한민국의 민주 사회를 지탱하는 사상적 지주가 돼야 한다면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을 계승발전시켜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교수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5월 11일)을 중심으로 고부봉기(2월 14일)부터 전주화약(6월 11일)까지 연속적으로 기념해 그 열기를 올 상반기 내내 유지하자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여타 민주화운동기념일(419, 518), 보훈기념일(현충일)과 같이 거국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홍성덕 전주대학교 교수는 동학은 정읍, 전라도 등 특정 지역의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다며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종합토론에 앞서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의 동학농민혁명과 대한민국을 주제로 한 기조강연과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의 의의, 장세길 전북연구원 연구위원의 동학농민혁명의 지역 간 연계전략 주제발표도 진행됐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익산 구 이리농림고등학교 본관(1동 지상 4층)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7일 밝혔다. 익산 구 이리농림고등학교 본관은 1963년 당시 이리 지역을 대표하는 농업전문 교육기관인 이리농림학교의 제2본관으로 건립됐다. 붉은 벽돌의 조적조(組積造) 건물이면서 주출입구 상부의 계단실과 정면에 설치한 현관부(포치)를 화강석으로 쌓아 입면을 강조한 건축 기법 등이 특징이다. 현재 소유자는 전북대학교다. 문화재청은 이날 익산 구 이리농림고등학교 본관과 함께 이자해자전 초고본한국독립운동사략(상편)을 등록 예고했으며, 3건은 30일간의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등록될 예정이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이 20년의 보수정비를 마치고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문화재청과 전라북도, 익산시는 30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날 준공식에는 정재숙 문화재청장, 송하진 전라북도지사, 정헌율 익산시장, 월주 스님, 지역 국회의원, 불교계, 도민 등 600여명이 참석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석탑 준공을 축하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말 무왕때인 639년에 세워져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석탑이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가 벼락에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을 시멘트로 덧바르면서 미관상은 물론 구조적 안정에도 큰 부담을 줬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안전진단 결과, 콘크리트 노후 등 구조적 문제가 확인되자 1999년 문화재위원회에서 6층까지 해체수리를 결정하면서 보수작업에 착수했다. 이후 2001년부터 본격적인 석탑 해체조사에 착수해 2017년까지 원래 남아있던 6층까지 수리를 완료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가 진행되던 2009년 1월 석탑 1층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유물들은 미륵사 창건과정과 시기, 백제의 역사와 문화적 위상, 사리봉안 의례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국보급 유물들이 대거 발굴돼 학계는 물론 문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20년의 보수정비 과정을 마치고 최근 가설 시설물의 철거와 주변정비까지 마무리하고 지난 3월 23일부터 일반에 석탑의 완전한 모습을 공개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최장 기간 체계적인 연구와 수리가 진행된 사례로 평가받으며 국제적 기준에 따라 보수정비 과정을 이행해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로 한 획을 그었다. 또한 추정에 의한 복원이 아닌 원래의 부재를 81%까지 최대한 재사용해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미륵사지 석탑 준공을 계기로 국제적 기준에 맞는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세계유산으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하겠다며 익산의 다양한 문화자원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도시로 만들어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1380년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세운 위대한 사업이다면서 다시 일어선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전북 대도약의 시대를 힘차게 열어가겠다고 말했다.
2002년 6월, 호남문화재연구원 한수영 실장은 그해 봄에 진행한 완주군 반교리 일대 지표조사 보고서 작성 마감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현장을 찾았다. 그는 갈동 마을 저수지인 갈동제 남동쪽 호남고속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인 이곳을 시굴조사 대상 지역으로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이었다. 조사 당시 이곳은 오래전에 성토(盛土)되어 지표상에는 별다른 유물이 채집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실장은 이곳이 완만한 구릉지대라는 지형적 특성과 인근 완주 반교리, 전주 여의동 등지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지표조사 보고서에 이곳을 시굴조사 대상 지역으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시굴조사에서도 구릉 정상부에 초기철기시대의 도랑 흔적만 확인되었을 뿐, 구릉 사면은 1~1.5m 정도로 최근의 흙이 쌓여 있어 별다른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한 실장은 전면 발굴조사 여부를 두고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도 그는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성토된 흙을 전면 제거하여 발굴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흙을 거둬내니 움무덤 4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움무덤 내부를 조사하던 조사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식동검의 거푸집이었다. 금속을 녹여 부어 도구를 만들기 위한 거푸집은 한 사회가 금속기를 주조하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 증거로, 그 사회의 생산력 수준과 사회발전단계 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까지 한국식동검 거푸집은 평양 장천리, 경기 용인 초부리, 영암에서 발견 수습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갈동 유적 초기철기시대 움무덤 안에서 완벽한 형태의 거푸집이 최초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매우 크다.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한 문화재청은 갈동 유적의 현지 보존을 결정하였고, 이 거푸집은 29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 하였다. 한 연구자의 직감과 신념이 학술적 가치가 큰 유적과 유물을 세상에 선보이게 하였다. 양성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전북지역 문화재 3건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29일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완주 갈동 출토 동검동과 거푸집, 완주 갈동 출토 정문경 일괄 등 고려~조선 시대 회화와 불상, 초기 철기 시대 거푸집과 청동거울 등 총 7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유행한 두건을 쓴 지장보살좌상으로, 특히 불교회화에서 많이 그려진 도상이다. 이 시기 금동과 목조로 제작된 지장보살상은 몇 점이 전하고 있지만, 석조로 제작된 지장보살 중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한 사례는 참당암 지장보살좌상이 거의 유일하다. 완주 갈동 출토 동검동과 거푸집은 갈동 1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거푸집 2점으로, 한 점은 한쪽 면에만 세형동검의 거푸집을 새겼고, 다른 한 점은 동검(銅劍, 칼)과 동과(銅戈, 창)가 각각 양면에 새겨져 있다. 초기 철기 시대 호남 지역의 청동기 제작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서, 고분의 편년과 거푸집에 새겨진 세형동검의 형식 등으로 볼 때, 기원전 2세기경에 실제로 사용된 후 무덤에 매장된 청동기 제작용 거푸집으로 추정된다. 완주 갈동 출토 정문경 일괄은 초기 철기 시대인 기원전 2세기경에 사용된 2점의 청동제 거울로서, 정식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된 보기 드문 사례다.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에 자리한 갈동 5호와 7호 토광묘에서 각각 한 점씩 출토됐다. 이 외에도 도기 연유인화문 항아리 일괄과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 신편유취대동시림 권9~11, 31~39, 혼개통헌의 등을 국가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보물로 지정 예고한 총 7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김성규 기자천경석 기자
전주 어진박물관(관장 이동희)이 초상화 특별전 이렇게 뵙습니다전을 연다. 18일부터 6월 16일까지, 개막식은 17일 오후 3시. 초상화는 조상을 깍듯이 받드는 성리학적 질서체계가 자리한 조선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당시 초상화는 단지 그림이 아니라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조상님으로 여겨졌다. 피난 갈 때는 조상의 초상화를 고이 접어서 항아리에 넣어 땅속 깊이 묻어 두거나 피난 보따리 안에서 신줏단지 모시듯 지니고 다녔다. 이번에 전시되는 초상화는 보물 3점과 도문화재 6점을 비롯해 20여 점, 오랜 세월 후손들이 목숨처럼 받들어온 영정들이다. 최치원, 하연과 정경부인, 최덕지, 이숭원, 고희, 강응환, 이신문, 장태수, 김근배, 김기술, 이덕응, 박해창, 관우 초상화 등이 포함됐다. 태인 선비들의 모임을 그린 송정십현도도 전시된다. 최덕지 초상화는 유지 초본과 함께 전시되어 밑그림과 완성된 영정을 비교해 볼 수 있어 관심을 끈다. 이 영정과 초본은 보물 594호로 전북 지역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초상화이다. 최덕지는 전주 한벽당을 건립한 최담의 아들로 직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영정은 보기 드문 부부상으로 조선전기에 유행한 부부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연은 세종대 영의정을 지냈다. 정경부인의 영정은 조선전기 복식사를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다. 이동희 관장은 초상화를 통해 선조들을 만나본다는 의미에서 특별전 이렇게 뵙습니다를 마련했다. 많은 분들이 찾아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주 어진박물관은 한옥마을 경기전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관람 문의는 어진박물관 학예연구실 063-231-0190.
고문헌 등 5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한 전주 고하문학관에 전문 학예연구사가 파견돼 고서 정리를 돕는다. 전주시립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 공모한 고문헌 정리 및 관리지원 사업에 고하문학관이 선정됐다고 15일 밝혔다. 이 사업은 1945년 이전의 고서와 고문서, 지도, 고서화 등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에 전문 인력을 파견해 정리 및 관리방법을 안내하고, 서지목록 작성 등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고하문학관에는 오는 19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의 이정효 학예연구사 등 2명의 전문가가 상주하면서 고서 정리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전주시는 이번 사업으로 고문헌의 현황과 실태를 파악해 가치 있는 자료 선별과 보존이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최현창 전주시 기획조정국장은 이번 사업을 통해 고하문학관 고서 자료를 선별하고, 향후 디지털화 작업을 추진해 고서의 서비스 영역을 넓히겠다고 말했다.
전북 동부 산악지역 금강 상류에 용담호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1992년 착공하여 2001년에 완공된 용담댐 건설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이다. 저수량으로 본다면 소양호, 충주호, 대청호, 안동호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이다. 지금은 호수 위를 달리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받고 있지만, 그 깊은 물속에는 옛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혀있었다. 일정 면적의 건설공사를 할 때는 법적으로 고고학 조사를 필수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진안군 6개 읍면, 68개 마을이 수몰된 용담댐 건설도 당연히 조사 대상이었다. 1995~2001년 모두 4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적이 밝혀졌다. 특히 정천면 갈머리 마을과 진그늘 마을에서는 전북 동부 산악지역 최초로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이 두 유적에서는 완전한 형태로 복원 가능한 토기 몇 점이 수습되었다. 이것들은 영남 내륙지역 신석기시대 유물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진안고원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내륙 교통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으로 제시된 토기는 갈머리 유적에서 확인된 빗살무늬토기이다. 고고학에 있어 토기는 문화 흐름이나 집단 차이를 밝히는 데 주요한 도구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빗살무늬토기의 다양한 무늬는 기하학적 도형을 형성하면서 그 자체로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바닥이 뾰족하여 기능적으로 불안해 보이지만 밑으로 내려가면서 체감되는 간결한 V자 형태는 비례의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무늬구성을 살펴보면, 맨 위에는 선으로 이루어진 세모꼴 무늬가 연속적으로 둘러져 있고, 아래로는 방향을 달리한 비스듬한 선들이 가로방향으로 연속적으로 채워져 있다. 한편 맨 위에 새겨진 세모꼴 무늬는 크기가 거의 일정하다. 이는 신석기인이 토기를 만들기 전 미리 전체 토기 둘레를 가늠한 뒤 일정한 크기로 무늬를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석기인의 뛰어난 공간구성능력과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양성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유약을 입혀 높은 온도에서 구운 자기는 최상의 기술로 완성되는 섬세한 예술품이다. 고려는 이러한 자기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제작했으며 이는 도자기 역사에서 의미가 크다. 찬란한 공예품을 탄생시키고 향유했던 고려는 청자를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고려 건국 이후, 선종의 유행, 차의 재배와 차를 마시는 풍습, 그리고 그 차를 담아 마시는 도구인 완의 지속적인 수요는 중국산 자기 대신 고려에서 자체 제작의 동기를 부여했다. 고려에서 완을 중심으로 청자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차 문화의 확산과 발전으로 다완 외에 잔, 잔탁, 차를 보관하는 합, 물을 끓이거나 따르는 주자, 찻잎을 가는 다연, 찌꺼기를 버렸던 타호, 차 숟가락, 음식을 놓았던 방형대 등이 제작됐다. 술 또는 차를 마시는 공간을 장식하였던 꽃병과 분위기를 돋우는 악기, 탁자와 의자까지 청자들은 실로 다양하다. 오늘날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고려청자는 전라북도 부안, 전라남도 강진을 중심으로 대량 생산됐다. 이 작품은 완과 발, 잔 등의 일상기명과는 달리 독특한 모습을 뽐낸다. 높이 35cm되는 소담한 청자 의자로 윗면은 편평한 편이며 배가 불룩하여 안정감을 주는 구조이다. 몸체 전면을 겹쳐있는 고리무늬로 투각했으며, 넝쿨무늬가 새겨진 장식을 윗부분에 투각했다. 투각기법은 기면을 뚫기 때문에 번조 시 잘 터져버리는 단점이 있다. 이처럼 큰 투각의 청자 의자를 만든 것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제작기술 덕분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며, 고리무늬 같은 경우 고려시대 목가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나라 고분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도상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시대 차나 술을 마시는 향유 공간에서도 청자 의자를 놓고 앉아 썼을 것이다. 청자로 의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려인들의 화려했던 생활을 짐작케 해주는 귀중한 예로 이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음료를 즐기며 바둑을 두는 등 고려 귀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이처럼 두텁고 투각된 청자 의자 편들이 출토된 바 있으며, 따라서 이 청자도 부안 유천리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리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년~1791년)은 고창 출신의 학자이다. 그에 대한 설명에는 일반적으로 음운학자라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자모변(字母辨)>,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과 같은 저술이 후대 국어학자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백과사전식 연구를 했던 인물임이 드러나고 있다. 관직을 역임하며 서울에서 머물기도 했던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일기로 남긴 바 있다. <이재난고(頤齋亂藁)>라는 이 책은 한문 초서로 쓰여 있어 해독이 쉽지 않았으나 한문으로 정서가 되어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책에는 방대한 분량답게 18세기 지성인이 보고, 듣고, 느낀 여러 일들의 기록이 있으며, 공부 노트이자 자아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다. 황윤석은 음운학분야 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야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을 나타내었고 특히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지금을 따지면 이공계 학자였던 셈이다. 일기를 살펴보면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와 수학자를 찾아다니며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그가 저술한 이과 관련 백과사전이 바로 <이수신편(理藪新編)>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책에는 물리학, 수학을 비롯한 이학의 총체가 담겨져 있다. 천문학 분야에는 천문, 역법 등 동서고금의 여러 학설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는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 선교사들의 책을 접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수학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고전 산법을 3권에 걸쳐 상세히 다루기도 하였다. 또한 음운학, 성운학, 언어철학과 관련된 글들도 수록되어 황윤석의 방대하고 깊이 있는 학문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정대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재청이 4월 한 달 동안 숨은 무형유산을 찾는 대국민 공모를 진행한다. 국가무형문화재나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기능과 예능 등의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나 새로운 무형문화재로 지정할만한 종목을 발굴한다는 취지다. 공모 대상은 아리랑, 김치 담그기와 같이 전국적인 기반을 두고 지역과 세대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는 무형유산 7개 분야다. 세부적으로 △전통 공연예술 분야(음악, 춤, 연희, 종합예술 등) △전통기술 분야(공예, 건축, 미술 등) △전통지식 분야(민간의약지식, 생산지식, 자연우주지식 등) △구전 전통과 표현 분야(언어표현, 구비전승 등) △전통 생활관습 분야(절기풍속,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 등) △사회적 의식의례 분야(민간신앙의례, 일생의례, 종교의례 등) △전통 놀이축제와 기예무예 분야 등이다. 이번 공모를 통해 접수된 종목들은 무형유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위원회를 통해 엄선될 계획이며, 그 결과는 무형문화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예비목록에 포함, 순차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신규종목 지정 조사계획에 반영될 예정이다. 공모 접수는 4월 1일부터 30일까지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필요한 서류 양식을 내려받고 제안서를 작성해 우편으로 접수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042-481-4994)로 문의하면 된다.
조선 시대의 정치ㆍ사회ㆍ외교ㆍ경제ㆍ군사ㆍ문화 등 각 분야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 추가로 확인 돼 국보로 지정 예고된다. 문화재청은 26일 무주 적상산 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본 4책 등 96책을 추가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목록에는 무주 적상산사고본 4책 외에 오대산사고본 1책, 정족산사고본의 누락본 7책, 봉모당본 6책, 낙질 및 산엽본 78책이 포함됐다. 이번 추가 지정 예고는 문화재청이 국보 제151-1호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의 일부가 1973년 국보로 지정될 당시부터 누락됐다는 사실을 지난 2016년 인지하고, 2년간 조사한 끝에 이뤄낸 결과물이다. 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6.25전쟁 때 북한군이 북으로 반출했다고 전해질 뿐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사고본 실록(4책)이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3책)에 나눠서 보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국보로 추가 지정이 될 경우 성종실록인 정족산사고본의 누락본 7책은 정족산사고본이 국보 제151-1호인만큼 제 151-1호에 편입시키고, 효종실록인 오대산사고본 누락본인 1책은 국보 제151-3호에 편입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하는 조선왕조실록 5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계획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도 관청의 중재 혹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 공공기관 민원 절차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빈번하였으니, 문서의 형식을 갖추어 민원의 내용을 올리고 담당 직원이 처분을 내린 결과가 적혀 있는 문서를 소지(所志)라고 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영란(朴英蘭, 16세기)의 충절을 추천하는 문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문서에는 좀 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몇백 년이 지난 19세기 어느 날, 지역 유림들 21명이 예전 우리 지역에 충절로 뛰어난 인물이 있는데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면서 연대 서명하여 순찰사(巡察使)에게 그의 충절을 추천했던 연명첩(聯名帖)이기 때문이다. 박영란은 김제군에서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를 지낸 인물이었다.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공도 박영란이 하찮은 일이라도 애를 쓰고 절의에 죽으려 했던 뜻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임진왜란때 큰 공적이 있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실릴 정도였으며, 우리 고장(김제군) 선비들의 여론은 선무공신에서는 제외된 것에 대해 모두 서글프고 안타깝다 하며, 지금 임금이 효행과 충절로 뛰어난 사람을 추천받으니 연대 서명하여 진정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21명의 이름과 함께, 충절이 뛰어나므로 진정한 대로 처분한다는 결과가 적혀 있다. 문서에는 계미년 6월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1799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인 1853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에는 선조대에 나라가 어수선해 졌습니다. 그때 재주 많은 준걸들이 조정에 가득 차고 절의를 지닌 선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기틀이 다시 높아지고 운세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충성스럽고 어진 인물들을 드러내 높여주며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둔 효과가 어떠했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어진 인품을 잃지 않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두는 것이 중요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18년 동안 해체수리가 진행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오는 23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될 예정인 가운데 미륵사지 석탑이 원형과 다르게 복원됐다는 감사결과가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문화재청이 석탑을 보수정비하면서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한 사전검토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일관성 없이 축석(돌을 쌓음)하다 보니 석탑의 상하부 내부 형태가 애초의 원형과 달리 층별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21일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2011년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실시설계용역을 진행하면서 해체 당시 확인된 축석방식의 기술적 재현 가능성이나 구조적 안정성 여부 등 원형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검토를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석탑 상하부의 내부 적심(석탑 상부의 하중을 하부에 전달하는 역할)이 다른 형태로 축석되는 등 일관성이 없는 방식으로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또 3층 이상 적심부의 틈을 채우기 위한 충전재를 기존에 계획했던 실리카퓸을 배합한 무기바인더에서 황토를 배합한 무기바인더로 변경하면서 그 사유와 타당성에 대해 자문이나 연구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장에게 구조계산 등을 거친 실측설계도서 없이 축적된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구조안정성 검증 후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통보했다. 또 앞으로 문화재 보수 시 원래의 구조와 형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계획을 수립해 일관성 있게 할 것을 주의 조치했다. 이와 관련 문화재청은 미륵사지 석탑의 내부 상하 적심의 구성이 달라진 것은 석탑의 구조적 안전성 확보와 역사적 가치 보존을 함께 고려해 나타난 결과라면서 충전재는 공극 채움을 통해 석탑의 구조적 안전성을 크게 행상시키는 역할을 하며, 배합 재료의 변경은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에 큰 영향은 없다고 해명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결과 일제강점기에 덧씌운 콘크리트가 노후화되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단에 따라 1999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해체수리를 결정했다. 이후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인 석탑의 해체조사에 착수했고, 2017년까지 남아있었던 6층까지 수리를 완료했다. 최근까지 가설시설물 철거와 주변 정비를 모두 마무리했다. 강정원 기자김진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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