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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보관 상자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644042cm 크기의 검은색 나무 상자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투박하게 보이는 검은색 상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성껏 단단하게 만든 상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자가 바닥에 바로 닿지 않도록 상자의 발인 족대足臺를 달아두었고, 상자를 구성하는 나무판들이 사이가 벌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각 면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감잡이를 3개씩 부착해 두었습니다. 한아름이 넘는 상자의 크기만큼이나 큰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였던지, 뚜껑과 몸체를 일반 경첩이 아닌 고리 모양의 경첩을 달려있으며, 뚜껑을 열었을 때 뚜껑을 안정적으로 받치기 위한 받침대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상자의 양쪽 측면에는 활모양의 들쇠가 달려 있어, 상자를 종종 들어 올려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자 앞부분에는 宣祖實□, 第□櫃라고 적힌 종이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종이 메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상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상자입니다. 상자 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실록은 책 크기가 약 5233cm 정도로 일반 서적보다 크기가 컸으며,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최고급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최고급 종이로 만든 나라의 보물인 실록은 어떻게 상자 안에 담겨 있었을까요? 그 과정은 실록을 편찬하고 봉안하는 전 과정을 기록한 <실록청의궤>에 잘 남아 있습니다. 그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록 상자는 천궁과 창포 가루 주머니를 상자의 바닥에 넣고 저주지楮注紙(닥나무로 만든 종이)로 덮는다. 실록은 홍정주紅鼎紬 4폭 보자기에 부록부터 권 번호 역순으로 넣어서 싼 후 저주지와 천궁, 창포 주머니를 넣고 상자를 닫는다. 상자에 담은 후 총재관總裁官이 자물쇠를 잠그고 이 자물쇠를 저주지로 봉하고 봉안한 날짜를 적는다. 자물쇠 열쇠도 저주지로 두르고 총재관이 착함하여 자물쇠 중간에 매단다. <승정원일기>의 습기를 막는 데는 창포가루 만한 것이 없으니 실록이 지금까지 무탈한 것은 전적으로 창포가루 때문이다.라는 기록처럼, 천궁과 창포는 방충, 방습 효과를 위한 것이고, 자물쇠와 열쇠를 종이로 봉안하는 것은 실록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를 공명정대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왕조차도 보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인류 역사상 단일왕조 역사서로서 가장 규모가 큰 책입니다. 국립전주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실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품고 있었던 투박하게 보이지만 단단한 상자를 감상하며,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려 한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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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2 17:32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정읍 무성리 ‘머리 없는 미륵님’

그 옛날 그 지역에서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석공은 사람들의 염원을 모아서 돌을 찾고, 미륵을 다듬어서 세웠습니다. 아마 그 가운데 석공이 가장 정성을 쏟은 곳은 아마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각된 그 모습은 우리 자신들의 얼굴입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입니다. 이 땅에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갈 우리들의 얼굴입니다. 바로 과거현재미래의 한국인 모습입니다. 미륵은 이 땅에서 대를 잇기 위한 어머니들에게 코를 내어주어 얼굴의 형체도 없어졌습니다. 세월 속에서 미륵은 한적한 원래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기도 하지만 넘어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미륵은 본래 공동체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 미륵이 개인 집으로, 사찰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목도 부러지고, 손도 부러져 다른 돌로 의족(?)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초를 밝히고 정화수를 떠놓고 세상사의 모든 고초와 바람을 미륵에게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미륵은 민초들의 바람을 듣고 계십니다. 미륵은 그 모든 바람을 들어주십니다. 그 바람과 사연들을 모으면 개인사가 되고, 마을의 역사, 고을의 역사, 나라의 역사로 엄청난 민중생활사가 될 것입니다. 박물관 입구나 야외전시장에서는 목이 없는 부처님이나 목만 있는 부처님을 많이 만납니다. 그 설명문은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정호승 시인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라는 시집 속 소년부처라는 시를 전시 설명문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라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두상을 얻고, 얹은 이는 부처가 되니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관람객들은 눈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국립전주박물관에도 고려시대 정읍 무성리에서 출토된 목 없는 키 큰 미륵님이 서 계십니다. 목 없는 부처께 머리를 만들어 주고, 누구나 부처가 되어 보게 하여 주고 싶었습니다. 부처님과 사진 찍으면 누구나 부처님 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필자가 읽기도 어려운 설명문은 있지만.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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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5 17:0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그림 속 매화의 묵향

매화 그림을 자주 그렸던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 그림이 더 좋다고 한 바 있다. 人道眞梅好 사람들은 진짜 매화가 좋다 하지만 吾憐畫更好 나는 매화 그림 더욱 좋아하네 高標看其潔 세속 높이 초월함 이미 조촐하며 未有減容時 용모 감쇠하는 때도 없어라 매화 그림은 실물 매화의 형사形寫를 넘어서서 전신傳神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먹을 찍어 그은 붓끝에서 묵향이 더해져, 그림은 매화의 고결한 자태를 포착하는 동시에, 이미 형태를 넘어선 정신적인 가치를 전한다. 또한, 호남삼걸湖南三傑로 일컬어지는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와 석정 이정직이 나눈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대 그림을 본 적 있으시오? 가장 뛰어난 것은 뜻을 그려 신을 전한 것이요[寫意而傳神], 그 다음은 형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사형寫形]입니다. 꽃과 새를 예로 들자면, 꽃받침, 꽃봉오리, 꽃, 꽃술, 새의 부리, 눈, 깃털, 발톱 등을 꼭 닮도록 그리는 것입니다.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지고 능숙하고 또 묘해진 이후에야 형사를 벗어나 그 뜻을 그리고 정신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정교한 표현으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서서, 그동안 공부해 온 학습량과 내공을 통해 필력이 충분히 무르익은 후에야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얼마나 무르익어야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이정직이 그린 매화 그림은 똑같은 매화가 하나도 없다. 화면 구성을 자유자재로 하였고, 그렇게 매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통해, 매화의 본질과 의미를 찾고자 누구보다 노력했음을 알게 해 준다. 홍매紅梅와 백매白梅를 아래위로 배치하고 빈 공간에 시를 곁들인 이종석 소장 <묵매도>에서는 화면 구성의 묘를 볼 수 있으며, 국립전주박물관 <서화첩>에 실린 14점의 매화도에서는 다채로운 매화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매진했던 이정직의 노력을 읽어낼 수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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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8 18:54

‘완주 생강 전통농업시스템’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

완주 생강 전통농업 시스템이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전북도는 완주 생강 전통농업 시스템이 지난 12일 진행된 농식품부의 심의를 거쳐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국가중요농업유산은 농업인이 해당 지역에서 환경사회풍습 등에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형성 시켜 온 유형무형의 농업자원 중에서 보전전승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농업유산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2013년부터 지정해 오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12개의 유산이 지정돼 있다. 이번에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로 역사적 사료에 의한 완주지역 토종생강 생산기록과 온돌식 토굴 저장방식이라는 완주지역만의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온돌식 토굴 저장방식은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방식으로, 세계농업유산에도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이번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으로 국비 14억 원이 지원되며, 전북도와 완주군에서는 유산의 체계적인 정비를 통해 관광 자원화하고, 완주생강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농가 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최재용 전북도 농축수산식품국장은 중장기적 준비를 통해 세계농업유산에도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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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19.11.13 19:08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석정 이정직의 서예 연구자세 '담계재현첩'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칸트와 베이컨 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했고, 이를 성리학과 비교 분석한 남다른 연구자였다. 조선말기의 유학자 이정직의 학문적 탐구는 성리학 뿐 아니라 서양학문과 철학, 그리고 천문, 지리, 의학의 범위를 넘어 넓고 깊게 펼쳐졌다. 독설가로 유명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학문적 동반자이자 마음의 친구로 이정직을 존경했고 모르는 것이 없고 통달하지 않은 바 없는 희귀한 인재로 찬사했다. 이정직은 따뜻한 인품을 지녔고, 세속의 영달에 매달리지 않았던 고고한 선비였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던 그는 놀랍게도 홀로 학문적 경지를 이룬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가르칠 스승이 주변에 없을 정도로 학문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그의 가난한 환경으로 더 높은 사승관계 맺을 수 없었다. 이정직의 스승은 바로 고인古人이었다. 끊임없이 고인의 학문을 연마하며 그는 이를 자신의 것로 쌓아갔다. 이정직은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임서臨書를 매우 중시했다. 고인의 서법의 특징과 서풍을 파악하는 서예 연마와 연구 방식인 임서를 행함에 있어, 그는 말미에 반드시 고인의 필적을 평가하고 연원과 가치 등을 세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서법을 파악하였다. 이정직이 옹방강翁方綱(1733-1818)의 글씨를 임서한 <담계재현첩覃溪再現帖>은 그의 서예 연구 자세를 잘 보여준다. 청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은 첩학帖學과 비학碑學 두 영역을 모두 아울렀던 대가로, 고법古法의 법도를 글씨에서 실천하고자 평생을 노력하였다. 김정희金正喜와 신위申緯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정직은 옹방강 서예에 대한 관심을 임서로써 남겼다. <담계재현첩>에서 주목할 것은 이정직의 발문이다. 여기에 그의 서예 연구 자세가 담겼다. 자하 신위의 글씨는 석암石菴 유용劉墉과 담계覃溪 옹방강으로부터 왔는데, 석암은 전적으로 종요鍾繇를 배웠고, 담계는 구양순에게서 득력得力하고, 미불과 동기창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두 분의 묵법墨法은 모두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귀숙처歸宿處로 삼았다. 고인古人의 글씨를 임서할 땐 마땅히 먼저 그 글씨의 유래를 알아야 바야흐로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박성원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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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1 17:03

남원 청계 고분군, 호남 최고·최대 가야 고총 확인

남원 청계리 청계 고분군이 호남지역 최고(最古)최대(最大) 가야 고총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소장 오춘영)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임승경)는 남원 청계리 청계 고분군 발굴조사를 통해 청계 고분군이 현재까지 호남 지역에서 발굴된 가야계 고총 중에서 가장 이르고, 가장 규모가 큰 고총임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이번 발굴조사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인 가야문화권 조사연구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가야계 고분군이 밀집한 곳에 자리한 남원 청계리 고분군의 성격을 밝히고 보존활용 방안 마련을 위해 지난 5월부터 정밀발굴조사를 벌였다. 연구소 측은 이번 조사에서 또 호남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수레바퀴 장식 토기 조각을 비롯한 다수의 함안 아라가야계 토기, 호남 지역 가야 고총에서 최초로 확인된 왜계 나무 빗(수즐) 등 남원 아영분지 일대 고대 정치조직의 실체와 변화상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청계리 고분군은 남원 아영분지 일대의 최대 고분군인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사적 제542호), 남원 월산리 고분군(전라북도기념물 제138호)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이번 출토 유물로 보아 남원 월산리 고분군이나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에 비해 빠른 5세기 전반으로 추정했다. 규모는 남아있는 봉분을 기준으로 길이 약 31m(도랑 포함 34m 내외), 너비 약 20m, 남아있는 높이는 5m 내외로 현재까지 발굴된 호남 지역 가야계 고총 중에서 가장 큰 크기다. 양 연구소는 청계리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로 보존관리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안을 마련해 호남지역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이용수
  • 2019.11.06 18:30

전주 어진박물관 “태조어진 진본 보러오세요”

전주 어진박물관(관장 이동희)이 개관 9주년을 맞아 태조 어진(국보 317호) 진본을 5일부터 27일까지 특별 공개한다. 전주 경기전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어진박물관은 평소 태조어진 모사본을 전시하지만, 매년 개관일인 11월 6일에 맞춰 진본을 전시하고 있다. 경기전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으로 이를 기념해 조선 건국 후 1410년(태종 10)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태조어진을 봉안했다. 이후 1872년 구본이 낡자 세초매안하고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태조어진 진본과 함께 일월오봉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4호)와 의장물인 용선봉선도 함께 전시한다. 태조어진 뒤에 펼쳐져 있던 일월오봉도 병풍은 1872년 태조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할 때 제작 한 것으로, 다른 일월오봉도와 달리 특이하게 산 양편에 폭포 그림이 없다. 어진 뒤에 펼쳐진 일월오봉 병풍은 경기전의 것이 유일하다. 용선봉선은 각각 양면에 황룡과 봉황이 그려져 있다. 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의식구로 태조어진 거둥때 의장대들이 들고 따랐으며, 평상시에는 경기전 정전 내에 도열해 두었다. 경기전 용선 봉선은 조선왕실의 의식구로 유일하게 남아있어 가치가 높다. 관람 문의는 063-231-0190.

  • 문화재·학술
  • 이용수
  • 2019.11.04 17:43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석정집’, 전북 지역민이 마음 모아 간행하다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니, 재예인들 어찌 부족하랴. 보면 곧 깨달아 막히지 않고 원활하여라. 세간 명리에 벗어나고 얽매임 싫어하는 성품이셨다. 처세는 그 나름의 방법이 있어 세속에 뒤섞이지 않고 여유로우셨네. 어린아이, 아낙네도 좋아하였고 평이한 마음, 모나지 않았다. - <裕齋集>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제자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이 스승 이정직이 돌아가신 후 남긴 시이다. 제자 송기면이 회고한 스승의 모습처럼 이정직은 명리名利를 따지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아우르고 보살피는 마을의 지도자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한 여러 예술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곤 했다. 하지만 이정직은 고법古法(옛 사람의 높은 법)을 배우고 옛 스승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할 뿐,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다. 1894년 5월부터 세상을 떠난 1910년 11월까지 이정직은 김제에서 저술 활동에 전념했고, 산문 273편과 시 927제題 1279수를 남겼다. 이정직은 생전에 자신의 글을 <연석산방미정문고燕石山房未定文藁>,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등으로 정리했다. 산문은 세상의 이치를 논증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내용을 담은 논변체論辯體 산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정직은 진실한 마음을 담백하고 쉬운 시어로 표현한 시를 좋은 시로 생각하고 그런 창작을 했다. 이정직의 소탈한 성품과 1910년 우리나라가 처했던 상황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문집을 간행할 수 없었다. 마을의 지도자였던 이정직의 저술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았고, 10여 년이 지난 1923년 드디어 <석정집石亭集>이 간행됐다. <석정집>에는 김영한金寗漢(1787~1950), 이건방李建芳(1861~1939)이 쓴 서문序文과 최보열崔輔烈(1847~1922)의 발문跋文이 있으며, 이정직의 오랜 벗 황현黃玹(1855~1910)이 1901년 이정직의 회갑을 맞이해 지은 경수석정선생육십일세서慶壽石亭先生六十一歲序를 서문으로 대신 싣고 있다. 이정직이 자신의 문집에 황현의 글을 받고 싶다는 스승의 평소의 희망을 제자들이 실현한 것이다. 송기면을 비롯한 <석정집>을 편집한 제자들이 이정직의 도학적道學的 측면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이기설理氣說, 태극설太極說과 같은 성리학적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석정집>은 문집 간행 이후에도 꾸준히 교정해 오자誤字를 찾아 문집에 정오표를 함께 수록하는 등 편집자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문집이다. 마을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생전의 이정직의 모습을 보여주듯 <석정집>은 제자와 지역사람들의 힘을 모아 간행됐고, 마지막 부분에는 간행에 참여한 80여 명의 제자와 지역 유지의 이름을 담고 있는 뜻깊은 책이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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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4 17:37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전주성(全州城) 기와

우리 전주 시민들은 전주(全州)라는 도시의 기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았음직하다. 일반적으로 어떤 지명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면 우선 찾는 게 기록이다. 전주의 출발은 완전하다 온전하다와 뜻이 통하는 완산(完山)에서 비롯되는데 아마도 고구려 보장왕 9년(650) 승려 보덕이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완산이지 않았을까. 이후 신라는 일련의 통일전쟁 상황이 정리가 되고 신문왕 5년(685) 지금의 전주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체제를 완비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는 중국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주군현 명칭을 한자로 바꾸는 조치로 완산주를 전주(全州)로 개명하였다. 전주성(全州城)은 어떠할까. 전주에 있는 성이라는 의미일 게다. 기록으로는 고려 명종 12년(1182) 전주사록 진대유(陳大有)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폐성고수(閉城固守)와 고종 40년(1153) 8월 몽고병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전주성(全州城)과 반석역(半石驛)은 내용상 전라감영의 고지인 고려시대의 전주성에 가깝다. 그런데 전주성의 또 다른 실체가 있다. 사진에 보이는 동고산성에서 발굴된 전주성(全州城)명 막새들이다. 가운데에 全州城의 명문과 양쪽에는 무사무늬가 있는 암막새 1점, 양쪽에 새 무늬가 있는 암막새 2점, 명문과 연꽃무늬가 있는 수막새 7점이다. 모두 동고산성 주건물지 출토품이다. 이 기와들은 견훤(甄萱) 백제의 전주성을 보여주는 실물이다. 예로부터 막새는 궁궐이나 사찰, 관청의 지붕에 올리는 건축 부재로 건물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22칸, 측면 4칸으로 정면과 양 측면에는 회랑도를 두었다. 건물터는 길이 84.2m, 너비 14.1m로 평면 형태와 초석의 배치상태로 본다면 2층 이상의 외관을 가진 건물로 추정되며 단일 건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 당시 조사자는 왕궁의 정전과 같은 건물로 보았는데 동고산성이 견훤궁터로 전해진다는 1688년 「성황사중창기」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만 도심과 다소 떨어진 현실적인 점을 고려할 때 평지 전주도성의 배후산성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전주의 지명이 8세기 중반부터 사용되어 동고산성의 전주성 기와가 보다 이른 시기일 가능성도 있으나 동고산성에서 조사된 11개의 건물지와 성문지의 개축이 대부분 9세기말 ~ 10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또한 견훤의 전주성 쪽으로 더 기운다. 결론적으로 전주성(全州城)은 2곳이지 않았을까. /최흥선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문화재·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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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8 17:06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대나무 그림 속에서 선비 정신을 읽다

6폭에 걸쳐 대나무를 그리고, 마지막 폭 끝에 1909년 정월 초사흘에 호서실好書室에서 그렸다고 적었다. 1909년은 69세 이정직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이고, 호서실은 책을 좋아하는 방이라는 뜻의 서재 이름이다. 6폭의 병풍은 3개의 종이를 이어 160.032.0cm의 화면을 만들고 그 안에 대나무를 담았다. 병풍 상태로 보면 2미터를 넘는 대작大作이다. 화폭 속 대나무는 비가 온 뒤 대나무, 우죽雨竹에서부터 새로 돋아나는 신죽新竹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자세도 다양하다. 댓잎은 위로 뻗기도 하고, 아래로 쳐지기도 하며, 하나하나에 날카로운 필력의 내공이 담겨져 있다. 또한 농묵으로 그린 댓잎과 담묵의 댓잎이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살려주고 있다. 자연 속 실제 대나무는 보통 숲을 이루는데 그림 속 대나무는 한두 그루씩 쓸쓸하게 그려진다. 댓잎도 소략하다. 숲을 이룰 때보다 한두 그루씩 홀로 서 있는 모습은, 묵향墨香을 머금고 멋스러운 느낌을 준다. 여백에는 중국 당시唐詩 가운데 대나무를 노래한 시를 골라 적었는데, 그림의 전체 윤곽을 따라가며 글의 시작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냈다. 이정직은 「종죽기種竹記」에서 국화, 파초와 함께 대나무를 직접 재배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효용성을 논한 바 있다. 6폭 병풍에서 대나무 그림 옆에 곁들인 중국 시를 보면, 어울리는 시를 잘 찾아 매칭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직접 대나무를 노래한 시 또한 문집에 많이 전하고 있어, 이정직이 그만큼 시문학에 조예가 깊었음도 알 수 있다. 이정직에게 글을 받으러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고, 제자가 되고자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고법古法에서 발견하고 철저한 학습과 끊임없는 탐구로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갔다. 6폭의 대나무 그림에서는 그러한 꼿꼿하고 철저한 선비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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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1 17:5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청자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 시대의 대문인이었다. 그의 본관은 황려, 호는 백운거사이며,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선생으로 불렸다. 그는 글과 시에 대한 재주가 탁월하였고, 늘 술과 시를 오락 삼아 침상에 누어서도 시를 끊임없이 읊었다고 한다. 문집으로는 『동국이상국집』이 남아 있다. 그가 쓴 시 가운데 청자술잔에 관한 시가 있다. 청자술잔을 예찬하며 그로 인해 술에 탐취貪醉하는 내용이다. 그의 호를 떠올려보면 이런 소재로 시를 썼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청자 제작 과정과 청자의 특성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를 짓게 된 계기는 김군金君이 녹색 자기[綠甆] 술잔을 두고 시를 지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자술잔을 함께 완상할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시상詩想은 청자의 제작으로 시작하여, 청자의 특성, 솜씨와 문양 예찬으로 이어졌다가 술잔으로 인한 술의 탐취로 끝을 맺는다. 앞의 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남산에서 많은 나무를 베어[落木童南山] 연기가 해를 가릴 정도로 가마에 불을 지펴서[放火烟蔽日] 청자를 구워내었다[陶出綠瓷杯]. 많은 땔나무가 필요한 것은 청자는 이전 도기와 달리 1100-1200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내기 때문이다. 또한 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다[揀選十取一]고 할 정도로 질 좋은 청자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청자술잔은 선명하게 벽옥빛이 나고[瑩然碧玉光], 영롱하기가 수정과 같으며[玲瓏肖水精], 단단하기가 돌과 맞먹는다[堅硬敵山骨]고 하였다. 이 시구들보다 청자의 특성을 더 정확히 간파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청자색은 옥에서 유래하였다. 이 선명한 벽옥색을 고려인들은 보통 비색翡色이라 불렀다. 수정과 같은 영롱함은 유약이 유리질화 된 자기표면을 가리키고, 돌 같은 단단함은 강한 경도를 말한다. 이 같은 유약 상태와 경도는 높은 기술력으로 제작되는 자기의 특성이다. 또한 술잔을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려 왔고 [酒知埏塡功 似借天工術], 가늘게 꽃무늬를 놓았는데[微微點花紋] 묘하게 화가의 솜씨와 같다[妙逼丹靑筆]고 하였다. 아! 고려 시인 이규보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찬탄한 청자술잔은 어떤 것일까? 아쉽게도 시를 짓게 한 그 술잔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예찬했을 법한 종류의 청자술잔(혹은 찻잔)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이 국립전주박물관 미술실에 오셔서 이런 청자술잔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김현정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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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4 17:01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붓끝으로 이룬 천지조화, 이정직 ‘서화첩’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감히 고인古人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스스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세상에 쓰이지 못해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과 시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운명과 시대 역시 내게 주어진 소명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니, 하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에 대한 답을 할 뿐입니다. - 이정직이 황현에게 보내는 글에서 타고난 남다른 재능과 후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1-1910)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고, 그래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지도 못했다. 그를 알아봐 주고 끌어줄 스승도 없었고, 그에게 그림과 글씨는 스승이자 친구이자 모든 것이었다. 고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힘쓰는 것. 그것을 하늘이 내린 소명으로 삼는다는 말은, 그의 인생을 돌아볼 때 가슴 한 켠에 진한 울림을 준다.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1894년, 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그는 54세의 나이에 전 재산과 저작을 잃었다. 그러한 좌절을 딛고 김제로 돌아와 세상을 떠난 1910년까지 약 15년 동안 저술에 힘쓰고 서화에 매진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옷을 걷어 부치고 제자가 되고자 찾아왔다. 계단에는 신발이 그득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그림과 글씨, 시와 저술들이 그를 지탱해주었을 것이다. 이정직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 그림이 더 좋다고 한 바 있다. 매화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여 그림으로 그려졌지만,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묵향墨香을 머금고 자연 속 매화보다 훨씬 더 멋스럽다. 총 8책(314면)으로 이루어진 <서화첩>에는 모란, 연꽃, 수국, 포도, 매 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 등이 담겨 있다. 그의 그림들은 화면 속에서 먹과 필법, 여백을 활용하여 천지조화를 이루며 잔잔한 묵향墨香을 전해준다. /민길홍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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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7 17:40

가야 수장층 무덤떼 추정 ‘장수 동촌리 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

전북지역 가야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로 알려진 장수 동촌리 고분군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장수군 장수읍 마봉산(해발 723.9m) 산줄기에 조성된 고대 고분 83기를 묶은 장수 동촌리 고분군을 사적 제552호로 지정했다고 1일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 고분군을 5세기 초~6세기 초 무렵 가야에 의해 만들어진 장수지역 가야계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도 편자, 재갈, 둥근고리 자루칼, 은제 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가야계 수장층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종류와 유사하다. 동촌리 고분군의 가야계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에서는 가야계 토기와 백제계 토기가 함께 발견됨으로써 동촌리 고분군이 가야와 백제의 역학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장수군은 오는 4일 오전 10시 장수군 한누리전당에서 동촌리 고분군이 군 최초로 사적에 지정된 것을 축하하는 기념행사를 연다. 이 행사에는 문화재청장, 전북도지사,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해 전북에서 최초 건립된 가야홍보관 개관식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황철호 전북도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장수 지역에 가야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이라며 동촌리 고분군이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전북지역 가야사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북도는 향후 장수가야 유적정비 사업에 지속적 노력을 기울여 장수 백화산고분군(장수 삼봉리호덕리 고분군)과 침령산성의 국가사적 지정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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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경
  • 2019.10.01 19:52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완주 상림리 출토 동주식동검(東周式銅劍)

2013년 2월 전주 중동, 전주완주 혁신도시 개발사업으로 한창 공사 중이던 예전의 완주군 이서면 상림리 206-1번지 일대를 답사하였다. 이곳은 1975년 11월 25일에 26점의 중국식 청동검이 발견된 장소다. 중국식동검은 그동안 알려져 왔던 요령식동검이나 한국식동검과는 형태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발견 당시부터 주목되었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후 일대는 사라졌고, 2014년 12월 2일부터 2015년 1월 25일까지 완주 상림리 청동검 테마전이, 2014년 12월 5일에는 완주 상림리 청동검의 재조명 학술대회가 열렸다. 40년 만에 보다 진전된 자료수집과 연구가 종합된 장이었다. 상림리 동검에 대한 연구는 수집 당시 전주시립박물관장이었던 故전영래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와 당시에는 비교자료가 많지 않아 그 중요성이나 의의가 다소 약하게 전달되었다. 중국식동검은 자루와 몸체를 한 번에 주조한 형태로 일명 도씨검桃氏劍으로 불리며 최근 동주시대(기원전 770~221)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동주식동검이라 부른다. 이 동검은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출현하여 전국시대에 완성되었다. 또한 중국의 중심 분포 지역인 중원지역 이외에 중국 동북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 한반도에서의 출현은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중국에서는 동검이 단절되고 철검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던 시기이다. 따라서 한반도 유입품은 무기로서의 실용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항상 대두되었다. 완주 상림리 동검 또한 특별한 매장 시설 없이 일괄로 26점이 발견된 것을 볼 때 358점의 중세형동검이 발견된 일본의 시네마현 고진다니 유적이나 15점의 요녕식동검이 발견된 여순의 노철산 곽가둔 유적과 유사하게 의례적인 목적을 위한 매납 유구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시를 위한 본격적인 분석에서 동검의 세부적인 형태나 사용흔, 무게, 성분, 주조 상태가 서로 달라 26점이 모두 처음부터 매납을 위해 비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제작방법이나 과학적 분석 결과를 볼 때 제작에서 사용, 폐기까지의 서로 다른 과정을 겪은 동검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주석의 함유량이 낮아 경도가 떨어져 비실용적인 것이 많고 납 원료의 산지가 대부분 한반도로 추정되어 중국의 동검을 모방한 방제품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2천 년 전 완주에서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아울러 최근 보물로 지정된 완주 갈동 유적 청동거울이나 청동검 거푸집을 볼 때 당시 최신의 기술이 모인 곳이 완주였다. /최흥선 학예연구실장 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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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30 17:20

전북의 자산 ‘도 무형문화재’ 원형보전 위한 기록화 연구 ‘속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원형보전을 위한 기록화 연구 기록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전북도 문화유산과가 26일 오전 전북도청 공연장 2층 세미나실에서 영상 시연회를 열고 사업추진 방향을 밝혔다. 이날 시연회에서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40호이자 성금연류 가야금산조 보유자 지성자에 대한 영상을 상영한 후 예능분야 책임연구원인 송영국 백제예술대 교수가 원형보전사업과 타 학술연구용역 사업의 차별성과 연구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사업은 전북지역 무형문화재의 전승기록에 대한 원형을 보유자 중심으로 현장 채록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중심의 역사쓰기에서 소외된 전북무형문화재의 역사적 재현을 위해 전승자들의 기예와 예술활동을 구술채록으로 남기겠다는 게 사업의 골자다. 이에 기존의 무형유산 기록사업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원형과 전형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에 방점을 찍고, 조사대상 종목에 대한 현장실태를 기록하는 것은 물론 보유자의 기예능을 초기 단계부터 완성단계까지 밀착 조사하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기록대상 보유 종목에 대한 영상 기록은 지정종목에 대한 원형영상자료 복원부터 보유자의 실현과정 전체를 기록하는 것은 물론, 구술조사에서도 인생사가 아닌 예술구술방법론을 개발해 활용할 방침이다. 지성자 보유자는 오늘날 아이들은 소리를 직접 듣기 보다는 악보를 보고 국악을 공부하다보니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며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국악을 이어받아 하고 있는만큼 후손에 우리 소리를 제대로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말로 기록화 연구에 참여하는 소감을 대신했다. 한편, 원형보전 기록화 연구사업의 대상은 △판소리 이용길 △가야금산조 지성자 △한지발장 유배근 △거문고 최동식 등 모두 4명이다. 지난달 착수한 이 사업은 구술채록과 촬영본에 대한 편집 및 자문회의 과정을 거쳐 오는 12월 중순께 최종보고회를 가질 예정이다. 전북도 문화유산과 관계자는 "문화다양성의 시대에서 전통음악이 현대사회의 문화와 융합하는 순간을 전승자 구술채록과 악보로 기록하는 것은 역사적 재현에 있어서 유의미한 일"이라며 "보전 가치가 있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의 전통예술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전승자들의 기예와 예술활동을 제대로 기록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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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경
  • 2019.09.26 18:57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항아리

말린 구연과 수직의 목, 그리고 둥근 어깨에서 사선으로 내려가면서 몸체를 이룬 듬직하고 넉넉한 분청사기항아리이다. 고창 용산리에서 출토되었다. 몸체 전면을 백토로 분장한 후 겹선으로 둘러 3단 문양대를 구성하였다. 목 아래부터 어깨까지 겹연판문대와 초화문대를 차례로 돌렸고, 그 아래에 활달한 필치로 물고기들을 표현하였다. 물고기들은 등지느러미를 활짝 펴고 연이어 헤엄치는 모습이다. 한 물고기는 기쁜 듯 새우를 입에 물었다. 연꽃 아래로 수초가 있는 물속에 물고기가 노니는 장면을 3단 문양대로 간략화한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무늬는 조선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공예품에서도 많이 사랑받는 길상적 소재였다. 물고기무늬는 물고기를 뜻하는 어魚가 여유 있다는 뜻의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서 풍요로움과 여유를 뜻한다. 이와 함께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다산과 자손번창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꽃과 물고기가 결합하면 해마다 풍족하고 여유 있으라는 연연유여年年有餘의 의미가 된다. 연꽃의 연蓮과 해의 연年이 발음이 같고, 어魚는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서이다. 새우를 뜻하는 하蝦는 하賀와 음이 같아서 축하, 경사스러운 일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이 분청사기항아리는 듬직하고 넉넉한 모양새나 장식된 무늬처럼 항상 풍요롭고 여유로우며 경사가 있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바람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어떻게 풍요와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 가만히 항아리 속을 들여다본다. 여기를 가득 채우기도 해야 하지만 깨끗이 비우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순간 항아리 속 물고기가 춤을 춘다. /김현정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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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23 17:28

익산 쌍릉 소왕릉에서 문자 없는 묘표석 2점 발견

백제 무왕(재위 600641)에 얽힌 고대 설화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는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소왕릉에서 문자를 새기지 않은 길이 1m가 넘는 묘표석(墓表石) 2점이 발견됐다. 백제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되는 두 유물은 각각 석실 앞과 봉분에서 나타났고, 모양새는 전혀 달랐으며 묘표석에는 명문(銘文금석에 새긴 글자)이 없었다. 하지만 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릉에서 인골이 담긴 상자가 나온 것과 달리 소왕릉에서는 피장자를 추정할 만한 단서가 확인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과 익산시(시장 정헌율),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는 20일 오후 2시 국내에 전례가 없는 이번 무자비(無字碑) 형태의 묘표석 두 점 발견과 관련해 발굴현장 공개 및 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왕릉급 고분에서 국내 최초로 이번에 발견된 두 종류의 묘표석은 석비(石碑)형과 석주(石柱)형이다. 석비형은 일반적인 비석과 유사한 형태로 석실 입구에서 약 1미터 떨어진 지점에 약간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로 발견됐다. 크기는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이며, 석실을 향하고 있는 전면에는 매우 정교하게 가공되었고, 그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다. 석주형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봉토 내에서 뉘어진 상태로 발견되어 원래 위치인지는 불분명하다. 길이 110㎝, 너비 56㎝의 기둥모양으로 상부는 둥글게 가공되었고, 몸체는 둥근 사각형 형태다. 이들 두 묘표석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자가 없는 무자비 형태다는 것이다. 참고로 석주형 묘표석과 비슷한 예는 중국 만주 집안(集安) 지역의 태왕릉 부근에 있는 고구려 봉토석실분인 우산하(禹山下) 1080호의 봉토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발굴조사단은 이번에 소왕릉 규모와 축조 기법도 파악했다. 봉분은 지름 12m높이 2.7m이며,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시루떡처럼 번갈아 쌓아 올린 판축기법을 사용했다. 이같은 기법은 지난해 조사한 대왕릉에서도 확인됐다. 구조는 백제 사비도읍기(538660)의 전형적인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으로, 석실 단면은 육각형이다. 석실 길이는 340㎝폭 128㎝높이 176㎝로, 대왕릉과 비교하면 길이너비높이가 모두 약 50㎝씩 짧다. 다만 측벽 2매, 바닥석 3매, 덮개돌 2매, 후벽 1매, 고임석 1매 구조 짜임새와 석재를 치밀하게 가공한 점은 대왕릉과 동일하며, 석실 중앙에 관대(棺臺관을 얹어놓는 넓은 받침)를 둔 점도 같다. 관대는 길이 242㎝폭 62㎝높이 18㎝로 대왕릉보다 작다. 석실 천장 고임석에서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든 길이 68㎝높이 45㎝인 도굴 구덩이가 나왔다. 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에 이르는 연도(羨道)는 짧은 편이며, 폐쇄석은 대왕릉처럼 두 겹으로 설치했다. 남쪽으로 뻗은 무덤길인 묘도(墓道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는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로 조사됐다. 현재까지 드러난 묘도 길이는 약 10m다. 연구소 최 소장은 묘도는 흙을 쌓은 뒤 되파기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묘도부 끝부분에는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다듬은 석재를 반원형으로 두른 듯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발굴조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큰 관심을 끈 피장자 추정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대왕릉 조사에서는 관대 위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됐고, 사망 시점이 620659년이고 60대 남성의 뼈라는 분석 결과가 알려지면서 641년 세상을 떠난 무왕 무덤이라는 견해에 힘이 실렸다. 최 소장은 소왕릉 주인이 선화공주인지,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에 등장하는 사택적덕 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익산 쌍릉은 거리 180m 사이에 두고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성됐는데 대왕릉은 익산에 미륵사라는 거대한 사찰을 세운 무왕, 소왕릉은 무왕 비인 선화공주가 각각 묻혔다고 알려졌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19.09.19 16:19

[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용비어천가

지금 방탄소년단이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사로잡는다면,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자 했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음악을 역할을 중요시했다. 노래가사에 반영된 백성들의 마음과 사회의 모습을 알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을 수집하여 민심民心을 살폈고, 정치적 소문을 노래 가사로 지어 퍼트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愛國歌를 들으며 마음을 굳게 다잡은 것, 현재 월드컵, 올림픽 등을 보며 응원가를 부르며 하나가 되고, 애국가를 들으며 숙연해지는 것도 노래가 가진 힘 덕분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농업서인 농사직설農事直設, 우리나라의 하늘에 맞는 시간과 달력을 담은 역법서 칠정산七政算, 우리나라 약재 정보를 담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을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업적은 남겼다. 세종대왕의 눈부신 업적 중에서도 가장 비밀리에 진행되고 조심스러웠던 프로젝트가 우리말,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당시 세종대왕은 두 가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을 설득하는 것과 조선이 고려를 뒤엎고 세운 나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조선 왕조의 창업을 칭송한 노래인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쓰는 것을 선택했다. 왕이 되어 날아올라(龍飛) 하늘의 명에 따른다(御天)는 용비어천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대왕은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분명하게 하면서 조선 건국이 정당하다는 내용은 노래 가사에 가득 담아두었다. 백성들은 한글가사로 용비어천가 음악을 들으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학자들은 신성한 내용을 담아 백성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훈민정음의 반포를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였다. 6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육룡이 나르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등의 용비어천가 속의 내용이 방송에도 사용되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세종대왕의 음악을 활용한 전략이 잘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조선은 국가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고, 한글은 생명력을 얻어 우리의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국립전주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실에서 훈민정음으로 지은 첫 번째 작품이자 세종대왕의 깊은 고민이 담긴 용비어천가를 만날 수 있다. /이기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9.09.16 18:35

‘왕의 고장 전북’, 지역문화재 도민 속으로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조선 태조어진과 익산 왕궁리유적 등이 문화콘텐츠로 활용된다. 문화재청은 2020년 지역문화재 활용 사업으로 문화재 야행, 생생문화재 등 총 386선을 선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사업은 지역에 있는 문화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개발해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고 지역경제 활성화 및 고용 창출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전북지역에선 생생문화재 분야로 조선 태조어진경기전(풍패지향 전주, 태조어진을 뫼시다), 익산 쌍릉미륵사지왕궁리유적(백제왕도 익산여행), 정읍 황토현 전적전봉준 유적(다시 피는 녹두꽃), 남원 황산대첩비지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운봉고원 왕조를 깨우다) 등 총 13개 사업이 선정됐다. 문화재야행에선 전주군산익산지역이 뽑혔다. 전통산사 부문에선 군산 동국사, 남원 실상사, 김제 금산사, 완주 송광사, 고창 선운사 등 5곳이 포함됐다. 향교서원으로는 전주향교와 정읍 무성서원, 고택종갓집 활용 부문에선 김명관 고택, 몽심재, 이웅재 고가가 선정됐다. 지역문화재 활용사업은 국민의 문화재 향유 기회 확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상당 부분 이바지해왔다. 2018년 사업별 점검 결과, 전국의 문화재야행 프로그램에 약 303만명의 관람객이 참여한 것으로 조사됐다. 생산 유발과 부가가치 등 경제적 파급 효과는 총 2061억원에 달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유산이 핵심 관광자원으로 지역의 문화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맞춤형 활용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명국
  • 2019.09.15 17:38

‘전북의 선비’ 석정 이정직의 학문과 예술세계 엿보다

천문, 지리, 의학, 수학, 서화 등 다양한 분야에 두루 통달한 유학자, 석정 이정직. 그를 가리키는 여러 수식어 중 통유(通儒)는 다방면에 능통했던 그의 인재상을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천 황현은 이정직을 두고 시, 문, 서화, 천문역법, 음악, 산수,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사농공상 및 언변까지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통달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니, 앞으로 이삼백년 사이에 없을 희귀한 인재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학문과 예술로 후학을 기르는 한편, 배려와 나눔을 몸소 실천했던 조선시대 선비 이정직의 면모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천진기, 이하 박물관)이 10일부터 오는 11월 24일까지 박물관 내 시민갤러리에서 선비, 전북 서화계를 이끌다라는 주제로 석정 이정직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전북지역의 선비 이정직의 예술 활동을 돌아보고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글씨와 회화, 그리고 후학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는 △첩학 연구의 대가 △조선의 마지막 시서화삼절 △지속되는 서화의 맥 등 3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조선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전통을 배우고 익혀 후학에게 전했던 법첩 연구의 1인자로서의 면모를 조명한다. 일찍이 이정직은 중국 서예의 맥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그는 중국과 조선의 명필가가 쓴 글씨를 수없이 임서하면서 골자를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2부는 조선의 마지막 시서화삼절로서 일구어간 회화작품을 살펴본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괴이한 바위를 주로 그린 이정직은 필력과 상징성이 담긴 깊은 내공의 문인화를 남겼다.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의 느낌이 그림으로 이어지니, 이러한 경지를 두고 서화일치라고 불렀다. 3부에서는 조선에서 근대로 지속되는 서화의 맥을 알아본다. 이정직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사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국적으로 성장했는데, 이들은 스승과 함께 호남 서단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학문과 예술의 근대를 이끌었다. 김제를 기반으로 서예와 회화의 맥을 잇고, 호남 유학을 계승했던 후학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민길홍 학예연구사는 이정직은 무척 가난했고 스승이 없었지만 홀로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익혀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며 이정직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인재가 김제로 모였고, 후학들은 스승 이정직이 보여준 학문과 예술을 따라 전북에서 근대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10월 11일과 12일에는 이번 특별전과 연계한 학술강연회가 열린다. 11일 구사회 선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근대 계몽기 석정 이정직의 수학과정과 학예관을, 유순영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전북의 선비, 석정 이정직의 회화를 주제로 강연한다. 12일에는 진준현 전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석정 이정직의 서화론을 설명하고 이어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이 첩학의 대가로서의 이정직을 재조명한다.

  • 문화재·학술
  • 김태경
  • 2019.09.09 17:54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