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리뷰] 전북의 얼굴을 바꿔준 ‘일 트로바토레’에 경의를
나는 참 많은 오페라를 봤는데 아쉽게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포괄적의미의 균형감이다. 오페라는 그 자체로 종합예술이듯이 예술행위의 모든 장르가 다 망라되어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이다. 무대공학에서, 성악, 관현악, 합창에 이르기까지와 무대외적인 것들 즉 연출에서 비롯되는 무대나, 미술, 발레, 의상, 조명 그리고 성악가들도 주역에서 조역, 단역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수준으로 같이 움직이는 일체감의 결정체인 균형감 말이다. 이런 오페라 공연을 만난다는 것은 일생에 한, 두번 있는 행운일 것이다. 그런데 그 행운을 11월 첫날에 얻었다.
11월 1일부터 3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호남오페라단의 <일 트로바토레> 공연이 있었다. 바로 이 오페라가 그런 종합적인 균형감을 보여준 것이다.
이태리지휘자 로렌조 카스트리오타가 지휘를 맡았고, 연출은 마르코 푸치카테나, 오케스트라는 전주시립교향악단, 합창은 전주시립합창단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역들은 이태리 성악가로 첫날에는 레오노라에 레베카 로카, 만리코에 렌쪼 줄리안이 맡았고, 아주체나 최승현, 루나백작 장성일, 페란도 유준상, 이네스 공해미, 루이츠 김진우 등이 출연했다. 특별히 이 <일 트로바토레>에서 주시해야할 것이 주역 두 사람이 이태리 성악가들이었는데도 무대는 음악적 구성에서 완벽한 수준을 유지했고 두 명의 주역을 받쳐주는 우리 성악가들이 그들 못지않게 음악을 아주 알차고 확신 있게 보여주고 있는 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역이 주역, 조역이다 싶은 그런 느낌 같은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크고 작은 역들이 제자리에서 오페라의 일부로 꼭 맞게 돌아갔다. 누가 잘한다거나 못한다는 정의가 의미가 없어진 치차가 딱 맞춰 작동하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조화의 오페라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정말 이건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다.
베르디의 <일토레바토레>는 지금까지 나온 오페라 중 내용이 가장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할 수 있는 오페라다. 그 때문에 오페라를 공연해도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전체를 이해하고 본다는 것이 어렵고 무대 또한 복잡해 제작비를 들이고도 표가 안 나는, 성공이 어려운 오페라로 알려져 있다. 호남오페라단은 그 두 가지 난제를 너무 쉽게 풀어내고 있다.
첫 번째 놀란 것은 오페라의 스토리를 단번에 쏙 관중에게 알려준 페란도의 아리아 <옛날에 두 아들을 둔 행복한 아버지가 있었네>를 들으면서였다. 사건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청중에게 알려주었고, 그래서 청중은 전체를 다 알아버렸다. 이렇게 문제를 간단하게 풀고 시작하니 매듭 풀리듯 자연스럽게 오페라가 모든 청중의 귀에 쏙쏙 들어와 이해가 됐다.
만리코 역을 맡은 렌쪼 줄리안은 그의 역할이나 곡의 지배력에서 언제나 특별하게 눈에 띄는 테너다. 그는 이 작품을 너무 깊이 알고 편하게 몸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타며 공연했다. 동선이 자연스럽고 생활하듯 만리코를 살려냈다 할까? <나의 사랑이여 저 무서운 불길>에서는 극적인 표정과 기백을 보여준 열창, 그래서 노래와 그의 매력으로 각인됐다.
레오노라를 맡은 레베카 로카는 소리의 폭이나 양감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맑고 투명한 성질이 잘 다듬어져 있고 발성이 자연스러워 작으면서도 알차게 내용을 전달하는 특성이 있다. 그의 아리아를 들으면서 최고의 기술은 풍부한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진 목소리에 노래를 담아 청중에게 분명하게 전해주는 그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때그때의 격정을 노래에 담을 줄 알았고 색깔 있게 맛을 내 청중을 사로잡는데도 능했다. 잘 부른 아리아 <조용한 것은 밤이라네> <사랑아 장미빛 날개로 날아라> 등 안타까움 가득한 아리아가 일품이었다.
루나백작, 이 오페라에서 사실 가장 비극의 주인공이다. 루나역을 맡은 장성일은 부드럽고 거침없이 밀고가는 중량감이 있는 노래가 무기였다. 거기에 감정을 담아내 뚜렷하게 표현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비극의 사람으로 울부짖듯 부르는 창연은 굉장한 호연이었다.
아주체나 최승현, 그는 그런 체질이 처음부터 있어온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뽑아쓰듯 극의 흐름에 절박함과 원망과 아쉬움과 안타까움 등 그 모든 것을 더하는 갈등하는 영혼, 집시여인의 한으로 살았다. 그의 아주체나는 자연스러웠고, 그의 소리는 차분하고 촉촉하다. 그가 노래한 <불길은 치솟고>, <가난에 찌들어서> <아 잔인한 사람 이 쇠사슬을 느슨하게 해주오> 지하감옥에서의 노래 <오랫동안 우리를 감싸주던 우리들의 산으로>의 아리아는 그래서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페란도를 맡은 유준상은 곡의 성격을 극대화 시켜 폭넓은 뉘앙스와 뚜렷한 강약의 대조로 설득력 있고 호소력 있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오페라의 전체를 열어준 <두 아들을 둔 행복한 아버지가 있었네>가 백미(白眉). 아주체나가 백작의 아들을 훔쳐간 범인인 것을 알아보며 만리코가 잃어버린 그 아들인 것도 안 인물인 그는 얽혀버릴 수 있는 오페라를 정리해준 업적이 있다. 그의 소리는 분명하고 확신에 찼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노래로 앞으로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일 트로바토레>는 모든 출연자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들은 모두가 다 특별하게 잘했기 때문이다. 모두 한 몸이었고 그냥 일 트로바토레의 한 무리들이었다. 어떻게 이럴수 있을까? 오페라를 보는 내내 던지는 질문이다.
공동 연출자 두 사람이 모두 특별했다. 마르코 푸치 카테나와 조승철은 오페라 전체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완벽하게 이 오페라에 대한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오페라 수준으로 출연자 모두의 눈을 열어놓았다. 모든 연주자가 이 오페라를 통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것을 알게 했다. 그러자 모두 일 트로바토레에 도가 트인 작품 속 사람들이 돼 공연이 아니라 그들로 살았다. 너무 천진하고 자연스럽게 배역으로 변하니 모든 게 특별해졌다. 그리고 놀라운 세계적인 지휘자가 있었다.
오페라에서의 지휘자의 역할은 단순히 무대와의 음악적 교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로렌조 카스트라오타의 지휘는 오케스트라의 그냥 맥이었다. 관현악이 흐른다는 느낌이 아니었고 오페라에 스위치가 들어가자 맥이 뛰기 시작하고 생기가 살아나는 듯 음악이 탄생했다. 출연자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찾고 맞추고 하지 않았다. 음악이 흐르며 몸에 닿으면 몸속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어떤 높이의 노래들이 떠올라왔다. <이제 노름을 하세> <누가 집시들을 기쁘게 해주는가>의 합창이 드물게 빛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아리아로, 아리오소로, 2중창 3중창으로 얽히고 풀고 열리면서 숨쉴 수 없는 자연스러운 감동의 오페라가 완성됐다. 누가 다시 이런 미친 감동을 만들 수 있을까? 놀라운 감동으로 이 날을 진하게 가슴에 담았다.
<일 트로바토레>, 이런 공연 하나보면 생각이 바뀐다. 막을 내릴 때, 나는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주에서 뭘해 라고 나는 전주의 수준을 무시하고 왔었다. 그러나 지난해에 보았던 푸치니의 <토스카>와 금년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서 보여준 <달하, 비취시오라>에 이어 이 공연을 보고난 후 전주, 전라북도 참 굉장한 곳이구나, 라며 생각이 바뀌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전라도에는 거인이 산다. 작년 <토스카>공연에 이어 <일 트로바토레>에 호남오페라단에 경의를 표한다. /이남진 음악평론가(한국음악비평가협회뮤직리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