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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고사부리성, ‘상부상항’명 온전히 새겨진 첫 목제 유물 발견

정읍시 고부면 소재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井邑 古沙夫里城)에서 상부상항명이 온전하게 새겨진 첫 목제 유물이 발견됐다. 정읍시는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천선행)과 진행한 정읍 고사부리성 성벽에 대한 8차 정밀발굴조사를 지난달 완료했다고 12일 밝혔다.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井邑 古沙夫里城)은 행정구역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성황산(해발 133m) 정상부에 자리한다. 고사부리성은 백제 오방성(五方城) 중의 하나인 중방(中方) 성으로, 조선시대 영조 41년(1765년)까지 읍성으로 이용됐던 곳이다. 고사부리성은 성황산의 두 봉우리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 1050m, 장축 길이 418m, 단축 길이는 200m 내외다. 이번 발굴조사는 남성벽 내측 평탄지를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부에 해당한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 통일 신라시대, 조선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공간 이용의 변화상이 확인됐다. 특히 조사구역이 두 봉우리 사이 계곡부에 위치해 유수 퇴적층과 물을 이용하기 위한 저수시설 및 우물, 배수 시설(목제 배수로), 지반 보강 시설 등이 다수 확인됐다. 그 가운데 백제시대 층에 조성된 직사각형 모양의 구덩이(길이 640㎝, 잔존 너비 192㎝)는 내부가 오랜 기간 침수돼 얇은 점토층과 실트층이 반복적으로 쌓여있었다. 바닥에는 삿자리를 깔고, 양 가장자리에 구덩이의 길이 방향으로 한쪽에 결구를 위한 구멍을 뚫은 막대형 목재(길이 144148㎝, 두께 3.33.6㎝)를 한 쌍씩 나란히 붙여 설치한 것이 확인됐다. 막대형 목제 유물의 하나에서 상하 방향으로 새긴 상부상항명이 확인됐다. 상부와 상항은 백제의 수도를 편제한 오부(五部)오항(五巷) 중의 하나로, 기존 북문지 발굴조사(2005)에서도 상부상항 기와편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자료들은 부여, 익산 등 백제의 고도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으로, 정읍 고사부리성에서도 확인됐다는 사실은 백제 중방 성으로서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오부명이 새겨진 유물은 대부분 기와이고, 오부명과 오항명이 함께 기술된 것은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西(서부) 후항(後巷) 명 목간(木簡)이 유일하다. 이번 고사부리성에서 나온 상부상항 명 유물은 나무에 새겨진 목제 유물로 최초이자, 온전한 형태로 확인된 첫 사례로, 백제 사비기의 것이 확실한 오부와 오항 명이 함께 새겨져 학술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앞으로 오부와 오항의 관계, 상부상항 명의 의미를 파악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목제 유물들은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원형 유지를 위한 보존처리 중이며,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의 유물 선별 과정을 통해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임장훈
  • 2021.01.12 16:07

전북 서원·사우 255곳 중 25곳 국립문화재 지정 가능

전북지역에 서원과 사우가 255 곳에 달하고 90여 곳은 시도, 국가 문화재로 등록가능한, 문화적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조사됐다. 11일 전북도가 지난해 도내 14시군에 존재하는 서원 및 사우를 전수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총 255곳의 서원사우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중 서원은 전체 비중의 38%인 85곳 이었으며, 사우는 전체 62%를 차지하는 140곳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도는 국가문화재로 등록가능한 서원 및 사우는 약 25곳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고, 70여 곳은 시도 문화재 등록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문화재청이 전국 20여곳의 서원향교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는데, 전북지역에서는 단 한곳도 지정되지 않으면서 향후 도내지역 서원 등의 보물지정을 추진을 위한 기초자료 확보 차원에서 이뤄졌다. 서원은 조선시대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이다. 성리학을 널리 알린 인물들을 기리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도 담당했다. 사우는 조선 시대에 선현(先賢)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된 제향처(祭享處)이다. 사우는 유현이나 충절인의 가향(家鄕), 거주지, 근무지, 유배지, 순절지(전승지), 타계지 등에 세워졌다. 사우의 건물 구조는 대개 제사를 지내는 사묘(祠廟)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서원과 사우의 차이는 교육기관(건물 강당)의 유무다. 지역별로는 고창이 32곳으로 가장 많은 서원사우가 존재했다. 이어 김제 28곳, 정읍 24곳, 남원 23곳, 진안 16곳, 무주장수익산이 각각 14곳, 완주 13곳, 전주임실 각각 11곳, 군산 10곳, 순창 9곳, 부안 6곳 순이었다. 서원사우의 건물배치는 학문의 공간이 앞쪽에 배치되고 제향공간이 뒤쪽에 위치하는 전학후묘형과 그 반대인 전묘후학형, 두 공간이 나란이 위차한 좌묘우학형, 좌학우묘형 등 다양한 건물배치를 보였다. 사당의 평면규모는 정면3칸, 측면 2칸 형태가 235건 중 140건(60%)이었고, 강당의 평면규모는 정면4칸, 측면 3칸 형태가 53건으로 나타났다. 사당의 지붕형식은 맞배지붕(건물 앞뒤에서만 지붕면이 보이고 추녀가 없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만으로 구성된 지붕) 196건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강당의 지붕형식은 팔작지붕(우진각지붕과 같이 사방으로 지붕면이 있으나 양측 지붕면 위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있어서, 우진각지붕 상부를 수평으로 잘라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 같은 복합형 지붕형식)이 138건으로 약80%를 차지했다. 도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수리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역사와 건축양식등을 볼 때 95곳에 달하는 서원사우가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서원관리에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11 16:45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 보고서 발간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농업 이민정책을 폈다. 조선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를 이주지로 선정하고 대규모 농장을 개설했다. 개간된 농지와 대지의 소유권은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다우에 타로(田植太郞), 오사와 신조(大澤新藏) 등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자영농이었던 토착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해방 전까지 궁핍한 삶을 살았다. 이 중 구마모토 리헤이는 46세대 92명이 거주하는 용서마을을 거점으로 신태인 지역의 드넓은 평야를 착취했다. 현재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화호병원과 화호우체국, 일본인 대농장주(구마모토) 사택 등 일본 근대식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농민들을 착취한 구마모토 리헤이는 전북도 옥구군 박면 내사리와 신태인읍 화호리 두 지역에 농장을 개설했다. 그 범위는 3500정보(町步1050만평)에 달했다. 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를 제외하고 개인으로는 전북 최대 지주였다. 그는 소작농을 부려먹어 생산한 쌀을 일본에 보냈다. 소작농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보고서가 발간됐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는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Ⅰ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일제강점기 농촌수탈과 해방 후 농촌 보건의 역사가 남아있는 정읍시 화호리에서 실시한 학술조사 결과를 담았다. 해방 후 정읍시는 구마모토 리헤이 농장 소속 의사였던 쌍천 이영춘 박사가 열악한 농촌 보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않고 농장 시설물을 활용해 입원실과 내과 등 5과 진료과목을 갖춘 화호중앙병원을 설립했으며 현재도 이 흔적이 남아있다. 쌍천 이영춘(1903~1980)은 일제의 수탈로 고통당하는 한국 소작농의 치료에 일생을 바친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로 전해진다. 보고서는 △ 식민지 화호리의 일본인 지주들, 정읍 화호리의 식민지 기억과 경관 △ 신문기사와 지도, 사진, 공문서 등을 통해 당시 화호리 역사와 인문지리 △ 건축물 현황과 부재 수종조사, 식생조사, 석재 산지조사, 디지털 기록을 수록했다. 연구소는 화호리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6동과 해방 이후 공간변화 등을 디지털 영상자료로도 제작했다. 이 영상을 보고서내 QR코드로 삽입해 스마트폰 등 휴대기기로 재생해 볼 수 있게 했다. 이번에 발간한 보고서는 국공립 도서관과 지방자치단체 등에 배포된다. 문화재청과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공개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07 17:49

전주전통술박물관 사실상 박물관 기능 상실

5일 오전 한옥마을내 전주시 완산구 한지길(풍남동 3가) 전주전통술박물관.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인근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기와를 얹은 한옥풍의 박물관이다. 입구를 지나 전시실을 둘러봤다. 술의 역사부터 술을 담그는 기구가 몇 개 전시되어 있었다. 술을 만드는 재료인 누룩모형도 전시돼 있었다. 이뿐 이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단 5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이 전시장 면적은 44㎡. 박물관이라 하기엔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또 다른 입구로 들어가보니 비슷한 크기의 공간에서는 전통술을 판매하고 있었다. 개관 20년이 다 되가는 전주시 설립 전주전통술박물관이 사실상 박물관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주전통술박물관은 전통가양주(집에서 빚어내던 술)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전주시가 2002년 현재의 자리에 개관했다. 개관 당시 전통술을 내세운 박물관으로는 전국 최초였다. 개관 초기부터 10여 년까지는 맷돌, 소줏돌, 용수, 체 등 전통술을 빚는 기구를 포함해 212점의 유물을 소장했지만 이후 10년 가까이 추가 유물을 확보하지 못했다. 상설전시 된 유물수도 48점으로 소장 유물의 4분의 1 정도만 공개하고 있는 수준이다. 기획전시할 공간도 부족한 실정이다. 전주전통술박물관 측은 전시공간이 부족해 많은 유물을 전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물관에는 전문학예사도 없다. 박물관장을 포함한 2명의 직원이 전부로 전문학예사가 없다보니 유물관리와 전시유물 교체와 신규유물확보가 안되고 새로운 연구를 통한 기획전시도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전통술 빚기부터 시음행사 등 다양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마저도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국비를 따와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문제로 술 박물관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에서 낙제점을 받아, 평가인증을 받지 못했다. 전주전통술박물관은 2017년부터 전라슬로푸드문화원이 전주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전라슬로푸드문화원은 시의 지원금을 박물관 유지 비용의 약 80%를 차지하는 운영비와 인건비로 쓰고 있다. 그리고 20%는 자체 수익을 통해 메꾸고 있는 실정이다. 박물관 측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어떻게든 박물관은 운영해보고자 직원들이 학예공부를 하고, 관장이 퇴직금 등 사비를 투입해 버티고 있지만 힘든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시는 해당 박물관이 사실상 박물관 기능을 상실한 점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술 박물관에 대한 변화를 고심하고 있다. 지난해 박물관의 기능보다 교육, 전시를 극대화할 수 있는 문화관 전환을 검토했지만, 전국 최초의 술 박물관이란 이유로 철회했다. 올해 전시공간 확대를 위한 리모델링 예산을 책정하고, 개편에 나설 예정이다. 전문학예사도 추후 배치해 추가 유물구입 및 연구도 진행 할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전주전통술박물관에 대한 지적에 충분히 공감한다면서 여러 방면으로 활성화를 위해서 많은 고심을 하고 있다. 거점관광도시에 걸맞게 술박물관을 변화시킬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05 18:20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제동유적 시굴조사서 제동로와 제련폐기장 추가 발견

동광석을 1차 제련해 구리를 추출하는 제동로(구리 생산에 사용되는 노시설의 통칭)와 구리 제련 불순물 폐기장이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제동유적(구리 생산 관련 유적의 통칭) 시굴조사에서 추가 확인됐다고 5일 진안군이 밝혔다. 이번 시굴조사는 전북도와 진안군,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가 함께했으며 전북 가야사 발굴조사 및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됐다. 신라 말 고려 초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량리 제동유적은 동향면 대량리 창촌마을 내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기록된 동향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조사에 앞서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창촌마을에서 진행된 시발굴조사에서는 동 생산에 활용된 제동로 2기와 대형 폐기장(구리 생산 폐기물 버리는 곳) 1개소가 발견된 바 있다. 군에 따르면 이번 시굴조사는 기존 시발굴 조사된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유적의 존재범위와 제동로 등 유구의 추가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실시됐다. 시굴 결과 기존조사와 비슷한 형태의 제동로와 폐기장을 추가로 확인하는 수확을 얻었다. 이번에 발견된 것 중 제동로는 석재와 점토로 축조돼 있으며 강한 화기 탓에 붉은 색을 띠고 있다. 주변엔 슬래그와 노벽편이 다수 산재하고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에는 정확한 구조와 성격을 아직 알 수 없지만, 기존의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제련로의 현황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띨 것으로 군은 추정하고 있다. 또 이번에 발견된 폐기장은 그 부근이 오랜 경작활동으로 대부분 훼손된 상태며 높이 0.4m 가량만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숯, 슬래그, 노벽편 등이 발견됐다. 이들 제동로와 폐기장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유적의 가치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당시 국내 구리 생산체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동로 구조 복원을 위한 핵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1980년대까지 동광석을 채광하기 위해 운영됐던 동향광산과 연계시켜 보존활용 방안이 모색된다면 유적의 가치는 매우 높아질 수 있다는 게 군 관계자의 판단이다.

  • 문화재·학술
  • 국승호
  • 2021.01.05 17:04

군산 최초의 성당 둔율동 성당 신축기록 국가문화재 지정

군산 최초의 성당인 둔율동 성당의 건립당시 기록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군산 둔율동 성당신축기 및 건축허가신청서를 국가등록문화재 제677-2호로 지정했다고 3일 밝혔다. 군산 둔율동 성당이 국가문화재(제677호)로 지정 된지 3년 만이다. 이번에 등록된 성당신축기 및 건축허가신청서는 기존 국가등록문화재 군산 둔율동 성당의 건축공사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다. 성당신축기는 성당의 계획 수립착공완공건축기금 등 건축 전반의 과정을, 건축허가신청서는 당시의 허가신청서청사진 도면시방서 등이 적혀 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이 지난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도 성당신축기와 건축허가신청서가 잘 보존돼, 성당 신축과 관련한 성도들의 헌물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사례가 건설지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문 사례덕이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은 일제강점기 공소(본당보다 작은 교회)로 시작해 1955년~1957년에 신축됐다. 이번에 등록된 유물은 한국전쟁 직후 신축한 성당의 건축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당과 상호 연계된 통합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청은 판단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은 1929년 5월 나바위 본당에서 분리되어 군산 본당으로 설립됐다. 1961년 11월 둔율동 본당으로 개명됐다. 초대 신부로 김영구 베드로 신부가 부임했다. 1925년 김 마리아 사택에 공소를 개설하고 나바위 본당 신부들이 들러 판공 성사를 봤다. 군산 본당으로 설정된 후 옥구 군청 관사 대성원을 임시성당으로 사용하고 부속 건물을 사제관으로 개수해 사용했다. 이후 50년 간 만주에서의 사목을 마치고 군산 본당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임인교 신부는 일제강점기 시대였던 1938년에 본당 주보를 설정하고 목조 성당을 신축했다. 하지만 이후 소실되고 1955년에 현재의 건물로 신축됐다. 신축 후에는 한국 전쟁 후에는 성심 유치원과 보육원을 설립해 전쟁고아와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주력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1.01.03 17:53

[2020 전북문화계 결산] ③ 학술, 문화재

올해 전북문화계 중 학술문화재 분야는 반가운 소식들이 많았다. 한국전쟁이후 소실됐던 전라감영이 70여 년 만에 재창조 복원됐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무성서원의 중수기 편액이 발견됐다. 웅치전적지 국가사적 지정노력 등 전북의 문화재 지정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한 반면, 전주시역사박물관과 어진박물관에 대한 직영전환에 따른 논란도 불거졌다. △ 70여 년 만에 시민 곁으로 돌아온 전라감영 지난 7일 전라감영은 준공식을 갖고 시민의 품에 안겼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를 관할했던 전라감영은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완전히 사라졌다. 전주시와 전북도는 2017년부터 총사업비 104억 원을 투입해 구도청사를 철거하고, 동쪽 부지에 선화당 및 관풍각, 연신당, 내아, 내아행랑, 외행랑 등 7개 핵심건물을 복원했다. 먼저 전라감영 내부 세 번째 출입문인 내삼문(內三門)은 이번 재창조 공사과정에서 전라감영의 정문으로 새롭게 자리했다. 임금의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을 품고 전라감사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은 조선시대 관찰사 집무실이자 전라감영의 핵심 건물로 높이 10.9m 팔작지붕 아래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웅장한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됐다. 전라감영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재탄생될 때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96년 전북도청사 이전이 확정된 후 전라감영 복원 문제가 본격 거론됐다. 복원이 논의되자 구 도청사에 입주했던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구 도청사가 가진 역사적인 시간도 무시할 수 없고, 현대사의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전라감영복원에 부정적인 시각들이 존재했다. 여러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면서 20년 넘는 시간이 허비됐다. 그렇게 2016년 전라감영지 발굴조사를 통해 관풍각, 내삼문, 비장청 등의 연관 시설을 확인하고,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추정되는 건물터 등이 확인되면서 전라감영 복원이 진행될 수 있었다. △ 사라진 무성서원 편액, 다시 주인의 품으로 임실군은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정책 당시 정읍 무성서원의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는 편액이 발견했다. 이 편액은 임실출신의 한 인물이 이 작은 것이 무성서원의 발전에, 전북 문화풍토에 작은 울림이라도 일으켰으면 한다면서 임실군에 기증했다. 기증된 편액은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92㎝, 세로 25㎝, 두께 2㎝ 정도의 송판에 흰색 글씨로 전 만경군수 정인희가 쓴 것이다. 해당 편액은 시간이 지나 일부 지워진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온전한 상태다. 현재 무성서원의 편액은 서원철폐정책 이후의 편액이 존재하지 않아 그 가치가 더 크다. 현판은 초반부 최치원을 칭송하는 내용, 중반부 글을 작성하게 된 이유, 후반부 당시 무성서원의 역할 등이 담겼다. 임실군은 해당 편액을 연구분석 한 후 내년 정읍시와 협의를 통해 기증할 방침이다. △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위한 움직임 활발 올해 전북은 임진왜란(1592~1598선조 25~31년)당시 전주부성을 향해 침략해오는 왜군에 맞서 조선 관군과 완주 소양진안 부귀 주민을 포함한 의병연합군 3000여 명이 사투를 벌인 전투현장인 웅치전적지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 지난 6월에는 완주군이 전라문화연구원에 의뢰해 발굴조사한 결과 옛 웅치길(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진안 부귀면 세동리) 일원에서 성황당 터봉화 터 진지 터 등의 유적들을 확인했다. 또 유적 토양을 채취, 조선군 시신 매장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총 인, 총 칼슘의 함량을 분석해 조선군 무덤을 최초로 확인했다. 전북일보는 지난9월 27일 창간 70주년을 맞아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위한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전북도를 중심으로 정치권과 학계가 뭉쳐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 전주역사박물관, 어진박물관 직접운영전환 논란 올 연말은 전주시의 전주역사박물관과 어진박물관에 대한 직영운영전환이 큰 화두였다. 지난달 27일 전주시의회 문화경제위원회가 시가 제출한 전주역사박물관과 어진박물관의 민간위탁 동의안을 부결하면서 직영전환에 돌입했다. 그런 과정 중 직원들의 고용승계 문제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직영 전환에 시는 고용승계를 깊이 고민했으나, 공개채용을 실시하며 직원들을 거리에 내몰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민간위탁 동의안을 부결시킨 시의회도 직영전환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29 18:59

전라감영 선화당 주련문 담긴 <풍패집록>, 전주역박 확보

전라감영 선화당 주련문(柱聯文)의 내용이 담긴 <풍패집록>을 전주역사박물관이 확보했다. 전주역사박물관은 지금까지 찾아지지 않은 전주지역의 기록물 <풍패집록>을 발굴했다고 29일 밝혔다. <풍패집록>은 전주지역의 관아, 성문, 학교, 군진, 누정 등의 상량문ㆍ중수기ㆍ시문 등을 비롯해사가(私家)의 재실과 정려기 등을 일일이 필사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조선말전주사람 채경묵이 편찬한 필사본으로, 1책이며 유일본이다. 편찬시기는 조선말 1890년께로 추정된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늦게는 간재 전우선생이 1891년에 지은 <발김효자행실>이 실려 있다. 전라감사 서호수가 찬한 <희현당중수기> 말미에는 개국 505년 병신(1896)에 훼철되었다고 세필로 표기해 놓았다. 이 세주는 추기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전주지역 총 108개의 상량문ㆍ기문류와 6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중에 상량문기문류 84개, 시 63편 정도가 <완산지>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들로 그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 이 책은 조선말 전주의 풍경을 일상 속에서 저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1차적 기록물로 전주의 역사문화를 풍부하게 해주고 이를 복원해 가는데 획기적인 자료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관아건물들의 상량문, 기문, 시 등이다. 전라감영 선화당과 작청의 주련문을 비롯해 관풍각, 연신당, 재가청 등에 걸려 있던 편액들이 필사되어 있다. 전라감영 선화당을 복원하고 주련문을 붙이지 못했는데 이제 이 문제도 해결될 수 있게 됐다. 전주 동헌에 걸려 있던 많은 편액들도 책에 필사돼 있다. 동헌의 편액들은 통치행정을 담고 있는 것들로 조선시대 전주지역의 지방통치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동헌에는 아전들의 세금포탈을 금하는 일, 환곡, 향임 택임을 비롯해 지방통치에 필요한 자료 등이 담긴 편액이 이 책에 담겼다. 관방시설인 남고산성, 위봉산성, 만마관 등의 기문들도 필사되어 있다. 공북루, 진남루, 승금정, 비비정, 한벽당 등 전주지역 누정과 다가정, 천양정, 읍양정, 군자정 등의 활터의 기문과 시 등이 필사되어 있다. 향교와 희현당, 양사고 등의 교육 관련 건물, 풍남문, 패서문 등 전주성의 문루에 대해서도 알려진 기록물과 다른 기문들이 필사되어 있다. 채경묵은 평강채씨로 전주에 세거한 가문의 후예다. 그는 조선말 전주지역의 이런 기문들을 일일이 답사하고 모아서, 필사했다. 채경묵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명사들조차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풍패집록>의 가치가 확인됨에 따라 전주역사박물관은 이 책을 매입해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풍패집록>의 영인본 출판에 들어갔으며, 1월 중순경에 마무리 작업을 마치고 출간될 방침이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전주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출간하는 것으로 박물관 일을 마무리하게 되어 뜻깊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29 18:59

익산 미륵사지 ‘2020 한국관광의 별’ 선정… 전북도 2020년 그랜드슬램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2020년 한국 관광의 별에 익산 미륵사지가 선정됐다. 익산 미륵사지가 대한민국 제1 관광명소로 인정받은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그 자체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모범적 K-방역 사례로 발전한 관광지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한국 관광의 별은 국내 관광에 대한 관심 제고 및 우수관광 자원 홍보, 한국 관광 발전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를 발굴하고 알리기 위해 2010년 처음 제정돼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했다. 이번 2020년 한국 관광의 별 선정에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총 85개소(본상 65개소, 특별상 20개소)가 신청했으며, 본상(4개소), 특별상(2개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치렀다. 그동안 전북도는 2010년부터 한국 관광의 별 선정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전주 한옥마을(2010년), 전주비빔밥(2011년), 전북투어패스군산 근대역사문화거리남원 예촌(2017년)에 이어 익산 미륵사지가 여섯 번째로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다. 1차 서류접수 단계부터 2차 현장 심사에 이르기까지 전문가 의견수렴과 사전현장답사 및 컨설팅을 통해 최종 선정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매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20년에 걸친 미륵사지 석탑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1월에는 보이지 않는 박물관 형태의 국립익산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무려 24만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큰 호응을 얻었으며, 지난 6월 야간 경관조명 설치와 8월 미륵사지 달빛 향연을 주제로 한 야간 열린음악회 개최 등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아울러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사전 예약제 해설 서비스 제공 등을 통해 미륵사지 자체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모범적인 K-방역 관광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윤여일 전북도 문화체육관광국장은 4대 고도(古都)인 백제의 왕도 익산이 이번 한국관광의 별 수상으로 대한민국 대표 여행체험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며 왕궁리 유적지, 보석테마파크, 익산교도소 촬영지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다양한 콘텐츠 제공으로 한곳 더 둘러보고, 하루 더 머물고, 한 번 더 찾을 수 있는 여행체험 1번지 전라북도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이번 수상은 익산 미륵사지가 한국인이라면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여행지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손길을 통해 꾸준히 변신해 온 결과라며 앞으로도 매력적인 관광지로서 모두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열린 관광지 조성과 주변 관광지 연계 프로그램 발굴 등 지속해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전북도는 올해 전주시 지역관광거점도시 국비 500억 원, 남원시 계획공모형 지역관광 개발사업 국비 100억 원, 임실, 군산, 익산, 순창 열린 관광지 국비 20억 등 3개 공모사업에 국비 620억 원을 확보한 바 있다. 전북도는 이번 미륵사지 한국 관광의 별 선정으로 2020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주요 사업 4개가 선정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대한민국 여행체험 1번지로서의 위상을 떨쳤다는 평가다. /천경석 기자엄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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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엄철호
  • 2020.12.21 17:57

전주시, 전주대사습놀이 국가무형문화재 등록 추진

전주시가 전국적인 판소리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대사습청 설치를 시작으로 국가무형문화재 등록에 나선다는 것이 시의 주요 계획이다. 시는 전주대사습놀이를 국가무형문화재 등록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20일 밝혔다. 주요 내용으로 시는 전주대사습놀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9월 전주대사습청 설치 및 운영 조례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조례안에 따라 전주소리문화관을 전주대사습청으로 명칭을 변경할 예정이다. 이후 각종 자료를 수집한 뒤 많은 학술대회를 개최해 최종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방침이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후기 성행했다가 중단된 후, 1975년도에 복원돼 현재까지 전주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는 판소리 중심의 전국 규모 국악 경연대회다. 사습(私習)이란 활쏘기에서 정식으로 쏘기 전에 연습으로 쏘는 일을 일컫는 말로, 전주의 전라감영과 전주부의 통인청(通引廳)이 주관했던 사습놀이가 전주대사습놀이의 전신이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숙종(1661~172) 당시 마상 궁술대회와 영조(1694~1776)대의 물놀이와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놀이를 종합해 대사습이라 불렀다. 영조8년에는 지방재인청과 가무 대사습청의 설치에 따라 전주에 4군자정을 신축하고, 최초로 전주에서 대사습놀이가 펼쳐진 뒤 매년 연례행사가 실시됐다. 그 후 대사습에서 선발된 권삼득, 신재효 등 많은 이들에게 의관, 통정, 감찰, 오위장 등의 벼슬을 직접 제수하고 명창 칭호를 하사했다. 조선 후기에 전주대사습놀이는 해마다 동짓달에 전주의 다가정(多佳亭)과 같은 정자에서 주로 열렸다. 당시 경연은 지금의 도청에 해당하는 영문(營門)의 전속 판소리 창자들과, 지금의 시청에 해당하는 본부(本府)의 전속 판소리 창자들의 두 패로 갈려 진행됐다. 당시 본부 전속으로 장자백(?-1907), 정창업(1847-1889), 김세종, 송만갑(1865-1939), 염덕준 등이 참여했으며. 영문 전속으로 이날치(1820-1892), 박만순, 주덕기, 장수철 등이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 명성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1910년 전후로 중단됐고, 1974년 전통예쑬에 뜻을 가진 전주지역 인사들이 모여 이듬해인 1975년부터 판소리와 농악, 무용, 시조, 궁도 등 5개 부문으로 전주대사습놀이를 개최하면서 부활했다. 시 관계자는 전주대사습놀이는 역사가 깊은 대회 중 하나라면서 국가무형문화재로 반드시 등록을 시켜야한다. 대사습청 설치를 시작으로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이 더 멀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20 18:00

서원철폐정책 당시 무성서원의 역할 가늠할만한 편액 발견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정책 당시 정읍 무성서원의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는 편액이 발견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실군은 무성서원 중수기 편액으로 추정되는 편액 1점을 확보했다고 17일 밝혔다. 이 편액은 임실출신의 한 인물이 이 작은 것이 무성서원의 발전에, 전북 문화풍토에 작은 울림이라도 일으켰으면 한다면서 임실군에 기증했다. 기증자는 1988년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근무 중 서울 황학동의 한 수집상으로부터 구입해 보관하던 중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임실군 학예사의 권유에 따라 기증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증된 편액은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92, 세로 25, 두께 2㎝ 정도의 송판에 흰색 글씨로 전 만경군수 정인희가 쓴 것이다. 해당 편액은 일부 세월의 흔적으로 지워진 것을 제외하곤 대체로 온전한 상태다. 현재 무성서원의 편액은 서원철폐정책 이후의 편액이 존재하지 않아 그 가치는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현판의 내용은 크게 3가지 틀에서 요약해볼 수 있는데, 초반부는 최치원을 칭송하는 내용, 중반부 글을 작성하게 된 이유, 후반부 당시 무성서원의 역할 등이다. 정인희는 우리동방의 빛나는 문헌들의 근원이 모두 문창공(최치원)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며, 선생은 천하를 다스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중국을 주유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어찌 때를 만나지 못해 펼치지 못했는가. 마침내 이를 시행하고 남았지만 이 땅에 거문고를 타면서 읊었던 음율이 천년을 이어 지금까지 우거져 있는 것이 가이 알수 있도다라고 최치원을 칭송했다. 해당 내용은 신라의 골품제로 인해 제 뜻을 펼치지 못했던 최치원을 안타까워하고, 그의 능력과 학문이 무성서원을 통해 계속해서 전승됐다는 내용이다. 중반부에서는 1904년 원임 유종규, 김선술이 자신에게 글을 부탁해 작성됐고, 성재공 후손 정위 김병욱이 힘을 다해 마치 집사처럼 중수하는 일에 앞장섰다고 써져있다. 후반부에는 세상의 변고가 심하고 이단이 횡류하는 때에 능히 안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하물며 선현을 존경하고 도를 지키려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서원의 첨원들이 분파가 달려 물결치는 것을 사사로운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칠현의 학문과 의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당시 세상의 변고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과 동학농민혁명, 외세들의 침입 등이 발생하던 시기를 뜻하고, 이단이 횡류하는 때는 천주교, 동학 등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고 발생하면서 유림이 밀려나가는 때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사는 이번 기증받은 편액은 당시 혼란한 정세 속에서도 무성서원은 전통을 지키고, 유학을 이어가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해왔을 것으로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며 이번 편액의 가치는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한편, 임실군은 해당 편액을 연구분석 한 후 내년 정읍시와 협의를 통해 기증할 방침이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2.17 18:05

고창 반암리서 ‘초기 청자’ 가마 확인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에서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과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초기 청자 가마가 확인된 가운데, 가마와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10세기 후반 초기 청자를 생산했던 가마유적으로 판단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4일 고창군 등에 따르면 문화재청 2020년 긴급발굴조사 공모사업을 통해 (재)호남문화재연구원은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계명산 줄기 서쪽 기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최근 들어 가마터 일부가 훼손됨에 따라 유적의 훼손 방지와 성격 규명, 보존 관리 등을 위한 발굴 조사였다. 그 결과 벽돌가마(전축요, 塼築窯) 1기, 진흙가마(토축요, 土築窯) 3기, 퇴적구릉(폐기장) 3개소, 건물지 2동 등이 확인됐다. 특히 벽돌가마는 1호 진흙가마 아래에서 중첩돼 확인됐다. 이같은 사례는 최근 사적으로 지정된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요지에서 처음 확인됐다. 하지만 진안 도통리 가마는 벽돌가마를 파괴한 후 그 위에 진흙가마를 축조한 반면, 반암리 가마는 벽돌가마 폐기후 퇴적층과 퇴적구릉(1.5m 내외)이 형성된 다음 진흙가마를 조성해 벽돌가마가 비교적 잘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바뀌어 간 양상이 잘 남아 있어 앞으로 초기청자 가마의 발생과 변화 과정, 구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번 시굴트렌치를 통해 확인된 1호 가마는 길이 35~40m, 폭 1.2m 내외로 추정돼 전형적인 초기 청자 가마의 형태를 보여준다는 것이 발굴팀의 설명이다. 퇴적구릉은 다량의 청자편과 청자를 구울 때 씌웠던 갑발(도자기를 구울때 담는 큰 그릇), 가마 축조재료인 벽돌 등이 2~3m 정도로 쌓여 있었고 건물지에서는 官, 坪 명 등의 명문기와도 출토돼 반암리 청자요지의 성격과 시기 등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일대는 사적 제345호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 사적 제250호 고창 분청사기요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115호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요지 등 다수의 지정비지정 가마유적이 분포하는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도자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고창군은 반암리 청자요지의 보존관리를 위한 방안과 함께 유적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릴 수 있는 추가발굴조사를 실시할 방침이며, 전라북도 기념물과 국가사적 지정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20.12.14 17:42

희귀수첩 전북유형문화재 제148호 ‘이용화 백세영수첩’ 남원시에 기증

전북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된 이용화 백세영수첩이 24일 남원시에 기증됐다. 이번 기증은 지난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남원군의회 제1, 2대 의장을 지낸 전주이씨 종중 이권기 씨가 조상의 소중한 문화재를 도난, 훼손 등으로부터 보호하고 시민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기부의사를 남원시에 밝힘에 따라 이뤄졌다. 시는 이날 기증식을 개최하고 이환주 남원시장이 이권기 씨에게 기증증서를 수여했다. 이용화 백세영수첩은 1865년에 만들어진 필사본으로 상, 하 두 책에 걸쳐 구성된 관직첩이자 축하시문첩이다. 이 수첩은 100세가 넘은 이용화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 고종이 관직을 수여한 일을 기념해 제작된 경수시첩(慶壽詩帖)이다. 특히 이 수첩은 이용화가 100세까지 장수하자 조정에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지중추부사(중추부 정이품 무관벼슬)라는 관직을 수여하고, 조정백관들이 축하의 시문을 모아 상, 하 두 책으로 만들었다. 학계에서는 좌의정 김병학이 지은 이지추옹서(李知樞翁序)라는 서문을 비롯한 원로대신과 조정 대신 108인의 송축(頌祝) 자필 시문(詩文)이 기록돼 있는 희귀한 수직첩으로 꼽히고 있다. 상권의 크기는 가로 35.5cm, 세로 50cm로 60매이다. 하권은 가로 34.8cm, 세로 50.2cm로 62매 등 상, 하 모두 122편이다. 역사 연구의 사료로서 가치 있을 뿐 아니라 서예와 문학 연구에도 가치가 있어 1995년 6월 20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이환주 남원시장은 이권기 전 의장의 소중한 문화재 기증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향후 전시나 학술연구 등에 활용해 문화재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영호
  • 2020.11.24 17:43

남원 아막성(阿莫城), 신라시대 대형 집수시설 발견

남원 아막성(阿莫城)에서 신라시대 대형 집수시설이 발견됐으며 그 내부에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됐다. 남원시는 17일 전북도와 함께 이같은 내용을 담은 남원 아막성 발굴조사 학술자문회의를 열었다. 시에 따르면 아막성은 봉화산(919.6m)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에 위치한 퇴뫼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 640m로 전북 동부지역에 분포하는 고대 산성 중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3년(602년)과 무왕 17년(616년)에 백제가 신라의 아막성(또는 모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막성은 20여 년 간 철 산지인 운봉고원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던 역사적 장소로,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그간 문헌사적으로 추정됐던 아막성 실체가 드러났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사 결과 집수지 1기와 도수로 목주열의 잔존현황이 확인됐다. 집수지는 길이 9.5m, 너비 7.1m, 최대깊이 2.5m로 전북지역 최대급에 해당한다. 집수지 주변으로는 외부에 이물질이 직접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도수로가 폭 50cm 내외로 축조돼 있다. 또한 도수로 일대에는 집수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목주열이 9기 확인됐다. 최완규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성벽의 축조수법 및 집수시설의 조사가 꼼꼼하게 진행됐다며 집수시설의 경우 축조 방식이 특이해 추가 발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집수시설의 내부에서는 삼국시대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이루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유물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된 신라 토기로서 아막성의 축조운영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줬는데 기록상 등장하는 아막성의 운영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 중 칠 원료가 담겨져 있는 토기류가 있어 주목되는데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이는 남원 칠기 문화의 전통과 역사성을 복원할 수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설명이다. 이 외에도 목제 유물과 동물 유체가 상당수 출토됐으며, 목제 유물의 경우 글씨가 새겨진 목간과 목검이 출토돼 주목을 끈다. 동물 유체는 곰과 말, 소, 자라 등이 확인돼 당시 군사들의 생활방식은 물론, 식생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고 있다. 특히 곰 유체의 경우, 신라 월성에서 출토된 예가 있는데 삼국사기에 신라인들이 곰의 가죽으로 장군 깃발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시는 집수시설 내부에서 확인된 목간에 적혀 있는 글자를 판독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적외선 촬영 등을 시행하고 학계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아막성 목간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하는 동시에 과학적 분석방법을 통해 아막성의 연대를 파악할 계획이다. 박광춘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집수시설 외에도 주변 공간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며 체계적 조사가 완료된 후 사적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영호
  • 2020.11.17 17:24

“구석기 유물 쏟아져나왔는데…” 정읍 구절초 지방정원 조성 사업 논란

정읍시가 수십억원을 들여 지방정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업 부지에 묻혀 있던 구석기 시대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하지만 정읍시는 추가 발굴은 없다는 의사를 보이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구절초 지방정원 공사 중 발견 정읍시는 산내면 구절초 테마공원(면적 41만5000㎡) 일원(약 30만㎡)에 국비ㆍ시비 60억원을 들여 구절초 지방정원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착공해 내년 말 완공이 목표였지만 지난해 매장 문화재 시굴(시험적으로 파 보는 일) 및 지표 조사에서 각각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와 구석기 유물 70여 점이 발견됐다. △정밀조사결과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지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정읍시 의뢰를 받아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정밀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구석기 유적 1000여 점이 발굴됐다. 대형 석재와 좀돌날(잔석기를 만들기 위해 몸돌에서 떼어낸 아주 작은 돌 조각), 돌도끼, 망칫돌, 갈돌 등이다. 긁개와 밀개 등 성형석기도 출토됐다. 특히 석기 제작에 쓰인 망칫돌과 화덕 흔적이 발견되며 학계에 관심을 끌고 있다. 일단 그간 정읍에서 단 한번도 보이지 않던 구석기 시대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점에 귀추가 쏠린다. 발견된 흔적을 분석해보면 해당 지역은 석기제작소로 추정된다. 구석기인들의 임시 공간이 아닌 거주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또 약 8000년 전 후기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됐다. 한반도에서 후기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변화되는 시기의 유적은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유일하다. 도내의 한 고고학 교수는 탄소연대측정이 나와야 정확하겠지만 여럿 흔적을 봤을 때 추측이 맞다면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흔적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존해야한다는 학계, 난감한 정읍시 문화재청으로 올린 발굴보고서에 각계 전문가들은 유적의 역사적 가치가 높고 매우 중요하다며 자치단체와 협의해 추가 발굴하고 보존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적었다. 김재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은 정읍에서 처음나온 구석기 유적지는 매우 상징적이라며 공사계획을 당장 중단하고 인근의 부지에서도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서둘러 발굴에 들어가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읍시는 수만 년 전 유물을 발굴ㆍ보존하려다 완공을 눈앞에 둔 사업이 자칫 차질을 빚을 수 있어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정읍시는 결국 추가 조사는 하지 않고 유물이 발굴된 장소를 잔디 등으로 덮어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읍시 관계자는 (가을에 피는) 구절초만 가지고는 관광객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있어 사람들이 1년 내내 와서 쉬고, 먹고, 즐길 수 있는 아이템을 채우는 지방정원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면서 현재 문화재청의 지시가 나와봐야 알지만 우리가 훼손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잔디 등을 통해 공원으로 조성한다면 유적지 훼손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1.16 17:37

문화재청, 서원향교문화재 20건 보물지정예고, 전북은 ‘전무’

문화재청이 전국의 서원향교 20여 곳에 대한 보물지정 예고를 했지만 전북에서는 단 한 곳도 지정이 안된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문화재청은 강릉향교의 명륜당,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와 도산서원의 도산서당 등 20건의 서원향교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하지만 강원, 경기, 경상, 충청, 전남 등의 서원향교만 지정됐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향촌에 근거지를 둔 사림(士林)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부터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까지 담당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에 설립된 관립 교육기관으로, 그 건물은 엄격한 유교적 예법에 따라 명확한 직선 축과 좌우 대칭의 배치로 이뤄졌다. 특히 이들 서원과 향교가 보물로 지정 예고된 배경에는 건물들의 가치가 결정적이었지만 전북도내 향교와 서원들이 배제된 것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북도에 따르면 전북의 서원향교는 약 255곳이 존재한다. 이중 도가 관리하는 문화재는 전주향교, 옥구향교 등을 포함한 향교 26곳, 서원 23곳 등 49곳에 달한다. 이 중 대표적인 곳이 전주향교다. 사적 제379호인 전주향교는 그 부지가 사적으로 지정됐을 뿐, 내부 건물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설명한 순천향교의 보물 지정이유는 호남지역교육기관으로는 순천, 나주, 전주 3곳뿐이라며 이러한 중요성과 위상 때문에 1407년 순천도호부의 향교로 설치되어, 여수ㆍ광양ㆍ돌산 등 인근 군현들의 향교를 관할하게 된 점이 크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전주향교만 하더라도 순천향교에 절대 밀리지 않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고, 건축양식또한 훌륭, 지역별 안배와 위상을 생각해 전북에도 보물지정이 이뤄줘야 한다고 말한다. 전주향교는 고려 말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는데 태조 이성계 영정봉인을 위해 현재의 장소로 이전됐다. 전주향교는 나주향교와 마찬가지로 만화루, 일월문, 대성전, 명륜당이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계성사가 서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대성전은 1653년(효종 4)에 고쳐 세워졌는데 이기발이 쓴 중건기가 있다. 이후 1907년(융희 1)에 군수 이중익이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4성인, 10철학자, 송나라 6현의 신위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9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퇴칸이 구성되어있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전주향교는 전라감사가 위치한 지역의 대표 향교로 오히려 보물로 지정된 순천향교보다 역사적 가치가 높다면서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크다고 말했다. 도도 도내 서원향교의 중요한 가치를 분석해 문화재청에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요구할 방침이다. 도 관계자는 현재 다양한 서원과 향교에 대한 용역을 진행 중으로 내달 초쯤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전북에도 국가지정문화재가 선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1.09 17:52

무형문화재 인정예고 김수연·김일구 명창 “판소리 전승, 후진 양성 매진”

문화재청이 최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김수연(72) 명창을, 적벽가 보유자로 김일구(80) 명창을 인정 예고하면서 소리 고장 전북이 자존심을 높게 세웠다. 김수연 명창과 김일구 명창은 기쁘고 영광스럽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선정돼 시간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후계자 양성 등 자신들의 문화재를 전수할 시간이 부족해서다. 평생 소리 외길을 걸어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판소리와의 운명적인 만남 김수연 명창 이번에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예고 된 김수연 명창은 군산 출신이다. 어린 시절 김 명창의 놀이터는 국악원이었다. 마을에 놀이터가 없어 뛰어놀 공간이 부족했던 그는 국악원 연습실을 헤집고 다녔다. 그곳에서 매일 같이 소리를 듣다 보니 소리에 귀가 트기 시작했고, 어깨너머로 본 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당시 군산국악원장이었던 김재경 명창은 어린 김수연 명창의 소리에 빠져들었다. 김재경 명창은 김수연 명창의 어머니를 찾아가 수연이가 소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소리를 전공할 수 있도록 직접 가르쳐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주변에서 어린 나이에 한이 있다는 극찬을 받았다. 최고의 칭찬이었다. 김재경 명창이 떠난 후 김수연 명창은 이리(현재 익산)에서 배움을 이어나갔고, 21살 무렵 박초월 명창을 찾아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박 명창은 소리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박 명창은 돈도 없고, 연고지도 없던 그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등 큰 힘이 됐다. 김 명창은 정말 어려웠던 시절 선생님(박초월 명창)께서 베풀어 주신 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박 명창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운 그는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우기 위해 성우향 전 보유자를 찾아가 전수받았다.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아서일까. 김 명창은 현재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스승의 가르침대로 어려운 제자들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박초월 선생님 밑에서 공부할 때 선생님의 가족이 우리가 죽이라도 같이 먹고 살자고 했던 따뜻한 마음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면서 스승의 가르침대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도움을 주려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가난이 선물한 소리 김일구 명창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 예고된 김일구 명창이 소리를 시작한 직접적 동기는 가난이었다. 소리를 좋아하는 어른들로부터 소리꾼들이 용돈을 받는 등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본 그는 소리만 배우면 대우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김 명창은 평소 소리를 즐겨하신 아버지를 통해 소리에 입문한다. 지독하고 혹독했던 가난이 그를 소리의 길로 인도한 셈이다. 20살이 된 김 명창은 1960년 광주 호남국악원에 활동하고 있던 공대일 명창을 찾아가 흥보가를 배웠다. 이후 박봉술 전 보유자에게 적벽가 등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변성기가 찾아왔다. 무리해서 소리를 하다간 목이 꺾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그는 악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22살이 되던 해인 1962년 목포 유달국악원에서 활동하고 있던 장월중선 명창을 찾아가 아쟁산조를 배웠고, 1968년에는 부산에서 활동 중이던 원옥화 명인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우며 전통악기의 대가로 성장하게 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공연을 한 그는 예향의 도시 전주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특히 판소리의 고장인 전북에 있는 전주대사습놀이와 전주세계소리축제가 펼쳐진다는 점에 더욱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서울 생활을 청산한 그는 2001년부터 예향의 도시 전주에 정착해 한옥마을에 온고을 소리청을 개관했다. 그의 목소리에 반한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은 전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 명창은 청년 시절부터 전주에서 언젠가는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면서 생각만으로 쉽지 않았지만 당시 김완주 시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주는 명예를 안겨주고 제자 양성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우도록 한 도시라면서 앞으로 전통 판소리를 전승계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최정규
  • 2020.11.05 17:51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