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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유적, 봉화 관련유물 검증 두고 격돌 “반파·기문 검증” vs “검증 다시 해라”

20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린 전북 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 학술발표회에서는 소위 전북가야사를 규명하기 위해 발굴한 유물‧유적과 문헌사료 해석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동부지역에서 발굴된 제철‧봉수(봉화)유적터가 전북 가야 의 실체를 완벽히 규명해줄 수 있는지가 논의의 골자다. 이와 함께 문헌자료인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나온 기문과 반파를 각각 남원과 장수로 볼 수 있는 지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문헌‧고고학적 연구 결과 반파국의 소재지는 장수, 기문국은 남원으로 드러났다며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잘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실학의 비조인 성호 이익도 가야의 범위를 전북 동부로 봤다고 설명했다. 봉화와 관련해서는 거대 봉화망의 발견은 문헌사료에서 누락된 정치체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며 <일본서기>등에 따르면, 백제-왜-신라-반파국은 3년 간 전쟁을 벌였고, 당시 봉화가 국가(가야국) 운영에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제철유적과 관련해서는 운봉‧진안고원, 장계분지에 발견된 제철산지를 4국 전쟁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며 제철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지면 이 같은 상정을 뒷받침해줄 것이라고 부연했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발굴된 봉화를 토대로 전북 동부지역에 형성된 봉화망을 주장했다. 곽 교수는 운봉‧무주‧금산‧완주‧진안‧관촌‧임실‧순창 봉화로는 장수군 장계리 삼봉리 산성에서 하나로 합쳐진다며 이들 전체망은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과 국경선을 따라 배치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봉화시설에서 장수군 가야계 분묘유적 출토품과 동일한 가야토기가 출토됐다며 운영주체를 장수가야로 고증됐다고 주장했다. 이남규 한신대 명예교수는 발굴된 제철유적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가야시대 제철로 보기엔 시기상조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도 무주, 순창, 완주에 일찍부터 철산지가 있었다고 나와 있지만, 장수, 진안, 남원지역의 철산은 고문헌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향후 개별 유적들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와 굴토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료를 충분히 선별해 분석전략을 세우고 고고학‧금속공학 연구자들과 작업을 같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인선 순천대 교수는 학계 일부에서 가야 봉화로 볼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며 약속된 규칙과 노선에 따른 신호전달 체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 소장은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최 소장은 전북 가야론자들이 주장하는 진안 지역 25개 봉수가 흔적도 없는 이름만의 봉수들이라며 이 봉수들이 완주나 금산의 봉수로의 중계지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27곳이나 되는 제철지 역시 금시초문으로 흔적조차 잡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문헌사료와 관련해서는 전북 가야의 존재는 <일본서기>의 간략한 기록 뿐이라며 그런데 장수(장계)처럼 해안에서 멀고 내륙 깊숙한 지점에 있는 곳이 봉화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대가야 지역인 고령은 낙동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다"고 부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2.20 19:24

전북 가야 조사 성과 검증의 장 열린다

전북 동부지역에 존재했다는 가야세력의 실체를 조사한 성과를 살피고 재정립하는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특히 독자가야세력설의 근거인 제철 유적과 봉수의 조성 시기 문제, 문헌사료인 일본서기의 해석문제가 주요 화두가 될 전망이다. 전북도와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는 20일 국립전주박물관 강당에서 전북 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 학술대회를 열고, 전북 가야의 역사적 실체 등에 대해 토론을 한다. 주제는 전북 가야를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사항과 당시 고대국가의 움직임으로 압축된다. 제1세션에는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장이 마한과 백제, 그리고 전북가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고고학으로 본 신라의 전북지방 진출과정,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전북가야의 역사적 실체 검증을 발표한다. 제2세션에는 이남규 한신대 명예교수가 전북 제철유적의 현황과 조사방법, 곽장근 군산대 교수가 전북가야 봉화망과 그 의미를 발제한다. 주제별 발표가 끝난 뒤에는 이재운 전주대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지정토론 및 종합토론이 열린다. 토론자로는 조상진 전북일보 객원논설위원, 김재홍 국민대 교수, 송화섭 중앙대 교수, 홍진근 국립전주박물관장, 최인선 순천대 교수, 이춘구 전 KBS국장,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장이 참석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전북 가야 유물, 유적의 조사 성과 검토 외에 가야 정치체의 실체, 관련 유물인 봉수봉화제철유적의 조성시기, 반파국의 장수지역 존재여부, 문헌사료인 일본서기 해독 문제 등을 두고 갑론을박도 벌어질 전망이다. 전북 가야가 발표된 뒤, 학계에서 그 동안 논쟁을 벌여왔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반파국의 장수지역 존재와 일본서기 사용 및 해석여부를 두고는 최근에도 언론과 학계, 시민사회단체에서 치밀한 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2.19 19: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국제성

고창 봉덕리 일대에는 대형 분구묘 5기 외에도 많은 수의 마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어서 이곳을 중심으로 마한 「모로비리국」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아산-고창간 지방도 확·포장 공사구간에서 발견된 봉덕유적은 추정 방형분 1기와 주구 6기, 인근 구릉의 사면에서 52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 조사된 만동유적에서는 봉덕유적보다 이른 단계에 해당하는 분구묘 13기, 단독묘 4기 등에서 환두도와 철부 철모, 그리고 다양한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봉덕리 1호분은 발굴조사 결과 파괴된 석실 내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편과 금동신발편과 특히 4호 석실에 부장되었던 금동신발을 비롯한 화려한 위세품을 통해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구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5기의 석실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4호 석실에 부장되었던 중국제 청자와 소호장식광구호(小壺裝飾廣口壺)는 모로비리국의 국제적인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서로 주목된다. 4호 석실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는 석실의 남동 모서리에 뒤집어져 있던 토기 항아리와 같이 세워져 놓여 있었다. 이 청자는 높이 36.8cm 로서 아가리가 작은 쟁반과 같은 반구호(盤口壺)로서 최대 너비를 이루는 어깨에는 6개의 고리가 부착되었다. 각을 세워 만든 고리는 횡으로 2개를 한조로 반대편에 대칭으로 부착하고 그 사이에는 동일한 형태의 1개씩의 고리를 역시 대칭으로 부착하였다. 시유된 유약은 녹황색의 탁한 색조를 띠면서 거친 편인데, 동체부 하단에서 바닥까지는 시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리 모양을 특징으로 하는 반구호는 중국에서는 동진 말기에서 남조 초기에 해당하는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호장식유공광구소호는 석실 내의 남벽 중앙에서 호와 받침이 한 세트를 이루고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출토된 예이다. 아가리가 넓은 호의 어깨에는 형태가 동일한 4개의 작은 광구호를 부착하고 하나의 구멍을 뚫고 있으며 둥근 바닥을 가지고 있는데, 높이는 17.4cm 이다. 받침으로 사용된 고배는 높이가 15.0cm로서 배신의 아가리는 넓고 그 아래에 2조의 돌대를 돌리고 그 밑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다. 대각은 그리 높지 않으며 세장방형의 투창을 4곳에 뚫고 각 투창 사이의 하단에는 원형 구멍을 뚫었다. 한편 대각의 바닥은 일반적인 고배와 달리 막음 처리를 했는데, 그 안에는 2개의 토제 구슬이 담겨져 있어 흔들면 방울처럼 소리가 난다. 이러한 형태의 소호장식광구호는 중국에서는 우리엔콴(五聯罐)이라 불리며 청자로 제작된 것이지만, 후지엔성(福建省)민허우 통꺼우산(桐口山) 출토의 동진시대 것과 통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발견된 예를 보면 장식호와 받침인 기대가 부착된 상태로 제작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특히 6세기 중엽이후의 것들은 매우 높은 기대가 부착되어 있다.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에서 발견된 중국 동진대의 청자는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다수 발견 예가 있다. 한편 소호장식유공광구호는 일본의 고분시대의 스에끼(須惠器)와 토기제작수법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고창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유물자료를 볼 때, 봉덕리 주변의 마한 분구묘와 집자리를 축조했던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폭넓은 국제적 교류를 통해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 문화재·학술
  • 기고
  • 2021.12.14 17:21

전주국립박물관 디지털 굿즈로 문화유물 알린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홍진근)이 태블릿PC와 모바일폰 환경에서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굿즈 굿노트 템플릿서비스를 6일부터 제공한다고 밝혔다. 노트 필기 앱에서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서식 문서인 굿노트 템플릿은 월간 다이어리와 자유로운 기록이 가능한 무지 다이어리, 자신만의 전시 후기를 담을 수 있는 전시 다이어리 속지가 담겨있다. 월간 다이어리 속지와 전시 다이어리 속지는 전주의 옛 한지 느낌을 살려 제작됐다. 국립전주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청자 모란 구름 학무늬 매병등의 스티커로 실제 다이어리처럼 꾸밀 수 있다. 무지 다이어리 속지는 국립전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비 서화가 이정직(1841~1910)의 묵죽도 6폭 병풍 를 주제로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선현들의 작품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만날 수 있다. 함께 제공되는 모바일 배경화면은 매월 박물관의 대표 유물들로 주제를 바꿀 수 있도록 제작됐다. 전 낙수정 범종을 필두로 내년 1월부터 선보인다. 오는 25일까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벤트도 진행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내려 받은 굿노트 템플릿 혹은 모바일 배경화면을 사용하는 모습을 찍어 개인 SNS에 올리고 댓글로 링크를 달면 추첨을 통해 선물을 증정할 예정이다. 박물관 홍보 담당자는 이번 디지털 굿즈 드림을 통해 박물관의 전시 및 문화행사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디지털에 특화된 젊은 세대에게 지역 문화유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2.06 17:24

“삼례출신 김춘배 의사 단독으로 독립투쟁한 대표 사례”

전북 삼례 출신인 김춘배 의사는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연길 일대에서 부호를 협박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에 체포, 함경북도에 있는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수감 기간 동안 재소자들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1934년 출옥 후 공산촌락을 건설할 작정으로 혼자 함경북도에 있는 신창주재소에서 대량의 총기와 실탄을 탈취했다가 며칠 후 체포된다. 그는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해방 후 출옥했지만 이듬해 사망한다. (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가 지난 26일 전주중부비전센터 글로리아홀에서 전북향토문화연구회의 학술활동과 독립투사 김춘배 의사의 항일투쟁을 개최했다. 학회에서는 김춘배 의사의 집안과 단독으로 의거를 일으킨 과정, 역사적 평가를 살폈다. 김춘배 함남 권총 의거를 발제한 황수근 평택문화원 연구원은 △삼례에서 살던 김춘배 집안이 간도로 이주했던 이유 △정의부 가담 후 군자금 모금 양상 △함남권총의거 계획 수립 △권총의거의 경과 △권총의거의 역사적 성격을 조명했다. 황 연구원은 김춘배는 군자금 삼만 원을 모금한 뒤 만주로 넘어가 공산촌을 건립한다는 확실한 의도를 갖고 함남권총의거를 일으켰다며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고 개인이 단독으로 의거를 시행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항일운동에서 1930년대 군자금 모금 활동의 한 사례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독립투사 김춘배 의사 가계로 보는 韓民族 現代 微視史를 발제한 김규남 (협)지역문화연구공동체 모정이사는 김춘배의 가계를 통해 한국, 북한, 간도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사를 살필 수 있다며 이는 지역사로 보는 한민족 미시사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삼례에서 일제 침탈에 맞서 김춘배 집안의 김계홍, 김창언 등이 결연히 일어났고, 청산리 전투 등 독립군 무장투쟁이 있던 간도에서는 김춘배가 활약했다며 그러나 분단의 역사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슬픔이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항일투사 김춘배 의사의 역사적 평가를 발제한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규홍최익현유장렬 의병장의 활동과 김춘배 의사의 의거를 비교분석했다. 주 교수는 당시 의병장들은 개인 재산을 내놓거나 친일파 부호를 약탈해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해왔다며 특히 유장렬 의병장이 후자의 사례인데 김춘배 의사의 함남권총의거와 일맥상통하다고 설명했다. 주 교수는 이어 김춘배 의사는 독립을 위한 일념으로 부호로부터 자금을 빼앗아 정의부로 보내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해 대량의 총탄을 노획했다며 이후 전주로 와서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행적이 발각돼 체포됐고,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대일투쟁 정신은 역사에 길이길이 보전돼야 한다고 부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1.28 17:57

“가야 봉수 존재…신호 노선 입증 관건”

장수 지역에 가야국 봉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선 신호전달 체계와 노선을 입증하는 게 관건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학계가 장수에서 발견된 봉수 유적을 놓고 조성시기와 형태 논쟁을 지속하는 가운데 새로운 논제가 제기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19일 대전 KW컨벤션센터에서 조선 시대 통신체계의 완성 봉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조선시대 봉수(부산서울)를 학술조사한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으나, 최근 장수에서 발견된 봉수 유적 규명 문제도 제기됐다. 발굴조사 당시 학계에서 화제가 됐고, 계속 논쟁이 진행 중인 탓이다. 문제제기는 조선시대 봉수제의 사적 추진 의의 발표를 맡은 정의도 한국성곽학회장이 시작했다. 우선 정 회장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를 발견하면 횃불로서 알리라는 기록이 있다며 이를 토대로 볼 때 삼국시대에 봉화를 사용했던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해서 최근 전북 장수지역 가야 봉수와 관련한 유적의 발굴조사도 화제가 됐다 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봉수는 정해진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노선이 규명돼야 한다며 산의 정상에서 구조물을 쌓고 불을 피운다고 해서 봉수는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봉수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구조와 라인이 발견되지 않은 장수 발굴 유적을 가야 봉수라고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김영관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장수 지역 크기에 비해 봉수가 너무 많은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 제2거 직봉(조선시대 전국 봉수망을 연결하는 근본 노선에 위치했던 봉수대)이 동래 다대포~한약 목멱산에 이른다며 비교적 먼 거리임에도 봉수가 44개소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가 축조해서 사용했다는 봉화가 100여 곳이 넘는다는 주장이 있다며 고대시기와 조선시대 봉수대의 밀도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인데 기술 발전의 산물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부연했다. LH밀양사업단장(문화재청 사적분과 전문위원)은 봉화 유적에서 가야 토기가 출토됐다고 해서 가야 봉화라고 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장수 지역에서 발견된 봉화유적에선 그랭이 축조 공법과 주공, 진안 서비산에선 암반부에 열쇠구멍이 보인다며 둘 다 가야국이 축조했다고 하는 데 구조적인 공통점이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전북 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봉화 유구를 무조건 가야의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차용걸 충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봉수 유적 조사발굴에 관한 제언을 남겼다. 차 교수는 개별 지역차원에서 너무 섣부르게 접근하면 충분한 고증없이 잘못 복원이 될 우려가 있다며 오랜 시간 조사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중앙 단위 행정기관이나 문화재 위원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1.21 18:00

“남원 옛 지명은 고룡(古龍)” vs “기문 사용 문제 없다”

지난 5일 남원시립도서관 지리산 소극장에서 열린 2021 남원시 가야역사 학술토론회-남원 가야육의 역사적 성격에서는 남원유곡리 두락리 가야 고분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고분을 조성한 주체를 기문(己汶)으로 표기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고대시기 남원 지역을 <일본서기> 등에 나온 기문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한 지가 논쟁의 골자다. 재야사학자들은 기문이 임나일본부설(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한 뒤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통치했다는 설)에 이용되는 <일본서기>에 나온 국명이라며, 등재자체를 반대하거나 용어삭제를 촉구하고 있다. 반면 일부 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사실이 학계에서 이미 밝혀졌고, 기문이란 국명은 일본서기 외 다른 사료에도 나온다며 기문이란 국명자체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박찬화 (사)대한사랑 연구위원은 기문 용어의 사용은 임나일본부설을 강화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박 위원은 기문설은 한국사왜곡에 앞장섰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소속인 이마니시 류가 제기했다며 근거는 <일본서기>이며 언어학을 적용해 <삼국사기>에 나온 남원의 옛 지명인 고룡(古龍)도 기문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을 보면 남원의 옛 지명은 고룡으로 나온다며 기문이라는 명칭을 남원에 비정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남부를 기문으로 비정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호남가야, 즉 임나가야의 논리를 만든 것은 이마니시 류, 아유카이 후사노신 등 일본 식민사학자들이라며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을 일본 열도에서 찾아야 하는 데 이들은 고대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명을 찾았다고 했다. 반면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 <일본서기>, <삼국사기>, <양직공도>, <한원> 등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기문국은 임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며 기문국은 백제 영역이었다가 반파국이 장악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문국은 임나일본부설을 설명하는 임나4현이라 임나 10국 등 어디에도 섞일 이유가 없고 왜에도 속하지 않았다며 임나의 기문국이나 임나 소국 기문은 공상의 용어라고 반박했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도 지금까지 축적된 고고자료로 남원 운봉고원의 가야 정치체를 기문국으로 비정한 것이라며 마한 분구묘와 가야 고총 180여기, 가야계 산성 및 봉화, 금동신발수대경 등이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어 유적과 유물, 즉 고고자료가 문헌의 핵심내용을 충족시켰다며 기문국 비정은 고고자료를 문헌과 연구성과에 접목시켜서 했다는 점을 밝혀둔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1.08 18:08

미륵사지 가상현실 활용해 복원 시도

백제 무왕 때 창건한 최대 규모의 절터인 익산 미륵사지가 가상현실을 활용한 방법으로 옛 모습을 되찾을 전망이다. 현재 미륵사지석탑만 남아있는 터에 각종 시설을 갖춘 절을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등을 통해 복원한다는 것이다. 익산시는 오는 2022년 1월~12월 가상현실을 활용한 미륵사지 원형복원 및 플랫폼 구축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5일 익산시에 따르면,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는 미륵사를 대웅전, 당간지주, 관음전 등을 갖춘 절로 AR과 VR을 활용해 복원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AR아바타 서비스인 제페토를 활용해 복원된 절에서 온라인 종교활동이나 명상을 할 수 있도록 구상하고 있다. 앞서 지난 8월 콘텐츠 구현방법을 위해 불교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문가 토론회도 개최했다. 이달부터는 사업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뒤, 관련예산을 편성할 계획이다. 익산시 관계자는 미륵사지 설화나 창건 주체에 대한 기록은 문헌사료와 유물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절의 건축구조는 나와있지 않다며 이로 인해 직접 복원하기보다 디지털기술로 구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아직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라며 콘텐츠를 현장에서 구현할지, 앱이나 모바일로 선보일지 추후 논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국내에서 실물이 사라진 문화재를 디지털 기술로 복원, 구현한 것은 지난 2019년 5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서울시가 함께 복원했던 서울 서대문(돈의문)이 첫 사례다. 두 번째 사례는 지난해 복원한 신라 최대의 왕실 사찰 황룡사이다. 익산시는 앞선 두 사례와 달리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일단 하나의 콘텐츠를 실험적으로 개발해서 운용을 해본 뒤,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보면.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행차했을 때,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자 왕비가 절을 세우길 청했다는 내력이 전한다. 이후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또 이 절터는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2009년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절을 창건한 사람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0.05 18:21

한국 최초 순교자 유해 입증 증거…목뼈에 남은 참수형 흔적, 백자사발지석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순교자인 윤지충은 생전에 과거시험 소과에 합격한 성균생원이었다. 치아건강은 좋지 않았는데, 치아 32개 가운데 4개는 충치가 있었으며 치주염도 앓고 있었다. 천주교 전주교구가 지난 24일 완주 초남이성지에서 유해 진정성에 관한 보고회를 열고 지난 3월 발굴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윤지충 동생)에 대한 자세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이들 순교복자 3인의 신체적 특징과 신분, 세례명, 생년, 본관 등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전주교구는 이날 유해 발굴 이후 4개월여에 걸쳐 고고학해부학적 검증 작업을 거친 결과를 자세히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순교자 3인의 유해는 넙다리뼈(대퇴골)가 매우 납작한 아시아계이며, 볼기뼈(관골)의 형태는 남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넙다리뼈와 정강이뼈 길이로 산출한 신장은 윤지충 바오로가 1653.8㎝, 권상연 야고보 152.53.8㎝, 윤지헌 프란치스코 163.93.8㎝였다. 치아가 온전히 보존된 윤치충의 경우 13,12,22,23번 치아가 충치였고, 생전 치주염 증상 이 있던 것으로 추정됐다. 이들 3인의 치아와 뼈의 상태로 추정한 사망 당시 연령도 사료 및 유물에 나온 기록과 거의 일치했다. 윤지충의 치아로 추정한 나이는 29~39세, 권상연은 31세~41세였는데, 기록에는 각각 33세와 41세로 나와 있다. 윤지헌은 27세~37세였고, 기록은 37세였다. 형벌의 흔적이 남은 유해 전신사진도 공개됐다. 참수형을 당한 윤지충은 다섯 번째 목뼈에서 예기(銳器날카로운 도구)로 손상된 흔적이 나왔고, 권상현은 목뼈가 없었다. 능지처참형을 당한 윤지헌의 유해는 둘째 목뼈, 양쪽 위발뼈, 왼쪽 넙다리뼈 등이 골절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해남 윤씨 친족 5명, 안동 권씨 친족 5명의 머리카락과 구강세포로 진행한 부계 유전자(Y-STR) 비교분석 결과도 이들 3인과 대부분 일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해 감식 총괄 책임자인 송창호 전북대 의대 교수는 유해의 주인공을 완벽히 밝혀내는게 쉽진 않았다며 사망 무렵 예기손상 흔적과 유전자 비교 분석결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순교자 이름과 직위, 집안, 과거 합격기록 등이 적힌 백자사발지석(誌石)도 이날 공개됐다. 사발 바닥엔 모두 한자 22자(字)가 쓰여 있었는데, 망인의 매장시점과 신분, 이름, 세례명, 본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윤지충의 지석에는 이름과 함께 聖名(성명세례명) 保祿(보록바오로)이 적혀 있었다. 당시 성균관에서 치르는 과거시험 소과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뜻하는 成均生員(성균생원), 성인이 된 이후 가진 이름을 일컫는 字禹庸(자우용), 본관이 해남윤씨임을 일컫는 本海南(본해남) 등이 남아있었다. 권상연의 지석에도 당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學生(학생)이 적혀 있었다. 학생은 성균관사학향교에 속한 유생이거나 품계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성인 때 또 다른 이름인 景參(경삼)이라는 의미인 字景參(자경삼), 본관이 안동권씨임을 의미하는 本安東(본안동) 등도 기록돼 있었다. 윤지헌의 묘에서는 다른 두 순교자와 달리 백제자기 접시가 수습됐는데, 묵서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26 16:38

(속보)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유해 문화재 지정될까

속보 =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인 윤지헌 프란치스코(윤지충 동생)의 유해가 230여년 만에 발굴된 가운데 이 유해들의 문화재 등재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구전(口傳)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순교자의 역사가 실체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유해는 박해를 받은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천주교사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형벌의 실제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25일 완주군 초남이성지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 진정성에 관한 보고회를 연다. 지난 16일 완주 초남이성지에 안치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검증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역사적 가치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유해 검증에 참여했던 전북대 전 고고인류문화학과 교수, 전북대 의대 송창호 교수 등도 참석한다. 전주교구 홍보국장인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는 지난 1일 유해발굴 관련 기자회견보다 더 자세히 검증과정을 보고하고 의의에 대해 자세히 논의할 것이라며 향후 한국 천주교사 분야에서 관련 연구도 해야 하고, 교황청에도 보고서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화재 지정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완주군청과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과 관련한 질문에는 아직 (유해를 발굴한 뒤 의의를 찾고 있는) 시작 단계라며 점진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며 말을 아꼈다. 실제 유해가 가진 실증적 가치도 크다. 1791년 신해박해로 참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은 목뼈 부분에 날카로운 도구에 잘린 흔적이 남아있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능지처참을 당한 윤지헌은 목, 팔 등에 절단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 3월 발굴된 무덤에서 나온 사발지석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정보와도 일치했고, 윤지헌의 묘에서는 백자제기가 출토됐다. 실증 자료로 근거로 한국 천주교사를 상세히 연구할 토대가 생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함께 향후 순교자 유해를 발굴할 때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호남교회사연구소장인 이영춘 신부는 조선시대 천주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사료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선시대 형벌의 실제뿐만 아니라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에서 발굴된 사발지석은 문화사적인 가치가 있다며 게다가 윤지충은 다산의 고종사촌관계로 당시 남인 정치세력과 천주교의 연계관계 등 천주교사를 정밀하게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유해의 문화재 지정 여부를 두고는 문화재청에서도 지정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개인적으로도 천주교 유산을 넘어 한국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23 17:23

[직격 인터뷰] 곽장근 교수 “전북 가야설에 대한 반박 논문 통해 해야 한다”

곽장근 교수 속보 = 최근 전북 가야 문화권을 비정하는 기문(己汶)과 반파(伴跛)를 두고 사료문제와 유물유적 검증문제가 쟁점이 된 가운데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의 입장에 관심이 쏠린다. 오랜 세월 이 분야를 연구해 왔으며, 해당 학설의 주창자이기 때문이다.(관련기사 1일 13면, 7일 9면13면) 논란은 남원지역 시민사회 단체 등이 남원 가야계 소국=기문 등식화를 두고 문제를 제기한 데서부터 시작했다. 이들은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신청서에 명시한 기문용어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한 뒤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료인 <일본서기>에 나온 국명이라는 이유다. 반면 남원시는 유네스코에 제출된 서류를 전문가가 검토하는 단계라며 현 상황에서 신청서 내용을 수정하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도 사료해석을 비롯해 봉수제철유적의 존재유무와 조성시기를 놓고 지역사회와 학계에서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이에대해 장수군은 학계에서 다수 학자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반파 용어 사용을 당분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본보는 곽장근 교수의 입장을 들어봤다. -장수군의 반파 보류 결정 어떻게 보시는가 행정은 객관성이 생명이다. 결정을 존중한다. 다만 나는 학자로 행정보다 앞서 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장수 가야에 대한 과제는 특별히 과제라고 말하긴 어렵다. 역사고고학자로서 40여 년간 연구하면서 쌓은 고고학 자료도 있고 문헌학자들의 연구 성과와도 일치가 된다. 설명이 안 될 부분이 없다. 그리고 최근 10개 봉화를 중심으로 발굴 했는데, 가야 토기만 나왔다. 대가야 것도 아니었고 고려, 조선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불 피우는 흔적도 나왔다. -고증을 시작하는 단계로 봐도 되는가 그렇다. 이제 시작이다. 학자로서 학문의 방향성을 잡고 결론을 도출해나갈 것이다. 학술대회 통해서 계속 검증을 받겠다. -남원 시민사회단체가 제기하는 기문문제 어떻게 보는가.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서 관심이 높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이며 폐기된 학설이다. 기문이란 용어는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양직공도>, <환원> 등에도 나와 있다. 일본서기만 가지고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동북아 정세와 역사 맥락배경 등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다. 일본중국 학자들과 수차례 학술대회를 열어 검증도 했다. -전북 가야를 비판하는 매체를 많이 보는가 유튜브, 칼럼 등 다 보고 있다. -비판하는 측을 향한 입장은 어떠한가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만 칼럼과 유튜브, 말로 비판할 게 아니라 논문으로 반론을 제기해 달라. 나는 논문 수십 편으로 내 이론을 세상에 알렸다. 그렇기 때문에 팩트를 기반으로 쓴 논문을 통한 문제제기는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논문과 책이다. 이 방법이 우리의 가야를 만들어갈 수 있고 전북의 미래를 구현할 수 있는 길이다. -향후 계획은 올해까지 논문을 쓰고, 앞으로 가야사 연구는 후학들에게 맡길 계획이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작고 있기 때문에 좋은 논문이 양산될 것으로 믿는다. 다만 대중서는 계속 쓰면서 도민들께 인사를 드릴 것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07 17:43

장수군 ‘반파=장수가야설’ 학설 인용 보류

장수군이 최근 지역일대에 반파(伴跛)라는 독자 가야세력이 존재했다는 학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 대해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고대사학계와 지역사회에서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 논란이 일자 기존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장수군이 해당 학설이 사학계에서 인정받은 뒤 다시 사용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관련유물유적과 문헌사료를 통해 검증해야 하는 과제가 대두하고 있다. 장수군은 6일 전북일보와 통화에서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 학술적인 논란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는 것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학계에서 인정받으면 그 때 다시 반파라고 명명해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했다며 현재는 장수지역에 존재했던 가야세력으로 칭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장수군은 오는 10월 19일 군민의 날 행사에서 반파국 선포식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보류한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그 동안 한국 고대사학계와 지역사회에서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와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문헌 <일본서기>와 <양직공도>에 나온 반파(伴跛, 叛波)를 토대로 장수에 반파국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일본서기>에 나온 반파는 백제와 3년 전쟁(514년~515년)을 치르면서 봉수를 쌓아올렸다는 기록과 지표조사를 통해 봉수터로 추정되는 117곳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대다수 가야사 전공학자는 사료에 나온 반파를 대가야로 낮춰 부르는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5~6세기 백제와 대가야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다. 또 <일본서기>에 등장한 반파 관련 내용도 중국문헌 <삼국지> 내용을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봉수터도 가야의 것만이 아니라 삼국,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시기에 걸쳐 분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장수 시민사회에서는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쓰인 사료라며 문헌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장수군의 입장대로 추후 반파=장수가야설을 다시 내세우기 위해서는, 유물유적과 사료 검증을 통한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에대해 곽장근 교수는 장수군의 고민과 입장은 충분히 존중한다며현재 발굴이 미진한 상태로 더 많은 발굴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곽 교수는 최근 10개 봉화를 중심으로 발굴을 했는데, 전부 장수 독자세력설을 증명할 수 있는 가야토기만 나왔다며 대가야 토기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금까지 30년 넘게 가까이 발로 뛰면서 가야 시대 유적을 발굴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40여편 이상의 논문을 써왔다며 앞으로도 대중서적을 쓰면서 전북 가야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입장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열리는 학술대회와 다른 학자들이 쓰는 논문을 통해 제가 주장하는 전북 가야에 대한 검증을 꾸준히 받겠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06 18:02

지역 내 가야사 갈등 지속 이유는

남원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신청서 기문(己文) 삭제 요구와 반파 장수 가야설등 소위 전북 가야사와 관련해 지역사회에서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를 두고 자치단체가 역사를 검증 없이 지역 활성화 차원에서 접근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진단이 나온다. 유물유적이 묻혀있는 곳을 지표조사를 하거나 발굴한 뒤, 통설과의 비교분석, 비판적인 접근이 부족한 상태로 전북 가야의 유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 논란이 있는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전국 고대사학계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철저한 검증과 지역사회의 공감대 형성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바른 등재를 원하는 남원지역 초중등 교사모임에 속한 한 중학교 교사는 교육청에 남원가야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서류에 적힌 기문 삭제를 부탁드린다는 민원을 넣었다. 이를 두고 지역사회에서 계속 갈등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앞서 남원 지역 시민사회 단체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문이라는 명칭은 <일본서기>에서 당시 남원 일대를 지배한 정치체를 일컬은 것이라며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곽장근 군산대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며 가야 소국의 하나인 기문이란 용어는 일본서기 뿐 아니라 다른 사료에도 나와 있다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비슷한 입장을 내놓은 상태다. 반파 장수 가야설을 두고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실학의 비조인 성호 이익은 최초로 가야의 범위를 전북 동부까지 확장했다며 <일본서기>와 <양직공도>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반파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특히 섬진강 하구는 반파국이 남해로 나가는 수송관문이고, 이와 연계된 운봉고원과 장계분지에서는 막대한 제철 유적이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반면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장은 역사와 고고학은 문헌과 물증으로 입증해야 한다며 봉화망의 실재(實在)도 의문이고, 언제 운용되었는지도 모를 제철지를 놓고 가야 제철지로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섬진강 물길이 반파의 수송로 역할을 했다면 장수와 섬진강 하구는 수로로 연결돼야 하는데, 장수와 장계는 금강수계라고 부연했다. 자치단체가 국정과제에 따른 전북 가야사 발굴을 명분으로 검증 없이 지표조사와 발굴만 밀어붙인 게 이같은 갈등의 원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실제 전북 동부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발견된 제철, 봉수, 고분은 800여개로 알려져 있지만, 전부 가야시대 유물로 보긴 힘들다는 게 고대사학계의 주장이다. 봉수는 조성시기와 간격문제, 제철은 입지 문제가 주요 화두다. 특히 제철은 전근대 제철시기가 망라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이 없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치단체 관계자는 문재인 정권 이후 가야사 관련 예산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급하게 (지표조사, 발굴을) 추진한 감이 있다고 말했다. 진안 마령고 이상훈 역사교사는 역사를 지역 활성화 차원에서 접근한 게 문제라며 검증도 안된 상태로 섣부르게 (가야 유물이라는) 결론을 내놓다보니 많은 사람들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역사학자는 가야사 육성이 국정과제가 되면서 정부가 무분별하게 예산을 투입한 것부터가 문제라며 급하게 추진하다보니 조사결과도 오류가 많고 나중에 이를 바로잡는 데도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사료 자체에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를 엄정한 비판없이 활용한 탓도 있다고 부연했다. 이정린 전북도의원은 가야사 연구는 학계에서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분야로 알려져 있다며전북도가 하반기에 개최할 예정인 전북가야 역사 재정립 학술대회에서 기문가야 논란을 비롯한 여러 부분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8.31 18:21

(속보) 남원 유네스코 등재 고분 일제 ‘기문국’ 용어 사용…교육부 민원

속보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예정인 남원 유곡두락리 고분군에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인 기문을 명시한 사실과 관련된 논쟁이 교육부까지 전달됐다.(관련기사 20일 13면, 25일 9면)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바른 등재를 원하는 남원지역 초중등 교사모임에 속한 한 중학교 교사는 최근 교육부에 민원을 넣었다. 이 교사는 세계문화유산 위원장이신 유은혜 교육부 장관님이라며 남원가야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서류에 적힌 기문 삭제를 부탁드린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원지역은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앞두고 갈등이 심해졌다며 최근 가야문화유산을 임나일본부설 근거자료인 <일본서기> 속 지명에 따라 기문으로 설명에 넣어 등재하려고 하기 떄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한 뒤,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이다. 이 교사는 이곳 남원은 역사적으로 항일의 뼈아픈 현장이라며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잘 막아낸 곳이지만, 정유재란 때 만여 명이 순국한 피흘린 역사의 고장이며, 동학농민군들의 죽음이 있었던 처절한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런 땅에 식민사관의 근거자료를 마련해주는 용어인 기문이란 두 글자를 꼭 넣어야 하는가라며 기문이란 이름에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위원인 이마니시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이 임나일본부설을 되살리기 위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나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정됐다며 믿으라고 한다며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사례를 예로 들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이 교사의 민원 요청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또는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인 학자는 물론 대다수의 일본인 학자들도 부정하고 있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 합의되기도 했다고 답변했다. 이 교사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서 영어 원문에 기문의 근거를 <일본서기>로 든 점도 지적했다. 실제 세계문화유산 등재 원문에는 기문의 출처를 Japanese history Nihon Shoki(Chronicles of Japan)으로 밝히고 있다. 이 교사는 기문이란 지명이 여러 차례 강연과 홍보를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여러 사서에 기록됐다고 전달했던 내용과 다르게, 일제시대 임나일본부설주장을 합리화하던 <일본서기>마을 근거로 제시했다고 했다. 현재 이 민원은 교육부에 접수된 상태다. 이에 대해 무소속 이용호 의원(남원임실순창)은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기문국이라는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며 이와 관련, 남원시는 세계유산등재 추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적극적인 소통과정을 거쳐야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8.30 17:34

“신석정 시인 고택 사라지면 안 된다”

속보 = 전주시 노송동 주민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비사벌초사 보존대책위원회(보존대책위)를 결성했다. 비사벌 초사는 신석정 시인(1907~1974)이 생전 거주하던 고택인데, 노송동 지역에 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고택의 철거여부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송동 주민과 전북지역 18개 문화예술단체(전북문인협회 등)가 지난 4일~8일 보존대책위를 구성한 뒤, 고택의 존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보존대책위는 10일 문화도시로서 자긍심을 지켜야 할 전주시가 개발 논리에 밀려 역사 문화적 가치를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석정 시인은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았다며 1961년 조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시인 단식의 노래, 춘궁은 다가오는데, 전아사를 발표했다가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시인이 남긴 삶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전주, 특히 이곳 노송동 일원을 떼어놓고서는 말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실제 비사벌초사는 당대 시인들과 교류하는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고택에는 이병기, 박목월, 김영랑, 김남조, 박두진 시인 등이 자주 들렀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던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이 출간한 시집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댓바람 소리> 중 3권을 비사벌초사에서 썼다. 대책위는 전북대학교, 영생대학에서 시론 등을 강의하기도 했고, 1963년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등학교)에서 정년 퇴임하셨다며이후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비사벌초사에서 거처하셨다고 부연했다. 대책위는 비사벌초사를 문화유적으로 온전히 보존하고, 근처에 신석정문학관 건립을 전주시와 전주시의회에 강력하게 촉구한다며비사벌초사는 미래에대에게 남길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 가치와 정신이 보전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주시 미래유산 14호로 지정된 신석정 시인 고택 비사벌초사의 존재를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고, 이를 보존하기 위한 서명운동(SNS방식 병행)을 전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8.10 17:41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무형유산을 논하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종희)이 디지털 신기술(ICT)을 무형유산 전승기록과 콘텐츠 활용에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한다. ICT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있는 가상현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을 의미한다. 국립무형유산원은 29일 오후 2시 원내 국제회의실에서 신기술(ICT)과 무형유산 전승활용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기록이 어려웠던 무형유산 핵심 기예능이 데이터로 구현되는 방안과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생한 체험이 가능한 방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대회는 안재홍 카이스트 교수의 주제발표 무형유산에서 신기술 적용 영역과 방향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진행되는 1부는 유정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와 임정환 한국산업기술문화재단팀장이 무형유산 기록보존을 위한 신기술 현황 및 고도화 방안을 주제로 논의한다. 2부에서는 유상현 서경대학교 교수와 최경준 바이더미디어랩 감독이 각각 무형유산 체험의 질적 향상을 위한 실감형 콘텐츠 개발 방안, 다양한 미디어 아트 기술을 이용한 무형유산의 표현 방법을 발제한다. 종합토론은 안재홍 카이스트 교수를 좌장으로 김진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실장, 장지헌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김주섭 서강대학교 교수, 유미옥 서경대학교 교수, 송민선양진조 국립무형유산원 과장이 발표자 전원과 심도 있는 의견교환이 이뤄질 예정이다. 학술대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화와 전자우편으로 사전신청을 받아 선정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다. 참석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국립무형유산원 유튜브에서 생중계도 할 예정이다. 앞서 무형유산원은 지난 21일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당장 직무대리 최원일)국립중앙극장(극장장 김철호)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종관)와 공연예술 문화유산 보존활용을 위한 업무협약(MOU)도 체결했다. 이날 협약으로 무형유산권과 4개 기관은 △공연예술 아카이브 발전을 위한 정책개발학술연구 등 협력 △아카이브 서비스의 원활한 운영과 확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아카이브 운영을 위한 법 제도적 개선 노력을 공동으로 펼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27 17:46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 매듭지어야”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독립군이나 의병과 마찬가지로 항일 활동을 벌였지만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역사적 행적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해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교육관에서 개최한 정기학술대회 반일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농민군 서훈에서는 근대사학자들이 모여 예우방안과 관련법, 2차 동학농민혁명의 반일항쟁 성격 등을 두고 논의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올 4월말 기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로 공식 등록된 인원은 총3687명이다. 이들 가운데 1894년 3월 1차 봉기 참여자는 전체 6%인 211명, 9월 이후 2차 봉기 참여자는 85%인 3151명에 이른다. 2차 봉기가 서훈문제가 쟁점화 된 항일의병전쟁기이다. 유족은 모두 1만2071명이다. 자녀는 10명에 불과하며, 손자녀는 1206명, 증손녀 4590명, 고손자녀는 6265명이다. 그러나 이들 참여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추진되는 기념사업이 전부이다. 김양식 청주대 교수는 독립유공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국가 공훈록에 등재돼 서훈을 받는다면서 그 후손은 취업, 요양, 주택우선 공급, 정착금 등 다방면의 지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반면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은 명예만 회복됐을 뿐 실질적인 국가예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문제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법률은 일제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독립유공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보상토록 명시하고 있다. 심사 기준년도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895년 전후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로 한정한다. 김양식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직전에 일어났으므로 충분히 심사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 지가 쟁점이다. 허수 서울대 교수는 현재 학계의 입장을 봐도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입장을 통일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서훈을 받는 독립유공자처럼 동학농민혁명군도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전봉준의 일제 법정 심문에 답한 재판기록인 <전봉준공초>에는, 전봉준이 2차 동학농민혁명의 목적을 일본의 침략반대와 보국안민으로 답변한 기록이 있다. 실제 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에도 국경을 침범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사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으며, 각 지역 일부 농민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유생, 관리들과 연합전선을 추구한 사례가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이를 두고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강토침략으로 인식하고 대적했다며 항일투쟁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국왕이 일제에 포로로 인신이 구속되는 등 1894년은 이미 국권이 탈취된 상태라며 당시 동학농민군은 일본 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전국에서 봉기했다고 설명했다. 관련법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로 개정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법적 근거를독립유공자법에 따를 경우 기존의 법 관행상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자체 법률을 제정하자는 것이다. 김양식 교수는 역사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518민주유공자법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며예우 방안으로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등 구체적인 사항을 명시했는데,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을 개정할 때도 이 사항을 참고해 예우조항을 조문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립묘지 조성, 동학농민군 현충사업 지원 등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는 동학농민군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예우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 전체를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외세, 반침략, 항일 구국 투쟁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학농민군의 독립운동 참여가 충분히 근거를 얻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22 17:01

[전북사의 과제] ④에필로그

1주일간 연재했던 전북사가 종결했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되짚어보면, 후백제 왕도인 전주에 대한 문헌기록과 유물유적, 고조선 준왕이 금마(익산)로 내려왔다는 기록에서 출발한 마한사, 남원장수지역에서 확인된 봉수와 제철의 존재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가야사를 소략한대로 짚었다. 에필로그에서는 전북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백제사를 비롯 각 역사별로 보완해야 할 점을 제언한다. 전북의 백제사는 다른 시기 역사보다 상대적으로 논쟁이 적은 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관세음응험기> 등 문헌사료에 익산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무왕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등 고고학적 유물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와 왕궁리 유적은 익산이 왕도로서 존재했다는 데 힘을 보태준다. 삼국사기에는 익산에 있던 궁궐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고, 왕궁리 유적 내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지칭한 명문이 있다. 이를 두고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천도설과 수도와 동일한 행정구역인 별부별부설 등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익산이 백제 무왕대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는 해석은 연구자들끼리 일치한다. 앞서 지난 2015년에는 왕궁리 유적 주변이 시가지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남쪽 1.3㎞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물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왕궁리와 제석사지 사이, 궁 남쪽의 탐리마을에서는 기와편, 건물터 등 생활유적도 확인됐다. 백제 왕도로서 익산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도성체계라는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왕궁리 유적은 궁성, 미륵사는 국찰, 쌍릉은 왕릉 등으로 비정하고 고고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며 익산에 산재한 유적은 동시대의 것들로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야 익산도성 본래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고 했다. 전주가 후백제 왕도로서 갖는 역사적 정체성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는 후백제왕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전주 동고산성,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 등 각지에서 산성유적도 확인된다. 그러나 대부분 유적이 땅속에 매장된 상태로 성격규명이 미진한 상태다. 후삼국 시대에 존재했던 왕조의 수도인 만큼 도성, 궁성, 분묘, 사찰, 생산시설 등을 세분화해서 발굴 조사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차상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주무관(전 전라문화유산원)은 고대도시 구조라는 시각을 전제해야 한다며 여러 시설의 위치를 연계하면서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한사는 중국 문헌 <삼국지>와 <후한서>, 한국사료인 <고려사>. <제왕운기> 등에 집단의 존재가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전북 등 호남지역 사학자들은 1970년대부터 발굴에 매진한 결과, 마한사를 설명할 수 있는 토기, 분구묘, 동검, 유리구슬 등 다수의 유물을 발굴했다. 그 결과 마한이 전라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규명했으며, 소국 11개~12개 정도가 존재했다고 분석했다. 중국-마한-변진한 왜로 연결되는 국제교역망도 밝혀냈다. 다만 기존 유물유적 발굴과 연구는 단편적 편린만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게다가 마한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자 육성과 고고학적 보완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야=연맹왕국이라는 틀을 깨고 전북 동부 지역에 독자적으로 존재했다고 이론을 세운 점을 두고는 학계에서 평가가 긍정적이다. 가야로 통칭하는 각국에 대한 분석에서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을 간과했던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근거로 쓰이는 봉수의 조성시기, 제철의 입지, 문헌사료의 해석을 두고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보완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사료 자체로 문제점이 제기된 <일본서기>의 해석문제를 두고는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9 18:2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