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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금지면서 220여 년 전 ‘마을 규약’인 향악안 보관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에서 조선 정조 시대에 쓰인 220여년 전 향약안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향약안은 당시 마을의 자치규약을 담고 있는 문서로 마을 헌법이라 일컬어진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 마을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사료로 평가받는다. 현재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향약안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 지정여부에 관심이 모아진다. 향약안의 존재가 밝혀진 시기는 지난 4월이다. 마을회장인 배용춘 씨는 1980년대 중반 마을의 한 집안 벽장 안에서 발견됐다며 일제시기, 한국전쟁시기를 겪으면서도 마을 어른들이 소중하게 보관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사유재산이 아니어서 마을 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을에서 보관 중인 향약안은 기지입암향약안(機池笠巖鄕約案), 기지방입암촌향약안(機池坊笠巖村鄕約案) 등 6권이다. 작성일자는 1795년(정조 19년)이며, 작성자는 뒷부분에 김흥백, 박동신으로 적혀있다. 내용은 예, 효 등 인간이 지켜야 할 덕목과 불효, 절도, 소란을 일으킨 자에 대한 처벌조항이 담겨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향약안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받도록 하기 위해, 남원향토박물관에 연구검증을 의뢰한 상태다. 향약안을 살펴보고 있는 이경석 학예연구사는 사료적 가치와 보존가치가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학예사는 18세기 후기 서구가 격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지역사회는 어떤 생활방식을 고수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라고 했다. 이어 마을의 농업경제상황도 알 수 있는데 수확량이 상당히 많은 부촌임을 추론할 수 있다며 전북 내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료라 보존가치도 있고 연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관련 전공 교수등과 함께 면밀히 검증해야한다고 말했다. 강용구 전북도의원(남원시 제2선거구, 민주당)은 도 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강 의원은 향약안에 대한 정확한 연구검증이 선행돼야 하겠지만 추후 가치있다고 평가를 받을 경우 문화재 지정을 적극 고려해 봐야 한다며가치있는 유물이 문화재 지정이 안 된 상태로 민간에서 보관하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세희 기자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5.13 18:56

“동학농민 탐관오리 영세불망비 안내문 설치해 악행 기억해야”

동학농민혁명기념일(5월 11일)이 127주년을 맞은 가운데 혁명을 유발한 탐관오리들이 전북에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치적비)에 안내문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자신이 저지른 폭정을 숨기고 선정을 베푼 관료로 남기 위해 세운 위장 송덕비(頌德碑)지만, 풍화작용으로 훼손돼 이들의 역사적 악행이 감춰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도내 자치단체는 관할에 있는 비석의 존재나 성격조차 모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11일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전북에서 확인된 선정비나 영세불망비는 67기다. 이들 가운데 균전사 김창석의 영세불망비 4기(독자 오동표 씨가 최근 발견한 비석 2기 포함)와 전운사 조필영의 영세불망비 1기(오 씨 지난 10일 발굴 비석)가 관심을 모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에 앞서 전라도 백성들을 상대로 악행을 저지른 탐관오리들의 비석이기 때문이다. 당시 세곡담당관리였던 김창석과 조필영은 전라도에서 세곡을 징수할 때마다 불법항목을 만들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으며. 이로 인해 유배를 갔다. 그러나 고종은 조용해지자 둘을 사면시켰고, 이들은 자신의 악행을 숨기고자 백성들을 부추겨 공덕비를 세웠다는 말도 전해진다. 완주, 김제, 정읍에 있는 이들 비석들은 굵게 새겨졌으나 풍화작용으로 훼손돼 읽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비신의 윗부분과 귀퉁이가 깨진 것도 있다. 일부 자치단체 면사무소와 지역 주민들은 비석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훼손상태가 심해져 완전히 알아볼 수 없기 전에 비문의 내용을 기록한 안내문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동학농민혁명을 야기한 탐관오리의 전횡과 기억을 사료화하자는 것이다. 실제 동학농민혁명 당시 탐관오리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졌던 조병갑의 선덕비는 경남 항얌군역사인물공원안에 안내비와 함께 서 있다. 앞서 동학혁명 120주년이 되는 지난해 함양군 의원들이 함양인의 선비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며 철거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현재는 잘못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 의미로 보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안내문을 설치하기 전 발견된 영세불망비에 대한 정확하고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탐관오리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살아있을 때 백성들을 압박해서 세웠는지, 혹은 후손들이 세웠는지에 따라 비석이 갖는 역사적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인물의 집안과 관련한 시비문제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5.11 18:08

이일주 명창 후계자 송재영·장문희 명창 동시 인정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송재영(61) 이사장과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장문희(45여) 수석단원이 이일주(85여) 명창의 뒤를 이을 공식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다. 전북도는 지난 7일 무형문화재위원회에서 이같이 확정한 사항을 도보에 고시했다. 도보에 따르면, 송 이사장과 장 단원 모두 보유자 인정 1단계2단계심사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1단계 심사는 전승 활동 실적, 전승 기량, 대상자 평판, 건강 상태, 전승 기여도, 2단계는 심사 실기 능력, 교수 능력, 시설장비 수준, 전승 의지 등을 평가한다. 그러나 국악계에서는 한 문파에서 후계자 2명이 나온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에 도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공정하게 심사했다는 입장이다. 도 관계자는 2년 전 법령이 바뀐 이후 중복지정이 가능해졌다며 태평무,승무 등에서 무형문화재로 여러명이 지정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도 차원에서 중복 지정된 사례는 처음이라고 전했다. 무형문화재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A교수는 두 명창 모두 실력이 출중했다며정량평가에서 고득점을 받았고, 경력을 살펴봤을 때도 오랫동안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해 문화재로 손색이 없었다고 밝혔다. 한 문파에서 후계자 2명이 나온 사례를 두고는 자치단체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 심사를 한다며관련법이 개정 후 2018년부터 한 문파에서 여러 명씩 보유자가 나오는 사례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태평무 같은 경우 한 스승의 밑에서 4명의 보유자를 지정했고, 이매방 선생 문하에서는 승무 2명, 살풀이 2명의 보유자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한편 도는 지난달 이옥희(이일주씨 본명) 바디 판소리 심청가 전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송 이사장과 장 단원을 지정(인정) 예고한 바 있다. 바디는 판소리에서 명창이 스승에게 전수받은 다듬은 판소리 한바탕 전부를 의미한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5.09 18:05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유 동학농민군 편지 국가등록문화재 등록 예고

오는 1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앞두고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유한 동학농민군 편지가 국가문화재로 등록예고됐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동학농민군 편지와 제주 이시돌목장 테시폰식 주택 2건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6일 밝혔다. 동학농민군 편지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유광화(劉光華, 1858~1894)가 1894년 11월 경 동생 광팔(光八)에게 보낸 한문 편지이다. 유광화(劉光華)는 양반가의 자제로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로 활동하며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화순전투 등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편지는 나라를 침략한 왜군(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니, 필요한 군자금을 급히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편지는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의지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이 농민뿐만 아니라 양반 층도 참여한 범민족적 혁명이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또 해당 편지는 동학농민군의 일원이 전투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매우 희소한 편지 원본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제주도 이시돌목장 테시폰식 주택은 아일랜드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의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1960년대 초 제주도 중산간 지역 목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간이 쉘 구조체 공법의 건축물 2채다. 문화재청은 이번 등록 예고되는 2건에 대해서 30일 간의 예고 기간을 거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백세종
  • 2021.05.06 20:00

부안 청자 매병, 도자기 최초 전북도 유형문화재 지정

청자 상감 정사색명 유로문 매병 부안군 청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자 상감 정사색명 유로문 매병(靑瓷 象嵌 淨事色銘 柳蘆紋 梅甁)이 도자기로는 최초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4호로 지정됐다. 부안군은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가 지난 23일 열린 심의를 통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청자 매병은 고려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2017년 9월 김완식 선생으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은 작품이다. 매병 몸체에는 버드나무와 갈대 무늬가 흑백상감 기법으로 장식돼 있으며, 몸체 중앙에는 정사색(淨事色)이라는 글자가 흑상감으로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정사색은 고려의 국왕이 도교(道敎)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준비를 맡아 하던 왕실 내전의 관청이다. 『고려사高麗史』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고종 45년(1258)에 정사색이 처음으로 확인되고, 공양왕 3년(1391)에 혁파됐다. 이 매병에 새겨진 정사색 글자와 상감무늬, 비례가 맞지 않아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형태 등은 사온서(司醞署), 보원고(寶原庫), 덕천고(德泉庫), 의성고(義城庫) 등의 관사명(官司名)이 표기된 14세기 중후반의 청자 매병과 성상소(城上所), 사선서(司膳署)가 표기된 15세기 1/4분기 청자 매병 간의 양식변화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아울러 현재까지 고려청자 가마터(窯址)에서 정사색명이 확인된 바가 없으며, 전해오는 완형의 청자 중에서도 유일하기 때문에 한국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고려 말~조선 초 사이의 요업체제 변화 및 상감청자 편년 연구의 기준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했다. 권익현 군수는 부안군 소장 청자 매병은 고려시대 문헌에 기록된 정사색 관사명이 새겨진 유일한 예로 희소성과 학술적 가치를 겸비한 중요유물로서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홍석현
  • 2021.05.02 17:00

남원문화원 조선왕조실록 남원편 발간

남원문화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151-2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남원 기사를 모은 조선왕조실록 남원편 상하권 발간 보급에 나섰다. 남원문화원(원장 김주완)은 지난해부터 2년 사업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남원 관련 기사를 취합 발간했다고 26일 밝혔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사회경제문화정치외교법률풍속 등 역사적 사실들을 기술하고 있으며 연 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총 1967권 948책에 이른다. 하지만 남원문화원은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남원 기사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고 남원의 내용을 종합해 보급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발간을 추진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시조인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기록해 왜곡된 부분이 많아 포함하지 않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27대 순종까지 519년간의 기록 중 남원 기사를 모두 발취해 책으로 엮었다. 이번에 발간된 조선왕조실록 남원편 상권은 태조실록에서 명종실록까지 340페이지이며 하권은 선조실록에서 고종실록까지 7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주완 원장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원의 기록을 찾고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왕조실록 남원편을 발간 보급함으로 남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중요한 사건 내용과 행정, 인물 등이 수록돼 있다며선조실록에서는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의 전투 상황에 대해 많은 부분이 차지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남원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신기철
  • 2021.04.26 19:50

‘이재난고’, 고창군으로 돌아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재 황윤석(1729~1791)이 평생에 걸쳐 보고 들은 모든 지식을 기록한 백과전서 이재난고 일부가 황윤석의 고향인 고창군으로 돌아온다. 26일 고창군에 따르면 이재 황윤석의 8대 종손인 황병무씨가 이재난고와 이재유고 목판 100점을 최근 고창군에 기탁기증했다. 이에 군은 감사와 그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오는 30일 기탁기증 행사를 연다. 이재난고는 대실학자 이재 황윤석이 열 살 때부터 세상을 뜨기 이틀 전까지 53년 동안 온갖 다양한 정보들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다.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인 이재난고는 50여 책, 6000장 정도의 내용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일기류 중 최대최다의 방대한 저작물이며,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낸 연대를 기록하고 난고(亂藁) 또는 이재난고라는 표제를 달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재난고는 애초 60책으로 이루어졌으며 거기에 이재의 수고본 2책을 더해 62책인데, 이 가운데 47책의 일기를 1994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활자화해 이재난고 9책으로 발간해 오늘날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이 일기만도 40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인데, 62책 전체는 약 530만 자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이재난고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황윤석이 보고 배우며 생각한 모든 것을 매일 기록하고 그의 연구 결과까지 정리하면서 조선 후기 과학자의 연구 노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정치, 경제, 과학, 역사, 사회, 문화, 언어 등 전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철저히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해 모두 이재난고에 담았다. 이재난고에는 양반 지식인이 살아온 궤적이 매우 상세하게 담겨 있다. 심지어 당시 쌀값이나 국밥이며 고기 따위의 물가 변동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여행하면서 마을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적어 놓았고, 식물, 광물, 기물 따위도 한자와 한글을 나란히 적어 뒀다. 그는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자명종을 개발하려고 시도했고, 조선후기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는 많은 자명종을 소개하고 그 원리를 분석한 글을 남겨 놓았다. 또 강원도 춘천에 있던 선대 묘소를 이장할 때 이를 발굴보고서로 기록하고 고려 시대 묘제에 대한 분석까지 곁들였으니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굴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고창과 인근에 대한 정보는 대단히 많은데 난고에는 당시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당시 고창(흥덕)에서 서울까지 6박 7일 정도로 다녔던 노정(路程: 580리)과 여행일지, 경승지나 유적지 등을 돌아본 내용도 있다. 또 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상주에서 호랑이로 인한 피해 상황과 호랑이 사냥 관련 현상금(큰놈 100냥, 중간놈 50냥, 작은놈 30냥)을 통해 하루 사이에 20여 마리를 잡았다는 내용과 1768년(영조 44) 7월에 과거시험을 본 날 점심으로 일행과 냉면을 시켜 먹은 내용, 주막 국밥값 3전, 고급 누비솜옷 4냥, 평민의 누비솜옷 2냥, 말 한 마리 40냥과 말을 대여할 경우 100리마다 1냥 7전, 전의현감 월급 15냥 등이 기록되어 있는 등 당시의 물가와 사회문제 등 조선후기 생활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어 조선시대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부터 수학, 과학, 천문, 지리, 어학, 역법 및 신문물인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백과전서(百科全書)처럼 망라하여 다른 일기와 차이가 크며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고창군은 향후 이재난고의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승격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국립중앙과학관)의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록 등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21.04.26 19:15

“독자적 전북 가야 이제는 검증하자, 자화자찬은 그만“

봉수제출유적의 시기규명, 문헌사료 해석문제 등 여러 쟁점이 있는 전북 가야사를 두고 전국 역사학계의 검증절차를 거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전북도와 군산대학교 가야문제연구소가 유물유적을 발굴한 뒤, 발표한 학설이 통설과의 비교분석이나 비판적인 검증 없이 수용되고 있다는 이유다. 26일 전북도의 4월 보조금심의위원회 심의안건 서면검토 의견서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문화유산과 심의위원은 올 5월~12월 진행되는 전북가야 역사 재정립을 위한 학술대회, 보고서 발간 등과 관련한 7000만원 예산편성(추경 2000만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 심의위원은 이날 전북일보와 통화에서 전북 가야의 학술발굴 작업과 관련해서 많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연구고증분야는 미진하다고 판단했다며 학계와 언론에서 많은 반박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시기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심의위원은 진안문화원 부설 최규영 향토사연구소장이 쓴 글을 소개했다. 최 소장은 글을 통해 국사는 오랜 시일에 걸쳐 여러 학자, 전문가들의 연구와 학계의 컨센서스를 거쳐 정립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군산대학교 가야문제연구소의 견해를 확정된 견해처럼 발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 군산대 가야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무주, 장수, 완주, 금산 등이 고대 가야의 지배권에 있었다는 논거는 <일본서기>에 나온 3월 반파가 성을 쌓고 봉수를 둬 일본에 대비했다(중략)사졸과 무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했다는 기록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성립하려면 봉수로와 반파가 남해안에 연결되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반파로 비정한 장수는 금강유역으로, 남해안과 연결이 되지 않고 거리도 너무 멀다고 부연했다. 최 소장은 이런 전제를 무시한 장수 반파설은 학계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며 현재 반파국을 논하는 연구서들은 거의 성주나 고령 반파설을 지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성주나 고령은 남해와 가깝거나 남강, 낙동강, 섬진강을 통해 연결되고, 신라의 도읍 경주와도 가까운 지역이라며 일본에 대비할 당위성도 있고 신라를 핍박하기도 가능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봉수와 제철유적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최 소장은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는 봉수인 지 입증되지 않은 곳 107개소를 가야시대에 운용된 봉수였다고 주장하고, 실재(實在)가 증명되지 않은 231개소를 가야 때 운용된 제철지라고 강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가야문제연구소에는 봉수전문가도 없고, 고대 제철 전문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제휴해 연구한 실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 소장은 이 문제는 사안의 성격 때문에 그대로 봉합되기 어렵다며 전북가야 문제와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공청회 또는 학술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심의위원도 최 소장의 글을 토대로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가야사의 문헌, 봉수제철유적분야 권위자가 있다며이런 사람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학술대회는 예산낭비다. 학술대회와 관련한 예산지출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4.26 17:53

고창지역 문화유산 4건 전북도 문화재 지정

고창군 죽림리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터 등 고창지역의 문화유산 4건이 전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창군에 따르면 고창 선운사 영산전(도유형 제277호), 고창 석탄정(도유형 제278호), 고창 삼호정(도유형 제279호), 고창 전봉준 생가터(도기념물 제146호)가 지난 9일 전라북도지정문화재인 유형문화재와 기념물로 각각 지정됐다. 이번 지정된 문화재들은 전라북도문화재위원회의 현지조사를 거쳐 문화재 지정예고(30일 간) 기간 동안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의견을 받아 도문화재위원회에서심의 후 최종 확정됐다. 고창 선운사 영산전(高敞 禪雲寺 靈山殿)은 대웅전, 만세루와 함께 선운사를 대표하는 불전이다. 1713년에 2층 각황전으로 창건되었다가 1821년 단층으로 재건하는 등 연혁과 관련된 기록이 명확하고, 19세기 초 부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고주 7량가 양식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찰의 영산전 건물과 다른 형식의 구조, 공포, 평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적 독창성과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또 영산전 내에는 고창 선운사 영산전 목조삼존불상(도유형문화재 제28호) 및 16나한상과 함께 건물 내부 벽면에는 1821년 재건 당시의 벽화가 조성되어 있어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등 건립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고창 석탄정(高敞 石灘亭)은 1581년 석탄(石灘) 류운(柳澐)이 낙향 후 학문 강론을 위해 건립한 정자(1830년 중건)다. 넓은 평야에 동산처럼 솟아있는 암반지대에 운치 있게 나무와 정자를 세워 유유자적하며 풍류와 학문을 즐기던 공간으로 전해진다. 전라북도 누정 중에서 창건연대가 빠르며,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지붕 등 건축물의 가구구조가 독특해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됐다. 고창 삼호정(高敞 三湖亭)은 옥천조씨 삼형제(인호 조현동, 덕호 조후동, 석호 조석동)의 호(湖)를 따서 1700년대에 지었고, 1864년에 중건한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집 구조 등 조선 후기의 건축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주변 경관이 우수하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며 시를 쓰고 글을 읽으며 지냈던 당시의 유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로써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고창 전봉준 생가터(高敞 全琫準 生家址)는 동학사, 병술보 등 학술 고증과 많은 연구자들의 논문, 각종 학술조사, 학술대회, 촌로들의 증언 등을 통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장군이 1855년 12월 3일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때어나 13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확인됐다. 전봉준 생가터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혁명적 사건인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하고 이끈 최고 지도자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상징적인 장소로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유기상 군수는 이번 4건의 도지정문화재 지정은 민선 7기 취임 이후 문화재 지정승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온 결과라며 고창군이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한반도 첫 수도 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사례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 심의 중에 있는 고창 무장기포지 , 고창 문수사 대웅전 , 고창오거리당산제, 고창농악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과 고창 상금리 고인돌군에 대한 도기념물 지정 등을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고창군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위상을 높여 나감과 함께 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와 활용방안을 모색해 나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21.04.11 17:13

모악산 4대종교 성지 모두 문화재 지정

모악산의 4대 종교 성지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됐다. 김제시는 금산면 수류성당이 지난 2일 전북도 문화재 심의위원회를 최종 통과,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됐다고 5일 밝혔다. 호남 천주교 정착 100여 년 역사를 간직한 수류성당은 교우촌과 더불어 천주교 신앙인들의 중심이 된 사적지로, 한국전쟁 당시 호남권의 천주교 기록물을 옹기에 담아 땅속에 묻어 온전히 보존했다. 특히 인민군에 의해 신도들이 학살되었던 가슴이 아픈 역사적 공간이다. 2003년 개봉한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김제시 금산면에는 불교와 미륵신앙의 성지 금산사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근현대 신흥종교로 성장한 증산교의 성지인 증산법종교 본부는 국가등록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초기 개신교 성지로 ㄱ자 교회의 원형이 잘 보존된 금산교회 역시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이다. 이번 수류성당의 문화재 지정이 확정되면서 금산면은 면내에 위치한 4대 종교 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전국 최초 사례로 기록됐다. 박준배 김제시장은 이번 수류성당지의 문화재 지정으로 4대 종교의 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를 만들어 전라북도민과 김제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이 매우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 문화재·학술
  • 최창용
  • 2021.04.05 17:18

프랑스기록원 문서 전주 한지일 가능성 있어

프랑스 국립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가 고려시기 전주에서 생산한 한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가 중국 원(元)나라 간섭을 받던 13세기~14세기 당시 전주목(全州牧)에 속했던 소양면(완주군)에서 한지를 생산하고 있던 데다, 당시 전주한지가 품질이 좋아 불교 간행물과 왕실 진상물로서 가치가 높았다는 분석이 나와서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환관이 된 고용보와의 연관성도 거론된다. 29일 한스리그(한지, 한복, 한옥, 한식 분야 전문가 단체) 등에 따르면, 고려시기 전주목이었던 소양면 등지에서는 한지 생산량이 높았다. 전주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의 재배가 제도화돼 지방관아에서 닥나무 밭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려시대 왕실의 진상물로서 전주한지는 생산량과 품질면에서 높이 평가됐다고 나와 있다. 실제 고려 공민왕대(1361년) 전주 원암사에서 불교경전인 불조삼경(佛祖三經)이 간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보물로 지정된 이 책에는 원나라 혜종의 세 번째 연호인 지정(至正)과 출간연대, 간행장소, 간행자. 도와준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전북 문화재 의원을 지낸 이태영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원암사 일대에서도 닥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며 자연스럽게 사찰에서 책을 간행할 정도면 (공민왕) 이전부터 높은 한지생산량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국립기록원에 있는 고려한지로 추정되는 문서를 두고도 전주에서 생산된 한지일 가능성을 열어 뒀다. 이 교수는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고 보지만 프랑스에 있는 한지의 질을 확인해봐야 한다며 한지의 촉감과 책에 따라 생산지를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주를 본관으로 둔 원나라 환관 고용보와의 연관성도 거론된다. 고용보는 1310년대 원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며, 1340년대부터 사신으로 파견돼 고려의 정치에 간섭했다. 한스리그 관계자는 교황 요한 22세와 충숙왕이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추정되는 1333년은 고용보가 원에서 공녀인 기씨(훗날 기황후)를 궁녀로 추천하면서 실권을 잡던 시기라며 당시 고려가 원에서 바치던 종이 등 진상품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고 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29 18:21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최종절차 돌입

임진왜란 당시 민관이 하나가 돼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켰던 웅치전적지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단계가 최종 절차에 들어갔다.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TF는 지난 19일 오후 4시 전주비전대학교 비전관에서 전북도청 문화유산과 국철인 과장과 도 관계자, 하태규 전북대교수, 완주군, 진안군 문화재 업무 담당, 용역 담당인 비전대 심정민 교수 팀등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 회의를 가졌다. TF는 이날 기존 완주지역 도지정문화재 구역에 이어 진안군 구역까지 아우르는 90만 여㎡ 부지를 국가지정문화재 보호구역대상 신청 지역으로 정했다. 현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인 전북웅치전적지가 90㎡가 넘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다시 태어나는 최종 행정적 단계에 들어간 셈이다. 구체적 대상지역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51번지 일대 74만7347만㎡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산292-2임야 일대 16만807만여㎡ 등 일대 90만 8154㎡ 부지이다. 기존 300만㎡가 넘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면 일대 웅치 전적지보다 면적이 대폭 줄어든 것인데, TF는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보다 효율적인 대상지 조사와 주민설명회, 현장 탐사, 전문가 의견 수렴 절차 등을 거쳤다. TF는 향후 도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도문화재지정심의위원회에 진안군 구역을 포함하는 안을 5월 안에 신청하고 6월 중으로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다는 계획이다. 도는 도지정 문화재 위원회 통과 이후 국가지정문화재로 웅치전적지가 지정될 경우 전적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또 웅치전적지 기념관을 건립하고 도와 시군간 연계 협력망 구축, 유지관리, 역사탐방길 조성 등도 검토할 예정이다. 이날 회의에서 하태규 전북대학교 교수는 어려운 과제를 심 교수가 잘 정리해 주신 것 같다. 주민민원이 많았을 텐데, 완주와 진안 두 지자체 관계자가 협조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논의는 1990년대부터 시작되는 등 지역 숙원 사업 중 하나였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 것 같고 역사적인 사건의 상징성이 부여될 수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도 관계자는 이번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사업 과정에서 주목할한 만한 것은 도와 두 개 기초지자체가 함께 해 지정지역을 도출했다는 점이 의의가 크다다며 전국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지자체간 협의도출의 사례라고 말했다. 국철인 도 문화유산과장은 TF를 작년부터 가동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되면서 오늘까지 왔다. 오늘 회의가 마무리돼 종지부를 찍었으니, 남은 기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백세종
  • 2021.03.21 18:12

[학술강연회] “전북 항일 운동 배경… 일제 수탈 동맥 구실 한 탓”

한말 31만세운동 전후 전북의 항일독립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 전북일보와 JTV전주방송, 사)사선문화제전위원회, 사)독립운동가 박준승선생기념사업회가 18일 전북일보사 2층 공자아카데미에서 주최한 호남 지역의 31 운동 성격과 전북 동부지역 투쟁상황 전국 학술강연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자리였다. 전북일보 윤석정 사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 독립을 목을 터져라 부르짖었듯, 우리 모두 애국선열의 충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사)사선문화제전위원회 양영두 위원장은 전북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박준승 선생 등 최고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지역이라며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치신 순국선열 애국지사께 머리 숙여 추모 인사 올린다고 했다. 이날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은 호남지역 31운동 성격과 전북 동부지역의 투쟁상황, 동국대 천지명 연구교수는 31운동 전후의 항일운동 양상, 최성미 전 임실문화원장은 임실 지역의 동학, 천도교와 31운동 을 주제로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전북일보 김원용 논설위원이 나섰다. 나종우 회장은 전북에서 항일 운동이 활발해진 이유를 식민지 시기 수탈에서 찾았다. 식량해양 자원이 풍부했던 호남은 19세기 일제 식민지 시기 경제적 침탈의 주된 표적이 됐기 때문이다. 목포와 군산항 개항 전후로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 창구가 됐고, 호남선과 전라선, 목포-신의주 국호 1호선 등은 일제 수탈의 동맥 구실을 했다. 나 회장은 이런 현실은 전북민들에게 지속적인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이런 저항의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에도 전북이 천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데 기인했다. 전주정읍익산임실남원 등지에 각각 종리원(宗理院)이 설치됐고, 동학 접주였던 임실의 박준승은 이준윤효정 등과 함께 헌정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 같은 활동은 31운동 당시 조직적 저항으로 이어졌다. 나 회장은 전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경로를 보면 알 수 있다며 서울에 상경했던 천도교도들이 독립선언서를 지역으로 가져와 31운동 전부터 시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전북 동부 지역의 투쟁도 활발히 전개됐다. 임실순창남원장수진안무주에서는 종교계,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투쟁의 발생건수는 220여 회, 동원된 연인원도 3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제에 기소된 인원도 1131명에 이른다. 나 회장은 전북 지역 31 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분석은 조선총독부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실상과 거리가 멀다며 종교계, 학생, 농민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해 1920년대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의 계층을 다양하게 하는 토대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최성미 전 원장은 동학농민운동이 31운동으로 조직적으로 이어진 근원으로 임실의 천도교를 주목했다. 1873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벌였던 포교활동으로 동학이 사회운동화됐고, 당시 활동했던 인물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최 전 원장은 천도교 진보회 전주지부장을 맡았던 김영원 선생은 1919년 2월 상경해 의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과 숙의를 한 후, 임실교구를 거점으로 독립선언서를 전주, 남원, 순창, 진안 등지에 전달했다며 이에 따라 각 시군에서 3월 10일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고 설명했다. 천도교가 중심이 된 항일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는 게 최 전 원장의 설명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할 때, 천도교 4세 교주 박인호 춘암상사는 수제자와 배일운동 투쟁위원회를 조직했고. 1938년부터는 멸왜운동(滅倭運動)을 벌여나갔다. 최 전 원장은 천도교인들은 815해방되던 날까지 멸왜운동을 계속했다고 밝혔다. 천지명 교수는 31운동 이후 전북지역에서 일어난 청년운동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전국 단위 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 국내 항일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해서다. 천 교수에 따르면 전북 청년운동은 192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이전은 실력양성에 기반을 둔 지역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기, 이후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기간이다. 천 교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전북 지역 청년운동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관 속에 성장했다며 특히 1922년 10월 조직된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 익산 출신 임종환을 지역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또 이 시기는 조선청년총동맹 단계로 전국 단위 청년조직 산하에서 조직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며 1925년부터 전주, 남원, 김제, 군산 용담 5개 청년회가 모여 도 단위의 통합전선 운동을 시작했다부연했다. 전북일보 김원용 논설위원은 토론회 자리에서 3.1운동에 대한 지역사 연구가 많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사건의 나열에 그치는 감이 있다며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담은 더 많은 사료 발굴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31운동사 외연확장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김 위원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고창 출신의 백관수, 의병활동 지원과 노동농민운동 변호로 일제에 저항한 순창 출신 김병로, 전주 3.1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목사 등 전북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은 대단하다며 이들의 활동은 전북 항일운동 역사의 큰 자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이들 지도자급 항일운동가와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때 전북 항일운동사는 더욱 알차고 풍성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8 18:08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두고 갑론을박

남원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등재 신청서가 지난 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프랑스 파리)의 완성도 검사를 통과한 가운데, 등재 타당성을 두고 지역 역사학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신청에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은 제외하여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문화살림 대표라고 밝힌 글쓴이는 이 게시판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을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과 같이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계 유적이 발견된다고 이들 지역을 가야 강역으로 지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대가야(고령)의 서부 영남지역에서 4~5세기경의 백제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고 해서 백제의 강역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4~5세기 경 백제와 가야의 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증표로 봐야 한다며 오늘날 영호남 경계지역은 고고학역사학적으로 호남 동부지방의 백제와 영남 서부지역의 가야와 인적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또 고분의 축조방식과 출토 유물도 백제와 가야의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어 가야 고분군으로 단정하긴 어렵다며 문화재청도 지난 2018년 고분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할 때 5~6세기 전북 동부 지역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명시했다고 밝혔다. 글쓴이는 고대사가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며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등재신청은 전국 학계와 국민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에 논의하도록 해달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른바 호남 가야설에 대한 충분한 연구검토와 고대 국가의 영토강역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 세워진 후 고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글은 지난달 5일에 청원이 시작돼 지난 7일 청원이 마감된 글이지만, 이를 두고 전북 지역학계에서 논의는 분분하다. 군산대학교 곽장근 역사철학부 교수는 16일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을 수 없다며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을 두고 일본중국 학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검증을 거친 뒤 등재신청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를 세계유산센터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전북도 노기환 학예연구사는 문화재청에서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과 충분히 논의를 했고 절차상 문제점이 없다고 밝혔다고 했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 A씨는 청원게시판에 나온 의견이 타당한 부분도 있다며전북 가야사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오히려 전북 동부지역 백제사에 대한 연구가 완전히 선행된 뒤, 가야사를 조명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역사학 교수 B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가야사 복원사업을 발표한 뒤, 등재를 서두르는 통에 역사적 규명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학 교수 C씨는 전북 동부권에 발굴된 유적이 가야의 것임은 확실하다며 특히 남원 두락리 고분군은 명백한 가야의 무덤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전북 동부 가야세력이 독자세력인지 대가야가 외연을 확장한 세력인지 확실히 규명하고, 봉수의 제철유적의 실체도 좀 더 면밀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청원 글에 대해서는 지난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때 전북을 배제하려는 움직임과 현 고대사학계의 입장이 반영된 글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6 18:29

전북지역 임진왜란사 정리 필요성 대두

전북지역 임진왜란사 정리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 전북지역 관군과 의병이 지역뿐만 아니라 경기도, 경상도 등 전국적으로도 파견돼서 국가를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연구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에서는 최근 호남 의병을 기리기 위해 남도 의병역사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전북에서도 체계적인 임진왜란사 연구고증작업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북 역사학계 등에 따르면, 1592년 있었던 웅치(진안과 전주사이에 있던 고개)전투와 이치(금산 서평)전투는 조선이 왜군을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최대의 곡창지대로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오던 전라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듬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국가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國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 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며 전쟁의 정황을 전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 전북의 관군과 의병은 많은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1593년 경기도 행주산성을 막아낸 행주대첩에서도 전북 관군이 활약했다. 전라도도절제사로 이치전투를 이끌었던 권율은 전쟁이 끝난 뒤, 군사를 이끌고 북상해 병력 1만여 명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경상도 지역의 왜군을 막기 위해서도 파견됐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전라도를 방어하는 데 성공한 뒤, 경상도 지역에 증원되는 왜군을 감당해야만 했다며 전북은 향토방어라는 관점도 있지만 국가를 수호하는 군대의 역할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북은 웅치, 이치 등 일부지역 전투를 제외하고 종합적인 연구와 자료 정리가 미비한 상황이다. 정유재란 시기 연구는 공백 상태이며, 일부 의병을 두고는 진위논란까지 빚어지는 상황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1990년대부터 임진왜란사 자료 정리와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돼왔다. 경북에서는 <경북의병사>(1990년), <대구지역 임진란사>(2017), <경북지역 임진란사>(2018)가, 전남에서는 <호남지방임진왜란사료집>(1990)이 발간됐다. 전남도는 지난 9일 2024년까지 440억원을 들여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 일대 36만㎡에 건물 연면적 8300㎡규모로 남도 의병역사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도는 의병관련조사연구, 전시교육, 교류선양 등 활동에 필요한 유물 수집에 나섰다. 이런 상황을 두고 전북대학교 한문종 사학과 교수는 경상도나 전라남도 같은 경우 임진왜란 관련 자료 수집이 진행되고 있으며, 개별가문에서 문집들을 간행하기도 한다며 문집의 진위여부를 떠나 연구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영구 교수는 연구인력이 경상도에 많은 영향도 있다며 이들 중심으로 임진왜란사 자료정리와 연구가 이뤄지다보니 전쟁 자체가 향토방어로 각인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전라도 군인이 경상도 지역에서 이동해서 싸운 전투를 두고 경상도 임진왜란사로 기록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북에서도 체계적인 임진왜란사 정리와 고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관찬사찬기록, 각 문중 소장 자료, 일본중국의 고문서 등을 수집한 뒤, 연구를 거쳐 학술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야 한다는 게 도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한문종 교수는 황진, 채홍국, 김제민 등 전북 의병장 및 문무관, 최호, 송상현 등 타 지역 활동 인물, 권율, 이복남 등 다른 지역 출신이 전북에서 활동한 사례 등 정리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임진왜란 당시 전북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4 16:57

“후백제성 동고산성 정비계획 수립해야”

후백제 성터유적으로 꼽히는 동고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를 실사하는 과정에서 정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고산성은 1990년~2014년까지 7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지만, 발굴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정비계획은 수립되지 않은 상태다. 문화재의 상태에 따라 정비계획을 병행하면서 복원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북대학교 남해경 건축공학과 교수는 11일 전주시가 개최한 후백제전주성(동고산성) 국가지정 승격 학술대회에서 동고산성에 대한 보존과 활용을 전체적으로 기획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남 교수는 동고산성 정비는 성벽, 성 내부 시설, 문지 등의 보존과 문화재 안내판, 이정표, 편의시설 등 설치가 해당된다며 세분화한 계획을 제시했다. 성벽은 상태가 좋지 않은 지점부터 조사한 후 보수를 실시하고, 벽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는 주면의 수목은 정리해야 한다는 게 남 교수의 설명이다. 성 내부에 있는 소나무 등 교목을 두고는 이식을, 경작지는 정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적 탐방로에 위치한 민묘의 경우 이장을 주문했다. 남 교수는 정비를 전제로 보수복원경관유지관리재정계획을 순차적으로 세워야 한다고 정리했다. 동고산성이 후백제 도성의 피난성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주 건물지가 궁전이었다는 고(故) 전영래 교수의 이론과 다른 관점이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 강원종 학예실장은 성벽, 성문, 건물지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개축과정이 보인다며 이런 대대적인 개축은 평상 시 이뤄진 개보수과정으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유로 성벽의 통과선이 다르고 견치석으로 다듬은 성돌을 면석으로 사용했다. 주 건물지와 성벽 가까이에는 대형건물이 재건축된 흔적도 있다며 이런 축성법은 전쟁이 잦은 후삼국시기에 이뤄지는 대사역이라고 설명했다. 동고산성이 후백제의 성이라는 확증할만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공주대학교 서정석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견훤의 옛 궁터로 전해온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라며 소어벽 최하단 성돌이 일반 성돌보다 크고 돌출된 부분을 두고 축성 시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날개처럼 좌우 양쪽에 쌓아 가운데 성의 부족한 기능을 도왔던 익성(翼城)의 최초사례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익성은 대몽항쟁기에 처음 출현한 성으로 춘천 삼악산성 내성, 원주 영원산성, 충주 대림산성, 속초 권금성 등이 대표적이다. 전주시 최락기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동고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면서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기반을 조성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1 18:35

[단독] 프랑스국립기록원 한국한지 존재 확인

프랑스 국립기록원이 고려시대 한지로 추정되는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려가 중국 원(元)나라 간섭을 받던 13세기, 고려왕이 원 황제에게 공물로 바친 종이가 프랑스왕에게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문서를 두고는 전주에서 제작한 한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면서 관심이 집중된다. 한지와 한복, 한옥, 한식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단체 한스리그(공동대표: 손주경, 천상묵)는 지난 2019년 프랑스국립기록원에서 한지로 추정되는 문서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8일 한스리그 관계자는 전주시와 2017년부터 바티칸 비밀수장고에 있던 교황 요한 22세-충숙왕 서신(1333년), 고종 황제-교황 비오 10세(1904년) 서신을 한지로 복본하는 과정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서가 한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은 프랑스에 있는 아시아 박물관인 기메(Guimet) 박물관장과 바티칸기록원에서 고문서를 담당하는 엔리코 플라이아니 박사가 제기했다고 덧붙였다. 기록원에 따르면, 문서는 1289년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일족인 몽골족이 지배하는 일칸국(바그다드 위치)의 왕이 프랑스 왕에게 보낸 서신이다. 고려 충렬왕(1264~1308년)이 쿠빌라이에게 조공으로 바친 종이를 일칸국에 교역물품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칸국 왕이 고려 종이를 프랑스 왕에게 보낸 서신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고반여사> 등과 같은 사료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들 사료에는 고려가 원나라에 고려종이를 공물로 바친 사실이 나와 있다. 특히 중국사람의 취미를 설명한 명나라 사료인 <고반여사>는 원나라가 종이를 공납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술자를 징발해 현지에서 직접 제조하게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시 일칸국 성직자가 원나라를 오갔다는 사료는 고려 한지가 일칸국에 전달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경교 사제인 라반 바사우마(Rabban Bar Sauma)는 1287년 바그다드, 북경, 아비뇽 교황청 등을 다니며 일칸국의 사자(使者) 역할을 했다. 실제 프랑스 기록원이 가진 문서에도 Papier Coreen으로 적혀있어, 고려 한지임을 추정케 한다. 넓게는 전주에서 제조된 한지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고려시대 전주와 진안은 종이, 먹, 벼루 등을 생산했던 부곡으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한스리그 관계자는 전주한지라는 추정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몽골문서 내용을 계속 추적해왔던 하버드대 엔칭도서관과 한국 동양사학계, 전주 한지 전문가 등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08 18:24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