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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 매듭지어야”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독립군이나 의병과 마찬가지로 항일 활동을 벌였지만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역사적 행적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해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교육관에서 개최한 정기학술대회 반일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농민군 서훈에서는 근대사학자들이 모여 예우방안과 관련법, 2차 동학농민혁명의 반일항쟁 성격 등을 두고 논의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올 4월말 기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로 공식 등록된 인원은 총3687명이다. 이들 가운데 1894년 3월 1차 봉기 참여자는 전체 6%인 211명, 9월 이후 2차 봉기 참여자는 85%인 3151명에 이른다. 2차 봉기가 서훈문제가 쟁점화 된 항일의병전쟁기이다. 유족은 모두 1만2071명이다. 자녀는 10명에 불과하며, 손자녀는 1206명, 증손녀 4590명, 고손자녀는 6265명이다. 그러나 이들 참여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추진되는 기념사업이 전부이다. 김양식 청주대 교수는 독립유공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국가 공훈록에 등재돼 서훈을 받는다면서 그 후손은 취업, 요양, 주택우선 공급, 정착금 등 다방면의 지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반면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은 명예만 회복됐을 뿐 실질적인 국가예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문제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법률은 일제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독립유공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보상토록 명시하고 있다. 심사 기준년도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895년 전후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로 한정한다. 김양식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직전에 일어났으므로 충분히 심사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 지가 쟁점이다. 허수 서울대 교수는 현재 학계의 입장을 봐도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입장을 통일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서훈을 받는 독립유공자처럼 동학농민혁명군도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전봉준의 일제 법정 심문에 답한 재판기록인 <전봉준공초>에는, 전봉준이 2차 동학농민혁명의 목적을 일본의 침략반대와 보국안민으로 답변한 기록이 있다. 실제 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에도 국경을 침범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사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으며, 각 지역 일부 농민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유생, 관리들과 연합전선을 추구한 사례가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이를 두고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강토침략으로 인식하고 대적했다며 항일투쟁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국왕이 일제에 포로로 인신이 구속되는 등 1894년은 이미 국권이 탈취된 상태라며 당시 동학농민군은 일본 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전국에서 봉기했다고 설명했다. 관련법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로 개정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법적 근거를독립유공자법에 따를 경우 기존의 법 관행상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자체 법률을 제정하자는 것이다. 김양식 교수는 역사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518민주유공자법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며예우 방안으로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등 구체적인 사항을 명시했는데,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을 개정할 때도 이 사항을 참고해 예우조항을 조문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립묘지 조성, 동학농민군 현충사업 지원 등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는 동학농민군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예우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 전체를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외세, 반침략, 항일 구국 투쟁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학농민군의 독립운동 참여가 충분히 근거를 얻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22 17:01

[전북사의 과제] ④에필로그

1주일간 연재했던 전북사가 종결했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되짚어보면, 후백제 왕도인 전주에 대한 문헌기록과 유물유적, 고조선 준왕이 금마(익산)로 내려왔다는 기록에서 출발한 마한사, 남원장수지역에서 확인된 봉수와 제철의 존재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가야사를 소략한대로 짚었다. 에필로그에서는 전북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백제사를 비롯 각 역사별로 보완해야 할 점을 제언한다. 전북의 백제사는 다른 시기 역사보다 상대적으로 논쟁이 적은 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관세음응험기> 등 문헌사료에 익산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무왕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등 고고학적 유물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와 왕궁리 유적은 익산이 왕도로서 존재했다는 데 힘을 보태준다. 삼국사기에는 익산에 있던 궁궐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고, 왕궁리 유적 내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지칭한 명문이 있다. 이를 두고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천도설과 수도와 동일한 행정구역인 별부별부설 등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익산이 백제 무왕대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는 해석은 연구자들끼리 일치한다. 앞서 지난 2015년에는 왕궁리 유적 주변이 시가지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남쪽 1.3㎞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물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왕궁리와 제석사지 사이, 궁 남쪽의 탐리마을에서는 기와편, 건물터 등 생활유적도 확인됐다. 백제 왕도로서 익산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도성체계라는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왕궁리 유적은 궁성, 미륵사는 국찰, 쌍릉은 왕릉 등으로 비정하고 고고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며 익산에 산재한 유적은 동시대의 것들로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야 익산도성 본래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고 했다. 전주가 후백제 왕도로서 갖는 역사적 정체성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는 후백제왕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전주 동고산성,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 등 각지에서 산성유적도 확인된다. 그러나 대부분 유적이 땅속에 매장된 상태로 성격규명이 미진한 상태다. 후삼국 시대에 존재했던 왕조의 수도인 만큼 도성, 궁성, 분묘, 사찰, 생산시설 등을 세분화해서 발굴 조사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차상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주무관(전 전라문화유산원)은 고대도시 구조라는 시각을 전제해야 한다며 여러 시설의 위치를 연계하면서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한사는 중국 문헌 <삼국지>와 <후한서>, 한국사료인 <고려사>. <제왕운기> 등에 집단의 존재가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전북 등 호남지역 사학자들은 1970년대부터 발굴에 매진한 결과, 마한사를 설명할 수 있는 토기, 분구묘, 동검, 유리구슬 등 다수의 유물을 발굴했다. 그 결과 마한이 전라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규명했으며, 소국 11개~12개 정도가 존재했다고 분석했다. 중국-마한-변진한 왜로 연결되는 국제교역망도 밝혀냈다. 다만 기존 유물유적 발굴과 연구는 단편적 편린만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게다가 마한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자 육성과 고고학적 보완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야=연맹왕국이라는 틀을 깨고 전북 동부 지역에 독자적으로 존재했다고 이론을 세운 점을 두고는 학계에서 평가가 긍정적이다. 가야로 통칭하는 각국에 대한 분석에서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을 간과했던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근거로 쓰이는 봉수의 조성시기, 제철의 입지, 문헌사료의 해석을 두고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보완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사료 자체로 문제점이 제기된 <일본서기>의 해석문제를 두고는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9 18:20

[전북사의 과제] ③가야사

전북 가야사는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전국 고대사학계에서는 가장 쟁점이 많은 분야다. 전북 동부지역에 대가야가 존재했다는 통설을 뒤집고, 독자세력 존재를 주장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근거로는 지표조사로 발견된 봉수와 제철, 중국과 일본의 문헌사료를 든다. 그러나 봉수의 조성시기, 제철의 입지, 문헌사료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치열하다. 아직까지는 통설(전북 동부지역=대가야)이 힘을 얻고 있다. 전북 가야사를 둘러싼 쟁점과 가야할 길을 두 짚어본다. 전북도 등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북 동부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발견된 제철, 봉수, 고분은 800여개다. 특히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은 역사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프랑스)의 완성도 검사까지 통과한 상태다. 가야세력의 존재여부를 유추해주는 문헌사료도 있다. 중국문헌인 <양직공도>와 일본의 <일본서기>다. 두 사료에는 반파(가야소국)가 봉수를 쌓아올린 기록과 남원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되는 기문국이 나온다. 이들 유물과 문헌을 근거로 대두한 학설이 전북 독자가야설(장수 반파가야설)이다.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는 반파의 위치는 역사 고고학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며 전북 동부에서 발견된 110여곳 8갈래 봉화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 장계분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서기에 반파가 513년 기문과 대사를 두고 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봉후 기록이 나오는 데, 그 물증이 전북 동부지역 봉화망이라고 부연했다. 전북 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117개 봉수는 조성시기가 주된 논쟁거리다. 논쟁은 고대시기부터 구한말까지의 문물제도를 망라한 <증보문헌비고>에서 촉발된다. 이 사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각 봉수당 거리는 11.6km이다. 봉수분야 전공자인 김주흥 LH밀양사업단장은 이를 두고 (거리상으로 볼 때) 가야시대에 (특정 한 지역에서) 110여 개의 봉수를 운영했다는 게 맞지 않을 수 있다며장수 지역 봉수는 삼국,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시기에 걸쳐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한다. 형태를 둘러싼 논쟁도 치열하다. 110여개의 봉수가 가야시기에 지어졌다면 구조상으로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과 전쟁이 많은 고대시기에 급조해서 만든 봉수는 형태가 제각각이며, 양식도 토축암반석축형으로 다양하다는 입장이 충돌하고 있다. 제철은 입지 문제가 화두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대시기부터 존재했던 모든 제철산지가 나오는데, 전북과 관련된 기록은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장수에 고대부터 제철산지가 존재한 게 아니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남규 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입지상의 문제로 장수 대적골과 같은 산간에서는 제철이 생산되긴 힘들다며 고대시기 유통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곽 교수와 조명일 군산대가야문화소연구원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주변을 지표조사 했을 때 삼국시대 토기편이 적지 않게 수습됐다며 특히 대적골에서 발굴된 유물은 통일신라 문화층까지 접근했다고 반박한다. 많은 가야사 전공 학자들은 반파를 대가야로 보는 통설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반파=장수가야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처럼 사료인 <양직공도>와 <일본서기>를 근거로 들고 있다. 다만 유물유적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우선 이들은 반파를 백제가 대가야를 낮춰부르는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5~6세기 백제와 대가야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서기>에 등장한 반파 관련 내용은 중국문헌 <삼국지>의 내용을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유물유적과 연관한 해석에서도 △반파가 성을 지은 자탄은 경남 거창 , 대사는 경남 진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고령토기의 확산지점이 넓다는 점 등을 들면서 통설에 힘을 실고 있다.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반파 장수 독자세력 이론에 대한 근거도 고고학적 자료인 봉화뿐만 아니라 문헌사료인 일본서기로도 들고 있다며 사료의 문제점이 제기된 이상 논리보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통설을 뒤짚은 학설인만큼 검증을 통한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장수가야 독자세력설을 입증하려면 봉수봉화뿐만 아니라 국가체제의 상징인 산성, 왕궁, 왕릉, 수취체제인 창고도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야=연맹왕국이라는 틀을 깬 이론인만큼 시각을 유지하면서 연구검증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는 정치체를 놓고 중심과 변두리라는 등식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며 장수와 진안일대,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에 무게를 두고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8 17:12

고창의 풍류문화 · 전통가요 전승과 문화적 활성화 방안 모색

고창의 풍류문화와 전통가요를 전승하고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전북대 농악풍물연구소는 16일 고창읍 동리국악당에서 고창의 풍류문화 전통가요 전승과 문화적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학술대회는 관련학계 전문학자 5인의 발표와 6인의 토론으로 이뤄진다. 제1부에서는 부산대 최헌 교수가 현전 백제가요 전승 자료들과 그 문화-역사적 가치: 고창지역을 중심으로, 전북대 김익두 교수가 최근 새로 발굴된 <선운산곡禪雲山曲>의 발견기록화 과정과 그 역사문화적 특성가치의의를 발표한다. 토론에서는 나승만 목포대 교수를 좌장을 맡아 안후상(고창북고) 진동규(전북대) 호병탁(원광대) 선생의 논의를 진행한다. 제2부에서는 전남대 나경수 교수가 고창지역 주요 전승가요/민요들과 그 문화적 활성화 방안, 숭실대 성영애 교수가 고창지역의 선비 풍류문화 : 이재 황윤석의 <현금악보>에 나타난 자료적 성격과 풍류생활, 전북대 권민정 박사가 고창지역 풍류문화의 근현대적 전승과 미래: 고창지역 관련 율계를 중심으로를 발제한다. 이어서 전북대 하우봉 교수를 좌장으로 김헌선(경기대)최선아(서울대)이용찬(전북대) 선생의 토론이 진행된다. 제3부에서는 강릉원주대 강등학 교수를 좌장으로 발표자 토론자 및 청중들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이 이어질 예정이다. 유기상 고창군수는 이번 고창학 학술대회는 지역이 보존해 온 풍류문화가요문화를 오늘날의 문화적 맥락에서 재발견한 뒤 미래문화로 재창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는 고창군이 주최하고, 전북대 농악/풍물굿연구소 및 사단법인 민족문화연구소가 주관한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5 18:12

[전북사의 과제] ② 마한사(하)

전국 역사학계에서 전북에 마한소국이 존재했다는 이론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마한을 구성하는 종족의 분포양상과 영역 범위, 고조선 준왕이 익산으로 이동했다는 설 등을 두고는 이견이 있다. 우선 전북에 마한 세력만 존재했을 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마한이란 용어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 교수는 마한을 구성한 여러 정치체가 전라도-경기-충청 지역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다만 호남 동부지역을 마한이라는 이름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종족도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문헌사료에 누락되거나 이미 다른 세력에 통합돼 실체가 사라진 종족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승옥 전북대 교수도 마한 등 여러 고대문화의 정체성이 주거지나 무덤에서 발견된 한두 가지 유물로 규정될 수 없다며 주거지와 무덤, 성곽, 수혈, 패총 등 모든 유구의 특질과 출토된 유물에 대한 과학적 해부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준왕이 남쪽(익산)으로 내려왔다는 기록도 역사적 사실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박대재 고려대 교수는 중국 문헌 <삼국지>에 나온 준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윤색된 기록이며, 기자가 고조선에 와서 문화를 교화시켰다는 중화적 인식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또 마한에 정착한 조선계 유민이 준왕과 가계를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관련분야 연구자 육성과 고고학적 보완 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마한사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연구자가 적다며 전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인 만큼 지역 대학에서 관련분야 연구자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근까지 지표상으로 확인된 유적유물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최 이사장은 혁신도시와 만경강 일대에 마한사와 관련 있는 다수 유물유적이 확인됐다며 그러나 이 부지에 유물유적이 묻혀있다는 표식조차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확인된 유물유적을 빨리 발굴한 뒤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드는 등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산지역에 3~4세기 이후 존재했다고 보이는 마한소국인 건마국의 실체도 규명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최 이사장은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자료가 발굴되지 않고 있다며위치비정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요망된다고 했다. 이어 건마국이 익산이라는 전제로 전개된 마한의 성장과 세력변천에 대한 견해도 재검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5 17:45

[전북사의 과제] ② 마한사 (상)

전북 마한문화권을 둘러싸고는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 개정안 포함 여부가 관심사다. 당초 전북에서는 지역 마한문화권을 역사문화특별법의 범주에 넣으려고 했으나 충북중원문화권 추가 의견이 제기되면서 무산됐다. 이후 전북도는 충북의 중원문화권, 강원의 예맥문화권과 병합심사를 염두에 두고, 지역학계와 마한문화권 포함을 추진하고 있다. 관련 개정안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에 올라가 있다. 도와 지역 역사학계는 문헌사료와 고고학적인 유물을 근거로 전북 서남북부에 마한 11개의 소국이 존재했고, 이들 소국이 중심부를 형성했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전국 역사학계에서도 마한이 전라도에 존재했다는 이론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다만 존속했던 기간과 종족의 분포양상, 고조선 준왕의 남쪽 이동 등을 두고는 이견이 존재한다. 전북 마한문화권에 대한 이론과 쟁점, 과제를 짚어본다. 중국 문헌사료인 <삼국지>와 <후한서>, 한국 사료인 <고려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동사강목>에 따르면, (고)조선왕 준(準)이 위만에 패한 뒤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을 정복하고, 스스로 한왕에 올랐다고 나와 있다. 특히 <제왕운기>, <동국통감>, <동사강목>에서는 준왕이 내려온 지역을 금마군(익산)으로 지목하고 있다. 관련 유물유적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최근 만경강 이남과 황방산 일대에서는 대형 군집묘와 구상유구(U자 모양 수로)가 발견됐다. 김승옥 전북대 교수는 관련 연구를 통해 국읍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인구가 밀집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익산 영등동과 율촌리에서는 각각 주구묘와 분구묘가 잇달아 발견됐는데, 특히 주구 내에서는 마한 초기 문화권을 보여주는 점토대토기들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중국-마한-변진한 왜로 연결되는 국제교역망을 설명해주는 유물도 발굴됐다. 철기, 푸른 유리구슬, 덩주식 동검, 중국산 동경 등이 대표적인데, 이는 만경강 일대와 완주 갈동과 신풍 익산 평장리 등에서 확인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마한에 대한 기록이 적은 상황에서 각종 고고학 유적과 뮤이 출토돼 역사상을 복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평했다. 전북 역사학계는 문헌사료와 유물유적을 근거로 전북 서북부 지역이 마한의 중심부였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학계는 중국문헌사료 <삼국지>에 등장하는 54개 마한소국 가운데 11개~12개 정도가 전북에 위치했다고 보고 있다. 익산의 감해국, 고창 모로비리국, 김제 벽비리국, 부안 지반국, 정읍 구소국, 군산 만로국, 익산 건마국, 정읍 초산도비리국, 전주 불사분사국 등이다. 묘제와 토기문화권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한 곳이다. 최 이사장은 특히 감해국, 벽비리국, 모로비리국은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존속했던 시기도 기원전 3세기 말~기원 후 6세기 중엽까지로 보고 있다. 총 4단계로 나눠진다. 조기(기원전 3세기 말~기원 전후)는 만경강 등 서남해안 일대, 전기(기원전 1세기~3세기 중반) 서울인천 경기충청전라 일대, 중기(3세기 중반~4세기 중후반) 인천경기 일부와 전라일대, 후기(4세기 후반~6세기 전후) 고창과 영산강 일대에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전북 마한소국이 사라진 시기도 4~5세기로 보고 있다. 백제가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병합됐다는 것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3 18:31

[전북사의 과제] ① 후백제사

2021년 6월 10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전북 고대사의 역사적 실체 규명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법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6개 문화권으로 구분한 뒤, 국가가 이 권역에 맞춰 보존, 관리, 발굴, 복원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전북은 백제와 가야문화권이 포함됐다. 그러나 관련 문화권 유물의 시기비정, 도성의 정확한 위치파악, 백제사에서 익산이 차지했던 위상규명 등이 숙제로 남아있다. 아직 법에 포함되지 않은 마한문화권의 심사통과 여부도 과제로 거론된다.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王都)로서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 후백제 문화권도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최근 법에 포함될 필요성이 제기됐던 문화권부터 과제를 짚어본다. 후백제의 사료는 <삼국사기> 열전 견훤전,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전에 제한적으로 드러난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견훤은 900년 나라의 도읍을 완산(전주)에 정하고 후백제 왕이라 칭했다. 관부(官府)도 설치했으며 직책까지 나눴다. 영토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전주의 인구 확충을 위해 신라 등에서 노획한 포로들을 옮겼으며, 백제 부흥을 선언할 때 고조선-마한-백제 계승의식을 드러냈다. 이외에는 견훤과 관련한 설화와 평가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완산지>에는 토성과 왕궁 등 전주에 존재한 도성관련 시설의 존재가 드러난다. 사료는 도성 고을의 방향, 읍성(邑城)을 쌓을 때 사용한 석재, 궁터, 도성의 규모와 방어체계, 도시 구조 등을 보여준다. 다만 정확한 위치가 제시되지 않아 학계에서 계속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도내에서 후백제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목되는 산성은 전주 동고산성,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 익산 미륵산성, 정읍 고사부리성, 임실 월평리 산성, 장수 침령산성, 장수 합미산성이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군산대학교 박물관 등이 이들 산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9세기~10세기경 토기, 수막새, 집수시설 등이 발견됐다. 그러나 전주 동고산성을 제외하고는 후백제의 특징을 찾기엔 어렵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이 성은 1991년부터 총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13개 건물터, 25동 건물지가 있던 것으로 밝혀진 상태다. 주 건물터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암막새에 새겨진 全州城(전주성) 글자는 이곳이 견훤이 쌓은 산성이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도 거론된다. 반면 전주성글자만 두고 후백제의 성으로 확증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지난 3월 전주시가 개최한 후백제전주성(동고산성) 국가지정 승격 학술대회에서성돌이 크고 돌출된 것을 봤을 때 익성(翼城)의 최초사례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익성은 대몽항쟁기에 처음 출현한 성으로 춘천 삼악산성 내성, 원주 영원산성, 충주 대림산성, 속초 권금성 등이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동고산성 일대를 왕궁하는 비정사흔 설과 배후를 방어하는 방어성으로 보는 견해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후백제 왕궁위치와 관련해서는 고토성, 물왕멀 일대, 동고산성, 전주부성, 인봉리 일대 등 연구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놨다. 1940년 간행된 전주부사에서는 물왕멀(현재 중노송동) 일대를 궁성지로 꼽았다. 근거는 기와자기편왕성 초석 등을 내세웠다. 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는 1980년 동고산성 개괄 조사를 통해 발굴한 全州城(전주성)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 84.2m14.1m의 대형 건물터 등을 근거로 이곳을 왕궁지로 주장했다.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전주부사의 견해를 토대로 풍남문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을 왕궁지로 추정했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이전 KBS가 있던 자리인 거북바위를 주목, 전주왕도에 사령(四靈) 수호개념(기린용거북봉황)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개념에 맞춰 동고산성 일대를 궁성지로 추정했다. 조 교수는 기존에 전주 왕궁과 도성유적을 확인하기 위한 기존 연구는 단편적 편린만 보여줄 뿐, 아직 구체화된 성과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며이에 대해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조사연구가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논산에 있는 견훤왕릉에 대한 공간적 내용적 포섭문제를 두고도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는 통일신라 시대에 있던 격자형 도로, 전라감영 등을 통해 유추한 통일신라 시대의 행정치소 등을 근거로 궁성을 전주 천변인근의 평탄지대로 봤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에 왕성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현 전주정보영상진흥원 뒤쪽의 토축을 궁성의 서벽으로 제시했다. 차상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주무관(전 전라문화유산원)은 후백제의 성곽시설은 도시구조 변화과정에서 일부 흔적만 남고 대부분이 멸실된 상태라며 고대도시 구조라는 시각을 전제로 왕실사찰, 왕궁, 도성유적, 왕릉, 유적의 위치를 연계해서 심도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2 18:49

전북 마한문화권, 역사문화정비특별법 포함 여부 ‘주목’

지난달 10일부터 시행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에 전북 마한문화권이 포함될지 주목된다. 역사문화특별법 개정에 앞서 전북 마한문화권은 충북의 중원문화권, 강원의 예맥문화권 등과 병합 심사를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5월 국회를 통과한 역사문화특별법은 지역 역사문화유산 정비를 위해 역사문화권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등 6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북은 백제와 가야문화권에 포함됐다. 그러나 마한문화권은 영산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전남만 포함돼, 전북을 포함한 특별법 개정이 요구됐다. 전문가들은 특별법이 원안대로 시행될 경우 마한의 시작과 전성기를 함께한 전북지역의 마한사 연구와 발굴, 복원 등이 사멸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지난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전북 마한문화권 추가 개정안을 상정해 심의하기로 했으나, 충북 중원문화권 추가 의견이 제기되면서 관련 논의는 쟁점 법안으로 분류됐다. 결국 전북 마한문화권 추가 개정안은 상정되지 못했다. 이후 각 자치단체는 역사문화특별법에 중원문화권, 예맥문화권 등을 추가하는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도 문화유산과 관계자는 문화재청 등과는 역사문화특별법에 전북 마한문화권을 추가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향후 전북 마한문화권은 충북 중원문화권, 강원 예맥문화권 등과 병합 심사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는 역사문화특별법 개정 작업과는 별도로 전북 마한사 복원을 위한 대선 공약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또 문화재청의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전북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 계획에는 마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관광 자원화 방안 등을 담을 방침이다. 한편 전북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마한이 존재했다. 특히 익산 금마는 고조선 준왕이 망명해 마한 세력의 중심지가 됐다는 고고학역사적 사료들이 많다. 고창 봉덕리 유적을 비롯한 서남부권은 영산강 유역과 함께 후기 마한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7.07 18:00

동학농민군 편지, 국가등록문화재 됐다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우리가 왜군과 더불어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어섰던 동학농민군 중 한명의 편지가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1일 동학농민군 편지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 이 편지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유광화(1858~1894)가 1894년 11월께 동생 광팔에게 보낸 한문 편지다. 유광화는 양반가의 자제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로 활동하며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화순전투 등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유광화는 편지에서 자신이 나라를 위해 왜군(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으니, 동생에게 군자금을 급히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 내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의 처지, 농민군 지도자들의 의식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각 지역에서 일어난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농민과 양반이 참여한 범민족적 혁명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이 직접 작성한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 동학농민군 일원이 전투 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편지 원본이라는 희소성 면에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 편지는 손자인 유길홍이 오랫동안 보관해 왔다. 자료 원본 형태 그대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동학농민군 편지'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와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해 체계적으로 보존ㆍ관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7.01 16:59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 과거급제 어려워”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이 과거에서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이 학술대회를 통해 제기됐다. 전북대 이재연구소가 지난 25일 교내 인문사회관에서 이재 황윤석의 西行日曆과 科擧를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는 황윤석이 전라도민이라는 이유로 과거제도에서 차별받았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연구소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족인 경화사족과 교유를 확대하고, 서울에서 만난 실학자들을 통해 서학을 익혀 조정에서 인정받으려고 했던 사실을 25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재난고>를 통해 확인했다. 조선후기 농업경제와 화폐유통에 대해서도 살폈다. 이 과정에서 <이재난고>등 여러 저서에 대한 번역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문종 이재연구소장(전북대 사학과 교수)은 이재 황윤석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관찬사서에 나오지 않은 조선시대 생활상과 경제양태 등을 연구하기 위해 기록 전반에 대한 번역을 진행해야 한다며 <이재난고>를 국가지정 문화재(보물)로 신청하기 위해 선행해야 할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황윤석은 <이재난고>에 1752년~1785년 총 15차례에 걸쳐 과거시험을 치른 경험을 상세하게 남겼다. 이 기록에는 관찬사서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 나오지 않은 과거의 종류가 나온다. 황윤석이 참가했던 과거, 소식만 들은 과거, 자격이 되지 않아 참가할 수 없는 과거 등 다양하다. 당시 수험생의 입장도 자세히 담고 있다. 황윤석은 과거를 치르기 전 출제자인 지배층(왕)의 출제의도를 정확하게 알려고 했다. 그해 새롭게 도입된 국가운영정책, 정치환경, 왕의 지식계층 관리 정책 등 다양하다. 김승룡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임금이 출제하는 책문을 잘 쓰기 위해선 정치사회 현안을 대하는 왕의 태도를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며 황윤석은 매일 왕의 동향과 발언, 인사정책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황윤석 같은 향촌 지식인이 완벽이 동향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면 벌열집안(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경력이 많은 집안) 후손들은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동향을 알기가 용이했다. <이재난고>에는 전라도 인재들이 중앙정부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유영옥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18세기에 이르러 경(京)향(鄕)의 경계가 확연해졌다며 이런 추세 속에서 호남은 서울 근기뿐만 아니라 호서나 영남보다 차별받았던 땅이라고 설명했다. 송만오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도 당시는 개인의 능력보다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고 부연했다. 실제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들의 문과 점유율 평균은 대략 6.7%로 경상도나 충청도에 비해 낮았다. 송 교수는 전라도 출신이 문과에 급제하긴 어려웠다며 남원은 3.8년 만에 한 명, 전주는 5.2년 만에 한 명 정도 배출됐으며, 특히 황윤석의 고향인 흥덕(고창)에서는 71.7년 만에 한 명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황윤석은 소과엔 합격했지만 바로 관직엔 진출하진 못했다. 게다가 고관으로 향하는 문과의 벽은 평생 넘지 못했다. 황윤석은 이조판서 정흥순과 전직 이조판서 서지수의 도움으로 어렵게 장릉참봉직(종 9품)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과 급제자가 아니어서 중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다. 결국 경화사족과의 교유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전라도 출신인 그의 입장에선 이들과의 관계가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루트였다. <이재난고>에는 황윤석이 교유했던 인물 18명이 거론돼 있다. 조정정경순홍봉환홍계익김상익 등 고위관료다. 다만 교유에는 원칙이 있었다. 유 교수는 공과 사의 구분, 자신을 지키려는 지조, 선친이 맺은 교유의 연장을 계속 고수했다며 자존감을 지키고 올곧은 선비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화사족 역시 박학군자로 유명한 황윤석을 만나보려 했다고 부연했다. <이재난고>에 있는 서행일력에 따르면, 황윤석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토대로 수학과 유클리드 기하학, 마테오리치의 산수역법 등 서학을 접하고 익혔다. 과거 시험을 앞두고도 서학 정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당시 명망 있는 인물인 홍대용과 이덕무를 통해서는 서양의 천문역법을 배웠다. 천기철 부산대 연구교수는 황윤석은 박학으로 명망을 얻어 영조에게 인정을 받았다며 1783년 호남의 문학극망지사(文學極望之士)로 추천돼 외국에 갈 기회까지 얻었으나, 모친 상중이라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이재난고>는 18세기 사회경제적 상황도 드러낸다. 황윤석은 집안이 가진 토지면적과 농업 경영 형태(지주-전호제), 동전과 같은 화폐지출 내역, 고리대, 노비들의 태업 등 당시 경제문제를 기록했다. 이정수 동서대 일본어학과 교수는 이재난고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보를 제공한다며 학술서적 시장, 지방재정의 운영, 가정경제의 운영, 산송, 하급관료와 수령의 생활 등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27 17:18

무주 한풍루 보물됐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무주 한풍루(茂朱 寒風樓)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22일 밝혔다.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인 무주 한풍루는 선조 때 문신 백호(白湖) 임제가 호남의 삼한(三寒)인 무주 한풍루와 남원 광한루(廣寒樓), 전주 한벽당(寒碧堂)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문화재다.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고 전해지며, 수많은 묵객이 글과 그림으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당시 시대상과 문화상을 알 수 있는 건물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5세기 조선전기 문신 성임과 유순 등이 한풍루를 보고 쓴 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고, 임진왜란(1592) 당시 전소된 이후 다시 건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주 한풍루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로 이익공 양식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후기 관아누정 격식에 충실하게 건축됐다. 누하층에 평주 설치, 누하주와 누상주의 비례와 흘림 수법, 대량의 항아리보 치목, 추녀에 강다리 설치 등의 건축적 요소에서 구조적 안정감과 미적가치를 고려한 무주 한풍루만의 건축적 특이성을 볼 수 있다. 또 최근에 목재 연륜 연대 분석에서 16~17세기 중순 당시 기둥과 창방 등 주요 목부재가 확인돼 진정성 있는 복원이 이뤄졌다는 점과 임진왜란 전후의 중수와 복설(없어졌던 것을 다시 설치), 일제강점기 철거 위기에 있던 건물을 원래의 모습과 자리로 되찾으려 한 무주군민의 애환이 담긴 점,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중층 관영 누각으로 17세기 시기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 점 등 역사, 건축,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문화재청은 무주 한풍루 외에도 조선 왕실 불교 미술품인조선 회암사지 사리탑을 보물로 지정했다.

  • 문화재·학술
  • 백세종
  • 2021.06.22 19:03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제작동기…신천학살 아니야”

우석대학교(총장 남천현, 이사장 서창훈) 동아시아평화연구소(소장 서승)가 22일 전주시 금암동 우석빌딩 화하관에서 개최한 625 전쟁과 이북지역 민간인 학살 학술 심포지엄에서 한국 전쟁시기 북한 신천학살 사건의 주체를 미국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유물, 국제여성민주연맹의 조사를 토대로 보면 북한 내부에서 일어난 좌우 간의 이념대립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작품의 제작동기 역시 신천학살 사건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서창훈 우석학원 이사장과 남천현 우석대학교 총장, 장영달 우석대학교 명예총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지선 스님 등 유관단체와 학계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전쟁시기 발생한 신천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손님>(2001)을 발표한 황석영 작가는 사전 동영상 발제를 통해 해당 사건을 기독교 우파와 마르크스주의 좌파 간 사상대립이 폭력화 된 결과물로 해석했다. 앞서 그는 북한을 다녀온 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소설을 썼고, 여기서 학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손님(기독교 우파, 마르크스주의 좌파)으로 형상화했다. 황 작가는 (1989년) 방북했을 때, 북한의 황해도 신천에는 미제학살기념박물관이 있었다며 신천 양민학살 사건을 일으킨 주체를 미국으로 보고, 이를 고발하기 위해 세운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뉴욕에 체류하면서 어느 목사를 만나 그의 소년 시절 목격담을 듣고서 여러 가지 의문이 풀렸다고 강조했다. 황 작가는 그 끔찍한 학살은 우리들끼리 저질렀다는 게 진실이라며 배경은 계급적 유산이 약한 북한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두 가지 관념 모두를 개화로 받아들였던 탓이라고 했다. 한성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신천박물관과 한국에서의 학살-우익 치안대와 미군 그리고 피카소 발제를 통해 신천에서 일어난 학살을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하는 동기로 볼 수 없다며 피카소는 학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50년 9월,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한국전쟁을 고발하는 작품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듬해 1월 18일 완성했다고 말했다. 이어 피카소의 작품은 당시 좌파 쪽으로 기울어져있던 지식인들의 감정과 일치했다고 부연했다. 한 교수는 신천학살에 대한 실증적인 문제도 제기했다. 그는 신천학살의 가해자를 미군으로 특정하는 것은 다른 맥락에서 짚어봐야 한다며 신천박물관 전시실에는 진열된 총기류에는 한청(대한청년단), 치안대 글자가 적혀있다고 말했다. 이어 신천학살은 우익치안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천박물관의 전시내용과 구성이 가진 의도도 분석했다. 그는 노동당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며 이들은 박물관을 통해 인민들의 반미감정을 고양하고 일반화시키고자 했다고 했다. 김태우 한국외대 한국학과 교수는 한국전쟁기 국제민주여성연맹의 북한지역 조사와 신천학살 발제를 통해 국제민주여성연맹이 조사 당시 북한사람들이 증언한 내용에 의구심을 가진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민주여성연맹은 1951년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17개국 여성이 모여 한국전쟁의 참상을 조사하기 위해 꾸린 단체다. 이들은 학살사건이 있던 신천을 비롯한 북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참상과 증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김 교수는 국제민주여성연맹은 학살가해자로 미군 혹은 미군 통제하의 한국군으로만 지목되는 상황에 의구심을 제기했다며 나아가 실제 현장 대기 증언자들이 사전에 지침을 받았을 가능성까지 거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해도 지역 내에서 이동하는 도중에 만난 사람들과 가진 무작위 인터뷰에서는 우익치안대의 존재까지 억제되진 못했다고 했다. 이어 연맹은 이런 상황이 발생한 원인으로 북한 최고위급 인사나 조선인 통역관을 지목했다며 이들은 북한 정부의 지시 하에 일괄적으로 정보를 왜곡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김 교수는 북한은 우익치안대의 존재를 감춰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며 전쟁이전 인민의 확고한 지지위에 정권이 수립됐다고 선전한 상황에서 유혈사태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22 18:17

이재 황윤석의 학문과 사상을 조명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재 황윤석의 학문과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고창 출신인 이재 황윤석은 영정조 시대 호남의 대표 실학자로 10세부터 63세 서거하기 2일전까지 정치, 경제, 사회, 농공상 등을 망라한 일기 <이재난고>를 남겼다. 조선시대 개인이 저술한 저작으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전북대 이재연구소는 오는 25일 전북대 인문사회관 208호에서 이재 황윤석의 西行日曆과 科擧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황윤석이 중국 북경을 거쳐 전래한 서구지식과 학문사상을 살핀 뒤, 저서 <이재난고>의 보물승격을 모색할 예정이다. 1부에서는 김승룡 교수(부산대)가 黃胤錫의 아름다운 선물, <이재난고>와 그 속의 지식인들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다. 2부에서는 송만오 교수(전북대)가 이재 黃胤錫의 應科譜 作成을 위한 기초자료의 정리(1) 유영옥 교수(동아대)가 西行 시절 이재 黃胤錫의 交遊 원칙, 이지양 교수(성균관대)가 황윤석, 養親의 꿈을 품고 떠돈 仕宦길을 발표한다. 3부에서는 박순철 교수(전북대)가 서행일력 루트와 시문의 특색, 천기철 교수(부산대)가 황윤석, 서행에서 얻은 서학과 서학 인식의 특징 이상봉 교수(부산대)가 황윤석의 한시에 나타난 客의 이미지를 발제한다. 4부에서는 한문종 교수(전북대)가 <이재난고>의 연구현황과 과제 옥영정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가 <이재난고>의 서지학적 가치 이정수 교수(동서대)가 사회경제사에서 본 <이재난고>의 사료적 가치를 발표한다. 종합토론은 두 차례에 걸쳐 열린다. 2부3부가 끝난 뒤에는 하우봉 교수(전북대)를 좌장으로, 4부가 끝난 뒤에는 김경수 교수(청운대)를 좌장으로 토론이 열린다. 한문종 이재연구소장(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는 이재 황윤석 선생의 학문과 사상의 연구저변을 활성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이와 함께 <이재난고>의 보물승격을 위한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20 18:31

전북 공립박물관 총체적 난국

전북 지역 자치단체 산하 공립박물관들이 학예사 인력부족과 고용불안정, 부실한 예산지원 등 열악하게 운영되면서 개선이 요구된다. 현재 도내 20여 곳의 공립박물관들은 학예사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있어도 1명이거나 많아야 3명에 불과하고 예산도 부족해 기획 전시회는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전북도에서 제공한 2020년도 전국 박물관 운영현황 정기보고 제출양식과 역사학계에서 제시한 부수자료에 따르면, 도내 공립박물관은 익산 4곳(마한보석박물관, 왕궁리유적입점리 고분전시관), 전주 3곳(역사어진전통술 박물관), 군산 2곳(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군산역사관), 정읍 2곳(정읍시립박물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순창 2곳(순창장류전북삼림박물관), 진안 2곳(역사가위박물관), 고창 2곳(고인돌판소리 박물관), 김제 1곳(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남원 1곳(남원향토박물관), 완주 1곳(대한민국테마박물관), 무주 1곳(곤충박물관), 부안 1곳(청자박물관) 등 총 22곳이다. 박물관 22곳에서 근무하는 학예사는 모두 29명이지만, 각 박물관마다 인원 격차가 있다. 전주역사박물관과 김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이 각각 3명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1~2명 수준이다. 익산 입점리고분전시관과 순창장류박물관, 전북산림박물관은 학예사가 없다. 비정규직(계약직) 학예사도 상당수다. 공립박물관 22곳 가운데 10곳은 계약직 학예사만 있으며, 3곳은 정규직과 계약직이 같이 근무한다. 계약은 3~5년 단위로 갱신하는데, 평균재직연수도 4년에서 19년까지 천차만별이다. 학예사 A씨는 인원도 적고 고용까지 불안정하니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며 단순히 박물관을 지키면서 유물만 관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이어 실정이 이렇다보니 학예사들이 흥미를 잃은 채로 근무하다가 떠나는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다른 자치단체보다 못한 상황으로 정규직 학예사를 늘릴 필요가 있다며 예컨대 인구 26만 규모인 경북 경산시의 시립박물관도 학예사가 4명~5명 근무한다고 설명했다. 지원예산도 부족한 상황이다. 전북도와 도내 박물관 등에 따르면, 박물관 한 곳당 지원예산은 인건비를 제외하고 연간 평균 2000~3000만 원 정도다. 학예사 B씨는 예산이 적다보니 좋은 유물을 확보하거나 기획전시를 열기 어렵다며 전시회를 제대로 하려면 도록 값만 2000만 원 이상 든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장을 자치단체장이 겸직하는 사례도 있어서 전문성 문제가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고창 고인돌박물관과 판소리박물관은 고창군수, 무주 곤충박물관은 무주군수, 정읍시립박물관은 정읍시장, 진안 역사박물관과 가위박물관은 진안군수가 관장을 겸직하고 있다. 한 국립박물관 관계자는 문화재 보존관리, 박물관 경영은 대학교에 관련학과가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영역이라며 단체장이 겸직하는 건 바람직하진 않다고 지적했다. 전북 지역 대학교의 한 역사학과 교수는 자치단체장 주도하에 관장직은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전문직을 뽑아야 한다며지금같은 상황 그대로라면 발전없이 정체되는 악순환만 지속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20 17:16

“후백제 도성·왕궁 위치 규명…고지형 분석 필요”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王都)로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발굴작업과 학술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후백제학회가 지난 11일 한국전통문화의 전당에서 연 후백제의 왕도 전주 바로 알리기 학술대회에서는 역사고고학적 가치규명에 대한 필요성이 주된 화두였다. 유철 전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후백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문적 뒷받침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유 원장은 후백제 유적 대부분은 땅속에 매장돼 있어서 성격규명이 미진한 상태라며 도성, 궁성, 분묘, 사찰, 생산시설 등으로 나눠서 발굴 조사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동고산성 같은 경우 건물지 등이 초석, 기단석 등이 노출된 상태로 정비돼 있다며 일부는 복원을 추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 원장은 △전주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후백제 답사체험프로그램 개발 △동고산성, 기린봉, 왜망실 기와터를 연계한 후백제 역사문화관광벨트 조성 △후백제를 주제로 한 역사관(전시관) 건립 등 관광자원 활용방안도 제안했다. 전상학 전주문화유산원 책임연구원은 학자 간 이견이 있는 도성위치와 궁성추정지를 정확히 고증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전 연구원은 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했던 연못의 위치, 도성벽의 방향, 하천의 흐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진다면서 고지형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이어 최근 학제간 융복합 연구로 통실신라의 왕경인 경주 월성과 주변에 대한 고지형을 분석한 사례가 참고할 만하다며 후백제 궁성과 전주 왕경도 고지형 분석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는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기린봉 무릉마을에 후백제 왕릉의 존재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해당지역을 중심으로 심층적인 조사를 촉구했다. 곽 교수는 무릉마을 아중산장 부근에 있는 원형 산봉우리 모양이 왕릉의 양식과 흡사하다며 후백제 시기 왕궁과 왕릉이 배치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면담과 지표조사를 근거로 왕릉 존재 가능성을 추론한 상황이라며 정확한 성격을 밝히기 위한 물리탐사와 시굴조사가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미 전주대학교 연구교수는 후백제의 역사문화환경을 보전하는 가운데 전주의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풍부한 역사자원은 도시가 특별한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자산이라며 서울 풍납통 몽촌토성 사례, 대구 중구의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사업일본 마치즈쿠리도시별 사례 등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도시의 특성자원이 지켜지는 선에서 도시재생,주택개선사업이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학술세미나는 전라북도와 전주시, 후백제학회과 주최하고, 후백제학회와 후백제시민연대가 주관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13 17:00

전북가야 쟁점…봉수, 제철, 문헌, 용어

백제학회와 한성백제박물관이 지난 4일 개최한 학회에서는 전북 가야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사안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어졌다. 참여한 학자들이 논쟁을 벌인 주제는 봉수제철유적의 시기규명 문제, 반파국을 장수지역에 비정하는 견해 등이다. 또 장수가야, 김해가야, 함안가야 등 행정지명+가야 식 작명법의 적절성을 놓고도 논의가 이뤄졌다. 이를 부분별로 정리한다. 최근까지 전북 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117개 봉수 조성시기와 형태가 주된 논쟁거리였다. 김주흥 LH밀양사업단장은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국에 있는 봉수는 44개이며, 각 봉수당 거리는 11.6km라며 가야시대에 110여 개의 봉수를 운영했다는 게 맞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삼국,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시기에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부연했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일본서기에 나온 데로, 반파가 514년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단기간에 봉화를 세웠다면 구조적인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면서 게다가 남해안 쪽에도 분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조명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호남 동부권은 산악지대로 봉화를 조밀하게 배치할 수밖에 없다며 대지에 설치한 조선시대 봉화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반박했다. 이어 주변국가와 전쟁을 벌일 때 급조해서 만들다보니 형태가 다를 수 있다면서 지형과 환경의 특수성으로 쓰이는 재료도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는 당시 봉화 양식은 토축형, 암반형, 석축형으로 다양하다며 봉화로도 복원을 했는데 섬진강 유역에도 배치된 흔적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제철은 입지 문제가 화두였다. 이남규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입지상의 문제로 장수 대적골과 같은 산간에서는 제철이 생산되긴 힘들다며 고대시기 같은 경우 유통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남원, 장수 구릉지대에 슬래그가 분포하는 곳이 있다면, 그 곳에서 제철을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김상민 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부 교수는 현재까지 대적골에 나온 제철 중에 삼국시대 것이 확인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조 연구원은 주변을 지표조사 했을 때 삼국시대 토기편이 적지 않게 수습됐다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대적골에서 여러 차례 발굴한 결과 통일신라 문화층까지 접근했다며 그 아래 선대 문화층이 있기 때문에 발굴결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 교수는 전국 여러 기관에서 제철유구, 유물을 발굴한 결과를 발표한 보고서에 오류와 시행착오가 드러난다며 유적 발굴을 너무 서두르지 말고 발굴역량을 강화한 뒤 시행해야 문제가 안 생긴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제철고고학은 40여 년 간 고고학금속공학을 연구해온 전문가들에게도 어렵고 미해결 분야가 많다고 부연했다. 반파를 대가야라고 보는 기존 통설과 장수에 존재하는 독자세력으로 보는 새로운 학설도 충돌했다. 이날 학회에 참여한 학자 대부분은 △반파는 백제가 대가야와 적대적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격상을 낮추기 위해 부른 용어라는 점 △반파가 성을 지은 자탄은 경남 거창, 대사는 경남 진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고령토기의 확산지점이 넓다는 점 △일본서기가 삼국지의 문헌 내용을 윤색했다는 점 등을 들어, 반파는 대가야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에 힘을 실었다. 반면 곽 교수는 반파의 위치 비정은 엄연히 역사 고고학의 범주라며 전북 동부에서 발견된 110여곳 8갈래 봉화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 장계분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서기에 반파가 513년 기문과 대사를 두고 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봉후 기록이 나오는 데, 그 물증이 전북 동부지역 봉화망이라고 부연했다. 이에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반파 장수 독자세력 이론에 대한 근거를 고고학적 자료인 봉화뿐만 아니라 문헌사료인 일본서기로도 들고 있다며 일본서기의 문제점이 제기된 이상 논리보강이 필요하다고 재반박했다. 행정지명에 가야라는 고유명사를 붙이는 조어문제도 제기됐다. 권 교수는 장수가야, 김해가야, 함안가야라는 용어는 참 어색하다면서 예컨대 전북가야라는 표현은 전북 전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병남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지역 사회와 일부 지역민 사이에서는 행정지명+가야를 연결한 조어를 실체로 받아들이는 현상도 있었다며 학계 바깥의 사회에서는 검증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검증을 통한 논리보강과 새로운 시각으로의 전환이 촉구됐다. 권 교수는 장수 가야 세력과 관련해서 봉수봉화뿐만 아니라 국가체제의 상징인 산성, 왕궁, 왕릉, 수취체제 창고를 발굴했으면 좋겠다고 제언했다.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는 정치체를 놓고 중심과 변두리라는 등식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며장수와 진안일대,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에 무게를 두고 연구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이제 고고학적인 유물과 유적 발굴을 시작한 단계라며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간, 학제간 융복합 발굴과 연구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06 17:28

“논쟁의 영역 전북가야…검증필요”

한국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가 전북 가야를 두고 검증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남원장수 일대 독자 가야세력 존재설의 근거로 쓰이는 봉수제철 유적, 고분군, 문헌사료에 대한 보완 연구규명이 필요하다는 게 학계의 공론이다. 봉수제철 유적, 고분군을 두고는 가야 것으로 입증하기 위한 추가 조사, 문헌사료 양직공도(梁職貢圖)일본서기(日本書紀)의 활용을 두고는 기존의 통설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백제학회와 한성백제박물관이 지난 4일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백제와 가야의 경계와 접점을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는 전북 동부지역 독자 가야세력론이 주된 화두였다. 세부 논의주제도 이 이론의 근거로 활용되는 봉화봉수, 제철 유적, 고분, 양직공도일본서기 등이었다. 김주홍 토지주택공사(LH) 밀양사업단장은 전북 동부 봉화의 구조형태규모축조방식을 보면 특정시대에 축조되었다고 보기 힘든 곳들이 많다며 소위 가야 봉화의 독자적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유구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봉화 인근에 출토된 가야 토기를 두고도 관련 전공자들과 함께 갑론을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남규 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조선시대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전북 지역 철산에 대한 기록도 없다며 지표 조사를 실시했던 장수 산악지대도 입지상으로 고대시기 제철이 나오긴 힘들다고 말했다. 권오영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와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는 반파를 장수로 규정하긴 어렵다며 일본서기와 양직공도에 녹아든 사관과 고분 양식 등으로 보면 대가야설, 즉 통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는 장수 지역에서 양직공도, 일본서기에 나온 봉화가 발견됐으며, 장계분지에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며 독자세력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제철 유적도 봉화 유적이 확인된 곳과 일치하며, 그 곳에서 삼국시대 토기가 적지 않게 수습된다며 고대시기 제철일 가능성을 열어뒀다. 백제학회 회장인 성정용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이런 공론화의 장은 곽 교수님을 비롯해 지역에서 30여 년 간 유적 발굴을 해오신 분들 덕분에 열렸다며지역의 독자성을 두고 좀 더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과도한 추론은 지양하면서 접점을 만들어나가면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06 17:28

‘후백제 왕도’ 전주 등 7개 시·군 후백제문화권 발굴 ‘시동’

900년부터 936년까지 37년간 후백제의 왕도(王都)였던 전주는 후삼국시대 격동의 중심지이자 찬란한 역사 문화가 펼쳐졌던 역사적 장소다. 전주시를 포함한 후백제문화권 7개 시군이 후삼국시대의 주역이었던 후백제의 역사문화를 규명하고 이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지방정부협의회를 꾸리기로 했다. 김승수 전주시장과 박성일 완주군수, 장영수 장수군수, 전춘성 진안군수, 강영석 상주시장, 김영길 문경부시장, 한성환 논산시 동고동락국장은 1일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 구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전북의 전주완주장수진안과 경북 문경상주, 충남 논산에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왕의 탄생과 성장, 후백제 건국, 견훤왕의 죽음 등 역사 기록이 있고, 후백제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그동안 후백제 역사문화와 위상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이에 7개 시군은 이날 협약을 기점으로 후백제문화권의 지속가능한 방향을 설정하기로 힘을 모았다. 연말까지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를 꾸린 뒤 후백제 역사문화 발굴조사와 학술연구, 홍보활동 등에 협력하고, 후백제 권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활성화 사업도 함께 발굴한다. 협의회는 오는 10일 시행되는 역사문화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역사문화권을 추가로 설정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인다. 후백제 문화재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세계문화유산 지정에도 힘쓴다. 또 타 지자체의 참여 독려, 정책포럼, 정책토론회, 학술대회 등도 추진해 후삼국시대의 역사 조명을 확장한다. 앞서 시는 후백제 역사문화 복원을 위해 지난 2019년 문화유산전문가와 박물관장, 학예사, 관련 분야 교수 등으로 구성된 전문 학술연구단체후백제학회를 출범했다. 연말까지 서고산성 추정 서문지와 우아동사지, 무릉고분군 등에서 후백제 유적 정밀발굴조사도 한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의 출범으로 찬란했던 후백제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재조명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전북뿐만 아니라 충남과 경북 지역을 아우르는 후백제의 역사문화적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여 나갈 것이라고 했다.

  • 문화재·학술
  • 김보현
  • 2021.06.01 19:35

전북 가야 치열한 논쟁의 장 열린다

전북 동부지역에 존재했다는 가야세력의 실체와 관련 유물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백제학회와 한성백제박물관은 오는 6월 4일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백제와 가야의 경계와 접점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전북 동부지역 정치체, 고분 축제세력, 가야 제철유적 및 봉화의 실체 등을 놓고 토론을 한다. 백제 학회는 이날 대회목적을 전북 동부지역 가야의 실체 대한 공시적 접근, 백제와 가야의 관계에 대한 궁극적 해명으로 내세웠다. 주제도 전북가야를 둘러싼 여러 쟁점사항과 백제와의 접경지대 상황으로 압축된다. 오전 세션에는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전북 동부지역 정치체에 대한 기초적 이해, 위가야 성균관대 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가야사 관점에서 본 백제와의 접경,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가 전북 동부 지역의 고분 양상과 축조세력(or정치체)를 발표한다. 오후 세션에는 김주흥 LH 한국토지주택공사 밀양사업 단장이 전북 동부 지역의 봉화봉수, 김상민 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부 교수가 전북 동부 지역 제철유적의 성격, 김병남 전북대 사학과 교수가 백제사 관점에서 본 가야와의 접경을 발제한다. 주제별 발표가 끝난 뒤에는 성정용 백제학회 회장(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을 좌장으로 종합토론이 열린다. 토론자로는 이남규 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 김영심 한성박물관 전시기획과장, 홍보식 공주대 사학과 교수, 조명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조성원 부경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김낙중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참석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전북 동부지역 가야 정치체의 실체, 봉수봉화제철유적의 시기 비정문제, 문헌사료 양직공도(梁職貢圖)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 반파국의 장수지역 존재여부 등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일 전망이다. 전북 가야가 발표된 뒤, 학계에서 그 동안 논쟁을 벌여왔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반파국의 장수지역 존재여부를 두고는 최근에도 언론과 학계 등 각 분야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어지고 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5.23 18:03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