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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 유물관' 한옥마을 건립을"

전북대 박물관이 마련한 '전주한옥마을 재발견' 특별전에서 유물이 공개돼 관심을 모았던 금재 최병심 선생(1874∼1957)의 유물관을 한옥마을에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최병심은 간재 전우 선생의 수제자이자 전북을 대표하는 유학자. 간재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제자중의 하나였던 그의 학문은 성균관 부관장으로 추대되기까지 할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특히 일제 시대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선생에게 옥류동 땅을 팔라며 토지수용령을 내렸으나 이를 거부하고 단식으로 항거, 22년간 법정투쟁으로 '한전 사건'을 불사했던 장본인이다. 독립운동 야사 「염재야록」 의 서문을 써주다가 임실경찰서에 구금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에 온 몸을 바친 공로자이기도 했다. 평생의 강학과 교육을 통해 길러낸 제자만도 300여명. 그 제자들은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유학과 전통문화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덕분에 전주의 토박이 어른들 사이에서는 한벽루 부근에 살았던 최병심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삶과 학문적 자취가 담긴 공간는 없어졌다. 지난 1969년 한벽당∼국군묘지 간 도로공사, 1986년 기린로 공사로 인한 강제 철거령으로 그의 초당과 자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곳은 최선생의 제향을 드렸던 장소가 전부. 설상가상으로 5년 전부터 이곳에 일반인이 불법 입주해 강제 퇴거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증손 최동호씨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며 "어떻게 해 볼 형편은 안되고, 저렇게 스러지게 될까봐 늘 속만 탄다"고 안타까워했다.이런 상황이 알려지면서 학계와 문화계의 전문가들은 최 선생의 수십 여권의 서첩과 14권의 문집, 영정 등 보관할 수 있는 유물관을 세워 한옥마을에 선비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최 선생의 유물들을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유물관을 건립해 최선생의 연구와 그 뜻을 새기는 작업들이 진행돼야 한국 유학과 선비정신의 마지막 불씨를 담았던 곳으로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학계는 "한옥마을의 옛 선비정신을 살리려면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변두리로 밀려났던 최 선생의 삶이 재조명돼야 한다"며 서당이 복원되거나 유물관이 건립되면 한벽당∼전주향교∼강암서예관을 잇는 문향(聞香)의 띠가 생겨 한옥마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8.07.28 23:02

故 오정숙 명창 영결식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

"참 부모같은 스승입니다. 오래도록 살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가십니다. (남겨진) 우리 제자 선생님들, (동초제 맥을 잇기 위해) 많은 짐을 지게됐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이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 천궁으로 가실겁니다. 잘 가십시오. 선생님."삶의 끝자락에서 씻김굿이 펼쳐진다. 귀한 사람이 갔다. 살아생전 극진히도 모시고 또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스승 동초 김연수 선생 곁으로 아까운 사람 하나가 홀연히 떠났다.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인 고 운초 오정숙 명창. 11일 오전 9시 그의 영결식이 열리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광장에는 명창이 부른 '춘향가' 중 '어사출도' 대목이 울려퍼지고 있었다."저는 오정숙 선생이랑 반백년 이상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정숙 선생, 내가 더 지키고 가꿔서 오랫동안 더 살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죄인이 됐습니다."유족 배기봉 동초제판소리보존회 회장은 눈물을 훔쳐내느라 말을 잇지 못한다.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이순단 방성춘 이영신 명창 등 문화재로 지정받은 제자들을 비롯해 소리를 물려받은 제자들이 부르는 눈물 섞인 '반야심경'과 '보렴'은 더 구슬프다. 제자 대표로 고별사를 한 동초 선생의 아들 김규형씨는 "부모님 돌아가실 때의 아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낀다"며 "고된 꾸지람을 끔찍한 제자 사랑으로 생각하고, 동초제가 방방곡곡에 꽃 피울 수 있도록 지켜가겠다"고 다짐했다.맑고도 단단한 소리를 뽑아냈던 작은 체구는 제자들의 오열 속에 전주 효자동 승화원에서 불꽃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명창의 유해는 한 줌 재가 돼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 동초 선생 곁에 뭍혔다.국악장으로 열린 오명창의 영결식에는 송하진 전주시장과 이영희 한국국악협회 회장, 김용삼 문화체육관광부 전통문화예술과장, 황병근 전 전북예총 회장, 이재형 국립민속국악원 원장, 문치상 풍남문화법인 대표, 홍정택 김유앵 최승희 김일구 조통달 명창, 주봉신 김청만 고수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시민 400여명이 참석해 국창 가는 마지막 길에 함께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8.07.14 23:02

미륵사지석탑, 해체 10년 공정 80%

10년전 보수 정비에 들어간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해체 공정이 80%를 넘어섰다. 국내 문화재의 전면적 해체와 복원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공사와 관련,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10일 올 상반기 162일간의 현장보고서를 냈다.이에 따르면 올들어 6월말까지 해체된 석탑 부재는 518개. 하루 3.2개꼴로 부재를 걷어낸 셈이다. 고건축 전공자 3명과 보존학자 4명, 드잡이(석탑을 뜯어내 다시 맞추는 사람) 1명이 투입돼 부재 1개마다 스캔을 뜨고 복원시 재사용 할 수 있게 보존처리 하면서 '진짜 보물 다루듯' 하느라 해체과정이 더디다.문화재연구원은 98년 시작된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을 당초 10개년 계획으로 2007년 마무리 할 예정이었으나, 신중한 해체와 학술연구 병행을 위해 2014년까지 연장키로 지난해 결정했다.연장 첫해인 올 연초 서울대와 카이스트에 의뢰해 안전성평가 용역을 완료했고, 3월에 보수정비 현장 마당에 해체한 옥개석(지붕돌)을 해체전 모습으로 복원했다. 4월부터는 인근 금마 삼기면 일대 민가에 있는 석재 94구를 조사, 20% 정도가 미륵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추정했다.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석탑 1층 본체의 옥개석 아랫부분과 북서측 석축 일부로, 연구원은 하반기 남은 부분에 대한 해체를 계속할 계획이다.유물전시관측은 보수정비 과정 자체가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보고 방학중 일반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수정비에 대한 현장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08.07.11 23:02

부여문화재硏, 3중 기단 백제 목탑 첫 확인

목탑이 들어설 기단을 3중으로 다져 만든 사례가 익산 제석사지에서 처음 밝혀졌다.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0일 사적 제45호인 익산 제석사지에 대한 올해 발굴조사 결과, 정교한 판축(版築)으로 만든 삼중기단 목탑지와 화려한 암막새로 장식된 금당지 등 익산제석 사지의 실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제석사지는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이 사비(부여)에서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는 일환으로 세웠다가 639년 벼락으로 불당과 회랑 등 불에 탄 백제 왕실사찰로 추정되고 있다.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6월 익산 왕궁성과 관련된 왕실 사찰의 성격을 규명하고 정비 복원 자료로 활용키 위해 사역 중심부인 목탑지-금당지-강당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이번 조사 결과 제석사지 가람의 세부적인 특징이 드러났는데 두께 약 3m에 3중인 목탑 기단은 차곡차곡 흙을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바깥쪽 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21.2m의 이중 구조며 그 안에 목탑 중심부가 위치하는 또 다른 기단이 드러나 결과적으로 3중 기단으로 구성됐다.목탑은 지면을 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약 70cm 두께로 갈색 사질 점토를 채워 넣은 다음, 다시 그 위에는 약 250cm 두께로 또 하나의 판축 기단을 조성했다.연구소는 이같은 3중 기단 갖춤 목탑은 일본과 중국등 동아시아 3국 불교 건축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구조라고 밝혔다.이번 조사 결과에서는 또 전형적인 백제 연화문 수막새 및 다른 기와 편과 함께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다량으로 확인됐다.조사단은 이 암막새들이 같이 출토되는 유물 및 그 출토 층위를 볼 때 백제시대 유물로 판단된다면서 중앙에는 도식화한 귀면문(소위 도깨비 문양)을 조각했으며 그 좌우에는 유려한 인동당초 문양이 확인됐다고 밝혔다.이밖에 제석사지 곳곳에서 건물 기단 기초를 다지기 위한 달구질 흔적이 확인됐으며 그 북동쪽 폐기장에서는 帝釋寺(제석사)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가 출토됐다.한편 부여문화재연구소는 향후 제2차 발굴조사를 통해 제석사지의 중문지와 회랑에 대한 확인조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독특한 형태의 목탑 구조를 밝혀 중국, 일본의 목탑에 대한 비교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이번 발굴조사에 대한 일반인 대상 현장설명회는 오는 12일 실시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08.07.11 23:02

"태조 어진 잘 모셔라"…문화재청 전주시 방문

'왕(王)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문화재청이 최근 태조 어진(御眞·보물 제931호)을 풍수지리까지 감안해 봉안해 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이들 관계자들은 9일 경기전 유물전시관 관련, 업무협의를 위해 전주시를 방문한 가운데 태조어진의 봉안 위치와 봉안 방향까지 일일이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태조어진은 오는 21일, 3년여 만에 전주로 환안되며, 오는 2010년 이후 경기전에 건립되는 유물전시관에 봉안된다.문화재청 관계자들은 이와 관련, 태조어진을 유물전시관 지하층이 아닌 1층에 보관하라고 주문했다.전시 방향도 북쪽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도록 조정함으로써 조선의 초대 왕인 태조(太祖)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갖출 것을 요청했다.물론 문화재청의 제안에는 지하보다는 지상, 북향보다는 남향이 항온·항습 효과가 크다는 의미도 담겨있다.하지만 비록 초상화지만 왕을 방문객 발밑에, 햇볕과 바람이 적은 북쪽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따끔한 충고가 담겨있는 것으로 풀이된다.문화재청은 이에앞서 전주시청에 태조어진이 또다시 훼손될 경우 영구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한다는 공문을 보내왔다.시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춘 가운데 최대한 잘 모시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한편 시는 오는 2010년까지 경기전 내에 총 44억원을 투입해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의 유물전시관을 건립한다.

  • 문화재·학술
  • 구대식
  • 2008.07.10 23:02

"스승님 걸어온 길 잘 지킬 것"

국창이 떠난 자리. 가장 먼저 오정숙 명창을 찾은 이는 오랜 세월 북장단을 맞춰온 김청만 고수였다.자녀가 없는 명창 곁을 지킨 이들은 제자들과 국가지정문화재 증서. 낡았지만 그의 평생과 맞바꾼 표창이었다.8일 오 명창의 빈소가 차려진 원광대학병원 장례식장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국악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일주 김유앵 조소녀 홍성덕 김성녀 김성애 송재영 김연 임향님 명창, 주봉신 김청만 고수, 이영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김학곤 전북국악협회장, 김숙 전북무용협회장, 가수 장사익씨 등이 조문을 했으며, 이명박 대통령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추모화환을 보내왔다.70년대 오 명창에게 소리를 배운 홍성덕 전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은 "너무 빨리 가셔서 안타까울 뿐"이라며 "스승이 걸어온 길을 잘 지켜갈 수 있도록 제자들이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고 은희진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다 오 명창 밑으로 들어간 젊은 소리꾼 이자람씨는 "선생님은 손녀뻘인 제자의 제자를 거둬주셨다"며 "소리를 가르치실 때는 엄격하시지만 평상시에는 소녀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신 분"이라고 기억했다.30여년 전부터 오 명창의 공연을 보러 다니며 친분을 쌓아온 장사익씨는 "장르는 다르지만 평소 오 명창의 소리하는 모습과 사설을 참 좋아했다"며 "소리와 결혼해 많은 제자들을 키워낸 오 명창을 평소 존경해 왔다"고 말했다.오 명창의 장례는 동초제판소리보존회 주관으로 국악인장으로 치러진다.국악장례위원회 위원장은 이영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부위원장은 채치성 국악방송 본부장과 김학곤 전북국악협회 회장이 맡았다. 이 이사장은 "오 명창은 한마디로 참소리꾼이었다"며 "소리꾼으로 대쪽같이 정도를 걸어온 오 명창의 죽음을 모든 국악인들이 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5일장이며, 발인은 11일 오전 8시. 영결식은 오전 9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놀이마당에서 진행된다. 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이순단 방성춘 이영신 명창 등 문화재로 지정받은 제자들이 '보렴' '반야심경' '사모곡' 등을 부르기로 했다. 박태구 동초제판소리보존회 사무국장은 "영구차를 꽃으로 장식하고 영결식에서 제자들이 소리를 올리는 등 선생님 가는 길을 귀하게 모시겠다"고 말했다.오 명창은 생전 바람대로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 곁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에 뭍힌다. 하관식은 오후 5시.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8.07.09 23:02

판소리계 큰별 오정숙 명창…소리무대 하늘로 옮기다

7일 타계한 운초(雲超) 오정숙 명창은 한국 판소리계의 산증인이었다.그는 1972년 '춘향가' 완창을 시작으로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까지 다섯바탕을 완창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여성명창으로는 처음이었다. 1975년 부활된 전주대사습놀이에서는 장원을 차지하며 당당히 명창의 영예를 얻었다. 동초 김연수의 유일한 제자였던 그는 다른 소리를 섞지 않고 스승의 소리를 올곧게 이어 '김연수 바디'를 우리나라 대표 판소리로 키워냈다.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오명창은 같은 해 중앙 무대의 화려한 명성을 뒤로 한 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동초각'을 짓고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전념해 왔다."제자들 잘 가르쳐서 내놓는 것이 남은 의무"라며 "나를 이겨먹는 소리꾼이 나와 동초제를 더욱 융성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오명창이었기에 제자들 면면도 화려하다.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이순단 김소영 방성춘 김선이 이명희 김성녀 김성애 명창 등 오늘의 소리판을 이끌고 있는 명창들 대부분이 오명창에게서 소리를 익혔다.1935년 6월 21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오명창은 전주 태생이었던 아버지 오삼룡 명창의 영향을 받아 열살 때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열네살 때부터 열여덟살 무렵까지는 우리국악단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스물 한살 때 창극 활동을 그만 두고 판소리 배우는 일에 매달렸다.스물세살 때 김소희 명창에게 '심청가'를 배웠으며, 다음해부터는 은거하고 있다가 스물일곱살에 정식으로 동초 전수생이 됐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먹으면서 소리를 익히고, 동초 선생과 백일공부에 들어가면 '이름난 명창과 제자가 매일 소리를 한다'는 소문에 일대 귀명창들이 찾아와 소리판이 벌어지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평생을 동초제 판소리에 바쳐온 그에게 스승은 단 한 명, 동초 김연수 명창이었다. 1974년 스승이 세상을 떠나던 날에도 '수궁가'를 완창하고 있던 그는 스승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히며 "우리 선생님은요"라며 간절한 그리움을 풀어놓곤 했다. 시간만 나면 스승이 묻힌 전남 고흥을 찾았던 그는 쓰러지던 날에도 '고흥동초국악제' 준비를 위해 고흥을 가던 중이었다.지난해 동초 김연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춘향가'를 완창하며 '곽(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피나게 공부해도 다 못하는 것이 소리 공부'라고 했던 오명창. 그의 마지막 무대는 지난 6월 8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1회 동초제 판소리 국악한마당'이었다.나이 차이가 한 살 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평소 스승으로 극진히 오명창을 모셨던 이일주 명창은 스승의 타계 소식에 "허망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판소리 연구가 최동현 군산대 교수는 "오정숙 명창은 판소리 동초제 보존과 보급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에 힘쓰는 등 국악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며 "전북 판소리 뿐만 아니라 한국 판소리사의 큰 별이었다"고 회고했다.키 150cm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단단한 소리. 그 작은 사람이 무대에만 서면 무대가 꽉 차 보였다. 명창 오정숙. 이제 그의 이름은 판소리사에 잊혀지지 않을 역사가 됐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8.07.08 23:02

"전라감영, 문화벨트 공간연결 될 수 있다"

전라감영이 '한옥마을∼경기전∼풍남문'과 '객사∼차없는 거리∼영화의 거리'를 잇는 문화벨트의 공간적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전라감영 복원 문제를 놓고 역사성에 바탕을 둔 전문적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라감영의 조직과 관찰사의 기능, 시대적 변화에 따른 감영의 변천, 감영 재정 등 역사적 뿌리찾기가 시도돼 주목을 받았다.하지만 이같은 학술적인 규명노력이 전라감영 복원사업과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19일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과 전라문화연구소(소장 한문종)가 마련한 '전라감영의 원형과 활용'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소장은 "감영복원의 기본컨셉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역사적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며 전주전통문화 중심도시와 관련성을 갖는 공간성의 확장을 주장했다.이어 원소장은 이 공간을 조선시대∼ 근·현대까지 각종 역사를 상징화하고 기념화한다면 훌륭한 역사학습 공간이 될 수 있으며, 감영 자체의 스토리텔링을 개발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토론자로 나선 이해준 공주대 교수는 "선택적 복원, 상징적 복원이 현실적일 수 있다"며 "최근 문화재 정책 변화를 고려할 때 경관이 변형되거나 문화기반이 따를 수 없을 때 과거의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또한 문화원형의 특성과 수요층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문화콘텐츠와 프로그램 개발이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남해경 전북대 교수는 "전라감영의 복원과 활용문제는 단순히 역사적인 건축적 행위뿐 아니라 현세의 생활과 관련된다"며 "전주시민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역사문화재를 활용해 도시를 디자인해야 새로운 차원의 도시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8.06.20 23:02

전주학 이끈 6년, 전라감영의 뿌리를 찾다

개관 6주년을 맞이한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을 집중 조명한다.전주역사박물관·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소장 한문종)가 19일 6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전주학 학술대회·전라감영 특별전을 준비한다.올 7회를 맞은 전주학 학술대회 주제는 '전라감영의 원형과 활용' .19일 오전10시 전주역사박물관 녹두관에서 진행되는 이번 학술대회는 전라감영의 뿌리를 찾고, 구도심 살리기와 맞물려 있는 전라감영의 문화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대안 마련을 위한 자리. 1·2부에 걸쳐 전라감영의 운영, 전라감사의 현황 등 중심으로 7개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이 진행된다.1부엔 이희권 전북대 명예교수의 '전라감영 직제와 기능' 주제발표를 시작으로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의 '전라감사의 출신과 재임실태' 홍승재 원광대 교수의 '전라감영 건축물의 구성과 기능' 발표가 있다.2부는 '전라감영의 재정구조와 운영' ' 「완영일록」 에 나타난 전라감영' 등에 관해 김태웅 서울대 교수, 이태영 전북대 교수, 김현영 국사편찬위 연구관, 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소장이 주제발표가 이어진다.학술대회와 함께 전라감영 특별전 '선화당 회화나무' 전시도 있다.200여년이 넘은 회화나무는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 우리 선조들은 회화나무를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겨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고 믿었다.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대궐 등에서만 심을 수 있었고, 임금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관리에게 상으로 내릴 정도.전라감영의 지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있는 이번 전시는 전라감영과 전주, 전라감사, 전라감영지 발굴유물, 전라감영과 출판문화, 전라감영 고문서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된다. 처음 소개되는 전라도 관찰사와 육방이속 사진, 감영지 발굴유물과 완영일록 등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8월10일까지 3층 기획실에서 전시된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8.06.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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