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어진 전주봉안 600년, 원형 찾자] 땅속 137년…"귀중한 유물 더 훼손되기 전 발굴해야"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봉안 600년. 1410년 전주에 봉안, 1872년 세초돼 경기전에 매안된 태조 어진 구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경기전 어진 구본을 찾는 과정은 조선 왕조의 본향으로서 전주 역사의 원형을 회복하고 전주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전문가들은 "2010년은 전주시가 시로 출범해 환갑을 맞는 해이고,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기념하여 태조 어진을 모신지 600년이 되는 해"라며 "2010년 태조 어진 봉안 600년을 맞는 지금이 이를 상징하는 태조 어진 구본 발굴 작업을 벌이기에 적기"라고 강조한다.한국의 전통사회에서 60년은 환갑(還甲)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역사의 한 획을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의미 있는 시점. 옛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태조 어진 구본을 찾아 다시 역사를 복원해야 할 때인 것이다.▲ 태조 이성계 어진과 전주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어진(御眞) 중 화재와 전란을 피해 온전하게 보존된 단 두 작품 중 하나로, 전신상으로는 유일한 예다. 또한 원래 봉안된 장소인 진전에 그대로 남아있는 조선 태조의 하나밖에 없는 초상이기도 하다.영흥의 준원전과 경주의 태조 어진이 태조 재세시 태조의 명으로 봉안된 것이라면, 전주의 예는 1408년 태조가 승하하고 다음해인 1409년 전주부의 요청으로 경주의 태조 어진을 모사해 1410년(태종10) 전주부에 봉안한 것이다. 조선후기 기사이기는 하지만, 「영조실록」에 남아있는 '전주는 국조 시조 본향이고 태조가 왜구를 정벌할 때에도 일찍이 이 곳에 주절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주나라의 기와 한나라의 풍패처럼 여겨 특별히 전우를 세워 태조의 영성을 모셨다'는 내용은 전주에 태조 어진을 봉안한 배경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기록이다.경기전 태조 어진은 봉안대상과 봉안처가 함께 보존되고 있으며 관련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어서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은 "최초의 어진 제작과 진전의 건립,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돼 행해진 어진의 봉안과 모사를 위해 투여된 막대한 인력과 재원은 경기전 태조 어진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며 "경기전 태조 어진은 면면히 발달해 온 한국 초상화의 역사를 대변해 주며, 더 나아가 동아시아 초상화의 독특한 전개과정을 웅변해 주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2007년 구본 발굴 추진, 왜 중단됐나2007년 전주시는 경기전 내 세초돼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조 어진 구본 발굴을 추진했었다.2007년 1월 전주를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학계 전문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어진 구본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 어진이 묻혀있는 유력한 공간으로 거론됐던 경기전 본전 후원 등을 대상으로 지중탐사기로 지질탐색을 벌였다.그 결과 2007년 7월 폐쇄공간인 경기전 본전 후원 4곳에서 매장 의심물체가 감지됐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본격적으로 구본 발굴에 들어가기 위해 전주시가 같은 해 8월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에 대한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냈다. 그러나 9월 '문화재위원 심의결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신을 받게 되면서 어진 구본 발굴은 흐지부지하게 됐다.전주시 관계자는 "당시 4000만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본전 후원 600㎡를 대상으로 매장 유물 발굴을 위한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문화재청에 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물에 씻어서? 혹은 불에 태워서?「조선왕조실록」 고종 9년 5월 4일 기사에는 '慶基殿 舊本(경기전 구본), 則新本展奉後(즉신본전봉후), 陪進大臣以下(배진대신이하), 敬奉洗?(경봉세초), 埋安于本殿北階上(매안우본전북계상), 恐好(공호)'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해제하면, '경기전의 구본은 신본을 모신 후에 배진하는 대신 이하 관리들이 모셔다가 세초하여 본 전각의 북쪽 섬돌 가에 매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다.이는 낡은 어진의 처리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경기전의 구본으로 말하면 본 왕조 초기에 그린 것으로, 500년 동안 모셔오던 어진을 세초하여 매안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라고도 나와있어 경기전 어진 구본이 가진 의미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경기전 구본이 세초매안됐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이외에도 「어진이모도감청의궤」와 「일성록」 등 역사적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구본을 어떻게 묻었느냐다. 일반적으로 '세초(洗?)'가 물에 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태워서 묻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 1985년 쓰여진 「전주시사」에는 '1872년 너무 오래돼 낡아 새로 모사케하며 동년 9월 20일 바꿔 봉안케하고 여러차례 국난 겪으면서 400년 보존된 유일한 어진을 세초매안, 불살라 묻어버려 영원히 찾을 수 없다'고 기록돼 있으며, 이보다 앞선 1943년 「전주부사」에도 '洗(燒却)'라고 적혀있다.그러나 불에 태웠다는 의미는 불교적인 것으로 유교가 지배했던 당시 상황과 또 태조 어진이 가지는 위엄을 생각할 때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어진 구본을 세초매안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것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어진을 세초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이 위에 먹을 씻어내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며 "구본 어진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경기전의」에 나타난 어진 보관 방식에 따라 세초한 구본을 보자기에 싸서 상자 또는 항아리에 넣어 묻지 않았을까 싶다"며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한다.어진 구본이 묻혀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계상(北階上)'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경기전 본전 뒷뜰, 본전 북쪽 섬돌 밑, 폐쇄된 정전 온돌 속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추정에 불과한 것들. 현재로서는 2007년 지질탐색에서 매장 의심물체가 감지된 본전 뒷뜰이 가장 유력한 장소로 점쳐지고 있다. 그동안 경기전의 구조가 많이 바뀌었지만, 이 곳은 폐쇄공간으로 거의 훼손되지 않아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견이다.▲ 태조 어진 구본, 왜 발굴해야 하나?태조 어진 구본이 묻혔을 당시의 상태나 위치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태조 이성계 어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어진 구본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학계 및 문화계 전문가들은 귀중한 유물이 더 훼손되기 전에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차피 땅 속에서 사라질 단계에 처해있다면, 매안된 지 137년이 된 지금 발굴해 이에 대한 보존처리와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경기전 유물전시관이 새로 건립되고 있어 유물 보관과 관련된 별도 공간이 마련되는 만큼, 발굴 후 보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진 구본과 함께 경기전과 태조 어진이 갖는 역사성을 종합적으로 연구, 보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 경기전 전시관에 역할을 부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구본을 항아리에 넣었다는 기록은 태를 모셨던 태항아리(왕가 자손 태반을 담은 항아리) 개념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는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특히 어진은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초매안 당시 여러가지 형식과 의례를 갖췄을 것이기 때문에 구본 어진과 함께 관련 자료를 발굴해 연구가 진행된다면 새로운 전주의 역사문화 자원을 확보하고 전주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철배 전북대 강사는 "경기전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 태조 어진 구본을 찾아 발굴하는 것은 문화콘텐츠와 관광자원으로서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며 "이런 작업이 꾸준히 진행돼 지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은 "2010년 태조 어진 전주봉안 600주년 맞아 기념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위원회를 구성, 어진 구본 발굴 작업도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