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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 서벽 철거시기 '어떤 자료가 맞나'

「전주부사」냐, 「완산지」냐.최근 전주성 철거 시기가 기록돼 있는 옛 문헌들이 다양한 경로로 주목받으면서 전주성 서벽 철거 시기가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전주성 철거 시기가 남아있는 문헌들이 모두 근거로서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데다 유독 서벽 철거 시기만 다르게 적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전주성 철거시기가 기록돼 있는 문헌은 1943년 일본에 의해 일본어로 쓰여진 「전주부사」와 1911년 전주향노재에서 중간한 「완산지」. 「전주부사」에는 1907년, 「완산지」에는 1909년 전주성 서벽이 헐린 것으로 나와있다.1994년 발간된 「성곽발달과 도시계획 연구-전주부성을 중심으로」에 전주성 서벽 철거시기가 1907년이라고 기술한 장명수 전 전북대 총장은 "당시 「전주부사」와 '조선총독부시정연보'를 근거로 전주성이 1907년에 철거됐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며 "두 자료 모두 전주성을 철거한 일본인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물인 만큼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전주부사」 92쪽, 103쪽, 666쪽 등을 보면, '1906년 통감부 시대에 들어가서 다음해인 1907년 부터 여러차례에 걸쳐 전주성벽을 점진적으로 파괴해 오늘날 시가지에 이르렀다'는 내용과 '1907년 군전도로의 개수공사에 뒤이어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서쪽의 성벽을 헐고 평탄한 대도를 만들어 반원형을 그리며 시가지의 서쪽을 감쌌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한편, 「완산지」에는 1909년 전주성 성벽이 훼철됐고 1911년 동문·서문·북문 3문이 철거된 것으로 적혀있다. 「완산지」는 성벽 철거 당시의 자료로, 전주성 서벽과 동·서·북문 3문은 철거되고 동벽과 풍남문만이 남아있는 지도도 첨부돼 있어 철거 시기를 따져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받고 있다.이에 대해 학계 연구자들은 "전주성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으로, 전라감영이 있던 곳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며 "좀더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3.05 23:02

'조선정조 전라도 군현'의 생생한 역사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정조대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 전라도·전주부편을 영인(影印, 인쇄물의 원본을 사진으로 복사해 인쇄하는 일)해 「전주학연구」 2집에 수록했다.이 「호남읍지」는 기존에 영인돼 간행된 영조대 「여지도서」 전라도편, 1871년 「호남읍지」, 1895년 「호남읍지」와는 다른 책으로, 개인 소장본이다. 특히 「여지도서」에는 빠져있는 16개 군현, 전주·제주·남원·담양·여산·익산·고부·금산·진산·김제·대정·정의·임피·만경·금구·정읍 등의 읍지가 모두 실려있어 기존 읍지를 보완하고 정조대 전라도 상황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18세기 군현상황을 보다 풍부하게 볼 수 있다는 가치도 지니고 있다.「전주학연구」는 역사박물관이 전주시의 지원을 받아 2007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연 1회 발간하고 있는 지역학 전문학술지. '전주학에 관한 연구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2집에는 「호남읍지」 영인본 이외에도 지난해 진행된 제8회 전주학 학술대회 '금재 최병심의 삶과 학문'에서 발표된 논문 5편을 수정·보완한 기획특집과 '전주 전라감영지 문화재 발굴조사 개요' 보고서 등이 실렸다.기획특집에 실린 5편의 논문은 전주 출신 유학자로 '제2의 간재'로 칭송받던 금재 최병심의 가계와 생애, 학맥과 유학사상, 항일의식에 대한 연구논문들이며, 보고서는 전라감영지 복원에 앞서 건물지 유구를 확인해 정비 및 복원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전주시가 전북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한 발굴조사를 요약한 것이다.비매품으로, 이달 말 전국 박물관 및 연구소, 행정기관 등 유관단체에 발송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3.02 23:02

정읍 은선리 고분 고려시대 것 확인

백제고분으로 추정됐던 정읍 은선리 고분이 고려시대에 축조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됐다.고려시대 고분으로는 아직까지 횡혈식석실이 조사된 바가 없어 추후 고려시대 석실분과의 비교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산사태로 노출된 정읍 영원면 은선리 고분을 지난 8월부터 수습조사해 온 전북문화재연구원(원장 최옥환)은 26일 자문위원회의를 열고 "석실의 평면형태와 축조방법 등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백제 횡혈식 석실의 축조방법을 따르고 있지만, 석실내부에서 청자 4점이 출토돼 고려시대에 축조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지하에 축조된 석실은 평면형태 장방형. 봉분 윤곽은 단면상에서는 확인이 되지만 전체적인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고분 축조시 주변지역을 넓게 정지해 지하에 석실을 축조한 후 봉분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석실내부에서는 청자상감운학문 발 1점, 청자 대접 2점, 청자 접시 1점 등 4점의 유물이 출토됐지만, 내부 조사과정에서 청자편이 수습돼 원래는 보다 많은 유물이 부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백제의 흔적을 보여줄 만한 유물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규정 전북문화재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묘를 재활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경우 백제 때의 무덤을 고려 때 다시 활용한 것 같다"며 "석실에서 출토된 청자상감운학문 발이 최고품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27 23:02

[일과 사람] 태조 어진 모사본 그린 권오창 화백

"태조 이성계 어진을 모사(模寫)하는 기념비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어서 더없는 영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원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제(高制)와 안료선택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어진과 관련된 학술적인 연구도 부족했고 모사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시피 해 어려움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25일 경기전 유물전시관 기공식에 참석한 전통인물화가 권오창씨(61). 현재 경기전에 전시돼 있는 태조 어진을 1999년 모사한 권씨는 "모사 당시 재료 하나도 일일이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6개월 만에 완성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진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요즘에 와서 보니 부족한 점이 눈에 띄어 아쉽다"고 말했다."어떤 범본(範本)이 되는 회화작품을 그대로 베껴내는 행위인 모사(模寫)와 그 작품인 모작(模作)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작은 원화와 꼭 같이 복제한 작품으로 서화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설정돼 있습니다. 특히 어진 모사는 어진이 하나의 회화작품이기 전에 국왕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감상용 회화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어진 모사본을 진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에, 그는 "모사작가로서는 최고의 칭찬"이라며 "모사는 당대 작가의 소신이나 주관성보다는 대대로 내려져 온 고식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그는 "그동안 어진 진본이 과학적인 장치 없이 봉안되고 훼손까지 이르게 되는 걸 보며 안타까웠다"며 "유물전시관 건립이 어진의 위엄이 다시 서고 현대인들이 근접한 자리에서 어진을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반갑다"고 전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26 23:02

태조 어진 편안한 시설에 모신다

보물 제931호인 태조 이성계 어진을 봉안할 경기전 유물전시관이 첫 삽을 떴다.전주로 환안된 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태조 어진을 비롯 경기전 관련 유물을 보관·전시하기 위한 경기전 유물전시관 기공식이 25일 오전 10시30분 경기전내 공사현장에서 진행됐다.경기전 서편에 건립되는 유물전시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 연면적 1193㎡ 규모로 총 사업비 44억원이 투입된다.지상층은 경기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목조 한옥형태로 지어지며 전시관 내부는 어진전시관,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수장고, 이벤트마당 등으로 구성된다. 어진전시관에는 태조 어진을 중심으로 조선왕조 개창사, 어진의 이안경로, 어진제작기법 등 어진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며, 상설전시관에는 가마를 비롯한 경기전 유물과 반차도행렬, 왕의 일상, 영상물 등이 전시된다.경기전에는 태조 어진을 비롯해 조선 왕조 여섯분의 어진과 향정, 가마, 선, 산 등 50여점의 유물이 소장돼 있지만 항온·항습 등 과학적 시설이 미비한 실정이었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유물전시관이 완공되면 태조 어진과 경기전에 보관된 귀중한 문화유산이 과학적 설비를 갖춘 전시관에 안전하게 보존 관리될 수 있으며,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경기전의 새로운 명소로 전통문화중심도시로서 전주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날 기공식은 태조 고황제께 유물전시관 건립을 고하고 무사를 기원하는 고유제로 시작됐다. 송하진 전주시장과 최찬욱 전주시의회 의장, 유기상 전북도 문화체육관광국장,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관계자들, 김영원 국립전주박물관장, 이호석 전주향교 전교,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김민영 전주전통문화센터장 등 도내 각 기관 단체장들 및 문화계 인사들과 시민들 300여명이 참석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26 23:02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년, 원형 찾자] 경기전에 묻힌 '어진 구본' 찾아야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봉안 600년을 맞아 경기전에 묻혀져있는 것으로 알려진 어진 구본(御眞 舊本)의 발굴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특히 전주시가 경기전 내 묻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진 구본 발굴을 위해 2007년 문화재청에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신청까지 냈다 반려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학계와 문화계를 중심으로 구본 발굴 작업을 포함,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년 기념 사업 준비를 위한 추진위원회가 구성돼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전문가들은 어진 구본 발굴은 태조 어진의 원형을 찾는 작업으로, 이를 발굴해 새로 지어지는 경기전 유물전시관에 보관한다며 전주의 역사문화 자원을 확보하고 조선 왕조의 본향으로서 전주의 위상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어진은 1409년 전주부의 요청으로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해 1410년에 전주부에 봉안한 것. 이 태조 어진은 이후 1763년 한차례 수리과정을 거쳤지만 1872년 그 소임을 다하고,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이 새로 제작됐다. 경기전 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진 구본은 1872년 '세초매안(洗?埋安)'된 것. 「조선왕조실록」 고종 9년(1872) 5월 4일 기사에 따르면, '경기전의 구본은 신본을 모신 후에 세초하여 본 전각의 북쪽 섬돌 가에 매안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태조 어진을 모사한 행사의 기록이란 점에서 의의가 큰 「어진이모도감청의궤」에도 '어진 구본은 1872년 9월 27일에 세초하여 백자항에 넣어 본전 북계상에 매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일성록」 고종 9년 10월 7일 기사에도 '신본을 먼저 봉안하고, 고안제를 한 후에 구본은 돌돌 말아서 봉안하는데 세초하고, 또한 본전의 북쪽계단에 매안하는데, 박석으로 둘러 이를 쌓았다'고 적혀있다. 이보다 앞선 7월 17일 「일성록」 기사에는 '경기전에 신본을 9월 27일 이안하고, 구본은 같은 날 미시(未時)에 세초매안할 것이다'라고 나와있어 1872년 경기전 어진을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한 것은 9월 27일이고, 당일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 태조 어진 구본을 경기전 전각의 북쪽 계단 근처에 묻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일반적인 '세초(洗草)'는 종이문서를 물에 빨아 먹물을 빼고 다시 종이로 재생하는 것이지만, 어진과 관련된 '세초(洗?)'는 비단에 그려진 그림 자국을 물로 씻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어진 구본 발굴과 관련해서는 '세초매안(洗?埋安)'과 '북계상(北階上)'이 핵심 단어로, 즉 그림 자국을 물로 씻어내 경기전 북쪽 계단 근처에 매안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일부에서 태웠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태워서 백자항아리에 넣어 경기전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은 "조선시대 태조 어진은 왕의 존재 그 자체였다"며 "물에 씻어서 묻었든 불에 태워서 묻었든, 어진 구본을 담은 백자항아리가 발굴만 된다면야 획기적인 것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도 "역사 기록에 따른다면 적어도 백자항아리는 나올 것인데, 어진을 담을 정도면 명품이 분명하다"며 "어진 구본 발굴 작업은 조선 왕조의 본향으로서 전주의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가장 최근에 세초매안된 어진인 만큼 땅 속에서 더 훼손되기 전에 제대로 발굴하자"며 "2010년이 태조 어진을 전주에 봉안한 지 600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에 맞춰 구본을 발굴, 경기전 어진과 관련된 새로 지어지는 전시관에 보존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23 23:02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년, 원형 찾자] 땅속 137년…"귀중한 유물 더 훼손되기 전 발굴해야"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봉안 600년. 1410년 전주에 봉안, 1872년 세초돼 경기전에 매안된 태조 어진 구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경기전 어진 구본을 찾는 과정은 조선 왕조의 본향으로서 전주 역사의 원형을 회복하고 전주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전문가들은 "2010년은 전주시가 시로 출범해 환갑을 맞는 해이고,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기념하여 태조 어진을 모신지 600년이 되는 해"라며 "2010년 태조 어진 봉안 600년을 맞는 지금이 이를 상징하는 태조 어진 구본 발굴 작업을 벌이기에 적기"라고 강조한다.한국의 전통사회에서 60년은 환갑(還甲)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역사의 한 획을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의미 있는 시점. 옛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태조 어진 구본을 찾아 다시 역사를 복원해야 할 때인 것이다.▲ 태조 이성계 어진과 전주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어진(御眞) 중 화재와 전란을 피해 온전하게 보존된 단 두 작품 중 하나로, 전신상으로는 유일한 예다. 또한 원래 봉안된 장소인 진전에 그대로 남아있는 조선 태조의 하나밖에 없는 초상이기도 하다.영흥의 준원전과 경주의 태조 어진이 태조 재세시 태조의 명으로 봉안된 것이라면, 전주의 예는 1408년 태조가 승하하고 다음해인 1409년 전주부의 요청으로 경주의 태조 어진을 모사해 1410년(태종10) 전주부에 봉안한 것이다. 조선후기 기사이기는 하지만, 「영조실록」에 남아있는 '전주는 국조 시조 본향이고 태조가 왜구를 정벌할 때에도 일찍이 이 곳에 주절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주나라의 기와 한나라의 풍패처럼 여겨 특별히 전우를 세워 태조의 영성을 모셨다'는 내용은 전주에 태조 어진을 봉안한 배경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기록이다.경기전 태조 어진은 봉안대상과 봉안처가 함께 보존되고 있으며 관련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어서 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은 "최초의 어진 제작과 진전의 건립,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돼 행해진 어진의 봉안과 모사를 위해 투여된 막대한 인력과 재원은 경기전 태조 어진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며 "경기전 태조 어진은 면면히 발달해 온 한국 초상화의 역사를 대변해 주며, 더 나아가 동아시아 초상화의 독특한 전개과정을 웅변해 주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2007년 구본 발굴 추진, 왜 중단됐나2007년 전주시는 경기전 내 세초돼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조 어진 구본 발굴을 추진했었다.2007년 1월 전주를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학계 전문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어진 구본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 어진이 묻혀있는 유력한 공간으로 거론됐던 경기전 본전 후원 등을 대상으로 지중탐사기로 지질탐색을 벌였다.그 결과 2007년 7월 폐쇄공간인 경기전 본전 후원 4곳에서 매장 의심물체가 감지됐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본격적으로 구본 발굴에 들어가기 위해 전주시가 같은 해 8월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에 대한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냈다. 그러나 9월 '문화재위원 심의결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신을 받게 되면서 어진 구본 발굴은 흐지부지하게 됐다.전주시 관계자는 "당시 4000만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본전 후원 600㎡를 대상으로 매장 유물 발굴을 위한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문화재청에 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물에 씻어서? 혹은 불에 태워서?「조선왕조실록」 고종 9년 5월 4일 기사에는 '慶基殿 舊本(경기전 구본), 則新本展奉後(즉신본전봉후), 陪進大臣以下(배진대신이하), 敬奉洗?(경봉세초), 埋安于本殿北階上(매안우본전북계상), 恐好(공호)'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해제하면, '경기전의 구본은 신본을 모신 후에 배진하는 대신 이하 관리들이 모셔다가 세초하여 본 전각의 북쪽 섬돌 가에 매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다.이는 낡은 어진의 처리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경기전의 구본으로 말하면 본 왕조 초기에 그린 것으로, 500년 동안 모셔오던 어진을 세초하여 매안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라고도 나와있어 경기전 어진 구본이 가진 의미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경기전 구본이 세초매안됐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이외에도 「어진이모도감청의궤」와 「일성록」 등 역사적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구본을 어떻게 묻었느냐다. 일반적으로 '세초(洗?)'가 물에 씻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태워서 묻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 1985년 쓰여진 「전주시사」에는 '1872년 너무 오래돼 낡아 새로 모사케하며 동년 9월 20일 바꿔 봉안케하고 여러차례 국난 겪으면서 400년 보존된 유일한 어진을 세초매안, 불살라 묻어버려 영원히 찾을 수 없다'고 기록돼 있으며, 이보다 앞선 1943년 「전주부사」에도 '洗(燒却)'라고 적혀있다.그러나 불에 태웠다는 의미는 불교적인 것으로 유교가 지배했던 당시 상황과 또 태조 어진이 가지는 위엄을 생각할 때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어진 구본을 세초매안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것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어진을 세초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이 위에 먹을 씻어내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며 "구본 어진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경기전의」에 나타난 어진 보관 방식에 따라 세초한 구본을 보자기에 싸서 상자 또는 항아리에 넣어 묻지 않았을까 싶다"며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한다.어진 구본이 묻혀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계상(北階上)'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경기전 본전 뒷뜰, 본전 북쪽 섬돌 밑, 폐쇄된 정전 온돌 속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추정에 불과한 것들. 현재로서는 2007년 지질탐색에서 매장 의심물체가 감지된 본전 뒷뜰이 가장 유력한 장소로 점쳐지고 있다. 그동안 경기전의 구조가 많이 바뀌었지만, 이 곳은 폐쇄공간으로 거의 훼손되지 않아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견이다.▲ 태조 어진 구본, 왜 발굴해야 하나?태조 어진 구본이 묻혔을 당시의 상태나 위치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태조 이성계 어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어진 구본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학계 및 문화계 전문가들은 귀중한 유물이 더 훼손되기 전에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차피 땅 속에서 사라질 단계에 처해있다면, 매안된 지 137년이 된 지금 발굴해 이에 대한 보존처리와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경기전 유물전시관이 새로 건립되고 있어 유물 보관과 관련된 별도 공간이 마련되는 만큼, 발굴 후 보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진 구본과 함께 경기전과 태조 어진이 갖는 역사성을 종합적으로 연구, 보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 경기전 전시관에 역할을 부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구본을 항아리에 넣었다는 기록은 태를 모셨던 태항아리(왕가 자손 태반을 담은 항아리) 개념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는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특히 어진은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초매안 당시 여러가지 형식과 의례를 갖췄을 것이기 때문에 구본 어진과 함께 관련 자료를 발굴해 연구가 진행된다면 새로운 전주의 역사문화 자원을 확보하고 전주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철배 전북대 강사는 "경기전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 태조 어진 구본을 찾아 발굴하는 것은 문화콘텐츠와 관광자원으로서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며 "이런 작업이 꾸준히 진행돼 지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은 "2010년 태조 어진 전주봉안 600주년 맞아 기념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위원회를 구성, 어진 구본 발굴 작업도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23 23:02

문화재청, 발굴유적 보존기준 마련키로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적의 보존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구체화된다.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12일 "문화재 보존 관리과정에서 국민에게 과도한 불편이나 부담을 주는 규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자" 규제개혁과제 9개를 선정하고, 그 일환으로 '발굴조사에 따른 유적 보존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키로 했다고 밝혔다. .예컨대 해당 유적의 접근성이나 활용 가능성, 학술적 가치 등을 포함한 '체크 리스트'를 마련해, 이 기준들을 일정 부분 이상 충족시킬 때 보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지금까지는 명확한 기준없이 문화재위원회에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면 이를 토대로 문화재청이 사적 지정 등의 보존 조치를 취해왔다.문화재청은 또 '건설공사에 따른 문화재 영향검토 합리화'를 위해 문화재 주변 건설공사에 따른 사전 영향 검토 항목도 더 구체적으로 확정하기로 했다.현재의 문화재 영향검토에서는 시·도지사가 조례로 정하는 지역(국가지정문화재 외곽 경계로부터 500m 이내)에서 건설공사를 시행할 경우 관계 전문가 3명 이상의 의견을 들어 문화재에 영향이 있다고 1명이라도 판단하면 그에 대한 심의를 문화재위원회에서 일일이 받아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문화재청은 이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말했다.문화재청은 이 밖에도 △고도(古都) 지정지구에 대한 이중 규제 해소 △문화재 수리업자의 등록요건 완화 △천연기념물(동물) 현상 변경의 시·도 위임 △등록문화재 현상변경 행위의 구체화 △등록문화재 현상변경 허가절차 간소화 △문화재 매매업자 결격 사유 완화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해피콜 제도 도입 등의 항목을 규제개혁과제에 포함시켰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13 23:02

中-대만 문화재 교환전시 이뤄질까

중국과 대만의 박물관들이 국보급 문화재를 교환해 전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성사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일 대만과 홍콩언론들에 따르면 처우쿵신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 원장은 양안 고궁박물원의 보물들을 상호전시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오는 14일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한다. 처우 원장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정신먀오 원장을 만나 오는 10월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융정(雍正)황제전'에 베이징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융정황제 관련 보물을 빌려오는 문제를 협의할 예정이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측은 융정황제 관련 보물 20점 가량을 베이징고궁박물원으로터 대여받아 전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옹정황제의 초상화, 비빈 초상화, 옹정행락도(雍正行樂圖), 옹정독서도(雍正讀書圖) 등을 임대해 전시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중국측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들이 대만에서 전시될 경우 양안간 보물 교류에 있어서도 본격적인 '대삼통(大三通)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쫓겨나면서 2개로 분리된 고궁박물원의 보물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전시되는 것은 60년만에 처음이다. 중국 정부도 양안간 화해 무드에 힘입어 베이징고궁박물관의 보물들이 대만에서 전시되는 데 반대하지 않고 있어 10월 '융전황제전'에서 양안의 보물들이 한자리에 전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문제는 대만의 국보급 보물들도 중국에 임대돼 전시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만측이 대만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들을 중국측에 대여할 경우 중국이 이를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의식한 듯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처우 원장은 9일 중국 방문에 앞서 "타이베이고궁박물원이 중국측에 보물들을 대여하기 위해서는 중국당국이 대여 전시가 끝난 뒤 대만측에 안전하게 반환할 것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류자오쉬안(劉兆玄) 행정원장도 지난 8일 대만의 국보급 보물들이 중국에서 전시되기 위해서는 안전한 반환 문제에 대한 법적인 보장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대만은 1992년 문화 및 예술 교류에 대한 법률을 제정, 중국의 문화재의 법적 소유권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70만점 이상의 중국 문화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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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02.11 23:02

정조 '막후정치' 입증 비밀편지 299통 발굴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正祖)가 재위 말년에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를 치밀하게 펼쳤음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그의 비밀 편지 299통이 무더기로 공개됐다.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대학원은 9일 오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조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어찰첩(御札帖)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개인이 소장해오다 공개된 이 어찰첩은 탈초(脫草.정자체로 풀어쓰기)와 번역을거쳐 내용을 분석한 결과,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되었으며, 그 전부가 정조의 친필로 심환지에게만 보낸 보물급 문화재로 드러났다.이번 자료발굴과 분석에 관여한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이 편지들은조선시대의 어찰로는 분량이 최대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정조가 지속적으로 없애라고 명령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라며 "국왕과 대신 사이에 국정현안을 놓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여론 동향을 캐는 다양하고 은밀한 통치행위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이 편지들은 수신자인 심환지 쪽에서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 장소를 기록해 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이번 어찰첩이 발굴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조시대 정국 동향은 물론이고, 정조 자신의 성격이나 정국 구상과 그 추진 방식 등이 상당 부분 베일을 벗게됐다.무엇보다 심환지가 정조와는 날카롭게 대립했으며 심지어 그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낭설'로 판명났으며, 정조가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에 능수능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이 편지들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를 보내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런 맥락에서 정조는 심환지의 큰아들을 과거시험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고 했으나 (아들이 그러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아울러 이 편지들에서 정조는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토로한 것으로 밝혀졌다.정조가 1800년 6월28일 타계하기 13일 전인 6월15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뱃속의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중략)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고 호소하기도 했다.어찰첩 분석에 참여한 조선사 전공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자료가 공개되면서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국가 편찬 연대기 자료에만토대를 둔 역사 연구는 방향 전환이 불가피해졌다"고 밝히고 "나아가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로 대표되는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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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10 23:02

영암군 '고려 목탑' 국내 첫 복원 나섰다

전남 영암군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고려시대 목탑 복원에 나섰다. 영암군은 전남도 지방기념물 제197호로 지정된 '사자사지(師子寺址) 목탑 복원을 위해 타당성 조사 용역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9일 밝혔다. 영암읍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월출산 사자봉 아래 위치한 사자사지는 1995년 순천대박물관에 의해 탑지와 건물지가 확인됐으며 '사자사'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면서 천황사 대신 사자사로 부르고 있다. 타당성 용역을 맡고 있는 전남대 천득염(건축학) 교수는 "사자사지 목탑은 실체가 대부분 소실되거가 자료부족으로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고려 목탑지로 초석 및 기타 유구의 흔적이 잘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며 "사자사 목탑 복원은 학술 연구를 기반으로 디지털, 모형, 구조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 목탑지로는 영암의 사자사지와 남원 만복사지, 개풍, 흥룡사지 등 12곳이 있지만, 복원된 사례는 아직 없다"며 "사자사 목탑이 국내 최초로 복원되면 지역문화 향상, 관광 수요 증가 등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암군 관계자는 "사자사 목탑 복원을 위해 이미 타당성 용역을 발주했으며 규모와 형태 등 학술적 고증 작업이 끝나면 복원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영암군은 10일 영암군 정보문화센터에서 천득염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자사 목탑 복원 타당성 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복원 당위성 등을 분석하는 심포지엄을 연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10 23:02

아! 숭례문…100여년전 원형 사진 공개

1910년 전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숭례문. 염창교 쪽에서 찍은 것이며 숭례문 편액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며 오른편에 감시용 망루가 설치돼 있고 입구에는 정체가 불분명한 석등이 세워져 있다.일제가 도성의 기운을 막으려고 문 입구에 무속제를 올리기 위한 석등을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된 사진이다.일제에 의해 숭례문이 훼손되기 전인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서울성곽과 연결돼있는 숭례문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진 3점이 숭례문 화재 1년을 앞둔 8일 공개됐다.이 사진들은 1883년 제물포에서 조선 최초의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을 설립한 독일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후손들이 유품으로 간직해온 것들로, 정성길(68)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발굴했다.정 관장은 "숭례문의 원형을 제대로 복원해 보존할 수 있도록 하고자 사진을 공개하는 것"이라며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 위치와 형태조차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우리 후손들이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3점 모두 서울성곽이 연결된 남산쪽에서 숭례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졌다.이 중 188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1번)은 안개가 낀 날 촬영한 듯 흐릿한 화면 속에 한 폭의 그림 같이 숭례문의 자태가 드러나 있다.또 1890년대 초 찍은 것으로 보이는 숭례문 사진(2번)은 숭례문과 연결된 부분의 서울성곽 형태가 적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문 주변부의 성곽을 좁게 만든 옹성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문화재청은 현재 진행 중인 숭례문 복구 때 1907-1909년 일제가 허물어 현재는 경사면 형태(삼각형 모양)로만 남은 좌우측 성곽의 일부도 복원할 예정이어서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이 성곽 복원 작업에도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이 사진의 경우 성곽 안쪽으로 성곽을 따라 들어선 초가집과 지게를 진 사람, 성밖을 내다보는 한복 차림의 어린이 등 당시 사회상도 엿볼 수 있다.역시 1890년대 초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각도의 숭례문 사진(3번)은 무악재 방향과 서대문 성곽을 함께 담고 있다.한편 정 관장은 성밖 염창교 쪽에서 촬영된, 일제 강점기 숭례문의 아픈 과거를보여주는 또 한장의 사진(4번)을 함께 공개했다.이 사진은 숭례문 주변 성곽이 이미 허물어진 뒤인 1910년 전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숭례문 편액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 가운데 오른편에 감시용 망루가설치돼있고 숭례문 입구에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석등이 세워져 있다.이와 관련, 정 관장은 "일제가 1937년 백두산에 쇠말뚝을 박고 무속제를 올렸듯이 숭례문에서도 도성의 기운을 막으려고 문 입구에 무속제를 올리기 위한 석등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일본이 원구단을 철거한 뒤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고 광화문의 위치를 옮겨자신들이 신궁을 세운 남산을 향하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왜곡하고전통 문화를 말살하려 한 또 하나의 사례라는 주장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9 23:02

서울시, 문화재 24시간 감시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2월 발생한 숭례문 방화 사건을 계기로 문화재 전담 경비인력 86명을 흥인지문 등 주요 문화재 22곳에 배치하는 등 '문화재 종합 안전관리 대책'을 시행 중이라고 8일 밝혔다. 시는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직후인 작년 3월 문화재 전담 경비인력으로 86명을 채용해 흥인지문, 문묘 등 22개 문화재에 한 곳당 3~9명을 배치해 3교대로 24시간 근무하도록 했다. 숭례문 화재 이전에도 55명의 문화재 관리 인력이 있었지만 24시간 상주체제는 아니었다. 시는 올해 14명을 추가로 뽑아 총 100명의 경비인력을 최규하가옥 등 2곳을 추가한 24개 문화재에 배치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시는 보신각, 남산골 한옥마을 등 문화재 97개소에 CC(폐쇄회로) TV와 적외선 감지기, 자동경보 소화기, 연기감지기 등 방범ㆍ방재시설을 설치했으며 올해는 56곳에 추가로 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다. 또 유사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흥인지문 등 문화재 11개소에 대한 재난대비용 설계도면을 제작해 관리단체와 자치구, 소방서에 비치했다. 시는 올해는 50곳의 설계도면을 추가로 제작할 계획이다. 시는 아울러 화재에 취약한 목조문화재에 방염제를 입히는 사업을 흥인지문, 사직단 정문, 대원각사비 등 58곳에서 시행할 예정이다. 시는 지난해 문화재 안전관리예산을 1억800만원으로 편성했다가 41억5천200만원으로 재편성했으며 올해 관련 예산을 61억5천600만원으로 증액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9 23:02

미륵사, 판도라의 상자 열리나

'무왕의 익산 천도설' '서동설화' 등 오래된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로 평가받고 있는 익산 미륵사 서탑 사리장엄구 발굴과 관련, 미륵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학계를 중심으로 미륵사 서탑 사리장엄구의 발굴성과를 점검하는 학술대회가 연이어 개최된다. 전라북도 역시 미륵사와 관련해 3월 국내 학술대회와 10월 국제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가장 먼저 열리는 학술대회는 한국사상사학회(회장 최기영)의 정기 학술대회로, 불교적 측면에 주목한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사리봉안기의 판독과 해석을 맡았던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발표자로 나서 사리봉안기 판독과 해설을 보강할 예정. 길기태 국가기록원 박사와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봉안기를 통해 석탑이 조성된 시기로 밝혀진 639년 당시 백제 불교사상에 대해 말한다. 다음달 14일 오후 2시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다.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는 다음달 21일 미륵사를 주제로 제82회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한정호 동국대박물관 연구원이 미륵사 사리구와 왕궁리 석탑 사리구를 비교하며, 김수태 충남대 교수가 7세기 백제와 무왕시대에 비춰 미륵사 축조가 갖는 의미를 분석한다.이 학술대회에서는 사리봉안기의 서체와 사리공양품 중 장신구 유물 등 그동안 언론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뤘던 부분에 대해서도 집중조명할 예정이다. 장소 미정.전라북도는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소장 최완규), 백제학회(회장 양기석)와 공동으로 3월 말 대규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가칭 '미륵사 사리장엄 발견 계기로 본 미륵사의 재발견'.10월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등과 함께 국내외 연구진들이 참석하는 국제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전북도 관계자는 "미륵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을 추진하려면 이에 대한 학술대회는 필수라고 생각한다"며 "분기별 학술대회 개최를 검토하고 있으며, 역사적 규명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산업적 측면에서도 다각도로 접근해 보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2.09 23:02

맹목적인 이스라엘 찬양을 분석하다

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된 이후 유대인은 더이상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수없이 학살당한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며, 그들도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5일 진보적 종교 연구소들의 연대체인 '종교인네트워크'가 서울 충정로 한백교회 안병무홀에서 개최한 '열린포럼, 홀로코스트 종교를 넘어서'라는 토론회에서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김 실장은 '홀로코스트 신학과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이라는 발제를 통해 "아우슈비츠 이후 유대인을 비난하는 게 금기시됐는데 이를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서구 신학자들은 비난했다"며 "현대 서구 신학 역시 이런 홀로코스트 산업에 포섭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자신의 고통을 특화시키는 순간 더 이상 희생자의 담론이 아니며, 또 다른 희생자를 부르는 제국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이 가자를 침공한 순간 유대인들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이 '정당방위'라고 언급하는데 그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적 성공에 예속된 식민화된 자의식이 깔려 있다"며 "(그 자의식을) 성찰할 지적 준비도, 신앙적 의지도 없다면 (개신교 지도자들이) 전 지구의 고난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정당하게 판단할 신학적, 신앙적 사유의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박준영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신학의 시대적 한계와 종교 간 협력을 통한 극복'이라는 발표에서 "한국은 자본주의적 성공 추구로 이스라엘을 정신적 모델로 삼았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고, 이는 개신교의 개별 교회 성장 추구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맹목적 찬양과 지지로 연결됐다"고 분석했다. 박 연구위원은 "배타적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나 내부에 있는 위험한 본능과 같다"며 "기독교는 내부의 근본주의를 극복한 경험이 가장 많은 종교라는 점에서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이스라엘의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라는 발제에서 2차 대전에서 일본인의 피해를 그린 '요코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도식적 이분법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성찰이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2.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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