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7 09:38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화재·학술

뚜껑 연 정조시대 '판도라 상자'

조선후기 정조시대의 '판도라 상자'가 뚜껑을 열었다. 국왕 정조가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어찰 297통이 전부 원본 그대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18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 대학 출판부를 통해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 두 종류를 발간했다고 말했다. 하나는 주된 독자층으로 학계를 겨냥한 2권 1세트 본(本)이며, 다른 하나는 1권짜리 보급판이다. 이 중 2권 1세트 본에는 지난 2월9일 언론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정조어찰 297통 전부를 원색 사진으로 촬영ㆍ축소해 수록하는 한편, 이에다 탈초(脫草.인쇄체 정자로 새로 쓰기), 번역, 윤문 및 해제를 덧붙였다. 그런 까닭에 이 1세트 가격은 25만원으로 책정됐다. 반면 보급판(568쪽)은 실물 영인을 제외한 원전의 탈초와 번역, 윤문과 해제를 수록했다. 가격은 3만원. 동아시아학술원은 "지난번 언론 공개 당시 정조어찰을 모두 299건으로 파악했으나 날짜별로 다시 정리한 결과 2건이 줄어 모두 297건으로 확인됐다"면서 "이번 자료 및 해제집은 19세기 전후 정조시대 정치사와 문화사를 해명하는 크게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편지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공식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이 겹친다 해도 그와는 전혀 색다른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판도라 상자'에 비유된다. 무엇보다 국왕이 특정신하에게 보낸 어찰이 이처럼 대규모로 발굴된 적이 없고, 나아가 정조가 특정 계파를 대표하는 인물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정국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때로는 '공작정치'를 시도한 흔적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학술원은 1796년 8월20일 이후 1800년 6월15일까지 심환지에게 보낸 이 어찰들을 사안별로 분류한 결과 민감한 정치 현안의 처리와 자문에 관한 내용(67건)과 인사 문제에 관한 사항(54건)이 가장 많고, 상소ㆍ차자ㆍ장계의 처리와 지시를 담은 내용(41건)과 중앙 정계와 산림의 여론과 동향을 탐색한 사안(31건) 등이 뒤를 잇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정조의 사망 원인은 이번 정조어찰첩을 근거로 보면 그의 기질과 지병에 따른 병사(病死)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면서 "비록 4년간의 편지지만, 정조의 건강은 이미 지속적으로 나빠졌고 사망할 무렵에는 급속도로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학술원은 말했다. 학술원은 이 어찰첩이 "여론 파악을 위해 정조가 심환지만이 아니라 노론과 남인, 시파와 벽파 등의 각 정파 핵심 인물과 사적으로 정보망을 구축해 여론 향배와 정국 현안에 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정국운영을 하려 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어찰첩은 그 자체로 정조의 친필 묶음집이라는 점에서도 보물급 이상 가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19 23:02

[오목대] 진신사리(眞身舍利) - 장세균

얼마전에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등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지킴이 대책회의가 열린 가운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진신사리(眞身舍利) 친견 대법회는 익산에서 개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진신사리와 관련해서 이야기 한다면 진신사리는 부처님이 돌아 가신 후 그 유골은 각기 연고를 주장하는 여덟 부족(部族)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중에 와서 소유를 주장하는 두사람에게는 나누어줄 유골이 없어 한사람에게는 유골을 담았던 단지를, 다른 한사람에게는 화장(火葬)한 곳의 재를 주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고 한다.이렇게 분배된 부처님의 유골을 그 후 아쇼카왕이 거두어 8만4천개의 사리탑에 나누어 모셨다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길이 없다고 한다. 오직 과학적으로 입증할만한 유일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1898년에 인도와 네팔의 국경지방의 한 옛 전탑에서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그곳은 부처님의 고국(故國)인 석가족이 살았던 땅이라고 한다.그 당시 영국의 주재관원(駐在官員)이었던 폡폐라는 사람이 전탑발굴 도중에 뼈단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곁에 기원전 수세기 무렵의 고대문자가 씌여져 있었다고 한다. 그 문자가 "샤카족 불세존(佛世尊)의 유골단지로 영예로운 형제자매 처자들이 받들어 모시는 바이다"로 해독되어 당시 온 세계를 흥분시켰다고 한다.이 유골단지는 불교국인 태국왕실(泰國王室)에 양도되어 지금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불세존의 사리를 모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한다.예를 든다면 양산(梁山) 통도사, 팔공산(八公山)의 동화사, 묘향산(妙香山)의 보현사, 오대산(五臺山)의 적멸보궁, 태백산(太白山)의 정암사, 천안(天安)의 광덕사, 지리산의 대원사, 속리산의 법주사, 설악산의 봉정정암 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도굴로 화제가 되고 있는 고성(高城) 민통선(民統線)에 있는 건봉사(乾鳳寺)가 있는데 한때는 조선의 4대 사찰의 하나로써 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사리탑 두 개와 무지개 다리만이 남아있다고 한다./장세균 논설위원

  • 문화재·학술
  • 장세균
  • 2009.05.18 23:02

'신라비석 보자' 학계 행렬에 곤혹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15일 종일토록 시달렸다. 고대사학계 저명인사들이 연구소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날 언론보도를 통해 발견 사실이 공개된 포항 학성리 신라고비(古碑)를 보기 위해 연구소를 찾은 것이다. 이 행렬에는 고려대 교수로서 신라사 전공자이기도 한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포함됐다. 연구소는 포항시를 통해 문화재청에 '학성리비'가 발견된 사실을 보고받고, 14일 현장에 출동해 비석을 연구소로 옮겨다 놓았던 것인데 이 소식을 접한 고대사학자들이 너도나도 비석 실물을 보자고 몰려든 것이다. 연구소 한 직원은 "어떤 중진학자는 방문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와 연구소로 들른다고 하기에 막을 수는 없어 오시라고 했다. 혼자 오시는 줄 알았더니 제자나 다른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나셨다"면서 "아무리 비석이 궁금해도 그렇지, 기본 예의는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유물을 보겠다고 하면 우리가 그것을 막을 명분은 없다"면서 "하지만 종일 학계인사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연구소 업무는 마비되다시피 했다"면서 "기초조사와 유물 보존처리 등이 완료될 때까지는 이런 방문은 삼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점에서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산하 기관도 아닌 문화재청 산하기관에 나타난 것도 눈총을 받고 있다. 최 관장은 이날 연구소에 들러 포항 학성리에서 비석이 발견된 당시 포항공대 모 명예교수가 해 놓은 이 비석 탁본을 내놓고는 실물 비석과 비교해 가면서 판독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최 관장 본인이 효성여대 교수 재직 시절 울진 봉평비라든가, 영일 냉수리비 판독에 참여한 전력이 있고, 또 신라사 전공자로서 이번 학성리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그렇지만 기초조사도 하지 않은 유물을 보러 다른 기관에 나타난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박물관에서도 기초조사나 보존처리가 끝나기 전 유물은 원칙적으로 공개를 미루지 않느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우리가 그 비석을 조사해야 하는데 왜 연구소가 가져갔느냐"는 식으로 문화재연구소에 따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18 23:02

"미륵사는 새로운 사상 전하는 희망 징표"

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 건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대역사로, 신라와의 전쟁 속에 시달려온 백성들에게 새로운 사상이 도래했음을 전하는 희망의 징표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16일 원광대 6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미륵사지 사리장엄 출토기념 2009년 학술대회'에서 박현숙 고려대 교수는 "사비가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왕이 익산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궁궐과 미륵사를 짓게된 시기는 무왕 3년(602) 아막(阿莫)산성 전투 패전 이후의 일로 보인다"며 "정권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를 맞으면서 익산지역으로 관심을 돌리는 동시에 미륵신앙에 내재돼 있는 전륜성왕 사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격상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박교수는 '익산 천도설'을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익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익산은 교통로상의 중심지이자 군사적인 요충지였으며 경제적인 기반도 풍부했다"며 "무엇보다 즉위 이전까지 무왕의 삶의 터전으로 사비지역보다 익숙한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또 무왕대 가장 주목받았던 공간인 익산지역과 사리봉안기에 등장한 '사택씨' 세력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했다. 박교수는 "익산에 기반을 둔 세력은 익산 경영의 추진세력 또는 협조세력으로, 무왕은 이러한 후원세력을 기반으로 익산 경영과 미륵사 창건을 추진하고 왕권강화를 도모했을 것"이라며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세력은 사택씨로, 사택씨 세력의 근거지를 익산과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고 말했다.'백제 무왕의 서동설화와 미륵사'를 발표한 나경수 전남대 교수는 "역사가 현실이라면 문학은 꿈"이라며 "사리봉안기, 즉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서동설화는 거짓으로 판명났지만 서동설화는 분명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설화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서동설화는 집단의 소망이 투사돼 꾸며진 집단적인 꿈"이라고 전제한 나교수는 "나제간의 쟁패 역시 지배자들의 욕망이었을 뿐 피지배자인 백성은 평화를 원했을 것이며, 왕권강화를 위해 세운 미륵사의 대역사 역시 동원된 백성의 입장은 참혹하기만 했을 것"이라며 "백성들의 공동작으로 만들어졌을 서동설화에는 지배자의 이념이 아니라 피지배층인 백성들의 꿈과 소망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익산 백제 미륵사지의 재발견'을 주제로 한 이날 학술대회는 전라북도와 익산시, 고려사학회가 주최하고, 고려사학회(회장 최창희 한림대 교수)와 전북역사문화학회(회장 나종우 원광대 교수)가 주관했다. 나종우 전북역사문화학회 회장은 "그동안의 학술대회가 주로 문헌사료를 연구하는 고대사학자들 중심으로 「삼국유사」와 사리봉안기 해석에 대한 논쟁 위주로 진행돼 왔다면, 이번 학술대회는 정치·사상·건축·미술·문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폭넓은 접근을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5.18 23:02

700년간 잠들었던 전통 사경 예술성 되살려

700년간 잠들어 있던 전통 사경의 예술성을 되살렸다는 평을 듣는 외길 김경호(47) 한국사경연구회 회장이 역시 오랜 세월 맥이 끊겼던 전통 탑비(塔碑) 양식의 현대적인 부활에 나섰다. 경기 양주의 사찰인 오봉산 석굴암에서 열반한 초안(속명 송만석.1926-1998) 선사의 탑비가 최근 그에 의해 1차 작업이 완료된 것. 1차 작업이란 비문에 들어갈 글과 문양을 종이 위에 제작하는 작업으로, 석공이 그대로 돌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불교가 발전했던 옛날 국사나 왕사 등의 전통적인 탑비는 지금처럼 비신(비석의 몸체)에 행장을 기록한 글만 새겨진 게 아니에요. 800여 년 만에 전통 양식을 되살렸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전통 탑비 양식은 1085년에 세워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에서 볼 수 있듯이 비신의 테두리와 윗부분에 극락세계를 상징한 그림과 아름다운 무늬를 담고 있지만 고려 말을 거치면서 상징은 도식화됐고 1150년대 이후에는 아예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이번에 사찰 의뢰로 제작한 탑비는 옛날 양식을 참고했을 뿐 아니라 불교 경전인 아미타경(阿彌陀經)에 표현된 극락세계를 참조해 흩뿌려내리는 꽃, 악기 등 상징성을 보완하고 우주선, 휴대전화, 폭죽 등 현시대의 상징물까지 반영했다. 비문 역시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이 쓴 글의 내용을 한문 해서체와 한글 궁서체를 섞어 품격있는 서예로 썼다. 그는 전통 탑비 양식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데 대해 "서예가들도 탁본을 통해 옛 양식을 봤겠지만 오래 잊혀 있던 문화이다 보니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서예가로서 많은 탁본을 접해온데다 사경변상도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제 의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경변상도는 금, 은가루로 불교 경전을 쓰면서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도 담는 서예, 회화, 공예의 요소가 집약된 종합예술이지만 억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서예를 배워 일찍이 전국 학생서예대회에 출전,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휩쓸다가 고교 시절부터 사경에 빠져 부모 몰래 세 번이나 출가하는 등 독특한 이력을 걸었으며 이런 외길 인생 덕분에 1㎜의 공간에 5-10개의 선을 그을 만큼 치밀한 경지에 올라 국내에서는 사경 분야의 1인자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일반인들의 사경에 대한 예술적인 이해도는 낮은 상황이다. 그래서 소더비 등 해외 경매 출품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시 또 다른 전통 양식의 부활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먹구구로 탑비가 제작되는 데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어요. 좋은 전통을 살린 예술작품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14 23:02

"선진국일수록 도로보다 박물관 잘 돼있어"

전국 국ㆍ공립 및 사립박물관 모임인 ㈔한국박물관협회(회장 배기동)가 이달 하순에 2009년 한국박물관대회를 개최한다. 한양대박물관장이기도 한 배기동 회장은 13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올해 박물관대회는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을 담아 제12회 전국박물관인대회와 제3회 한국박물관국제학술대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 중 국제박물관협의회(ICOM)가 제정한 '세계박물관의 날'(5.18)에 즈음해 전국 박물관ㆍ미술관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친목행사인 박물관인대회는 25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연다.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수여와 우수박물관 활동상 시상, 그리고 박물관ㆍ미술관인 결의문 낭독 등으로 진행된다. 박물관국제학술대회는 22-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계 저명한 미술관ㆍ박물관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한 가운데 앞으로 100년간 한국박물관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점검한다. 한편 배 회장은 협회가 지난달 30일 정부에 대해 박물관ㆍ미술관 정책을 전담하는 부서를 복원해 달라고 청원했다고 밝혔다. 그는 "박물관ㆍ미술관 2천관 시대를 위한 범국가적인 준비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범정부적 통합 관리시스템을 전담하는 부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물관은 그 성격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과학기술부, 농림수산식품부 등으로 전담부서가 분산돼 있다. 같은 박물관이라고 해도 국ㆍ공립이나 사립박물관은 문화부 소관이지만, 대학박물관은 교육부 관할이다. 이런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로 문화부에 박물관과 혹은 도서관박물관과 등이 있었지만, 지난해 3월을 기점으로 폐지되고 그 기능은 문화부 문화정책과와 예술정책과에 흡수됐다. 배 회장은 "일본은 문부과학성에서 (박물관ㆍ미술관 업무를) 전담하고, 중국에서는 박물관협회장이 차관급 정무직이며, 미국에는 독립기구인 도서관ㆍ박물관위원회가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미래발전의 전략적 정책개발 추진주체로서 정부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 회장은 "우리는 박물관보다 고속도로가 훨씬 잘 돼 있지만, 선진국일수록 고속도로보다 박물관이 훨씬 잘 돼 있다"면서 "우리 박물관ㆍ미술관은 고속도로는커녕 경로당보다(그렇다고 경로당 시설이 박물관보다 못 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못한 실정"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배 회장은 "아직도 정부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박물관을 '고물창고'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는 게 아닌가 한다"면서 "그런 박물관은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14 23:02

"미래에는 여성이 위대한 작가로 부상"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13일 미래에는 여성들이 위대한 작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날 오후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열린 `세계대전에서 세계화로 : 문학의 질문들'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세계대전 이후 서로 다른 문화간 교류의 결과로 `여성적 문화'가 도래했다"며 이같이 예측했다. 르 클레지오는 잔인한 인간성이 드러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가치.언어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오늘날의 문학이 여성들에게 `표현의 장'이 됐다는 점에서 위기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식민지 시대 속박당했던 민족들이 세계대전 이후 독립해 자유를 얻은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여성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의 문화'가 남자들이 만들어낸 재앙, 즉 전쟁으로 인한 재앙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여성들이 위대한 작가로 떠오르는 시기에는 과거 여성작가들처럼 남성의 절대권력에 대항하라고 선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르 클레지오는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인이 승용차의 바퀴를 훔쳐가는 것을 지켜보고 유대인 가족이 죽음의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사실을 전해들은 일 등 어린 시절의 전쟁 경험이 자신의 글쓰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소개했다. 그는 "전쟁을 겪는 운과 불행을 동시에 누렸다"며 "책이나 영화가 아닌 전쟁의 현실을 체험했고 그 경험은 내면에 뿌리박힌 정서로 남아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털어놨다. 르 클레지오는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불교와 가톨릭교 등 종교의 다양성, 각 지역별 특성을 고려할 때 한국 문화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며 `한국 문화가 미국화했다'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기를 묻는 질문에는 "스웨덴 한림원 관계자들이 황석영 등 한국 작가의 작품 뿐 아니라 사기 그릇, 병풍 등 한국의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생동감있는 한국 작품이 많이 출간되고 있기때문에 머지 않아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14 23:02

16일 익산 미륵사지 재발견 학술대회

미륵사 사리장엄 발견과 동시에 창건 주체에 대한 논쟁 위주로 흘러가던 미륵사지에 관한 연구를 고대사, 고고학, 미술사, 국문학 등으로 확장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전라북도와 익산시, 고려사학회가 공동주최하는 '익산 백제 미륵사지의 재발견' 학술대회가 1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원광대 60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이날 미술사 전공자인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은 사리장엄의 출토 과정과 봉안 상태에 대해 조사 당시 촬영한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출토 사리장엄의 의의'를 발표한다. 이실장은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창왕명 사리감'과 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목탑 사리장엄에 이어 출토된 미륵사지 사리장엄을 백제 사리장엄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부각시킬 전망이다. 특히 공예사적인 의의를 집중조명할 예정.고대사 전공자로 '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를 발표하는 박현숙 고려대 교수는 그동안 학계 논의가 선화공주와 사택씨 왕후에만 초점이 맞춰져 온 것에서 벗어나 미륵사 건립 주체를 단계적으로 나눠 보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사리봉안기를 제일 먼저 해석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미륵사 발원자는 사택왕후로 미륵사 전체를 창건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무왕대 불교계 동향과 관련해 보완발표할 계획이다.동탑 조사보고서와 서탑 조사보고서를 분석한 양정석 수원대 교수는 동일한 유적에 대해서도 조사기간이 장기간에 걸치면서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 미륵사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과정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할 예정이다.국문학자인 나경수 전남대 교수는 '백제 무왕의 서동설화와 미륵사'에 대해 발표한다.종합토론은 오후 4시30분부터. 정재윤(공주대) 이강근(경주대) 현승환 교수(제주대)와 조경철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가 토론에 참여한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5.14 23:02

문화유산 보전 대안은 용적률거래제

보존과 개발의 조화. 말이야 좋지만 문화유산 현장에서는 문화재 때문에 못 살겠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한성백제 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풍납동 풍납토성 일대 주민들이 오죽하면 '풍납동'이라는 동명을 버리고 '잠실동'으로 바꾸고자 했을까? 천년고도 경주 시민들이 압도적인 찬성률로 방폐장을 받아들이기로 한 데도 문화재에 대한 '환멸'이 크게 작용했다. 개발과 보존의 조화라는 해묵은 숙제에 직면한 문화재청은 최근 국토연구원이 그 해법으로 제시한 '용적률거래제'라는 카드를 부쩍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12일 오후 2시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역사문화환경 보존ㆍ관리를 위한 '용적률거래제' 도입 방안 정책 토론회'를 개최한다. 용적률거래제를 입안한 국토연구원 문화국토전략센터장 채미옥 박사가 이 제도의 도입 취지와 개념, 적용 방안 등을 발표하며, 학계와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언론과 시민단체 관계자 12명이 그 타당성에 대한 격론을 벌이게 된다. 이 자리는 지난 3월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문화재청이 후원하고 국토연구원이 주최한 '문화국토를 위한 고도육성 방안'의 확대판, 혹은 연장판이라 할 수 있다. 후원자였던 문화재청이 이번 토론회 주최자로 나선 것은 국토연구원이 제시한 방안을 정부 정책으로 공식 채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엄승용 문화재정책국장 또한 "(문화재청) 내부 검토 결과 용적률거래제가 문화유산을 보전하면서도 그 주변 개발 압력을 조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용적률 거래제는 특정지역을 일정밀도 이상으로 개발할 경우 보존지구로 규제를 받고 있는 지역에서 용적률을 사오게 하는 제도다. 기본 취지와 개념은 개발권양도제와 동일하지만, 개발권이 아니라 용적률을 거래하는 제도라는 점이 다르다. 채 소장은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는 규제받는 지역의 자산가치 손실을 개발하는 지역의 개발이익으로 보전함으로써 보존지구와 개발지구 간의 손익을 조정할 수 있고, 간접적으로는 불로소득을 향유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함으로써 토지시장 안정과 난개발 방지를 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방식에 의하면, 예컨대 서울의 A 재개발지역, B 재건축지역, C 뉴타운지역 사업 허가 때 풍납토성 내부지역에서 용적률을 매입하도록 허용하고, 그 용적률을 거래케 함으로써 문화재보존지역에 사는 풍납토성 주민들의 손실을 보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채 소장은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녹색성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개발이 필요한 곳은 쉽게 개발할 수 있도록 하되, 보존이 필요한 곳은 주변지역까지 연계해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역사문화자산을 효율적으로 보전하는 방안의 하나로 개발권양도제를 한국실정에 맞게 보완한 용적률거래제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12 23:02

"판소리, 전국 기반으로 발달 호남서만 싹튼 건 아니다"

배연형 동국대 교수가 평양 등과 같은 대도시 관장들의 놀음이 소리광대들의 주된 시장이었다고 주장했다.9일부터 10일까지 전북대 정보전산원에서 열린 '제61차 판소리 학술대회'에서 배 교수는 '판소리 노정기와 연행사 연행일기' 주제 발제를 통해 "'연행사 연행일기'는 연행 사신들이 고을에 들러 휴식을 취할 때 벌어진 각종 연희에 관한 기록이자 드물지만 광대 이름까지 거론된 중요한 자료"라며 "「삼절연공겸사은사」의 기록인 '이도령가 타령'을 보면 크고 유창한 발성, 너름새, 공연시간 등을 미루어 볼 때 판소리 형태라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배 교수는 "「진하겸사은사」의 「유헌삼록」에 따르면 연행사 일행이 의주에 머무는 동안 창부 '주덕기의 가(歌)'를 들었다는 기록에서 「조선창극사」 에 언급된 동시대·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은 데다 '창부의 가(歌)'는 광대의 판소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평양감사연회도'에 등장한 모흥갑이 평양 능라도에서 판소리 하는 장면을 예로 들며 평양이 모흥갑이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도시였다고 주장했다.그는 "판소리를 배태하고 길러낸 것이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시장 기반 위에서 발달했고, 주된 수요층이 관장들이었으며, 소리광대가 이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공연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며 소리 광대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붙박이로 소리하기 시작하면서 판소리의 지방화가 가속화됐고, 그 결과 계면조 지역구에서 주저앉은 것이 현대 판소리의 실상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목소리를 높였다.한편 이날'판소리 학술상'은 조영규씨(41·국립창극단 단원)가 선정됐다.조씨는 지난해 출간한 「바로잡는 협률사와 원각사」(민속원)을 통해 협률사나 원각사가 극장 이름이 아니라, 예인들의 조직체라는 것을 밝힌 공로를 인정받았다.그는 사(司)와 사(社)자가 전혀 다른 협률사(協律司)와 협률사(協律社) 관계를 그간 학계가 동일시해왔다며 전자는 궁중음악을 관장하는 곳의 이칭이며, 후자는 예인들을 활용해 군악대로 보충하는 성격의 연희회사를 뜻한다고 밝혔다.전남 영암 출생, 전남대 국악과를 졸업한 그는 성창순 명창, 김일구 명창, 안숙선 명창을 통해 사사받았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05.12 23:02

일본인 츠즈미씨, 우석대에 문화재급 유물 20여점 기증

우석대는 일본내 대표적 친한파(親韓派) 인사로 알려진 츠즈미 가즈오(堤千恩·81) '화합을 위한 마을의 모임'회장이 6일 문화재급 유물 20여점을 대학에 기증했다고 밝혔다.츠즈미 회장이 이날 기증한 유물은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의 사쓰마야키(薩摩燒)와 사가현(佐賀縣)의 이마리야키(伊万里燒)를 비롯한 명품 도자기 6점과 지마(輪島) 및 이시가와현(石川縣)의 칠기(漆器) 2점, 맹종죽(孟宗竹)에 쓴 글씨 2점 등이다.또 중국 용천요(龍泉窯)의 청자 2점과 중국고궁박물관에 소장됐던 그림 및 피카소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우석대 관계자는 "기증받은 도자기와 공예품은 일본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주일 한국대사를 지낸 라종일 총장과 인연이 있는 츠즈미 회장이 한·일 교류 활성화 차원에서 대학에 유물을 기증했다"고 말했다.라종일 총장은 "츠즈미 회장은 한·일 협력과 상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면서 "기증받은 유물은 대학 박물관에 상설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우석대는 츠즈미 회장에 대해 지난 1974년 고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으로 한·일관계가 경색되자 이를 우려, 양국 학생교류를 위한 '화합을 위한 마을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든 친한파 인사라고 소개했다.츠즈미 회장은 특히 일제시대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사망한 한인들을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고 위령제를 지내며 유골 반환운동까지 펼친 인물로 유명하다.

  • 문화재·학술
  • 김종표
  • 2009.05.07 23:02

무수리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회한

"일찍이 임금의 은총 입어 / 순종으로써 공경히 모셨네 / 마음에 성실함 온축하시니 / 궁궐 법도에 부합했네 / 이내 상서로운 복 품으시어 / 우리 성궁(聖躬) 낳으셨네 / 대왕이 될 점괘에 부합하니 / 하늘이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조가 즉위하던 해인 1725년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숙빈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숙빈최씨는 무수리로 궁궐에 들어갔다가 숙종의 성은을 입어 영조를 낳았다. 영조는 70세에 도달한 1763년에는 자신의 출생 내력을 기록한 '갑술년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를 열람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승정원일기는 적고 있다. "아! 칠순이 되는 해 9월에 우연히 호산청일기를 얻어 보고는 감회가 일어나 (육상궁<毓祥宮>으로 가서) 다만 배알(拜謁)만 하고 돌아오니 이 마음 갑절이나 새롭다" 이 육상궁은 숙빈최씨를 봉사(奉祀)하기 위한 사당으로 지금은 청와대 경내의 칠궁(七宮) 중 하나로 남아있다. 워낙 출신이 미천한 까닭에 자세한 가문 내력이나 초반기 생애가 알려지지 않은 숙빈최씨는 1670년(현종 11년) 11월6일에 태어나 7세에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1692년 우연히 한밤중 왕궁 '순찰'에 나선 숙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고, 아들을 낳아 일약 내명부 최고 품계인 숙빈까지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품계가 높아졌다 해도, 그리고 그 아들이 임금이 되었다고 해도, 숙빈최씨의 신주는 종묘에 갈 수 없었다. 1718년(숙종 44년) 3월, 49세로 생을 마감한 숙빈은 그 해 5월12일, 양주 고령동 웅장리 묘향(卯向) 언덕에 안장됐다. 국왕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고한 신분제 아래서 임금인 아들은 죽은 어머니를 대대적으로 추숭하는 일들을 벌이게 된다. 재위 29년(1753)에는 화경(和敬)이라는 존호를 올린 데 이어 묘(墓)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조선시대 능묘제도에서 원(園)은 왕이나 왕비 무덤에나 붙일 수 있는 능(陵) 다음 칭호였다. 재위 34년(1758), 어머니 묘소를 참배한 영조는 어머니가 죽던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감회에 젖어 "붓을 쥐고 회포를 써 내려가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통곡했다. 이처럼 무수리 출신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절절한 회포의 정을 담은 흔적 중에서도 산도(山圖)와 비문만을 정리한 자료집이자 해제집이 최근 이들 자료 소장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도록 형태로 나왔다. 이에는 숙빈최씨의 장지를 물색하고 지관(地官)이 그림 형식으로 올린 산도와 그 지역 풍수론을 정리한 산론(山論), 소릉원 전체와 그 석물(石物) 배치도, 그리고 소릉원 주변 화재 방지선인 화소(火巢) 그림 등이 포함됐다. 나아가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각종 비문 7종의 탁본도 있다. 이번 자료 해제에 관여한 윤진영 장서각 연구원은 이 중에서도 "숙빈최씨의 산도와 산론은 이런 종류의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현존 유일하다"고 말했다. 윤 연구원은 또 "영조는 자기 어머니 관련한 기록은 한장도 버리지 않고 육상궁에 모아뒀다"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 콤플렉스도 느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조의 효심은 극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한중연은 6일 장서각에서 숙빈최씨자료집 출판과 관련, '영조와 숙빈최씨'를 주제로 '제17회 장서각 콜로키엄'을 연다. 정만조 국민대 교수가 '영조와 숙빈 최씨' 을 주제로, 이현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영.정조대 육상국의 조성과 운영'을 주제로 각각 발제한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5.04 23:02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 국립박물관 승격 검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출토 유물은 발견된 자리에 보관전시돼야 한다고 밝혀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국립박물관 승격에 탄력을 더해주고 있다.유 장관은 지난달 30일 오후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찾아 미륵사지석탑 해체복원 현장 등을 둘러보고 "미륵사지에서 국보급 유물이 대거 출토됐지만 이를 보관할 적당한 시설이 없는만큼 현재의 미륵사지전시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하는 문제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이어 유 장관은 "출토된 각종 유물은 발견된 장소에 보관되어야 한다"면서 "문화재청과 상의해 역사적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유 장관은 이에앞서 원불교중앙총부를 방문하고 경산 장응철 종법사와의 환담을 나눈 자리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겠다"고 피력했다.또 유 장관은 한글의 세계화 정책을 추진해 달라는 종법사의 제안에 대해 "제가 문화부 장관이 된 이후 한글 정책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한글만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한글 교육문화센터'를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한글문화를 세계화하는 것이 우리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노력하면 의미 있는 결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장세용
  • 2009.05.01 23:02

천연기념물 지정 500호 돌파

국가지정 문화재의 하나인 천연기념물이 500호를 돌파했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전남 목포시 용해동 산 86-24 일대 '갓바위'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500호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문화재보호법 제정ㆍ시행과 더불어 1962년 12월3일 대구 도동의 측백나무 수림이 1호로 지정된 이래 이번까지 500호에 이르는 천연기념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중에는 '독도천연보호구역'(면적 18만902㎡)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11월16일 336호로 지정된 독도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목포 갓바위가 500호라 해서 현재 이만한 숫자의 천연기념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정 대상에 동ㆍ식물이 많은 까닭에 태풍이나 벼락, 혹은 돌림병과 같은 각종 재해로 천연기념물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지정 해제가 된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500호라는 숫자 안에는 1962년 12월3일 문화재보호법 시행에 따라 천연기념물을 새로 지정하면서, 일본강점기 이래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던 북한 내 문화재를 지정과 동시에 해제한 숫자까지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관계자는 "500호 목포 갓바위까지 이르는 천연기념물 중 현존하는 것은 416건으로 집계되므로 84건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가 해제된 셈"이라면서 "북한 소재 천연기념물이 어떻게 해서 1962년에 지정됐다가 해제됐는지 현재로서는 그 곡절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국가지정 문화재는 설혹 해당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더라도, 유명한 운동선수의 등번호가 흔히 그런 것처럼, 그 번호는 '영구 결번' 처리된다. 이번에 지정된 목포 갓바위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있어 풍화 작용과 해안침식 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tafoni)로서, 삿갓 쓴 사람 형상을 한다. 이 갓바위는 인위적 요인 없이 순수 자연적인 과정으로 빚어진 풍화혈 상태의 자연 조각품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4.29 23:02

새 문화재위원회 위원 80명 위촉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 위원과 전문위원 임기가 지난 25일자로 만료됨에 따라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을 비롯한 80명의 문화재위원과 130명의 전문위원을 새로 위촉했다고 27일 밝혔다. 새 문화재위 위원과 전문위원들은 앞으로 2년간(4.26-2011.4.25) 활동하게 된다. 문화재위원장과 및 분과별 위원장은 30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에서 열리는 전체회의에서 선출된다. 문화재청은 새 문화재위에서는 위원 수를 종전 120명에서 80명으로 대폭 줄이고, 여성 위원의 비율을 13.3%에서 20%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문화재위 심의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국민 생활과 직결된 분야에서는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해 보다 균형감 있는 안건 심의가 가능하도록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가급적 3회 이상 연임은 배제했으며, 아울러 발굴 기관 혹은 문화재 관련 기업체 운영 등 문화재와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와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 등도 위촉 대상에서 배제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문화재청은 새로운 문화재위원회 출범과 함께 종래 국보 지정만을 담당하던 국보지정분과와 문화재 주변 현상변경 업무를 전담하던 문화재경관분과는 폐지하고, 공예분야와 예능분야로 분리 운영하던 무형문화재 관련 분과는 무형문화재분과로 통합했다. 이와 함께 세계유산에 대한 등재 및 관리, 잠정목록 대상 관리를 전담할 세계유산분과를 신설함으로써 종전 11개 분과 위원회는 9개 분과로 축소됐다. 언론인 출신으로는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한 정중헌 서울예술대 부총장이 건축문화재분과와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을 겸임하며, 이경희 세종대 겸임교수는 매장문화재분과와 근대문화재분과위원을 겸임한다. 박석홍 건양대 겸임교수는 무형문화재분과 위원으로 활동한다. 법조계 인사로는 대검찰청 마약부 부장검사와 서울지검장을 지낸 법무법인 세종 소속 유창종 변호사가 건축문화재분과와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을 겸임하고, 정종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사적분과와 매장문화재분과에서 동시 활동한다. 불교계에서는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인 수경 스님과 중앙승가대 미산 스님이 각각 건축문화재분과와 동산문화재분과 위원에 위촉됐다. 경제계에서는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장이 매장문화재분과위원이 됐다. 한편, 이번에 새로 위촉된 문화재 위원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전ㆍ현직 출신자가 9명이나 위촉돼 지나치게 많은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위원 위촉을 최종 결정하는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출신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4.28 23:02

점말동굴 석가탄생불 30년 만에 공개

구석기시대 동굴유적으로 유명한 충북 제천의 점말동굴에서 30년 전에 출토된 석가탄생불이 공개된다. 더불어 점말동굴 재조사 과정에서 신라 화랑의 무리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각자(刻字.돌에 새긴 글자)가 무더기로 확인돼 그 성과도 발표된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충북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1973-80년 총 7차례에 걸쳐 연세대박물관이 조사한 점말동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신라시대 각자를 암벽 곳곳에서 확인했다고 27일 말했다. 연구원은 이번 재조사와 이전 점말동굴 조사 성과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28일 제천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화랑의 장(場) 점말동굴, 그 새로운 탄생'이라는 주제로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특히 1979-1980년 실시한 제7차 점말동굴 조사대상 지역 중 용굴 앞 광장 지역에서 수습한 탄생불상이 공개된다. 현재 연세대박물관이 소장한 이 탄생불을 검토한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춘실 교수는 "재료가 금동이 아니라 돌이며, 하늘을 가리키는 손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고, 커다란 광배와 넓은 대좌를 갖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탄생불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 불상은 전체 높이 17.3cm, 하부 폭 9.4cm, 상 높이 11.2cm이며, 대좌의 앞뒤 폭은 6.8cm다. 발굴 당시에는 대좌 부분이 깨져 있었으나 현재는 접착 복원된 상태이며 재료는 사암(砂巖) 계통의 돌로서 표면은 푸른 색을 띠지만 깨진 곳을 보면 속은 붉은색이다. 다른 탄생불과 비교할 때 이 불상이 조성된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로 볼 수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김 교수는 나아가 이런 탄생불의 발견을 통해 점말동굴 유적은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왕래한 곳이며 통일신라 말기-고려 전기 무렵에는 절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점말동굴 내부 곳곳에서 확인한 신라시대 각자에 대한 조사 성과도 발표된다. 이 조사에 참여한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이 각자들이 "신라 화랑(花郞)과 낭도(郞徒)들이 다녀간 흔적"이라는 견해를 발표할 예정이다. 조사 결과, 각자 중에는 신라시대 교육과 의례를 관장하던 관청인 '예부'(禮府)라는 문구가 보이며, 이 외에도 울주 천천리 서석(書石)에 보이는 화랑 이름인 '금랑'(金郞)이라는 글자도 발견됐다. 이 교수는 각자 자료를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 혹은 낭도의 이름과 연관시키면서, 다녀갔음을 의미하는 '行'(행)이라는 글자가 자주 보이는 점을 들어 이를 '화랑각자'(花郞刻字)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힐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4.28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