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칼럼] TV 보러갔다가 드린 예배 - 김승연
옛날에 경상도 어느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목사님 댁에는 칼라 TV는 고사하고 흑백 TV조차 없었습니다. 다만, 애지중지하는 트랜지스터라디오 한 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TV를 소유한 집이라면 대단한 부자였습니다.그 마을에는 흑백 TV가 딱 한 대 있었는데, 그 집은 바로 박 장로님 댁이었습니다. 평소에 목사가 평신도의 집에 찾아가서 TV 구경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늘 TV 연속극을 즐겨 보면서도 어쩌다 목사가 한 번 보다가 깔깔대며 웃기라도 하는 날에는 경건치 못한 목사라며 금세 소문을 퍼뜨리고, 은혜가 떨어진다 하니 함부로 웃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가끔 심방 가서 예배를 마친 다음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구경삼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아예 죽치고 앉아서 시청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니 김일 선수와 일본의 레슬링 선수 이뇨키와의 경기를 TV로 생중계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목사님의 평소 취미는 라디오를 통해 스포츠 중계를 즐겨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 선수의 레슬링 같은 경기를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듣는다는 것은 왠지 답답할 것 같았습니다. TV를 통해 직접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TV가 남의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교회 장로님 댁에 있으니까 조금은 미안하지만 부담 없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목사님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모시 바지에 저고리를 갈아입고, 흰 고무신을 끌고, 부채 하나를 들고, 염치불구하고 박 장로님 댁을 찾아갔습니다. “박 장로님, 계십니까?” 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여름 철이라 모두들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옷은 벗어젖히고, 마루에 나와 방안에 있는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 댁에는 갑자기 1급 갑호 비상이 걸렸습니다. 박 장로님은 예고없이 목사님이 들이닥치니 마치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TV를 급히 끄고, 부인은 치마를 둘러 걸치고, 애들은 후다닥 방으로 몰려 들어가고, … 야단들이 났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던 목사님 역시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괜히 왔나!’ 싶기도 했으나 큰 맘 먹고 찾아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일단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강심장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략 정리가 끝났는지 박 장로님은 마루에서 황급히 내려서면서 “아니, 목사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목사님은 차마 TV 중계를 보러 왔다는 말은 못하고, “아니, 혹시 박 장로님 댁에 무슨…”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온 가족들이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었던 분위기를 깬 것 같아 너무 미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얼른 대답을 못하자 박 장로님이 소리를 지릅니다. “얘들아! 목사님 오셨으니 예배드리자. 성경, 찬송가 어서 가져오너라.”아이들은 방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성경, 찬송가를 들고 우르르 몰려 나와 자리하고 앉았습니다. 순식간에 TV 시청 장소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애당초 심방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경, 찬송가는 있을 리 만무하고, 부채만 하나 덜렁 들려 있었습니다. 할 수없이 목사님의 인도로 예정에도 없던 예배를 간단하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마친 후 이제나 저제나 TV를 켤까 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기다려 보았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분초를 다투어 흘러가 버리고 이젠 하는 수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결국 목사님은 레슬링 중계도 못보고 예배만 드리고 돌아오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괜히 TV 중계도 못보고, 예배만 드리고 왔네! 차라리 집에서 라디오 중계나 들을 걸!”박 장로님 역시 목사님을 전송하고 들어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니, 목사님은 예고나 하고 심방을 오실 일이지! 하필이면 김일 선수 레슬링 중계시간에 오셨지! 모처럼 TV로 레슬링 경기를 보려고 했더니 예배만 드리고 말았네.”목사님이 떠나시자마자 건성으로 인사를 건넨 아이들이 곧바로 TV를 켰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소리칩니다. “아버지! 목사님 때문에 레슬링 중계 다 끝나버렸잖아. 씨~”/김승연(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