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최광석 작가의 ‘지금 만나는 복(福)’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귀가할 때면 꼭 지나야 할 길에 오일장이 섰는데, 어느 날 난 신기한 구경을 했다. 장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가 뭉툭하고 넓적한 구둣주걱 같은 곳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각각 다른 곳에 묻히더니 글씨와 그림을 한 획으로 그리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예뻤다. 미술대회에 출전이라도 하면 학교 앞인지 학교 울안이었는지도 모호한 작은 봉오리, 오메봉에 올라서 보면 보이는 것은 논(畓)뿐이어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던 어찌어찌 녹색을 칠하고 그 위에 "ㅛ"의 형상을 몇 개 그려 넣어 그곳이 논임을 표시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나는 그 거리 화가의 솜씨에 황홀감마저 느꼈었다. 나중에 미술 공부를 전문으로 하다가 알게 된 것은, 그 장바닥의 아저씨가 그렸던 것은 문자도(文字圖)였으며, 그 붓은 가죽 붓이었고, 그런 그림을 혁필화(革筆畵)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뜻글자인 한문 문화권에서만 표현될 수 있고. 어느 글자에는 어느 그림이 공식적으로 들어가야 하며(가령 孝의 경우에는 잉어, 죽순, 부채, 귤 등), 유교 문화권에서만 이루어지는 그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로 쓰이는 글자는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 수, 복, 강, 령, 부, 귀, 다, 남으로 그리되기를 바라는 소원 내지 기도 같은 것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대 서예가 겸 화가인 박방영 작가는 서예를 쓰는 중간에 무리 없이 형상을 집어넣어 쓰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문자도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한문(漢文)의 날카로운 획(劃)의 곡선을 차용하여 조각하던 고 백철수 교수가 있었고, 현재는 자개를 오려서 그림에 부착하는 심홍재라는 퍼포먼서의 회화가 있고, 이 중에서도 가장 문자도와 혁필화에 영향을 받고 그 조형미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최광석 교수가 있다. 그러하니 공식적으로 문자도를 표방하고 문자도에 심취, 그 효험까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작가는 최 작가가 유일무이하다 하겠다. 최 작가는 조선시대의 백수백복(百壽百福)이라는 문자도에서도 따로 복(福)만을 떼어내어 백복(百福)이 아니라 백만복(百萬福)을 기원하며 질리지도 않는지 "福"이라는 글자를 이용하여 문자와 문자를 둘러싼 배경의 회화적 표현에서 줄곧 현대화를 이루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상한 것은 이 열여섯 자 중에서도 유독 福 자에만 심취하고, 조선시대의 사람들처럼 그 영험까지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최 작가는 원래 동양화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으나(문자도를 선택한 이유가 될 수도), 당시 최대섭, 이건용, 박장년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현대미술 기수들인 교수들의 영향 때문인지 줄곧 그 판을 흘깃거렸고, 지역에서도 한참 선배 화가이며, 비록 학교는 다르지만, 문복철 교수 같은 현대미술의 쟁쟁한 분들이 있었기에, 거기에다 작가 본인의 성격이 호탕하고 솔직담백함에서 풍겨 나오는 파괴력마저 느껴지는 최 작가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파괴력이라는 단어에 이상한 생각이 있을지 몰라 한 마디 곁들인다. 여기에서의 파괴력은 솔직담백함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심이다. 책에서나 있을 법한 적당한 처세술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솔직담백함은 인생을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느껴지게 하는 두려운 감정을 파괴력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아무튼 수없는 공모전 출품에서도 동양화가 아닌 현대미술 계열로 많은 수상 경력을 인정받아 약관의 나이 28살에 대학교수로 입신양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학교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수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福들이 얼크러져 있었다. 과연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닌데, 종교의 다양함에 유교도 많이 밀려 이제는 사당의 시제와 가정의 제사 양식에만 약간 남아있는데 과연 이 다양한 관심사가 넘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 중 하나였던 문자도의 역할과 효능은 어떻게 생각될지 두고 볼 일이다. 요즘에도 민화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현대미술로서의 입장에서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한 궁금하다. 이래서 현대미술은 항상 실험적인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