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
천자문(千字文)엔 봄 ‘春(춘)’자가 없다. 천자문 달달 외워도 ‘立春大吉(입춘대길)’을 못 쓴다. 그렇다고 봄이 오지 않는가? 봄은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입춘(4일)이 코앞이다. 하지만 봄은 이미 내 몸 깊숙이 똬리를 튼 지 오래다. 봄은 입맛으로부터 온다. 혓바닥은 요물이다. 겨우내 입안이 온통 헛헛하고 텁텁하다. 찌든 ‘군둥내’에 진저리친다. 시큼한 김치찌개 냄새, 퀴퀴한 청국장 냄새, 에~취! 코를 찌르는 찬장의 눅눅한 고춧가루 냄새…. 풋것이 미치도록 먹고 싶다. 하마, 남녘 바닷가에선 무시로 봄 쑥국이 밥상에 오르리라. 바닷바람에 연하고 순해진 해쑥들. 그 여릿여릿 생명의 풋것들! 그 수선거림과 흥성거림. 온몸이 달뜬다. 도리질에 안달복달, 발을 동동 구른다. 잇몸이 근질근질, 혀끝이 간질간질, 방안을 왔다 갔다, 의자에 앉았다 섰다, 책을 폈다 덮었다…. 에라, 전주에 달려가 ‘파 강회’나 실컷 먹어볼까? 단골 막걸릿집에 퍼질러 앉아, 파강회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켜놓고, 주모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나 들어볼까? 우두둑! 정갈하게 돌돌 말린, 세모시 옥색치마의 쪽파 허리 ‘즈려’ 씹으며, 젓가락 장단이나 두드려볼까? 어금니 잇몸 위아래로 ‘슴베 나오는’ 데친 쪽파의 새콤한 연녹즙. 쪽파 보늬 껍질의 풋 냄새와 매옴 시큼한 초고추장의 환장할 어우러짐. 씹으면 씹을수록 아련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살찐 농어가 풍덩! 뛴다. 파릇파릇 미나리 강회는 또 어떨까. 살찐 생미나리의 상큼한 새물내. 너부데데한 놋그릇에 김 펄펄 하얀 쌀밥과 살짝 데친 미나리 숭숭 썰어 넣고, 고추장 참기름으로 쓱쓱 비벼 먹고 싶어라. 오호라, 입속에 다발로 피어나는 재스민 향기. 콧숨 뿌리에 알큰하게 차오르는 봄 향기. 한순간 온몸의 실핏줄이 우우우 부풀어 오른다. 얼씨구나 절씨구! 남이야 혁명을 하든 말든, 미나리 파란 싹이 입안 가득 돋아난다. 새록새록 감칠맛이 우러난다. 전주 어르신들 말로 ‘개~미’가 있다. 아뿔싸, 또 있다. 봄동이다. 이거 빼면 새봄이 허전하다. 요즘 봄동은 발가락으로 무쳐도 맛있다. 봄동은 역시 ‘봄~똥!’으로 읽어야 제격이다. ‘봄의 똥’인가? 그렇다. ‘봄 강아지가 쪼르르 길 가다가 눈 연둣빛 똥’이다. 겨우내 징게밍게 논두렁밭두렁에서 한뎃잠을 잔 ‘노숙 배추’를 그렇게 부른다. 한마디로 ‘납작배추’ ‘떡배추’다. 엄동설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다. 그래서 더욱 깨소금 맛이다. 입에 넣으면 사각사각! 사과 깨무는 소리가 난다. 씹을수록 들척지근하고 꼬소름하다. 맛이 둥글다. 그렇다. 봄똥 속엔 전주 기린봉 귀때기를 후려치는 칼바람 한 줌, 꽁꽁 얼어붙은 전주천의 얼음 한 조각, 경기전 앞마당에 퍼붓는 함박눈 한 줌, 전주한옥마을 각시방 영창에 매달린 수정고드름 하나, 섣달 밤 다가산 너머 눈썹달 비껴가는 기러기 한 마리, 북풍한설 완산칠봉 산비탈에 맨살로 서 있는 신갈나무 한 그루, 하늘나라 어머니의 자나 깨나 자식 걱정 한소끔, 그리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댕기냐?” 앞서가신 아버지의 낮고 뭉툭한 목소리가 들어 있다. 시부저기 “봄~똥!”하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눈꺼풀에 햇살 부스러기가 간질간질 내려앉는다. 귓가에 투욱~ 툭! 생강나무 꽃망울 터지는 소리. 얼음장 밑 쫄! 쫄! 쫄! 물 흐르는 소리. 공기가 참 달다. “보옴~똥!” /김화성 전 동아일보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