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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경관의 권리

2002년 12월 18일, 일본 도쿄도(東京都)내 기초자치단체 중의 하나인 쿠니타치(?立)시에서는 일본 전역은 물론 국내에서까지 화제를 불러일으킨 재판이 하나있었다.『쿠니타치(國立)시의 대학로(大學通り)사건』으로 불리는 이 재판은 대학로에 면하여 지어진 높이 43m의 맨션에 대해 지역주민 50명이 제기한 소송으로, 도쿄고등재판부는 맨션이 경관을 저해한다는 주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높이 20m이상의 부분에 대한 철거명령과 철거 때까지 1개월에 1만엔씩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판결은 경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상징적인 의미와 경관관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준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에서는 국가차원에서의 경관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했고, 지난해 6월 경관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년 3월, 국내에서도 건설교통부가 경관법(가칭)을 제정하고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경관에 대한 권리 보호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경관법 제정을 두고 환경단체와 개발업자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보존과 개발이라는 대립구도가 형성되고 있으며, 또 다시 일본의 법제를 무작정 따라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파괴되어가는 현대도시의 경관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경관정책에 있어서 일본이 국내보다 앞섰다는 점을 인정하고 배우지 않을 수 없다.일본에서 경관관련법제가 제정된 것은 1968년부터이다. 시작은 전통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점 역사경관의 보존에서 도시경관의 관리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현재는 약 500여개의 지자체에서 도시경관관리를 위한 자치조례를 제정하고 경관정비와 보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지난해 제정된 일본의 경관법은 새로운 법제라기보다는 이러한 지자체의 경관정책을 정부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국내에는 안타깝게도 내세울만한 관련 법제나 정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몇 몇 지자체에 관련조례가 있긴 하지만 자연경관이나 역사경관의 보존에 한정된 것들이어서 도시전체의 경관을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때문에 같은 도시공간 속에서도 한 지역에서는 역사경관을 보존해야 한다, 자연경관을 보호해야 한다며 경관보호를 주장하고 있는데 인근 지역에서는 거리낌없이 고층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는 아이러니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다.우리 도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 도시에는 환경부로부터 국내 제일의 생태하천으로 인정받은 전주천이 흐르고 있고,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시한옥의 아름다운 전통경관을 갖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갖췄다는 월드컵경기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춘 도시공원들이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어 어느 도시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경관도시로서의 충분한 자격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올라와 있는 나홀로아파트나 경쟁하듯 하루하루 높아가는 아파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도시의 경관이 아름답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물론, 오늘날 우리가 갖게 된 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전통경관 역시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애써 일궈낸 결실들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도시전반에 대한 균형적인 경관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경관관리라 하면 개발억제나 보존, 저층화 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경관관리는 지역의 성장을 촉진시키고 고층화하여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조율하는 정책이기도 하다. 이는 경관관리가 단순한 보존이나 개발억제의 차원을 넘어 도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균형있게 성장시켜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드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국내의 경관법 제정은 전문가들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어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관법이 마련되고 관련정책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과 주인의식을 갖고, 쿠니타치의 시민들처럼 경관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매력적인 도시경관 형성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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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6.14 23:02

[새벽메아리] 과대 포장과 표사유감

상품의 과대 포장이 항상 말썽이다. 상품의 양보다 포장지의 양이 몇 배에 이른다. 자원의 낭비와 엄청난 양의 쓰레기도 문제지만, 비본질적인 요소들로 본질적인 허술함을 호도하려는 의도로 보여 씁쓸하다. 상품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고가품일수록 과대포장의 정도가 심하다고 보면 틀림없다.며칠 전에는 아파트 입구마다 어느 정치인의 의정보고서라는 것이 수북이 쌓여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서라는 표제에 관심이 있어서 내용을 살펴봤다. A4 규격에 용지는 최고급 광택 아트지요, 색도는 올 컬러로 8장 16쪽에 이르는 화려한 보고서였다. 그득하게 싸인 소위 보고서라는 것이 며칠이 지나도 그 양이 별로 줄어들지 않더니, 어느 날인가 말끔히 치워졌다. 아마 청소하는 분의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아무리 이미지 시대요 영상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좋은 지질에 막대한 인쇄비를 들여 제작한 의정보고서라면 제목에 걸맞은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할 터인데도 선전문구식 제목과 화려한 전면 컬러사진만 눈에 들어왔다. 보고서라면 무슨 활동을, 어떻게 해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으며, 아직 미진한 부분과 앞으로의 계획 정도는 담겨야 하지 않겠는가? 선량의 서비스 정신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굳이 홍보하고자 한다면 균형 있는 편집으로 형식과 실질을 함께 담을 수도 있으련만, 볼 테면 보고 말테면 말라는 식의 보고는 아니함만 못하지 않은가. 상품을 과대포장해서 쓰레기를 양산하는 상인의 행태보다 조금도 낫지 않은 정치인의 의식과 행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저서의 앞뒤 표지나, 표지의 날개(표지가 안으로 접혀진 부분) 등에 담은 말을 표사(表辭)라고 한다. 국어사전에 오른 표제어가 아닌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 전부터 쓰인 말은 아닌 양 싶다. 이 표사에는 저자가 책에 담은 내용 중에서 독자의 독서 욕구를 자극할 만한 구절이나, 내용의 일부를 발췌하여 싣는 것이 통례였다. 아니면 책에 함께 담긴 평설이나 발문 중에서 일부분을 담아내기도 한다.그러던 표사가 근래에는 저자의 저서 내용이나 평설이나 발문과는 상관없는 글들이 실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것도 사계의 권위자나 소위 언론에 이름이 잘 팔린 사람들의 이름 석자와 함께 촌평이 실린다. 그 촌평이 어느 지면에 어떤 내용으로 담겨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정보는 없다. 이 저자에 대하여 (유명인이) 이렇게 한 마디 했다는 것이 목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다 보니 표사의 내용은 당연히 찬사 일변도일 것은 뻔하다.그런 표사가 상업 목적이나 정치인이 노리는 과대선전의 한 방법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이 시인-작가들의 저서에 버젓이 실리는 것을 보는 것이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소위 정신력의 무게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자존의 힘으로 지탱해야 할 시인-작가들이 유명 인사의 홍보성 몇 마디로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룬 정신력의 무게를 대변하려는 과대포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과대포장은 상품이나 정치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허영의식이 만연하여 자원의 낭비와 쓰레기 양산이라는 무거운 짐에 우리 스스로 질식하지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다./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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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6.07 23:02

[새벽메아리] 고추밭에서 자라는 과학

환자의 몸에서 떼어낸 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황우석교수팀의 연구결과가 내 머릿속을 어수선하게 했다. 새벽 일찍부터 고추밭에 풀을 베 깔면서 내내 그 생각만 했다. 과연 이 연구 성과는 증기기관이나 방직기, 또는 종이의 발명만큼 획기적인 것일까? 비닐을 전혀 사용 안 하는 생태자연농법을 12년째 하고 있는 나는 풀을 키운다. 풀을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는 동반자로 보기 때문이다. 잡초는 토양에 산소공급을 할뿐더러 보습효과도 있다. 익충을 보호하여 해충방제에도 한 몫을 한다. 풀을 베어 덮으면 밭의 잡초는 더 못 자라게 되고 도리어 2모작 때 좋은 거름이 된다.제초제를 뿌리고 비닐로 땅의 숨구멍을 다 틀어막는 것을 나는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땅속의 미생물과 소 생물들을 죽이고 수자원을 오염시키며 땅을 산성으로 만드는 화학농법으로 건강한 생명의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참된 과학은 무엇일까?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키지 않고 하늘의 도리와 자연의 운행에 역행하지 않고서도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른 과학이지 않을까?황우석교수팀이 광우병에 안 걸리는 소를 만들었다. 모든 언론이 열광했다. 광우병이라는 병이 왜 생겼는가? 채식동물인 소에게 소고기와 양고기를 고단백 사료로 만들어 속성으로 사육하는 과정에서 생긴 병이 아닌가. 인간의 탐욕이 빚어 낸 천형이 광우병인데 병의 원인을 없애지는 않고 내성만 키운다면 소에게 무제한의 육식사료를 주겠다는 것인가.동네 앞개울을 깨끗이 낫으로 깎아 한 시간여 만에 트럭에 가득 풀을 실었다. 덤으로 돌미나리도 한 소쿠리나 뜯었다. 개울가에 버려져 있던 페트병이랑 깡통이랑 농약병, 비닐쓰레기도 한 자루나 수거했다. 이를 본 동네 할아버지가 장마철에 물 잘 빠져 좋겠다고 한마디 했다.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 일석사조 인 셈이다. 소홀히 할 수 없는 경제외적 가치들이다.황우석교수팀은 여성난자제공의 윤리문제가 거론되자 인조난자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수정란 자체를 생명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문제제기에 대한 황교수팀의 대응이다. 인조난자의 수정란은 생명이 아니란 말인가? 신발 벗고 방에 들어오라고 했더니 맨발로 돌아다니던 사람이 그냥 방에 들어가는 꼴이다. 연구팀원인 한 여교수는 자기의 가족이 난치병이라면 자기의 난자를 기꺼이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난자제공을 경계하는 것은 난치병자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간공장이 만들어져 국가동원체제하에서, 또는 상업적 목적으로 악용되는 끔찍한 가정에 대한 예방이고 주의인 것이다. 충분한 논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몇 년 전부터 제초제 저항성 잡초가 전국에 걸쳐 번지고 있다. 기존의 설포닐우레아계 제초제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독성이 강한 새로운 제초제를 개발하고 있다. 또 다른 재앙의 씨앗을 만드는 개발과 연구는 대응기술을 개발하느라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다. 애국주의와 성급한 난치병치료 기대에만 휩싸여 황교수팀에게 열광부터 한다면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이렇게 내 고추밭에서는 종일 과학이 만발했다./전희식(농부전주라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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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5.31 23:02

[새벽메아리] 문화 예술의 고향, 전북

오월이 왔습니다.아카시아 향기도 시들어지고 넝쿨 장미가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군요.오월 하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치는 게 5.18 민중항쟁이 떠오릅니다.보상도 거의 끝나가고 누구나 자랑스럽게 5.18을 말 할 수 있으나 아직도 그 시작이 어디며 끝은 어딘가, 진실은 죽은 자 의 몫으로 떠넘기기에는 너무 가까운 세월이라는 생각입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전북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전국 최하위를 맴도는 경제지수는 낙후 전북의 상황을 정치권에 질타를 하곤 합니다.과연 정치하는 사람들의 잘 못 일까요?과거 야당 할 때는 소외론, 여당 할 때는 배제론, 귀에 걸고 코에 걸어 민심이 아닌 표 심을 얻고자 도민의 마음에 상처도 주고 심리적으로 이용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전북 발전은 타 지역에 비해 예산을 많이 확보하고 경제가치를 창출할 공공기관, 기업 등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미래 지향적인 전북 발전은 바로 문화 예술의 고향을 고향답게 보전하고 만들어 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그래서 예술의 혼이 살아서 숨쉬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랫동안 머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얼마 전 유치에 성공한 태권도 공원은 세계인의 심신 수련과 관광의 명소로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태권도와 문화 예술의 만남이 중요하겠죠.다만 지금까지 전개를 봐서 심히 우려를 아니할 수 없습니다.몇 몇 인사 개인의 치적과 독단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저, 선사시대로 넘어가 고창 고인돌, 과연 세계문화유산을 얼마나 관심과 사랑을 보였느냐 의 반성을 제기합니다.인간 문화 발전은 이목구비 중 이의 귀, 소리의 역사는 위대한 인류의 자산입니다.우리 고장의 판소리, 얼마나 멋지고 장엄하며 예술적입니까눈물이 주르르 흐르도록 슬픔을 주었다가 기뻐 흥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게 하는 머릿속 깊이 숨어있는 혼을 밖으로 불러 내여 인간 삶을 충족시켜주는 마술이 판소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행사 끝나면 밥 먹고 집에 가서는 잊게 하는 연결과 기억, 생활 속에 예술이 살아있는 문화 연대가 없습니다.백제의 찬란한, 동학의 위대한, 전북의 멋진, 문화 예술이 전국은 물론 세계에서 으뜸가는 고장으로, 춘향의 매력이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다시 살아나 가슴 설레 이는, 남녀 청춘은 물론 노소 가릴 것 없이, 유형이 무형으로 돌아 무형이 유형을 낳고 유형이 무형을 창출시키게 하는, 문화 예술의 고향 전북을 살려나갑시다. /이윤영(전 정치개혁 전북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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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5.24 23:02

[새벽메아리] 밤이 아름다운 도시

1897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 인류역사상 가장 큰 문명의 이기(利器)는 전등이었다. 전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활동시간을 밤까지 연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되면서 전등의 역할은 어둠을 밝히는 1차적인 영역을 넘어 실내장식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나아가 조명 자체가 건축물의 한 부분이나 예술작품으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조명은 생활 속에서도 삶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으며, 상점의 조명에 따라 판매고가 달라진다 폐점후에도 쇼윈도 조명을 켜두면 다음날 매상이 오른다 라는 말이 일반화될 정도로 판매전략의 중요한 수단이 되고도 있다. 또한, 조명은 도시의 관광정책에서도 중요한 전략요소가 되고 있다. 최근, 도시의 경관조명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요소로 부각되면서 세계 주요도시에서는 야간경관 조성이 한창이다. 경관조명에 있어서 대표적인 도시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리옹시에서는 도시의 조명계획이 선거공약으로까지 내세워졌었다. 1989년, 미쉘누아루 시장은 공약대로 150개 건물과 교량에 조명기기를 설치하여 도시 전체를 화려한 조명 예술작품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이 조명계획은 컨벤션 산업과 연계되어 리옹시를 세계적인 관광국제회의도시로 급부상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리옹시는 역사깊은 도시,실크와 음식의 도시로서의 명성에 덧붙여 밤의 도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일본의 경우에도 1983년 오사카를 시작으로 요코하마(1986), 삿포로나고야(1988) 등 주요 도시에서 야간경관개선사업이 추진되었고, 1994년 교토에서는 수도지정 기념으로 도시의 역사 문화재를 대상으로 한 조명디자인계획을 수립하는 등 조명계획이 도시경관형성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다뤄져 왔다.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야간경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서울에서는 남대문을 비롯해 예술의 전당,포스코 본사 등 대형건물에 전문디자이너에 의해 계획된 옥외조명 설치를 유도하고 있으며, 부산에서는 부산대교와 광안대교, 용두산 공원타워 등을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하여 관광효과를 높이고 있다. 우리 도시에서도 올해 문화축제 기간 동안 빛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루미나리에를 설치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루미나리에의 경우에는 도시의 경관조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루미나리에의 일시적인 효과로 경관조명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이다. 더욱이,에너지 절약이나 경제 살리기와 같은 슬로건이 내걸린 현 사회 분위기속에서 경관조명에 욕심을 부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현 상태에서는 우리 도시에 경관조명을 한다고 갑자기 유럽의 도시처럼 한순간에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조명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변변치 않은 경우에는 그 효과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단시일 안에 효과를 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유명도시의 선례나 루미나리에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분명 도시 야간경관의 개선은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관광자원으로서의 효과가 크다. 이 때문에, 세계 선진도시들에서는 도시의 경관조명계획이 다른 개발사업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도시의 모습을 일신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자 고부가가치의 관광 상품으로 꼽고 있다.이러한 점에서 보면 우리 도시도 어쩌면 지금이 도시의 경관조명이 필요한 가장 적절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윤정란(전주시정발전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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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5.17 23:02

[새벽메아리] 시인의 글쓰기

대단한 독서가요 장서가였던 마오저뚱은책을 많이 읽을수록 어리석게 된다.고 독서의 의의를 폄하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표현한 강조어법으로 해석된다. 이는 인식에 대한 실천성을 중시한, 마오의 핵심사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실천성을 상실한 교조주의, 텍스트주의, 책벌레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말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공자도말로 할 수는 있어도 쓰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하여 실천이 따르지 않는 언어적 표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는말은 휘발성이 강한 음성언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성이 강하여 증거가 남는 문자언어에 비하여 음성언어가 지니는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람에 스쳐 사라지는 말은 할 수 있으나, 바위에 새겨 남는 글은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문사철(文史哲)을 비롯한 인간의 정신적 소산들이 문자로 기록된다. 그런 언어의 부림이 구체성을 지니지 못할 때 그 언어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실천궁행한 삶의 족적을 기록한 역사와 구체적 형상화를 생명으로 하는 문학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에 값하는 구체성을 요구한다. 심지어 철학마저도 형이상학적인 사유가 인간과 세계에 구체성으로 적용되었을 때 비로소 관념적 언어는 제 무게를 지닌다.근래 우리 사회는 언로에 있어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로 보인다. 일례로 민주제의 합의로 세운 국가 원수가 한 말씀(말씀은 겸양어도 공대어도말씀이다)이라도 할라치면 교수건 정치인이건 언론인이건 필설을 가진 자는 다 한마디씩 하려도 든다. 그것도 자기를 성찰한 겸손이 전제되거나, 전문성을 무기로 한 논거나,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제목부터 선동적이고, 내용에서는 안하무인격이며, 다분히 감정이 개입된 듯한 필봉을 두려움 없이 휘두른다. 독자-국민을 청맹과니로 알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건전한 비판이나 대안을 갖춘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국민의 삶에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이 미치는 구체적 정치행위인 대통령의 정책에 대하여 교조주의적이거나 택스트주의적인 책벌레의 실천성 없는 언사로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는 뜻이다. 교수의 이름으로, 혹은 작가의 이름으로, 또는 언론인의 이름으로. 그것은 여론을 빙자한 자기도취이거나 혹세무민일 뿐이다.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詩人)이라고 한다. 시인이 쓴 문자로서의 시가, 시인이 지닌 사람됨의 품격과 일치하여 실천적 구체성을 지닐 때 시(詩)도 인(人)도 비로소 제 값을 지니게 된다. 시인되기를 열망할지라도, 참다운 시인되기는 두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미학적 고담준론의 시를 쓴 천박한 속물 시인이나, 훌륭한 인격자라도 미학적으로 설익은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모든 필자들이 시인된 마음가짐으로 글을 쓴다면, 우리 사회의 언로가 조금은 더 공동체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을 향한 필설만이 아니다. 글과 사람됨이 일치된 실천성을 지닌 글은 독자를 정신적-현실적으로 고양시킨다./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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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5.10 23:02

[새벽메아리] 자식대하듯 곡식 키워

요즘 아무리 바빠도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것이 있다. 모종이 자라고 있는 포트에 아침저녁으로 물주는 일이다. 몇 주 전 씨앗을 넣을 당시에는 새벽 공기가 아주 차서 마당 옆에 죽 깔아 논 포트를 비닐로 덮고 옆을 눌러 주었는데 지금은 싹이 다 나서 벗겨냈다. 자연생태농법에서는 비닐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고 새싹 틔울 때만 비닐을 잠시 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날 심었어도 싹이 돋는 날은 같지가 않고 모양도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다른 종자끼리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같은 종자끼리도 많이 차이가 난다. 한 부모에게서 난 자식도 서로 딴판인 것을 보는 듯하다.호박씨는 항상 껍질을 뒤집어쓰고 싹이 난다. 호박씨 껍질이 먼저 땅을 뚫고 올라오는데 그 속에 새싹이 숨어있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속담의 유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껍질을 뒤집어쓰고 새싹이 돋는 호박씨의 속성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옥수수는 젓가락 끝처럼 뾰족하게 돋는다. 옥수수가 주식인 남미사람들의 성격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혼자 궁금증이 인다. 오이와 수세미가 제일 늦게 나온다. 가지와 토마토는 떡잎이 날 때쯤 돼야 구별이 가능하다.사람도 어릴 때 버릇이 잘 들고 건강해야 자라서도 행실이 바르고 잔병치레를 안 하듯이 곡식도 잘 되려면 모종을 부을 때부터 잘 해야 한다. 씨앗을 목초액에 침종하는 것과 좋은 상토를 쓰는 것이 그것이다. 상토는 물 빠짐이 좋을뿐더러 철저히 무균상태여야 한다. 풀씨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거름기는 많지 않아도 된다. 씨앗 속에 싹을 틔울 만큼의 영양분이 있기 때문이다. 거름기가 너무 많으면 미생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씨앗이 삭아버리기도 한다. 애를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물러터지는 것과 어쩌면 그렇게 꼭 같은지 모른다. 애는 밖에다 풀어 키우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올해는 처음으로 상토를 직접 만들었다. 시중에서 파는 상토도 좋지만 약으로 소독한 것이라 직접 만드는 것만 못한 것은 당연하다. 날씨가 아주 좋았던 어느 날 마대 여러 개를 챙겨 리어카를 산기슭까지 끌어다 놓고 부엽토를 파 왔다. 낙엽이 많이 쌓인 곳 땅을 30센티 정도 파고 퍼 온 것이다. 집에 와서는 이것을 체로 쳐서 걸러내고 발효퇴비를 넣고 모래와 숯을 섞어 만들었다. 숯은 겨우내 아궁이에 장작 때고 잉걸불을 꺼 모아 둔 것이 많이 있었다.삼일에 한번 정도는 물에 목초액을 섞어 모판에 뿌려준다. 그래야 싹이 건강해진다. 자식을 공부만 시킬게 아니라 일도 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종 키울 때 나만의 독특한 농사법이 하나 더 있다. 자식 대하듯이 새싹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물을 주면서 잘 자라라고 기도를 한다. 장차 내 생명이 될 곡식에 대한 최소한의 공경이라 여기면서./전희식(농부전주라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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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5.03 23:02

[새벽메아리] 동학의 함성이 들리는가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봄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자.일본은 제 3차 한반도 침략을 독도를 기점으로 다시 불을 댕기고 있다.임진년, 갑오년, 을유년 그들의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불멸의 이순신.. 녹두장군 전봉준.. 거북선과 죽창이 시퍼런 피를 흘리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미국의 국제적인 전략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강대국 사이에 있는 대한민국은 눈치만 보다간 우방과 적국의 혼돈 속에 돌이킬 수 없는 우를 범할 수 있다.진정 우방은 누구이며 적국은 누구인가?유럽연합이 탄생된 계기가 무엇인가.. 바로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고 세계의 평화를 갈망하는 일원과 경제속국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한다.미국이라는 군사 경제 초강대국과 일본의 합세는 지구촌 식민지 전술로 나타난다.중국과 유럽연합의 비약적 발전만이 유일한 선택인가?그건 아니다.북한의 핵 개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남한을 고립시키고 체제유지를 위한 최후의 발악인가?강대국에 예속되지 않고 자주 독립국가의 기틀은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지만 대한은 미안하지만 핵 개발일 수도 있다.그러나 전쟁이란 극단적인 비극이 몰고 올 위험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한반도 상황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침략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무관한 것만은 아니다.국제정세는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다.오늘날 동학을 다시 생각 안 할 수 없다.전쟁이 아닌 평화를 염두에 두고 남북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한다.남북이 계속 분열되고 따로 논다면 일본과 중국에게 미소를 던져주고, 미국이 한반도 전쟁을 주도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보국안민의 계책이 나와야 된다.해월선생과 녹두장군이 머리를 맞대고 동학혁명을 상의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북이 손을 잡고 평화통일을 논의한다면 동북아 평화는 물론 일본의 군사대국 길을 막을 수 있으며 미국도 평등적인 새 파트너의 우방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핵 개발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이 전부는 아니다.위험한 외줄 타기보다는 안전한 협력을 통해 국민의 생활을 보호해야 한다.6.15 남북 선언이 우리의 생명이요 등불이라 생각한다.인내천 사인여천 사상은 3.8선을 넘어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백두산 천지에 둥지를 틀 것이다. 동학의 함성이 거북선 죽창을 타고 무궁화 꽃을 피웠으면 한다.올해를 남북 공존과 세계평화의 해로 만들어가자. /이윤영(전 정치개혁 전북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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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4.26 23:02

[새벽메아리]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하늘

천조자조자(天助自助者)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이 경구들은 언어는 달라도 모두 목표를 정하여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좌우명으로 새겨지고 있다. 옛 선비들에게도 중용(中庸)의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성실함은 하늘의 도요, 성실하게 노력함은 사람의 도이다)는 신념이자 삶의 지침이었다. 갑자기 한자에 영어까지 써가며 새삼스레 경구의 의미를 들먹거리는 것이 요샛말로 조금은 쌩뚱 맞은지도 모르겠지만, 애써 중용까지 빌어 선인들의 신념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요즘 우리 사회에 팽배해져 버린 방관자적 풍조와 여기에 묻혀 사라지고 있는 자생적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전주시의 도심 거리에는 걷고 싶은 거리, 영화의 거리, 차이나거리, 약전거리, 웨딩거리, 공구거리와 같은 이름들이 붙어 있다. 이 중에는 행정에서 인위적으로 거리를 정비하고 붙인 이름도 있고, 하나둘 유사업종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도 있다. 이름이 자생적인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어울리기만 한다면야 별 차이 없는 일이겠지만, 자생거리와 그렇지 않은 거리에서 배어 나오는 느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가끔씩 거리를 걷다보면 잘 정비되지 않아 허름한 모습인데도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막대한 예산으로 말쑥하게 치장되었는데도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나는 자생이란 단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명 자생거리라고 불리는 거리에는 오랜 세월 자신들의 거리를 살리려고 애써 온 상인들의 마음과 노력이 배어 있다. 그리고, 그런 마음과 노력이 모여 강한 생명력을 발산시키고, 재생의 잠재력과 활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하지만, 후자의 거리에는 이런 느낌이 없다. 오히려, 사과나무아래서 입 벌리고 있듯 행정에 대한 의타심만을 키워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마저 있다. 이는 비단 도심 거리에서의 현상만은 아니다. 때때로 자신들의 마을을 정비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그저 바라만보고 있는 주민들을 볼 때가 많다. 그러나, 주민참여 없이 만들어지는 계획이란 오류가 발생되기 십상이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기란 만무하다보니, 사업이 끝난 뒤에서야 주민들은 불평을 늘어놓거나 책임소지를 따지기에 바쁘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냐를 떠나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에게 남게 된다. 결국, 자신의 방관자적 태도가 스스로에게 피해를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최근, 도시계획분야에서는 건축협정제라는 용어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건축협정제는 주민들이 스스로 협정을 만들어 자신들의 동네에 유흥주점이나 룸살롱, 고층건물, 나홀로아파트 등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거나 마을 경관을 가꾸기 위해 지붕의 형태나 색깔, 간판 등에 대해 자율적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도시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되어 지금은 정착단계에 이르고 있다.건축협정제의 도입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많지만, 이 제도의 취지처럼 이제 우리사회도 행정주도의 도시계획에서 벗어나 주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도시계획의 시대로 바뀌어 가야 한다는 점은 공감되고 있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주민들은 자신의 마을과 도시를 가꾸는데 더 이상 방관의 자세를 고수해서는 안 되며, 행정 또한 이제는 주인을 제쳐두고 앞장서거나 방관하고 있는 이들의 등을 떠밀면서까지 사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행정이 두 손 놓고 있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행정은 주도가 아닌 지원의 자세로 전환하여 언제라도 주민들을 도울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춰두어야 한다.이와 같은 역할 바꾸기가 정착된다면 우리의 도시는 선진도시로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에는 노력하는 자들이 성공하는 성숙된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윤정란(전주시정발전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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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4.19 23:02

[새벽메아리] 서정시의 위기

요즈음에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가까운 지인이 그렇게 반문했다. 요즈음에는 무슨 책을 읽으며, 혹시 그 독서목록 중에 시집이 들어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하여 돌아오는 반문이었다. 요즘 같은 산문의 시대, 비서정의 시대에 시를 읽는 사람을 기대하다니그래도 어찌할 것인가? 사람들의 성정이 메말라 갈수록 시문학은 서정성의 공급처요, 시대가 한사코 건조하게 변질되어 갈수록 시는 더욱 필요한 수분의 공급처인 것을.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부족하기 쉬운 2%의 무엇인가를 공급해 주는 어떤 것이다. 그 <무엇>이 바로 사람의 사람다운 성정이요, 그 <어떤>이 당대에 결핍되기 쉬운 시대정신이다. 서정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성의 눈을 뜨도록 자극함으로써 슬픔을 슬퍼할 줄 알게 하고, 물성화 되어 가는 시대에 올곧은 정신력을 충전시킴으로써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의 가슴에는 따뜻한 강물을, 시대의 머리에는 냉철한 핏줄을 흐르게 하지 않았던가? 시가, 서정시가!서정시는 본질적으로 비극적 정감에 가깝다. 드러내놓고 울릴 수 없는 감성의 현을 건드려 훈훈한 성정의 모닥불을 피우게 하거나, 비극적 세계 인식의 중심에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심미적 정신력을 고양시킨다. 그 서정시의 생존이 위기에 처하는 시대는 정상적인 시대가 아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바람직한 시대상은 아니다.분주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달리는 말에 채찍이 아니다. 문자를 지닌 매체들이 한사코 정치적 수사와 경제적 당위성을 들어 주마가편(走馬加鞭) 격으로 채근할지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쉼표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대다. 그 여유롭고 평화로운 온음의 쉼표가 바로 서정시다.서정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치열성을 내재하고 있는 무위(無爲)의 정신과 닮았다. 중국의 지성 왕멍(王蒙)은 무위의 정신에서 시정신을 찾고 있다.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무익(無益)하고, 무효(無效)하고, 무취(無趣)하고, 무료(無聊)한 일, 더구나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 효율의 원칙이요 양생의 원칙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예술이요, 일정한 경지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자존이요, 사회와 역사에 대처하는 인내요 총명이다. 이 무위의 정신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합당한 매체가 바로 서정시다.그 서정의 힘으로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서정시는 더 이상 나약한 감성이나 근거 없는 지성의 넋두리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시인일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무위의 정신으로 4무(왕멍)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술책을 부리지 않는 무술(無述), 모략하지 않는 무모(無謀), 이름을 좇지 않는 무명(無名), 공을 세우려 안달하지 않는 무공(無功)을 최고 최선으로 삼는 삶, 바로 서정시의 세계다. 현실 속에서 보통사람 모두 시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일 수 없다. 다만 사무(四無)의 정신을 외면하는 시대풍속이 서정시의 생존을 어렵게 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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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4.12 23:02

[새벽메아리] 부끄러운 전북 평등도민

한 사람이 죽었다. 70평생을 살아 온 마을 앞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자동차에 깔려 죽었다. 원래 이 길은 소 구루마가 다니고 경운기가 다니던 정겨운 농로였는데 4차선 도로로 바뀐 뒤 주민 몇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더니 급기야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바야흐로 전 국토가 갈가리 찢기고 농토는 뭉개지고 그 위로 죽음의 잿빛 콘크리트들이 덮이고 있다. 새로 만들어진 도로는 개통하기가 무섭게 차량들로 가득 차버린다.대한민국의 국체는 성장과 건설이다. 국호도 바꿔야 할 판이다. 대한토목건설 공화국이 제격이다. 공화국이라 하기에도 낯 뜨겁다. 공사가 끊일 날이 없다. 오늘 신문에는 내가 사는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 대규모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기사가 났다. 오래전부터 용진면 석산개발로 몸살은 앓고 있는 완주군이 또 일을 저지르나보다. 완주군 뿐이 아니다. 진안군도 운일암 반일암에 골프장은 유치한다고 한다. 오는 21일 기공식을 하는 경주마 목장 건설로 장수군은 육십령 일대를 다 파헤치고 있으며 무주군은 태권도 공원 유치로 들떠있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임을 내세워 갖은 축제로 도시민 호객행위를 하는 무.진.장 지역은 다른 한편으로 청정지역을 파괴하는 개발에도 열심이니 뭐가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덕분에 백두대간 보호법은 여태 표류중이다.단언하건데 강현욱지사 체제 이후에 노골화 되어 온 개발과 성장이라는 미신이 전라북도를 뒤덮고 있다. 강한전북 일등도민은 경쟁의 논리요 시장의 논리다. 경쟁의 기재는 기본적으로 두려움과 불신이다. 불신과 두려움으로 일궈 낼 미래는 없다.실직하지는 않을까. 굶지는 않을까. 노후가 안전할까. 병들면 제대로 치료는 받을까. 한데 잠을 자는 일은 없을까. 내 호주머니 외에 믿을 게 아무것도 없다. 지역홀대 당했다 등등. 강한 것은 차고 딱딱하다. 차고 딱딱한 것은 죽은 것이다. 생명체는 따뜻하고 부드럽다.우리에게 경제성장은 사회발전의 공통된 믿음으로 되어있다. 이를 철저히 부정한 경제학자 ?더그러스 러미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경제성장을 비판했다. 침몰을 통해서만 겨우 무한 질주를 그치게 되는 타이타닉의 비극은 멀리 있지 않다. 놀랍게도 저자는 지금이 100년 전보다 절대빈곤이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들추어내고 있다. 오늘자 같은 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또 하나 있었다. 전라북도가 새 도청 청사에 사무집기를 모두 새것으로 들여 놓는다는 기사였다. 사용연한이 남은 책걸상 등 사무집기를 17억이나 들여 다 바꾼다는 것이다. 서민들이 알아야 할 진실이 있다. 성장과 개발로 아무리 파이가 커져도 나누어지는 조각은 절대 커지는 법이 없다. 이는 만고의 진리다. 자본이 지배하고 그 주변세력과 종속집단이 판치는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실패한 정치가 김구선생의 목소리가 새삼 그립다. 부강한 나라가 싫다. 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백범일지를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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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4.05 23:02

[새벽메아리] 역사의 라이벌

역사의 라이벌 하면 왕건과 궁예, 이성계와 최영 장군이 대표적으로 떠오르지만 라이벌이 최대의 협력자가 된 왕건과 견훤도 있고 이방원은 라이벌인 정도전을 죽이지만 결국 정도전의 구상이 조선조의 이념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의 틀을 유지시키는 승자와 패자의 위치가 바뀌는 경향도 있다.근대사를 보면 이승만과 김구, 박정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왕건이나 이성계 같은 역사의 중심인물로 다가온다.만약 김구 선생이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어땠을까?물론 역사란 가정이 없다.그러나 교훈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부정해서는 아니 된다.독도와 북 핵 문제에 부힌 우리나라에서는 김구선생의 이념과 정치실천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국민과 함께 해야 된다.역사의 라이벌은 라이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운명을 좌우한다.지금 박정희 식 개발독재가 통하는 시대도 아니고 김대중 식 남북 평화 공존과 국가경영차원의 경제발전이 인정받는 평등 지향적인 글로벌 정치이념의 시대이다.배고픈 시대의 군홧발을 그리워하는 것은 역사의 퇴보요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후진성을 붙잡는 결과와 같다.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차기 정권이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다.현재는 여당인 열린우리당 라이벌은 김근태와 정동영이다.그리고 야당인 한나라당은 박근혜와 이명박이다.여야의 대표주자가 본선라이벌이 되겠지만 과연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역사가 발전되고 세계 속에 한국을 자랑스럽게 이끌어 갈 것인가?다시 말하지만 개발독재도 아니고 인기 순인 이미지 정치나 논할 그런 상황도 아니다.남북관계를 슬기롭게 해결하며 국제적인 지도자로서 도덕성과 참신성 그리고 거시적인 통찰력과 갈등조정능력의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민주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할 인물이 필요하다.해방 후 김구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 다음으로 역사적인 대통령이 한 분 더 나왔으면 좋겠다.그래야만 남과 북의 진정한 라이벌이자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으며 국제적인 라이벌의 일본을 견제하고 결국 승리하는, 불멸의 이순신을 능가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영광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지방자치시대를 열어 가는 우리 고장도 도지사 시장 군수를 뽑을 때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지방과 국가발전의 인물을 선택하였으면 한다.지금 거론되는 도지사나 시장 인물 중에 행정가와 기존 정치인들이 과열 경쟁 속에 눈살을 찌풀이게 하는 경향이 많은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참신한 시민운동가들도 인정받고 경쟁 대열에 동참시켜 새로운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으면 한다./이윤영(전 정치개혁 전북시민운동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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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3.29 23:02

[새벽메아리] 간판이 도시의 얼굴이다

낯선 도시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 곳을 회상할 때 처음 떠올리게 되는 영상은 역을 빠져나와 눈앞에 펼쳐졌던 거리의 풍경이나 번화한 상점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들은 오랫동안 그 도시의 이미지로 남겨진다.이것은 외지인들이 전주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주역에 내려 처음 접하게 되는 영상은 곧게 뻗은 백제로와 그 주변에 늘어선 건물들, 그리고 빼곡하게 들어찬 간판일 것이다. 만일 방문시간이 밤이라면 현란한 네온으로 번쩍거리고 있는 간판은 그 어느 것보다 먼저 시야로 들어오는 것이며 이것은 전주의 첫 번째 영상이 될 것이다. 기차역을 이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면서 울긋불긋한 간판들이 빼곡한 거리의 모습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이것은 전주를 아름답지 못한 도시라고 낙인찍는데 빌미로 제공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도시하면 유럽의 도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왜 아름다운지에 대해 건물의 형태나 거리의 전경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속에는 간판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상점가에는 크지도 않고, 튀지도 않는 마치 처음부터 건물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간판들이 있다. 그 덕분인지 거리를 걸을 때 간판보다는 거리의 전경이 먼저 시야로 들어오고, 건축물의 형태도 한눈에 알아 볼 수가 있다. 어떤 간판들은 그 자체가 예술작품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다고 이들의 간판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치밀한 상술에 의해 간판이 설치된다. 일례로, 외국의 한 도시에서는 간판정비에 앞서 이용자의 시각에서 간판이 가장 잘 인지되는 위치와 크기를 먼저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저층부에 조그맣고 아름다운 간판들을 부착하였다.일본의 대표적인 전통간판 포렴(布簾)은 비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물건을 조금 사는 사람도 부끄럽지 않게 얼굴을 가려주는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포렴은 간판이라기보다는 손님에 대한 주인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건물주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간판을 달거나 떼지도 않는다고 한다. 간판이 가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거리, 나아가 도시 전체의 이미지와 관계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의 간판 속에서는 손님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거리의 이미지조차 찾아보기 어렵다.왜 우리의 거리에서는 간판들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이는 간판에 대한 오해 탓이 아닌가 싶다.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간판을 마치 부적처럼 여긴다. 간판이 좋아야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업종이 뭐든 간에 주인들이 선호하는 간판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게 문제다. 어디에서 보더라도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크기와 색깔, 선정적인 상호, 여기에 화려한 네온까지 덧붙여진 간판이 상가의 전면을 다 채워져야 만이 주인은 안심을 한다. 이렇다 보니 벽, 창문 할 것 없이 가능한 자리에는 모두 간판이 부착되어 건물의 형태나 재질은 알아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간판의 반 이상은 원색이다 보니 주택가의 거리마저 유흥가를 방불케 한다.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법에서 간판의 설치를 제한하고 있고, 지자체마다 불법 간판들에 대한 철거전쟁을 선포하기도 하고 대대적인 간판정비사업을 추진해오고도 있다. 하지만 그 성과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이는 간판정비가 광고주의 자율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이제 머지않아 전주한옥마을의 간판들이 정비된다고 한다. 단아한 한옥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간판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었는데 새롭게 단장된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저 깔끔하기만 간판이 일률적으로 매달리는 건 아닌지 혹여 아름답다고 외국의 간판들이 그대로 모방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앞선다. 똑같은 간판은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매력 없을 게 분명하고, 예쁘다고 남의 얼굴을 가져와 우리 얼굴로 삼을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판정비에 앞서 외국의 간판 속에 숨겨진 배려의 마음과 합리적인 상술만은 배우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우리에게도 우리 도시의 얼굴이 될 간판들이 생겨나길 바란다./윤정란(전주시정발전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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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3.22 23:02

[새벽메아리] 시비(詩碑) 시비(是非)

시비(詩碑)에 대하여 할 말[是非]이 있다. 금년 초에, 출향한 원로 시인의 시비(詩碑)를 세우겠으니 전북문협에서 후원하고 전주시에서는 부지를 제공해 달라는 안건이 전북문협의 정기총회에 상정 되었다. 평생을 시문학에 바친 원로 시인의 시비를 시인의 제자와 후학들이 자비를 드려 세우겠으니 문협과 시에서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자기선전의 성격이 농후한 홍보성 선전막-선전탑은 도처에 걸리고 세워지거늘, 그것도 시군의 공적예산을 투입하여 제작되는 것이 다반사이거늘, 한 시인의 문학성을 기릴 수 있는 시비 하나 세우는 일이 이처럼 버거워서야 되겠는가 생각하였다.절차로 따지자면, 본인이나 제자들이 나서기 전에 지자체나 문협에서 자발적으로 시비를 세우겠다고 나서야 도리에 맞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 본인의 문학성을 기리는 일일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산을 지역사회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나, 지역사회에 문화-예술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전주에는 몇 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덕진공원이나 다가공원 등에 몇 기의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문화도시요 예향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빈약한 모습이다. 전북문협에 등록된 문인들이 600명에 달하며, 그 중에 시인이 300명에 가깝다. 출향한 문인이나 시인들을 망라한다면 그 수는 더 불어날 것이다.세상에는 많고 커봐야 별로 좋을 것이 없는 경우도 있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도 있다. 거리를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는 각종 원색의 간판이나 계몽과 자기 홍보성 선전물들은 크고 많아야 좋을 것이 별로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시문학은 모든 문화-예술의 원천적 질료가 되는 장르다. 그런 시와 시정신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많을수록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어느 지자체에서는 막대한 자체 예산을 투입하여 시비-조각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로 하여금 대표작을 시비로 제작하는 데 공적예산을 지원하거나, 조각가들의 작품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구입전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시비공원이나 조각공원에 가보면 자연 경관이 주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시나 조각 작품의 조형미가 주는 아름다움이 그 도시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한다. 그런 미감이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하여 나그네의 발길을 의미 깊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비가시적 성과를 경제적 생산효과로만 재단하여 폄하할 수는 없다.그렇다고 해서 정선되지 않은 시비나 조각 작품이 무분별하게 세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차제에 <시비건립심의위원회(가칭)> 같은 기구를 발족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시인을 대표하는 전북문인협회와 미술계의 대표가 참여하고, 누구보다도 전라북도와 각 시군의 문화예술 담당자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깊이 있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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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3.15 23:02

[새벽메아리] 농업고등학교 간 딸아이

올해 고등학생이 되는 딸아이랑 지난달에 신입생 학부모 연수를 1박2일 다녀왔는데 그때 보고 듣고 한 감동이 여태 계속되고 있다.농업고등학교라 구석진 시골에 학교가 있었다. 농업고등학교가 시골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감동 먹을 일도 아니다. 감동은 엉뚱한데서 시작되었다. 입구에서 학부모를 안내하는 재학생들이 인사를 하는데 맑았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이놈들아 맑긴 뭐가 맑아? 날이 흐렸구먼. 이라고 했더니 자기들은 인사를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럼 저녁인사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고요합니다.라고 알려주었다.생각할수록 인사말이 기특(?)했다.맑고 고요하게 살아가라는 말일까? 세상은 본래 맑고 고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일까? 날씨는 갰다 궂었다 해도 마음은 늘 맑게 닦으라는 가르침인가? 그 학교의 독특한 인사법은 시작에 불과했다. 학부모연수가 진행되는 1박2일 동안 이와 유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노래를 배우는 시간에 꼴찌가 되라는 노래를 불렀다. 어설픈 1등보다는 당당한 꼴찌가 되라고 했다. 교장선생님은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지 말고 그냥 평민이 되라고 했다. 보통사람이 되라는 말인데, 오래전 군사정권의 대통령이 자신의 쿠데타경력을 감추기 위해 사용했던 기억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학생들에게 상식을 알고 예의를 갖춘 그냥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한 그 교장선생님은 정작 보통교장같아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이랑 뒤섞여 책걸상도 나르고 식판을 닦고 녹차를 탔다. 교장실도 따로 없고 교무실에 다른 선생님들 책상과 같이 교장책상이 있었다. 개교 50주년을 맞는 학교의 역사와 전통이 굴절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보는 듯 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한 가정씩 나와서 인사를 할 때도 순서가 독특했다. 자료집에는 1번부터 26번까지 기록되어 있었지만 나오는 순서는 앞에서 한사람 뒤에서 한사람씩 나오게 했다. 학교가 내세우는 무두무미(無頭無尾)라는 교육이념이 떠올랐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대표가 참석한다고 한다. 하룻밤을 자고나서 딸아이에게 물어봤다. 아빠는 학교가 마음에 드는데 너는 어떠냐고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실망했어요. 너무 절망적이에요.라는 게 아닌가. 이 학교를 가고 싶다고 해서 입학시켰는데 절망적이라니? 여자(!)에게 또 배신을 당하는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애들이 실상사작은학교가 뭔지도 모르고 이우학교를 아는 애도 하나밖에 없어요.라는 게 딸아이 절망의 수준이었다. 아빠의 수준을 비웃는 순간이었다. /전희식(농부전주라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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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3.08 23:02

[새벽메아리] 태권도공원, 세계무술성지로

전북 무주에 태권도공원이 유치되었다는 현실은 지금도 기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전북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태권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치에 공이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우리는 흔히 '태권도' 하면 동네 태권도장을 연상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태권도는 현재 세계 150여 개국에 전파되어 우리말 구령 속에 하얀 도복을 입고 한국의 얼과 정신을 심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종교인들이 그 종교 성지를 연상하듯 지구촌 태권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외국 태권도인에게 실망감만 안겨주는 이렇다할 성지개념의 공원이 없었던 차 국책사업으로 무주에 태권도 공원 건설은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체면을 세워주고 제2의 세계화 작업에 큰 도움을 줄 걸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관광부의 원래 계획했던 안이 아니고 대폭 축소한 설계도는 큰 실망감을 안겨준다. 다행이 재검토한다는 소식은 세계를 정복한 한국무술 태권도 위업에 걸 맞는 조치라 생각한다. 필자는 전북 무주에 태권도 공원 진척 상황을 보면서 태권도전문가 입장에서 우려를 금할 없다. 정치인들은 관광개발에 초점이 모아지고 체육인들은 근시안적 사고로 제 2의 전주월드컵경기장이 자꾸 연상된다. 무주 태권도공원이 유령공원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한다. 첫째 : 태권도 공원은 태권도 공원다워야 한다. 태권도 성지로서 세계 태권도인들이 순례하고 배우는 정신문화가치 창출에 신경을 써야한다. 그럼 무엇으로 성지다운 정신을 심어야 하겠는가? 바로 서울에 있는 국기원을 이전하고 국기원 업무를 이관하여야한다. 한국 태권도 성지는 규모는 작지만 명실상부한 '국기원'이다. 한국과 세계 태권도 총본부이자 메카역할을 하였던 국기원은 반드시 무주로 와야한다. 둘째 : 무주 태권도 공원은 태권도인들만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태권도를 중심으로 한국무술을 총 망라한 종합시스템이 가동되어야 한다. 외국에서 크게 성공한 태권도를 보면 말이 태권도지 종합무술성격을 띄고 있다. 중국의 예를 들더라도 '우슈'는 무술이라는 말로 중국무술의 수만은 종파를 '우슈'이름으로 통합해버렸다. 태권도는 한국무술과 세계무술 중 우수성과 교류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면에서 모든 무술인의 성지로 발전해야한다. 셋째 : 태권도 성지와 관광의 이원적인 차원을 하나로 통합하며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광이 우선이면 태권도공원은 망치고 만다. 성지차원에 조심스럽게 관광을 접근해야만 태권도 정신도 살리고 문화관광도 성공할 수 있다. 아무쪼록 지면상 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으나 제발 부탁이지만 정치논리로 풀지 말고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태권도 지도자의 자문과 세계 무술 적인 차원에서 천년대계의 태권도 성지공원이 세워지길 바란다. /이윤영(전 정치개혁전북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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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3.01 23:02

[새벽메아리] 진화하는 전통

우리는전통이라는 말에 연쇄반응 하듯 보존 혹은 복원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고집스러울 만큼 형태복원에 매달린다. 이는 지금껏 우리가 지녀온 전통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여느 도시 못지않게 전통도시로서의 이미지가 중시되고 있는 우리 고장에서는 조그만 사업조차도 이러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몇 해 전 입담 좋은 한 도시계획가는 그의 저서에서 전통이 화석이 되어버리면 맛이 덜하다. 이것이 옛 모습 그대로의 복원만이 능사가 아닌 이유이다, 가장 강력한 전통은 옛 모습 그대로보다도 오히려 현재 우리 곁에 끈끈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라면서, 신식 동네에서 전통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진화되어온 동네를 소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가 소개한 곳은 전주한옥마을이었다. 전주성의 성곽이 허물어지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한옥마을에는 방 두 칸이 앞뒤로 들어간 겹집에 부엌을 집안으로 들여 공간 활용도를 높인 신식 한옥주택들이 건립되었다. 새롭게 건립된 개량한옥들은 당시로서는 주거문화를 선도하는 최신식의 주거양식이었고, 한옥마을은 이러한 신식 주택들이 즐비한 고급주택가였다. 하지만, 한옥보존지구 지정과 같은 박제식 보존정책이 추진되면서 동네의 진화는 제한되었고, 한옥마을내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인 정비조차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민선자치단체의 출범이후 박제식 보존정책이 주민의 삶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전통한옥에서 진화한 도시한옥-도시한옥은 1900년대 초반에 도시의 협소한 대지여건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대응하고, 새로운 건축 재료와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개량한옥이다- 이 보존가치를 인정받게 되면서 동네는 다시 진화의 활기를 띄고 있다.이와 같은 한옥마을의 일대기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단 신식 주택들을 자랑하던 동네가 전통주거문화를 대표하는 동네로 변화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라. 한 동네를, 마을을, 나아가 도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전통이며, 전통은 화석처럼 굳어버린 것이 아닌 우리 곁에서 숨 쉬며 진화하는 전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은 이러한 선례를 앞에 두고도 전통을 진화시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잊는다. 오히려,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회귀하여 그릇된 판단을 할 때도 있다.지난 한 해, 전라북도청사의 이전이 가시화되면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도청사 이전부지의 활용논의 역시 그러했다. 공공기관을 이전하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도심부에 남겨질 이전부지가 비단 이곳만이 아닌데도, 전통의 보존과 개발이라는 개념이 부각되면서 유난히도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고, 대립되는 논의 속에서 합의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전통의 해석과 계승방법에 대한 편협된 관념이 자유로운 논의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우리의 도시가 전통의 도시로, 성장하는 도시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전통을 어떻게 진화시켜나가야 할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통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고, 전통을 진화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번 똑같은 과오로 인해 뒷걸음치는 도시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윤정란(전주시정발전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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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2.22 23:02

[새벽메아리] 귀성, 그 자유의 실습

올 설날이 지나갔다. 민족의 대이동이 막을 내리고 있다. 극심했던 교통체증도 길어진 연휴로 분산되어 예년보다 덜하다고 한다. 그래도 누가 오라고 강요하지도 않은 고향을 고생을 무릅쓰고 찾아온다. 여느 통행 시간보다 두 세배, 열 몇 시간씩 품을 들여가며 한사코 고향으로, 어버이의 품으로 찾아든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귀성객들의 귀향행렬과 그 과정에서 겪는 불편을 귀동냥해보면 수행승들의 고행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명절날 귀성 수행자들이 고향을 찾아와서 행하는 중요한 절차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차례와 성묘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다하기 위하여 그 먼 길 고통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가 하나로 귀일하는 때가 바로 설날과 추석 명절이다. 산 사람들에게 가장 즐거운 잔칫날이 곧 죽은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명절이 되는 셈이다.인간에게 있어 가장 인간다운 징표는 자유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이 자유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다다익선을 가치로 여기는 재화의 획득이나, 높은 성취를 지선으로 치부하는 명예와 지위들이 궁극적으로는 현세적인 자유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다.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자유를 위하여 그처럼 얻으려 애를 쓰는 현세적인 개념들과 가치들이 실현되면 될 수록 그것들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여 꺼져가는 생명의 촛불을 연명하는 환자들에게 산소통의 산소가 자유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죽음을 몸에 익히는 것은 자유를 실습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지 않는 방식을 배운 셈이다라고 지적한 사람은 몽테뉴다.그럼으로 참자유의 실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 자유로운 삶은 현세적인 성취나 성공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부자유스러운 욕망을 자유로 착각하는 망상을 떨쳐내는 데 있다.마음이라는 코끼리를/ 온갖 방면으로 주의해서 끌고 간다면/ 모든 공포는 사라지고/ 완전한 행복이 찾아오게 된다/온갖 공포와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M.매틱스「깨달음의 길에 들어가다」)차례와 성묘를 위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고행마저도 서슴지 않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자유를 실습하는 사람들이다. 산 사람들이 행하는 선인들을 위한 도리와 예절은 곧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익히는 학습이요, 그것은 곧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실습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가 곧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이 아닌가? 어찌 고행을 마다 할 것인가!/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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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2.15 23:02

[새벽메아리] '갑'과 '을'이 평등한 사회

최근 맡게 된 작업 일정이 너무 빠듯하여 일부는 외주를 주기로 했다. 간부회의에서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프리젠테이션에 참가하는 모든 업체들에게 경비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산규모도 정식으로 밝혔다. 이러한 내용을 제안요청서에 담아 업체들에게 발송했다. 참가비 지급을 결정했기에 대상 업체 선정에 신중했고 접수된 제안서를 놓고도 프리젠테이션을 요청할 업체를 엄선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않았고 제안서도 1부만 보내게 해서 필요한 수량은 우리가 복사했다.이렇게 한 것은 최근 몇 년간 겪은 너무도 불합리한 기업풍토. 갑과 을의 부당한 권력관계 때문이다.올 초 익산의 어느 양조회사는 우리회사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를 각각 불렀다. 두 차례나 불려가서 한 일은 프로그램 설계에 대한 강의에 가까운 프리핑이었다. 완주 소양에 있는 **연수원은 직접 오라 하더니 제안서 원본 시디와 칼라인쇄 7부 뿐 아니라 메인 디자인과 서버 디자인 견본도 요구했다. 정해 준 날에 두 명의 직원이 가서 한나절동안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200만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에 4개 업체가 그랬던 것이 나중에 확인되었다.전주 서신동에 있는 어느 건설회사는 곡절을 거쳐 계약서 초안이 확정되었고 날인만 남았었지만 다른 업체랑 계약을 했다. <전주라인>에서 제공 된 모든 자료를 고스란히 딴 업체로 가져가서 흥정을 한 것이다.사기업만 이랬던 것이 아니고 공공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전주지방**청은 전체적인 진행 일정도 안 밝히고 몇 번이고 불렀다. 여러 날에 걸쳐 각 지방의 **청들을 조사하여 사이트맵과 디자인견본을 제출했다.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확인 했더니 계획자체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전주지방***회도 꼭 같은 경우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북발전*** 이였다. 100여 페이지나 되는 제안서를 칼라로 11부를 요구했고 그것도 두 번이나 제출하게 했다. 프리젠테이션 비용은 빼더라도 인쇄비와 인건비만 100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최종발표일도 공개하지 않았었고 문의 할 때마다 심사 중이라는 대답이 두 달을 넘기더니 결국 재시행 한다는 것이었다.갑은 눈에 보이는 모든 회사들을 불러들여 을로 삼았고 이러저런 요구를 함부로 했다. 60간지를 이루는 10간 중 하나에 불과하고 표기상의 편의를 위해 정해졌으리라 여겨지는 갑과 을은 계약서류에 등장하면서 적나라한 권력관계로 돌변했다. 서부우회도로에 있는 모 창호회사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네 차례나 조정 합의된 견적서와 도메인등록과 서버세팅, 본 작업을 시켜 놓고도 돌연 법대로 하라며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버려서 충격이라는 게 아니다. 그 회사에서 준 자료의 이면지에는 대금을 받지 못한 을의 애원이 담겨 있어서였다. 갑의 지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그 창호회사가 다른 갑 앞에서 보이는 초라함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손한 갑과 당당한 을을 꿈꾼다. /전희식(농부전주라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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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2.01 23:02

[새벽메아리] "민심은 천하를 주고 받는다"

필자는 다년간 네티즌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특히 정치개혁에 관심이 많은 나는 개혁성향이 강한 정치인들을 지원하고 소위 수구세력들에게 비판을 가한다. 그중 김근태 의원(보건복지부장관)에게는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 정치개혁이란 화두 속에 동지적 입장에서 지지와 비판을 서슴없이 표현을 하고 있다. 그래서 네티즌사회에서 친 김근태 논객으로 평가받고 있다(본명이 아닌 필명이 따로 있음). 그래서 지난해 논쟁과 투쟁으로 얼룩진 열린우리당의 4대개혁입법문제로 김근태 장관께서 국민에게 의사를 묻고 설득하며 함께 하는 민심개혁론을 주장하다가 지지와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므로, 나는 민심은 천하를 주고받는다.의 제목으로 모모 인터넷신문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엄청난 논란과 찬반의 전쟁 속에 접속자와 댓글의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일명 민심논객이란 별명이 붙어버렸다. 그때는 한 대권주자를 위한 글이었으나 이제 정치권 전반에 걸친 국민과 도민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후련하고 정치인들에게는 정신이 번뜩 들게 하는 글을 쓰고자한다.작금의 정치는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국민 위에 정치가 없고 민심아래 정치가 있어야 되는데, 정 반대이다. 이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에 따라 당리당략과 차기대권의 욕심에 눈이 멀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요즘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인 개혁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 속에 민의는 등한시하고 극한 정쟁만이 난무하는 이유는 지역정서를 교묘히 이용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야당성향과 성급한 개혁지상주의 여당성향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상생의 정치는 침몰되고 상극의 정치가 활개치면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정서는 왕짜증 그 자체이다. 아니 심하게 표현해서 혐오감까지 느끼곤 한다.예부터 지금까지 정치인과 백성의 관계를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가마탄 이들이여 가마 멘 이들의 심정을 아는가?란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말로야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의 상머슴 발로 뛰는 참 일꾼등 한 표 한 표에 코가 땅 닿게 납작 엎드려 절하면서 구걸하다시피 하다가 당선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되어버린다. 내가 정치권 전반에 대해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훌륭한 당도 있고 참신한 정치인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본인들이 개혁대상들이다.특히 정치인들의 활동비 및 특혜는 여, 야의 러브궁합속에 조금도 변화가 없고 은근슬쩍 올려버린다. 바로 민주주의의 대의정치는 사라지고 당리주의의 개인정치가 난무하는 현 정치권은 국민들의 지탄에 대상이 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 대통령이나 여, 야 의 신년구상이 경제와 민생을 최우선정책으로 추진한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그렇다고 개혁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치지도자의 말처럼 국민의 의사를 묻고 설득하며 함께 하는 민심개혁론이 진행되어야 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잃지 말고 나도 성공, 백성도 성공, 나라도 성공하는 대동세상을 열어 가는 개혁이 되었으면 한다./이윤영(전 정치개혁전북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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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1.2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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