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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 문학박사, 신아지역문학 연구총서 '무주문학론' 펴내

무주를 빛낸 작가들의 노고를 담아낸 책이 세상에 나왔다. 최명표 문학박사가 신아지역문학 연구총서 <무주문학론>(신아출판사)를 발간한 것. 책은 지난 2021년 출간된 <정읍시인론>에 이어 소지역의 문학 현상을 조감한 2번째 연구서다. 최 박사는 “책을 통해서 그들의 노고가 군민을 비롯한 독자들에게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게 됐다”면서 “이번 책에서 취급한 작가들은 자기 자리에서 무주를 빛내기 위해 힘쓴 이들로 선정했다”고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실제 책은 ‘제1부 소원문학회’, ‘제2부 김환태론’, ‘제3부 시인론’, ‘제4부 시집평’, ‘제5부 아동문학가론’ 등 총 5부로 구성됐다. 먼저 1부에서는 1962년 12월 무주에 처음으로 생긴 ‘소원문학동인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내용을 보면 서재균·이찬진·정치중·조기호·한창근 작가 등 5명으로 출범한 소원문학동인회에 대한 설명과 함께 ‘소원(素園)’, ‘귀찮은 말씀’ 등 일종의 선언문으로 채워졌다. 2부에서는 무주를 대표하는 비평가 ‘김환태론’을 조명했다. 그간 발표했던 김환태 비평가의 낭만주의적 성격과 동심의 심미화 과정, 영향 관계 그리고 ‘순수’론을 담아낸 것. 특히 김환태 비평가의 비평이 함의한 의의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최 박사의 심정을 담아내 무주군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 이어 3부에서는 정훈 시인을 비롯해 박희연, 이봉명, 전선자, 이선옥 시인의 작품을 통해 무주시인론을 다룬다. 4부는 무주 출신 시인들의 시집평이 실려있다. 차주일, 이이진, 장만호, 이병수, 석경자, 이현정, 이기종, 주평무, 이일우 작가의 작품이 다뤄졌다. 끝으로 5부에는 서재균론과 김종필 작가의 동화집평이 묶인 아동문학론이 담겼다. 최 박사는 “무주와의 인연은 2019년 제30회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 이후 눌인문학회장을 맡으며 깊어졌다”며 “무주문학론을 준비하며 무주인들은 저마다 넉넉한 덕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척척(戚戚)하게 지내는 등 덕유산을 닮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문학론을 통해 무주 출신 작가들의 흔적과 그들의 혼화한 작품을 읽는 재미를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최명표 박사는 문학박사를 비롯해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전북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수료했으며, 전북아동문학상, 방전환문학상, 아름다운문학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전북지역시문학연구>, <한국근대고년문예운동사>, <전북시인론>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전현아
  • 2024.01.03 18:02

김재환 수필가 <이빨에 땀이 나도록> 펴내

김재환 수필가의 네 번째 수필집 <이빨에 땀이 나도록>(수필과비평사)이 출간됐다.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 더 예리하고 날카롭게 지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이번 수필집에는 서정적인 이야기보다 서사적 사회 비판 글이 도드라진다. 특히 정의롭지 못한 정치인과 법조인, 국회의원, 재벌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정치 후진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정치판을 꼬집는다. 40여 편이 수록된 수필집은 '내안의 갈등', '공허한 메아리', '세상 밖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스포츠와 함께' 등 총 5부로 구성됐다. 저자는 “정치와 사회를 바르게 보다 보니 격한 정치 사회 평론글이 됐다”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작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진안 출신인 김재환 수필가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고 농협에서 33년간 봉직, 정년 퇴임했다. 10대부터 글을 쓰고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는 <금물결 은물결>, <그곳엔물레방아집은없었네>와 세계기행 에세이집 <역마살> 등을 집필했다.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작촌예술문학상, 행촌수필문학상, 진안예술상 대상, 진안군민의장 문화체육장 등이 있으며 한국문협 진안지부 회장, 수필과 비평작가회의 전북지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문학·출판
  • 박은
  • 2024.01.03 18: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지안 '오늘부터 배프! 베프!'

요즘처럼 한 끼 식사가 무서운 적이 있었을까.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밖에서 외식을 할 때마다 부쩍 오른 가격을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웬만한 식사가 거의 만 원에 육박하거나 훌쩍 넘는다. 이런 상황이니 동화에 나오는 아동행복나눔카드로 아이들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한 끼를 넘겨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돌아서면 배고픈 나이의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사시간은 무섭다. 그래도 아동급식카드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을 수 있으나 당사자의 입장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턱없이 부족한 식비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편의점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 당연한 의무지만 그 삶의 무게가 조금 덜어진다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매번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같은 음식 먹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식당이나 편의점 밥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주인공 서진이가 편의점에서 만난 남자아이나 소리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원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그 마음은 또 어떠한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밥을 먹어야 하는가에 이르면 마음은 더 착잡해진다. 그런 점에서 아동급식카드로 편의점 음식을 사 먹어야 하는 두 아이와 들고양이의 접점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이미 세상의 냉혹함을 알아버렸다. 배려가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처지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쓴맛을 알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이미 맛본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지금보다 좀 더 사랑받고 행복해지기를 기원한다. 그들이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들을 응원하고 지켜주고자 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그들의 꿈이 꿈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로 변하고, 그들이 만나고 싶은 미래가 더 멋진 모습으로 후다닥 다가오기를 바란다. 아쉽게도 <오늘부터 배프! 베프!>에는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서진이와 엄마의 지나가는 이야기 틈에 희미하게 한 줄로만 등장할 뿐이다. 발을 동동거리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모습도 안타깝지만 설령 그게 아빠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저출산을 탓하기에 앞서 오늘 이 시간에도 애를 태우며 아이를 키우고 있을 수많은 한부모 가정,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시스템과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가 그리워진다. 우리 시대는 예전처럼 이웃이 부모의 빈자리를 메워주거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일주일, 길게는 한 달 후에나 발견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박할 때는 작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주는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진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그 고비만 넘기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 누군가가 이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힘든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이 또한 금방 지나갈 거라고, 장창영 작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4.01.03 18:02

하기정 세 번째 시집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발간

“지팡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여름이 자라고 있다/ 명아주잎이 물컹하고 비릿하게// 매미는 새보다 일찍 일어난다/ 가로등이 햇빛처럼 비추는 나무 아래서/ 좋아하는 것들 틈에서// 여름이 자라고 있다/ 초록의 질투는 뿔처럼/ 여린 죽순에 받힌 송아지가 여름을 마주 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네가 쥐고 있다”(시 ‘청려장’ 중에서) 감성을 노래하는 하기정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상상인)를 새로 펴냈다. 첫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에서 마치 잘 꿰어진 언어의 염주를 만들어낸 시인은 두 번쨰 시집 <고양이와 걷자>에선 낯설음과 낯익음이 뒤섞인 특유의 시 세계를 나타내 깊고도 매혹적이면서 농익은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한 세 번째 시집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는 제4회 선경문학상 수상 시집이기도 하다. 삶의 체험에서 시를 통해 서정적인 울림을 자아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했다. 시집의 해설을 쓴 박동억 평론가는 “수사적인 형식과 존재론적인 자세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지점에서 시인의 아름다운 형상 또한 길어 올려진다”고 평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한 권의 시집이 될 사람이고 싶다”며 “잘 쓴 시보다는 좋은 시를 쓰고 싶고 시를 쓰면서 더욱 새로워지겠다”고 밝혔다.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한 시인은 5·18문학상, 불꽃문학상, 시인뉴스 포엠 시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문학·출판
  • 김영호
  • 2024.01.03 18:02

[202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동화] 우주 보안관이 된 우리 엄마 - 정종균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엄마가 조심스럽게 수아를 불렀다. “수아야, 잠깐만 이리 와 볼래?” 근처 간이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던 수아는 그 말을 듣고 쪼르르 엄마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엄마에게 기댔다. “왜 엄마?” “우리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엄마는 앙상한 팔을 들어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창문 너머에는 환하게 빛나는 동그란 달이 떠 있었다. 달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꽉 채울 것 같은 은은하면서도 포근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기 봐, 달이 예쁘지?” “응. 예쁘다.” 엄마는 수아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사실 비밀인데, 지금 저 달에 몹시 나쁜 외계인이 몰래 숨어있다?” “정말?” 마침 스마트폰 게임 속에서 무시무시한 외계인이 반짝이며 화면을 가로질렀다. 엄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래서 지구에서 외계인과 싸울 수 있는 우주 보안관을 보낼 계획을 세웠어. 외계인과 싸워서 지구를 지킬 수 있는 용감한 사람 말이야. 그런데 그 보안관으로 엄마가 뽑혔다지 뭐야?” 그 말을 들은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우주 보안관이면 나쁜 외계인들과 싸우는 거야?” “맞아.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커다란 로봇도 타고, 멋진 레이저 총도 쏘면서 외계인들과 싸우는 거야.” 엄마는 병원에 입원한 이후, 매일 같이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복잡한 기계를 주렁주렁 매단 채 검사를 했었다. 그런데 설마 그게 우주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 줄이야. “그런데 오늘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는데, 엄마가 이제 곧 로켓을 타고 달나라로 갈 수 있다네?” “우와, 엄마 대단하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우주를 여행하는 만화영화를 본 적 있다. 우주는 지구와 달리 중력이 없어서 물건이 둥둥 떠오르고, 창밖으로는 언제나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다. “엄마, 나도 따라가도 돼? 응?” 수아는 신이 나서 엄마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엄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수아는 아직 어려서 못가. 달나라에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거든. 만약 수아까지 우주로 가면 아빠는 혼자 남잖아.” 수아는 엄마의 말에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는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부터 웃어 본 적이 없다. 매일 같이 어깨와 허리를 푹 숙이고 울상만 짓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엄마를 따라 자신까지 떠나 버리면 아빠는 외로워서 엉엉 울지도 몰랐다. “그럼 엄마는 언제 와?” “아주, 아아아주 나중에.”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창문 너머로 동그랗게 빛나고 있는 달을 가리켰다. “대신에 엄마는 아주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갈 거야. 그 망원경으로 달에 앉아 우리 수아가 뭘 하고 있나, 항상 지켜볼 거란다. 그러니까 엄마가 우리 수아가 잘 있나 늘 확인할 수 있게 매일 달을 보면 손을 흔들어줘. 알았지?” 엄마는 수아를 꼭 안고 당부했다. 하지만 수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댔다. “칫, 나도 달에 가고 싶은데. 엄마만 좋은 데 가고.” “미안해. 엄마만, 우리 딸을 두고 엄마만 가서 미안해.” 엄마는 수아를 안고서 늦은 밤까지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나도 데리고 가지. 수아는 엄마가 가리킨 창밖 너머의 달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 * * * * 달나라로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엄마는 비쩍 말라갔다. 팔은 창밖 너머 나무처럼 앙상하게 말랐고 뺨은 홀쭉하게 들어갔다. “엄마는 로켓에 타려고 일부러 몸을 가볍게 만들고 있는 거야. 몸이 무거우면 로켓이 날아가다가 떨어질지도 모르잖아.”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런 와중에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언니들이 몇 번이나 엄마를 찾아왔다. 잘은 모르지만, 엄마가 곧 우주여행을 떠날 때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빠가 수아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수아는 아빠 손을 잡고 병실 구석으로 향했다. 한 번 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몇 번이나 엄마를 검사하던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 뒤로 하얀 천을 뒤집어쓴 누군가가 보였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수아는 그게 엄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 엄마는 이제 달나라에 가는 거야?” “응.” 아빠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가벼운데, 달에 갔다가 휙 하고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달은 지구보다 중력이 약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높이 뛸 수 있다고 책에서 읽은 적 있다. 지금 엄마는 무척이나 가벼우니, 잘못 하다가는 그대로 우주 너머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 수아는 걱정이 돼서 물었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흥. 아빠는 엄마가 걱정도 안 되나 봐.” 괜히 심통이 난 수아는 아빠의 손을 놓고 무작정 바깥으로 향했다. 이유는 몰랐지만, 이곳에 있는 게 너무 답답했다. 그러다 수아는 병원 휴게실에 도착했다. 텅 빈 휴게실 안은 따뜻한 데다 푹신한 소파도 있었다. “하암.” 수아는 소파에 드러누워 하품했다. 안 그래도 아빠가 아침 일찍 깨워서 졸리던 참이었다. 수아는 꾸벅꾸벅 졸다가 스르륵 잠에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수아는 불연 듯 눈을 떴다. 수아의 눈에 어두컴컴한 휴게실 풍경이 들어왔다. 자는 사이에 밤이 온 모양이었다. 거기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 무서워.” 수아는 어두컴컴한 주위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와락 겁이 들었다. 어두운 휴게실 안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꼭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 엄마!” 그리고 울먹이면서 습관처럼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도 수아가 부르면 항상 달려오곤 했다. “엄마, 나 여기에 있어!” 수아는 어둠 속에서 엄마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수아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아는 뒤늦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맞다, 엄마는 달에 갔지?” 엄마는 오늘 아침 로켓을 타고 달나라로 떠났다. 한 번 가면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지금쯤 분명 지구하고는 멀리 떨어진 우주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엄마 미워! 나만 두고 달에 가고! 다른 친구 엄마들처럼 그냥 지구에 있으면 안 돼?” 수아는 지금까지 꾹꾹 눌러 담아 왔던 서운함에 휩쓸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신을 여기 두고 우주 보안관을 한다면서 달에 간 엄마가 너무 미웠다. 다른 친구의 엄마들은 달 같은 곳에 가지 않는다. 로켓을 타야 한다며 병원에 누워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두고 달에 가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니 수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그때, 휴게실 창문 너머에서 무언가 수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아는 깜짝 놀라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엄마?” 거기에는 새하얗고 동그란 달이 떠 있었다. 달은 구름 너머에서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수아의 몸 위로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한 빛이 쏟아졌다. 꼭 달이 하얗게 반짝이는 은빛 손을 뻗어 수아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것 같았다. 휴게실 안으로 달빛이 쏟아지자, 수아를 겁주던 그림자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수아는 그렇게 온몸으로 달빛을 맞으면서 한참이고 자리를 지켰다. “수아야!” 아빠가 휴게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빠의 몸은 땀으로 가득했다. “아빠!” 수아는 달려가서 아빠의 품에 안겼다. 아빠는 수아를 꼭 끌어안으며 안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 찾아 다녔어.” 아빠의 품에서는 씁쓰레한 냄새가 났다. 아빠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 수아, 혼자 여기에 있는 게 무섭지 않았어?” “난 괜찮아. 저기 봐, 아빠!” 수아는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창밖 너머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엄마와 언젠가 함께 보았던 달이 동그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어찌나 크고 밝은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그대로 코가 닿을 것 같았다. “엄마가 저기서 좋은 망원경으로 날 지켜보겠다고 약속했거든. 엄마가 날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도 안 무서웠어.” 어쩌면 이미 엄마는 달 위에 도착해 있을지도 몰랐다. 엄마가 말했던 나쁜 외계인들이 엄마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뽑힌 우주 보안관이다. 그런 엄마가 외계인에게 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지금쯤 엄마는 힘을 내서 외계인과 싸우고 있겠지?” 수아는 창을 향해 쪼르르 다가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엄마, 봐봐. 나 아빠랑 잘 있어! 그러니까 나쁜 외계인한테 지지마! 알았지?” 수아는 달 저편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엄마를 향해 쉬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 문학·출판
  • 김영호
  • 2024.01.01 16:31

[202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 동화] 정종균 작가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싸늘한 겨울바람에 벌벌 떨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찾아온 기쁜 전화는 당시의 추위가 모조리 날아갈 만큼 따스하게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동화를 읽으면서 자랐던 제가, 이제는 동화를 쓰는 어른이 됐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격을 느꼈습니다. 사실 처음에 다소 무거운 소재를 고른 건 아닌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모든 이별이 비극으로 귀결되지 않고, 모든 상실이 슬픔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짧은 생애를 살아오면서 배웠습니다. 죽음 역시 삶의 당연한 일부분이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동화가 각자만의 사정으로 힘든 순간을 거치고 계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영원한 뮤즈이신 어머니, 제 인생 최고의 후원자인 아버지, 그리고 제 첫 독자였던 동생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과분한 달란트를 주신 주님께 감사 말씀 올리며, 언젠가 뵙게 될 그날까지 순종하는 종으로서 창작을 이어갈 것임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정종균 작가는 단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중이다.

  • 문학·출판
  • 김영호
  • 2024.01.01 16:20

[전북의 문학 명소] 14. 우리 마음 닿는 곳마다 문학이 있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단 하나의 힘, 사랑 세상을 이루는 건 자연이고, 그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부여한 자연의 가장 위대한 가치는 예술이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마주할 때 느끼는 미묘한 감정을 사랑이라는 말로 부른다. 그러니까 사랑은 어떤 것에 부여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치이자,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다. 이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예술적 감성으로 충만해지는 이유다. 그래서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주 자기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 첫 번째 여정을 초남이 성지로 삼아보면 어떨까? 완만한 능선이 우리의 눈높이에서 부드럽게 물결치고, 숱한 발걸음이 다져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 인간의 위대한 사랑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인간의 사랑이 신의 부름 앞에 순교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소설가 서철원은 최후의 만찬에서 그 높고 숭고한 사랑을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림자를 나란히 하면서 초남이 성지를 걷다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다른 사람을 신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이란 걸 알게 된다. 초남이 성지에서 성스러운 사랑을 보았다면, 남원 광한루원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연정을 만나게 된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춘향과 이몽룡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그네에 오르면, 벅차게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을 알 수 있다. 그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광한루원을 걸어보라. 그러면 앞서 걷는 그림자까지도 서로 다정해질 것이다. 그러다가 늘어진 버드나무 그늘에서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 거기 당신이 보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담겨 있는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가 또 있을까? 그 투명한 모습으로 혼불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에서 우리는 전 10권에 달하는 소설 혼불의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과 만난다. 수백 년의 시간이 묵묵하게 다져진 길과 무수한 사람들의 눈길이 더듬었을 언덕과 산자락이 마치 누대를 이어온 종가의 모습이다. 그곳에서 살았던 연인들의 애끓는 사랑이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 간다면, 그 바람 끝자락에 서 있을 강모를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혼불문학관에 오르면 신분도, 윤리도, 몽둥이도, 시대도, 사상도…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절실히 알게 된다. △ ‘나’라는 별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방식, 외로움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어느 날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도 문득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 혼자 훌쩍 길을 나서게 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길은 외로운 걸음이 만든다. 길은 외로움처럼 세상 곳곳으로 이어져 있고, 그래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한 권의 소설이 외로운 길을 말 없이 함께 걸어주는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 시인 안도현은 외로운 날에 완주 화암사에 간 모양이다. 그는 시 「화암사, 내 사랑」에서 화암사를 두고 “잘 늙은 절 한 채”라고 표현하였다. 실제로 화암사는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외로워할 이유가 사라진다. 늙는다는 건 외로움이 끝난다는 뜻이니까. 외로움쯤이야 세상의 먼지처럼 인생에서 만나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그걸 아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외로움의 궁극에 서 있는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에는 화암사가 제격이다. 세상 가장 깊은 자리에서 외로운 사람을 불러들이는 화암사. 그러니 화암사에서 발길을 돌려나오는 사람의 표정에서 잘 늙은 삶의 한 단면을 읽어낼 수 있다. 남원 실상사도 혼자 찾아가기 좋다. 아니, 혼자 찾아가야 하는 절이다. 그래야 도종환 시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진여실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 고즈넉한 실상사 마당에 서 있으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하다. 외로움이란 그렇듯 자기중심이 강하게 발현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외로움이 너무 깊어지지 않도록 실상사 입구에는 장승이 서로를 마주하고 서 있다. 우리 사는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그렇게 알려준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혼자 견디지 말자. 누군가 우리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주 다정하고 따스한 눈길로. 남원의 옛 서도역도 혼자 찾아가기 좋은 문학 명소다. 억새가 흐드러진 가을 오후라면, 그곳에 혼자 있어도 결코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든다. 외로운 기분으로 찾아갔다가 더는 외롭지 않게 되는 곳이다. 남아 있는 철길이 두 갈래라서 그렇다. 한쪽 선로에 올라 두 팔을 펼치고 균형을 잡고 걸으면, 저쪽 선로에서도 누군가 나란히 두 팔을 펼치고 서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손끝과 손끝이 스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것을 두고 인연이라고 해도 좋고,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 외로움은 인연과 운명 앞에서 조금 작아질 것 같다. 순창 남계리 석장승보다 외로운 사람이 있을까? 장교철 시인은 시 「석장승 남계리」에서 석장승의 외로움을 “별이 떨어진 그 자리”라고 적었다. 그렇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건, 우리 마음에 언젠가 떨어져 내렸던 별이 있어서다. 그래서 그 별이 반짝거릴 때마다 우리는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석장승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가끔 우리 외로워질 때마다 남계리 석장승 옆에 서주어야 한다. 서로가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도록. △누군가 점점 다가오는 순간, 설렘 사랑과 외로움은 그 시작과 끝에서 언제나 설레는 감정과 연결된다. 설레는 순간 세상은 새롭게 발견되고, 설레는 순간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 새로운 순간이 모든 예술과 문학의 근원이 된다고 오랫동안 우리는 말해왔다. 삶에 설렘이 없다면 우리의 심장은 얼마나 심심할까? 낯선 여행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 앞에서 마음껏 설레보자. 그 자리에 시집 한 권쯤 동행한다면 설렘이 더 크게 박동하지 않을까? 설레고 싶다면 임실 섬진강길을 걸어보라. 맑은 물살을 옆구리에 끼고 물의 속도보다 조금 느리게 걸으면 마음 어딘가에서도 소살거리며 흘러가는 게 있을 것이다. 그 길에서 사랑에 관한 시를 만난다면 더욱 기쁘지 않을까? 섬진강길에 서 있는 김용택 시인의 시비 앞에서 천천히 시를 읽으면, 나무도 풀도 구름도 햇살도 모두가 설레어 환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옆에 나란히 선 사람을 마주 보아라. 세상이 온통 설레게 될 것이다. 장진영기념관 영화배우 장진영(1972∼2009)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임실에서 태어난 장진영은 전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녔다. 1997년 KBS 드라마 《내 안의 천사》에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했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대한민국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나, 2008년 9월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이듬해 향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진영기념관은 고인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인 김하인의 장편소설 국화꽃 향기를 읽고 가보면 좋은 곳이다. 남원의 만복사지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만복사지는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다. <만복사저포기>는 죽은 여자와의 사랑을 절절하게 그려낸 고전소설이다. 주인공 양생은 만복사라는 절에서 부처님과 내기하여 젊은 여인과 인연을 맺은 뒤 재회를 약속했다. 그런데 그 여인이 3년 전에 죽은 여인이라니.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사랑이 강하고 애절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을 읽고 가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날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방황 살다 보면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날 때가 있다. 두 갈래라면 선택이 조금 쉽겠지만, 무수하게 얽혀 있는 길이 있다면 혼란을 겪게 된다. 그것이 삶이다. 가야 할 길 혹은 가고 싶은 길이 없을 때 우리는 방황하고, 방황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럴 때 힘이 되어 주는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학과 예술은 인간이 가장 힘든 순간에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를 열어주는 힘이 있다. 임실 호국원은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금 방황하고 있는 당신들에게 이곳을 추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임실 호국원에는 자기 인생을 묵묵히 살아낸 사람들이 다른 곳보다 많기 때문이다. 끝없이 세워져 있는 묘비를 손바닥으로 만져보고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나지막하게 읽어보라. 저마다의 인생이 살아간 흔적이 보일 것이고, 그 인생이 나아가고자 했던 길이 열리는 걸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얻는 곳. 임실 호국원에서 돌아 나올 때쯤이면 우리 앞에 선명한 운명의 길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임실 호국원에서 나와 갈담을 지나 전주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섬진강물이 잠시 숨을 고르는 옥정호가 나온다. 옥정호는 섬진강 물길이 전열을 채비하는 곳이다. 그러나 물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길이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옛 흔적들을 잔잔한 수면이 감추어버렸다. 옥정호는 속내 복잡한 가운데 무표정하게 서 있는 우리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수면에 언뜻 그런 모습이 비치는지도 모른다. 근심이나 시름 같은 혼란한 마음을 옥정호 물에 풍덩 빠뜨려 버리면 어떨까? 후련하고 시원하지 않을까? 마음 복잡하고 삶의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 마지막으로 들러보고 싶은 곳은 이치전적지다.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자락에서 충남 금산으로 나가는 길목인 이치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민관군과 왜병들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김동진은 역사소설 임진무쌍 황진에서 “적의 보병들이 진격해올 길목마다 날카로운 마름쇠를 뿌려놓았다”라고 묘사한 적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이치전적지를 찾아가면, 방황하는 우리 삶의 길목마다 날카로운 마름쇠가 놓여 있을 듯하다. 그래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우리 발길을 붙잡아줄 것만 같다. 그렇게 문학은 인간의 내면에서 빛난다. /문신(문학평론가, 우석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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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31 10:00

[전북의 문학 명소] 13. 강처럼 흐르는 인생, 산처럼 우뚝한 문학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강은 물길이 아니다. 강은 흐르지 않는다. 강은 굽이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은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어야 한다. 그것도 인간의 핏줄 속에서 굽이쳐 흐르는 숨길이어야 한다. 그래서 강은 뜨겁게 살아 있다. 섬진강은 전라도의 대동맥처럼 펄떡펄떡 살아서 섬진강을 지척에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흘러든다. 그 맑고 찰랑거리는 강물을 닮아 섬진강가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러므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그 사람들의 마음을. 그 사람들의 심정을. 그 사람들의 영혼을. 임실 사선대를 돌아가는 섬진강은 임실문학비와 조각공원을 기억한다. 임실문학비는 임실문인협회 기관지『임실문학』 제30호 발간을 기념하고, 협회와 협회원들의 문운과 단결, 애향을 기원하면서 세웠다. 지역의 문학이 이렇게 기념될 수 있는 것으로도 임실의 문학은 충실하다. 사선대 조각공원에는 임실이 고향인 가수 최갑석(1938∼2004)을 기리는 노래비도 있다. 최갑석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활동하며 <태평양 마도로스>, <한 많은 유랑 나그네>, <평안도 사나이>, <정든 목포항>, <내 고향 찾아가면> 등을 불렀다. 문학의 기원이 노래였으니, 섬진강도 밤낮으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사선대를 지나간 섬진강은 굽이치다가 옥정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옥정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섬진강댐 물문화관이 있다. 이곳에는 전북문학관에서 기증한 400여 권의 도서가 비치되어 있어 문학의 향기에 젖어 들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 섬진강댐에서 흘러넘치는 섬진강이 한국문학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섬진강은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 연작의 영감이 되어 소리 없이 흘러간다. 진뫼에 이르면 “전라도 실핏줄 같은”(김용택, 「섬진강1」) 섬진강은 묵묵히 흘러가면서 많은 시적 영감을 안겨준다. 진뫼는 시인의 마을이자, 시인의 영혼이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이다. 이곳에는 김용택 시인의 생가가 있고, 섬진강길을 따라 김용택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시비에 새겨진 「향기」, 「봄날」, 「사람들은 왜 모를까」, 「나무」, 「섬진강1」, 「섬진강3」 등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에 시가 찾아든다. 그런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푸른 하늘을 가르면서 한 줄기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도 보인다. 섬진강은 그렇게 이 땅의 골짜기와 하늘, 인간의 마음을 시심(詩心)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진뫼에는 김용택 시인만 있는 게 아니다. 진뫼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진뫼에서 밭을 일구는 김도수 시인은 시집 진뫼로 간다,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등을 통해 진뫼의 문학적 속살을 보여준다. 이렇듯 문학의 땅 진뫼를 떠난 섬진강은 순창 경계에 이르면 한 번 크게 뒤채며 부서진다. 장군목 유원지에 이른 섬진강은 마지막으로 임실을 돌아보며 하얗게 물보라를 남긴다. 그리고는 유유히 순창으로 접어든다. 임실에서는 임실의 하늘빛을 닮고 임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섬진강이 순창에서는 또 순창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것이다. △ ‘만경’창파에 시를 띄워라 임실 슬치에서 흘러내린 전주천과 모악산 자락을 타고 온 삼천이 합류하고, 완주 고산천과 소양천이 몸을 섞어 마침내 만경강 큰 물줄기를 이루는 곳이 삼례다. 그래서 삼례 사람들은 만경강을 일러 큰 하천이라는 뜻으로 한내라고 불렀다. 골짜기의 물줄기들이 삼례에서 비로소 강이 된 것이다. 이렇듯 삼례는 물줄기뿐만 아니라 원근의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모여드는 땅이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세를 규합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물이 합쳐지고 사람이 보이는 삼례에 문학적 자산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 첫째 자리는 비비정이다. 비비정에서는 만경강 물줄기의 속살까지 볼 수 있다. 비비낙안이라는 말로 비비정의 풍경을 이야기해온 것을 봐도 비비정의 풍경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서늘한 가을 오후, 비비정에 올라 시를 읽는 모습은 비비낙안에 견줄만하지 않을까? “서로의 가슴속에 저 달을 품어”보자고 했던 김은숙 시인의 시 「비비정에 달 뜨거든」처럼, 비비정은 우리 가슴에 문학이라는 따뜻한 마음을 품게 한다. 만경강이 시작되는 삼례에는 문학적으로 가볼 만한 곳이 많다. 옛 삼례역을 중심으로 삼례문화예술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책 박물관’을 비롯하여 ‘그림책도서관’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을 위해 지었던 창고를 개조한 공간에 자리한다. 당시의 수탈상을 그린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이나, 삼례 들녘과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미곡을 야적했던 군산항의 미두장을 다룬 채만식의 탁류 같은 소설을 통해 삼례문화예술촌의 옛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삼례문화예술촌은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삼례시장이나 삼례역도 많은 시인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안도현 시인이 삼례역의 기차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뽕뽕, 하고 운다”라고 시 「기차」에서 이야기한 적 있다. 송하선 시인은 삼례시장의 풍경을 시로 옮기기도 했다. “삼례의 장날/ 그대 장터에 가거든 보아라.// 조선옷 입은 마음으로”라고 「삼례의 장날」에서 읊었을 때, ‘조선옷 입은 마음’이 어떤 건지 삼례시장에 가서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만경강은 삼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척왜척화 척왜척화 밤낮으로 흘러간다.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마치 우리 인간의 역사와 같다. 물결이 흘러간 뒷자리에 새로운 물살이 밀고 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뒷강물이 앞강물을 밀고, 앞강물이 뒷강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 자연의 이치를 만경강에서 확인하면서, 사람 사는 풍경이 만경강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 강물 위에 달이 뜨면 달빛 아래 만경강의 시가 환하게 반짝거릴 것만 같다. △산자락마다 시인의 마을이 있다 누군가 말한 적 있다. 한 나라의 산 개수와 그 나라 시인의 숫자가 같다고.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는 시인의 나라다. 마을마다 크고 작은 산이 무더기로 솟아있고, 산비탈마다 시인의 고향 아닌 자리가 없다. 완주, 임실, 남원, 순창에도 시인의 수만큼 산이 우뚝하다. 그리하여 산이 시인을 품고, 시인은 그 산을 노래한다. 이렇게 산은 문학의 고향이자 문학의 대상이다. 완주 모악산은 도심에서 가까워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김해강 시인은 “힘 있게 뻗은 네 기슭에서 내 몸이 났”다고 시 「오오 나의 모악산아」에서 적었다. 바로 그 기슭에서 오랫동안 깃들어 살았던 박남준 시인은 모악산의 풍경을 글로 여러 차례 옮겼다. “모악산방, 모악산 그 산자락 속의 외딴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는 초여름의 숲은 무성히도 우거져서 벌써 좁은 산길을 덮고 키 작은 내 그림자를 가리워 가더군요.”라고 산문집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에서 이야기한다. 시인의 말대로, 모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좁은 산길’을 걸어 자기만의 외딴집을 찾아가는 길인지 모른다. 모악산에서 외딴집을 찾았다면, 순창 회문산을 오르는 길은 역사의 ‘비트’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도 끝내 침묵하는 회문산이다. 그러므로 회문산은 우리 현대사가 꽁꽁 숨어 있는 커다란 비트가 아닐까? 시인 권진희는 시 「회문산1」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과 산이 밀물처럼 다가오는/ 회문산 정상에 서서 보라”고. 과연 그 정상에 서면 산과 산이 어깨를 겯고 힘차게 우뚝 솟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때로 그 골짜기가 짙은 그늘에 잠기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또 말해보고 싶다. 산자락이 슬그머니 감추고 있는 회문산 골짜기에 들어가 보라.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올려다보았을 우리 역사의 하늘과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작고 동그란, 그렇지만 하늘보다 깊었던 한 인간의 눈을 보라고. 문학은 바로 그 눈에 비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강천산은 착하고 부끄럼을 타는 산이다. 그래서 강천산을 노래한 시에서는 연정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김용택 시인이 “유월이 오면/ 강천산으로 때동나무 꽃 보러 갈라네/ 때동나무 하얀 꽃들이/ 작은 초롱불처럼 불을 밝히면/ 환한 때동나무 아래 나는 들라네”라고 시 「강천산에 갈라네」에서 노래한 것처럼, 강천산은 연심과 시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찾는다. 설임수 시인은 강천사의 단풍을 두고 “두견이 가슴앓이/ 진홍빛 바다”라고 시 「강천사 단풍부」에서 적었다. 시인의 시처럼, 가을 강천산은 누군가의 가슴앓이로 온통 진홍빛이다. 이목윤 시인은 완주 대둔산을 두고 “저 아름다이 꽃들이 피워내고/ 봄 갈 여름없이 구름이 멈추어섬은/ 전라향병의 넋”이라고 했다. 그가 시 「대둔산」에서 노래한 것은 대둔산의 첩첩한 산자락과 기암괴석이 이 땅의 역사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조미애 시인도 “깜깜한 어둠을 가르며/ 대둔산의 힘진 소리”를 시로 적었다. 대둔산은 이렇게 전라북도의 역사적 순간들을 온몸으로 기록하는 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치전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대둔산이 갑오년에는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보루였음은 당연하다. 우리의 서사문학은 이런 순간들을 피의 역사로 형상화한다. 이렇듯 산자락마다 살아온 내력이 있고,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마찬가지로 산자락마다 들려줄 이야기가 있고, 애끓는 가슴앓이가 있다. 이것들이 우리의 시가 되고 소설이 되었다. 그러므로 산이 그냥 산이 아니라 시라는 것. 산이 그냥 산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 따라서 눈을 들어 산을 올려다볼 때마다 우리는 시를 읽고 문학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에 산 하나 들어 앉히는 일이 문학에 빠져드는 일이 된다. /문신(문학평론가, 우석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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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30 10:00

[2023 전북 문화계 결산] ② 문학·출판

올해 전북 문화계에서 문학·출판 분야는 다사다난했다. 전북 문단의 원로 시인 고하 최승범 시인이 별세하기도 했고 코로나19 이후 전면 대면 행사가 진행돼 문단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전북문인협회는 제1회 명예시인으로 윤석정 전북일보 사장을 선정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얼굴에서 뗄 수 없었던 마스크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간 문우들은 얼굴을 맞대고 행사장에서 웃음꽃을 피웠다. 기성 작가들은 물론 신인 작가들은 첫 키스와 같은 신작을 내놓아 출간 소식이 줄을 이어 독자들을 설레게 했다. 전주시의 민간위탁을 받아 개관 초기부터 현재까지 최명희문학관을 안정적으로 운영해오던 혼불기념사업회는 31일 위탁 기간 만료에 따라 최명희 작가의 유족들이 만든 최명희기념사업회가 내년부터 바통을 이어 받고 전북문인협회장 선출 예정 등 내년에도 문단에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문학 전북을 대표하는 원로 시인이자 전북대 명예교수를 지냈던 고하(古河) 최승범 시인이 1월 15일 장례를 마치고 영면했다. 향년 93세. 전북문인협회는 지난 1월 윤석정 전북일보 사장의 메세나 운동 공로를 인정해 제1회 명예시인으로 선정했다. 전북시인협회는 이형구 시인이 제9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6월 바다의 날을 기념하고 해양문학에 대한 관심을 드높이기 위한 제17회 바다문학상 대상에는 신춘희(경기)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지난 10월 14일 부안 석정문학관에서는 신석정 시인의 고결한 인품과 뛰어난 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제10회 석정시문학상 시상식과 제9회 신석정 전국 시낭송대회가 열렸다. 석정시문학상은 김남곤 시인, 석정촛불시문학상은 오창렬 시인이 수상했고 시상식에 앞서 신석정 전국 시낭송대회에서는 조귀덕 씨(광주)가 대상을 받았다. 최명희문학관은 인문학 특강을 통해 전북의 민족문학을 짚어봤고 작고 문학인 세미나도 개최했다. 아울러 문학소녀 최명희의 중학생 시절 글쓰기 노트도 공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출판 올해 초에는 지역 문단의 어른 정양 시인의 신작 <암시랑토앙케>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전북일보에 칼럼을 연재한 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장은 <전통문화 바라보기>를 출간해 잊혀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엮었다. 전주문인협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이해 지난 7월 문예지 <문맥> 제60호를 펴냈다. 문예지에는 특집 ‘창립 30주년 기념’을 비롯해 회원 100여 명의 시·시조·동시·동화·수필·평론이 수록됐다. 첫 출간 소식도 잇달았다. 소선녀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 <두베가 내게 올 무렵>을 펴냈고 진채란 시인은 <바람의 둘레>로 습작 노트에 써내려간 시들을 모았다. 이채영 시인의 첫 번째 시집 <4월의 눈꽃> 발간 소식도 지역 문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연말에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지난 4일 ‘대한민국 그림책상’을 신설하고 올해 대상으로 픽션 작품인 <사라진 저녁>(권정민, 창비)과 논픽션 작품인 <줄타기 한판>(민하, 글로연) 등 총 8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관계자는 “대한민국 그림책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우수 그림책을 선정하고 해외 수출까지 통합 지원해 한국 그림책의 해외 진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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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호외(1)
  • 2023.12.27 17:26

박래윤 작가, 첫 사진집 ‘자연이 그려낸 순간들’ 발간

“기록은 기억을 이기고 시간보다 오래 남는 사진의 힘을 믿습니다.” 박래윤 작가가 첫 사진집 <자연이 그려낸 순간들>(신아출판사)을 발간했다. 책은 ‘1978년~2000년 슬라이드 사진’과 ‘2001년~2023년 디지털 사진’으로 구성돼 130여 장의 사진이 실려있다. 박 작가는 “전국의 아름다운 산과 자연을 담은 이번 사진집은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삶과의 만남을 조명한 소중한 기록이다”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삶의 현장을 40여 년 동안에 걸쳐 과거와 현재를 다양한 시각으로 담아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다”며 사진집을 제작한 계기를 설명했다. 실제 사진집에는 김제 금산사의 전경으로 전하는 전북의 봄부터 대둔산과 선유도의 슬라이드 사진 속의 여름, 전주 향교의 은행나무와 전남 백양사의 감으로 선보이는 가을, 지리산 제석봉에 소복이 쌓인 눈 등 전라도의 사계절의 멋과 맛이 담겨있다. 그는 “이 사진집은 산과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선사할 것”이라며 “삶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정복규 객원 논설위원은 축간사를 통해 “사진집에는 동트는 새벽 한 컷을 위해 겨울철에도 수없이 새벽길을 나서는 박래윤 사진작가의 선천적인 부지럼과 열정이 담겨있다”며 “그는 마지막 고향 땅을 지키고 있는 산골마을 주민들의 인물사진을 수록하는 등 우리 고향이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임을 보여준다. 작가의 독자적인 철학과 해석을 표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전주 출생의 박 작가는 1977년부터 2015년까지 전북일보 등 도내 주요 언론사에 몸을 담았다. 언론사에 몸담은 40여 년의 세월 동안 박 작가는 4단 컷 시사 만화를 그렸으며 특유의 과장과 풍자로 독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 문학·출판
  • 전현아
  • 2023.12.27 17:26

김경희 독서치료사, 음식 에세이 ‘맛의 위로’ 출간

맛깔스러운 음식 이야기로 가슴속 위로를 전하는 에세이가 나왔다. 전주시보건소 마음치유센터에서 독서치료를 강의하고 있는 김경희 씨가 에세이<맛의 위로>(도서출판 이비락)를 출간한 것. 책은 ‘그리운 맛’, ‘위로의 맛’, ‘다정한 맛’, ‘익숙한 맛’, ‘새로운 맛’ 등 총 5부로 구성돼 음식에 얽힌 이야기로 소박한 삶의 철학을 담아냈다. 김 씨는 “음식을 만들면서 느꼈던 행복, 음식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음식에 깃든 에피소드를 구수하고 향기롭게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며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우리가 먹는 음식은 허기를 달래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닌 희로애락애오욕과 인생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책을 발간한 소감을 전했다. 이어 그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음식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며 “음식은 신체의 근육을 형성하는 데도 유익하지만, 영혼과 정서의 근육을 키우는 데도 유익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책은 오래전에 먹은 죽 한 그릇, 쑥개떡 하나, 배추전 한 조각 등 음식에 깃든 추억을 끄집어내 인생을 이야기하며 독자들에게 본인의 음식 세계에 깃든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초대한다. 끝으로 그는 “음식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한편 김 씨는 부부와 주부를 위한 독서 클럽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 <남의 일기는 왜 훔쳐봐 가지고>를 집필했다. 또 그는 전주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전주교육대학교 학생상담 센터에서 심리치료사로 활동했다. 현재 보건소, 마음치유센터에서 독서치료를 강의하고 있다.

  • 문학·출판
  • 전현아
  • 2023.12.27 17:26

완판본문화관 ‘나무의 문을 열다’ 발간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판각이 나무에 숨겨 있던 글자를 발굴하는 일이라면 책을 출판하는 것은 그 결과물을 세상과 나누는 일입니다.” 전주 시민이 판각한 천자문 목판의 인쇄와 교정, 제책 과정 등을 담은 간행 기록물 <나무의 문을 열다>(완판본문화관)가 발간됐다. 올해 전주도서관 출판 제작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된 완판본문화관이 판각본 책을 간행하는 1년여의 과정을 책에 소개하고 있다. 한국은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시작으로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훈민정음, 동의보감, 유교책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적잖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온전히 다룬 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현 시대에 판각이 갖는 의미를 돌이켜 보게 만든다. 전주는 책의 도시다. 한때 조선시대 유통되던 책의 상당 부분이 완판본의 고장 전주에서 만들어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주에는 아직도 나무를 매만지며 글자를 새기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는 시민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전주만이 담을 수 있는 책 이야기다. 완판본의 고장인 전주에서 전통 판각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이번 책의 집필은 시인이자 문학박사인 장창영 작가가 맡았다. 작가는 대장경문화학교의 전통 판각 강좌 13기 수강생으로 판각을 만나 특별한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고독하면서도 우직하게 나무에 글을 새겨야 하는 작업의 무게가 글 전편에 드러나 있다. 또한 출판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판각을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뿐만 아니라 나무 이야기 등도 수록돼 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다. 안준영 관장은 “판각본 천자문 간행 과정을 세세하게 담아낸 이 책은 전주 출판문화의 생생한 기록이다”며 “판각과 관련해 의미 있는 책을 발간할 수 있어 뜻 깊다”고 밝혔다. 완판본문화관에서는 책 발간을 기념한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전시는 22일 개막을 시작으로 내년 3월까지 이어질 계획이다.

  • 문학·출판
  • 김영호
  • 2023.12.27 17:26

[줌] 제16회 작촌문학상 수상한 안도 시인

“항상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문우들에게 감사합니다. 작촌문학상이란 이름에 걸맞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가 될 수 있게 정진 또 정진하겠습니다.” 안도(76) 시인이 제16회 작촌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아동문학가이자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론 선택받는 일조차 버겁고 힘겨울 때가 많은데 이번에 수상의 영광을 안게 돼 무척이나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국제펜전북지역위원회는 최근 심사위원회를 열고 올해 작촌문학상 수상자로 그를 선정했다. 작촌문학상은 전북펜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등단한지 10년 이상 된 회원 중 역대 회장을 역임한 공적 등을 반영해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올해가 16번째를 맞았다. 이번에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국제펜한국본부는 한국인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권이 있다”며 “선택을 피해 도망치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해 기뻐할 만한 문학상을 받게 되니 감격 만큼 부끄러움도 따른다”고 말했다. 평소 후진 양성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안골복지관 등지에서 수강생들에게 시, 수필, 아동문학 등을 꾸준히 가르쳐온 그는 “문인의 사명은 자기의 이름을 결코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며 “독자들에게 유익한 작품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 문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앞으로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끝으로 그는 “언제나 씩씩하게 곁에서 등불처럼 지켜주는 가족들과 살가운 정을 나눈 고향 친지에게도 수상 소식을 전하며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남원 출생으로 1984년 월간문학 시 신인상, 2017년 표현문학 평론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전주교대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고 시와 소설, 수필, 동시, 동화 등 장르를 불문하고 왕성한 필력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국제펜클럽 제3대 전북위원장, 전라북도국어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문학관 관장, 전북예총 수석부회장을 역임했고 전주시립도서관, 전북대 평생교육원, 전북교육문화회관에서 시·수필 전담교수로 활동했다. 아울러 KBS 전북도민의 노래 작사 당선, 한국아동문학상, 목정문화상, 한글유공자 표창 등을 받았고 다수의 시집과 동시집, 평론집을 발간했다. 제16회 작촌문학상 시상식은 내년 1월 4일 오후 4시 전주연가(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소재) 대연회실에서 전북펜문학 제22차 정기총회 및 전북펜문학 제22호 출판기념회와 함께 열린다.

  • 문학·출판
  • 김영호
  • 2023.12.26 18:15

[전북의 문학 명소] 12. 계절마다 한 권의 책이 되는 곳

△춘정이 활짝 피어나는 봄날 사람의 심정에 작은 불꽃을 피워 올리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봄날의 햇살과 같다. 문학은 얼어붙은 인간 감정에 따뜻한 피가 돌게 하고, 새로운 박동으로 생명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시인이 춘정(春情)을 노래해오지 않았던가! 완주, 임실, 남원, 순창의 문학 명소 중에서 봄날에 거닐어 보고 싶은 곳이 있다. 그곳에 갈 때면 옆구리에 시집이나 소설책 한 권 정도는 끼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리산 바래봉은 봄의 전령사 철쭉꽃으로 유명하다. 군락을 이룬 철쭉꽃이 만개하는 5월이 되면, 바래봉은 온통 연분홍으로 물든다. 누군가는 철쭉꽃 앞에서 가슴 설레는 사랑의 향기를 맡기도 하지만, 우리 역사는 처절했던 피비린내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래서 지리산 바래봉은 많은 작가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우미자·안도현·고정희·김광원 등 많은 시인이 매년 봄 철쭉이 흐드러진 지리산 바래봉에서 붉은 언어의 시를 써냈다. 지리산 바래봉에서 철쭉꽃의 향연을 감상했다면, 이제는 남원 광한루원에 늘어진 능수버들의 싱그러운 연두의 봄날을 거닐어도 좋다. 광한루원은 판소리 <춘향가>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봄밤의 정취를 감상하기 위해 광한루에 나왔다가 그네를 뛰는 춘향 모습에 넋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팔청춘의 첫사랑이 그렇게 광한루원의 봄날 저녁을 환하게 밝혔다. 복효근 시인의 시 「춘향의 노래」라든가 서정주 시인의 「추천사」 등에서 봄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봄날의 정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은 흐드러진 벚꽃 아래일 것이다. 임실군 강진을 지나 덕치를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4월 벚꽃은 피어난다. 그리고 섬진강 그 맑은 강물 같은 시심으로 덕치초등학교 운동장 가에도 벚꽃이 핀다. 이 벚꽃 그늘에서 김용택 시인이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서일까? 벚꽃 피는 날, 덕치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이 된다. 봄날 거닐어 보고 싶은 문학 명소에는 강천산과 모악산도 있다. 산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문학적 영감을 주지만, 강천산과 모악산은 특히 봄날의 정취가 좋다. 강천산이 봄날의 연두를 보여준다면, 모악산은 진달래꽃의 연분홍으로 설레게 한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만물이 봄날을 맞아 그렇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봄날, 연두의 햇살을 받으며 강천산 등산로를 맨발로 걷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잡히는 것들이 마음에서 자그마한 연못을 이룬다. 그 연못에 살랑 바람이 일면 그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모악산 등산로에서 저만치 비켜 서 있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동자에 맺힌 그 다사로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영혼을 서늘하게 해 줄 여름 여름은 인간과 자연이 맨몸으로 마주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진심이 서로 통한다. 이렇게 통하는 진심의 힘으로 문학은 탄생하고, 독자의 가슴에 서늘한 파문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무더위를 피해 찾아든 계곡에서 우리는 문학을 읽는지도 모른다. 게으른 영혼을 화들짝 일깨울 정도로 시리게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책갈피를 넘기다 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잊어버릴 것 같다. 지리산 뱀사골 계곡과 달궁계곡은 여름날 찾아가 며칠쯤 머물고 싶은 곳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정신은 맑아지고, 그 투명한 영혼으로 시 한 구절이 새겨질 것 같다. 소설의 한 대목을 읽다가 눈을 들면 숲 그늘은 푸르고, 그 아래로 하얗게 속살을 내보이며 굴러가는 물살이 보인다. 그 물살을 일으키는 크고 작은 바위에서 우직하게 자기 삶을 지켜내는 우리 자신이 보인다. 그게 보일 때면 여름이 성큼 물러나고 있지 않을까? 뱀사골 계곡 입구에 우람하게 서 있는 전적비 앞에서 한 번쯤 우리 역사를 생각해봐도 좋겠다. 역사는 인간의 비극을 어떻게 기록하는지, 또 우리는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생각하다 보면 더운 여름날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온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했던 숱한 사연들을 그 숲은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숲을 본다. 그것이 역사다. 오늘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를 바라보는 것. 지리산 뱀사골 계곡과 달궁계곡에서 우리는 온몸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과거로부터 오늘에 도착해 있는 역사적 인간인 우리를. 지리산 계곡물이 섬진강으로 흘러가면 임실과 순창의 어름에서 또 크게 물살을 뒤척인다. 기괴한 물속 바위로 유명한 장군목 유원지다. 귀 맑은 사람이라면 여름밤 이곳을 흘러가는 물살의 기척에서 요강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 밤에는 또 높이 펼쳐진 하늘에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다슬기 같은 별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장군목 유원지에서 건져낸 다슬기에서는 별빛의 향기가 나는지도 모른다. 완주의 위봉폭포도 여름날 찾아가기 좋은 문학 명소다. 여름 한 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폭포수를 보고 있으면, 한낮의 열기를 지워낼 수 있다. 그뿐인가? 폭포의 수직 낙하를 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얹혔던 근심이나 시름을 통렬하게 씻어내는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무모하리만큼 겁 없이 뛰어내리는 폭포수 앞에서 여름날 조금은 게을러졌던 삶의 자세를 고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이 허락해준 인간의 시간, 가을 가을에는 다른 계절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자연이 만들었던 봄과 여름의 맹렬했던 시간이 조금씩 소멸해가면서 비로소 인간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자주 우리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 단풍 흐드러진 산자락에서 더 그렇다. 눈은 자연이 만든 소멸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지만, 마음에서는 한껏 풍부해진 자기감정에 충실해진다.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산사(山寺)다. 가을 햇살이 고즈넉하게 떨어지는 절 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에 단풍이 물들어 있다. 가을 산사에서 만나는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간다. 그래서 자주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완주 송광사에서는 하루가 일 년처럼 흘러간다. 발소리를 죽이며 대웅전 앞에 서면 부처의 마음에 닿는 것 같다. 눈을 들면 사찰의 단청 빛과 산자락의 단풍을 구분할 수 없을 듯하다. 송광사를 지나 위봉사에 도착하면 그곳은 또다른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곳에는 시간이 없다. 무시간의 공간이다. 그래서 위봉사에서는 절도 없고 나도 없어진다. 그냥 텅 빈 무(無)의 세계에서 오로지 간절한 마음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 마음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그곳에 서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경내를 걸으면 산그늘에 발자국이 새겨지고,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져 말소리마저도 그대로 스님의 미소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한나절 위봉사 경내에 머물다 보면 침묵이 한 편의 시처럼 영혼에 깊이 새겨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완주의 사찰 가운데 가을에 가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곳은 화암사이다. 시인 안도현이 쓴 것처럼, 화암사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절이다. 특히 가을볕이 그 어느 곳보다 환하고 따스하게 내린다. 곱게 늙어가는 절 마당에 서 있으면 삶이 한결 가뿐해지고 단순해진다. 남들과 시비를 가리고, 손에 뭔가를 쥐고자 애썼던 날들이 그저 야속해진다. 그래서 가을 화암사를 다녀간 사람들은 영혼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져 있다. 화암사를 지나면 대둔산과 마주하게 된다. 단풍이 물든 대둔산의 가을은 서늘하다. 온몸의 피부가 잔뜩 긴장한 듯, 대둔산 앞에 서면 인간은 비로소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수천 년을 단단하게 서 있는 바위와 한 번도 그 자세를 고쳐본 적 없는 능선은 가을을 가을답게 해 준다. 그래서 대둔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저절로 가을을 걷는다. 아니, 신의 시간을 걷는다. △숨죽인 우리의 사랑 노래, 겨울 겨울을 걷는 사람에게는 이미 봄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그래서 겨울은 더욱 혹독하다. 새로운 계절을 잉태하고 있으므로, 겨울은 더욱 치열하게 자기를 수련한다. 그 수련의 깊이를 사랑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자기를 갈고닦는 일이 다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이고, 다른 존재를 조건 없이 기꺼이 품어주는 일이라면, 겨울은 한 번도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적 없는 시간이다. 겨울 실상사는 그런 점에서 사랑의 처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눈 내린 실상사 마당을 엇갈려 지나가는 발자국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도종환 시인이 「실상사-정도상에게」라는 시에서 “네가 만나야 할 것은 진여실상”이라고 말했을 때, ‘진여’의 모습에서 사랑이 보인다. 그럴 때 사랑은 세속의 모습도 아니고 탈속의 자세도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심의 영역에서 피어나고, 참된 자기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게 실상의 세계가 아닐까? 순창 회문산에서 어쩌면 ‘진여실상’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 장면이 회문산에 묻혀 있다. 이태의 남부군을 읽어보라. 그들은 이념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건 사람들이다. 눈 덮인 회문산 자락에서 꽁꽁 얼어붙은 몸을 깨워준 것도 사랑이었고, 죽어가는 이들의 눈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모습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회문산에 오른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 사랑을 품게 될 것이다. 임실 국사봉도 겨울에 다녀오기 좋은 명소다. 전망대에 오르면 눈 아래 옥정호가 지상의 하늘처럼 맑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사봉 전망대는 새해 일출을 맞이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멀리 산자락 너머로 뜨겁고 붉은 햇살이 솟아오를 때, 허연 입김을 내뿜는 감탄의 소리가 울린다. 꼭 새해 첫날이 아니어도 국사봉 전망대에 오르는 눈길은 특별하다. 서걱서걱 눈 밟히는 소리와 함께 마음의 무거운 짐이 하나씩 벗겨져 나간다. 그러나 겨울 진객은 따로 있다. 완주 비비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대로 새한도다. 고결한 정신과 순결한 마음이 견디어내는 혹한의 겨울 풍경처럼, 비비정에서 바라본 만경강은 으뜸이다. 과연, 비비낙안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넓게 펼쳐진 삼례 들녘으로 겨울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은 어떤 그림으로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찬란하다. 살얼음 낀 강가에 갈대가 제 몸을 부러뜨리고, 바람이 갈대의 심장을 차갑게 훑고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인간의 자리가 없이도 겨울은 저절로 깊어간다. 아쉬운 건, 그 겨울의 내면을 어떤 시인도 온전하게 글로 옮겨 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신(문학평론가, 우석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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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23.12.24 10:00

[전북의 문학 명소] 11. 뜻과 의지로 이름을 새긴 사람들

인걸은 지령이다. 영험한 땅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고, 그 인물이 있어 그 땅은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남원시·순창군·완주군·임실군에는 빛나는 행적으로 이름을 남긴 위인이 많다. △고려 말 남원에서 왜군을 물리친 황산대첩의 이성계(1335∼1408) △조선 초기 집현전 학사로 문화를 꽃피웠던 최덕지(1384∼1455) △임진왜란 때 이치전투를 이끌며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은 명장 황진(1550∼1593) △조선 영·정조 시대의 지리학자·실학자인 여암 신경준(1712~1781)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1∼1791)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이삼만(1770∼1847)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인 노사 기정진(1798∼1879) △동학 경전인『동경대전』을 쓴 수운 최제우(1824∼1864)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1944∼1960) 열사 등이다. △“천하는 만백성의 것” 혁명가, 정여립 정여립(1546∼1589)의 탯자리로 알려진 완주군 상관면 월암마을에 정여립공원이 들어선 것은 2020년이다. 정여립이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고 있는 기개에 찬 모습을 형상화한 철판 조형물이 있고, 그의 생애와 사상, 기축옥사 등에 관한 설명이 8개의 오석 안내판에 적혀있다. 최기우의 희곡 「정으래비」(평민사·2022)는 ‘천하는 백성의 것’이라고 외쳤던 전주 출신 사상가 정여립과 기축옥사를 소재로 했다. 반상의 귀천과 남녀의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던 혁명적 사상가인 정여립과 당시 억울한 죽음이 남긴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여립의 삶을 다루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민중이 있다. 차별 없이 고른 세상을 향한 정여립의 꿈을 잇는 이들이다. 홍석영의 장편소설 「소설 정여립」(범우·2008)은 기축옥사가 뜻하는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 그 영향은 어떻게 남았는지 보여주고자 사료와 문헌을 탐구한 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서철원의 장편소설 「별의 노래」(짓다·2023)는 마이산이 있는 진안의 밤하늘에 그려진 별의 천문을 통해 정여립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상향과 판타지를 보여준다. 정여립의 죽음은 참혹하고 뜨악한 역사를 남겼지만, 푸른 댓잎 같던 그의 대동사상은 후세에 큰 울림을 남겼다. 백성으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한 그의 사상은 허균의 ‘호민론’과 정약용의 ‘탕론’으로 이어졌으며, 동학사상도 그 줄기로 엮여 있다. △임실치즈를 만든 신부, 지정환 임실성당은 대한민국 치즈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1931∼2019) 신부는 1964년 6월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가까이 지켜본 신부는 산양을 키우며 사제관에서 산양유를 이용해 치즈를 만들었다. “치즈!” 사실, 지 신부는 벌써 며칠 전부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산양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꼼꼼히 헤아려 본 터였다. 연유나 분유 같은 가공식품도 고려해 보았지만, 얼핏 생각해도 엄청난 시설비용을 도저히 감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그리하여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치즈였다. ∥고동희·박선영의『치즈로 만든 무지개』 중에서 1961년 1월 임실성당 주임대리로 6개월 동안 근무했던 지정환 신부는 부안성당을 거쳐 1964년 6월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다시 부임했다. 척박한 땅,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그가 찾은 것은 산양유를 활용한 치즈 만들기. 그러나 치즈 제작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산양유를 약탕기로 졸이고, 비눗갑에 담아 숙성시키고, 유럽의 치즈공장들을 둘러보며 방법을 배워오는 등 숱한 도전과 실패 끝에 치즈 만들기에 성공했다. 지정환 신부의 삶과 의지는 고동희·박선영의『치즈로 만든 무지개: 지정환 신부의 아름다운 도전』(명인문화사·2007)과 박선영의『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와 무지개 가족의 신화』(명인문화사·2014) 두 권의 책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1959년 12월 사제의 신분으로 한국에 온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 신부가 전주·부안·임실·완주·서울 등에서 만났던 사람들, 임실치즈의 태동을 함께한 사람들, 다발성신경경화증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오히려 평생 장애인들의 아버지로 살며 무지개장학재단을 이끈 이야기들은 큰 감동을 선사한다. 임실치즈테마파크에도 지정환 신부와 임실N치즈의 이야기를 담은 임실치즈역사문화관과 지정환신부역사관이 있다. △붓으로 지켜낸 구국의 신념, 조희제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寺洞)은 대한제국 말의 학자이며 순국지사인 조희제(1873∼1939)의 삶터이며, 1895년부터 1919년까지 절의를 세운 의열선비와 의병들의 실적과 문헌을 수집해 편찬한『염재야록』을 집필한 곳이다.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란 조희제는『염재야록』 집필을 마음먹고 수십 년 동안 한말 의병장과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의 행적, 독립투사의 항일사적, 3·1운동 애국투사의 공판 등을 찾아 재판 실황을 기록했고, 자료를 수집해 야사 형식으로 엮었다. 그러나 1938년 책을 쓴 일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조희제를 비롯해 서문과 발문을 쓴 최병심(1874∼1957)·이병은(1877∼1960)과 교정을 본 김영한, 서역을 맡은 조현수 등 많은 인사가 임실경찰서에 연행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잔혹한 악형과 고문을 당했다. 다행히 조희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염재야록』을 두 개로 편집해 책 표지에 ‘덕촌수록(悳村隨錄)’이라고 쓴 뒤, 한 질은 책상에 두고, 한 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덕촌’은 조희제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키는 말로 ‘덕치(덕촌)의 이야기를 기록한다’라는 뜻으로 이목을 피하려 한 것이다. 고문받던 조희제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일경은 고문의 만행을 인멸하기 위해 병보석으로 석방, 임실병원에 입원시켰다. 이후 조희제는 일제가 단발 종용을 강요하자 “저들에게 모욕당하고 구차히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의를 지켜 죽음을 맹세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그가 남긴 소중한 기록들은 후세에 길이 전해져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춘향의 정절을 이은 최봉선 춘향사당은 남원을 배경으로 한 고전소설 「춘향전」의 여성 인물인 성춘향의 일편단심을 되새기고, 그녀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영정각으로 1931년 광한루원에 세웠다. 춘향사당은 이곳을 건립하고 오랫동안 제사 지내는 일에 앞장섰던 남원예기조합의 기생 최봉선(1900∼1974)의 꿋꿋한 삶과 의지가 담겨 있어 더 의미가 깊다. 1931년 단옷날 새벽,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기생 100여 명이 사당 앞에 줄지어 섰다. 남원 권번 기생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기생들이었다. 남원 출신으로서 경성뿐 아니라 전국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화중선, 이중선 자매도 와 있었다. ∥김양오의 동화 「백 년 동안 핀 꽃」 부산 출신인 최봉선이 남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24년 봄. 열녀 춘향에 대한 흠모의 정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던 그녀는 남원의 유지들과 사당을 짓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일제 관헌은 모든 협조를 거절했고, 몇몇 사람은 ‘천한 퇴기의 딸 춘향의 사당 건립은 점잖지 못한 일’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최봉선은 뜻을 굽히지 않고 기금 2백 원을 내놓았으며, 동료들과 모금 운동에 나서 건축비 1천 2백 원을 모았다. 초상화는 ‘진주의 화가 강(姜) 모 씨’에게 맡겼으며, 1929년 춘향의 생일로 여긴 음력 4월 8일에 준공식을 올렸고, 1931년 6월 3일 춘향사당 낙성식과 제전을 열었다. 최봉선의 삶은 김양오의 동화『백 년 동안 핀 꽃』(빈빈책방·2021)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초의 지역 축제 춘향제를 만든 최봉선’을 부제로 한 이 동화는 1931년 제1회부터 1967년 제37회까지 제주(祭主)를 맡아 춘향제향을 모셨고, 한국전쟁 때에는 춘향의 영정을 주천면으로 옮겨 전쟁의 화마에서 지켜낸 최봉선의 결의에 주목한다. 우리말과 우리글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일제강점기에 춘향제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되살리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 속 인물인 춘향을 현실 세계로 불러오고, 이야기 속 춘향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 후손들의 본보기로 삼은 것은 춘향을 향한 열녀 최봉선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춘향사당과 춘향 영정은 춘향의 정절을 이은 최봉선과 같은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감동을 준다. /최기우(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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