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6-02-13 20:41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화재·학술

김제서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 제8회 연수회 열려

문예지 출판 허가 기준과 신인 추천권, 문학 관련 협회 가입 조건 등을 강화, 수시로 운영상태 등을 파악해 공시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28일과 29일 김제 모악산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2010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 제8회 연수회'에서 정희수 한국녹색문학아카데미 회장은 "국내 작가들의 활동 기반이 약화되고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문학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기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며 "주범은 신인 양산이며, 종범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문학지 탓"이라고 지적했다.정회장은 "현재 문예지는 잡지 운영의 용이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인을 무책임하게 배출함으로써 '끼리끼리 문학'의 울타리만 견고하게 쌓고 있다"며 "일정한 기간 수준급의 작품을 수록한 문예지에게만 신인 추천권을 주고, 실력있는 추천위원회를 조직해 투명하게 추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배출한 신인에 대해서는 연수 등을 통해 필력을 육성하도록 하고, 일정 수준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신인이라면 일정 기간 기회를 줘 연수받게 하는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조미애 전북풍물시동인회 회장 역시 "등단이라고 하는 절차가 문학의 치열성과는 크게 상관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며 "각종 문예지에서 양산한 문인들로 인해 발생한 아마추어문학에 대한 우려는 오래전부터 한국 문단의 심각한 과제"라고 동의했다.그러나 정군수 전주문인협회장은 "프로작가와 아마추어작가를 구분하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주관적이고 모호하다"며 "글쓰기가 서툴고 표현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들이 등단한 동인지를 폄하하고 아마추어작가로 매도하는 것은 문인의 길을 함께 가는 도반(道伴)의 자세라고 할 수 없다"고 반론했다.이날 주제는 '아마추어 문학의 새로운 지평과 수준 향상을 위한 과제'. 총론을 발표한 오하근 원광대 명예교수는 "이번 주제가 아마추어적인 문학과 문학인이 만연돼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며 "그들이 문학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가 되고 있듯 문학을 하고 문학을 읽고 문학을 아는 인구가 많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학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활용하고 문학인이란 라벨을 창작의 결과로 획득하지 않고 선전과 광고의 방편으로 취득한 사이비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사이비 문학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대표 김한창)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전북지역을 비롯해 대전과 광주 지역에서 150여명이 참가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8.31 23:02

'비운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 복원 개방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구한말 역사 현장이었던 덕수궁 중명전이 원형 복원돼 일반에 개방된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26일 서울 정동 중명전에서 간담회를 열고 내부를 역사현장체험공간인 상설전시관과 교육공간으로 조성해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오는 29일 일반에 개방한다고 밝혔다. 중명전은 1897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의 설계로 건립된 황실도서관이었으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화재가 난 이후 고종황제가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사용하면서 긴박했던 역사의 중심이 됐다.이후에는 일제의 훼손으로 외국인 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25년에는 화재로 내부가 타는 재난도 겪었다. 1976년에는 민간에 매각돼 사무실 등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1983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고 2003년 정동극장이 이를 인수한 데 이어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소유권을 갖게 되면서 사적 124호인 덕수궁에 편입됐다.문화재청은 이듬해인 2007년 12월부터 2009년 말까지 원형복원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는 공간을 넓히려고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회랑 등을 건립 당시의 모습으로 고치고 아치 형의 벽돌 구조를 되살리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실내의 벽난로와 앞마당의 우물도 원모습대로 복원했다. 일부 흙에 묻혀 있던 지하도 복원했다. 중명전 내부에는 대한제국 말 중명전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장이 마련됐다.1층 전시실은 중명전의 연혁을 정리한 '중명전의 탄생', 을사늑약의 현장을 보여주는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 을사늑약 후 고종과 대한제국의 노력을 담은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헤이그 특사의 활동을 조명한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등으로 구성됐으며, 2층에는 고종의 집무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살핀 '고종과 중명전' 전시가 마련됐다.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2전시실은 실제로 늑약이 체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방으로, 뒤편에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했던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이 감금당했던 '마루방' 추정 공간도 보인다. 고종 황제의 집무공간으로 쓰였을 2층에는 고종이 있던 자리에 대한제국 국새의 복제본을 전시했다.중명전 관람은 수용인원과 문화재 보호 등을 고려해 1일 6회 실시하며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회당 25명씩으로 관람인원이 제한된다. 관람료는 무료다. 문화재청은 27일 오후 4시 중명전 현장에서 후손 등 관계자를 초청해 중명전의 현판식과 전시 개막행사를 연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8.27 23:02

이천오층석탑 반환 위한 첫 국제심포지엄

일제 강점기에 반출돼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뒤뜰에 세워져 있는 이천오층석탑을 환수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한일 관계 모색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오는 27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청 1층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심포지엄은 이천오층석탑 환수위원회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공동 주최하고 문화재청, 경기도, 영월암, 미란다 호텔이 후원한다. 일본에서는 태평양 전쟁 유족찾기 지원 활동가인 기쿠치 히데아키씨가 참석, '일본에서 본 이천오층석탑 환수 운동의 현안과 문제점'을 주제로 발표한다. 환수위에서는 박창희 실무위원장이 '이천오층석탑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 연구', 이상구 상임위원장이 '이천오층석탑 환수운동 추진경과 및 향후 활동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어 한국문화재반환 네트워크의 켄 아르미추씨, 한.일시민사회 100년 네트워크의 이대수씨, 심주완 조계종 총무원 문화재팀장, 강덕희 일본 조치대 교수가 토론을 벌인다. 환수위 김나영 사무국장은 "한일 병합 100주년을 맞아 민간 단위의 문화재 환수운동을 통해 새로운 한일 관계 모색을 위한 국제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천오층석탑 등 불법 유출된 우리 문화재 찾기에 대한 국내외 여론도 확산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천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 이천시 관고동에 세워졌으나 조선총독부가 1914-1915년께 석탑을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1918년 오쿠라재단과 관련된 오쿠라토목조(현 다이세이건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이천 시민.문화단체는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이천오층석탑 반환을 위해 3년이 넘게 활동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8.23 23:02

"학술 연구·전시 등 좋은 곳에 써달라"

순흥 안씨 집안 호구단자(戶口單子)가 전북대학교 박물관(관장 김승옥)에 기증됐다.호구단자는 3년마다 실시하는 호구조사 때 호주가 집안의 호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관에 제출하던 낱장 문서. 이번에 기증된 호구단자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후반 전남 광양현 다압면 죽천리에 살았던 순흥 안씨 집안 것으로, 1795년~1885년에 작성된 고문서 27점이다.특히 한 집안의 낱장 호구단자가 아니라 90년 동안 25번 호구조사에 응했던 일괄문서로 3대에 걸친 호구상황이 기록돼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호구단자에는 선대에 정3품인 절형장군(折衡將軍)의 품계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어 무반(武班)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명(改名)한 이들의 이력과 식솔 수 등이 자세히 나와있다.전북대에 재직 중인 이철량 교수의 권유로 기증을 결심한 이교수의 처남 안정일씨(대전 거주)는 "훼손돼 가는 고문서를 학술연구나 전시 등 좋은 데에 써줄 곳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전북대 박물관 신축 소식을 듣게 됐다"며 "새로 지어지는 박물관이 국립박물관 못지 않은 수장시설과 보존·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해 유물이 더 좋은 환경에서 보관·관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했다"고 말했다.김승옥 전북대 박물관장은 "전북대는 고문서 부문에서 국립대로는 최고의 보유량을 가지고 있다"며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하거나 기탁하는 분들의 뜻을 이어 감동적인 박물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8.23 23:02

[용담댐 담수 10년, 빛과 그림자] 용담댐 수몰지구가 살아 숨쉬는 곳

진안역사박물관과 진안용담호미술관은 용담댐 수몰지구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에도 살아숨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지난 5월 용담면 수천리에 개관한 용담호미술관은 수몰지구가 고향인 한국화가 김학곤씨와 수몰지구는 아니지만 진안에서 태어난 서예가 여태명 원광대 교수가 입주해 작업하며 운영한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시는 수몰지역 어르신들을 찾아가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훈을 직접 붓글씨로 쓰도록 한 것. 전시가 끝난 후에는 작품들을 어르신들의 자녀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미술관 개관을 축하하며 전국에서 보내온 엽서들도 전시했다. 유성엽 국회의원, 류명식 홍익대 교수를 비롯해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보내온 엽서를 붙여 '진안 용담호미술관'이란 글자를 완성한 것도 재밌다.용담호미술관은 담수 10주년을 맞아 10월 9일과 10일 이틀간 기념사업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추진하고 있다. 김학곤씨의 용담고을 그림전 '향수', 창작판소리 '용담가' 제작 및 무용과 함께 하는 여태명 교수의 서예 퍼포먼스, 수몰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옛 가요 부르기 대회 등을 메인 행사로, 용담호 디지털 판화, 용담호 달력·엽서·인장만들기 체험 등이 부대행사로 기획됐다.여태명 용담호미술관장은 "아직 예산 확보가 과제로 남아있지만, 용담댐 10주년의 의미를 살리기 위한 기념사업은 꼭 필요하다"며 "특히 고향을 상실한 수몰민들의 한을 예술로 위로하고 승화시키기 위한 자리는 절실하다"고 강조했다.향토사 성격의 진안역사박물관은 고고관에 용담댐 수몰지역에서 발굴된 선사·고고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민속관 터치 스크린을 통해 수몰지역의 영상과 자료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2006년 개관기념전으로 '다시 보는 용담-땅, 물, 그리움…'전을 기획한 이래 올해는 1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으로 '용담의 기억과 향수'(가제)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길순 학예사는 "용담 수몰지역의 지역사적 특징을 종합적으로 구성하는 동시에 근현대 생활을 재구성해 진안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며 "용담댐 수몰지역과 관련된 역사자료, 기록회화와 사진, 다큐영상, 생활민속자료, 이주민 구술 생애사 등을 담아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8.19 23:02

[용담댐 담수 10년, 빛과 그림자] ⑨용담 수몰지구 문화유적

용담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수몰되는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했다.발굴조사는 용담댐 축조로 인해 수몰되는 지역, 진안군 용담면과 상전면, 안천면, 정천면 지역을 대상으로 1995년 12월부터 2000년까지 4차에 걸쳐 이뤄졌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국립전주박물관, 군산대 박물관, 조선대 박물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호남문화재연구원 등이 참여했다.수몰지구에서 발굴된 유물은 969점.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를 아우르는 유물들은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일부 진안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이 2003년에 기획한 '수몰된 옛 사람의 흔적, 용담'전에 특별논고 '용담댐 수몰지구의 발굴성과와 과제'를 쓴 윤덕향 전 전북대 교수는 "용담댐 수몰지역에 대한 조사에서 여러 가지 의미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며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가 미진한 전북 동부지역에 대한 본격적이고 대규모 조사가 이뤄졌다는 점만으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조사를 통해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각종 문화유적을 조사하고 확인함으로써 이 지역의 고대 문화와 역사적 좌표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윤 전 교수는 용담댐 수몰지역 조사의 가장 큰 성과로 안천면 삼락리, 정천면 여의실, 모정 등 고인돌 관련 유적을 꼽았다. 특히 고인돌 축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유구와 그에 이어지는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의실 유적의 조사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시대별로 분류하면, 구석기 유적의 확인은 전북지역 고고학 연구에서 시간적 외연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금강 상류인 진안고원에 자리하고 있는 진그늘유적은 전북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된 구석기 유적으로 후기 구석기 늦은 단계의 문화양상을 보여주는 대규모 생활유적이다.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은 용담댐 수몰지구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데, 전북 내륙지방에서 드물게 발견되던 빗살문 토기 관계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청동기시대 생활유적으로 정자천 여의곡에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석묘 상석을 옮기는 상석 이동로로 추정되는 길이 발견됐다. 이 상석 이동로는 상석의 이동방법과 이동방향, 채석장의 설정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무덤은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에는 지석묘가 축조되고, 이어 석관묘·석개토광묘·옹관묘 등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와정 유적이나 황산 유적 등 삼국시대 유적에 대한 조사를 통해 이 지역이 가지는 공간적 위치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도 확보됐다. 고려시대 각종 묘제가 조사된 수천리 유적 역시 하나의 성과다. 수천리에서는 고려시대 석곽묘 53기, 고려·조선시대 토광묘 37기, 조선시대 석곽묘 5기, 회곽묘 3기 등 총 98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특히 고려시대 유구에서는 11세기의 해무리굽청자와 12∼13세기의 다양한 청자와 청동유물, 도기들이 출토됐다. 이 시기 유물들을 통해 당시인들이 무덤을 선정할 때 사신사상 등과 같은 사상체계에 입각했음을 알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청자를 통해 청자가 변천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전문가들은 용담댐 수몰지역의 발굴조사를 통해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구명하는 기초자료로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8.19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7)백제 유일의 석비 '사택지적비'

사택지적비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본인들이 부여 부소산 일대에 신궁을 조성하면서 도로에 깔 석재들을 수습해 쌓아놓았는데, 1948년 부여를 탐방하던 황수영 씨가 관북리 도로변 돌무지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화강암으로 높이 102cm, 폭 37.9cm, 두께 29cm로 전면에는 1변이 7cm인 정방형의 정간선을 치고 그 안에 글자를 음각하였다. 1행 14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4행까지 56자가 판독되었다. 이후에도 명문이 있으나 5행부터 반듯하게 잘려나가 알 수 없다. 다만 발견된 석비의 전면 글자가 거의 온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판독한 글자를 토대로 대략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의 좌측면(비의 입장)에는 원 안에 봉황을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해 놓은 것이 보인다.우선 판독된 명문의 내용은 이렇다."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지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을 슬퍼하여, 금을 캐어 진당(珍堂)을 짓고 옥을 캐어 보탑(寶塔)을 세우니, 그 웅장하고 자애로운 모습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여 구름을 보내고, 그 우뚝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런 빛을 머금어…"(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峨峨悲, 含聖明以…)한문에서 운율을 느낄 수 있도록 대구(對句) 형식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문장을 사륙변려체의 형식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구를 중시한 조밀한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백제시대 금석문의 문학성을 편린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비문 첫머리의 갑인년은 그 자체로는 연도를 추정할 수 없으나, 비의 주체인 사택지적이 의장왕 때의 인물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의자왕 14년, 즉 654년으로 산정하였다. 그 다음에 나오는 '柰祇城' 세 글자는 부여를 사비성으로 지칭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지명이 등장하여 역사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내지성에 대해서는 부여 인근의 은산(恩山)과 매라(邁羅)가 지목되기도 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사비성으로 일컬어지는 부여의 또 다른 명칭이거나 혹은 부여에 소속된 인근지역의 명칭일 것이다. 그것은 비의 주체인 사택지적의 지위가 당시 제2인자인 좌평(佐平)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신지는 적어도 그에 걸맞는 상징적인 지명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미스테리가 있다. 지적(智積)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642) 2월조에 흠명천황을 조문하러 온 사신을 통해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같은 해 7월조에 다시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 등이 (천왕을) 배알했다." "백제사신 대좌평 지적과 그 아들인 달솔(達率), 은솔(恩率)인 군선(軍善)이 왔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태식(연합신문)은 미륵사지 출토 사리봉안기에 보이는 '좌평 사탁적덕'이 일본서기에서 641년 11월에 죽었다고 말한 '대좌평 사택지덕'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이후 명문에서 세월이 쉬이 감을 슬퍼하며 진당을 짓고 보탑을 세웠는데,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성스런 빛을 머금었다는 표현은 불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비의 좌측에 보이는 봉황무늬가 범상치 않다. 백제대향로의 봉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택지적은 불교보다는 장생불사를 염원하는 도교적 신선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문의 서체는 단아한 해서로서 강한 골기가 엿보인다. 남북조시대의 금석에서 보이는 해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전형을 이루는 당해보다는 훨씬 소박한 결구를 지니고 있다. 귀중한 백제사료의 하나이자 유일한 백제 석비라는 점에서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8.18 23:02

'광화문 복원'에 부쳐 - 이보영

서울 '광화문'이 참으로 오랜만에 복원돼 8월15일 공개됐다. 그 동안 '광화문'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온 겨레에게는 가슴 설레는 뉴스가 아닐 수 없다.'광화문'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증인이다. 1910년 8월 29일로 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병탄된 순간, 그 문은 닫혔고, 그 후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으로 인하여 해체되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폭격기의 폭격으로 문루(門樓)가 탔고, 4·19혁명과 5·16쿠데타도 목격했다. 그래서 '광화문'은 단순한 궁성 정문(正門)이 아니라 우리의 파란 많은 역사 과정을 우리와 함께 겪은 나머지 우리의 피붙이 같은 느낌을 주어왔다. 그 정문을 허무는 망치 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것과 같았고, 그것이 불에 타면 우리의 피부가 타는 느낌이었다.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순간부터 '광화문'은 조선조 궁궐을 떠나 피압박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고종과 순종은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압에 결사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권의 상징인 '광화문'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렸던 것이다.'광화문'은 궁성의 다른 세 개의 문과 달리, 국권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경술 국치 이후에도 말썽에 휩싸였다. 첫 번째 말썽은 1923년 일제가 '광화문' 뒷 마당에서 '공진회(共進會)'를 개최함으로써 초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상품박람회'인데, 그 때 일제는 '광화문'을 온통 멍석으로 둘러싸버렸던 것이다. '광화문'을 아끼는 조선인에게 그 누추한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테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이 작가 염상섭이었다. 그는 「세 번이나 본 공진회」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쓴다.일본의 柳宗悅군이 와서 [광화문을]보았다면 멍석에 싸인 잔해(殘骸)를 붙들고 방성통곡(妨聲痛哭)이나 아니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은 한국미술을 사랑하고 아낀 일본의 미술학자이지만, 조선조 궁전의 정문이 '멍석'으로 너절하게 둘러싸인 모습을 '시체'에 비유했을 때의 염상섭의 울분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다.그러자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광화문'철거에 착수함으로써 더 큰 말썽을 일으켰다. 가령 야나기는 「소멸시키려고 하는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강제로 사라져가는 '광화문'을 슬퍼하면서 총독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예상 외의 항의에 부딛치자 일제는 헐어버린 '광화문'을 궁궐 동쪽의 '건춘문(建春文)'북쪽에 옮겨지었다. 결코 가서는 안될 어색한 위치에 선 그 '광화문'은 이전의 위세와 생명력과 미(美)를 잃고 있었다. 염상섭은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장편소설 「삼대」에서 그 '광화문'을 쓸쓸한 벌판의 '유령'같다고 비꼬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을 것이다.'광화문'은 8·15광복 후에 수십년 동안 방치되고 잊혀져 왔었는데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불완전하게나마 중건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또 한번 말썽이 일어났다. 문화재청에서 '광화문'의 '한글 현판'을 본래의 '한자 현판'으로 바꾸려고 하자 '한글 학회'에서 들고 일어나 반대한 결과 '한글 현판'보존론과 그 반대론이 충돌햇던 것이다.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정통성이 없는 통치기관이어서 '광화문'철거는 야만적 횡포였다. 그러나 '한글 현판'의 정통성이라는 문제는 예술적 정통성의 문제다. 모든 문화유산으로서의 예술품의 복원은 원형대로 해야 하며, '광화문'의 경우 그 '한글 현판'은 '건축문'을 비롯한 세 개의 궁성 문의 '한자 현판'과 조화되지 않는다. 문화유산과 관련된 역사의식은 전통의식이다. '한글 학회'사람들에게는 전통의식이 없다.이렇듯이 말썽이 반복되어 온 '광화문'은 침묵을 지켜왔다. 너무나 사연이 깊은 침묵이다.민족의 고난을 안고 본의 아닌 말썽도 일으킨 '광화문'이 경술 국치 100주년 8월 15일에 '한자 현판'을 달고서 겨레에게 공개됐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 복원 소식을 듣는 기쁨은 착잡하다. 망국한(亡國恨)을 안고 한국전쟁의 피해까지 받은 '광화문'복원의 기쁨은 상처입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지울 수는 없고 지우려고 할 것도 없다.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그 상처를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광화문'에 대한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이보영(문학평론가·전북대 명예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8.16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6)백제시대 사지출토 사리유물

최근 몇 년 사이에 백제시대의 사지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로 꼽히는 무녕왕릉 발굴에 이어 왕흥사지와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역사학계에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들이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 백제시대 불교연구는 물론이고, 발굴된 유물 중에는 정사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명문들이 포함되어 있어 고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예사 연구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 있는 발굴이었다.1995년 부여 능산리의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창왕'이라는 명문이 선명한 화감암 재질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이 출토되었는데 안에 봉안되었던 사리기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석조사리감의 양면에는 각각 10자씩 나누어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백제 창왕 13년 정해(567)에 창왕의 매형과 공주가 함께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간기를 가진 귀중한 유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조에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창왕은 곧 위덕왕임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6년 5월 30일 국보 제288호로 지정되었다.뒤이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3중구조 사리구(舍利具)를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청동제 사리함 안에 은제 사리병을 넣고, 다시 은제병 안에 작은 황금사리병을 넣었다. 청동사리함 겉면에는 명문이 있는데, 5자씩 6행에 걸쳐 모두 29자(제6행은 4자)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그런데 명문을 판독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도출되었다. 정확한 판독을 위해서는 우선 명문을 서체와 문자학적 입장에서 면밀하게 고증할 필요가 있으며, 다음으로 판독된 석문을 정확하게 해독하는 일이다. 일차 공개한 석문은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며, 그를 토대로 번역하면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물이 공개된 후 亡자를 三으로 보아야 하고 葬자는 묻을'예'자로 보아야 한다거나, 立刹은 절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탑의 찰주(刹柱)를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이체자에 대한 논란도 그 중 하나이다. 과학적인 분석과 더불어 시대적 입장에서 치밀한 서체분석이 선행되어야만 정확한 석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의 2월 15일은 단순히 사리를 봉안한 날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그 날이 바로 부처님의 열반일에 해당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역사적 의미는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또 2009년 1월 14일 백제 제30대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1호 익산미륵사지 석탑 가운데 서탑(西塔)의 기단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진신사리는 또 한번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사리기가 출토된 것은 2007년 왕흥사지 목탑터에 이어 두 번째이며, 유물 중에는 앞뒤면에 총 193자가 새겨진 금제사리봉안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그동안 전해오던 선화공주에 대한 일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굴된 유물들은 그 해 6월 27부터 7월 26일까지 미륵사지박물관에서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및 진신사리 특별전'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명문의 서체는 왕흥사지 출토 사리함과 비교하여 훨씬 정제된 체세를 보이고 있어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만 그것이 백제시대의 미감을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8.11 23:02

조선침탈 상징 동상 서울시 무관심 속 훼손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일제 강점기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1860~1939)의 업적을 기려 세운 동상 일부가 당국의 관리 소홀로 훼손된 것으로 확인돼 역사의식이 모자란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3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옛 조선통감관저 터에 방치됐던 하야시 동상 좌대 판석의 글자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 중 '조(助)'자의 좌변과 '군(君)' 자의 '입 구(口)' 부분이 깨졌다. 훼손 사실을 처음 발견한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지난달 30일 통감관저 터에 갔다가 일부 글자가 파손된 것을 발견했다"며 "좌대 옆에 놓여 있던 돌로 글자가 새겨진 부분을 누군가 내리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야시 곤스케는 1899년부터 7년간 주한공사를 지냈으며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협약 체결 등에 깊숙이 관여한 조선침략의 원흉이다. 문제의 동상은 1936년 그의 업적을 기념해 통감관저 앞뜰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동상은 그동안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혔다가 2006년 존재 사실이 다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의 잔디밭에서 하야시 동상 좌대의 판석 3점이 발견돼 이 일대가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공포된 조선통감관저 자리였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 판석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해 보존대책을 수립하라는 역사단체 등의 요구에도 학계 고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가 오늘날 훼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비난했다. 이순우 소장은 "수치스러운 역사를 통해서도 보고 배울 점이 있는 법이다.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이라고 감추고 지우려고만 하지 말고 최소한의 보존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8.04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5)부여궁남지출토 목간의 가치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부여) 남쪽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궁남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사비시대 백제왕실의 정원으로서 그 축조가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선다. 궁남지의 발굴은 1990년 궁남지발굴조사단(단장 윤무병)에 의한 1차 조사와 국립부여박물관이 1991년에서 1993년에 걸쳐 2차 및 3차 조사를 실시하였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조사결과는 2007년 3월 「부여궁남지 발굴조사보고서(1~3차)」에 수록되었다.1995년, 궁남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한 편의 목간은 곧바로 관련 학계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역사학계에서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백제시대의 새로운 기록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유물로 인정되었고, 서예계에서는 백제시대 친필로서 서예사적 의미가 담긴 선명한 목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목간은 대체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나무를 평평하게 깎아 글씨를 쓴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기록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1차 자료이다. 특히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은 그 내용과 형식에서 특이한 점이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오늘날 1500여 년의 세월동안 간직해 온 생생한 필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음은 실로 안복이 아닐 수 없다. 발견 이후, 적외선 촬영을 통하여 보다 선명한 필획을 확보하고 이에 대한 해독도 이루어졌다. 모두 31자의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백제의 정치 및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다. 목간의 앞면에는 "서부(西部)의 후항(後巷)에 사는 사달(巳達)·사사(巳斯)라는 사람은 21세 이상의 사람……, 귀인(歸人) 중에 16세 이상 20세 이하인 4명, 16세 이하인 2명이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利源)에 가서 논 5형(形)을 개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의 이해를 위하여 중국의 사서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도성 내 민가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수서(隋書)」 백제전에도 "도성 내에 5부가 있고, 부에는 5항이 있는데 사인들이 거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에는 5부(部)가 5항(巷)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독된 글자 중에는 연령대를 뜻하는 글자로서 정(丁)·중(中)·소(小)가 있는데 「당령집유」에 의하면 "3세 이하를 황(黃), 16세 이하를 소(小), 20세 이하를 중(中), 21세 이상의 남자를 정(丁)이라 한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보이는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利源)은 백제의 왕후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남제서」에는 동성왕 12년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또 중국 요서에 진출한 백제군이 위기에 처하자 대륙에 장군을 파견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자 沙法名을 邁羅王, 贊首流를 ?中王, 解禮昆을 後, 木干那를 面中侯로 임명하였다는 기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껏 중국의 사서에만 전해오던 매라(邁羅)에 대한 기록이 백제의 목간에서 재확인된 것이다. 이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 자리한 소국이었다는 관념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대목이다. 백제는 강력한 국권을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을 분할통치하는 지방관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에 대한 관리도 매우 치밀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이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내용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한다.서예적 측면에서 보면, 자체가 구속됨이 없는 활달함을 보이고 있어 그 필세가 자유분방하다. 자형이 평정하면서도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숙달된 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필묵의 사용이 일반에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형화된 석각문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8.04 23:02

'역사마을' 세계유산 등재 과정과 의미

특정한 유산(Heritage)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기회는 오직 한 번밖에 없다. 유네스코는 한 유산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두 번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등재 여부를 최종 판가름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앞서 각국은 등재 가능 여부를 면밀히 따져, 해당 유산이 등재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회의 직전에 등재 신청 자체를 철회하는 일이 많다. 그런 점에서 유네스코 자문기구가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에 앞서 유네스코에 제출하는 등재 후보지 심사보고서는 이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가늠자가 된다. 이번에 한국이 10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처럼 등재 후보지가 '문화유산'일 때는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라는 자문기구가 현지실사를 포함한 해당 유산에 대한 광범위한 심사를 한다. 한데 '한국의 역사마을'은 지난 6월에 공개된 ICOMOS의 평가보고서에서 '등재 보류'(Refer) 판정을 받았다. 등재 보류란 말 그대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미비점으로 말미암아 등재를 '보류'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류'가 등재 신청 자체를 해당 국가에 돌려보내는 '반려'(Defer)나, 등재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등재 불가'(Not Inscribe)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평가이긴 하지만, 등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반면, '등재권고'(Recommended for Inscription) 판정을 받으면 이변이 없는 한 그 유산은 세계유산위원회 회의를 통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지난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이 ICOMOS 평가보고서에서 바로 '등재권고' 판정을 받았다. 통상 '등재 보류' 판정을 받으면,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직전에 등재 신청을 철회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기 마련이다. 단 한 번밖에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조선왕릉과 함께 우리가 동시 등재를 추진한 '남해안 지역 백악기 공룡 해안'은 등재 보류 판정을 받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등재 신청을 철회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는 하회ㆍ양동마을에 대해서는 이런 우회 방법을 쓰지 않고 정공법을 채택했다. 이것이 결론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정부가 이렇게 나간 데에는 비록 ICOMOS 평가보고서에서는 '등재 보류' 판정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정부는 하회ㆍ양동마을이 왜 등재 보류 판정을 받게 됐는지, 그 이유를 분석했다. 그 결과 ICOMOS 평가보고서는 두 마을이 지닌 역사적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 마을에 대한 통합관리 체계를 문제로 삼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인 진단이 나오면 처방전도 나오기 마련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ICOMOS가 지적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이에 따라 이미 ICOMOS 평가보고서가 공개되기 전인 지난 4월에 이미 중앙정부와 지자체, 문화유산보존활용전문가와 마을 주민대표까지 모두 참여한 통합관리 체계인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대비는 ICOMOS 평가보고서를 예측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협의회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두 마을에는 경상북도와 문화재청이 함께 관여하는 통합관리 체계가 사실상 존재했다는 점을 유네스코에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2008년 말레이시아의 역사도시인 말라카(Malacca)와 조지타운(George Town. 喬治市)이 ICOMOS에서 '보류' 권고를 받았음에도 보완책을 마련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 전례가 있어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과 외교통상부 등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기간과 그에 앞서 유네스코 본부와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키를 쥔 세계유산위원회 21개 위원국에 대해 ICOMOS가 우려한 통합관리 체계의 마련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것이 효과를 발휘해 마침내 두 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난관을 뚫고 하회ㆍ양동마을이 '한국의 역사마을'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이는 한국의 세계유산 숫자 하나가 늘어났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역사도시' 또는 '역사마을'은 단순히 마을이 오래됐거나 고건축물이 많다고 해서 등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역사마을의 문화가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까지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에서 주목한 것은 이곳에 이어져 내려오는 유교문화였다. 지난해 9월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현장을 찾아 실사 작업을 벌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현지 실사단은 마을 종갓집에서 손님을 맞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씨족 마을이 하나가 되어 손님을 대접하는 데도 관심을 뒀다. 실사단은 또 직접 한국 전통 의관을 갖춰 입고 사당 참배 의식에도 참여해 큰절을 올리는 체험도 했다. 이들 마을에서 '씨족공동체'가 살아 있고, 유교문화도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이해한 셈이다. '한국의 역사마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청서 작성에 참여한 전봉희 서울대 교수는 이번 등재에 대해 "유교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철저히 지켜온 한국 전통의 유교문화가 세계의 인정을 받은 셈"이라며 "서구에서도 선구적인 동양학 연구자들은 이미 이런 평가를 하고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갖는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는 해석도 있다. 전 교수는 "과거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보편적 가치'를 강조해 (세계유산을) 서구중심적으로 해석했지만, 최근에는 다극화한 시각이 많이 수용되면서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며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도 이런 다양성 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8.02 23:02

세계유산 '역사마을', 이제는 관리가 문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31일(현지시각) 열린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마침내 한국의 10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이제는 관리가 더 시급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이번 위원회에 앞서 두 마을에 대한 현지실사를 포함한 심사를 담당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의 한국위원회 위원장인 고건축학자 이상해 성균관대 교수는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전통마을치고 관광지 개발이니 뭐니 해서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통마을 등재가 그만큼 힘든 것이며, 유네스코나 ICOMOS 쪽에서도 그만큼 까다롭게 나옵니다." 이런 언급은 세계유산 중에서도 전통마을은 유독 관리가 어렵다는 점을 예고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관광지 개발과 보존의 딜레마어느 곳이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관광객이 몰리는 '세계유산 특수'를 경험하게 된다. 지난해 세계유산이 된 조선왕릉만 해도 지난해에 견줘 외국인 관광객이 7배 늘었음이 최근 밝혀진 바 있다. 문제는 관광객이 느는 과정에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 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근에 대한 개발이 추진되는 일이 잦다는 점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들어서면 세계유산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유산의 보존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고, 최악에는 등재가 취소될 수도 있다. 실제로 독일의 세계문화유산이었던 엘베 계곡이 대규모 교량 건설이 문제가 돼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된 전례도 있다.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두 마을도 안심할 수 없다. 하회마을에서는 지난해 정부가 '4대강' 사업의 하나인 '하회보'를 설치하려 했다가 마을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시민단체와 문화재청 등의 지적을 받고 백지화한 경험이 있고, 양동마을에서도 역시 마을 앞에 건설되는 콘크리트 건물 때문에 경관을 훼손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안동시가 이달 초 하회마을의 입장객을 하루 5천명으로 제한하기로 한 것도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려들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을 전혀 짓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현실성이 없다.◆"'역사마을보존협의회'로 통합관리"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지난 4월 출범한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통해 일관성 있고 통합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방침이다. 협의회를 문화유산에 영향을 줄 만한 개발 행위 방지는 물론이고, 마을에 대한 보존 등을 관리할 책임 있는 협의체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협의회에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문화유산보존활용전문가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대표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보존과 활용에서 중용(中庸)을 지키는 데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협의체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을 함께 관리한다는 점에서 더 전문성을 띤 관리체계가 갖춰질 것도 기대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훼손을 막고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만든 것"이라며 관리가 문제화할 가능성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8.02 23:02

[전시] '고산 미인도', 21년 만에 일반인 공개

조선 숙종 때 학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미인도가 21년 만에 일반인에 공개된다. 전남 해남군은 다음 달 1일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임시 개관에 맞춰 고산 미인도 등 해남 윤씨 문화유산 4천600여 점을 전시한다고 29일 밝혔다.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인도(67cmX49cm)는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이 그렸다는 설이 있는 작품으로, 종가의 소장 유물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고 군은 전했다. 이 미인도는 사연이 많다. 지난 1989년 해남읍 고산유적지관리소에 전시된 이 미인도는 충남의 모 사찰 주지가 훔쳐 서울 인사동 고미술상에게 팔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이후 일본으로 밀매되기 직전 절도범이 붙잡히면서 해남 윤씨 종가의 노력으로 되찾을 수 있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지금껏 보관만 해 왔다. 오는 10월 중순 정식 개관할 유물전시관은 전체면적 1천830㎡,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전통한옥양식으로 전시관과 교육관, 사무동 등을 갖추고 있다. 1층 특별전시실에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미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국의 각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돼 있던 그의 작품을 빌려 와 전시한다. 지하 1층 제1전시실에는 해남 윤씨 종가의 학문과 예술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고문서, 유물이 전시된다. 제2전시관에는 윤선도 관련 고문서와 유물과 함께 낙서 윤덕희와 윤용의 그림세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군은 지난 2004년부터 남해안관광 벨트 사업의 하나로 100억원을 들여 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을 짓고 주변 정비 사업을 벌였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30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4)백제시대 최고(最古)의 석각 무녕왕릉지석

1972년 6월 29일, 충남 공주읍 금성동 송산리에 소재한 고분군 6기중 제5·6호분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7일째 되는 7월 8일, 고분에서 순금왕관과 지석 2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그 고분이 무녕왕릉이라는 것이 처음 밝혀졌다. 비록 간단하게 기술된 묘지이지만 고분의 주인공과 축조연대를 확인한 삼국시대 유일의 왕릉이 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斯摩)이며 모대왕(牟大王 : 東城王)의 둘째아들이다. 신장은 8척이요,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녕왕은 백제 25대 왕으로서 501년부터 523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재위시절 남조 양(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웅진시대를 이끈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집권 말기인 21년 11월에 강성해진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신을 통해 양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장문의 표문을 올렸으나 양 고조가 이를 묵살하자 후에 조공을 단절하였다. 조공을 받은 양 고조는 그 해 12월 무녕왕을 '使持節, 都督 百濟 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재위 23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으며,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발견된 두 개의 묘지명은 무녕왕과 왕후의 것으로서 백제시대 최고의 석각문이다. 묘지명의 기록을 살펴보면,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 나이 62세 계묘년(523) 5월 7일에 붕어하시어 을사년(525) 8월 12일에 대묘에 모셨다. 묘지명의 세운 것도 좌와 같다."라고 하였다. 묘지에 보이는 '영동대장군'은 앞서 양 고조에게 받은 명호이며, 삼국사기와 달리 무녕왕의 이름이 斯摩가 아닌 斯麻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무녕왕의 출생연도를 따져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삼국사기」 보다 묘지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한편 지석 위에서 오수전(五銖錢) 꾸러미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의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지로 사용할 땅을 매입한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일명 매지권(買地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최근(2007.9) 일본 히로시마대학의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는 묘지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이 이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는 것과 또 묘지명 뒷면에 새겨진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간지가 없는 것은 묘지부지로 서쪽 땅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기하여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백제 묘지명의 형식을 해소하는 연구성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추론은 불교에서 사후 세계를 서방정토로 인식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빈전에서 3년 정도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천장(遷葬)한 관례로 보아 당시 장사에서 불교의 논리보다는 도교적인 관습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하여 발견된 묘지명이 과연 묘지인가 아니면 매지권인가 하는 논란이 일었다. 이것은 천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묘지명이라는 역사적 사실 이면에 매지권을 기입함으로써 묘지의 신성함을 아울러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발굴된 묘지명을 최초로 탁본을 한 금석연구가 황수영 씨는 그 감회를 상세히 밝혔는데 서체와 관련된 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체는 사택비보다도 중국 육조체다운 웅건한 풍운이 풍기는 필치로 되어 있었다. 안정된 자체와 신중한 운필 등은 백제미술의 공통적 기질인 온화한 작풍이 느껴졌다. (중략) 이 돌에 새겨진 6행 52자의 글씨(서예)야말로 그대로 최고의 국보요, 큰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7.28 23:02

도난당한 문화재 1천200여점 되찾았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4∼5년 전 도난당한 고서(古書)와 서화 등을 장물업자를 통해 산 혐의(문화재관리법 위반)로 구모(65)씨 등 골동품 업자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6일 밝혔다. 또, 같은 장물 업자한테서 '연구 목적'으로 도난 서적을 다량 구매한 혐의로 모 대학 교양학부 교수 김모(47)씨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전국의 향교와 재실, 고택 30곳에서 도둑맞은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ㆍ유학자 주희의 서간을 조선 정조가 간추려 펴낸 책) 등 고서와 고문서, 서화 등 1천200여점을 2005∼2006년 장물업자 김모(47. 2007년 당시 구속)씨를 통해 사들인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구씨 등 골동품 업자 3명은 김씨에게서 '껌껌한 물건(도난품)이니 일정기간(공소시효 10년) 숨겨놔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고서와 그림 병풍 등 300여점(2천800여만원 어치)을 사들여 대부분을 3∼12배 이윤을 남기고 처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중국학을 연구한다'며 영규율수(瀛奎律髓ㆍ중국 당송시대 시선집)와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典ㆍ유교 경전의 일종) 등 고서 900여점을 1천200여만원에 사들여 대학 연구실과 자신의 오피스텔에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산 작품은 국보나 보물이 아닌 비(非)지정 문화재이지만, 조선 전기에 발간된 희귀 금속활자본 서적 등이 포함돼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경찰이 전했다. 이 문화재는 전북 고창 향교와 전남 영광 해주오씨 재실, 경북 영천 옥간정(玉磵亭), 인촌 김성수 생가 등 지방 주요 사적지에 보관돼오다 2005∼2006년 도둑맞았다. 경찰은 2007년 7월 붙잡은 절도단 16명 중 일부가 진술을 거부해 해당 작품의 처분 경로를 밝히지 못했으나, 이번 수사로 뒤늦게나마 문화재를 되찾았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에 적발된 골동품업자들은 작품의 낙관을 오려내거나 가짜 낙관을 찍는 수법 등으로 출처를 감추려고 했다. 압수한 문화재는 도난 피해를 봤던 향교 등에 반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구씨 등이 작품을 처분하는 데 이용한 A 문화재 경매 사이트가 무허가 서비스라는 점을 적발해 이 사이트의 대표 김모(55)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구씨 등 업자들이 다른 도난 문화재도 사들여 유통했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추가 수사를 벌이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27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