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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충청북도 중원군 가전면 용전리 입석(立石) 부락 입구에서 하나의 고비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비가 서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북지역에도 있는데, 필자가 지난 2005년에 김제지역의 명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만경의 입석산(立石山)에 송일중(宋日中)의 글씨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 탐방하였는데, 산 정상의 집채만한 거대한 자연석에 행서 필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탁본 전시한 적이 있다. 이곳의 지명도 그런 예이다. 학계에서는 발견된 비의 제액이 확실치 않으므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붙여 '중원고구려비'라 명명하였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 너비 55cm의 자연석을 다듬어 전면과 좌우측면에서 문자를 새긴 흔적이 보이는데 마모가 심하여 해독이 어렵다. 다만 高麗大王, 大使者, 大兄 등 고구려 관등이 보이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원을 지배한 5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와 더불어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비의 발견 이후 비문을 해독하면서 입비의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비문 해독의 문제는 그 내용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해야 하고, 새로 밝혀지는 내용들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각자의 설들은 그때마다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논란들은 아직까지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입비설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을 받았던 부분은 전면부에 보이는 '十二月卄三日甲寅'이라는 내용이었다. 12월 23일이 어느 해를 가리키며, 또 간지가 갑인일에 해당하는 때는 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러 설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 서기 480년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사처럼 논란이 많은 부분은 개인에 의한 단편적 연구에 의지하기보다는 애초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역량 있는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5월에 高麗大王 上王公와 新羅 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라는 구절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엿볼 수 있고, 고구려가 신라를 '東夷'로 칭하면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에서는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5세기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돌의 형식으로 보아 아직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4면으로 다듬기는 하였지만 자연석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글씨는 질박한 고예풍의 필획을 느낄 수 있으나 글자의 우측이 올라간 우견서의 형태를 보이고 있고, 자형이 해서의 결자 방식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광개토호태왕비보다 해서화된 느낌이 든다.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와 같은 장중한 맛은 부족하지만 서체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점제현신사비로부터 광개토호태왕비, 중원고구려비, 신라시대의 울진봉평비, 창녕진흥왕순수비에 이르기까지의 고대의 비들은 특정한 서체로 확정하기 모호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필획의 질박함과 결구의 소박함은 고졸미를 자아내어 토속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전에도 우리 민족의 고유서체를 운위한 적이 있지만 고대의 석각문자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자연과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형식을 매우 중시하는 후대의 비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지금까지 살펴본 광개토호태왕비에 관한 내용은 오히려 국부적인 문제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문의 일부 내용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비문 전체에 담긴 고구려의 상징성을 조망하는 일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비문 서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이다. 실상 100여 년에 걸친 종래의 연구결과를 검토해 보면 비문의 논쟁처에 대한 첨예한 의견들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정작 고구려의 상징성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연구결과에 의하면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단락은 고구려의 건국신화로부터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과 비문의 주인공인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술하였다. 둘째 단락은 광개토왕 재위시절에 행해진 정복활동을 기록하였고, 셋째 단락은 수묘(守墓)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일별하면 고구려 건국의 상징성과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이다. 고구려의 위대함을 상징할 수 있는 거대한 자연석에 장문의 비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고구려의 위대성과 민족적 포용력이다. 고구려의 위대성은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잘 나타나 있으며, 민족적 포용력은 수묘에 관한 기사에 잘 반영되어 있다. 묘를 지키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하지 않고 전쟁에서 노획한 포로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묘토록 한 것은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다음으로 비문 서체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입비된 시기를 살펴보면, 비문에 "以甲寅九月二九日乙酉"라고 보이므로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중국으로 치면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0년에 해당한다. 중국서예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면, 양한(兩漢)의 예서시대를 지나 위촉오 삼국시대를 거치고, 서진을 넘어 동진시대 왕희지가 난정서를 쓴 353년보다 61년이 지난 때이다. 굳이 중국서예사를 빗대어 시기를 설명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비에 나타난 서체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체와는 전혀 다른 서풍을 띠고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간의 서평을 보면, 중국의 섭창치(葉昌熾)는 "비의 글자 크기는 접시만큼 크며, 방엄(方嚴)하고 질후(質厚)한 서법은 예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다. 진(晉)의 의희(義熙) 10년에 건립하였으며, 고구려 건국의 무공(武功)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서 참으로 해동(海東) 제일의 보배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니시바야시(西林昭一)는 "서체는 예서이며, 거의 방형(方形)으로 하부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시기 한의 고예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유(悠悠)한 자태로 순고고아(醇古古雅)하다. 이것은 거의 같은 지역 같은 시기의 모두루제기(牟頭婁題記) 묵서가 서북지방에서 통용되던 서풍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 고구려의 상징성을 간과한 중국적 서평에 불과하다.필자는 광개토대왕의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비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이후에도 고구려가 건흥(建興), 연수(延壽), 연가(延嘉), 태화(太和), 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국가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비문에 사용한 서체는 형태상 고예(古隸)로 분류될 수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서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논술한 바 있는 점제현신사비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 이후에 나타나는 중원고구려비와 신라 고비와도 혈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고구려의 고유서체임이 분명하다. 자형면에서 볼 때에도 사용하고 있는 이체자와 풍부한 자형의 변화는 중국서예사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전주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15일 전주역사박물관 녹두관에서 열린 '제11회 전주학 학술대회'에서 홍성덕 전주대 교수는 "전주는 역사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호남제일성으로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전라감영과 전통도시 전주에 대한 연구 또한 부진하다"며 "단순히 한옥마을 등과 같이 물리적 공간 조성 단계를 벗어나 전통도시 전주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교수는 "과거 전주가 지녔던 위상과 영광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번 학술대회는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전주학추진위원회(위원장 함한희)와 공동으로 마련한 것.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기념, '조선왕조와 전주'를 주제로 조선시대 전주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했다.특히 이동희 역사박물관장은 태조의 본향이 전주가 아니라는 설에 대한 진위를 밝히고 경기전비 건립 추진과정을 통해 전주사람들의 풍패의식을 분석한 '풍패지향 전주,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그 역사와 성격'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이관장은 "조선초 풍패의 중심은 태조가 태어난 영흥과 그가 살았던 함흥 일원이었지만, 조선후기 시조가 중시되는 가문풍조가 확산되면서 전주는 태조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는 한계를 넘어 풍패로서 의미와 위상을 확고하게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이관장은 "전주부민들 또한 지속적으로 경기전비 건립 요청을 하는 등 풍패지향으로서 전주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덧붙였다.임미선 전북대 교수의 '조선의 예향, 전주'는 전주에 대한 음악학적 접근으로, 임교수는 "전주는 전통예술의 발생지보다는 전통예술을 일상에서 가까이 즐겼던 소비지향적 측면이 더 강했다"며 "우리 음악의 소중함과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다"고 평가했다.'관민협치, 전주'를 주제로 발표한 이병규 동학기념재단 연구부장은 "1894년 동학혁명기 집강소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관과 민이 손을 잡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크다"며 "특히 관민협치의 집강소가 전주 지역에서 중심을 두고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한편, 학술대회에 앞서 역사박물관 개관 8주년 기념식과 특별전 개막식이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송하진 전주시장과 최찬욱 전주시의장, 이광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북지원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특별전 '경기전, 조선의 가슴에 귀 기울이다'는 9월 12일까지 역사박물관에서 계속된다.
행정기관 중심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문화재를 가꿔나가는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사업.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재 지킴이들이 남원에서 만났다.문화재청이 주최하고 남원문화원이 주관한 '2010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전국대회'가 12일과 13일 사랑의 광장, 국악의 성지 등 남원 일대에서 개최됐다.충남 부여와 최종 후보지로 올라 개최지로 선정된 남원대회는 전북지역에서는 처음 열린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행사. 전국에서 300여 명이 참석했다.12일 오후 1시 춘향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개회식에서는 남원 문화재지킴이 활동하고 있는 고등학생 장재준군과 임민정양이 문화유산헌장을 낭독했으며, 최중근 남원시장이 남원문화재 명예지킴이로 위촉됐다.우수활동 유공 단체 및 개인으로는 대동문화재단(광주광역시) 아모레퍼시픽(경기도 용인시) 충주전통문화회(충북 충주시) 하이닉스반도체(서울시) 한국의 재발견 우리궁궐지킴이봉사단(서울시)과 김경자(68·경남 진주시) 노윤지(65·경기도 성남시) 조길영씨(67·경기도 수원시)가 선정됐다. 문화재지킴이 활동 우수사례로는 LG하우시스(서울시)의 '친환경 독도천연보호구역 LG가 앞장선다'와 광주북구문화원 역사문화해설사회(광주시)의 '가사문화권 문화재지킴이'가 소개됐다.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대회사를 통해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사업을 통해 문화재 보호 분야에 민간부문의 다양한 인력과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며 "자발적인 문화재 보존 운동에 전 국민이 앞장서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병채 남원문화원장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역사가 집약돼 있는 남원에서 이번 대회를 열게 돼 기쁘다"며 "우리 모두에게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 후손들에게 물여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이번 전국대회에서는 '남원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나종우 원광대 교수의 특강과 황산대첩비지, 송흥록 생가, 만인의총, 만복사지, 광한루 등 남원지역 문화유산 답사가 진행됐다.
우리는 흔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을 하며 역사를 추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내재해 있다. 하나는 외세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자주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고, 또 하나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기대이다. 통일신라를 배워온 필자로서도 가끔 그런 담론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고구려가 이미 5세기에 한반도의 삼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비문의 내용 중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구절이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칭한 것은 「맹자」에서 이른바 "인(仁)을 해친 자를 일러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친 자를 일러 잔(殘)이라 한다(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는 것에서 기인한다. 한반도 내에 존재하는 같은 민족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동인의식을 강조한 표현일 것이다.(최영성 교수의 교시)이처럼 고구려가 한반도를 사실상 지배하면서도 백제와 신라를 멸하지 않고 그들의 국가적 기반을 유지시킨 것은 역시 대제국 고구려다운 면모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에 존재하는 이민족 왜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은 이처럼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가하여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하려 애썼다. 그렇게 된다면 20세기에 국치로 불리는 일제강점기 역시 정당성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의 주체는 고구려이다. 비문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비문의 신묘년 조이다. 잠시 여기에 소개하면 이렇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비의 탁본을 연구하여 석문하고 해독하여 발표를 선점한 일본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논리이지만 판독된 문자의 해독으로만 본다면 가능한 해석이다. 이에 대하여 재일사학자 이진희씨는 급기야 비문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하였고, 그 증거로 비문에 덧칠해진 석회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왕건군은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을 깨끗하게 뜨기 위해 탁공들이 취한 조치이며 비문조작은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때까지의 주요 쟁점은 일본인들의 비문조작 문제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비문의 조작문제보다 해석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즉 위의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하는 '고구려'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할 경우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으려 하므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문맥상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그동안 한중일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 기사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였지만, 전체 비문의 핵심은 고구려의 대내외적 위상과 민족적 포용력이다. 비록 의를 해친 백제였지만 동일 민족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않았다.최근 류승국 교수는 100여 년의 논쟁을 검토한 연구를 발표하여 학계의 공감을 얻었는데, 그 역시 비문의 변조설을 주장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아래에 신묘년 조에 대한 해석을 소개한다. "백제와 신라는 본시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옛적부터 조공을 바쳐 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매양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과 □□ 신라를 파(破)하여 신민(臣民)을 삼으려고 하므로, 그래서 영락 6년 병신년에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왜적과 잔국(殘國 : 백제)을 토벌함에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가 왜적의 과구(소굴)에 이르러 공격하여 열 여덟 개의 성을 취하였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시공 확대를 위해 봄 축제와 가을 축제로 이원화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또한 급변하는 IT 환경에 맞춰 가상공간으로 축제 무대를 확장시키고 축제에 참여하는 연령층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5일과 6일 군산대학교 인문대학에서 개최된 판소리학회 제64차 정기 학술대회. 판소리학회(회장 최동현)와 군산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정성은)가 공동주최한 이날 주제는 '판소리 문화·제도'로,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잡은 전주세계소리축제의 미래전략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다."소리축제 핵심 콘텐츠를 판소리에 국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곽병창 우석대 교수는 "소리축제 10년 역사 동안 판소리를 중심에 둔 축제라는 이름값이 충분히 높아진 만큼, 이제부터는 축제의 콘텐츠를 다양화하고 그 외연을 넓혀야 한다"며 "대안으로 판소리를 중심에 둔 월드뮤직축제로서 위상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소리축제 총감독을 역임하기도 한 곽교수는 "봄 축제는 대사습과 공동개최하면서 전국의 소리꾼과 명인들이 참여하는 전통음악축제로, 가을 축제는 시내 일원을 두루 활용하면서 전 세계의 현대화한 전통음악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독창적인 월드뮤직축제를 만들자"고 설명했다.허문경 한양대 강사는 "급변하는 IT 환경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연무대에 3D 기술을 도입하고 위치기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제공하는 등 홍보미디어의 다변화가 시급하다"며 "이는 물리적 공간 확대를 넘어 가상공간으로 축제 무대를 확장하고 축제참여의 연령층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라북도가 소리축제라는 관제축제를 기획하고서도 향유계층인 대중과 지역주민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참여를 위한 동기부여, 즉 마켓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보다는 예산규모에 따라 과다하게 프로그램을 편성해 해외공연단을 초청하고 이에 따른 평가는 관객수를 기준으로 하는 기획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며 "소리축제는 수요자와 소통이 잘되는 참여형 축제가 아닌,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관람형축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했다.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판소리 공로상과 판소리 학술상에 대한 시상이 이뤄졌다. 판소리 공로상은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가, 판소리 학술상은 「판소리 중고제 심정순 가의 소리」(민속원, 2009)의 신은주(전주교대), '판소리 몸 담론 연구'(경희대 박사학위논문, 2009)의 서유석 회원(서강대)이 수상했다.
삼국은 기원전 1세기 무렵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동하여 주위의 토착세력을 통합하며 점차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마침내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국이 정립(鼎立)하며 생존을 위한 경쟁에 돌입하여 외교적 견제와 전쟁이 반복되는 가운데, 5세기에 이르면 고구려는 그 세력이 강대해진다. 관제의 개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고구려는 정복사업을 통해 세력의 팽창을 추진하였다. 한 이후로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고 다시 5호16국으로 분열된 틈을 노려 고조선 이후 점령당했던 대동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전쟁의 상흔 또한 만만치 않았다. 소수림왕의 개혁정치를 이어받은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나라로 성장시켜 마침내 고구려시대를 열었다.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은 414년에 선왕의 위업을 기리는 비를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集安)의 왕릉 곁에 세웠다. 비의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碑)'이다. 높이 6.39m의 거대한 자연석(凝灰巖) 비에는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삼국의 관계 그리고 왜에 관한 기사 등 1800여 자가 실려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최고 최대의 비로 알려져 있으며, 대제국 고구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상징이다.그러나 비는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 하여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고, 청나라 때에는 그 지역이 만주족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어 통행이 금지되어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1876년 중국인 관월산(關月山)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이 소식을 접하고 육군참모본부의 정보원이었던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비밀리에 중국에 파견하여 1884년 광개토대왕비를 찾아 채탁하여 갔고, 육군참모본부는 그것을 토대로 쌍구가묵본으로 만들어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에 소개하였다. 이로써 비문에 대한 해독이 진행되면서 고구려의 실체와 고대 한일관계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이후 100여 년 동안 한·중·일의 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는 가운데 재일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에 의해 일본이 비문을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고, 다시 이에 대한 중국인 왕건군(王健群) 반론이 제기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100 여 년이 지난 20세기 말에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돌연 이 쌍구본을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대사에 대한 쟁점의 부활은 물론 역사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상태에서 또다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었다.최근 중국은 종래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자국 중심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동북공정을 단행하는 한편 광개토호대왕비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함으로써 비의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이전에도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고대사에 대하여 일본의 조작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또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종래 이 문제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는 특정한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을 문제삼기에 앞서 우리의 학문적 태도와 역사인식부터 다져야 한다. 정복의 역사는 비단 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인식에까지 해당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몇 차례에 걸쳐 비의 역사적 의의와 쟁점의 상황, 그리고 서예사적 가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지난해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에서 금동사리호(金銅舍利壺) 등과 함께 발견된 청동합(靑銅盒)이 보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26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에 따르면 발견 당시 청동합은 심한 외부 부식으로 인해 개봉을 미뤄왔으나 문화재보전과학센터가 보존처리를 실시하면서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유물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했다고 밝혔다.이번에 개봉한 청동합에는 구슬류를 비롯한 금제장식, 직물류 등 다양한 공양품이 들어 있었는데 특히 원형 청동합(靑銅盒) 뚜껑에서는 이것의 원래 주인이 당시 백제 고위관리였음을 입증하는 글자도 발견하게 됐다고 덧붙여 밝혔다.청동합은 운두가 낮은 둥글넓적한 형태이며 모두 6점이다.크기는 직경 5.9-8.3cm, 높이 3.2-4.6cm 정도인데, 주조(鑄造)로 제작됐다.대부분의 합은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았으나 6번 합에는 초화(草花)무늬와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1번 합 뚜껑에서는'상부달솔목근(上部達率目近)'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드러나 있다.글자를 새기는 작은 칼인 도자(刀子), 혹은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듯한 이 문구를 풀이해 볼 때 "상부(上部)에 사는(혹은 본적이 상부인) 달솔 벼슬에 있는 목근이라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미륵사 석탑을 세울 때 달솔 목근이 시주한 공양품으로 판단된다.상부는 당시 백제 서울 사비(부여)를 5개로 나눈 구역 중 북부를 의미하며 달솔은 모두 16등급으로 나뉜 백제 관직 중 2품에 속한다.또한 청동합에서는 금제구슬 370여점을 비롯한 금제고리, 금제소형판 등 많은 양의 금제품과 유리구슬, 진주, 곡옥 등 총 4,8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된 점으로 미뤄 보석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 가운데 가장 큰 4번 합에서는 무려 4,4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는데 1점의 곡옥은 채색된 금장식 모자가 씌워져 있는 것이 매우 이채롭다.직물과 향분(香粉)으로 추정되는 유기물질 등도 이번에 확인된 가운데 금제구슬 등은 화사한 빛을 그대로 간직할 정도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향후 청동합과 수습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보존처리를 시작하여 수습된 금속, 유리류, 유기물 등에 대한 성분 분석과 제작기법 등 다각적인 조사연구도 병행 실시할 계획이다고 밝혔다.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청동합과 그 수습 유물에 관한 1차적인 조사 내용을 27일부터 28일까지 양일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하는 '미륵사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그동안 한국서예사를 다루면서 고대 삼국을 상한선으로 잡고 5세기 초에 수립된 광개토호태왕비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하며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과 독자성을 확보하기 이전에도 고조선(위만조선을 포함)의 문화를 계승하는 한편 한의 문화를 수용하여 성대한 문화를 이룩했음을 증명해주는 유물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이 고조선을 멸하고(B.C.108)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그 영역 안에 설치한 한사군 중에서 낙랑은 그 문화의 수준이 가장 높았다.2001년 7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낙랑' 특별전이 열린 적이 있다. 이 전시는 그 해 9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지금 필자의 곁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간한 '낙랑' 도록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발굴유물들을 일별하면 그 문화적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낙랑의 유물 중에서 최고의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금제교구(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는 실로 화려한 금빛을 발하며 당당하게 그 문화적 수준을 대변하고 있다. 평양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고 전해지는 봉니(封泥)와 온전한 상태로 석암리 고분에서 발견된 귀뉴동인(龜紐銅印)과 옥인(玉印)은 특수계층의 문화생활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여기에 창원 다호리 고분(1호분)에 발견된 붓과 삭도(削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엽전, 요철 명문이 찍혀있는 다양한 벽돌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유물로서 한자문화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이외에도 기년명칠이배(紀年銘漆耳杯)가 눈길을 끄는데, 칠기에 기년을 포함한 글귀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어 절대적으로 빈약한 문헌자료를 보충해주는 한편, 그 필의가 실재로 쓰여진 서사에 가깝다는 점에서 서예사적 의의를 안고 있다. 해설에 따르면, 기원전 85년에서 기원 102년 사이에 지금의 중국 사천성 일대에서 만들어져 낙랑으로 수입된 것이 많으며, 명문에는 칠기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 등 내력이 상세히 담겨 있다고 한다. 서체로 보면 한대에 유행한 죽간의 서체와 매우 흡사한데 붓이 아닌 철필로 새겨져 있어 필획의 변화는 느낄 수 없지만, 정교한 각법과 능숙한 결구를 볼 때 한문의 생활화가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서 소개한 점제현 신사비의 경우도 한문의 보급 정도와 토속신앙,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 서체를 추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낙랑은 한사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문화를 일구어왔다. 비록 한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정치적 군사적 지배보다는 경제적 의미의 조계(租界)에 불과했다. 이후 옛 땅을 되찾으려는 토착세력의 질긴 저항으로 한사군이 통폐합되어 204년 대방군이 설치될 때까지 낙랑은 존속하였으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이행되어는 과도기적 문화이행기에 속하는 낙랑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로써 널리 보급된 서예문화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면모를 지니고 있어 새로운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토착문화를 계승한 낙랑의 문화가 후에 고구려에 흡수되는 역사적 전개에서 보면, 고구려의 서예문화 또한 낙랑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록이 매우 귀한 이 시대의 유물을 우리보다 앞서 일본의 고고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고대사 조작에 의구심을 갖기에 앞서 이제라도 우리 문화에 대한 한량없는 관심과 체계적인 연구를 계속하여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울산시 박물관추진단(단장 김우림)은 올해 상반기 2차 유물구입 공고를 통해 '조국구도(曺國舅圖)'와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호작도(虎鵲圖)' 등 명품유물 다수를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입했다고 24일 밝혔다. 박물관 추진단에 따르면 '조국구도'는 도교 8선 가운데 한 명인 조국구가 악기를 들고 서 있고 좌우에 악기를 불거나 복숭아 광주리를 진 소년 3명이 그려져 있다.특히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는 김홍도의 '신선도 8폭병풍'의 '조국구도'와 거의 같은 구성과 표현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동래부순절도'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백성들의 항전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1834년 변곤(卞崑 1801∼?)이 그린 것이다.이 그림은 현재 육군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392호 '동래부순절도'(1834년작)와 구성과 구도가 거의 유사하다. '호작도'는 꼬리를 치켜든 호랑이를 소나무 위에서 까치가 내려다보는 그림으로 17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되며, 호랑이의 털이 살아있는 듯 묘사가 섬세하다. 김우림 박물관추진단장은 "내년 6월 울산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전시 및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준 높은 유물을 계속 구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근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우리의 고대사가 일부 조작되었다는 주장들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낙랑시대의 유물로 알려진 점제현 신사비는 내용이 아닌 출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비는 점제현 신사비라고 알려져 있으나 염제현 신사비 혹은 점선현 신사비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며, 축약하여 점제비라고 일컫는다.최초의 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3년 평안남도 용강군(현 온천군) 성현리 토성의 서남쪽 약 485m 지점의 밭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참조)이것이 어떻게 그들에 의해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학계에서의 논쟁은 발견된 지점이 애초에 입비된 자리가 아니라 역사조작을 위해 한반도로 이치된 것이며, 원래는 중국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정황적 근거와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조작을 자행했을까. 조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한나라가 고조선을 점령하고 그 영역 안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이 비의 발견처가 바로 그 중 하나인 낙랑지역이라는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고조선의 활동무대를 대폭 축소함으로써 약소민족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이다.일부에서는 당시 중국 한나라에서 일종의 교화를 명분으로 문화를 외부에 전파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는데, 그 증거로서 중원보다도 오히려 중국의 주변에서 역사적 증거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에 세워진 점제현 신사비도 이와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처럼 점제현신사비는 우리 민족의 2000년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점에서 역사적 논쟁이 된 점제현신사비를 서예사적 입장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정교한 비석의 사진과 탁본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이 제시한 발견 당시의 사진과 중국의 고고학자 나진옥(羅振玉 : 1866~1940)의 낙관이 있는 희미한 탁본사진으로 볼 때, 중국 한대(漢代)의 비와는 상당히 다른 특이한 풍모를 보이고 있다. 종선으로 계선이 있고 정방형에 가까운 예서가 전서형 필의로 쓰여져 있다. 일부가 파손되어 현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80여 자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점제현과 관련이 있고 제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점제현 신사비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탁본에는 '한점제평산신사비'라고 되어 있다. 서체면에서 볼 때 상당히 정제된 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이후에 보이는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 고예(古隸) 보다 단정한 느낌이 있다. 전서에서 예서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적 서체로 보아도 무방하며, 우리나라 초기 석비 형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서술하겠지만 당시 한나라의 고예와 대비가 되며, 한편으로는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와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 서예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그것이 한의 역사 속에서 한의 문화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한의 문화를 수용한 우리의 심의식과 미의식을 우리 식으로 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역사적 주목을 받게 되는 광개토호태왕비와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신라 선덕여왕 재위기에 활동한 양지(良志)를 최초의 서가로 들고 있다. 이어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을 들고, 다음으로 한눌유(韓訥儒)를 꼽았다. '나대편(羅代編)'이라는 제하에 서화사의 권두를 장식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우리나라에서 그 이름이 밝혀진 서가들임에 틀림없다. 전존하는 필적을 중심으로 서자가 분명하게 밝혀진 경우로 한정한 것이지만, 양지의 경우 「삼국유사」에 기록에 근거하여 '필찰(筆札)을 잘하였다'는 단평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그가 스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불교와 서의 관련성, 필찰이 통상 편지서체를 일컫는 말이므로 모필에 의한 필사가 보편화되었다는 점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인물사를 중심으로 서예를 바라볼 경우 문화의 시대가 훨씬 뒤로 밀려난다는 사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서예사 서술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전존하는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문화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자의 검증에 앞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기록에 대한 검토가 우선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고대 즉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은 한결같이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최초로 완정본 한국서예사를 집필한 김기승의 경우에는 점선현신사비(일명 점제비)와 광개토대왕릉비로 필두로 하여 고구려시대를 그 출발점을 삼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인가, 아니면 신라-고구려-백제인가에 대한 것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金富軾) 이래 역사서술의 관점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기승은 한(漢)의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중국대륙과 연접한 고구려가 가장 우위에 있다고 보고, 한의 문화가 한반도로 동전(東傳)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문화가 탄생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를 그 기점으로 삼았다. 최근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의견들이 개진되고, 최근 북한에서도 이에 대한 대규모의 학술토론이 있었던 점을 참고한다면, 한에 종속된 문화적 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해석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토속문화에 외래문화가 수용되어 조화되는 경우가 있고, 또 달리 미개지역에 선진적인 외래문화가 정착하여 토착화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문화는 물과 같아서 선진문화가 후진문화로 흘러 들어가기 마련인데, 서로 다른 두 문화가 갈등하고 융화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고대시대의 서예사료를 수집하여 일별하면 대륙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서예사에서 권두를 장식하고 있는 고구려의 점선현신사비(일명 점제비, 85년 각석으로 추정)를 비롯하여 광개토호태왕비와 호우, 중원고구려비, 모두루묘지, 평양성석각 등을 비롯한 백제와 신라의 초기 석각 및 필적들은 당시 중국의 서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이 곧 우리의 고대문화의 특징이며 우리 선조들의 미의식이자 삶의 방식이다.중국 대륙을 통털어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비만큼 웅장하고 당당한 자연석비는 없다. 비신의 규모 뿐만 아니라 그 서체 역시 당시 중국의 전통적인 서법으로는 검증하기 어렵다. 고구려의 역사와 정신, 나아가 그들의 역사인식과 미의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독불가능한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칠지도(七支刀)는 근초고왕 재위 때로 추정되는 369년에 백제 왕세자가 왜왕(倭王)에게 준 칼이다.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이 소장한 이 칼은 지금까지는 주로 당시의 백제-왜 관계를 밝히는 자료로만 사용돼왔다. 칼이 하사품이라면 백제가 왜의 윗길에 있었다는 뜻이고, 헌상품이라면 그 반대일 것이라는 논쟁이다. 그런데 백제학회 회장인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칠지도의 길이가 75㎝라는 점에 착안해 당시의 도량형을 밝혀냈다.노 교수는 이 칼을 백제 왕실에서 직접 만들었을 것이므로 정확한 도량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당시 쓰였던 후한척(後漢尺. 23㎝)과 진전척(晉前尺. 23.1㎝), 서진척(西晉尺. 약 24㎝), 동진척(東晉尺. 약 25㎝) 등과 비교해봤다. 그 결과 칠지도는 '1척=25㎝'인 동진척을 기준으로 했을 때 칼의 몸길이가 2자6치, 자루가 박히는 부분이 4치로 전체 길이가 정확히 3척이 되는 것으로 드러나 당시 백제에서는 동진척을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노 교수는 "지금까지는 백제가 수도를 한성에 둔 시기에는 후한척을 써왔으며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동진척을 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라며 "왕실에서 만든 유물은 가능한 정확한 척도를 써서 만든다는 점에서 이 당시부터 벌써 동진척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칠지도에는 동진의 연호가 새겨져 있으며, 근초고왕은 372년에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라는 작호도 받았다는 점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이 도량형을 당시 조성했던 건물ㆍ무덤과 비교해봤다. 백제 왕실 무덤인 적석총 3, 4호분과 풍납토성 경당 유적의 44호 건물지 등의 길이와 폭, 높이 등을 동진척으로 환산해보니 숫자가 정수로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수도 한성이 아닌 지방에서도 동진척이 쓰였음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근초고왕 대의 백제 건물ㆍ무덤 발굴현장에서 노 교수가 확정한 동진척을 표준으로 작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노 교수는 또 김해 양동리에 있는 서기 3세기 대의 무덤에서 나온 청동솥을 확인해 당시 쓰였던 부피 단위인 1두(斗. 말)가 약 2ℓ임도 밝혀냈다. 이 솥에는 '용량은 1말(容一斗)'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용량을 측정해보니 1.98ℓ였다는 것이다. 약 18ℓ에 해당하는 지금의 말과는 거의 10배나 차이가 난다. 노 교수는 "옛 도량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며 "도량형은 물건을 만드는 데부터 조세를 걷는 데까지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므로 당시의 경제 여건과 조세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근초고왕 당시 '1척=25㎝'인 동진척이 쓰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광개토대왕비문(414년 조성)에 백제가 고구려에 조공한 것으로 나오는 '세포(細布. 세마포) 1천필' 역시 25㎝를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 당시의 조세 현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말이 2ℓ라는 추정도 백제 때 조세를 다룬 다른 문헌과 비교해보면, 당시 백제의 경제규모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 교수는 또 이 도량형이 수도인 한성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쓰인 증거가 유물들에서 나타나므로, 당시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지방에까지 속속들이 미쳤다는 것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내용은 백제 때의 성씨와 도량형, 의학, 농사 등의 내용을 정리해 최근 출간한 학술서인 '백제사회사상사'(지식산업사 펴냄)에 실렸다. 저자는 책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삼산(三山)-오악(五岳)-제산(諸山)을 표현한 것으로, 불교와 선교(仙敎) 뿐 아니라 유교의 영향도 함께 받은 유물이라는 점도 밝혔다.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에 있는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6호)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승격 지정 예고했다고 6일 밝혔다. 이 석탑은 신라 애장왕(재위 800~806) 때 창건한 법수사지 내에 있으며, 가야산 계곡에 돌을 쌓아 만든 단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5.8m이며, 상ㆍ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노반(路盤. 사리탑의 맨 꼭대기 지붕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탑의 규모가 작고 하층 기단이 높고 안상(眼象. 둥근 모양의 무늬)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 석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지만,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의 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 창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안동 옥동삼층석탑과 인제 한계사지 남삼층석탑 등의 하층 기단에서도 3개의 안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특성도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기간 동안 지방자치단체 및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보물로 공식 지정할 예정이다.
2일 서울 종묘에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가 봉행됐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공동주최하고 종묘대제봉행위원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는 오전 9시30분 영녕전 제향으로 시작해 경복궁과 종로를 거쳐 종묘로 돌아오는 어가행렬 재현과 오후 1시부터 거행한 정전 제례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건무 문화재청장,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비롯해 해외 언론인과 주한 외교사절, 관광객 등이 참석했다. 종묘제례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에게 지내던 제사로, 조선왕조가 지낸 제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종묘대제'라고도 불린다.
보물 제583호인 '전주객사' 이름을 '전주 풍패지관'으로 바꾸기로 한 것과 관련해 학계 및 향토사학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문화재청은 "그동안 국가지정문화재 중 국보·보물 건조물문화재의 지정명칭의 명명 방식이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며 왜곡되고 지정명칭과 관련된 통일된 기준이 없어 혼란스러웠다"며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지정명칭 일제정비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형문화재과 관계자는 "원래 건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이름을 찾아주자는 것"이라며 "전주객사의 경우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남아있고 객사가 전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재 명칭으로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풍패지관(豊沛之館)'은 조선에 온 중국 사신 주지번이 익산의 선비 송영구를 찾아가던 중 전주객사에 들렀다가 쓴 글씨로 전해진다. '풍패'란 한나라를 건국했던 유방(劉邦)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했으며,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이라고 했다.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은 "조선초기 기록에는 '객관'으로 돼있지만, 조선후기 기록을 살펴보면 '풍패관'으로 나온다"며 "우리 지역이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것을 객사 이름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홍성덕 전주대 교수는 "전주객사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 풍남문을 남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객사는 통칭이고 풍패지관이 고유한 이름"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전주객사'를 '전주 풍패지관'으로 바꾸었을 때 상당기간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교수는 "풍패지관이란 명칭을 일반인들까지 자연스럽게 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당분간 안내판에 개정 전 명칭을 함께 병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은 "풍패지관으로 하면 일반인들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전주객사 풍패지관'으로 하면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고 말했다.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역사를 근거로 문화재위원들과 논의해 문화재청에 지역 여론을 전달할 예정"이라며 "만약 명칭을 바꾸는 게 된다면 시민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보물 제583호인 전주 객사 이름이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국가지정문화재 중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건조물문화재의 명칭을 전면 개정하기로 하고, 전국적으로 151건의 명칭을 정비한다고 27일 밝혔다.현판이름을 지정명칭으로 바꾸고 별칭은 안내문안에 넣어 설명하기로 함에 따라 전주 객사는 전주 풍패지관으로 변경될 전망이다. 그러나 목조문화재 명칭 변경예고 기간인 30일 안에 이해관계자의 이의 제기나 반발이 있을 경우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명칭을 확정하게 된다.이번 지정명칭 일제정비 사업에서 명칭 변경 대상이 된 도내 문화재는 전주 풍패지관 등 총 19개다.
일본에 약탈당한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경기도 이천 5층석탑 환수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구)가 석탑 반환을 일본 측에 공식 요구했다. 현재 일본에 체재중인 이천 5층석탑 환수추진위원회 실무협상단(단장 박창희)은 이천 5층석탑을 보관하고 있는 도쿄시내 사설 박물관인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을 방문해 석탑 반환 요청서를 전달했다고 21일 밝혔다. 오쿠라 슈코칸은 1915년 이천 5층석탑을 반출한 일본 오쿠라재벌의 사설 박물관으로 석탑의 소유자이며, 석탑은 현재 도쿄시내 오쿠라호텔내 오쿠라 슈코칸 뒷마당에 서 있다. 실무협상단은 석탑 환수에 대한 이천 시민의 간절한 염원을 전달하고 한일 양국의 새로운 100년 역사를 열어가는데 이천시민과 오쿠라 슈코칸이 앞장서자면서 석탑의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 5층 석탑 반환을 요구한 적은 2차례 있었으나 공식 반환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실무협상단은 5층 석탑 반환을 위한 범 이천시민 서명운동에 참여한 6만8천명의 서명도 함께 전달했다. 이에 대해 오쿠라 슈코칸 측은 5층 석탑이 도쿄에 있어도 일본을 찾는 한국인들이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자신들이 석탑을 더 잘 보관하고 있으며 일본 국민도 한국 석탑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면서 반환을 거부했다. 오쿠라 슈코칸 측은 현재로서는 석탑 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으므로 반환이나 기증은 어렵다면서도 환수추진위원회가 제안한 미래지향적인 공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실무협상단은 "석탑이 일본에 있는 것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며 해방된 지 오래이므로 당연히 역사 청산이 되어야 하고 석탑도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고 재차 반환을 촉구했다. 실무협상단은 일본 측이 석탑을 잘 보관하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현장 확인 결과 석탑이 놓인 자리에 배수가 되지 않아 이끼가 많이 끼고 부식이 심하다고 전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천 5층석탑은 이천향교 근방에 있었다고 해서 '이천향교방5층석탑'이라 불렸지만 일본인들이 명명한 이름이라는 지적에 따라 현재는 석탑이 위치했던 산기슭의 이름을 빌려 '망현산5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서예가 태동한 시기는 한대(漢代)이다. 한대는 다시 전한과 후한, 또는 서한과 동한으로 지칭되는데 특히 후한시대에 이르러 서예미가 극에 달한다. 역사시대 이래로 많은 문자자료가 산재한다. 주술적 의미의 갑골문과 왕조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금문(金文), 그리고 진시황제가 전국(戰國)을 통일하고 문자통일을 단행하면서 승상 이사(李斯)가 제시했다고 전해지는 소전(小篆)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기물이나 벽화에서 나오는 부호들 역시 문자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그 자료의 다양성은 실로 방대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이 예술적 행위의 소산이냐 하는 점에서 본다면 입장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술적 행위란 쉽게 말하여 심미적 의식이 그것에 가미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즉 문자라는 것에 개인의 미의식을 가미하여 서예미를 발현시켰느냐 하는 것인바, 속된 비유를 빌리자면 어떤 재료를 가져다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리하여 음식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문자가 의사를 전달하는 고유의 기능이 강조되었으나 한대에 들어서면서 여기에 서예미가 가미되어 비로소 예술성을 띠게 된다.한대를 서예의 기점으로 산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화적 사실이 뒤따른다. 우선 일상에서 문자를 서사하는 과정에서 획일적인 서사를 벗어나 다양한 면모를 보이며 이른바 오체(五體)가 나타난다. 종래와는 달리 일상생활의 간이함을 좇아 자연적 발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문자정책을 넘어서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전파력이 강하였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자의 서체는 이미 한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되었다. 문자생활의 보편화가 주된 원인으로 꼽히며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화활동이 동시다발로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둘째는 개인의 심미의식을 가미하여 문자를 표현하는 전문적인 서가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문자를 심미적으로 체득한 서가가 서(書)의 미적 가치를 논하는 서론(書論)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넷째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부응하여 문자의 발생과 변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문자학이 태동하여 근거에 입각한 서의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부수적인 사실이 있으나 이것만으로도 한대를 서예적 기점으로 꼽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종래에 우리나라 서예의 출발점은 대략 중국에서 한자가 보급된 시점으로 산정하였다.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한반도에 한자가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나라의 서예는 한대의 영향권 아래에서 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문화의 동전설(東傳說)이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 이후 우리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고대 서예자료들은 중국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들을 굳이 중국에 예속시켜 논할 수도 있겠지만 문화가 전래된 이래 그것을 생활상에 반영하는 것은 수용자의 몫이다. 문화의 전래가 그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변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문자자료들은 한자를 어떻게 활용하고 또 어떻게 미적으로 표현하였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역사적 근거이자 서예사적 자료이다.이제 한국서예사를 일별하는 시점에서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외래문화의 수용과 토착문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를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에 예속된 문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미의식 속에서 우리 문화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서예문화의 독자성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생활과 의식을 반영한 것이며 크게는 민족성으로 비춰진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김홍렬)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분야 국제 NGO(비정부기구) 자격 승인이 결정된 사실을 최근 통보받았다고 19일 말했다. 국제 NGO 자격을 획득하면 긴급보호목록 등재를 비롯해 협약관련 프로그램과 사업활동ㆍ국제원조신청 심사 등에서 정부간위원회에 자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재단은 해당 자격을 2008년에 신청했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오는 6월 열리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제3차 당사국 총회에서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이에 따라 재단은 본격적인 활동방향 정립을 위한 전문가 회의를 21일 오후 2시 무형문화재전수회관(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개최하고, 회의 결과를 토대로 당사국 총회에 활동계획서를 제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국내 단체 가운데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분야 국제 NGO 자격을 보유한 단체는 ㈔세계무술연맹(WoMAU)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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