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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발전연구원(전발연)은 10일 이슈브리핑을 통해 옛 도청사 부지에서 추진되는 전라감영복원사업지를 전북도의 상징문화공간으로 조성해야한다는 주장했다.전발연에 따르면 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대부분(83.6%)이 상징문화공간의 필요성하다고 응답했으며, 지역의 대표성과 장소, 발전잠재력을 놓고 비교한 결과 전라감영복원사업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라는 것.전발연은 전라감영터를 비롯 전주공설운동장,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월드컵경기장 등을 놓고 상징문화공간을 조사해왔다. 그 결과 전라감영터는 다른 공간보다 상징성과 역사성, 접근성, 문화자원 연계성, 정책수요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전발연은 "세계적인 문화도시들 대부분이 그 도시의 문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문화공간과 건축물을 갖고 있다"며, "전라감영복원사업과 상징적 문화공간 조성을 연계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는 매우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은 9일 "박물관이 보전·연구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 일반 관람객과 만나게 되는 부분은 전시라고 생각한다"고 밝혀 향후 박물관 운영에서 전시에 주력할 것임을 예고했다.김영나 신임 관장은 이날 취임사를 통해 "일반대중이 박물관이 많이 친근해졌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박물관에 자주 다니는 것"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초대 국립박물관장인 고 김재원 박사 딸로, 어린 시절을 박물관장 관사에서 보낸 김 관장은 "개인적으로 어려서부터 국립박물관과 함께 자라난 것 같은 기억도 있다"면서 "이제까지 배운 지식과 경험을 최대한 살려 해 보겠다는 각오로 관장직에 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김 관장은 취임식을 마친 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특히 조명시설에 많은 관심을피력, 그간 지나치게 조명이 어둡다는 지적을 받아온 불교미술실을 비롯한 일부 전시코너가 개선될 가능성을 점치게 했다.
전라감영 핵심 건물인 선화당 위치가 밝혀짐에 따라 선화당 복원과 전라감영 복원 범위를 하루빨리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9일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에서 열린 선화당 위치 추정 조사연구 보고회에서 전라감영·전주 4대문 복원 추진위원회(위원장 채병선) 위원들은 "복원 규모와 범위, 성격 등이 여전히 논쟁이 되고는 있지만,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데 뜻을 함께 했다.전라감영 복원 부문에 있어 전체 복원이냐 부분 복원이냐를 두고 논의가 오랫동안 진행된 것은 역사성 문제도 있지만, 전라감영 복원은 구도심 활성화라는 중요한 과제도 안고 있어서다. 이날 위원들은 전체 복원이 전라감영의 원형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지만, 시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만큼 부분 복원이 현실적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이양재 원광대 교수는 "복원 연구팀을 따로 두고 부분 복원을 하되 선화당은 물론 중삼문 내삼문까지 복원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전라감영 복원은 조선 500년 전라도 수구의 상징성을 살리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사적 지정을 받아 전체 복원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맞섰다.이용완 전 도의원은 "선화당 위치가 나왔으니 선화당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김혜숙 전주시의원은 "사적 지정을 해야 하는지, 선화당 복원부터 인지 우선 순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이동희 관장은 "복원 범위를 놓고 위원들간의 설전이 있지만 선화당 위치가 구 도청사와 구 도의회 건물(구 상공장려관)사이로 확인된 만큼 선화당 복원부터 하루 빨리 매듭짓고 단계별로 복원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당굿·지신밟기·용왕제 등 만선·마을안녕 기원●자료사진첨부 (지난해 열린 행사-위도면 대리마을에서 열린 띠뱃놀이에서 주민들이 원당굿을 열어 마을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동아시아 최고 풍어제로 알려진 위도 띠뱃놀이 공개행사가 위도띠뱃놀이 보존회 주최로 올해는 음력 정월 초 사흗날인 5일 부안군 위도면 대리마을과 앞바다에서 열린다.이런 가운데 지난해에 지원됐던 전북도 재량사업비 1000만원이 올해에는 지원되지 않아 행사준비에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1일 위도띠뱃놀이 보존회에 따르면 지난해 위도띠뱃놀이 행사는 문화재청 지원금 1000만원과 도 재량사업비 지원금 1000만원, 부안군비 200만원 등 모두 2200만원으로 치렀다.그러나 올해는 도 재량사업비 지원금이 없어 문화재청 지원금 1000만원과 부안군비 200만원, 자부담 500만원 등 총 1700만원을 확보, 지난해보다 행사비가 500만원 가량 줄었다.위도띠뱃놀이 보존회 장영수 회장은 "행사를 축제 분위기속에서 치러야 하고 중요무형문화재로서 영구존속시켜야 하는데 물가가 가뜩이나 오른 실정에서 올해 행사비가 줄어 참석자들에게 푸짐하게 제공했던 음식을 부녀회원들이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한편 160∼170년 전부터 원형을 지켜와 중요무형문화재 제 82호로 지정된 띠뱃놀이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어민들이 산신과 용왕신을 통해 공물과 띠배를 바침으로써 풍어를 빌고 마을, 그리고 자신에까지 안녕을 기원하는 전통행사이다.띠뱃놀이는 음력 초사흗날 전날 마을에서 자라는 갈대와 볏짚을 엮어 어선 모양의 띠배를 만들고, 그 안에 만선(滿船)을 기원하는 오색기와 어부·선원을 상징하는 허수아비, 안녕·풍어 소원문, 용왕에게 드릴 음식 등을 준비하면서 시작된다.이어 다음날 이른 아침 풍물패와 주민이 원당(願堂·소원을 비는 곳)에서 굿과 제사를 올리는 원당굿, 마을을 한바퀴 돌며 지신밟기를 하는 주산돌기, 바다의 용왕신에게 제를 올리는 용왕제, 길이 4m 폭 2m의 띠배에 액운을 실어보내는 배 띄우기 순으로 진행된다.띠뱃놀이의 절정은 모선이 선착장에서 띠배를 끌고 나가 임금님 진상품이었던 '칠산 조기'가 많이 잡혔다는 칠산 앞바다에서 띠배의 줄을 끊어 띄워보내는 마지막 과정이다.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국가기록원을 통해 옛 전라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의 위치를 찾았다고 3일 밝혔다. 선화당의 위치는 옛 전북도청 주차장 부지의 중앙에서 도의회 방향으로 약간 치우친 지점이다.전주시는 1928년과 1937년 선화당 주변에 전북도청사와 상공회의소를 지으며 그린 공사도면에 표시돼 있었고, 국가기록원에 도면이 소장돼 있었다고 설명했다.전남·북과 제주도를 통괄했던 옛 전북도청 자리에 소재한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은 목조건물로 1951년 폭발사고에 의해 불에 타 없어졌다. 선화당이 옛 전북도청사 본관 건물 뒤에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자리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2007년 선화당 자리를 찾기 위해 옛 도청사 주차장 터를 발굴했으나 집터 등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었다.이번 선화당 위치 확인은 지난해 11월 전주역사박물관이 연구용역을 발주해 선화당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선화당 관련 사진과 전라감영 관련 문헌 등을 검토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전주시는 선화당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 확인됨에 따라 전라감영 복원사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내년 8월 개관 예정인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 시민들의 기증 유물이 상당수 전시될 전망된다.23일 군산시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이날 현재까지 확보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시유물은 총 3952점으로, 이 가운데 시민이 기증한 물품은 1892점에 이른다. 나머지 2060점은 청소년회관 향토자료실에서 이관한 물품(1921점) 또는 매입한 물품(139점)이다.확보된 유물 중에는 제주고씨 문중의 요여와 토지소송서류, 이영춘 박사 유품, 조선은행 출근부, 대한제국시위대 칙령장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 많다. 서수지역 농촌생활물품 399점 등 군산의 생활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도 포함돼 있다.시는 '시민이 함께 만드는 박물관'이라는 건립 취지에 걸맞게 시민이 기증한 유물 등을 전시할 계획이며, 박물관 관련 전문가들은 군산시민들의 기증 참여율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시 관계자는 "'오래된 물품의 소장가치를 생각하는 세태로 볼 때 군산시민들의 기증 참여율은 매우 놀랄만한 것'이라는 박물관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올 정도"라며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 박물관은 근대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업비 182억원이 투입돼 현재 공사가 한창인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내항 장미동에 지하 1층과 지상 4층 규모(연면적 4248㎡)로 내년 8월 준공될 예정이고, 상설전시관·기획전시실·어린이박물관 등이 갖춰진다.
속보=전북도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국립박물관 승격을 재추진한다. 이와 병행해 문화재청과 협의해 유물전시관을 확대·보강하기로 했다.도는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소규모 전시장에 그치고 있어 미륵사지 유적을 관리·전시하는데 한계가 있고, 익산지역 유적을 집중화할 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유물전시관을 박물관으로 승격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익산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과 왕궁리유적전시관 마한관 입점리고분전시관 등 기능이 유사한 4개의 전시관만 있어 마한·백제문화를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표 시설이 없는 실정이다. 특히 미륵사지의 경우 국보급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지만 이를 관리 전시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유물 보존·관리와 연구 사회교육 기능은 전무하다.이에따라 도에서는 조배숙·이춘석의원과 연대해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이나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고도로 지정된 익산에 국립박물관을 설립하거나 국립박물관 분원을 설립·운영하는 조항이 신설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이와함께 도는 TF팀을 구성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전시실과 수장고시설을 보강하고, 교육장 등을 마련하는 시설확장사업을 2012년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또 전시관 운영과 연구, 홍보 등을 위한 전문인력 확충도 검토하고 있다.
통일 신라기에 접어들면 석비의 형식과 비문의 양식이 정형화된다. 이는 무엇보다 나당의 긴밀한 문화교류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국가적 안정기에 나타나는 상징적인 문화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국가체제의 안정은 사회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통일신라 문화는 안정된 국가적 체제 속에서 문화적 자부심이 결부하여 그 빛을 발하였다. 통일 이전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문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연재의 마지막 소재로 선택한 무장사비는 통일신라의 서예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석비이다. 필자는 지난해 경주시의 위촉으로 무장사비 복원사업에 참여하여 비신의 서체를 복원한 바 있다. 올해 가을에는 경주 현대호텔에서 무장사비에 관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필자는 무장사비와 왕희지의 서체를 치밀하게 비교 고찰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장사비는 통일신라 서예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석비이다.무장사비에 대한 건립내역은 일연의 「삼국유사」 탑상편에 처음 보인다. 경주 동북쪽 20리쯤의 암곡동에 무장사가 있는데, 제38대 원성왕(敬信, 785-798)의 아버지 명덕대왕(孝讓)이 숙부인 소성왕(昭聖王)을 추숭하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소성왕은 799년 12월 29일에 원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이듬해인 800년 6월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소성왕의 갑작스런 죽음에 비(妃) 계화왕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읍혈극심하다가 자신이 입던 육의(六衣)와 재물을 희사하여 왕의 명복을 빌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명장을 불러 아미타상을 만들고 이를 무장사에 봉안한 뒤, 그 내력을 적은 비를 무장사에 세웠다. 이 비의 정확한 명칭은 이수에 나타난 비명을 따라야 하지만, 마멸이 심하여 여섯 글자 가운데 '阿彌陀佛' 네 글자만 판독되므로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라는 긴 이름이 붙여졌다. 이 또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속설에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를 이 산 계곡에 감추었다 하여 무장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비문의 발견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조선후기 금석학자 이계 홍양호는 경주 암곡동 깊은 골짜기의 무장사터를 찾아가 비편 하나를 발견하고 탁본하여 유척기 등에게 전해주었다. 필자가 탐색한 바로는 이후 추사 김정희가 아버지를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이 비편의 탁본을 구하여 옹방강에게 선물함으로써 비로소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옹방강의 아들 옹성원은 추사와 동갑이었는데 서체의 정교함에 반하여 전비 탁본을 요구하였고, 추사는 직접 경주 무장사터를 찾아 또 다른 비편 하나를 더 발견하고 탁본한 뒤 제기를 비편 옆면에 새겨 놓았다. 그러나 추사가 무장사비를 발견했을 때 옹성원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세 번째 비편이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귀부의 거북머리가 계곡에서 발견되었다.무장사비는 왕희지체 행서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동안 옹방강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이 집자비로 판정하였으나, 필자는 금번 국제학술회의를 통하여 왕희지체와 정밀하게 대조한 결과 집자비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왕서 집자비의 전형으로 알려진 집자성교서나 흥복사단비의 참치미(參差美)와는 사뭇 다른 유려함과 정제미를 보여준다. 통일신라 서예문화가 최고조에 달하였음을 증명하는 비인 것이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백제문화유적을 집중화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익산에도 국립박물관이 설립돼야 한다는 여론이다. 특히 고도보존지역으로 지정된 4곳(경주 공주 부여 익산)중 익산에만 박물관이 없어 익산지역의 국보급 유물들이 문화재청이나 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국회에 개정안이 상정된 고도보존법 등 관련법에 국립박물관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항을 신설해 익산에도 국립박물관이 들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현재 익산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과 왕궁유적전시관, 입점리전시관, 마한관 등 전시관만 4곳 운영되고 있다. 익산과 같은 고도보존지역으로 지정된 경주와 공주 부여에는 모두 국립박물관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욱이 지난해 미륵사지에서 사리장엄구가 각종 유물과 함께 출토되자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현재 사리장엄 유물은 문화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미륵사지 유물뿐 아니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익산지역 일원에서 출토된 국보급 백제 유물들이 중앙박물관이나 전주박물관 원광대박물관 등 곳곳에 흩어져 있다.이와관련 전문가들은 "익산 왕궁과 금마지역은 백제의 수도로 역사적 가치가 높고, 관련 유적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어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박물관이 필요하다"며 "익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보관과 관리, 전시, 연구자료 활용등을 위해서 박물관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중장기적 대책을 위해서도 중심 센터로서의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한편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에는 이춘석의원이 국립박물관 설립에 관한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국회 법제실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국립박물관 승격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위축됐지만, 문화재·학술 분야에 있어 의미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태조 어진 600주년 전주 봉안을 맞아 어진박물관이 전주 경기전에 개관해 전주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자리가 됐으며,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를 재조명하는 시민강좌와 학술대회가 줄을 이었다. 전주대 인문과학종합연구소와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이 호남권 고전 번역 거점연구소로 지정 돼 한문 고전을 번역하고 지역별 고전번역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됐다. 문화재청은 전주 객사(보물 제583호)를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태조 어진 600주년 기념 어진박물관 개관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기념 행사는 정부의 미온적인 예산 지원으로 국가행사로는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어진을 봉안한 과정을 재현한 기념대제는 트위터 검색어 1위에도 올랐을 만큼 시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경기전 뒷편에 건립된 어진박물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 건물면적 1194㎡로 어진실과 가마실, 역사실, 수장고, 기획전시실 등을 갖춰 문을 열었다. 어진박물관은 개관 20일 만에 7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됐으며, 전주가 조선왕조의 본향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전북 뿌리찾기 학술대회·시민강좌개관 20주년을 맞는 국립전주박물관은 전북과 전주의 역사성·정체성을 찾는 전시와 학술대회를 열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조선왕실과 전주'를 주제로 한 '토요 명사 초청 강좌'로 조선의 의궤·왕과 왕위계승·도자 등을 재조명했으며, 조선 왕실문화를 주제로 국제 학술 심포지엄도 열었다. 전주역사박물관은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첫 전주학 연구지원사업인 '전주학 콜로키움'을 진행했으며,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과 이희권 전북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공동 작업으로 전주학 총서 「경기전의」의 완간해 지역학 연구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전북역사문화학회도 '전북 향토사 재발견'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처음 열어 향토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학술대회를 정례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주대, 고전번역 거점연구소 선정전주대 인문과학종합연구소와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이 호남권 고전 번역 거점 연구소로 지정됐다. 이는 한문 고전을 번역하고, 한문 번역 인재를 양성하는 30년 장기 프로젝트. 연구책임자 변주승 전주대 교수를 주축으로 10년간 연구비 25억을 지원 받아 협동번역사업을 진행한다. 연구소는 올해부터 양곡 소세양, 유헌 정 황, 현곡 조위한 등 임진왜란 전후 호남 대표 시인들의 문집과 여암 신경준, 이재 황윤석, 간재 전우 등 유학자들의 문집 번역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조선 후기 인문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총 50권)를 출간한 변주승 교수를 포함한 연구진들은 2012년에 「국역 추안급 국안」(총 100권)도 간행할 예정이다.▲ 백제문화 관심·아쉬움 교차지난해 '국보 중의 국보'인 익산 사리장엄구 출토로 백제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백제문화권종합개발사업이 국가 예산이 확보되지 못하면서 13개 중 5개 사업만 마무리됐다. 하지만 사리장엄구 유물이 발견 이후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으며, 왕궁리유적전시관 개관 이후 일본인들의 방문도 늘어나고 있어 백제문화권종합개발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기단부 발굴 조사에서 토제 나발(소라 모양으로 말아 올린 부처의 머리카락)과 금동장식편 등 유물 27종 290여 점을 출토했으며, 지난해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동사리호와 함께 발견된 청동합에서 금제장식, 직물류 등 4800여 점의 보물도 잇따라 나왔다.
김제출신 현죽 서원석 회장((주)성원제강)이 소장하고 있는 자기류 등 고(古) 미술품 등 933점을 기증받아 김제 벽골제에 건립키로 한 현죽박물관(본보 2009년 1월21자 11면)이 무산 또는 연기될 가능성이 높아 시민들로 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김제시와 서원석 회장은 지난 2008년 12월16일 김제시청에서 고 미술품 기증 및 수증 약정서를 체결하고, 2010년 12월31일까지 독립된 박물관(부지면적 2000평, 건축면적 400평)을 건립해 소장품의 철저한 관리· 보관을 책임지며, 소장품의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보관· 관리를 위해 특별관리행정기구를 설치키로 합의했다.또한 소장품의 영구적인 안전관리를 위해 기증자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현죽박물관에는 서 회장의 기증품만 전시· 관리키로 약정했다.현죽박물관은 김제 진봉 출신인 서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자기류 등 고 미술품 933점을 김제시에 기증하기로 약정함에 따라 그동안 시민모금운동 등 물밑작업이 진행돼 왔다.서 회장이 김제시에 기증키로 한 고 미술품 933점은 시가로 수 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서 회장은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낸 군산시와 주소지인 서울 종로구, 전북대학교 등으로부터 미술품 기증을 줄기차게 요청받았으나 끝내 고향인 김제시를 택해 많은 김제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었다.그러나 김제시와 서 회장이 합의한 2010년 12월31일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죽박물관 건립과 관련 명확한 입장 및 구체적인 계획이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많은 시민들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시민 최모(51, 김제시 월촌동)씨는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서로 합의했으면 합의한대로 좋은 결과가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행정이든 기증자이든 시민을 우롱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한편 현죽박물관 건립과 관련, 그동안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1000여만원이 모금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논하자면 김인문(金仁問·629~694)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부 금석서에서 태종무열왕릉비의 찬서자로 김인문을 지목하고 있으나, 그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과연 선고의 능비를 찬서했을까 의문이 앞선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에는 김인문의 외교적 역할이 막대하였다. 신라시대 이른바 숙위(宿衛)의 대명사로 일컬어질 정도였던 그는 당(唐) 전문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500여 년이 지나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김인문의 묘비는 1931년 12월 11일, 조선고적연구회 경주주재연구원이었던 일본인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와 조수 이성우(李盛雨)에 의해 경주시 서악리 서악서원(西岳書院)의 누문 아래에서 비신의 일부만 발견되었다. 비편의 내용상 김인문의 묘비임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간기가 없어 세워진 연대나 서자 찬자 등의 정보를 알 수 없다. 이전에 태종무열왕릉비와 문무왕릉비를 통해서 확인했듯이 통일신라에 접어들면 비문의 형식이 정형화된다. 김인문의 묘비 또한 정형화된 비신에 정간선(井間線)을 긋고 절제된 구양순체로 새겼다. 초당의 해서 특히 구양순체가 일세를 풍미하는 가운데 세워진 비라는 점에서 신라의 서예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전기에 의하면, 자는 인수(仁壽),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 취학하여 유가의 서적을 다독하고 노장과 불가의 설을 겸섭하였으며, 예서를 잘 썼다. 진덕왕 2년(648)에 아버지 김춘추가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황제를 뵙고 일곱 아들이 있으니 숙위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숙위하게 되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신라의 노력은 결국 김인문의 외교력에 힘입어 나당연합을 통한 삼국통일의 위업이라는 결실을 거둔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도 위기는 있었다.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를 멸한 후, 당이 고구려 유민을 부추겨 신라를 치려는 의도가 엿보이자 신라(문무왕)는 고구려 반란군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였다. 이에 노한 당 황제는 유인궤(劉仁軌)를 앞세워 신라 정벌을 도모하는 한편,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여 귀국시키려 했다. 형제간의 살육을 예고하는 위기였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김인문은 어쩔 수 없이 신라로 향하였으나 다행히 신라에서 급파한 사신이 당에 사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효소왕 3년 병에 걸려 당나라에서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당 황제는 수의를 내려주며 애도를 표하고 육원경(陸元景)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신라로 압송토록 하였다. 고국 신라에서는 최고의 관직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그 이듬해 10월 27에 경주 서원(西原)에 장사지냈다.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그 세월이 22년이었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당에서 보낸 것이다. 이처럼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지만 세월은 이들의 영화로운 비신을 지켜주지 못하였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무주군 관광해설사 권중헌씨와 김한순씨가 이달 9일 전주대 지역혁신관에서 열린 제4회 전북문화관광해설사 스토리텔링 대회에서 금상과 동상을 각각 수상했다.이번 제4회 전북문화관광해설사 스토리텔링 대회는 관광서비스의 질을 높여 관광객들이 전북만의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로, 전주대가 주최하고 전북도 문화관광해설사회가 주관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스토리텔링 대회를 비롯해 전북도 문화관광 해설사들의 활동 10주년 기념도서 '문화관광의 꽃 해설사 10년'에 대한 출판기념회도 함께 열려 관심을 모았다.이날 대회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한 무주군 문화관광해설사 권중헌씨(49세)는 '적상산 안국사와 무학대사'라는 주제로 수준 높은 스토리텔링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한편 군 관광해설사는 20여명이 활동 중이며, 국제관광 휴양도시를 지향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과 자체 스토리텔링대회 등을 통해 관광해설사들의 자질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에 있는 국가지정 보물 제 267호인'용암리석등'이 오는 16일부터'임실진구사지석등'으로 명칭이 변경될 전망이다.8일 군에 따르면 현재까지 국내의 정치와 문화, 사회 및 경제 등의 각종 용어가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것으로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사실과 다르게 왜곡됐다는 것.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키 위해 문화재청은 전국의 지자체들에 문화재 명칭을 현실에 맞도록 변경할 것을 지시, 임실군도 이에 부응했다는 것이다.당초 용암리 석등이 자리한 곳의 사찰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난 92년 전북대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진구사지(珍丘寺址)라는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발굴 당시 조사팀은"석등의 규모로 봐서 적어도 1000여명의 승려가 기거할 정도로 웅장한 절터였다"고 증언했으며, 인근 지역 주민들도"옛날에 엄청나게 큰 솥이 발견됐다는 노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이번 명칭 변경에 따라 임실군은 오는 16일 문화재청의 승인을 바탕으로 각종 문화재 안내판과 홍보물 수정, 홈페이지 게시 등 수정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생전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문무왕은 그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비한 설화가 가득하다. 선고인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언니의 괴이한 꿈을 산 문희(文明王后)와 혼인하여 낳은 이가 문무왕(法敏)이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나이며, 신라 최고의 외교가로 꼽히는 김인문은 문무왕의 동생이다. 삼국 통일의 배경에는 이들의 절대적인 후원이 있었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에 대한 기록이 역대 어느 왕보다도 자상하다. 신비한 설화적 내용이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묘사되었다.두 사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문무왕의 유조(遺詔)이다. 삼국사기에는 그 유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가의 독실한 불교 전통을 계승한 문무왕은 불교식 장례대로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 줄 것을 명한다. 곧 산골(散骨)을 명한 셈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설화에는 장골(藏骨)로 기록되어 있다. 뼈를 동해의 대왕암에 수장했다는 말이다. 해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조가 새삼 숙연해지는데 수중릉이라는 대왕암에서는 아직까지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유조에 따라 화장을 했지만 무언가 문무왕을 기리는 상징적인 왕릉이 있지 않았을까. 앞서 언급한 두 사서에는 왕릉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호국불교의 정신을 담아 독특한 양식으로 건립한 사천왕사지에 문무왕릉을 조성했음을 보여주는 비편이 발견되었다. 조선후기 금석학자인 이계 홍양호가 1796년 (정조 20년) 경주 낭산의 선덕왕릉 아래에서 문무대왕릉비 비편을 처음 발견하였고, 이후 추사 김정희가 다시 두 개의 비편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해동비고에 전하며,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도 비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비편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가 1960년 하단부 비편과 2009년 9월 2일 상단부 비편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금석기록과 비편을 재구성하면, 신문왕 2년(682) 7월 25일에 건립했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國學少卿) 김아무개이고, 비문의 글씨는 한눌유(韓訥儒)가 썼으며, 문장은 사륙변려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전모는 알 수 없다.비면은 좌우보다 위아래가 약간 긴 장방형의 계선을 긋고, 그 안에 2cm 안밖의 전형적인 구양순체 필의로 새겨져 있다. 이로써 문무대왕릉비는 당과의 밀접한 교류 속에서 서예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며, 태종무열왕릉비에 이어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명과 찬자가 비문의 첫머리에 나오고, 서자가 비문의 끝에 자리하는 양식을 갖추었다. 구양순이 쓴 구성궁예천명과 같은 형식이다. 서자와 관련하여, 이전에 서술한 바와 같이 각석에서 이미 서자(書者)의 직함과 이름이 출현하였지만, 태종무열왕릉비와 문무대왕릉비의 경우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고, 당의 전형적인 서법을 핍진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눌유는 단순히 서자보다는 서가(書家)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신실한 불심으로 파격적인 유조를 전한 문무왕, 그러나 차마 성고(聖考)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 세웠던 비는 이렇게 무참히 조각나고 말았다. 문무왕이 속세의 영화를 잊으려했던 이유를 여기서 알겠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국내에서 전통 아교 제조 기술이 끊겨 서구식 아크릴 아교와 안료로 회화 문화재 보존 처리를 하다 보니 그 원형이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4일 원광대 시청각실에서 '문화재 보존 수복의 실제'를 주제로 열린 원광대 문화재보존수복연구소(소장 김범수)의 학술대회에서 김범수 소장은 "회화 문화재에 대한 복원이 서구식 아크릴 아교와 안료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훼손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서양 아크릴 아교나 안료를 사용하게 되면 번들거리면서 가라앉는 색감이 나와 우리나라의 전통채색화에서 보여지는 미감이 반감된다고 설명했다.김 소장은 이어 "일본은 문화재 수복 연구를 1500여 년간 진행하면서 기술력을 쌓아 우리가 일본의 기술을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라며 "경남 양산 통도사 영산전 다보탑 벽화의 경우 일본 간고우지 문화재연구소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자비를 들여 벽화를 복원해낸 것은 뼈 아픈 대목"이라고 강조했다.원광대 문화재수복연구소와 일본 교토대, 일본 간고우지 문화재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학술대회에서 간고우지 문화재연구소 야마우치 아키라 연구원은 일본 전통방식을 이용한 통도사 영산전 다보탑 벽화 복원 과정을, 기노시타 마사요 연구원은 회화 문화재를 손상시키지 않는 접착제 제조법 등을 소개했다. 미야모토 미치우 교토대학 교수는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벽화의 모사 복원 과정을, 조상완 범해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영조대와 어진 복원 과정을 발제했다.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위계승을 살펴보자면 24대 진흥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흥왕의 장자로서 태자에 책봉되었던 동륜(東輪·銅輪)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그의 동생 금륜(金輪·舍輪)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법(宗法)에 의하면 맞지 않는다. 동륜의 죽음을 둘러싸고 화랑세기에는 다소 의아한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의아심이 느껴진다. 동륜 대신 왕위에 오른 금륜이 25대 진지왕이다. 그 역시 음란을 일삼다가 폐위되어 사망하였다. 진지왕은 용춘(龍春·龍樹)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왕위는 제자리를 찾아 태자 동륜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손자인 백정(白淨)에게 전해졌다. 그가 진평왕이다. 진평은 재위시절 많을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들 없이 두 딸만을 두게 되었다. 덕만과 천명공주이다. 성골의 왕위를 계승을 위하여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그가 선덕여왕이고, 천명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내혼하여 김춘추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29대 태종무열왕이다. 진흥으로부터 태종무열왕에 이르는 역사적 전개가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태종무열왕은 삼국의 역사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비견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의 역대 왕 중에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태종무열왕은 그 업적에 비해 전하는 공적비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광개토대왕비의 위상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는 신라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우월하였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경주 서악리에서 발견된 귀부와 이수를 통해 대략 그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태종무열왕릉비의 일부로 추정되는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으나 中禮라는 두 글자만이 판독될 뿐, 그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다. 그나마 발견된 이수 역시 철저하게 파괴된 역사적 상흔을 그대로 안고 있다. 신라의 번영와 쇠락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이수의 전액이 뚜렷하게 보임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재위시절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이라 할지라도 후대의 평가는 냉정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독자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나당연합을 통하여 삼국을 통일한 것이 후대에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일례가 아닐까 한다.비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中禮를 비신의 일부로 가정할 경우 해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뿐, 대부분의 금석관계서에는 발견된 이수의 전액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大東金石名攷의 ()太宗武烈王陵碑額()조에는 "金仁問篆 辛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東國金石에는 좀더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慶州志를 인용하여 서악리에 있으며, 김인문이 비문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아울러 전액은 양각되어 있는데 필획의 끝이 모두 말발굽(馬蹄)처럼 되어 있어 용속(冗俗)하다는 서평을 첨부하였다. 두 기록으로만 본다면 전액이든 비문이든 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김인문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보물 제931호인 태조 어진(御眞ㆍ왕의 초상화)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어진박물관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25일 전주시에 따르면 지난 6일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에 문을 연 어진박물관이 개관 20일만에 7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어진박물관은 경기전 내에 지상 1층, 지하 1층, 건물 면적 1194㎡ 규모의 목조 건물로 건립됐으며 어진실과 가마실, 역사실, 수장고,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었다.어진실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역사실에는 각종 유물들이 전시 돼 있어 조선시대 경기전의 관리, 제례 등을 살펴 볼 수 있다.전주시 관계자는 "어진박물관이 전주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면서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을 확충하는 등 박물관 서비스를 강화할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어진박물관에서는 개관을 기념, 조선왕릉 40기를 소개하는 '불멸의 위엄 조선왕릉'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백제 말기에 조성된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반타원상의 물길에 의해 둘러싸인 왕궁성 후원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물길과 북문지, 건물지 등이 발견돼 왕궁리 유적의 연대 추정과 함께 중국과의 문화교류 양상을 살펴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24일 문화재청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에 따르면 지난 1989년부터 백제 왕실이 직접 관여한 중요한 유적인 왕궁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올해 확장 조사를 실시한 왕궁리 5층석탑 북쪽에 위치한 왕궁리 유적 후원에서 물길이 확인됐다.이 물길은 반타원상의 물길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후원 공간의 규모는 최대 길이가 240m나 되고 동·서의 너비는 71m 가량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북성벽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평탄한 지점에서는 정면 3칸(동서 길이 4.4m), 측면 2칸(남북 폭 3.9m) 규모의 북문지가 발굴됐다이로써 왕궁리 유적에서는 동ㆍ서ㆍ남ㆍ북 모두에 걸쳐 문지(문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이와함께 성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물길을 만나게 되며, 이 물길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다리의 기초시설도 함께 발견됐다.올해 발견된 유적중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 유구는 후원 공간에서 가장 평탄하고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평면 정사각형의 건물지다.이 건물지는 한변의 길이가 55cm 가량의 네모난 주춧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졌고, 건물지 규모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4칸(10m)인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올해 실시한 조사에서 발견된 또다른 유물로는 북벽에서 발견된 '대관관사(大官官寺)'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5층석탑 북동편의 민묘 이장 지점에서 확인된 중국청자 조각 등이다.한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건물터가 위치나 규모 등으로 봤을 때 거주 공간이 아니라 의례나 제례 등과 관련된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안문화원(원장 김원철)이 부안 진서면 곰소항 구진마을의 마을길을 개통하고, 생활사박물관을 연다. 한국문화원연합회(회장 최종수)의 '2010 지방문화원 어르신 생활문화 전승 프로그램'에 부안문화원이 선정, 구진마을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됐다.구진마을은 수군들의 진영인 검모포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충선왕(1년) 때 일본 정벌을 위해 여몽연합군이 제작한 900여 척의 수송전함이 이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진마을은 해방 후 물에 끓여서 만드는 전통 소금인 화염(火鹽)을 생산했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소금을 굽는 벌막, 바닷물의 염도를 높이는 섯등 등이 남아 있다.부안문화원이 개척한 마을길은 구진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구진성터, 당산나무, 구진우물, 간척길, 곰소만 갯벌, 구진마을 생활사박물관, 수송전함을 제작한 곳으로 추정되는 구진 조선소터를 잇는 2㎞ 구간이다. 부안문화원은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판을 설치하고,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해설을 맡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생활사박물관은 다소 소박하다. 마을 인근에 버려져 있던 198m²(6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리모델링해 주민들의 농기구, 어구 등 생활도구를 전시한다. 특히 곰소만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전통배 꽁댕이배 모형물을 설치, 어촌마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김원철 원장은 "구진마을은 부안에서도 잘 모르는 주민들이 많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역"이라며 "이곳을 명소로 삼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생활사박물관 개관식은 30일 오전 11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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