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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성당 순교기념관 기공식

한국천주교 첫 순교성지인 전주 전동성당(국가지정문화재 사적 288호)이 세계적인 성지 지정 노력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전동성당 교육관 이전 건립축성식과 함께 순교자 윤지충(바오르) 권상연(야고보)과 호남의 사도 유항검 일가를 기리는 순교기념관 건립기공식이 11일 낮 12시 30분 김완주 도지사, 최규호 교육감, 국회 신건·장세환 의원, 송하진 전주시장, 이병호 전주교구주교, 전주교구 총대리 유장훈 몬시뇰, 김치산 전 전동성당주임신부를 비롯 천주교인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천주교의 세계적인 성지인 전동성당은 첫 교수형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외 123위를 현재 교황청에 복자(福者) ·성인(聖人 혹은 성녀)으로 추대하는 시복시성을 청원중인 상태. 교황청의 시복시성이 확정되면 순례여행 코스로도 개발돼 전주가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전동성당 보수복원 추진위원회는 총 사업비 36억원을 확보 지난 2006년부터 전동성당 보수 및 사적공원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순교기념관 신축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공사를 추진할 계획이다.전동성당 김용태(베네딕토) 주임신부는"전동성당과 풍남문 경기전 한옥마을 일대의 문화역사 인프라를 바탕으로 동 서양을 막론하는 문화재 사적 공원화를 추진하고 있다"며"전주가 세계적인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민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 부탁드린다"고 말했다.한편 문화재청은 내년 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78호인 전동성당 사제관도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 문화재·학술
  • 윤나네
  • 2009.10.12 23:02

"임기보장 민간 전문가가 국악원장 맡아야"

전북도립국악원(원장 이선형)의 운영이 활성화되려면, 임기가 장기간 보장된 민간 전문가가 도립국악원장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9일 오후 1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열린'국악원 운영 활성화 및 발전방향'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박용재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연구실장은 "지난 23년간 12명의 국악원장이 재임했고, 2001년부터 예술에 대한 전문 식견이 부족한 행정원장이 1년 단위로 전환되면서 내부의 반목이 커졌다"며 "국악원이 발전하려면 민간 전문가를 국악원장으로 영입하고, 책임감을 갖고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임기를 장기간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어 박 학예연구실장은 "사무국 역시 국악원 재산 관리, 예산 집행를 다루는 관리계 업무는 일반 행정직에 맡긴다 하더라도, 교무계는 예술 행정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전북도립국악원이 전국적으로 내걸 만한 작품을 기획하려면, 최소한 2~3년부터 공연을 준비해 운영할 수 있도록 예산 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민국렬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원은 "현재로서는 예산에 맞춘 공연을 올릴 수 밖에 없어 공연의 질적 저하가 예상된다"며 "최소한 2년 전엔 공연을 기획하고 연구해 올릴 수 있도록 예산이 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이종민 전주문화재단 운영위원장은 "내실있는 공연을 위한 예산 확충도 필요하겠지만, 도립국악원 단원들 스스로가 공연을 통한 자구책 찾기에 골몰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전북도립국악원이 주최한 이번 세미나는 도립국악원 정상화를 위한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첫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는 있었지만, 국악원 내부 진단과 소통을 위한 대안 마련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10.12 23:02

[전북의 문화콘텐츠 50] (25)부안 청자

누군가 고려청자의 신비로운 색깔은 가을하늘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부안으로 취재하러 가는 길, 길가에 가득한 코스모스를 저리도 흔드는 건 바람이 아니라 가슴 저리게 맑은 비취빛 하늘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래 청자의 비취빛, 즉 비색(翡色)은 옥색(玉色)을 모방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에게 옥은 군자를 상징하는 귀중한 보석이었지만,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청자다. 도자기에 옥색을 입혀 대리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그러나 일찍이 도자기술이 발달되었던 중국조차 비색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도자기의 원료 흙인 태토(胎土)와 유약의 질이 일정한 수준에 오른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형태로 완성될 수 있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월(越)이라 불렸던, 중국 대륙의 동남부 저장성(浙江省)지방에서 생산된 청자는 '월주청자'라 불리며 명품 도자기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렇지만 중국청자는 진정한 비색을 완성하지 못했다. 중국청자가 비록 중후한 맛은 있으나, 유약이 투명하지 않아 태토의 색감과 문양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청자기술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되, 고려 도공들은 그 기술을 창조적으로 적용했다. 중국처럼 벽돌가마를 쓰지 않고 흙가마를 썼으며, 가마의 크기도 줄였다. 그리고 불과 흙, 공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철분이 함유된 백토에 투명한 유약을 바른 뒤 천천히 불을 때면 유약이 녹으면서 철분이 산화된다. 이윽고 유약이 충분히 녹게 되면, 공기의 유입을 완전히 차단한 채 더욱 센 불을 지핀다. 그러면 흙과 섞였던 산소까지 모두 타게 되는데, 이때 비색이 탄생한다. 이처럼 산화와 환원이라는 복잡한 화학공정을 정확하게 거쳐야만 투명한 비색을 머금은 도자기, 중국 북송의 화가 서긍(徐兢)이 극찬했던 그 고려청자가 완성된다. 남송의 시인 태평노인은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을 신비로운 색, 비색(秘色)이라 칭하며 어떤 청자도 견줄 수 없는 천하제일이라고 했다.투명한 비색과 더불어 고려청자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이다. 파도와 물고기, 앵무새, 연꽃, 학 등 자연에서 따온 소재를 음각과 양각, 인화와 상감 등 다양한 수법으로 문양을 새겼다. 특히 상감청자는 고려청자의 백미다. 먼저 반(半)건조된 그릇 표면에 문양을 음각하고 초벌구이를 한다. 그리고 무늬에 따라 흙으로 메우고 유약을 칠한 뒤 다시 구우면, 문양이 유약을 통해 은은하게 드러나는 상감청자가 된다.청자가마터는 주로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가마터가 발견되는 곳은 전남 해남과 강진, 그리고 전북 부안이다. 해남에서 발굴된 청자가 대부분 품질이 떨어지는데 비해, 강진과 부안에서는 왕실이나 귀족에만 공급되던 질 높은 청자가 많이 발굴되었다. 부안과 강진은 모두 좋은 흙과 물이 풍부하고, 청자를 개성으로 운반하기 쉬운 물길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지리적 여건이 고려시대 최대 도요지를 형성케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변산반도는 예로부터 수목이 울창하고 좋은 목재가 생산되어, 궁궐이나 사찰의 기둥나무를 제공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풍부한 땔감 역시 도요지로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일 터. 부안은 청자생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췄고, 그에 걸맞게 최고의 청자를 생산했다.부안의 가장 큰 특징은 상·중·하급의 청자가 모두 발견되면서도 상감청자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청자가 대중화되면서 수요계층에 따라 맞춤형으로 생산·보급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더 이상 부안청자요가 관요인지 지방요인지 논쟁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안의 가마터는 줄포만을 중심으로 유촌리와 진서리 등지에 밀집되어 있는데, 특히 유촌리에서 발굴된 최상급 청자들은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게 많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상감인물문매병 복원품, 청자상감용파문대매병 복원품 등이 예다. 청자상감인물문매병은 새겨진 문양이 다른 어떤 청자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독특한 것이며, 청자상감용파문대매병은 크기도 크기거니와 왕의 상징인 용과 파도가 상감되어 있어서 권위와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왕실용 청자매병이다. 고려청자의 정점인 상감청자,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명품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부안이다.이처럼 가치가 높은 부안청자가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은 강진청자가 대규모로 먼저 발굴되었고, 이에 맞춰 강진군이 청자박물관을 지으며 장소 마케팅을 선점한 이유가 무엇보다도 크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에 많은 청자가 도굴된 것도 한 몫을 했다. 앞서 언급한 명품청자가 이화여대박물관에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후카다 야수토시라는 일본인이 도굴한 청자의 일부를 이화여대에서 매입했던 것이다.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강진군이 매너리즘에 빠져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관한 지 10년이 막 지난 강진청자박물관은 관리가 부실해 벌써 낡았다. 때마침 총공사비 250억원을 들인 부안청자전시관이 내년 중에 개관된다. 전시관을 근거지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생각보다 빠르게 유천리 일대가 명품 청자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오히려 진짜 선진지이며 무서운 경쟁자는 일본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도자기기술을 강제로 수입한 일본은 4세기만에 세계 최고의 도자기강국이 되었다. 부안이, 아니 한국이 따라 잡아야 할 대상은 바로 일본이다. /이경진 문화전문객원기자(시인·문화기획자)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10.12 23:02

[전북의 문화콘텐츠 50] 부안청자전시관 내년 봄 개관

부안청자가 중요한 지역문화콘텐츠로 자리매김하면서 전시관건립이라는 성과를 내기까지, 주요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 부안군청 청자전시관팀 팀장을 맡고 있는 김종운씨다. 동양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운 팀장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2000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부임하면서 부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3년부터 청자전시관팀에 합류하여 지금까지 왔다.운영계획을 묻자 "전시관이라고 하지만 원래 국립박물관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다"고 말을 뗀다. "지자체 예산만으로는 지속적인 발굴과 개발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부에게 국립으로 운영할 것을 제안했지만, 잘 안됐다. 그렇지만 어렵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것이 이루어질 거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한다.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지만, 몇 장짜리 제안서만 들고 정부를 설득해서 전시관건립비를 확보했던 그 뚝심이 그냥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청자는 12, 13세기에 중국과 일본 뿐 아니라, 몽골, 타이완, 류큐(오키나와), 필리핀, 이란까지 수출되었던 세계 최고의 도자기였다. 그 상감청자를 주로 생산하던 곳이 부안이다." 콘텐츠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자신감이다.문제는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파생 콘텐츠를 개발할 것인가이다. "기본적으로 전시관은 학예실과 도자공방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학예실은 도자 도예지 연구, 유물 보존처리, 전시기획 등을 담당한다. 도자공방은 일종의 체험관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도자기 제작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전문가 양성을 위한 도자학교를 운영할 것이다."더불어 도자마을 조성도 추진된다. 청자, 분청자, 백자 등을 포괄하는 부안도자클러스터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또한 청자복원을 위한 지속적인 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상감청자축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한국에서 아직까지 관주도로 진행된 어떤 예술창작촌도 성공한 예가 없다는 현실과 운영계획이 강진의 그것과 큰 차별성이 없다는 사실이 우려되었다. "급히 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5년여 동안 시범적으로 운영하면서 확실한 마스터플랜을 만들 예정이다. 문제는 인력이다. 같은 시설이라도 어떤 인력이 운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를 것이다. 정말 실력 있는 민간전문가가 결합할 수 있는 운영형태를 고민하고 있다."오롯이 맞은 말씀이다. 청자완(靑磁碗)의 모습으로 디자인되어 내년 봄에 개장될 지상3층, 5609.9m² 규모의 거대한 건물이, 살아있는 명품청자의 기념비가 될지, 아무도 쓰지 않는 낡은 상징이 될지는 어떤 사람이 운영하느냐에 달려있다./이경진 문화전문객원기자(시인·문화기획자)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10.12 23:02

안중근 처형 전 사진 원본 국내 첫 공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안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 처형 전 유언을 남기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사진 원본과 감옥에서 남긴 글씨가 8일 국내에 들어왔다. 이들 사진 27점과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3점은 일본 류코쿠(龍谷)대가 소장품을 대여한 것으로, 국내에는 처음 들어왔다. 26일부터 내년 1월24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독립을 넘어 평화로'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도 공개된다. 체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상반신 사진은 코트를 입은 가슴에 수형 번호가 적힌 리본을 달고 양손을 가슴에 모아 왼손 약지 단지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면회 온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프랑스인 신부에게 유언을 남기는 모습도 사진에 담겼으며 호송마차를 타고 형무소에서 법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광경도 있다. 의거에 사용한 브라우닝식 연발 권총과 탄환을 찍은 사진도 있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이제까지는 원본을 복제한 희미한 사진만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논어의 경구인 '不仁者不可以久處約'(불인자불가이구처약, 어질지 않은 자는 곤궁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이라고 적힌 유묵에서는 옥중에서의 힘든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른 논어 경구인 '敏而好學不恥下問'(민이호학불치하문,민첩하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도 있으며 나머지 1점은 중용의 경구인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간다)를 적었다. 유묵은 모두 사형집행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것으로 약지 손가락의 단지 흔적이 있는 왼손을 눌러 찍은 안 의사의 장인(掌印)이 있다. 이밖에 저격당하기 6일 전 러일전쟁 격전지를 시찰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행의 모습, 이토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승강장에 내려 안중근에게 사살당하기 직전의 순간을 담은 사진도 공개된다. 전시되는 유묵은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 있을 당시 사형수를 교화시키기 위해 안 의사를 만나 교감을 나눴던 일본 정심사(淨心寺) 주지 마쓰다 가이준이 안 의사로부터 받은 것이며, 사진 역시 안 의사 순국 후 마쓰다가 수습해 일본으로 가지고 간 것들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0.09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④왕헌지(王獻之)의 십이월첩(十二月帖)

왕희지와 그의 7자 헌지(344~386)는 진대를 대표하는 명서가이다. 서예사에서는 이 두 사람을 아울러 이왕(二王)이라 칭하며, 한편으로는 희지를 대왕(大王) 헌지를 소왕(小王)이라 지칭한다. 헌지의 자는 자경(子敬)이며, 중서령을 지내 왕대령(王大令)이라 부르기도 한다. 희지는 헌지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여 훗날 명서가가 될 것을 예언하고 비결서 「필세론」을 쥐어주며 친히 필법을 전수했다. 헌지가 아버지를 따라 현사들이 모인 난정의 유상곡수연에 참석했을 때의 나이가 불과 9세였으니, 그때 시를 짓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현재 전하는 필적으로는 십이월첩(十二月帖) 압두환첩(鴨頭丸帖) 중추첩(中秋帖) 입구일첩(卄九日帖) 지황탕첩(地黃湯帖) 등의 척독이 있으며, 소해(小楷)로서 낙신부(洛神賦) 13행이 있다. 일부는 탑모본으로 전하며, 순화각첩을 비롯한 여청재첩, 보진재법첩, 괘설당첩 등의 판각본에서 그의 필적을 확인할 수 있다.헌지에게는 유독 아버지와 얽힌 일화가 많다. 「진서」 본전에는 7~8세 무렵부터 글씨를 배웠는데 희지가 몰래 뒤에서 붓을 잡아당겼으나 빠지지 않자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후에 크게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고 예언한 것이 보인다. 이후로 지금까지도 집필법을 논할 때면 으레 이 일화를 들먹이며 붓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후기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도 필법전수서를 집필하면서 이 일화를 거론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어느 날 희지가 다른 도시로 떠나면서 행차에 임박하여 벽에 글씨를 써 놓았는데, 헌지가 몰래 그것을 지우고 얼른 글씨를 써서 바꾸어 놓고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다. 그런데 희지가 돌아와 보고 탄식하며 "내가 갈 때 정말 많이 취했었구나!"라고 하자 헌지가 속으로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의 실력을 아버지와 견주려 했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는 일화이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구애됨이 없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던 헌지의 언행은 때로 오만하게 보였다. 당시의 명현 사안(謝安)이 헌지에게 아버지 글씨와 비교하면 어떠하냐고 묻자 당연히 자신이 낫다고 대답하였다. 사안이 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헌지는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사안은 헌지의 편지를 찢어 교정지로 사용하기도 하고, 희지가 보낸 편지에 다시 답장을 써서 보내는 등 헌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헌지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언행을 교정하고자 한 듯하다. 헌지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한 말은 윤리적 비난이 있지만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했던 점에서 예술가의 기질이 엿보인다. 희지도 그러한 헌지를 마음 속으로 인정하였다.아버지만한 아들 없다고 했던가. 일반적으로 "헌지는 희지만 못하다"는 서평이 정론이지만. 당대에 종요(鍾繇)·장지(張芝)와 더불어 사현(四賢)으로 지칭되는 것을 보면 헌지에게 있어 아버지 희지는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반자 관계였다. 특장인 행초서는 그의 분방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십이월첩'은 북송대 서화가로서 높은 감식안 지닌 미불이 "이른바 일필서로서 天下子敬第一帖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희지와는 다른 헌지만의 기개가 느껴진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10.07 23:02

[일과 사람] 日쿠라쿠 요시유키 사야마이케 박물관 원장

"4세기 초에 만들어진 김제 벽골제와 7세기 초에 만들어진 일본 사야마저수지는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야마저수지를 만드는 데 있어 벽골제가 본보기가 된 듯 합니다. 귀중한 토목유산을 배우기 위해 벽골제에 오게 됐습니다."김제 벽골제를 둘러보고 지난 2일 전주를 찾은 일본 오사카 부립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 쿠라쿠 요시유키(工樂 善通) 관장(70)은 "일본의 토목기술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벽골제를 직접 보기 위해 전북에 왔다"고 말했다.사야마저수지는 7세기 초에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댐식 용수지. 사야마이케박물관은 1400년 역사가 쌓여있는 제방과 물을 빼내는 송수관, 제방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목제틀 등의 토목유산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그는 "전통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전통가옥과 전통음식이 남아있는 전주에 방문하게 됐다"며 "역사적인 토목유산인 사야마저수지의 활용방안을 전북에서 얻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쿠라쿠 관장은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일본 고고학 및 역사학 관련 장서 1만여권을 기증, 박물관 도서실에 '쿠라쿠 요시유키 문고'가 설치되기도 했다. 나라문화재연구소 매장문화재센터장을 지내는 등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평생을 근무한 그를 통해 내년에 열리는 '나라 헤이죠쿄(平城京) 천도 1300년 기념축제'도 들을 수 있었다."'나라 헤이죠쿄 천도 1300년 기념축제'는 헤이죠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궁까지 포함해 나라현 전체에서 1년 동안 열리는 행사입니다. 나라가 일본의 수도였다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은 이미 높습니다. 이번 축제를 통해서는 아무래도 관광객을 통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죠."나라 헤이죠쿄는 서기 710년에 완성된 도읍으로, 784년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일본의 수도였다. 쿠라쿠 관장은 "헤이죠쿄는 초석과 기단, 계단 정도가 남아있는 정도였다"며 "헤이죠코의 중심인 태극전인 내년에 완성되는 등 200억엔을 들여 중심건물 중심으로 헤이죠쿄의 일부분을 복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이나 한국은 7~8세기 목조건물이 많아 세월이 흐름 속에서 많이 없어진 반면 유럽은 돌로 만든 건물들이 많아 당시 유적이 그래도 남아있는 편"이라며 "헤이죠쿄 복원에 있어 경복궁 복원 사례가 참고가 됐다"고도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0.06 23:02

도내 중요 목조문화재 화재 무방비

국보 62호인 금산사 미륵전으로 비롯 도내 국보와 보물 등 중요 목조문화재가 화재에 무방비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5일 문화재청이 국회 이명수(자유선진당)·이은재·장제원(이상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광역자치단체 관리, 중요 목조문화재 소방시설 현황'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으로 금산사 미륵전과 전주 풍남문·객사 남원 광한루 정읍 피향정 등 도내 중요 목조문화재 18곳 중 12곳이 화재경보기와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상태다.특히 도내 중요목조문화재 18곳 중 화재경보 시스템이 구축된 곳은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 관계당국의 늑장대응이 자칫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도내 중요 목조문화재중 CCTV가 설치된 곳은 고창 선운사 대웅전과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송광사 대웅전·종루 내소사 대웅보전 개암사 대웅전 등 6곳에 불과했다.이 의원 등은 "문화재 소방방재 시스템을 구축할 책임이 있는 문화재청은 깜깜 무소식이고 소방방재청은 손을 놓고 있으며 자치단체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며 "중요 목조문화재에 대한 소방방재시스템 구축 등을 포함한 대책들은 탁상공론식 실책만 있어 정부를 중심으로 총체적 부실상태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이와 관련해 전북도는 도내 국보, 보물 등 중요 목조문화재는 현재 화재예방 시스템과 관련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일부 문화재를 제외하고는 올 연말 안에 시스템이 구축될 것이라고 밝혔다.전북도 문화재관련 담당자는 "중요목조문화재에 대한 화재예방 시스템은 중앙 정부에서 심의를 통해 예산을 지급하는 것으로 예산 승인이 미뤄지거나 문화재 별로 설계안을 변경해야 해 사업이 지체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도내 문화재 18곳은 모두 현재 공사가 완료됐거나 설계를 마친 상태다"며 "보수 공사가 겹친 몇몇 문화재 외에는 올해 안에 화재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임상훈
  • 2009.10.06 23:02

[전북의 문화콘텐츠 50] 완판본과 방각본

▲ 완판본(完板本)완판본은 조선후기(18C 후반∼20C 중엽)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전라감영뿐만 아니라 일반 서점 및 개인이 간행한 것도 포함된다. 시기적으로 한문본 「구운몽」이 출판된 1803년부터 '양책방(梁冊坊)'이라는 서점이 아동교육용 도서를 출판한 1937년까지 약 140년이며, 활기를 띠었던 시기는 1850년에서 1910년까지 약 60년 동안이었다. 완판본으로 대표되는 전주의 출판·인쇄는 조선시대 수도였던 서울을 제외하고 그 규모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전라감영에서는 「자치통감강목」, 「주자대전」 등과 같은 유학관련 서적들을 발간하였다. 그 책판들은 전주향교 장판각에 보관되어 오다가 전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돼 있다. 당시만 해도 이곳에 보관됐던 책판은 9500여 개에 이르렀지만 자연재해와 조선말의 혼란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많은 양이 손실되었다. 최근 정리사업을 통해 조사된 목판의 수는 10종 5059장에 이른다.일반 서점과 개인들은 유학관련 서적뿐 아니라 수많은 한글 고소설과 판소리계 소설을 발간하였다. 완판본 중에서 「열여춘향슈졀가」나 「심청전」과 같은 한글소설은 전북지역 방언과 국어의 역사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또한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어서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경판본과 안성판본의 단조로움보다 더욱 다양한 서체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이 잘 표현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방각본(坊刻本)방각본은 조선시대 사가(私家)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간행한 책을 말하는데, 목판으로 인쇄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방간본(坊刊本)이라고도 한다. 또한 방각본은 출판의 주체인 판원(板原)에 따라 분류된 명칭의 하나이다. 판원에 따라 분류하면 관청에서 출판한 관본(官本), 개인이 가정에서 출판한 사가본(私家本), 상인인 민간 출판업자가 판매 목적으로 출판한 방각본, 사찰에서 출판한 사찰본(寺刹本)등으로 나누어진다.한국 최초의 방각본은 1541년(중종 36) 명례방에서 간행한 「한서열전(漢書列傳)」이 처음이라고 하나 기록상으로 확인된 것은 1576년 간행된 「고사촬요(攷事撮要)」이다. 방각본은 중국 당나라 때 시작돼 송나라 때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방각본에 의한 출판·인쇄 경향은 임진왜란으로 일시 침체되었다가 17세기 말에 와서 호남지장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17세기 전라도 태인 지방에서 손기조(孫基祖) 전이채(田以采) 박치유(朴致維)등 아전 출신의 인사들이 간행한 책이 호남지방 방각본의 원류가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 그 주류가 전주지방으로 옮겨와 전주의 방각본을 형성하기에 이르면서 그 담당층이 서리 중인층으로부터 서민 출신의 상공층으로 바뀌어 갔다. 특히 방각본 출판·인쇄물의 특징은 시장성을 전제로 한 한글목판본 소설류이다. 주된 독자층은 서민으로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는 오락적인 소설의 출판을 가속화했다는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일부 소수의 계층에 안정되어 읽히던 소설을 서민층도 널리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소설작품의 출판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소설발달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고전소설의 유통상 필사본의 한계점을 극복하여 그 작품들의 광범한 보급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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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05 23:02

[전북의 문화콘텐츠 50] (24)전주 완판본 - 고소설의 성지

출판·인쇄의 기록문화를 선도했던 우리 전주. 조선시대 전라감영에서 발간된 60여권의 책, 개인 출판업자에 의해 20여 종류의 한글 고대설과 250여 종류의 고문헌이 출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1803년부터 1932년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다양한 고소설들이 전주에서 출간됐고, 현재 전하는 완판본 한글 고소설의 종류는 총 23가지로, 판본이 다른 것까지 합치면 50여종이 이른다. 이 덕에 전주는 고소설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 서울 다음으로 최고인 출판·인쇄문화문자는 대량의 정보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보관할 수 있어서 다른 도구나 기계들이 발명되기 이전, 정보전달의 거의 유일한 도구였다. 문자를 통한 정보소통의 가장 일반화되었던 방법은 문헌을 통한 것으로 문헌 출판의 능력은 곧 그 사회의 문화 발달이 중요한 지표가 된다. 세계의 출판문화에서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발명이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에 세계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우리나라에서는 각 시대별로, 각 지역별로 독특한 출판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지방의 감영마다 문헌을 출간했고, 사찰과 서원 등에서도 문헌을 간행했다. 근대에 들어 출판의 대량화 요구에 맞추어 방각본이 출현하면서 지역별로 독특한 방각본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서울의 경판본, 전주의 완판본이다. 경판본이야 국가의 수도인 서울에서 간행된 것이기 때문에 출판여건이 좋은 상황이었지만, 완판본은 출판여건이 어려운 지방에서 간행된 것이어서 우리의 관심을 더 끌게 한다. 완판본 중에서도 특히 한글 고소설은 경판본 고소설과 함께 고소설사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주의 종합문화가 반영된 완판본완판본이 전주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언어 외적인 요소가 작용하였을 터. 판목을 만들기 위한 목재공급의 수월성, 책을 찍어낼 한지의 생산·공급이 용이성, 출판을 담당할 수 있는 높은 재력 등이 이것의 조력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러한 책을 직접 쓸 수 있는 다양한 서예가와 판각능력을 가진 각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상황이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들을 소비할 수 있는 독자층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고, 이들을 전국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사업조직인 판매망이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서적 출판이 단순히 작업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완판본이 존재는 그 당시 전주의 종합문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면 완판본의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책을 판매하는 책방은 주로 전주부성 4대문 밖에 형성된 시장부근, 특히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길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또한 방각본을 찍어 판매한 책방은 서계서포, 다가서포, 문명서관, 칠서방 등 10여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앙과 다른 완판본 한글 고소설출판이 아무리 그 사회·문화의 척도가 된다고 하여도 출판된 문헌의 언어와 문자가 난해한 것이면 출판을 통한 정보전달이라는 기능을 반감시키게 된다. 어떠한 문자로 문헌을 간행하였는가 하는 부분도 출판문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완판본 한글 고소설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지방에서 간행된 문헌 중에서도 각 감영에서 간행해낸 문헌은 대체로 중앙에서 간행해낸 문헌과 큰 차이가 없지만 방각본인 완판본 고소설은 중앙의 간과 큰 차이를 보인다. 각 감영에서 간행한 문헌은 주로 중앙 간본의 복각본이 많아서 지방판별로 언어상의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이와는 달리 완판본 고소설은 경판본 고소설에 비해 언어적 차이가 무척 커 전라도만의 방언들이 수록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한편 완판본 한글 고소설은 대중문화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완판본 한글 고소설에 보이는 서체에서 서민들의 서체를 볼 수 있기 때문. 전주문화의 특징이 궁중문화가 아니듯 완판본 고소설에 보이는 한글서체는 궁중의 서체가 아닌 일반 서민들의 서체이다. 경판본이 오늘날 서체의 명칭으로 말하자면, '궁체'의 하나인 반면 완판본은 '민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완판본에도 궁체와 유사한 서체도 보이지만 경판본의 궁체와는 확연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출판문화 속에 담긴 전주의 미래우리가 완판본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그 역사 속에 숨겨져 있는 전주문화의 특징을 찾고, 그 문화를 오늘날 되살려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는 데에 있다. 완판본에 대한 이와 같은 결실은 전주향교 옆에 들어설 완판본 문화관으로 맺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다시금 고민에 길에 접어들게 된다. 과거의 찬란했던 출판문화는 조상들의 것이기 때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은 완판본을 통해 전주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다. 따라서 완판본 문화관은 단순히 완판본이 주향인지, 그 특징이 주향인지 알려주는 공간에서 벗어나 전완판본에 담겨져 있는 전주정신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설이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출판, 인쇄문화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한 한지와 서예문화 등 전주의 문화·역사를 완판본 속에서 창조하는 힘이 되길 바란다. /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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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05 23:02

"영상콘텐츠로 긍정 바이러스 전파하자"

서병문 단국대 미디어콘텐츠연구원 원장은 30일 "'긍정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영상 콘텐츠들이 나온다면 그만큼 우리사회도 더 밝아지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날 오후 방송회관 3층에서 한국문화콘텐츠산업협회 주최로 열린 '영상 콘텐츠의 사회적 책임과 과제'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막장 드라마'로 불리는 반사회적인 영상 콘텐츠가 방영되면서 우리 드라마의 영화(榮華)는 이제 끝났다는 자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며 이처럼 강조했다. 그는 "사회 일탈적인 내용이 방영되면 순간적으로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도 진출하지 못하게 될것"이라며 "우리 영상 콘텐츠의 메시지 중에는 지나치게 현실부정이나 자기비하적인 내용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서 교수는 드라마 '찬란한 유산', '솔약국집 아들들', 영화 '거북이 달린다' 등을 '착한 드라마' 혹은 '착한 영화'라고 칭하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장밋빛으로 채색하자는게 아니라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보편적인 태도를 보여주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손병두 KBS이사장은 "세계인들이 매력적이라고 공감할 만한 보편적 감성의 소프트파워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토론회는 작년 12월 출범한 한국문화콘텐츠산업협회가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우리 콘텐츠 산업의 현주소부터 점검해보자는 차원에서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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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01 23:02

강강술래 등 5건 세계무형유산 등재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 등 우리 무형문화재 5건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30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강강술래 등 5건이 세계무형유산 목록에 올랐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미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년), 판소리(2003년), 강릉단오제(2005년) 등 3건이 등재돼 있어 모두 8건의 세계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이번에 세계무형유산이 된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는 설, 대보름, 추석 등에 행해진 노래, 무용, 음악이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춤을 추는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 선소리를 하면 모든 사람이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의 형태로 노래하고, 노랫소리에 맞춰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남사당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는 조선후기 남사당패가 농ㆍ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했던 놀이로 풍물놀이,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탈놀이), 덜미(꼭두각시놀음)가 이어진다. 양반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 비판하고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영산재(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는 49재의 한 형태로 영혼이 불교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하는 의식이다. 해금, 북, 장구 등을 연주하고 바라춤, 나비춤 등을 추며 영혼에 제사를 지낸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은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신당인 칠머리당에서 마을 수호신에게 하는 굿으로 영등신에 대한 제주도 특유의 해녀신앙과 민속신앙이 담겨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해녀가 하는 굿이다. 처용무(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는 궁중 무용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가면과 의상, 음악, 춤이 어우러진 무용예술이다. 통일신라 시대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유네스코는 2001년부터 격년제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 프로그램을 실시해 국가별로 구전 및 무형유산 등재신청을 받아 지정해왔다. 이 프로그램은 국가당 신청건수를 1건으로 제한해 2005년까지 구전 및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은 70개국 90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2006년 무형유산보호협약이 발효되면서 각국별 신청 건수를 제한하지 않고, 신청된 무형유산은 대부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해주는 쪽으로 심사기준을 바꾼 '대표 목록(Representative List)'제도를 도입했다. 올해는 새 프로그램이 시행된 첫해로 22개국이 무형유산 76건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 올렸고, 이 가운데 한국 무형유산 5건도 세계무형유산으로 인정받게 됐다. 한국은 당초 조선궁중음식을 포함한 6건을 등재신청했으나 이것이 세계무형유산 목록에 오르면 상업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전자문회의에서 탈락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세계무형유산은 '세계유산(World Heritage)' 제도와 달리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문화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차원이다. 국민적 관심을 높여 무형유산 보존에 보탬이 될 것으로 본다"면서 "지난달 무형문화재 40건을 등재 신청해 내년에는 세계무형유산이 더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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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01 23:02

조선왕릉 복원정비..4천900억원 투입

지난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가운데 일부 훼손된 왕릉을 복원정비하는 등 조선왕릉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서울시,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 관련기관 의견 수렴과 학술포럼 개최, 그리고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수립한 '세계유산 조선왕릉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을 30일 발표했다. 이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일부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보존과 완충구역의 적절한 보존지침 마련, 안내해설 체계 마련 등을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이 기본 계획을 문화재청은 단기사업(2010~2015)과 장기사업(2016~2025)으로 구분했다. 단기사업은 유네스코 권고사항 등을 이행하기 위한 사업을 중심으로 진행하며, 장기사업은 능역 내의 사유지 매입 등을 통한 능제(陵制) 복원 사업을 위주로 한다. 사업에는 단기 2천400여억원, 장기 2천500여억원 등 모두 4천900원이 소요된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우선 내년부터 서삼릉(젖소개량사업소, 경주마 목장 등), 의릉(구 국가정보원 건물), 태강릉(국제사격장, 국가대표선수촌) 등 일부 훼손된 왕릉을 복원정비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2025년까지 16년에 걸쳐 동구릉 등 18개 왕릉의 훼손된 시설물을 복원하는 한편, 사격장 등 능역 안에 들어선 건축물은 철거한다. 또 화재나 도굴 등을 예방하기 위해 CCTV와 경보기 등 경비시스템을 비롯해 소방 설비 등 종합적인 방재시설을 구축할 예정이다. 조선왕릉은 서울과 경기 일원에 분포해 개발압력이 높은 가운데 왕릉 주변 완충 지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준을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수립하며, 재실(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사무공간 등으로 사용하는 데 대해 문화재 훼손 우려가 제기됨에 따라 관리사무소를 별도로 만들 예정이다. 한편 조선왕릉을 세계유산의 품격에 걸맞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안내판을 정비하고 고궁과 왕릉 및 주변 관광지를 연계한 탐방코스를 개발할 계획이다. 의궤 등 기록문헌 번역물 등을 제작하며 조선의 장묘 및 제례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왕릉 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안내서비스를 강화하는 한편 관광가이드북 등 홍보물도 제작해 배포한다. 문화재청은 왕릉을 찾는 국내ㆍ외 관광객이 국장 절차, 왕릉의 공간 구성 및 구조, 산릉제례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울 노원구에 있는 태강릉 주변에 조선왕릉 전시관을 건립해 12월 중 개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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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01 23:02

100년만에 다시 태어난 심청전 목판

'송나라 말년의 황주 도화동의 한사람이 잇스되 셩은 심이요 명은 학규라...'(심청전 상권)우리나라의 대표적 고전소설인 심청전의 상권 목판이 조선시대 최고의 출판문화를 꽃피웠던 전북 전주에서 다시 태어났다.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목판서화체험관 대표 안준영(52)씨는 최근 심청전 상권 30장(60쪽)의 목판 복각(復刻) 작업을 끝냈다. 520여 글자가 들어가는 한 장을 양면에 새기니 목판은 모두 15장이다. 심청전은 문장체 소설에 가까운 경판(京板)계와 판소리의 영향이 묻어나는 완판(完板)계 등 이본(異本)이 여럿 있지만 이들 모두 목판은커녕 낱장 전체가 온전히 남아있는 판각본도 찾기 어렵다. 선비만 보던 경전이나 문집과 달리, 서민들이 서로 돌려 읽다 보니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탓이다. 안씨는 1906년께 간행된 상.하권 71장짜리 완판본 완서계신판(完西溪新板) 완질을 원광대 박순호 교수(국어교육과)로부터 어렵사리 구해 지난해 11월 복각을 시작했다. 대구와 경북 안동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하생들이 작업을 도왔다.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인 완판본을 모본(母本)으로 택한 것은 세계 최고로 꼽히는 우리나라 목판인쇄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판본이기 때문. 질 좋은 전주한지를 사용하는 데다 서체도 다양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목판인쇄의 시작이라면 완판본은 그 끝"이라는 게 안씨의 생각이다. 그는 복각 작업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숨구멍이 거의 없고 견고한 산벚나무로 판을 짠 뒤 직접 만든 20여 가지의 조각칼과 망치로 한 획을 서너 번씩 당기거나 밀다 보면 하루 8시간씩 쏟아도 한 장을 새기는 데 4~5일은 족히 걸린다. 안씨는 우리 목판 인쇄술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라지만 먹은 그렇지 않아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종이로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게 우리 목판 인쇄술입니다. 쉽고 간단하게 찍지만 30만 부를 찍어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죠."안씨는 내년에 하권 41장까지 모두 복각할 계획이다. "하권까지 완성되면 책으로 찍어 흐릿한 복사본을 보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보급할 생각"이라는 안씨는 10월6일 목판서화체험관에서 기념식을 열고 이번에 복각한 목판을 공개한다. 이어 한글날을 맞아 10월11일까지 진행되는 '목판으로 만나는 한글 문화유산전'에서도 안씨가 복각한 훈민정음 언해본 등과 함께 심청전 목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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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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