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영화 '추격자' 제작보고회
14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정동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영화 ‘추격자’의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나홍진 감독, 주연배우 김윤석 하정우 서영희가 자리를 함께 했다.영화는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 분)을 쫓는 엄중호(김윤석 분)의 추격을 따라간다. 엄중호는 전직 형사로 비리에 연루돼 사직한 후 출장 안마소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아프다는 김미진(서영희 분)을 불러내 출장 안마를 내보낼 정도로 악랄하고 이기적이다. 어느 날부터 ‘아가씨’가 하나씩 사라지고, 도망간 게 아니라 실종임을 알게 되면서 추격을 시작한다. 우연히 부딪힌 영민이 살인자라고 알아볼 정도로 동물적 직감을 가졌다.영화 추격자는 단편 ‘완벽한 도미요리’ ‘한’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으로 보통 3∼4개월 정도 진행되는 여타 영화보다 좀 길게 5개월에 걸쳐 촬영됐다.김윤석 “나태했던 육신을 특공대로 만들어줘 감사”나홍진 감독은 이에 대해 “처음에 충무로 분들께서 90%를 서울의 골목길에서 그것도 밤 장면으로, 그 중의 60%는 비가 오는 시나리오를 보고 우려가 크셨다”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처음 해보는 장편 작업이었기에 패기 있게 뛰어들었던 것 같다. 다시 군대로 돌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죽다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이어 “이 모든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을 만난 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며 배우들에게 감사를 표했다.김윤석도 “이렇게 많은 액션을 소화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나태했던 육신을 특공대로 만들어주신 여건에 감사한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한 달 가까이 달리기만 했다며 달리는 동안 접한 ‘재미있는’ 현실을 전했다. “동네 아래부터 달리기를 시작하면 처음엔 담벼락 높이만 6m에 이르는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중간쯤엔 빌라가, 꼭대기에는 아직도 화장실 앞에 줄을 서는 달동네가 있다”며 “불과 1㎞ 반경 안에 이런 상황이 공존해 있다. 우리 사회구조, 계층문제를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무수면’ 40시간 강행군 속 촬영배우들의 고생담은 하정우에게로 이어졌다. 촬영장에 가면 늘상 (인공)비가 와 바닥에 물이 고여있고 밤이었단다. 저녁 6시에 시작하면 아침 6∼7시에 촬영이 끝났다. 나 감독, 김윤석과 술 한잔 기울이고 집에 들어가면 점심, 자고 나와 다시 밤샘 촬영의 생활이 계속됐다고.하정우는 “그런 생활이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생각이 없어지더라. 아직도 수면 장애를 앓고 있고, 지금 이 자리도 몽롱하다”면서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쏟은 에너지와 힘이 영화 상에 좋은 기운으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서영희는 “두 분에 비하면 100분의 1 정도밖에 힘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고생했다. ‘힘들겠구나’ 각오를 했음에도 예상수준을 넘더라”며 “배우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영화에서 확인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하며 애교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김윤석이 촬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였다. 종반 결투 장면이었는데, 김윤석과 하정우가 피 범벅이 되어 땀으로 젖은 채 격투를 벌였다. 28시간 찍고 났을 때 감독이 물었다. “쉬었다 할래, 계속 할래?”. 김윤석은 지금 상태를 만들기 위해 피 분장을 새로 하고, 옷을 다시 적셔야 한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져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덕분에 촬영은 열두 시간을 보태 40시간을 자지 않고 계속됐다.서영희, 미혼모 출장안마사 변신고생이 예상되는 영화의 캐스팅 제의에 배우들은 왜 응했을까.먼저 김윤석은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지문이 없고 대사가 짧아 좋았다. 대사가 입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며 “특정 장소가 아닌 서울의 주택가와 골목이 생 것, 날 것(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으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고 밝혔다.또 “캐릭터는 두 번째였고 시나리오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엄중호, 지영민 중 아무 거나 해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였다”며 “감독님을 만났는데, 얘기를 나눠보니 이런 사람과 작업하면 행복하겠다 싶어 결정했다”고 덧붙였다.서영희는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 시종일관 긴장감이 느껴졌다. 김미진이라는 캐릭터는 어린 나이에 어린 아기를 둔 여자로, 그녀에게서 모성애가 느껴졌다. 이런 모성애라면 힘겨운 안마사를 하며 살아갈 이유가 되겠다 싶어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하정우 “아이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연기”하정우는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다.‘밤의 열기 속으로’라는 제목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첫 장을 넘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훌륭하고 멋진 이야기였다”며 만족스런 시나리오를 출연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로 소개했다. 이어 기존에 없던 연쇄살인범 캐릭터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컸다고 말했다.“연쇄살인범이라는 악역은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거의 모든 영화, 미국 드라마까지 찾아 봤는데 뚜렷하게 맞는 ‘롤 모델’도 없더라. 감독님이 많이 열려 있어서 제가 생각한 캐릭터를 말씀드리니 호응해 주셨다. 현장에서도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하정우가 생각한 지영민의 캐릭터는 절대 악역이 아니며, 유아적이다 못해 순수하다고 할 정도로 행동한다는 것. 하정우는 억지스럽지 않은 연쇄살인범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식의 흐름’대로 연기하고자 했고, 현장에 대사를 외우지 않고 나갔다고 촬영 상황을 전했다.‘선을 넘지 않은’ 악인의 ‘선을 넘은’ 악인에 대한 추격영화 ‘추격자’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악’ 지영민을 추격하는 엄중호가 ‘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는 선에 의한 악의 응징, 정의구현 등과 같은 도덕적 모토와 거리가 멀다.나 감독은 “두 남자주인공은 악”이라고 단정했다. 이어 “선을 넘지 않은 악인(엄중호)과 선을 넘은 악인(지영민)의 차이를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 전면에 드러내진 않았지만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고 강조했다.나 감독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여러가지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에 대해 조사한 결과다. 범죄자들은 비슷한 범행 양식을 보였는데, 단발로 그치지 않고 계속 그러한 범행을 저질렀던 원인을 분석해보니 선을 넘었느냐 넘지 않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 감독은 선을 넘었는 지의 여부가 가져오는 결과의 차이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거듭 강조했다.‘선을 넘지 않은 악인’을 연기한 김윤석. 장사를 위해선 아프다는 미진을 끝내 불러낼 만큼 악덕한 그가 미진을 찾아 헤매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완전한 악인도 아닌, 선인도 아닌 캐릭터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특별한 상황에 휩쓸려 ‘추격자’가 된 당신의 선택은?김윤석은 언젠가 읽었다는 여성경호원에 관한 기사 얘기를 꺼냈다. 경호의 목적이 공격자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호하려는 고객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대목을 읽으며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얘기는 엄중호로 옮아갔다. “우리 영화에는 출중한 영웅이나 특이한 인물이 없다”고 전제한 뒤 “비인간적이던 엄중호가 갑자기 도덕적 성찰을 얻어서 인간적으로 변모해가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이 인물이 상황에 휩쓸려 들어가며 인간 본연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영화는 따라간다. 지영민을 잡는 게 목적인지, 미진을 구하는 게 목적인지 그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이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김윤석은 추운 겨울밤 길에 쓰러진 사람을 만났을 때 얼른 그를 구해낼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반문했다. 엄중호도 평범한 우리처럼 모른 척 지나갈 인물이라면서, 그러나 하필 그날 열 번쯤 길에 누운 사람을 만난다면 한 번쯤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바로 엄중호가 그런 특별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임을 설명했다. 하지만 엄중호의 선택이 흔히 보아온 사람들의 것과는 다르다는 점, 그것이 영화의 매력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았다.김윤석은 나홍진 감독의 연출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어느 배우에게도 치우친 애정을 주지 않는 ‘얼음 같은 시각’이라고 표현했다. 신예 감독과 중견 배우들의 깊은 고민이 묻어나는 영화 ‘추격자’는 내달 14일 개봉한다.